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산중 살림이 어언 30여 년째. 이력이 길어 쌓인 내공도 겹겹일 터다. 따라서 번듯한 집과 농장을 갖추었을 성싶지만 웬걸, 거처의 모습에 애써 다듬거나 꾸민 흔적이 거의 없다. 원래 화전민이 살았다는 집부터 옛 모습 그대로다. 1000평 규모의 농장 역시 야생 초원에 가깝다. 그렇다면 천하태평 게으름뱅이들이 사는 집? 또는 못 말릴 자연주의자의 거처? 후자가 정답이다. 즉 안희상(76, 다락골 구름밭 농장)과 아내 정선희(71)는 외진 산골에서 자연과 동행한다. 자연에 순응하고 동화하는 데에서 건강한 삶이 가능하다는 믿음을 고수해왔다. 농사도 유기농보다 한층 진보적인 자연농법을 구사한다. 자연의 생태 그대로를 존중하는 천연농법으로 자급자족을 도모하고, 나아가 삶과 생각의 대부분을 자연으로 채워 만족스러운 나날을 누린다.
서울에서 살았던 안희상은 대형 건설사 직원이었다. 그는 수시로 해외 근무를 했는데 45세 때의 어느 날 청천벽력과도 같은 폐암 선고를 받았다. 그게 산골로 이주한 계기였다. 폐 하나를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고 산이라는 요양소에 입소했다. 무너진 건강을 산에서 회복하기 위해 귀농을 했던 것. 그리고 대단한 성과를 거두었다. 마침내 암을 물리쳐 안정적인 건강상태에 이르렀다는 진단을 받았고, 지난 30여 년간 감기 한 번 걸리지 않았다는 게 아닌가. 만약 산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이에 대한 안희상의 답은 이렇다.
“도시 생활을 지속했다면 일찍 세상과 이별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도시의 복잡한 일상과 식습관에서 벗어나는 게 살 길이라고 봤는데, 그게 입증된 셈이다. 자연이 주는 산나물 중심의 음식을 먹고, 번잡한 문화생활을 배제하자 좋은 결과가 나타났다. 단조로운 생활을 반복하면서 뇌가 편해졌는데, 이 역시 치유 효과를 가져왔다. 아내가 정성껏 만들어준 제철 식단의 힘도 컸다.”
집이 인상적이다. 작고 낡아 불편해 보이지만 고색창연해 정겹다. 옛날 집을 원형 그대로 두고 사는 이유가 있겠지?
“100여 년 전에 화전민이 지은 토담집이다. 요즘처럼 흙이 오염되기 이전 시대에 지어진 황토집인데, 헐어내고 새로 짓기엔 아까웠다. 8평짜리 본채에 툇마루를 보탰을 뿐 본래의 구조를 유지한 채 살고 있다. 난방은 아궁이에 군불을 때 해결한다. 여러모로 불편한 점이 있지만 우리는 원래 있는 조건 그대로를 수용하며 살기로 했다. 이 집에서 살았던 화전민들의 원시적인 생활 방식을 따르자, 도시에서 익숙해진 습관과 사고를 싹 바꾸자, 그러면 병이 낫겠지, 그런 생각을 했던 거다.”
반듯한 냉장고가 없는 대신 작은 김치냉장고 하나만 가지고 산다지?
“최대치의 간소한 생활을 한다. 적은 소유로 적은 소비를 하기 위해서다. 쓰레기 배출에 따른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해서도 적은 소비는 당연한 거라 봤다. 우리는 계곡물을 호스로 끌어들여 생활용수로 쓴다. 세탁기 없이 사시사철 손빨래를 하며, 원초적인 형태의 생태 화장실을 집 밖에 설치해 배설물을 퇴비로 바꾼다. 농사용 장비는 기계톱이 유일하다. 호미와 괭이로 모든 농사일을 감당해온 셈인데, 그러한 육체노동이 암을 낫게 한 요인의 하나로 작용했다.”
건전한 노동은 떳떳해서 아름답다. 그런데 부인을 너무 혹사시키는 건 아닌지?(웃음)
“아내에게 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품고 산다. 다행히 그의 기질은 강인하고 투철하다. 때로 파이터로 변한다.(웃음) 한편 아내 역시 불편하고 간소한 산중 살림의 긍정적인 가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매사 쾌활하게 적극적으로 움직인다. 산에 살면서 산을 오염시키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원칙에 대해서도 부부가 공감대를 갖고 실천해왔다.”
야생 조수는 산골의 원주민
2월 말의 산중을 채운 공기는 차갑지만 봄기운이 이미 흥건하다. 여기저기 수선화 새잎들이 소복이 올라와 솔바람에 설레어 살랑거린다. 머잖아 온갖 봄꽃들이 다투어 우르르 피어나면 숫제 야생 화원으로 바뀔 거란다. 다종다양한 약초, 야생화, 꽃나무 등속이 어울려 꽃 정원을 연출하는 것인데, 이 가상한 꽃밭이 바로 안희상 부부의 농토이자 일터다. 고구마, 마늘, 고추 등 일반 농작물은 물론, 갖가지 산나물이 산재한 채 마음껏 활개 치는 식의 자유로운 성장을 해 결실을 맺는다. 농약을 치거나 비닐 멀칭을 해주는 식의 요령은 전혀 동원되지 않는다. 그래 자연농법이다.
안희상은 자연의 생리와 기법을 존중하는 한편 인위와 간섭을 배제하는 농사를 짓는 것이야말로 농부가 해야 할 진정한 업무라고 보는 것 같다. 그런 농부라야 비로소 이상적인 먹거리로 밥상을 차릴 수 있으며, 나아가 식물들이 성황리에 펼치는 순수한 생명 이벤트를 즐겁게 관람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사가 동화나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즐겁기만 하랴. 농장이 자리 잡기까지 고생도 적지 않았으리라.
“구체적 계획 없이 산에 들어온 탓에 처음엔 막막하고 힘들었다. 그러나 무질서한 주거 환경에서 하나하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이 사실은 즐거웠다. 남들이 할 수 없는 삶의 방식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기면서는 더 큰 재미를 느꼈다. 건강 문제를 잊을 정도로.”
초보 농부로서 겪은 애로점은?
“돌이 많은 밭이라 돌을 캐내는 작업부터 만만치 않았다. 초기부터 시도한 유기농법 역시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잘 자라는 건 산나물들이었다. 결국 농장의 절반을 산약초로 채웠고, 유기농법을 자연농법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해서 야생에 가까운 농원이 형성됐다. 문제는 실로 낮은 소출 수준이었다. 따라서 잠시 실망도 했지만 적은 생산일망정 자연이 베푸는 선물임을 자각하고 고마운 마음을 갖게 됐다.”
소출이 적다면 소득도 적을 텐데 생활비는 어떻게 조달하나?
“산에 들어올 때 가져온 자금에 여유가 있어 한동안 문제가 없었지만 세월이 흐르며 궁색해지더라. 해법은 소비를 줄이는 데 있었다. 도시에 사는 아들의 도움도 받았다. 이건 사실 30여 년의 산중 생활 중 유일하게 낭패스러운 대목이다. 자급자족을 추구했지만 뜻대로 풀려나가지 않았으니까.”
근래의 기후 변동으로 농부들의 애환이 많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야 한다고 보나?
“기후위기에 따른 자연재해를 불러들이는 건 건 결국 인간이다. 환경오염을 줄이기 위한 생활습관의 변화가 대안일 테고. 농사 역시 자연의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가는 게 옳다. 독성을 품은 화학농약에 의존하는 농사는 결국 몸에 좋지 않은 먹거리를 양산할 뿐이며, 동시에 토질을 망쳐 자연 생태를 깨트린다. 관행농법을 폄하하는 건 아니지만, 환경을 생각하는 귀농인이라면 마땅히 자연농업을 지향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야생 조수에 의한 농사 피해를 호소하는 농부들도 흔하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나?
“우리는 초기에 부엌도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보니 천장에 걸어둔 냄비에 뱀이 들어앉아 있더라.(웃음) 이걸 어쩌나. 죽여? 그럴 순 없는 일이었다. 알고 보면 원래 이 산골에 자리 잡고 산 건 사람보다 짐승들이 먼저였다. 야생 조수들이 이 땅의 주인이라는 얘기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새를 내쫓고, 개구리를 잡아먹고, 멧돼지를 죽인다. 원주민을 이렇게 대접해도 되나? 야생 조수들이 자연 속에서 하는 선한 몫까지 고려하면 해결 방안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상생이 답이라는 얘기다.”
상생의 가치는 귀하지만 자신하고도 불화하며 사는 게 사람이다. 상생을 염두에 두고 내려온 귀농인조차 마을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해 고심하는 경우도 흔하다.
“이웃과의 갈등. 이 문제는 사실 우리에게도 만만치 않은 사안이다. 불합리한 정도가 지나쳐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태와 맞닥뜨리곤 했다. 완고하고 이기적인 사람에겐 사실 대책이 없다. 그런데 이건 있다. 도시 사람들의 큰 이기심에 비할 때 시골 사람들의 작고 단순한 욕심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거. 그럼에도 갈등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부족하고, 재주 없고, 부끄럽지만
소소한 난항은 어쩌면 순항으로 데려가는 징검돌이다. 안희상은 초기의 개척시대를 통과한 탄력으로 산중의 삶을 매우 긍정적인 방향으로 운항, 일찌감치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불편하고 낯설고 거친 생존 조건조차 ‘자연스럽게,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고 하는 걸 보면 원래 야생의 기질을 타고났을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그는 굳이 이를 악물고 살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 스펀지에 스며드는 물처럼 자연의 감화력에 흡수되었고, 자연농법 삼매경을 경험했으며, 건강을 회복했고, 결핍과 불만이 없는 영일(寧日)을 누린다.
“불편한 환경이 오히려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는 걸 느끼며 살았다. 어떤 논문에 이런 게 있더라. 윤택한 밭과 거친 밭에 시금치 씨앗을 나누어 심었는데, 나중에 수확해 분석한 결과 거친 환경에서 자란 시금치의 약성이 더 뛰어났다는 거다. 사람의 경우도 비슷한 게 아닐까? 산속에서 검소하고 단순하게 사는 게 힘들 것 같지만 안분지족(安分知足)할 경우엔 삶의 질이 높아진다.”
자연의 모든 걸 좋아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실제의 삶은 반자연적이거나 부자연스럽다. 어쩌면 우리는 엉뚱한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산속에 살면서 나는 자연에 대해 외경과 감사를 느끼는 사람으로 변했다. 그러면서 더 온전한 삶을 지속할 수 있었다.”
어떨 때 외경의 감정이 일어나나?
“가령 밭에 뿌린 씨앗에서 싹이 틀 때, 작은 싹이 자라 열매를 맺을 때 경이롭다. 뇌우가 쏟아지는 밤, 마루에 앉은 나의 옷깃에 날아와 앉아 비를 피하는 개똥벌레를 바라볼 때도 환희를 느낀다. 이럴 때면 성찰의 눈으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한다.”
꽉 막힌 산골에서 원초적인 스타일의 삶을 구현하는 일. 적게 먹고 담백하게 사는 일. 그걸 30년째 즐겁게 지속하다니. 한 방 얻어맞은 기분이다. 삶의 관성을 넘어선 안희상의 ‘도발’이 놀라워서.
안희상이 주는 귀농 Tip
•자연은 예술을 뛰어넘는다. 자연을 향유하고자 하는 자세를 가지고 귀농하는 게 현명하다. 도시에서 몸에 밴 놀이 문화를 싹 버리고 시골 생활에 입문하는 게 좋다는 얘기다.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철저하게 결여된 사람이라면 귀농을 아예 하지 않는 게 옳다.
•도시 문화를 그대로 가지고 귀농귀촌을 하면 원주민들의 문화와 충돌하게 마련이다.
•재능이나 자금력보다 자연에 의지하자. 자연 생태에 관한 안목과 사랑이 생기면 도시에서보다 수준 높은 삶의 질을 누릴 수 있다.
•강도 높은 노동이 요구되는 게 농사다. 따라서 50세 이전에 귀농하는 게 좋다. 무릎 관절에 문제가 있는 경우는 귀농을 삼가라.
•집을 크게 짓지 말자. 철수할 상황이 발생했음에도 매도가 어려워 진퇴양난에 빠지는 사례가 드물지 않다는 걸 유념하자.
•몸에 좋은 먹거리를 거둘 수 있는 자연농법을 하라. 그러면 오지 산골에 살더라도 병원 신세를 지지 않고 건강하게 살 수 있다. 자연농법을 위해서는 생태 화장실이 필수품이다. 배설물로 거름을 만들어야 하니까.
해발 800m 고지에 덩그러니 농장 하나 있다. 높고 외지고 고요한 곳이다. 속세가 아스라이 멀어지는 산간이다. 사위로 펼쳐지는 풍광은 콘테스트에서 뽑은 귀재처럼 잡티 없이 빼어나다. 손에 잡힐 듯 구름은 가깝고, 정적에 휩싸인 숲은 청신한 기운을 뿜는다. 환경이 이러니 사로잡힐 수밖에. 김영혜(58, 놀숲치유농원 대표)는 한동안 남편과 함께 귀농지 물색을 위해 곳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김천시 증산면 고지대의 수려한 풍광에 꽂혀 낙점하고 귀농했다. 순수한 자연과 함께 평온한 여생을 누리기에 이보다 나은 곳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서.
