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인문학자라 불리는 김찬호(金贊鎬·57) 성공회대학교 교양학부 교수. 그는 인간의 영혼이란 매우 여리고 취약한 것이라 말한다. 누구든 작은 말 한마디와 눈빛만으로도 타인의 영혼을 파괴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자기 영혼을 다스릴 수 있는 감수성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아울러, 이러한 감수성은 인간의 언어를 ‘경청’하는 경험에서 나온다고 덧붙인다. 그는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서해문집)를 통해 인생 선배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본다.
‘베이비부머 세대의 구술생애사를 통해 본 희망의 노년 길 찾기’라는 부제의 도서 ‘당신의 이야기는 무엇입니까’. 공동저자인 김찬호 교수와 문학평론가 고영직, 여성학자 조주은은 각자 베이비부머를 한 사람씩 인터뷰하며 그들의 생애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반평생 은행원으로 일하다 늦깎이 시인이 된 최영식 씨, 전업주부로 살며 포기했던 꿈에 다시 도전하는 김춘화 씨, 이우학교를 만들고 현재는 ‘50+인생학교’ 학장이 된 정광필 씨. 그중에서 김 교수가 만난 이는 정광필 학장이다. 일전에도 대안 교육과 관련한 공식 모임에서 만난 적은 있지만, 단둘이 이야기를 주고받은 것은 처음이다.
“아는 사이지만 사적인 대화를 한 적이 없어 호기심이 생겼어요. 정광필 학장은 고등학생 때부터 정치에 대한 비판의식을 갖고 용기 있는 실천을 해왔습니다. 우여곡절이 많았을 텐데, 모든 일을 게임 감각으로 풀어나가는 경쾌한 분이었어요. 그런 점에서 인생 선배에게 배운다는 게 이거구나, 말보다는 어떤 기운으로 그가 살아온 인생이 묵직하게 느껴졌죠.”
그는 10시간 가까이 정 학장을 인터뷰 했지만, 한 가지 묻지 못한 것이 있었다. “오랜 시간 누군가에게 내 삶을 말 해보니 어떤가요?”라는 것. 질문을 바꿔 김 교수에게 물어봤다. “오랜 시간 누군가의 삶을 들어보니 어떤가요?”
“나의 스토리가 누군가에게 전해질 때, 즉 스토리가 텔링이 되면 또 다른 힘이 생깁니다. 수박 겉핥기이지만, 한 사람의 60년 인생을 따라간 거 아녜요. 일종의 시간 여행이죠. 그분의 삶을 통해 나를 잠깐 떠나볼 수 있는, 나를 객관화하고 낯설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어요. 인터뷰할 땐 그 사람의 삶에 온전히 들어가 있으면서 동시에 나와 있어야 하거든요. 살아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그의 표정과 함께 다가올 때, 그 삶을 내가 잠깐 살아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래서 인터뷰라는 게 참 재미있죠.”
삶의 공백을 채우는 자기 언어
김 교수는 생애 전환기의 중장년 세대가 ‘내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그 발걸음이 품고 있는 내재율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자기 삶을 되짚어보길 바랐다.
“베이비부머가 압축 성장한 산업화 시대를 살았다고 하는데, 당시엔 민주화도 아주 급진적으로 이뤄졌어요. 그 시기 산업화와 민주화의 공통점은 자기 삶이 없다는 거예요. 그냥 내던진 거죠. 돈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그 과정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친구들이 끌려가고, 가족이 죽고, 자기도 당하고, 그런 아픔을 제대로 보살피지 못한 채 살아왔죠. 그런데 세월이 흘러 외적으로는 뭔가 생겼어요. 돈, 지위, 명예… 내적으로는 굉장히 공허한데 말이죠.”
