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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징어 게임, 우리 동네는 어떤 이름을?
- < 편집자주 - 이 기사에는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대한 스포일러가 노출되지 않도록 구성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오징어 게임을 다루고 있어 스포일러가 간접적으로라도 노출될 가능성을 완벽하게 배제할 수는 없다. 따라서 ‘오징어 게임’ 스포일러 노출에 대한 우려가 있는 독자는 이를 참고하기 바란다. > 최근 국내에서 제작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오징어 게임’이 화제다. 국내 드라마 최초로 전 세계 넷플릭스 1위를 차지하며 세계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어서다. 특히 국내에서는 드라마에 나온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놀이에 대한 추억과 사연 등을 간직한 시니어들이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인터넷 커뮤니티와 카카오 단톡방 등을 통해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연령층에 확산하고 있다. 올해 50대에 진입한 기자는 자라면서 오징어 게임을 ‘오징어’라는 이름으로 놀이를 즐겼다. 그런데 이 놀이 이름이 지역마다 다소 이름이 달랐던 것으로 확인된다. 한 커뮤니티에 오징어 이름에 대한 게시글에 많은 시니어들이 댓글을 달며 자신이 어린 시절에 놀았던 오징어 게임 이름을 알렸다. 이 댓글에 따르면 부산과 거제, 경남은 오징어 달구지, 대구는 오징어 가셍, 서울 남부(영등포, 강남 등)와 경기 남부 지역은 오징어 가이생 또는 오징어 가이상, 서울 송파와 경기 성남은 오징어 또는 오징어 이상, 서울 북부(마포, 중랑, 동대문 등)와 인천, 광주, 전라북도, 대전, 충청, 강릉은 오징어, 서울 은평과 종로는 오징어포, 울산은 오징어 돋구 또는 오징어 등 다양하게 불린 것으로 확인된다. 댓글과 다른 놀이 문화 관련 여러 자료를 종합하면 같은 동네라고 해도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냐에 따라, 또 같은 동네라 해도 학교에 따라 이름을 조금씩 다르게 사용한 것으로 확인된다. 이는 해당 놀이가 학생들에게 퍼지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이 어느 지역에서 왔느냐가 놀이 이름에 영향을 준 것으로 추정된다. 이 글을 읽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인 시니어들이 어떤 이름으로 오징어 게임을 기억하고 있을지 무척 궁금하다. 일부에서 오징어 게임이 일본에서 유래한 놀이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확인된 자료에 따르면 일본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근거가 미약해 국내에서 발생한 놀이로 보는 것이 적합한 것으로 나타났다. 오징어는 막대기나 발을 이용해 운동장이나 공터에 오징어 모양으로 제한된 공간을 그리고 만들어 즐기는 놀이다. 한 팀에 적으면 3명 정도, 보통은 5~6명, 많으면 10명까지 편을 먹고, 한 팀은 공격, 상대 팀은 수비를 하는 형태로 승부를 겨루는 놀이다. 공격하는 팀이 한 명이라도 살아서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집으로 돌아오면 그 팀은 다시 공격하고, 그렇지 못하면 수비와 공격이 서로 진영을 바꿔서 다시 시작하는 놀이다. 시니어들이 어린 시절에 경험했던 오징어 게임을 떠올릴 수 있도록 기자가 경험했던 오징어 게임 규칙을 간략하게 소개한다. 하지만 이 규칙도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여기서 소개하는 오징어 게임 규칙을 보고 ‘이런 규칙으로 즐긴 학교가 있었구나’라고 참고하면 좋겠다. 세모 모서리 부분의 동그라미에서 공격팀이 출발하고, 수비팀은 세모 안쪽과 네모 안쪽에서 상대팀 공격을 방해한다. 동그라미 지역은 완충 지대로 두 발로 편하게 있을 수 있는 반면 상대를 공격할 수는 없다. 공격팀은 주로 쉬는 공간이나 작전을 짜는 공간으로 동그라미 지역을 활용한다. 공격팀은 기본적으로 동그라미와 다리에서만 두 발을 이용할 수 있고, 나머지 공간에서는 한 발(한 발을 든 채로)로만 움직여야 한다. 그런데 가운데 다리를 통과하면 세모 안쪽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공간에서 두 발로 움직일 수 있어 공격에 매우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다. 이런 이유로 공격팀이 다리를 건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수비팀의 핵심 활동이다. 다리는 공격팀이 건너다 밀려 넘어지거나 끌려 넘어지는 등 수비팀과 공격팀이 충돌이 자주 일어나 가장 많이 다치는 공간이기도 하다. 공격팀이 공격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으면 수비팀은 공격팀을 찾아가 쓰러뜨릴 수 있다. 수비팀은 네모와 세모 안쪽, 다리, 그리고 동그라미 지역에서는 두 발로, 나머지 외곽 지역에서는 한 발로 움직여야 한다. 양팀 모두 잡기나 밀기 싸움으로 상대를 선 안이나 바깥으로 끌어내면 상대가 죽는다. 또 한 발로 움직이는 상대를 쓰러뜨리거나 두 발을 땅에 닿도록 하면 역시 상대가 죽는다. 공격팀은 네모 동그라미 위치에서 네모 안쪽을 통과한 뒤 세모 안쪽으로 세모 모서리와 동그라미가 겹치는 부분을 밟으면 승리한다. 공격팀이 승리하면 팀 변경 없이 그대로 다시 공격을 시작한다. 수비팀은 공격팀이 이렇게 하기 전까지 상대를 모두 죽이면 승리한다. 수비팀이 승리하면 수비팀은 공격팀으로, 공격팀은 수비팀으로 바꿔 놀이를 다시 시작한다. 남자아이들만 이 놀이를 즐겼는데, 힘을 이용해 밀고 당기면서 상대를 쓰러뜨려야 했기 때문이다. 힘을 이기는 방법은 순발력과 협동, 재치 등인데, 순발력을 잘못 발휘하면 힘에 의해 더 크게 다치는 경우도 생긴다. 이런 놀이 특성으로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에 오징어 놀이를 하다 다치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특히 놀이에 열중하는 아이들일수록 다칠 확률이 높았다. 적당히 하면 다칠 위험을 피해가며 놀 수 있는데, 놀이에 몰입할수록 위험을 간과하고 승부에 집착해 속된 말로 ‘물불’ 안 가리고 놀이에 빠져들기 때문이다. 기자도 초등학교 당시 오징어 놀이로 앞니가 파손돼 현재까지도 어린 시절의 생생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그런데 왜 요즘은 우리 아이들이 이런 놀이를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을 모으는 것이 힘든 환경 탓이 크다. 두 팀을 만들려면 보통 10명 정도가 모여야 하는데, 이 숫자는커녕 3~4명를 모으기도 무척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게다가 오징어보다 더 선호할만한 놀이인 스포츠 종목이 많아진 것도 한몫했다. 요즘은 학교에서 다양한 스포츠 운동 기구를 수업시간과 쉬는 시간에 빌려서 이용할 수 있다. 마음만 먹으면 축구, 농구, 배드민턴 등 다양한 스포츠에 필요한 공이나 도구를 빌려서 친구들과 즐길 수 있다. 또 집집마다 축구공이나 농구공 같은 스포츠 도구를 보유할 만큼 가정 형편도 좋아졌다. 기자가 어릴 때는 학교에서도 축구공을 구경하기가 쉽지 않았다. 학교에 한두 개밖에 없어서인지 운동회처럼 큰 행사가 아니면 보기가 쉽지 않았다. 점심시간에 빌려서 이용하는 것도 거의 불가능했다. 학교 수업시간에도 축구공을 만져보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이렇게 도구를 이용할 수 없다 보니 오징어처럼 도구가 필요하지 않은 놀이를 아이들이 더 많이 즐길 수밖에 없었다.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는 줄다리기, 설탕뽑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구슬치기, 징검다리, 오징어 같은 다양한 놀이가 등장한다. 최소 40대부터 많으면 70대에 이르는 시니어들은 누구보다도 드라마 ‘오징어 게임’에 나오는 이 같은 다양한 놀이에 대한 사연과 추억, 사진 등을 많이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 나온 다양한 놀이에 대한 사연과 추억, 사진을 갖고 있는 시니어들이라면 이를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비롯해 주변과도 함께 나누면 어떨까 싶다.
