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문현(70)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36년간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근무하고 2013년 정년퇴직했다. 같은 해 콘래드서울호텔에 채용돼 총 45년을 호텔에서 근무하며 인생을 배웠다. 하루 9시간씩 서 있고, 1000번 이상 허리를 숙인다. 그는 오늘도 문 뒤에서, 혹은 앞에서 묵묵히 고객을 맞이하고 배웅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평생직장’, ‘평생직업’이라는 말이 드물어진 시대. 권문현 콘래드서울호텔 지배인은 여전히 한 분야에서 현역으로 활동 중이다. “건설 현장에서 같이 일하던 친구가 어느 날 다른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가지 않겠냐고 물었다. 공사 현장에서의 일이 너무 힘들고 벅차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게 응했다. 호텔에서 면접을 본다는 말을 듣고 긴장됐다. 영어를 쓰는 곳이라는데 영어라면 한마디도 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면접장에 들어가 뭐든 맡겨주면 열심히 하겠다고만 대답했다. 그렇게 조선호텔 임시직 페이지 보이가 됐다. 어쩌다 호텔에 들어와 40년 넘게 일했고 아직도 출근하고 있다.”
살아 있는 호텔의 역사
페이지 보이는 전자결제 시스템이 없던 시절, 각종 서류에 승인을 받은 후 해당 부서에 전달하는 역할을 하던 사람이다. “그 시절에 만보기가 있었다면 하루에 2만~3만 보는 족히 찍혔을 거다. 입사 초기에는 온종일 호텔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고 나면 퇴근 후 다리와 발바닥이 너무 아파 매일 뜨거운 물에 발 마사지를 했다.” 당시 그가 가진 가장 큰 콤플렉스는 영어였다. “가끔 영어로 표기된 서류를 잘못 전달해 혼이 나기도 했다. 당시 조선호텔 고객은 외국인의 비중이 매우 높았는데, 나한테 말이라도 걸까 두려워 목례만 하고 지나가기 바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월급을 받은 뒤 바로 종로1가 영어학원에 등록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ABC부터 따라 그리기 시작했고, 2~3년 동안은 퇴근하면 바로 영어학원으로 갔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그랬을까, 정직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였을까. “외국인과 마주 보기만 해도 울렁증을 겪던 시기를 지나 서서히 외국인 고객들의 말이 조금씩이나마 들렸다. 정말 간절했다. 다른 회사는 갈 곳도 없고, 무조건 여기에서 자리를 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영어 공부도 못 할 게 없었다. 물론 배우는 속도는 더디고 발음도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피나는 노력 끝에 결국 벨보이로 정식 발령이 났다. 발령 후 대기할 때의 자세나 표정 등을 하나하나 지적받았다. “호텔 직원은 특히 자세가 중요한데, 고객이 눈앞에 없을 때는 나도 모르게 자세가 흐트러지고 무표정한 얼굴로 바뀌기 일쑤여서 초반에는 많이 혼났다. 웃는 얼굴이 아니라며 고객에게 한 소리 듣고는 거울 앞에서 매일 몇 시간씩 표정과 자세를 연습한 적도 있다.”
의전이 전부였던 그때는 도어맨과 벨맨을 대상으로 차 번호 암기 시험을 봤다. “지금도 자동차 번호판을 보면 습관적으로 숫자를 중얼거린다. 특히 대통령, 기업 CEO, 장관 등 특별히 기억해야 하는 차의 번호판 네 자리 숫자는 최대한 많이 외워야 했다. 가장 많이 외웠을 때는 350개 정도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외교관 차가 들어오면 차에 달린 국기만 보고도 어느 나라 외교관인지 알아야 했기 때문에 국기도 외웠다. 자동차 번호는 거의 잊어버렸지만 그때 외운 국기들은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다. 가끔 손주들이 보는 책이나 TV에 다른 나라 국기가 나올 때면 자신 있게 맞힐 수 있다.”
권 지배인은 국가적인 행사가 많이 열리는 특급 호텔에서 일하다 보니 박정희 대통령을 시작으로 전·현직 모든 대통령을 봤다. “군인 출신인 전두환 대통령과 노태우 대통령은 겉모습에서부터 힘이 들어가 딱딱한 분위기였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은 따뜻한 인사를 건네주시곤 했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은 언젠가 흰 봉투 속 손 글씨가 적힌 편지를 건네기도 했다. ‘관광 산업을 위해서 노력하는 호텔 직원들 수고가 많으십니다’라고 적혀 있었는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격려였다.”
그는 매일 아침 조간신문 세 개를 정독하고 장·차관, 대기업 임원 인사는 꼭 챙겨 메모한다. “인물 정보 파악은 기본 중의 기본이다. 오래전 장관을 역임했던 분이 행사 참석차 호텔을 방문했는데, ‘○○○ 장관님 잘 지내셨지요?’라고 인사했더니 어떻게 이름까지 기억하냐며 깜짝 놀라신 적이 있다. 한 끗 다른 정성의 차이다. 기억력이 뛰어난 편이 아니라서 틈날 때마다 메모해둔 걸 보고 또 본다.”
진상 고객은 애정 고객
신입 시절 선배들에게 배운 노하우와 권 지배인의 경험이 매일 더해져 고객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한다. “고객의 택시가 도착했을 때 문을 벌컥 열면 안 된다. 요즘은 카드 결제 후 영수증을 받기까지 몇 초 걸리기 때문에 잠시 기다렸다 고객이 영수증을 받을 때 여는 것이 좋다. 고객이 타고 온 택시 번호를 기억해두면 물건 잃어버렸을 때 빨리 찾을 수 있다. 외국인 관광객의 경우, 택시를 타고 출발할 때 내비게이션에 목적지 설정이 잘됐는지 체크해야 한다. 서비스의 질 차이는 디테일이다.”
권 지배인은 항상 고객들이 ‘내 스승이 될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워낙 고객들의 성향이 다양하니 응대에 신경 쓰다 보면 하루에 한두 가지라도 경험과 노하우가 쌓인다.” 더불어 그는 진상 고객을 애정 고객이라 부른다. 무언가를 지적하고 불편함을 표시한다는 것은 그만큼 호텔이 발전할 기회, 애정을 주는 사람이라서다. 그 불만을 귀 기울여 듣고 해결해준다면 다시 방문할 마음이 있다는 것이라 본다. “나는 불만이 가득 쌓인 고객의 말에 우선 귀를 기울인다. 10분이고 20분이고 고객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다. 내 이름의 ‘문’이 들을 문(聞)이 아닐까 생각할 정도다.” 하지만 노련한 그에게도 어려운 손님은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쉽게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는 손님을 만나면 명함을 한 장 달라고 한다. 경청을 위한 관계 형성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관계라는 것은 투명해질 때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명함을 받고 고객과 잠시라도 눈을 마주치고 대화를 나누는 순간, 관계가 한 겹 더 탄탄해지고 단단해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또 고객이 무슨 일을 하는 분인지 알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보이는 경우가 많다.”
훌륭한 선배가 되다
우리나라는 1970년대까지만 해도 호텔 종사자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다. “처음엔 나를 깔보는 사람이 주변에 더러 있었다. 결혼하겠다고 처가에 인사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서비스업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특히 고객들은 호텔 직원을 ‘어이’라고 부르고 다짜고짜 반말을 하기도 했다. 손님이 왕이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1980~90년대로 넘어오며 호텔리어라는 말이 쓰이면서 호텔의 황금기가 열렸다. 자존심 상하는 순간도 많았지만 이제는 직원을 대하는 고객들의 태도가 달라졌고, 친척들이 나를 보는 시선도 달라졌으며, 입사 경쟁률도 높아졌다.”
점차 호텔이 시스템을 갖춰나가고 사내 교육이 늘면서 그는 서비스업 종사자로서, 선배로서의 사명감이 커졌다. “내 일에 내가 가치를 부여하고, 내가 한 번 더 웃고, 내가 더 친절해지려고 노력했다. 자주 오는 고객들의 자동차 번호와 고객의 성함, 나이, 직장, 특이사항 등을 정리해서 공유하고 수시로 업데이트했다. 벨맨과 도어맨의 자세나 인사하는 법, 불만을 제기하는 고객에게 대응하는 법 등도 차근차근 후배들에게 가르쳤다. 가끔은 이런 것까지 배워야 하나 싶은 표정을 짓는 후배도 있고, 자동차 문 닫는 힘과 소리 등의 세세한 것을 새롭게 배우면서 뭔가 깨닫는 듯한 후배도 있었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이것저것 알려주다 보니 어쩌다 아들보다 어린 직원들의 멘토가 돼 있었다.”
