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확산한 이후 하늘길이 막히고, 해외여행이 위축됐다. 이에 호텔 객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부대시설을 이용하는 ‘호캉스족’이 늘고 있다. 장기간 누적된 여행 욕구를 개별 공간이 보장되는 호텔에서 푸는 문화가 확산한 셈이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명절 연휴조차 고향에 내려가기보다 호캉스로 시간을 보냈다. 여행 플랫폼 야놀자가 이번 추석 연휴(9월 18일~22일, 총 5일)의 국내 여가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호텔 이용률이 전년 연휴 대비 40.7% 증가해 높은 신장률을 보였다. 이에 발맞춰 호텔업계는 다양한 패키지를 속속 출시하고 있다. 특히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실버 호캉스' 상품들이 눈길을 끈다.
메이필드호텔 서울은 가을을 맞아 11만2400여㎡(약 3만4000평) 숲속에서 골프를 즐길 수 있는 ‘도심 라운딩 앤 호캉스’ 패키지를 출시했다. 라운드와 호캉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데다 골프클럽 짐맥클린 골프스쿨 프로에게 개별 레슨을 받은 후 골프장을 이용할 수 있다. 골프는 비거리 300야드, 3개 층 75타석의 완전 자동 티업 시스템을 갖춘 실외 연습장(90분)과 호수와 그린이 펼쳐진 파3 골프장 중 선택 가능하며 11월 30일까지 운영된다.
웨스틴 조선 서울은 필름 카메라로 추억을 남기고 고품질의 LP 음악을 감상하며 아날로그 감성의 호캉스를 즐길 수 있는 ‘폴 인 레코드’ 패키지를 내놨다. ‘레코드(Record)’의 중의적 의미인 기록과 음악이라는 두 가지 테마를 담아 중장년층에게 추억을 선사한다는 설명이다. 패키지 이용객에게 객실 타입에 따라 흑백 필름 카메라와 LP 음악을 들을 수 있는 턴테이블이 제공된다. 오는 11월 21일까지 이용할 수 있다.
콘래드 서울은 65세 이상 노인을 위한 ‘실버 럭셔리(Silver Luxury)’ 패키지를 선보였다.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 톰 크루즈 등 할리우드 연예인이 다녀간 펜트하우스와 스위트룸에서 숙박하며 서울 야경을 즐길 수 있다. 객실에는 뵈브 클리코 샴페인 1병, 콘래드 서울 타워 모양을 모티프로 하여 만든 시그니처 디저트 타워가 마련돼 있으며 세단 차량 픽업 서비스도 있다. 11월 29일까지 예약 가능하며, 투숙은 9월 1일부터 11월 30일까지 가능하다.
건강검진과 호캉스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패키지도 있다. 부산미래IFC검진센터는 지난 5월 같은 건물의 아바니센트럴부산호텔에서 숙박하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있는 ‘HO캉스! 프리미엄 숙박검진 패키지’를 선보였다. 숙박 검진을 통해 검진 전 금식, 식이 조절, 약 복용 등 주의사항을 제대로 지키고 건강 상태를 정확히 체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김대훈 부산미래IFC검진사업부 지원팀장은 “오픈 이벤트로 진행했었던 숙박검진 패키지는 젊은 층보다 중장년층 고객이 비교적 많았다”며 “호텔과 센터가 같은 건물이라 이동이 용이함은 물론이고, 대장내시경을 진행하는 경우 검진 전 금식이나 약 복용 등을 집보다 수월하게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좋은 반응이 나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 패키지 진행에 대해서는 “현재 VIP 검진 항목에 한정해 조식을 포함한 숙박권이 포함돼있는 상태”라고 전했다.
온갖 정치·사회 뉴스와 SNS, 유튜브 등 자극적인 콘텐츠들은 시종일관 현대인을 괴롭힌다. 여기에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유행까지 피로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이에 많은 사람에게 현실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잠시 쉬고 싶다’는 욕망이 생기는 추세다.
이처럼 코로나19 이후 중장년층의 ‘코로나 블루’가 심화되고 있다. 코로나 블루는 ‘코로나19’와 ‘우울감(blue)’이 합쳐진 신조어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일상에 큰 변화가 닥치면서 생긴 우울감이나 무기력증을 뜻한다.
삼성생명 인생금융연구소가 지난해 발표한 ‘중노년기 불안심리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불안 빈도를 물어보는 질문에서 ‘자주 또는 항상 불안하다’고 응답한 비율은 40대가 21.9%로 가장 높았다. 이어 50대 19.5%, 60대 이상 10.8% 순이었다. 불안심리를 촉발시키는 요인으로는 ‘노후 생활에 대한 걱정·미래에 대한 불확실성(20.1%)’이 1위를 차지했다. 이어 ‘코로나19로 인한 감염 우려(19.2%)’, ‘일자리 상실에 대한 염려(8.7%)’가 뒤를 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최근 사람들에게 힘과 활력을 주는 ‘힐링’을 위한 한 방법으로 ‘멍 때리는’ 행위가 인기를 얻고 있다. 모닥불을 바라보는 ‘불멍’, 물을 바라보는 ‘물멍’, 숲을 바라보는 ‘숲멍’ 등 아무 생각 없이 눈앞의 풍경을 바라보며 마음의 편안함을 느낀다는 사람이 늘고 있다.
이런 흐름은 공중파 방송까지 사로 잡았다. 공중파 EBS는 지난해 9월부터 매주 월~목요일 밤 ‘가만히 10분, 멍TV’를 방영한다. 초승달·폭포·연못 속 물고기 같은 자연, 맥반석 김·호떡 굽기 등 요리, 괘종시계·인형뽑기·턴테이블 등 일상의 흔한 소음이나 모습을 아무런 설명이나 장면 전환 없이 있는 그대로 쭉 보여준다.
여러 유튜브 채널들도 일상 소음을 담아 뇌를 자극해 심리적인 안정을 유도하는 ASMR 영상을 우후죽순 업로드하고 있다. 머리 감기, 빗질하기, 귀 파주기, 마사지, 목욕하기, 화장품 바르기, 장난감 가지고 놀기 등 영상 종류도 다양해졌다.
최근 배우 이상이는 예능 프로 ‘나 혼자 산다’에 출연해 물고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뽐내며 직접 집 안에 거대한 어항을 설치한 후 수족관을 찾아가 반려어를 사고, 수초수조를 만드는 등 물멍의 기초 작업 과정을 자세히 보여줬다. 그는 “반려어와 수족관을 하루 2시간씩 그냥 쳐다본다”고 말했다. 물멍을 통해 마음이 정화된다는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실제로 이런 ‘멍 때리기’가 마음을 가라앉히는 명상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멍 때리기로 심장박동수가 안정화하고 뇌에도 휴식을 취하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이동귀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조선일보와 인터뷰에서 “느리게 움직이는 물체를 보면 호흡과 마음이 편안해지는 명상 효과 같은 것이 나타날 수 있다”며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 대한 하나의 반(反)작용으로 멍 때리기가 유행하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덧붙여 “다만 멍 때리며 휴식을 취한다고 직면한 문제가 사라지진 않는 만큼, 이를 도피처로 삼지 말고 현실 문제를 해결하는 시간과 멍 때리는 시간의 밸런스를 잘 맞춰야 한다”고 당부했다.
요즘 레트로가 대세다. 기성세대의 추억으로 여겨졌던 ‘옛 것’들이 최근 젊은 세대 사이에서 ‘레트로 감성’으로 다시 부상하고 있다.
레트로는 과거의 모양·정치·사상·제도·풍습 따위로 돌아가려 하고, 이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로 좇으려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평범했던 일상이 그리워지면서 과거로 돌아가려는 ‘레트로 감성’이 하나의 트렌드로 자리잡았다.
다시 돌아온 LP와 턴테이블의 전성기
스마트폰으로 원하는 음악을 선택해 바로 들을 수 있는 시대다. 하지만 LP(long playing record)와 이를 재생하는 턴테이블(turntable)이 다시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 LP를 경험해본 중장년층뿐 아니라 레트로 트렌드를 주도하는 MZ세대(1980∼2000년대생) 중에서도 집에 턴테이블을 두는 이들이 늘고 있다.
