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년 전통 ‘오뎅식당’
의정부 맛집 하면 ‘부대찌개’를 빼놓을 수 없다. 의정부중앙역 인근 부대찌개거리에는 오래된 가게들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오뎅식당’은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50여 년 전, 창업주인 허기숙 씨는 어떻게 처음 부대찌개를 만들게 됐을까? 그의 손자이자 현 주인장인 김민우(37) 씨가 부대찌개의 탄생 비화를 들려준다.
“원래는 어묵을 파는 포장마차였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식당 근처 미군부대에 근무하던 손님들이 햄, 소시지, 베이컨을 가져와 할머니에게 안주거리를 만들어 달라고 했죠. 처음엔 가져온 재료를 볶아서 내놓았는데, 단골들이 밥과 먹을 만한 찌개를 해달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기존 재료들에 김치랑 장을 더해서 찌개로 만들었는데, 그게 오늘날 부대찌개가 됐습니다.”
부대찌개 전문점이지만 어묵을 팔던 시절 손님들이 부르던 이름 그대로 ‘오뎅식당’이라는 상호를 쓰고 있다. 사실 이곳은 허영만의 만화 ‘식객’을 통해 소개되며 유명해졌다. 만화에서도 묘사된 국물 특유의 부담 없는 단맛은 오뎅식당 부대찌개만의 매력 포인트다. 기본 부대찌개에는 햄, 소시지, 두부, 다진 소고기, 당면, 김치 등이 들어간다. 여기에 저마다 입맛에 맞는 사리를 추가해 먹을 수 있는데, 가장 인기 있는 건 아무래도 ‘라면 사리’라고 한다. 주인장은 사리용 라면에도 특별함이 숨어 있다고 설명했다.
“6개월 연구 끝에 오뎅식당 전용 라면사리를 만들었습니다. 부대찌개에 특화된 면인데, 콜라겐을 넣어 더 쫄깃하고 탱탱한 게 특징이죠. 일반 라면보다도 덜 불고요. 기본 재료와 반찬으로 내는 김치도 여주에 있는 공장에서 직접 담아 숙성시킵니다. 저희 묵은지에 매력을 느껴 찾는 단골도 많아요.”
기본 부대찌개는 옛 방식을 그대로 고수해왔지만, 그때그때 유행을 반영해 사리 메뉴는 달라졌다. 어떤 사리를 넣느냐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부대찌개의 특성이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장점이자 장수 비결이 됐다. 오뎅식당은 최근 타 지역에도 직영점을 열며 더 많은 고객과의 만남을 꾀하고 있다. 물론 어느 곳을 가더라도 동일한 부대찌개 맛을 자부한다는 주인장이다.
“변함없는 맛이 철칙이기 때문에 직영으로만 운영하고, 체인점을 낼 계획은 전혀 없습니다. 새로 연 가게들은 모던한 인테리어이지만, 제게 가업을 이으라 하셨던 할머니의 흔적들을 남기고 싶어 매장마다 할머니 사진을 꾸며놓았죠. 할머니가 그러셨듯이 저 또한 두 아들에게 꼭 가업을 이어가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의정부경전철 의정부중앙역 2번 출구 도보 2분 거리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호국로1309번길 15
영업시간 매일 8:30~20:30
대표메뉴 부대찌개, 모둠사리, 라면사리 등
※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56년 전통 ‘지동관’
화교 요리사가 3대째 이어온 의정부 대표 중식당 ‘지동관’. 가게 이름인 지동(志東)은 본래 중국 산둥(山東) 출신이었던 1대 주인장 김성정 씨가 언젠가 고향의 가족을 만나겠다는 의지를 담아 지은 것이다.
특히 김성정 씨는 6·25전쟁 당시 참전용사로 활약하며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국포장을 받기도 했다. 이후 사람들은 그를 ‘김 상사’라 불렀고, 한국을 위해 참전해줘서 고맙다며 그 보답으로 지동관을 자주 찾았다. 2대 주인장이었던 김육안(60) 씨는 “의정부 시민들 덕분에 지동관이 잘 정착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아버지에게 고맙다며 찾아오셨던 분들이 요즘도 방문하십니다. 그러다 보니까 중장년 단골이 많은 편이죠. 같은 자리에서 장사하면서 조금씩 리모델링도 하고 변화를 줬는데, 몇 년 전에는 손님들의 편의를 생각해 가게 내 엘리베이터를 설치했어요. 식당이 2층 구조인데 거동이 불편한 분들은 계단을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잖아요. 그동안 발걸음해주신 어르신들이 불편 없이 다니시게끔 배려한 거죠.”
