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장 깊숙한 곳에 있는 셔츠, 철 지난 바지도 얼마든지 멋지게 입을 수 있다. 10년, 20년 뒤를 꿈꾸게 하는 ‘취향 저격’ 멋쟁이를 발견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좋다. 취향 앞에 솔직하고 당당한 태도를 배울 수 있다면, 노인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김동현 사진작가의 사진과 감상의 일부를 옮겨 싣는다. 첫 번째 주제는 손이다.
1 내게 손은 가장 의미 있는 부분이다. 삶의 흔적이 가득 묻어 있기 때문이다. 손을 찍은 사진을 보면 인생이 느껴진다. 나이테와 같은 주름살과 결혼반지가 어우러진 친할머니의 손은 할아버지와의 사랑과 추억을 증명한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었지만 할머니는 여전히 반지를 끼고 다닌다. 그런 할머니의 손을 보면서, 언젠가 내 손에 새겨질 삶의 나이테는 어떤 모습일지 기대하게 된다.
2 각얼음을 연상시키는 액세서리로 무장한 아버님의 손.
3 삼천포에서 미용실을 하는 어머님의 손. 어머님의 머리는 핑크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거의 모든 색상으로 염색을 해보시고는 뻔한 색이 재미없어 핑크색으로 염색했다고 말했다.
4 성북동 새이용원 이덕훈 이발사의 손. 그는 19세부터 이발사인 아버지의 어깨너머로 이발 기술을 배운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이발사다. 누구보다 멋진 손에 염색약이 묻어 있다.
5눈에 띄는 지팡이를 지닌 아버님. 연락처를 ‘스핑크스 아버님’으로 저장해뒀다.
6 ‘디올 어머님’. 별칭은 처음 뵈었을 때 ‘디올’(Dior) 브랜드 로고가 박힌 옷을 입고 계신 데에서 착안했다. 호탕하게 웃는 모습이 정말 멋있는 분이다. 그의 당당한 모습이 내 눈에는 코코 샤넬(패션 브랜드 ‘메종 샤넬’의 설립자이자 디자이너)처럼 보인다.
2013년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를 통해 수많은 딸들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던 한성희(韓星姬) 이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 딸의 결혼을 앞둔 한 엄마이자, 정신과 전문의로서 건넨 진정 어린 조언이 큰 사랑을 받으며 베스트셀러에 이름을 올렸다. 이후 잠시 절판됐던 도서가 최근 다시 출간됐다는 희소식이 들려왔다. 시간의 흐름 때문일까? 표지에 그려진 딸의 모습은 한층 더 성숙해져 있었다. 당시 50대였던 한 원장 또한 어느덧 60대에 이르렀다. 딸 못지않은 인생의 전환점을 지났을 터. 그녀는 “잘 성장하고 있다”며 담담히 안부를 들려줬다.
하나뿐인 딸아이의 결혼, 그것은 한 원장이 책을 펴낸 계기이자 크나큰 성장통을 앓게 한 사건이었다. 자녀의 독립이 시원섭섭한 건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이지만, 그녀의 상황은 좀 달랐다.
“딸이 미국 유학을 갔는데, 당연히 언젠가 다시 돌아오리라 여겼죠. 그런데 어느 날 결혼 얘기를 꺼내더니 아예 미국에서 살 거라더군요. 제 나이와 여건을 감안할 때, 앞으로 20년 동안 1년에 한 번씩 본다 해도, 평생 딸을 볼 기회가 20번 남짓인 거예요. 너무나 기가 찬 노릇이었죠. 영원한 이별은 아니더라도, 그 못지않은 심정이었어요. 공항에서 서로 엉엉 울며 헤어졌지만, 즐거운 신혼을 앞둔 젊은 딸과 점점 늙어만 가는 엄마가 느끼는 아픔은 천지차이죠. 그 옛날 우리 친정엄마도 같은 마음으로 나를 보냈을 텐데, 이 정도로 상실과 아픔이 크리라고는 그땐 상상도 못했어요.”
아직 어린 딸을 이것저것 챙겨주고 가르쳐주고 싶었지만 상황이 녹록지는 않았다. 아쉬운 마음도 달랠 겸 그동안 딸에게 하지 못한 이야기를 담아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딸에게 보내는 심리학 편지’가 완성됐고, 덕분에 그녀는 엄마로서의 삶 1부를 잘 마무리할 수 있었다.
“자녀가 부모로부터 독립하기도 어렵지만, 부모가 자녀로부터 독립하는 건 더욱 쉽지 않다는 걸 경험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부모가 말로는 ‘독립하라’고 하면서도 막상 자식을 떠나보내지 못한 채 주변을 맴돌죠. 아이를 한 인격체로 존중해야 하는데 내가 외롭고 힘들다고 계속 붙잡아두는 거예요. 겉으로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그럴싸한 이유를 대겠지만, 사실상 소유욕에서 비롯된 착취나 다름없죠. 물론 저도 아주 쿨하게 딸을 보내지는 못한 것 같아요. 그만큼 자녀에게서 독립하는 건 누구에게나 참 힘든 일이죠.”
입체적 삶을 위한 경험 투자
그토록 힘든 일임에도 해내야 하는 까닭은 한 인간으로서의 ‘성장’에 있었다. 딸의 성장은 물론 엄마의 성장까지 말이다.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것, 여자에서 엄마가 되는 것, 그리고 엄마에서 다시 ‘나’로 돌아오는 것. 한 원장은 이러한 성장을 통해 오롯이 나로서 존재하고 보다 성숙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이를 먹으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과정 같지만, 역할 변화에 따른 전환점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 시기가 고통스러워서 어떤 이들은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하죠. 자신에게 주어졌던 역할의 고리들을 과감히 끊어내는 용기가 필요해요. 물론 그것이 더러 외롭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겠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존재라면 다 겪어야 할 일들이죠. 흔들리다가도 중심을 찾는 오뚝이처럼 스스로 바로 설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합니다. 그것이 성장하는 과정이고, 그렇게 성숙해야 왜곡과 갈등 없이 자녀와 잘 분리될 수 있습니다.”