그는 현재 시점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음미해볼 것을 권했다. 이를 위해서는 삶의 여백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여유로운 중장년의 경우 삶의 여백이 많다고 할 수 있을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여백과 공백은 다르죠. 디자인도 잘못한 걸 보면 여백이 아니라 공백처럼 느껴지잖아요. 마찬가지로 시간이 비었다고 무조건 여백은 아닙니다. 노후에 할 일이 없고,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의 경우엔 공백이라고 봐야죠. 그러니 공허한 거고요. 빈 시간이 여백이 되려면, 그만큼 자기 마음에 그릇이 생겨야 해요.”
마음의 그릇은 어떻게 만드느냐고 묻자, 김 교수는 ‘자기 언어’가 있어야 한다고 대답했다. 그가 강조하는 ‘자기 언어’는 무엇일까?
“언어는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가 아닙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선수의 한마디가 사람들을 울릴 때가 있잖아요. 또 극한의 고통에 빠진 사람이 세상을 향해 외치는 호소, 그때의 언어는 신호가 아니거든요. 그 존재가 다가오는 거지. 이때 느끼는 자기 언어의 생명력은 대단한 학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경험하고, 감동할 수 있죠. 자기 언어는 내면에서 생성되는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바깥에서 지식으로 언어를 흡수하기 때문에 일상의 언어가 도구화되어 버렸죠.”
그는 특히 중장년 세대가 자기 언어를 갖지 못하고 살아왔다며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냈다. 명령의 언어, 힘겨루기의 언어, 과시의 언어 등에 익숙해져버린 것. 이에 대한 해답 역시 ‘경청’이라 제안한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에 경청할 여유가 없었고, 반대로 온전히 나를 경청해주는 사람 앞에서 말해본 적도 없어요. 늘 대화하면서 내가 이렇게 말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까를 생각하죠. 그건 상대에 대한 배려가 아닌 견제거든요. 서로 위협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정서적 신뢰를 쌓는 안전한 관계가 필요한 거죠.”
내 남은 생애가 쓰이길 바라며
경청이 중요한 것은 알지만, 실천하기는 어렵다. 마음먹고 잘 들으려 하다가도 어느새 잔소리를 늘어놓기 일쑤다. 이에 김 교수는 ‘감수성’ 차이에서 오는 문제라고 지적했다.
“내가 잘해주고 싶은 것보다 상대가 필요로 하는 걸 헤아려야죠. 그게 감수성이고, 센스인데, 의지만으로 생기지 않는 것들이에요. 먼저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훈련이 돼 있어야 해요. 관찰, 통찰, 성찰은 함께 이뤄져요. 상대에 대한 이해는 나에 대한 이해와 같습니다. 남에게 친절한 사람은 그만큼 자신을 사랑하는 거고, 늘 화내는 사람은 자신과도 불화 관계에 있다고 생각해요.”
나와 잘 지내기가 곧 남과도 잘 지내는 방법이라는 것. 그렇다고 자신과 좋은 관계를 맺는 게 꼭 자기만 생각하라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의 삶을 좋게 만들고자 할 때 자연히 나의 삶과 관계도 편안해질 수 있다고.
“꼰대질이라는 걸 왜 하게 될까요? 에고(ego)에 갇혀 있기 때문이에요. 에고에서 벗어나려면 자기를 넘어선 세계를 지향해야 합니다. 공적인 영역, 시민으로서의 정체성, 역사의식 등이죠. 내 남은 생이 인생 후배들의 삶을 위해 쓰이도록 초점을 맞춰야 해요. 그러면 꼰대질을 덜 하게 되죠. 꼭 내가 인정받지 않아도 되니까요. 여생의 능력이 쓰여 누군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여기면 내가 대접받고 아니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져요.”
책 말미에서 정 학장은 “나이 들어 더 좋은 게 있다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세월이 갈수록 이해가 많이 된다. 스스로 내려놓으면 오히려 많은 걸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김 교수에게 같은 질문을 하자, 비슷한 대답이 나왔다.
“포기할 게 많아진다는 것?(웃음) 선택지가 줄어들거든요. 이미 많은 게 굳어진 상태니까요. 좋은 의미의 체념이랄까? 고민할 게 줄어드니 마음이 한결 편안합니다.”