교육하다 보면 권 지배인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후배들에게 많이 받는다. “그만두고 싶은 위기마다 가족들이 반대해서 버티다 보니 지금까지 왔다고 이야기했는데, 그 누구보다 자신의 선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내 이야기에 얼마나 공감했을지 모르겠다. 나 역시 뒤돌아보면 그만둘 위기가 여러 번 있었지만 그게 또 죽을 만큼 호텔 일이 싫었던 건 아니었나 보다. 하기 싫거나 지겹다는 생각도 할 틈 없이 달려왔으니, 알게 모르게 이 일이 내 천직이라고 여겼던 게 아닐까. 내 이름에는 문(文)자가 들어 있다. 항상 문(門) 앞을 지키며 고객들에게 묻고(問) 고객들의 말을 듣는(聞) 사람으로 살고 있으니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지 싶다.”
45년의 비결은 배려와 인내심
권 지배인이 업계 장인이 될 수 있었던 비결은 일단 직원들을 향한 배려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젊은 후배들과의 소통 능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는 끊임없이 노력한다. “아들딸보다 어린 동료들과 같이 일하며 조심하는 것이 몇 가지 있다.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희롱이 난무하는 세상을 지나왔고, 나이를 훈장처럼 달고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하는 이도 많았다. 하지만 세상이 이제 변했다. 나 같은 세대도 그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는 제일 좋은 소통법으로 ‘말수 줄이는 것’을 꼽았다. “필요한 말만 하면 된다. 생각 없이 흘러넘치는 말이 없게 해야 한다. 회식 같은 술자리에서는 특별히 더 조심해야 한다. 나는 회식 때 보통 1차만 참석하고 집으로 간다. 요즘 말로 ‘낄끼빠빠’(‘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져라’를 줄여 이르는 말)라고 하던가. 나이는 벼슬이 아니다.”
또 하나는 인내심이다. “언젠가부터 인내심이나 버틴다는 말이 구시대의 상징처럼 돼버린 듯하다. 40년 넘게 호텔에서 실습생이나 파트타임 직원들을 보면 반나절 근무하다 밥을 먹고 연락이 두절된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학생일 때 호텔로 실습 나와 성실하게 일하고 지금은 동료가 된 직원도 분명 있다.” 호텔은 이직률이 높은 편이다. 외부에서 볼 때는 화려함에 이끌리지만 업무 강도가 높고 버티기가 쉽지 않아 실망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신입 사원들의 임금도 높은 편이 아니다. “힘들겠지만 직업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호텔에 취업할 것이라면 한 직장에서 몇 년 일해보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좋은 평판을 쌓고 선배들의 노하우를 최대한 배워 내 것으로 만들어 발전시켜나가면 어떨까. 물론 호텔에서 오래 일한 사람으로서 이 업계가 더 일하기 좋은 직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다. 후배들이 자부심과 소속감을 느끼고 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선배로서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미안하고 안타깝다. 그래서 노력한다. 후배들에게는 또 다른 잔소리로 비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성실하고 우직하게 일했던 45년. 그의 직장 생활에는 자부심이 묻어났고, 상대방을 배려하고 존중하는 삶의 태도는 따뜻했다.
[TIP] 시시콜콜 호텔 이야기
●욕실에서 쓰는 샴푸, 린스, 보디워시 따위의 어메니티는 가져가도 된다. 슬리퍼와 머리끈 같은 일회용품도 무료다. 호텔마다 어메니티의 디자인과 브랜드가 제각각이라 비교하는 재미도 있을 것이다.
●호텔에 간 날이 생일이라면 체크인할 때 적는 것이 좋다. 서비스가 좋은 호텔에서는 소정의 선물을 제공하기도 한다.
●객실 뷰 이외에 에어컨이 약하다거나 담배 냄새가 나는 등 객관적인 어떤 이유로 객실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고객은 방을 바꿀 수 있다.
●주변 맛집이나 교통 정보, 예약 등이 필요하면 컨시어지 서비스를 이용해보자.
●짐이 많을 때 배기지 다운 서비스를 요청하면 짐을 로비까지 옮겨준다.
최근 인문학이 대세다. ◯◯인문학이라고 이름 붙이기도 따라서 유행이다. 그런데 성만 한 인문학이 또 있을까?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고, 사랑을 나누고, 종족을 남기고, 늙고 죽어가는 이야기는 다 성에 있다. 성을 한자로는 ‘性’이라 표기하는데 어찌 이렇게 적확한 표현을 찾았는지 놀랍기까지 하다. 성은 그 사람의 본성을 뜻한다. ‘배정원의 성 인문학’은 역사, 예술, 사회 등 사람이 만들어가는 문화 속에서 성을 재미있게 풀어볼 것이다.
이번 그림은 중국의 춘화다. 그림의 배경은 사람들의 복식으로 미루어 명나라이고, 부귀를 누리는 고관대작의 집에서도 내실 침소다. 그림에는 총 다섯 사람이 등장하는데, 그중 복식이 가장 화려한 두 사람의 남녀가 섹스 당사자이고, 나머지 세 사람은 그들의 방사를 돕는 도우미다. 도우미 중 두 사람도 옷을 벗고 있으나 오늘 운우지락을 누릴 주인공은 침대에 엎드린 젊은 여인의 등에 기댄 귀부인이다.
노란 비단옷을 입은 당당한 풍채의 남자는 늘어뜨린 구레나룻과 수염이 길고 새카만 데다 젊은 얼굴은 아니나 건강이 아주 좋아 보인다. 마치 부인에게 인사라도 하러 온 듯, 방사를 나누는 중인 이 남자는 방 안에 여인들이 여럿 있어도 전혀 서두르거나 쑥스러워하지 않고 아주 느긋해 보인다. 곁에 시중드는 두 여자의 어깨에 턱하니 팔을 걸치고, 심지어 자신의 음경마저 맡긴 채 부인을 바라보는 눈길이 다정하기까지 하다.
부부간의 섹스는 참으로 은밀한 행위인데, 이들은 어쩌자고 세 여인을 불러 자신의 성행위를 거들게 하는 것일까? 중국 춘화를 보면 섹스를 하는 두 사람을 곁에서 자연스레 지켜보거나 도와주는 여인들이 자주 등장한다. 아마도 고대 중국에서는 남녀 간의 성이 자연스런 일이었고, 또 아랫사람은 부끄러움을 느껴야 할 대상이 아닌 하찮은 이들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림을 찬찬히 볼라치면, 세 사람의 젊은 여인 중 옷을 벗고 팔을 베개에 괸 채 침대에 엎드린 여자는 하녀가 아닌 게 분명하다. 그녀는 남자를 부축(?)하고 서 있는 두 여인과 달리 머리 장식이 화려할 뿐 아니라, 발은 조그맣고 앙증맞은 전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곱게 화장한 얼굴의 표정도(화가가 의도했는지는 모르지만) 두 여자와는 달리 긴장돼 보인다. 전족은 남당 시대의 2대 통치자인 ‘이욱’이 유행시켰다고 하지만 명청 시대에 전족 유행이 꽃을 피웠고, 산다 하는 집안의 딸들은 모두 전족을 해서 ‘귀한 집안 처자’임을 과시해야 했다. 따라서 그 젊은 여인은 아마도 남자의 첩일 것이다. 그녀는 침대 위에 올라서 본부인과 남편의 정사를 돕기도 하지만, 때로는 자신도 그들의 섹스에 동참하는 역할을 맡고 있으리라. 이날은 본부인(1호 부인)이 남편과 운우지정을 나누는 중인가 싶다.
네덜란드 직업외교관 R. H. 반 홀릭이라는 동양학 학자가 저술한 ‘중국의 성풍속사’를 보면 중국의 권력과 부귀를 가진 남편들은 일부다처제에서도 막강한 힘을 과시했다.
중국은 가문의 대를 잇는 의무가 중요해 아들을 많이 낳아야 했으며, 따라서 여자의 성적 의무도 오로지 후사를 잇는 것으로 남자들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어려서는 아버지를 따르고, 혼인해서는 남편을 따르고, 남편이 죽으면 아들을 따르는 삼종지의(三從之義)의 전통은 여자들을 억눌렀지만 나름 집안의 위계가 엄격했다. 또 여러 명의 아내들은 본부인의 수하에 있었으며, 심지어 시어머니가 죽으면 시아버지의 다른 부인들도 아들 본부인의 뜻을 받들어야 했다니 본부인의 위세는 자못 등등했다.
