75분의 1초. 찰나(刹那)는 이토록 짧은 시간을 의미한다. 그 찰나의 시간이 켜켜이 쌓여 우리의 삶이 된다. 최백호는 ‘낭만에 대하여’를 작사·작곡하고 노래한 가수다. 일상에서도 낭만을 품고 살았기에 그는 낭만을 노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이 쌓여 최백호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낭만 가객’으로 등극했다.
최백호는 낭만의 시간과 도전의 시간을 함께 살고 있다. 지난해 11월 기획앨범 ‘찰나’를 발매한 그는 젊은 가수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 외적인 변신도 시도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신년호 표지를 장식하며 젊은 스타일을 멋지게 소화한 것. 변화의 준비를 마친 최백호가 수놓을 2023년이 기대된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정말 신나는 일이에요! 살아온 세월이 다 없어진 것 같지만 그냥 흘러가지 않아요. 어떤 형태로든 다 쌓여 있어요. 그 많은 것이 내 삶에 긍정적으로 작용하고요. 저는 지난해 73세의 시간이 너무 좋았어요. 74세의 시간이 기대됩니다.”
후배들과 협업한 ‘찰나’
기획앨범의 타이틀곡 역시 ‘찰나’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낭만에 대하여’를 잇는 포크송으로 누가 들어도 최백호 노래다. ‘찰나’는 빛났던 순간, 힘들었던 순간 모두 인생을 수놓은 소중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최백호의 세월을 그대로 담은 목소리가 가사와 맞물리며 깊은 울림을 안겨준다.
“제 노래가 원래 좀 그렇기는 해요. 별로 정돈되지 않고 노래가 제 박자에 들어가지 않기도 하고요. ‘찰나’에서는 특히 제 목소리가 가다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오죠. 나이가 느껴진다는 반응도 많고요. 기획하고 믹싱한 분들이 노래와 맞다고 판단해서 제 목소리를 그대로 살린 것이라 생각해요.”
앨범 ‘찰나’의 수록곡은 총 8곡이다. 최백호는 마지막 곡 ‘책’만 작사쪾작곡하고, 나머지 7곡은 후배들에게 맡겼다. CJ ENM의 신인 작곡가 육성·발굴 프로젝트인 ‘오펜 뮤직’ 출신 작곡가들이 노래를 만들었다. 최백호는 2018년부터 오펜 뮤직의 멘토로 참여했고, 그 인연이 ‘찰나’로 이어졌다.
최백호는 직접 노래를 쓰고 만들어 부르는 싱어송라이터로 유명하다. 때문에 그에게 ‘찰나’ 앨범 자체는 실험이고 도전이다. 최백호의 새로운 변화에 후배 가수들이 동참해 힘을 실어줬다. 지코, 타이거JK, 정승환, 정미조, 죠지, 콜드 등이 피처링에 참여했다.
노래의 장르가 달라지니 창법 또한 달라졌다. 최백호는 타이거JK와 힙합곡 ‘변화’를 불렀다. 그는 고음을 소화하며 파워풀한 창법을 보여줬다. 죠지와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 ‘개화’를 함께했다. 최백호의 목소리에 신나는 리듬이 붙으니 가사가 주는 설렘이 더해졌다. 최백호는 후배들과의 작업에 대해 “공부도 많이 했고, 깨우친 것도 많다”고 소감을 밝혔다.
“저는 좋은 노래는 쉽고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꼭 정답은 아니라는 것을 깨우쳤어요. 젊은 세대의 노래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이 깨진 거죠. 또 제가 평생 혼자 노래 부르다 보니 하모니를 잘 못 내요. 같이 노래 부른다는 게 어렵기도 했고 공부를 많이 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실력 있는 작곡가들과 가수들이 있어서 K-팝이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는다는 사실 또한 알게 됐죠.”
이번 앨범에는 특히 ‘가요계 3대 코’ 막내 지코가 ‘찰나의 순간’ 내레이션에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최백호는 “사실 지코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털어놓았다. 지코 측의 요청으로 그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하면서 지코라는 존재도 알게 되었고, 협업도 이뤄졌다고 한다.
이와 함께 ‘가요계 3대 코’ 최백호, 개코, 지코가 한자리에 모였다. 최백호는 발음하면 최배코가 되어 가요계 3대 코 맏형이 됐다. 세 사람은 올해 힙합곡을 내기로 약속했다. 최백호는 “진짜 부르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힙합을 해보고 싶다. 이번에 타이거JK와 함께 힙합을 처음 해봤는데 재밌었고, 노래가 들을수록 좋다. 개코, 지코와는 어떤 노래가 나올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사실 이번 앨범은 세상에 나오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지난여름 최백호의 건강이 악화돼 녹음이 힘든 상황이었다. 최백호는 “그때 의사가 ‘노래를 안 부르고 오래 살든지, 노래를 부르고 일찍 죽든지 둘 중 하나를 하라’고 말할 정도로 심각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대답은 “선생님, 저 노래 부를게요”였다.
최백호는 자기 몸보다 후배들의 노력을 저버릴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는 “몸이 안 좋다 보니 녹음할 때 아주 예민했다. 후배들을 잘 챙겨주지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면서 “지금은 많이 호전됐다.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지금 너무 행복하다”고 전했다. 최백호는 자신이 노래를 부르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천생 가수라는 사실 또한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나이 듦의 변화
최백호는 화가라는 직업도 갖고 있다. 59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는 전시회도 여러 차례 열었다. 최백호는 ‘나무 그리는 화가’로 특히 유명하다. 그는 “나무밖에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나무는 계절에 따라 변화할 뿐이지 배신을 하지 않는다”며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를 밝힌 그는 특별한 나무 이야기를 전했다.
“고향이 부산 기장인데 어머니께서 시골 국민학교(초등학교) 선생님이셔서 사택에서 같이 살았어요. 그 사택에 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고향에 갈 때마다 그 나무를 보고 와요. 어머니와의 추억이 가득한 나무죠. 그런데 다른 학교가 들어와서 그 나무를 뽑으려 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때마침 거기 문화원장과 식사 자리가 생겨서 나무 얘기를 했더니 보존하기로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최백호 나무라고 이름도 생겼다죠. 하하.”
최백호에게 어머니는 매우 큰 존재다. 그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최백호의 어릴 적 꿈은 어머니처럼 교사가 되는 것이었다. 미술에 소질이 많았던 터라 미술 교사를 꿈꿨다. 학창 시절 그는 미대 진학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등록금이 부족해서 재수할 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때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당장 잠잘 데가 없을 정도로 가난했던 그는 돈을 벌어야만 했다.
최백호가 선택한 방법은 생계형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그는 부산 라이브 클럽을 3년, 서울 라이브 클럽을 1년 넘게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그러다가 1976년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로 가수로 정식 데뷔했다. ‘내 마음 갈 곳을 잃어’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만든 곡으로 지금도 가장 애착이 가는 노래라고 한다.
“운 좋게 데뷔 앨범이 잘됐지만, 여전히 가난했어요. 기획사에서 돈을 안 줘서 수입이 없었거든요. 28세까지는 하숙비를 못 낼 정도로 너무너무 가난했어요. 29세가 되어서야 돈을 왕창 받고 그 회사를 나와 다른 회사로 갈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 이후 슬럼프가 찾아왔습니다.”
데뷔곡 이후 최백호는 이렇다 할 히트곡을 내지 못했다. 30대의 그는 술집을 전전하며 돈을 벌었다. 하루에 술집 일곱 군데에서 일한 적도 있다고. 최백호는 “술도 매일 마시고 정신적으로 망가져 있던 때였다”며 과거를 떠올렸다.
당시 돈은 많이 번 덕분에 최백호는 처음으로 자기 집을 마련했다. 30대 중반에 서울 목동 아파트를 샀다. 최백호는 “그 집이 터가 정말 좋다. 풍수가 좋은 집이다”라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그 집에서 불후의 명곡 ‘낭만에 대하여’가 탄생했기 때문이다. ‘낭만에 대하여’는 1994년에 나왔는데, 1995년 KBS2 ‘목욕탕집 남자들’에 나오면서 역주행 인기를 끌었다. 20년이 넘은 현재도 여전히 사랑받는 곡이다.
“그 집에서 ‘낭만에 대하여’를 만든 덕에 돈을 많이 벌어 다른 집으로 갈 수 있었죠. ‘낭만에 대하여’는 40대에 만든 곡이에요. 20대에는 만들 수 없는 노래죠. 나이가 들면서 노래가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거예요. 노래가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사람들이 항상 새로운 노래처럼 반응해주시고 좋아해주셔서 신기하고 감사해요.”
나이에 따라 새로운 감성이 생기고 노래도 자연스럽게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그는 70대에 ‘찰나’를 만났다. 최백호는 “80대에는 또 어떤 멋진 노래를 부를지 기대된다. 나이 먹는 것은 절대 슬픈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년기일수록 나이 듦에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데, 이에 대해 그는 일침을 날렸다.
“행복은 선택이라고 하잖아요. 잠들기 전에 하루를 돌아보세요. 99개의 힘든 일이 있었어도 한 가지는 즐거운 일이 있었을 거예요. 오늘 이렇게 즐거운 일이 있었다고 생각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하면 하루가 찬란해지죠. 나이 먹는 것도 똑같이 생각하면 돼요. 신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나머지 시간을 즐기시기 바랍니다.”
2023년, 70대 중반에 접어드는 최백호. 새해 목표는 무엇일까. 그는 “목표가 없다. 적극적으로 다가가면 다 도망가는 사주다. 그래서 가만히 기다리는 쪽이다”라고 답했다. 누구에게나 기회의 순간은 오지만, 누구나 그 기회를 누리는 것은 아니다. 최백호는 늘 준비되어 있었기에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매 순간, 매일, 매년 새로운 이야기를 쓰고 있다.
“‘낭만에 대하여’에도 탄생 비화가 있어요. ‘낭만에 대하여’를 쓰고 며칠 뒤 조용필 씨의 전 매니저가 앨범을 만들고 싶다면서 저를 찾아왔어요. 그래서 ‘낭만에 대하여’가 세상 밖에 나올 수 있었죠. 참 신기한 일이에요. 어떤 기회가 오면 잡아야 하는데, 그래서 평소에 바른 자세, 진정성을 갖추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는 어느 정도 기본적인 자세가 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좋은 기회들을 잡았고 지금의 결과를 얻은 게 아닐까요?”
