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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쓸모’에서 밀려난 50대 여성의 이야기…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하여간 그렇대. 우리 나이가 한참 늙느라 바쁜 나이래.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면서 고장 나는 데 생기고, 마음은 공허하고. 살아 뭣하나, 싶은 나이라는 건데. 그게 당연한 마음이라니까 너무 난감해하지 마.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49p ‘피하고 싶은, 그러나 엄존하는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소설가’(제9회 김현문학패 심사평) 김이설의 신작 소설이 출간됐다. 2006년 등단 이후 18년간 꾸준히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가족에 대해 질문해온 그가 이번에는 50대를 앞둔 난주, 미경, 정은, 세 친구의 강릉 여행을 통해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난주, 미경, 정은은 1975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오랜 친구지만 각자 사느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사는 거리가 먼 만큼 마음도 멀어진 무렵이었다. 매번 여행 한번 가자는 말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강릉에 가자고 한 건 난주였다. 늘 그렇듯 말뿐일 게 뻔했다. 혼자 노모를 모시는 미경은 하루 시간 빼는 것도 쉽지 않다. 모두 속으로는 올해도 여행은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데, 불쑥 미경이 “가자!”고 호응한다. 강릉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일, 세 친구는 서울역에서 만난다. 강릉 여행은 스물넷 이후 25년 만이고, 셋이 다 함께 모인 건 난주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7년 만이었다. 낯선 것도 잠시, “왜 이렇게 부었어? 살찐 거야, 아픈 거야?”, “넌 왜 이렇게 늙었니?”라며 서로 장난스럽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X세대, 신세대, 수능 0세대. 한때 이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싱그럽고 통통 튀고 정의할 수 없는 젊음 그 자체로 예쁜 시절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요실금과 고혈압, 탈모 등 다양한 신체 변화를 겪고 있다. 세 명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펜션을 잡고, 여행 내내 잔뜩 먹고 마신다.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 장칼국수를 먹거나 허난설헌의 생가도 가고, 커피도 여섯 잔씩 시켜 나눠 마시고, 질리도록 술을 마신다. 이렇게 셋이 모이는 날이 또 없을 거라는 듯 최선을 다해 즐긴다. 그간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부딪치는 구석도 많다. 기혼인 난주, 정은과 미혼인 미경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고, 투잡을 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정은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인 난주는 자주 투덕거린다. 싸움을 푸는 방식은 간단하다. 마시고, 웃고, 푼다. 술 한잔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누다 보면 당장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도 괜찮다. 이들의 여행 또한 술 한잔과 같다. 앞으로 똑같은 삶이 반복돼도 버틸 수 있는 잠시의 안도, 찰나의 틈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을 견디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김이설 작가의 사이 “5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생각보다 없어요. 각자의 세계와 인생이 있을 텐데 그저 엄마, 아줌마, 며느리, 딸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표지 속 거위처럼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는 2023년 6월 초, 김이설 작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하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무료 소설 연재를 구독할 독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을까지 경장편소설을 마감하려면 스스로를 강제해 진도를 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신청자들의 메일 주소로 매주 1회씩, 원고지 30매 분량을 전송하는 ‘소설가의 생초고 메일링’,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원동력이었단다. “재앙이 매주 제법 많은 양의 원고를 써야 하는 저에게 해당하는 말인지, 정리 안 된 소설을 읽게 될 메일링을 신청한 분들인지 모호했지만 일단 썼어요. 어떤 노래를 들으며 무슨 마음으로 작업했는지도 함께요. 응원과 애정이 담긴 답장은 물론, 바다 사진을 꾸준히 보내기도 하셨어요. 두 번의 펑크를 내면서도 ‘무리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3개월 동안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강릉으로 떠난 중년 여성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의 주인공 난주와 정은, 미경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감 가는 구석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했다. 노안이 찾아왔지만 ‘안 보면 안 봤지, 돋보기라니’라며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녀들이 독립할 시기에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요실금이 의심되는 상황에도 병원 가는 것을 미루는 등 낯선 몸, 낯선 자신을 만나며 혼란을 겪는다. “50대가 되면 몸 여기저기가 하나씩 고장 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설익은 상태인 것 같아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때랄까. 아직 힘은 있는데, 40대보다는 ‘쓸모’라는 영역에서 다소 밀려났다고도 느껴요. 우울하고 주눅이 들죠. 하지만 다들 각자만의 큰 세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걸 풀어내고 싶어도 세상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겁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걸 한꺼번에 터뜨리려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닐까요. 난주와 정은이, 미경이 같은 ‘아줌마’들은 쓸쓸함을 견뎌내고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중인 거예요.” “세상에 안 힘든 이십대가 어딨니? 이십대는 그냥 이십대인 것만으로 힘든 거야.” 미경은 끝을 내지 못했던 학생운동과 이뤄질 수 없었던 성희 언니와의 관계를, 정은은 일도 연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세상의 패자가 된 기분에 빠졌던 나날을, 난주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아줌마로 전락해버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셋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97p 삐거덕거리는 몸과 마음을 안고 세 친구는 강릉으로 떠난다. 김 작가는 강릉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년배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에 배경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1970년대 대학가에 MT 문화가 퍼지면서 강원도는 그 시절 학생들에게 낭만의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강릉은 세 친구의 젊은 시절이 켜켜이 쌓인 상징적인 곳입니다. 저 역시 처음으로 부모님을 속이고 첫사랑과 여행한 곳이에요. 소설의 원제도 ‘강릉에 가자’였어요.” 등장인물들은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카페를 찾거나, 관광지를 들르려 애쓰지 않는다. 안목해변 주변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건 술이다. 과거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과 오해, 깊어진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다투지만, 담백한 건배와 함께 목구멍으로 털어 넘긴다. “여행 왔다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잖아요. 술에 잔뜩 취해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들이 인연을 이어온 25년이 짧은 시간이 아닌 데다 처한 환경이 너무도 다르니 적당히 술 한잔으로 흘려보내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겠죠. 그래야 아프고 잊고 싶던 기억 위로 이번 여행이 씌워질 테고, 또 살아가니까요.” 앞으로 안도할 우리 김이설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인생을 알아차리게 된다’(110p)는 강릉의 커피 명장 박이추 선생의 말을 빌렸다. 자녀와 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면서 사회적인 위치까지 공고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고단하더라도, 살다 보면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단다. “흔히들 특정 시절이 가장 찬란했다 말하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실수했던 순간이 자꾸 생각나고 숨고 싶어져도 어느 날부터는 되레 아름답게 여겨져요. 한동안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글을 전혀 못 읽고 못 쓰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극복했지만요. 작가에게 그건 죽음과 같은 건데요, 등단하고 10년 동안 육아와 원고 작업을 병행했더니 지쳤던 것 같아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날카롭고 거칠던 문체가 둥글둥글하고 편해졌어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도하고 감사하면서 계속 쓰다 보면 모르는 새 영글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쓸쓸함도 곧 잦아들기를 바라요.”