귀농 전 김영혜는 부산에서 영어학원 강사 겸 원장으로 뛰었다. 잘나가는 학원이었다. 규모를 늘릴 필요성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은 다른 데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에겐 남편과 공유한 오래된 꿈이 있었다. 적당한 시점을 골라 산골로 들어가자는 소망을 지니고 살았던 것인데, 50대에 접어들 즈음 소망의 농도가 짙어져 더 미룰 수 없었다. 유한한 인생을 도시에서 미적거리며 소비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쯤에서 더 망설이지 말고 과감하게 산골로 들어가자!’ 부부는 그렇게 의기투합했다. 산골의 자연과 동행하며 부부만의 유토피아를 일구는 데 모든 시간과 에너지를 쓰는 일이야말로 삶을 낭비하지 않는 길이라 본 것 같다. 주변 지인들은 귀농을 뜯어말렸다지. 그러나 그의 내심엔 이미 산골이 꽉 박혀 더 고려할 이유가 없었다.
“망설이다가 꿈을 이룰 기회를 영영 놓칠 수 있다고 봤다. 한 살이라도 젊은 나이에 시골 생활을 시작하는 게 옳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좋은 터를 찾아낸 것이다. 맨 처음 한 건 집짓기였다. 남편이 먼저 이곳에 들어와 1년여 동안 토목공사를 하고 건축을 완료했다. 남편은 건축 감리사다. 그래 모든 공사를 직접 주도했다. 공사를 마친 뒤인 2012년엔 나도 들어와 합류했다.”
귀농인들은 흔히 조언한다. 집을 짓기 전에 가령 셋집을 빌려 한동안 살면서 농촌과 농사의 물정을 미리 익혀두라고. 그게 차후 리스크를 줄일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라고.
“우리는 아무런 사전 준비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왔다. 상당히 무모한 도전을 한 셈이다.(웃음) 귀농교육도 이곳에 들어오고 나서 받기 시작했다. 농업기술센터나 농민사관학교 등을 통해 부지런히 공부했다. 하지만 ‘무작정 귀농’엔 어쩔 수 없는 누수가 발생하더라.”
귀농을 쉽게 생각했다?
“그렇다. 철저한 준비를 해도 시행착오가 발생하는 게 귀농인들의 현실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우리는 복잡한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살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일단 성공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원했던 경관이 있는 곳에서 원했던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원하는 이에게 이곳은 이상적인 공간으로 보인다. 하지만 아름다운 자연도 날마다 바라보다 보면 질린다.(웃음)
“처음엔 자연 풍경에 벅찬 만족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그건 잠시 맛본 행복감에 불과했다. 지금 돌아보면 초기엔 자주 우울했던 것 같다. 난 도시에서 매우 활동적으로 살았다. 그런데 아는 이 없지, 얘기할 사람 없지, 마을과 동떨어진 외딴집에서 여러모로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직 남편을 괴롭히는 게 일이었다.(웃음)”
남편은 구미시로 출퇴근해
산 절반, 하늘 절반으로 이루어진 이곳의 훤칠한 경관은 가히 압권이다. 외진 암자처럼 고즈넉해 은자를 선망하는 사람에겐 더 적격이리라. 세상의 아귀다툼과 소음이 침범 못 할 곳이니 마음 하나 온전히 다스리며 한 그루 나무처럼 조용히 살기에 적당한 장소다. 터를 고른 부부의 눈썰미가 평범치 않다. 김영혜는 남편과 함께 도시에서 오랫동안 명상 수련을 했다. 그 내공으로 삶터와 풍경을 보는 안목이 열렸나? 그러나 어디에 살든 돈 문제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법. 자연과 교제하며 명상이 있는 소박한 생활을 추구하더라도 경제가 뒷받침돼야 지속 가능하다. 그래 그는 농사로 소득을 얻기로 하고 귀농을 한 게 아닌가. 그런데 막연히 생각했던 농사라는 경기장에 걸린 허들이 한둘이 아닌 걸 그는 뒤늦게 알았다.
“농사로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기가 쉽지 않았다. 농사에 문외한이라 재배 기술도 서툴렀다. 따라서 초기엔 수입이라는 게 아예 없었다. 들어오는 돈은 없고 나가는 돈만 있어 고민이 많았다. 무슨 수를 찾지 않으면 상황이 매우 나빠질 수 있어 불안했다. 그래 귀농 2년이 지날 즈음 남편이 구미시에 사무실을 내고 감리사 일을 다시 시작하게 됐다. 이곳에서 출퇴근하면서. 불가피한 대안이었다. 상황이 개선되면 곧바로 농사에 복귀하기로 했으나 남편은 지금도 구미로 출퇴근한다.(웃음)”
농사 작목은 어떤 걸 선택했나?
“고추, 들깨, 두릅 등을 재배했지만 소소한 텃밭 농사 수준에 그쳤다. 주 작목은 오미자다. 현재도 오미자 농사를 계속하고 있다.”
오미자를 선택한 이유가 있겠지?
“귀농교육을 통해 초심자도 비교적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게 오미자 농사라는 걸 알고 시작했다. 마침 집 뒤편에 야생 오미자밭이 있어 그걸 기반으로 삼았다. 오미자 농사는 초기 자본과 인력도 덜 든다. 오미자 넝쿨이 타고 올라갈 수 있는 망을 설치해주고, 풀을 잡기 위한 차광막이나 부직포를 설치하면 되기 때문이다.”
재배 기술을 숙달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첫해 농사에선 거둔 게 없었다. 모종이 죽거나 순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고전했다. 이듬해엔 다소 나아졌지만 여전히 작황이 저조했다. 해결책은 재배 실력을 키우는 데 있다는 걸 깨닫고 멘토를 모셔 도움을 받았다. 순을 관리하는 요령, 효율적으로 물과 거름을 공급하는 방법 등 재배에 따른 모든 기법을 공부했다. 흙의 과학을 배우기도 했고, 토질 개선을 위해 토양검사도 했다.”
비로소 실력을 갖춘 농부 대열에 올라선 셈이었겠다.
“프로 농부들에게 농법을 익히면서 작황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오미자 농사 3년 차부터 비로소 튼실하게 달린 결실을 거둘 수 있었으니까. 이후 10여 년 차에 이른 현재까지 고품질 오미자를 무난하게 지속적으로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소득 효과는 여전히 미미하다.”
연평균 매출이 얼마나 되기에?
“500평 규모의 오미자밭에서 2000만 원 정도 올린다. 이건 재배 면적 대비 최대치 매출이다. 그러나 안정적인 수입 수준과는 거리가 멀다.”
오미자 수익 외에 농장에서 발생하는 다른 소득은 없나?
“민박업을 하고 있다. 힐링 또는 치유를 테마로 한 민박이다. 그런데 이 역시 아직 궤도에 올라서지 못했다. 결국 남편이 도시에 나가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부족한 수익 구조를 보완하고 있다. 농장 수입으로만 따지면 지난 10여 년간 연속적으로 적자를 기록했다.”
도시에서보다 생활비가 한결 덜 드는 게 시골 생활이라고 한다. 정말 그렇던가?
“귀촌의 경우엔 생활비 절감이 가능할 테지만, 귀농엔 이모저모 비용 지출이 많다. 이를테면 농사 장비와 시설 설치 등에 드는 재투자 자금이 필수적이다.”
“끝까지 달려 꽃피어보고 싶다”
김영혜는 귀농 10여 년을 이렇게 결산한다. “절반의 성공은 거두었다!” 비록 농업소득은 아직 시원치 않지만 애초 원했던 삶의 토대를 구축했으며, 원했던 자연과의 동행을 지속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는 생태환경 속에 살고 있음에 안도하는 것 같다. 아쉬운 건 남편으로 하여금 어쩔 수 없이 도시에 직장을 두게 한 점이지만, 관점을 달리하면 이는 이상적인 분업의 형태다. 똘똘한 전략이다. 하지만 그는 부부가 함께 농장일 하나에 몰두할 수 있길 바란다. 귀농의 목적이 애초 거기에 있었으며, 그래야만 진정한 만족을 구가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고, 따라서 농업소득을 안정적인 궤도 위에 올려놓아야만 하는 것이다.
파도에 시달리고서야 튼튼한 뱃사공으로 자란다. 시련이 성숙의 효모인 건 농사도 마찬가지. 그는 막연히 뛰어든 농사의 경험을 통해 한결 냉정한 눈을 얻었다. 지나온 날들을 점검해 한결 당차고 실속 있게 행진할 수 있는 솔루션을 찾아냈다. 바로 치유농업이다. 치유농업은 농산물만이 아니라 농가가 보유한 경관과 문화까지 자원으로 삼아 심신의 교정이 필요한 이들에게 치유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산업이다. 요사이 등장한 신종 트렌드다. 그는 이미 치유농업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치유농업에 필요한 여건을 더 보완할 참이지만 기본 틀은 잡혔다. 숙소, 심신단련실, 체험교육장이 있으며, 산책로와 숲속의 명상 공간도 구비했으니까. 부부가 오랫동안 해온 명상 수련 경력도 자산이다. 무엇보다 유능한 자산은 자연환경 그 자체라 할 수 있고.”
널찍한 농원 전역이 매우 정갈하다. 얼마나 많은 땀을 쏟아야 이런 모습이 나올까. 너무 과도한 근로에 얽매여 사는 건 아닌가?
“일이 버거울 때도 있다. 풀을 뽑다가 연골이 찢어지기도 했다.(웃음) 지난 10년을 돌아보면 시간을 낭비한 감이 있다. 사실 귀농 생활에 탄력이 붙은 건 5년 전부터다. 이제 도약할 시점이다. 나에겐 성취욕이라는 게 있다. 현재에 눌러앉는 성격이 아니다. 치유농업을 중심에 둔 개성적인 농원으로 키워나갈 참이다.”
이 농원은 매력적인 자연 풍경만으로도 호감을 준다. 치유농업을 위해 어떤 점을 보완할 계획인가?
“해발고도가 높아 접근성이 떨어진다. 이는 약점이지만 오히려 장점으로 어필할 수도 있겠지. 관건은 홍보에 달려 있다고 보고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
귀농을 통해 뭔가 변한 건 없나? 내면의 모습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MBTI(성격 유형 검사)로 보니까 ‘사고형 인간’에서 ‘감정형 인간’으로 바뀌었더라. 이 깊은 산골에 들어온 건 외부와 심리적 거리를 두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귀농이 주는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외향성이 강화된 것 같다. 한번 뜻을 크게 펼쳐보고 싶다는 열망, 끝까지 달려 완전하게 활짝 꽃피어보고 싶다는 심리가 나를 지배하고 있다고나 할까.”
단지 일에 파묻히기만 하면 ‘노잼’이다. 방향이 뚜렷하고 행보엔 격한 구석이 있어야 생동한다. 그는 질주하고 싶은 것이다.
김영혜가 주는 귀농 Tip
•사전에 귀농의 목표를 분명하게 설정하라. 대충 내려와서 대충 농사에 뛰어들었다간 쓴맛을 볼 수 있다. 농사 작목, 규모, 자금 능력, 유통 문제 등에 관한 구상은 물론 실행 방안을 미리 마련해두자.
•귀농교육을 미리 충분히 받아도 현장에선 헤맬 수 있다. 하물며 사전 귀농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귀농이라면? 이건 귀농 필패 비결에 속한다.
•원주민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못하면 고독해질 수 있다. 그러나 깊은 관계는 가능치 않다. 시골 정서와 도시 정서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를 미리 전제하면 소소한 상처 정도는 가볍게 넘어설 수 있다.
•무엇보다 내 몸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신경 쓰자. 몸 망가지기 쉬운 게 농사니까. 특히 풀 뽑기를 하다 관절염을 얻을 수 있다. 풀을 뽑을 땐 쪼그려 앉지 말고 퍼질러 앉아라.
•자력으로 수준 높은 농사 기술을 터득하기 어렵다. 반드시 멘토를 만들어 도움을 청하자.
농사는 흙에 땀을 쏟아 결실을 거두는 일이라는 점에서, 또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나 햇빛의 동향과 긴밀하게 연관된 일이라는 점에서 신성한 직업에 속한다. ‘농자천하지대본’이라는 말이 괜히 있겠는가. 하지만 농사로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기는 쉽지 않다. 귀농의 경우는 더욱 버겁다. 자칫하면 풍랑을 만나 표류할 수 있다. 올해로 귀농 5년 차에 이른 김광호(65, ‘예단비농원’ 대표) 역시 이를 잘 알고 농사에 뛰어들었다. 농사가 아무리 어렵더라도 장애물을 돌파해 기필코 부농의 꿈을 성취하겠다는 투의 결기로 무장한 건 아니었다. 그는 여느 귀농인들과는 다른 방향에 타깃을 두었다. 농업으로 경제 효과를 거둘 생각 자체를 아예 내려놓고 귀농했으니까 말이다. 다시 말하자면 소득 창출에 목적을 둔 귀농은 애초에 합리적이지 않다고 판단하고 시골에 내려왔다.