삶의 키워드를 ‘성장’이라고 언급한 한 원장은 몇 해 전 과감히 유학을 결정했다. 딸도 결혼하고 안정적으로 병원을 운영하던 차였기에 사람들은 그녀의 선택을 의아해했다. 늦은 나이에 웬 공부냐는 반응이었다. 단순히 커리어만을 위했다면 단행하지 못했겠지만 그보다 더 근본적인 성장을 바랐기에 가능했다.
“커리어는 성장을 통해 얻는 일종의 부산물이죠. 애당초 그걸 목적에 둔 건 아니었어요. 물론 현실적인 면에서 내가 잃는 것과 얻는 것을 두고 저울질을 많이 했었죠. 금전적인 리스크도 있었지만 거기에만 초점을 맞추면 바보 같은 선택을 한 거예요. 그러나 돈이란 것은 결국 나의 잠재성을 실현하고 내 삶을 더욱 입체적으로 만드는 데 쓰이는 거잖아요. 나중에 죽음에 이르렀을 때 돈이나 나이 등등 때문에 성장의 기회를 잃었다고 생각하면 너무 후회할 것 같더라고요. 갑자기 남자가 된다거나, 공학자가 된다거나 하는 비현실적인 바람도 아닌데 말이죠. 그저 내가 해오던 것을 더 심화하려는 욕구였기에 조금만 발돋움하면 되는 거였어요. 그렇게 ‘돈을 경험에 투자하자’고 마음먹었죠.”
기품 있는 중년의 아름다움
그러나 이제 막 가정을 꾸린 자녀 세대의 경우 개인의 성장보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는 이가 대부분일 것이다. 한 원장은 자신을 찾아오는 워킹맘들의 우울한 심정을 절절히 공감한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워킹맘으로 고단한 현실을 체감했기 때문이다. 단, 허덕이며 사는 삶 속에서도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땐 당연히 먹고살려고 일하지 자기실현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어요. 생계를 위한 일이 꿈을 이루는 일이면 참 좋겠지만, 그러기는 쉽지 않죠. 그러나 그런 중에도 자기 꿈을 위한 여지는 남겨둬야 한다고 생각해요. 당장은 실현되지 않을 것 같아도 조각을 쌓다 보면 언젠가 실체가 보이기 시작하거든요. 애 키우고 일하느라 아직은 버겁더라도 가슴 한편에 꿈을 품고 살아야 언젠가 이모작, 삼모작의 기회도 잡을 수 있습니다. 짬짬이 단 15분이라도 취미시간을 즐기는 것도 좋은 방법이고요.”
한 원장 역시 수십 년 동안 천천히 조금씩 즐겨온 취미가 있다. 바로 ‘첼로’다. 딸이 세 살 무렵 첼로를 샀는데, 이제 중급 정도의 실력은 된단다. 자신의 여든 살 생일에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연주하리라는 야무진 꿈도 생겼다. “인생 별것 없다. 재미있게 살아라”라며 힘든 시절 그녀를 위로했던 친정어머니의 말씀처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살아가리라 다짐도 해본다. 그런 한 원장 역시 딸아이가 늘 즐겁게 또 아름답게 중년을 맞이하길 바란다.
“언젠가 제인 구달이 한국에 왔을 때 백발을 늘어뜨린 수수한 모습이 참 아름답다고 생각했어요. 여든이 넘은 나이에 민낯이었는데도, 메이크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품이 느껴지더군요. 코코 샤넬은 ‘스무 살 때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이고, 쉰 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라고 했는데, 자기 삶을 잘 다져온 이가 뿜어내는 고유의 아우라가 있는 거죠. 그렇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신만의 향기를 품는, 아름다운 중년의 딸을 보고 싶습니다.”
마리 로랑생(Marie Laurencin, 1883~1956) 하면 그녀의 연인이자 시인인 기욤 아폴리네르를 떠올린다. 그녀를 비롯한 당대 여성 예술가들은 사랑하는 연인의 빛에 가려 탁월한 예술성이 평가절하되곤 했다. 로댕의 연인 카미유 클로델, 디에고 리베라의 연인 프리다 칼로 등이 그러했다. 그러나 시대가 변화하면서 그녀들의 작품도 속속 빛을 발하기 시작했고, ‘누군가의 연인’이 아닌 독자적인 아티스트로서 작품세계를 인정받고 있다. 그중 대표적 인물이 바로 마리 로랑생이다.
로랑생의 작품에는 기욤 아폴리네르를 향한 애틋한 사랑이 특유의 그루미한 무드로 녹아 있다. 특히 그와 이별한 후의 작품에는 그러한 분위기가 한층 두드러진다. 주로 핑크, 블루, 그레이 등 파스텔 톤을 사용해 몽환적이면서도 우아한 분위기가 매력적이다. 그녀의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미묘한 나른함에 취하고, 때론 쿨한 색조 안에 스며든 사랑스러운 온기를 느끼기도 한다.
지난해 코코 샤넬(Coco Chanel, Gabrielle Chanel, 1883~1971)의 일생을 다룬 영화 코코 샤넬(Coco Before Chanel, 2009)을 봤다. 패션의 아방가르드이며 모더니스트인 샤넬의 삶이 어쩐지 로랑생과 퍽 닮아 보였다. 짧지만 연인과 열렬히 사랑했고 온 열정을 쏟아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창조해낸 강인함을 지닌 아름다운 여인들. 사실 두 여인에겐 한 가지 사연이 있다. 로랑생이 무대 디자이너로 명성을 날리고 있을 즈음, 샤넬이 로랑생에게 직접 초상화를 의뢰했던 것. 그런데 완성된 초상화를 본 샤넬은 썩 달가워하지 않았다고 한다. 쓸쓸하면서도 우울한 기운이 감도는 그림 속 자신이 실제 자신과 닮지 않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러한 반응에도 로랑생은 그림을 수정하지 않았다. 두 여인의 팽팽한 신경전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결국 샤넬의 초상화(Portrait of Mademoiselle Chanel, 1923)는 로랑생이 평생 소장하고 있다가 사후 오랑주리 미술관에 기증되었다.