- 2024-07-22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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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드뉴스] 커피 명장 박이추의 자기평가
- 아직 맛있는 커피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스스로 만족이나 납득이 안 돼요. 그래서 지금도 커피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계속해야만 합니다. - 박이추, 커피 명장 (시니어 매거진 2024년 4월호 인터뷰 중) 에디터 조형애 취재 손효정 디자인 유영현
- 2024-05-09 0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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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에 미(美)쳐 조연을 자처한, 명장 박이추
- 가만히 서 있는 듯하지만, 그의 손과 눈과 귀는 바삐 움직인다. 손목으로 주전자를 돌리며 커피를 내리고, 필터로 빠져나오는 커피 방울을 눈이 빠지게 지켜본다. 방울이 컵에 또르르 떨어져 쌓이는 소리를 듣는다. 박이추(74) 명장은 지금 커피와 대화 중이다. 커피 생각에 하루 24시간이 모자란다는 그는 가끔 꿈에서도 커피를 만난다. “이런 제가 비정상이라거나 미쳤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죠. 그런데 미치지 않으면 맛있는 커피는 세상에 나올 수 없습니다.” 강원도 강릉시 사천면 ‘보헤미안박이추커피공장’에서 커피업계의 큰어른 박이추 명장을 만났다. ‘바리스타 1세대’ 1서 3박(서정달·박원준·박상홍·박이추) 가운데 유일하게 현업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국내에 드립커피 대중화를 이뤄낸 인물이다. 박 명장은 어른이라는 표현에 손사래를 치며 “바리스타 1세대로 불리는데, 짐을 메고 있는 기분이 든다. 부담이 아닌 숙제를 안고 매일매일 살아가는 것 같다”라고 생각을 전했다. 박이추 명장은 매주 목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본점에 출근한다.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쉬는 까닭은 손목과 팔을 우려해서다. 하루에 300잔의 커피를 만든 적도 있다는 그는 현재도 하루 100여 잔을 손님에게 대접한다. 바리스타로 일한 지 40년이 되어가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커피가 탄생했을까. 그럼에도 명장은 아직 커피에 대해 다 깨우치지 못했노라고 겸손한 고백을 한다. “몸, 마음, 커피가 하나 될 때 맛있는 커피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합니다. 커피를 만들 때 어떤 생각을 하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사실 저는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그저 맛있는 커피를 만들고자 최선을 다하죠. 그러나 아직 맛있는 커피를 찾지 못한 것 같습니다. 내가 만든 커피가 맛이 없다거나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스로 만족, 납득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지금도 커피 공부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계속해야만 하죠. 내가 발전해야 커피 맛도 발전할 수 있으니까요.” 서울, 강릉, 그리고 울진 “커피를 배우지 않았다면 목장을 운영하고 있겠죠?” 갑자기 웬 목장이냐 하겠지만, 박이추 명장의 본래 꿈은 낙농인이었다. 재일교포인 그는 1974년 한국으로 와 경기도 포천에서 2만 5000평의 목장을 일궜다. 이후 경기도 광주, 강원도 원주에서도 소를 키웠지만, 모두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꿈을 이루지 못한 그는 다시금 도시에 살고 싶어져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려면 기술 하나쯤 갖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배운 것이 바로 커피 만드는 방법이다. “외식 산업에 관심을 갖고 여러 가지를 배우다가 우연히 커피를 만났습니다. 그때만 해도 커피에 대한 마음이 지금처럼 크지 않았죠. 커피는 커피콩 수확, 로스팅, 핸드드립으로 내리기까지 여러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커피나무를 볼 때가 가장 좋더라고요. 아무래도 자연을 좋아하나 봅니다. 2018년 라오스에 6000평짜리 커피 농장을 세웠습니다. 보통 3000평에 2000~3000그루를 심는 편입니다. 코로나 후에 못 가봤는데 나무들이 잘 있는지 궁금해서 가보고 싶네요.” 1988년 다시 한국에 돌아온 박이추 명장은 서울 혜화동에 ‘가베 보헤미안’을 열었다. 이후 고려대 인근인 안암동으로 옮겨 10년을 보냈다. 믹스커피가 커피의 전부인 줄 알았던 1990년대. 박이추의 핸드드립 커피는 신선한 충격을 안겼다. 새롭고 고급스런 커피 맛이 입소문 나면서 카페에는 손님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처음 시작했을 때 카페가 잘 됐으면 좋겠다는 희망은 컸지만, 정작 커피 만드는 실력은 부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많은 손님을 만났지만, 서울에서 카페 할 때 만난 분이 가장 기억에 남아요. 