“결혼 생활은 쪽팔림의 연속이에요. 서로가 서로한테 쪽팔려요. 쪽팔려도 가장 나를 이해하고 믿어줄 거라는 그러한 믿음 하에 쪽팔림을 그냥 겪고, 또 그걸 겪으면서 감당해나가는 겁니다.”
6월 6일 방송된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MBC)에서 5년째 문자로만 소통하고 신체적·정서적 접촉이 전혀 없는 부부에게 내린 솔루션 말미에 나온 말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쪽팔림의 역사
실제로 부부의 삶이란,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 생활을 해나가는 것은 아내가 남편에게, 남편이 아내에게 혹은 부모가 자식한테, 자식이 부모한테 끊임없이 쪽팔려 하는 시트콤 같습니다. 품위와 체면을 잃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비단 결혼 생활뿐 아니라 인간관계도 비슷합니다. 불편한 진심을 끄집어내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 마음을 표현하려면 자존심이 상하기 때문입니다. 누가 뭐라 비난하는 것도 아닌데 본인은 굴욕감을 심하게 느낍니다. 관계도 어색해지기 마련입니다. 마치 안톤 체호프의 단편소설 ‘관리의 죽음’에서 주인공이 그랬듯이요. 내 치부와 허물을 붙잡고 죽음으로 몰고 가기보다 때로는 당당하고 뻔뻔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제 쪽팔릴 준비 되셨습니까? 마음 미장공 열 번째 이야기는 쪽팔릴 줄 아는 용기를 북돋우면서 시작합니다.
안톤 체호프의 ‘관리의 죽음’
어느 아름다운 저녁, 행복에 겨워 오페라에 심취해 있던 회계원 이반 드미트리치 체르바코프. 갑자기 재채기를 한 그는 앞자리에 앉은 상급 관리 브리잘로프 장군의 민머리와 목덜미에 침이 튀어버렸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자신의 실수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 괜찮다는 답을 들었음에도 그는 다음 날 접견실까지 찾아가 또 사과를 합니다. 일방적이고 계속되는 사과에 병적으로 집착하다 결국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당사자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별일 아니니 괜찮다고 지나간 것을 기어이 들쑤시고 후벼 파서 상대와 자신을 괴롭히는 어리석은 짓을 우리는 얼마나 자주 해왔을까요. 섣부른 판단과 고정관념, 선입견으로 일상을 지옥으로 만든다면 얼마나 불행할까요.
사랑은 쪽팔림의 결정판
지난 추석 연휴에 케이블방송에서 영화 ‘접속’(1997)을 봤습니다. 아직 개인 휴대전화가 없던 시절, PC통신 대화방의 상대인 줄 모르고 지하철에서 우연히 마주 앉아 있던 두 주인공(한석규, 전도연 분) 사이에 한 청년이 손잡이를 잡고 섭니다. 말을 심하게 더듬는 왜소한 체격의 그 남자는 물건을 팔 거라는 승객들의 예상과는 달리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말이 유독 서툴고 어눌하지만 창피를 무릅쓰고 이 자리에 선 이유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기 때문에 말버릇을 고쳐보려 용기를 낸 것이라고 합니다. 사랑이야말로 쪽팔림을 기꺼이 감수하게 하는 마법이 아닐까요.
쪽팔려서 좋은 것들
버스에 안내원이 있던 시절 “여기서 내려요!” 이 말을 못 해서 내려야 할 곳을 몇 정거장 지나쳤던 적이 있습니까? 기어드는 목소리로 부들부들 떨지라도 쪽팔림을 불사해야 하는 이유는 가야 할 곳을 가기 위해서입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첫 발표를 했던 순간을 떠올려봅시다. 윗사람한테 신랄한 평가를 받았을 때 좌절하지 않고 자신을 성장시키려면 역시 쪽팔림을 이겨내야 합니다. 쪽팔림을 장벽으로 여겨서 주저앉을지, 징검다리로 생각해 다음 단계로 나아갈지 자문해보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사랑도 일도 일단 저질러볼까요. 이럴 때 ‘아니면 말고’와 ‘싫으면 말고’ 정신이 도움이 됩니다.
쪽팔릴 줄 아는 것도 용기입니다
‘아니 젊을 때야 뭔 짓을 못 해.’ ‘내가 그 나이만 됐어도 그 정도는 껌이지.’ 이런 말로 주저하고 쭈뼛거리며 변명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가슴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물어봅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더욱 필요한 것이 바로 쪽팔릴 줄 아는 마음가짐입니다. 그렇다면 쪽팔리는 상황은 어떤 때일까요? 우리가 무엇인가를 하지 않을 때는 부끄럽거나 치욕스러울 일이 거의 없습니다. 무슨 일인가 하려고 할 때, 무슨 말을 꺼내려 할 때, 그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길 때라야 비로소 쪽팔릴 일이 벌어질 수 있습니다. 특히 나이를 걸림돌로 의식하지 않고 일을 도모하는 당신은 그래서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이왕이면 모양 빠지지 않고 근사하게 쪽팔리는 비법은 없을까요?
근사하게 쪽팔리는 방법
•내가 실수한 것은 화끈하게 인정합니다.
•약속에 늦었을 때는 반드시 사과합니다.
•모르는 것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어디서나 묻습니다.
•사랑과 감사 표현도, 친구랑 만남도 내가 먼저 제안합니다.
•조언이나 의견을 먼저 구합니다.
•‘그 나이에 왜 굳이’ 이런 말을 하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먼저 인정하고, 사과하고, 질문하고, 고백하고, 고맙다 하고, 제안한다고 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과해야 할 때 하지 않고 버티는 것이야말로 훨씬 쪽팔리고, 면이 안 서는 짓입니다. 나이를 빌미로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게 말리거나 막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뭘 하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고 합니다.
모르는 것을 인정하고 주변에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자존심을 구기는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자존심 살리고 자존감도 높이는 행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묻는 것은 죽어도 못 하겠다면 하다못해 인터넷 검색을 해서 확인해도 됩니다. 혹시 길을 잘못 들었을 때, 내비게이션대로 운전해도 헤매고 있을 때 아직도 주유소에서나 주변 사람한테 묻지 않습니까? 예에 통달한 공자도 남의 제사상에 감 놔라 배 놔라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물어보고 또 물어봤다고 합니다. 풍습과 관례를 최대한 존중하면서요. 그러니 묻는 것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고, 서로 체면을 살려주는 일입니다.
‘근자감’에 희망을 준 사람
‘근거 없는 자신감’을 줄인 말이 ‘근자감’입니다. 지난 50년 가까이 수학계 난제로 남아 있던 리드 추측(Read's Conjecture)을 대수기하학의 한 갈래인 호지(Hodge) 이론을 통해 증명해 수학계 노벨상으로 꼽히는 필즈상을 거머쥔 허준이 교수가 모교인 서울대학교 후배 학생들을 위한 강의에서 한 말입니다. 그동안은 과대망상이다, 허세다, 만용이다 하며 비웃음을 사거나 조롱감이 되었던 신조어가 바로 근자감입니다. 그런데 근거 있는 자신감도 줄이면 근자감이 될 텐데 왜 줄여서 부르지 않는지, 허 교수 얘기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성적이나 입상 경력 같은 근거 있는 자신감을 가진 사람은 여러 가지 불운한 일이 겹쳐서 힘든 과정을 만나고 그 근거를 잃게 될 경우 쉽게 부서질 수 있습니다. 반면 근거 없는 자신감을 지닌 사람은 살면서 어쩔 수 없이 맞닥뜨리는 힘든 과정에 놓일 때도 유연하게 자신의 목표를 변경합니다. 근자감은 인생을 끝까지 잘 살아가게 하는 큰 힘이 되더라고요.”
근자감이야말로 쪽팔림을 소화해낼 수 있는 바탕이자 에너지가 아닐까요. 이것 때문에 자신감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없더라도 나는 잘 해낼 수 있다는 무조건적인 자신감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더 간절해집니다.
자식이 공부를 잘해서, 얼굴이 예뻐서, 내 말을 잘 들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실수를 하고 방황을 해도 조건 없이 사랑해주는 부모 마음도 근자감의 원천이 됩니다. 그런 믿음이 있어야 쪽팔림을 당당하게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틈과 흠에서 나오는 아름다운 빛
부서진 조각을 모은다 해도 온전히 합칠 순 없다
(중략)
완벽한 것은 없다
어디에든 틈은 있기 마련
빛은 그곳으로 들어오리니
우리에게 ‘I’m your man’이란 노래로 알려진 레너드 코헨(Leonard Cohen)은 싱어송라이터이자 시인이며 소설가입니다. 그가 1992년 발표한 ‘송가’(Anthem)의 이 노랫말은 임상심리학 박사이자 불교 명상 지도자로 유명한 잭 콘필드(Jack Kornfield)의 책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제주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돌담은 허술하게 쌓은 것 같지만 강한 바람에도 무너지는 법이 없습니다. 커다란 현무암 사이에 생긴 틈이 바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돌 사이 빈틈이 담장을 살리고 금이 간 틈새로 빛이 들어오듯, 사람 사이의 틈과 거리가 관계를 숨 쉬게 하고 살리게 하는 묘책이 아닐까 합니다.
아메리카 인디언은 구슬 목걸이를 만들 때 일부러 흠집 있는 구슬 하나를 꿰어 넣는다고 합니다. 그 구슬을 ‘영혼의 구슬’(Soul Bead)이라고 부르는데 ‘모든 것은 문제가 있다’는 지혜를 담고 있다고 하네요. 고대 페르시아에서도 최고급 카펫을 짤 때 아주 작은 흠 하나를 굳이 짜서 집어넣었다고 합니다. ‘페르시아의 흠’(Persian Flaw)이라 부르는 이 행위는 ‘영혼의 구슬’과 마찬가지로 인간이란 완벽할 수 없으며 불완전한 존재라 믿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빈틈이나 흠결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하지 맙시다. 자신에게나 상대에게나 완벽한 잣대를 내려놓은 채 ‘근자감’을 등에 업고 ‘쪽팔릴 줄 아는 용기’로 무장한다면 세상에 두려울 것 하나 없는 멋진 삶을 살 수 있지 않을까요. 저와 당신이 지닌 틈과 흠에서 아름다운 빛이 나올 거니까요. 고맙습니다.
