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에서 시집 해설을 가장 많이 한다고 알려진 유성호(柳成浩·56) 한양대학교 교수가 첫 산문집 ‘단정한 기억’을 출간했다. 규준이 정해진 딱딱한 논문과 평론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로운 글을 쓰며 모처럼 그는 ‘자연인 유성호’가 간직한 섭렵과 경험의 기억들을 가지런히 펼쳐보였다.
유 교수는 최근 한 칼럼을 통해 “‘산문’은 진솔한 고백을 통한 자기 확인을 욕망하면서, 특정 토픽에 대해 독자와 소통하려는 의지를 담고 있다”라고 설명했다. 그런 그가 이번 산문집을 펴내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오래된 글까지 모았더니 하나의 범주로 묶긴 어렵더군요. 삶의 이력처럼 복잡한 장르의 글들을 정리하며 목표로 삼은 건 두 가지였습니다. 먼저 어느 시기에 내가 어떤 경험과 생각을 했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어요. 또, 살면서 저를 위해 애써준 분들이 쉽게 볼 만한 책을 선물하자는 거였죠. 그동안 평론 전문 서적을 더러 냈는데, 일반인에게 쉽게 읽히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그래서 이번 책은 평론가나 연구자보다는 어린 시절의 친구와 동창에게 많이 보냈어요. 저야 책 받는 게 익숙한 직업이지만, 그들에겐 책 선물이 귀하고 감동스러웠던 모양이에요. 잘 봤다며 선물도 보내오고, 몇 권 사서 주변에 나누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기분이 좋더라고요. 앞으로는 무게를 덜고 소통 친화적인 글을 더 써보고 싶습니다.”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추억
산문집을 엮으며 과거를 음미하는 과정 속에서 유 교수는 지난날 곳곳에 남긴 삶의 흔적들과 마주하곤 했다. 그는 책에서 이러한 인생의 기억과 추억을 ‘물방울의 흔적’에 빗대 이야기했다. 요약하자면, 물방울이 머물다 날아간 ‘마른 흔적’은 그 물방울이 존재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지금은 그 물방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증과 같다는 것이다.
“시간을 사이에 두고 물방울의 존재와 부재를 동시에 증명하는 실체가 마른 흔적인 셈이죠. 우리의 삶도 이와 같아요. 한때 존재했던 것들에 대한 소중한 ‘기억’과, 이제는 그것이 사라지거나 소멸했다는 ‘실감’ 사이에서 살아가니까요. 그런 점에서 ‘추억’은 물방울 그 자체가 아니라 ‘물방울의 흔적’이라 할 수 있죠.”
유 교수는 추억이 꼭 과거지향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윤동주의 ‘자화상’ 마지막 문장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에서, 이때의 추억은 지난날을 감싸 안으면서, 그러나 과거에만 머무르지 않고, 한 단계 넘어서겠다는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추억이란, 기억되는 그 순간의 온기로 새록새록 되살아나는 ‘꿈꾸는 기억’과 같다고 표현했다.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라는 노래 가사에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실제 늙어가는 첫사랑을 만난다면 어떨까요? 반가움과 동시에 상실감도 들 겁니다. 추억은 그리움의 깊이로 완성되는 거니까요. 그것을 현실화하려는 욕망이 앞서면 추억에서 ‘꿈’이 빠져나가고, 현재의 물리적 어색함만이 남게 됩니다. 오히려 꿈꾸는 기억으로 머물 때보다 더 왜소하고 허약한 추억이 될지도 모르죠. 그리움은 그 대상을 획득하는 것이 아닌, 그리워하는 마음과 행위 자체에서 빛을 발하고, 그것이 생을 아름답게 한다고 생각해요.”
이에 반해 나이가 들수록 과거에 매몰돼 현실에 울분을 갖고, 젊은 세대를 부정하는 등의 행위는 경험적 한계에 갇힌 결과라고 해석했다.