‘난 그냥 농사를 즐기는 것으로 만족할래! 그게 취향에 맞으니까.’ 김광호가 스스로 다짐한 목표가 그랬다. 농사를 즐긴다? 이게 가능할까? 자그만 텃밭 농사라면 몰라도 3000평이나 되는 농토를 재미 삼아 일구기로 작심하고 귀농을 하다니…. 김광호의 포부는 화통하고 유쾌하지만 평범을 초월해 낯설다. 그러나 그는 뜻한 대로 살아왔다. 지난 5년이 통째 즐거운 나날이었단다. 물적 소득은 별로 없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호황을 누리기 때문에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한다.
김광호는 30년간 서울에서 행정직 공무원 생활을 하다 퇴직했다. 은퇴했으니 이제 지도 펴놓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야 할 상황이 도래한 셈이었다. 하루 세 끼를 꼬박 아내가 챙겨주는 밥으로 채우는 ‘삼식이’ 노릇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내가 길을 터주었다. “30년간 고생한 당신, 이제 뭐든 하고 싶은 일을 하세요!” 이건 김광호에게 일종의 복된 신호였다. 진로 선택의 자유를 부여받았으니까. 그는 곧바로 내심에 두었던 행선지를 자비로운 아내에게 통고했다. TV에 나오는 ‘자연인’처럼 깊숙한 산골짝에 함께 들어가 살자는 제안을 한 거다. 그러나 아내에게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머리를 맞댄 상의 끝에 합의한 게 귀농이었다.
“이젠 용도 폐기된 인생이 시작되는 건가? 무엇으로 활로를 삼을까? 퇴직하자마자 고민했다. 어쩌면 공직과 함께 흘러간 세월보다 더 길 수 있는 여생을 즐겁게 살아갈 길을 찾는 게 숙제였다. 아내는 깊은 산골만 아니면 어디든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래 이곳으로 귀농하게 됐다. 처음엔 나 혼자 내려와 살았다. 농촌의 물정을 익히고 농사를 체험하는 일부터 선행하는 게 옳다고 봐서.”
선발대 역할을 했다? 빈 시골집을 빌려 썼나?
“지자체에서 운영하는 ‘귀농 준비자를 위한 미리 살아보기 프로그램’을 활용했다. ‘귀농인의 집’에서 1년간 살며 다양한 체험을 했다. 공과금을 제외한 모든 걸 무료로 제공하더라. 귀농 준비자들에게 매우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무엇보다 마을 주민들과 자연스럽게 소통할 수 있는 기회의 장이어서 좋았다.”
원주민들은 마을에 새로 등장한 귀농인에게 관심을 집중한다. 무대에 올라온 신인배우를 바라보듯 은연중 주시하게 마련이다. 불편은 없었나?
“처음에는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더라.(웃음) 그럴 수밖에 없으려니 하고 적극적으로 주민들 속으로 들어갔다. 매번 인사 잘하는 건 물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면 뭐든 나서서 도왔다. 그렇게 1년이 잠깐 사이에 지나갔는데, 그즈음 주민들이 비로소 속내를 밝혔다. 주민들로서는 외지인에게 일단 좋지 않은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했다. 귀농인이 마을 분위기를 흐려놓거나, 땅값만 올려놓는 등 폐단을 경험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결론은 이랬다. ‘당신은 다르다!’(웃음)”
집과 농토는 어떤 경로로 마련했나?
“시골에 빈집은 많다. 그러나 팔지 않는 집들이 대부분이다. 도시에 사는 집주인의 자제들이 반대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발품을 많이 팔아야 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마땅한 매물을 찾았으나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용케 마을에서 매물이 나왔고, 여러모로 맘에 들어 매입했다. 집은 튼튼하게 잘 지어진 구옥이다. 남향으로 들어앉아 환하다. 집에 딸린 전답 3000평도 세트로 나와 함께 샀다. 이건 점토질 토양인데 말 그대로 ‘문전옥답’이다. 운이 따라준 것 같다.”
100여 종의 작물 길러
김광호의 집은 마을 중앙부에 있다. 저만치 사방으로 높거나 낮은 산들이 펼쳐지고, 간혹 거쿨진 노송 숲이 보여 아늑한 분위기를 돋운다. 그에 따르면 이곳이 길지(吉地)란다. 뭐든 한번 해볼 만한 곳이라 한다. 뜻을 펼치기에 적격인 곳이라 한다. 그 ‘뜻’이란 농사를 즐기자는 데 있다. 여기에 기름진 농토가 있다. 딱히 빼어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쉬울 것도 없는 자연 풍광도 있다. 게다가 그의 조력자이자 지지자인 아내의 긍정적인 에너지까지. 이건 완벽한 조건이다. 따라서 농사를 한바탕 신나게 즐기지 않고 어떻게 견디랴. 김광호의 생각이 처음부터 그렇게 웅장했다.
그의 농원에선 현재 100여 종의 식물이 자란다. 거의 모든 농작물이 망라된 것 같다. 농사로 돈 벌 목적이 부재한 대신 농작물에 대한 호기심과 애착은 질겨 해마다 작물 수를 늘려왔다. 그래 다종다양한 결실물이 나온다. 하지만 이미 예상했듯이 소득 효과는 미미했다. 이 대목에서 귀농인들은 경악한다. 내가 이러려고 귀농을 했나? 머리를 감싸 쥐고 웅크려 고심하게 마련이다. 그러나 김광호에겐 고심할 이유가 없었다. 태연자약할 수 있었다. 애초 소득 문제라는 뇌관을 제거한 귀농을 구상하고 농사를 시작했기 때문에, 폭약이 터질 일 자체가 없었던 게 아닐까.
“돈벌이 대신 농작물을 취미 삼아 기르는 데 목적을 두자 모든 게 대체로 수월했다. 재배 기술은 서울에 살 때 이미 익혀둔 게 있었다. 18년간 남의 땅 25평을 빌려 주말농장을 일군 경험 덕분이다. 귀농교육도 충분히 받았다. 수년간 총 1000시간 정도 교육을 받았으니까. 요즘도 공부를 계속한다. 식물의 생태를 알면 알수록 농사 재미도 커지더라.”
농장에서 나오는 생산물은 어디로, 어떻게, 누구에게 가나?
“생산성에 의미를 두지 않은 농사라서 소출은 적다. 아마 남들의 반도 되지 않는 것 같다. 수확물은 도시에 사는 우리 아이들과 친지, 이웃, 방문객 등에게 나누어 준다. 손수 지은 깨끗한 먹거리를 남들과 나누는 일은 정말이지 행복하다. 남는 물량은 공판장으로 보낸다. 다른 농가보다 싼 가격을 매겨 로컬 푸드에 내다 팔기도 한다. 그런데 전체 매출은 실로 낮은 수준이다. 사실 지금까지 손에 쥘 만한 게 거의 없었으니까.(웃음)”
농장 일은 부부가 함께 하나?
“아내는 간접 지원을 한다. 농장을 놀이터로 삼은 남편을 인정하고 존중해주는 것만으로도 그지없이 고맙다. 아내가 농장에 모습을 나타내기만 해도 몹시 기분이 좋아진다. 농장 일이 쉽지 않다. 벼농사는 남에게 맡기기도 했지만 일의 양이 엄청 많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품이 많이 들망정 기본적으로 매사 재미있다. 식물들이 자식처럼 보이고, 병든 식물을 내 손으로 응급처방을 해 살려냈을 때는 어디서도 맛볼 수 없는 희열을 느낀다.”
모든 농부가 작물을 애지중지하며 비지땀을 쏟는다. 그렇지만 흔히 안정적인 소득을 올리지 못해 고민한다. 농사를 취미로 즐기는 당신의 방법을 의아하게 보는 눈은 없을까?
“초기엔 나의 미숙한 농사 기술을 구박하는 이들이 있었다. 취미 생활 형태의 운영 방식에도 ‘그게 뭐야?’라며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도 인정하고 있다. 농사의 목적과 방향이 서로 다르다는 걸 이해하면서.”
궁금하다. 농업소득이 미미한데 생활비는 무엇으로 조달하나?
“연금으로 산다. 부부 둘이 소박하게 먹고살기 충분한 수준이라 걱정이 없다. 연금이라는 수단이 없었다면, 경제의 불확실성이 자명했다면 농사를 취미처럼 즐기기가 불가능했겠지. 서울에서 가지고 살았던 욕심을 내려놓았다는 점도 시골 생활의 만족도와 안정성을 높여줬다. 무엇보다 만족스러운 건 내가 원래 좋아한 식물 재배를 맘껏 즐길 수 있다는 데 있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50%
알고 보면 풀들도 춤을 춘다고 했던가. 김광호는 식물들의 생동과 약동에 덩달아 즐겁다. 물과 햇빛과 공기만으로 광합성을 하며 성장하고 순환하는 식물들의 생태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깊숙이 관찰하면서, 그는 인생의 참다운 열매를 따는 듯 만족을 느낀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언설은 간결해 ‘식물이 너무 좋다, 농사가 재미있다’는 정도에 그치지만,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흥에 사로잡혀 사는 것 같다. 흔치 않은 형태의 ‘농사 삼매경’에 빠진 셈이다. 그는 또한 마을 이장을 맡아 동분서주한다. 50여 가구로 이루어진 집성촌에서 외지인이 이장에 선임되는 건 흔한 일은 아니다. 시골 마을의 권력은 보통 이장에게 집중돼 있다. 따라서 이장 선거전이 치열하게 펼쳐지는 마을도 드물지 않다. 물론 김광호의 관심은 마을 권력에 있지 않다. 공무원 출신으로 재능기부 차원에서 이장직 권유를 수락했다.
“올 들어 주민들과 마을대동회로부터 이장을 맡아달라는 권유를 여러 차례 받았으나 고사했다. 자꾸 요구하면 차라리 이사 가겠다고 강경하게 나가기도 했지만 끝까지 사양하긴 힘들었다. 그런데 이장 일을 하다 보니 이 역시 재미가 있더라. 보람도 크다.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바라보는 안목도 생겼다. 식물에 빠져 사는 것처럼 요즘은 이장 일에도 푹 빠져 지낸다. 농사에 50%, 이장 일에 나머지 50%의 에너지를 배분하며 산다.”
향후 지금의 일들에 어떤 걸 더 보태고 싶나?
“소득과 무관한 농사로 재미있게 살아보겠다는 꿈은 이미 이루었다. 원했던 삶과 지금의 삶이 일치하는 기쁨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깨소금 맛이라 해야 하나? 이젠 프로 농부를 지향하고 싶다. 귀농 2막이랄까. 농사의 방향을 전환, 소득 창출에 주력해볼 참이다. 준비는 이미 다 해놓았다. 농(農)식물원으로 가꿀 구상도 가지고 있다.”
놀이로 시작한 농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끌어가겠다는 것. 돈보다 취향을 중심에 두고 살아 만족스러웠던 날들도 이제 어깨 뒤로 넘길 시점이라는 얘기다.
김광호가 주는 귀농 Tip
•농사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 쉽지 않다. 시골에 왜 빈집이 많은지, 기존 귀농인들이 일쑤 귀농을 만류하는 까닭이 무엇인지 신중하게 헤아려보라.
•1만 평 이상의 농지 규모를 확보하거나 스마트 팜을 조성할 경우, 또는 특수작물을 재배할 경우 상대적으로 승산이 높을 수 있다. 그러나 막대한 투자비가 들어간다.
•지자체들이 주관하는 ‘미리 살아보기’ 프로젝트에 관심을 가져라. 큰돈 들이지 않고 농사와 농촌의 물정을 익힐 기회를 제공받을 수 있다.
•인터넷 정보처럼 빠르게 퍼지는 게 시골 소문이다. 주민과 융화하는 일에 정성을 들여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야 좋은 평을 들을 수 있다.
•부부 동반 귀농은 필수다. 혼자만의 귀농은 실패를 초래할 수 있는 첩경이다.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은 서울시 보람일자리사업을 통해 인생의 재도약을 꿈꾸는 4050 세대를 응원하기 위해, ‘모두 위한 내 꿈, 다시 뛰는 4050’ 캠페인을 펼칩니다. 본지는 서울시와 서울시50플러스재단이 함께한 보람일자리 사업을 통해 사회 곳곳에서 공공에 기여하고 있는 중장년들을 소개합니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서울북부지사에는 ‘이사님’이 4명 있다. 그들의 업무는 직원 관리·감독이나 지시가 아니다. 오히려 지사장이 요청하는 면담에 응하고 직원들의 행정 업무를 일부 분담한다. 대외적으로는 보람일자리 참여자로 불리는 ‘이사님’들의 이야기다.
널찍한 회의실에 들어서자 말끔한 캐주얼 정장 차림의 두 노신사가 반가운 인사를 건넸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서울북부지사의 ‘시니어 이사’ 이경규 씨, 김용균 씨가 그들이다. 업무 7개월 차,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이 하는 일을 줄줄 외울 정도가 된 두 이사는 일이 참 만족스럽다며 웃었다. “실은 보람일자리 참여자입니다. 보람일자리라는 이름을 참 잘 지은 것 같아요. 은퇴 후에도 사회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 일할 공간이 주어진다는 것이 만족스럽습니다. 임원으로 존중도 받고요.(웃음)”
배려와 예우, 극강의 업무 효율을 만들다
승강기안전관리법 제6장 제55조에 따라 설치된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은 승강기 안전인증 업무 대행, 교육 및 홍보, 시설 점검 등 승강기 안전과 관련된 일련의 업무를 하는 공공기관이다. 올해부터 보람일자리 신규 활동처가 된 서울북부지사는 참여자 4명과 동행하고 있다.
