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 시행령’ 제정으로 주목받는 기업재난관리자는 예측불허로 일어나는 기업의 각종 재난을 최소화하고 이에 대응한다. 지난 1월 본지가 전문가 20명을 대상으로 한 취업 전망에서도 해당 분야의 발전을 밝게 점친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자료 수집이나 데이터 활용, 계획 수립 등의 업무에 자신 있는 중장년이라면 체력에 구애받지 않고 충분히 도전해볼 만하다.
효성그룹, 웅진그룹 등 굵직한 기업에서 30년간 근무 경험이 있는 봉영권(63) BCM협동조합 대표도 기업재난관리자에 도전장을 내밀어 재해경감 컨설팅을 주업으로 인생2막을 살고 있다. 그는 과거 기업체에 근무하면서 퇴직 이후를 대비해나갔다. 초반에는 준비의 일환으로 지인들과 교류하며 기업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경영컨설팅이나 외부 강의를 조금씩 진행했다.
“경영 컨설팅과 더불어 산업안전 컨설팅도 준비했어요. 산업안전 컨설팅은 제조업체 사업장의 산업안전을 지도하고 안전보건 시스템을 만드는 일을 담당하죠. 그러던 중 2013년에 국내 재난 안전 관리 분야의 필요성이 대두하면서 행정안전부에서 관련 교육과 자격 취득 사업이 시작됐습니다. 저 또한 눈여겨보던 산업 안전 쪽과 연관 있고, 전망 있는 분야라는 생각이 들어 자격증을 취득했어요.”
국가자격 취득, 대행분야가 고비
기업재난관리자 시험 및 교육 과정은 크게 재해경감활동 실무분야, 재해경감활동 계획 수립 대행분야, 우수기업인증 평가분야로 나뉜다. 각 분야에 맞는 교육 과정을 이수해야 해당 시험에 응시할 수 있으며, 실무분야-대행분야-평가분야 순으로 취득해야 다음 단계 응시가 가능하다. 봉영권 대표는 2014년 실무분야 취득 후 2018년 대행분야, 2019년 인증분야까지 섭렵했다.
“실무, 대행, 인증 과정 각각 교육 수료, 시험 단계를 거쳐야 해요. 실무는 35시간 대행은 70시간, 인증은 35시간 교육을 수료해야 시험 자격이 주어지죠. 다른 조건은 따로 없어요. 실무 분야 시험은 객관식이라 비교적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교육 과정만 따라가면 취득이 용이한 편이라고 봐요. 고비는 대행 분야입니다. 5과목으로 이뤄지는데 주관식으로 단답과 기술형 출제가 있어서 집중적으로 충분히 공부해야 합격할 수 있어요.”
인증분야의 경우 대행분야를 취득하면 비교적 쉽게 합격할 수 있다고도 덧붙였다. 인증과정의 경우 기업재난관리사 분야에 대한 전반적인 안목과 시스템을 평가하는 능력을 갖는 단계라고. 그는 직장에 다니는 경우라면 교육기관에 따른 수강 시간을 고려해 일정 계획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교육 기관마다 시험에 대한 팁들을 잘 주기 때문에, 교수분들과 소통을 하면서 시험 대비를 하면 좋습니다. 취득 이후에는 컨설팅 대행기관이나 인증기관에 연락하셔서 본인 상황에 맞는 역할을 찾아가길 추천 드려요. 제 경우엔 자격증 취득 후 대행기관에 소속돼 활동하고 있습니다. 2019년부터 재해경감활동계획수립사업이 공공기관 중심으로 많이 전개되고 있고, 2021년 하반기부터는 민간 기업들에도 확대돼 컨설팅 대행기관들이 이 일들을 담당하는 상황이에요.”
젊은이 거의 없어, 노련한 중장년이 적합
기업재난관리 컨설팅 완료 후 해당 시스템이 적정한 것으로 검증되면 재해경감 우수기업 인증서를 행정안전부로부터 받을 수 있다. 이러한 검증 역할을 인증 대행기관에서 진행하는데 이때 인증분야 자격을 취득한 이들이 대행기관에 상임이나 비상임 위원으로 등록하면 관련 업무를 수행할 수 있다. 봉영권 대표 또한 인증 대행기관의 비상임으로 소속돼 수시로 활동 중인 셈. 국가자격 시행 10년, 초창기부터 관련 분야에 몸을 담아온 그에게 기업재난관리사 자격증 취득이 중장년에게 유리할지 물었다.
“현재 기업재난관리 분야 관련 학과가 많이 없는 편이라 젊은 인력도 부족한 현실입니다. 종합적으로 기업을 지도해주고 시설의 요구 사항을 해결해주려면 사회경험이 많은 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때문에 여러 기업에서 실무 경험과 네트워크를 갖고 있는 중장년들에게 유리한 분야라고 판단됩니다.”
현재 그는 재해경감 컨설팅 대행기관에서 여러 기업들의 재난안전 대응 관련 컨설팅과 시스템 인증평가원 업무를 병행하며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근래 코로나19 등 감염병 사례에서도 알 수 있듯, 재난안전 분야는 계속해서 그 중요성과 필요성이 커질 전망이다. 그에 반해 현재 관련분야 시장이나 시스템 마련은 초기 단계인 상황. 역으로 그만큼 재난안전관리사가 해야 할 일이 많다는 사실도 유추 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봉영권 대표 또한 남다른 자부심과 열정으로 관련 업계 성장에 이바지하겠다는 마음이다.
“해외에서 우리나라 재난 안전 대비나 연속성 계획 수립의 요구는 향후에 더욱 심화되리라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 시스템을 준비하는 기업들도 더 늘려 나가야 하고, 시스템 수준도 고도화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관련 분야 생태계를 담당하는 정부기관과 공공기관, 협회, 컨설팅 대행기관들이 각자 수준 향상을 위해 노력해야 할 시기라고 생각해요. 제가 이끄는 BCM협동조합 또한 이러한 부분에 이바지하고 기업의 안전문화 수준을 높이는 역할을 해나가는 전문기관으로 발돋움하고자 합니다.”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실거래가를 기록한 아파트는 용산구 한남동에 자리한 한남더힐이었다. 한남더힐 전용면적 243.642㎡는 지난해 9월 실거래가 77억5000만 원으로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2위는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7차아파트였다. 지난 10월 67억 원(전용 245.2㎡)에 거래됐다. 3위는 강남구 청담동 효성빌라청담101로, 지난 11월 62억 원(전용 226.74㎡)에 거래됐다.