건강이 좋지 않은 분이었는데, 의사가 커피를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한 달에 한 번은 저를 찾아왔죠. 그 정도로 커피를 좋아하셨기에 커피 내리는 입장에서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온전히 커피에 집중하고 싶었고, 바다를 보고 싶었던 박이추 명장은 이번에는 강원도로 내려갔다. 강원도 곳곳을 전전하던 그는 2004년 지금의 본점인 카페를 차리며 강릉에 정착했다. 그랬더니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고 싶다며 강릉까지 찾아오는 일이 벌어졌다. 거기에 더해 2009년 강릉 커피축제가 개최되면서 강릉은 현재 커피의 메카가 됐다. 이러한 사연으로 강릉 커피의 원조로 통하는 그는 “저는 그냥 할 일을 열심히 했을 뿐”이라며 겸손해했다. ‘보헤미안박이추커피’는 서울에 두 곳(상암동·여의도), 강릉에 세 군데 있다. 연곡면의 본점, 사천면의 커피공장, 그리고 아버지의 추천으로 커피를 배운 아들 박태철 바리스타가 운영하는 경포점. 이처럼 강릉과 뗄 수 없는 관계인데, 박 명장은 2025년 경상북도 울진군으로 옮겨갈 계획을 갖고 있다. 그곳도 그가 가면 커피로 유명해질지 모를 일이다. “강릉은 제게 특별한 곳이고 축복의 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울진으로 가려는 이유는 강릉이 싫어져서가 아니에요. 서울을 떠나왔던 것과 같은 이유로, 사람이 아닌 커피와 대화하고 싶어서 조용한 곳을 찾아가는 겁니다. 커피와 가까워져야 하니까요. 그런데 내년이면 삼척~ 울진~포항을 잇는 철도가 개통된다고 해서 조금 걱정입니다. 하하.” 행복을 주는 사람 대한민국은 어느새 커피 공화국이 됐다. 시장조사 회사 유로모니터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1인당 연간 커피 소비량은 405잔으로, 전 세계 소비량(152잔) 대비 두 배 이상 높았다. 박이추 명장은 “현대인에게 커피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다.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커피를 마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라고 말했다. “커피를 마시면서 휴식을 취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고, 생각 전환도 됩니다. 커피가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죠. 저는 하루에 커피를 2~3잔 마십니다. 커피 마실 때도 물론 좋지만, 커피 생각을 할 때가 가장 행복합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에게 맛있는 커피로 행복을 주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제가 만든 커피로 누군가 행복해진다면, 그것이 또 행복 아니겠습니까?” 커피 애호가가 늘어나면서 커피 산업이 활성화된 것은 분명 환영할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듯이, 커피를 돈벌이 수단으로만 보고 업계에 뛰어드는 사람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는 자신의 손을 거치는 모든 커피에 애정을 쏟는 박이추 명장이 가장 우려를 표하는 지점이다. “제게 커피를 배운 제자들도 커피를 돈으로만 볼 때가 있어요. 정말 가슴 아픈 일이죠. 커피로 돈을 벌려고 하면 어떻게 되나요? 마음이 급해져서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카페를 열게 되죠. 커피에 대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무작정 카페를 여는 것은 잘못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카페 사장이기 이전에 바리스타로서 커피의 마음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사랑할 수 있어야 하죠. 저는 사람이 아닌 커피를 위해서 커피를 만듭니다. 그저 주인공인 커피가 빛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이니까요.” 로봇 바리스타의 등장에 대해 박 명장은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커피를 한땀 한땀 장인정신으로 만드는 사람으로서 허무함을 느낄 줄 알았는데, 예상과 다른 반응을 보였다. “AI가 우수하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로봇이 커피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니 신기하다”면서 “맛은 사람만큼 안 날 수 있지만, 일손 해결 등에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로봇 바리스타는 기술의 발전으로 이뤄진 일이지만, 커피로 돈을 벌려는 사람은 마음을 잘못 품은 것이기에 그 점을 질책한 것이라 해석된다. 박이추 명장은 커피를 ‘인생의 동반자’라고 표현한다. 커피를 못 만드는 날은 아마도 자신이 세상을 떠나는 날이라고 덤덤하게 말하면서, 앞으로도 커피를 인생의 친구로 두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박 명장은 어느 책에서 본 ‘맛있는 커피는 당신의 팔자와 운명을 바꾼다’는 문장을 언급하며, “나는 이 말을 믿는다”고 밝혔다. 그 말이 사실이 될 수 있음을 박 명장은 이미 증명하지 않았는가.
