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생장에서 시작해 스페인 북서쪽의 산티아고를 향해 약 800km의 길을 한 달가량 걷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이제 모르는 사람들이 없을 것이다(물론 출발지는 제각각 다를 수 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아도 국내에서도 섬이나 들판을 가로지르며 순례길처럼 걷는 길이 생겨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안 섬의 12사도 순례길은‘섬티아고’라 부른다. 지난 초여름에 다녀온 신안 섬의 순례길은 갯벌이 살아 있는, 때가 묻지 않은 천혜의 섬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바로 당진의 버그내 순례길이다. 자연의 숨결을 온몸으로 느끼며 걸을 수 있는 곳. 가을이 한창이던 지난달에 다녀와서 지금껏 그 들판이 차분하게 나를 다스린다. 여건상 순례길 일부만 돌아봤지만 다시 한 번 조용히 찾아가 제대로 걸어볼 생각이다. 마음속에 기분 좋은 여정을 감춰두고 기다리는 은밀한 기분이다.
순례길의 주요 지점은 솔뫼성지를 시작으로 합덕제와 합덕성당, 원시장과 원시보 우물터를 거쳐 무명 순교자의 묘를 경유해 신리성지까지 약 13.3㎞ 코스로 비순환형이다. 이곳은 한국 천주교회 초창기부터 이용되었던 순교자들의 길이다. 시간은 발걸음에 따라 4~5시간 정도 걸리는데 오름길이나 거친 길 없이 고요하고 평온하기만 해서 이곳이 더 알려지지 않고 지금만큼만 유지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그내 순례길의 시작인 솔뫼성지, '소나무가 뫼를 이루고 있다' 하여 솔뫼라는 순 우리말로 이름을 지었다. 이곳이 한국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가 탄생한 자리다.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할아버지부터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곳으로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고도 불린다.
특히 지난 2014년 천주교 프란치스코 교황 방문으로 전 세계적인 천주교 성지로 명성을 얻기도 했다. 곧 다가올 2021년은 김대건 신부의 탄생 200주년의 해이다. 유네스코 세계 기념인물로도 선정되어 당진 일대를 걷다 보면 곳곳에 행사를 예고하는 글귀를 볼 수 있다.
솔뫼성당 입구로 들어서 조금 걸으면 원형 공연장 겸 야외 성당인 솔뫼 아레나가 쉼터처럼 펼쳐진다. 둘레에 12사도가 세워져 있어 야외 행사의 느낌이 남다를 듯하다. 성당 주변을 둘러싼 솔밭 사이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조형물들이 이어진다. 천주교 전파를 위해 피를 흘린 순교자들의 모습이 노송들 사이에서 성스럽게 서 있다.
버그내라는 이름은 삽교천으로 흘러들어 만나는 물길로, 합덕 장터의 옛 지명인 ‘범근내포’에서 유래됐다. 이 물줄기를 중심으로 천주교 신앙이 퍼져나간 것이다. 이 길에 서린 순교와 박해의 역사를 몸으로 느껴보는 시간이다.
발길 따라 계속 걷다 보면 합덕 평야에 농업용수를 조달하던 저수지 합덕제를 거쳐 합덕성당을 만난다. 1929년 프랑스 선교사였던 페랭 신부가 봉헌한 합덕성당은 조용한 합덕 마을을 앞에 두고 고요히 서 있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 구조를 이룬 두 개의 종탑이 반짝인다. 하늘을 향해 두 손을 모은 형상이라고 하는데 그 경건함이 붉은 벽돌의 고딕과 어울려 아름답다. 가던 길 멈추고 이 지역의 랜드마크인 합덕성당에 들러 그 풍경 속에서 한참 머물다 가길 권한다. 100년쯤의 역사를 간직한 이 성당은 한국 천주교회에서 사제와 수도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성소의 요람으로 알려져 있다.
합덕의 너른 들에 가득 차 있는 기운을 받으며 처절한 순교의 길을 택한 이들을 기억하며 구불거리는 길을 걸어간다. 바람 부는 평야를 지나 조붓한 둑길을 걸으면 평온한 자연 속에서 버그내 길이 이어진다. 걷고 또 걸으며 순례길이 품은 순교자들의 신념, 아픔, 그리고 뜨거웠던 영혼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위안을 받는 또 다른 시간이다.
신앙의 못자리이자 한국의 베들레헴이라는 말, 처음 듣는 표현이었다. 이 말이 당진 곳곳을 지나면서 자주 보였다. 여기에 이런 말이 있었구나 내심 생소했지만 하루쯤 걷고 둘러보면 누구나 수긍하게 된다. 순교자들을 기리는 성지로서 그들의 뿌리와 죽음은 물론이고 그들의 아픔까지 느낄 수 있는 곳이란 것을.
