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오(89) 명예총재의 영웅담은 끝이 없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만연하던 시절, 군대에서 끝끝내 대한민국 여성 최초로 단독비행을 성공했다. 이후 유학을 떠나 기죽지 않고 나라를 알렸고, 자전거 한 대 갖기 어려운 시절에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했다. ‘마담 킴’의 비행 아래, 우리나라는 괄시받는 가난한 국가에서 국제기구 총회 유치에 성공하는 항공 선진국이 됐다. 그는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심어주고 전후(戰後)의 어둠을 걷어내는 새벽별과도 같았다.
김경오 명예총재는 ‘대한민국 최초 여성 비행사’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스무 살의 나이에 6·25전쟁에 공군 조종사로 참전해 비밀문서를 전달하는 업무를 전개했다. 예편 후 후학 양성을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고, 말도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생활고를 버텨낸 끝에 ‘조국과 후배들을 위해 비행기 한 대를 가지고 돌아오겠다’는 꿈을 이뤘다. 또한 자신의 뒤를 이을 여성 비행사를 양성하기 위해 한국여성항공협회를 창설하고,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해 여성운동에도 앞장섰다.
그는 최고의 비행사이기도 하다. 공군 창군 50주년이던 1999년, 최고의 조종사에게 주어지는 훈장(Command Pilot Wings)을 받았다.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비행사인 그는 국제항공연맹에서 항공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비행사에게 시상하는 ‘에어골드메달’ 훈장을 수여받았다. 미국 오클라호마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에는 한국 여성으로 유일하게 개인 전시관인 ‘김경오 전시관’이 마련돼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못 하고 있습니다”
비행과의 인연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시작됐다. 그는 교장선생님의 호출에 무작정 연필과 지우개를 들고 시험을 치렀다. 이북데기(이북 출신을 낮잡아 부르던 말)라고 놀림받던 것을 설욕하기 위해 공부도 열심히 했던지라, 시험에 이은 면접과 신체검사까지 통과했다. 최종 합격통지서를 받은 날에야 알았다. 제1기 공군 여성 조종사 후보생을 모집하는 시험에서 몇 백 대 일의 경쟁률을 뚫었다는 사실을.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사관 생도를 뽑으면서 여성 항공병도 따로 뽑도록 지시했기 때문인데, 김경오 명예총재는 실질적 목적은 따로 있었다고 설명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젊을 때 미국 유학을 떠났었죠. ‘하늘의 퍼스트 레이디’로 불리던 아밀리아 에어하트를 비롯해 활발하게 활동하는 여성 조종사들을 보면서 생각했을 거예요. ‘우리나라가 독립해 자주국가가 되었음을 알려야 하는데 이를 위한 홍보 수단으로 여성 조종사만큼 좋은 아이콘이 없겠다’고요.”
하지만 비행사가 되기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험난했다. 전쟁이 터졌고, 여성 생도들은 소위로 임관되어 비행기를, 전투기를 타며 참전하기만을 꿈꿨지만 유야무야 시간만 흘렀다. 미래가 없다고 판단한 동기들은 하나둘 떠났고, 김 명예총재만이 군에 남게 됐다. 홀로 남은 여성 소위를 향한 회유와 협박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됐다. 그는 ‘이대로 가다간 비행기를 몰아볼 기회조차 얻지 못할지도 모르겠다’는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승만 전 대통령이 공군을 방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는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하며 정복을 정갈하게 다려 입었다. 행사 당일, 이대로 대통령을 보내면 다신 기회가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모든 용기를 끌어모아 대통령 앞으로 튀어나가 보고했다. 헌병들도 다 얼어붙어서 말릴 틈도 없었단다.
“‘경례! 공군 소위 김경오입니다. 각하, 저는 1949년 대통령의 뜻에 따라 공군에 들어온 사람입니다. 제가 여자라는 이유로 조종을 안 시켜줘서 못 하고 있습니다.’ 대통령은 딱 두 마디 했죠. ‘아, 기억나요. 잘하고 있습니까?’ 막사로 돌아왔는데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헌병들이 날 잡으러 오겠구나 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는데, 그 다음 날 명령을 받았어요. ‘공군 소위 김경오 명(命) 비행 훈련, 사천 훈련장.’ 공군참모총장의 특명 제1호였죠.”
우여곡절 끝에 그는 1952년 대구에서 최초의 단독비행에 성공했다. 단독비행을 하던 날 아침, 그는 손톱·발톱과 머리카락을 깨끗한 종이에 싸서 유서와 함께 어머니에게 건넸다고 한다. 전쟁 중이어서 위험했거니와 비행 사고가 나면 시신을 수습하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워서다. 전쟁에 참전하여 비밀문서를 전달하거나, 결혼하고 큰딸을 낳은 뒤 6개월 만에 일본과의 친선비행에 나설 때 그는 유서를 남겼다. 무사히 비행을 마치고 돌아오면 유서를 태워버렸고, 다음 비행에 나서기 전에 새로운 유서를 썼다.
타잔처럼 멋지게, 마음먹은 대로 사는 인생
‘누가 뭐래도 네 인생은 네가 컨트롤해야 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에게 기대지 않는 것이며, 모든 것은 너의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김경오 본인이 그런 삶을 살았다. 두 딸이 결혼하기 전까지 적었다 태우기를 반복한 유서처럼, 남에게 기대지 않고 목표한 바를 이룰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는 삶. 그는 남다른 투지와 인내심으로 계속해서 기적을 일궈냈다. 다치거나 죽는 이들도 많았던 단독비행을 성공해냈고, 민간항공을 공부하고 후학을 양성하라는 대통령의 특명을 받고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영어 한마디 할 줄 몰랐고, 동양인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자행되는 차별에 생활고까지 감내하며 버틴 나날은 고통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뚜렷한 목표가 있었다. 훈련용 경비행기 한 대를 고국에 가져가는 것. 당시 우리나라에는 훈련용 비행기가 없어 공군 생도들이 실전 훈련을 받아보지 못한 채 졸업해야 했다. 김 명예총재는 후배들을, 우리나라 항공의 미래를 위해 영어 공부에 매진했다. 그러는 사이 그가 한국전 참전 용사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조종사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매스컴의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타임’, ‘뉴스위크’, ‘라이프매거진’ 등 유수의 매체에 그의 인터뷰가 실렸고 6·25전쟁의 참상을 알리러 강연을 다녔다.
“초대받은 자리에는 빠짐없이 나서서 열정적으로 임했습니다. 내가 지금 하는 모든 활동이 민간 외교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어요. 비행기를 가지고 돌아가겠다는 제 목표를 들은 기자들은 고개를 저었지만 결국은 해냈죠. 당시 미국의 여성 비행사 1만 명이 저를 돕기 위해 ‘We Help Captain Kim’이라는 현수막을 내걸고 모금을 진행했어요. 모금이 유명해지면서 한 경비행기 회사에서 경비행기 ‘파이퍼 콜드’ 한 대를 기증해줬거든요. 덕분에 목표한 대로 비행기 한 대와 함께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한국군 유일한 여성 비행사는 희망의 아이콘이었다. 그는 어릴 적부터 체득한 군인 정신으로 나라를 위한 일이라면 가리지 않고 임했다고 말하지만, 호방한 성정도 한몫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일화가 있다.
“초등학생 때는 장래 희망으로 ‘밀림의 왕 타잔’을 적어냈어요. 동화책을 보는데, 호령 소리만 들리면 작은 동물부터 맹수까지 한 번에 달려오는 게 너무 멋있게 느껴졌거든요. 나도 말 한마디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 있는 멋진 사람이 돼야겠다고 생각했죠. 하지만 담임선생님한테 혼났어요. 여자애가 무슨 타잔이냐 교사나 하지 하면서 머리를 쥐어박혔죠.”
밀림의 왕처럼 하늘을 누비던 그는 2009년 미국 오클라호마에서 20분간 마지막 비행을 했다. 그림처럼 예뻤던 하늘에서 내려온 그는 세계여성파일럿박물관의 김경오 전시관을 둘러본 뒤,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객기를 탔다. 그는 주문한 샴페인을 마시고, 남은 한 모금을 머리에 부으며 하늘에 인사를 건넸다. ‘Good bye, dear my blue sky.’ 성격만큼 호쾌한 인사였다.
