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뗀석기가 뭐예요?”
쉬는 시간에 들어온 질문이다. 우리가 학생이었을 때는 구석기시대의 도구인 ‘뗀석기’를 ‘타제석기’로 불렀다. 성년을 훌쩍 넘은 학생이 대부분이라 나오는 질문이다. 답을 해드리며 빙긋 웃음이 난다.
서울시 평생교육진흥원 주관의 재능나눔학교에 ‘차이나는 중국사이야기’ 강좌를 개설하고 6월 27일 첫 강의를 진행했다. 수강 신청한 25명이 모두 모였다.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아 반가우면서도 부담이 된다. 많은 사람을 두고 하는 강의는 오랜만의 일이라 살짝 떨린다.
중국은 제2의 경제 대국이며 우리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 중국에 대한 이해를 높여 협력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이웃인 그들과 지혜롭게 공존하고 발전할 방안을 모색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개설한 강의다.
총 5회 중 첫 수업인 오늘의 주제는 ‘중국문명의 발생’과 ‘춘추전국시대’. 강의실을 메운 수강생을 보니 어떤 동기로 오셨는지 한 분 한 분 궁금하다. 40대부터 70세가 넘어 보이는 분까지 나이대는 다양하고 남녀 비율은 비슷하다. 강의 도중에 던지는 질문에 대답도 잘하시고 고개도 끄덕여주셔서 다행이었다.
중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친 경험을 나누기 위해 개설한 강의이다. 꼬박 2시간을 서서 수업하니 힘은 들었지만, 보람은 한 아름이라 뿌듯하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들이 사실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인문학에서다. 자주 인용되고 너무 잘 알려진 작품에서 더 그렇다.
한국 뿐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정치인들의 필독서라고 알려진 삼국지다. 삼국지는 광활한 중국대륙이 무대고 무대 위에 오른 국가의 수가 많다. 복잡미묘함이 아마도 현대 국제사회의 모델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외교, 군사전략상의 이론, 실전에서 사용 할 만한 작전들의 고전이 될 수가 있는 모양이다. 오래 전부터 권력투쟁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은 삼국지를 여러 번 읽고 배움이 컸다는 고백을 했다, 그 이유로 삼국지는 여러 연령층의 사람들이 재미있게 읽고 소화 할 수 있게 편집되었다 나도 중학교 저학년시절에 이미 만화로 나온 삼국지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 만큼 일찍 내 안에 있었던 이야기다.
책을 읽지 않아도 삼국지의 작으 사건 이야기들은 종종 만난다. 인간관계 또는 정치적이거나 군사적인 사건을 해석하면서 삼국지는 종종 인용되었기에 삼국지의 부분 부분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구체적으로나 전체적으로 아는 삼국지가 아니면서도 등장인물의 특성이나 중요한 승부전환의 사건들은 또 너무 잘 알게 된다.
다른 잘 알려진 걸작들처럼 삼국지도 대하드라마로 선보였다. 디테일하고 쉽게 재미로 이해 할 수 있는 보편화한 인문상식이 되고 있다
삼국지 드라마를 보면서 아무래도 내가 알고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아 이상하다 싶었다. 지금쯤은 등장할텐데 할텐데... 대강의 이야기는 내가 대충대충 기억하는 그대로인데 나와야 할 인물들이 나오지를 않는다
10권으로 된 이문열의 초한지가 내 손에 들어왔다 한 두 권 읽으면서 초한지에 정작 내가 알고 있는 삼국지의 등장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음에 깜작 놀랐다. 나는 삼국지와 초한지를 범벅으로 알고 있었다 400년의 시차를 두고 일어난 역사적인 사건들을 혼돈한 것이다.
이 혼돈에서 놀라웠던 것은 BC200년대의 초한지 사건과 AD200년대의 삼국지 사건에서 사회 무기 전투방법 전략 외교가 별 진전이 있다거나 다르다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다. 그 시대는 400년 동안 그렇게 유유히 흐르는 황하처럼 사람들의 사회도 변함이 없었나보다.
