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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서 확인한 日 장례산업, “취향 반영된 서비스가 트렌드”
- 지난 8월 28~29일, 도쿄 빅사이트에서 열 번째 장례박람회(エンディング産業展)가 열렸다. 엔딩산업전이라고도 하는 일본의 장례박람회는 장례, 매장, 공양, 상속 등 다양한 장례와 종활 산업 등을 소개한다. 이번 박람회에는 약 160개사가 참여했으며, 1만 3318명이라는 역대 최대 방문자가 다녀갔다. 고령자는 늘어나고 있지만 코로나19 이후 장례 시장은 오히려 그 규모가 줄어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럼에도 마지막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것에 대한 관심은 높아지고 있다. 이에 본지는 29일 도쿄에서 열린 엔딩산업전을 방문해 새로운 장례 문화로서 어떤 것들이 주목받고 있는지 살펴봤다. 고인의 취향을 담다 이번 장례박람회에서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분야를 불문하고 고인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도록 다양한 상품과 서비스가 마련돼 있다는 점이었다. 먼저 유골함과 관의 디자인이 정말 다양했다. 소재, 디자인, 모양, 크기 등 선택지가 많았다. 올해는 ‘친환경’을 강조한 관이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에스지에코그린(SG ECO GREEN)이 선보인 제품은 종이로 만든 것으로 화장할 때에도 검은 연기가 나지 않는 것이 특징이며, 금속·못·나사·경칩 등을 사용하지 않았다. 에스지에코그린 담당자는 “친환경 잉크를 사용해 고인의 가족사진 등을 프린트 해 관의 외부를 꾸밀 수 있어 고인의 취향을 반영할 수 있으며 최대 250kg까지 적재할 수 있다”면서 “앞으로는 환경을 고려한 제품들이 주목받을 것이라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한편 고인의 취향을 반영하기 위한 기술들도 등장했다. 주식회사 abs의 서비스 ‘노아(NOA)’는 고인의 기본 정보를 입력하면 AI가 취향에 맞는 제단을 꾸며 보여준다. 생각하고 있는 예산을 입력하고 고인이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스타일, 생전의 취미, 성격, 꽃의 종류 등을 고르면 이를 반영한 꽃의 제단 디자인 네 가지를 보여준다.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예산을 조정하거나 색깔을 바꾸는 등 다른 조건을 넣어 디자인할 수 있다. abs 담당자는 “AI가 만들어준 이미지를 꽃집에 가져가 똑같이 만들어달라고 주문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생각한 것과 다르게 제단이 꾸며져 있거나 하는 상황을 피할 수 있다”면서 “지금까지는 장례 회사에서 보여주는 획일화된 장식 중에서 골라야 했다면, 노아는 개인 맞춤형으로 제단을 꾸밀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라고 설명했다. 온천욕을 좋아했거나, 좋아하는 향기가 있었다거나 하는 고인의 취향을 반영해 온천수나 입욕제를 넣어 납관 전 주검을 씻기는 탕관(湯灌) 용품도 등장했다. 전용 비누가 붙어있으며 물이 나오면서 동시에 빨아들이는 기술로 침대에서 고인의 몸을 닦을 수 있다. 간호용으로 나온 제품이 있지만, 온천수나 입욕제를 사용할 수 있도록 새로운 기술을 적용한 최초의 제품이다. 진심이라는 뜻의 ‘마고코로(まごころ)’를 개발한 재팬토와(ジャパン唐和) 담당자는 “마지막까지 고인이 좋아했던 방식으로 몸을 씻어줄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전했다. ‘분골(分骨)’ 유행할 것 지난해에 이어 올해에도 장례 문화는 ‘간소화’되는 모습이다. 일본은 집에 불단을 두고 고인을 기리는 풍습이 있는데, 불단은 전체적으로 크기가 작아졌고 피우는 향 대신 작은 화분이나 시들지 않는 꽃 등으로 대체하는 상품들이 눈에 띄었다. 1인 가구가 늘면서 거주하는 집의 크기가 작아졌고, 불단이 차지하는 면적을 줄이는 추세라는 설명이다. 또 하나 작아진 것은 유골함이다. 이탈리아의 장인이 빚은 도자기로 유골함을 만드는 이탈리아 회사 FENICETEK 담당자는 “앞으로는 화장 후 여러 개의 작은 유골함에 유골을 나누어 보관하는 형태가 유행할 것이라고 본다”고 전했다. 유골 일부는 우주장례식을 하고, 일부는 바다에 뿌리고, 일부는 쥬얼리로 보관하고, 일부는 불단에 두는 등의 장례 문화가 퍼지리란 전망이다. 유골 일부를 넣어 만든 유리 장식품이나 뼈나 머리카락에서 추출한 탄소를 활용해 제작한 보석으로 목걸이, 반지 등으로 만든 쥬얼리 제품이 전시장 곳곳에 있었다. 보석은 머리카락 10g, 뼈 300g으로 제작할 수 있으며, 반려동물의 털이나 유골로도 제작할 수 있다. ‘분골’은 일본의 장례 문화 특성으로도 볼 수 있다. 이철영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는 고인의 신체를 훼손하면 안 된다는 인식과 문화가 있어 분골이 유행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일본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악귀가 된다고 생각해 집안에 불단을 두고 매일 기도를 올려 선하게 바꾼다는 문화가 있어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분골의 유행 전망과 더불어 우주장례식, 바다장례식, 수목장례식 등 다양한 형태의 장례 서비스도 눈길을 끌었다. 지난 3월 실시된 ‘묘지 소비자 전국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48.7%가 수목장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응답자의 64.1%가 후계자가 필요 없는 묘를 구입했다고 답한 것으로 보아 향후 우주·바다 장례식 등도 점차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우주장 업체인 은하스테이지(銀河ステージ)는 담당자는 “바다 장례식은 한 달에 150건 정도가 진행되며, 우주 장례식은 2년 동안 11건이 진행됐는데 해마다 늘고 있다”고 말했다. 우주 장례식은 우주비행, 인공위성, 달 여행, 우주탐험 등 원하는 서비스를 고를 수 있다. 이 외에도 고독사가 일어난 부동산을 전문적으로 관리해주는 서비스를 비롯해, 상속진단사·종활카운셀러·유품정리사와 같은 죽음 관련 직업들이 소개됐다. 또한 올해에도 상속, 종활, 엔딩노트 등 생전에 죽음을 준비하는 활동과 생전장례식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처럼 앞으로도 스스로 죽음을 준비하는 문화가 더욱 확산될 것으로 예상되며, 고인의 취향을 반영해 간소화됐지만 형태는 다양한 장례 문화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반려동물을 위한 장례문화◇ 또 하나의 장례문화로서 전시장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반려동물을 위한 장례 서비스였다. 반려동물을 위한 수의, 유골함, 이동 화장 서비스뿐만 아니라 디지털 앨범, 반려동물용 불단, 기념 액자 등 다양한 제품과 서비스를 볼 수 있었다.
- 2024-09-13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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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버 케어 시장에 뛰어든 상조업계… ‘폭풍의 눈’ 되나?