‘트로트의 황제’ 설운도(64)의 노래에는 특별함이 있다. 그의 노래에는 추억이 녹아 있고(사랑의 트위스트), 아픈 이별의 기억이 떠오른다.(보랏빛 엽서) 힘든 순간 위로가 되어주기도 했다.(다함께 차차차) 설운도가 대한민국 국민들과 희로애락을 함께한 지 벌써 40년이다. 그 스스로도 “오랜 시간 국민의 사랑을 받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지 않냐”고 말할 정도로 가수로서 자부심이 있다. 그렇다고 권위적이거나 까탈스럽지 않다. 오히려 누구보다 젊고 열린 마음을 갖고 있고, 시대를 읽는 눈을 갖고 있다. 40년의 역사는 결코 그냥 써지지 않았다.
설운도는 ‘트로트계의 싱어송라이터’로 통한다. 그는 노래도 잘 부르지만 작곡 실력도 뛰어나다. 설운도의 히트곡 ‘쌈바의 여인’, ‘보랏빛 엽서’, ‘사랑이 이런 건가요’ 등은 모두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더불어 ‘사랑의 트위스트’, ‘여자 여자 여자’는 설운도가 작곡하고 아내 이수진이 작사한 곡들이다. 영화 ‘그 여자 작사 그 남자 작곡’의 현실판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난해에는 설운도가 임영웅에게 선물한 노래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대박 나기도 했다.
이처럼 시대를 풍미하는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진정한 가수, 설운도.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타고난 DNA로 가수가 됐지만, 꾸준한 노력 없이는 오늘날의 자신은 없었을 것이라고 자평했다.
“국회의원들을 보면 2선, 3선 계속하잖아요. 그러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우리도 똑같아요. 노력하지 않고 히트곡이 없으면 안 되죠. 그래서 지금도 한해 한해 열심히 사는 거죠. 노래 연습도 열심히 하고, 음악의 감각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작곡도 계속하죠. 제가 트로트 가수 작곡가 중 현대적인 감각의 노래를 많이 만들잖아요. 저는 현재 어떤 음악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지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해요. 새로운 것을 추구하다 보니 한 곡 만드는 데도 시간이 오래 걸리고 힘들죠. 저한테 곡 받으려고 사람들이 무지하게 많이 와요. 뚝딱뚝딱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오는 사람들한테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도와주고 싶죠.”
가수가 될 운명
설운도에게 가수는 ‘운명’이었다. 6남매 중 셋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난 설운도(본명 이영춘)는 유독 어머니를 빼닮았다. 얼굴, 성격, 그리고 노래 실력까지. 설운도의 어머니는 치과의사 아버지 밑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자랐고, 시청 공무원으로 일했다. 그러던 어느 날 점심시간에 노래자랑에 나갔는데 단번에 MBC 전속 가수로 발탁됐다. 그 정도로 노래 실력이 뛰어났지만, 집안의 반대로 꿈을 접어야만 했다.
설운도의 어머니는 가수가 되지 못한 것이 평생의 한이 됐다. 꿈을 이루지 못하면 더욱 간절해지는 법이니까. 이에 그녀는 자신을 닮아 노래를 잘 부르는 설운도가 자신의 못다 이룬 꿈을 이뤄주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노래를 정말 잘 부르셨어요. 어머니가 노래를 부르면 눈물이 주르륵 흘렀어요. 당신의 못다 이룬 꿈이 가수였기 때문에 앉으나 서나 ‘너라도 내 꿈을 이뤄다오’라는 어머니의 말씀이 귓전에 맴돌았어요. 저에게 가수가 되는 것은 과제였고, 결과적으로 효도했죠. 문화관광부 주최로 수여하는 ‘예술가의 장한 어머니상’이 있어요. 1995년에 어머니께서 그걸 받으셨는데 정말 많이 우셨어요. ‘엄마의 한을 풀어줘서 정말 고맙고 기쁘다’고 하셨죠.”
설운도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금수저 출신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집안이 기울어졌고 어머니도 다른 일을 해야만 했다. 어머니는 울산의 한 회사 구내식당을 운영했다. 설운도는 어머니를 보러 울산에 갔다가 울산 MBC 주최 노래자랑에 출연하게 됐다. 그때 불과 열여섯 살이었던 설운도. 놀라운 노래 실력으로 울산 대표로 뽑혀 서울 MBC에서 진행하는 전국 노래자랑까지 진출했다. 당시 그는 금메달을 네 개 받았고, 최우수상을 수상했다.
“저는 늘 아버지가 마음에 걸려요. 어머니는 제가 꿈도 이뤄드리고, 잘되는 모습을 보시고 돌아가셨잖아요.(2016년 별세) 그런데 아버지는 제가 열일곱 살 때 돌아가셨으니까…. 제가 서울 MBC에 갔다가 금메달을 하나씩 들고 돌아오면, 아버지께서 동네에 자랑하고 다니시던 모습이 생각나요. 아버님이 살아 계셨으면 제가 잘되는 모습을 보고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그게 늘 가슴이 아파요.”
가수로서의 재능을 확인한 설운도는 이후 부산의 극장 쇼, 라이브 클럽을 전전하며 무명 가수로 활동했다. 부산에서도 인기가 많고 돈을 잘 벌었기 때문에 굳이 서울에 갈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던 때 군 복무를 마친 그에게 숙자매의 매니저 안태섭 씨가 찾아왔다. 안 씨의 권유로 설운도는 1982년 KBS ‘신인 탄생’이라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됐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원조 격인 프로그램이다.
설운도는 5주 연속 우승하며 가요계에 정식 데뷔했고, 이듬해 ‘잃어버린 30년’을 발표하며 세상에 이름을 알렸다. 특히 이 곡은 ‘남북 이산가족 찾기’ TV 방영 당시 메인 곡으로 선정됐고, 설운도의 구슬픈 목소리는 많은 이들을 눈물짓게 했다. 뜨거운 관심 속에 설운도는 그해 KBS ‘10대 가수상’을 수상했다.
“열여섯 살 때부터 극장 쇼부터 지방 업소를 다니고, 고생을 많이 했죠. 그래서 공부를 제대로 못 했어요. 졸업도 못 하고 중퇴하고 그랬죠. 특히 제가 서울로 올라왔을 때는 어머니께서 하시던 사업이 망해서 정말 어려웠어요. 저도 자리 잡은 게 아니라 도와주지 못했죠. 그러는 바람에 엄마하고 형제자매들이 다 흩어졌어요. ‘잃어버린 30년’이 히트치면서 다시 만났죠.”
2세로 이어진 가수 DNA
마침내 오랜 무명 생활을 청산하고 주목받은 설운도. 그러나 그의 가수 인생은 쉽게 가는 법이 없었다. 1984년 회사에 문제가 생겨 문을 닫게 된 것. 설운도는 당시에 대해 “졸지에 홀로서기를 하는데 추락하는 것에는 날개가 없더라. 10대 가수에서 밑바닥으로 떨어졌다”고 회상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그는 이를 감당하지 못했고 일본으로 도피했다. 그는 3~4년 일본에서 엔카 공연을 했다.
그리고 돌아온 설운도는 1991년 ‘다함께 차차차’를 발표하며 재기에 성공했다. 그는 MBC ‘10대 가수상’을 2년 연속 받으며 트로트 4대 천왕으로 급부상했다. 듣기만 해도 힘이 나는 ‘다함께 차차차’는 현재도 국민 송으로 통한다. 더불어 그해 겹경사가 터졌다. 설운도는 이수진과 결혼했고, 이듬해 설운도 작곡·이수진 작사 ‘여자 여자 여자’가 탄생했다.
설운도와 이수진의 결혼은 당시 큰 화제였다. 이수진은 1980년대 ‘빨간 앵두’, ‘자유부인’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였다. 연예인 커플, 특히 가수와 배우 커플은 흔치 않았기 에 두 사람은 더욱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이수진은 결혼 후 설운도의 노래를 작사했고, 현재는 의상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설운도의 무대 위 화려한 의상들은 그녀가 만든 것이다. 설운도의 의상들이 유독 멋스러운 이유는 아내의 사랑이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아내와는 파티 장소에서 만났는데, 옆자리에 앉았어요. 외모가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더라고요. 말을 붙였는데 고향이 부산 쪽인 양산이라는 거예요. 더욱 호감이 갔죠. 사실 제가 숫기가 없는데 이 여자를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때 아내가 노래를 좋아한다고 앨범 내는 것이 소원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유명한 작곡가라며 곡을 주겠다고 거짓말로 아내를 꾀었어요. 사실 아내 노래 실력은 형편없었는데, 당시 누가 아내를 가수로 키우려고 바람 잡았던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아내와 데이트를 했는데 큰아들이 바로 생겨버린 거예요. 이 여자를 만나라는 하늘의 뜻이구나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동거하다가 애 낳고 결혼했어요.”
설운도는 아내 이수진에게 ‘강원도 포수’라는 별명을 지어줬다고 밝혔다. “강원도는 워낙 숲이 우거져서 한 번 들어가면 못 나온다. 우리 아내는 돈을 벌어다 주면 돈이 밖으로 안 나온다. 그만큼 알뜰하다는 소리다. 덕분에 애들도 잘 컸고 내조를 잘 해줬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내와의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고 했다. 둘 다 연예인이었기 때문에 자기주장이 강해 부부 싸움을 많이 했다고. 설운도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고 있다. 장남 이승현은 1990년에 태어났고, 이듬해 둘째 아들 이승민이 태어났다. 막내딸 이승아는 1996년생이다.
자녀들은 아버지의 가수 DNA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첫째 아들 이승현은 루민이라는 예명으로 가수로 활동 중이다. 그는 아이돌 그룹 포커즈, 엠파이어로 활동했고, 최근에는 솔로로 신곡을 발표했다. 딸 이승아는 가수 지망생으로 KBS 2TV ‘트롯 전국체전’에 출연한 바 있다. 설운도는 이승아의 근황에 대해 “가수는 물론 연예계 생각을 접었다”고 강조했다.
