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사랑하는 사람은 돌아서면 그립다. 인천의 바다는 쉽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낮은 곳이거나 높은 곳에 올라 바다를 향해 바라보아도 자신을 숨기고 보여주지 않는다. 인천을 거쳐간 근대 역사를 더듬어가며 그리운 바다를 가슴에 품고 차이나타운과 개항장 거리를 걸으면 하루짜리 최고의 힐링 여행이 완성된다. 천천히 걸어도 반나절이면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개항기 역동의 세월 속으로 빠져들어갈 수 있다. 이국적 풍광의 인천개항누리길을 걸어보자.
코로나 시대 우리의 여행은 이렇게 종말을 맞이할 것인가? 여행 기분은 제주를 가더라도 비행기도 타고 면세점도 들러야 제맛이다. 전철에 몸을 맡기고 흔들리며 인천을 가는 여행은 비행기 타지 않고 해외여행을 하는 기분이 든다. 겨울 오후 지하철 안은 한산했다. 인천역은 서울시청역에서 1시간 9분이면 도착한다. 금방이라도 서해가 펼쳐질 것 같지만 지하철 1호선 종착역에서 내리니 차이나타운임을 알리는 황금빛 패루(牌樓)가 눈에 들어온다. 서해를 건너온 사람들이 처음 정착한 곳이다. 화교뿐만 아니라 여러 바다를 거쳐 건너온 사람들도 있다. 인천항은 조선시대에 근대 문물을 처음 받아들인 항구였다. 차이나타운과 일본인 거주지역은 청일 조계지 경계 계단 하나를 사이에 두고 확연한 건축 양식의 차이를 보인다. 차이나타운은 중국 특유의 현란한 붉은색 간판이 거리를 원색으로 물들인다. 반면 일본인 거리는 단색의 정돈된 이미지가 완연하다.
자장면 맛은 변함이 없지만
계단을 걸어 위쪽으로 올라가면 좌우의 석등이 다른 생김새로 각기 자기 나라의 고유 양식을 보여준다. 계단 끝부분에는 공자 상이 자리 잡고 서해를 내려다보고 있다. 자유로운 이동이 방해받는 시대, 서해의 겨울바다를 보려면 차이나타운을 천천히 30여 분 정도 걸어 다니다가 자유공원으로 올라야 한다. 맥아더 장군 동상이 있는 곳에 이르면 비로소 바다가 보인다. 역사적 사건과 근대의 역동성을 보여주던 이 지구는 지금 조용하다. 간간이 마스크를 끼고 방한 장비로 중무장한 산책자들만 보일 뿐이다. 지나치는 사람들을 쳐다보면 간신히 눈만 빼꼼하다.
평소에는 식사시간이 되면 긴 줄이 이어졌다는 유명한 중화요릿집도 점심시간인데 홀이 한산하다. 자장면의 맛은 변함이 없지만, 풍경은 어쩐지 낯설다. 과장해서 말하면 손님보다 종업원이 더 많다. 차이나타운 상가를 한마디로 말한다면 거의 개점휴업이다. 코로나 사태뿐만 아니라 영하 11℃의 한파도 한몫한 듯하다. 이 모든 현상은 전 지구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창궐에서 비롯했다. 그렇지만 인류의 역사가 그렇듯 문제가 발생하면 답을 구해 슬기롭게 해결할 것이고 우리는 다시 여행을 떠날 수 있으리라.
인천은 최초에 대한 기록이 꽤 있다. 1882년 축구와 야구의 도입지, 서양과 맺은 최초의 조약 체결지, 이듬해 해관 설치, 1884년 청관(淸館)의 기원과 자장면의 발상지로 자리매김했다. 이 외에도 교회, 호텔, 공원, 전환국, 철도, 우체국 등 한국 근대사의 여명을 장식한 도시다.
현재 진행 중인 제4차 산업혁명이 인터넷과 디지털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근대의 전 지구적 접속은 항구가 중심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인천이 선구적 위치를 점했다. 이동, 변화, 융합, 그리고 창조가 가능했던 국제도시였고 수도 서울의 관문이었다. 지금은 항구보다 세계적 허브공항의 이름으로 위세를 떨치고 있지만, 바다를 통해 문화는 교류되었고 이 도시는 교류 초기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것도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개항도시 인천이다. 개항 이후 세계와 처음 만난 도시가 인천이고 이후 천지개벽의 역사가 펼쳐졌다.
운요호사건으로 일본과 1876년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1883년에는 부산, 원산에 이어 인천을 개항하기에 이른다. 속속 외세가 당도한다. 한국 화교의 태동은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했을 때 시작됐다. 화교들이 한국으로 이주해왔다. 당시 청나라는 3000여 명의 군사를 파견했는데, 청군과 함께 한국에 온 화상 수는 40여 명이었다. 처음에는 대부분 중국 남방 출신이었다. 이렇게 시작된 청국 조계지는 상징적인 조세는 냈으나 치외법권 지역이었고 경찰서, 감옥, 신문사까지 갖추고 있었다. 조선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는 소중국이었다.