- 2021-09-26 1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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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플로깅, 나도 지구도 건강해지는 특별한 운동
- 평소와 다름없는 주말, 코로나19 탓에 외출이 조심스럽다. 집에 있자니 무료하기 그지없다. TV를 켜니 예능 프로그램 ‘1박 2일’이 나온다. 2명씩 짝을 이뤄 각자 다른 코스를 걸으며 쓰레기를 주운 뒤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미션을 수행하고 있다. 하지만 김종민이 1시간 넘도록 약속 장소에 등장하지 않는다. 알고 보니 해변에 방치된 엄청난 쓰레기 더미를 혼자 치우느라 발이 묶여버렸던 것. 유통기한이 18년 지난 과자 봉지까지 발견됐다. 쓰레기가 이렇게나 많다니. 어릴 때 ‘선생님이 교내 정화 활동을 시켜서’, ‘봉사 시간을 채우기 위해서’ 같은 이유로 길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운 적이 있다. 하지만 따로 쓰레기를 주우러 다닌 적은 없다. 길거리에서 많은 쓰레기를 마주하지만 내가 버린 게 아니라 굳이 나서서 줍지는 않았다. 그러나 우연히 본 예능 프로그램을 계기로 ‘쓰레기를 주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니 그 활동은 ‘플로깅’(Plogging)이었다. 플로깅은 이삭줍기를 뜻하는 스웨덴어 플로카업(Plocka Up)과 달리기를 뜻하는 영어 조깅(Jogging)의 합성어로, 조깅하면서 쓰레기 줍는 활동을 뜻한다. 2016년 스웨덴에서 시작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2년 전부터 ‘줍깅’(줍다+조깅), ‘쓰담’(쓰레기를 담다) 등으로 부르며 확산되고 있다. 최근 배우 김혜수와 이시영 같은 유명 연예인들도 플로깅에 동참하고 있다. 비싼 장비도 필요 없고, 그저 봉지 하나와 튼튼한 팔다리만 있으면 된다. 이거 생각보다 운동되네 7월의 마지막 토요일, 자발적으로 첫 ‘플로깅’에 나섰다. 오후 4시쯤 서울 관악구 장군봉 근린공원에 도착했다. 쓰레기 담을 봉지와 물을 준비했다. 쓰레기를 주울 때 나뭇가지 두 개로 젓가락을 만들어 사용하는 게 좋을 것 같아 장갑이나 집게를 따로 준비하지 않았다. 공원 입구서부터 쓰고 버려진 마스크를 발견했다. 벤치 주변엔 담배꽁초가 수북했고 숲길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니 음료수 캔, 과자 껍데기, 물티슈 등 다양했다. 방석대신 깔아둔 종이 박스와 먹다 남은 음식물 찌꺼기를 묶어둔 봉지도 있었다. 심한 냄새와 함께 파리가 날아다녔다. 아마 박스를 깔고 앉아 ‘무언가’를 먹은 듯했다. 결국 음식물이 담긴 냄새 나는 비닐봉지는 치우지 못했다. ‘누군가 음식물을 먹지 않았더라면, 음식물을 먹고 제때 치웠더라면, 음식물과 비닐을 분리라도 했더라면.’ 여러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버리는 사람 따로, 치우는 사람 따로 있어?” 어릴 적 내 방을 대신 치우던 엄마의 잔소리가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2시간가량 주운 쓰레기는 준비해간 20L 봉지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옷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다리는 후들거렸다. 플로깅은 일반적인 조깅보다 열량 소모가 크다. 걷다가 쓰레기가 보이면 다리와 허리를 굽히기도 하고, 앉았다 일어나는 동작도 반복돼서다. 집에 가만히 누워 있을 시간에 밖으로 나와 운동을 하고 쓰레기를 줍는 일석이조의 시간을 보냈다. 쓰레기를 위한 쓰레기까지 조심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플로깅에도 도전했다. 먼저 쓰레기를 주울 나무젓가락을 하나 챙겼다. 물과 쓰레기봉지는 근처 편의점에서 살 생각이었다. 이날은 비영리단체 이타서울에서 주관하는 ‘데이터 플로깅’에 참여했다. 활동 중간중간 쓰레기를 주운 위치와 종류를 지정된 인터넷 사이트에 기록하는 식이다. 어떤 쓰레기가 어디서, 얼마나 나왔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오후 2시 한강공원에서 데이터 플로깅에 참여하는 사람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었다. 플로깅 활동을 계기로 초면인 라유림 씨와 함께 쓰레기를 주웠다. 처음 보는 사람들은 보통 카페나 식당에서 만나기 마련인데, 환경을 보호하는 마음 하나로 모여 함께 쓰레기를 줍다니 꽤 신선했다. 유림 씨는 쓰레기를 주울 도구인 나무젓가락, 옷을 구매하고 받은 종이 쇼핑백, 물을 담은 텀블러를 챙겨왔다. 편의점에서 살 생각으로 달랑 나무젓가락만 들고 온 게 창피했다. 라 씨는 “플로깅을 위해 최대한 갖고 있는 물건을 활용하려 했다”고 말했다. 쓰레기 담을 봉지를 얻기 위해 무언가를 사고 쓰레기가 추가로 나온다면 그 의미가 흐려진다는 설명이다. “쓰레기를 위해 쓰레기를 만드는 게 불편했다”고 말하는 유림 씨가 대단해 보였다. 또 “필름 사진 찍는 게 취미지만 사용한 필름도 결국 쓰레기가 되기 때문에 이 취미를 오래 할 수 없을 것 같아 고민”이라며 취미까지 환경에 해가 가지 않는 선에서 즐기려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으로 주운 쓰레기를 공원 내 쓰레기통에 재활용품과 일반 쓰레기로 나눠서 버린 후 활동을 마무리했다. 기록한 데이터를 살펴보니 담배꽁초가 가장 많았다. 실제로 몇 걸음 옮기지 않아도 조금만 몸을 틀면 꽁초들이 모여 있었다. 틈새에도 숨어 있어 자세히 봐야 했다. 벤치나 한강 둔치 편의점에서 음식을 먹고 버린 빈 플라스틱과 비닐도 많았다. 플로깅의 유행이 사람들을 더욱 독려하는 것 같다. 쓰레기를 버리는 일이 아니라 쓰레기를 줍는 일이 유행이어서 다행이다. 두 번의 플로깅으로 지구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됐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부모님 플로깅을 마친 날 저녁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평소 어떻게 하면 부모님이 쉽고 편하게 운동할 수 있을까 관심이 있었던 터라 플로깅을 소개하기로 했다. “엄마, 요즘 쓰레기를 주우면서 등산이나 조깅하는 활동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 두 번 정도 해봤는데 그냥 걷는 것보다 운동도 되고 환경에도 도움을 줄 수 있어 뿌듯해. 주말에 아빠랑 산에 갈 때 한번 해보는 건 어때?” 수화기 너머에서 아빠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 주말에 한번 해봐야겠네.” 들뜬 목소리다. 며칠 뒤 “주말에 산에 가서 쓰레기 주웠는데, 이거 운동 엄청 되네. 집에 와서 완전 뻗었잖니”라며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중간에 어떤 부부가 배즙을 마시곤 껍데기를 땅에 파묻고 있었는데 쓰레기 줍는 우릴 보더니 머쓱해하더라. 쓰레기봉지랑 집게를 들고 다니니까 사람들이 눈치를 보더라고.” 작은 활동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이 쓰레기를 버리지 않도록 자연스레 영향을 준다는 설명이다. 또 등산객들에게서 “좋은 일 하시네요”, “수고 많으십니다” 같은 덕담도 듣고, 환경을 위해 좋은 일 한다는 자부심도 얻었다고 했다. “이제는 걸을 때 쓰레기만 보여. 쓰레기가 왜 그렇게 많은지. 다음 등산 갈 때도 쓰레기 주워야겠어”라는 부모님 말씀을 들으니 부모님께 플로깅을 제안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느라 바빠 쓰레기 주우러 다닌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했어. 천천히 걸으면서 환경도 생각해보고, 방학 숙제하던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더라. 나이 든 사람들한테 더 좋은 것 같아. 