- 고령자 증가에 따라 실버 케어 시장이 확대되고 있다. 그 가운데 장례 서비스를 제공하는 상조업계도 시장에 뛰어들었다. 장례 서비스 경험을 활용해 주요 고객인 중장년층을 케어하며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수익을 창출하고자 하는 목표가 읽힌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에 따르면 국내 실버산업 규모는 2020년 72조 원에서 2030년 168조 원으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요양과 주거 등 실버 케어와 관련한 관심도가 높다. 2022년 기준 국민의 평균 기대수명은 82.7세로 건강하고 오래 편안한 곳에서 나이 드는 것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실버 케어를 받는 고령층이 새로운 특성을 보유한 베이비부머(1955~1974년생)세대라는 점이 산업의 변화를 이끌었다. 지난해 발간된 하나은행연구소의 ‘시니어 케어 시장의 확대와 금융회사의 대응’ 보고서에 따르면 베이비부머 세대는 기존의 고령층과 비교해 교육 수준과 경제력이 높으며, 노후 주거지역으로 의료시설 및 생활 편의시설 인프라, 교통 등의 접근성이 좋은 대도시 혹은 도심지를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에 따라 개개인의 성향에 맞는 다양한 서비스에 대한 니즈가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하나금융연구소는 “국내 시니어 케어 시장이 영세한 개인사업자 위주로 형성되면서 질적인 측면에서의 성장은 더딘 편”이라며 “시장 전 영역에 민간 기업 진출이 확대되면서 경쟁 구도가 점차 변화할 전망”이라고 진단했다. 실제로 시니어 맞춤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며 다양한 기업이 나선 가운데, 주요 상조업계가 동참해 눈길을 끈다. 토털 라이프 케어 브랜드로 탈바꿈 고령화 시대에 웰다잉 문화 확산으로 장례 서비스에 대한 관심이 늘면서 상조업계는 크게 성장했다. 사망 인구 증가도 영향을 미쳤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사망자 수는 35만 3000명이었으며, 연령별로는 80대 사망자가 가장 많았다. 정부는 사망자 수가 2030년 41만 명, 2070년에는 70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흐름으로 인해 장례 서비스를 이용하는 주요 고객은 그들의 자녀인 베이비부머 세대가 됐다. 현재 경제의 중심에 있는 인구이며, 이들의 기대수명은 매년 증가하고 있다. 이에 따라 상조업계에서는 주요 고객을 잡겠다는 심정으로 실버 케어 상품을 내놓고 있다. 무엇보다 상조업계 변화의 가장 큰 이유로 자본이 거론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실버산업은 수익적인 부분에서 성장 가능성이 높고, 미래 먹거리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상조업계 가운데 움직임이 가장 두드러지는 곳은 보람그룹이다. 올해 창립 34주년을 맞은 보람그룹은 상조를 비롯해 제조・웨딩・건설・IT・바이오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다. 토털 라이프 케어 브랜드로 확장하고 있는데, 특히 4069 중장년을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강화한다는 목표다. 먼저 보람그룹의 상조 계열사 보람상조리더스는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휴레이포지티브’와 업무협약을 맺고 서비스를 시작했다. 휴레이포지티브는 앱을 기반으로 혈당을 측정하고 건강관리를 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 양사는 건강과 관련된 플랫폼을 만들어 실버 케어에 집중할 예정이다. 추후에는 홀로 거주하는 노부모의 돌봄 시스템까지 갖춘 업그레이드 서비스를 출시할 계획이다. 또한 보람그룹은 인천 서구 경서3구역에서 5성급 호텔 및 시니어 레지던스(실버타운・노인 복지주택) 사업을 추진한다. 총면적 약 11만 1346평 규모로 기존에 보람인천장례식장이 위치한 보유 부지 일대다. 주거・의료・취미시설 등 맞춤형 서비스를 총망라한다. 장례식장이 변화에 맞춰 탈바꿈하는 셈이다. 보람그룹 관계자는 실버 시장 진출에 대해 “주요 고객층인 시니어를 대상으로 사업을 펼치는 것은 어떻게 보면 보람그룹의 고객만족 경영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면서 “‘요람에서 무덤까지’라는 말을 흔히 쓰는데, 우리는 역발상으로 ‘무덤에서 요람까지’라고 표현한다. 고인에게 예우를 다하는 한편 고객을 중장년층으로 확대했고, 더 나아가 웨딩・여행사업 등을 통해 젊은 층까지 잡고자 한다”고 설명했다. 디지털과 휴먼 터치의 만남 또 다른 상조회사 프리드라이프는 지난해 디지털 헬스케어 전문기업 에임메드와 손잡고 시니어 전용 상조 상품 ‘늘 든든’을 출시했다. 에임메드는 전문화된 간병인 및 요양시설 매칭 서비스 등을 선보이며 실버 케어 시장을 선도하는 기업이다. 늘 든든 상품은 가입 후 10년간 14개 진료과목 전문 의료진 건강 상담, 전국 종합병원 진료 간편 예약, 요양병원 비교견적 및 장기요양 등급 컨설팅 등을 제공받을 수 있다. 학습지 ‘빨간펜’으로 유명한 교원그룹은 저출산・고령화에 따라 2010년 상조 서비스 교원라이프를 시작했고, 10년 만에 업계 3위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는 2위까지 올라서며 놀라운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더불어 최근 ‘시니어 한 달 살기’ 전환 상품을 출시해 눈길을 끈다. 액티브 시니어의 니즈를 읽은 상품으로, 쿠알라룸푸르에서 3주간 여행하면서 외국어를 배우고 이색 문화 체험도 즐길 수 있도록 구성했다. 상조업계뿐 아니라 KB라이프・신한라이프 등 생명보험업계도 실버 케어 시장에 합류했다. 생명보험업계는 시니어 레지던스를 준비하고 있는 보람그룹처럼 요양시설에 주목하는 점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수형 인하대학교 정책대학원 노인학과 초빙교수는 이 같은 경제 변화를 자연스러운 흐름이라고 짚었다. 김 교수는 “기대수명이 늘어나면서 실버 케어 시장의 수요는 늘어났는데 공급은 부족한 상황이다. 이를 알아본 상조・보험 등 다양한 업계에서 실버 케어 시장에 진출했다고 본다”면서 “경제력을 갖춘 베이비부머 세대가 에이징 인 플레이스를 원하다 보니 그에 맞는 케어 서비스들이 나오고 있다고 분석된다”고 말했다. 김수형 교수는 실버 케어 시장에 진출한 상조업계의 특징으로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과 협업을 맺은 점을 꼽았다. 상조업계는 중장년층이라는 인맥 풀을,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은 시니어에게 도움 되는 기술을 각각 보유하고 있다. 김 교수는 상조업계의 케어 서비스와 실버산업의 만남은 시너지 효과를 낳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김수형 교수는 “우리나라가 디지털・IT 강국이다 보니 실버 케어 시장에서는 그것에 기반한 서비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단순히 기술의 발전에만 의존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AI가 할 수 없는 휴먼 터치도 중요하다. 인간과 기술이 상생해서 발전할 수 있는 모델을 지속적으로 가져가야 앞으로도 시장이 발전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생명보험업계도 실버케어 KB라이프 KB라이프의 자회사 ‘KB골든라이프케어’에서는 요양시설 서초・위례 빌리지와 노인 복지주택 평창카운티를 운영하는 등 생명보험업계 중에서도 요양산업을 선도하고 있다. 내년에는 강동과 은평, 광교 등 3곳에 요양시설을 추가로 개소할 예정이다. 신한라이프 올해 시니어 사업 전담 자회사 ‘신한라이프케어’가 출범했다. 2025년 경기도 하남시에 60~70명 수용 가능한 도심형 요양시설을 개소할 예정이다. 또한 2027년 개소를 목표로 서울시 은평구에 실버타운 건립도 추진 중이다. 삼성생명 보험업계 최초로 경도인지장애 및 치매 단계별 보장이 가능한 ‘삼성 치매보험’을 선보였다. 해당 특약에 가입하고 약관상 보장 개시일 이후에 경도인지장애 또는 최경증이상 치매 진단 시 최초 1회에 한해 돌봄 로봇을 제공한다. 또한 시니어 케어 사업 진출 계획을 밝혔는데, 삼성그룹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 ‘노블카운티’를 통해 사업을 확장할 수 있다. 미래에셋생명 시니어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외부 업체 대명스테이션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미래에셋생명의 신탁상품에 가입한 고객이 장례 이용을 원하면 고객이 맡긴 재산으로 대명아임레디에서 서비스를 제공받는다. NH생명 디지털 요양 플랫폼 사업을 추진 중이다. 일본 젠코카이 산하 젠코종합연구소와 MOU를 맺었다. 젠코카이는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요양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스마트 요양사다.