의를 지키고 착하게 살라는 의미를 지닌 사당 의선당(義善堂)은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건축 양식을 보여준다. 도교의 신 중 하나인 항해의 수호 여신으로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포세이돈과 같은 마조신을 모시고 있다. 화교들이 터를 잡으면서 중국 문화가 인천으로 유입되었고 그렇게 자장면과 같은 중국적인 것들의 한국화가 이루어진다. 하지만 북적이며 향불이 끊임없이 타올랐던 의선당의 향불도 코로나 시대인 현재는 꺼져 있다.
수많은 최초의 이야기가 남아 있는 곳
일본은 자본의 침탈을 개시한다. 일본의 조계지였던 개항장 일대는 현재 역사 문화 거리로 조성되어 있다. 적산가옥이 즐비한 일본풍 거리다. 지금의 중구청 자리에는 1882년에 건립된 일본 영사관이 있었다. 당시 일본의 위세를 가늠하게 해주는 장소였다. 해가 잘 들고 산을 배경으로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자리를 선점했다.
구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건물은 1888년에 건립되었다. 인천의 최초 서양식 건물이다. 해운업을 독점했고 쌀과 잡화를 실어 나르는 기선을 운영했다. 인천은 대외 항구뿐만 아니라 강화를 거쳐 노량진에 이르는 국내 운송까지 겸하는 요충지였다. 일본 해운회사의 본점 또는 지점이 설립되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은 개항 초기 조선의 쌀과 금을 일본으로 유출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처음에는 출장소로 출발했고 1883년에는 인천지점으로 승격해 본격적인 은행 업무를 시작했다. 주로 사금과 금괴의 업무를 봤다. 이후 해관세에 대한 업무도 개시했다. 화폐로 사용했던 은폐에 대한 업무도 진행했다. 개항 전에 상평통보나 당오전을 사용했던 조선은 개항 후 돈의 가치가 하락하자 일본의 자금을 들여오기 시작한다. 인천과 경성에 전환국을 설치해 일본과 같은 신식 화폐도 발행한다. 구화폐를 신화폐로 바꿔주는 역할을 한 은행이 제58은행이다. 이후에는 1은행과 18은행에서도 업무를 같이 수행한다. 근대식 금융권이 최초로 인천에 밀집돼 있었다는 것, 세계 경제의 축소판으로 근대가 태동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인천은 자본가, 은행가 상인의 각축장으로 변모한다.
1894년 청일전쟁으로 청나라와 일본이 인천의 상권을 장악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지만 무역은 일본이 앞섰고 정치 외교에서는 청나라가 우세한 분위기였다. 청일전쟁 이후에는 일본이 앞서기 시작한다. 외국 자본의 횡포로 조선의 소가죽, 호피, 쌀 등이 헐값에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개항 이전의 인천은 200여 명이 거주하는 조그만 황무지에 불과했다. 이곳에 일본 세력들이 건물을 짓기 시작했고 서구 열강의 쇄도가 이어지며 외국인 커뮤니티가 생겨났다. 조합을 만들어 협약을 맺고 건축을 했다. 차별을 두는 지배자들의 속성을 잘 보여줬다. 우리나라의 건축 양식도 변화를 맞는다. 은행 건물들은 신고전주의 양식을 따랐다.
초기 일본은 정치적 의도를 숨기고 우선 경제적 이익에 집중했다. 따라서 은행의 침투가 활발했다. 건축상의 변화는 벽돌을 쌓는 신기술에 있었다. 인천 개항장에 벽돌 건물이 대거 등장했다. 일본의 은행 건물은 벽돌과 나무로 지어졌는데 멀리서 보면 돌로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일본도 기술 초기 단계여서 석재를 다루는 기술이 고도화되기 이전이었다. 나무로 전환된 신고전주의 양식이 인천에 많이 나타났다. 상부 목조 트러스 구조가 주종을 이루었다. 하부 2m 정도는 화강석이고 상부는 벽돌, 출입구는 석재로 축조해 건물을 지탱하도록 했다. 1883년부터 1910년까지 청일 조계지로 형성되었던 지역은 1910년 일본 상인의 거주지로 바뀌었다. 일본은 인천 일본인의 거주지를 확장하기 위해 홍예문까지 뚫는다. 1906부터 1908년까지 3년간 이어진 공사였다. 돌산을 폭파하느라 많은 희생을 내고 준공도 늦어졌다. 일본 명칭은 아나몬[穴門]인데 조선에게는 혈문(血門)이다.
서양인 사교클럽 제물포구락부는 각국 외국인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된 시설이었다. 1901년 러시아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한 서양식 건물이다. 전망이 빼어난 곳에 서향으로 지었다. 인천 앞바다로 열려 있는 구조다. 개항기 역사의 흔적을 담고 있다. 영사관, 무역회사 등 서양 사람들이 서울로 가기 전에 머무는 등 일제강점기 전의 개항 시기에는 외국인으로 북적댔다. 조계지가 철폐될 때까지 중요한 외교 장소의 임무를 수행했다.
조선을 합병한 일제는 1911년부터 1918년까지 조수간만의 차로 무역항으로서 치명적 결함을 갖고 있던 인천항에 갑문식 도크를 건설한다. 조선과 세계를 잇는 근대과학의 출발점이었다. 결국 조수간만의 차를 이겨냈다. 백범 선생도 이때의 작업에 강제동원됐다고 백범일지에서 고백했다.