놀랍고도 서글픈 사실은
내가 중국역사를 꽤 많이 알고 있음을 발견했다. 이웃나라이고 어쩔 수 없이 역사적으로 얽히었으니 우리 역사를 알면서 부수적으로 아는 역사로 중국역사를 잘 안다면 당연하다 그렇지 않고 많은 부분이 중국역사 자체로 안다면, 내 나라역사보다 더 잘 안다는 면 그건 왠지 그리 달갑지 않다. 그 쉽고 아름다운 한글을 두고 한문을 중시하였던 조선의 사회적 학문적인 태도가 지금도 중국고전을 즐겨 인용하는 분위기를 만들고 있다.
아시아채널을 통하여 중국사극드라마를 시청한다. 그 시대의 우리니라에서는? 하는 질문을 곧잘 던진다. 중국사는 단편적이고 간헐적인데 비하여 우리 역사는 선후 시간대가 정확한 일목요연함을 알게 된다. 조금은 필자의 자부심에 위로가 된다. 그 일목요연함은 수업시간의 체계적인 공부와 시험제도를 통과하면서 한 두 번 쯤 정리한 지식이라 그럴 수 있다.
삼국지도 초한지도 아닌 혼합된 내용들은 유명세를 탄 책이라 개연으로만 안 엉터리 지식이었다.
이번 호부터 우리의 역사로 돌아가자. 한국사에서 ‘최대의 위기’를 꼽는다면 어떤 사건일까? 한 국가의 역사에서 ‘최대의 위기’란 일반적으로 국가멸망을 말하겠지만 보다 높은 차원인 민족말살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의 역사에는 고대로부터 고구려의 수-당 전쟁, 몽고의 고려침공과 지배, 임진왜란, 한일 강제합방, 6·25전쟁 등등...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필자는 신라의 당에 대한 항쟁을 꼽는다. 1950년대에 중학생이었던 70대 중반 이상은 이 시대의 이야기로 국어교과서에서 유치진(柳致眞) 극본 ‘원술랑’을 읽었을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국가가 멸망하거나 외세에 종속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한민족 자체는 말살되지 않았다. 국가를 멸망케 한 일본의 강제합방이 100~200년 지속되었다면 민족말살로 이어졌을지 모른다. 그러나 123년 간(1795~1918) 국가가 없었던 폴란드도 “국가는 사라졌지만 민족은 영원하다”고 말했다. 일단 민족적 정체성이 형성되면 완전 동화나 민족말살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말이다.
‘한민족’이라는 개념은 신라의 삼국통일을 계기로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만주와 한반도에 산재했던 국가들을 ‘지리적’ 인접성을 기준으로 중국 정사(正史)에서 ‘조선’이라는 항목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 간에는 언어, 풍습에서 유사성이 있었던 것 같다. 중국 남조 양(梁, 502~557)의 역사서인 ‘양서(梁書)’에는 신라인과 중국인 간의 대화에 대해 ‘(중국과 교류가 잦은) 백제인을 기다려 통했다.’고 하니 백제와 신라 간에는 말이 통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어의 유사성에도 불구하고 동일 민족이라는 관념은 당시 존재하지 않는다. 통일신라 이후 같은 민족, 한민족이라는 관념이 형성되기 시작한다. 신라의 대당항쟁 시기는 일반적으로 668년 고구려 멸망 이후 676년까지 8년으로 잡는다. 그러나 당의 병탄 야욕과 신라의 저항은 660년 백제 멸망 직후 시작되니 16년간이라 해야 할 것이다. 신라는 당시 세계 최대 강국이며 중국사를 통틀어 최고의 전성기를 맞은 당을 상대로 때로는 전쟁으로 강력하게 맞서며, 때로는 외교술로 굽히면서 갈등을 능수능란하게 요리하여 오늘날 남북한 휴전선과 유사한 선에서 ‘한민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당시의 기록들을 읽어보면 우리가 성당(盛唐)시기 중국에 대항할 수 있을 정도로 지적으로나 군사전략 면에서 성숙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연히 신라의 대당항쟁은 손쉽게 얻어진 것은 아니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 곧 바로 백제인들과 신라를 반목시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수법으로 신라를 견제했다. 백제 멸망 2개월 후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곧 이어 당에 포로로 끌려간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을 귀국시켜 웅진도독으로 임명, 신라와 동등한 자격으로 맹약을 맺게 하는 등 갈등을 부추긴다.