“흔히 ‘너는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다’는 식의 경험적 우월성을 내세우는 분들이 있죠. 그런데 젊어본 적 있다고 뭔가를 더 많이 아는 건 아녜요. 가령 어딘가를 직접 여행한 사람보다 가지 않고 책만 본 사람이 그곳을 더 잘 알기도 하잖아요. 실제 가본 사람은 경험적 한계에 갇히기도 하기 때문이죠. 이렇듯 젊은이는 늙어보지는 않았지만 늙음을 상상할 수는 있어요. 그런데 막상 늙어서는 자신의 젊은 시절을 재구성하는 데 그치죠. 이 역시 긍정적인 부분을 내세우게 되고요. 옛날에도 말 안 듣는 학생은 많았는데, 마치 요즘 아이들만 유난하다고 지적하는 것처럼요. 그러니 ‘내가 해봐서 아는데’, ‘나 때는 말이야’ 등의 언행은 지양해야 하지 않을까요?”
아름다운 역설적 기억, 청춘
물론 누군가의 과거 속엔 실제로 열정 넘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존재한다. 우리는 이를 ‘청춘’이라 부른다. 유 교수는 ‘청춘’이란 오히려 청춘을 지나버린 사람들의 생에서 발견되는 흔적, 즉 역설적 기억과도 같다고 일컬었다.
“청춘은 젊은 시절 의식 속에 존재하는 현재적 생의 조건이 아닌, 뒤늦게 발견하는 기억의 형식이라 볼 수 있죠. 저 역시 지나고 떠올려보건대, 온전히 대학 4년이 제 인생의 청춘이었던 것 같아요. 미정형이던 육신과 정신이 그때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 이전과 이후 전혀 다른 생각을 갖게 됐고, 당시를 기점으로 생(生)이 갈라졌으니까요. 지금은 그때의 연장선에 있다는 생각을 해요. 책도 대학 시절의 것이 많은데, 그때 읽은 것이 진짜 책이고, 요즘 읽는 것들은 플러스알파라고 봐요. 말하자면 별책부록 같은 거죠.”
별책부록에 자주 비유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여생’(餘生)이다. 유 교수는 책에서 ‘향원익청’(香遠益淸, 향이 멀리 퍼질수록 더 맑아진다)을 언급하며 “자기 경험에 갇힌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열린 향기를 전하는 노경(老境)의 모습이 간절한 때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여생’이 아닌, 소통과 공감의 능력으로 새롭게 태어난 ‘후반 인생’을 살게 된다”고 덧붙였다. 이처럼 대부분 남은 생을 버티는 식이 아닌,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며 존경받는 어른으로의 후반생을 원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고, 꿈에 그린 노후를 포기한 채 사는 이도 적지 않다. 유 교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의지로 자신의 말년을 위엄 있게 지켜나가길 바랐다.
“존경받는 어른이 되긴 참 어렵죠. 그러나 그토록 힘든 만큼, 오히려 더 되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나요? ‘어차피 내가 죽으면 알 게 뭐야’ 하며 무신경하게 사는 이도 있겠죠. 그러나 죽음으로부터 살아나는 기억도 있어요. 저도 부모님 두 분 다 돌아가셨는데, 부재함으로써 진정 존재하는 것들이 생기더군요. 사랑하는 사람, 나와 가치관을 나눈 이들에겐 내가 세상을 떠나고부터 시작되는 기억들이 존재해요. 아무리 내 삶이라도 그 기억의 용량까지 줄일 순 없잖아요. 가치 있다고 여긴 일들을 변함없이 지치지 않고 끝까지 해내는 모습을 남기는 것이 삶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생각합니다.”
2020년 한 해 두고두고 읽을 만한 책 - by 유성호
단순한 진심 (조해진 저)
프랑스로 입양된 주인공이 임신 후 자신의 뿌리를 찾아 한국을 찾으며 벌어지는 일화를 그린다. 소설 속 인물들은 시공간을 넘어 우연히 마주치는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데 몰두하며 차츰 타인과 소통하고 서로의 삶에 스며든다.
오래 속삭여도 좋을 이야기 (이은규 저)
2012년 첫 시집 ‘다정한 호칭’으로 독자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위로했던 이은규 시인이 7년 만에 펴낸 두 번째 시집이다. 이번 책에 담긴 49편의 작품들에서도 시인의 섬세한 시선과 아름답고 우아한 문장들을 발견할 수 있다.