개항장에는 의미 있는 근대 건축물이 있다. 역사적 상처도 있다. 이국적 공간이자 부인할 수 없는 문화유산이다. 긴 안목으로 반면교사로 삼아 효율적 공간으로 꾸려야 할 일이다. 문호개방으로 인천은 신문물을 처음 접했고 근대과학 산업문명의 시발점이 되었다. 새로운 문명을 만나 근대도시가 된 인천에는 새로운 미래로 나아가고자 했던 노력이 숨겨져 있다. 아픔과 슬픔 속에서 140년 전에 세워진 조선 최초의 국제도시다. 스스로 변하지 못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변화된 모습을 보았다. 개화시기보다 더 변화가 심한 제4차 산업혁명 시대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스스로 걸어야 하지 않을까?
최치현
한국외대 중국어과 졸업. 숭실대 국제통상학과 겸임교수로 ‘국제운송론’을 강의한다. 저서는 공저로 ‘여행의 이유’가 있다. ‘여행자학교’ 교장으로 ‘일본학교’ ‘쿠바학교’ 인문기행 과정을 운영한다.
가을은 하늘에서 먼저 온다더니 며칠 전부터 부쩍 높고 푸르다. 바람도 제법 서늘하고 창밖 숲에 내리는 볕도 달라졌다. 어디든 내달리고 싶은 날씨다. 오후에 잠깐 인천에 다녀왔다. 오래전 살았던 곳이다. 인천을 갈 때는 늘 아는 이들이 살고 있는 이웃 마을 마실가는 듯한 기분이다. 내게 인천은 추억의 장소가 아니라 늘 내 주변에 있었던 것 같은 편안한 이웃 동네다.
이곳에 살았을 때만 해도 나는 한창 젊었다. 잠시도 가만히 있질 못하고 '빨빨거리며' 쏘다니던 때였다. 그렇게 인천 구석구석 내 발자국을 남겼다. 그러다 보니 유치원과 초등학교 시절 한때를 보냈던 내 아이들도 마치 고향인 듯 생각한다. 아이들의 기억 속에도 자리 잡고 있는 모양이다. 서울로 떠나와서도 틈이 날 때마다 잠깐 다녀와야겠다 하면서 핸들을 돌리게 한 곳이다.
신포동 쪽에서 인성여고를 지나 전동으로 넘어가는 경계에 홍예문이 있다. 이 터널을 지나 제물포고등학교 쪽으로 자동차가 빠져나갈 때마다 어린 두 아들은 굴속을 지나가는 기분이 드는지 “와, 터널이다” 하며 좋아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가는 아주 짧은 시간인데도 아이들은 함성을 질러댔다.
을사보호조약으로 일본에게 외교권을 빼앗긴 시절에 만들어진 홍예문은 윗부분이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다. 그래서 한자 무지개 ‘홍’ 자와 무지개 ‘예’ 자를 써서 홍예문, 또는 무지개 문이라 불렀다. 사실 일본인들은 구멍 ‘혈’ 자에 문 ‘문’ 자를 써 '혈문‘(穴門)이라고 했다.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산허리를 잘라 구멍을 뚫었지만 인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보이는 모습 그대로 무지개문이라고 했고 지금껏 홍예문은 무지개문으로도 불린다.
1900년대 초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이곳에 지름길을 만들기 위해 응봉산 마루턱이 무지막지하게 폭파당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착공했고, 중국의 유명 석수장이들까지 불렀다. 부족한 시공비용과 힘든 노동은 조선인들의 몫이었다. 결국 우리 국민들의 피땀으로 3년 만에 홍예문이 만들어졌다. 화강암 석축으로 쌓은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석문(石門)은 112년 전 일본인들이 물자 소송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 만들었다.
그 뒤 시간이 흘러 광복 후엔 우리 시민들에게 유용한 공간이 되었다. 양옆으로 고급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고 젊은 연인들에게는 멋진 데이트 코스가 되었다. 홍예문 석문 위로는 늘 영화 광고판이나 표어와 포스터가 붙어 있었고 학생들이 졸업 앨범 사진을 찍던 인기 포인트이기도 했다. 지금은 많이 낡아 오랜 시간의 흔적이 가득하다. 그래도 인기는 여전해서 영화나 드라마 촬영지로 활용되기도 하고 외부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가 되었다.
홍예문 양옆으로 난 돌계단을 천천히 올라가 봤다. 담쟁이덩굴이 늘어진 화강암 석축에 세월의 더께가 묻어 있었다. 고즈넉한 언덕길을 걸어 석문 위로 올라서면 탁 트인 풍광이 펼쳐지고 멀리로는 인천항까지 보인다. 옆길은 자유공원과 송월동 벽화마을로 이어진다.
맞은편 계단을 이용해 내려오는데 몇 군데 예쁜 카페가 눈에 들어온다. 구조가 독특한 적산 가옥의 공정무역 찻집과 브런치 카페, 그리고 전통찻집의 독특한 외관이 멋지다. 그래서 이 부근이 홍예문 카페길이라 불리나보다. 담쟁이덩굴 담장 따라 이어지는 사계절의 운치 덕분에 제법 핫한 곳이다.