관절에 무리가 가는 것도 아니고, 쓰레기 줍는 데 정신 팔려서 자연스럽게 운동하게 되니까 힘든지도 모르겠더라. 멍하니 걷는 것보다 훨씬 뿌듯했어.” 한유사랑 이타서울 대표는 “플로깅은 환경과 인간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사회에 나눌 수 있는 선한 인간다움의 순간”이라며 플로깅의 가치를 설명했다. 이어 “쓰레기를 줍는것은 적극적인 선행 활동이자, 삶의 품격을 높이고 주변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 대표는 “현장에서 플로깅을 진행하다 보면 청년들뿐 아니라 중년들도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5060세대는 급변하는 환경 문제의 심각성에 더 깊이 공감하고, 이에 대한 책임을 크게 느낀다”며 “이들의 플로깅은 건강을 영위하는 품위의 표출이자, 미래 세대에 모범이 될 어른의 환경 활동”이라고 정의했다. 플로깅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든 할 수 있다. 집 앞 골목부터 공원, 산, 바다 등 한정이 없다. 마스크 착용은 필수다. 버려진 쓰레기는 줍고, 내가 만드는 쓰레기는 줄이며 슬기로운 환경 생활에 동참해보자. 플로깅을 위한 팁 준비물: 쓰레기 담을 봉지, 장갑, 집게, 얼음물, 쿨토시, 손수건, 모자 등 주의사항 ① 사용한 봉지를 재활용함으로써 쓰레기를 최소화한다. ② 분리수거용 봉지와 일반 쓰레기용 봉지 두 개를 준비하면 좋다. ③ 비닐장갑이나 물티슈 대신 면장갑이나 집게를 사용한다. ④ 위험한 곳까지 무리해서 들어가 쓰레기를 줍지 않는다. ⑤ 쓰레기를 줍기 전 가까운 분리수거장 위치를 찾아두고, 없을 때는 집으로 가져가 꼼꼼하게 분리 배출한다.
- 2021-09-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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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대공감] 추석 명절, 손주부터 형님까지 가족 간 세대공감 소통법
- 60대 중년의 신동원 씨는 과거와 사뭇 달라진 명절 분위기에 적응하기가 어렵다. 10대 중반까지만 해도 재롱을 부리며 장난치던 조카들이 20~30대가 되면서 어른들과의 대화를 피하는 분위기다. 젊은이들이 하도 ‘꼰대’라고 흉본다기에 그렇게 안 보이려고 나름 노력하며 다가가는데도 조카들 반응은 제법 서운하다. 나이 든 사람끼리 앉아 뻔한 대화를 나누기보다 다양한 세대와 어울리며 진솔하게 소통하고 싶은데, 가족인데도 참 어렵기만 하다. 사실 다른 세대와 소통한다는 건 매우 힘든 주제다. 2021년 3월 전국의 만 18세 이상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이뤄진 한국리서치 조사에서 세대갈등 인식에 관한 질문에 세대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한 응답자가 전체 85%였다. 모든 연령대에서 최소 78% 이상의 응답자가 세대갈등이 심각하다고 답했다. 세대갈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전 연령대에 보편적으로 공유되고 있음을 드러냈다. 세대갈등 극복 전망 역시 낙관적이지 않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세대갈등이 지금보다 심각해질 것이라는 응답은 44%, 지금과 비슷한 수준일 것이라는 응답은 46%로, 10명 중 9명이 현재도 심각한 세대갈등이 앞으로도 비슷하게 유지되거나, 오히려 더 심각해질 것으로 예상했다. 이처럼 세대가 다르면 상대를 경쟁과 갈등의 대상으로 여긴다. 최근 언론에서는 세대갈등이 갈수록 심각해진다며 호들갑이다. 그런데 세대갈등은 어느 시대나 있었던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사람이 태어나고 늙어가는 과정에서 시대는 계속 발전하고 변한다. 같은 시대를 사는 것 같아도 각 연령대의 사람들이 경험하는 세상이 다르고 생각도 달라진다. 이를 독일의 미술사학자 핀터(W. Pinter)는 ‘동시대의 비동시대성’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문제는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사상이나 취향이 옳고 우월하다고 생각할 때 발생한다. 영국의 유명 소설가 조지 오웰은 “모든 세대는 자기 세대가 앞선 세대보다 더 많이 알고 다음 세대보다 더 현명하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세대갈등은 이런 착각에서 시작된다. 소통하려면 ‘워딩’부터 달라야 유난히 다른 세대와의 소통이 어려워 답답해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다른 세대를 탓하기보다 시니어들이 무엇을 피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대화법으로 살펴본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과 이야기할 때 자주 나오는 ‘나 때는 말이야’는 유행어나 다름없다. 2030세대가 민감하게 반응하는 건 다음이 어떻게 될지 뻔해서다. 보통 ‘나 때는 말이야’ 하고 시작되면 상대를 위한 조언보다는 권위와 경험을 내세운 일방적 훈계에 그치기 쉽다. 기성세대는 자신의 과거 경험이 현재나 미래 사회에 어울리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들에게 진심 어린 조언을 하고 싶다면 자신의 경험을 문제해결의 한 방법으로 제시하며 부드럽게 얘기하는 게 좋다. 답은 정해져 있고, 너는 대답만 하면 된다는 ‘답정너’ 태도도 안 된다. 우리는 누구나 자신의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민주사회에 살고 있다. 그런데 이미 스스로 답을 정해놓고 질문하는 시니어들이 있다. 이는 질문의 형태를 취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거나 지식을 뽐내는 화법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을 때는 편견 없이 상대의 대답을 수용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안물안궁.’(안 물어봤고 안 궁금해요) 상대가 궁금해하지 않는 주제에 대해 자기 이야기를 끊임없이 늘어놓는 대화법은 듣는 이를 지치게 한다. 상대가 묻지 않은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면 듣는 이의 반응을 고려하며 잘 소통되는지 확인해야 한다. 말을 짧게 하는 것도 방법이다. 다음으로 자신보다 어리고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위주의적으로 말하는 대화법은 듣는 이에게 존중받지 못한다는 느낌을 준다. 명령형 말이나 강압적인 말투, 일방적인 주장 등이 그 대표적인 예다. ‘권위적인 어투’는 취업사이트 ‘사람인’에서 실시한 직장인 비호감 말투 조사에서 1위를 차지했다. 상대와 동일한 인격체로서 대화를 나눌 때 원활한 소통이 이뤄진다. 마지막으로 성적, 연애, 연봉, 결혼과 같은 사적인 주제는 가족 사이에서도 조심해야 할 민감한 주제이므로 신중해야 한다. 친인척끼리 이런 얘기도 못 하나 싶은 시니어도 있겠지만 사생활을 중요시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무례한 질문이 될 수 있다. 이는 곧 소통 단절로 이어진다. 한국가정문화연구소를 운영하며 가족소통 전문가로 활동했던 김대현 소장(현 중년행복연구소 소장)은 등산을 예로 들며 세대 간 소통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숨을 헐떡거리며 산을 오르는 등산객은 등산을 마치고 내려가는 하산객을 보고 묻는다. “정상까지 얼마나 남았어요?” 하산객은 웃으며 거의 다 왔다고 답한다. 이후 한참을 올라도 정상이 보이지 않자 등산객은 거짓말한 하산객이 미워진다. 사실 하산객이 기억하는 등산 과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이미 왜곡됐다. 하산객의 시간과 등산객의 시간은 서로 다르다. 세대 간 소통이 바로 이와 같다. 한창 치열하게 살아가는 청년과 그 시기를 마치고 여유를 찾은 중년이 느끼는 세상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에 사소한 말 한마디에도 쉽게 불통이 발생하는 것이다. 