유통업계에 따르면 온라인 쇼핑몰 G마켓에서 올해 상반기 턴테이블 매출은 지난해 동기보다 30% 증가했다. 같은 기간 SSG닷컴의 턴테이블 매출은 44% 뛰었다.
LP도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국내 LP 업계는 MP3 플레이어 등장과 디지털 시대가 오면서 바닥까지 내몰렸었다. 하지만 최근 LP 판매량이 증가세를 보인다. 음반 판매 사이트 ‘예스24’에 따르면 지난해 LP 판매량은 2019년보다 73.1% 증가했다. 2018년 26.8%, 2019년 24%의 증가율을 보이다가 지난해에 급격하게 판매량이 늘었다.
LP와 턴테이블은 특유의 감성과 분위기가 있다. 살아오면서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아날로그적인 작동 방식에서 신선함을 느끼는 셈이다. 중장년층의 추억이 깃든, 그리움을 상징하는 물건이 젊은 세대에게는 못 겪어 본 ‘새로움’으로 작용했다.
기성세대와 조금 다른 MZ세대의 LP 사랑
LP는 기성세대에게 ‘LP판’, ‘빽판’ 등으로 불리지만 MZ세대에겐 ‘바이닐’이란 용어가 더 익숙하다. 바이닐(Vinyl)은 PVC(염화비닐)를 말한다. LP판의 주재료이기도 하다. ‘빽판’이란 단어가 주는 감성은 LP가 빽빽이 꽂혀 있는 DJ 부스를 아는 기성세대가 더 제대로 느낄 수 있듯이, MZ세대가 공유하는 LP의 감성은 ‘바이닐’이라는 단어에 함축돼 있다.
2016년 전후로 이런 문화가 본격적으로 확산돼 감각적인 공간이 속속 생기기 시작했다. 2016년 한남동에 개장한 현대카드의 ‘바이닐앤플라스틱’을 비롯해 음반 구매와 청음이 가능한 젊은 감각의 전문숍이 곳곳에 생겨났다. 단순히 음반만 파는 게 아니라 음악과 관련된 티셔츠, 포스터, 스티커 등 다양한 굿즈를 취급하는 게 특징이다.
과거에는 10곡 이상 담을 수 있는 지름 12인치짜리 LP판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출시되는 ‘바이닐’은 더 다양한 개성을 뽐낸다. 음반 외에 스티커, 화보집 등을 묶어서 소장 욕구를 자극하기도 한다. LP 한 장에 가능한 한 많은 곡을 담아 가성비를 극대화했던 과거와 다르게, 수록곡 수와 관계없이 LP 자체가 하나의 굿즈로 자리 잡았다.
모래시계 보는 요즘 애들
최고 시청률 64.5%를 기록한 드라마 ‘모래시계’는 해방과 6·25 이후 최대의 격동기였던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의 현대사를 배경으로 개성 있는 인물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1995년 ‘귀가시계’라고도 불렸을 만큼 드라마 모래시계를 보려고 직장인들이 일찍 귀가해 서울 시내가 텅 비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나 지금 떨고 있냐”,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같은 명대사도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연예인들에 의해 매번 회자된다.
이 모래시계가 온라인 영상 스트리밍 서비스(OTT)에서 다시 인기다. 특히 모래시계 시청자가 20~30대 젊은 층이라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왓챠에서 모래시계를 시청한 이들 중 절반 이상이 MZ세대였다. 모래시계가 방영되던 1995년에 이들은 너무 어리거나 심지어 태어나지도 않았다.
왕자웨이(왕가위) 감독의 영화들도 이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가장 인기가 많은 ‘중경삼림’(1994년)은 27년 전, ‘타락천사’(1995년)는 26년 전 작품이다. 5060 시니어들에게는 이 작품들이 자신들의 과거이자 추억이다. 하지만 MZ세대에게는 새롭고 신선한 영화인 셈이다.
김효진 왓챠 콘텐츠 사업 담당 이사는 “이제 MZ세대들은 과거의 것을 재해석한 콘텐츠를 넘어 과거의 콘텐츠 자체를 직접 즐기고 주체적으로 소비하고 있다. 늘 새로운 것을 갈망하는 MZ세대들에 의해 20세기의 올드 콘텐츠들이 21세기에 새로운 생명력을 얻어 가고 있다”고 설명했다.
진공관 앰프, 턴테이블, 카세트테이프…. 지금은 자주 쓰이지 않는 음향기기의 가치를 되살리고, 그때 그 시절에만 느낄 수 있던 아날로그의 향취를 전하는 곳이 있다.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2층 ‘수리수리협동조합’이다. 2017년 낙후한 세운상가를 되살리는 ‘다시·세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설립된 수리수리협동조합은 ‘추억을 고쳐드립니다’라는 슬로건으로 연식이 오래돼 고장 난 음향기기를 수리한다. 겉보기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할 것 같은 기기도 이승근(75)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사장의 손길을 거치면 다시 태어난다. 아날로그 음악과 기계가 좋아 55년째 이곳에서 오래된 음향기기를 고치고 있다는 이 이사장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Q. 언제부터 음향기기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아버지랑 청계천 길을 따라 자주 걸어 다녔어요. 길가에 노점 많았는데, 대부분 ‘하꼬방’(판잣집)이라 어수룩했죠. 거기에 있는 음향 시스템을 구경하는데, 신기하더라고요. 소리가 나니까. 길가에 떨어진 거 주워서 장난도 해보고 놀았죠. 그런 순간들이 동기가 돼서 전기·전자 계통에 발을 들이기 시작했어요. 그 후 1964년쯤 고등학교 막 졸업하고 이곳에 왔죠. 그게 지금까지 이어진 거예요.
Q. 기기 수리는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나요?
먼저 홈페이지에 문의를 해요. 문의는 한 달에 100건 정도, 혹은 그 이상 들어올 때도 있어요. 근데 기술자라고 그걸 다 고칠 수 있는 건 아녜요. 수리가 불가능한 것들도 있죠. 그중에 할 수 있는 걸 하는 거예요. 그래도 한 60~70% 정도는 다 고쳐요. 기간이나 가격은 기계 상태에 따라 천차만별인데, 보통은 10일 이상 걸린다고 보면 돼요. 지방에 사는 분들은 택배로도 많이 보내요.
Q. 수리를 요청하는 이들의 연령대는요?
빈티지 오디오를 가진 사람들은 대부분 60대 이상이에요. 60대나 70대 정도죠. 나하고 연배가 비슷해요. 반대로 젊은 친구들 중에서는 돌아가신 부모님이 젊었을 때 애지중지하던 유품을 가져오는 경우가 많아요. 부모님 생각이 나니까 잘 안 되고 고장이 났어도 버리기가 아까운 거죠. 그러다가 그 기기로 음악을 들어보니, 본인들이 듣던 거랑 또 다른 느낌이 드나 봐요. 그래서 더 좋아하고 신기해하는 것 같아요. 이것도 복고 열풍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요.
Q. 한층 위에 있는 음악 감상실도 운영하신다고요. 특별한 계기가 있다면요?
‘다시·세운’ 프로젝트 준비할 때 무얼 해볼까 하다가, 옛날에 다니던 음악 감상실이 생각났어요. 그땐 여기 종로 바닥에 음악 감상실이 많았거든요. 뒤시네, 세시봉, 카네기, 메트로 이런 곳들이 다 전문 음악 감상실이었죠. 그 후에 발전된 형태가 다방이고요. 젊었을 땐 반 정도 미쳐있을 정도로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그 이후에도 음향기기 만지는 일을 하다 보니 자연스레 옛 음악 감상실을 표방한 청음실을 운영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음악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와서 쉬다 가라고 만든 거죠.