사람을 읽고 책과 만나다 (정민 저)
한양대학교 정민 교수가 30여 년 학문의 길을 걷는 동안 삶의 길잡이가 되어준 사람과 책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무수한 시절이 빚어낸 삶의 단면들을 입체적으로 그려내며, 필자 특유의 필치가 녹아든 산문의 정수를 잘 보여준다.
윤동주 평전 (송우혜 저)
민족시인 윤동주의 삶과 시를 되새길 수 있다. 북간도의 역사와 당시의 시대 상황, 일경의 극비취조문서, 일본 경도재판소의 판결문 등 각종 자료를 바탕으로 한 작가의 예리한 분석이 숭고한 시인의 삶을 재조명한다.
글 유성호 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1945년 8월 15일, 한 사상가의 표현대로 ‘도적처럼’ 찾아온 해방은, 고통스러운 식민지 시대를 살아온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새로운 가능성과 맞닥뜨리게 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우리 근현대사에 가장 중요한 전기를 마련해준 이날은 무엇보다도 그동안 박탈당했던 모국어의 근원적 회복을 가져다주었다. 이때는 일제 강점기에는 간행되지 못했던 이육사, 윤동주, 심훈 등의 유고시집이 간행되었고, 여러 종의 사화집도 잇달아 출간됨으로써 역동적인 문학 출판 시대를 열게 된다.
해방 직후 출간된 박목월, 박두진, 조지훈의 『청록집』과 서정주의 『귀촉도』는 우리 나라의 정상 시편으로 손색이 없는 위상을 보여주었다. 특별히 『청록집』은 자연을 근대시의 주요한 시적 대상으로 아름답게 재현해내면서 우리 말의 가락과 이미지를 높은 예술적 형상 속에서 구현함으로써 이 시대의 가장 화려한 사화집으로 등극되었다. 더불어 김영랑, 김광균, 유치환, 김광섭, 김현승, 신석정, 김상옥, 이호우 등이 우리 서정시의 미적 경지를 우뚝하게 올리는 가편들을 쏟아냈다.
소설 쪽에서는 해방 전후의 현실을 다룬 작품들이 눈에 띄었는데 염상섭, 이태준, 채만식, 김동리, 계용묵, 허준, 황순원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이처럼 당대적 상황 인식으로서의 소설은 8·15가 외세에 의한 불완전한 해방이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념 대립과 남북 분단을 낳았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민족사적 출발이 되지 못했다는 점을 증언하였다. 그 불충분한 해방이 분단과 전쟁을 곧 야기한 것은 우리가 두루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다
1950년대 벽두에 터진 6·25전쟁은 우리 역사를 근원에서부터 바꾸게 되었다. 우리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물리적 충격을 주었던 이 전쟁은 이후 우리 문학의 가장 강력한 존재 근거이자 동시에 한계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가난, 반공과 서구 추수라는 공통된 체험을 통해 이 시기의 문학적 주체들은 문학적 아비를 상실한 채 폐허 속을 거닐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 시의 주류 미학은 ‘순수서정’에 뿌리를 내리게 되는데, 특별히 서정주는 독자적인 상상력과 탁월한 시적 의장(意匠)으로 한국 시의 정상으로 우뚝 서게 된다. 공동사화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1949)을 펴낸 ‘신시론’ 동인들은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였다.
이 시기의 소설은 전쟁을 직접 겪은 작가들의 경험적 증언으로 채워졌다. 그들의 작품 세계는 방향 상실과 불안 의식 등에서부터 생활의 고통에 이르기까지 매우 섬세한 심리적, 현실적 리얼리티를 담게 되는데 김동리, 김성한, 이범선, 오유권 등이 그 사례일 것이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피해 의식의 치유 과정을 그린 손창섭, 서기원, 반전 이념을 담아낸 박영준, 황순원, 선우휘, 오상원 등도 기억할 수 있다. 이밖에도 장용학, 이호철, 임옥인, 박경리, 강신재, 박연희, 오영수 등이 커다란 주목을 받았다. 작가들이 절대 가난과 싸우면서 소중한 기록을 남긴 중요한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세 가지 흐름에 불을 지피다
1960년대에 일어난 4·19혁명은 민주주의의 경험과 가치를 인식시키는, 호환할 수 없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 시기의 시문학은 대개 세 가지의 흐름을 형성한다.