본부인은 남편이 집에 없을 땐 모든 권한을 대신했고, 평소에는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했다.
물론 남편은 정처라도 내쫓을 권한이 있었지만, 대개의 경우는 아내의 집안도 만만치 않았으며 그 권한을 인정해주는 것이 집안의 평화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를 어찌 평화롭게 다스리겠는가?
고대 중국의 성에서 중요한 것은 아들을 수태하는 것이 제1이요, 여자의 음기로 남자의 양기를 보충하는 것이 제2였는데, 사실 그 충만하게 채워진 남편의 ‘양기’를 누리는 것 또한 우선은 본부인이었다. 양기를 높이려면 다른 여자들과 자주 섹스를 하되 사정을 하지 않고 여자의 음으로 자신의 양을 보충해야 한다. 쉽게 말해 첩들에게서 ‘음기’를 보충한 후 힘을 축적해 그 힘으로 본처와 관계를 하여 우수한 아들을 낳는 것이 가장 우선이었고, 그 다음이 자신의 정력 보전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편은 모든 처첩을 성적으로 만족시켜야 했으니 아내가 많을수록 그 의무는 무거웠으리라. ‘예기’에서도 아내 중 한 사람이라도 소홀히 하는 것은 아주 중대한 ‘무례’라고 했다. 여러 명의 첩과 사정을 하지 않고 조절하며 섹스를 하고, 본처에게 그 양기를 안겨야 했으니 그 또한 때론 ‘죽을 맛’ 아니었을까?
또 남편은 아름다움이나 나이로 처첩과의 교접 횟수나 차례를 정해서는 안 되었다.
‘첩이 비록 늙더라도 나이가 쉰이 되지 않았으면 남편은 닷새에 한 번은 그녀와 교접해야 한다’에서부터 ‘부부의 의무는 70이 넘어야 벗어날 수 있다’고 하니 무조건 처첩을 많이 거느리는 것도 능사는 아니었을 것 같다.
어쨌든 남편은 첩과 밤새도록 있어도 안 되고 온 밤을 함께 보낼 수 있는 권한은 오로지 정부인에게만 있었다고 하니, 평생을 남편에게 종속되고 통제받아야 했던 억울함이 본부인에게는 좀 가벼웠을까?
다시 그림으로 돌아오자. 지금 젊은 첩의 등에 기대어 남편의 삽입을 받아들이고 있는 부인은 정말 당당해 보이지 않나? 그녀의 머리 장식은 참으로 화려하고, 표정은 느긋하게 남편의 성기를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왼손으로는 술잔을 올린 작은 쟁반까지 들고 있는데, 그 술잔은 남편을 위한 것이라기보다 그녀를 위한 것으로 보일 지경이다.
등을 받친 첩의 자세나 표정으로 봐서 정부인의 위세는 등등하기만 하고, 침대 옆에 입위의 체위로 선 채 하녀의 손에 맡겨진 남편의 음경은 그래서인지 체격에 비해 왜소해 보인다.
어쨌거나 오늘은 그녀의 날, 그동안 충전한 남편의 ‘양기’가 그녀를 흐뭇하게 하려는지!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정달호 前 대사의 외교관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나도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해외여행이 통제됐을 때는 여권을 받아 해외에 나간다는 것 자체가 매우 어려웠으므로 자유로이 출국하는 외교관이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다양한 나라를 상대하면서 조국을 위해 일한다는 것은 외교관의 특권이자 긍지다. 외교관은 빛나는 일도 하지만 궂은일도 많이 한다.
우리나라는 지정학적으로 강대국들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기에 그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외교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나는 대학에서 정치외교 분야를 전공한 것이 직업의 특성과 맞았고, 여기저기 해외를 다니며 다방면의 견문을 넓힐 수 있다는 점에 매료되어 외교관이 되었다.
영어를 비롯한 외국어는 외교관의 기본 무기이기도 하다. 해외 근무지로는 잘할 수 있는 언어 사용국을 선호하지만 항상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노르웨이, 이라크로 시작해 세 번째 임지는 미국 뉴욕이었다. 뉴욕에서 ‘뉴욕타임스’를 매일 읽고 현지 방송을 듣고 현지인들과 영어로 대화하면서 영어에는 자신이 붙었다.
그다음에는 오래 마음속에 그리던 파리로 발령을 받았는데 프랑스어를 꾸준히 공부한 덕도 있지만 시운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서양 외교관들은 일생의 꿈으로 여길 만큼 파리 근무를 희망한다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미국에 비해 출세 길이 멀다고 프랑스를 선호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는 대유럽 외교의 중요성에 비해 아쉬운 일이다.
첫 임지인 노르웨이에서 어느 날 한국 여성의 울먹이는 소리가 전화선을 타고 흘러왔다. 사정을 들어보니 멋모르고 국제결혼을 해서 왔는데 몇 달 되지 않아 남편에게 구타와 구박을 당해 공포에 떨고 있으니 무조건 노르웨이를 떠나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다. 들어보니 사정이 딱하기 이를 데 없었다. 법적인 조치를 취할 경황도 없이 오슬로 밖 멀리 은신처에서 피해자를 데려와 하루이틀 보호하다가 귀국하도록 도와준 일이 있다. 쉽고 편한 일은 아니었다.
이라크에서는 당시 이란과 전쟁 중인 터라 핵심 전투 지역인 바스라의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우리 근로자들의 보호가 초미의 과제였다. 이라크 쪽 전세가 불리해져 근로자들이 마지막 철수할 때까지 이들과 함께 지냈는데, 상대측의 포탄이 터지는 굉음으로 방 벽에 걸린 그림이 떨어지고 물건들이 쓰러지는 등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해외 어디서 근무할 때가 제일 좋았냐고 누가 물으면 서슴없이 파리라고 대답한다. 프랑스는 참으로 복 받은 나라다. 3면이 바다(대서양, 지중해, 북해)이면서 평야가 많고 동쪽에 알프스라는 웅장한 산이 있어 지리적 이점이 뛰어나다. 그런 만큼 먹을거리도 풍부하며, 이를 바탕으로 문화와 예술을 발전시켜왔다. 파리 바깥 프랑스 어디를 가더라도 풍요로움을 느낄 수 있다. 유명한 포도주 생산지를 방문해 양조 공정에 대한 설명도 듣고 시음도 해본 추억이 생생하다.
프랑스는 또한 파업이 빈번한 나라다. 한번은 한말숙 소설가가 이끄는 우리 시인·작가 그룹이 파리에 와서 프랑스 문인들과 문학 행사를 벌이는데, 쌀쌀한 겨울인 그날 대중교통이 파업에 들어간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몇 킬로미터인지도 모를 그 먼 행사장까지 마라톤을 해서 간 적이 있다. 도로는 차와 사람들로 뒤범벅돼 있었다. 선진국의 역설을 경험한 셈이다. 아무튼 추운 겨울날 땀 흘리며 파리의 밤거리를 뛰었던 것이 하나의 추억이자 보람으로 남아 있다.
그다음 독일어권인 오스트리아 근무를 마치고 파나마 대사로 나가면서 생각지도 않던 스페인어를 배워 그 문화권과 친분을 맺을 수 있었던 것 또한 적지 않은 성과다. 파나마에 부임한 지 겨우 두 달 만에 우리 예술인 방문단이 왔는데 국립오페라극장 로비에서 이들을 위한 리셉션이 열렸다. 그때 양국 인사들 앞에서 대사가 연설을 했는데 일천하지만 스페인어로 했다. 물론 원고를 보면서 했지만 파나마 외무차관으로부터 연설이 아주 좋았다는 평가를 들었다.