- 2024-04-16 0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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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식과 역사 한번에 즐기는 안성 ‘시간여행’
- 여럿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이 즐거운 사람들이 있다. 그런 편이 못 되다 보니 가능하면 이럴 땐 피하고 싶기도 하다. 혼자 혹은 동행 한 명쯤과 다니기 좋은 미술관이나 박물관 관람은 어수선함이나 소음으로 피곤한 상황을 피하기 좋다. 혼자서 자기 속도대로 구경하고 한참씩 멈춰 있어도 뭐라 할 이 없으니 말이다. 동행이 있어도 각자 생각의 방향으로 돌아보고 나서 만나면 된다. 이번에 가본 안성의 한국조리박물관도 그렇게 돌아보기 좋은 곳이다. 조리박물관의 메인 전시관과 요리아트스쿨 교육장을 중심으로 주변의 너른 공원과 잘 정돈된 조경, 예쁜 카페와 식당까지 고루 잘 조성된 테마파크형 박물관이다. 서양요리 100년의 역사를 갖춘 한국조리박물관은 국내 최초이면서 세계에서는 프랑스와 미국에 이어 세 번째라고 한다. 전시관은 국내 서양요리 역사, 조리인, 메뉴 레시피, 식문화 조리단체, 조리기구와 도구, 소스와 향신료, 커피·바리스타·와인·베이커리 등 8개 테마로 구성되었다. 공간 구획에 따라 준비된 각종 자료들이 생생한 역사를 전달한다. 찬찬히 돌아보며 만난 도구 하나하나, 맛과 연관된 역사적 사실이나 작은 소스 하나까지 신기하고 흥미로워서 한참씩 들여다보게 된다. 과거와 미래를 잇는 뜻깊은 관람이다. 이를 이루고자 한 걸음씩 심혈을 기울이며 나아간 이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총 부지 1만 평 정도의 테마파크형 박물관으로, 자연 속에서 관람과 휴식을 함께 할 수 있어서 일석이조다. 이번엔 조용히 혼자 전시장을 돌아보려던 생각을 바꿨다. 키오스크로 입장권을 사서 입장하려는데 안내석에 계시던 분이 말을 건넨다. “해설이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사실 해설을 들으며 볼 생각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괜찮다며 그냥 들어섰다. 그러다가 문득 이곳은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면서 제대로 관람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화해설사로 교육받으신 분답게 자신의 소개를 시작으로 친절한 안내와 꼼꼼한 설명으로 전시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어찌나 성심성의껏 안내를 하시는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연륜이 돋보이는 분이었다. 안내를 마치고 잠깐 이야기를 나누어보았다. “안성시청 소속 문화관광해설사로서 현재 이곳 한국조리박물관에서 파견근무하고 있습니다. 이 지역에서 일하는 문화해설사는 20명 정도인데 우리가 사는 지역을 위한 일이어서 다들 자부심을 가지고 즐겁게 일합니다. 이곳의 문화해설은 팀마다 다르지만 한 번에 한 시간 정도, 경우에 따라 세 시간 한 적도 있어요. 내가 즐거우면 관람객들도 즐겁고, 잘 따르도록 리드하는 능력도 생깁니다. 그런 즐거움이 날마다 여기로 나오게 합니다.” 맡은 일에 자부심이 넘치신다. 청산유수로 설명하는 내용도 귀에 잘 들어오고 구수하기까지 하다. 주어진 일이 즐겁다고 연신 말한다. 유용한 시간으로 하루를 보낸다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 전해진다. “내가 7학년입니다, 하하하. 건강관리만 잘하면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죠. 지금 하는 일이 대가 여부를 떠나서 보람이 큽니다. 문화 관련 일을 접하는 것도, 또 전시관 주변의 자연도 아름다워서 하루하루가 즐겁습니다. 무엇보다 이곳에 오시는 분들에게 도움이 되고, 내 시간을 가치 있게 만들어나가는 것 또한 행복한 일 아니겠어요?” 은퇴 후의 시간을 이렇게 보람찬 나날 속에 보내는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진심 어린 말이다. 시니어들의 일자리 문제는 어제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초고령화 시대를 사는 시니어에겐 안정된 노후나 취미 생활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노후의 경제활동이나 적극적인 사회활동이 필요하다. 심혁주 문화관광해설사님의 말처럼 일이란 건강한 삶을 위해서도 필요하고, 진취적인 삶이 행복을 유지해준다. 마침 한국조리박물관 초대 관장을 맡은 최수근 관장을 만나 잠깐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경희대 교수를 은퇴한 최 관장은 여러 호텔 근무 경력도 지닌 식품학 박사로 실무와 이론을 겸비한 분이다. 특히 ‘소스의 대가’로 불리기도 한다. “대학 졸업 후 요리 일을 열심히 하다가 더 공부하기 위해 파리 르코르동블루로 유학을 갔지요. 그때 처음으로 이런 박물관을 세우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남프랑스 니스에 있는 개인박물관이었어요. 프랑스 요리의 거장 에스코피에 셰프의 기념박물관에서 받은 감동을 오랜 꿈으로 간직해왔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었습니다. 주방 관련 사업을 하는 이향천 대표를 만난 겁니다. 문화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분인데 아낌없는 지원을 해주셔서 한국 최초의 조리박물관 건립이 이루어졌습니다. 요리 분야 원로들이 귀한 자료들을 많이 주셨고 저 또한 모든 것을 쏟아부었죠. 지금도 콘텐츠 발굴이나 행사 진행을 하고, 자문을 얻으며 공부합니다. 