김 소장은 세대 간 원활한 소통을 위해 ‘이청득심’(以聽得心)을 강조한다. 귀 기울여 경청하는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최고의 지혜라는 말이다. 기성세대가 청년들에게 해주고 싶은 쓴소리는 얼마든지 밖에서 듣고 있다. 부모와 집안 어른들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어 휴식처가 되어주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기분 좋게 세대 간 소통법 다른 세대와 기분 좋게 소통하려면 우선 다른 세대를 일반화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밀레니얼 세대는 예의가 없어”, “산업화 세대는 고리타분해”와 같이 자신의 경험으로 다른 세대를 일반화하면 편견이 생긴다. 같은 세대여도 사람마다 특성이 다르다. 일반화의 오류는 세대갈등을 조장할 수 있어 피해야 한다. 다음으로 누군가와 소통할 때는 연령대와 상관없이 타인을 ‘인격체’로 존중해야 한다. 뻔한 이야기 같아도 이를 놓치고 마음대로 상대를 평가하며 변화시키려는 사람들이 많다. 서로의 생각과 취향이 다름을 인정하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또 선한 호기심으로 무례하지 않게 질문한다. 미국의 한 수필가는 “우주가 인류에게 준 두 가지 선물.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인류 발전의 큰 원동력이자 인간에게 주어진 선물 같은 에너지가 바로 사랑과 질문의 결합이라는 뜻이다. 이경랑 SP&S컨설팅 대표는 사랑이 결합된 호기심을 ‘선한 호기심’이라고 정의한다. 단순한 호기심은 무례하게 작용할 수 있다. 하지만 애정을 바탕으로 한 선한 호기심은 대화를 풍성하게 만들어준다. 선한 호기심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를 전제로 한다.말하기 전에 이 질문이 상대에게 불쾌함이나 당혹감을 줄 수 있는지 먼저 고민해야 한다. 또 공감하며 경청한다. ‘공감적 경청’은 나의 사고체계 속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준거를 바탕으로 이해하는 것을 말한다. 공감적 경청의 자세는 나와 다른 세대와 대화를 나눌 때 굉장히 중요해지는데, 서로 생각이 달라 불통이 쉽게 일어나서다. 마지막으로 간결하게 이야기한다. 간결한 말만큼 전달력이 좋은 화법은 없다. 말이 길면 오히려 핵심을 잃기 쉽다. 짧고 굵게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좋다. 이렇게 다른 세대와 대화할 때 더 신경을 기울여야 하는 이유는 세대별로 경험한 세상과 생각·행동의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스마트폰을 놓지 않는 Z세대의 손주, 대학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고군분투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조카, 돈 아깝다며 외식을 한사코 거절하는 베이비붐 세대 어머니. 특정 세대 시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각 세대에게는 지극히 평범한 모습이다. 따라서 다른 세대와의 무심한 소통은 오해를 야기하고 불통으로 이어지기 일쑤다. 그런데 사실 이런 대화법은 세대를 뛰어넘어 대화 예절에 속한다. 최근 ‘웰에이징’(Well-aging) 개념이 주목받고 있다. 단순히 오래 살기보다 건강하고 아름답게 늙어간다는 의미다. 웰에이징의 방법으로 건강한 식습관과 운동을 흔히 얘기하지만 신체의 웰에이징만큼이나 중요한 게 바로 마음과 태도의 웰에이징이다. 나보다는 상대를 배려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지는 것이 행복한 노년을 보낼 수 있는 웰에이징의 시작이다. ‘말’은 사람의 ‘성품’을 드러내는 만큼 상대를 배려하며 품격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 시니어의 모습은 진정한 웰에이징을 증명한다. 청년세대와 원활하게 소통하는 이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상대방을 그 자체로 존중하는 태도다. 그들은 나이와 지위를 가지고 상대를 아랫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누구나 동등한 입장으로 인정하고 상대와 눈높이를 맞춰 소통한다면 연령대와 관계없이 즐겁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난해한 현대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부가 필요하듯, 청년들과 진정으로 소통하기를 원한다면 겸허하고 진정성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 올 추석 동년배끼리 뻔하고 지루한 대화를 나누기 싫다면, 다양한 세대와 공감하며 그들의 눈높이로 소통을 시도해보자. 시니어 빅3의 인플루언서 소통 노하우! 세대갈등의 중심엔 청년세대와 기성세대 간의 갈등이 자리 잡고 있다. 이들 간의 갈등이 극심해진 현대사회에서 청년들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들이 있다. 그들의 비결은 뭘까. 윤여정 ‘권위적이지 않고 자유분방한 태도’ 70대 윤여정은 MZ세대(밀레니얼 세대+Z세대)의 워너비다. MZ세대를 열광시킨 윤여정의 화법은 직설적이지만 권위적이지 않다. 70대 배우로 높은 위치에 올랐지만 상대를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또 젊은 세대에게 완성된 어른으로 보이길 원하지도 않아 솔직하고 자유롭다. “젊은 사람이 왜 재미없게 살아? 인생 길지 않아. 그냥 즐겨!” 70년 넘은 인생에서 얻은 자유분방한 태도를 유쾌하게 건넨다. 그의 이야기에는 어른으로서의 권위도, 장황한 잔소리도 없다. 그저 자유롭고 솔직한 자신의 생각, 짧고 명확한 전달력, 연륜에서 나오는 지혜가 존재할 뿐이다. 밀라논나(장명숙) ‘닮고 싶은 멘토의 대화법’ 70대 유튜버 장명숙은 ‘밀라논나’라는 유튜브 채널을 통해 MZ세대와 소통한다. 밀라노에서 유학한 최초의 한국인인 그는 패션에 대한 팁 또는 진로, 취업, 결혼 같은 젊은이들의 고민에 조언을 던지며, 2030으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다. 인기 비결은 조곤조곤하게 전하는 ‘인생 상담’이다. 이 상담은 세 가지 측면에서 그동안 기성세대가 하던 조언과 차이가 있다. 첫째, 그는 70대의 나이에 다소 공감하기 어려운 청년들의 고민에도 진심 어린 공감을 전한다. 둘째, 그는 청년 시청자들에게 조언을 전할 때는 물론, 손주뻘의 연예인과 대화를 나눌 때도 언제나 존댓말을 사용한다. 셋째, 그는 사회의 기준보다 개인의 주체성을 존중한다. 예컨대 직장 상사의 괴롭힘으로 힘들어하는 청년에게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직장을 나오라”고 말하며 “내가 제일 중요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안 어려운 직장이 있냐”, “나약하게 굴지 마라”처럼 개인의 주체성보다 한국 사회 기준으로 조언하던 기성세대와 확연히 다르다. 백종원 ‘상대를 움직이는 소통법’ 요리연구자이자 외식사업가 백종원은 요식업계 최고의 위치에서 업계 사람들에게 냉정하게 조언한다. 자칫하면 ‘꼰대’라고 불릴 수 있는데 그는 MZ세대의 공감과 인기를 얻고 있다. 그의 소통 비법은 세 가지다. 첫째, 자신의 비책부터 말하기보다 상대의 문제를 알아보기 위해 우선 관찰한다. 둘째, 관찰로 원인을 진단하고 이에 따른 처방을 원포인트로 내린다. 잔소리를 늘어놓지 않고 핵심을 짚어 솔루션을 제공한다. 셋째, 권위가 아닌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조언해 진심을 느낄 수 있게 한다. 절대 특권의식을 바탕으로 상대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보이는 일이 없다. 예컨대 잘못된 고집을 꺾지 않는 상대와 소통할 때도 권위보다는 요리 대결로 자신의 솔루션을 몸소 입증한다.