한계 대신 지금에 집중하는 삶
이후 직접 조종석에 앉는 일은 없었지만 그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국제항공연맹, 국제여류비행사협회 등의 국제회의에 꾸준히 참석하며 우리나라 민간항공의 성장을 도모했다. 미래는 하늘에 있으리라는 것을 일찍이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수석대표로서 회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은 물론, 쉬는 시간이 주어지면 선진국 대표들과 안면을 트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바빴다. 모두 그만의 ‘민간외교’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었다. 그의 공로는 높아진 한국의 위상으로 인정받았다. 2009년 인천의 제103차 국제항공연맹총회 유치에 성공하기까지 김 명예총재의 기여한 바가 컸다.
아흔을 앞둔 지금도 삶을 대하는 자세는 군인 시절과 다르지 않다. 일찍 전역했지만 어릴 적부터 군대 제식 교육을 받아서인지 아직까지 그렇게 생활하게 되더란다. 오전 3시 30분이면 눈을 뜨고, 천천히 일어나 기지개를 켠 뒤 침대에서 내려온다. 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꼭 화장을 하고 나선다. ‘나이 들어 화장해서 뭐하느냐’고 말하는 친구에게는 따끔하게 한 소리 한단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선을 다하는 자세가 자연히 몸에 배어 있다.
“매일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해요. 나는 ‘백세시대’라는 말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백세시대라고 말해버리면 내 나이를 백세까지로 한정 지어버리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나는 이 나이에도 자기 전에 침대에 누워 공상하기를 즐깁니다. 이를테면 내가 연애를 한다면 어떤 남성이 어울릴까, 즐겨 보는 드라마의 주인공이 되어보면 재밌겠다, 이렇게 지내면 매일이 즐겁지 않겠습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비행을 할 수 있다면 어디로 떠날 것인지 물었다. 망설임 없는 대답이 이어졌다. “답이 정해진 질문이네요. 평안북도 강계요. 내가 나고 자란 고향이 지금은 어떤 모습인지, 하늘에서라도 빙 둘러보고 싶습니다.” 다시 태어나도 또다시 공군이, 비행사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해 기꺼이 스스로를 갈고닦겠다는 김경오 명예총재. 미국의 시인 새뮤얼 울먼이 말했듯, ‘머리를 높이 들고 희망의 물결을 붙잡는’ 그가 늘 푸른 청춘이 아닐 리 없다.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의 경력은 그 분야에서 얻을 수 있는 가장 화려한 결과물처럼 보인다. 1978년에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교수로 임명된 이후 은퇴할 때까지 36년간 자리를 지키다 정년퇴직을 하고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재직한 그는 2016년부터는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임명되어 혁신을 이끌었다. 올해 4년간의 임기를 끝내고 산업정책연구원 이사장으로 위촉된 그는 다시 베이징으로 돌아갈 날을 위해 최근 중국어를 배우려고 방송통신대학교 3학년으로 편입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쉼 없이 제2의 인생을 추구하는 그의 삶 속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를 탐색하는 시간을 가졌다.
인천대학교 총장으로서 성공적인 4년의 임기를 마친 조동성 산업정책연구원(IPS) 이사장의 표정은 밝아보였다.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했다.
“인천대학교는 서울대학교와 더불어 우리나라에 둘밖에 없는 국립대 법인으로 지배구조가 같아서 신바람 나게 일했어요. 4년이 짧지 않았느냐는 질문을 받곤 해요. 사람에 따라선 4년이 1년 같을 수도 10년 같을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인천대를 가기 전 지난 서울대 총장 선거를 10여 년간 치르면서 조직선거가 아닌 정책선거를 추구했어요. 그래서 대학교를 위한 다양한 정책을 10여 년 동안 마련할 수 있었고 인천대에서 4년 동안 그것들을 마침내 도입했죠.”
50년 만에 다시 대학생, 중국어를 배우는 이유
사실 그는 2014년 서울대학교에서 은퇴한 후 인천대학교 총장으로 취임하기 전까지 중국 베이징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임용됐다. 15년 계약으로 2029년, 80세까지 임기였지만 인천대학교로 가면서 무급휴직에 들어갔다. 총장 임기를 마친 후 다시 장강경영대학원 교수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상황이어서 못 돌아가고 간접 활동만 하는 중이라고 했다. 언젠가는 돌아가서 본격적으로 활동해야 한다고 말하는 그는 최근 방송통신대학교 중어중문학과 3학년으로 편입해 2020학번 대학생이 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다음에 돌아오면 중국어로 강의하겠다고 약속했거든요. 2029년까지는 이제 9년 남았으니 중국어로 강의할 수 있도록 실력을 갖추자는 게 목적이에요.”
그는 중국을 이해하면 한국이 보인다고 했다. 중국과 한국을 대비하면 재미있는 감각이 생긴다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면 우리나라에서 연줄이라는 말은 중국말로 콴시라고 합니다. 둘의 공통점은 ‘이게 없으면 되는 것도 안 된다’는 것이죠. 그런데 그 정도가 달라요. 우리나라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연줄은 10% 정도라고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중국에서 어떤 일이 이뤄지려면 콴시가 90% 정도 비중을 차지합니다.”
연줄과 콴시를 비교하면 중국이 보인다
연줄과 콴시(關係, 인맥) 사이에는 더 큰 차이가 있다. 연줄은 과거가 필요하다. 고향이 같든 학교가 같아서 만들어지는 게 연줄이다. 그런데 콴시는 과거가 없다는 게 특징이란다.
“유비, 관우, 장비는 도원결의 전에는 서로 공통점이 하나도 없었어요. 하지만 한 번 맺어지니 계속 갔죠. 그처럼 콴시는 뿌리가 없는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연줄을 보면 후배가 막 대해도 선배가 세 번은 봐줘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선배가 옹졸하다는 얘기를 듣죠. 콴시에서는 그런 게 없어요. 처음 만난 관계니까요. 그래서 콴시는 만들어진 후에 어떻게 유지하느냐가 관건입니다. 저는 콴시를 살얼음판이라 여겨요. 살얼음판 걷듯이 콴시를 유지해야 하거든요.”
연줄이 혈연·지연·학연으로 맺어진 과거지향적 관계라면 콴시는 미래지향적이다. 많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중국에서의 성공을 꿈꾸지만 실패하는 이유는 연줄 만들듯 콴시를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라는 게 조 이사장의 분석이다.
“콴시는 수단입니다. 앞으로 일을 도모하는 데 필요한 수단이지 목적이 아니에요. ‘삼국지’에서도 콴시가 맺어지니 나라가 만들어졌잖아요? 우리와는 정반대죠. 우리는 활용한다는 개념이 없고, 설혹 그러면 진정성이 떨어진다고 하니까요.”
중국의 ‘콴시’를 한국의 연줄이라 착각하면 큰코다친다는 것이다. 콴시는 몸으로 부딪쳐 직접 습득해야 하며 머리로 깨쳐서는 안 된다고.
조 이사장의 설명을 들으니 중국을 통해 우리나라를 본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최근 중국에 대한 안 좋은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중국은 미국과 함께 가장 중요한 나라일 수밖에 없다고 강변했다.
“미국을 공부하는 수준으로 중국 공부를 해야 하는데 안 하죠. 미국은 잘 모르니까 공부를 하는데 중국은 어느 정도 안다고 대충 생각하니까요. 미국이나 유럽은 모르니까 열심히 공부하거든요. 중국은 어떤 형태로든 상관없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중요한 존재고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중국을 모르고 사회 지도자가 될 수는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 봅니다.”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배워도 된다
1949년생이지만 미래를 위해 다시금 처음부터 공부에 뛰어들 정도로 열정과 학구열이 높아서인지 조 이사장은 나이에 비해 동안으로 보였다. 그는 나이를 잊고 살아서 그런 게 아닌가 싶다고 웃으며 말했다.