로랑생의 그림을 내키지 않아 했던 샤넬의 심정은, 그녀의 파란만장한 삶과 명언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다. 수녀원의 고아원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야 했던 샤넬은 그곳에서 바느질을 배우기 시작했다. 이를 기반으로 패션업에 뛰어든 그녀는, 모진 세파와 우여곡절 속에서도 가장 독립적이면서도 창조적인 삶을 일궈나간 당찬 여인이었다. 모던하면서도 우아한 샤넬의 디자인은 화려한 오브제를 포인트로 단조로움을 없애며 절제된 아름다움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생전 그녀가 구축한 샤넬 디자인은 현재 ‘샤넬’ 브랜드 패션쇼에서도 명맥을 잇는 고유의 콘셉트가 됐다.
“심플함은 우아함의 열쇠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은 남는다”, “성공은 종종 실패를 모르는 사람에 의해 달성된다”, “나는 당신이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나도 당신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으니까” 등 샤넬이 남긴 수많은 명언 중에서도 최고를 꼽자면 “내가 바로 스타일이다”(Style, that’s what I am)가 아닐까 싶다. 그녀는 여성성 안에서 여성의 본질을 날카롭게 파악하면서도, 자존심과 당당함을 패션으로 승화하며 현대 여성을 대변했다.
샤넬의 근거 있는 자신감에 반해버린 까닭일까? 개인적으로 로랑생이 그린 샤넬 초상화도 좋아하지만, 샤넬이 그토록 거부했던 마음도 절절히 이해가 간다. 아마도 그녀는 백년전쟁의 선두에서 프랑스군을 승리로 이끈 잔 다르크처럼 자신감이 충만한 진취적 신여성의 모습을 기대했을지도 모르겠다.
가을이 오면 우울증은 언제, 어디서든 뜬금없이 시작된다. 가령 오늘 입은 옷이 정말, 정말 마음에 안들 때, 혹은 마치 어제 막 맨몸으로 태어난 사람처럼 입을 옷이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이때 스카프를 떠올리는 건 ‘슈퍼 그레잇’한 일이다. 밋밋한 까만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만난 디자이너 코코 샤넬이 즉흥적으로 자신의 집 커튼을 쭉 찢어 스카프처럼 목에 감아 스타일을 ‘업’시켜줬다는 일화도 있지 않은가. 이번 가을 잘 고른 스카프 하나가 자식보다 더 큰 효도를 할지도 모른다.
패션에서 대부분의 아이템은 기능적인 목적에서 고안된다. 추위를 막거나 더위를 피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 많은데 이 스카프만큼은 태생적으로 장식적인 멋을 강조한 아이템이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일부러 멋을 내기 위해서는 최고의 아이템이란 얘기다. 그만큼 스카프를 고르고 연출할 때는 예민한 감각이 필요하다. 요즘 영부인 김정숙 여사의 옷차림이 화제다. 그녀는 한국을 대표하는 (중년) 여성으로 뜨겁지도 그렇다고 심심하지도 않은 적당한 온도의 패션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다양한 스카프 스타일링은 패션에 대한 그녀의 높은 감각을 여실히 보여준다. 가령 독일 순방 중에는 평범한 회색 투피스에 핑크 스카프를 둘러 품위 있는 룩을 완성하기도 하고, (정신없던) 대선기간 중에도 편안한 옷차림에 감각적인 스카프 스타일링으로 우아함을 놓치지 않았다. 스카프를 얘기하며 배우 김용건을 빠트릴 순 없다. 소문난 멋쟁이인 김용건은 슈트를 입을 때도, 가볍게 봄버 점퍼를 입을 때도 스카프를 빼놓지 않는다. 그를 보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얼굴의 주름이 아니라 스카프의 풍성한 주름으로 옮겨간다. 고수의 향기가 툭툭 둘러맨 스카프에서 느껴진다.
스카프는 군인의 예복 차림에서 시작된 것인 만큼 정장 차림에 기품을 더하기에 그만이다. 남자의 경우 실크 소재의 유연한 광택을 지닌 스카프를 셔츠 안에 풍성하게 매면 타이와는 또 다른 뉘앙스의 정장을 완성할 수 있다. 여성도 마찬가지다. 밋밋한 원피스 위에 스카프만 잘 둘러주면 새 옷 못지않은 신선함을 줄 수 있다. 옷에만 활용되는 것이 아니다. 토트백의 손잡이 부분에 얇은 스카프를 둘러 장식할 수도 있고, 1950년대 여배우처럼 머리에 두를 수도 있다. 휴양지에서는 멋진 선드레스로도 활용이 가능하다. 스카프 스타일링법이 궁금하다면 핸드폰을 켜고 에르메스의 ‘Silk Knots’ 앱을 다운받자. 상상 그 이상의 스카프 스타일링법을 친절하게 동영상으로 소개한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시연이 스카프 스타일링에서는 중요하다!
스카프를 한 번도 안 매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매는 사람은 없다. 이처럼 매력 넘치는 스카프는 구입에도 요령이 필요하다.
스카프가 처음인 사람은 무늬가 없거나 스트라이프, 페이즐릿 같은 고전적인 무늬를 고른다. 이후 스카프 스타일링에 익숙해지면 점차적으로 과감한 프린트의 스카프에 도전한다.
요즘은 유명 작가의 일러스트를 담은 스카프나 타이포그래프가 그려진 스카프가 유행이다. 컬러도 마찬가지다. 처음에는 외투나 재킷 컬러와 톤온톤으로 시작해 이후 보색이나 시즌 컬러의 스카프로 포인트를 주면 옷 입는 재미를 배가할 수 있다.