Q. 아날로그 음악의 매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빈티지 오디오만의 감성이 있어요. 디지털 음원은 소리가 깨끗하긴 해도 날카롭거든요. 반면 빈티지 오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는 편안하고 구수하죠. 무엇보다 소장 가치가 있잖아요. 옛날 생각은 나는데, 옛날 것들은 자꾸만 사라지니까. 과거는 흘러갔어도 지워지는 건 아니잖아요. 좋고 나쁨을 떠나 추억을 떠올릴 수 있으니 옛것을 애호하게 되는 거죠.
Q. 동년배 시니어에게 들려주고 싶은 노래가 있다면요?
해리 제임스의 ‘잠자는 호수’, 앤디 윌리엄스의 ‘문 리버’를 좋아해요. 해리 제임스는 몇 안 되는 백인 트럼펫 연주자죠. 또 중국 영화중에 ‘스잔나’라고 있는데, 여기에 나온 주제곡들이 다 좋아요. 영화 주인공인 리칭이 부른 곡도 있죠. 이런 노래 들으면 옛날 생각 많이 나요. 내 또래들은 아마 들으면 다 알 거예요.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적어도 음악에서만큼은 ‘백견이 불여일문’이다. LP 음반 속 옛 노래를 두 귀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음악 감상실을 소개한다.
명동 ‘세시봉’, 충무로 ‘카네기’, 종로2가 화신백화점 3층의 ‘메트로’. 이름만 들어도 그때 그 시절이 떠오르는 이곳은 과거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음악감상실이다. 음악을 향유할 방법이 많지 않았던 당시 청년들에게 음악감상실은 흥과 한을 표출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곳이었다. 어느덧 클릭 한 번만 하면 원하는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대가 왔지만, 0과 1로 가득한 오늘날에도 옛 감성을 재현한 공간들이 있다. LP 음반이 돌아가고 최신 가요 대신 올드 재즈가 흘러나오는 곳.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음악감상실은 시대의 변화 속에서도 아날로그를 고집한 이들 덕분에 어딘가에, 여전히 존재해 있다.
백숙집 건물에 숨은 반전 매력 ‘리홀뮤직갤러리’
서울 성북동 누룽지 백숙집 건물. 벽에 붙은 LP 음반 표지를 따라가다 보면 희미하게 들려오는 재즈 선율이 이어서 길 안내를 한다. 소리의 근원지로 가 보니 양 벽을 빼곡하게 채운 LP 음반과 한가운데 놓인 1930~40년대 빈티지 스피커들이 그 위엄을 자랑한다. 위압감에 당황하기도 잠시, 고막을 가득 채우는 진공관 사운드에 홀려 착석한다.
리홀뮤직갤러리는 인쇄업체 경림코퍼레이션 리우식 대표가 2014년부터 운영해온 음악감상실로, 뮤지션을 꿈꿨던 어린 시절의 소망이 깃든 공간이다. 7만여 장이 넘는 LP 음반에, 진공관 스피커 등 음향 시스템 규모도 10억 원이 넘는다. 다루는 장르는 팝·재즈·클래식 세 가지다. 말만 들어도 어마어마한 이곳의 입장료는 음료 포함 1만 원. 방문한 이들이 ‘만 원의 행복’으로 음악을 즐기다 갔으면 좋겠다는 리 대표의 바람이 담긴 값이다.
이곳의 매력은 신청곡을 받으면 그 음악을 잘 표현해주는 스피커로 들려준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머라이어 캐리처럼 성량이 풍부한 가수의 노래는 ‘웨스턴 일렉트릭 15A혼’으로, 비트가 생명인 밴드 음악은 ‘알텍’으로 내보낸다. 재질이나 모양에 따라 표현할 수 있는 소리가 다르기 때문에 한 곡을 듣더라도 그에 걸맞은 스피커로 감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는 알텍으로 들어야 해요. 마치 귀청소를 하는 기분이 들 거예요.”
음악 애호가들이 알음알음 모이는 곳인 만큼, 매달 첫째·셋째 주 화요일에는 올드팝 칼럼니스트 박길호 씨의 팝 강의가 진행된다. 주로 팝 가수의 일생과 철학을 돌아본다. 참여를 원할 경우 전화로 예약하면 된다. 수강료는 1회 2만 원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성북로31길 9
영업시간 매일 12:00~21:30 월요일 휴무
빛바랜 기억 되살리는 ‘수리수리협동조합’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 2층의 한 사무실. 투명한 외벽에 A4 용지 한 장당 한 글자씩 큼지막하게 ‘수리수리협동조합’이라 적어 붙여놓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아래의 ‘추억을 고쳐드립니다’라는 팻말 속 글귀. 안으로 들어가자 수리수리협동조합 이승근 이사장이 직사각형 모양의 기계를 바쁘게 손보고 있었다. 1960년대에 만들어진 진공관 오디오라 했다.
2017년에 설립된 수리수리협동조합은 ‘수리수리 수리실’과 ‘수리수리 청음실’로 구성돼 있다. 수리실은 ‘수리수리 얍’이 연상되는 이름에 걸맞게 고장 난 옛 음향기기를 마법처럼 고친다. 온라인 홈페이지나 전화로 상담을 한 뒤 기기를 가져오면 이 이사장이 직접 수리한다. 연식이 오래된 기기일수록 잔병치레를 자주 하는지 매달 100여 건의 문의가 이어진다.
“빈티지 오디오를 가진 사람들은 나랑 연배가 비슷해요. 60~70대가 많이 찾죠.”
청음실은 수리실 바로 위층에 있다. 젊은 시절 음악감상실을 자주 다녔던 이 이사장이 자신의 옛 추억을 떠올리며 직접 제안한 공간이다. 그래서인지 인테리어에서부터 아날로그 감성이 진하게 풍긴다. 조용필과 강수지 앨범이 진열돼 있는 이곳에서는 국내 가요를 비롯해 추억의 음악을 무료로 들려준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소장한 LP 음반을 가져와 턴테이블에 직접 올려보는 1일 DJ 체험(?)이 청음실만의 쏠쏠한 재미. 집에 턴테이블이 없어 LP 음반을 관상용으로 묵혀두고 있다면, 먼지만 가볍게 털어내고 세운상가로 데려가보자.
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계천로 159 세운상가
영업시간 평일 10:00~18:00 주말 및 공휴일 휴무
DJ가 들려주는 클래식 퍼레이드 ‘황인용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
지도 앱에 현 위치를 알려주는 파란색 동그라미 표시가 목적지와 가까워진다. 곧 대형 창고나 컨테이너를 연상케 하는 회색빛 콘크리트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단단한 철문을 열자 바그너의 ‘교향곡 C장조’ 1악장이 내부를 가득 울린다. 벽 쪽 통유리 천장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은 바그너의 선율에 맞춰 춤을 춘다.
‘황인용뮤직스페이스 카메라타’는 16년간 자리를 지킨 파주 헤이리마을의 터줏대감이다. 이곳의 주인은 ‘밤을 잊은 그대에게’ 등 1970~80년대에 라디오 DJ로 활약했던 황인용 전 아나운서다. 오랜 세월 청취자와 소통하며 음악의 매력에 푹 빠져 살았던 그는 2004년 자신만의 음악감상실을 차렸다.
카메라타를 라디오에 비유하면 클래식 채널이라 할 수 있다. 오직 클래식만 취급하기 때문이다. 황 전 아나운서가 직접 모은 2만여 장의 LP 음반도 대부분 클래식 앨범이다. 피아노의 부드러운 소리와 첼로의 웅장한 저음은 ‘웨스턴 일렉트릭’, ‘클랑필름’ 등 1920년대 미국과 유럽 극장에서 사용하던 스피커들과 만나 한층 더 풍성해진다.
공간은 3층 규모로 높고 널찍하며 2인석부터 6인석까지 완비돼 있어 가족 단위의 손님이 많이 찾는다. 두 명이 방문한 경우에는 대부분 스피커를 바라보고 나란히 앉아 조용히 감상을 한다.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는 일반 카페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르다.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연주회가 열린다. 연주가 끝나면 전문가의 곡 해석이 이어져 클래식 음악을 잘 모르는 이들도 부담 없이 공연을 즐길 수 있다. 카메라타는 이탈리아어로 ‘동호인 모임’을 뜻한다. 이름의 의미처럼 클래식 입문자 혹은 마니아들이 아지트로 삼기에 좋은 곳이다. 입장료는 1만 원. 차 한 잔과 머핀이 제공된다.