어느 때부터인가 시니어를 지칭하는 단어가 ‘50플러스’가 되었다. 외국에서 건너온 단어이기도 하지만, 50세에 직장을 퇴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실감이 난다. 50대에 활발히 인생 이모작 활동을 시작하고 60대 중반에 피크를 이루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이란 책은 50+인생학교 학장 정광필씨가 최재천 교수, 박원순 서울시장 등 11명의 이야기를 모아 낸 책이다. 전체적으로 경어체로 통일 시킨 것이 좀 거슬렸다. 경어체는 겸손의 자세는 있어 보이지만 가르치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들기도 한다.
인생 이모작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가지 책이 나온 바 있다. 그 나이가 어떤 의미이며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었다. 추상적인 설계부터 각자의 전공에 따라 여러 가지 주장을 해왔다. 이런 책들 덕분인지 시니어에 대한 인식은 어느 정도 되어 있는 것 같다. 남은 생을 어떻게 살아 갈 것인가에 대해 각자 택할 방식은 각자의 몫이다.
여러 사람의 글 중에 ‘개저씨는 왜 혼자가 되었나?’를 쓴 이승욱 씨의 글이 마음을 당겨 이 책을 사게 되었다. ‘개저씨’는 아저씨를 낮춰 부르는 경멸의 단어이다. 시니어들이 범람하는 사회에서 필자 나이 또래들도 눈에 거슬리게 느끼는 일들을 지적했다. 매너는 당연하지만, 특히 말을 적게 하고 경청하라는 것이다. 시니어가 되면 말이 더 많아 지는 사람도 있고 말수가 적어지는 사람도 있다. 특히 말이 많은 사람은 상대를 피곤하게 하고 말을 많이 하다 보면 실수가 불가피하다. 자녀들에게 문제가 발생하면 아빠와 상의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60%라고 한다. 그러나 자녀들에게 물어 보면 1% 이하가 그런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시니어들은 자신이 신식 아빠라는 환상에 젖어 있지만, 그래봤자 구세대라는 것이다. 그러니 소통이 될 리가 없다.
행복한 성문화대표 배정원씨의 글은 늘 재미있다. 아직도 남자들도 입에 담기 꺼려하는 성생활 이야기를 여자가 하고 있어서 눈길을 끈다. 미인이면서 늘 웃는 인상에 긴 머리를 하고 있어 젊어 보인다. 여자의 입장에서 성에 대한 얘기를 풀어 놓아 남자들에게 여성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사랑과 섹스, 로맨스에는 은퇴가 없다’며 지속적인 성생활을 주장하고 있다. 섹스를 하면 좋은 점은 면역력 강화를 비롯해서 상당히 많은데 시니어들은 오히려 성생활 중단 및 기피로 갈등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섹스를 하고 나면 상대방의 성 에너지가 내 몸 속에 7년이나 머문다는 주장도 눈길을 끈다. 성생활은 시니어들의 고민 중 큰 요소이긴 하다. 몸이 예전 같지 않은데다 배우자마저 등을 돌리고 있어 고민을 풀 수 있는 환경이 점점 나빠지고 있는 것도 큰 문제이다.
최광철- 안춘희 부부는 90일 동안 유럽 5개국 3,500km을 자전거로 횡단했다. 원주시 부시장까지 역임한 사람이다. 스마트폰과 구글지도 덕분에 초행길을 무사히 완주한 것이다. 시니어들의 버킷리스트에 여행은 빠짐없이 들어간다. 그래봤자 여행단 따라 3박 4일 정도 쉬고 오는 정도의 여행일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한꺼번에 화끈하게
‘50년의 무뎌진 칼날을 다시 세우는 시간’, ‘꼰대를 졸업하는 것이 목표였던 수업’, ‘남편을 후배로 만들고 싶은 학교’. 서울50플러스 재단이 운영하는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인생학교 졸업생들의 반응이다. 겉치레로 끝나는 은퇴 수업이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서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는 교육의 현장, 그곳의 중심에 정광필(鄭光弼·60) 학장이 있다. 가르치는 것이 아닌 같이 배우고 성장해나가는 즐거움이 더 크다는 정 학장의 인생 배움터를 찾아갔다.