- 2024-08-13 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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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개 넘는 낡은 라디오가 울리는 추억 하모니
-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에는 ‘모던춘지’라는 이름의 건물이 있다. 불투명한 유리문 너머로 보이는 것이 무엇일까 싶어 문을 활짝 열어보니 라디오 1000여 대가 얼굴을 드러낸다. 나이도 국적도 달라 보이는 라디오가 질서정연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감탄을 자아낸다. 건물의 규모는 작지만 라디오 박물관이라 해도 손색없는데, 이곳 주인 김형호 기자는 “그냥 라디오가 좋아서 모았을 뿐”이라고 말한다. 전시나 수익의 목적이 아니라 취미 수집의 결과라니 놀라울 따름이다. 덕후의 힘은 실로 대단하다. “이 붐박스는 마돈나가 ‘Hung-Up’이라는 노래의 뮤직비디오와 라이브 공연에서 갖고 나온 모델이에요. 겉모습만 봐도 화려하죠. 라디오를 통해 자신의 캐릭터와 성향을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또 이건 VE301이라는 굉장히 오래된 라디오입니다. 히틀러는 이 라디오를 국민에게 보급해 연설을 내보내는 등 선동하는 용도로 사용했죠. 당시의 분위기를 느껴보고자 히틀러의 마지막 연설이 담긴 LP판도 공수해와 놓았답니다. 어느 날 여길 방문한 독일 분이 보고는 깜짝 놀라시더라고요.” 김형호 기자는 모던춘지 곳곳을 돌아다니며 라디오에 대해 설명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는 ‘가장 오래된 라디오가 가장 비싸냐’는 식의 질문을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다고 꼽았다. 그의 답은 “단순히 오래되었다고 비싼 게 아니다. 당시 어떤 가치를 구현했느냐가 중요하다”였다. 보통은 라디오의 외형이나 금액 등을 궁금해하지만, 그는 라디오 뒤에 숨은 스토리에 주목한다. 라디오가 가진 역사, 가치, 그리고 라디오 주인과 그의 사연. 그 모든 것을 따뜻한 마음으로 품고 있다. 라디오를 수집한 지 약 15년. 김형호 기자도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라디오 스토리를 갖고 있다. 어부인 아버지는 매일 아침 라디오 방송으로 날씨를 확인했고, 어린 소년은 늦은 밤 아버지의 손때 묻은 라디오에서 나오는 방송을 들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어우러지는 라디오의 음색은 소년의 감수성을 키우기에 충분했다. 이후 서울에서 학업을 마치고 돌아온 소년은 TV에 나오는 지역 방송국 기자가 됐다. 그러나 늘 마음속 한편에는 라디오가 자리한 터. 그리하여 라디오를 하나둘 모으기 시작한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라디오 안식처, 모던춘지 당시에는 몰랐지만, 돌이켜보면 필연인 순간들이 있다. 김형호 기자는 결혼할 때 아내로부터 TV 대신 티볼리 라디오를 혼수품으로 받았다. 라디오를 애지중지하며 매일 방송을 청취했던 그는 어느 날 1970년대 독일에서 나온 라디오 소리를 듣게 됐단다. 티볼리 라디오보다 30년 정도 일찍 만들어진 것인데, 놀랍게도 소리의 차이는 엄청났다고. 김 기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여기에 그의 지적 호기심이 더해지면서 라디오 수집과 연구가 시작된 것이다. 날이 갈수록 김형호 기자의 집에 쌓이는 라디오도 늘어났다. 문제는 보관이었다. 다행히 2017년 삼척에서 강릉으로 이사 가면서 라디오 보관 공간이 생겼다. 단독주택인데 지하실이 있었기 때문. 그러나 이번에는 습기가 문제였다. 라디오가 상할까 봐 걱정하던 가운데, 김 기자는 대형 사고를 터뜨리고 말았다. 라디오 전문 사이트에서 한꺼번에 내놓은 라디오 100대를 집에 데려온 것. 더 이상 라디오를 지하실에 방치할 수 없다고 생각하던 즈음 어머니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는 모던춘지가 지어진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어머니를 보내드리면서, 죽음이라는 게 마음의 준비 없이 갑자기 찾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리고 물건의 의미도 생각하게 됐죠. 장례 후 자식들이 어머니 집 정리를 했는데, 어머니가 쓰시던 물건들의 가치를 모르니 버릴 수밖에 없어 너무 죄송스럽더라고요. 그러면서 내가 라디오에 대한 가치를 정립해놓지 않으면 이 물건들이 쓰레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이 공간을 지었어요. 너무 아프고 힘들어서 위로받고 싶기도 했죠. 모던춘지의 ‘춘지’는 어머님 성함이에요. 여기 있으면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나죠.” 2019년 모던춘지를 지을 당시 건축 비용이 예상보다 많이 들었다. 그는 삼척 신혼집 아파트를 팔고 보험도 해지해 1억 원이 넘는 돈을 마련했다. 라디오 수집에 이어 창고 만들기까지, 취미활동으로 큰돈을 소비한 김형호 기자는 아내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을 지니고 있다. 그는 “평일에는 직장에 다니고, 주말에는 여기에서 노는 게 좋다. 이런 놀이터 같은 공간을 갖는 것이 어른의 로망 중 하나인데, 아내가 이해해줘서 가능했다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호주에 사는 친형과 라디오 수집을 같이 시작했어요. 사실 호주에는 여기보다 더 많은 라디오가 있답니다. 4년 전쯤 형과 라디오 수집을 위해 호주 곳곳을 돌아다녔는데, 그 과정에서 만난 사람들과 라디오의 의미, 사연 등을 인터뷰한 것을 영상으로 남겨놓았어요. 그걸 편집해 만든 다큐멘터리 상영회를 2월 13일 세계 라디오의 날에 여기에서 가졌죠. 라디오에 대해 생각하고 얘기를 나눈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이곳에서 종종 토론회, 전시회를 진행했으면 좋겠어요. 궁극적으로는 더 넓은 공간으로 옮겨가서 라디오를 기반으로 하는 복합 문화 공간을 형성하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라디오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첫 번째는 유리관 내부를 진공으로 만들어 전극을 넣은 진공관 라디오다. 두 번째는 1954년 미국에서 발명한 트랜지스터 라디오다. 반도체 부품이 쓰이면서 파손 위험이 줄어들었고, 오늘날 휴대용 라디오도 탄생했다. 그렇다면 라디오 역사계에 있어 혁명적인 일은 무엇이었을까. 김형호 기자는 붐박스(Boombox) 탄생이라고 꼽았다. 붐박스는 트랜지스터에 속하며, 손잡이가 달린 것이 특징이다. 힙합과 브레이크댄스의 영향으로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냈다. “저는 붐박스를 문화가 접목된 물건이라고 생각해요. 흑인들이 랩 배틀을 할 때 비트 음악이 필요하잖아요. 그때 휴대 가능한 붐박스가 큰 역할을 했죠. 우리나라에서도 1990년대 후반에 청춘들한테 인기를 끌었어요. 그래서 붐박스는 중년들에게 향수의 물건인데,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죠. 저는 붐박스만 100개 넘게 모았어요. 전 세계적으로 붐박스에 대한 관심이 높은데, 국내에서는 이렇게 모은 사람이 없어요. 붐박스를 계속 수집하고 연구해서 어떤 프로젝트를 해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오래된 라디오 생존법 김형호 기자는 드라마나 영화 등을 볼 때, 시대나 상황에 맞지 않는 라디오가 소품으로 나와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고 한다. 예를 들어 199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주인공이 2000년대에 나온 노트북을 사용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얼마나 어색한가. 그러나 컴퓨터와 달리 라디오는 변천사를 잘 아는 사람이 없기에, 소품이 잘못 쓰여도 모르고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김 기자는 “라디오 전문가로서 자문 역할을 하고 싶다. 지금도 가끔 비공식적으로 소품 자문 요청을 받는다. 작품의 배경, 인물의 환경 등을 분석해 답을 찾는다. 작은 디테일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법이다”라고 말했다. “라디오가 오래된 물건 같지만 사실 역사가 100년이 채 안 된 물건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1980년대 이전의 라디오 스토리를 잘 모르죠. 저도 수집하면서 진공관 라디오를 처음 접했으니까요. 라디오 연구와 자문을 통해 시대별로 만들어진 라디오가 다르다는 점과, 그 안에서 읽어야 하는 코드는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요. 라디오의 가치를 찾아주고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이런 일도 있었어요. 제가 아는 사람 집에 오래된 라디오가 있었는데, 저는 보자마자 그 라디오의 가치를 알아봤어요. 그게 지금 영월 라디오스타 박물관에 전시돼 있어요. 박물관 전시 주제와 맞는 라디오라고 생각해, 제가 중간에서 가치에 대해 보증을 섰죠. 자신이 갖고 있던 물건이 어느 날 박물관에 전시되다니, 얼마나 놀랍고 뿌듯한 일인가요.” 현재는 ‘옛 물건’, ‘서민형 물건’이라는 인식이 있지만, 과거에는 라디오가 고급 물건으로 대접받았다. 1970년대만 해도 라디오 한 대 가격은 100만 원, 현재 가치로 보면 1000만 원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TV가 보편화되면서 라디오는 몰락의 길을 걸었다. 수요가 줄어들자 제조사에서도 예전만큼 좋은 부품을 사용하지 않는다. 그에 따라 라디오는 저품질화되고, 대중의 인식 또한 저하되고 말았다. 김형호 기자가 가장 아쉬워하는 지점이다. “오늘날 라디오에 손이 가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소리가 좋지 않기 때문이에요. 부품의 차이가 크죠. 쉽게 얘기하면 과거에는 스피커를 쇠와 자석으로 만들었어요. 그런데 오늘날에는 비싸다는 이유로 자석을 쓰지 않아요. 그래서 과거 라디오와 같은 단단한 소리가 나오지 않는 겁니다. 저는 소리가 좋아지면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고 있죠.” 김형호 기자는 라디오 수리도 직접 한다. 회사의 필요에 따라 무선설비기능사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그 덕에 기초 지식을 갖게 됐다. 그리고 수백 대의 라디오를 직접 고쳐보며 방법을 터득했다. 그는 오래된 라디오의 전원이 켜지게 하고, 주파수를 맞춰 라디오 방송이 스피커에서 나오게 한다. 블루투스 스피커 장치 연결로 휴대폰 음악 듣기도 가능하다. 세상의 변화는 때로 아주 사소한 움직임에서 시작되는 법이다. 좋은 소리를 좇아 라디오를 모으고, 수명 다한 라디오를 살려내기까지 하는 김형호 기자. 그 낭만의 나비효과가 어디까지 뻗어갈지 궁금증이 증폭된다. “라디오가 사람들에게 친숙한 존재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현재 사람들은 라디오를 방송으로만 인식하고 있는데, 물건으로서 다가가면 또 다르게 평가할 수 있다고 보거든요. 제가 만든 것처럼 오래된 라디오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활용할 수도 있죠. 오래된 라디오의 소리는 노래 부르는 사람이, 방송 진행자가 가까이 있는 듯한 느낌을 안겨줍니다. 일반 전자기기로 노래를 듣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죠. 오래됐다고 무조건 낡은 물건이 아닙니다. 숨을 불어넣어 주면 물건의 가치는 재탄생할 수 있습니다.”