스카프를 고를 때는 예산을 넉넉히 하자. 피부에 직접 닿는 아이템이자 볼륨감을 살리는 것이 포인트이므로 고급 소재를 고르는 것이 좋다. 한 번 사면 오래 두고 사용하는 것이니 목걸이나 반지 같은 액세서리를 고르듯 공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
스카프는 마치 매력적인 친구 같다. 가까이 하면 할수록 빠져든다. 우울할 틈을 주지 않는 스카프, 이 가을에 스카프가 필요한 이유는 끝도 없이 많다.
이번 한글날은 훈민정음 반포 570주년을 맞는 해라는 데 더욱 의미가 있다. 일상에서 흔히 사용하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한글을 인식하며 지내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매일같이 한글을 떠올리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에 대해 고민하는 이가 있다. 세계 최초로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상에 내놓았던 ‘이건만 에이엔에프(LEE GEON MAAN AnF)’의 이건만(李健滿·54) 대표다. 읽고 쓰기 쉬운 우리 한글이지만, 디자인에 접목하는 것에는 숱한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한글이기에 더더욱 포기할 수 없다는 그의 다부진 말투에는 남다른 사명감이 스며 있었다.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한글 디자인 패션브랜드를 세울 수 있었던 계기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유학 생활을 하며 샘솟았던 애국심이 심지 역할을 했다.
“해외 나가면 다들 애국자가 된다고 하잖아요. 어느 날 학교 도서관에 갔는데 일본어로 된 책은 많고 한국어로 된 책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방학 때면 한국에 나와 우리 책을 사서 대학 도서관에 기증했죠. 또, 외국 작가들에게 한국적인 것을 찾으라고 하면 대부분 중국이나 일본 것을 고르더라고요. 어떻게 하면 한국의 문화를 디자인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고민했었죠.”
다양한 한국 전통 문양들을 떠올리기도 했지만, 이 역시 중국 문명의 영향 때문에 차별화하기가 어려웠다. 그 어느 나라의 것도 아닌, 우리만이 가지고 있는 언어나 사상 등이 반영돼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맺혔다. 그리고 그 생각의 종착점에 ‘한글’이 있었다. 이러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아티스트로서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던 그였다. 그러나 교수로 활동하던 시절, 결국 심지에 불이 붙고야 말았다.
“친구가 어느 날 ‘너 1야드에 실이 몇 개 들어가고 넥타이가 몇 개 나오는지 알아?’라고 묻더라고요. 모른다고 했죠. 미국에서 공부할 땐 그런 걸 배운 적도 없고, 특히 유럽은 브랜드를 중심으로 디자이너가 어떤 창의적인 디자인을 하느냐가 중요하거든요. 그런데 한국 섬유 시장은 OEM형태로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도 가르쳐야 했던 거예요. 내가 공부하고 온 걸 그대로 가르치는 것은 소용이 없겠더라고요. 그래서 아이들에겐 ‘21세기엔 디자이너가 브랜드가 되는 시대가 온다. 너희들의 몸값이 달라지고 디자이너가 경영자가 돼야 한다’고 이야기했어요. 근데 그 말을 들은 의대, 공대 다니던 학생들이 전과를 한 거예요. 덜컥 책임감이 생기고 겁이 나더라고요.”
그의 마음이 무거워졌던 것은 자신이 이야기했던 것들은 그때까지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디자이너는 직급이 올라가도 차장 정도에 머무르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한마디로 디자인만 해서는 먹고 살기 어렵던 시절인데, 멀쩡한 전공을 박차고 나온 학생들을 보니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느냐, 내 이야기가 맞느냐 틀리느냐를 증명해 내기 위해 그는 교수직을 뒤로하고 현장에 뛰어들게 된다. 그렇게 제자들과 합심해 만든 것이 지금의 ‘이건만’ 브랜드다.
한글과 패션, 트래디션과 트렌드를 접목하다
2000년, 처음 회사를 설립했을 때도 그랬고 현재까지 가장 힘든 점은 한글을 패션에 접목하는 일이라고 한다. 알파벳처럼 나열문자가 아닌 자음과 모음이 어우러지는 입체문자인 한글을 제품에 효과적으로 입히는 작업은 쉽지 않았다.
“특히 한국인에게는 한글이 언어이기 때문에 디자인 요소가 아닌 글자로 읽힌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래서 자음과 모음을 분리하는 과정을 거쳤죠. 한글의 형태적 분석도 하지만, 그보다는 한글이 가진 의미에 대해 공부했어요. ‘한글이 대체 우리에게 뭐지?’라는 물음을 던지고 그런 고민을 디자인에 담으려고 했죠. 디자이너들도 고충이 있죠. 지금까지 디자인한 작업물만 3000개가 넘는데 또 새로운 것을 창작해야 하니까요. 우린 다른 곳처럼 카피할 수 있는 디자인이 있는 것도 아니고, 경쟁업체도 없으니 오히려 더 힘들죠.”
그렇다고 그들만 한글 디자인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오래 버티지 못하거나 단기적인 작업에 그쳤다고 한다. 이 대표는 그만큼 한글을 패션에 접목한다는 것은 어렵고 힘든 길이라고 설명했다.
“한글과 패션, 한마디로 트래디션(tradition)과 트렌드(trend)라 할 수 있죠. 어찌 보면 그 두 가지를 함께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어요. 차라리 한글 디자인으로 패션이 아닌 자개함 같은 소품을 만드는 게 훨씬 쉬울 거예요. 그렇게 하면 그저 인사동에서 사는 관광 상품에 지나지 않거든요. 한국 사람이라면 그런 기념품을 더욱 살 이유가 없죠. 그래서 역설적으로 스카프, 넥타이, 핸드백 제품을 디자인하게 됐어요.”