수도권에서는 성남시 분당구 정자동 분당파크뷰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지난 6월 35억원(전용 244.65㎡)에 거래됐다.
지난해 서울 실거래가 상위 100위 아파트의 평균 거래가는 52억159만 원이었다. 100위 안에 든 아파트가 가장 많은 지역은 강남구였다. 53개로 전체의 48%에 달했다. 이어 용산구(26개, 24%), 서초구(25개, 23%), 성동구(6개, 5%)가 뒤를 이었다.
한남더힐은 2018년, 2019년에도 최고 거래가를 기록했다. 각각 81억원(전용 244.783㎡), 84억원(전용 244.749㎡)에 거래됐다. 타워팰리스, 삼성동 아이파크로 이어지던 대표 고가 아파트의 계보가 한남더힐로 이어지는 모양새다.
서울 아파트 최고 거래가는 한남더힐이 거래되기 전 40억~50억 원대였으나, 한남더힐이 거래되기 시작한 2014년 이후 70억~80억 원 선으로 크게 올랐다.
한남더힐 거래가 강세는 대출 없이 집을 구입하는 수요가 늘어난 데 힘입은 것으로 분석된다.
2019년 발표된 12ㆍ16 부동산 대책에 따라 15억 원이 넘는 주택 구입 시 대출을 한 푼도 받을 수 없다. 그럼에도 고가주택을 현금으로 구입하는 수요는 증가세다. 국회 교통위원회 소속 더불어민주당 소병훈 의원이 2018년 1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서울에서 집을 매입한 45만5930명의 주택자금조달계획서를 분석한 결과, 대출 없이 자기 자금만으로 이뤄진 거래는 2018년 2496명에서 2019년 3276명, 2020년 3105명(8월 기준)으로 꾸준히 늘었다.
그중 한남더힐 거래가 41건으로 가장 많았다. 한남더힐을 매입한 이들이 평균적으로 지출한 자금은 33억 7317만 원이었다. 한남더힐 다음으로 현금 거래가 많은 주택은 강남구 도곡동 타워팰리스와 송파 위례 리슈빌 퍼스트클래스였다.
2011년 준공한 한남더힐은 용산구 한남동에 위치했으며, 단지는 32개 동, 600세대 규모다. 유엔빌리지 인근, 옛 단국대학교 부지에 조성된 최고급 주거단지다. 구광모 LG그룹 회장, 박세창 아시아나IDT 대표이사 등 재계 인사와 방탄소년단, 소지섭, 안성기 등 톱스타 연예인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주요 재벌가 부인들 중 주식부자 1위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부인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 관장인 것으로 조사됐다.
기업분석 전문 한국CXO연구소는 최근 ‘국내 주요 100대 그룹 재벌가 부인 주식재산 현황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대상은 공정거래위원회가 관리하는 59개 대기업집단을 포함해 총 100개 그룹이다. 조사 대상자는 오너가 부인 성명 파악이 가능한 90명이다. 오너 부인 성명은 공정위 공시 자료와 언론 기사 및 각종 인물 검색 등을 통해 파악했다.
이번 주식 재산은 금융감독원에 보고된 주식 중 보통주(우선주 제외) 기준으로 조사했으며, 지난 7일 종가를 곱해 주식평가액을 산정했다. 비상장사 주식가치는 제외했다. 또 여성 자신이 그룹 총수거나 경영자, 배우자가 고인이 된 경우 등은 조사에는 포함시켰으나 주식평가액 순위에는 제외했다.
1위는 홍라희 전 관장이 차지했다. 정 관장은 삼성전자 보통주 주식 5415만 3600주(0.91%)를 보유했으며, 지난 7일 기준 주식재산 가치가 2조6860억 원에 달했다. 2위는 이장한 종근당그룹 부인 정재정 여사로 409억 원 가치의 주식재산을 보유했다. 정 여사는 종근당홀딩스 주식을 29만1575주 보유했고, 7일 종가 10만8000원으로 곱한 주식평가액이 310억 원을 넘어섰다. 94억 원 상당의 경보제약 주식도 보유한 것으로 파악됐다.
김석수 동서그룹 회장의 부인 문혜영 여사는 336억 원으로 오너가 안방마님 주식부자 클럽 톱 3에 이름을 올렸다. 문 여사는 ㈜동서 주식 200만5935주(2.01%)를 갖고 있다. 신춘호 농심그룹 회장의 부인 김낙양, 임성기 한미약품그룹 회장의 부인 송영숙 여사는 각각 200억 원대 주식평가액을 보유하며 5위권에 들었다.
이어 6위 이병무 아세아그룹 회장 부인 이정자 여사(187억 원), 7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부인 서영민 여사(183억 원), 8위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부인 오수정 맥시칸 대표이사(170억 원), 9위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 부인 송광자 여사(156억 원), 10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부인 김선정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120억 원) 등이 100억 원대 주식재산을 보유한 것으로 조사됐다.
즐기는 취미가 있는가. 부자들의 좀 더 특별해 보이는 그것, 혹은 돈이 없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럭셔리 취미생활을 엿봤다.