- 2024-06-12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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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해외 이색 웰다잉 문화
- 세계에서 가장 죽기 좋은 나라는 어디일까? ‘죽기에 좋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좋은 죽음’을 정의하고 준비하는 나라들이 있다. ‘잘 죽는 방법’을 고민할 이들을 위해 해외의 웰다잉 문화를 소개한다. 영국 ‘당신의 1% 찾기’ 영국의 국가 생애 말기 돌봄 프로젝트로 의사들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내는 환자들을 파악해 돌봄 계획을 수립할 수 있도록 한 캠페인이다. 다잉 매터스, 닥터스 넷, 왕립일반의사협회와 기타 주요 단체들이 협력해 완화치료 등 생애 말기 돌봄 시스템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미국 ‘죽음 만찬’ 미국에서는 만찬을 차려놓고 죽음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프로그램이 유행했다. 죽음을 맞는 공포를 완화하고 애도 과정을 좀 더 수월하게 하자는 의미다. 2015년에는 20여 개 나라로 퍼져 7만 명 넘는 사람들이 참여하는 운동이 됐다. 일본 ‘풍선 우주 장례식’ 화장이 전통 장례로 꼽히는 일본에서는 유골을 풍선에 담아 하늘로 보내는 ‘풍선 우주 장례식’이 등장했다. 헬륨가스를 채운 풍선이 40~50km 상층권으로 올라가 터지면 하늘에서 고인의 유골이 흩어진다. ‘벌룬공방’이라는 일본 기업이 시작한 것으로 2011년부터 300여 차례 장례식을 치렀다.
- 2023-12-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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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으로 되새긴 삶의 의미, 임종 체험 현장을 가다
-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임종 체험’은 죽음을 미리 맞이해보는 과정을 통해 삶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준다. 전국 다양한 기관에서 체험할 수 있는데, 충청남도 천안시 백석웰다잉힐링센터(백석대 부속 웰다잉힐링센터)에 국내 최대 수준의 임종 체험관을 갖췄다고 해서 직접 찾아가 봤다. 11월 16일 백석웰다잉힐링센터. 임종 체험을 하기 위해 30여 명이 모였다. 평택남부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이 단체로 참가, 절반 이상은 60세 이상 어르신들이었다. 최연소 참가자는 초등학생이었다. 한 중년 여성이 고등학생·중학생·초등학생인 세 아들을 데리고 와서다. 연령대와 사연은 다르지만, 이들 모두 삶의 의미를 찾고자 이곳을 찾았을 터. 생생한 후기를 전달하고자 기자도 직접 임종 체험에 참여했다. 영정사진 촬영부터 입관까지 임종 체험은 센터에 도착해 자리에 앉는 순간부터 시작됐다. 책상에 놓여 있는 ‘힐다잉(임종) 체험 신청서’는 인적 정보를 묻고 ‘행복하십니까?’, ‘사후 세계가 있을까요?’, ‘자살을 생각한 적이 있나요?’라는 세 가지 질문을 던진다. 신청서 작성이 끝나면 영정사진 촬영을 진행한다. 외모 점검을 할 수 있도록 한편에는 거울과 빗, 화장품 등이 준비되어 있다. 직원들은 어르신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해 노력한다. 무엇보다 사진 촬영을 할 때 “밝게 웃으세요”라고 말한다. 기자도 사진 촬영할 때 웃고는 있었지만, 셔터가 터지는 순간 조금은 울컥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음으로 정용문 백석웰다잉힐링센터장(백석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의 강연이 이어졌다. 마음 편히 살다가 잘 죽는 ‘힐다잉’을 강조하는 그는 어떻게 살아야 후회하지 않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지 얘기했다. 특히 ‘죽을 때 후회하는 세 가지’에 대해 ‘건강을 미처 챙기지 못한 것’, ‘있는 그대로에 감사하지 못한 것’, ‘쓸데없는 걱정을 많이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후에는 영정사진과 유언서가 배부되고, 마침내 ‘임종 체험관’에 입장했다. 촛불 앞에 영정사진과 유언서를 놓으니 죽음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한동안은 명상 타임을 갖고 여러 영상 자료를 보면서 삶의 소중함을 되새긴다. 김광석의 ‘어느 60대 노부부 이야기’ 가사를 그림으로 재구성한 영상, 가족을 두고 세상을 떠나는 중년 남성의 다큐멘터리를 시청했다. 자연스럽게 감정이입이 되니 이곳저곳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음에는 유언서를 작성했다. 다들 눈물 닦으랴, 글 쓰랴 바빴다. 일부는 센터장의 요청으로 유언서 낭독 시간을 가졌다. 대부분 가족, 배우자와 자식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메시지를 남겼다. 한 여성 어르신은 가족 중 ‘엄마’에게 먼저 메시지를 보내 눈길을 끌었다. 그는 “내가 엄마보다 먼저 떠난다는 게 너무 불효인 것 같다”고 사과를 전하며, “여생 편하게 살다가 오세요. 먼저 가 기다릴게요”라고 말했다. 유언서까지 작성한 후에는 준비된 수의를 입고 관에 들어갔다. 살아 있는데 이런 경험을 해보다니, 너무 이상했다. 관에 누우면 관 뚜껑을 닫아주고, 실제와 비슷한 느낌을 주기 위해 망치질 소리까지 낸다. 그리고 정용문 센터장은 “이제 여러분은 죽었습니다”라고 알려준다. 관 속에서는 5분 정도 시간을 보낸다. 암전 속에서 ‘정말 이 세상과 이별한다’는 생각이 들자 오히려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 지난 삶을 돌아봤다. 가족의 소중함 깨달아 관이 열린 후 다시 밝은 세상을 마주했다. 참가자들은 생환과 앞으로의 행복한 삶을 축복하는 의미에서 서로에게 박수를 보냈다. 정용문 센터장은 “행복한 사람,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했다. 또한 “참 모진 세월, 가족이 있어 버텨왔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오늘만큼은 가족들에게 ‘사랑한다’, ‘고맙다’고 말해줘라”라고 덧붙였다. 앞서 강연에서도 정용문 센터장은 가족의 소중함을 얘기했다. 그는 “과거 장례지도사로 일하면서 입관식 때가 가장 안타까웠다. 유족에게 마지막으로 고인의 손을 잡아주고, ‘사랑한다, 고맙다’라고 말해주라고 한다. 살아생전에 그런 얘기를 했다면 좋았을 텐데라는 생각에 임종 체험 프로그램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임종 체험 소감을 묻자 평택남부노인복지관 어르신들은 “가족의 소중함을 느꼈고, 남은 인생 잘 살아야겠다 생각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올해 70세가 된 윤재웅 씨는 “나는 잘 살아왔고, 즐거운 소풍 왔다 간다고 생각한다. 가족들도 웃으면서 보내줬으면 좋겠다”고 덤덤하게 말했다. 캐나다에 거주하는 40대 부부 지승혁·김시나 씨는 “오늘이 결혼기념일인데 임종 체험을 해서 기분이 이상하면서도 뜻깊었다”면서 “앞으로 죽을 만큼 사랑하겠다”고 소감을 전했다. 박옥경 백석웰다잉힐링센터 팀장은 “매일 임종 체험을 보지만 매일 눈물이 난다. 최근에 친구가 세상을 떠나서 감정이 더욱 올라오는 것 같다”면서 “정말 삶과 죽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고, 잘 살아야 잘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후회가 남지 않도록 죽음을 미리 준비해야 한다”고 웰다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 2023-12-18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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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로 고인 다시 만나” 디지털 기술 활용 장례 문화 확산
- 품위를 지키며 삶을 마무리하는 웰다잉(Well-dying) 문화가 디지털 세상을 만나면서 진화하고 있다. 스마트폰 앱으로 엔딩 노트 및 유언장 작성이 가능해졌으며, 온라인 추모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 그 결과 장례, 상속, 추모 등의 복잡했던 과정이 간편해졌고, 시공간의 제약이 줄어들었다. 스마트폰 하나로 웰다잉 준비 40여 년 동안 샐러리맨으로 열심히 일한 남성은 정년퇴임을 앞두고 위암 5기 판정을 받는다. 그러나 그는 슬퍼하기보다는 담담하게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만의 엔딩 노트를 준비한다. 일본 다큐멘터리 영화 ‘엔딩 노트’ 이야기다. 2011년 일본에서 영화가 개봉된 뒤 엔딩 노트 작성 열풍이 불었다. 이후 국내에서도 웰다잉 문화가 확산되면서 엔딩 노트가 주목받았다. 엔딩 노트는 스스로 삶의 이력과 추억, 사후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를 기록하는 노트를 말한다. 일종의 자서전이나 유언장 같은 역할을 한다. 이제 엔딩 노트를 스마트폰에서 작성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 대형 GA(법인보험대리점)인 iFA(아이에프에이)는 ‘엔딩 노트’ 앱을 개발해 지난해 출시했다. ‘엔딩 노트’는 유족의 의사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이 주도적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도록 서비스를 제공한다. 앱을 이용하면 장례식부터 장지까지 개성을 담은 맞춤형 장례식을 계획할 수 있다. 또한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상속 플랜을 수립, 유족 간의 분쟁을 방지하고 상속·증여세 절세 방안도 마련할 수 있다. 아울러 유언장과 버킷리스트 작성, 장기 기증, 유품 정리, 디지털 클린, 펫 신탁 등을 계획할 수 있다. 