“청춘을 유지하고 싶어요. 나이를 안 먹고 싶다는 게 아니라 이상을 추구하는 자세를 유지하고 싶은 거죠. 청춘은 나의 미래이자 삶을 긍정적으로 관조하는 자세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자신만의 영웅론을 갖고 있다. 영웅은 마음은 있고 자질이 없으면 돈키호테가 되고, 마음은 없고 자질만 있으면 햄릿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진정한 영웅은 두 개를 다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생각하는 영웅의 마음이란 젊은 마음, 즉 청춘을 의미한다.
“그런데 우리 또래가 만나서 하는 얘기의 95%는 옛날 얘기예요. 그래서 제가 나가는 모임에서 ‘절대로 어제 골프 친 얘기 하지 말자, 미래에 뭘 할 건지를 얘기하자’는 원칙을 세웠던 적도 있어요. 그런데 몇 달 해보니 한계가 와서, 아예 젊은 강사를 초빙해 강의를 듣기도 했죠.”
그러고 보니 그는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독서모임인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의 경영자 독서모임(MBS)을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이 모임에서는 1년에 책 40권을 읽는데, 올해로 25년을 했으니 1000권을 읽은 셈이다. 그는 독서를 어렵고 무거운 것으로만 생각하는 이들에게 책을 내 걸로 만들겠다는 아집, 강박관념을 버리는 것이 독서법의 출발이 되어야 한다고 충고한다.
“독서를 할 때 처음부터 끝까지 줄 치면서 읽지 않아도 됩니다. 머리말을 보고 이 책이 왜 씌어졌는지 이해한 후에 관심 있는 것부터 읽으면 됩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책 한 권에서 한 단어만 내 것으로 하면 성공적으로 읽은 셈이죠.”
그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경영대학원에서 AI. 크립토 MBA 석사과정도 밟고 있다. 인공지능의 이론과 실제, 경영의사결정 활용 등을 배우고, 블록체인과 디지털금융 메커니즘 및 비즈니스 접목 등도 공부하고 있다.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은 빅데이터, 블록체인, 크립토 등 4차 산업혁명을 선도하는 MBA 과정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최근 모든 석·박사 과정에 AI를 도입하기로 발표해 큰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 중 한 사람
25년째 MBS(Management Book Society)를 이끄는 것에서 짐작 가능하듯이 조 이사장은 안중근 의사가 중하게 여긴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 안에 가시가 돋는다”는 말을 신봉하며 사는 사람이다. 또한 그는 안중근 의사와 남다른 인연이 있기도 하다.
“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오촌 조카였죠. 열 살 무렵에 고아가 되셔서 굉장히 어렵게 살았지만 공부를 잘해 연세대에 입학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연세대 교수를 하셨어요. 현실 정치에도 관심이 있어서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가셨는데 안 되셨죠.”
그런데 그에게 강렬한 영향을 미친 아버지의 모습은 바로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마한 아버지였다. 낙마한 날, 아버지가 러시아 책을 읽으며 러시아 공부를 하는 걸 본 것이다.
“당시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이 북한에 갔을 때였죠. 낙마한 날, 아버지께서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발전할 것 같은데 러시아가 어떻게 나올지 알아야겠다며 공부를 하시는 거였어요. 그날의 충격이 지금도 생각납니다. 그 자리에서 바로 과거와 단절하고 새 출발을 하던 아버지의 모습이야말로 제가 배운 아버지였어요.”
그러나 정치에 참여해 곤욕을 치른 남편이 못마땅했던 것일까. 조 이사장의 어머니는 그가 1978년에 서울대학교 교수가 되었을 때, 절대로 정치계로는 나가지 말라고 했다. 교수로만 일하다 정년퇴임하라는 ‘명령’이었다.
“제가 몇 번 정치 유혹을 받았는데, 그때마다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켰죠. 2014년까지 교수로 있겠다고 답하곤 했거든요.(웃음)”
잘하는 거 해야 하나, 좋아하는 거 해야 하나
조 이사장은 자신이 어떻게 기억될지보다는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을지에 더 관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2013년 9월, 서울대학교에서 마지막 학기를 맞이하면서 무엇을 할까 생각했다.
“제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얘기해왔는데 교수도 사회적 책임이 있지 않나 싶었죠. 그래서 그걸 수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는 전국에 있는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자신을 불러주면 두 시간 무료 강의를 해주겠다는 제안이었다. 그러자 15개 학교에서 요청이 왔고, 매주 한 번씩 15주 동안 강의를 진행했다.
“15개 학교에서 똑같이 하는 질문이 있었어요. ‘잘하는 걸 할까요? 아니면 좋아하는 걸 할까요?’”
그는 고민 끝에 그런 질문을 가진 사람들을 네 부류로 나누었다. 꿈이 확실히 있고 평생 지키는 독립군 같은 사람은 A형, 꿈은 있는데 바뀐 사람은 B형, 꿈이 있으나 자신이 없는 사람은 C형, 아예 꿈이 없는 사람은 D형.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름의 답을 찾았다.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은 결과 변수였던 거예요. 원인 변수를 생각해서 원인이 이럴 때는 이런 결과를, 저럴 때는 저런 결과가 나온다고 말할 수 있어야 했던 거죠. 원인을 종속변수로 보지 말아야 했어요. 그래서 자신이 ABCD 카테고리 어디에 속하느냐에 따라 선택은 달라집니다. A형은 좋아하는 걸 해야 하죠. 잘하든 못하든 상관없이 총을 잘 쏘든 못 쏘든 독립군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니까요. 꿈이 없는 D형은? 잘하는 것을 해야 하죠. 그렇다면 가운데 있는 B, C형은? 꿈을 실행할 수 있을 때까지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하자, 누군가가 조 이사장에게 ‘발칙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은 어느 카테고리에 속하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그런데 저는 이걸 하면서도 제가 어디에 속하는지 생각하기 싫더라고요. 이럴 때 빠져나갈 방법이 있습니다. ‘자네가 생각하기에 나는 어떤 타입인가?’라고 물었죠. 그 학생이 기다렸다는 듯이 ‘선생님은 D형이었다가 B형으로 간 것 같다’고 말하더군요. 감개무량한 충격을 받았어요. 저를 난생처음 본 학생이 정확하게 말한 거였으니까요.”
그는 자신이 최근까지 꿈이 없었다고 고백했다. 소위 ‘엄친아’로서의 삶이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부모님이 하라는 대로 하면서 산 사람이었죠. 그런데 최근에 꿈이 생겼어요. 제가 박사 학위를 도와준 사람이 400명 가까이 됩니다. 저는 좋아하는 사람을 박사 학위 받도록 해주는 걸 취미로 가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어요.(웃음) 그걸 보며 ‘이게 진짜 행복이구나’ 하는 걸 느껴요.”
그래서 그는 시간이 갈수록 사람의 평균수명이 늘어나는 만큼 공부하는 기간도 길어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공부하는 시간을 인생의 3분의 1이라고 보면 됩니다. 일제강점기에는 평균수명이 50대였으니 중학교만 나와도 동네에서 지도자 역할을 할 수 있었죠. 이승만 대통령 때는 평균수명이 60대였으니까 고등학교를 나와야 했고요. 박정희 대통령 때는 70대였으니 대학을 나와야 했습니다. 최근에는 평균수명이 80대니까 석사까지는 밟아야지요. 그리고 100세 시대에는 박사가 표준이 될 겁니다. 사치가 아닙니다. 즉, 박사 공부는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어요. 그러니 60대 시니어는 30년 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 공부해야 합니다. 평생교육은 오래 사는 데 필요하기도 하지만,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도 중요하거든요.”
평생교육의 전도사인 조 이사장은 ‘우리 인생의 첫날은 오늘이다’라는 말을 믿고 따라온 사람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과거를 회고할 때는 아닌 셈. 우리의 절정기는 오늘부터이니까 과거의 전성기를 회고할 필요는 없다는 게 그의 신념이다. 그 말처럼, 그의 프라임타임은 거듭나고 있다.