하나는 당대의 현실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저류로서 김수영과 신동엽이 주축을 이루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 시는 4·19혁명이 가져다준 이념적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 민족주의의 상보적 형상화를 경험하게 된다.
그 다음 하나는 인간 내면과 형식 탐구의 흐름으로서 김춘수가 대표적이다. 김춘수의 시는 관념의 배제를 노리면서 존재와 언어의 관계에 대해 천착하는 일관성을 보였다. 마지막 하나는 전봉건, 김종삼, 천상병처럼 전 시대로부터 창작을 꾸준히 이어온 시인들에 의해 구축된 현대적 감각의 세계였다. 김남조, 박재삼, 박용래, 김관식 같은 서정의 흐름도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소설 쪽의 대표적 사례는 최인훈의 『광장』이었다. 이 작품은 남과 북의 이념적 대립과 주인공 이명준의 자살로 상징되는 절망, 자유와 평등의 문제를 심각하게 제시하였다. 그런가 하면 분단과 외세의 문제를 정면에서 다룬 남정현의 『분지』는 이 시기 최대 문제작으로 거론되었다. 그리고 분단 문제는 박경리, 이호철 등의 작품에서 심화된 형상을 얻는다. 특유의 감각적 문체로 도시적 삶의 위선을 그린 김승옥의 서사는 ‘감수성의 혁명’이라는 별칭을 받을 정도로 1960년대 문단을 강타하였다. 그만큼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다양화가 비로소 이루어진 때라고 할 수 있다.
민중적 서정시와 노동현실 소설화
1970년대의 문학적 감각과 상상력은 ‘유신’이라는 정치 체제와 전태일 사건이라는 충격적 사건으로부터 그 형식과 내용이 시작되었다. 이 두 가지 축은 당시의 작가나 시인들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문학적 관심의 본격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시에서는 민중적 서정시가 경제 발전의 불균형과 그에 따른 민중의 피해 과정을 가장 본격적으로 그려냈는데 신경림, 고은, 김지하, 조태일, 정희성, 문병란 등의 시가 주목되었다.
그런가 하면 황동규, 정현종, 마종기, 김광규, 김명인 등이 보여준 음역은 현대 사회의 메커니즘이 주는 소외와 내적 파탄을 증언, 가시화함으로써 한국 시의 수준을 한 단계 올려주었다.
이 시기의 소설은 현실적 삶에 초점을 맞추는 양상이 본격화하였다. 그 대표적 형태가 농촌 공동체의 해체와 근대화에 대한 비판이었고 이문구가 그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노동 현실의 소설화는 황석영, 윤흥길, 조세희 등이 주도하였다.
또 이 시기에 비로소 씌어지는 대하소설 박경리의 『토지』, 권력을 비판한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분단 문제를 다룬 윤흥길의 『장마』 등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역사소설이 호응을 얻었다는 점인데, 이는 4·19로 비롯된 역사의식의 성장과 급격한 시대 변동에 따른 역사적 단절감의 회복 욕구가 작용한 결과일 것이다. 또한 1970년대는 대중소설이 폭넓게 출현하였다. 한수산, 최인호, 조선작, 조해일, 박범신 등이 그 구체적 목록이다. 이 시기는 우리 문학의 사회적 상상력이 깊어진 시기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창작과비평’ 그리고 ‘문학과지성’
1980년대는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 안에 구비된 강한 기억과 저항의 힘은, 창작과 비평 모두에서 정치적 상상력의 만개를 가져왔다.
시 부문의 대표적 흐름은 노동시라고 불린 일군의 경향으로서 박노해와 백무산의 활약이 단연 돋보였다. 또한 김남주는 줄기찬 저항성으로 한 시대의 가장 뜨거운 전사 시인이 되었다. 이러한 흐름에 일정한 대타적 영역을 형성한 해체시는 기존의 시문법에 대해 강렬한 도전을 보냈으며, 정치적 전위가 아니라 미학적 전위로 나섰다. 특히 황지우는 언어 실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탁월성으로 문학적 성가를 누렸다. 이어 박남철, 김영승, 장정일 등이 더욱 급진적인 실험적 해체시를 양산했다. 또한 정치적 격변의 와중에서도 개인사의 굴곡을 통한 사회 반영 혹은 인간의 존재 탐구에 매진해온 시인들로는 이성복, 최승자, 최승호, 기형도 등이 있었다.