김육안 씨가 가게 일에서 아예 손을 뗀 건 아니지만, 장차 온전히 가업을 물려주기 위해 상당 부분을 두 아들에게 맡기고 있다. 첫째 김지성(30) 씨는 홀에서 고객 및 직원 관리와 경영을, 둘째 김지량(28) 씨는 주방에서 요리와 메뉴 개발 등을 담당한다. 형제가 꼬마였을 때부터 찾아온 손님들은 대를 잇는 이들의 모습에 흐뭇하기만 하다. 김지성 씨는 “우리도 3대째이지만, 손님들도 3대에 걸쳐 오신다”며 오랜 단골들을 위해 가게의 명맥을 계속 이어나가리라 포부를 다졌다.
“꼭 가업을 이어야 한다고 다짐했던 건 아닌데, 생각해보니 이대로 지동관 역사가 사라지는 건 너무 아깝더라고요. 동생이나 저나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도왔기 때문에 일은 낯설지 않지만, 책임감이 더해지니 어깨가 무거워요. 최근에 중소벤처기업부에서 ‘백년가게’로 선정했는데, 그 타이틀에 걸맞게 100년을 채우면 참 멋지지 않을까요?”
지동관은 자장면, 짬뽕, 탕수육 등 일반 중식 메뉴들도 훌륭하지만, 다양한 수제 딤섬과 요리를 맛보는 즐거움도 쏠쏠하다. 마라관자·소고기, 꿔바로우 등 최근 젊은 층이 선호하는 메뉴들도 꾸준히 연구해 선보이고 있다.
“저희 차림표에 적힌 메뉴만 50가지가 넘는데 손님들이 주문하는 건 한정적이에요. 장수 메뉴들의 경우 기본적인 맛을 고수하되, 트렌드를 반영한 요리들도 내놓으려고 해요. 그렇게 3대가 함께 와도 모두 만족할 수 있도록 기분 좋은 변화를 이끌어갈 계획입니다.”
지하철 1호선 의정부역 5번 출구 도보 5분 거리
주소 경기도 의정부시 호국로1298번길 78
영업시간 매일 11:00~21:30
브레이크타임 15:00~17:00
대표메뉴 삼선자장면, 탕수육, 수제 딤섬 등
※본 기획 취재는 (사)한국잡지협회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요즘 먹방이 유행이다. TV 채널 어디를 돌려도 먹거리 방송이 빠지질 않는다. ‘맛집’으로 소문이라도 나면 줄이 길게 늘어서고 손님들이 몰려든다. 사람들이 먹거리에 대해 그만큼 관심이 많다는 증거다. 유명한 맛집 골목은 오랜 역사를 갖고 있다. 남산기슭 장충동 족발집이 유명하다 보니 저마다 ‘원조 할머니 족발집’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다. 신당동에 가면 ‘떡볶이’ 골목이 있고, 의정부에 가면 부대찌개 골목이 있다. 제주도에는 ‘흑돼지’가 유명하다. 전국 어디든 같은 현상이다.
그런데 줄 서는 집은 따로 있다. 바로 원조집이다. 몇십 분씩 기다리는 건 예사다. 어떤 때는 몇 시간을 기다려야 할 때도 있다. 옆에 같은 종류의 음식을 하는 식당이 있어도 그렇다. 나머지 식당들은 대부분 썰렁하다. 먹어보면 맛과 가격에서 그리 큰 차이가 없는데도 그렇다. 한 집은 잔칫집처럼 손님이 넘쳐나고 다른 집은 속된 말로 파리를 날린다. 손님이 없는 식당 주인은 TV를 보고 있다. 왠지 사람들이 줄 서 있는 식당에 가서 먹어야 잘 먹은 것 같고 그렇지 않은 집에서 먹으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기다리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붐비지 않는 식당이 서비스도 더 좋고 분위기가 쾌적하기까지 하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잘되는 식당으로만 몰린다. 하도 사람이 많아 2호점 3호점을 내는 식당도 있다. 가족이 체인점 식으로 운영하기도 한다. 점포를 하나 더 내는 것은 전쟁터로 뛰어드는 일이다. 누군가는 살고 누군가는 죽는 일이다. 보이지 않는 싸움터, 약육강식의 현장이다.
이러한 싸움터에 아름다운 미담이 전해지고 있다. 일본 소설가 ‘미우라 아야코’의 이야기다. 그는 남편과 작은 점포 하나를 운영했다. 장사가 아주 잘됐다. 점포를 키워도 밀려드는 주문 때문에 트럭으로 물건을 공급할 정도였다. 매출이 쑥쑥 올라 부자가 되는 건 시간 문제였다. 반면 옆집 점포는 파리를 날렸다. 그러던 어느 날 미우라는 남편에게 솔직한 심정을 터놓았다.
“우리 가게는 너무 잘되는데 옆집 가게는 문을 닫을 지경이에요. 이건 우리가 바라는 바도 아니고 하느님 뜻도 아닌 것 같아요.”
남편은 아내가 자랑스러웠다. 부부는 가게를 축소하기로 했다. 손님이 오면 이웃 가게로 보내줬다. 적당한 수의 손님만 받다 보니 시간이 여유로웠다. 미우라는 남는 시간을 평소 하고 싶었던 글쓰기를 하며 보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소설이 ‘빙점’이다. 그녀는 그 소설을 통해 가게에서 번 돈보다 몇백 배 넘는 부와 명예를 얻었다.