>>> 조동성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67학번, 미국 하버드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과정 수료. 1978년 최연소 서울대학교 교수로 임용돼 경영대학장을 지냈고, 36년간 재직하며 한국경영학회장· 한국학술단체총연합회장, 15개 해외 대학 초빙·겸임교수로 활동했다. 이명박 정부 때 대통령 직속 국가경쟁력강화위원회 위원, 2014년 국가브랜드진흥원 이사장을 역임했다. 2016년에는 인천대학교 총장에 취임해 지난 7월 임기를 마쳤다. 8월에 싱크탱크 산업정책연구원(IPS) 제5대 이사장으로 취임했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아이들은 호모 루덴스(유희하는 인간)다. 아이들은 여러 가지로 논다. 요즘 아이들은 게임하고 카톡을 하면서 주로 비대면으로 혼자 논다. 하지만 1960년대의 아이들은 또래들과 만나서 놀고, 동물들과 놀고, 말장난 수수께끼에 노래 가사를 바꿔 부르며 놀았다. 장난감이 없던 시대의 아이들에게는 말이 장난감이었다.
그런데 숫자를 차례로 나열하는 말장난이나 끝말을 이어가면서 약간의 멜로디와 리듬을 붙여 소리치고 다니는 유희, 이런 걸 뭐라고 하지? 예를 들면 “애들 모여라, 애들 모여라. 여어자는 필요 없고 남자 모여라.” 또는 어려서 아이들이 날 놀려 먹던 노래(?) “순이 순이 철순이, 장가 장가들었다, 누라 누라 마누라, 개다 개다 두 개다.” 이런 거. 나는 요언(謠言)이라고 쓰려 했는데, 찾아보니 사전엔 뜬소문이라는 풀이밖에 없더라. 그게 맞는 말이기도 하겠다. 나는 마누라가 두 개가 아니니까.
(여기서 잠깐~! 이쁘고 요리 잘하고 착한 마누라를 얻으려면? 답은 마누라를 셋 얻는 것이다. 마누라가 하나면 한심한 남자, 둘이면 양심적인 남자, 셋이면 세심한 남자라고 하지 않던가? 이렇게 신소리 헛소리를 하면서 작전타임을 써 봐도 딱 맞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겠다. 그런데 이런 게 바로 자생적이고 자발적인 동요가 아닐까.)
나는 어려서 못된 말장난을 많이 하고 다녔다(물론 어른들이 못 듣는 데서). “일, 일본 년이 이,……, 삼, 삼밭으로 들어가 사. 사방을 둘러보니 오, 오는 사람이 없어 육, 육시랄 년이 칠,…… 팔, 팔뚝만한 XX로 구, …… 십,…을 하더라.” 이 칠 구의 말줄임표는 생각나지 않는다는 표시다. 함께 자란 고종사촌형에게 물어봤지만 “난 너무 고상한 사람이라 그런 거 생각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형과 나는 무슨 행진곡인가에 가사를 붙여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마려 아이고 오줌 마려.” 이렇게 발맞추어 노래 부르곤 했다. 그러면 안방에 있던 할머니가 “아, 얼렁 뒷간에 가. 오줌 참으면 병나”라고 소리쳤다(사실은 병이 된다는 말인데, 충청도 말 도+ㅑ가 표기되지 않는 게 유감이다).
그 형과 내가 공통적으로 완전하게 기억하는 건 이거다. “야 야 야마싯대가 담뱃대, 대 대 대꼬바리(담배통)가 홀애비짱, 장 장 장돌뱅이가 시리방구, 구 구 구두 신었다구 재지 마, 마 마 마루 밑에 달기똥(닭똥), 똥 똥 똥 싸놓고 도망갔다네, 내 내 냇가에서 놀다가, 가 가 가아련다 떠나려언다….” 무슨 뜻인지 지금도 모르는 말이 몇 개 있다. 네가 내로 바뀌는 대목이 어색하지만, 이 말장난의 끝은 유행가 ‘유정천리’로 이어진다.
1959년 박재홍이 불러 대히트를 한 그 노래의 1절은 이렇다. “가련다 떠나련다. 어린 아들 손을 잡고/감자 심고 수수 심는 두메산골 내 고향에/못살아도 나는 좋아 외로워도 나는 좋아/눈물 어린 보따리에 황혼 빛이 젖어드네.”
그런데, 우리 공주 시골동네 청년들은 다르게 불렀다. 가사를 바꾼 노래의 1절과 2절은 다음과 같다.
가련다 떠나련다 해공 선생 뒤를 따라
장면 박사 홀로 두고 조 박사는 떠나간다
천리만리 타국 땅에 객사죽음 웬 말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비가 오네
세상을 원망하랴 자유당을 원망하랴
춘삼월 십오일에 조기 선거 웬 말이냐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당선 길은 몇 굽이냐
자유당에 꽃이 피네 민주당에 눈이 오네
노래가 발표된 1959년은 4·19 한 해 전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독재가 막판으로 치달을 때였다. 1956년 5월 15일의 제3대 대통령 선거를 열흘 앞두고 민주당의 해공 신익희(1894~1956) 후보가 호남선 열차에서 급서했다. 이어 4년 후인 1960년 3·15 대선 때는 민주당 조병옥(1894~1960) 후보가 미국으로 신병 치료하러 갔다가 선거 한 달 전인 2월 15일에 타계했다. 그 상황에서 대중의 절망과 민주화 열망을 담은 노래가 “가련다 떠나련다”의 개사곡이다. 1960년은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마을 청년들은 작대기로 지게목발을 두드리며 이 노래를 참 많이도 불렀다.
또 하나 ‘비 내리는 호남선’이라는 노래. 해공 급서 이후 민주당의 당가처럼 불린 가요가 있다. 작사자 손로원, 작곡자 박춘석은 정치와는 무관한 사람들이었고, 해공이 타계하기 석 달 전에 나온 노래였는데도 해공을 애도하기 위해 만든 거라는 오해를 받아 경찰에 소환당하며 시달렸다. 5월 5일 어제가 해공의 64주년 기일이었다.
사람은 가고 노래는 남았다. 그러나 가사를 바꾸거나 곡조도 없는 노래로 만든 말장난 동요는 불러본 사람들만의 것이어서 전승되지 않는다. 동시대의 사람들이라도 잘 알지 못한다. 악보상의 노래와 달리 기억 속의 동요는 사람과 함께 사라진다. 스스로 만들어 노래유희를 하는 아이들도 이제는 보기 어렵다.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내가 초등학교 때 부른 ‘이승만 대통령 찬가’는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로 끝난다. 그러나 찾아보니 원전은 그게 아니올시다였다. 경향신문 1953년 8월 15일자에 실린 가사를 보면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각하’다. 박사와 각하는 음운상 비슷하지만 엄청 다르다. 내 기억의 착오인가, 아니면 이승만 우상화에 염증을 느낀 우리 계룡초등학교 선생님이 바꾸어 가르쳐주신 걸까? 후자였으면 정말 좋겠다.
그 가사가 실린 건 6·25 정전협정(1953.7.27.)을 체결한 지 한 달도 안 된 시점인데, 노래에 대한 해설기사는 전혀 없다. 서울방송 어린이노래회가 그해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광복절 기념식에서 부른 노래는 다음과 같다. 1~3절을 신문에 실린 그대로 옮긴다.
一. 그어느곳에 슬기었던가 원한의거슬린 피뛰어솟는곳 온땅에믿음이 피어나리고 정의의불가마 밝게안기인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二. 그어느곳에 약속이던가 온하늘사랑이 높이솟으라 그리움에물이여인 내를쌓고 평화의너럭 바위굳이간직한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三. 그어느곳에 결의었던가 삼천리맑은물결 길이이끌어 백두의정수리높이 보살피는데 행복의 넓은바다 인자로그은 우리의대통령 이승만각하
정의의 불가마 밝게 안기고, 그리움에 물이 여이고, 행복의 넓은 바다 인자로 그은, 무슨 말인지 참 알아듣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렇게만 기억하고 있었던 건 마땅하고 옳은 일이다.
난 불러본 적 없지만 알고 보니 “우리 대통령’이라는 노래도 있었다. 전체 3절 중 1절은 이렇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해/여든 평생 한결같이 몸 바쳐 오신/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 대통령/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이 전 대통령은 1875년생이니 여든이면 1955년에 나온 노래인가보다.