브리지 게임에 빠진 슈퍼리치
한국 사람에게 가장 있기 있는 게임이 화투라면 외국에서는 트럼프 카드로 즐기는 브리지 게임(이하 브리지)이 인기다. 우리에게는 생소하지만 130여 개국 4000만 명이 이 게임에 열광한다.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지적인 두뇌 게임’이라는 찬사가 따라다니는데, 그 명성만큼이나 이 사교 게임을 즐기는 부호와 사회 지도자도 많다. 당장 부자의 대명사로 꼽히는 워런 버핏과 마이크로소프트 창업자인 빌 게이츠의 이름이 나온다. 두 사람이 함께 브리지를 즐기는 모습이 인터넷 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이 이 게임을 소위 광적으로 즐긴다는 소문이 나면서 브리지는 세계 최고 부자의 놀이로 인식됐다. 워런 버핏은 “브리지를 잘하는 사람 3명만 있으면 교도소에 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말할 정도로 빠져 있다. 버핏과 게이츠는 브리지의 장점 등을 알리며 미국의 중·고교 학생들에게 보급하기 위해 기부를 이어가고 있다. 두뇌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시니어 세대 치매 예방에도 좋은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브리지 하면 인도네시아 최고의 갑부 마이클 밤방 하르토노도 빼놓을 수 없다. 경제전문지 ‘포브스’ 선정 ‘인도네시아 최고 부자 50인’에 11년 동안 1위 자리에 올라 있는 인물. 하르토노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정식 종목에 브리지를 넣기 위해 많은 힘을 기울였다. 특히 그는 당시 79세의 고령에 선수로 참가해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중국의 덩샤오핑 전 주석은 마오쩌둥 집권 당시 자본주의의 산물이라며 금지했던 브리지를 숨어서까지 했을 정도로 즐겼다. 이 열성적인 정치지도자로 인해 아시아권에서 중국이 브리지를 가장 많이 하는 국가가 됐다. 이외에도 미국의 아이젠하워, 케네디 대통령, 영국 윈스턴 처칠 수상 등이 즐겼으며, 조훈현 9단도 브리지 게임의 매력에 푹 빠져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우주를 품는 슈퍼리치 3인방
아마존 창업자 제프 베조스 회장은 2000년 항공우주회사 블루오리진(Blue Origin)을 설립했다. 테슬라모터스의 최고경영자(CEO) 일론 머스크는 2년 후인 2002년 민간 우주개발업체 스페이스X(Space Exploration Technologies Corp.)를 만들었다. ‘괴짜 CEO’로 알려진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회장도 2004년 민간 우주탐사기업 버진갤럭틱(Virgin Galactic)을 설립해 우주여행의 꿈에 한 발짝 다가섰다. 그는 10억 달러(약 1조1825억 원) 이상의 개인 자금을 우주 사업에 투자했다.
버진갤럭틱의 경우 지난해 10월 미국 뉴욕증권거래소(NYSE) 상장사가 되면서 우주여행 사업이 더 이상 공상과학이 아니고 투자가 가능한 분야임을 입증했다. 2000년대 초반 이들이 민간 우주항공사를 만들 때만 하더라도 ‘저게 과연 가능한 발상인가’ 하며 젊은 부호의 허세로 여겼다. 하지만 장난처럼 보였던 도전은 취미에 머물지 않았고 정부산업의 축으로 보던 우주 분야의 문을 열었다.
이들 중 후발주자인 버진갤러틱은 두 회사를 제치고 2018년 12월 민간기업 최초로 탑승객을 태운 우주선의 대기권 밖 여행을 성공시켰다. 성공이 있기까지 각종 사고와 실패가 있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우주여행의 꿈에 꾸준히 다가선 결과다. 특히 리처드 브랜슨 회장은 민간우주선을 타고 우주를 여행한 인류 최초의 여행자로서 원대한 꿈을 이루겠다고 다짐해왔다. 지난 1월 8일에는 비행기 모양의 차세대 유인 우주선 ‘버진 스페이스십 유니티’를 공개하며 차근차근 우주 정복의 시기를 앞당기고 있다. 버진갤럭틱은 1인당 약 2억8000만 원을 내면 우주비행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지금까지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저스틴 팀버레이크, 레이디 가가 등 유명 인물을 포함, 700명이 신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민간 관광객 우주 방문 프로그램인 로켓 시스템 ‘뉴셰퍼드’를 개발해온 블루오리진은 현재까지 11차례의 시험 비행을 마쳤는데, 6명까지 탑승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귀를 자극하고 마음을 열다
남자들이 특히 빠지면 안 된다고 입을 모으는 것 세 가지가 있다. 자동차와 카메라 그리고 오디오다. 이들 세계에 눈을 뜨는 순간 수천만 원을 쏟아 붓는 일이 어렵지 않게 벌어지기도 한다. 오디오필, 오디오파일 혹은 스테레오파일 등 오디오 애호가를 지칭하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전 세계에 하이파이(Hi-Fi), 하이엔드(High-End) 오디오라 부르는 고음질 음향을 추구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얘기다. 꼭 슈퍼리치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디오 마니아로 소개된 이는 많지만 심취해온 구력(?)으로 봤을 때 공정곤 전 효성물산 부회장 이름이 가장 눈에 띈다. 그는 고가의 오디오 장비로 음악 감상실을 꾸며왔다. 스피커의 경우 1987년 생산된 골드문트사의 아폴로그. 이탈리아 유명 미술가 클라우디오 로타 로리아가 디자인해 세계 최초로 뉴욕 MoMA에 전시됐다. 이 제품의 25주년 특별 한정판 가격은 6억5000만 원이다. 한 인터뷰에서 그는 “고교 시절 오디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해 대학 때부터 빠져 살았다”고 말했다. 레코드판이 많을 때는 1000장이 넘을 정도였다고.
오일머니 축구 구단주, 이것이 돈의 맛
2006년, 군부 쿠데타로 태국 정치권력으로부터 추출됐던 탁신 친나왓 전 태국 총리가 2007년 잉글리시 프리미어리그(EPL)의 맨체스터시티(맨시티)를 인수한 적이 있다. 그 소식이 들리기가 무섭게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아랍에미리트의 왕자인 셰이크 만수르 빈 자예드 알 나얀(이하 만수르)이 3000억 원에 샀다는 것. 당시만 해도 그저 그런 성적을 보이던 맨시티를 사는 데 들어간 비용 자체만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만수르는 “진정한 부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겠다”는 말로 인수에 관한 언급을 대신했다. 사람들은 중동 부자가 인수한 맨시티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일 것인지 촉각을 세웠다.
그 후 12년 동안 맨시티의 분위기는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2011-2012 시즌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시작으로 거의 매년 우승과 준우승을 오가며 고공행진 중이다. 만수르의 전폭적인 투자와 선수영입과 육성은 우승이 멀게만 느껴졌던 맨시티에게 기회를 제공한 셈. 2018년 언론보도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만수르가 맨시티에 퍼부은 돈만 2조1000억 원이다. 그 뒤 2년의 시간이 더 흘렀으니 그보다 더 많은 돈을 투자했을 것이다. 그는 스타급 선수를 영입하는 것은 물론 소속 선수들에 대한 지원, 차원이 다른 팬 서비스, 유소년 축구클럽 후원에도 아낌없는 지원을 이어갔다.