유언장 작성을 주요 서비스로 제공하는 앱도 있다. 웰빙·웰다잉 전문 IT 기업 ‘웰브’가 론칭한 모바일 디지털 유언 서비스 ‘남김’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이곳은 사단법인 한국상조산업협회와 업무협약도 체결했다. ‘남김’은 언제 어디서든 누구나 쉽게 유언을 모바일로 남길 수 있는 서비스다. 블록체인 등 4차 산업 기술 및 데이터 암호화 기술 등을 적용해 안전한 보관이 가능하다. 자필 유언이나 증서는 수정이 어려운데, ‘남김’에서는 이 점이 보완된다. 또한 상속, 법률, 장례 등 유언 작성 과정에서 고민이 생기면 전문가의 상담을 무료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현재 온라인으로 작성한 유언은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한다. 민법이 규정하고 있는 유언 방식은 5가지(자필, 녹음, 구수증서, 비밀증서, 공정증서)다. 이에 따라 온라인에서 하는 유언 작성은 실제를 위한 연습 정도로 생각하고 활용하는 것이 좋겠다. 또한 직접 하기는 어렵지만 사후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남겨두기에 적합한 창구로 보인다. 온라인 추모 서비스 활발 새로운 추모 문화로 주목받고 있는 ‘온라인 추모 서비스’란 비대면으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을 말한다. 코로나19로 비대면 중심 디지털 생활이 가속화되면서 관심이 높아졌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온라인 추모 공간은 생전에 자신이 직접 만들 수도 있다. 이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웰다잉과 관련이 깊다. 생전에 미리 공간을 만들어놓으면, 멀리 떨어져 지내 왕래가 어려운 친지의 부담 또한 줄어든다. 이에 따라 웰다잉을 생각하는 1인 가구를 중심으로 온라인 추모 서비스가 확대되고 있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에 발맞춰 상조회사에서는 온라인 추모 서비스 상품을 내놓고 있다. 업계에서 가장 먼저 온라인 추모관을 도입한 곳은 ‘보람상조’다. 보람상조 가입 고객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고인의 생전 모습과 장례식 과정을 추모 앨범과 영상에 담아 제작한 ‘추모관’, 고인에게 전하지 못했던 마음을 작성할 수 있는 ‘하늘 편지’, 추억을 온라인 공간에 보관하는 ‘추억 보관함’으로 구성된다. 또 다른 상조회사 ‘프리드라이프’는 지난해 QR 코드를 활용한 ‘디지털 추모관’ 서비스를 출시했다. 디지털 추모관은 고인의 위패와 추모 액자에 새겨진 QR 코드를 스캔하면 입장할 수 있다. 물론 웹사이트 주소를 입력해도 접속 가능하다. 추모관 안에는 고인의 약력, 가족 사항, 묘역 위치 정보 등이 소개돼 있으며, 추모글 게시판을 통해 유족들과 위로의 마음도 나눌 수 있다. 또한 프리드라이프는 AI 추모 서비스 ‘리메모리’도 선보였다. 그동안 온라인 추모는 웹사이트에서만 가능했는데, 플랫폼을 통해서도 할 수 있게 됐다. 교원그룹은 최근 장례 종합 플랫폼 ‘첫장’을 출시했다. 전국 장례식장 및 장지 검색, 가격비교, 부고 문자 발송 등 장례 준비 단계부터 온라인 추모 서비스까지 장례에 필요한 모든 서비스를 제공한다. 상조업계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와 이목을 끌고 있다. 정부도 온라인 추모 서비스 지원에 적극적이다. 보건복지부는 2020년 한국장례문화진흥원과 함께 ‘e하늘 장사정보시스템’ 내에 비대면으로 고인을 추모할 수 있는 ‘온라인 추모 서비스’를 공개했다. 해외동포를 포함해 국민 누구나 어디서든 무료로 이용 가능하다. 2020년 첫 도입부터 현재까지 매해 이용 실적은 20만 명을 넘는다. 기존 2차원(2D)에서 올해 3차원(3D) 온라인 추모관이 개발되면서 완성도가 높아졌다. 한 장례업계 관계자는 “시공간의 제약이 없는 온라인 추모 서비스는 앞으로 더욱 확대, 발전할 것으로 예상한다. 아직은 정식 추모가 아니라고 생각해 어색해하는 분들이 많다고 들었다. 그러나 온라인 환경에 익숙해진 고령층이 늘어나면 수요가 증가할 것이고, 그에 따라 디지털 세상에서 고인과 소통한 이들도 많아지면서 인식의 전환이 이뤄질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 2023-12-13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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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죽음 앞둔 환자의 마지막 준비
- 36세의 젊은 엄마가 하늘로 떠났다. 5살, 7살 두 딸 아이를 남겨두고. 9년 전 위를 송두리째 떼어내고 다 나은 줄 알았는데, 두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지내던 중 암이 재발됐고, 항암치료에 전념했지만 암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더 이상의 항암치료는 무의미하다는 말기 판정과 함께 우리 병원 호스피스로 의뢰됐다. 젊은 엄마는 남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하길 원했기에 상담 후 가정호스피스 서비스를 받기로 했다. 야속하게도 암은 계속 진행돼 몸은 하루하루 더욱 앙상하게 말라 갔고, 장폐색까지 진행되면서 나중엔 물만 마셔도 구토가 계속되자 가정호스피스팀은 소위 콧줄이라 부르는 배액관을 넣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콧줄을 달고 있는 자신의 모습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던 그는 콧줄을 거부하고 화장실에 숨어 몰래 구토를 하면서 마지막까지 아이들과 함께했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티기 힘들다는 생각이 들자 두 아이를 어린이집으로 보내면서 그 뒷모습에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고 119를 불러 응급실로 왔다. 응급실에서 만난 내게 자신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다했으니 더 이상 고통 없이 떠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반복되는 구토로 탈진해 있는 그에게 나는 미뤄왔던 콧줄을 바로 삽입했다. 그리고 배액장치를 통해 역류하는 소장액이 계속 바로바로 빠져나오자 비로소 그녀는 구토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다. 배액이 원활해지니 이제 조금씩 물과 음료도 마실 수 있게 됐다. 수액을 통해 탈수가 교정되고, 마약진통제를 통해 통증이 가라앉자 잠도 푹 잘 수 있게 됐고 조금씩 기력도 돌아왔다. 물론 이 모든 것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어린 두 아이들 생각에 그는 몸이 더는 감당할 수 없는 상태였는데도 수차례와 수술과 항암치료를 견뎌냈고, 그로 인해 몸은 너무나도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특히 배 안은 유착이 너무 심각해 심한 통증과 구토가 반복됐다. 콧줄과 배액장치에도 구토가 발생할 때가 있었고, 그런 불편감으로 입원 후에도 밤을 꼬박 새워야 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나는 콧줄의 위치를 섬세하게 조정해 배액장치가 아닌 주사기를 통해 소장액을 뽑아냈는데, 배액에 성공할 때면 그는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이제 살 것 같아요”라는 말을 반복했다. 고통에서 자유로워지자 그는 표정이 밝아졌고 여유가 생긴 만큼 두고 온 아이들에 대한 그리움이 밀려왔다. 어느 날 그는 조심스레 내게 다시 집으로 갈 수 있냐고 물었다. 꼭 해야 할 일이 하나 남아있다며 나를 바라보던 그의 차분하면서도 굳건한 눈빛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절대 아이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콧줄을 단 모습마저도 스스로 용납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집에서 지내기 위해서는 배액장치로도 해결되지 않는 구역질이 발생했을 때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고민 끝에 나는 그날부터 주사기를 통해 수동으로 소장액을 배액하는 법을 그녀를 간병하는 친정엄마에게 꼼꼼히 전수했다. 반복하는 연습과 교육으로 이제 구역질이 밀려올 때면 친정엄마 역시 능숙하게 그녀를 편안하게 만들어 줄 수 있었다. 준비는 다 끝났다. 이제 집으로 돌아갈 때다. 약속된 퇴원 전날 밤 나는 그의 침대 곁으로 찾아가 설레임과 두려움에 잠들지 못하고 있는 그와 친정엄마에게 이렇게 말했다. “지난 2주간 참 잘 이겨내 줘서 고마워요. 입원하기 전까지 고생을 너무 많이 해서 사실 집보다 병원이 훨씬 편하실 텐데, 다시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시니 그 결정 속에 각오만큼이나 큰 두려움이 담겨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사실 그의 엄마는 화장실에서 숨어서 구토를 하고, 신음소리를 삼키며 고통을 참던 딸의 모습을 봐왔기에 다시 그 지옥같은 상황으로 돌아가게 될까봐 퇴원을 반대했지만 결국 딸의 결심을 꺾을 수 없었다. 나는 딸과 엄마의 손을 포개어 손에 쥐고 말을 이어갔다. “삶은 여행이라잖아요. 이제 집으로 여행을 떠나는 겁니다. 여행에는 늘 변수가 생기고, 자는 것도 먹는 것도 모든 것이 불편하겠지만 목적이 있으니 사람들은 고생을 감수하고 떠나는 거겠죠. 집에 가시게 되면 꼭 그 목적을 이루세요. 저희가 지켜드릴게요.” 그는 퇴원을 하고 3주 정도를 집에서 보냈다. 중간에 오한과 고열이 발생해 응급실로 실려온 적이 있었지만, 응급처치만 받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그 ‘해야 할 일’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입원하지 않고 가정호스피스를 통해 해열제와 항생제를 투여하면서 다행히 발열은 안정됐다. 그리고 내가 가정호스피스팀과 함께 그의 집을 방문했던 어느 날 그는 아파트 정원이 내려다보이는 거실 창가의 침대에 누워 나를 반겼다. 