‘10월 유신’의 해인 1972년엔 그에 못지않은 박정희 대통령 찬가(박목월 작사, 김성태 작곡)도 발표된 바 있다. 지금은 누구나 북한의 김 씨 일가 우상화를 비웃고 놀리지만 우리에게도 그에 못지않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다.
뉴라이트 성향의 보수단체 자유기업원(구 자유경제원)이 2016년에 ‘이승만 시 공모전’을 주최한 일이 있다. 건국 대통령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사람들이 하도 많아 바로잡으려고 기획한 일이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다. 이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시인데도 내용을 잘 모르고 최우수작(영시)과 입선작으로 뽑은 탓이다. 입선작 ‘우남찬가’의 경우 각 행의 첫 글자를 세로로 이어서 읽으면 ‘한반도분열 친일인사고용 민족반역자 한강다리폭파 국민버린도망자 망명정부건국 보도연맹학살’이 된다. https://blog.naver.com/fish96/220806135895
이런 걸 아크로스틱(acrostic, 삼행시처럼 각각의 행에서 처음이나 중간 또는 끝의 말을 서로 연결해 어구나 문장이 되게 만드는 방식) 기법이라고 하나보다. 영시는 물론 한시에도 그런 게 있다. 잡체시(雜體詩)의 일종으로 분류되는데, 엄연히 문학적 족보가 있는 창작 기법이다. 자유기업원은 입상을 취소하고 명예훼손 혐의로 응모자를 고소했지만 결국 그 사람만 유명해지고 말았다.
아크로스틱 문자희롱의 사례를 찾아보자. 집을 나가는 아내(완전 가출은 당연히 아니고)와 남편이 주고받은 말이 널리 퍼져 있다. 어떤 아내가 집 나가면서 냉장고에 써 붙인 글을 세로로 읽으면 ‘까불지 마라’, 남편이 이에 대해 휴대폰으로 응수한 글은 ‘웃기지 마라’다.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데, 내가 ‘원전’(?)을 좀 더 멋지게 고치고 다듬었다.
까스 조심하고
불내지 말고
지퍼 막 내리지 말고
마누라 찾지 말고
라면이나 끓여 먹어
VS
웃음이 절로 나고
기분 정말 째진다
지퍼야 내 맘대로지
마누라는 오든 말든
라면? 호텔 뷔페다!
근데, 가스를 조심하라거나 불내지 말라는 말은 사실 그게 그거니까 ‘불’을 어떻게든 바꾸면 좋겠다. 시에서 동어 반복은 어디까지나 기피해야 할 일 아닌가? ‘불평불만 입 닥치고’ 이래볼까? ‘불타는 금요일은 개뿔’ 또는 ‘불안에 떨지 말고’?, 아니, ‘불두덩이나 만지고’ 이러면 어떨까? 이게 그 아래 ‘지퍼 막 내리지 말고’와 어울릴 법하다.
그런데 그것도 말이 친숙하지 않고 야해서 좀 거시기하다. ‘불량(또는 불순)한 짓 하지 말고’나 ‘불 켜놓고 자지 말고’, ‘불쌍한 척하지 말고’ 이런 건 어떨까? ‘불콰해져 해롱거리지 말고’도 괜찮을 거 같기는 하다. 에이 모르겠다. 다 맘에 들지 않는다. 더 재미있는 말이 불현듯 생각날 때가 있겠지.
임철순 언론인ㆍ전 이투데이 주필
※4월 1일(수)부터 ‘임철순의 즐거운 세상’을 주 1회 온라인 연재합니다. 코로나19로 어둡고 우울한 시대에, 삶의 즐거움과 인간의 아름다움을 유머로 버무려 함께 나누는 칼럼입니다.
나는 2월에 ‘충청도 사람 이야기’ 1~3편을 쓴 적 있다. 이 글은 내 블로그에서 정말 인기가 높다(고 나는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중 두 번째 글(https://blog.naver.com/fusedtree/221820129396)은 아래와 같이 끝난다.
저는 초등학교 때 이런 노래를 배웠습니다. “맑은 바람(하늘?) 밝은 달(그다음은 생각 안 남) 7백년 백제 역사 이룩한 고장, 찬란한 옛 문화 새로 꽃 피워 이 나라 길이 빛낼 도민 3백만.”
‘충남도민의 노래’인데, 이 글을 쓰면서 찾아보니 1957년 충청남도 내무국 문화예술과(아아, 그 시절에도 이런 과가 있었다니!)가 생산한 노래라고 나오네요. 그러나 가사 전문은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걸 찾아서 알려주시는 분께는 후사하겠습니다. *후사=일이 다 끝난 뒤 고맙다고 말로 때우는 것.
저는 초등학교 때 조회(종례?)시간에 ‘이(승만) 대통령 찬가’도 불렀습니다.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 (다음은 생각 안 남)” 이렇게 시작해서 “우리에 대애통령 이승만 박사.” 이렇게 끝나는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를 알려주시는 분께도 잊지 않고 후사하겠습니다.
그랬는데 두 달 다 되어 어떤 분이 이런 댓글을 달았다.
-안녕하세요? 저도 국민학교 조회 시간이나 학예회 때 부르던 '대통령 찬가' 를 찾던 중이었는데, 열심히 검색하여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 원한의 거슬린 피 뛰어 솟는 곳, 온 땅의 믿음이 피어나리고 정의의 불가마 밝게 안긴 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승만은 대통령 찬가가 한두 가지가 아니고 종류가 많아서 찾기 매우 힘들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 정말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이승만 찬가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좌우당간 나는 이렇게 답했다.
-와, 무려 60년 만에 가사를 알게 됐네요. 알고 보니 되게 어렵고 외우기 머리 아프군요. 그래서 다 잊어 버렸나? ㅎㅎㅎ. 정말 감사합니다.
-저도 가사를 처음 시작 부분과 끝부분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 어느 곳의 슬기였던가…우리의 대통령 이승만 박사, 이렇게요.
-저하고 똑같군요. ㅎㅎ
-작년에, 제가 국민학교 6년 동안 불렀던 이승만 대통령 찬가 가사를 알고 싶어서 오랜 검색 끝에 겨우 찾아 휴대폰에 저장해 놨는데, 어느 순간 삭제해 버렸어요. 그런데 이번에 또 그게 궁금해져서 검색을 하는데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더군요. 그러다가 "그 어느 곳에 슬기였던가" 이렇게 검색을 했더니 뜬금없이 ‘충청도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주 재미가 있더군요. 크게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제 친구 중에 충청도 출신이 있어 충청도 말씨나 억양에 많이 익숙해요. 그래서 이 글을 그 친구한테 바로 보내줬습니다. 그런데 맨 마지막에 대통령 찬가 첫 부분과 끝부분이 나오는 거예요. 제가 알고 있는 것만…. 참! 실소가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걸 어떻게든 찾으려고 컴퓨터로 오랜 시간 검색하다가 드디어 찾아냈습니다. ㅎㅎ. 며칠 동안 머릿속에 자리하고 있던 과제를 마무리해서 속이 후련합니다.
-제가 그 가사 알려주시는 분께 후사한다고 했는데, 알려주셨으니 제 책 한 권 보내드리겠습니다. 괜찮으시면 주소를 알려주십시오.
-*후사=일이 다 끝난 뒤 고맙다고 말로 때우는 것. 이미 받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아차, 그렇군요(당했다!).
-'이승만 찬가'도 실은 어느 분의 블로그에 들어가서 발췌해 왔어요. 이승만 찬가나 대통령 찬가로 검색하면 제가 배웠던 곡은 절대로 안 나오고 다른 것만 나와요. 이 노래 찾기 정말 어려웠어요. 그래서 역시 첫 소절로 검색하다 어느 분의 블로그에 들어가게 됐어요. 1960년에 3·15 부정선거가 일어나던 때의 상황을 설명하며, 저랑 같은 시대를 살았는지 특별히 그 노래를 기억하고 있었어요. 음악시험 시간에 필수곡이었다고 하면서요. 그분은 교실에 이승만 초상화도 걸려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기억이 안 납니다.