2015년 SBS 다큐멘터리 에서 소위 문제아로 낙인찍힌 아이들에게 진정성 있는 교육을 통해 새로운 길을 인도했던 그가 이번엔 베이비붐 세대의 인생 2모작을 위한 교육자로 나섰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가르치는 학생들이 10대에서 50대 이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국내 최초의 도심형 대안학교인 ‘이우’의 초대·2대 교장으로도 지냈던 그는 여전히 세상을 따뜻하게 하는 참교육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다.
“ 때는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했는데, 그때 주안점을 둔 것이 ‘어떻게 아이들 스스로 깨어나게 할 수 있을까?’였어요. 고민하던 끝에 희곡 을 가지고 교육연극을 해보기로 했죠. 연극교육이 아닌, 연극을 매개로 한 교육연극이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운명을 거역하고 여러 고난에 직면하는 내용인데, 결국 그 이야기를 통해서 ‘나’를 찾아가는 게 목적이었죠. 다행히 결과가 좋았는데, 그 과정을 지켜본 어른들이 ‘이거 우리도 한번 해보면 정말 좋겠다’고 하는 거예요. 사실 중·장년기야말로 나는 누구이고, 무엇을 좋아하고, 내 운명이 뭔가를 고민하는 때잖아요. 그들에게도 이러한 교육이 긍정적인 효과를 거둘 수 있으리라 판단했죠. 그때의 생각을 구체화한 것이 바로 50플러스인생학교입니다.”
지난 인생에서 뺄 것, 앞으로 인생에서 더할 것
학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교육을 하지만 책상에 앉아 하는 수업은 극히 일부다. 그보다는 워크숍 형태의 활동이 주를 이룬다. 인생학교에 참여한 이들이 스스로 주인의식을 느끼고 변화해나가길 바라는 의미에서다.
“이들에겐 강의가 필요한 게 아니에요. 그동안 살아온 삶 자체로도 이미 훌륭하죠. 새로운 걸 배우는 것보다는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잘 끄집어내는 과정이 중요해요. 그동안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직장이나 가정을 위해 달려왔는데 이제 와 보니 막연해져버렸잖아요. 그렇지만 이미 오십 넘게 살았으면 사람이 잘 안 바뀌거든요. 속에서는 고민이 많지만 드러내기 어렵고, 그런 미묘한 차이를 뛰어넘는 게 강의 하나 듣는다고 해결되지는 않죠. 길게 호흡하면서 깊이 있는 교육적 접근을 해야 한다고 느꼈어요.”
단기적인 자극보다는 내재해 있는 열정을 서서히 끌어올리는 과정에 초점을 맞춘 교육은 총 10주 동안 이루어진다. 학교라는 틀 안에서 학장이라 하면 권위적인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그는 이러한 인식부터 타파하고자 했다. 불필요한 구색 맞춤식 교육이나 의전을 없애고 알맹이 중심으로 가자는 게 그의 방침이다. 경직되고 부자연스러웠던 벽을 허물고 다가가니 학생들도 서서히 자신의 교육활동에 몰입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의를 들으러 온 수강생이 아니라 당사자 입장이 돼야 해요. 선생님의 가르침이나 이끌음보다 자신이 중심이 돼서 수업에 참여하는 게 훨씬 효과적이거든요. 수업이 내 것이 되고, 내 학교가 되고, 그러다 보면 정말 내가 뭔가를 풀어나간다는 느낌이 들죠. 그 느낌을 가져야 즐거운 변화가 시작되는 거예요. 중·장년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있지만 대부분 강의 중심이잖아요. 명강사가 와서 멋진 이야기를 하고 가요. 그러면 일단 느낌이 좋죠. 느낌은 좋은데 그래 그럼 그다음엔? 이런 문제가 남잖아요. 느낌만 주고 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삶을 바꿔 갈 수 있는 과정이 뒤따라야죠.”