차별화된 전략 덕분에 이건만 브랜드의 제품은 국내외 인사와 패션 마니아의 눈길을 사로잡을 수 있었다. 이건만 한글 넥타이는 청와대·정부부처·공공기관의 귀빈 의전용 명품으로 납품됐고, 한국 브랜드 최초로 일본 대형 백화점에 입점하는 기회를 얻기도 했다. 우여곡절도 많고 힘든 점이 많았지만, 이만하면 성공반열에 올랐다 할 수 있지 않은가? 그에게 ‘성공’이란 조금 다른 의미였다.
“아마 실패한 것들을 이야기하자면 무척 많을 거예요. 아무래도 추진하던 일이 실패하면 그만큼 금전적으로 손해가 생기거든요. 저는 그걸 수업료라고 해요. 수업료 굉장히 많이 냈습니다(웃음). 그런데 성공의 기준이 뭐냐. 성공과 출세는 다르다고 생각해요. 출세는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지는 건데, 그렇게 따지면 아직 출세는 못 한 것 같아요. 하지만 이 일을 시작하고 대학에 관련 커리큘럼이 생기고, 많은 유통라인에 개인 디자이너 브랜드의 입점 가능성을 열어줬다는 것에 제가 작은 역할을 했다고 봐요. 돈 벌고 유명해지는 출세보다는 내가 나를 인정할 수 있는 성공을 하고 싶어요. 출세는 그 자리에서 내려오면 바로 낫씽(nothing)이지만, 성공은 그 자리에서 물러나도 역사에 남고 하나의 장르를 열고 패러다임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성공입니다.”
디자이너 경영자가 이어갈 ‘이건만 에이엔에프’
그는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디딤돌 역할을 했다는 것에 큰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이러한 점은 ‘이건만 에이엔에프’만의 경영방침에서도 드러난다. 무엇보다 훌륭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열정을 발휘하는 이 대표는 경력자보다는 신진 디자이너 채용을 우선시하고, 매출의 20%가량을 디자인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사업을 시작할 때에도 목표로 삼은 것 중 가장 첫 번째가 ‘동종 업계 디자이너 월급의 2배를 주는 회사’였다고 한다. 디자이너 출신 경영자다운 면모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회사와 후배들을 향한 애정으로 에너지가 가득한 그에게도 요즘 걱정거리가 생겼다. 나이가 드니 체력이 떨어지는 것을 실감한다고. 열심히 운동하며 자기 관리에 힘쓰면서도 디자이너들의 역량 강화에 더욱 힘을 쏟게 된다는 이 대표다.
“요샌 나이 드는 게 무섭더라고요. 아,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그냥 이대로 끝나버리는 거 아냐? 그런데 한편으로는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하고 쥐고 가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외만 봐도 디자이너의 이름을 딴 명품 브랜드가 오랜 세월 명맥을 유지하고 있죠. 코코 샤넬이 죽었다고 그 브랜드가 힘을 잃은 것은 아니잖아요. 브랜드를 이끌어갈 디자이너를 키웠기 때문에 가능한 거죠. 우리 직원들에게도 디자인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영, 마케팅, 유통, 소비자 심리 등을 알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어요. 제 욕심에 그런 거지만, 아마 다들 엄청 피곤할 거예요. 그래도 우리 브랜드를 물려줄 인재를 만들려면 어쩔 수 없죠.”
그는 한글이 담긴 디자인 브랜드를 이끌어 나가는 것은 자신이 아닌 누구라도, 또 더 많은 이들이 해야 할 역할이라고 설명했다. 힘들고 더디지만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는 사명감도 있었다.
“일이 힘들수록 자신만의 철학이 있어야 해요. 내가 이 일을 왜 하는가? 돈을 위해서? 돈을 벌려고 했으면 다른 일이 얼마든지 있겠죠. 명예를 위해서? 그럼 대학교수로 남아 있었겠죠. 브랜드를 하나 육성하려면 굉장히 많은 돈과 시간이 필요해요. 애초에 요행을 바라고 시작한 일은 아니니까 서두르지 않죠. 남들보다 큰 솥을 만들었기 때문에 밥은 늦게 짓더라도 그만큼 더 많이 지으면 되잖아요. 이미 이만큼 달려왔기 때문에 다시 돌아갈 수도 없어요. 끝도 보이지 않지만 그 시작도 보이지 않을 만큼 멀리 와버렸죠. 그럼 어떻게 하겠어요? 돌아가나요? 일단 달리고 보는 거죠.”
인생 2막, 얻는 게 없어도 일단 달리고 본다!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 속에 어쩐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지난 일들이 스쳐 지나가는 듯했다. 다사다난했던 지난 10여 년, 한글을 선택하지 않았다면 그의 인생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혹시 후회하는 마음은 없는지 물었다.
“아마 대학에서 교수생활도 하고, 굉장히 유명한 아티스트가 됐을 것 같아요. 하지만 결코 후회는 안 해요. 그 삶은 지금이라도 다 벗어던지고 할 수 있는 것들이거든요. 오히려 공부를 많이 한 건 후회해요. 대학교, 대학원, 그리고 유학까지. 지금 보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 없었겠다 싶어요. 똑똑하고 아는 게 많다고 사업을 잘하고 세상사는 데 도움이 되는 건 아니더라고요.”
그러한 후회 역시 이만큼 살아봐서 알게 된 것이라고. 그는 공부하던 30대 중반까지를 인생 1막, 그 이후로부터 현재의 삶을 인생 2막이라고 설명했다.
“인생 1막은 어느 정도 계획대로 됐어요. 공부는 열심히 하고 노력하면 점수 잘 받아서 좋은 대학 가고 그것에 만족할 수 있거든요. 근데 인생 2막은 노력한다고 다 이룰 수 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는 정량이 있고 그 조건에 맞추면 되지만,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다들 머리 굴리고 있거든요. 변수가 생기죠. 내비게이션이 안 막히는 길을 알려 주면 그대로 가나요? 머리 써서 다른 길로 가는데 또 막히잖아요. 그러니 게임이 안 되죠. 근데 아직은 다 내 것만 같아서 욕심도 내고 그렇기 때문에 실패하더라도 달릴 수 있는 것 같아요. 2막까지는 노력한 만큼 얻는 게 없더라도 일단 해보려고요.”