“솔직히 저는 엄마, 아빠가 연예계에 있었지만, 아이들은 다른 길을 가길 바랐어요. 애들이 워낙 하고 싶어 하니 막지는 못하지만, 노래로 경쟁 사회에서 성공하기는 쉽지 않다고 봐요. 제가 어디 나가서 ‘우리 아들입니다’ 소개하는 그런 것을 못 해요. 우리 딸도 오디션에 나왔는데, 제가 심사위원인데도 내 딸 나온다고 아무한테도 말 안 해서 떨어졌잖아요. 아무리 딸이라도 실력이 안 되면 떨어져야죠.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노력하고 실력도 향상돼요. 고기를 잡아주는 것보다 고기 잡는 기술을 알려주는 것이 좋죠.”
다시, 트로트 전성기
2020년 TV조선 ‘미스터트롯’으로 트로트 열풍이 이어지면서 설운도는 제2의 전성기를 썼다. 지난해 ‘미스터트롯’ 우승자 임영웅 효과로 설운도의 노래 세 곡이 동시에 히트를 쳤다. 설운도는 이를 두고 “기적 같은 일”이라고 표현하면서 “영웅이와 나는 묘한 조합이다. 둘의 시너지가 엄청난 에너지를 만들어낸 것”이라고 짚었다.
먼저 임영웅이 ‘미스터트롯’에서 ‘보랏빛 엽서’를 불러 설운도는 23년 만에 역주행 신화를 썼다. 또한 2019년 나온 설운도의 노래 ‘사랑이 이런 건가요’도 임영웅이 부르며 재조명됐다. 이에 설운도는 임영웅에게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를 작곡해 선물해줬다.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 뮤직비디오는 조회 수 5000만 뷰 돌파를 앞두고 있다. 트로트 역사상 유례없는 인기다.
“‘보랏빛 엽서’가 히트하면서 나도 동반 성장하게 된 거죠. 영웅이한테 고맙잖아요. 그래서 곡 선물을 해주고 싶었는데, ‘별빛 같은 나의 사랑아’가 영웅이한테 가게 된 거죠. 많은 국민들이 노래를 좋아해주셔서 작곡가로서 기쁘고 뿌듯해요. 요즘 사랑이 메말랐잖아요. 사랑의 전도사 같은 노래예요. 삭막한 세상에 모두가 이해하고 용서하고 배려하는 사회가 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어요. 후배 영웅이 덕을 많이 봤으니까 늘 잘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걔가 속이 깊어서 고마움을 알고 항상 감사해하는 친구예요.”
설운도에게 가장 애착이 가는 히트곡을 묻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사랑이 이런 건가요’를 꼽은 것. 그는 “젊은이들이 트로트를 좋아하게 만든 노래다. 펑키한 리듬이라 트로트 느낌도 안 나고, 이 노래에 자부심이 있다”고 설명했다. 설운도는 트로트가 중장년층의 전유물이 아닌 젊은 세대에도 통하는 음악이 된 점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트로트가 재조명받은 이유로 신선해졌다, 맑아졌다, 수준이 높아졌다, 트로트 하는 친구들이 젊고 다양한 연령층의 팬들을 확보하고 있다 등을 꼽을 수 있어요. 예전에는 트로트는 부모들이나 듣고 옛날 사람이 하는 음악이라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트로트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죠. 우리가 좋아하는 노래고 우리의 노래구나라고 사람들이 인식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트로트를 좀 더 신선하고 수준 높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설운도는 이처럼 젊은 세대와 통합하는 방법을 알고 있고, 앞날을 선도해가야 한다는 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미래 유망 사업인 NFT에도 관심이 아주 많다. NFT는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디지털 대체 불가 토큰을 말한다. 설운도는 ‘잃어버린 30년’ LP를 등록해 NFT 기부 챌린지에 참여했다.
“NFT로 기부 챌린지 말고 조만간 새로운 도전을 할 예정이에요. NFT는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재산이에요. 죽더라도 나는 그 가상공간에 살아 있게 되죠. 가상공간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우주 공상과학 영화에나 나오던 것이었지만 앞으로는 현실이 되고, 보이는 것만이 다가 아닌 세상이 온 거죠. NFT는 부가가치가 높기 때문에 지금 해야 해요. 나중에 가서 하면 늦죠.”
설운도는 “트로트는 나의 모든 것”이라면서 파란만장한 지난 시간을 돌아봤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산 밤업소를 돌아다니며 노래하고 좌절도 맛봤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이 있다고 말한다. 힘든 순간에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노력을 배로 했기 때문에 기회가 찾아왔고 영광의 순간을 맞이했다고 생각한다. 설운도가 앞으로 이루고 싶은 목표는 ‘K-트로트’다. 한국의 정서가 담긴 트로트가 전 세계에서 통하길 바라는 대부의 마음이다.
“저는 트로트라는 장르를 고집했고, 앞으로도 영원히 트로트 가수로 남을 거예요. 트로트 가수로 무대에서 노래하다 죽어야죠. 힘들었던 역경을 지나오면서 지금의 제가 탄생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마음속에 항상 희망과 꿈, 비전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K-트로트’라는 개념은 전 세계인이 트로트를 이해할 수 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거예요. ‘K-트로트’ 문을 누가 열지는 모르겠어요. 누군가는 그 문을 열어야 하고, 그다음에는 모두가 주력해야겠죠. 세계 문화를 주도해가는 대한민국이 될 수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자는 거죠.”
● Exhibition
◇앨리스 달튼 브라운 : 빛이 머무는 자리
일정 10월 24일까지 장소 마이아트뮤지엄
앨리스 달튼 브라운은 지난 50년간 건물의 외부와 실내의 경계, 그리고 실내에 빛이 머무는 자리를 그려냈다. 이번 전시는 작가의 해외 최대 규모 회고전이다. 드라마 ‘부부의 세계’, ‘미스티’, ‘비밀의 숲’ 등에 아트 프린트가 소개돼 인기몰이를 한 ‘황혼에 물든 날’(Long golden day)의 오리지널 유화 작품과 마이아트뮤지엄 의뢰로 제작한 신작 3점을 포함해 2~3m 크기의 대형 유화와 파스텔화도 소개한다. 이외에도 작가의 작품 활동을 총망라하는 작품 80여 점을 만날 수 있다. 자연 소재와 인공 소재의 대비를 섬세하게 그려내는 앨리스 달튼 브라운의 작품은 빛과 물, 바람이 어우러진 청량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준다. 오디오 가이드와 도슨트를 운영해 작품의 이해를 높일 수 있으며, 어린이 대상 키즈 아틀리에와 시즌 이벤트 프로모션 등 전시와 연계한 다양한 교육·문화 프로그램을 제공한다.
◇아트 오브 뱅크시
월드투어 인 서울
일정 2022년 2월 6일까지 장소 갤러리아포레 더 서울라이티움
‘얼굴 없는 거리의 화가’, ‘거리의 아트 테러리스트’ 등으로 불리는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뱅크시의 행동하는 예술 세계를 관객들과 공유할 체험형 전시가 아시아 최초로 서울에서 열린다. 뱅크시는 사회·정치적인 문제와 예술의 허례허식, 미술계의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퍼포먼스로 화제를 일으켰다. 그는 도둑 전시와 길거리 그림 판매, 아트 테러, 다큐멘터리 연출 등 다양한 방식으로 자본주의에 잠식된 예술계를 조롱했다. ‘뱅크시가 누군지 아무도 모르지만 모두 그가 누군지 안다’라는 말까지 생겨났을 정도로 뱅크시의 정체는 철저히 베일에 싸여 있다. 이러한 익명성 덕분에 불평등하고 억압된 세상에서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침묵하지 않고 자신의 메시지를 자유롭게 담아 표현할 수 있었다.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 칭해온 뱅크시는 디스토피아 같은 장소에 그래피티 예술을 그려 넣음으로써 우리가 처한 현실을 풍자한다.
● Book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노부토모 나오코·시공사)
늙어가는 부모가 가장 두려워하는 병은 ‘치매’다. 자식에게 끝을 알 수 없는 부담을 지게 하는 건 어떤 부모든 피하고 싶은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 노부토모 나오코의 어머니도 그랬다. 완벽한 주부이자 자랑스러운 어머니였던 그녀는 딸에게 뜻밖의 새해 인사를 전한다. “올해는 치매니까 잘 부탁합니다.” 이 책은 다큐멘터리 영상감독인 노부토모 나오코가 치매를 앓는 어머니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아버지의 애틋한 나날을 기록한 에세이다. 치매 전후로 질병 당사자, 가족,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생활이 어떻게 바뀌는지 여과 없이 보여준다.
책은 치매를 슬프고 비참한 것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치매 진단을 받은 85세 어머니와 그런 어머니를 돌보는 아버지. 딸은 카메라를 통해 부모님을 바라보며 비참했던 일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치매 할머니와 귀먹은 할아버지의 맞물리지 않는 어긋난 대화는 훈훈하고 사랑스럽게도 느껴진다.
어머니가 치매 진단을 받고, 아버지가 간병에 뛰어들며 외부의 도움을 거부하던 노부부는 사회와 다시 연결된다. 이 과정을 시간 순으로 전개하는 이 에세이는 우리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노화와 질병의 현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한편, 가족과 돌봄의 의미를 새롭게 일깨워준다.
저자는 어머니를 돌보면서 인간적으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있음을 느낀다. 저자의 간병 경험을 통해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의 인생이 질병으로 정의되거나 기억될 수 없고,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고 약해지며, 결국 서로에게 의존해야 하는 연결된 존재라는 걸, 간병은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상호 돌봄이라는 걸 알려준다.
◇보험, 인문학에 빠지다 (이경재 저·바른북스)
보험은 이제 필수품이 됐지만 아직 보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팽배하다. 30여 년 동안 보험을 연구하고 강의한 저자가 보험을 인문학적으로 생각하게 하고, 보험의 새로운 가치를 알려준다.
◇데카메론 프로젝트 - 팬데믹 시대를
건너는 29개의 이야기 (마거리 애트우드 외 28인·인플루엔셜)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던 14세기, 액자 소설 ‘데카메론’이 사람들을 위로했다. 700여 년 전 ‘데카메론’을 재현하기 위해 ‘뉴욕타임스’가 세계 각지 작가들의 단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다.
