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에서 밀려난 50대 여성의 이야기…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기사입력 2024-07-22 08:04 기사수정 2024-07-22 08:04

[명사와 함께하는 북인북] 김이설 작가

북인북은 브라보 독자들께 영감이 될 만한 도서를 매달 한 권씩 선별해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해당 작가가 추천하는 책들도 함께 즐겨보세요.

하여간 그렇대. 우리 나이가 한참 늙느라 바쁜 나이래. 여기저기 삐거덕거리면서

고장 나는 데 생기고, 마음은 공허하고. 살아 뭣하나, 싶은 나이라는 건데. 그게 당연한

마음이라니까 너무 난감해하지 마.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49p


‘피하고 싶은, 그러나 엄존하는 세계 속으로 우리를 이끄는 소설가’(제9회 김현문학패 심사평) 김이설의 신작 소설이 출간됐다. 2006년 등단 이후 18년간 꾸준히 ‘나쁜 피’, ‘환영’, ‘선화’, ‘우리의 정류장과 필사의 밤’ 등의 작품을 통해 여성과 가족에 대해 질문해온 그가 이번에는 50대를 앞둔 난주, 미경, 정은, 세 친구의 강릉 여행을 통해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이야기한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난주, 미경, 정은은 1975년생 동갑내기 친구다. 오랜 친구지만 각자 사느라, 하루하루 살아가는 데 최선을 다하다 보니 자주 만나지 못했다. 사는 거리가 먼 만큼 마음도 멀어진 무렵이었다. 매번 여행 한번 가자는 말만 할 뿐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올해 강릉에 가자고 한 건 난주였다. 늘 그렇듯 말뿐일 게 뻔했다. 혼자 노모를 모시는 미경은 하루 시간 빼는 것도 쉽지 않다. 모두 속으로는 올해도 여행은 어려울 거라 생각하는데, 불쑥 미경이 “가자!”고 호응한다.

강릉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일, 세 친구는 서울역에서 만난다. 강릉 여행은 스물넷 이후 25년 만이고, 셋이 다 함께 모인 건 난주 아버지의 장례식 이후 7년 만이었다. 낯선 것도 잠시, “왜 이렇게 부었어? 살찐 거야, 아픈 거야?”, “넌 왜 이렇게 늙었니?”라며 서로 장난스럽게 안부를 주고받는다. X세대, 신세대, 수능 0세대. 한때 이들을 가리키던 말이다. 싱그럽고 통통 튀고 정의할 수 없는 젊음 그 자체로 예쁜 시절이 있었다. 이들은 이제 요실금과 고혈압, 탈모 등 다양한 신체 변화를 겪고 있다.

세 명은 소위 말하는 ‘인스타 감성’의 펜션을 잡고, 여행 내내 잔뜩 먹고 마신다. 강릉에서 유명하다는 순두부, 장칼국수를 먹거나 허난설헌의 생가도 가고, 커피도 여섯 잔씩 시켜 나눠 마시고, 질리도록 술을 마신다. 이렇게 셋이 모이는 날이 또 없을 거라는 듯 최선을 다해 즐긴다. 그간 다른 삶을 살아왔기에 부딪치는 구석도 많다.

기혼인 난주, 정은과 미혼인 미경은 서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고, 투잡을 뛰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정은과 상대적으로 부유한 삶을 사는 전업주부인 난주는 자주 투덕거린다. 싸움을 푸는 방식은 간단하다. 마시고, 웃고, 푼다. 술 한잔에 이야기를 털어놓고 나누다 보면 당장 해결되는 것이 없더라도 괜찮다. 이들의 여행 또한 술 한잔과 같다. 앞으로 똑같은 삶이 반복돼도 버틸 수 있는 잠시의 안도, 찰나의 틈이 바로 여행인 것이다. 그렇게 각자의 사정을 견디며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과정이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이설 작가의 사이

“50대 여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소설이 생각보다 없어요. 각자의 세계와 인생이 있을 텐데 그저 엄마, 아줌마, 며느리, 딸이라는 단어 속에 숨어버린 이들의 목소리를 담고 싶다고 느꼈습니다. 표지 속 거위처럼 시끄럽고 우악스러운 이미지가 있지만, 들여다보면 그렇지만은 않거든요.”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는 2023년 6월 초, 김이설 작가가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올린 글 하나에서부터 시작됐다. 무료 소설 연재를 구독할 독자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가을까지 경장편소설을 마감하려면 스스로를 강제해 진도를 내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는 이유였다.

신청자들의 메일 주소로 매주 1회씩, 원고지 30매 분량을 전송하는 ‘소설가의 생초고 메일링’, ‘스불재’(스스로 불러온 재앙)였다. 쉽지는 않았지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 자체가 원동력이었단다.