그는 노력하는 만큼 가치를 느낄 수 있는 인생 3막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그때가 되면 얼마만큼을 노력해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지에 대한 혜안이 생길 것이라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인간의 수명이 1000년 정도 되면 안 되는 일이 없을 거예요.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 인생의 룰을 깨닫게 되는 거죠. 아마 인생 3막은 그런 룰을 깨달았을 때 찾아오는 게 아닐까 해요. 내 것과 내 것이 아닌 것을 알고, 무엇이 중요한지를 구분하는 시기인 거죠. 그러면 자연히 무리한 계획을 세우거나 욕심을 부리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게 욕심을 덜고 농부의 마음으로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끝으로, 그에게 인생 3막은 언제쯤 오리라 예상하는지 물었다.
“글쎄요. 철들면 죽는다잖아요. 아마 저도 그냥 이렇게 살다가 눈 감는 순간에 ‘아휴, 그래 내가 이럴 줄 알았지!’ 한마디 하고 깨닫지 않을까요?”
‘아름다움’은 지극히 주관적이어서 ‘정의’를 내릴 수 있는 단어가 아니다. 정의가 필요치 않은 것은 기본이 충만할 때다.
스위스의 전 지역에 대한 평가는 구구절절한 설명이 필요치 않다. 스위스는 가는 곳마다 ‘아! 너무 좋다’, ‘이 도시를 떠나고 싶지 않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그 아름다움 속에서 살아온 덕분일까? 스위스 사람들은 여행객들에게 한결같이 친절을 베풀어 준다. 보드라운 속살처럼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다가와 상대를 배려한다.
>>글 이신화 여행작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베른에서 만난 아인슈타인
필자는 알프스를 기대고 있는 프랑스 남부의 안시(Annecy)에서 국경을 벗어나 제네바(Geneve)에 도착한다. 제네바의 레만 호수에는 하늘 높이 분수가 솟구치고 있다. 롤렉스 간판들, 거리의 꽃시계 등이 시계의 나라임을 다시 인식시켜 준다. 주마간산으로 도심을 돌아보고 베른(Bern)으로 장소를 이동한다.
스위스의 수도, 베른은 가을비에 촉촉하게 젖었다. 수도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아주 작다. 기차역 주변 말고는 인적도 뜸해 번잡한 구석을 찾을 수 없다. 숙소에서 준 대중교통 프리 티켓도 필요치 않다. 그저 작은 소읍의 풍치를 걸어 다니면서 보면 된다. 베른은 스위스 최초로 1983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구 시가지의 골목에는 유럽에서 가장 긴 아케이드가 이어진다. 베른 도시가 생성됐던 12세기 후반에 지어지기 시작해 16세기 중반에 완성된 건물들이다.
그 건물에는 저장고 형태의 반 지하 상점이 늘어서 있다. 엇비슷한 건물 형태에 잠시 길을 잃을라치면 그럴 때마다 이 도시의 시계탑이 랜드마크 역할을 해준다. 시계탑은 감옥탑 이전에 베른의 출입구 역할을 했던 곳. 매시 정각 4분 전, 곰들과 광대들이 나와 춤을 추는 시간. 그 즈음이면 관광객들은 고개를 외로 꼬고 있다. 아랑곳하지 않고 시계탑 아래로 버스들이 오간다.
그것 말고도 자꾸만 시선과 발길을 멈추게 하는 것은 다양한 테마로 만들어진 인형과 석조물이 아우러진 작은 분수들. 거기에 가는 곳마다 만나는 곰 형상들. ‘베른’이라는 이름 자체가 도시를 세운 체링겐 가문이 곰 사냥을 해서 시작됐다는 전설이 내려온다. 뉘데크 다리 건너편에는 곰 공원도 있다.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장미공원 가는 길목이라서 으레 발길을 멈추지만, 왠지 어설프기만 한 곰 공원에 배시시 웃음 짓는다. 그 외 스위스 최대의 고딕양식 건물인 대성당(높이 100m)과 국회의사당 등이 포인트다.
욕심 없이 베른 시가지를 배회하다가 한 유명한 인물을 만난다. 아인슈타인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들이 많을 텐데 왜 베른에서는 거대한 아인슈타인 박물관을 만들었을까? 아인슈타인과 베른은 어떤 연계가 있을까?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고향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취리히 공과대학을 다녔고 베른에 온 것은 직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의 이력은 어느 곳에서나 많이 나오니까 생략하기로 하고 흥미로운 사적인 삶을 들여다보자.