지난해 국제축구연맹(FIFA) 산하 국제스포츠연구센터(CIES)가 선수들 몸값을 조사했을 때 맨시티가 가장 값비싼 선수들을 보유한 구단으로 나타난 바 있다. 맨시티 선수들 몸값 합산가는 10억1400만 유로(약 1조3350억 원). 특히 몸값으로 10억 유로를 넘긴 구단은 맨시티가 EPL 역사 이래 처음이다. 만수르가 맨시티 하나만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 지난해 말 만수르는 인도의 축구팀 뭄바이시티FC을 인수했다. 만수르가 운영하는 시티풋볼그룹(CFG)은 이 축구팀의 지분 65%를 인수했다. CFG는 맨시티를 비롯해 미국 메이저리그사커(MLS) 뉴욕시티FC, 호주 A리그 멜버른하트FC, 일본 J리그 요코하마 등을 소유하고 있다. 뭄바이시티FC는 만수르의 8번째 축구팀이다.
슈퍼리치의 특징 다섯 가지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 인사이더’는 ‘미래 부자의 이웃: 부자가 되기 위한 장기적인 계획’을 쓴 작가인 사라 스텐리 팔라우의 연구를 통해, 미국의 600여 명 부자들이 뚜렷하게 가지고 있는 5가지 특징을 소개했다. 바로 독서, 운동, SNS 활동, 잠, 일이다. 그러면서 부자들은 이와 관련한 활동을 하루든 한 주든 한 달이든 평균적으로 고르게 시간을 할애한다고 강조했다. 취미도 잠도 운동도 성공에 있어 모두 중요한 요소라는 의미다. 특히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일수록 독서에 할애하는 시간이 많은 점에 주목하면서 워런 버핏의 경우 하루의 80%를 책 읽는 시간으로 쓴다고 언급했다.
마크 저커버그도 책읽기를 강조하며 책을 통해 다른 문화와 역사와 기술, 신념을 쌓아갈 수 있다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말했다. 특히 운동 습관은 일반인들에 비해 철저했다. 일주일에 6시간 가까이 운동을 하는데 애플의 공동 창업자 팀 쿡은 매일 아침 4시 30분에 일어나 피트니스센터로 향한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 안나 윈투어 역시 아침 5시 45분에 일어나 테니스로 몸을 푼다고.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도 아침에 주로 테니스를 치는데 서핑보드, 수영, 자전거 등도 꾸준히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명 슈퍼리치의 취미
•마크 저커버그(페이스북 창업자) 히브리어 책 읽기
•피터 틸(페이팔 창업자) 체스 두기 (국가대표 출신)
•래리 앨리슨(오라클 CEO) 요트 타기(그의 팀은 아메리카스컵 대회에서 우승을 거뒀다)
•데이비드 록펠러(미국의 전 은행가, 사업가) 딱정벌레 수집(록펠러가 최초로 발견한 딱정벌레에는 그의 이름이 학명으로 붙었다)
•구본무(전 LG그룹 회장) 새 관찰(살아생전 집무실에 망원경이 있었고, 조류도감도도 발간하고 새 사랑 사이트도 있었다)
‘기업과 나라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 권오용(權五勇·63) 효성그룹 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그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재계에서 ‘뼛속까지 홍보맨’의 요직을 거치면서 여러 굴지의 오너와 인연을 갖게 된 그는 국가와 사회,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그가 상임이사로 일하는 한국가이드스타(이사장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는 비영리 공익법인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6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가 발견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길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예요.(웃음) 2015년 1월호를 창간하기도 전에 정기구독 신청을 했고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죠. 평생 구독 회원이 될 것 같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제1호 독자, 권오용 고문은 단순히 여가를 활용하고 문화만을 즐기는 게 아니라 현실 사회까지 다루는 중량감 있는 시니어 매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바로 그러한 바람이 구현된 잡지다.
“여가와 문화만을 즐기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니어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강물처럼 흘러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치 저수지처럼, 필요할 때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시니어라고 봐요.”
부자는 돈을 잘 쓰는 사람
전경련 기획홍보 본부장을 거쳐 금호아시아나그룹, SK그룹 홍보실장, SK 사장, 효성그룹 홍보 고문까지, 스스로 재계에 취직했다고 하는 그가 공익법인 평가 법인에서 봉사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그의 국가관을 들어봐야 한다.
“선진국의 기준이란 뭘까요? 바로 오랫동안 잘사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중요한 건 기간이죠. 그런 의미에서 최고 선진국은 유럽이고, 그다음이 미국이죠. 그리고 일본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에는 소득이 5만 달러 이상인 사람이 1억 명이나 된다고 해요. 그런데 잘사는 나라로 보여도, 기간으로 보면 졸부예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 쓰는지를 따지면, 그 부분에 있어선 선진국이 아니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부자인 이유는 돈을 잘 쓰기 때문이죠. 평생을 쓰레기 주워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는 빌 게이츠 못지않은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많은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세금을 안 내면 투명성으로 보답해야
돈을 잘 써야 공동체가 잘 산다. 기부가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권 고문이 보기에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기부금이 1년에 12조 원 정도 됩니다. 그중 7조 원이 종교단체에서 나와요. 그리고 5조 원은 공익법인이 마련한 기부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부금 시장이 양적으로는 굉장히 늘었는데, 어떻게 썼는지는 불투명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익법인 기부금의 어마어마한 액수에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문제들도 떠올랐다. 당장 얼마 전 한국 사회를 전율시켰던 ‘어금니 아빠’ 이영학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각 뒤에는 그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풍족한 생활을 뒷받침해준 소위 ‘눈먼 기부금’이 있지 않았는가.
“세금은 국회를 통해 어떻게 쓰이는지 파악되지만 기부금은 잘 쓰이고 있는지 국민이 관심이 없어요. 막연히 잘 쓰이고 있겠지 생각만 하죠. 미국의 공익법인도 우리처럼 세금을 안 냅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조세정의의 관점에서 일반 기업보다 훨씬 많은 투명성의 책임이 부여돼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냥 방관하는 편이죠.”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한국가이드스타는 공익법인이 세금을 면제받는 대가로 국세청에 매년 제출하는 재무보고서를 분석 소스로 삼는다. 재무보고서를 분석해 운영을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검토하고, 결과를 점수화해 매년 공개하고 있다. 작년에 처음 발표했는데, 반응이 꽤 컸다고 권 고문은 자평했다.
“물론 평가는 다 싫어하죠. 학교도, 신문도, 개인도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는 입장에서는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라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런 걸 정부에서 하면 탄압한다는 얘기를 듣게 돼요. 그래서 민간 쪽에서 하는 게 맞죠.”