노련한 운영은 처음답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적극적인 지원·관리로 참여자를 시스템 안에 녹여내 한 해 만에 우수 활동처로 선정됐을 정도다. 강북50플러스센터의 추천 의견은 이렇다. “참여자들을 ‘이사님’이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사회 경험과 경력을 예우하고 있습니다. 업무 배치는 상담을 통해 하고, 그간의 경력(군인, 은행 지점장, 공무원 등)을 살려 일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경력을 살려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업무를 통해 보람을 느끼는 일을 한다는 보람일자리 사업 취지에 맞아 우수 활동처로 추천합니다.”
서울북부지사는 시작 단계에서 공을 많이 들였다. 지사장은 참여자와 1:1 면담을 통해 그동안 해온 일, 또 지사에서 하고 싶은 일을 경청한 뒤 업무를 맡겼고, 이후에는 전담 직원이 밀착 관리했다. 전담 직원은 참여자가 업무를 숙지할 수 있도록 내용을 갈무리해 전달하고 그때그때 생길 수 있는 질문에 답하며 적응을 도왔다. 이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참여자 성향과 의사에 가장 적합한 업무를 찾기 위해 월 1회 세심한 관심을 기울였다.
효과는 빠르게 나타났다. 7개월이 지난 현재 참여자가 담당 업무를 예상 일정보다 빨리 끝내 쉬엄쉬엄하라는 말을 할 정도다. 실질적인 효과도 거뒀다. 법률 위반 건수와 사후 관리 건수가 줄어든 것으로 확인할 수 있다. 참여자 이경규 씨는 서울북부지사 관계자들에게 공을 돌렸다.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나와 일하고 있는데, 지사장님을 비롯한 직원들이 많이 배려해줍니다. 서로 존중하고 예우하는 환경이라서 좋습니다. 업무 분담도 잘돼 있습니다. 주먹구구식이 아니에요.”
업무 이해도가 높아진 참여자들은 점점 일하는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근무 3개월여가 지나면서 고령자를 위한 오프라인 안전교육 안내 및 진행을 맡았고, 최근에는 홍보 캠페인도 담당하고 있다. 시스템 안에 녹아든 참여자들은 벌써부터 내년을 그리고 있다. 또 서울북부지사와 보람일자리를 함께하고 싶냐는 질문에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캠페인 전화를 돌리고 있습니다. 고령자의 경우 행정 처리를 못 해 법률을 위반하는 경우가 생각보다 많아요. 답답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형님이나 누님 같아서 최대한 자세히 설명해드립니다. 그럼 ‘이런 연락은 처음’이라며 감사해하세요. 민원인께서 만족스러워하면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 보람일자리요? 기회만 되면 계속해야지요!”
이동희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서울북부지사 지사장
“더 빨리 활동처 될걸 그랬어요!”
“내년에도 같이 계속해나갈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동희 한국승강기안전공단 서울북부지사 지사장은 묻기도 전에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을 꺼냈다. 그는 직원들의 행정 업무를 덜어주기 위해 시작한 일로 얻는 것이 참 많다면서 웃었다.
서울북부지사가 보람일자리 참여자를 파견받기 시작한 건 지난 4월이다. 참여자의 업무 능력과 적응력, 인수인계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존 직원의 업무 증가는 물론 보안 문제까지, 채용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이 많은 공공기관이라 다소 걱정이 있었지만 이 지사장은 한번 해보기로 했다. 직원들이 줄곧 호소하는 업무 과중을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판단해서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이 하는 일 중에는 행정 업무도 꽤 많습니다. 기술직 직원들이 현장에서 검사하고, 각자 맡은 행정 업무도 처리해야 하지요. 어떻게 하면 업무 강도를 낮춰줄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보람일자리 참여자를 받기로 했는데 아주 만족스러워요.”
이 지사장은 초반에 조금 수고스럽더라도 시간을 들여 교육하는 방법을 택했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이 하는 일은 지사장이 전체적으로 설명했고, 참여자에게 주어진 일은 전담 직원이 안내했다. 업무 분담에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본격적인 업무를 하기 전에 일부러 시간을 내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내용을 토대로 나름대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업무를 드렸고, 나중에 다른 업무가 더 적합할 것 같으면 바꿔드리면서 맞춰나갔습니다. 너무 잘 해주셔서 지난 4월에 시작한 게 아쉬울 정도입니다.(웃음)”
참여자들은 연착륙했다. 이 지사장은 수치로 드러날 만큼 업무 성과를 확인하고 있다고 한다. “한국승강기안전공단의 미션은 ‘승강기 안전, 국민 행복 실현’입니다. 관리 주체가 안전하게 건물을 살필 수 있도록, 또 법률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말씀드리는 일을 합니다. 효과는 생각 이상입니다. 일을 참 잘하시거든요. 어떤 업무를 드려도 생각보다 빨리 해내세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말 잘합니다.”
참여자들은 그 배경에 존중과 배려가 있다고 입을 모은다. 이동희 지사장은 진심이 통한 것 같다면서도, 되레 느끼는 바가 많다며 감사해했다. 정석에 가까운 사회생활과 업무 에티켓, 은퇴 후에도 회사에서 제 몫을 해내는 모습이 사내에 귀감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은퇴를 앞두고 있는 이 지사장 본인이 많은 자극을 받았다. 한평생 한국승강기안전공단에 몸담고 있다는 그는 은퇴 후 도전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에 눈을 밝혔다. “시니어 이사님들 에티켓은 완벽에 가까워요. 오랜 사회생활로 몸에 배어 있지요. 그 자체로도 본받을 만한데, 규칙적으로 생활하면서 보람일자리를 비롯한 여러 일을 하시는 게 참 보기 좋더라고요. 느끼는 바가 많습니다. 저는 30년 넘게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회사를 떠나면 내 사회생활도 끝이겠구나’ 하는 생각도 가끔 들죠. 그런데 우리 ‘이사님’들 보면 정책을 살피고 신청도 하면서 인생 2막을 열 수도 있구나 싶어요.”
팬덤에 관한 한 세대 차이나 문화 격차 문제는 잠시 넣어둬도 좋다. 시니어 팬덤은 K팝 아이돌 팬덤 문화까지 섭렵하며 시장에 넓게 손을 뻗치고 있다. 높은 경제 수준과 여유로운 시간으로 무장한 그들의 소비는 뭔가 다르다.
“좋다고 하길래 하루에 2포씩 먹고 있어요.”
2021년 2월 27일 방탄소년단(BTS) 정국의 한마디에 콤부차(차를 발효한 음료) 품절 대란이 빚어졌다. 개인방송 도중에 소개한 중소기업 티젠의 분말 형태 콤부차 한 달치 물량은 3일 만에 바닥 났다. 매출, 수출 모두 급증했다. 3월 첫 주 매출은 전주 대비 500% 증가했고, 수출도 전월 대비 800% 폭증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아미(BTS 팬덤)니까 가능한 일이지만, 아미만 가능한 일은 아니다. ‘영웅시대’로 대표되는 시니어 팬덤의 화력도 못지않다.
자동차부터 죽까지 트롯맨 뜨면 동난다
“시니어 팬덤은 소비 단위가 달라요. 자동차 같은 고관여 상품도 구매하죠. 범위도 넓습니다. 우리 삶 전반에 관련된 제품 소비가 이뤄지고 있어요.” 이현지 유진투자증권 미디어·엔터 애널리스트의 말처럼 시니어 팬덤의 소비는 단위와 범위 모두 남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쌍용차(현 KG모빌리티)다. 2020년 존폐 위기에 선 쌍용차는 TV조선 예능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터트롯’ 1등 상품으로 ‘G4 렉스턴’을 제공하고 ‘진’(眞) 임영웅과 광고 계약을 맺으면서 기사회생했다.
‘임영웅 효과’는 산업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년간 임영웅을 모델로 기용한 청호나이스는 실적이 꾸준히 개선됐고, 죽 브랜드 본죽은 CF 영상이 2000만 뷰를 넘기고 쇼핑백이 중고 거래되는 등 전에 없는 홍보 효과를 누리고 있다. 임영웅이 시축과 공연에 나선 FC서울의 K리그1 6라운드 홈경기에는 올 시즌 최다 관중 4만 5007명이 들어서기도 했다.
콘서트는 말할 것도 없다. ‘임영웅 콘서트 IM HERO TOUR 2023 서울’은 대기자만 최다 60만 명에 달했고, 6일치 공연 티켓은 발매 즉시 매진됐다.
음반 판매량과 스트리밍 횟수는 오랜 K팝 팬인 이현지 애널리스트도 놀랄 정도다. “임영웅 씨는 정말 대단해요. 정규 1집이 100만 장 넘게 팔렸거든요. 100만 장을 판 아이돌이 있긴 하지만, 사실 글로벌을 포함한 거예요. 임영웅 씨는 100만 장을 국내에서만 판 셈인데, 이는 거의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스트리밍은 글로벌 K팝 팬들도 견제할 수준이고요.(웃음)”
이현지 애널리스트는 시니어 세대가 ‘몰입의 대상’을 제대로 찾았다고 분석했다. “시니어는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요. 시간도 비교적 많고요. 그동안 쓰고 싶지 않아서 안 쓴 게 아니에요. 몰입할 대상이 없어서 못 썼던 거죠. 그런데 임영웅이라는 사람이 등장한 겁니다.”
이 몰입은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비즈니스 성장 전략가 데이비드 미어먼 스콧은 말했다. “고객은 떠나도 팬은 떠나지 않는다.”
“웃음이 없는 하루는 낭비한 하루다.”
- 찰리 채플린(1889~1977)
우하하하하하하하!
한 번 더!
우하하하하하하하!
독자 여러분, 일단 웃고 이야기 시작하겠습니다.
웃을 일이 없다고요?
속 편한 소리 하지 말라고요?
걱정이 태산인데 웃음이 나오냐고요?
그러니까 웃어야 합니다.
그럴수록 웃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웃어야 합니다.
웃지 않으면 병이 옵니다.
웃음에는 삶의 통찰과 지혜가 함축되어 있습니다.
“소고기 사주는 사람을 주의하세요.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습니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예요.”
허리가 꺾어질 만큼 웃었던 게 언제인지 떠올려봅시다. 흉도 허물도 없이 마냥 좋은 친구, 내 사정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가는 날, 저만치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구부정한 어깨에 팔자걸음 딛는 사람을 보는 순간, 한눈에 알아보고 실실 웃기 시작합니다. 시간은 훌쩍 열아홉 나이로 미끄러져 들어갑니다. 그러다 도로 앞까지 마중 나가 얼굴 마주하자마자 입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웃습니다. 말 한마디 없이 보기만 해도 웃깁니다. 웃는 나를 보고 친구는 더 크게 웃습니다.
사랑하면 예뻐지는 이유
카페에서 혹은 거리에서 사랑에 빠진 사람은 한눈에 티가 납니다. 옆에서 듣기에 말 같지도 않은 말에도 활짝 웃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깔깔거리고, 별것 아닌 걸 보면서도 키득키득합니다. 두 눈을 반짝이며 상대가 하는 말에 귀를 쫑긋 세우고, 시답지 않은 얘기에 손뼉을 치며 웃음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 순간엔 정말 세상 부럽지 않을 만큼 아름답고 잘생겨 보이기까지 합니다. ‘좋을 때다’ 이러고 지나가는 독자 여러분, 당신도 그렇게 예쁘고 멋진 순간이 있었습니다. 이제부터라도 다시 사랑하고 다시 웃고 다시 아름다워집시다.
완벽한 커뮤니케이션 수단
‘소가 웃을 일이다.’ 기가 막히고 어이없는 일을 당했을 때 흔히 쓰는 표현입니다. 이 말은 소는 웃지 못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동물도 감정을 느끼고 밖으로 드러내지만 기쁨을 웃음으로 표현하지는 못합니다. 필자도 ‘벼리’라는 반려견과 16년째 같이 살고 있지만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니까요. 동물은 사람과 달리 안면 근육이 웃을 수 있게 발달되지 않은 데다 생존에 웃음이 필수적이지도 않습니다. 웃음은 인간이 지닌 심리적 반응이며, 문화적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복잡한 감정과 생각을 웃음 속에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눈웃음, 코웃음, 너털웃음, 헛웃음, 비웃음, 박장대소, 파안대소, 포복절도, 요절복통 등 갖가지 웃음으로 우리 마음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우리 몸에는 완벽한 약국이 있다.
우리는 어떤 병도 고칠 수 있는 강력한 약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웃음이다.”