◇햇빛은 찬란하고 인생은 귀하니까요 (장명숙·김영사)
한국인 최초 밀라노 패션 유학생, 이탈리아 정부 명예기사 작위 수여자, 구독자 87만 유튜버 밀라논나의 인생 내공을 담은 에세이.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모든 이에게 위안과 희망의 언어를 전한다.
● Stage
◇하데스타운
일정 9월 7일~2022년 2월 27일
장소 LG아트센터
연출 박소영
출연 조형균, 박강현, 시우민, 최재림, 강홍석, 김선영 등
제73회 토니어워즈 최우수 작품상, 제62회 그래미어워즈 최고 뮤지컬 앨범상에 빛나는 최고의 무대가 한국에서 최초로 펼쳐진다. 극작과 작곡·작사를 맡은 아나이스 미첼의 동명 앨범을 극으로 만든 ‘하데스타운’은 2016년 브로드웨이에서 첫선을 보인 후 뮤지컬 애호가들이 가장 주목하는 작품이 됐다. ‘하데스타운’은 그리스 신화를 바탕으로 한다. 갑작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아내 에우리디케를 되찾기 위해 지하 세계로 향하는 오르페우스, 사계절 중 봄과 여름은 지상에서, 가을과 겨울은 지하에서 남편인 하데스와 보내는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지상과 지하 세계를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교차된다.
◇사랑했어요
일정 10월 31일까지
장소 광림아트센터 BBCH홀
연출 임영근
출연 조장혁, 정세훈, 성기윤, 고유진, 홍경인, 김용진 등
독보적인 음악 세계로 대중을 사로잡은 故김현식 주크박스 뮤지컬 ‘사랑했어요’가 광림아트센터에서 공연된다. 故김현식은 한국적 언더그라운드 스타일을 제시했다는 평가받는 싱어송라이터다. ‘비처럼 음악처럼’, ‘내 사랑 내 곁에’ 같은 명곡들을 편곡을 통해 되살린 그의 음악이 다시 한번 세대를 뛰어넘는 감동을 선사한다.
◇카포네 트릴로지
일정 9월 14일~11월 21일
장소 두산아트센터 연강홀
연출 오루피나
출연 이건명, 고영빈, 박은석, 송유택, 장지후, 강승호 등
독보적인 갱스터 누아르 장르의 작품 ‘카포네 트릴로지’가 두산아트센터 연강홀에서 3년 만에 관객을 만난다. 연극 ‘카포네 트릴로지’는 20세기 역사상 가장 악명 높은 마피아 ‘알 카포네’가 주름잡던 미국 시카고를 배경으로, 렉싱턴 호텔 661호에서 일어난 사건을 다루고 있다. 선과 정의가 위태롭게 흔들리던 시대의 ‘안티 히어로’ 이야기를 그려낸다. 탁월한 시대상 반영과 풍자, 위트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조부모는 손주에게 조건 없는 사랑을 주기도 하고, 때로는 삶의 지혜를 들려주는 역할을 맡는다. 동서양과 시대를 막론하고 그랬다. 다만 세월이 흐르면서 조부모의 역할과 모습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조부모의 모습을 통해 좋은 조부모로서 갖춰야 할 자세가 무엇인지 살펴보자.
‘당신은 어머니의 형상을 한 천사였어요. 내가 넘어질 때면, 당신이 와 날 잡아주겠죠. 날개를 펼친 모습으로 멀어질 테죠. 그리고 신이 당신을 데리고 돌아갈 때, 이렇게 말했을 거예요. 집에 돌아왔구나.’ 영국 출신의 1991년생 싱어송라이터 에드 시런이 자신의 경험담을 바탕으로 쓴 ‘Supermarket Flowers’의 가사다.
그는 뛰어난 작곡 실력과 아름다운 목소리로 2010년대 전 세계 음악 시장을 휩쓸었다. 인지도와 수익 등을 고려했을 때 세계적으로 뛰어난 아티스트로 손꼽힌다. 그는 “좋든 나쁘든 저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저의 첫 반응은 기타를 잡는 것입니다”라고 할 만큼 일상 속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다. 앞서 소개한 곡은 외할머니 사후에 추모하기 위해 만든 곡으로, 어머니의 관점에서 쓴 가사다.
가수로서의 명성도 대단하지만 효손으로도 유명하다. 한창 앨범을 만드는 데 박차를 가하는 와중에도 당시 아프셨던 외할머니의 병동에 매일 찾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곡이 수록된 앨범에는 ‘Nancy Mulligan’이란 곡이 있다. 곡 제목은 외할머니의 이름에서 따왔고, 이 노래는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의 사랑 얘기를 그리고 있다. 그가 이렇게까지 외할머니를 아꼈던 것은 그의 과거와 무관하지 않다.
학창 시절 그는 빨간 머리 때문에 생강 소년으로 불렸고, 어릴 때 잘못된 수술로 인해 말을 더듬는 증세가 있었다. 이런 특징 때문에 학교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 무명 시절에는 노숙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SNS를 통해 그의 실력이 입소문 나면서 지금 이 자리까지 오게 됐다. 가수를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노랫말처럼 외할머니의 조건 없는 사랑과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격대교육과 학조부모
조부모는 사랑을 전해주는 ‘천사’의 역할과 더불어 지혜의 ‘길잡이’ 역할도 한다. 조선 시대에는 ‘격대교육’이 있었다. 격대교육이란 조부모가 부모를 대신해 손주를 교육하는 것을 말한다. ‘예기’에 따르면 포손불포자(抱孫不抱子)라 하여, 군자라면 손주는 안아도 아들은 안지 않는다고 했다. 격대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굳이 왜 이렇게 한 것일까? 그 이유는 ‘맹자’에 나온다. ‘맹자’에 실린 내용에 따르면 아버지가 자식을 직접 가르치면 기대가 지나치기 때문에 오히려 갈등이 생긴다고 했다. 이러한 이유로 한 세대를 건너뛰고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퇴계 이황 선생은 맏손주와 편지를 주고받으며 격대교육을 했다고 전해진다. 시대가 달라도 말하는 주제는 비슷했다. 특히 맏손주가 과거 공부를 게을리한다는 소식을 듣고 꾸중하는 편지를 보내서 손주를 타일렀다. 퇴계 선생은 과거 공부를 출세를 위한 수단으로 삼는 것을 경계하면서도, 한 가정의 가장이자 사회인으로서 생업에 종사하는 것을 장려했기에 과거 공부를 게을리하는 손주를 혼낸 것이다.
또한 원칙과 도리를 지키고, 마음가짐을 바르게 할 것을 늘 당부했다. 예를 들어 손주가 조정 대신을 많이 안다고 동네방네 자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손주의 태도를 나무라기도 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실천하고 있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은 평소에 출처가 불분명한 물건은 받지 않았고, 원칙에 어긋나는 일은 절대 하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보다 손주에 대한 신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실제로 퇴계의 마지막 30일을 담은 문집을 쓴 이가 바로 맏손주다.
그렇다면 현재 조부모의 모습은 어떨까? 세월이 지나도 손주에 대한 교육열과 관심은 높다. 이른바 ‘학조부모’란 신조어도 탄생했다. 학부모와 조부모의 합성어로, 육아뿐만 아니라 취학 후에도 조부모가 손주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을 말한다. 실제로 교육 현장에서 ‘할머니 치맛바람이 거세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아동 및 청소년 교육 전문가는 “공개수업이나 상담에 참여하는 학부모님 가운데 조부모님이 많다. 조손 가정이 아니더라도 맞벌이 가정의 경우 조부모님이 학교에 오시는 경우가 많다”라고 말했다.
손주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의는 좋지만, 사랑이라는 이유로 손주를 너무 다그치면 안 된다. 잘되라는 뜻으로 하는 얘기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반복되거나 듣기 싫은 말이 되면 잔소리에 불과하다. 따라서 손주에게 유연하게 접근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김대성 부산시교육청 학부모교육 강사는 “전달할 내용을 무조건 단호하게 말하기보다는, 따뜻한 태도로 공감하는 표현을 먼저 하고 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정확하게 하는 것이 좋다”라고 말했다. 지혜의 길잡이로서 지혜 전수도 좋지만, 손주에 대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
좋은 조부모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3계명
❶ 마음 상태를 고려 ▶ ‘걱정’이라는 명분 아래 하는 말이지만 손주가 듣기 불편해한다면 그 말은 안 하는 것이 좋다. 잔소리와 조언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말하기 전에 손주의 마음 상태를 고려하자.
❷ 말은 따뜻하게 ▶ ‘개인’을 중요시하는 손주 세대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들의 마음 상태를 공감하고 따뜻한 표현을 써보자. 사실에 기반하는 것보다는 그 사실로 인한 아이의 마음 상태를 생각하자.
❸ 칭찬으로 자신감 UP ▶ 아이들은 칭찬을 받을수록 자신감이 올라간다. 사소한 부분일지라도 반복적으로 칭찬을 해주는 것이 좋다. 칭찬을 많이 받을수록 손주는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주려고 노력할 것이다.
언더그라운드 가수, ‘천둥 호랑이’가 되어 돌아온 권인하. 올해 나이 예순두 살. 그러나 나이가 무색하게 29만4000여 명의 유튜브 독자를 보유한 그는 여전한 현역으로서 젊은 세대의 열광을 받으며 인생 2막을 일구고 있다. 1980년대를 주름잡았던 그가 40여 년이 지나 어떻게 다시 전성기를 열게 되었을까? 천둥 호랑이가 말하는 음악, 소통, 그리고 도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봤다.
지금 가수 권인하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한동안 잊힌 가수였던 그의 봄날은 유튜브 덕분에 찾아왔다. 그가 놀라운 것은 1980년대에 주로 활약한 과거 세대의 가수면서도 유튜브라는 새로운 포맷에 최적화된 가수로 다시금 성공했다는 점이다. 그 성공의 계기는 젊은 세대와의 적극적인 소통 덕분이었다.