파나마에서 독립 100주년 기념으로 대규모 갈라 디너가 열렸는데 대사들은 장관급 텐트에, 국가원수들은 별도의 텐트에서 디너를 하기로 돼 있었다. 원수급 텐트에 낯익은 모습의 신사가 앉아 있기에 다가가서 보니 영화배우 숀 코너리였다. 그는 파나마 대통령의 친구 자격으로 왔다는데 디너 자리에서 원수급 대우를 받는 것을 모두 자연스럽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만큼 인간적 매력과 품격이 몸에 밴 노배우가 존경스러웠다. 이집트 대사 시절에는 한 유력 가문의 혼사에서 여성들에게 둘러싸인 오마 샤리프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는데, 많이 쇠락한 모습임에도 명배우의 자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외교관을 하면서 잊을 수 없는 일 하나는 우리 원양어선이 소말리아 해적에게 최초로 나포되었을 때 일이다. 선원들의 석방을 위해 인접국 케냐에 두 번이나 가서 현지 교섭을 지휘한 끝에 서너 달 만에 이들의 석방을 이루어냈다. 석방하는 순간까지 해적들이 우리를 너무 힘들게 해서 참 고생을 많이 한 기억이 난다. 몸바사 해안의 비밀스런 장소에서 몰골이 초췌한 우리 선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포옹하며 맞이할 때 그들이 눈물을 글썽이면서 고마워하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하늘은 높고 말은 살찐다'는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 가을은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시기로 1년 중 어느 때보다 먹거리가 풍부해 맛집 여행을 떠나기 안성맞춤인 계절이다. 하지만 좀처럼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이번 가을도 모두의 발길을 꽁꽁 묶어놓아 ‘방콕’ 여행을 하게 만들고 있다. 풍요로운 가을을 이대로 보내기 아쉽다면, 넷플릭스로 식도락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이번 주 브라보 안방극장에서는 입맛을 돋우고 군침이 돌게 만드는 요리 영화 세 편을 소개한다. 소개하는 작품은 모두 넷플릭스에서 만나볼 수 있다.
1. 리틀 포레스트 (Little Forest, 2018)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하며 공무원을 준비하던 '혜원'(김태리)은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모든 것을 내려놓고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온다. 매일 편의점 재고로 끼니를 때우던 혜원은 오랜만에 친구 '재하'(류준열), '은숙'(진기주)과 함께 밥 한 끼를 만들어 먹으며 행복을 느끼고, 다쳤던 마음을 치유해나간다. 소박하지만 따뜻하게 사계절을 보낸 혜원은 어느 날 자신이 고향을 찾은 이유를 깨닫고, 다시 봄을 맞이하기 위한 첫 발을 내디딘다.
영화 '리틀 포레스트'는 각박하고 치열한 도시 생활에 지친 주인공이 고향에서 사계절을 보내며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으로, 동명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다. 아카시아꽃 튀김, 배추전, 크림 브륄레, 말린 곶감, 팥 케이크 등 계절별로 등장하는 제철 음식과 고요하고 평화로운 시골 마을의 모습이 자극적이지 않고 편안한 즐거움을 선사한다.
2. 아메리칸 셰프 (Chef, 2014)
어느 날 레스토랑 오너에게 메뉴 결정권을 뺏기고 유명 음식 평론가에게 혹평을 들은 일류 레스토랑 셰프 '칼 캐스퍼'(존 파브로)는 홧김에 SNS로 욕설을 보내버린다. 이 사건으로 하루아침에 인터넷 스타로 떠오른 칼은 결국 레스토랑을 그만두고, 푸드 트럭 장사에 나선다. 쿠바 샌드위치로 도전장을 내민 칼은 길 위에서 셰프의 명예를 되찾기 위한 도전을 시작한다.
영화 ‘아메리칸 셰프’는 일류 셰프 칼 캐스퍼가 푸드 트럭에 도전해 아들과 함께 미국 전역을 일주하는 이야기를 그린다. 영화 속 '칼 캐스퍼'의 실제 모델은 한국계 미국인 셰프 로이 최로, 그의 실제 성공담과 마케팅 노하우, 개발한 음식 등이 작품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멕시코 음식과 한국 음식을 접목한 퓨전 타코 등 남미의 향이 물씬 풍기는 요리와 신나는 라틴 음악이 식욕과 흥을 동시에 돋운다.
3. 줄리 앤 줄리아 (Julie & Julia, 2009)
먹을 때가 제일 행복한 주부 '줄리아 차일드'(메릴 스트립)는 외교관 남편과 함께 프랑스로 떠나 명문 요리학교 '르꼬르동 블루'를 다니며 현지 요리에 도전한다. 이후 전설적인 프렌치 셰프로 거듭난 줄리아는 자신의 비법이 적힌 요리책을 남긴다. 그로부터 50년 뒤,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려는 공무원 '줄리 파웰'(에이미 아담스)은 줄리아의 요리책을 보며 1년간 524개의 요리법에 도전하고, 이를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한다.
영화 '줄리 앤 줄리아'는 시대를 달리하는 두 여인이 요리를 통해 자아를 탐색해나가는 이야기로, 1950년대 프랑스 파리와 2000년대 미국 뉴욕을 번갈아 등장시키며 두 주인공의 서사를 지루하지 않게 풀어낸다.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대표 요리인 뵈프 부르기뇽(부르고뉴산 와인을 넣은 쇠고기 찜)을 비롯해 솔 뫼니에르(버터에 구운 가자미) 등 정통 프랑스 요리들이 미각을 자극한다.
느닷없이 맥주를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좀 싱거운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군요. 술꾼치고 맥주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있겠나 싶어서죠. 애주가 중에서도 위스키나 소주 같은 독주나 와인 등 다른 술은 좋아하면서 딱히 맥주는 즐기지 않는 분들도 있겠지요. 아닌 게 아니라, 술의 청탁을 그리 가리지 않는 저도 한때 맥주를 멀리했는데 해외에서는 와인에 빠져 있을 때 그랬고 국내에서는 맥주가 맛이 없을 때 그랬었죠.
조직문화의 일환으로 회식자리에서 폭탄주(밤 칵테일, 코리안 칵테일)나 소맥(소주 칵테일, 심플, 오로라, 레인보, 선라이즈 등등)을 할 때는 어쩔 수 없이 맥주를 마실 수밖에 없었지만 그건 맥주가 좋아서 마시는 것과는 다른 거죠. 맛나게 잘 만든 칵테일이라면 몰라도 소주 칵테일은 되도록 멀리합니다. 짧은 시간에 분위기를 올리는 장점은 있지만 술맛으로는 이 맛도 저 맛도 아니기 때문이죠.
무더위에 시달리는 여름철이나 운동 또는 일로 땀을 많이 흘린 후, 마실거리로 맥주만큼 당기는 술은 없을 거예요. 전통주인 막걸리도 좋지만 아무 때고 막걸리를 마시자고 할 수는 없죠. 빈대떡 등 부침류나, 도토리묵 같은 무침류, 그도 아니면 김치 몇 조각이라도 앞에 놓여 있어야 막걸리를 마실 기분이 납니다. 매콤하거나 걸쭉한 전통 먹거리와 어울리는 게 시큼털털한 막걸리가 아닐까요? 그렇다고 외래주인 맥주가 걸쭉한 안주나 한식차림에 맞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안주에 어떤 술이 ‘맞다’, ‘안 맞다’를 잘라서 말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선택할 안주가 많다면 술 먼저 정하고 안주를 고르는 것이 애주가들에게는 더 익숙하겠지요.
음식과의 어울림을 따지는 데는 와인이 맥주보다 훨씬 까다롭다고 하겠습니다. 술과 음식의 조화(매칭, matching)를 진지하게 따지는 프랑스인들이 그런 매칭(Vins et Mets)의 전통을 만들어왔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런데 요즘에 와서는 맥주 종류도 많고 브랜드도 많아 어떤 맥주에 어떤 안주가 어울린다는 설명이 더 많이 눈에 띕니다. 미식가나 애주가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거겠지만 고객의 눈을 끌기 위한 판매 전략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그건 제가 아직 진정한 맥주 마니아가 아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술과 안주의 매칭은 많이 마셔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것 아닐까요(술꾼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리오!).
지금, 맥주전쟁이 한창입니다. 대형마트에 가보면 새로운 우리 맥주 브랜드에 온갖 수입 맥주들이 가세해 진열대가 현란할 정도입니다. 눈이 즐거울 소비자들에게 맥주의 매력을 한껏 높이는 동시에 맥주시장의 치열한 경쟁을 볼 수 있게도 해줍니다. 근래 ‘테라(Terra)’라는 국산 브랜드가 나와 엄청난 속도로 점유율을 높이고 있는데 7월 기준으로 출시 3개월 만에 1억 병이 나갔다고 합니다. 몇 년 전에는 클라우드(Kloud)가 나와 한동안 맥주 애호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기도 했지요. 이런 판에 수입 맥주들이 자유롭게 들어오고 있으니 가히 ‘맥주 백가쟁명(百家爭鳴)’의 시대라 하겠습니다.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맥주전쟁도 이따금 정치·외교의 바람을 타게 돼 있죠. 전장(戰場)을 들여다보면, 현해탄의 파고가 이처럼 높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지금의 맥주시장이 일깨워주고 있는 셈이지요. 수입 맥주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지켜왔던 일본 맥주가 전달에 비해 45%나 떨어진 것입니다. 그새 맥주 강국 벨기에가 1위를 차지하고 미국 맥주가 2위를 가져갔다고 합니다. 아사히, 기린, 삿포로 등 일본 맥주 애호가들이 다른 브랜드로 옮겨갔다지만 열혈팬들은 여전히 27%의 점유율을 지켜주고 있다네요. 현해탄의 파고가 다시 낮아지면 옛 팬들이 되돌아올지는 아직 알 수가 없는 상황이죠. 맥주 브랜드의 다양한 입맛에 길들여지면 다시 바꾸기가 어렵지 않을까 싶군요.