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헤이리마을길 83
영업시간 평일 11:00~21:00 주말 및 공휴일 11:00~22:00
요즘 애들처럼 놀아볼까? ‘만평 바이닐 뮤직’
‘뉴트로’(New+Retro)가 유행하면서 젊은 세대들에서도 복고 콘셉트의 음악감상실이 인기다. 그중 ‘만평 바이닐 뮤직’은 2030세대의 집합소다. 이곳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찾기 힘들다. 간판이 작거나 없는 ‘요즘 감성’에 특화된 곳이기 때문.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다. 목적지 근처에 가면 조용한 골목 에 음악소리가 새어나오는 건물이 보인다. 만평은 시티 팝을 틀어주는 몇 안 되는 바이닐 바다. 이곳을 다녀온 이는 “1980년대 버블경제 한가운데서 술 마시는 느낌이 난다”고 평한다. 이외에도 펑크, 디스코 등 비트 있는 음악을 주로 선보인다. 매주 금요일과 토요일에는 DJ의 공연이 열린다. 손님이 DJ에게 맥주를 건네고 선 채로 음악을 즐기는 등 동적인 분위기가 낯설 수 있지만, 리듬에 몸을 맡기다 보면 절로 흥이 오를 것이다. 입장료는 3000원이다.
주소 서울특별시 마포구 토정로 27 2층
영업시간 매일 19:00~02:00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 DJ 정상묵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흐르는 강가를 거닌다.
‘인생은 비장한 것’이라며 창조주가 속삭이는 삶의 메시지를 밤새 들은 듯하다.
결국 선택은 내가 하는 것이고 그 책임은 모두 나의 것이다. 멈출 수 없는 인생의 길이 외롭지 않기를…. 음악을 벗 삼아 평생 힘든 생태농업의 길을 걸어온 정상묵 씨를 만나 그가 사랑한 음악 이야기를 들어봤다.
몇 살인지도 모를 만큼 어린 시절이었다. 꼬마 정상묵은 전쟁이 끝난 후 혼란의 소용돌이 중 창궐하던 홍역에 걸려 앓아누웠다.
어른들이 방 바깥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해 몸에서는 불이 나는데 방 안에서 뒹굴뒹굴하기만 했다. 너무 답답해 손가락에 침을 묻혀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살랑거리는 바람에 코를 킁킁거리고 있을 때였다. 마당에서 아름다운 음악소리가 들렸다. 몸은 뜨겁고 온몸이 간지러워 미칠 것 같던 그때, 들려오는 음악이 너무 아름다워 안에서 뜨겁게 내뿜던 열기와 간지러움도 잊고 잠시 넋을 잃고 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음악 감상은 강렬한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당시 꼬마의 귀에 환상의 소리로 들려왔던 그 음악을 다시 듣게 된 건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후였다. CBS 방송을 틀어놓고 일을 하다 흘러나오는 음악소리에 마치 감전된 듯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단다. 이 음악을 도대체 언제 들었지? 무슨 음악이었지? 며칠을 고민하다 어느 날 갑자기 어린 시절 창호지에 코를 박고 들었던 기억 속의 선율이 스쳐 지나갔다.
아! 맞다. 그 음악이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음악의 제목을 알 수 없었다. 그때부터 CBS 방송 주파수를 고정하고 좋은 음악이 나오면 무조건 귀를 쫑긋하며 들었다. 제목을 쓰고 외우길 반복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꿈에 그리던 그 음악을 다시 들을 수 있었다.
정상묵 씨를 음악의 세계로 이끌었던 그 곡은 바로 베토벤의 ‘로망스 제2번 F장조 op. 50’. 바이올린과 오케스트라 협주곡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클래식 음악은 물론 당시 젊은이들의 가슴을 들뜨게 했던 미국의 포크, 영국에서 시작해 전 세계적으로 대유행을 하던 비틀스 노래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선율에 귀를 맡겼다.
당시 즐겨 듣던 미국 포크 음악의 대부인 피트 시거의 대표곡 ‘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 비틀스의 ‘Ob-La-Di, Ob-La-Da’와 ‘Hey Jude’와 ‘Let it Be’, 사이먼&가펑클의 ‘Bridge Over Trouble Water’ 등은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즐겨 듣는 노래 중 하나다.
“당시 비틀스 음반 한 장 가격이 160원이었어요. 넉넉지 않은 생활이라 음악에 대한 갈증은 라디오로 많이 풀었죠. 그러다 꼭 사고 싶은 음반이 있으면 무슨 일이 있어도 카세트테이프나 LP 음반으로 사서 듣곤 했습니다.”
정상묵 씨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악기 연주에 대한 꿈으로 이어졌다.
카세트테이프로 감상했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기타 연주는 너무 많이 틀어 중간중간 끊어지기도 했다. 그때마다 겨우 이어 붙여 듣곤 했는데 늘어지고 해져서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지경이 돼서야 그의 손을 떠날 수 있었다. 이때 들었던 기타 소리가 너무 좋아 이 곡을 연주하겠다는 목표로 기타를 배우기 시작했단다. 당시 기타를 연습할 때 쓰던 너덜너덜해진 교재는 아직도 갖고 있다. 오랫동안 몸에 익은 곡이라 가끔 연주해보곤 했는데 2년 전, 손가락 세 개의 신경을 다치는 바람에 더 이상 기타를 들지 못하게 됐다.
신의 독백 같았던 베토벤의 ‘합창’과 하이든의 ‘황제’
LP 음반을 사기 시작한 건 1970년대 후반부터였다. 당시에는 듣고 싶은 음반을 사는 게 즐거움이었다면, 2000년대부터는 동묘와 신설동 시장 사이에서 열리는 풍물시장, 명동 회현역 지하상가 등 귀한 음반을 판매하는 곳은 어디든 가봐야 직성이 풀렸다.
주말만 되면 LP를 사러 갈 생각에 설레어 잠을 설칠 정도였다. 장당 1000원에 보석 같은 원반을 발견할 때는 온몸에 엔도르핀이 솟구쳤다. 흥분된 마음으로 위대한 음악을 들으며 밤을 지새운 후, 새벽 물안개 낀 두물머리 강가를 거닐곤 했다는 정상묵 씨. 그에게 음악은 인생을 성찰하며 뚝심 있게 앞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옆에서 조언해주던 친구 중의 친구, ‘절친’이었던 셈이다.
동묘 풍물시장에서 찾아낸 가장 값비싼 보석은 유진 오르먼디가 지휘하고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을 7장으로 녹음한 세트 음반이다. 1966년 콜롬비아사에서 발매한 이 음반 세트가 포장도 뜯기지 않은 상태로 눈에 띄었을 때 심장이 두근거리며 뛰던 그 느낌을 아직도 잊을 수 없단다.
그날 그는 베토벤 교향곡 9곡 전곡이 담긴 LP 음반 세트를 지갑에 있던 돈 1만2000원과 바꿔 손에 넣고는 부리나케 두물머리로 돌아왔다. 음반을 들을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날 밤은 그렇게 턴테이블에 LP를 올려놓고 홀딱 새웠다. 정상묵 씨가 그동안 모아놓은 음반은 1만여 장. 이 중 80%는 클래식 음반이고 베토벤 작품 LP는 300여 장에 달한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제9번 ‘합창’이다. 10명의 지휘자들이 연주한 작품들을 수집해 각각의 연주 특색을 체크하면서 감상하고 있다. 연주자의 반음 미스 터치까지 들릴 정도라 하니 득음의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상묵 씨는 작곡가의 의도를 재현하는 지휘자들의 다양한 표현을 캐치하는 게 클래식 음악을 듣는 즐거움 중 하나라 했다. 지휘자에 따라 연주시간이 10분 이상 차이가 나기도 하는데 음악을 감상하는 데 이력이 생기면 지휘자들의 이러한 세밀한 표현법의 차이를 느낄 수 있다고.