이렇게 해서 나는 문제의 가사를 드디어 마침내 결국 알게 됐다. 원래 내가 말한 후사는 두둑하게 사례를 하는 게 아니라 맨입으로 때우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물하려던(말로만) 책 한 권도 굳게 됐다. 다만, 가사를 잊어버렸던 부분은 어떻게 부르는지 곡조를 아직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나나 내 또래인 것 같은 그분은 왜 이렇게 그 가사를 되살리려 한 걸까? 잊어버리면 잃어버린다. 그 노래는 잃어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잃어버린 건 잘 잊히지 않는다. 잊어버린 걸 되살리는 건 잃어버린 걸 되찾는 일이다. 물건은 잃어버려도 좋지만 노래는 다르다. 노래는 그 자체로 삶이니 노래를 찾는 건 나의 기억과 시간을 되찾는 일이다. 시대가 어떠했든 내용이 무엇이든 ‘그때 그 노래’는 되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조금 있으면 누군가 또 나타나서 ‘충남도민의 노래’도 알려주지 않을까. 길을 걷다가 기타 삐꾸(피크)를 주운 녀석이 “앗싸, 인제 기타만 주우면 된다.”고 그러더라지? 그런 마음보로 ‘독지가’를 기다린다.
임철순 약력
서울 보성고, 고려대 독문과, 한양대 언론정보대학원 졸. 한국일보 편집국장, 주필 역임. 이투데이 이사 겸 주필 역임. 현재 자유칼럼그룹 공동 대표. 삼성언론상, 위암 장지연상 등 수상. 저서 ‘손들지 않는 기자들’, ‘노래도 늙는구나’ 등. 대한민국서예대전 5회 입선.
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늘푸른 연극제’는 지난 해 ‘원로 연극제’로 시작했다. 한 평생 연극에 몸 바쳐 온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행사이다. 7월 28일부터 8월 27일까지 한 달 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4개의 연극을 공연한다. 그 중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 연극을 감상했다. 권병길, 정상철, 이민철, 김종 구 외 극단동양레퍼토리에서 20여명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반민특위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사실이다. 조선 말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 36년을 거쳐 해방이 되었다. 새 나라를 건국하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국민들은 일제에 협력했던 매국노들을 잡아 징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쳐 국회에서 아들을 징벌하기 위해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이승만은 미국에서 건너온 인사로서 국내에 배경이 없었다. 자싱의 배경이라고는 오로지 미국과 일제시대에 일본에 빌붙어 있던 세력들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좋아할 리 없었다.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비롯하여 고등부 형사 김태석, 노덕술 등 일제에 빌붙어 권력과 부를 축적하던 매국노들을 구속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계를 망라하여 매국노들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통령의 비호 아래 유령단체가 등장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한다. 경찰은 못 본 체한다. 결국 반민특위는 6.6 사건으로 기록된 유령단체의 습격으로 비극적 파탄을 맞는다.
우리 역사에서 매국노들을 징벌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흠으로 남아 있다. 이승만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방 후에도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은 경찰 계통 등 공직은 물론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하고 있었다. 존경 받아 오던 사람들이 일제 편으로 전향하고 매국노 노릇을 했다.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사람,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와 시, 문학으로 일제에 빌붙었던 사람 등,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연전연승하던 시절 일제가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날 까지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곱지 않다.
이 연극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미국의 매카시 선풍 같은 빨갱이 매도 시류이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0여명의 반 정부 국회의원들을 제거하고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세력들을 제거하고 이승만 정권은 독재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은 한강 다리를 끊어 놓고 국민들에게는 안심하라면서 자신은 부산으로 피신했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가 함락되어 있던 시절 나치 독일에 협력하던 부역자들을 종전 후 단호히 처벌했다고 한다. 사실주의 학자 카뮈도 이런 과거의 매국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매국노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라며 처벌을 지지했다.
지금도 정권이 바뀌면 ‘적폐 청산’이라 하여 전 정권에 있던 사람들은 찬 서리를 맞는다. 한편으로는 보복 정치라며 비난하지만, 잘못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이 바뀌게 되었을 때도 떳떳해야 한다.
“안전벨트 꼭 매세요. 출발합니다.”
2017년 총동문회 상반기 안보 탐방을 진해로 떠난다는 말에 얼마나 들떴는지 잠을 제대로 못 이루고 뒤척이다 일어나 탐방 준비를 했다. 일 년에 두 번 탐방이 있지만 매번 함께하지 못해 아쉬웠는데 어린 시절 수학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버스에 몸을 실었다.
들떴던 마음과는 달리 긴 여행이어서 슬슬 허리가 아파오고 몸 여기저기가 결려올 때쯤 협력국장이 팔을 걷고 앞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앉아서 할 수 있는 풍선게임과 각종 레크리에이션이 시작되자 우리는 친구들과의 수학여행을 떠올리며 깔깔거리며 맘껏 즐거움을 발산했고, 버스 안은 금세 흥분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어느 새 진해에 도착했고 모두들 바닷가를 배경으로 맛난 점심을 먹은 뒤 대형 수송함과 다목적 군함인 독도함을 찾았다. 광복 및 해군 창설 70주년을 기념하는 해군 관함식이 거행되었던 독도함은 뉴스로 보고 듣던 위대함 그 자체였다. 우리나라를 책임지는 위엄이 느껴졌다.
독도함은 상륙작전을 위한 병력과 장비수송을 하는 기본 임무와 해상 작전을 지휘 통제하는 지휘함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동함대다. 1만4,500톤급 대형 함정의 위상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독도함에 탑재된 항공기나 화물을 운발할 수 있는 거대한 항공기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배 위로 올라서는 순간, 해군들의 나라를 향한 충성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승만 대통령 별장에서는 이 대통령의 애국의 숨결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었고, 잠수함 역사관에서는 잠수함의 위엄에 탄성을 지르며 감탄했고 우리나라 안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각인할 수 있었다. 정원에서 활짝 핀 장미가 우리를 반겨줬다.
마지막으로 해군사관학교에 들러 그 위상에 놀라고 또 바다 위에 떠 있는 거북선을 바라보며 우리나라를 위해 인고의 시간을 보냈을 우리의 선조 충신들의 애국심에 저절로 머리가 숙여졌다. 영화 의 대사도 떠올랐다.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
“나의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죽음 앞에서도 용기를 줬던 이순신 장군의 목소리가 마치 귓가를 스쳐지나가는 듯했다.
오랜만에 만난 동문들과의 서먹함이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한마음 한뜻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각자 최선을 다하며 살자는 각오를 다진 뒤 많은 아쉬움을 뒤로 하고 우리는 다시 달리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출발할 때의 들떴던 마음들과는 달리 애국이라는 단어 앞에서 숙연해져 있었던 탓일까? 동문들은 한참을 말없이 사색에 묻혀 있었다. 그러는 사이 구름을 붉게 물들이는 일몰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누군가 일몰의 아름다움에 대해 한마디 던졌고 그 순간 다 함께 합창을 했다.
“와~ 너무 멋있다~~”
희망의 메시지를 안고 돌아오는 버스는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아쉬움이 가득한 채 다음 탐방을 약속하며 각자의 인생 속으로 돌아갔다. 우리의 인생도 노을처럼 그렇게 아름답게 물들기를 바라면서….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의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정유재란 때 울산왜성은 일본군 최전선 보루였다. 위도 상으로는 가장 북쪽이었고, 방위로는 일본과 가까운 동쪽 끝이었다. 일조유사시 언제라도 도망쳐 가기 쉬운 위치였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도 없고, 망망대해와 맞닿아 철수작전에 큰 장애가 없는 전략적 요지였다.
그런 지리적 요인에다 왜군 선봉대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본진이어서 울산성은 정유재란 전투 중 손꼽히는 현장이 되었다. 허물어진 성벽만 남은 학성공원에서는 전투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성이 무너진 것은 세월의 작용이지, 전투 때문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울산 나들이에서 그 처참했다는 울산왜성 전투의 흔적은 찾아보지 못했다. 성터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천지개벽 같은 변화에 세월의 두께만 느꼈을 따름이다. 먹을 것이 없어 적병의 시신을 뒤졌다거나, 기갈을 면하려고 제 오줌을 받아 마시고, 말을 잡아 피를 마셨다는 아수라장을 엿볼 단서는 찾아내지 못했다.