벨기에 맥주가 1위를 차지한 것은 라거(lager)와는 다른 에일(ale) 맥주의 인기가 올라가고 있는 데도 그 이유가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맥주 기호가 바뀌고 있음을 의미하는 거죠. 에일을 주로 하는 수제맥주(craft beer)에 대한 기호도도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는데 점유율은 아직 전체 5조 원 시장의 1.3%에 불과하다지요. 연평균 40%의 그 상승세가 어디까지 갈지 궁금합니다. 오래전 영국에 체류할 때 펍(pub)에 가서 맥주 달라고 하면 그냥 에일을 가져왔던 기억이 납니다. 학교 캠퍼스에도 맥주 카운터 같은 게 있는데 머그나 파인트에 받아와 잔디에 비스듬히 누워서 즐겨 마시던 불그스름한 에일의 추억이 생생하네요. 그래서 지금도 에일 맥주를 더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군요.
수제맥주는 브루어리(brewery), 즉 양조장과 판매장이 한곳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만 대형 양조장이 거느리는 전국적인 프랜차이즈도 늘고 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웬만한 큰 도시에는 길에 수제맥주 간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니까요. 길에 나가서 수제맥주집이 안 보이면 큰 식당이나 골프클럽 같은 데로 들어가 신선한 생맥주(draft beer)를 시켜 마실 수도 있지요. 생맥주는 병이나 캔이 아닌 캐스크(cask)에서 직접 받아내므로 양조 과정을 조금이나마 느껴볼 수 있는 사치(?)가 있지요. 게다가 “맥주는 글라스 안에서 성장해야 한다(Bier muss im Glas wachsen)”는 말도 있으니 기포가 활발하게 움직이는 생맥주가 더 매력적으로 다가옵니다.
세계 맥주시장이 워낙 커서 우리나라 맥주의 점유율을 따져본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합니다. 빠르게 질이 향상되고 있다지만 대동강 맥주보다 못하다는 평을 듣던 우리 맥주를 생각하면 수출이 되기나 할까 싶군요. 그런데 실상은 그게 아니랍니다. 우리나라 맥주 수출은 2010년부터 소주를 제치고 주류 수출 1위를 지키고 있으며 지난해 처음으로 20만 톤을 넘어섰다고 합니다. 판매액에서도 1위를 차지한다는데 해외에서 우리나라 맥주를 소비하는 사람들은 주로 향수에 젖은 동포들과 케이 컬처를 업고 늘어나는 한식당들이 아닐까 싶네요. 맥아(麥芽)나 홉(hop) 등 맥주 원재료에서 취약하긴 해도 머지않아 우리의 제조기술이 올라 훨씬 맛 좋은 맥주를 생산할 것으로 기대해야겠죠.
맥주는 거의 인류의 역사와 함께해 왔습니다. 기원전 2500여 년쯤 이집트 피라미드 공사 인부들이 맥주를 마시던 당시의 유적이 발견된 것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렇다고 이집트가 맥주 제조의 시초라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곡물이 비에 젖어 자연발효가 이루어지는 순간 맥주가 탄생했다고 본다면 농경시대에 들어 세계 곳곳에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소설을 통해 보면 중세 유럽에서는 물 대신 에일 맥주를 늘 비치해놓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에일은 발효 온도가 높은 효모를 사용함으로써 윗부분[上面]에서 발효가 되도록 한 것이고 라거는 발효 온도가 낮은 효모를 사용해 아랫부분[下面]에서 발효가 되도록 한 차이가 있지요. 바로 그런 이유로 에일과 라거는 향미나 목넘김이 상당히 다르다 하겠습니다.
1561년에 독일 바이에른의 빌헬름 4세는 ‘맥주순수령(German Beer Purity Law, 麥酒純粹令)’을 공포했는데 맥주는 물, 홉, 보리로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죠. 다른 원료가 들어간 맥주에는 무거운 세금을 물리는 바람에 밀맥주 제조는 면세 지역인 수도원으로 들어가게 되었다지요. 빌헬름 4세를 취향 면에서 맥주 정통파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 법령으로 인해 독일이 유럽 내 맥주 제조의 주도권을 쥐었을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지금도 어떤 독일 맥주 브랜드는 이 영(令)에 따라 주조했음을 밝히고 있죠).
독일과 경쟁이 될 만한 체코의 맥주가 뜨기 시작한 것은, 1842년 플젠(Plzen)에서 제조된 황금색의 필스너 라거가 나오면서입니다. 당시 새로이 등장한 투명 유리잔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시장을 휩쓸다가 독일로 역수출된 것이 필스너인데 대표 브랜드 필스너 우르켈(Pilsner Urquell)은 원조 필스너란 뜻으로 체코의 자존심을 지키는 한 축이죠. 맥주의 본방을 독일로 치더라도 맥주 강국이 의외로 체코라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체코의 1인당 연간 맥주 소비량은 143ℓ로 24년째 세계 1위를 지키고 있다고 하네요. 체코 다음은 오스트리아(106ℓ), 독일(104.2ℓ), 미국(74.8ℓ)의 순이고요.
스텔라 아르투아, 벨기에産
맥주에 대한 취향은 계속 변하는 걸까요? 사람마다 기본적인 취향이 있다고 해도 여러 가지 브랜드를 접하다 보면 기왕의 취향과 다른 맥주들을 찾게 되지요. 언젠가 브뤼셀에 들렀을 때 미술관 옆 큰 광장에서 친구와 함께 마시던 스텔라 아르투아(Stella Artois) 생맥주의 기억은 여전히 생생합니다. 그 양조장이 1366년에 세워졌다 하니 연도만으로도 애호가들의 갈망을 채워주기에 족하다고 하겠죠.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스텔라 아르투아를 멀리할 수 없답니다. 10여 년 전 이탈리아 남부 포지타노(Positano)에서 옥빛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마시던 페로니(Peroni)의 완벽한 블론드 빛깔과 가뿐한 그 맛에 매혹되어 요즘도 이태원의 유명 피자집에 가면 찾아서 마신답니다. 마드리드에서 관광객이 몰리는 어느 광장에 헤밍웨이가 자주 찾았다는 맥줏집(Cervezaria)이 있는데 굳이 그 집을 찾아 헤밍웨이가 와서 앉곤 했다는, 창가 바로 그 자리에 앉아서 에스트레야(Estrella) 생맥주를 주문해 마셔보기도 했죠.
에스트레야, 스페인 바르셀로나産
지금까지 유럽 맥주 이야기를 주로 했지만 유럽 밖의 맥주에 대해서도 몇 마디 하지 않을 수 없군요. 수입량 2위를 자랑하는 미국산 맥주 브랜드도 다양합니다. 버드와이저를 비롯해 밀러, 쿠어스 등. 미국 하면 무엇보다 야구장에서 맥주를 마시는 풍경이 떠오르죠. 오래전 뉴욕의 시(Shea) 스타디움에서 메츠와 양키스 게임을 보러 갔을 때 남들 하는 대로 종이컵에 든 버드와이저 생맥주를 사 마셨는데 솔직히 맛있다는 인상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 후 미국 맥주 하면 도매금으로 ‘별로’라는 판정을 내리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프랭크 시나트라가 부르는 광고 노래가 좋아서 한동안 미켈롭(Michelob)이란 브랜드를 즐겨 마신 적도 있습니다. 100만 달러짜리 목소리를 타고 멋진 블론드의 여인이 춤추듯 걸어가는 장면이라 아마도 거기에 정신을 빼앗겼던 것 같기도 합니다.