걷기 열풍이 계속 이어지는 추세이지만 순례길만의 깊은 의미를 새기는 시간은 남다르다. 지난해엔 걷고 싶은 길로 선정되었을 만큼 여행자들의 발걸음이 늘고 있다. 다만 주변에는 주민들이 살고 있으니 조용히 묵상하면서 걷는 예의도 명심할 일이다. 비대면 여행이 강조되는 이즈음에 순례길 걷기는 더없이 좋다. 특히 이곳은 '혼행'으로 최적이다.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비행기나 여객선을 타지 않아도, 애써 여러 날을 비울 필요도 없다. 어느 날 하루 훌쩍 떠나면 된다. 신념의 전파를 위해 피 흘리기를 택했던 순교자들의 이야기가 있는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무언가 가슴에 실리는 것이 있을 것이다. 단 하루면 가능한 버그내 순례길의 여운은 아주 길다.
▲주변 명소& 맛집
당진 면천읍성(沔川邑城 ) 마을
당진시 면천읍성 일대를 성안마을로 부른다. 아주 오래된 이곳은 뉴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마을이다. 우체국을 미술관으로 만들어낸 ‘면천읍성 안 그 미술관’, 자전거포를 동네 책방으로 변신시킨 ‘오래된 미래’, 원래는 대폿집이었던 소품 가득 감성 가득 ‘진달래 상회’, 건너편에 면천향교를 둔 연꽃 가득한 연못 ‘골정지’, 면천 관아의 문루였던 ‘풍락루’ 등 마을 전체가 개발이 제한된 유적지여서 푸근한 시간여행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 아주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마을. 느리게 그러면서도 충만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곳, 면천읍성 마을이다.
아미미술관
당진보다는 아미미술관을 아는 사람은 많을 것 같다. 들길을 지나고 산 아래로 다가가면 나타나는 맑은 공기 속 예술 공간 아미미술관. 덩굴로 뒤덮인 담장이 먼저 객을 맞이한다. 유동초등학교라는 이름의 폐교를 개조한 미술관이다. 주변의 자연, 낡은 학교 원형을 그대로 살려 멋진 미술관으로 탈바꿈시켰다. 오랜만에 갔더니 복도의 설치 작품들이 교체되어 다시 새롭다. 실내의 전시작품, 마당의 너른 잔디밭과 핑크 뮬리가 혼잡한 세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소설 '상록수'가 탄생한 곳, 심훈의 필경사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낙향해 터를 잡은 곳, 당진에 내려와 직접 설계해 지은 집 ‘필경사’(筆耕舍). 필경사라는 옥호는 '붓으로 밭을 일군다'는 뜻이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대표 농촌 소설인 ‘상록수’가 집필되었다. "농부가 쟁기로 밭을 가는 것처럼 지식인은 붓으로 시대의 어둠을 가는 존재다"라는 심훈의 말처럼 당시 농촌계몽활동을 하던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조형물들과 시비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다. 그 옆 심훈기념관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있는 전시장이 마련돼 있다. 따사로운 풍경 속에서 한참을 쉬어도 좋을 농촌 마을이다.
교황님도 다녀간 당진 식당 '길목'의 '꺼먹지 정식'
‘꺼먹지’는 당진의 향토음식이다. 가을 무청을 염장했다가 다음해에 먹을 수 있는 무청 짠지로 처음에는 파랗게 절여졌던 것이 검게 변했다 하여 꺼먹지라고 한다. 걸쭉한 들깨 찌개에 구수한 꺼먹지가 함께 어울려 맛을 내는 음식이다. 그릇도 흰 분청사기에 정갈하게 담겨 나온다. 손맛이 좋은 반찬들이다. 교황이 솔뫼성지 방문 후 사제단 만찬을 이곳에서 했을 때 꺼먹지 정식이 제공되었다고 한다.
명장이 만든 떡, 민속떡집
민속떡집의 쑥 왕송편이 유명해서 당진을 떠나면서 늦은 저녁에 들렀더니 왕송편은 이미 다 팔린 후였다. 떡 명장이 만들어내는 민속떡집은 당진시 최초로 백년가게에 선정되었다.
눈 녹지 않은 시골길을 굽이굽이 지났다. 길게 늘어진 소나무의 그림자는 쓸쓸하고 차가웠다. 아무도 찾지 않는 이끼 낀 옛 유적을 찾아가는 기분. 굽이치는 소나무 숲길을 지나 만난 심훈기념관(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에는 소설 의 주인공 박동혁과 채영신, 그리고 작가 심훈이 옛이야기를 나누 듯 서 있다.