요리에 관해서라면 누구든 언제든 이곳에 찾아오시면 도움이 되어드릴 수 있습니다.” 넓은 공원의 자연과 전시관을 돌아보는 그의 시선에 애정이 듬뿍 묻어난다. 바쁜 와중에도 조리박물관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성의껏 이야기해주셨다. 일정 때문에 급히 이동하면서도 끝까지 예의를 다해 조리박물관의 의미를 전해주시는 마음이 와 닿았다. 한국조리박물관에 가면 근현대 요리와 조리의 방대한 자료를 통한 스토리텔링을 마주하게 된다. 조리계 원로들과 한국 조리명장들이 분야별 자문위원단으로 동참한 귀하고 소중한 것들을 가득 만날 수 있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이고 외국의 유명한 박물관이나 요리학교, 셰프들을 방문하고 벤치마킹하며 진행해온 일이다. 이 모든 것이 주방 제조업계의 이향천 대표와 한국 조리업계의 역사를 보존하고 재조명하려는 최수근 관장의 열정이 힘을 합친 결과로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현재 한국조리박물관 1층 기획전시실에서는 ‘대통령의 밥상’이라는 전시를 하고 있다. 청와대 요리사가 들려주는 대통령의 밥상 이야기와 청와대 요리사로서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다. 전시장에는 대통령의 식기가 역사 순으로 전시되었는데 이 또한 전해지는 일화가 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빈 만찬에 일본 도자회사의 그릇을 사용해왔다. 이를 본 육영수 여사가 한국 도자기를 주문 생산했고, 그 뒤로 국빈들에게 당당히 우리 그릇을 내놓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다. 요즘은 가히 요리와 먹방의 시대다. 맛있는 요리를 나누고 누군가에게 알리는 것이 근래의 일만은 아니다. 답답한 도심에서 벗어나 자연 속의 전시장을 둘러보고 맛의 역사에 다가가 보는 시간이 알차다. 조리인들의 철학과 발자취를 돌아보며 흥미로운 요리 세계로 빠져볼 만하다. 안성 일죽면에 가면 봄이 오는 길목에서 맛의 원천을 되새기는 시간을 만날 것이다. 주변에 가볼 만한 곳 서일농원 한국조리박물관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서일농원이 있다. 볕 잘 드는 곳에 자리 잡은 2000여 개의 장독대에서 우리의 장맛이 익어가는 옛 정서를 만끽해볼 만하다. 연못가를 지나 산책로를 걸으며 차분히 사색에 빠져보아도 좋을 듯하다. 코로나19 이후 닫혔던 문이 비로소 올해는 열린다고 한다. 죽주산성 죽산면 쪽으로 조금만 더 달려보자. 시원하게 죽주산성에 올라 봄바람을 맞아볼 일이다. 삼국시대 신라의 북진 과정에서 축조한 성곽이다. 성벽을 따라 걸으며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확실한 기분전환을 할 수 있다.
- 2023-04-21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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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과 죽음의 공간 서오릉으로 떠난 역사 여행
- 조선왕릉은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20기가 남아있다. 이 가운데 능은 42기, 원이 14기, 묘가 64기이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한다. 그 외 왕족의 무덤은 묘라고 한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히 보존된 것은 세계에 그 유래를 찾기가 힘들다. 2019년도 저물어가는 12월 가까이 있는 서오릉을 찾았다. 삶과 죽음, 역사 이야기를 통해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봤다. 홍릉을 통해 본 영조의 삶은 과연 행복한 삶이었을까? 천한 신분인 ‘무수리’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열등의식은 그의 개인적인 삶에 한계를 지우는 원인이 되었다. 배다른 형을 세자로 둔 왕자였지만 금수저가 아니라 차라리 흙수저에 가까웠다. 성장기도 궐 밖의 사가(私家)에서 지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조선의 21대 왕이 된 이가 영조다. 그는 어려서 궐 밖에서 지낸 경험으로 인해 백성을 위한 정치와 검소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많이 알려진 탕평책(비록 실패했지만)과 균역법은 그의 대표적 업적이다. 그 밖에도 쌀이 부족하면 일시적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했고, 가혹한 형벌을 없애기도 했다. 영민한 군주였지만 그는 콤플렉스로 인해 개인적으로 결코 행복한 인생을 살지는 못했다. 먼저 자신에게 지나치게 엄격했다. 오로지 왕으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만 집중한 외골수였다. 일례로 경연을 자주 열었다. 왕위에 있는 동안 역대 최고인 3458회를 기록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자신의 학문 실력을 자랑하기도 하고 신하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밖으로 빈틈을 보이지 않으려는 의도였다. 피곤한 스타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조선의 왕이라는 신분에 얽매였다. 중요한 것은 그에게 왕이라는 신분이 고난을 견디게 하는 자부심이 아니라 권력을 소유하는 기준에 불과했다는 점이다. 그는 정비인 정성왕후에 대해서도 첫날밤에 소박을 놓기까지 했다. 그 이유가 어이없다. 첫날 밤 연잉군(왕이 되기 전 영조의 호칭)이 말하길 “그대는 손이 참으로 곱소”하였다. 