라거가 미국으로 건너가서 보리와 홉의 사용량을 줄이고 옥수수나 쌀 등을 섞어 단가를 낮추면서 대량생산 체제에 들어간 것도 미국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겠죠. 저는 맥주의 ‘아메리칸 스탠다드’는 그리 대단하게 여기지 않지만 위스키가 영국에서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보리가 아닌 다른 재료들을 써서 버본이나 테네시 위스키 등으로 변화를 이뤄낸 것은 매우 긍정적인 발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대국 중의 대국인 중국의 칭따오(Tsingtao, 청도) 맥주를 잠시 언급하지 않는다면 이 또한 불공정한 일이겠죠. 사실 중국 식당에서는 칭따오 외에 다른 맥주를 찾아보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죠. 칭따오가 언제부터 유명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미국이나 영국의 화교들이 운영하는 중국 요릿집에서 드러나게 눈에 띄는 맥주가 칭따오 아니겠습니까. 칭따오 맥주는 세계 어느 곳에서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중화요리에 얹혀서 널리 알려진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칭따오 맥주는 19세기 말 삼국간섭(三國干涉)으로 독일의 지배를 받게 된 산둥반도에서 독일 기술자들이 맥주공장을 지어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높은 기술 전승 혜택으로 오늘날과 같은 명성을 누리는 것으로 보입니다.
맥주 원료는 물, 맥아, 홉 그리고 효모인데 무엇보다 우선 물이 좋아야 좋은 맥주가 나오겠지요. 아무리 물이 좋아도 좋은 맥아가 없고 좋은 홉이 나지 않는다면 훌륭한 맥주를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홉은 덩굴식물의 꽃인데 종류에 따라 레몬이나 포도, 솔잎, 재스민 같은 다양한 아로마를 가미해주죠. 말하자면 맥주의 향신료라고 할 수 있는데 홉이 우리나라에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유감스러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좋은 물은 정제해서 만들 수도 있다지만 좋은 맥아나 홉은 수입해 와야 합니다. 그러니 제조 원가가 비쌀 수밖에 없는데 원가절감을 하다 보면 맛 좋은 맥주를 생산하기 어렵다는 사정은 이해할 만하죠. 아무튼 우리 스스로 근사한 맥주를 만들 때까지 다양한 수입 맥주가 들어와 맥주 애호가들의 입맛을 채워주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요.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 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도 국제교류자문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왕자님께 말을 걸어봅니다. 저는 왕자님의 성(姓)이 고(高) 씨인지, 양(梁) 씨 또는 부(夫) 씨인지도 모릅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니까요. 천년을 거슬러 이렇게 말을 건네니 좀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하네요. 가족에게든 연인에게든, 부치지 않은 편지를 써놓은 기억이 없어서 뭘 써야 하나, 고심하던 중 오늘 아침 일어날 즈음 꿈결에서 왕자님이 떠올랐어요. 서귀포 하원동을 지나면서 ‘탐라국 왕자의 묘’라는 안내표지를 자주 봐서 그랬나봅니다.
왕자님은 탐라국 땅이 바다 밑 화산 폭발로 생긴 지가 160만 년이 된다는 건 모르셨을 겁니다. 한반도에서 제일 늦게 생성된 젊은 땅으로, 서울 크기의 3배나 된답니다. 섬 전체가 하나의 산이라고도 할 수 있지요. 그러니까 한라산이 곧 제주도요, 탐라국이었던 셈이지요. 하나의 산이라지만 370여 개의 ‘오름’이 여기저기 솟아 있어 멀리서 보는 것과는 달리 능선이 결코 밋밋하거나 단순하지 않답니다.
어떤 건축가는 이 오름들이 퍼져 있는 모양을 단면도로 그렸을 때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없다고 기염을 토했습니다. 그렇습니다. 근래 주로 바닷가를 도는 올레길이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그보다 늦게 조성된 한라산 둘레길은 한번 들어가면 산의 속살을 마음껏 보고 누리면서 걸을 수 있어 좋답니다. 어딜 가나 여러 개의 오름들이 각양각색의 모습으로 다가와 친근감과 아름다움을 더해줍니다. 왕자님도 탐라국 시절에 산속을 더러 유람하셨을 테니 제 말을 잘 이해하실 겁니다.
그런데 이런 자연의 수려함도 그렇지만 요즘 제주도는 문화와 예술 활동이 돋보인답니다. 온갖 예술인이 여기저기 많이 모여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10여 년 전에 일 찾아 제주로 왔다가 그 매력에 반해서 아주 눌러앉아 살기로 한 저도 예술이나 예술가들을 좋아하는 편입니다. 한번은 유명한 언론인이자 작가인 분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왜 제주도는 인구에 비해 예술 활동이 더욱 활발하게 보입니까?” 하고요. 그랬더니 이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아, 그건 제주의 자연이 아름다워서 그럴 겁니다”라고 답하는 거예요. 그 말을 듣고 첨에는 그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웬만큼 살면서 보니 그 말이 갈수록 실감이 납니다. 탐라국이었던 제주도는 어딜 가나 산이요, 숲이요, 바다입니다. 바람 따라 움직이는 구름의 모양이 시시각각 변해 하늘 자체가 장관인 데다 여명(黎明)이나 석양(夕陽) 공히 형형색색으로 지는 노을을 쳐다보노라면 감동이 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연 속에서 사람들이 예술적인 영감을 받지 않을 수가 없을 거예요. 탐라국 시절의 예술로서 남아 있는 걸 본 게 별로 없어서 이에 대해 제가 여기서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왕자님은 그런 것도 다 알고 계시겠지요.
나라 잃은 슬픔이 아직도 남아 있을 왕자님에게 이런 얘기가 그리 재미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하지만 좋은 소식도 있습니다. 요즘 제주에는 제주어로만 노래를 부르는 멋진 밴드가 인기를 끌고 있으며 또 제주어로만 진행하는 방송 프로그램도 있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제주어로만 말하는 연극단도 있고 무엇보다 ‘제주어(濟州語)’를 다시 교육과 생활에 들여오겠다는 운동이 만만찮게 일고 있답니다.
제주어란 결국 탐라국 말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본토의 말과 완전히 다른 건 아니지만 저 같은 사람이 들으면 30%도 이해하기 어렵답니다. 옛말을 다시 찾는 건 좋지만 인구의 반도 넘을 이주민들은 소외감마저 느낄 수도 있을 것 같군요. 아무튼 왕자님께서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라도 미소 지을 거라 생각하면 저도 흐뭇하기는 합니다.
왕자님이야 더 잘 아시겠지만 탐라국은 신화가 풍부하지 않습니까. 1만8000의 신이 있다고 하는데 무엇보다 창조신화의 주인공인 설문대할망은 여전히 사람들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 같습니다. 20여 년 전부터 조성돼온 제주돌문화공원은 100만여 평(휴양림 70만 평 포함)에 세운 엄청난 규모의 시설인데 모아놓은 기기묘묘한 돌들이 어쩌면 다 신을 형상화하는 듯이 보입니다. 이 공원은 탐라국 신화를 테마로 세계인의 관심을 모아가면서 세계 명상의 중심지로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답니다. 매년 5월에 지내는 설문대할망제를 통해 탐라 시절,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살았던 제주인의 본 모습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서려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잘되도록 왕자님께서도 영력(靈力)을 발휘해주실 것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이 편지는 오는 5월 설문대할망축제에 가서 어딘가로 부치면 혹 왕자님께 전달되지 않을까, 그렇게 기대해봅니다.
정달호 전 이집트대사관 대사
서울대학교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줄곧 외교관으로 일했으며 주 파나마, 이집트대사를 지냈다. 은퇴 후 제주에 일자리를 얻는 바람에 저절로 귀촌을 하게 되었다. 현재 제주돌문화공원 운영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한라산 자락의 텃밭과 꽃나무들을 가꾸는 등 자연의 품에서 생활의 즐거움을 찾고 있다.
4) 데이비드 워나로비치(David Wojnarowicz, 1954~1992년)
화가, 사진작가, 영화제작자, 공연예술가, 에이즈 인권활동가로 활동했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어린 시절 가족에게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6세에 집을 나와 거리 생활을 했다. 미국 전역을 히치하이킹했고 샌프란시스코와 파리에서 몇 달간 살다가 1978년에 이스트 빌리지에 정착했다.
이스트 빌리지에 새로운 물결을 일으킨 첫 멤버로 1980년대 초에 시빌리안 워페어, 클럽 57, 그레이시 맨션, 패션 모다, 림보 라운지 같은 전설적 공간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1985년에는 휘트니 비엔날레에 초청되어 ‘그라피티 쇼’를 했고, 미국을 포함한 유럽 등지에 그의 작품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38세에 에이즈로 사망했는데, 투병 중에도 도발적인 작품을 끊임없이 만들었다.