평소 차분한 그였지만 이날은 왠지 유난히 들떠 보였다. 친정엄마에게 선생님 좋아하시는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내려서 드리라고 계속 채근을 했고, 커피를 내가 다 마시자마자 수정과도 준비했다며 다시 엄마를 재촉했다. 어떻게 지내냐는 내 말에, 처음에는 콧줄을 달고 있는 엄마의 모습에 아이들이 충격을 받을까 걱정했는데 오히려 다시 돌아온 엄마를 아이들은 반겼고, 심지어 이제는 절대 떠나지 말라며 아이들이 팔목에 수갑 같은 팔찌를 채워놓았다며 웃었다. 나는 그에게 미소로 화답하며 그 ‘해야 할 일’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냐고 찬찬히 물었다. 기다렸다는 듯 그는 내게 말했다. “주문한 피아노 내일 집에 들어와요.” 퇴원 후 그는 바람에 날려갈 듯한 그 앙상한 몸으로 매일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동화책을 읽어주고, 작은 전자 피아노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쳤다. 엄마가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 꼭 한 번 건반 피아노의 맑은 소리로 아이들에게 피아노를 치는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내일이면 그게 현실이 될 것이기에 그는 들떠서 환히 웃고 있던 것이다. 그것이 내가 기억하는 마지막 그의 얼굴이었다. 그 환한 웃음을 남겨두고 일주일 뒤 새벽 그는 하늘나라로 부름을 받았다. 우리 병원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렸기에 나는 다음날 우리 호스피스 팀원들과 조문을 갔다. 그의 친정엄마는 우리 가정호스피스 간호사 선생님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흐느끼며 울었다. 그 옆에서 고인의 남편도, 여동생도, 그리고 시부모님들도 눈시울을 붉혔다. 그리고 다 함께 그에 대한 추억을 하나씩 꺼내 놓으며 나누다 보니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얼굴에 어느새 환한 웃음이 지어졌다. 비록 그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우리 모두가 함께 극복하고 새롭게 도전했던 시간들은 돌아보니 분명 해피엔딩이었다. 슬픔이 비극과 상처로 남지 않고 웃음과 위로로 추억되는 이 순간이 호스피스를 하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선물이고 보람이다. 장례식장을 떠나며 남편과 악수하며 말했다. “마지막까지 아이들 곁을 지켰던 엄마의 용기를 아이들이 커가면서 분명 깨닫게 될 거예요. 그 용기는 고스란히 남아 평생 아이들의 삶을 지탱해 줄 겁니다.”
- 2023-12-11 0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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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외의 웰다잉 문화, 가장 ‘죽기 좋은’ 국가의 모습은?
- 세계에서 가장 죽기 좋은 나라는 어디일까? ‘죽기에 좋다’는 말이 생소하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좋은 죽음’에 대해 정의하고 죽음을 준비하는 나라들이 있다. 100세 시대를 맞아 ‘잘 죽는 방법’을 고민할 이들을 위해 해외의 웰다잉 문화를 소개한다. 영국의 시사 주간지 ‘이코노미스트’ 산하 연구기관 인텔리전스 유닛(EIU)은 ‘죽음의 질 지수’를 발표했다. 임종을 앞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의료 시스템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나타내는 지수다. 죽음을 앞두고 갈 수 있는 병원 수, 치료 수준, 임종 관련 국가 지원, 의료진 수 등 20가지 지표로 측정했다. 80개 국가 중 우리나라는 2015년 기준 18위였다. 1위는 영국이다. 누구나 ‘좋은 죽음’ 맞이하도록 영국도 과거에는 죽음에 대한 논의를 피하는 문화가 있었다. 영국 보건부는 ‘생애 말기 돌봄 전략’을 제시하며 죽음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꿨다. 이때 영국 정부는 ‘좋은 죽음’을 정의했다. ‘익숙한 환경에서, 가족·친구와 함께 존엄과 존경을 유지한 채 고통 없이 죽는 것’이 그들이 정의한 좋은 죽음이다. 영국은 생애 말기 치료법과 호스피스 제도를 발전시켰다. 생애 말기 치료법은 완화치료라고도 하는데,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줄여주는 치료법이다. 말기 암 환자뿐 아니라 죽음을 눈앞에 둔 환자라면 누구든 완화치료를 받을 수 있다. 또한 가족들의 고통까지 돌보는 호스피스를 강조한다. 호스피스는 죽음이 가까운 환자들이 입원해 고통을 덜어주는 치료를 하는 특수 병원이다. 또한 교과 과정에 ‘상실 체험과 비탄’이라는 과목을 개설한 중·고등학교도 늘고 있다. 비탄 교육이란 소중한 사람(가족)의 죽음, 학교 교사나 친구의 죽음, 유명인의 죽음, 재난을 통한 죽음 등을 경험할 때 필요한 정서적 도움이나 돌봄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죽음, 준비하세요” 미국, 독일, 일본에서는 ‘죽음 준비교육’을 제도화했다. 미국은 유치원부터 대학교까지 죽음에 대한 이해, 슬픔을 극복하는 방법을 가르친다. 노화 과정, 죽음 준비 과정, 임종 시의 상태, 유가족을 위한 교육 등 네 가지 분야로 나뉘어 있다. 학교별로 죽음 준비교육 관련 프로그램이 100여 개에 이르고, 학교 외에 병원·기관 등에서도 교육을 실시한다. 또한 ‘행복한 죽음 운동’을 시작으로 죽음 만찬, 죽음 살롱, 죽음 카페 등이 빠르게 늘었다. 독일은 중세시대부터 다른 나라와는 달리 종교의 영역에서 죽음 준비교육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초·중·고등학교 종교 수업의 선택 과목 중 하나로 죽음 준비교육 프로그램이 있는 이유다. 중학교에서는 ‘죽음과 죽음에 이르는 과정’, ‘임종-죽음-부활’이라는 교과서로 죽음을 다룬다. 고등학교에서는 더 깊이 있는 죽음 준비 탐색을 위한 5단계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종활’(終活)이라는 죽음 준비 활동이 활발한 일본 역시 죽음 준비교육을 한다. 일본 조치(上智)대학의 알폰스 데켄 교수가 “죽음에 대한 준비교육은 말 그대로 자신이 죽을 때까지 매일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철학으로 1977년부터 ‘죽음의 철학’을 강의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2002년 일본 정부는 초·중·고등학교를 대상으로 삶과 죽음 교육 과정을 개발했고, 2004년부터 교육 과정에 포함됐다. 또한 20여 개 대학에 죽음과 죽어감에 대한 과목이 개설돼 있다. 김조환 웰다잉문화연구소 소장은 “외국에서는 웰다잉 이전에 ‘죽음 준비교육’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됐다”면서 “죽음 준비란 계절의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나이 들어감을 자연스럽게 이해하고, 삶과 죽음에 관해 철학적으로 사색하며 삶의 방식을 찾아가는 선순환을 만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우리나라는 어르신 대상으로 삶을 수용하는 방향의 교육이 주로 이뤄지고 있어 아쉽지만, 앞으로는 외국처럼 전 생애에 걸쳐 죽음 준비교육을 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 2023-12-11 0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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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 길 먼 존엄한 죽음… ‘가족 중심’ 문화 웰다잉 정착 막아
- 웰다잉(Well-dying)을 직역하면 ‘좋은 죽음’이다. 저마다 삶의 양식과 가치관이 다르기에 좋은 죽음에 정답은 없지만, 대체로 ‘삶의 마무리 단계에서 자기결정권을 실현할 수 있는 죽음’을 의미한다. 국내에선 자기결정권의 일환으로 연명의료결정법 시행 이후 웰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었다. 다만 이에 따른 실천은 미미한 편이다. 문제는 개인이 실천했음에도 웰다잉 실현은 어려울 수 있다는 점. 무엇이 그들의 존엄한 마무리를 가로막는 것일까? 웰다잉 수요 변화를 충족할 사전적 정책 대응 마련해야 2025년 한국은 초고령사회 진입이 예상된다. 베이비붐 세대가 후기고령자(75세 이후)로 대거 편입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후기고령자는 치매, 중증 질환 등으로 인해 자기결정권 행사에 제약이 있는 노인이 많다. 이에 대비한 생애 말기 지원 정책의 확대가 요구되는 가운데, 웰다잉 지원 정책의 필요성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이러한 현상을 반영하듯 정부는 2020년 12월 ‘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 내 세부 항목에 ‘존엄한 삶의 마무리 지원’을 포함했다. 당시 ‘생애 말기·죽음 관련 자기결정권이 구현되는 사회문화적 기반 조성’을 목표로 내세우며 해당 정책의 내실화를 강조한 바 있다. 그보다 앞선 2018년에는 연명의료결정법, 2019년에는 호스피스·연명의료 종합계획(2019∼2023)을 발표해 시행 중이다. 그밖에 존엄사법, 성년후견지원제도, 장사제도, 유족연금제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생애 말기 케어, 고독사·죽음준비 평생교육과 상담, 유류품 지원 서비스 등 다양한 관련 법과 지원책이 마련되기도 했다. 해외 선진국에 비하면 국내 웰다잉 정책의 역사는 짧지만, 최근의 시도 덕분에 죽음에 대한 인식과 관심은 꽤 높아진 편이다. 그러나 앞으로 늘어날 웰다잉 정책 수요를 충족하는 제도적·물리적 여건이 현실적으로 마련될지는 미지수다. 