– 노먼 커즌스(1915~1990)
만병통치 명약이 공짜
컬럼비아대학교 졸업 후 ‘뉴욕 이브닝 포스트’ 기자로 활동하다 ‘새터데이 리뷰’로 옮긴 뒤 30년을 편집장 겸 발행인으로 활동한 노먼 커즌스(Norman Cousins)는 50대 초반 강직성 척추염이라는 희귀병에 걸려 침대에서 옴짝달싹 못 한 채 통증에 시달렸습니다. 병원에서 더 이상 해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근처 호텔에 방을 잡고 코미디 비디오를 빌려 보며 실컷 웃었습니다. 한참을 웃고 나니 극심한 고통이 사라지고 염증 수치가 줄어들었으며, 어느새 진통제 없이도 편히 잠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웃음 치료 효과를 몸으로 입증한 그는 6개월 만에 다시 걷게 되었고, 두 해 뒤 직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노먼 커즌스는 한 발 나아가 의과대학과 병원 관계자들을 설득하고 웃음이 가진 의학적 효과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75세 되던 해 ‘웃음의 치유력’(원제 Anatomy of an Illness)이라는 책을 펴냅니다. 출간되자마자 엄청난 반응을 얻으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됩니다. 그는 유효기간이 없어 부패하지도 않는 최고의 명약이 바로 웃음이며, 만병을 막아주는 방탄조끼가 웃음이라고 역설합니다. 게다가 웃음은 공짜입니다.
웃음이 주는 백만 가지 효능
‘웃음학’을 개척한 노먼 커즌스의 ‘웃음의 치유력’을 비롯해 리 버크와 스탠리 탠 의대 교수가 발표한 논문 ‘웃음과 면역체계’, 40년 가까이 웃음을 연구해온 스탠퍼드대학교 심리학과 교수 프라이 박사 등의 연구를 종합해 대표적인 웃음 효능을 정리해보았습니다. 매일 아침 큰 소리로 읽어보고 한바탕 웃으며 하루를 시작하면 건강과 행복이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라 믿습니다. 웃음으로 불치병을 이겨낸 노먼 커즌스는 웃음이야말로 참으로 놀랍고 긍정적인 최고의 약이자,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 고백했습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살아야 할 이유를 자신의 전 생애를 통해 증명해냈으니까요.
▶웃으면 통증을 줄이는 호르몬이 200~300배 많이 나옵니다.
▶웃다 보면 면역력이 증가하고 감기를 예방합니다.
▶웃음은 천연 혈액순환 개선제입니다.
▶웃으면 화난 사람이 아니라 환한 사람이 됩니다.
▶웃을 때 제일 예쁘고 가장 멋있습니다.
▶웃으면 어려 보입니다.
▶웃음은 조직의 유대감을 높여주고, 창의적인 사고를 가능하게 합니다.
▶아직 끝나지 않았지만 지면 관계상 이하 생략합니다.
가장 빨리 웃는 방법 : 까꿍 인사
숨 막히는 긴장 상황에서 누군가 터뜨린 웃음이 관계를 탁 풀어줄 때가 있습니다. 막힘을 뚫어주고 관계를 되살려주는 웃음이란 선물을 어떻게 활용하면 좋을까요. 아이 같은 마음, 동심을 회복하는 것이 웃을 수 있는 지름길입니다. 억지로 웃기도 힘든 당신께 가장 쉽고 빨리 웃는 방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바로 까꿍 인사입니다. 필자가 강의 초반에 객석을 돌아다니며 나누는 절차입니다. 까꿍 하면서 화내는 사람은 여태 보지 못했습니다. 독자 여러분도 저와 같이 해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짝을 지어 먼저 오른손으로 악수하며 “반갑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이번에는 악수한 오른손 위로 왼손을 마주 잡고 악수하며 “고맙습니다” 하고 인사합니다. 이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악수로 교차한 양손을 머리 위로 들어 상대와 눈을 맞춘 채 ‘까꿍’ 하고 인사합니다. 백이면 백 반드시 웃음이 터집니다. 꼭 해보셔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는 게 까꿍 인사입니다. 20대 젊은이부터 70~80대 어른까지 직접 같이 해보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누구와도, 어떤 자리에서도, 공적이든 사적인 모임이든 관계없이 ‘까꿍 인사’를 하는 순간 웃음이 빵 터집니다. 아이를 보듯 마음이 무장해제되면서 한순간에 활짝 열립니다. 웃을 수 있는 마음의 상태가 됩니다. 지름길이 맞으니 꼭 자주 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장 남편, 아내와 해보시면 압니다.
공자 맹자 노자 대신 웃자 살자 놀자
어떨 때는 웃음이 백 마디 말보다 훨씬 효과가 크고 반응도 즉각적입니다. 나라마다 언어, 문자는 달라도 웃음은 만국 공용어로 만인 소통 수단이 됩니다. 특히 함께 웃을 때 상대에게 호감을 느끼고, 같은 생각이라는 맞장구, 같은 편이라는 신호를 나타내는 관계의 척도가 바로 웃음입니다. 미국의 뇌과학자이자 심리학 교수인 로버트 프로바인은 연구를 통해 인간은 혼자 있을 때보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있을 때 30배 더 많이 웃는다고 밝혔습니다.
웃음이라는 신이 주신 선물을 마다해서야 되겠습니까. 얼른 받아서 잘 써먹어야 합니다. 공자도 맹자도 노자도 좋지만 성인 말씀 그대로 실천하기 무척 힘듭니다. 하지만 웃으며 살고 재밌게 노는 건 우리가 해볼 만합니다. 웃자, 살자, 놀자, 그리고 지화자! 웃으면 복이 와요.(笑門萬福來) 한 번 웃으면 한 번 젊어지고, 한 번 화내면 한 번 늙어지니까요.(一笑一少 一怒一老) 우하하하!
‘이게 뭔가? 세상에 뭐 이런 병이 다 있나?’ 몸 안에 심각한 병이 들이닥쳐 횡포를 부리는 건 알겠는데, 도무지 병명조차 알 수 없었던 정규원(54, 백민구절초연구소 대표)은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이 병원 저 병원 돌아다니며 갖가지 검사를 해봤지만 별 이상 없다는 얘기만 들었다. 조만간 죽음이 방문할 듯 몸의 통증이 자심했는데도 말이다. 매우 난처한 상황이었다. 고민과 궁리를 한 끝에 그는 마침내 시골로 내려가기로 했다. 시골이라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기로 한 거다. 시골의 자연환경이 괴로운 육체는 물론 덩달아 저하된 정신까지 끌어올려 줄 거라는 기대를 가졌던 것 같다. 그의 귀농은 이렇게 시작됐다.
정규원이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귀농한 건 2010년, 41세의 한창 나이 때였다. 인생의 전성기라 할 시즌이었으니 정리가 쉬웠으랴. 만족스럽던 직업(의류 관련 액세서리 사업)을 일거에 접는 것부터 쉬운 일은 아니었겠다. 게다가 그의 곁엔 살뜰한 아내와 토끼 같은 어린 자식 둘이 있어 발목 잡히기 십상이었다. 과연 아내가 귀농에 동의할지, 무엇보다 가족을 동반하고 귀농할 경우라도 아이들 교육은 어떻게 해야 할지, 이래저래 고심이 많았다. 그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렸다. 우선은 혼자 외진 산속에 들어가 쑥이나 고사리처럼 조용히 사는 게 좋겠다는 쪽으로. TV에 나오는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살며 병부터 다스리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을 바꿔야 했다. 아내가 동행을 자청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누구나 알 만한 일이지만, 대부분의 아내는 남편이 귀농을 선창할 경우 일단 반기를 든다. 매우 영민한 종족인 아내들은 날이면 날마다 풀을 뽑다가 뱀을 만나 까무러칠 가능성이 농후한 귀농이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는 걸 직관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정규원의 아내는 시골행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그의 얘기는 이렇다. “아마도 아내는 가정을 지켜야 한다고 판단한 것 같다.”
이민만큼이나 어려운 역경과 맞닥뜨릴 수 있는 게 귀농이다. 하물며 남편만의 단독 귀농이라면? 이는 가정의 불안정을 촉진하는 지름길이다. 최악의 경우 가정의 해체까지 불러들일 수 있다. 정규원의 아내는 이와 같은 리스크를 고려해 전향적인 판단을 했을 테다. 아내의 대범한 태도에 힘을 얻은 정규원은 마침내 귀농 거사를 착수하게 됐다. 서울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사업을 정리한 뒤 가족 모두를 대동하고 시골로 내려갔다. 그가 귀농한 곳은 할아버지의 고향인 충북 청주시 문의면이다. 이왕이면 아주 낯선 객지보다 연고가 좀 있는 곳이 정착에 유리하겠다는 생각으로 점찍은 곳이다. 거처는 농촌 마을이 아닌 면 소재지에 마련했다. 초등생 아이들의 등하교 편의를 배려한 결정이었다.
“귀농 초기엔 건강 회복에 중점을 두었다. 텃밭 농사를 통해 직접 기른 채소로 만든 음식을 주로 먹었고, 부지런히 뒷산을 오르내렸다. 명상센터에 나가 수련을 하며 마음을 돌보는 일에 집중하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농사에 대한 구상도 많이 했다. 논을 사 벼농사를 시도하기도 했다. 쌀만큼은 직접 농사지어 먹자는 아내의 의견에 공감해서였다.”
귀농 전에 미리 받아둔 귀농교육이나 농사에 관한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나?
“서울에서 ‘인드라망 생명공동체’가 주관한 귀농교육에 관심이 있어 아내와 함께 참여한 경험이 있다. 경기도 의왕에 텃밭을 마련해 작은 농사를 지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소소한 경험치에 불과했다. 사실 계획 없이 막연한 귀농을 한 셈이었다. 건강 문제가 화급해 사전 준비를 할 겨를이 없기도 했다.”
농업만큼 만만치 않은 직업이 드물다고 알려져 있다. 섣불리 농사에 뛰어들 일이 아니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까?
“난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다. 농사로 가족을 건사하느라 고생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기에 농업에 매력을 느껴보진 못했다. 하지만 한줄기 동경 같은 게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걸 알겠더라. 농부로서 긍정적인 풍모를 지녔던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귀농교육은 귀농 이후 적극적으로 받았다. 이를테면 지역의 농업기술센터에서 1년간 교육을 받았다. 친환경 농업을 기본 방향으로 정한 바 있어 관련 공부를 해 유기농업기능사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전자상거래 등 다변화하는 디지털 환경에 적응할 필요를 느껴 E-비즈니스 교육도 받아두었다.”
일련의 농업교육을 이수한 뒤 비로소 본격적으로 농사를 시작했나? 아니면 몸 치유에 치중한 시간이 더 많았나?
“치유와 농사를 병행했다. 그게 바람직한 길이기도 했다. 농사일을 하면서 건강도 서서히 좋아졌고, 좋아지는 건강 상태에 따라 농사에 대한 의욕도 상승했으니까. 2013년엔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는 귀농인들과 함께 협동조합을 만들어 상생의 토대를 마련했다.”
멧돼지들이 농장을 초토화하기도
정규원이 선택한 주 작목은 구절초다. 구절초를 재배, 가공식품을 만들어 판매한다. 현재 그는 산속에 있는 4000평 규모의 구절초 농장을 운영한다. 바야흐로 유능한 구절초 농부로 부상하고 있다. 출발은 미미하고 미묘했다. 할머니 묘소에 벌초를 하러 갔다가 가을바람에 살랑대는 구절초 꽃을 본 기억을 잊을 수 없어 200평 남짓한 작은 땅에 구절초를 심은 게 구절초와 인연을 맺은 계기라는 게 아닌가. 일종의 감성적 충동으로 시험 재배 삼아 구절초를 심어봤을 뿐인데 이게 향후의 길을 환하게 열어줬다.
“남에게 빌린 200평짜리 작은 밭에서 거둔 구절초로 조청을 만들어봤는데 50인분 밥솥 하나 분량의 조청이 나왔다. 판매 목적으로 만든 건 아니었다. 주변 사람들과 나누면 된다는 생각으로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조청 품질이 좋다며 구입을 원하는 사람이 많았다. 홍보도 해주었고. 이렇게 기대하지 않았던 판매 효과까지 거둔 뒤엔 서서히 생산량을 늘려나갔다. 자연스럽게 구절초 농사에 본격 입문한 셈이다.”
조청만 생산하는 건 아니겠지?
“다양한 제품을 생산한다. 구절초꽃차, 모종, 체험 상품인 에코화분, 그리고 구절초블랙이라 이름 붙인 농축액 등을 생산한다. 주력 상품은 구절초블랙이다. 이건 유기농 구절초 함량 97%에 달하는 제품으로 나름 야심을 가지고 개발했다. 현재 상표출원 절차를 밟고 있다. 소비자의 80% 이상은 구절초 제품을 약용 목적으로 구입한다. 구절초블랙은 이와 같은 소비자의 니즈에 부응하기 위해 개발됐다.”
구절초 농사 전체 과정 가운데 어려운 부분은 어떤 것인가?
“모든 농사가 그렇듯 구절초 역시 제초 작업부터 뭐 하나 손쉬운 게 없다. 재배 기술 습득은 비교적 용이하다. 문제는 날씨 변동이다. 예상하지 못한 폭우와 긴 장마엔 구절초가 맥을 못 춘다. 과도한 습기에 약한 작물이니까. 배수시설을 완비하고 밭에 경사도를 만들어 극복하는 수밖에 없다. 병충해 예방을 위한 선제적 대응 능력도 필요하다.”