도심에서 이렇게 고풍스러운 멋과 함께 수수함을 간직한 곳이 있다는 게 좋다. 고갯마루에는 비록 아픈 역사가 깃들어 있지만 각자의 추억을 안고 홍예문을 찾는 발걸음은 의미 있다. 이날은 코로나19 여파 때문인지 온 동네가 숨죽인 듯 고요하다.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변해가는 세상에서 석문만은 그 자리에서 여전하다. 이럴 때 부쩍 조용해진 옛길을 호젓하게 돌아보는 여유로움을 누려본다.
◇홍예문(虹霓門): 인천광역시 중구 송학동 20번지 외 4필지 / 인천 유형문화재 제49호
정유년인 올해는 정유재란(1597.1~1598.12) 발발 420주년이다. 임진왜란으로부터는 427주년. 임진왜란이 치욕의 역사였다면, 정유재란은 왜군이 충남 이북에 발도 못 붙인 구국승전의 역사다. 그 전적지는 진주, 남원, 직산 등 삼남지방 곳곳에 있지만 옛 자취는 찾기 어렵다. 뚜렷한 자취가 남아 있는 곳은 왜군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농성하던 성터들이다. 주로 경남 중동부 해안에 밀집한 왜성 터들도 오랜 세월 허물어지고 지워져 갈수록 희미해져간다. 왜성이라는 이유로 사적지 지정이 해제된 탓이다. 근래 일부 지방자치단체는 그 중요성에 눈을 떠 옛 모습대로 복원하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치욕의 역사도 반드시 기억해야 할 역사다. 더 늦기 전에 지금 모습이라도 남겨둬야 한다. 더 사라지고 훼손되기 전에 역사 현장 보전의 필요성을 일깨우고, 정유재란의 역사적 의미를 천착하기 위해서라도 그 흔적을 돌아볼 필요가 있어 에 게재하기로 한다.
문창재 언론인(前 한국일보 논설실장)
저녁놀이 고와 보이지 않았다. 왜적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자진하겠다고, 부녀자들이 줄지어 뛰어내려 핏빛이 되었다는 황석산 바위를 보고 온 탓이었다.
취재를 마치고 함양을 떠난 시간이 오후 7시였다. 남원성 전투 취재 때도 같은 시간이었다. 고속버스 차창에 타는 저녁놀이 가득 드리웠지만 여느 때처럼 가슴 뛰는 풍경이 아니었다. 어찌 피뿐이랴. 성안에 있던 군사와 백성이 모두 도륙당한 그 아비규환이 머릿속에 가득한데 붉은 빛이 아름답게 보이겠는가.
전투가 아니어도 그랬다. 왜군 종군승려 케이넨(慶念)의 에는 남원으로 쇄도하던 왜병들의 악귀 같은 만행이 사건기사처럼 기록돼 있다.
“너나없이, 남에게 뒤질세라 재보를 빼앗고 사람을 죽이며 서로 쟁탈하는 모습들, 도저히 눈 뜨고 볼 수 없는 기분이다.”(1597년 8월 4일) “들도, 산도, 섬도 죄다 불태우고 사람을 쳐 죽인다. 그리고 산 사람은 쇠사슬로 꿴 대롱으로 목을 묶어서 끌고 간다. 어버이 되는 사람은 자식 걱정에 탄식하고, 자식은 부모를 찾아 헤매는 비참한 모습을 난생처음 보게 되었다.”(1597년 8월 6일)
이 모든 비극은 원균의 칠천량 패전에서 비롯되었다. 호랑이 같은 조선수군이 궤멸되어 남해안을 마음껏 휘젓고 다니게 된 왜군은 바로 전라도 공략에 나섰다. 임진년에 진주에서 참패하고 이순신에게 짓눌렸던 한풀이였다.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군을 주축으로 한 왜적우군 6만 명은 7월 25일 울산 서생포 등 각자의 주둔지에서 밀양-거창-안의를 지나 황석산에 이르렀다.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군이 주력인 좌군 5만 명은 28일 부산포 안골포 순천 등에서 하동-구례를 거쳐 남원으로 쳐 올라갔다. 수군 7000명도 섬진강을 거슬러 올라 구례에서 좌군과 합류해 남원으로 쇄도했다.
남원성 전투와 만인의총
남원성 전투는 중과부적이었지만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의 용렬한 작전계획이 초래한 참화였다. 지키기 좋은 교룡산성을 버리고 평지성인 남원읍성에만 의지한 졸전이었다. 조선군의 건의대로 험준한 교룡산성에서 버텼다면 최소한 저항기간을 더 늘릴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지원군이 오면 수성에 성공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구례와 곡성을 거쳐 오면서 마치 사냥하듯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던 왜적 병력은 5만7000명이었다. 이에 맞서는 수비군은 양원이 거느린 명나라 병사 3000명에 전라병사 이복남(李福男)이 이끄는 조선군은 1000명을 밑돌았다. 그것도 제 군사들은 다 도망치고 남의 군사를 끌어모은 오합지졸이었다. 여기에 읍민 6000명이 전투를 도왔다지만, 그래도 6대 1의 싸움이었다.
남원성은 높이 4m 둘레 3.4km에 불과한 읍성이었다. 이 작은 성을 5만7000명의 왜군이 겹겹이 둘러쌌다.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田秀家) 군 1만 명은 남쪽,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 군 1만4000명은 서쪽,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군 1만 명은 북쪽,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군 1만3000명은 동쪽을 에워쌌다. 물 한 방울 샐 틈도 없는 완전 봉쇄였다.