지난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존엄한 삶 마무리 지원 정책 모니터링 및 과제’(이하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서는 “현시점 이후부터는 웰다잉 정책 수요의 급증이 예상된다”며 “수요 변화를 충족할 수 있는 사전적 정책 대응이 원활하지 않을 경우 상당한 혼란 또는 논란이 대두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내다봤다. [이슈 1] 고령화·1인 가구 증가, 웰다잉 품앗이해야 할 판 웰다잉의 직접적 정책 대상자는 사망자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사망자 수는 초고령사회 진입 시점인 2025년 이후 급증해 그 흐름이 2060년까지 지속될 전망이다. 이와 더불어 65세 이상 노년층 중 1인 가구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인구 구조 변화로 사회에서 웰다잉을 지원해줄 청장년층의 부담은 계속 커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장차 1인 가구 장례 품앗이 등을 고민해야 하는 지경에 처할 수 있다고 우려하는 상황이다. 가장 안타까운 건 저소득 독거노인의 죽음이다.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는 “독거노인의 경우 무연고 사망자가 많은데, 사실 90% 이상은 연고가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런데 대부분 경제적 이유로 시신 인수를 포기한다. 생전에 돈이 없어서 소외됐던 이들이, 결국 또 돈이 없어 장례도 못 치르는 설움을 겪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민간에서 해결하긴 어렵다. 결국 정부에서 고민하고 나서야 할 사안”이라고 말했다. 허울만 있는 웰다잉 정책은 ‘공염불’ 웰다잉 정책 수급 불균형의 대표적 사례로 ‘화장(火葬)장 부족’을 꼽을 수 있다. 통상적인 화장로 1기당 1일 적정 가동 횟수(3.5회) 및 가동 일수(300일)를 고려할 때 해마다 늘어나는 사망자 수를 감당하기엔 버거운 실정이다. 실제 코로나19 사태 당시 일시적 수요 증가에 따른 화장장 부족으로 인해 4~5일 장으로 장례를 치른 상황만 봐도 실감할 수 있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 따르면 향후 고령화에 따라 연간 1만 명 이상 사망자 수가 늘어날 전망이다. 이를 감안할 때 화장로는 매년 약 10기 이상씩 확충돼야 한다. 그러나 최근 5년간 한 해 평균 확충된 화장로는 7.8기에 불과하다. 더구나 화장장은 님비현상이 적용되는 대표적 시설로, 증설에만 약 10년이 걸린다고 한다. 대응책 마련을 서둘러야 할 상황이다.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는 “존엄한 죽음을 뒷받침할 시설과 제도 확충이 시급하다. 웰다잉 수요를 고려할 때 화장장, 영안실, 호스피스 병동 등이 훨씬 더 늘어나야 한다”라며 “법적인 부분도 실효성을 높여야 한다. 유언장을 썼더라도 법적 효력을 크게 발휘하지 못하니 죽음 이후 남은 가족끼리 갈등을 겪거나 소송까지 하게 된다. 독거노인의 경우 사망 후 시신 인수나 장례 등을 제3자가 진행하기에 한계가 있다. 때문에 스스로 정해놓은 죽음의 방식이 있더라도 이를 실현하기 어려워, 결국 웰다잉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어 “정책적으로 웰다잉을 언급하지만, 실질적인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공염불이나 다름없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곧 그 사회의 수준을 말해준다.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한 분야인데도 정책적 논의에서는 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잊힌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슈 2] 벼락치기 연명의료중단, 진정한 웰다잉일까? 현행법상 연명의료중단의 경우 사전연명의료의향서 혹은 연명의료계획서를 통해 환자 본인의 의사를 확인하거나, 가족 2인의 진술을 통한 환자 의사 추정 혹은 가족 전원 합의를 통해 이뤄지고 있다. 올해 10월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소속 서영석 의원(더불어민주당)이 보건복지부로부터 받은 ‘연명의료결정제도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7월 말 기준 연명의료중단 이행 건수는 29만 7313건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본인의 의사에 따라 연명의료중단이 이행된 건수는 39.2%였다. 즉 가족의 진술 또는 합의를 통한 연명의료중단이 과반수인 셈이다. 같은 자료에서 주목할 사항이 하나 더 있다. 연명의료중단을 위한 서식 작성과 이행이 같은 날 이뤄진 건수가 전체의 80%가 넘는다는 것. 이에 서영석 의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삶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것이 연명의료결정제도의 취지임에도 불구하고, 제도가 시행되고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살펴보면 나의 선택보다 가족의 선택으로 더 많이 이뤄지고, 준비하기보다 벼락치기가 더 많은 현실”이라며 “많은 국민이 제도에 참여하며 관심을 보이는 만큼 전체적으로 제도를 돌아보고 본래의 취지와 목적을 반드시 지켜낼 수 있도록 개선 및 보완해야 한다”고 밝혔다. 관습적 문제, 가족 눈치 보지 말아야 근래 웰다잉 관련 선행 연구들에서 언급됐던 좋은 죽음에 대한 공통된 개념 중 하나는 ‘자녀(혈연)를 비롯한 가족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죽음’이다. 웰다잉은 개인의 처지와 시대적 상황, 문화 등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특히 우리나라 노인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은 전통적 가족주의 문화가 반영됐다는 걸 알 수 있다. 남은 가족에게 심리적 부담은 물론 돌봄이나 장례 등으로 인한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고 떠나려는 것이다. 물론 이 또한 웰다잉의 일부이겠으나, 심할 경우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 죽음 교육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유경 사회복지사는 “웰다잉 실천을 어려워하거나 망설이는 이유 중 하나로 ‘지나친 가족 중심 문화’를 들 수 있다”며 “가령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핵심인데도, 마지막 단계에 이르면 보호자(가족) 쪽으로 결정권이 넘어가는 편이다. 환자의 치료 경과나 예후에 대해서도 당사자보다는 보호자 중심으로 이야기가 이뤄진다.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몰라 시의적절하게 마지막을 준비하지 못하는 이도 있다. 제도나 인식이 무르익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는 환자가 미리 연명의료중단 의사를 밝혔더라도 의료진으로선 추후 분쟁을 대비해 가족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을 거치는 게 현실”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남은 가족의 부양이나 비용 부담을 덜기 위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쓴다는 분도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이유로 자신의 마지막을 선택하기보다는 오롯이 ‘자기결정권’으로 주체적인 고민을 해보시길 바란다”며 “그 이후 가족들을 위해 할 일은 자신의 결정을 알려두는 것이다. 그래야만 갑자기 이별이 찾아오더라도 가족들이 우왕좌왕하거나 갈등하지 않고, 고인의 생전 뜻대로 마지막을 순조롭게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슈 3] 노인 중심 웰다잉 교육, 중장년도 외면 말길 웰다잉 분야 전문가들은 ‘죽음 교육’에 대한 수요 증가 및 활성화는 뚜렷하다고 입을 모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후기고령자 중심으로 정책 집행(제4차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에 따른 생애 말기 준비·설계 교육 등)이 이뤄져 다소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장소의 특성상 중장년은 교육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을뿐더러, 평생교육과의 연계 또한 어려운 실정이다. ‘존엄한 삶 마무리’ 보고서에서도 “부모의 장례를 준비하는 40~60대를 핵심 정책 대상층으로 선정해놓고 있음에도 (이에 따른 교육 등이) 소극적이라는 점에 아쉬움이 남는다”고 지적했다. 유경 사회복지사는 “중장년은 죽음을 먼 이야기로 여겨, 교육의 필요성을 느껴도 막상 실천으로 이어가지 못한다. 노년기에 죽음을 생각하면 주로 삶에 대한 회고지만, 중장년기에는 회고와 더불어 다가올 노년기를 계획해볼 수 있다. 즉 중간점검 기회인 셈이다. 다가오는 연말에는 나의 죽음을 떠올려보고, ‘웰다잉’을 내년 버킷리스트로 삼아보길 바란다”고 조언했다. 도움말 김경환 한겨레두레협동조합 상임이사, 유경 사회복지사(죽음 준비교육 전문강사) 참고 존엄한 삶 마무리 지원 정책 모니터링 및 과제(한국보건사회연구원)
- 2023-12-04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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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산관리부터 상속까지… “신탁이 노후를 바꿔”