우연처럼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다
권인하는 본인이 반드시 성공하겠다는 목적으로 유튜브를 전략적으로 운용하지 않았다. 유튜브의 성공 사례 중 상당수가 그렇듯, 그는 우연과 기회가 겹쳤을 때 본인이 갖고 있던 본연의 실력을 적중시켜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그 시작은 2015년 ‘복면가왕’에 출연했을 때부터다. ‘이 나이에 해도 되는 건가?’라며 긴가민가했던 출연 제의를 매니저가 적극적으로 권유해 나가게 되었고, 결과는 성공이었다.
“원래 ‘천둥 호랑이’ 채널은 내가 부른 노래들을 모아놓는 데이터베이스로 쓸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복면가왕’에 출연한 후 이슈가 되어 EBS ‘공감’에도 초대되었죠. 거기서 태연의 ‘만약에’를 불렀는데 본방에는 못 나갔지만 EBS에서 그걸 유튜브 채널에 따로 올렸어요. 그랬더니 화제가 되었고 순식간에 100만 뷰를 넘더군요. 그걸 본 아들이 본격적으로 유튜브를 통해 노래를 부르라고 권유했습니다.”
유튜브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그는 태연, 엠씨더맥스, 노라조, 에일리, 아이유 등 후배 가수들의 노래를 적극적으로 리메이크하여 자기 식으로 해석했다. 1980년대 실력파 언더그라운드 가수였던 그가 까마득한 후배들의 노래를 부르는 것 자체도 신선했지만, 더 신선했던 것은 이미 장년의 나이가 된 그가 구사하는 생생한 창법이었다. 다양한 음역대를 오가지만 특히 고음을 원키로 힘 있게 확 질러버리는 그의 ‘천둥 호랑이 창법’에 ‘진짜 가수’를 찾던 젊은 세대는 열광했다.
권인하의 법칙은 연습과 소통
권인하가 나이를 먹어서도 여전히 전성기 시절과 다름없는 압도적 성량과 테크닉을 유지하는 비법은 연습이다. 그는 요즘 매일 기본 3시간, 때로는 10시간씩 노래 연습을 한다. 새로운 세대와 호흡하게 되니 가수로서의 삶의 방식도 달라졌다.
“젊어서는 연습 안 하고 대충 불러도 ‘이 정도면 됐지’ 하며 교만했죠. 하지만 유튜브를 하면서 진심으로 열심히 만들어 부른 노래에 대중이 열광하는 걸 보고 절대로 대충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그는 밴드 후배들과 소주 한잔하면서 서운한 게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말하라고 했다. 후배가 자신이 느낀 점을 얘기하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사과한 다음 고친다. 당연히 처음에는 힘든 일이다. 하지만 후배로서나 그 자신으로서나 이러한 소통을 통해 더욱 개선된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점을 그는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한 태도는 자신의 노래를 듣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끊임없는 피드백을 통해 듣는 이들이 원하는 포인트를 계속 반영하며 진화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필수입니다. 또한 유튜브를 활용하면서 이제는 하나하나 다 기록으로 남기에 허투루 할 수가 없게 됐어요. 권인하라는 아티스트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졌기 때문에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계속 최고의 정신과 자기관리로 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댓글로 만들어진 놀이 공간에서 노닐다
권인하가 자신을 찾는 젊은 세대와 소통하는 방법도 적극 그 자체다. 다양한 SNS 활용. 유튜브, 팬카페, 인스타그램 등을 활용하면서 댓글이나 쪽지에 일일이 답장은 못 하지만 최대한 확인하려고 노력하고 피드백을 최대한 수용하려고 한다. 그것을 위해 그가 중시하는 것은 댓글이다.
“비결은 구독자들이 달아주는 재미있는 댓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젊은 세대는 좋은 콘텐츠가 있으면 그에 대해 댓글로 자유롭게 의견을 개진하면서 놀이터처럼 소비하죠. 그런 재미있는 댓글들이 달리기 시작하면 콘텐츠 자체에 새로운 활력이 생깁니다. 단순히 노래하는 콘텐츠가 아니라 놀이 공간으로 변모하게 되는 겁니다. 결론적으로 구독자들이 달아준 재미있는 댓글 덕분에 콘텐츠가 계속 생명력을 얻고 재확산될 수 있다고 봅니다.”
2021년 3월 중순 현재 권인하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 수는 29만4000명, 곧 30만 명을 돌파할 기세다. 그 구독자들의 연령대는 대부분 20~30대라고 한다. 옛날이라면 환갑잔치를 열었을 가수라고는 믿기 어려운 팬층의 구성이다. 그걸 가능케 한 것이 바로 권인하의 소통 능력 아닐까.
현재 권인하의 모습은 최신 매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멀티테이너적 인상을 준다. 또 그것이 인기의 비결이기도 하다. 새로운 물결에 올라타는 그의 모습은 그의 삶을 이해하면 어느 정도 이해 가능하다.
권인하가 요즘 보여주는 천생 가수로서의 모습만 기억하는 이라면 낯설 수도 있겠지만, 그는 과거에 한때 키보디스트이자 작사·작곡까지 하는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했다. 군대를 갔다 온 그는 1980년대 최고의 작곡가였던 이영훈과 고등학교 동창 한 명과 함께 셋이서 팀을 준비했고, 그때 이영훈의 곡을 보고 자극을 받아 작곡에 뛰어들었다. 그렇게 처음 만든 곡을 이광조가 불렀을 정도로 그의 작곡가로서의 능력은 일찌감치 인정받았다.
권인하는 또한 사업가 경험도 갖고 있다. 신촌뮤직을 운영하며 박효신을 발굴하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부터는 록 가수로서는 드물게 공중파 방송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음악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다양한 방송 활동을 했다. 심지어 배우로서의 경험도 있다. 1992년에 방영된 MBC 미니 시리즈 ‘창밖에는 태양이 빛났다’에서는 주연, 2001년 MBC드라마 ‘가을에 만난 남자’에서는 조연으로 나왔다.
카멜레온처럼 자신의 역할을 바꿔가며 다양한 일을 한 그지만, 뼈아픈 실패 또한 그를 따라다니기도 했다. 음반 시장이 음원 위주로 재편되면서 기존 중견가수들에게는 혹독한 시절이 시작되었다. 권인하 또한 이에 대처하기 위해 미사리 카페를 운영하고 골프 사업도 하는 등 다양한 사업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내가 “당신은 가만히 있는 게 돈”이라고 말할 정도로 사업은 실패를 거듭했다.
내가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 다행
성공과 사회적 인정, 그리고 실패들. 이쯤 되면 권인하가 가진 경험의 자산치가 보통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인플루언서로 변화할 수 있었던 비결도 다양한 경험에서 비롯된 본능적 감각이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지치지 않는 발전의 동력은 ‘어른’의 정의에 대한 그의 생각에서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도 어른이 됐나 싶을 때가 있지만, 누군가의 본보기가 되고 롤모델이 되는 거라고 봅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어른됨이겠죠.”
그는 요즘 자신의 가장 큰 기쁨으로 ‘내 노래를 기다리는 호랭이들이 생겼다는 것’, 그리고 ‘기존 팬뿐 아니라 젊은 층에서 호응해주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게 됐다는 점’을 꼽는다. 얼마 전 화제 속에 끝난 프로그램 ‘싱어게인’이 발굴한 스타 정홍일은 권인하의 ‘나의 꿈을 찾아서’를 인생곡으로 꼽았다. 1992년 앨범의 동명 타이틀곡이기도 한 이 노래의 가사는 지금은 힘들더라도 언젠가 찾아올 희망을 위해 꿈을 찾아 나아간다는 내용이다. 이 가사가 정홍일이 보여준 삶의 궤적과도 일치하기에, 더욱 살갑게 다가왔을 것이다.
“‘다행이다. 내가 저런 친구들에게 도움이 되는 선배였다니’라는 생각이 들었죠. 이미 너무 잘하는 친구이기 때문에 잘됐으면 좋겠어요. 함께 재미있는 그림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고요.”
자신만의 개성이 담긴 노래가 필요한 시대
권인하는 ‘싱어게인’ 같은 오디션 프로의 매력은 참가자들의 순수한 열망과 간절함에 있다고 생각한다. ‘진짜 간절함’은 못 이긴다는 걸 느꼈다는 것이다. 따라서 노래 한 곡을 부를 때 진짜 진심을 담아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요즘 후배들은 보컬로서의 기술적인 측면은 전체적으로 상향 평준화됐습니다. 그러나 소리를 내는 방식이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음색이나 아티스트의 개성 자체가 차별화되지는 않는다고 보여요. 기술적으로는 다들 너무 잘하기 때문에 좀 더 자신만의 색깔과 개성을 음악에 담고자 하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청자들이 가수의 진심에 반응해야 감동은 오는 법. 노래에 대한 진심과 개성에 대한 권인하의 충고가 과거 송창식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밝혔던 내용과도 일치하는 걸 보면, 어떤 경지에 도달한 거장급 가수들이 후배 가수에 대해 갖는 생각에는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는 모양이다.
“항상 즐거운 인생이지만 아직 못 다 이룬 꿈이 있기에 정진 중입니다. 이미 케이팝이 빌보드 차트를 점령하기 시작했잖아요? 우리 노래가 세계적 퀄리티라는 반증이죠. 10년 이내에 우리 세대의 음악도 훌륭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트렌디하게 만들어낼 수 있다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소망이 있습니다.”
권인하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안주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시대에 맞게 진화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원한다. 요즘 시대에 예순두 살은 무언가를 하기에 시간이 넉넉한 나이임을 생각하면,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많이 남은 셈이다.
“나이가 들어도 계속 자신의 기술을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우리 나이의 일반 개원한 의사들은 절대 쉬지 않아요. 여전히 현장 진료를 하고 신기술을 배우죠. 그걸 안 하면 환자들과 교류가 안 되니까요. 그래서 의사 친구들과 한잔할 때면 ‘그런 거 할 수 있는 게 어디냐, 못 하면 도태되는 거다’라고 말해주죠.”
멋있게 늙는 첫 번째 자질은 도전
권인하는 뒷전으로 빠지는 사람은 거기서 멈추는 것이라고 말한다. 의지를 갖고 접목시킬 게 무엇이 있을까 끝없이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멋있게 늙어갈 수 있는 첫 번째 자질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 또한 멈추지 않기 위해 요즘도 1년에 싱글을 두 곡씩 꾸준히 발표하고 있다.