초보자를 위한 클래식 길라잡이
‘두물머리 명반 감상실’은 지난 2009년 문을 열었다. 매월 셋째 주 수요일, 두물머리에 위치한 문화공간 두머리 2층 음악감상실에서 열리는 명반 감상회는 대구, 마산, 서울 등 각 지역에서 ‘두물머리 정상묵’의 명성을 듣고 올라온 음악 애호가들이 함께 음악을 감상하고 이야기를 나누는 친목 모임이다.
한창 왕성하게 활동할 때는 음악감상실이 꽉 찰 만큼 참가자가 많았지만 지금은 20여 명의 회원들이 정기적으로 만나는 정도다. 이 만남마저도 코로나19 사태가 터진 후에는 힘들어 요즘은 개점휴업 상태다.
자연 속에서 음악을 들으며 사는 삶을 꿈꾸는 은퇴자가 많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소 음악을 듣는 생활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 한다. 특히 클래식 음악은 어느 정도 귀가 열려야 감상할 수 있으므로 사전 정지 작업이 필요하다.
정상묵 씨가 추천하는 방법은 클래식 FM 라디오를 무조건 틀어놓고 생활하기다. 제목도, 연주자도, 지휘자도, 오케스트라 이름을 몰라도 그저 듣는 것이다. 생활 속에서 클래식 음악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위한 첫 발자국이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음악을 들으면서 내 안에 샘솟는 슬픈 감정 혹은 기쁜 감정을 유추해 그 감정에 깊게 빠져보는 것이다.
정상묵 씨는 음악이 주는 깊은 감정의 세례를 맛봐야 음악으로부터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서 음악과 감정을 하나로 만들 것을 조언했다.
정상묵 씨는 누구?
1952년생. 한국 유기농의 모태라 불리는 ‘정농회’(正農會)에서 생명농업의 중요성에 눈을 뜬 후 양평군 양서면 일대, 일명 두물머리 지역에서 1976년부터 유기농업을 시작한 농업인이다. 1975년 대도시 서울의 식수원인 한강 상류에 위치한 양평, 팔당이 상수원 보호구역으로 지정되면서 농약을 사용하지 못하게 되자,
이 지역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농업인들과 함께 팔당 일대를 유기농 생태농업의 메카로 만들었다.
이후 ‘정농회’, 사단법인 ‘환경농업단체연합회’, ‘팔당친환경생산자연합회’, 영농조합법인 ‘팔당생명살림’을 이끌며 한국의 생태농업인으로서 결코 쉽지 않은 삶의 길을 걸어왔다. “힘든 길을 지치지 않고 꾸준히 걸을 수 있게 해준 건 순전히 음악의 힘이었다”고 말하는 자기고백 속에 그동안 그가 겪었을 온갖 어려움과 고난의 무게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정상묵 씨가 꼽는 내 인생의 음악
베토벤 교향곡 제9번 op.125 ‘합창’ | 베토벤은 자신을 천재로 자각했던 것 같다. 인류에게 뭔가를 남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합창’ 1악장을 듣다 보면 마치 하늘의 별들이 지구를 향해 쏟아지는 듯한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천재적인 작곡가가 자신의 삶을 바쳐 작업한 음악들은 들어봐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제5번 op.73 ‘황제’ |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면 이 음악을 들으며 고민했다. 특히 1악장을 들을 때는 선택 후의 여러 갈래에 대해 고려해본다. 2악장은 비장함에 차 있다. 결국 삶의 선택에 대한 모든 책임은 내게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인생을 비장하게 살아야 한다는 뜻 아닐까? 베토벤이 내게 주는 의미를 멋대로 해석한 셈이다. 우주를 창조한 조물주가 베토벤에게 읊조리는 것을 선율로 만든 것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일몰시간에 이 곡을 듣다가 나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적이 있다. 아이를 키울 때는 2악장만 따로 녹음해 계속 들었다.
베토벤 현악 4중주 0p.130 ‘카바티나’ | 1977년 태양계 탐사를 위해 쏴 올린 무인우주탐사선 보이저 1, 2호에 실린 지구의 메시지 음악이다. 당시 이 탐사선에는 외계인을 만났을 때 지구를 알릴 수 있도록 54가지 언어로 각종 메시지를 담은 레코드를 실은 바 있는데 외계인이 언어를 이해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레코드 마지막 트랙에 1시간 30분짜리 분량의 음악을 선곡해 실었다. 그 곡이 바로 베토벤의 ‘카바티나’다. 지구를 대표해 외계인에게 보내는 음악이라니… 지금은 태양계를 벗어나 인터스텔라를 떠돌고 있을 보이저 1, 2호에서 계속 플레이되고 있을 이 음악을 감상해보라. 들어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피트 시거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 | 피트 시거는 미국 포크계의 전설이다. 밥 딜런, 존 바에즈 등과 함께 반전평화운동을 벌이며 자신의 의지대로 살았다. 나이가 들면 세상과 타협하며 좋은 게 좋은 거지 하며 산다고들 하는데 피트 시거는 미국의 매카시 광풍도 이겨내고 정말 옹골차게 살았다. 92세였던 지난 2011년 ‘월가 점령 시위’를 응원하기 위해 뉴욕 맨해튼에서 열린 공연에 참가했다는 뉴스를 보고 참 많은 것을 느꼈다.
월가 점령 시위대들이, 존 바에즈의 노래로 더 유명해진 시거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를 함께 부르며 나아가는 걸 뉴스 화면으로 봤는데 전율이 느껴지더라. ‘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나?’(Where Have All the Flowers Gone?)는 원작자 시거의 음반뿐 아니라 피터 폴&메리, 존 바에즈, 나나 무스꾸리, 시티(독일 밴드) 등 자신의 색깔을 확실히 갖고 있는 뮤지션들의 다양한 버전을 소장하고 있다. 요즘은 유튜브로도 듣는 나의 ‘최애’ 노래다.
가슴에서 잊히지 않는 추억 속 음악. 그 곡이 수록된 앨범은 지금까지 몇 장이나 팔렸고 현재 가격은 얼마일까. 그때 그 시절 추억의 영화음악과 희귀 음반의 가치를 살펴봤다.
추억 속에는 항상 음악이 있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몰려다니며 즐겨 들었던 음악이나 연인과의 애틋한 시간을 만들어준 음악, 또 기쁘거나 슬픈 순간을 함께한 음악, 남자라면 군대에서 외로움을 달래준 음악도 있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 이런 음악을 우연히 듣게 되면 의지와 상관없이 추억이 떠오른다.
그중에서 오리지널사운드트랙(OST)은 영화 속 추억의 장면으로 빠져들게 한다. 단순한 배경음을 넘어 스토리를 이끌어 몰입시키는데, 관객은 마치 자신이 영화 속 주인공이 되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런 영화음악은 오랜 세월이 흘러도 추억의 명곡으로 회자된다. ‘영화는 가도 음악은 남는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영화 속 OST 앨범 얼마나 팔렸나
영화 ‘보디가드’(1992년)에서 배우 케빈 코스트너가 휘트니 휴스턴을 받쳐 안았을 때 나오는 음악 ‘I´ll Always Love You’는 보디가드 신드롬을 일으킬 정도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당시 빌보드 차트 14주 연속 1위를 점령하는 대기록을 세웠으며, 이 곡이 수록된 앨범은 현재까지 가장 많이 팔린 음반으로 꼽힌다. 1993년 불황 속에서도 1000만 장 넘게 팔렸고, 현재까지 4500만 장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 중이다.
1970년대 말 디스코 열풍을 전 세계로 확산한 ‘토요일 밤의 열기’(1977년)도 만만찮다. 무명 배우였던 존 트라볼타를 한순간에 청춘의 우상으로 만든 이 영화에는 영국 록 그룹 비지스의 사운드트랙 ‘Night Fever’를 비롯해 ‘Stayin´ Alive’, ‘How Deep is Your Love’ 등이 담겼다. 이 앨범에 수록된 사운드트랙 가운데 4곡은 싱글 차트 1위에 랭크되는 기록을 세웠고, 누적 판매량은 4000만 장에 달한다.