개전 나흘 만에 낙성된 남원성 전투의 경과는 유성룡의 에 자세히 나와 있다. 조선 파진군(특공대)의 일원으로 명군에 파견되었던 김효겸(金孝謙)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와 유성룡에게 자초지종을 고한 것이다.
8월 13일 왜군 선봉대 100여 명이 성 밑에 접근해 조총을 쏘아댔다.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炮)로 응전했지만 사정거리가 짧아 미치지 못했다. 왜적은 몇 명씩 패를 지어 출동했다가 화살을 피해 밭고랑에 흩어져 숨어 총을 쏘았다. 성 위의 우리 군사 여럿이 쓰러졌다. 얼마 후 왜적 몇이 깃발을 들고 성 아래에 와서 큰 소리를 질렀다. 양원이 통역과 함께 병졸을 적진에 보냈는데, 그들이 받아온 문서는 선전포고인 약전서(約戰書)였다.
다음 날 왜군은 성을 3면에서 포위하고 우박처럼 총과 포를 쏘며 공격해왔다. 싸움이 벌어지기 전 양원은 성 밖에 빼곡히 들어찬 민가를 모두 태웠지만, 남은 흙벽과 돌담이 왜적의 방패가 되었다. 반면 성 위의 수비군은 적에게 노출되어 사상자가 속출했다.
15일 왜군은 볏단과 풀단을 무수히 만들어 밤 8시쯤 성 밖의 참호를 메우더니, 성 밑에도 쌓기 시작했다. 성보다 풀단이 높아지자 그것을 타고 넘어 성안으로 쳐들어왔다. 대혼란이 일어났다. 성안 여기저기에 불길이 치솟고 병사와 읍민들이 뒤엉켜 도망치고 숨기에 분주했다.
명나라 기병들은 말을 타고 달아나다 두 겹 세 겹 둘러싼 왜병의 총칼에 낙엽처럼 떨어져 비명을 질렀다. 양원은 호위대의 도움으로 위기를 돌파해 몇몇 수하와 함께 살아남아 제 나라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탈영죄로 참수되었다. 명 조정은 그 수급을 한양으로 보내 조리돌림시켰다.
유성룡은 “왜적이 양원을 알아보고 짐짓 모른 척 빠져나가게 했다는 말이 있다”고 에 썼다. 조경남의 에도 “양원이 왜적에게 성을 내주는 대신 목숨을 건졌다는 소문이 전해져 온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투에서 전라병사 이복남을 비롯해 남원부사 임현(任鉉), 총병사후 정기원(鄭期遠), 별장 신호(申浩), 구례현감 이원춘(李原春) 등 9명의 장수가 분전 중 전사했다. 조명 양군 병사 4000명에 읍민 6000명 등 1만 명이 죽었다. 가망이 없게 되자 이복남은 탄약이 적군 수중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화약고에 불을 지르고 분전을 독려하다가 최후를 맞았다.
그의 아들 이성현(李聖賢)은 왜군에게 붙잡혀 끌려간 일본에 뿌리를 내렸다. 히데요시 고다이로(五大老)의 일원이었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는 그에게 자기 이름의 ‘元’자를 넣어 ‘李家元宥’로 개명시켜 녹봉 100석의 관리직을 주었다. 일본 여자와 결혼해 3남4녀를 두었던 ‘李家’ 가문은 에도시대 조선 왕족의 지류로 인정받아 녹봉 500석을 받았다. 그 후예로는 1980년대 아사히신문(朝日新聞) 출판국장과 아시히학생신문사(朝日学生新聞社) 사장을 지낸 리노이에 마사후미(李家正文)가 유명하다. 그는 어려서 이왕가(李王家)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뿌리 찾기 이야기를 책으로 써 화제가 되었는데, 1980년대에 한국에 와서 조상 묘에 참배했다.
케이넨은 전투가 끝난 8월 18일 일기에 “성안으로 진을 이동하다가 날이 밝아 주위를 돌아보니 길에 시체가 모래알처럼 널렸다. 눈으로 볼 수 없는 처참한 광경이었다”고 썼다. 왜병들은 시체에서 코를 잘라 항아리와 나무통에 넣고 소금에 절여 부산으로 보냈다. 포로로 잡혀 일본에 끌려갔던 강항(姜沆)의 에는 이때 일본에 보낸 코 상자의 높이가 “구릉을 이루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만일 교룡산성에 의지했다면 어땠을까. 수비군 위치가 높고 공격군이 아래였다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다. 5월 10일 남원에 부임한 양원은 왜군의 공격에 대비한다고 교룡산성 안 민가를 모두 불태웠다. 백성을 읍성 안으로 모아 항전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남원부사 임현은 “천험의 요새인 교룡산성을 지키지 않으면 왜적의 근거지가 됩니다. 다른 고을 백성을 거기에 들여 지킵시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양원은 칠천량 패전을 입에 담으며 “멍청하고 겁이 많은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고 또 자멸하면 어쩔 텐가?” 하면서 교룡산성을 버리고 말았다.
피란지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사방에서 썩어가는 시신을 한곳에 모아 묻고 만인의총이라 불렀다. 시내에 있던 의총은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탄압 등으로 천덕꾸러기 신세를 면치 못하다가, 1980년 지금의 자리로 옮겨져 격식 있는 예우를 받게 되었다. 왕릉에 비교될 만큼 큰 유택을 갖게 되었고 국가사적지 지위까지 얻었다.