“생각만 하는 게 아니라 시도해야 결과가 나옵니다. 따라서 뭐든 하는 게 필요해요. 그 자체가 우리 나이에는 큰 용기를 주고 자존감을 높이는 일이 아닐까요. ‘아, 할 수 있구나, 되네’ 하는 경험을 가지면 미래에 도전할 수 있게 되니까요.”
그는 자신이 한 말의 증인이기도 하다. ‘할 수 있구나, 되네’를 실현시켜 미래를 꿈꾸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가 만들어갈 인생 2막의 열정적 행보와 소통의 미래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진다.
기쁠 때는 노래의 멜로디가 들리고, 슬플 때는 노래의 가사가 들린다는 말이 있다. 음악을 듣는 건 어떤 마음을 느끼는 행위일지도 모른다. 1980~90년대 포크밴드 ‘동물원’의 멤버로 활약했던 가수 김창기는 서정적인 노랫말로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 그가 기타를 세심하게 매만지던 손으로 초크 대신 펜을 들고 음악과 삶에 관한 얘기를 독자에게 들려주고자 한다.
“당신을 처음 보았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태양을 보았고, 달과 별은 당신이 이 공허하고 어두운 세상에 내린 선물이라 여겨졌죠. 우리의 사랑은 이 세상을 가득 채울 것이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지속할 것임을 알았죠.” 첫눈에 반할 때 뇌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이 찰찰 넘치는 노랫말이다. 내게도 이 노랫말과 같은 순간이 있었다.
아내를 처음 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짧은 연애 후 실연 9년 차였던 때, 다시는 사랑이란 없을 줄 알았던 내게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순간이었다. 지진이나 눈사태같이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휩쓸리듯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억압되어 있던 희망과 기쁨이 풍성한 거품처럼 ‘펑’ 터지며 하늘 높이 쏘아 올라간 것 같다고 할까?
앞서 소개한 노래는 1950년대 포크송인데, 한국으로 치면 트로트의 여왕 ‘주현미’ 같은 소울의 여왕 ‘로버타 플랙’이 리메이크해서 1969년에 발표한 그녀의 데뷔곡이다. 녹음할 때 편곡자가 좀 더 빠르고 멋지게 편곡을 하자고 했는데, 플랙은 이렇게 느리고 간결하게 하지 않으면 하지 않겠다고 했다.
당연히 노래는 상업적으로 실패했다. 그런데 1971년 배우이자 감독인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운전을 하고 가다가 우연히 이 노래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이스트우드는 다음 주유소에서 전화를 걸어, 자기가 준비 중인 영화에 이 노래를 꼭 쓰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그 영화가 바로 유명한 스토커 스릴러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다. 그 영화 덕분에 노래는 뒤늦게 대 히트곡이 됐다.
어두운 곳을 환히 비추는 사랑
알다시피 도파민에 의한 사랑의 유효 기간은 3년 정도다. 미칠 것처럼 뜨겁던 시간이 지나고 식어버린 사랑은 사랑이 아닐까? 본능적 사랑이 끝난 것일 뿐이다. 그 고개를 넘으면 진짜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다. 서로를 연인으로만 보는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수긍하며 감싸고 고마워하며 믿어주는 사랑이 비로소 시작된다. 평소엔 파트너였다가 힘들 때는 서로에게 부모처럼 크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는 것이다. 서로를 잘 알기에 서로에게 너그럽고 융통성 있는 역할을 해줄 수 있는 사이.
도파민은 중독성이 있어 갈수록 더 강력한 자극을 원하지만, 인간은 현명해서 파멸로 이끄는 본능으로부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보호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 대표적인 능력이 사랑이다. 자신과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는 현실적 사랑, 보호받을 때와 소중한 누군가를 보호해줄 때 몸에 흐르는 ‘옥시토신’을 추구하는 사랑. 그런 따뜻하고, 일관적이고, 민감하고, 관계 개선을 잘하는 진짜 사랑. 그게 오래가는 사랑이다.
눈에 콩깍지가 씌어서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과도한 결핍이나 부정적인 경험은 경험과 반대되는 쪽을 선택하게 만들고,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했던 사람은 사랑을 잘 몰라서 과도한 기대를 할 수도 있다. 만일 ‘도파민적’ 사랑이 끝나고 상대방을 도저히 ‘옥시토신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면 자신의 잘못된 선택을 인정하고 헤어지거나, 대안이 없을 땐 적응하도록 더 힘겨운 노력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왜곡된 사랑의 이유와 환상을 가지지 않았더라도 사랑을 지켜나가기는 힘들다. 사랑을 지키려면 함께 노력해야 하고, 좀 더 강하고 현명한 쪽이 늘 양보하고 더 노력해야 한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 그럴 수 없는 사람을 도와줘야 하니까. 보통의 관계에서 내가 상대방에게 10을 주면 상대방은 3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은 10을 줬다고 하는데 나는 3도 못 받곤 한다. 나머지 7은 어디로 간 것일까? 그 7은 상대방이 원치 않는 엉뚱한 곳에 던져 실종된 것이다.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잘 파악해야 더 효과적인 사랑을 할 수 있다.
그럼 이런 방법도 있다. 먼저 내가 원하는 사랑을 절반으로 줄여서 기대를 낮추는 건 어떨까? 왜 나만 손해 봐야 하냐고? 그럼 내가 받고 싶은 사랑의 절반만 주고, 5를 주면 1.5를 받는 것을 수긍하자. 그러면 조금 덜 억울하고, 가늘지만 끊어지지 않을 사랑을 유지할 수 있다. 사랑이 없으면 이 세상은 플랙의 노래처럼 ‘공허하고 어두운 곳’이 되니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 사랑이 가장 중요하니까.
The First Time Ever I Saw Your Face - Roberta Flack
원곡은 영국 포크송의 아이콘 ‘이완 매콜’이 작곡했다. 싱어송라이터이자 극작가, 배우, 사회운동가였던 그는 미래 자신의 세 번째 부인이 될 페기 시거를 오디션에서 처음 본 후 이 곡을 작곡했다. 막 활동을 시작한 로버타 플랙은 데뷔 앨범 ‘First Take’를 위해 이 곡을 리메이크했다. 처음에는 상업적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한편 배우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 곡을 자신의 감독 데뷔작 ‘어둠 속에 벨이 울릴 때’에 삽입한다. 이후 이 곡은 1973년 그래미 시상식에서 그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플랙은 R&B 가수로서 성공적인 음악 인생을 이어갔다. 뿐만 아니라 이 곡은 최초의 유인 달 탐사선 아폴로 17호가 지구를 떠난 지 9일째 되는 날 우주 비행사를 깨우는 음악으로 사용됐다. 지구를 넘어 우주에서도 울려 퍼지는 영광을 얻은 것이다.
사회혁신 네트워크 ‘나우’(나를 있게 하는 우리)가 노인맞춤돌봄서비스 대상자인 어르신, 돌봄서비스 제공자인 생활지원사 13인과 ‘위대한 복식클럽’ 팀을 구성해 공동창작한 노래 ‘어린시절 나에게’ 음원을 발표한다.
돌봄사회서비스를 공급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의 지점사업장 ‘늘푸른돌봄센터’와 함께 진행하는 이 곡은 오는 25일 각 음원사이트를 통해 공개된다. ‘위대한 복식클럽’ 프로젝트는 싱어송라이터 이한철 총감독과 구성원 13인이 지난 4월 말부터 약 4개월 간 매주 만나며 진행됐다.
‘노인맞춤돌봄서비스’는 기존의 노인돌봄사업 5종을 하나로 통합·개편해 올 1월부터 시행중인 어르신 중심의 맞춤형 서비스다. 각 지역의 생활지원사와 어르신을 연결해 혼자 힘으로 일상생활을 하기 어렵거나 독거생활을 하는 어르신의 서비스 접근 이용성을 높임으로써 복지 사각지대를 최소화한다.
이번 프로젝트를 함께한 사회적협동조합 도우누리의 ‘늘푸른돌봄센터’는 이 서비스의 수행기관 중 하나로 48인의 생활지원사(수행인력)와 함께 서울시 광진구 내 서비스 대상 어르신들의 종합적 사회안정망 구축을 위해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나우는 ‘이한철×나우’의 9번째 앨범 ‘어린시절 나에게’를 통해 ‘음악으로 풍요로워지는 돌봄의 시간’을 만들고자 한다. ‘위대한 복식클럽’ 구성원 13인은 4개월 간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이한철 총감독과 노래를 만들고, 춤와 미술, 수공예와 같은 다양한 예술 활동을 진행해왔다.
어르신들은 활동을 통해 사회적 교류의 폭을 넓히고 창작의 성취감을 느끼며 ‘즐거운 돌봄의 시간’을 경험하고, 생활지원사는 소정근로시간 내에 돌봄의 다양한 가능성을 모색하며 대상 어르신과의 유대감을 형성할 수 있다. 이런 활동을 통해 서비스의 제공자-대상자 관계를 넘어, 삶을 함께하는 동반관계로서의 돌봄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나우와 늘푸른돌봄센터는 ‘위대한 복식클럽’ 프로젝트가 어르신들의 생활 속 불편을 해결하는 기존의 돌봄 서비스를 넘어, 사회적 교류와 다양한 문화예술 활동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 서비스의 선행사례를 만들었다는 데에 의의를 두고 있다. 이번 기획과 프로젝트의 운영 경험을 ‘노인맞춤돌봄서비스’의 각 수행기관과 나누고 논의함으로써 돌봄의 시간이 더욱 풍성해지고 돌봄 노동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확장될 수 있는 계기가 생기길 기대한다.
돌봄은 흔히 ‘보이지 않는 노동’으로 불린다. 생애주기 동안 주변 사람들과 돌봄을 주고받지만 돌봄이 서비스나 노동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생소하다. ‘위대한 복식클럽’은 돌봄의 위대함과 중요성을 세상에 알리고 사회적 인식이 변화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자 노래 ‘어린시절 나에게’를 창작했다.13인의 어르신과 생활지원사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어린시절 나에게’의 가사는 구성원들의 어린 시절, 청년 시절, 중년 시절의 추억을 여행하고, 노년인 지금을 돌아본다. 생활지원사를 비롯하여 흔히 서비스의 대상자로만 여겨지는 어르신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가사에 담아 직접 목소리로 전한 이번 노래는 듣는 이에게 작지만 강한 울림을 준다.