아인슈타인은 취리히 공과대학 동창으로 상대성 이론 논문 작성을 거들었던, 첫 아내 밀레바 마리치와 결혼했다. 그가 결혼해 살았던 아파트는 구 시가지에 ‘아인슈타인 하우스’로 남아 있다. 그런데 역사박물관에서 더 자세하게 아인슈타인의 사생활을 엿보게 된다. 그의 첫사랑은 물론이고 그가 사랑했던 마지막 사랑까지 소개되어 있었다. 오직 연구만 하는 ‘샌님’이라는 고정관념이 확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인슈타인에게는 몇 명의 여자가 있었던 것일까? 아인슈타인은 결혼생활 16년 만에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인슈타인의 간통이었다. 이혼 위자료는 아직 타지도 않은 노벨상의 상금이었다. 아인슈타인은 이혼 후, 달랑 넉 달 만에 내연의 관계였던 사촌 엘자 뢰벤탈과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바람기는 재혼 후에도 잠들지 않아 평생 비서와 유부녀, 소련의 여성 스파이 등 여러 명의 연인을 두었다. 더불어 그는 아이들도 살갑게 돌보지 않았다. 밀레바와 혼전에 얻었던 딸은 출생 이후의 기록이 존재하지 않으며, 이혼 후에는 두 아들과 거의 연락하지 않았다. 둘째 에두아르트는 아버지가 가족을 버렸던 일을 평생 용서하지 않아 두서없는 원망의 편지들을 보내곤 했고, 결국에는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아인슈타인은 1932년 히틀러 집권 3주 전에 아슬아슬하게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미국에서도 생활이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하여튼 유명인들의 ‘가십(gossip)은 오랫동안 호기심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젊은 처녀의 어깨’라는 융프라우 요흐에 올라
베른에서 기차로 툰(Thun)호수 - 스피에츠(Spiez) - 인터라켄(Interlaken)까지 40분 정도밖에 소요되지 않는다. 융프라우 요흐((Jungfrau Joch, 3454m)까지 오르려면 산악열차를 타야 한다. 시작점은 인터라켄의 동역(Ost)이다. 동역에서 라우터브루넨(Lauterbrunnen)까지 올라가 다시 열차를 갈아타면 북벽 아이거 바로 밑 동네인 클라이네 샤이덱(Kl Scheidegg, 2061m)에 멈춘다. 이곳은 융프라우 정상과 그린델발트(Grindelwald, 1034m)로 가는 열차가 두 갈래로 나뉘는 환승역이다. 만년설을 가득 덮고 있는 위풍당당한 아이거 북벽이 우뚝 서 있다. 설산을 눈앞에 두고 마을 길 따라 1~2시간 정도 트레킹을 즐긴다. 가까스로 오르내리는 산악열차와 넓은 초지에 펼쳐지는 야생화, 햇살과 시간에 따라 바뀌어가는 산 그림자, 그림 같은 집들, 작은 호수, 레포츠를 즐기는 사람 등. 그 아름다움의 매력은 군더더기 말이 필요치 않다.
이 마을을 비껴 융프라우 정상으로 이어지는 산악열차에 오른다. 아이거와 묀히의 암반을 뚫고 설치한 톱니바퀴 레일은 총 9.3㎞. 1896∼1912년 건설되었으며, 최대경사도 25도의 압트식(Abt-System)으로 오르는 데 50분이 걸린다. 열차를 내려서는 그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레스토랑도 있고, 초콜릿을 직접 만들어 판매도 하고 한 조각 선물도 준다. 얼음궁전(Ice Palace)을 관람한 후 통로를 따라 나가면 900m 두께의 눈밭, 플래토(Plateau)에 도착한다. 유럽에서 가장 높은 스핑크스 전망대(3571m)가 있다. 북동쪽에는 묀히와 아이거, 남동쪽에는 알레치 빙하, 남쪽에는 알레치호른, 더 멀리에는 몬테로사 산이 있다. 하지만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기상 때문에 온전한 풍치를 보는 일은,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한다. 결국 제대로 보지 못했지만 클라이네 샤이덱 주변에 펼쳐지는 풍광과 그린델발트 마을을 에둘러 봤으니 충분히 행복한 여정이다.
◇007 촬영지, 쉴트호른의 길목 마을, ‘뮈렌’ 아름다워
융프라우보다 느낌이 더 좋은 곳은 쉴트호른(Schilthorn, 2970m)이다. 라우터브루넨(806m)을 기점으로 찾아가야 한다. ‘울려 퍼지는 샘’이란 뜻을 가진 라우터브루넨은 정말로 아름다운 산골 마을이다. 247m의 슈타우프바흐 폭포를 비롯해 70여 개의 폭포가 연이어 높은 암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독일의 대문호 괴테(1749∼1832)는 1779년, 이곳에서 문학적 영감을 얻었다고 전해진다. 낭만파 음악가 멘델스존(1809∼1847)은 폭포 앞에서 괴테와 함께 그림을 그리며 보냈다. 시인 바이런(1788∼1824)도 이 폭포에 시를 남겼다.
폭포를 지나 마을 농장 길을 따라 4㎞ 정도 걸어가면 쉴트호른 케이블카를 타는 곳이다. 5~6번 정도 정차와 운행이 반복된다. 특히 가는 길목에서 만나는, 산비탈을 등지고 사는 뮈렌(Murren, 1650m)이라는 마을은 그림 같이 아름답다. 고요할 정도로 조용한 고산 마을, 거칠고 척박한 높은 산봉우리 속에서도 화사한 꽃 화분으로 예쁘게 꾸미고 가꿀 줄 아는 사람들. 이 마을에 어찌 반하지 않겠는가? ‘이 높은 곳에서 뭐 먹고 살지?’ 하는 한국식 사고가 부끄러워지는 마을이다.
쉴트호른 전망대는 융프라우하고는 다르다. 터널이 아닌 시원한 야외 공간을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융프라우 요흐를 비롯해 묀히와 아이거 봉우리 3개가 한눈에 들어온다. 또 이곳은 유명한 시리즈 영화인 007 촬영장소로 활용되어 마치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 듯한 재미도 준다. 전망대의 식당(피츠 글로리아, Piz Gloria)’은 야외 풍경을 보면서 즐기라고 뱅글뱅글 움직이고 있다. ‘007 제6탄-여왕 폐하 대작전’에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식사한 곳에서 주인공인 것처럼 파스타를 먹는다. 분명코 융프라우만 보고 왔다면 반쪽 여행만 하게 되는 꼴이 될 것이다.
◇귀족, 부자들이 만든 휴양도시, 생 모리츠
한국 여행객 대부분이 융프라우 다음으로 가는 곳은 루체른(Luzern)이다. 필자는 루체른을 거쳐 생 모리츠(ST.Moriz)로 향한다. 스위스 여행 중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열차 여행이다. ‘Express’라는 이름으로 열차 관광 상품이 만들어져 있는데 그중 빼어난 명품 열차가 베르니나(Bernina) 익스프레스다. 베르니나는 스위스를 가로질러 이탈리아로 넘어가는 오래된 산악 열차다. 2008년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열차 코스가 있다. 투시스(Thusis) ~ 생 모리츠(61.6㎞, 알불라 라인), 생 모리츠 ~ 티라노(Tirano)(60.6㎞, 베르니나 라인)를 합친, 122㎞ 구간이다.