만인의총을 둘러보고 관리소 직원에게 물으니 걸어서도 갈 만하다기에 교룡산성을 찾아 나섰다. 의총 왼쪽으로 보이는 고속도로 뒤편이 교룡산(蛟龍山)이라 했다. 빠른 걸음으로 한 시간 가까이 걸어 산 중턱 선국사 입구 산성 문에 당도했다.
가파른 경사에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해 쌓은 성벽이 옛 모습 그대로였고, 성문은 아담하지만 아름다운 홍예문이었다. 임진년 진주성 싸움처럼 험한 산성을 등지고 군민이 일체가 되어 돌을 굴리고 끓는 물을 퍼부어가며 항전했다면, 그토록 허망하게 낙성되지는 않았으리라는 생각이 굳어졌다.
황석산성 전투와 백성들의 수난
황석산성 전투 기록은 남원처럼 자세하지 않다. 에는 왜군이 움직이자 “도원수를 비롯한 모든 장병들이 왜적을 피하기만 했다”라고 적혀 있다. 전주를 목표로 서진하는 길목의 목민관들에게는 “각자 알아서 흩어져 피란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호남 경계선에 있는 황석산에는 함양, 안음(안의), 거창, 합천, 김해, 초계, 삼가 등 7개 고을 피란민이 몰려들었다. 줄잡아 7000명이 넘었으리라.
“안음 현감 곽준(郭䞭)이 황석산성으로 들어가자 김해부사 백사림(白士霖)도 들어갔다. 그가 무인이라고 모든 사람들이 든든히 여겼다. 그런데 왜적에게 공격을 당한 지 하루 만에 그가 도망치자 먼저 군사가 무너졌다”고 은 기록하고 있다.
에는 곽준 일가의 의연한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남문으로 적이 쳐들어오자 곽준은 밤낮으로 독전했다. 울면서 계책을 청하는 아들과 사위에게 준은 이곳이 내 죽을 곳인데 무슨 계책이 있겠느냐면서 태연히 호상(胡床)에 앉아 죽임을 당했다. 두 아들(履祥, 履厚)이 시체를 부둥켜안고 왜적을 꾸짖으니 적이 함께 죽였다.” 그의 딸은 아버지가 죽고 남편(柳文虎)마저 적에게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목을 매 자진했다.
등 다른 기록에도 백사림의 행태가 고발되었다. 사태가 위급함을 알고 어머니와 두 첩을 줄에 매달아 밖으로 내려보내고 도망쳤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본 측 기록에도 나온다. 근세 일본의 베스트셀러 에는 백사림이 성문으로 도망쳐 나오는 그림과 함께, 그 일이 소상히 적혀 있다. 전투 상황에 대해서는 “일본병(日本兵)이 성안에 난입하니 베어지고 넘어진 조선 병사들의 피가 성안에 가득 넘쳐났다”라고 묘사되어 있다. 함양군수를 지낸 조종도(趙宗道)는 성문으로 들이치는 일본 세와 불을 뿜으며 싸웠으나 성문이 열린 것을 알고 자기 처자를 끌어내 한칼에 베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이 전해온다. 그가 산성에 들어오기 전에 지었다는 시 한 편은 에 실려 있다.
崆峒山外生猶喜
(공동산* 밖이라면 사는 게 외려 기쁘련만)
巡遠城中死亦榮
( 순원성* 안에서 죽는 게 또한 영광스러워)
*공동산과 순원성은 파천과 순절의 고사를 지닌 중국의 산
우리 측 기록에는 황석산 전사자가 군민 500명 정도로 돼 있다. 그러나 향토사학계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7개 고을 백성이 남부여대(男負女戴)하고 피란해온 산성에 군민이 500명밖에 안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것이다.
10년 넘게 관련 자료를 수집해 을 출간한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은 “황석산 전투는 하룻밤 전투로 조선군 500명이 죽고 왜병은 하나도 죽지 않은 이상한 전투가 아니라, 왜군 7만5000명을 상대로 5일간 치열하게 싸워 왜군을 궤멸 상태로 빠트린 전투였다”라고 저서에서 주장했다. 7개 고을에서 모여든 의병과 백성 7000명이 아녀자들까지 물과 기름을 끓이고, 노인과 아이들은 돌을 나르고 굴린 의로운 전투였다는 것이다.
우리 군민의 피해가 7000명에 이르고, 전투가 끝나고 전주에 입성한 우군 병력이 2만7000명으로 줄어든 것으로 보아 그들의 인명피해가 엄청났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는 일본 측 기록으로도 뒷받침된다. 8월 17일 모리 히데모토(毛利秀元)를 비롯한 적장 6명이 공동으로 작성하여 히데요시에게 보고한 내용은 이렇다. “8월 16일 조선군을 크게 꾸짖고 공격하여 산성을 함락시켰습니다. 성안에서 조선군 수급 353급을 베고, 골짜기에서 추가로 수천 명을 죽였습니다.” 성 바깥 골짜기에 피신한 백성들까지 다 죽인 것으로 볼 수 있는 문서다.