인생학교에서는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결 방법으로 ‘커뮤니티 활동’을 제안한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찾고 이를 함께할 수 있는 커뮤니티를 구성함으로써 아이디어와 힘을 얻고, 이를 토대로 실질적인 활동이 이어지게끔 지원하고 있다. 그의 바람대로 학생들이 스스로 자기 교육에 열정을 보일 수 있었던 건 입학 서류에 함께 제출했던 ‘마음 준비서’가 큰 역할을 했다.
“정원이 60명인데 선착순으로 뽑지 않아요. 그 대신 두 가지 질문을 하죠. 첫째, 지난 삶에서 뺄 것은 무엇인가. 둘째, 앞으로의 삶에서 더할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각각 A4용지 반 페이지씩 쓰게 하는데 이 과정에 부담을 느껴서 포기하는 사람도 꽤 있어요. 덜컥하는 거죠. 그러나 이 질문은 입학할 때뿐만 아니라 졸업하면서도, 그 이후에도 인생에서 다시 묻게 되는 질문이기도 해요. 이걸 ‘마음 준비서’라고 하는데 이 한 장을 쓰고 나면 교육에 참여하는 결의가 달라집니다. 내가 이곳을 통해서 뭘 얻고자 한다는 게 더 분명해지는 거죠. 어떤 교육도 마찬가지예요. 마치 소비자처럼 짜인 프로그램을 듣는 것에 목표를 두는 게 아니라 정말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게 무엇인지를 알고 발견해나가는 게 중요해요.”
우리가 달라져야 우리 사회가 달라진다
마음 준비서를 보면 알 수 있듯 인생학교에서의 수업은 결코 시간 때우기식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그만큼 밀도 높은 수업으로 차곡차곡 배움의 보람을 채우는 학생들이다. 혹여나 새로운 교육 방식에 불만을 품거나 힘들어하는 이는 없을지 궁금했다.
“이러한 교육시설과 프로그램이 있다는 것을 알고 지원한 분들은 이미 어느 정도 준비가 된 분들이죠. 거기에 마음 준비서까지 쓴 덕에 의욕이 더 생겨 수업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니 큰 어려움은 없어요. 오히려 이런 교육에 관심이 없거나 잘 모르는 분들이 염려스러운 거죠. 그런 분들에게 말로는 설득이 어려울 것 같아요. 그보다는 이곳을 거쳐 간 졸업생들이 자신의 변화된 삶을 보여줄 때, 그 주변 사람들이 관심을 넘어서 한 발을 내딛게 되겠죠. 이런 현상이 널리 퍼지면 좋겠지만, 처음 가는 길인 만큼 늘리는 데 연연해하기보다는 제대로 확실히 다져나가야 그 의미가 분명해질 것 같아요. 그래야 진심이 전파되고 그렇게 스스로 변화하고자 인생학교에 문을 두드리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겠죠.”
정 학장은 인생학교 졸업생들이 또래뿐만 아니라 젊은 세대에도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 함께 성장할 수 있도록 협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를 비롯한 베이비붐 세대의 에너지가 아직 여실히 남아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사실 베이비부머를 중심으로 한 우리 중·장년층은 많은 걸 가진 세대예요. 능력적으로도 그렇고, 그동안 살아온 경험도 풍부하고, 경제력도 있는 편이고, 건강도 좋고. 게다가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우리 사회를 여기까지 끌어왔고, 세상을 한번 바꿔본 민주주의에 대한 기억도 가지고 있어요. 오히려 내 능력은 이만큼 있는데 세상은 날 알아주지 않는다는 울분을 느끼기도 하죠. 그런 분들이 뭔가를 다시 하겠다고 마음먹었을 땐, 어느 세대보다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상으로부터 얻은 바가 많을 거 아녜요. 이제는 어깨에 힘을 좀 빼고 그동안 누린 혜택을 사회에 나누고 힘을 보태야죠.”