이에 대해 정성왕후는 “소첩이 궂은일을 하지 않아 그런 듯하옵니다.” 딱 한 마디 대답했다. 이 말에 그는 궂은일을 많이 했던 자기 어머니 손을 떠올리며 자신을 우습게 여긴다고 생각했다. 그날부터 그녀는 죽는 날까지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이 정도면 거의 병 수준이다. 하지만 그녀는 일국의 왕비로서 끝까지 체통을 잃지 않았다. 남편에게 평생 버림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비와 자식 간의 관계로 인해 마음의 병까지 얻은 그녀가 죽은 후 자리를 잡은 곳이 서오릉에 있는 ‘홍릉’이다. 홍릉은 조선의 능 중 유일하게 한쪽이 비어있다. 원래 영조는 자신이 사망하면 비워둔 오른쪽 자리에 함께 묻혀 쌍릉으로 조성하길 원했다. 하지만 정조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정조는 왜 영조의 말을 듣지 않았을까? 오렌지빛 주황색을 띤 겨울 햇살이 능과 마주 보고 있는 산 정상을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영조의 콤플렉스와 열등의식은 자신의 친아들인 사도세자에 이르러 절정에 달한다. 3살 때 글을 쓰고 읽을 정도로 영특한 이 선(사도세자의 이름)은 태어난 다음 해 세자로 책봉된다. 하지만 성장하면서 두 사람의 사이는 점점 멀어진다. 영조는 아들이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이 선은 무예에 관심이 많고 능통했다. 영조는 자기 뜻대로 행하지 않는 아들에게 점점 더 심하게 압박을 가했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정신병까지 생겼다. 결국, 우리가 잘 아는 세계사에 유례없는 참변에까지 이른다. 사도세자는 홍역을 앓으면서도 사흘 동안 눈 위에 엎드려 영조에게 잘못을 빈 적도 있었다고 한다. 부모가 자식을 엄하게 키워야 한다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영조의 이런 혹독함은 어떻게 보아야 하나. 그는 자식과 공감, 소통한 것이 아니라 소외, 단절한 것은 아니었나. 홍릉 주변을 걸으며 영조를 생각하니 가까이 있는 가족, 사람들과의 관계와 공감에 대해 반성하며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삶을 바라보며 또 다른 나를 통해 지나온 삶에 대해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다. 끊임없이 더 좋은 삶, 더 따뜻한 삶을 향해 노력하는 아름다운 삶의 길을 걷고 싶다. 서오릉은 치유를 통해 새롭게 시작하는 공간 서오릉에는 5개의 능과 2개의 원, 1개의 묘가 있다. 서울의 서쪽인 이곳에 처음으로 조성된 능은 세조의 큰아들이자 성종의 아버지인 추 존 덕종과 그의 비 소혜왕후가 있는 경릉이다. 세조는 그가 지은 죄 때문인지 아들이 두 명이나 20세 때 죽었다. 두 번째 능 역시 세조의 둘째 아들인 제8대 예종과 두 번째 부인인 안순왕후의 능이다. 세 번째 능은 숙종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네 번째 능은 제19대 숙종과 그의 첫 번째 왕비 인경왕후의 능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위에 이야기한 홍릉이 있다. 이번에 돌아본 서오릉은 단순하게 역사적 가치만을 지닌 공간이 아니었다. 51만여 평에 이르는 서어나무 길과 소나무 길이 있는 녹지대는 사색과 사유의 공간이었다. 소나무 향이 흐르는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담벼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삶과 죽음을 만날 수 있었다. 그 찰나에 우리가 진실로 찾고 있는 것은 ‘살아있음의 경험’임을 깨닫게 되고, 살아있음의 황홀함이 느껴지는 순간부터 우리는 행복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그렇게 서오릉은 치유의 공간이었다. 또 그곳의 자연에서는 봄을 위해 동토에 새싹을 피우는 자연을 만날 수도 있었다. 티 없이 화사한 자연의 미소가 거기에 있었다. △교통 지하철: 3호선 녹번역 4번 출구 은평구청 방향에서 광역버스(9701),일반 버스(702A,B) 3호선 원당역 3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구산역 1번 출구에서 광역버스 (9701) 6호선 응암역 2번 출구에서 일반버스 (701A, 702B) 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34-32 2019년 9월 서오릉 앞길이 정비를 끝내고 6차선 대로로 새롭게 길을 열었다. 전 보다 접근성이 아주 좋아졌다. 그러다 보니 요즘 서오릉이 서울 근교의 새롭게 떠오르는 먹방의 성지가 되고 있다. △가볼 만한 식당 ⁕ 대가왕 쭈꾸미 대한민국 요리 명장이 요리하는 곳으로 소문난 이곳의 요리와 메뉴는 퓨전이다. 불 주꾸미의 경우 불맛의 향을 살리면서도 숙주의 아삭함과 파향으로 느끼함을 잡아준 별미다. 식사 후 정원에서 커피도 가능하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307-8 ⁕경성빵공장 주인이 말하는 비법은 신선한 재료와 당일 생산, 당일 판매뿐이다. 그런데도 빵 마니아들에게는 소문이 자자한 곳이다. TEL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서오릉로 406-20 △TIP 정보 ⁕ 탕평책: 당쟁(영조 때는 노론과 소론)을 막기 위해 정치 세력 간에 균형을 꾀하려 한 정책. ⁕ 균역법: 백성들의 3가지 세금(토지, 특산물, 노동력)중 노동력에 해당하는 군역(군복무) 은 당시 베 2필로 대신할 수 있었는데, 이를 베 1필로 줄이는 대신 지주나 왕족에게 부족한 재정을 보충하게 한 제도. ⁕ 경연: 왕과 신하가 유교적인 이상정치를 추구하는 장으로서, 왕이 학문에 애쓰는 것을 드러내는 자리.