5) 쳉 퀑 치(Tseng Kwong Chi, 1950~1990년)
홍콩에서 태어나 16세에 캐나다로 이주했다. 파리 명문 예술학교에서 회화를 1년 공부한 후 사진으로 전공을 바꿨다. 1978년 뉴욕으로 이주해 에이즈로 40세에 사망하기까지 이스트 빌리지에 거주하며 사진작가로 활동했다. 키스 해링의 ‘절친’인 그는 해링의 부탁으로 4만 장의 ‘키스 해링 아카이브’를 제작했다.
챙 퀑 치는 뉴욕에서 경험한 다민족주의, 대량 소비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애매모호한 외교관’을 예술적 페르소나로 설정해 전 세계를 여행하며 작업했다. 1979년부터 1989년까지 작업한 ‘서양과 만난 동양’ 또는 ‘탐험 연작’은 서양이 아시아에 품는 순진무구한 선입견과 무지를 조롱하고, 서구라는 근대적 구성물이 동양과 어떤 연관 속에 구성되는지, 서구라는 상상 개념이 상징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어떻게 동양을 신비화하고 배제했는지를 묻는다. 챙 퀑 치는 중국인임을 적극 강조했지만 중국을 방문한 적은 한 번도 없다.
6)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년)
‘뉴욕타임스’는 바스키아를 가리켜 “흑인으로서 최초로 성공한 천재 아티스트, 검은 피카소”라 표현했다. 키스 해링, 앤디 워홀과 함께 3대 팝 아티스트로 불리며, 한때 마돈나의 연인으로도 유명했다. 1980년대에 세계적인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을 인정해줬던 앤디 워홀 사망 후에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27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바스키아는 뉴욕 브루클린의 평범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재능을 보여 어머니가 미술 전문 사립학교에 입학시켰다. 그러나 7세 때 어머니의 우울증으로 인해 부모가 이혼하면서 불행한 삶을 살게 된다. 15세 때부터 가출을 반복하며 거리 생활을 했다. 뉴욕 거리와 지하철에 낙서화를 하며 이스트 빌리지의 신표현주의 경향을 주도했다.
노숙자들과 공원 벤치에서 숙식하고 구걸하고 마약을 거래했다. 작업 초창기에 손으로 그린 엽서와 티셔츠를 뉴욕 거리와 상점에서 1~3달러에 팔며 생계를 유지했다. 그의 명성에 비해 초라해 보이는 7장의 엽서 시리즈 ‘무제(안티프로덕트 엽서)’는 이 시기의 작품이다. 바스키아의 엽서 시리즈는 앤디 워홀이 구매했는데, 당시 워홀과 함께 있던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는 이 엽서를 사지 않았다가, 훗날 바스키아에게 그림을 달라고 애걸하는 처지가 됐다고 한다.
7) 버스터 클리브랜드(Buster Cleveland, 1947~1998년)
소호 거리에서 우표 크기의 콜라주 작품을 판매하다 리무진을 빌려 소호 거리에서 작품을 전시하는 ‘리무진 쇼’를 열어 유명해졌다. 가난과 무명이 창조력을 발휘한 예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앤디 워홀의 영향을 받아 장난감, 자동차 후드 장식품 등 일상 재료를 이용한 콜라주 작품을 우편으로 보낸 ‘메일아트’가 그것이다. 메일아트는 가난한 예술가가 기성 제도권 전시 공간인 갤러리나 박물관에서 벗어나 대안 네트워크 공간에서 대중과 소통하면서 작품을 유통할 수 있는 방법이자, 국가나 기관으로부터의 검열을 피할 수 있었던 방식이기도 했다.
그가 애용한 재료는 미술잡지 ‘아트포럼’ 표지였다. 또 벼룩시장에서 싼값으로 구매한 제품들, 친구로부터 받은 선물, 이스트 빌리지 작가들 사진, 담뱃갑, 거리에서 주운 쓰레기로 작품을 만들었다. 작품은 재료 특성에 따라 변주됐는데, 누구든 월 구독료 100달러 혹은 평생구독료 1000달러를 내면 우편으로 그의 작품 ‘Art For Um’을 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전시장은 월요일 휴관한다. 현대미술은 도슨트 설명 없이는 온전한 이해가 어렵다. 도슨트 해설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을 확인하고 가길 권한다.
‘이스트 빌리지 뉴욕: 취약하고 극단적인’(전시기간: 2018년 12월 13일~2019년2월24일)
‘반항의 거리, 뉴욕’(전시기간: 2018년 12월 21일~2019년 3월 20일)
‘키스해링: 모두를 위한 예술을 꿈꾸다’(전시기간: 2018년 11월 24일~2019년 3월 17일)
‘케니 샤프, 수퍼 팝 유니버스‘(전시기간: 2018년10월 3일~2019년 3월 3일)
‘주님 위의 건물주’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시니어의 로망을 넘어서(?) 이제는 모든 세대가 인생의 마지막 꿈처럼 여기는 듯한 건물주라고 하면, 흔히 일반 상가 소유자나 빌라, 빌딩 주인 등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여기 좀 독특한 건물주가 있다. 김현우 씨, 주한 외교관들에게는 ‘피터 킴’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그는 주한 외교사절들을 대상으로 주거공간 렌트 사업을 하고 있는 흔치 않은 건물주다. 사업을 한 지 어언 30여 년이니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을 만난 생활 또한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 그를 만나서 쉬이 볼 수 없는 삶을 들여다봤다.
동빙고동에 위치한 모로코 대사관 Owls Avenue에서 만난 김현우 씨의 나이는 거의 40대로 보였다. 아무래도 주한 외교사절들과 접촉해야 하는 업의 특성이 그를 젊게 만든 것일까? 외교관들뿐만 아니라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 연예인들, 셀럽들 또한 그의 집을 빌리기도 했었다. 특별한 이들을 손님으로 모시는 건물주로서 살아야 했던 그의 감각 또한 계속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30여 년 전에 시작된 거죠. 남대문에 대한화재 건물이 있었는데, 독일대사관이 그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독일대사관 사람들에게 저희 집을 내주면서 일을 시작했죠. 그 후로 계속 대사관과 주재원들에게 집을 빌려주는 일을 하고 있어요.”
글로벌 회사가 인정한 인테리어 감각
그는 손님의 니즈에 맞게끔 인테리어를 짠다고 말한다. 최근 세계적인 인테리어 디자인 추세는 컨템포러리, 미니멀리즘이란다.
“주거문화에 대해 생각해볼 기회가 많죠. 우리나라 사람들은 롱패딩이 유행하면 모두가 롱패딩을 입지만, 서양 사람들은 개인의 개성이 다 달라요. 특히 독일 사람들을 25년간 겪었는데 굉장히 합리적이에요. 헤어질 때도 나이스하고. 독일 사람들이 인간으로 치면 명품이라고 봐요.”
요즘 그에게 가장 재밌고 즐거운 일 또한 인테리어다. 그는 자신의 감식안에 대한 모종의 자부심도 있다.
“덴마크에서 온 레고 코리아 대표님이 저희 집에서 사실 때가 있었어요. 그분이 계약서를 작성하면서 제가 코디한 가구와 그림을 그대로 다 계약서에 넣어 달라고 요청하시더군요. 유러피언 미니멀리즘적인 인테리어로 한 거였는데 너무 기분이 좋았어요. 정말 희열을 느꼈죠.”
젊게 살려면 가구 공간부터
그렇다면 이제 그에게 인테리어에 대해 물어볼 차례였다. 과연 젊게 보이는 인테리어는 어떻게 해야 만들 수 있을까? 그가 볼 때 한국 주거문화의 문제점은 ‘너무 많이 갖다 놓는다’는 것이었다. 가구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컨템포러리하고 미니멀하게 해야 해요. 나이 드신 분들은 제발 오래된 가구 버리고 요즘 디자인의 가구를 들이는 게 젊게 사는 비결이에요. 앤티크하거나 바로크적인 디자인의 가구는 나이 들어 보이거든요. 좀 더 모던하게 꾸밀 필요가 있어요.”
그가 중시하는 또 하나의 인테리어 조건은 컬러를 많이 쓰지 말라는 것이다. 그는 주로 화이트와 그레이, 우드색을 활용한다. 한 집에 컬러를 서너 개 이상 쓰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이것은 패션 쪽에서 말하는 ‘세 가지 색 이상을 입지 말라’는 말과도 통용된다.
“집은 자기가 평생 살 수 없어요. 반드시 이사를 가게 되어 있죠. 그래서 보편성에 맞춰야 해요. 맞춤에 있어 가장 좋은 것은 화이트예요. 화이트에는 그림을 걸어도 되니까 일종의 캔버스라고 생각하면 되죠. 그래서 저는 화이트를 많이 써요. 자기만의 컬러를 그 안에 넣어도 문제가 되지 않으니까요.”