곽준 조종도 등 순절자 위패를 모신 황암사(黃巖祠)는 일제 때 폐사되었다가 2001년 함양군 서하면 황산리 황석산 기슭에 재건되었다. 홍살문 너머로 출입문이 서 있고 그 안에 사당, 그리고 그 안쪽에 석재로 감싼 커다란 봉분이 외로이 누워 있다. 사당을 찾는 이보다 그 옆 청소년수련원을 드나드는 발길이 많은 것은 황석산 전설마저 잊힌 탓이리라.
반대로 황석산은 등산객 발길이 잦은 곳이다. 전국 100대 명산에 이름을 올린 탓이겠으나, 백두대간 덕유산과 통하는 육십령과 맞닿아 있어 산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황암사에서 남강 상류 계곡을 따라 오르다 우전마을 입구에서 ‘정상 5.7km’ 이정표를 따라가면 2시간 반이면 당도할 수 있다. 해발 1000m가 넘는 능선부에 옛 성터가 비교적 잘 보전되어 있고, 무너진 곳은 근년에 다시 쌓아 온전한 험지 산성 모습을 지녔다.
산을 오르면서 남부여대 피란길에 나섰을 백성들의 수난이 떠올라 세월의 간격을 실감했다. 어찌 남부여대뿐이었겠는가. 솥단지와 이부자리에 된장독까지 끌고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간단한 행장의 배낭 무게도 벅차 가파른 오르막길을 쉬고 또 쉬어 올랐는데, 노약자와 부녀자들 고통이 오죽했을까. 아무도 살아남지 못해 원혼들이 구천을 맴돌고 있지는 않을까….
육십령 고개를 넘고 장수와 진안을 거쳐 전주에 당도한 우군은 남원성을 유린하고 임실을 거쳐 올라온 좌군과 세를 합쳐 전주 공략에 나선다. 그러나 공략이라 할 것도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동남 양쪽에서 10만 대군이 닥쳐온다는 소식에 전주성내는 패닉 상태가 되었다. 명군 유격장 진우충(陳愚衷)이 수비군 병력을 이끌고 도망치자, 백성들은 돌팔매에 고기떼 흩어지듯 산지사방 흩어져 성안이 텅 비었던 것이다. 왜군은 그렇게 허무하게 전주를 손에 넣었다. 임진년부터 군량 걱정을 해결하려고 그렇게도 노리던 호남 땅이었다.
5월의 마지막 주말에 친구와 월미공원을 가자고 약속을 했는데, 막상 동인천역에서 만난 후에 생각이 바뀌었다. 이왕지사 발걸음을 하였으니 동인천에서 시작하여 자유공원, 차이나타운, 그리고 월미공원으로 이어지는 추억의 오솔길을 함께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고 도보순례를 시작하였다.
동인천역전은 50여 년 전의 모습에서 크게 달라진 게 없어보인다. 50여년이라고 하면 강산이 다섯 번이나 바뀌고도 남을 세월인데 막상 그곳은 세월의 무게가 살짝 비켜간 것처럼 올드한 모습에 왠지 모를 정겨움과 친근감이 느껴졌다.
역에서 출발하여 자유공원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이면도로에는 철물점, 전기 및 전자제품 상점 등이 다닥다닥 접해 있었고 그 옆으로 인현동 호프집 화재사건 희생자 추모탑이 나타났다. 참으로 끔찍했던 그 사건도 이미 우리들의 머릿속에서는 지워버린지 오래되었으니 인간의 뇌의 저장능력에 한계가 있어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1999년 10월의 마지막 날에 인현동 5층 건물 2층에 있던 40여평 규모의 호프집에서 불이나 순식간에 3층 당구장까지 솟아오르면서 52여명의 희생자가 났는데, 그 중에서도 학교 가을축제후에 뒤풀이 하던 학생들이 많이 희생되었던 안타까운 사고였다. 잠시 희생자 추모탑에서 머물다가 발길을 옮겼다. 제물포 고등학교를 끼고 자유공원으로 올라가는 길가의 주택 담장에는 무르익어가는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있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잠시 인천에 머물렀던 필자는 옛 생각에 젖어 친구와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면서 오르는데 추억의 홍예문이 불쑥 나타났다. 청소년 시절에 잠시 이 곳을 지나다니면서 신문배달을 하든 고단했던 추억이 떠올랐다.
인천 홍예문(虹霓門)은 윗부분을 무지개 모양으로 반쯤 둥글게 만든 문으로 높이 약 13m, 폭 약 7m의 화강암 석축을 쌓고 터널처럼 만든 석문(石門)이다. 일제강점 초기인 1908년도에 일본공병대가 만들어 혈문(穴門)이라고 불렸다.
당시 인천중앙동과 관동 등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의 수가 급격히 늘자 만석동 방면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이 홍예문을 뚫었다고 한다. 광복 70년이 지난 아직도 일제의 흔적들이 이렇듯 곳곳에 남아있다. 우리에겐 아픈 기억이지만 절대 잊지는 말아야겠다.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그늘을 만들어 뜨거운 햇살을 피할 수 있어 쾌적했다. 특히 곳곳의 나무그늘 정자에는 노인들이 삼삼오오 모여앉아 장기나 바둑을 두기도 하였고 그들 옆에서는 할머니들이 그룹을 지어 음식을 드시면서 이야기장단에 빠졌다. 참으로 평화로워 보인다. 인천학도의용대 호국기념탑이 눈에 들어왔다. 1950년 9월 15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자 인천지역의 학도들은 의용대를 조직, 강화하여 치안유지에 힘쓰던 중 승전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의 개입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남녀대원 3,000여명은 각각 현역으로 자원입대하여 조국에 젊음을 바쳤다.