또 존 트라볼타의 영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해 대성공한 ‘그리스’(1978년)는 존 트라볼타와 올리비아 뉴튼존의 노래와 춤 앙상블로 기억된다. 이 영화 속 사운드트랙은 1978년을 미국 역사상 음반산업이 가장 맹위를 떨친 시절로 만들었다. 앨범에는 엘비스 프레슬리의 ‘Hound Dog’과 그룹 마르셀스의 ‘Blue Moon’, 리틀 앤소니 앤 더 임페리얼스의 ‘Tears on My Pillow’ 등이 수록됐으며, 현재까지 3800만 장이 팔렸다.
‘더티 댄싱’(1987년)도 빼놓을 수 없다. 영화의 마지막에 패트릭 스웨이지가 제니퍼 그레이를 양손으로 받쳐 번쩍 들어 올리는 순간은 잊히지 않는 명장면으로 회자된다. 또한 춤을 소재로 한 영화인 만큼 사운드트랙의 인기도 엄청났다. ‘The Time of My Life’, ‘Be My Baby’ 등이 수록된 이 앨범은 1998년 5월에 빌보드 차트 정상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 앨범의 누적 판매량은 3200만 장이다.
셀린 디온의 목소리도 좋지만, 연주곡도 많은 사랑을 받은 ‘타이타닉’(1997년)의 사운드트랙 역시 추억 속으로 빠져들기 충분하다. 이 영화의 음악을 맡은 제임스 호너는 웅장하면서 서정적인 선율이 돋보인 음악을 넣어 감동을 줬다. 메인 테마인 ‘My Heart Will Go On’과 ‘The Sinking’, ‘Death of Titanic’ 등은 두 남녀 주인공의 애틋한 사랑을 아름답게 승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앨범은 그동안 3000만 장이 판매됐다.
◇시대를 대변하는 ‘옛 음반’의 가치
추억을 여는 열쇠는 영화 속 명장면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살아오면서 기억에 남는 순간에는 늘 음악이 함께 있었다. 인터넷의 발달로 언제든 원하는 음원을 다운받거나 스트리밍서비스를 이용할 수도 있다. 구하고 싶은 LP(Long Playing) 음반은 인터넷 사이트나 옛 레코드 가게에서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찾는 앨범이 희귀 음반이라면 품을 많이 들여야 한다. 이젠 구할 수 없는 앨범도 있다. 생산량이 많지 않고, 대량 폐기됐거나 쉽게 버려진 탓에 남은 수가 매우 적어서다. 이런 희소성 때문에 소위 ‘상태가 좋으면 부르는 게 값’이다. 이런 앨범은 일부 음반 수집가만이 소유한 경우가 많은데, 이들의 거래 소식을 통해 그나마 대략적인 가격을 알 수 있다.
음반 수집가들이 뽑은 국내의 희귀 음반 중 최고가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1926년)가 수록된 앨범이 꼽힌다. 이 곡은 윤심덕이 연인이었던 극작가 김우진과 현해탄에 투신하기 전 죽음을 결심하고 부른 노래로 알려지면서 당대 조선 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았다. 국내에서 실체가 확인된 음반은 6장 정도로, 수집가들 사이에서 6000만 원에 거래된 적이 있다. 현재 중고음반 거래시장에서의 가격은 1억 원이 넘을 거라는 얘기도 나온다.
김연실의 ‘아리랑’(1930년)이 실린 음반은 초창기 한국 대중가요가 영화음악과 관련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현재 1000만 원이 넘는 가격에 거래되고 있다. 또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 우승을 기념한 채규엽·손기정의 ‘마라손 제패가’(1936년) 음반은 당대 최고 가수였던 채규엽의 노래와, 손기정 선수의 당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희소성이 높다. 이 음반 가격은 1500만 원 정도로 평가받는다.
퇴폐적인 가사라는 이유로 두 차례 금지곡이 된 박신자의 ‘땐사의 순정’(1959년)이 실린 음반은 1950년대 여성들의 춤바람이 사회적 문제가 된 시대상을 반영해 수집가들 사이에 인기가 높다. 이 앨범은 200만 원에 거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조용필의 데뷔 앨범 ‘뮤지칼 사랑의 일기’(1971년)도 희귀 음반으로 구분된다. 재밌는 사실은 앨범 재킷 뒷면에 나온 이름이 ‘조영필’로 잘못 표기돼 있다는 점이다. 이 앨범은 300만 원 수준에서 거래되고 있다.
◇세상에 한 장뿐인 음반 값은 얼마?
해외에서는 비틀스 멤버들이 베트남전쟁에 반대한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 머리 잘린 인형, 피 묻은 고깃덩어리를 안고 찍은 사진을 재킷에 사용한 ‘Yesterday and Today’가 희귀 앨범에 속한다. 1966년 발매되자마자 재킷 사진 논란으로 회수 조치됐기 때문이다. 이 앨범은 지난해 경매에서 23만4000달러(약 2억7700만 원)에 낙찰됐다.
프린스의 열 번째 앨범 ‘The Black Album’은 원래 세상에 내보내지 않기로 한 앨범이었다. 1987년 프린스의 변덕으로 초판 50만 장을 출하 직전 전량 폐기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홍보용 음반을 받은 관계자 몇 명이 폐기 약속을 어기고 몰래 음반을 간직하면서 희귀 앨범이 됐다. 2016년 프린스가 세상을 떠나고 1년 뒤 세상에 나온 이 앨범은 4만2298달러(약 5010만 원)에 팔렸다.
희귀 음반의 끝판왕이라면 힙합그룹 우탱 클랜의 앨범 ‘Once Upon a Time in Shaolin’일 것이다. 2008~2013년까지 녹음해 단 한 장만 찍은 앨범이기 때문이다. 우탱 클랜은 이 음반을 발매하면서 2103년까지 음반에 실린 곡들을 공개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다만 단 한 장만 존재하는 이 앨범을 파티 등 공적인 장소에서 틀지의 여부는 소유자의 권한이라고 밝혔다. 2017년 이베이에서 102만5100달러(약 12억1400만 원)에 낙찰됐다.
회현지하쇼핑센터로 떠나는 ‘추억여행’
옛 레코드 가게가 있다는 서울 중구 회현지하쇼핑센터로 향했다. 예전에 이곳은 최신 가요와 팝송은 물론 희귀 음반도 구할 수 있다는 소문에 음악 좀 듣는다는 이들의 성지로 불렸다. 1990년대 중반까진 그랬다. 그런데 이곳을 찾은 날, 20~30대로 보이는 손님이 자주 보였다. 중장년층의 전유물로 생각했던 LP 음반인데, 최근에는 젊은 손님이 늘었다고 했다.
젊은층이 이 음반의 매력에 빠진 건 아날로그 감성 때문일 것이다. 그럴 만도 한 게 LP 음반은 모든 음역대를 왜곡 없이 담아낸다. 그러나 MP3와 CD는 고역대와 저역대의 일부를 잘라내서 인위적인 소리가 난다. 아무리 기술이 발달해도 아날로그를 완벽히 대체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곳의 터줏대감인 리빙사를 둘러봤다. 진열대 바닥부터 천장까지 LP 음반으로 빽빽하게 채워져 있다. 총 8만여 장의 중고 LP 음반이다. 음반 찾는 걸 도와 달라고 하니 직접 찾아보길 권했다. 진열장을 하나하나 넘기다 보면 예상치 못한 희귀 앨범을 발견할 수 있다고.