독일의 포용력에서 많은 것을 배우다
인터뷰를 진행하다 보니 사업가로서의 그의 첫 인연이 독일이었고 지금도 그 연을 이어가는 만큼, 그는 독일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지금까지 중국을 육십 번을 갔어요. 아이 공부 때문에도 그렇고 가구 수입 등의 일이 있어서. 그런데 그때가 20년 전이었는데, 모든 대도시의 택시가 폭스바겐이더군요. 다른 회사택시는 하나도 없었어요. 차만 팔았을까요? 차가 팔리면 부속적인 파트들이 얼마나 많이 팔리겠어요.”
그가 본 독일 사람들은 계약이 끝나면서 안 좋을 수 있는 관계라도 끝까지 매너 있게, 상대를 배려하며 합리적으로 마무리 짓는 사람들이었다. 그가 만난 사람들이 주재원이라는 엘리트여서 그런 것인지는 모를 일이나, 그는 그 모습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가 직원들에게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말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어떠한 일이든 절대 싸우면 안 된다고 가르쳐요. 분쟁이 생긴 후부터는 여러 가지 쌓이는 문제점들이 나오고 스트레스를 너무 받게 되거든요. 분쟁은 최종적으로는 소송으로 가죠. 그러면 변호사 고용해야지, 서류 검토해야지, 증거 서류 준비해야지…. 내가 다 해줘야, 변호사는 그걸 보고 일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양보해라, 보듬어라’라는 얘기를 많이 해요.”
그의 사무실에는 ‘Sue Zero(소송 제로)’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으니 그가 소송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미국의 유능한 엘리트들은 소송을 피하는 기술을 알아요. 그게 필요해요. 정신적으로나 건강 면에서 너무 좋은 것이니까. 포용은 무섭고 강한 힘이 있지요.”
좋은 공기가 행복이다
그는 차에서든 집에서든 에어컨과 히터를 쓰지 않는다. 건조한 공기가 피부를 망가뜨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큰아이는 제주로 보냈다. 서귀포와 서울의 미세먼지 차이가 어마하게 나는 걸 보고 깜짝 놀라서다.
용인 세컨드 하우스에서 사는 것도 공기 때문이다. 용인의 산속에 자리한 그 집은 큰 도로에서 1000m 더 들어간 곳에 있는 숲으로 둘러싸인 트리 하우스다. 봄부터 가을까지, 금·토·일의 주말 동안은 그곳에서 난방을 하지 않은 채 지낸다. 봄과 가을은 춥지 않냐는 말에 그는 구스다운 이불과 두꺼운 잠옷 그리고 러시아 친구가 준 솔잎가루 베개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 생활을 10년째 하고 있다.
“공기의 소중함이 어느 때보다 절실히 와 닿습니다. 차가 미세먼지의 주범이에요. 특히 디젤차. 최근에 판매된 승용차 대부분은 디젤차죠. 디젤차가 인센티브가 있고 연비가 좋으니 사람들이 많이 샀잖아요.”
그래서 그는 은퇴한 사람들이 도시에서만 살려고 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다. 디젤차로 가득한 서울 도심은 그에게 있어선 미세먼지 공장 같아 보일 것이다.
“젊은 사람들은 일을 해야 하니까 이해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울에 너무 중심을 두죠. 은퇴 후 여유가 되면 근교로 옮기는 게 정말 바람직한 일이라고 봅니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고 흙냄새가 올라오는 집, 별과 하늘이 가까워 일상에서 마음의 치유도 가능한 곳입니다.”
월·화·수·목은 서울에서 금·토·일은 자신의 개성이 잘 드러나는 용인 세컨드 하우스에서 힐링을 하는 그는 워라밸과 함께 휴양, 문화, 여가를 향유하고 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말, 중용
그는 건물 관리를 하며 여유로운 인생 후반기를 지내는 중이다. 어찌 보면 누구나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시니어의 일상을 유유자적 보내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그도 30, 40대에는 일에 미쳐 있었다.
“일을 하면 미친 듯이 하던 시절이었죠. 이른 아침 논현동 건축자재상인들이 안 나왔다해도 일찌감치 가 있기도 하고 점심은 차에서 사과나 바나나만 먹으면서 지내고…. 그러다 독일 사람들의 삶을 보며, 저의 멘토들을 보면서 이렇게 살 필요가 있나 싶었어요.”
그가 선호하는 단순하고 절제된 감각은 그의 삶의 법칙과도 연결되고 있었다. 젊어 보인다는 말에, 그가 ‘젊어 보이기 위해서는 절제하는 생활 습관이 중요하다’고 대답한 것도 사진의 취향이나 감각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공자가 한 중용이란 말을 중요시합니다. 사람 관계도, 먹는 것도 밸런스가 중요해요.”
김현우 씨는 일과 취향, 삶까지 일치시킨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일치는 그에게 ‘지지부진하지 않고 군더더기가 없다’는 느낌을 부여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세운 법칙에 따라 자신을 오롯이 정렬시킴으로써 얻을 수 있는 만족과 행복 덕분 아닐까. 그 쉽지 않은 길에 도착한 그의 모습이 부럽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12월 15일 저녁 9시 30분, SBS에서 2018년 AFF 스즈키 컵 결승 2차전을 중계했다. 베트남과 말레이시아 간의 경기였는데 시청률이 인기 드라마 수준을 넘어 무려 20%대를 기록했다. 결과는 베트남이 1대0으로 말레이시아를 꺾고 우승했다. 열광하는 베트남 사람들을 보며 2002년 한일 월드컵 때의 환희가 그대로 떠올랐다.
이 경기를 주목한 이유는 박항서 감독 때문이다. 그는 베트남 U-23(23세 이하) 축구대표팀을 3개월 만에 2018년 아시아축구연맹 U-23 챔피언십에서 준우승이라는 성적으로 이끌었다. 이뿐만 아니라 2018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서도 베트남 축구대표팀을 사상 최초로 4강에 진출시켰다.
그의 나이 올해 60세, 거스 히딩크 감독 밑에서 배운 리더십과 테크닉을 베트남에 가서 꽃피운 것이다. 국내 프로팀 감독을 맡았던 시절에는 좋지 않은 성적으로 외면당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보기 좋게 활약하며 인생의 절정기를 맞이했다. 그의 미담도 심심치 않게 들려온다. 부상 선수를 마사지해준 일, 비즈니스석을 선수에게 양보한 일 등 그의 배려 넘치는 행동 하나하나가 베트남 국민을 더욱 열광시켰다. 외교관 수백 명이 해도 못 할 일을 해내고 있는 그가 자랑스럽다.
젊은 시절 외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해외공사를 많이 하는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업무상 유럽으로 자주 출장을 가서 주말에는 출장지 부근 관광지를 다닐 기회가 많았다. 덕분에 현지의 많은 관광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긍심과 열정이 넘쳤고, 내가 그들 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퇴직을 앞두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 중, 문득 유럽 관광지에서 만났던 관광가이드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관광가이드가 되기로 마음먹고, 소양을 갖추기 위해 우선 한국관광공사가 발급하는 영어 분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관광가이드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무렵 서울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해설사가 되었다.
해설사들은 서울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 해설을 제공한다. 서울시에는 현재 203명의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다. 해설 코스는 청계천, 경복궁 등 25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한 번에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약 2시간 정도다.
나는 2009년도에 서울시 해설사가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9년째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해설을 하니 지금까지 약 900팀의 관광객에게 해설을 한 셈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관광객을 만난다. 한번은 네덜란드의 가족을 만났는데, 부모와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모는 서양인, 딸은 동양인이었다. 알고 보니 딸은 한국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로 입양된 여성이었다. 관광이 끝난 후 “친부모를 만날 때 통역을 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흔쾌히 수락했고, 실제로 만났다. 친부모가 별거 중이라 따로 만나는 수고가 있었지만, 한 사람이 평생 그리워했을 부모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어 무척 보람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 외에도 해설사 활동으로부터 오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세계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설활동을 할 때마다 두 시간 정도 걸으니 건강에도 좋다. 또한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이 밖에 해설사들의 평균연령이 60대 중반인데 외로울 수도 있는 노년기에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매월 월례회를 통해 해설 활동과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고 친목도 도모한다.
노년에 자기계발을 원하면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외국어에 소양이 있는 분이라면 문화해설사가 되어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해볼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