- 2021-09-15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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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그녀의 이름은 김순자입니다
-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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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 되리
- 2004년 2월 28일 난 평생 잊을 수 없다. 이유는 40년간 몸담아 온 직장을 하루 아침에 쫓겨나다시피 잃었기 때문이다. 몇 달 전부터 교육계에 퍼진 정년 단축이 내게 먼저 닥친 것이다. 그렇다고 난 미리 준비한 계획은 전연 없었다. 만 61살 일손을 놓기에는 빠른 나이다. 당장 내일부터 할일이 없다. 가진 기능이나 특기도 없고 남과 같이 기운이 세거나 막노동을 할 정도의 힘도 없다. 또 바둑이나 장기, 화투 등 오락도 취미도 없고 내놀만한 운동기능도 전연 없다. 오직 학교와 집밖에 모르는 샛님같은 아주 여린 봄꽃같은 난 모든 일에 쓸모가 없었다. 퇴직 후 생활은 기상하여 동네 뒷산을 오르거나 전철을 타고 종점에 도착해 값싼 점심과 목욕이 전부며 할 일이 없이 멍하니 약장사 구경만 종일토록 관람하며 흘러간 유행가에 젖어 마실 줄 모르는 막걸리 한 두잔에 취하거나 해져 귀가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러길 몇달째 참다참다 폭발한 아내는 울음섞인 목소리로 “이렇게 살바에는 다 죽자고” 짜증을 낸다. 이러길 수차례 어느날 울분과 흥분을 참지 못한채 길거리를 방황하는 난 가슴이 답답하여 길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지나가는 고등학생의 신고로 119가 몇분만에 도착하여 난 분당 서울대병원 응급실로 실려갔다. 평생 처음타본 응급 앰뷸런스에 계속 말을 시키는 간호원 구급대원의 봉사에 처음으로 감사의 마음을 느꼈다. 수분 후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기본 검사와 링겔 등 응급처치를 받고 병실 구석 후미진 코너 침대에 눕혀졌다. 사방을 살펴보니 별별 환자가 눈에 들어왔다. 금방 목숨을 거둘 것 같은 나이든 할머니, 뼈만 앙상하여 마치 해골같은 머리가 흰 할아버지, 한쪽 발이 없는 중년의 남자, 울다지쳐 버린 갖난애, 거기다가 지독한 소독약 냄새. 어느것 하나 빠짐없이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온전한 것이 없었다. 아비규환 속 분위기에 젖기도 전에 난 담당 간호원에게 이제 멀쩡하니 퇴원하겠다고 말하니 반기는 기색을 하며 뒤늦게 찾아온 아내가 퇴원 수속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했다. 집에 돌아와 시원한 내방에 누워 명상에 잠겼다. 병원에서 본 환자의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갔다. 내 나이 61세, 방황하며 허송세월을 보내기는 너무 젊은 나이임을 실감했다. 뭔가 해봐야하고 한번 죽이되든 밥이되든 시도해 보고 후회해도 늦지않을 것 같아, 난 큰 결심을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 잘 할 수 있는 일을 ‘벼룩시장’, ‘교차로’ 등 길가에 비치된 정보지를 봤다. 내게 맞는 일감은 없었다. 4호선 전철을 타고 오늘은 머리도 식힐 겸 친구와 만나 울분을 풀 셈으로 과천 서울대공원을 찾았다. 친구와 어울려 동물원을 걷는데 눈에 뜨인 광고판에 ‘한국에서 처음 시도하는 동물해설사’ 양성기사가 확 눈에 들어왔다. 난 친구에게 컨디션이 안좋아 먼저 간다는 핑계로 일찍 돌아와 동물원에 확인 전화를 했다. 나는 동물해설사이자 한 마리의 영리한 원숭이 “여보셔요. 거기 서울동물원 기획과죠. 동물해설사를 뽑는다는데, 나이 제한은 없나요?” “어떤 서류를 갖추어야 하나요?” 난 급한 마음에 여러 가지 궁금한 문제를 애원하다시피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리고 다양한 서류를 갖추어 인터넷 접수를 했다. 다행히 서류전형엔 합격했다. 그뒤는 몇 주간 강습이었다. 강의 내용은 수많은 동물과 멸종위기의 동물 종보전, 자연생태계 복원, 인간의 탐욕으로 남획을 막고 인간과 공존하는 법 등 다양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교육이 끝나면 필기시험과 면접 실연을 통해 실제 동물 앞에서 뭇관중이 보는 가운데 동물해설을 하며 최종선발을 거쳐 43명을 뽑는데 난 당당히 합격했다. 난 기뻐 날뛰면서 방안을 빙돌며 괴성을 질렀다. 아내가 놀라 날 쳐다보았다. 마치 로또복권에 당첨된 사람 같았다. 이렇게 환희의 순간을 만끽한채 동물원의 출근은 계속되었다. 동물원의 일과는 날 새로운 변신을 꾀하게 했다. 이유는 이른 아침에 출근하여 그날 체험학습을 올 아동 수 대로 당근, 배추잎(케일), 사료 등을 손질하는 것인데 당근은 하나하나 씻어 크기가 알맞게 자른 뒤 바구니에 준비하며 물기를 닦는 것이다. 그리고 코스별로 해설을 하며 체험교육을 시키는 것인데 예를 들면 최고의 광대처럼 재미있고 교육적인 산 교육이어야 인기가 있어 환영받는다. 즉 해설 방법 및 내용은 이러하다. “어린이 여러분 안녕하셔요. 저는 동물해설사 xxx입니다. 제 별명은 영리한 원숭이구요. 오늘은 여러분을 남미 페루에서 많이 사는 기니피그 먹이주기, 다음엔 말, 나귀 다른 점 관찰, 다음에 사막에 사는 미어캣은 무엇을 즐겨먹나요? 여러분이 만약 이 침에 쏘인다면 생명이 위험하지만 이 동물은 즐겨먹는 전갈을 맛있게 먹지요. 다음엔 여러분이 가장 좋아하는 토끼 먹이주기, 꼭 장갑을 끼고 먹이를 줘야해요 하며, 케일잎과 배추잎을 잡는 법을 알려주고 다음엔 원숭이, 그리고 염소, 양 등의 특징을 설명하고 먹이를 주면 돼요. 먹이를 던지거나 동물을 귀찮게 하면 안돼요.” 머리를 흔들며 재롱을 떨고 나이 많은 노인답지 않게 귀여운 표정, 손짓으로 윙크를 날리며 분위기를 잡고 해설이 끝나면 지도일지를 깨알만한 글씨로 가득 채운 뒤 일과를 반성하고 정리한 뒤 귀가하는 것인데 이 생활이 어찌나 즐거운지 나의 즐거운 변신은 대만족이며 거기다가 듬직한 해설사 월급을 받는다. 도랑치고 가재 잡고 하듯이 건강챙기고 시간보내고 급료 받는 나이든 늙은이로는 최대한 대우며, 피복, 모자, 소지품, 간행물 등 다양한 혜택을 받아 최고의 나날을 보낸다. 정말 교직에 버금가는 변신이다. 나의 변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다음 변신을 준비하고 실천했다. 실패의 나날에서 난 성공의 열쇠를 찾았다 -모형항공(글라이더, 고무동력 입상 및 국가대표가 되기까지) 동물원 해설이 없는 쉬는 날의 무료함을 달래고 내 취미생활 건강을 위해 고심하던 어느날 난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 블랙이글 축하비행과 공군참모총장배 스페이스 첼린져 모형항공기 대회를 참관했다. 아주 멋진 행사며 이 늙은 나이에도 나도 참가하고 싶은 욕망에 사로 잡혔다. 내 자신도 할 것 같아서 서울과학사를 찾아가 모형항공기 셋트를 구입했다. 