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늙지 않는다

기사입력 2020-08-26 08:00 기사수정 2020-08-28 09:55

[브라보! 음악에 치어스!!] PART 1. 음악의 가치


객석의 불이 꺼지고, 무대 조명이 켜지면 공연장의 공기는 일순 긴장한다. 준비됐는가. 이제 모두 날아오를 시간이다. 가수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노래의 첫 소절을 몸 밖으로 밀어낼 때, 무대와 객석의 시간은 새로운 표정으로 흘러간다. 나와 세계의 경계가 사라지는 몰아(沒我)의 순간. 가수는 노래하는 자신을 잊고, 관객은 그 몰입에 취해 역시 자신을 잊는다. 시간은 황홀하게 타오르고, 순간은 확장된다. 이 순간은 일회적이고 영원히 불가역적이다. 삶은 찰나적으로 완성되고, 존재는 충만해진다. 화인(火印)과도 같은 그 강렬한 시간은 각자 개별적이고 절대적 삶의 무늬가 된다.

음악은 이곳의 언어이자 피안(彼岸)의 언어다. 우리를 실존의 속박에서 잠시라도 벗어나게 하는 예술 장르는 음악이 유일하다. 음악을 추억하는 것은 단순히 지난 시절의 에피소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다. 어떤 충만함으로 타오르던 내 삶의 가장 높고 거룩했던 한때를 되새기는 것이다. 삶은 덧없고 허망하지만, 음악이 빚어내는 빛나는 순간들이 있어 그 허망함을 잠시라도 잊는다. 음악은 삶의 시간들을 풍요롭게 채워주는 영혼의 재화다. 부와 명예와 지위를 얻은들, 삶의 허기를 채울 수 없다. 또한 음악은 가장 아름다운 삶의 렌즈다. 그 렌즈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바라보고 재구성한다. 이 세상에는 각자의 음악으로 구축한 무수한 평행 우주가 있다. 그러므로 너는 나의 곁에 있지만, 나의 세계로 절대 들어올 수 없다.

눈물겹도록 곤궁했던 젊은 시절, 나는 음악이 있어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내 마음을 뜨겁게 달군 노래가 많았다. 그 뜨거움에 의지해 청춘의 한때를 걸어 나왔다. 그때 음악은 내게 종교적 힘을 준 경전이었다.

들국화 전인권의 샤우팅이 솟구쳐 오를 때, 나는 실재하는 감각으로서 자유가 무엇인지를 느꼈다. 그 아득하고 아찔한 목소리와 함께 내 청춘의 한낮도 작렬했다. “울며 웃던 모든 꿈/ 그것만이 내 세상”(그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전인권의 목소리가 도도하게 울려 퍼질 때, 이념의 격정이 들끓던 광장과는 또 다른 세상이 열렸다. 그곳은 존재의 고독과 불안으로 가득했다. 들국화는 도덕적 엄숙주의의 시대에, 개인적 욕망의 아름다움을 알려줬다.



김현식의 노래는 위험하고 불안한 기운으로 가득했다. 그는 짧은 생을 마칠 때까지 일탈과 자학을 삶의 양식으로 삼았다. 삶의 부조리에 저항하듯 절규했다. 이 날것의 샤우팅은 ‘분노와 슬픔’의 자식인 블루스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지적 무늬가 있는 전인권의 것과는 결이 달랐다. ‘넋두리’는 그의 사실상 마지막 유작인 5집 수록곡이다. 이 곡에서 “갈 테면 가라지 그렇게 힘이 들면”이라며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비웃으며, 단말마적 비명처럼 노래를 토해냈다. 그는 삶과 노래의 경계를 지워버렸다.

신중현의 ‘아름다운 강산’은 지금껏 나의 애국가다. 절묘한 리듬 기타 위로 장장 8분 동안 삶의 파노라마가 펼쳐진다. 신중현의 기타와 함께 삶이 고동치고 세계가 출렁인다. “실바람이 불어오는” 이 땅과 “붉은 태양이 비추는” 저 바다를 주유하는 대서사가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다 끝없이 다정해”라고 대단원에 이를 때, 다정(多情)이라는 단어에 연민의 물기가 고인다.

관계의 괴로움 때문에 우울한 날이 길어질 때마다, 나는 정태춘의 ‘북한강에서’를 들었다. 그리고 훼손되지 않은 어떤 시원(始原)을 생각했다. “과거로 되돌아가듯 거슬러 올라가 처음처럼 신선한 새벽”을 마주하면, 나는 다시 푸른 신생의 설렘을 얻어 살 만해질 것이라 믿었다.

김정호는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사람처럼 노래를 불렀다. 그에겐 목숨 한 줌과 노래 한 소절을 기꺼이 맞바꿔버린 듯한 처절함이 있어, 그의 노래가 끝나면 삶의 한 시절이 닫히는 듯했다. 평생 고독과 허무를 자기 집으로 삼은 그는, 자신의 노래 ‘하얀 나비’처럼 어느 날 우리 곁을 떠났다.

서울 성북동 ‘대원각’의 주인이었던 김영한 여사는 1000억 원에 가까운 전 재산을 불교계에 통째로 시주한 뒤,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돈이 그 사람(백석) 시 한 줄 만도 못해.” 김 여사는 한때 시인 백석의 연인이었다. 이 말을 빌려 말하고 싶다. “삶의 어떤 것도 내 가슴속의 노래 한 줄만 못해.”

지난 2013년 들국화 재결성 앨범을 녹음하던 중, 전인권이 화장실에 가 거울에 비친 초로의 자신과 마주쳤다. 그 순간의 감회를 주변 지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녹음 부스 안에는 청년이 있었는데, 화장실 거울 안에 낯선 노인이 있었다.” 그때 그의 나이 예순이었지만, 노래를 녹음하는 순간의 전인권은 여전히 가슴 뜨거운 청년이었다. 음악은 늙지 않는다. 음악은 시간의 물리성을 거슬러, 모든 순간을 처음처럼 갱신한다.

오늘밤 오래된 LP판의 먼지를 닦아내고, 삶의 턴테이블에 올려보자. 내 몸 안에 숨어 있던 청년 한 명이 걸어 나올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사금파리처럼 다시 반짝일 것이다.


이주엽 작사가이자 음악 레이블 ‘JNH뮤직’ 대표. 가수 정미조, 재즈 보컬리스트 말로,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의 음반 제작과 매니지먼트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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