이 열차 구간에 생 모리츠가 있다. 생 모리츠는 스위스 동쪽 끝 부분인 그라우뷘덴(Graubunden) 주의 엥가딘(Engadin)산맥 남쪽에 자리 잡고 있는, 세계적인 휴양도시다. 스위스에서는 가장 일조량이 많다. 365일 중 320일이 맑은 마을. 그래서인지 생 모리츠에 도착하면 ‘그 맑음’에 눈이 부시다. 이 마을에는 예로부터 이름난 명사(코코샤넬 등)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스위스가 관광산업을 시작했을 때 돈 많은 영국 귀족들이 유서 깊은 호텔을 세웠고 스위스에서 가장 먼저 전기를 끌어들인 곳도 바로 생 모리츠다. 봅슬레이가 처음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당시엔 영국 귀족들의 스포츠였다고 한다. 그 흔적들이 생 모리츠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마을은 고산을 기대어 터전을 잡았고 그 중간에 호수가 있다.
가파른 언덕이 있는 도르프(Dorf)와 온천이 모여 있는 바트(Bad), 두 마을로 이뤄져 있다. 도르프란 독일어로 ‘마을’, 바트는 ‘온천’이라는 뜻인데, 예로부터 온천으로 유명해 붙여진 이름이다. 호화로운 호텔과 부호들의 별장이 즐비하고, 류머티즘이나 심장병에 효험이 있다는 온천 근처에는 리조트도 들어서 있다. 그저 휴양도시라서 오래된 문화유적도 없다. 긴 역사의 흔적도 없다. 마을에 짙게 내린 가을 풍치와 산정의 겨울 풍치를 보면서 호숫가를 에돌아보면 된다. 흰 설국이 된다면 더 멋질 것이며, 이 도시는 엄청나게 북적거릴 것이다. 생 모리츠를 벗어나면서 자꾸만 미련이 남는다. 너무 아쉬워서 베르군(Bergun, Bravuogn) 역에 내려 한참이나 시간을 소요했다.
또 취리히로 나오는 길목에서는 ‘마이엔펠트(Maienfeld)에서 하룻밤을 유했다. 이 마을은 알프스 소녀 하이디의 배경이 된 곳. 이 마을에는 하이디와 할아버지가 살았던 집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박물관이 있다. 조용한 스위스의 시골마을에서의 하룻밤. 와이너리가 유난히 많은 이 마을의 호텔 바에 앉아 와인 잔을 기울인다. 동네사람들만 왁자하게 떠들던 그날 밤, 여행객의 상념은 깊어간다. 왜 스위스를 떠나는 게 이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단지 고국 떠난 여행객의 짙은 외로움만은 아니었으리라.
교통편 한국에서는 취리히 공항을 경유하는 게 일반적이다. 또 파리, 프랑크푸르트 등 유럽 각지에서 열차가 수시로 연결된다. 취리히 공항에서 베른까지는 1시간 단위로 열차가 오간다. 각 여행지 선택은 다음 일정에 의해 결정하면 된다. 생 모리츠는 이탈리아와 인접해 있고, 베른, 제네바는 프랑스와 통한다.
현지 교통 정보 스위스는 철도가 발달된 도시. 대부분 기차로 이동하면 된다.
스위스 카드 구입하기 스위스 패스는 아주 유용하다. 카드마다 특전이 다르므로 선택을 잘 하는 것이 좋다. 패스를 이용하면 열차는 물론 포스트버스 등 대중교통 대부분을 이용할 수 있으며 케이블카 할인, 박물관 무료 등 혜택이 많다. 머무는 시간이 길지 않다면 날짜에 맞는 카드를 구입하면 된다. 또 스위스 철도는 유레일패스로도 이용할 수 있지만 할인 적용이 다르다. 열차 시간표는 홈페이지(www.rhb.ch)에서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운행 시간은 유럽 전역에서 아주 정확하다.
대표 음식들 퐁뒤(Fondue)가 있다. 기본적으로 긴 꼬챙이 끝에 음식을 끼워 녹인 치즈나 소스에 찍어 먹는 요리다. 18세기 초 알프스의 사냥꾼들이 사냥 중 모닥불에 치즈를 녹여 마른 빵을 부드럽게 적셔 먹은 것에서 유래했다. 또 초콜릿이 유명하니 선물용으로 구입해도 좋다.
숙박정보 스위스는 우리나라에 비해 환율이 높다. 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것보다는 값싼 호스텔을 이용하면 된다. 융프라우나 쉴트호른을 가려면 으레 라우터브루넨을 경유해야 한다. 라우터브루넨의 작은 마을의 밸리 호스텔(Valley Hostel)은 편하게 잘 되어 있다. 생 모리츠는 휴양지라서 숙박 가격이 비싼 편. 유스호스텔을 이용하면 아주 좋다. 스태프들이 친절하고 음식이 아주 맛이 좋다.
화폐단위 유로 대신 스위스 프랑을 쓴다.
언어문제 스위스 인들은 노인층까지도 영어를 잘 구사한다.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아 관광 안내소에는 한국어로 된 팸플릿도 있다.
유의할 점 여행 떠나기 전, 융프라우에 대한 정보는 많이 복잡할 수 있다. 미리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현지에 가면 관광체계가 잘되어 있다. 역에 가서 목적지만 말하면 그들이 알아서 표를 끊어준다. 한국에서는 할인 티켓을 프린트해 가는 게 좋다. 또 여행 중 농장의 철조망을 유의해야 한다. 전류가 흐르고 있어서 가까이 가면 감전의 우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