고른 음반은 가게 안 턴테이블에 직접 올려 감상할 수 있다. 음반이 올라간 턴테이블이 빙글빙글 돌고 카트리지의 바늘이 내려앉으니 ‘지지직’ 짧은 잡음 뒤로 음악이 흘러나왔다. 입체감이 살아 있는 묵직한 소리가 세대를 거슬러 과거와 현재를 잇고 있다.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지면 공연장의 공기는 일순 긴장한다. 준비됐는가. 이제 모두 날아오를 시간이다. 가수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노래의 첫 소절을 몸 밖으로 밀어낼 때, 무대와 객석의 시간은 새로운 표정으로 흘러간다.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몰아(沒我)의 순간. 가수는 노래하는 자신을 잊고, 관객은 그 몰입에 취해 역시 자신을 잊는다. 시간은 황홀하게 타오르고, 순간은 확장된다. 이 순간은 일회적이고 영원히 불가역적이다. 삶은 찰나적으로 완성되고, 존재는 충만해진다. 화인(火印)과도 같은 그 강렬한 시간은 각자 개별적이고 절대적 삶의 무늬가 된다.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우리를 실존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하는 예술 장르는 음악이 유일하다. 음악을 추억하는 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던 내 삶의 가장 높고 거룩했던 한때를 되새기는 것이다. 삶은 덧없고 허망하지만, 음악이 빚어내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어 그 허망함을 잠시라도 잊는다. 음악은 삶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영혼의 재화다. 부와 명예와 지위를 얻은들,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또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렌즈다. 그 렌즈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구성한다. 이 세상에는 각자의 음악으로 구축한 무수한 평행 우주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곁에 있지만, 나의 세계로 절대 들어올 수 없다.
눈물겹도록 곤궁했던 젊은 시절, 나는 음악이 있어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 노래가 많았다. 그 뜨거움에 의지해 청춘의 한때를 걸어 나왔다. 그때 음악은 내게 종교적 힘을 준 경전이었다.
들국화 전인권의 샤우팅이 솟구쳐 오를 때, 나는 실재하는 감각으로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 아득하고 아찔한 목소리와 함께 내 청춘의 한낮도 작렬했다.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도도하게 울려 퍼질 때, 이념의 격정이 들끓던 광장과는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은 존재의 고독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들국화는 도덕적 엄숙주의의 시대에, 개인적 욕망의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김현식의 노래는 위험하고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일탈과 자학을 삶의 양식으로 삼았다.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듯 절규했다. 이 날것의 샤우팅은 ‘분노와 슬픔’의 자식인 블루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지적 무늬가 있는 전인권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넋두리’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유작인 5집 수록곡이다. 이 곡에서 “갈 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이라며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비웃으며, 단말마적 비명처럼 노래를 토해냈다. 그는 삶과 노래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지금껏 나의 애국가다. 절묘한 리듬 기타 위로 장장 8분 동안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신중현의 기타와 함께 삶이 고동치고 세계가 출렁인다. “실바람이 불어오는” 이 땅과 “붉은 태양이 비추는” 저 바다를 주유하는 대서사가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 끝없이 다정해”라고 대단원에 이를 때, 다정(多情)이라는 단어에 연민의 물기가 고인다.
관계의 괴로움 때문에 우울한 날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어떤 시원(始原)을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을 마주하면, 나는 다시 푸른 신생의 설렘을 얻어 살 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김정호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사람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에겐 목숨 한 줌과 노래 한 소절을 기꺼이 맞바꿔버린 듯한 처절함이 있어, 그의 노래가 끝나면 삶의 한 시절이 닫히는 듯했다. 평생 고독과 허무를 자기 집으로 삼은 그는, 자신의 노래 ‘하얀 나비’처럼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는 1000억 원에 가까운 전 재산을 불교계에 통째로 시주한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 만도 못해.” 김 여사는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이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삶의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의 노래 한 줄만 못해.”
지난 2013년 들국화 재결성 앨범을 녹음하던 중, 전인권이 화장실에 가 거울에 비친 초로의 자신과 마주쳤다. 그 순간의 감회를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녹음 부스 안에는 청년이 있었는데, 화장실 거울 안에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이었지만, 노래를 녹음하는 순간의 전인권은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음악은 늙지 않는다. 음악은 시간의 물리성을 거슬러, 모든 순간을 처음처럼 갱신한다.
오늘밤 오래된 LP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삶의 턴테이블에 올려보자. 내 몸 안에 숨어 있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사금파리처럼 다시 반짝일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이자 음악 레이블 ‘JNH뮤직’ 대표. 가수 정미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툭! 톱질이 멈추자 나무 조각이 떨어진다. 바닥에 쌓인 부스러기가 많아지는 만큼 그의 마음도 홀가분해졌다. 그간의 과오가, 미련이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수입이 막막한 지금의 사정이나 쪼그라든 통장 따위는 잊은 지 오래. 그에겐 눈앞에 놓인 나무만이 전부였다. 서울남부기술교육원에서 만난 김유(金維·49) 씨는 “앞으로 내가 살길을 찾은 것 같다”며 환하게 웃었다.
“세상을 쉽게 본 것이 실수였죠.”
그가 털어놓는 고생의 폭과 깊이에 비해 목소리는 무척이나 담담했다.
“원래 대기업 급식사업부에서 일했어요. 외부 기관 급식사업을 관리하고, 임직원을 위해 운영되는 사원매장 기획업무를 봤죠. 이 일을 배우려고 친구 아버지가 운영하는 유통 회사에서 무급으로 근무했던 것이 높은 평가를 받아 들어갈 수 있었죠. 입사 이후에는 세상이 너무 쉬워보였어요. 공급업체 사람들과의 원활했던 관계는 갑과 을이라는 위치에서 나온 것인데 저의 선의 탓이라고 믿었죠. 회사 동료와의 믿음도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너무 순진했었죠.”
그렇게 그는 어렵게 입사한 회사를 박차고 나온다. 직접 공급업체를 운영하면 돈을 쉽게 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만만치 않았다. 사람들은 적으로, 갑으로, 남으로 변해갔다. 결국 시작한 사업은 얼마 되지 않아 무너졌다.
사업 실패 후유증, 공예로 극복
“식자재 납품사업을 접고 나서 먹고살기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했죠. 무게 단위로 옷을 떼다가 파는 의류 도매업까지 닥치는 대로 해봤지만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어요. 실패가 거듭되면서 의욕이 점점 떨어졌죠. 역설적이게도 용기를 준 것은 통장 잔고였어요. 다 떨어져가는 돈을 보면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래서 하루에 두세 갑 피우던 담배도 끊고 새롭게 출발할 방법을 찾기 시작했어요.”
나락으로 떨어져버릴 것만 같았던 시절, 김 씨가 선택한 것은 목공이었다. 어릴 때부터 미술에 관심이 많았지만 보수적인 집안 분위기 때문에 미대에 진학하고 싶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지도 못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있었던 누님조차 일반 학교로 진학하는 것을 보고 그는 꿈을 접어야 했다.
“뭘 할까 고민하던 차에 떠오른 것이 나무였어요. 취미로도 다뤄본 적이 없었는데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기는 거예요. 어디서 배우면 좋을까 고민하다가 한국문화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전통공예건축학교를 알게 됐어요. 그 길로 바로 소목반 입학 신청을 했죠.”
소목은 건물의 창호나 목기, 목가구 등을 제작하는 전통 목공예 기법 중 하나다. 소반과 같은 단순한 것부터 보석함, 서안, 찬탁까지 소목을 통해 제작되는 가구는 다양하다.
이단 취급에 대회 출품 못해
“나무로 가구를 만들다 문득 궁금해졌어요. 보통 나무를 가공하고 나면 표면을 기름칠로 마무리하는데 다른 방법은 없을까 하는 것이었어요. 저만의 표현법을 완성하고 싶었는데, 마땅치 않았어요. 그러다 옻칠을 알게 됐고 매력에 푹 빠졌죠. 서울남부기술교육원과 가르쳐주신 임충휴 명장님 덕분이에요. 지금은 본말이 바뀌어서 소목보다 옻칠에 더 집중하는 것 같아요.(웃음)”
그는 옻칠의 매력으로 무궁무진한 확장성을 꼽았다. 다양한 표면 위에 옻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여러 상품에 적용해 실용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가 옻칠을 배우며 가장 먼저 만든 작품은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전자제품인 레코드를 재생하는 턴테이블이었다. 레코드판을 가공해 붙인 판 위에 전통적인 옻칠 기법을 응용해 장식한 작품. 하지만 전통 옻칠 공예인들에겐 환영받지 못했다.