흔히 병충해 방제는 농약에 의존한다. 당신의 경우는 어떤가?
“유기농업은 농약 없는 농사를 추구한다. 그러기 위해 생태환경 유지에 공을 들인다. 난 구절초 농장 복판에 억새섬이라 부르는 작은 숲을 조성해 자연생태와 평형을 이루도록 했다. 이 작은 숲은 병충해의 기습을 완충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사마귀 알집도 활용한다. 미리 채집한 사마귀 알집을 봄철에 방사하는 것인데, 부화된 사마귀들이 해충들을 먹어치운다. 이렇게 사마귀들이 농장을 지켜준다. 그런데 난해한 복병이 하나 있다. 바로 멧돼지다.”
멧돼지 피해가 심각했다는 얘기겠지? 그런데 멧돼지가 구절초도 먹나?
“구절초를 먹는 건 아니고 땅속에 있는 굼벵이를 꺼내 먹기 위해 밭을 아예 농부처럼 갈아엎는다. 한번은 멧돼지 군단이 몰려와 농장을 투철하게 초토화했다. 징을 쳐대고, 포수를 불렀지만 아무 소용없더라. 포수들이 야간 매복을 했으나 잡을 수 없었다. 녀석들의 공격은 한 달간 이어졌다. 내가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울고 싶은 심정이다.(웃음)”
구절초 향수를 개발하고 싶어
농사로 긍정할 만한 성과를 거두고 안락을 얻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오죽하면 귀농을 고행에 견주랴. 정규원은 비지땀 이상의 피땀을 쏟았다. 덕분에 순항을 거듭했다. 매우 어려운 사안으로 알려진 판로 문제도 길을 잘 찾아 해결했다. 생명운동을 지향하는 생활협동조합 ‘한살림’과 관계를 맺어 상품을 납품, 꾸준히 안정적인 경영을 해왔다. 세상에서 익힌 처신과 경험을 슬기롭게 제련해 귀농 생활의 재료로 활용하는 능력도 뛰어나 안정적인 행보의 거름이 됐다. 그의 언사는 나직하고 다소 어눌하다. 반면 내부엔 뭔가 강철 같은 게 들어 있다는 느낌을 풍긴다. 이기심은 줄이고 이타적 선의를 키워 나아가는 게 삶의 정수를 맛보는 길이라는 신념을 육화한 인간 유형이랄까. 그는 사실상 신념을 밀어붙이며 당찬 귀농 생활을 해왔다. 2013년에 결성한 문화적 농업 공동체인 유기농협동조합에 이어, 2017년엔 경제 공동체인 마을기업 ‘백민구절초연구소’를 만들어 리드하고 있다. 그렇다면 건강 문제는? 여전히 아픈 몸을 고독하게 끌어안고 농장에서 뛰나?
“실로 고통스러웠다. 오죽하면 몸 하나 살려보자고 귀농을 했겠는가? 몸이 추락하자 온갖 회의가 몰려들기도 했다. 이 지경으로 몸을 망쳐놓다니, 난 패배자야! 그런 넋두리가 잦았다. 그런데 기대보다 빠르게 건강이 회복됐다. 2017년에 이르러선 병의 늪에서 거의 완전히 해방된 걸 알았다. 따라서 마을기업 결성에 나설 수 있었다.”
아이들이 어느덧 대학생으로 자랐다지? 뒷바라지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 가계 형편은 어떤가?
“서울에 있던 집을 판 자금의 절반쯤은 귀농 초기에 다 까먹었다.(웃음) 농업으로 소득을 거둔다는 게 쉽지 않다. 그러나 이젠 꾸준히 소득이 늘고 있어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가족 모두 건강하게 잘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
부인은 당신의 농사에 어떤 식으로 조력하나?
“아내는 아내대로 일이 있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강의한다. 각자의 일을 하며 살아가는 상황에 우리 부부는 만족한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고마운 게 아내이고.”
만약 원점으로 돌아가 다시 귀농을 하게 된다면 지금과 어떤 점이 달라질 거라고 보나?
“(잠깐 생각하다가) 일을 좀 줄여 가족과 함께 더 많은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귀농 방식을 모색할 것 같다. 그러나 그게 가능할까? 내겐 아직 꿈이 많다.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는 과욕과 과속 없이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농장을 키워왔다. 하지만 확장에 대한 갈증은 여전하다. 구절초 가공 제품을 세계 시장에 선보이고 싶고, 구절초의 아찔한 향을 재료로 한 향수 개발에도 뜻을 두고 있다. 그 매너리즘 없는 정신이 그의 돛을 밀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정규원이 주는 귀농 Tip
•집과 농지를 서둘러 구입할 것 없다. 평생의 삶터로 삼을 경우엔 더 신중해야 한다. 처음엔 남의 농지를 빌려 활용하는 게 현명한 방법이다.
•처음부터 농사 규모를 크게 설정하는 건 금물이다. 내 농사는 작게, 그리고 남의 일도 도와주면서 농사 물정을 익히는 게 필요하다.
•농업 교육기관에서 만난 귀농인들과 적극적으로 교류하자. 모임을 만들어도 좋다. 결국은 귀농 에너지원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농사만으로 자립하기 쉽지 않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을 살린 일거리를 만들어 수입을 보완하자.
•구절초 농사에 뜻이 있을 경우 500평 정도의 작은 규모로 시작해야 리스크를 줄일 수 있다. 판로 문제에 대한 사전 연구도 필수다. ‘한살림’ 같은 생활협동조합에 가입해 활로를 모색하자.
건강을 잃고서야 절절한 심정으로 세상과 자신을 돌아보는 게 사람이다. 위중한 병을 얻었을 때 인생의 유한함을, 시간의 소중함을 비로소 뼈저리게 절감하며 새롭게 눈을 뜬다. 함지애(58, ‘지애의 봄향기’ 대표)는 40대 때 폐암 1기 선고를 받고 투병을 했다. 용케 조기에 발견된 암인 데다 수술이 잘돼 예후가 좋았다. 천운으로 병마를 다스렸으니 정상적인 일상으로 복귀할 수 있을 듯싶었다. 하지만 얼마 뒤 폐암보다 무섭다는 폐섬유증(폐가 굳어지면서 심각한 호흡 장애를 불러일으키는 질환)이 다시 기습했단다. 어이하나? 어떻게 일어서야 하나? 폐섬유증 수술을 마친 함지애는 고심 끝에 서울 생활을 접고 고향인 김제로 내려갔다. 그건 요양을 위한 낙향이었지만 귀농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남은 인생을 덤으로 여기고, 이제 시골에서 제대로 한번 잘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했다는 점에선 당찬 투신이자 기꺼운 모험이었다.
서울에 살 때 그는 의류유통업을 했다. 중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을 동대문 상가, 남대문 상가에서 뛰었다. 뛰더라도 그냥 뛴 게 아니라 경주마처럼 열렬한 질주를 했나? 그의 가게엔 자주 고객들이 줄을 섰다지. 아마도 그의 천성일 패기와 근성이 성과를 불러들였던 것 같다. 마침내 자수성가로 우뚝하게 일어선 이라는 소리를 듣기에 이르렀다. 몸에 중병이 찾아와 위세를 부리는 일이 없었다면 서울을 뜰 일이 없었으리라. 시골살이? 그건 그의 사전에 아예 없었다. 생각만으로도 시골 생활은 무섭고 싫었다고 한다. 그러나 병을 통과하면서 생각이 변했다. 삶의 방향이 확 바뀌었다. 이렇게 뜻밖에 찾아온 변곡점은 차라리 하나의 기쁜 선물이었다. 낙향 이후의 삶이 한결 새롭고 만족스럽다는 게 아닌가. 시골에 내려와 비로소 인생의 향긋한 열매를 따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 이왕 삶을 바꿀 거라면 다 내려놓고 가자!”
낙향 때 그의 머리에서 나부낀 기치가 그랬다. 인생을 레이스하는 데 쓸모가 큰 방편으로 여겼던 욕심과 경쟁심을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물질이든 행복이든 가급적 손아귀에 한가득 움켜쥐고자 했던 지난날의 타성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생존의 정글에서 지친 노루가 쉴 만한 물가를 찾아가듯이 마음을 비우고 낙향했다. 사람이 마을을 비우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 싶지만,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무가치한 것들을 종량제 봉투에 담아 내다 버렸다. 그게 병에서 벗어나 건강을 회복할 수 있는 유력한 길이라고 봤다. 함지애가 김제로 내려간 건 2012년. 초기 한동안은 요양에 전념했다.
“텃밭 농사로 거둔 깨끗한 채소류를 먹거나, 산야에서 약초를 얻어 섭취했다. 도시에 비할 수 없이 맑은 공기도 몸에 좋았다. 무엇보다 반가운 건 시골 생활이 주는 평온함이었다. 마음이 그토록 편안해지다니, 예상과 기대 이상의 만족감을 맛보며 안도했다. 건강도 좋아졌다. 빠른 속도로. 웃음을 달고 살다시피 했으며, 이웃들과 좋은 사이로 지냈다. 아, 시골에 오기를 잘했어. 좀 더 빨리 내려올걸! 자주 그런 생각을 했다.”
유능한 강소농 모델로 떠올라
잃었던 건강을 어느 정도 되찾으면서 함지애는 슬슬 농사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별일이 일어나지 않는 고즈넉한 생활은 적성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일을 해야 성장한다는 게, ‘일에 대한 불타오르는 열정이 있어야 즐거울 수 있다’는 게 그가 인생에서 배운 일종의 공리다. 농사에 뛰어드는 방식은 다분히 조직적이었다. 여러 농업 교육기관을 통해 공부부터 충실히 하는 한편, 대담하게도 5000여 평의 전답까지 마련해 바닥을 다졌다.
“농토에 벼, 찹쌀, 보리, 콩 등을 재배했다. 농사 방법은 친환경 농업을 추구하기로 했다. 안전하고 깨끗한 농산물로 고추장, 된장, 청국장, 간장을 만들자는 게 기본 방향이었다.”
혼자서 5000평이나 되는 너른 전답에 농사를? 그게 어떻게 가능하지?
“주로 위탁영농 방식으로 농사를 했다. 이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더라. 봄철의 논밭 갈이부터 가을철 수확까지 전 과정을 대행해주니까. 그런데 귀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교육이다. 사전에 부지런히 교육을 받아야 한다. 난 나름대로 열심히 농업을 공부했다. 건강에 자신감을 갖기 시작하면서 농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초기 5~6년은 수련기였다. 거의 공부 기간이었다. 이때 다수의 농업 관련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어디서 어떤 교육을 받았나?
“전주에 있는 한국농수산대학 가공학과에 적을 두고 배웠다. 버섯과 화훼 공부도 병행했다. 김제에 있는 농업기술센터를 통해서도 배운 게 많았다. 전통장류, 조청, 꽃차 등에 관한 이론과 실재를 교육받았으니까. 이렇게 공부하며 농어촌체험지도사, 전통장류제조사, 꽃차 소믈리에, 천연발효식초 제조관리사 등 자격증 여러 개를 취득했다.”
농업에서 가장 중요한 건 판로 부문이다. 판로와 관련해서도 사전에 공부해둔 게 있었나?
“판로 문제야말로 농업 경제의 핵심이라는 걸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따라서 정보화 공부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덕분에 농사 시작과 동시에 SNS 마케팅을 위해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었다.”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은 식초 사업으로 열었다지?
“2018년에 식초 생산의 기반을 조성할 수 있었다. 작업장과 체험장을 지어 생산과 체험 교육을 병행하기 시작했다.”
다양한 가공 분야 가운데 식초를 선택한 이유는?
“아까 말했지만 난 농업 관련 공부에 많은 시간을 썼다. 딴엔 제법 공부를 했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어느 수준인지, 뭐 좀 실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테스트할 필요가 있었다. 테스트 수단으로 식초 사업을 택한 건 식초가 사람 몸에 가장 좋은 식품이라고 생각해서였다. 나의 건강을 위해서도, 남의 건강을 위해서도 식초만큼 좋은 게 없다고 봤으니까.”
촘촘한 사전 준비에 힘입어 식초 사업은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특유의 현미식초를 만들어 특허 등록을 냈으며, 연잎식초라는 희귀한 제품을 만들어 역시 특허를 받았다. 스스로 설정한 테스트를 좋은 성적으로 통과한 셈이다. 이후 그는 식초의 이웃사촌인 술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전통주에 관한 공부를 미리 해둔 상황에서였다. 따라서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일단 필이 꽂히면 냅다 덤벼들어 몰두하는 평소의 습성과 기량을 풀가동해 전통주 개발과 생산에 주력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성과가 주어졌다. 각종 경연대회에 출품한 그의 술이 큰 상을 연달아 받으며 일약 알아보는 눈이 꽤 많은 실력자로 부상했다는 게 아닌가. 그는 2019년 충남도 농업기술원이 후원한 ‘우리 발효술 경연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2021년엔 ‘대한민국 명주대상’ 경연에서 청주 부문 대상을, 2022년엔 광주MBC가 주관한 ‘우리 술 어워즈’에서 ‘왕중왕’상을 거머쥐었다. 전통주 초심자가 거둔 만만치 않은 성취였으니 이변이라 말 못 할 것도 없겠다. 이제 그는 술과 더불어 유능한 강소농의 모델로 떠올랐다.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것
“난 술에 미친 여자다.(웃음) 좋은 전통주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양조엔 디테일한 기술력이 필수다. 누룩에서 발생하는 미생물 효모로 단맛과 신맛 등 풍미를 지닌 술을 빚어내기 위해선 반복적 실험이 선행돼야 한다. 술맛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다. 미치지 않고선 도달할 수 없는 게 양조다.”