- 2019-12-20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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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대 커피 명인, 여종훈
- “맛이 서로 싸우는 걸 알아야 해요.” 명인의 한마디는 예사롭지 않았다. 20여 년간 커피와 함께한 삶. 육화된 시간의 두께가 느껴졌다. 엄살도 없고 과장도 없다. 오로지 그 세월과 맞짱 뜨듯 결투한 사람만이 들려줄 수 있는 절창이다. 국내에 커피 로스터가 열두 대밖에 없던 시절, 일본에서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돌아와 그가 문을 연 청담동 ‘커피미학’에는 각지에서 맛을 보러 온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여종훈 커피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비싸다”는 소문에도 아랑곳없었다. 20대 때부터 커피를 달고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서커피에서 나온 무늬만 커피인 믹스커피를 마실 때 그는 미군 부대에서 흘러나온 깡통커피를 사다 마시곤 했다. 드립 커피에 대한 개념조차 생소했던 시대에 퍼컬레이터로 원두커피를 추출해 하루 열 잔 이상씩 마셨다니 요즘식으로 말하면 커피 덕후였다. “당시 원두커피를 파는 다방들은 많지 않았어요. 신촌의 몇몇 다방은 양키시장에서 깡통커피 MJB, MJC를 사다가 썼죠. 그때는 바리스타를 ‘주방장’이라고 불렀어요. 지금 그러면 기겁할 일이지만 커피 전문 주방장들이 원두커피 맛을 높이기 위해 담배꽁초나 칡뿌리 등을 몰래 넣기도 했어요.” 아직 무림의 고수들이 등장하기 이전이었다. 여종훈(呂鐘勳·64) 명인의 커피 인생은 우연한 기회에 시작됐다. 식품공학과를 졸업하고 원예 사업을 해보려고 20대 중반에 시골로 들어갔던 그는 6년 만에 다시 도시로 나오고 말았다. 지금처럼 성능 좋은 농기계가 없던 때라 삽으로 직접 흙을 파야 했는데 허리가 견뎌내질 못했다. 젊은 패기에 농사일을 너무 우습게 봤던 것이다. 원예 사업을 접은 뒤에는 몇 번 직업을 바꿨다. “손에 딱 잡히는 일이 없어 이런저런 생각이 많을 때였어요. 어느 날 일본에 살던 친구가 사업 구상차 한국에 왔는데 드립 세트랑 원두커피를 트렁크에 넣어왔어요. 마셔보니 맛이 기가 막힌 거예요. 어디서 가져온 커피냐 물었더니 일본에서 ‘커피미학(珈琲美学)’이라는 커피 전문점을 운영하는 장인이 볶은 콩이라고 하더군요. 국내 커피랑은 전혀 다른 고급스러운 향과 맛의 품격이 느껴졌어요. 반해버렸죠. 제가 커피를 정말 좋아하긴 했나봐요.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있는 커피를 한국에서 계속 마실 수 있을까’ 궁리하다가 커피 사업을 해볼까 하는 생각에까지 이르렀어요.” 일본에서 온 친구는 그와 함께 청담동에서 커피미학을 운영한 재일교포 나가시마 요시코였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했다. 그는 곧바로 일본으로 가 오하라 히로시(小原博 )를 만났다. 명성대로 꼬장꼬장했다. 그에게 로스팅 기술을 배우고 ‘커피미학’이라는 브랜드를 가져오는 과정은 쉽지 않았지만 결국 승낙을 받아냈다. “1년간 공부했어요. 고달팠죠. 커피 맛을 보기 위해 매일 30~40잔의 커피를 마시고 혈변을 보는 바람에 병원에 실려 가기도 했어요. 최고의 맛을 찾고야 말겠다는 강박 같은 게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련했어요. 한 모금 입에 넣고 맛만 보고 뱉어버려도 되는데 다 마시다가 그 사달이 났으니 말이에요.” 그는 해외유학파 1세대로서 일본 커피 명장의 인정을 받는다. 대학교 때 커피숍에서 일하다 마신 원두커피 한 잔이 인연이 되어 장인 명단에까지 이름을 올린 오하라 히로시는 많은 제자를 두었지만 여종훈 명인을 마지막으로,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었다. 제자들이 자신이 가르친 범주에서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종훈 명인은 제자들을 가르쳐보고 나서야 선생의 깊은 뜻을 헤아리게 됐다. “강의할 때 ‘이렇게 하면 안 돼요’라고 말하면 배우는 사람은 그걸 곧이곧대로 믿습니다. ‘왜 안 돼?’ 하면서 의심해보지 않는다는 거죠. 오하라 선생은 그런 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 게 큰 의미가 없고,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로스팅을 10년 해본 사람과 20년 해본 사람은 감별 능력이 다릅니다. 20년간 로스팅을 해온 저도 헤맬 때가 있어요. 맛에는 정답이 없어요. 그래서 연구는 끝이 없어야 합니다.” 그는 커피 맛을 스펙트럼에 비유해 설명한다. 맛의 정점이 한곳에 모여 있는 콩도 있고 넓게 형성되어 있는 콩도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원두 종류에 따라 반응하는 온도가 다른데 로스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풍미가 달라진다는 의미다. “약배전으로 해줘야 맛이 제대로 나는 콩이 있어요. 그럴 때는 약배전으로 끝내야 해요. 더 볶으면 제 맛을 잃어요. 또 어떤 콩은 강배전일 때 최고의 맛이 나죠. 이런 콩을 약배전으로 볶으면 맛이 망가집니다. 이런 감별 능력은 경험치에서 나와요. 끊임없이 테스트를 해본 사람만이 섬세한 맛의 차이를 구별해낼 수 있는 거지요. 이런저런 방법 다 써봐야 맛의 정점에 가까운 로스팅 방법이 구해집니다. 제가 오하라 선생을 만나러 일본에 갔을 때 매장에 내놓은 커피가 70여 종이나 되었는데 참 대단한 분이에요. 커피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 많은 콩의 맛을 감별해내기 힘들거든요.” 청담동 ‘커피미학’에서 ‘커피쌤’의 시대로 일본에서 돌아와 청담동에 커피미학을 열고 그는 40여 종의 커피를 메뉴판에 올렸다. 맛에 있어서만큼은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그가 직접 로스팅하고 핸드드립으로 정성껏 추출한 커피를 내놓자 난리가 났다. 