중·장년층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하는 형태의 활동으로 인생학교에서는 연극이나 독립영화를 만드는 청년을 돕는 커뮤니티가 생겨났다고 한다. 정 학장은 이러한 세대 간 교류를 통한 긍정적 영향이 우리 사회를 따뜻하게 만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젊은 친구들은 아이디어는 풍부하지만 그것을 구체화하는 네트워크나 능력이 부족하잖아요. 중·장년 세대는 그런 부분을 도와줄 수 있는 입장이란 말예요. 여기서 도와준다는 개념은 전적으로 책임지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와주는 위치에 서는 것인데 그게 참 어렵죠. 그러나 시간은 충분하잖아요. 호흡을 길게 가다듬고 뜻이 맞는 사람들을 만나서 젊은 친구들과 어려운 이들을 위해 살다 보면 점점 보람이 쌓일 거예요. 인생학교도 그런 점에서 새로운 문화의 흐름을 형성해내는 주체를 만들고, 그들의 역할에 큰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도울수록 덜어지는 상처, 더해지는 온기
그는 중·장년 세대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강조하면서도 철저히 돕는 입장에 서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는 정 학장 자신에게도 해당하는 충고다.
“인생학교를 찾아오시는 분들에게 ‘여러분이 이 학교의 중심이고 주인이다. 당사자가 돼야 한다, 나는 그저 도울 뿐이다’라고 이야기하거든요. 그런 관점을 가지고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진행하면서도 여전히 늘 피할 수 없는 게 바로 ‘가르치려 드는 행동’이에요. 교육자로서 자꾸 뭔가 멋진 말을 하려고 하고, 당위를 내세우고…. 그걸 한마디로 꼰대라고 하죠. 나는 꼰대처럼 보이고 싶지 않고 그걸 벗어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늘 실천해왔지만 여전히 그런 행동이 남아 있어요. 그들이 그 누구보다 에너지가 넘치고 잘해낼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손을 보려고 한다는 거죠. 철저히 돕는 위치에 서려고 늘 신경을 쓰는 데도 여전히 부족하다는 걸 느끼고 있어요.”
가르치는 것이 아닌 돕는다는 말을 자주 강조하는 정 학장은 인생학교의 학생들을 ‘학생’이라고 부르지 않는다고 했다. 그보다는 함께 배우고 성장하는 인생의 ‘동료’라는 표현이 더 좋다고. 앞으로 한 10년 정도는 동료들을 돕고, 동료들과 함께 세상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그에게 ‘도움’이라는 행위가 주는 의미는 남달랐다.
“돕는다는 거는 내가 남을 돕는 건데 사실은 도움을 받는 상대보다 내가 더 큰 걸 얻어가는 것 같아요. 남을 도울 땐 뭐랄까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본성을 자극하는 듯해요. 우리 세대를 보면 세상이 불쾌하고 화가 치밀고 그러면서도 상처받고 자존감이 떨어져 있거든요. 그런 분들이 누군가를 돕다 보면 순수한 마음이 되살아나고 그동안 억눌렸던 감정이 풀리면서 굉장히 여유로워져요. 그러면서 자존감도 올라가고 그윽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죠. 그런 변화를 느낄수록 이웃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사회도 점점 따뜻해져요. 그래야 좀 살 만한 세상이 되지 않겠어요?”
△ 50플러스인생학교 신청 및 문의
서울시50플러스 서부캠퍼스 sb.50campus.or.kr 02-372-5050 서울시 은평구 통일로 684. 다가오는 3월 봄 학기를 개강한다(중부캠퍼스도 개강 예정). 신청하는 커리큘럼에 따라 수강료가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