어떤 술들을 만들고 있나? 가장 자부하는 술을 꼽는다면?
“현재 6종류의 술을 생산한다. 대표 상품은 ‘초야’(初夜)라는 청주다. 신혼 첫날의 로맨틱한 분위기를 술에 담았다는 의미로 지은 이름이다. 탁주인 ‘순애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든 술이다.”
시중에 수많은 민속주가 쏟아져 나오고 있다. 당신의 술은 어떤 차별성을 가지고 있나?
“남들은 흔히 말한다. 여러 가지 꽃을 양조 재료로 삼은 꽃술은 함지애의 것이 뛰어나다고. 민속주를 만드는 이라면 누구나 ‘이게 바로 한국의 술이야!’라고 자신할 만한 술을 만들고자 노력할 텐데, 나 역시 그렇다. 그런데 술의 풍미 수준을 가르는 건 기술력보다 정성스러운 마음과 손길에 달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이를테면 어머니가 어린 자식에게 먹일 음식을 만들 때처럼 사랑과 정성을 다하는 마음. 그게 좋은 양조의 비결이라 믿는다.”
양조란 창의적 감각이 요구되는 난해한 장르다. 자력으로 단기간에 일정한 성취를 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서 궁금하다. 누군가에게 도제식 수업을 받은 적은 없었나?
“운 좋게도 좋은 스승들을 만났다. 명품 전통주 ‘호산춘’의 명인 이연호 선생님에게서 많은 걸 배웠다. 한국전통주연구소 소장인 박록담 선생님을 통해서도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다. 이 스승들 덕분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사실 시골에 내려온 이후 나는 이렇다 할 실패나 착오를 겪지 않았다. 이건 순전히 좋은 인간관계가 가져다준 선물이었다. 좋은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 좋은 걸 배웠고, 배운 걸 토대로 일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다. 일뿐만이 아니다. 삶의 질 자체가 아등바등 살았던 서울에서보다 훨씬 좋아졌다.”
좋은 사람들과의 관계로 일과 생활, 양면에서 선순환을 해왔다는 얘기다. 남의 가르침과 의견을 경청해 피드백으로 삼기. 이웃과 도타운 우정을 나누는 일에도 사업 이상의 정성을 쏟아 감흥을 누리기. 이쯤이면 결함 없는 생활이다. 인생의 중세시대라 할 만한 투병기는 어느덧 종료됐다. 여러 측면에서 서울에 살 때와 완연하게 변했다. 이제 그가 지닌 지배적인 감정은 만족감, 그 하나란다.
다만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유지되고 있는 양상이 있으니, 여전히 바쁘게 산다는 게 그렇다. 함지애가 만드는 건 식초와 전통주만이 아니다. 들에선 곡물을 생산하며 장류 사업도 여전히 지속하고 있다. 대파에서 피어나는 보랏빛 꽃을 부재료로 가미한 이색 꽃두부도 생산한다. 마을 부녀회장을 맡기도 했던 그다. 김제 시내에 오픈 스튜디오를 두고 대표를 맡고 있는 ‘징게맹갱 우리술 협동조합’의 기지로 활용하고 있기도. 독거노인과 결손가정을 돌보는 자선활동에도 적극적이다. 시내의 침체된 구역 일부를 놀이문화 공간으로 재생하는 일에도 앞장서고 있다. 일의 가짓수가 이토록 넘치다니. 그는 남몰래 비명을 지르는 건 아닐까? 일에 치여 부질없이 소비되는 뭔가가 있는 건 아닐까?
“투병 이후의 삶은 덤으로 주어진 거라고 생각하자 모든 게 감사하게 다가왔다. 희로애락은 여전하고 때로 눈물도 나지만, 내가 하고 싶은 걸 비로소 하고 있다는 실감으로 행복하다. 돈을 벌려고 바동거렸던 과거에서 벗어난 것만도 어딘가? 밝고 에너지 넘치는 본성을 회복한 건 또 어떻고? 욕심을 내려놓고, 짧고 굵게 살다 가면 된다는 생각이다.”
돈보다 소중한 가치를 가진 게 많다는 걸 알면서도 흔히들 까먹고 산다. ‘욕심에 휘둘리는 삶은 이제 싫어!’ 함지애의 드라마를 난 그런 외침으로 새겨두기로 했다.
함지애가 주는 귀농 Tip
•땅과 집을 마련하기 이전에 귀농 교육부터 충분히 하라. 지자체마다 운영하는 ‘1년 살아보기 프로그램’ 같은 걸 통해 농촌 생활을 미리 경험하는 것도 좋다. 그 과정에서 나의 숨겨진 역량을 발굴할 수 있으며, 과연 귀농을 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을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귀농 초기 3년 정도는 성공을 위한 수련기로 삼아 나를 알아가는 시간 내지는 농사의 방향을 모색하는 기간으로 활용하자. 농업의 경제 효과는 현명한 운영을 했을 경우에도 대체로 귀농 5년 이후에나 발생한다고 보면 된다.
•도시에서 쌓은 경륜이나 특기를 살려 재활용하라. 이를테면 꽃에 조예가 있다면 꽃차 사업에 도전하는 식으로.
•여성의 단독 귀농을 두려워하지 마라. 다만 남다른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귀농 초기엔 소득 발생이 전혀 없을 가능성이 많다. 예비비 확보가 필수다.
최근 모두를 위한 디자인으로 알려지며 ‘유니버설 디자인’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증가하고 있다. 우리말로 하면 ‘보편적 설계’라고 하는데, 이 개념은 교육 분야에도 도입됐다. 바로 ‘보편적 학습 설계’(Universal Design for Learning)다. 장애가 있든 없든, 나이가 많든 적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전 생애에 걸친 평생교육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는 평생을 특수교육에 몸담아온 이한우(56) 국립특수교육원 원장이 생각하는 모두를 위한 평생교육과도 같다.
보건복지부 ‘2020년 장애인 실태조사’의 연령별 장애 분포에서 65세 이상 비율은 49.9%로 절반에 달했다. 2008년(36.1%) 이래 수치가 꾸준히 증가하며, 75세 이상 초고령 장애인의 비중도 늘어나는 추세다. 아울러 40세 이상은 88.1%로, 장애인 10명 중 9명은 중장년임을 알 수 있다. 고령화에 따라 중장년 장애 인구가 늘어나는 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고령자는 시력·청력·인지력 등의 감퇴를 겪기에 장애 등록 여부를 떠나 불편을 호소하며, 돌봄과 안전에 대한 필요성이 증가한다. 역으로 장애 학생 중에서도 이와 유사한 요구를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단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장애 학생과 노인을 위한 지원책에는 일치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장애 학생에게 유용한 서비스는 노년층뿐 아니라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됩니다. TV 리모컨만 해도, 몸이 불편한 장애인에게 꼭 필요하지만 이젠 다들 일상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도구잖아요. 거동에 문제가 없더라도 직접 TV 모니터의 전원을 누르러 가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또 휠체어 이동을 위해 계단 대신 경사면을 설치한다고 불편해지는 게 있나요? 그렇게 유니버설 디자인이나 관련 서비스는 모두에게 편리한 환경을 제공하죠. 혹여 사고로 또는 나이가 들어 장애를 겪게 된다면 나를 위한 것이 될 수 있고요. 통계를 보면 선천적 장애와 후천적 장애 중 후자가 90% 이상입니다. 건강하다고 해서 등한시할 수 없는 거죠. 그런데도 여전히 이러한 지원을 장애인을 위한 혜택처럼 여겨 반대하거나 불필요하게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장애 학생 위한 콘텐츠, 고령자에도 효과적
올해 2월 교육부는 디지털 기반 교육 혁신 방안으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해 ‘모두를 위한 맞춤형 교육을 실현’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립특수교육원도 이에 발맞춰 디지털 기반 장애 학생 맞춤형 교육 지원을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치고 있다. 그 일환으로 팬데믹 시기에 구축했던 클라우드 기반 장애 학생 원격교육 플랫폼 기능을 개선하는 작업도 이뤄졌다. 시각장애 학생을 위한 화면 확대·대체 텍스트, 청각장애 학생을 위한 실시간 자막, 지체장애 학생을 위한 쉬운 화면 조작, 지적장애 학생을 위한 이용자 인터페이스(UI) 단순화 등을 제공하기 위함이었다. 이한우 원장은 이러한 기술이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에도 활용 가능하리라 예상했다.
“최근 북유럽에서는 사회 서비스 패러다임이 ICT 기반으로 급변하면서 복지 기술(Welfare Technology) 개념이 확산되고 있습니다. 자립자조, 사회적 네트워크, 건강관리 서비스 접근성 등을 아우르는 복지 기술은 장애 학생과 고령층 모두에게 편리하게 활용 가능하죠. 이러한 차원에서 우리 원에서 개발한 플랫폼 설계 원리가 노년층을 위한 웹사이트 구축에도 효과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봐요.”
국립특수교육원에서는 이외에도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교육 콘텐츠 개발 및 보급에 힘쓰고 있다. 무인정보단말기 교육용 콘텐츠도 그중 하나인데, 이 원장은 장애 학생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도움을 받은 자료라고 덧붙였다.
“하루는 햄버거를 사러 갔는데, 주문을 받지 않는 거예요. 봤더니 키오스크(무인 주문 기계)가 있더군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결국 빈손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나서 우리 원에서 비대면 무인서비스 확대에 따라 선제적으로 개발했던 장애학생 무인정보단말기 교육용 콘텐츠가 생각났습니다. 나도 한번 같은 콘텐츠로 학습해보기로 했죠. 시니어인 제가 보기에도 어렵지 않게 잘 설명돼 있었어요. 올해는 SK텔레콤에서 협력 사업으로 서울, 경기 특수교육기관에 강사와 무인정보단말기를 제공해 준 덕분에 학생들이 직접 우리 원이 개발한 콘텐츠를 실습할 수 있게 됐습니다. 물론 교실에서 PC나 모바일로 콘텐츠를 이용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애 학생의 경우에는 실제와 유사한 무인정보단말기로 해 보는 연습이 필요하니까요. 그런 과정이 우리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됐다고 봐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제는 키오스크로 주문하기 자신 있습니다.(웃음)”
일찍이 이 원장은 해당 콘텐츠가 노인층에도 보급할 만한 유용성을 갖췄다고 판단했다. 지난해에는 시니어 정보화 교육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강사들을 대상으로 그 효과성을 검증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단다.
“강사분들 반응이 뜨거웠어요. 우리가 개발한 콘텐츠를 꽤 긍정적으로 평가해주셨죠. 막연히 도움이 되리라 여겼지만, 현실적으로도 활용도 높은 콘텐츠라는 걸 체감했습니다. 더 많은 분들이 보시게끔 국립특수교육원에서 운영하는 장애학생 교수학습 지원 사이트 에듀에이블에 공개해 두었습니다. 누구나 무료로 다운로드 가능하니 시니어 대상 디지털 교육 등에 널리 쓰였으면 합니다.”
장애 자녀도 언젠가는 자립해야
최근 장애 자녀를 둔 어머니가 아이와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보도되며 큰 충격을 안겼다. 이에 같은 처지인 장애 자녀 부모들은 안쓰러움을 표하며 녹록지 않은 현실을 토로했다. 보통 자녀가 성인이 되면 양육 의무에서 벗어나지만, 이들 부모의 사정은 좀 다르다. 때문에 자신의 노후에 대한 막막함과 더불어 성인기 자녀에 대한 미래도 막연해하곤 한다. 이러한 현실을 잘 아는 이 원장 역시 보탬이 될 만한 지원책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있다.
“아무리 사랑하지만 장애 자녀를 오랜 기간 보살피는 과정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최근 성인기 장애 자녀를 둔 중장년 부모를 대상으로 필요한 지원에 대해 조사한 연구 결과, 각 연령대에 필요한 실제적인 정보 제공과 평생교육 프로그램 및 기관 확대 등을 원하더군요. 그도 그럴 것이 장애가 심한 학생은 학교를 졸업하면 마땅히 갈 곳이 없어 학령기에 습득한 기능조차 유지 못하고 퇴행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부모의 마음은 오죽할까요. 그런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이정표를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 원에서는 ‘온맘’(장애 자녀 부모지원 종합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온맘 사이트에는 영유아기부터 노년기까지 장애 자녀의 전 생애에 걸친 다양한 정보와 콘텐츠가 제공되고 있다. 그밖에 2018년에는 ‘국가장애인평생교육진흥센터’를 개원해, 장애인 평생교육 사업도 본격 추진 중이다.