울산왜성은 3개 층으로 된 구조다. 해발 25m 지점에 산노마루(三之丸), 조금 위에 니노마루(二之丸), 맨 위에 혼마루(本丸)가 있었다는데 지금은 석축 일부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큰 돌을 다듬어 경사면에 비스듬히 축대를 쌓은 것이 전형적인 왜성이다. 성문을 들어서면 급하게 방향을 꺾도록 돼 있는 호구(護口)도 그렇다. 기마병이나 보병에게 성이 뚫려도 바로 본성으로 달려갈 수 없도록 여러 굽이를 만들어 속도를 늦추려는 설계다. 호구에서 병력이 주춤거리는 사이 침입자에 대한 공격을 쉽게 하려는 의도였다.
그때 없었을 것은 너무 많았다. 우선 허허벌판이었을 격전지가 지금은 대도시 울산의 도심지가 되었다. 420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무너져 내린 성터에 수목과 초개가 우거져 울산성은 야산의 모습으로 변했다.
격전지가 공원으로 변해 울산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장소가 된 것이 제일 큰 변화일 것이다. 해발 50m 성 마루에 오르면 사방에 보이는 것은 온통 아파트와 빌딩 숲, 그리고 공장들이다. 상전벽해라는 말로는 표현이 한참 미흡하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면서 뜬금없이 대중가요 ‘울산 큰 애기’가 떠올랐다. 1960년대 초부터 방방곡곡에 울려퍼진 이 노래 가사가 너무 신기하고 이채롭게 느껴진다. 두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다.
내 이름은 경상도 울산 큰 애기 / 상냥하고 복스런 울산 큰 애기 / 서울 간 삼돌이가 편지를 보냈는데 / 서울에는 어여쁜 아가씨도 많지만 / 울산이라 큰 애기 제일 좋대나 / 나도야 삼돌이가 제일 좋더라.
반세기 남짓 전 울산은 큰 애기와 삼돌이의 연정이 아름답던 동해안 갯마을이었다는 증언이다. 눈 아래 펼쳐진 풍경과 비교하자니 격세지감이 느껴진다. 50년 세월의 간격이 이러할진대 420년 세월이야 어떠하랴.
이 노래 가사 2절에는 “성공할 날 손꼽아 기다려만 준다면 좋은 선물 한 아름 안고 온대나”란 소절이 있다. 답답한 시골에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성공’을 향해 서울에 간 연인을 다소곳이 기다리면서 선물받을 날을 꿈꾸는 큰 애기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지 않은가.
울산성은 차츰 지옥으로
울산왜성 전투가 왜병들에게 얼마나 비극적이었는지는 국내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성을 빼앗고 이 땅에서 왜를 몰아내지 못한 전투 결과로 보면 분명 조명연합군의 패전이지만, 왜군은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그 비극성이 잘 전해져온다.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서쪽 산악지대에서 발원한 태화강은 동쪽으로 곧게 흐르다가 급히 동해로 든다. 그 하구 언저리에 제법 널찍한 들판이 형성되어 까마득한 옛날부터 인간이 터를 잡는 살기 좋은 땅이었다. 들판 한가운데 외로이 솟은 야산에 가토 기요마사는 성을 쌓았다. 급히 자리를 잡았던 탓인지 성안에는 식수가 없었다. 남쪽으로 좀 더 가면 임진년에 쌓은 서생포성이 있는데, 태화강 너머에 진을 치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을 거역하지 못했던 걸까. 직산 싸움에서 패하고 도망쳐 내려가다가 잡은 입지라 했다.
조명연합군은 그 성을 둘러싸고 군량과 탄약 등의 보급품과 식수공급 루트를 차단했다. 벌판에 우뚝 고립된 성을 몇 겹으로 둘러싼 조명연합군 포위망에 갇혀 현지조달도 막힌 상황이었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와 가토 기요마사의 운명적 대결을 그린 엔도 슈사쿠(遠藤周作)의 소설 에는 당시의 참상이 이렇게 그려져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 병사들의 다리는 가느다란 막대처럼 되었고, 그 때문에 각반이 흘러내렸으며, 얼굴은 여위어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한다. 물을 찾아 야밤중 성 밖의 우물가에 가보면 우물 안에 시체가 던져져 있어서 물을 먹을 수 없도록 만들어놓았다고 한다. 성내의 소와 말은 모두 잡아먹었다. 그것이 동나자 적병의 시체에서 먹을 것을 구했다. 담벼락 흙을 빗물에 풀어 마실 때도 있었다. 두 달이 지나자 이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울산성은 차츰 지옥이 되어가고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기록이란 한 참전무사가 남긴 ‘조선이야기[朝鮮物語]’다. 아무리 목이 말라도 낮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밤이면 우물을 찾아 성을 빠져나오지만 우물마다 돌로 메워졌거나 시체가 썩어가고 있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태화강 강변을 찾아 나설 수밖에 없었다. 피로 물든 강물이라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
“지옥과도 같은 울산성에서 기아에 빠진 가토 기요마사의 농성군은 구원군의 손에 간신히 구조되어 한숨을 돌렸다. 4만의 조명연합군은 3만의 일본군을 보고 철수했다. 그들 역시 일본군의 총격으로 상당한 사상자를 냈기 때문이었다. 포위에서 해방된 농성군이지만 양식이 떨어진 그들은 종이를 씹고 담벼락의 흙을 파먹었다고 한다. 기요마사의 수염도 자랄 대로 자랐고, 뺨이 말라서 쑥 들어간 채 구원군 앞에 나섰다.”
4만 병력 조명연합군의 철수
울산성의 참상은 라는 기요마사 문서에도 나온다.
“성내의 사기 조상(阻喪)은 정점에 달했다. 식량과 식수가 없어 성병(城兵)은 벽토(壁土)와 종이를 먹었고, 자기 오줌과 군마의 피를 마시는 판이었다.”
이런 극한 상황을 겪은 가토는 훗날 구마모토 성을 지을 때 천수각 다다미에 고구마 잎줄기를 섞어 짜도록 했다. 식수난 경험으로 성내에 우물을 120개나 팠다. 지금도 당시의 우물이 20여 개 남아 있다.
일본 측 기록에 나오듯 4만 병력의 조명연합군은 완공도 되지 않은 평지성을 오래 포위하고도 왜군을 제압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먼 나라에 와 피를 흘리기 싫었던 명군 장수 양호(楊鎬)와 마귀(麻貴)가 내린 통한의 결정이었다. 35km 남쪽 서생포에서 달려온 왜군 1만3000명에게 배후를 공격당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철수한 것이다.
“중국 장수가 군대를 후퇴시키면서 먼저 보병을 내보내고, 스스로 기병을 거느리고 뒤를 막으면서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 장수가 도망치는 것을 보고 산 위의 적들이 줄지어 내려와 한꺼번에 사살했는데, 보병 중에 살아 돌아온 자가 많지 않고, 기마병도 죽은 자가 얼마인지 모릅니다. 갑옷과 투구를 버리고 맨몸으로 탈출하기도 했는데, 아군의 사상자도 많았습니다. 당당했던 대세가 순식간에 꺾이고 다 죽어가던 적이 도리어 흉독한 기세를 멋대로 부렸으니 진실로 통곡할 일입니다.”
에 실린 이 한 줄의 보고서가 역전된 전투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용열한 원군 장수의 결정이 조선 민중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은 생생한 증거다.
울산왜성은 아직 완공도 안 된 상태였다. 포위작전을 조금만 더 끌었어도 승리는 저절로 굴러들어왔을 것이다. 조명연합군의 첫 공격이 12월 23일이었으니 착공 2개월여도 못 되었을 때였다.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
일본군의 출진기지였던 규슈 나고야(名護屋)성 임진왜란 박물관에 걸려 있다는 울산성전투도에는 전투 상황이 파노라마처럼 묘사되어 있다. 들판에 홀로 솟아 있는 울산왜성을 조명연합군이 개미떼처럼 둘러싸고 공격을 퍼붓는 장면이다. 전투 중에도 성안에서는 말을 잡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종군일기 에는 전투 상황이 이렇게 씌어 있다.