신라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도 당이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게 넘겨준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고 삼국을 모두 차지하려는 야심을 드러내자 드디어 행동에 나서게 된다. 당이 서쪽에서 토번(吐蕃)과의 전쟁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670년 3월 압록강을 넘어 당군에 선제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라군이 당군을 직접 공격한 것은 아니었다. 신라에 귀순한 고구려 유민 부대가 당에 소속된 말갈군을 공격한 것이다. 말갈은 과거 고구려에 부속된 민족이니 고구려의 응징은 당연한 것이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당군이 직접 나서자 곧 물러나서 ‘지켰다.’ 당군과의 직접 대결은 회피한 것이다. 정치적 수단으로 군사적 갈등을 이용할 때는 낮은 단계부터 갈등을 고조시킨다(escalate). 갈등을 하나의 연속선상에 놓고 볼 때 중간단계가 많을수록 대화와 타협의 기회가 많기 때문이다. 당을 상대로 한 교전도 대규모 전투보다는 분쟁을 ‘국지화’시켜 실리를 취하면서 이를 기정사실화하는 전략을 택한다. 동시에 여전히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고 있으며 백제라는 ‘악당’이 당과 신라를 이간질한다는 메시지를 지속적으로 당에 전달한다. 반면 고구려 왕족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고구려 유민을 포섭한다. 주적을 단일화시키면서 부차적인 적[副敵]과 연합하는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략인 것이다. 이같이 다양한 신라의 전략에 대해 당은 분노한다. 그러나 고구려 옛 영역인 요동이나 돌궐과의 서북 변경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신라 문제는 적절한 선에서 타협해야 했다. 정치적으로는 서신을 통해 신라의 ‘배반’을 책망하고 문무왕을 ‘파면’한 뒤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봉한다. 조공관계에서 왕의 파면은 최고의 징벌이라 할 수 있다.
군사적으로는 672년 중반 석문(石門, 황해도 서흥 혹은 경기도 화성군)에서 신라군을 격파하여 신라 전체를 공황상태에 빠트린다. 이후 전투에서 양측은 일진일퇴하며 항쟁 후반기에는 신라가 소규모 전투에서 ‘18차례’ 승리하지만 약자의 승리는 인적·물적 자원을 고갈시킬 뿐이었다. 당 역시 서북 지역과 만주에서 군사령부 격인 ‘안동도호부’를 매년 이동할 정도로 정세가 불안하자 신라의 ‘사죄사절’을 맞아 문무왕을 ‘용서’하는 선에서 분쟁을 매듭짓는다.
신라는 최대 목표는 아닐지라도 ‘고구려 남쪽 국경’인 임진강 유역을 포함한 영역을 확보함으로써 당의 위협을 방어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를 확보했다. 당으로서도 이 선에서 신라의 북진이 저지된다면, 당에 대한 위협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간주했을 것이다. 어느 일방의 완전한 승리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타협의 산물인 것이다. 60년이 지나 문무왕의 손자인 성덕왕 35년(736)에 이르러 당이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을 신라에 넘겨준다. 신라의 북진은 또 다른 변수인 발해의 등장에 기인한 것이다.
신라의 대당항쟁은 삼국통일 이후 ‘한민족’의 정체성을 구체화되려는 여정의 출발점에서 부딪친 시련이었던 것이다.
>> 구대열 (具?列) 이화여대 명예교수
서울대 영문과 졸. 한국일보사 기자. 런던정경대 석·박사(외교사 전공).
외교안보연구원 교수, 이화여대 정외과 교수, 통일학연구원장 등 역임.
저서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