한국가이드스타는 어떻게 보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여론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를 건드리는 일이기에 지원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쉽지 않은 길이었고 ‘이 일을 내가 왜 하나’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올해도 3월 14일 우리나라 공익법인 8993개를 대상으로 투명성과 책무성을 분석해 93곳만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좋은 평가를 받은 곳에서는 좋아하지만 나머지는 무슨 자격으로 평가를 하느냐고 항의가 쏟아졌다.
지원이 불가능했던 미르·K 재단 사건
“작년에는 데이터를 통해 공익법인의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저희 취지를 긍정적으로 보고 큰 지원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한국가이드스타 평가를 중요한 참고 정보로 활용하는 기업도 생겼습니다. 보람 있죠. 공익법인에서는 싫어하지만.(웃음) 그러나 의무감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권 고문은 공익법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권 교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미르·K 재단 사건을 언급했다.
“권력을 이용해 자금을 요청하는 미르·K 재단 같은 곳은 어느 정권에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경련에 공익법인들에 대한 운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적이 있어요. 그 가이드대로라면 미르·K 재단은 돈을 줘선 안 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돈을 주는 바람에 기업 회장들이 구속되고 전경련은 해체 위기에 몰렸으니…. 미안한 심정이죠. 공익법인 평가는 기업으로 하여금 그런 비정상적인 재단에 돈을 안 줄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마련해줍니다.”
배려가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최근 오너십 체제와 기업 경제, 국가 발전이 함께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 변화된 오너십과 사회 환경의 장점들을 합쳐 한국만의 독자적인 모델이 개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 전경련에서 일할 때, 전경련 조찬이 7시 30분에 있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7시 35분에 도착한 일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회의가 늦게 끝나 미안하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새벽 5시부터 이미 회의를 하나 끝내고 온 거였어요. 촌음을 아껴 시대를 누빈 선배 경제인들의 열정에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거죠.
정주영, 이건희, 구자경, 김우중, 최종현 등 오너의 삶과 성과를 바로 옆에서 본 사람답게, 그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 관계를 정경일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열정과 실행력이 일으킨 변화의 긍정적인 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평창동계올림픽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유치한 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에요. 정경일체가 되어 국가적 목표를 달성한 거죠. 서울올림픽도 마찬가지였죠. 감동과 투자는 별개가 아니에요. 그 과정도 봐야죠.”
그는 시니어를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고 표현했다. 보이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이뤄지지만 보이지 않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안 이뤄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할 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배려의 힘이야말로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열쇠라고 말했다.
“올림픽이 그다음에 열리는 패럴림픽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효율이 배려가 되는 교훈을 보여줬죠. 올림픽이 몇 초를 기록으로 서로 경쟁하는 ‘효율’을 목표로 한다면 패럴림픽은 ‘배려’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경기입니다. 그런데 패럴림픽이 88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됐다는 걸 아세요? 사실 우리나라가 효율과 배려를 세계 최초로 시행한 나라입니다.”
재계에 취직했다는 사람답다. 전문성을 갖고 일가를 이룬 만큼, 이제 그는 봉사라는 기회를 통해 청춘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철학이 샘솟듯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권오용 고문.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의 행보라서 그런지 더욱 진한 여운이 남는다.
부자를 많이 배출하기로 유명한 경남 의령군에는 ‘부잣길’이 있다.
이병철 전 삼성그룹 회장, LG그룹 창업자 구인회 회장, 효성그룹 창업자 조홍제 회장이 태어난 곳이기 때문이다.
부자의 기운을 받으며 걷는 건강한 길이라 이름을 '부잣길'로 지었다. 의령군을 지나는 남강에는 '솥바위'(鼎巖)가 있다.
솥은 옛날부터 곡식, 즉 재물을 뜻한다.
의령군에는 솥바위 사방 20리 안쪽에서 큰 부자가 날 것이란 전설이 있었다.
실제로 솥바위에서 8㎞ 떨어진 정곡면에서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이, 7㎞ 떨어진 진주시 지수면에서 LG그룹 창업주 구인회 회장이, 5㎞ 떨어진 함안군 군북면에서 효성그룹 창업주 조홍제 회장이 태어났다.
의령군은 부자의 고향이라는 것을 널리 알리려 지난해 3월 부잣길을 개통했다. 6.3㎞짜리 A코스와 12.8㎞짜리 B코스가 있다. 두 코스 모두 의령군 정곡면 이병철 회장 생가 공영주차장에서 출발한다.
부잣길을 널리 알리고 안내하는 사람들의 모임인 '부잣길을 걷는 사람들'은 부잣길 걷기 행사 참가자들에게 문화상품권을 준다고 21일 밝혔다.
이 모임은 매달 셋째주 일요일 오전 10시 부잣길 걷기행사를 열고 있다.
매월 정기행사에 5번 이상 참여한 사람 가운데 가장 많이 참여한 사람에게 내년 1월 5만원권 문화상품권을 시상하고 순서대로 1만원~3만원권 문화상품권을 준다.
의령군청 관광·문화재 담당 공무원이면서 시인인 윤재환씨가 부잣길을 함께 걸으며 지역 소개와 문화재 해설을 한다.
국내 주요 기업 최고경영자(CEO)들의 평균 나이가 60세에 가까운 것으로 조사됐다.
경영전문지 월간현대경영은 국내 100대 기업 대표이사의 프로필을 조사한 결과 CEO 평균 연령은 59.9세로 집계됐다고 23일 밝혔다.
1994년부터 동일한 조사를 해 온 월간현대경영은 대기업 임원들의 연소화 추세와 달리 CEO의 평균 연령이 최근 5년간 지속적으로 많아졌다고 소개했다.
1994년 조사에서 54.8세였던 CEO 평균 연령은 2010년에서 58.6세, 2011년 58.9세, 2012년 59.3세, 지난해 59.4세였다가 올해는 거의 환갑에 도달했다는 것이다.
CEO들의 평균 회사 재직기간도 길어졌다. 2012년에 27.7년, 지난해에는 28.4년이던 평균 재직기간은 올해 조사에서 28.8년으로 길어졌다.
한 회사에서 가장 오래 몸담은 CEO로는 조석래 효성 회장(48년)이 꼽혔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47년)과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47년), 김준기 동부제철 회장(45년),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44년) 등도 한 회사에 오래 근무한 경영인으로 분류됐다.
CEO들은 입사 후 현재의 지위에 이르기까지 평균 22.7년이 걸린 것으로 파악됐다.
출신 대학교는 서울대가 38.0%로 가장 많았고 고려대(15.5%)와 연세대(9.9%), 한양대(8.4%), 성균관대(4.2%) 등이 뒤를 이었다.