, 로 대표되는 심훈(1901~1936)은 한국 근대사에 한 획을 그은 문학가로만 말하기에는 다재다능했고 여러 방면에 관심이 많았다. 문학인으로 각인돼 있지만 영화인이었고, 방송사와 신문사에서 일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일제강점기에 저항과 계몽의식을 잃지 않고 살아온 지표 같은 인물이었다. 1919년 3·1운동 가담으로 3월 5일 투옥됐다가 8개월 만인 11월 6일 석방된 심훈은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지금의 경기고등학교)로 돌아가는 대신 중국으로 망명했다. 말이 좋아 망명이지 밀항을 선택해 지인의 집을 떠돌아다니며 생활했다. 1923년 다시 한국으로 오기 전까지 난징과 상하이, 항저우 등에 머물며 견문을 넓히며 수학했다.
영화인, 소설가, 시인으로서의 삶
귀국 후 연극과 영화, 소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예술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흥미를 가졌던 분야는 영화였다. 1924년 첫 부인 이해영과 이혼하고 동아일보에 입사한 뒤에도 영화에 대한 관심의 끈을 놓지 않았다. 1925년 조일제가 번안한 소설 이 영화화됐을 때는 이수일 역을 맡은 배우로도 도전했으며 192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영화소설 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다음 해에 일본에서 제대로 된 영화 수업을 받고 돌아온 심훈은 영화 원작 집필·각색·감독에 제작까지 도맡았다. 단성사에서 개봉해 큰 성공을 거뒀지만 심훈이 마지막으로 제작한 영화가 됐다. 1928년에는 조선일보에 입사해 2년 후 무용수였던 안정옥과 재혼했다. 1931년 경성방송국(京城放送局)으로 이직하지만 사상 문제에 부딪혀 퇴사하고 말았다.
소설에 마지막 힘을 쏟다
영화 를 통해 영화감독으로 성공적 데뷔를 한 후에는 신문 연재소설에도 관심을 갖고 매진했지만 검열 장벽에 막혀 1930년 조선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과 가 연재 도중 중단됐다. 같은 해 저항시 또한 검열로 빛을 보지 못한 채 심훈이 세상을 뜬 후 1949년 유고집으로 출간됐다. 1933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 1934년 장편소설 (조선중앙일보)이 연재됐고 1935년 심훈의 대표작인 장편소설이자 유작인 가 동아일보 창간 15주년 기념 장편소설 특별공모에 당선, 연재됐다. 1936년에는 단편소설 (신동아)를 발표했다.
뜻밖의 관심, 시에 담다
심훈은 저항시인이자 농촌계몽운동의 상징적 인물로 평가받고 있지만 작품세계는 꼭 그렇지 않다. 그가 쓴 작품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사랑에 아파하는 마음, 동성애, 스포츠를 다룬 작품도 눈에 띈다. ‘오오, 조선의 자매여’는 1931년 4월 영등포역 기차선로에 뛰어든 홍옥임과 김용주의 이야기를 접하고 쓴 시다. 결핍과 금지, 검열의 시대에 동성애 그리고 자살을 선택했던 여성의 모습을 작품에 담았다. 그의 유작시인 ‘오오, 조선의 남아여’는 손기정 선수가 베를린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호외 뒷면에 쓴 시로 손기정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우승을 접한 감격이 그대로 묻어나 있다. 1929년에 쓰인 ‘야구’ 또한 흥미롭다. 야구 시즌을 기다리고 있는 시점이라 그런가 야구장의 함성이, 홈런의 짜릿함이 시에서 느껴진다. 무엇보다 1929년에도 지금과 비슷한 감정을 가지고 야구를 보고 느끼고 시로 표현했다는 것이 신기하다. 이 시를 계기로 심훈의 종손 심천보씨는 심훈 80주기였던 작년 9월 16일 한화 이글스 홈경기 시구에 나선 바 있다.
심훈기념관과 집필 장소인 필경사
심훈기념관 이야기를 하면서 유작 소설인 를 빼놓을 수 없다. 심훈기념관 옆에는 가 집필된 곳으로 알려진 필경사와 심훈의 묘가 나란히 있다. 기념관 일대는 의 실제 배경이 된 곳이다. 소설 속에서 농촌계몽운동을 했던 남자 주인공 박동혁의 실제 모델은 심훈의 장조카 심재영이다. 당시 심재영은 청년들과 함께 당진 부곡리에서 공동경작회를 조직,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인물이다. 심훈기념관에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농우회’ 회원의 실제 주인공들 단체 사진과 개인 사진들이 하나하나 전시돼 있다. 심훈은 1932년 서울에서 가족의 터전인 당진으로 내려와 를 집필하고 난 뒤 1936년 장티푸스로 생을 마감했다.
>>관람 정보
개관시간 10:00~17:00 입장료 무료 문의전화 041-360-6883 휴관일 매주 월요일 주소 충남 당진시 상록수길 97 ✽자가용 이용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