소설 쪽에서는 1980년대를 휩쓴 진보의 열기에서 비켜선 자리에서 문학을 했던 작가들도 있는데 그 대표 격이 이문열이다. 소설 기법의 새로움을 추구한 작가군으로는 이인성, 최수철이 있다. 그리고 기법 실험의 극점을 보여준 서정인의 『달궁』, 역사소설의 기법으로 현실을 우회적으로 그려낸 복거일의 『비명을 찾아서』등도 소재 확대를 가져온 예에 속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충격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보여준 작품들도 많이 창작되었다. 문순태, 임철우, 윤정모, 최윤 등은 그러한 유에 속하였다. 해방 직후의 삶을 통해 역사적 비극의 원천을 형상화한 김원일의 『겨울 골짜기』와 조정래의 『태백산맥』도 이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성취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소시민의 삶을 구체적으로 쓴 소설이나 언어 자체를 탐색하는 소설들도 다수 나왔다. 양귀자의 『원미동 사람들』 등이 그 실례일 것이다. 이 시기는 매체와 작가군이 폭증한 시대로서 대중이라는 개념이 본격화한 때라고 할 수 있다.
여성 작가들의 대활약
1990년대에 들어서는 여성적 감각에 뿌리를 둔 시쓰기 방식이 크게 대두하였다. 그 주자로 우리는 유안진, 천양희, 신달자, 노향림, 김승희, 최문자, 김혜순, 황인숙, 허수경, 정끝별, 나희덕, 박라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와 유사한 맥락에서 생태적 상상력의 시편들이 쏟아진 것도 괄목할 만한 현상이었다. 이시영, 이하석, 고형렬, 고진하 등의 시나 『녹색평론』 같은 근대적 기획에 대해 의혹과 도전을 보내는 패러다임이 이에 중요한 흐름을 이루었다. 이러한 지향은 ‘정신주의’라는 명칭을 부여받는 일군의 시적 경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는데 조정권, 최동호 등이 높은 성취를 이루었다.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시적 발언은 김정환, 도종환, 박영근, 최두석, 이재무, 안도현 등에 의해 이어졌다. 이른바 ‘몸’의 시학이라고 불리는 일군의 경향은 정진규, 김기택, 채호기, 박주택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는 주체, 권력, 이성, 중심의 언어에서 타자, 탈권력, 감성, 주변의 언어가 목소리를 얻어가고 있는 것을 실증하였다.
소설 부문에서는 여성성의 잠재적이고 대안적인 가능성을 문학적 감수성과 결합시켜 풍요로운 형상화가 이루어졌다. 공지영, 오정희, 신경숙, 은희경, 이혜경, 김향숙, 공선옥 등이 주도한 이러한 패러다임은 관용과 너그러움, 희생, 포용성으로 그 정서적 지향을 움직여갔으며, 어떤 것도 절대 구심이 될 수 없다는 융통성 있는 사유를 보여주었다. 박완서의 『아주 오래된 농담』과 황석영의 『오래된 정원』이 지나간 시대의 오래된 기억들을 독자 앞에 되불러주었으며, 구효서, 정찬, 성석제, 김영하, 김연수, 한강, 전성태 등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하며 새로운 언어들을 갈무리하였다.
이러한 복합적 흐름을 20세기에 형성했던 우리 문학은 21세기에 들어 더욱 활기찬 모습으로 그 외연과 실질을 확장하고 심화해가고 있다.
시에서는 이른바 ‘미래파’로 상징되는 새로운 시적 경향이 중요한 비평적 대상이 되었고, 소설 쪽에서도 다양한 작가군이 들어와 새로운 창작 지형을 만들어가고 있다. 그야말로 해방 후 70년 동안 우리 문학이 일구어온 역사는, 이렇게 가파른 역사와 삶을 비추어온 별자리처럼 한편으로는 선연하고 한편으로는 흐릿하기만 하다. 하지만 여기 거명된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아득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