“이 작품을 전통 옻칠 대회에 출품했다가 응모조차 못하고 퇴짜를 맞았어요. 전통공예의 범주에서 벗어난 천연재료로 만들지 않았다는 이유였어요. 왜 재료에 제약을 두는지 이해가 안 됐어요. 재미있는 사실은 같은 작품으로 대한민국미술대전에 제출해 입선을 했다는 점이에요. 덕분에 내가 완전히 잘못 생각하고 있지는 않구나 하면서 용기를 얻었죠.”
그의 크고 작은 대회에서의 수상 행진은 계속됐다. 받은 상이 벌써 10개나 된다. 2017년 전주전통목공예대전에서의 입선을 시작으로 지난해 국제전통예술대전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올해는 대한민국수공예공모대전에서 동상을 받았고, 이어 정부조달문화상품 공모전에서는 장려상을 받았다. 그는 “받은 상금으로 옻칠 재료를 잔뜩 살 수 있어 좋았다”며 웃었다.
멈추지 말고 용기 내 도전하길
현재 그는 서울남부기술교육원 옻칠학과 창업반 소속으로 정식 사업자등록을 내고 활동 중이다. 상호는 ‘이인상여(二人相與)’. 다산 정약용이 저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를 통해, 가장 중요한 덕목은 인(仁)임을 강조하기 위해 한 말이다.
조달청 공모전 수상을 통해 나라장터에 납품할 자격도 얻고, 다양한 수상을 통해 상품성이나 사업적 가능성도 타진된 만큼 머지않아 공방을 열고 독립할 계획도 갖고 있다.
“아직 사업 형태가 확정된 것은 아니지만 중도에 포기하지 않고 이어나갈 수 있는 구조를 갖추는 것이 첫 번째 목표예요. 운이 좋아 무형문화재 옻칠장 손대현 명장님 공방에서 잠시 일할 수 있었는데, 그때 옻칠 외에도 공방 운영과 관련해 많은 것을 배웠어요. 서울남부기술교육원에서는 매년 많은 졸업생이 배출되는데 그들이 독립하기 전까지 인큐베이터 역할을 할 수 있는 사회적 기업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천천히 가더라도 조심스럽게 이 일을 지켜나가고 싶어요.”
그가 구상하는 주력 상품은 나무나 금속 표면에 금박과 은박 등 여러 가지 옻칠 재료를 장식한 후 교칠기법을 활용해 마무리한 소반과 식기다. 부서지는 파도를 연상하게 하는 독특한 문양을 김 씨만의 상징(시그니처)으로 활용하겠다는 계획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금속 등 소재 제한도 두지 않을 생각이에요. 문제는 옻칠의 상당수 재료가 일본에서 만들어지다 보니 잘 조색을 해도 소비자 눈에는 ‘왜색’이 느껴지기도 해요. 그 한계를 어떻게 넘어설지가 숙제인 것 같아요.”
하지만 그는 이런 고민조차 즐거운 모양이다. 나무를 잡은 결정이 가장 잘한 선택이었다고 말했다.
“물론 실력만으로 승부해야 하니 두려움이 없진 않지만, 이러다 죽겠구나 싶었던 구렁텅이에서 절 꺼내줬으니 아주 행복합니다. 늦었다고 생각했는데, 빠른 결정이었던 셈이에요. 지금은 절 걱정하던 친구들이 퇴직 후 생활에 대해 제게 조언을 구하기도 해요. 그럴 땐 아버지가 늘 하던 말씀을 그대로 전해요. 시간은 화살과 같이 지나가니 용기를 내서 꼭 도전하라고 말이죠.”
당신의 아지트는 어디인가? 물론 특정한 한 곳만을 아지트로 삼은 사람도 있겠지만 날씨, 기분, 개인 욕구에 따라 가고 싶은 장소가 달라지기도 한다. ‘2019 시니어 아지트’ 설문조사에서 ‘시니어를 위해 생겨났으면 하는 아지트 유형은?’이라는 질문에 대다수가 문화공간, 학습터, 쉼터를 꼽았다. 그래서 준비했다. 즐기고, 마음의 양식을 채우고, 쉬고 싶을 때 찾으면 좋을 공간을 소개한다.
연재 순서 ① 樂(즐기다), ② 學(배우다), ③ 休(쉬다)
休(쉬다)
고즈넉한 여유
학림다방
옛 서울대학교 문리대 학생, 지식인, 문화예술인의 아지트다. 대학로에서 가장 오래된 다방으로 1956년에 문을 열었다. 삐걱대는 나무계단, 책장에 빽빽하게 꽂혀 있는 LP판과 목조 구조물들이 정겹다. 클래식한 매력 덕분에 주말이면 계단에 대기 줄이 이어질 만큼 인기다. 한가롭게 음악도 듣고 이 공간을 즐기고 싶다면 평일에 방문하는 게 좋다. 로스터리 카페 ‘학림커피’도 가까운 거리(도보 1분)에 위치해 있다.
위치 서울 종로구 대학로 119 (혜화역 3번 출구 도보 1분)
운영시간 매일 10:00~23:00 (연중무휴)
싸롱마고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걷다 보면 고즈넉한 한옥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바로 ‘싸롱마고’다. 현재 은덕문화원에서 운영하고 있다. 서예, 사군자를 가르치는 등 다양한 문화행사도 진행된다. 1층에 진열된 옛 CD, LP판, 턴테이블은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1층은 천장이 높아 탁 트인 느낌을 주며 2층엔 아담한 좌식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쾌청한 날 북촌길을 거닐다 이곳에 들려 책과 음악을 감상하며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겨보자. 대표메뉴는 마고차(직접 만든 국산 차 6000~7500원), 복분자 빙수(1만2000원).
위치 서울 종로구 창덕궁길 49 (안국역 3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매일 11:00~18:00 (월요일 휴무)
보약 같은 휴식
솔가헌
도심 속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고 싶다면 한옥 한방 카페 ‘솔가헌’에 들러보자. 진산한약국에서 운영하는 솔가헌은 한옥 내외부를 환경호르몬이 전혀 없는 원목으로 꾸몄다. 탁 트인 공간과 함께 피톤치드가 뿜어져 나오는 편백 좌식 온돌방도 마련되어 있다. 또 한방차와 더불어 각종 에이드와 스무디, 해독 피자, 다이어트 쿠키 등 다양한 먹거리도 즐길 수 있다. 솔 향 가득한 곳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며 즐기는 족욕(20분에 1만 원)은 그야말로 신선놀음이다. 대표메뉴는 진산한약국이 개발한 10여 가지의 한방차(다과 포함 1만 원).
위치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54 (경복궁역 3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평일·토요일 11:00~20:30, 일요일 12:30~20:30 (주문마감 20시, 화요일 휴무)
카페 드 바디프랜드
서울 청담동에 위치한 ‘카페 드 바디프랜드(Cafe′ de Bodyfriend)’는 안마의자로 유명한 헬스케어그룹 ‘바디프랜드’가 운영하는 복합힐링공간이다. 1층은 카페&베이커리, 2층은 레스토랑, 3층은 전시장으로 구성됐다. 카페&베이커리, 레스토랑에서는 친환경 식자재를 엄선해 사용하고 일체의 조미료를 쓰지 않는다고 한다. 전시장에서는 직접 바디프랜드 제품을 체험해볼 수 있으며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힐링의 격을 높여준다. 모든 층의 바닥과 벽면은 대리석, 전면은 통유리로 되어 있다. 한강과 도심을 내려다보며 안마도 받을 수 있고, 맛있는 음식과 디저트도 즐길 수 있어 호화로운 호텔 부럽지 않다.
위치 서울 강남구 도산대로 546 (청담역 13번 출구 도보 8분)
운영시간 카페&베이커리 10:00~22:00, 레스토랑 런치 12:00~15:00/디너 17:30~22:00, 전시장 10:00~21:00 (모두 연중무휴)
예약방법 070-4237-79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