설명서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만들었다. 밤을 새우면서 거의 완벽하게 조립하여 인근학교 운동장에서 시험 비행을 해봤다. 처음 만든 모형비행기지만 생각한 것보다 훨씬 잘 날고 체공 시간은 1분대였다. 몇 번을 날려봐도 아주 잘 날라서 기분이 아주 좋았고 자신이 생겼다. 이렇게 몇 번을 연습했다. 그리고 예선대회 즉 경기, 인천 예선대회가 수원 제 10 전투비행단에서 있었는데 그 대회에 참가했다. 내 차례가 되어 공군 보조원이 50m 후방에서 글라이더를 날려 주는데 왠지 몹시 서툴러서 믿음이 가지 않아 몇 번을 뒤돌아 보면서 뛰는데 글라이더가 영 상승을 하지 않고 왼쪽으로 “휙” 곤두박질하며 앞날개가 활주로 바닥에 부딪쳐 두동강이로 갈라져 1차 비행은 0점이었다. 난 당황해서 날개 조각을 회수하고 2차 비행 순서만 기다리고 있는데 남은 한 대 글라이더도 날개가 튼튼하지 못해 날개 중앙에 금이 가있었다. 급히 강력 접착제를 바르고 순서를 기다렸다. 두 번째 마지막 시합에서는 옛학교 과학주임이 와서 보조역할로 글라이더를 뒤에서 잡아주어 사수, 조수, 보조가 맞아 멋지게 바람을 가르며 높은 창공에서 선회하기 시작했는데 갑자기 회오리 바람이 불어 앞날개가 “우지직” 소리를 내며 망가진 채 공중에서 빠른 속력으로 활주로에 꼴아 박았다. 더 이상 기회도 없고 글라이더도 없어 퍽 아쉬웠지만 난 대강 비행기 잔해를 끈으로 묶어 보루지 박스에 쳐넣고 승용차편으로 귀가했다. 1년간 공들인 노력이 허사였고 그 공역과 재료비 등이 너무 아까워 눈엔 눈물이 고였다. 이렇게 무참하게 실패한 나는 집에 돌아와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그리고 노트에 기록하며 내년을 기약했다. 실패의 원인분석 ◎ 모형 항공기가 튼튼하지 못해 쉽게 부서졌다. → 다른 참가자들은 낚싯대 카본으로 가볍고 튼튼하게 만들었다 : 재료 문제 ◎ 견인자(사수)와 보조자(조수)의 싸인이 전연 안 맞음 → 혼자만의 힘으로는 글라이더를 띄울 수 없음. 보조자 대동해야 함. : 보조자 양성 ◎ 바람의 강약에 맞는 견인 연구 → 견인 기술 부족. 연습이 필요함. 또 실패의 원인을 냉철하게 분석했다. 또 재료 및 여러 가지 계측장비 등을 준비해야 함을 알았다. 또 기록이 좋은 모형항공기는 스마트폰에 사진을 찍어 살펴봤다. 더 많은 지식을 얻기 위해 한국 최고의 장인에게 사사 받았다. 그러니까 한국 모형항공의 대부 격인 경복궁 옆 동학과학 심xx 사장의 50년 이상의 노하우를 하나씩 익혀가며 모형항공기 킷트 공장제품을 이용하지 않고 수제품을 하나씩 만들었다. 즉 앞날개, 동체 수평, 수직꼬리날개 종이는 외제를 사서 가볍고 단단하게 만들었다. 다음해에 대한 준비를 하나씩 진행했다. 제작 기술도 늘고 요령이 생겨 견인방법도 바람의 세기를 큰 연을 만들어 날리면서 익혔고 이탈 및 체공 시간을 연장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습득했다. 두 번 다시 실패는 없다는 나의 각오는 연습으로 더욱 자신을 얻어갔다. 실패 후 1년이 지나 난 또 제 10 전투비행단 활주로에 시합을 위해 섰다. 조수는 우리집 차남이다. 평소에 같이 호흡하며 연습을 한 터라 손발이 “착착” 맞았다. 내 차례가 되어 계측하는 심사위원 대위의 신호가 떨어졌다. 난 무수히 연습을 한 터라 자신있게 센바람을 줄의 길이와 느슷함과 당김의 조화를 섞어 요리조리 걷다 뛰다하며 글라이더를 마치 살아있는 황새처럼 어루고 달래며 하늘 높이 띄우며, 그러니까 상승기류를 찾아 마치 강태공의 잉어낚시인양 뛰면서 글라이더 상태를 보며 살펴시 이탈시켰다. 많은 참가자와 구경꾼들이 박수를 치며 “무한대∞”를 연호했다. 아니나 다를까 난 일반부에서 3분(1차), 2차 3분 도합 6분으로 1위, 금상을 받았다. 60이 훨씬 넘은 노인이 상을 받는다고 축하박수가 유난히 컸다. 이렇게 예선은 작년의 패배를 설욕하고 회심의 미소를 먹음은 채 기쁜 마음으로 본선 대회를 준비했다. 대회는 9월이라 시간적 여유도 있지만 난 마음을 다시 잡고 제작 및 견인을 더욱 열심히 했다. 글라이더는 완전히 터득했다. 새파란 멍이 온 몸에 퍼져 기력이 쇠약해도 고무동력기는 내려야 했다 -청주 공군사관학교에서 본선, 공군참모총장대회, 고무동력기 이야기. 더 강하게 변신한 나의 모습 글라이더는 전국을 제패하고 몇 년간 노력 끝에 제 1인자로 자리메김 다. 이제는 고무동력부문이다. 처음부터 이 영역에는 값비싼 외국제품 및 부속으로 무장한 전국의 과학사의 문하생들이 주름잡고 있어 난공불락이었다. 거기다가 최신장비, 풍향풍속 계측기, 강력한 드릴로 신축성이 뛰어난 고무줄을 사용하는 그들을 따라잡기는 무리였다. 하지만 끈기와 변신의 귀재인 나는 하나씩 착착 계획을 진행했다. 그러니까 외제 고무동력기의 설계도를 수소문 끝에 구입하여 하나하나씩 내 기술로 개조했다. 고무동력기 동체, 외제는 값비싼 두랄루민·티타늄 등으로 만들어진 것인데 난 이점을 가벼운 플라스틱을 말아 가늘게 쪼갠 대나무 껍질을 이용하여 트러스 공법으로 동체를 만들었는데 단단함은 물론 가볍기가 기본동체의 1/3 무게도 안되었다. 대성공이었다. 또 프로펠라의 크기가 기성품은 작기에 대추나무로 세밀하게 깎았고 고무줄은 미제를 구입했다. 또 프로펠라를 돌려 고무줄을 감는데 조수가 꼭 있어야 하는 번거러움을 덜기위해 혼자서도 고무줄을 감을 수 있는 장치를 발명했다. 즉 강력드릴에 강철고리를 부착시킨 뒤 프로펠라 걸이를 세워있는 기둥이나 나무에 감고 프로펠라를 회전시켜 감는 방법인데 어른이 잡아주는 힘보다 서너배 많이 감고 아주 편했다. 이렇게 만전을 기한 나의 변신 기술은 공군참모총장배 본선에서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가슴쓰린 추억이었다. 그러니까 본선대회 1차 시기에서 연병장의 축구 꼴대에 고무줄 감기와 드릴을 이용해 두서너배 많이 감은 고무동력기를 날렸는데 연병장 주위 아주 높은 반절쯤 죽어가는 소나무에 걸려 프로펠라는 허공을 향해 “빙빙”돌면서 ‘퍼덕’ 거렸다. 급히 달려가 행사 보조위원에게 내려 줄 것을 이야기했다. 보조요원은 철제 사다리를 펴서 준비한 장대로 내리려고 애썼지만 고무동력기에 닿지 않고 위험하다는 핑계로 포기하라고 내게 말했다. 하지만 난 보조원의 만류도 뿌리치고 사다리를 올라 소나무에 다람쥐처럼 올라가 장대에 갈쿠리를 달아서 힘껏 끌어당겼다. 하지만 고무줄이 가지에 감겨 풀리지 않아 한참만에 겨우 비행기를 내려서 떨어트리고 사다리가 걸쳐진 나무둥지를 디디는 순간 사다리가 넘어가 함께 떨어져 풀숲에 내동댕이쳐졌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어 회수한 비행기를 손보고 날개를 바로잡고 고무줄을 바꿔 꿰어 다시 드릴로 감아 마지막 2차시기에 임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2차시기 비행 체공 기록은 만점 3분 무한대였다. 내가 속한 조에서는 1등인데 다른 조의 기록이 궁금해서 각조의 기록을 조마다 쫓아 다니며 살펴봤다. 만점은 없는 것 같았다. 이윽고 전체 시합이 끝나고 시상식만 남았는데 난 기록이 좋아 늦게까지 대기했다. 몇 시간 뒤 시상식이 열렸다. 초등부, 중등부, 고등부. 일반부는 마지막이었다. “일반부 고무동력 금상, xxx” 내 이름이 호명됐다. 별이 4개이신 공군참모총장님이 직접 금메달을 목에 걸어 주시며 빙그레 웃으시며 “노익장을 과시하니 보기 좋습니다”하시며 부상과 상장을 주셨다. 