당시 에스프레소 한 잔 가격이 무려 1만 원이나 했는데도 어디서 소문을 듣고 왔는지 매장 안은 커피 애호가들로 북적였다. “커피값이 밥값보다 비쌌어요. 그래도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들락거렸지요. 우스갯소리로 커피미학에서 커피를 마시지 않으면 청담동 사람이 아니라는 말까지 나돌았어요. 연예인, 스포츠인들도 자주 왔는데 손님들 중 3분의 1은 연예인이었어요. 손숙, 윤석화, 임예진, 최민식, 송강호, 차인표, 김선아 등이 그때 단골이었죠. 드라마나 영화 촬영이 끝나면 기자들 데리고 와서 인터뷰도 하고 금융권에서는 특별한 날 아예 하루 빌려 행사를 치르기도 했어요.” 다양한 문화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던 커피미학은 지금까지도 그 시절을 추억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린다. 그만큼 편안하고 매력적인 공간이었다. 유럽풍의 고급스러운 실내 분위기와 넓은 정원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지만 지하에 쿠바, 탄자니아, 에티오피아 등지의 나라에서 수입한 생두를 로스팅하는 공장까지 세팅해놓아 마니아들에게 신뢰감을 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종훈 명인의 커피 맛이 일품이었다. 한창 입소문을 탈 때는 신문과 잡지, TV 등에도 자주 소개되었다. 커피미학에서 로스팅한 콩을 가져다 쓰는 커피 전문점도 점점 늘어났다. “인기가 대단했어요. 지금은 원두를 팔기 위해 영업을 하지만 그때는 아무데나 안 주고 커피 맛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지 심사를 한 뒤 콩을 줬죠. 그래도 간혹 커피를 재탕해서 쓰는 곳이 있었어요. 그런 소리가 들려오면 바로 공급을 중단했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커피미학은 2010년 문을 닫는다. 1998년 청담동 본점을 시작으로 인사동, 롯데백화점, 현대백화점, 안성 등지에 새 둥지를 틀었다가 이런저런 부침을 겪은 후 재정상황이 급격히 나빠졌기 때문이다. 또 매해 급상승하는 월세를 당해내지 못했다. 현재 여종훈 명인은 경기도 용인민속촌 근방에서 ‘커피쌤’이라는 브랜드로 공방과 매장 운영을 하고 있다. 갓 로스팅한 그의 커피를 한 번이라도 맛본 사람들은 빠져나오기 힘들다. 그래서일까. 온라인에서도 여종훈 커피 맛에 중독되어가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 온라인 판매는 생각지도 못했는데 그 위력에 놀랐다고 한다. 이참에 브랜드에 명인 이름을 좀 더 부각하는 게 어떠냐고 묻자 그는 손사래를 친다. “맛으로 보여주면 됩니다. 그 이상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렇게 해서 방송에 나가고, 광고하고, 해외 산지 돌아다니다 보면 로스팅 연구는 뒷전이에요. 연구 안 하면 맛의 퀄리티는 당연히 떨어지는 거고요. 그런 커피 내놓기 싫습니다.”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그는 최근 지나치게 낮은 가격의 커피가 유통되는 상황이 염려스럽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드립 에스프레소는 식어도 맛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좋은 원두를 써야 하는데 요즘 인터넷에서 파는 원두 가격을 보면 놀라워요. 제대로 된 콩이라면 생산지에서 절대 그 가격에 사올 수 없습니다. 저가 커피는 품질을 의심해봐야 해요. 한때 유통업자들이 유통기한 지난 커피를 봉지갈이해서 팔았던 적도 있어요. 한두 가지 생두를 사다가 배전도에 따라 커피 이름을 마음대로 붙이기도 했죠. 커피 시장이 비정상적으로 성장하던 때였어요. 지금은 마니아가 워낙 많아 맛을 속이면 금방 들통이 납니다.” 요즘도 그는 새 로스팅 기계가 나오면 도전한단다. 기존의 로스터로 최고의 맛을 찾았을 텐데 뭐하러 새 기계를 들여와 그 힘든 과정을 다시 시작하냐고 물었다. 대답이 걸작이다. “새 기계는 자동차로 비유하면 벤츠예요.(웃음)” 솔직히 호기심도 있고, 새로운 룰을 만들면서 긴장하는 시간이 즐겁단다. 커피에 대한 그의 애착은 식을 줄 모르는 것 같다. 요즘도 어디 커피가 맛있다더라 하는 소리가 들리면 당장 가서 마셔보고 분석한다. “사람들은 맛이 싸우는 걸 몰라요. 커피를 다루려면 커피 마시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맛이 다투는 걸 먼저 느껴보고 로스팅은 그다음이에요. 세미나 할 때 하는 질문들을 들어보면 빤해요. 저는 이미 다 고민해본 것들이거든요. 어느 날 블렌딩 비율을 고민하는 사람에게 ‘조금 무겁네요, 요걸 한번 빼보세요’라고 말해줬더니 무릎을 탁 치더군요. 돌아가서 조언해준 대로 해보고는 전화를 했어요. 맛이 훨씬 좋아졌다고.” 서로 지지고 볶아대는 그 내밀한 다툼의 맛을 봐버린 그는 자신을 더 경계하게 됐을 것이다. 그래서 생두를 볶을 때마다 첫 마음, 처음 그 자리로 돌아간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기술이고 전략이며 내공이리라. “커피 맛은 농부와 조물주가 결정합니다. 로스팅은 생두에 열을 추가해 그 맛을 최대한 살리는 과정일 뿐입니다. 원재료가 형편없어도 로스팅 기술로 맛을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건 틀린 말입니다. 밥 짓는 솜씨가 좋다고 정부미로 아끼바리 밥맛을 낼 수는 없잖아요.” 농부와 조물주의 공을 먼저 챙기는 명인. 그에게도 얼마 전 직업병이 온 모양이다. “로스팅하면서 연기를 하도 많이 마셔서 그런지 2년 전부터 폐가 안 좋아졌어요. 아파보니 ‘잘못되는 게 순간이구나’, ‘생과 사의 경계선은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 후 욕심이 사라졌어요. 예전에는 인간들 비리만 보이고 그랬는데 요즘엔 좋은 모습들만 생각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앞으로 일도 좀 줄이고 제자도 키워볼 생각입니다.” 참 감사하다는 말이 오래 귓전에 머문다. 잘 숙성된 커피처럼 향이 깊다. 맛을 섬겨왔듯 이제는 그의 몸을 받들어 모실 때다.
- 2018-01-25 17: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