이웃과 함께 살아가는 작은 배려가 부부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여유와 배려가 있을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이 따뜻해진다. 요즘 많은 사람이 힘들어한다. 뭘 해도 먹고살기가 어렵다고들 한다. 창업을 했다가 접게 되면 그 피해는 막대하다. 잘못하면 다시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빚에 쪼들리기도 한다. 이럴 때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다면 살맛나는 세상이 되지 않을까. 우리 가게에 손님이 넘치면 옆집 가게를 소개하는 배려심이 있으면 좋겠다. 잘되는 식당만 고집하지 말고 한 번쯤은 옆집 식당도 찾아주자. 이 추운 겨울, 가난한 이웃에게 배려의 마음이 따뜻한 온기로 전해지길 바라면서.
지금까지 문화공간 취재를 다니면서 한 번쯤은 다른 시선을 가지고 있는 누군가와 가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8월호의 문화공간을 성수동 카페거리로 선정하면서 이곳과 인연이 깊다는 분과 함께했다. 최근에 등단한 신인 수필가이자 전 아쿠아리움 부사장 손웅익 동년기자다. 화학냄새 진동하던 공장지대에서 카페거리로 탈바꿈한 서울시 성동구 성수동 카페거리. 멋진 남자와 함께한 커피 향 가득한 거리 데이트에는 옛 추억도 함께 있었다.
성수동 거리를 걷다
성수동이 일반인들에게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수제화 장인들의 구두를 판매하는 성수수제화타운(SSST)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한 2011년부터다. 지하철과 버스 등 광고판을 통해 성수동이 어떤 곳인가를 인식했다. 사실 우리나라의 제화산업은 1950~1960년대 서울역 근처 염천교(서울시 중구 의주로 2가)에서 시작했다. 1970~1980년대 일명 ‘싸롱화’ 전성기였던 명동시대를 거쳐 1990년대 외환위기를 기점으로 싸롱화 수요가 줄면서 서울 안에서 비교적 땅값이 낮았던 성수동으로 구두 관련 공장들이 이동했다. 그리고 버려졌던 옛 공장과 창고가 새로운 문화 공간과 카페로 단장을 하면서 사람들이 모이고 향기를 나누는, 문화예술이 흐르는 공간으로 거듭났다.
서울의 두물머리, 성수동 옛이야기
한양대 건축과 77학번 출신인 손웅익씨에게 성수동은 각별하다. 한양대 시절 화양동과 성수동을 지나 학교를 다녔기 때문에 발전상을 보며 살았다. 산업화가 시작되면서 줄곧 공장지대였던 성수동. 이곳에는 건축과 시절 학내 모임인 공간연구회가 있었기 때문에 자주 방문했다.
“바로 위 선배 학번에 부자가 많아서 아파트에 전세 얻어서 작업실로 썼어요. 지금은 없어졌어요. 그런데 건축작업보다는 선배들이 카드게임하시면 라면 끓이고 그랬던 거 같아요(웃음).”
그리고 성수동이 한강 본류와 중랑천이 합쳐지는 양주의 두물머리 같은 지역이라고 설명했다. 성수동은 성수대교와 영동대교 사이 지역과 건대, 세종대, 한양대 지역을 감싸고 있다. 한강 개발 이전에는 장마철 이 지역의 둑이 범람하느냐 마느냐가 최대 관심사였다.
“둑이 터지기 직전에 비가 그치곤 했지만 거기 문제가 뭐냐면 중랑천 변에 판자촌이 있었는데 제가 어렸을 때 거기서 살았어요. 집들이 마치 해변에다가 지어놓은 것 같았어요. 비가 오면 집들이 해변에 있는 것처럼 잠겼었죠. 집이 떠내려가면 하룻밤에 집을 한 채씩 지었어요. 블록을 쌓고 서까래는 허접한 나무를 쓰고 기름종이를 붙이고 말이죠. 조세희의 에 나오는 집이 바로 그런 집들입니다. 제가 당시 산 증인입니다.”
비가 많이 오면 비가 온 만큼 집이 떠내려갔다. 그러면 전기도 없던 시절 횃불을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는데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학교 1학년 때까지 반복적으로 이어졌다. 중랑천 상류인 의정부 지역에서 돼지, 닭과 함께 오물이 쓸려 내려오기도 했다고 설명을 덧붙였다.
“방에 누워서 밖을 보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보여요. 블록 사이사이 구멍이 뚫려 있었거든요. 그러면 겨울에는 얼마나 또 추웠겠어요. 그런 세월이었습니다.”
■‘모두의 거리’란 이름의 성수동 수제화 거리 인터넷 사이트는 구두거리와 관련한 정보를 비롯해 맛집과 카페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seongsushoes.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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