“재앙이 매주 제법 많은 양의 원고를 써야 하는 저에게 해당하는 말인지, 정리 안 된 소설을 읽게 될 메일링을 신청한 분들인지 모호했지만 일단 썼어요. 어떤 노래를 들으며 무슨 마음으로 작업했는지도 함께요. 응원과 애정이 담긴 답장은 물론, 바다 사진을 꾸준히 보내기도 하셨어요. 두 번의 펑크를 내면서도 ‘무리하지 마라, 그저 기다리겠다’는 말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덕분에 3개월 동안 한 편을 완성할 수 있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강릉으로 떠난 중년 여성들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의 주인공 난주와 정은, 미경은 어디에나 있을 법한 공감 가는 구석을 가진 인물들로 구성했다. 노안이 찾아왔지만 ‘안 보면 안 봤지, 돋보기라니’라며 마지막 자존심을 부리거나, 자녀들이 독립할 시기에 빈둥지증후군을 겪고, 요실금이 의심되는 상황에도 병원 가는 것을 미루는 등 낯선 몸, 낯선 자신을 만나며 혼란을 겪는다.

“50대가 되면 몸 여기저기가 하나씩 고장 나지만 마음은 여전히 설익은 상태인 것 같아요. 젊지도, 늙지도 않은 애매한 때랄까. 아직 힘은 있는데, 40대보다는 ‘쓸모’라는 영역에서 다소 밀려났다고도 느껴요. 우울하고 주눅이 들죠. 하지만 다들 각자만의 큰 세계가 있었을 거예요. 그걸 풀어내고 싶어도 세상이 귀 기울여주지 않는 겁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걸 한꺼번에 터뜨리려니 목소리가 커지는 게 아닐까요. 난주와 정은이, 미경이 같은 ‘아줌마’들은 쓸쓸함을 견뎌내고 나이 듦을 받아들이는 중인 거예요.”


“세상에 안 힘든 이십대가 어딨니? 이십대는 그냥 이십대인 것만으로 힘든 거야.”

미경은 끝을 내지 못했던 학생운동과 이뤄질 수 없었던 성희 언니와의 관계를,

정은은 일도 연애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세상의 패자가 된 기분에 빠졌던 나날을,

난주는 두 아이를 키우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 채 아줌마로 전락해버렸던 시절을 떠올렸다.

셋은 제각기 고개를 끄덕였다. - 우리가 안도하는 사이’ 197p


삐거덕거리는 몸과 마음을 안고 세 친구는 강릉으로 떠난다. 김 작가는 강릉이라는 지명 자체가 동년배들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만하다는 생각에 배경지로 선정했다고 한다. 1970년대 대학가에 MT 문화가 퍼지면서 강원도는 그 시절 학생들에게 낭만의 장소가 됐기 때문이다.

“강릉은 세 친구의 젊은 시절이 켜켜이 쌓인 상징적인 곳입니다. 저 역시 처음으로 부모님을 속이고 첫사랑과 여행한 곳이에요. 소설의 원제도 ‘강릉에 가자’였어요.”

등장인물들은 맛있다고 정평이 나 있는 카페를 찾거나, 관광지를 들르려 애쓰지 않는다. 안목해변 주변을 그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니고, 순간마다 하고 싶은 것을 한다. 그 와중에도 빠지지 않는 건 술이다. 과거 서로에게 느꼈던 감정과 오해, 깊어진 상처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다투지만, 담백한 건배와 함께 목구멍으로 털어 넘긴다.

“여행 왔다는 것 자체가 일상에서 벗어났다는 의미잖아요. 술에 잔뜩 취해 해방감을 느끼는 모습을 그리고 싶었어요. 이들이 인연을 이어온 25년이 짧은 시간이 아닌 데다 처한 환경이 너무도 다르니 적당히 술 한잔으로 흘려보내는 게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방법이겠죠. 그래야 아프고 잊고 싶던 기억 위로 이번 여행이 씌워질 테고, 또 살아가니까요.”

▲김이설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김이설 작가의 저서와 사인(브라보 마이 라이프)

앞으로 안도할 우리

김이설 작가는 이번 소설을 통해 삶에 지친 이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다고 한다. ‘때가 되면 자신도 모르게 달라져 있는 인생을 알아차리게 된다’(110p)는 강릉의 커피 명장 박이추 선생의 말을 빌렸다. 자녀와 부모를 동시에 부양하면서 사회적인 위치까지 공고히 해야 한다는 압박에 고단하더라도, 살다 보면 지나고 보면 결국 모든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든단다.

“흔히들 특정 시절이 가장 찬란했다 말하지만 지나고 나니까 그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실수했던 순간이 자꾸 생각나고 숨고 싶어져도 어느 날부터는 되레 아름답게 여겨져요. 한동안 번아웃이 심하게 와서 글을 전혀 못 읽고 못 쓰던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극복했지만요. 작가에게 그건 죽음과 같은 건데요, 등단하고 10년 동안 육아와 원고 작업을 병행했더니 지쳤던 것 같아요. 과거와 지금을 비교하면 날카롭고 거칠던 문체가 둥글둥글하고 편해졌어요. 어느 쪽이 더 좋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안도하고 감사하면서 계속 쓰다 보면 모르는 새 영글지 않을까요. 여러분의 쓸쓸함도 곧 잦아들기를 바라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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