- 고령화 시대의 자산관리 방법으로 최근 신탁이 관심을 받고 있다.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는 다양한 영역에서 신탁이 활용되고 있다. 특히 일본의 신탁은 고령자가 주로 이용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활성화되지 않은 영역이지만, 배정식 법무법인 가온 패밀리오피스센터 본부장은 곧 트러스트2.0의 시대가 올 것이라고 본다. 하나은행에 재직 중이던 배정식 본부장은 2010년 금융권 최초로 ‘리빙트러스트’를 론칭했다. 국내에서 ‘최초’로 유언대용신탁, 치매대비신탁, 유산정리신탁, 증여신탁, 기업승계신탁, 상조신탁, 봉안신탁 등을 선보이며 신탁 시장을 만들어왔다. 금융권에서는 그를 신탁 분야의 ‘선구자’라 부를 정도다. 배 본부장은 이제 국내 신탁 시장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다양한 영역의 전문가들이 협업하며 상속뿐 아니라 생애 전반을 신탁으로 관리하는 시대가 왔다는 것. 왜 고령화 시대에 자산관리 방법으로 신탁이 주목받는지, 배 본부장을 만나 궁금증을 풀어봤다. 나의 자산관리 법인 ‘신탁’ 신탁은 생전쪾사후에 필요한 다양한 영역을 관리한다. 50대가 넘어가면 각자의 삶에서 다양한 이벤트가 발생한다. 부모님 의료비, 자녀 교육비, 상속, 황혼이혼 등의 문제가 생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완화하는 계약이 신탁이다. 배정식 본부장은 “가상의 자산관리 법인이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쉬울 것”이라며 “같은 금액을 상속받더라도 세금 문제가 형제마다 다르기도 하고 공통으로 마련해야 하는 비용도 있는데, 이런 갈등을 해결하는 중립적인 시스템으로서 하나의 도구인 셈”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보다 고령화를 먼저 겪은 일본은 2006년에 신탁법 개정이 이뤄지면서 유언대용신탁이 먼저 도입됐고, 신탁이 활성화되기 시작했다. 이즈음 우리나라에서도 사후에 자녀를 위해 자산이 쓰일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사람들이 늘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장애가 있거나 몸이 아픈 자녀가 있는 가정에서 부모가 부재할 경우 사후에 자녀에게 정해진 목적으로 자산이 쓰이도록 하고 싶었던 것이다. 또한 고령화 시대가 오면서 노인성 질환이 증가했다. 대표적으로 치매와 같이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표현하기 어려운 질환이 늘면서, 고령자의 자산을 두고 가족끼리 다툼이 벌어지거나 치매 환자의 자산을 가로채는 일 등이 생겼다. 이때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 신탁이다. “신탁의 본질은 계약입니다. 믿을 만한 사람에게 자산운용을 맡기는 자산관리 시스템인데요. 스스로 자산관리를 하기 어려울 때를 대비해 여러 방법을 계약으로 정할 수 있습니다. 생전에 나를 위해 자산이 쓰이다가, 사망하면 남은 재산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상속을 명시할 수도 있고, 사망 후 자산이 어디에 쓰일지도 정해둘 수 있습니다. 고령자가 많아지면서 생전쪾사후 자산관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고, 신탁이 활성화된 해외 사례를 보면서 신탁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생애주기 따른 맞춤형 서비스 미국에는 생명보험신탁, 연금양도신탁, 기부와 상속을 설정할 수 있는 신탁 CRT, CLT 등의 신탁 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다. 우리나라 신탁은 아직까지 유언대용신탁과 증여신탁이라는 큰 범위 안에서 서비스가 파생되고 있다. 우리나라 법 체계로는 증여신탁의 경우 실질적인 신탁 기능을 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다. 증여신탁을 제외하면 대부분 유언대용신탁에서 가지처럼 뻗어나온 서비스들이다. 2010년 신탁법 개정 논의가 이뤄지면서 사후에 자산의 쓰임을 설정하고자 하는 수요가 늘었다. 배정식 본부장은 신탁법 개정이 시행되기 전 법무부의 유권해석을 받아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재산을 수탁업자(은행, 증권사, 보험사 등)에게 맡겨 관리하고 운영하다가 사후에 ‘누구에게 주라’고 하면 유언대용신탁입니다. 치매대비신탁은 자산관리 과정에서 ‘만약 내가 치매에 걸린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자산관리 목적을 정합니다. 이때 두 가지 수요가 있었어요. 첫째, 치매에 걸리더라도 자산이 나를 위해 쓰이면 좋겠고 둘째, 사후에 원하는 이에게 상속하고 싶다는 거예요.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더라도 자녀에게 자산을 뺏기지 않고 병원비나 생활비 등에 사용하는 거죠. 신탁에는 이렇게 자산을 사용할 때, 물려줄 때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요소들을 계약을 통해 완화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유언대용신탁과 치매대비신탁이 신탁 시장에 물꼬를 터줬다. 고객들의 신탁에 대한 요구는 더 다양해졌다. 상조신탁과 봉안신탁도 그런 맥락에서 출발했다. 과거에는 상조회사에 일정 금액을 적립하다가 사후에 장례를 맡겼는데, 갑자기 여러 상조회사가 문을 닫는 상황이 벌어졌다. 적립금을 돌려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신탁으로 금융사에 자산을 맡겨두고 사망 시 상조회사에 자산이 쓰이도록 지정하기 시작한 게 상조신탁이다. 생전 자산관리부터 사후 자산관리까지 모두 맡기고 싶은 수요가 늘어난 셈이다. 사람마다 겪는 생애 이벤트가 다르지만, 개인 맞춤형으로 다양한 영역에서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게 신탁의 가장 큰 장점이다. “초기에는 요양원에 있는 분들의 수요가 많았다면, 이제는 경도인지장애가 왔거나 몸이 안 좋은 분들이 미리 계획을 세우고자 신탁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신탁은 한 사람의 삶 전반을 관리하는 것이더라고요.” 분야별 협업이 만든 ‘원스톱 서비스’ 상조신탁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는 걸 보면서 배정식 본부장은 생전 자산관리부터 마지막 장지까지 원스톱으로 신탁 서비스를 받을 수 있으면 어떨까 생각했다. 그래서 제안한 것이 봉안신탁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55만 평 규모로 신뢰성 높은 용인공원과 협업해 봉안신탁 고객에게 할인된 금액으로 봉안당을 제공하는 서비스를 만들었다. 기부 문화 확산을 위한 4자 협업 신탁 원스톱 서비스도 출시했다. 연세대학교 의료원, 법무법인 가온, 용인공원, 하나은행과 함께 의료원에 기부하는 고객의 생애주기에 맞춰 의료, 자산관리, 장묘, 법률 서비스를 제공한 것. 이를 통해 기부자의 건강한 생활, 자산관리, 상속, 증여, 후견, 상조, 장지 등의 절차를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배정식 본부장은 이런 분야별 협업이야말로 트러스트2.0의 시작이라고 말했다. 앞으로 더 많은 협업을 통해 신탁 시장이 확장해갈 것이라는 전망이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소비자 중심의 서비스로 전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시작이 모여 각 영역이 결합하면 하나의 원스톱 서비스 체계를 만들 수 있는 기초가 될 겁니다. 신탁은 신뢰를 기반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뢰성 높고 안전한 영역별 전문가들이 힘을 합치는 것이죠. 앞으로 전문가들이 네트워크로 연결될 수 있는 계기와 동력이 생길 거라고 기대합니다.” 2022년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신탁업 혁신 방안 중에는 전문기관과 금융기관이 위·수탁 계약을 맺을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법무법인, 시니어타운, 요양법인 등이 신탁 업무를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분이 편하게 신탁 상담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앞으로 신탁이 더욱 대중화될 수 있도록 길을 닦기 시작했다. 배 본부장은 앞으로 더 많은 이들이 신탁을 찾을 것으로 내다봤다. 그렇다면 신탁은 어느 시점에 맡겨야 가장 좋을까? 사실 정해진 답은 없다. 어떤 목적으로 신탁을 활용하고자 하는지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탁에 관심 있다면 ‘의사결정이 가능할 때’ 계약을 설정해두는 것이 유리하다. “현재는 부모에게 상속받은 경험이 있는 40~50대가 신탁에 관심이 높습니다. 상속 과정이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죠. 그런데 신탁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60대 중후반이 넘어서면 본인이 예상하지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거든요. 건강이 염려되는 시기에 적극적으로 신탁을 고려해보시면 좋을 겁니다. 또 미국처럼 예비부부도 신탁에 관심 가져볼 만합니다. 결혼할 때 모아뒀던 각자의 자산을 자녀에게 쓰겠다, 혹은 부모님에게 쓰겠다는 목적을 설정해 신탁으로 관리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추후 이혼에 따른 재산 분할 갈등을 줄여줄 수 있겠죠.” 꼭 자산이 많아야만 신탁을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1만 원으로도 신탁을 시작할 수 있고, 1억 원이 모이면 자녀에게 증여하는 방식의 신탁을 설정할 수도 있다. 신탁의 핵심은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면서 원하는 목적에 맞게 자산이 쓰이도록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을 관통하는 자산관리 방법이기도 하다. 배 본부장은 마지막으로 “고령화 시대에 신탁은 원스톱 서비스로서 하나의 자산관리 도구로 활용될 것”이라면서 “각자의 생애 이벤트에 따라 누구나 신탁을 이용할 수 있다는 인식이 생기면 좋겠다”고 전했다.
- 2023-09-20 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