시니어모델 김칠두가 출연하는 프로듀서 듀오 콧(cott)의 EP ‘rotary’ 타이틀곡 ‘별일’ 뮤직비디오가 13일 공개된다.
런웨이와 화보, 연극 등에 도전한 경험이 있는 김칠두는 이번 뮤직비디오에서 깊이 있는 연기를 선보인다. 김칠두는 스트릿웨어부터 하이엔드패션까지 모두 소화하는 국내 첫 시니어모델이다.
그는 흑과 백의 선명한 대비 속 가상의 공간에서 끈, 빛과 같은 오브제를 통해 한 사람의 감정과 관계에 관한 이미지를 표현할 예정이다.
이번 앨범에는 타이틀곡에 참여한 싱어송라이터 박재정뿐만 아니라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이루리, 요조를 비롯해 신예 보컬 muun, 홍대 인디밴드 화이트유즈드삭스가 참여했다.
이번 뮤직비디오는 13일 오후 6시 각종 온라인 음원사이트와 유튜브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든든한 아내, 듬직한 세 자녀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가수 최성수(60). 고등학생 늦둥이 아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이며, 아내에게는 집안일도 기꺼이 도와주는 평범한 남편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어떤 일을 겪든지 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가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 의미가 있나보다.
‘남남’, ‘동행’, ‘해후’, ‘풀잎사랑’, ‘기쁜 우리 사랑은’ 등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대표적인 미남 가수 최성수. 얼마 전에 그는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하림, 카더가든, 혁오 등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가수들의 노래를 과감히 선곡해 특유의 미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왕에 오르지 못한 것은 고작 5표 차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1983년에 데뷔한 이 베테랑 가수의 감각과 에너지가 지금 세대에게도 여전히 통한다는 의미였다. 감성을 채우면서 60세의 나이에도 변치 않는 젊음과 소통의 아이콘으로 청춘을 노래하고 있는 그다.
“요즘 노래들은 굉장히 세련됐어요. 예전에는 우리 가요를 우습게 생각하고 팝만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팝을 안 듣고 가요를 듣죠. 케이팝이 그만큼 세계인의 공통된 노래가 됐고 우리 것이 세계 것이 될 정도로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죠.”
최신 트렌드에도 자연스러운 최성수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는 얼마 전 디지털 싱글 ‘린도마니’를 발표한 데뷔 37년 차의 여전한 현역이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말하자면 최근의 트렌드에 더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바도 있다.
열등의식이 나를 키웠다
“제 첫 번째 직업은 가수죠. 사업가, 교수 등 여러 가지 일도 할 수 있지만 업(業)으로서는 끝까지 뮤지션이에요. 노래 부를 때 가장 행복하고 감사해요. 힘들 때도 노래만 부르면 시간이 지나갔거든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성수는 자신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다. 그런 그에게 가수로서의 깊이를 더해준 터닝 포인트가 1990년대 중반에 있었다. 서른다섯 살에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버클리 음대였다.
“서른다섯에 미국에 가서 프로페셔널 뮤직 전공으로 마흔에 학사를 받았죠. 그리고 돌아왔다가 다시 UCLA에 들어가 뮤직비즈니스 마스터를 하려고 했지만 익스텐션을 받는 걸로 정리했어요. 미국은 뮤직비즈니스를 노동법에 기초해 배우도록 되어 있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했고, 중앙대학교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죠.”
최성수는 서른다섯 살 이후 계속 공부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그는 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제 삶의 터닝 포인트는 열등의식이에요. 못살아서 잘살려고 했고, 잘살기 위해 노래를 했고…. 계속 노래를 하다가 보니 어느 순간 상처를 받았고 공부해야겠다는 터닝 포인트가 생겼죠. 노래를 하고 히트를 해도 공부에 대한 미련이 끊임없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교수법도 깊이 알아야겠더라고요.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열등의식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줬어요.”
때때로 열등의식은 자신을 바라보는 토대가 된다. 과거보다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최성수는 그 표본이었다.
노래 안에 시를 담은 가수
그는 가수로서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한다. 특히 노래를 잘하려면 많은 책을 읽고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노래에도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대의 최성수와 60대의 최성수가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때는 히트하는 게 꿈인 가수였죠. 지금은 다르죠. 요즘은 노래를 부르면서 두렵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좋아해줄까?’ 하면서 저 혼자의 노래라기보다는 노래를 듣는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의 정규 10집 앨범은 2007년, 그리고 11집은 2017년에야 나왔으니 무려 10년 만에 나온 셈이다. 노래 발표 주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은 노래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보다 숙고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1번째 정규 앨범 ‘시가풍류방’(詩歌風流房)의 콘셉트는 시의 멋과 풍류다. 타이틀곡 제목은 김현 시인의 시 ‘고맙다 사랑, 그립다 그대’에서 따왔다. 젊은 남녀에게 진실한 사랑과 일상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외 도종환 시인의 작품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안도현 시인의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가 가요로 거듭 태어났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쓰며 다양한 곡을 만들어 왔다.
2019년 싱글 ‘린도마니’가 나오는 데도 2년여가 걸렸다.
‘최성수 독창회’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인천 청라 엘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도 콘서트보다는 약간 클래식한 분위기로 그냥 목소리 하나랑 피아노, 성악가들이 함께한다.
“3월에 열리는 제 콘서트 이름을 ‘독창’이라고 지은 건 제 오랜 꿈이에요. 교회 성가대를 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꿈이 남아 있었던거죠. 사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불러봤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콘서트가 아니라 독창회라 이름 붙였죠.”
최성수의 미려한 목소리와 바리톤 성악곡에 있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결합. 상상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노래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최성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터닝 포인트로서의 영역이 미래에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담배는 아예 안 하고, 술을 먹으면 다음 날 노래가 잘 안 되는 걸 몇 차례 느껴 아예 술을 끊었단다.
그는 노래를 위해 술과 담배 등을 멀리하는 절제된 생활을 해왔기에 열심히 사는 게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아티스트 요건도 슈베르트의 삶처럼 절박하고 절실한 사람이다.
하루 통화의 절반은 아내와
1990년대 중반에 떠난 미국은 최성수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겼다. 한참 힘들게 지내던 시절, 지금의 아내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돈이 없어서 햄버거를 반으로 나눠 먹고 딸에게 1달러짜리 멜론도 못 사주고 했지만…. IMF 때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될 때 저를 버티게 해준 건 아내와 하나님이었어요.”
애처가로 소문이 난 그는 요즘도 하루 통화의 절반을 아내와 한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된 화제는 아이들이라고 대답한다.
최성수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그와 재결합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둔 상태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서른다섯 살, 딸은 서른한 살이 됐다. 현재 아내와의 사이에는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제가 자식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아빠이긴 해요. 엄마를 무서워하거든.(웃음) 아내는 악역을 자처한 거고, 저는 아이들 편에 서기로 한 거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막내아들 대학만 보내면 되겠죠.(웃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 삶에 대해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최성수는 자신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요. 제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고.(웃음) 그러니 하루하루 소소하게 행복해하고 감사해야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얼마 전 있었던, 가수 인순이 씨와 아내가 법정까지 갔던 갈등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났던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끝이든 나쁜 끝이든 끝은 반드시 있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사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다.
“억울하죠. 하지만 지나가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도 감내해야 할 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은 매번 순간순간, 어떤 때는 행복하지만 어떤 때는 힘들다.
“그런 매순간 자기 판단의 기준에 의해서 이겨내는 힘의 원천을 따져보면, 희망과 가족 덕이죠. 무조건 버텨야 해요.(웃음)”
그는 힘들 때마다 종종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단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걸 못할까’ 하는 마음이 훅 들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할 수 있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편협한 생각 버려야 현재와 어울릴 수 있어
다소 가벼운 얘기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최성수에게 지금까지 나온 앨범들 중 가장 아끼는 게 있냐고 물어봤다.
“2집이 저를 만든 앨범이었죠. 1집의 ‘남남’이 저를 바꾼 터닝 포인트였다면 2집의 히트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사라지게 해줬어요. 수록곡이 다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앨범이죠. 1집이 씨앗이었다면 2집은 주렁주렁 열린 열매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가수가 안 되었다면 기술을 배워 공장에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기타를 부숴버릴 정도로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게 바란 건 오로지 기술을 익히는 거였어요. 오죽하면 제가 직업훈련소에 가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을까요. 그런데 결국 그만뒀어요. 그 무렵 사람들이 사우디엘 많이 갔는데, 기술을 계속 배웠다면 사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됐겠죠?”
그가 자동차 정비공이 안 된 덕분에 한국 가요계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그는 자신이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으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가 공부를 계속하고 책을 보고 시를 쓰고 여행을 가는 건 모두 깊이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계속 현 시대와 어울려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니어가 젊은 세대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남자들이 자격지심에 가끔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편협한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봐요. 꼰대가 되는 상황은 전적으로 자격지심 발로와 연관된 경우가 많거든요. 서로 존중하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에서, 자기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려고 동물의 왕국에서 영역 표시하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어떤 때는 제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가족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성수는 태도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또한 같다.
“요즘 아이들은 지식이 너무 많아서 지식을 가르치기엔 제가 부족할 정도죠.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걸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음악하는 친구들에게는 인사 잘하고 시간 약속 잘 지키면 인생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말해요. 첫인상에서 뭘 알겠어요? 인사 잘하고 시간 잘 맞추는 게 기본이죠. 그리고 리더라는 위치에 서려면 팔로워가 많아야 하는데 팔로워에게서 존경의 눈빛이 있어야 해요. 그 눈빛의 가치가 바로 성공의 척도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 공감과 진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새해 들어 가장 중시하는 건 뭘까?
“집안일 잘하자.(웃음) 어제도 일 끝나고 와서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감사히 사니까 편해요.”
가족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관심은 온통 가족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나이를 잘 먹어가는 비결처럼 보였다.
“인생에서 진짜 잘한 일이요? 하나님을 만나고, 마누라를 만나고,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한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