특히 이공계 출신 CEO가 51.1%로 전체의 절반을 넘었다. 1994년 조사 이후 이공계 출신 CEO가 과반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월간현대경영은 설명했다. CEO들은 서울(42.0%) 출생이 많았고 경남(9.9%)과 경북(8.4%), 부산(7.6%), 경기(5.3%), 충북(5.3%) 등지를 출신지로 둔 경우도 있었다.
최근 들어 국내 부동산 시장이 회복될 기미를 보이면서 개발호재가 많은 지역이 부동산 투자자들의 시선을 모으고 있다. 개발 사업 진척 속도에 따라 시세차익까지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전문가들은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인 상승곡선을 타기 전인 올해 상반기를 주택 매수의 적기가 될 수 있다며 개발호재가 많은 지역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고 조언한다.
박상언 유엔알 컨설팅 대표는 “부동산 시장 회복 기대감이 커지고 있고, 봄 이사철 주택 거래량이 늘어날 것으로 예상되면서 집값과 전셋값 상승 폭도 조금씩 커질 것으로 전망된다”며 “하지만 부동산 시장 불안 심리가 여전히 존재하는 만큼 대기업 이전 등 개발호재가 있는 지역을 노리는 것이 안전하게 향후 아파트 시세차익을 기대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우선 주택 시장이 살아나고 있다. 21일 국민은행의 아파트 매매 및 전세시장 동향에 따르면 지난 1월 수도권 아파트 매매가격은 전달보다 0.06% 상승했다. 수도권 지역의 1월 아파트 가격이 상승한 것은 2011년 1월(0.15%)이후 3년만으로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지난해 청약 광풍의 진앙지 중 하나인 판교신도시가 시선을 끈다.
판교 개발호재의 핵심인 테크노밸리에는 국내 대표게임 업체들을 비롯해 정보기술(IT)을 비롯해 바이오ㆍ인터넷 콘텐츠 등과 관련된 700여개 기업이 들어서 있고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직원 수만 3만8000여명 이른다. 업계에서는 2015년이면 1000여개 기업에 임직원 수가 5만 명으로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동산114에 따르면 판교신도시 아파트의 3.3㎡당 평균 매매가는 지난 1월말 기준 2116만원으로 2012년 말에 비해 80만원 정도 증가했다. 지난해 인기를 끈 강남권 위례신도시의 3.3㎡당 평균 분양가가 1600만~1800만원 선인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다. .
판교신도시처럼 개발호재가 풍부한 지역으로는 송도국제도시가 대표적이다. 실제 올들어 세계 1위 보안업체인 다국적기업 ‘ADT 캡스’ 수도권광역본부가 송도 센트로드에 입주했다. 지난해 8월 송도에 콜센터를 설립한 효성ITX는 현재 40여명인 인력을 올해 안에 150여명으로 늘릴 계획이다. 1200여 명의 직원이 있는 포스코엔지니어링은 3월, 국내 최대 무역업체인 대우인터내셔널은 9월에 각각 송도로 본사를 이전한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사옥 이전을 위해 최근 312m, 68층으로 국내 최고층인 동북아무역타워(NEATT)를 매입했다.
제1공장 건립을 마친 삼성바이오로직스도 총 2조1000억원을 투자해 송도에 제조 프랜트와 연구개발(R&D)센터를 짓고 있다. 동아제약은 바이오산업클러스터를 앰코테크놀로지는 글로벌 R&D센터를 조성 중이다. 한진그룹은 오는 2018년까지 인하대병원 글로벌종합의료복합단지를 조성한다.
대기업 입주외에도 연세대와 뉴욕주립대, 조지메이슨대, 켄트대 등 유수의 국내외 대학이 들어선다는 점도 부동산 시장엔 호재다.
유입인구도 꾸준히 증가추세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7년 2만3000여명에 불과했던 송도국제신도시의 인구는 올해 1월 말 7만3000여명을 넘어서면서 5년 동안 약 3배 넘게 증가했다. 인구가 늘면서 전셋값이 상승해 매매가 대비 전세가율도 최근 60%를 넘어섰다.
송도 중에서도 이미 입주가 끝난 지역(1~3공구)보다 개발 호재가 많은 신흥주거지역(5·7공구)이 상대적으로 더 큰 수혜를 입을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이에 따라 해당 지역 분양 물량이 주목받고 있다.
대우건설은 5공구 RC-2 블록에 ‘송도 에듀포레 푸르지오’를 분양중이다. 59~105㎡(이하 전용면적 기준), 지하1~지상41층, 8개동, 총 1406가구 규모다. 중소형(84㎡ 이하)이 1284가구인 91.3%로 송도에서는 드문 중소형 위주의 단지로 꼽힌다.
분양가는 3.3㎡당 평균 1180만원 대이며 중도금 전액 무이자 혜택을 받을 수 있다. 오는 2016년 9월 입주 예정이다. 견본주택은 연수구 송도동 8-2번지에 있다.
롯데건설과 대우건설은 7공구에서 아파트와 오피스텔이 함께 들어서는 복합단지 ‘송도캠퍼스타운’을 분양중이다. 오피스텔인 ‘송도 캠퍼스타운 스카이’는 47층 2개동에 1835실이 들어선다. 26~34㎡의 소형 위주로 구성돼 있다. 기분양한 ‘송도캠퍼스타운 아파트’는 지하3~지상55층 6개 동에 59~101㎡ 1230가구로 구성됐으며 현재 저층 일부가 남아있다.
평택 부동산시장도 개발호재가 풍부해 기대감이 높은 곳이다. 평택은 삼성전자 고덕 산업단지 조성(2015년 준공예정), 주한미군기지 이전(2016년), LG전자 부품공장 조성(2017년 준공예정), 수서발 KTX 평택 지제역 개통(2015년 예정), 신세계복합쇼핑몰(2016년 완공 예정) 등 굵직한 개발호재로 주택수요가 꾸준히 늘고 있다. KTX 신평택역이 개통되면 수서역까지 약 22분이면 도달할 수 있다.
미분양 물량도 빠르게 소화되고 있다. 국토교통부 자료에 따르면 평택 지역 미분양 물량은 지난해 10월 2151가구에서 12월 말 1343가구로 절반 가까이 줄었다. 신규 분양도 호조세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5월 분양한 대림산업 ‘e편한세상 평택’은 5개월 만에 분양을 마친 것으로 알려졌다.