그리고 기념촬영. 난 그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전국을 제패한 벅찬 변신이었다. 영광뒤에 따른 무서운 변화에 난 몇 달을 고생하며 치료에 온 정신을 쏟았다 -고무동력기를 내릴 때 사다리에서 떨어져서 아픈 이야기 (낙상사고 후유증에 헤멤) 하지만 시상식이 끝나고 귀가하는 승용차 안에서 엉덩이와 온몸이 쑤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엉치뼈 그 다음엔 허리, 다음엔 목 등 차가 흔들릴 때마다 통증은 더 심했다. 난 천안 휴게소에서 내려 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팬티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살펴봤다. 멍 비슷하게 푸르슴한 색이 하체에 내려앉았다. 난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다시 차를 타고 귀가했다. 금메달을 딴 기분이 가시지 않았기에 약간의 통증은 견딜만했다. 하루가 지났다. 통증은 온몸에 퍼지고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온몸을 살핀 뒤, 멍을 보고 주사와 처방전을 간호원에게 시키며 한달 가량 쉬면, 멍이 가실거니 걱정 말라며 진료를 마쳤다. 약국에서 복용약을 받아서 복용한지 일주일이 지나도 차도가 없었다. 온몸에 번진 시퍼런 멍, 거기다가 성기며 고환까지 자주빛 멍이 소변을 볼 때마다 공포가 더했다.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난 아내 몰래 한방병원을 방문했다. 한의사가 내 온몸을 보는 순간 혀를 차며 “빨리 왔어야지요. 이지경이 될 때까지 참고 있어요. 피가 굳으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는데”하며 날 나무랬다. 그리고 온몸에 수없이 많은 침과 뜸을 뜨고 1시간 쯤 후엔 부항을 뜬다며 엉덩이 부분을 내리고 부항을 수십차례 색이 진한 부분마다 검붉은 피를 뽑았다. 참 신기하고 시원했다. 이러길 하루 건너 두달 치료 끝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난 처음으로 한의학에 경이를 표했다. 멍이 가시자 마자 나의 변신은 계속되었다. 각종 모형항공대회와 더 나아가 ‘국가대표’ 선발전에 출전하여 대표자격을 땄다. 그러니까 모형항공의 귀재로 변신한 나는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는 경기도 과학연구원 위촉 강사로 뽑혀 모형항공 지도를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드론이 대세라 막이 내렸지만 퍽 아쉽다. 그렇지만 난 드론에 도전하기엔 너무 손놀림이 늦어 포기했다. 내가 할 일이 아니기에. 낙방의 고배를 마시며 다져지는 나의 글쓰기 실력은 마침내 빛을 보았다 -백일장에 도전한 나의 이야기 나는 모형항공기 기능 섭렵을 끝내고 또 다른 변신을 꾀하던 어느 날 문득 백일장대회 현수막을 지나가던 길에서 눈여겨봤다. 또 변신의 기회를 잡으려고 도전하기로 마음먹고 준비를 했다. 먼저 서울 ‘교보문고’를 방문해서 백일장 입상문집을 사서 탐독했다. 그리고 입상작품의 특징과 글의 짜임, 쓰는 요령을 습득 뒤 나도 백일장대회에 참가했다. 내 딴에는 정성껏 바른 글씨와 내용을 그럴싸하게 써서 제출했다. 몇 시간을 기다린 끝에 입상자 발표가 있는데 내 이름은 없고 정성을 쏟은 보람도 없이 낙방이었다. 영문을 몰랐다. 떨어진 이유를. 돌아오는 전철에서 난 글쓰기에 소질이 없는 게 아닐까 반문해봤다. 도통 이해가 가지 않은 수수께끼였다. 그 뒤 계속 백일장대회에서 낙방을 연거푸 서너차례한 뒤 난 그 어떤 1% 부족한 내 자신을 찾았다. 그러니까 난 겉만 번지르한 실속 없고 알맹이 없는 미사여구만 늘어놓고 감동이 없는 허황된 글을 쓴 것이다. 내 결점을 찾은 뒤 백일장 대회를 기다린 어느 날 대전 동구에서 ‘우암송시열’ 백일장이 있었다. KTX를 타고 원거리 대회를 참가했다. 전국에서 수많은 문사가 참여한 전통 있는 대회라 난 기가 팍 죽었다. 축하공연이 끝나고 글제가 발표됐다. 주제는 ‘어머니’였다. 난 어머니와 같이 산 50년을 눈물을 흘리면서 회상하는 글을 써내려갔다. 내 어머니는 70여리가 넘는 먼길을 걸어서 쌀을 머리에 이고 자취하는 전주의 언덕빼기 집까지 부식을 마련하여 난 배고픔 없이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 어려운 시절에. 그리고 내가 교사로 발령을 받아 전등불도 안 들어오는 산간 벽지 오지 학교에 부임했을 때 삼시세끼를 따뜻한 밥을 해주시며 허름한 관사에서 동고동락하시며 내 뒷배를 후원하셨는데 끝내는 영화를 못 누리신 채 돌아가셨는데 눈물겨운 사연을 하나하나씩 깨알같은 글씨로 써냈다. 그뒤 서너 시간 뒤에 입상자 명단이 벽에 붙고 호명이 되었다. “수필부 금상, xxx 나오셔요” 처음으로 받은 상 그것도 장원이었다. 돌아오는 KTX열차가 왜 그리 느린지 난 처음으로 느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영광은 서울 한강 ‘구상백일장’, 고양 ‘어르신 백일장’, 수원 ‘정조대왕승모백일장’, 평택 ‘사랑사랑백일장’ 등 무수한 영광을 안은 채 난 제 2의 변신을 계속했다. 늙은 나이에 그 기쁨은 날 흥분케 했고 생에 대한 그 어떤 자신이 생기는 나날이었다. 난 이에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변신을 꾀하고 싶어 도전을 계속했다. 젊은이와 경쟁에서 스피드를 요하는 시합은 무리인가 -KBS1 ‘우리말 겨루기’에서 변신은 요원한 길인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40분 KBS1 TV의 ‘우리말 겨루기’는 날 들뜨게 한다. 그러니까 방영되는 월요일에는 모든 약속과 내 생활은 비상이다. 몇 년째 노트와 동영상을 캠코더를 찍어보고 여기에 수반되는 문제집, 국어사전, 속담, 사자성어, 크로스워드 책. 필요한 서적은 모두 구입해서 보며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도 모두 구입하여 보고 준비는 매일 밥 먹듯이 한다. 하지만 달인을 향한 내 꿈은 한 발자국도 진전이 없다. 석두일까? 자책도 해봤다. 치매증상이 있나? 치매 검사도 했지만 치매는 아니었다. ‘우리말 겨루기’ 예심이 인터넷에 뜨면 내 마음은 왠지 급해진다. 그러니까 예심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KBS홀에서 수많은 경쟁자와 한판 겨루기를 한다. 주최측에서 준비한 지필고사 20문제를 크로스워드, 십자말 칸을 인쇄한 용지와 대형 스크린을 비추면서 두 번 읽어주고 단 20분만에 답안지를 회수하여 30분쯤 채점이 완료되면 참가자의 10% 정도 합격자를 불러 2차 면접 및 실기 그리고 방송에 하자가 없고 유모어, 또는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재미있고 재치있는 참가자를 선별하는 테스트 과정이다. 난 예심에는 언제나 수월하게 통과하며 본방에 출연까지는 항상 무난하게 뽑힌다. 그 이유는 다 까닭이 있다. 40년간 교직에서 다져진 말솜씨, 동물해설사로 활동하면서 익힌 유모어, 평소 내 나이에 걸맞지 않는 가곡 레파토리가 있다. 