드디어 자유공원 정상에 오르니 거대한 동상 하나가 불쑥 눈에 들어온다. 한 손에는 쌍안경을 들고 인천상륙작전 지역이었던 월미도를 지그시 내려다보고 있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동상이었다. 자유공원의 상징이다. 초등학교 시절에 단체로 가끔 한번씩 와 보았던 추억의 그 장소에는 옅은 분홍색 장미와 노란색의 탐스러운 장미꽃이 활짝 피어 잘 가꾸어져 있었다. 훌쩍 지나가버린 50여년의 세월이 무상하다.
태평양전쟁 미군 최고사령관이었던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장군은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진주만을 기습한 일본을 공격하였으며 결국 1945년 8월 일본을 항복시키고 일본점령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 6·25전쟁 때는 UN군 최고사령관으로 부임하여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하였다. 우리나라와는 역사적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엮여 있다. 하지만 중공군과 전면전을 두고 트루먼 대통령과 갈등을 빚어 해임되었고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갔다. 혹, 그 때 내친김에 만주를 폭격했다면? 지금의 우리 나라는 어떻게 되었을까? 통일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쉬운 마음이 든다.
2005년 9월11일에는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 55주년을 나흘 앞둔 11일 인천 자유공원 일대에서 맥아더 장군 동상의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와 동상 사수를 주장하는 단체의 대규모 동시 집회가 동시에 개최되었는데, 이때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단체 회원들이 폭력시위를 벌이며 경찰과 격렬하게 충돌했다. 이로 인해 시위대와 경찰 모두 부상자가 속출하고 공원 일대는 난장판이 됐다.
결국 동상은 존치되었고 지금은 평화롭게 월미도를 응시하고 있는 예의 그 모습으로 역사의 현장에 남아있으니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직은 뿌연 황사가 시야를 가려 월미도가 흐릿한 안개 속에 떠있는 듯한 모습을 바라보며, 차이나 타운 으로 발길을 옳겼다.
과거로의 시간여행을 즐길 수 있는 곳이 있다.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전국 도성 성곽길이다. 성곽은 따라 걷는 것만으로도 역사의 현장학습이다. 거기에 운동효과까지 얻을 수 있어 일석삼조다.
서울에도 트레킹을 즐길 수 있는 성곽길이 많다. 그중 한양도성 성곽길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서울 토박이라도 한양도성에 가 본 사람은 많지 않다. 옛 서울 한양이 18.6㎞ 성곽으로 둘러싸인 성곽 도시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급속히 진행된 도시화·현대화로 인해 잊혀진 유적지가 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양도성 성곽은 수도권 지하철을 이용하면 쉽게 접근할 수 있어 트레킹 코스로는 안성맞춤이다.
한양도성 성곽은 현재 삼청동·장충동 일대와 숭례문·흥인지문·홍예문만이 남아 있다. 우리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도 있다. 북촌 전망소와 옛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북악산 정상 백악마루, ‘1·21 사태 소나무’ 등이 인기 코스다.
서울 광진구의 아차산성은 백제가 한강 유역을 처음 차지했을 당시 쌓은 성으로 현재 몇 개의 보루(지금은 초소)만 남아 있다. 그러나 아차산성은 1보루 위에 오르면 한강을 비롯한 서울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올 만큼 요새다. 산성 규모는 크지 않지만 천혜의 입지와 빼어난 자연경관 덕에 일출 명소로도 손꼽힌다.
수원화성은 정조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명물로 총 길이 5.7㎞다. 대부분의 성곽이 그대로 보존·복원돼 성곽을 따라 걷기만 하면 완벽한 트레킹 코스다. 소요시간은 약 1시간으로 변화무쌍한 코스 덕에 지루함이 없다. 화서문 앞 이름 없는 주막과 먹자골목에서는 다양한 요리를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부산 금정구의 금정산성은 동서남북으로 총 4개의 문이 있다. 길이는 17.34㎞로 넓어 어떤 문으로 들어가 어떤 문으로 나오느냐에 따라 답사 코스가 달라진다. 게다가 산길 양쪽으로 음식점도 많아 식도락가 사이에 인기다. 산성막걸리와 흑염소불고기가 대표 먹을거리다.
충남 공주의 공산성은 백제의 도읍 웅진(현 공주)을 수비하기 위해 축조된 성으로 총길이 2.6㎞의 포곡형이다. 한 바퀴 둘러보는 데 1시간 30분 정도 소요되며, 금서루에서 왕궁추정지와 쌍수정까지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성벽 길을 따라 펼쳐진 멋진 풍광이 특징이다. 무엇보다 공주를 관통해 흐르는 금강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어 관광객들이 몰린다. 4~10월 매주 토·일요일 금서루에서는 웅진수문병교대식이 열리며, 백제 의상 체험, 활쏘기, 백제 왕관 만들기, 백제 탈 그리기 등 다양한 체험 코너도 마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