금호건설이 지난해 9월 분양한 ‘평택용이 금호어울림’도 2215가구의 대단지임에도 60% 이상 계약이 된 상태다. ‘‘평택 용이 금호어울림’은 67~113㎡로 구성되며 수요자의 선호도가 높은 중소형 세대가 전체의 97%를 웃돈다. 분양가는 기준층 기준 760만원부터다. 같은 지역의 5년전 분양가보다도 저렴하다.
올해에도 신규 분양이 이어진다. 현대건설·대우건설·GS건설을 비롯한 8개 건설사가 모두 9828가구를 공급할 계획이다. 대부분 실수요자들이 선호하는 중소형으로 구성된다.
현대건설은 안중읍에 ‘평택 송담 힐스테이트’를 오는 4월 분양한다. 59~84㎡ 952가구 규모다. 우미건설과 반도건설도 평택시 소사벌지구에 4월 ‘평택소사벌 우미린’과 ‘평택 반도유보라 2차’를 각각 분양한다.
‘평택소사벌 우미린’은 84㎡ 단일 주택형으로 총 870가구이며 ‘평택 반도유보라 2차’ 는 74~85㎡ 630가구로 구성된다.
대우건설은 용죽지구에 ‘평택 용죽 푸르지오’ 761가구를 11월에 공급할 예정이다. 역시 중소형인 60~84㎡로 설계했다. GS건설은 12월에 동삭동에서 ‘평택 칠원동삭 자이’를 공급한다. 59~84㎡ 1095가구에 이른다.
롯데건설은 경기 안성시 대덕면 신령리에서 ´안성 롯데캐슬´을 분양중이다. 지하 2층~지상 20층, 30개동, 전용면적 59~84㎡, 총 2320가구로 구성된다. 전용 84㎡의 평균분양가는 2억3000만원대로 구입할 수 있다. 단지 앞의 38번 국도로 안성평택중심권역까지 10분이면 이동할 수 있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달리보면, 자신의 부모님과 한없이 가까워지는 일일 것이다. 그래서 젊었을 때는 알 수 없었던 부모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 헌신과 노력을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시간을 통해 성숙하게 익어가는 인생에 대한 하나의 증거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특히나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은 그 얼마나 많은 희생과 배려로 위대하게 완성되어 있는가.
부르면 부를수록 사무치는 그 이름, 어머니~~
어머니라는 그 이름을 기억하며 위안과 용기를 얻는 삶 속에서 소중한 존재를 다시 기억하자는 뜻으로 본지에서 만드는 「어머니」 코너는 그러한 위대한 어머니들의 삶과 의미를 돌아봄으로써 삶의 의미를 다시 묻고자 한다. 그 첫 시작은 권오준 포스코 차기 회장의 어머니 정수생 씨(1994년 별세)다.
◆어머니의 깊은 혜안과 맑은 지혜로움으로 꽃핀 5남매
긴 진통을 앓던 포스코의 차기 회장에 권오준 기술부문장이 내정되었다는 소식은 많은 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권 차기 회장은 서울대 금속공학과를 나와 미국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후 포스코에 입사해 연구개발 분야에서 정진했다. 또 포스코가 세계최초로 개발한 최첨단 파이낵스 신공법과 고부가가치 자동차 강판 등의 개발 주역을 맡았다. 한마디로 포스코에 뼈를 묻은 묵직한 기술전문가로서 위기에 처한 포스코를 구해내야 하는 막대한 임무를 수행할 수장으로 발탁된 것이다.
당신들은 헐벗어도 자식만큼은 반듯하게 키우려는 우리나라 부모들의 희생적인 자녀사랑과 교육열이야말로 디지털 강국 코리아를 이룬 저력이 아니었을까.
이처럼 권 내정자가 국민에게 존경받는 포스코를 만들고 글로벌 초일류 철강회사로 발돋움시킬 최고의 리더자로 성공하기까지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너희들은 굉장한 사람이 된다.” 어릴 적부터 어머니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될거야’가 아닌 ‘된다’라는 확신으로 마음속에 단단한 심지를 심어 주셨다.
재경 영주 향우회 관계자는 경북여고를 나온 어머니는 자녀의 기를 살려주고 재능을 키워주실 줄 아는 교육적 혜안을 가지신 분이셨다고 기억했다. 자식들의 타고 난 재능을 키울려고 했던 맹모의 가르침을 실행에 옮기셨던 것.
“유학 간 아들이나 서울에서 공부하는 자식들을 위해 바리바리 싸서 보내는 것 좋아하셨습니다. 양계장 하실 때도 계란을 반듯한 걸로 골라 광주리에 담아 서울로 들고 가셨지요. 당신은 안먹고 안 입고 아껴서 쥐포, 오징어, 무말랭이, 백김치, 고추찜 등을 보내는, 말로 다 하지 못하는 아릿하고 따뜻한 넘치는 사랑을 주셨습니다” 어머니를 잘 알던 고향의 한 어르신은 이렇게 회고했다.
끝없는 자식 사랑과 세상사는 법을 가르쳐주려는 어머님는 위대한 유산을 남기셨고, 그런 어머니를 바라보는 5남매의 안타까운 효심에 고향 어르신들도 눈시울을 적셨다.
◆어머니가 좋아하는 음식을 몰랐던 이유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육개장, 콩가루 칼국수(안동국시),뼈다귀 곰국을 기억하는 권 내정자를 비롯 5남매들은 정작 어머니 정 씨가 좋아했던 음식이 뭐였는지 잘 모르겠다고 고백했다.
어머니에 관한 회고에서 5남매만을 위해서만 맛있는 것을 해줬기 때문에 정작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선 알려줄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정 씨는 그러면서도 아이들 공부에까지 신경 썼다. 매번 자식들 숙제를 점검하던 정 씨는 자식들이 숙제에 대해 잘 몰라 하면 자식들보다도 자신이 더 분해했다. 모르는 자식에게 집을 나가라고 하고 책을 집어 던지기도 했고 아궁이로 가져가 책을 태우려고도 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되자 자식들은 울면서 어머니에게 매달렸고 한 번 울고 난 다음에는 묘할 정도로 공부가 잘 되곤 했다. 자식들의 학습열과 집중력을 위해 정 씨가 선택해야 했던 일종의 ‘쇼크 요법’이었을 것이다.