아울러 올해부터는 국립특수교육원과 교육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에서 만 19세 이상 장애인 학습자 2550명에게 1인당 35만 원의 ‘장애인 평생교육이용권(바우처)’을 지원하는 사업도 시행한다. 이 원장은 일련의 사업 진행을 통해 지속 가능한 장애 학생의 평생학습을 꿈꾸며, 이를 실현하는 데 디지털 기술이 매개체가 되리라 내다봤다.
“통계를 보면 장애인의 평생학습 참여율은 0.9%로, 비장애인의 참여율(40%)에 비해 낮은 수준이라는 게 현실입니다. 장애인에게 평생교육은 학습의 의미를 넘어 장애인의 자립과 사회통합에 기여함으로써 인간다운 삶을 유지하게 하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하죠. 그런 가운데 장애인 평생학습 분야에서 ICT 기술이 도움을 줄 부분은 무궁무진합니다. 기존 교육에서의 물리적 제약을 없애주는 것만이 아니라 교수자와 학습자 간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시각장애나 청각장애 학습자를 위한 챗봇, 지체장애 학습자를 위한 메타버스 아바타 등 ICT 기술은 장애인의 사고와 경험을 확장해줍니다.”
AI 보조교사 등장, 그럼에도 필요한 건
코로나로 인해 디지털 대전환을 맞으며 교육 분야에도 ICT 기술이 빠르게 침투했다. 최근 디지털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지만, 이 원장은 1990년대 특수교사 시절부터 디지털을 접목한 교육에 관심이 많았단다. 덕분에 2020년 코로나 위기상황에서도 적극적으로 현장을 지원하는 대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요즘에 코로나 학번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저는 코로나 원장입니다.(웃음) 취임했을 당시 코로나 상황이었던지라 대응과 후속 조치 준비에 온 힘을 다했죠. 코로나 시기 특수학교와 특수학급 학생들은 비장애 학생과 달리 ‘우선 등교’ 대상이었다는 것 아시나요? 방역 업무와 더불어 장애 학생의 배움을 위해 많은 선생님들이 고군분투하셨습니다. 가정에서도 지원을 아끼지 않으셨죠. 무엇보다 아이들도 학교에 가려고 답답한 마스크를 쓰고 나섰잖아요. 다들 애쓰는데 제가 가만히 있을 수 없죠. 선생님의 목소리, 학부모의 요구, 학생들의 눈높이를 헤아리며 현장에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렇게 3년이 지나고 보니, 어떠한 위기가 닥치더라도 교사와 학부모, 학생 등 모든 특수교육 가족과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굳건해졌습니다.”
디지털 패러다임 속 이 원장의 ‘특수교육 가족’이라는 표현이 유독 살갑게 느껴졌다. 챗GPT 등의 출현으로 AI 보조교사까지 거론되는 상황이지만, 교육만큼은 사람 간의 유대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그의 생각은 어떨까?
“지난 6월 교육부에서는 ‘인공지능 디지털교과서 추진 방안’을 발표하면서 AI 디지털교과서를 활용해 학생별 맞춤형 수업을 디자인하는 교사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교사가 AI 엔지니어가 되라는 건 아닙니다. 적어도 학생들을 잘 이해하고 가르치는 데 AI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AI는 수업 과정에 최적화된 교수 학습자료를 검색해 학생 수준에 적절하도록 조합하고 반복적인 평가를 대행하는 역할 수행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장애 학생의 개별 요구에 정교하게 반응하는 교수 역량은 AI가 대체하지 못하는 특수교사만의 고유 전문성입니다. AI가 잘하는 부분은 도움을 받으면서 교사는 개별 요구를 반영한 수업 기획, 학생의 사회성 제고, 정서 관리, 인간적 유대감 형성 등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겠지요. 워낙 빠른 속도로 발전해가기에 단정할 순 없지만, AI 보조교사와 잘 협업할 수 있다면 지금은 불가능했던 교육의 영역도 구현해내는 멋진 시대가 오지 않을까요?”
수년 전 실버 생활체육에 지각변동이 감지됐다. 곧이어 ‘파크골프가 인기’라는 말이 전국 곳곳에서 들려왔다. 반짝 흥행이 아니었다. 파크골프는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단계적 일상 회복이 되면서 아예 실버 생활체육 주요 종목으로 부상했다. 인근 공원에서 저렴한 비용으로 즐길 수 있어서. 단지 그뿐일까? 현장에서 들은 파크골프의 진짜 인기 이유는 꽤 흥미롭다.
양평교 초입에 들어서며 걱정이 앞섰다. 전국 대부분 지역에 돌풍과 천둥·번개를 동반한 폭우성 장맛비가 예고돼 있었고, 서울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시 소강 상태를 보이고 있었지만, 먹구름과 대기를 감도는 꿉꿉함은 양평교 아래 오가는 이 하나 없다 해도 이상할 것 없었다. ‘영등포 파크골프장’ 표지판이 가리키는 쪽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 순간 불안함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야말로 ‘줄 서서’ 파크골프를 즐기고 있었다.
매일 영등포 파크골프장을 찾는 이는 500여 명. 영등포구파크골프협회 ‘사랑클럽’ 회원 A씨가 전한 인기는 그 이상이다. “파크골프가 정말 인기예요. 말도 못 해요. 체감상으로 매년 두 배씩 느는 것 같아요. 이거 봐요, 치려고 밀려 있는 거!”
영등포뿐만 아니다. 파크골프는 일대 붐을 맞았다.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회원이 그 방증이다. 대한파크골프협회에 따르면 2020년 4만 5000여 명 수준이던 회원은 2022년 10만 명을 넘어섰다. 2023년 6월 기준으로는 12만 명을 돌파했다. 협회에 등록하지 않고 즐기는 동호인쪾비동호인까지 합하면 그 수는 대략 40만~50만 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1983년 일본 홋카이도 마쿠베쓰 강가에서 시작된 파크골프는 도심 속 공원이나 유휴부지에서 즐기는 게임이라고 해서 ‘공원 골프’(PARK GOLF)라는 이름이 붙었다. 국내에는 2000년 경남 진주에 위치한 노인복지시설 상락원에 6홀이 들어서며 처음 소개됐다. 실버 세대 생활체육 핵심 종목으로 부상한 건 수년 사이다. 2022년 9월 발표된 한국스포츠정책과학원의 ‘스포츠 빅데이터 인사이트’ 제13호에 따르면 현재 실버 세대 생활체육 유행은 ‘게이트볼에서 파크골프로 전환’되고 있다.
현장은 클럽 한 개와 공 한 개, 그리고 티만 있으면 누구나 인근에서 즐길 수 있는 파크골프의 편의성과 접근성에 열광한다. 몇 천 원이면 즐길 수 있는 저렴한 비용도 현실의 걱정을 덜어주고 있다. ‘사랑클럽’ 회원 A씨는 “파크골프가 노인들에겐 최적의 운동”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다른 운동 여러 가지 해봤지만, 이보다 좋은 운동은 없습니다. 접근하기 좋고, 이용료 저렴하고, 잔디 밟으면서 많이 걷고요. 나이 들어서 할 수 있는 운동이 뭐가 있어요? 고작해야 산책하는 건데, 산책은 지루해서 오래 못 해요. 근데 파크골프는 3시간이고 4시간이고 하죠!” 옆에서 듣고 있던 회원 B씨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장점이 정말 많아요. 마음이 젊어지는 것 같아요. 나이 먹어서도 할 수 있다는 게 삶의 활력이 돼요.”
파크골프가 사랑받는 주요 요인 중 ‘커뮤니케이션 효과’를 빼놓을 수 없다. 종주국 일본의 파크골프협회는 파크골프가 퍼진 요인에 대해 “경기보다 커뮤니케이션을 지향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을 들 수 있다”고 할 정도다. 일반 골프장은 1번 홀에서 티업하면 다른 팀을 만날 수 없지만 파크골프는 한눈에 다 들어오기 때문에 교류가 이뤄지기 용이하다는 것이다. 실제 ‘사랑클럽’은 회원 60여 명의 사랑방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회원 C씨의 말이다. “하면 할수록 재밌어요. 파크골프를 접하고 사람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자주 보니까 빨리 친해졌지요. 한번 어울리면 아침에 만나서 저녁까지 있다 가기도 합니다. 그게 너무 재밌어요.”
여기에 ‘한국판’ 파크골프만의 매력이 더해졌다. 경기의 재미를 느낄 수 있도록 진화해온 것이다. 파크골프는 하프 9홀(파33) 1라운드 18홀(파66)로 진행된다. 파3 네 개, 파4 네 개, 파5 한 개로 기본 제원은 일본과 같다. 차이는 한 홀의 거리다. 위험 방지, 연령이나 남녀 차이에 의한 핸디캡 최소화 등을 위해 거리를 100m 이내로 제한하고 있는 일본과 국내는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 일본은 9홀까지 연장 길이가 500m지만, 국내는 790m까지 가능하다. 파5 홀의 경우 일본은 60~100m, 국내는 100~150m다. 현재 국내는 대개 최장 거리인 150m를 선택하는 추세다.
이경호 대한파크골프협회 사무처장은 “국내 파크골프를 즐기는 인구가 증가한 요소”로 이를 지목한다. “일본은 ‘놀이’이고 우리는 ‘생활 스포츠’, 나아가 ‘경기’에 가깝습니다. 일본은 여전히 80대 이상이 파크골퍼의 주류를 이루고 있어요. 우린 연장 길이가 기니까 보다 젊은 세대가 많이 유입됐습니다.”이 사무처장은 배우기 쉬운 점도 파크골프 인구 증가 원인으로 꼽았다. “파크골프는 6개월 정도 열심히 하면 3년, 5년 배운 사람과 대결할 수 있을 정도가 됩니다. 이것도 또 하나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스포츠는 10년 이상 해야 우승할 수 있어요. 1~2년 바짝 해서는 대회 정상을 꿈꾸기 어렵지요. 그런데 파크골프는 노력 여하에 따라 6개월~1년 만에 전국 대회에서 우승할 수 있는 실력이 갖춰지는 운동입니다. 전국 투어를 다니는 분들도 그 수가 상당합니다.”
파크골프는 ‘경기’로 자리 잡고 있다. 대회 규모로 확인된다. 국내 대회 상금이 3000만 원까지 오른 상황이다. 경제 효과는 현장에서 먼저 체감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여파로 산천어축제를 연이어 취소했던 강원도 화천군은 파크골프 대회를 유치해 특수를 누렸다. 약 한 달간 이어진 대회에 1500여 명의 선수단과 가족이 방문해 지역 음식점, 숙박업소는 물론 편의점과 카페까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고 한다.
이경호 사무처장은 “경제 효과는 두말하면 잔소리”라고 말한다. “가장 많이 듣는 질문 중 하나가 ‘파크골프장에도 라이가 있어요?’입니다.(웃음) 당연히 있지요. 다 다르고 각각의 특색이 있습니다. 대회 당일 처음 가서는 성적을 낼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연습하러 현장에 일주일 전이나 열흘 전에 가서 현지에 체류하며 꽤 많은 비용을 씁니다. 1억 원을 투자해서 대회를 치른다고 하면, 그 열 배 이상의 경제 효과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한 대회에 나가는 선수만 해도 500~600명입니다. 그 지역에 머물면서 쓰는 돈은 엄청납니다. 지자체에서 계속 유치 신청이 들어오는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이는 파크골퍼들에게 놀라운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클럽’ 회원들은 스포츠로 자리 잡은 파크골프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지고는 못 삽니다. 대회 나가는 사람들은 죽기 살기로 해요. 진짜 장난 아니에요!(웃음)”
현장은 단기적 경제 효과 그 이상을 기대하고 있다. 파크골프가 고령 인구 증가에 따른 사회적 비용을 절감할 대책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나라의 평균 수명은 2007년에 이미 OECD 국가의 평균 수준을 상회하는 장수 국가군으로 진입했다. 2025년에는 초고령사회로 들어설 전망이다. 고령자의 진료비, 의료비는 당면한 문제다. 통계청이 2022년 9월 발표한 ‘2022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2020년 65세 이상 고령자의 1인당 진료비는 475만 9000원, 1인당 본인 부담 의료비는 110만 6000원에 달한다. 전체 인구 대비 각각 2.8배, 2.7배 수준이다. 반면 생활체육 참여자의 1인당 연관 의료비는 비참여자 대비 절반가량에 그친다. 생활체육 참여만으로 의료 비용 감소에 직접적인 역할을 기대할 수 있다는 뜻이다.
현장은 파크골프가 현재 최일선에 있는 운동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랑클럽’ 회원 A씨의 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봅시다. 노인들이 집에만 있으면 자식이고 며느리고 손주고 누가 좋아하겠어요? 우리도 다 압니다. 근데 파크골프장에 나오면 운동하고, 여기서 만난 친구들끼리 점심 먹고, 커피 한잔하고, 때론 반주하기도 하고, 내내 놀다가 저녁에 집에 가서는 피곤해서 바로 잡니다. 아프다는 소리도 안 합니다. 아프다고 하면 가지 말라고 할까 봐요.(웃음) 또 실제로도 아프면 못 합니다. 그러니까 파크골프를 하기 위해서 스스로 건강을 잘 챙겨요. 본인 건강하지, 가정의 평화 가져오지, 종국에는 사회적 비용 안 들지. 파크골프는 삼박자를 다 갖춘 운동이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