“아침에 연기가 솟아오르고 대포소리가 연달아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적군이 기습을 해왔다고 한다. 적군은 돌담 밑에서 맹렬하게 불화살을 쏘아댄다. 성안에는 물건들이 수없이 많은데 침구와 의복, 재물과 보석 등을 담은 상자에 불이 붙었다. 타오르는 연기 때문에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화재로 많은 무사와 인부들이 타죽었다.”
울산성 건축물 외곽에는 사방으로 삥 둘러 목조회랑이 설치되어 있었다. 바깥쪽으로 작은 창구를 설치해 거기에 총을 걸고 결사적으로 소총을 쏘았다. 수많은 창구에서 불을 뿜는 총격으로 조명연합군에 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13일간의 전투에서 피아 1만2000명 가까이 죽었다는 기록이 전투의 참상을 말해준다. 연합군 포위망이 열흘 넘도록 이어지자 자포자기의 심정이 된 기요마사는 인근의 동료 장수에게 보낸 문서에서 자결의사를 비추기도 했다. 라는 일본 기록물에는 “나는 여기서 할복자살을 할 것이니 당신은 그 성에서 (할복) 하시오”라는 말이 나온다.
케이넨 일기에는 “드디어 물도 식량도 떨어졌다. 더 이상 성을 방어할 수 없게 되었다. 내일은 성이 적의 수중에 떨어질 것이다. 밤새 부처님의 자비에 감사드리고 그 마음을 읊는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기요마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것은 인근에 주둔했던 일본군 지원 덕분이다. 왜성을 에워싼 조명연합군은 이런 상황에 대비해 태화강 하구를 봉쇄해 지원병력의 울산 접근을 차단했다. 바닷길로 울산에 온 병력이 격퇴당한 기록도 있고, 육로로 인근 양산에 온 적을 물리친 기록도 있다.
그러나 끝을 보지 못했다. 방심 아니면 포기였을 것이다. 기요마사 지원에는 숙적 유키나가 군대도 동원되었다. 둘은 불구대천지수 사이였지만 상대가 적군에게 함락되는 것만은 두고 볼 수 없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정유재란의 마지막 전투였다. 너무 혼이 났는지 일본군은 그 뒤로 수성전에 전념했다. 그러다가 몇 달 뒤 히데요시 사망 소식이 날아들었다. 이를 계기로 임진·정유 7년 전쟁은 끝났다.
“성주님이 나에게 배를 타라고 하신다. 너무도 기쁘고 도무지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할 수가 없다. 성을 내려올 때 너무 기뻐서 눈물을 흘렸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것 같았다.”
울산성을 떠나 일본으로 돌아간 병사가 남긴 이날의 감회 한마디가 전쟁의 비극을 잘 말해준다.
정유년에 다시 쳐들어온 왜군은 한양을 목표로 진군하다가 충청도 직산전투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패했다. 전열을 가다듬어 남쪽 해안으로 퇴각한 그들은 각 군별로 농성 준비에 들어갔다.
기요마사가 울산에 당도한 것은 그해 10월 말이었다. 기요마사 토벌을 목적으로 경주에 본진을 설영한 조명연합군에 맞서기 위해 기요마사는 태화강 북안에 성을 쌓기 시작했다. 임진왜란 때 쌓은 서생포성을 두고도 가까운 북쪽에 또 성을 쌓은 것은 히데요시의 명에 따른 것이었다. 한양을 다시 도모하려면 태화강 북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축성에 동원된 병력은 가토의 부장(部將) 구키 히로다카(九鬼廣隆) 등 5개 부대 병력 1만600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 밖에 일본에서 차출되어온 일반 농민 등이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케이넨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새벽부터 산에 끌려가 건축자재 벌채에 동원되었는데,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다 감독에게 들키면 목이 잘렸다 한다.
기요마사는 ‘일곱 자루의 창’이라 불린 히데요시 근습(近習) 가운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은 가신이었다. 입이 무겁고 충직한데다가 무술까지 뛰어났으니, 그만한 자격을 갖춘 사무라이가 없었다. 유키나가는 머리는 좋지만 무(武)가 부족하고, 이시다 산세이(石田三成)는 머리만 뛰어난 인물이었다. 게다가 그는 주군 히데요시 인척이었다. 기요마사의 어머니는 히데요시 부인과 시누이 올케 사이였다.
히데요시 문하에서 그는 단연코 으뜸가는 사무라이가 되었다. 타고난 체격 조건과 근면성, 주군과의 관계를 의식한 충직성이 그를 모범적인 무사로 만들었을 것이다. 무사로 인정할 수 없는 유키나가에게 조선출진 제1군 장수의 명예를 빼앗긴 그는 사사건건 유키나가와 대립했다. 그러나 우직한 그는 유키나가의 지략을 당하지 못했다.
기요마사는 조선의 왕자 임해군을 인질로 잡은 일과 한국의 호랑이를 다 잡아먹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임금이 몽진한 평안도 방면을 유키나가에게 빼앗기고 함경도 방면을 맡게 되었는데, 뜻하지 않게 조선의 왕자 둘을 인질로 잡았다는 것이다.
함경북도 회령에 피란해 있던 임해군과 순화군은 거기서도 횡포를 멈추지 않았다. 수령을 닦달하고 아랫사람들을 시켜 백성들을 노략질했다. 민심이 극도로 이반되어 있는 터에 국경인(鞠景仁)의 반란이 일어났다. 왕자들의 한심한 작태에 혀를 차던 그는 제일 먼저 두 왕자를 붙잡아 기요마사에게 넘겨버렸다.
그는 호랑이를 사냥해 호피를 히데요시에게 바쳐 신임을 사기도 했다. 일본은 호랑이가 없는 나라였다. 그러니 영물의 상징인 호랑이보다 귀한 선물이 있을 수 있겠는가. “호랑이 고기가 강정식으로 좋다”는 시의들 말을 들은 히데요시는 고기도 보내라고 지시했다. 기요마사는 내장까지 말려서 바쳤다. 59세에 아들을 얻은 후로 그는 더욱 호랑이고기를 찾았다 한다. 이런 이야기가 기요마사와 호랑이가 엉킨 전설의 연원이다. 지금도 구마모토 토산품에는 어김없이 호랑이 이미지가 들어간다. 축제 때가 아니어도 기요마사가 호랑이를 잡는 모형이 번화가에 장식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이승만 대통령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해서 유명해졌다. 한국과 일본의 국교수립을 중재한 미국의 요청으로 1954년 일본을 방문해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와 마주앉은 자리였다.
“한국에는 호랑이가 많다던데 아직도 많습니까?” 어색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려는 듯 요시다 총리가 이 대통령에게 운을 떼었다. 이 말에 대통령은 “이젠 없습니다.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이 다 잡아먹었습니다” 하고 말을 받았다. 동석했던 김용식 주일공사에 의해 이 말이 전해지자, 재일동포 사회는 통쾌한 반격이라고 크게 반겼다. 물론 국내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기요마사 승자의 영화
히데요시 사후 기요마사는 주군을 배반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편에 섰다. 천하의 패권을 놓고 충돌한 세키가하라 전투 때 유키나가가 히데요시 아들 편에 섰던 것과 너무 대조적인 처신이었다.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패한 유키나가가 비참한 최후를 마친 것과 대조적으로 기요마사는 승자의 영화를 누렸다. 그러나 자신을 길러준 히데요시를 배반한 죄의식 때문이었는지 도쿠가와, 히데요시 양 가문의 화친을 위해 애쓰다가 50세에 세상을 떴다. 그 일을 못마땅해 한 도쿠가와 측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울산 방문은 해군 상륙함(LST) 일출봉호 진수식 참석이 목적이었다. 막강한 기동력과 화력을 갖춘 그런 배가 당시에도 있었다면 울산전투가 그렇게 치욕적으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망상에 젖다가 귀경 KTX에서 부족한 잠을 청했다. LST는 없어도 압도적인 병력과 전세의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쉬워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