“어머니가 우리 5남매에게 보내주신 가장 큰 선물은 기도였다. 매일 밤 주무시기 전에 엄마는 꼭 정화수를 그릇에 가득 떠 놓고 두 손 모아 기도를 올렸다. 엄마에게 뭘 기도하셨냐고 물었더니 웃으셨다. 너들 잘 되는 거 말고 뭐가 있냐는 표정이었다, 기도가 희망이었던 분이었고 그 기도는 어머니가 준 가장 큰 축복이었다.”
어머니는 많은 일을 했지만 서울에 가 있는 자식들 뒷바라지를 하기엔 돈은 항상 모자랐다. 등록금을 낼 때면 어김없이 부부싸움이 벌어졌다. 정 씨는 때가 되면 남편을 닦달하여 어떻게든 등록금을 마련하곤 했다. 그렇게 해놓지 않으면 남편은 자식들이 등록금을 내지 않아도 학교를 다니는 줄 알 거라는 게 정 씨의 우려였다. 그리고 5남매들은 자신들의 학교 생활이 부모님의 노력과 헌신으로 지탱되고 있다는 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자식들에게 보내주신 큰 선물 '기도'…경북 영주 출신 모두 서울사대부고 나와
권 차기 회장이 대두되면서 자연스럽게 권 차기 회장의 가족이 화제가 됐다. 큰 누나 권원주 씨는 이화여대 약대를 나와 약국을 경영중이며, 큰형 권오성 씨는 외대 출신으로 무역업을 하고 있다. 권 차기 회장의 첫째 동생 권오진 씨는 연세대 의대를 졸업한 후 병원을 운영중이며, 둘째 동생 권오용 씨는 고려대 정외과를 나와 전경련 홍보실장, 금호아시아나그룹 홍보전무, KTB 경영기획실 상무, SK그룹 홍보담당 사장 등을 역임한 후 현재 효성그룹에서 상임고문으로 재직중이다. 권 차기 회장의 남매들은 모두 서울사대부고 16회, 18회, 20회, 24회, 26회 동문으로 서울대 연대 고대를 잇는 스카이대와 이대 외대 등의 명문대학을 나와 각계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중이다.
2008년 부친상을 당했을 때 포스코 기술연구소장 전무를 맡고 있던 권 차기 회장은 부고란에 자신의 신분을 ‘회사원’으로 적도록 했다. 포스코 전무의 부친상 부고가 나갔을 경우, 협력사 등에서 조문을 와야 하는 부담을 느낀다는 점을 고려해 배려한 것이다.
이처럼 권 차기 회장은 남들에게 나서는 것을 꺼려한다. 동생 권오용 고문은 “형님은 꼼꼼한 성격에 기술인이기 때문에 기술로만 보여주면 될 뿐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강하신 분”이라고 말했다.
◆위대한 어머니 정수생 씨의 헌신
성공한 자식들의 뒤에는 위대한 어머니가 있기 마련이다. 권 차기 회장 5남매(4남 1녀)의 어머니 정수생 씨 또한 그런 위대한 어머니의 그림을 그리기에 충분한 삶을 살았던 어머니였다.
선친 권영건 씨는 본래 양반가문으로 70년대 초반까지 고향인 영주에서 대규모 제재소를 경영해 상당한 재력을 쌓았지만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자금난에 몰려 사업이 기울었다. 그러나 가세가 어려워졌어도 자식 공부를 포기하지 않았고 5남매 모두를 상경시키는 교육열을 보였다. 정 씨는 그러한 남편의 의지와 자식들의 미래를 뒷바라지하기 위해 남다른 고생을 해야 했다.
5남매에게는 전형적인 엄친자모(嚴親慈母)형의 부모님이었다. ‘健全/道義/勤儉’이라는 가훈을 직접 지어주신 아버지는 무섭기는 해도 풍류를 아는 여유가 있었다. 어머니 역시 자애롭기는 하셔도 결코 원칙에 벗어나는 적은 없었다. 비록 가난했던 시절이었지만 부모는 당시 큰 도시에서 아이들을 교육시켜야겠다는 믿음이 강하신 분들이었다.
무엇보다도 돈이 문제였다. 자식들 유학 비용을 위해 정 씨는 서울에서 스테인리스 식기를 구매하여 영주에 가서 팔았다. 집 마당 한 켠에는 300마리 정도 되는 닭을 키웠다. 그 옆에는 돼지도 길렀다. 밤에도 불을 켜고 사료를 줘야 했다. 돼지야 먹던 걸 그냥 갔다 던지면 그만이었지만 닭은 사료를 사와 으깨서 나눠줘야 했다. 또 다른 벌이였던 하숙과 전세 관리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채를 하숙과 전세를 위해 내주고 정 씨를 비롯한 5남매 가족들은 사랑방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 사랑방에서는 꽃장사를 했다. 하굣길에 여학생들은 사랑방 창문을 통해 꽃을 사가곤 했다. 그 모든 것이 어머니 정 씨의 몫이었다.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제야 알게 되서…”
어머니!
나에게 티끌 하나 주지 않은 걸인들이
내게 손을 내밀 때면 불쌍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전부를 준 어머니가
불쌍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제야 알게 돼서 죄송합니다.
아직도 너무도 많은 것을 알지 못해 죄송합니다.
-서울여자대학교 사랑의 엽서 공모전 대상작 중에서
권 고문이 평소에 좋아하는 시인 에서는 어머니에 대한 그의 그리움과 후회가 넘쳐난다. 이 절절한 그리움에 대한 동감은 당연한 것이었다. 고생 끝에 하나씩 이뤄지던 자식들의 성공을 지켜 본 정 씨는 1994년에 71세의 나이로 운명하셨다.
5남매의 어머니 정 씨의 삶의 가치와 자식들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 이 땅의 어머니들의 삶의 가치를 다시 돌아보게 만든다. 자식을 위해 자신을 바쳤고 그렇게 성공한 자식에게서 얻는 기쁨으로 모든 것을 감내했다. 거기에는 이유가 없다. 그저 무제한적인 사랑만이 존재할 뿐이다.
어머니는 5남매를 존중했다. 어머니 스스로의 자신의 감정에 솔직했다는 것을 5남매는 뒤늦게 안다.
오는 3월 18일이면 어머니 기일이라 다 같이 모여 형제간의 깊은 우애를 다지는 시간을 함께 하기에 벌써부터 권오준 차기회장 내정자의 취임식에 하늘에 계신 어머니의 축복 담긴 기도가 기다려진다. 권 차기회장 내정자는 3월 14일 정기주총 통과 뒤 이사회 승인을 거쳐 최종 선임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