예전 유럽 현지 이탈리아에서 외국 여행객 이탈리아 가곡 부르기에서 상을 탄 저력이 있기에 말이다. 예심을 합격한 나는 마지막 단계 면접에서 뜻밖에 노래를 한번 불러보라는 면접심사위원의 청에 망설이다 정색을 하며 무대에서 그 당시 뜨는 가곡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열창했다. 면접대기자와 심사위원 전원이 앵콜을 연호했다. 난 주저하지 않고 ‘슈벨트의 세레나데’를 더 열정적으로 불렀다. 노래가 끝나고 모두들 “늙은이가 웬 노래를 저렇게 잘 부르지”하며 혀를 찼다. 며칠 후 인터넷에 합격자의 이름이 떴다. xxx 상위에 랭크된 내 이름 석자. 본방송 출연을 연락받고 밤새워 깨알같은 국어사전 글자를 돋보기도 쓰지않고 보던 어느 날 더 이상 눈이 침침하고 흐려 안과에서 백내장 수술을 했다. 보름 후엔 글씨가 똑똑하게 보였다. 그런 어느 날 ‘우리말 겨루기’ 녹화가 있으니 10시까지 KBS 녹화장이 있는 본관으로 오라는 연락을 담당 PD에게 받고 새옷을 입고 이발을 하고 달려갔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것이다. 이윽고 출연자 전원이 당도하여 분장실에서 마치 장가가는 새신랑마냥 아주 정성이 담긴 분장을 받았다. 기분이 황홀했다. 한 시간 뒤 녹화방송으로 ‘우리말 겨루기’가 엄지인 아나운서의 진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단계부터 중간까지는 최상위 점수로 정상이었다. 우승이 눈앞에 보이며 젊은이들도 별것 아니구나 하며 자신이 생겼다. 마악 누름단추 벨을 누르며 우승을 확정짓고 싶은 감정이 앞섰다. 지나친 과욕이었다. 기다리면 결승단계에 진출하는데 감점이 시작됐다. 오답이 연속된 나의 경거망동은 끝내 빛을 보지 못한 채 끝났다. 멋진 변신, 변태는 지나친 욕심과 만용 때문에 끝났다. 하지만 한 번 출연한 사람은 2년을 기다리기에 매미는 땅속에서 수년을 기다리는데 난 다시 변신의 칼을 간다. 2년간 그리고 화려한 날개를 펴며 푸른 창공을 “훨훨” 날아다닐 그날의 변신을 꿈꾸며 오늘도 내 길을 간다. 숨이 멎는 순간까지 나의 변신은 계속될 것이며, 이 길을 기꺼이 간다. 오늘따라 하늘이 더 높게 보인다. 이제 내 나이 80. 앞으로 20년은 더 살아가며 끝없는 변신을 꾀하며 더 행복한 나날을 영위해야 하지 않을까? 무한한 변신. 이제 무엇을 찾아 또 화려한 변신을 해야 할지 고민이다. 변신은 날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든 만병통치약인가 보다. 나의 변신은 오늘도 계속된다. •수상소감 - 우수상 미니자서전 은정남 “죽는 순간 숨이 멎는 순간까지 도전하고파” 응모하신 사람 중에서 나이가 좀 많습니다. 팔순이니까요. 그래서 저의 하찮은 글을 건져 올려주셔서 너무 고맙고요. 용기를 주신 선생님들과 캐나다에 이민을 간 아들한테 축하 인사 받았는데 정말 뿌듯합니다. 큰 용기와 힘을 얻었어요. 그래서 이제 앞으로 이제 세상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더 열심히 쓰고 또 갈고 닦아야겠죠. 죽는 순간까지 숨이 멎는 순간까지 모든 것을 해보고 싶어 공모전에 출품하게 됐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노인들이 많잖아요. 노인들은 지하철 공짜로 타며 놀러 다니고 또는 복지관이나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는 사람이 많아요, 사실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이제 그런 걸 탈피하기 위해서 제 나름대로 여러 가지 해봤는데 이번에 글을 한 번 써봤어요. 고등학교 다닐 때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시인 신석정 시인이 저희 은사였습니다. 그래서 글을 좀 잘 쓰려고 나름대로 좋은 책 많이 읽고 또 문학 활동을 꾸준히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쓰면 항상 친구들이나 동호회 회원들에게 카톡으로 공유했어요. 그러면 그분들이 모니터링해 주면 수정하며 첨삭하면서 배웠습니다. 학창 시절 백일장에 장원은 떼놓은 당상일 정도로 글을 쓰는 것을 좋아하긴 했지만…. 이번 수상을 계기로 자신감 가지고 소설을 써보려고 합니다. 제가 경험했던 동물해설사, 모형항공기, 우리말 나들이 도전을 통해 만났던 사람들이나 사건을 소재로 삼아서 소설을 써보고 싶습니다. 우리말과 우리글이 있어 행복합니다. 일감이 있다는 것은 어른으로서 큰 자부심을 느끼는데 이번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준비한 주최 측에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다시 하고 싶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쓸 만한 어른들과 아까운 시니어들이 많거든요. 사실 어르신들은 좋은 자원과 자산을 갖고 있고 재능과 경험이 다양한데 쓸모없이 이렇게 소멸해 가는 게 너무 안타까워요. 이번 공모전이 뜻 깊은 일을 하고 인생의 마무리를 하는 시니어들에게 힘을 주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자신보다 더 저를 믿어준 가족들에게 고맙고 사랑한다고 전하고 싶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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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생각의 관성
- 생각의 관성(慣性) 직장 문을 나선 지 꼭 2년이 지났다. 정확히 말하면 안식년을 포함해서 만 3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그동안 평소 바람대로 양지바른 곳에 앉아 햇볓을 쬐기도 하고, 자전거 페달을 밟으며 그림 같은 경치 속으로 빠져들기도 했으며 자격증을 따기 위해 한 달 동안의 기숙사 생활 같은 것도 체험해봤다. 그런데 그동안 겪은 이런저런 경험 중에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내가 가고 있는 방향이었다. 예를 들면, 출근 시간에 회사 방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다 중간에 옆길로 빠져 체육관을 향한다거나 회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자전거를 타고 가는 것 등이다. 동도 트지 않은 이른 아침에 도심을 향해 질주하는 차량들을 보면 “아! 나도 저렇게 정신없이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착잡한 마음도 들었고, 아침 운동을 위해 체육관 쪽으로 방향을 틀어 작은 길로 들어서면 갑자기 세상에서 밀려난 듯한 묘한 상실감이 일던 기억도 난다. 내가 지나는 길에는 차량도 별로 없었다. 남들이 출근하는 시간에 자전거를 타고 도심과 반대 방향으로 달릴 때 역시, “이제야 내 시간을 찾았다” 하는 생각과 함께 슬며시 끼어든, 마치 다른 세상에 편입된 것 같은 기분은 한동안 어쩔 수 없었다. 눈 뜨면 밥 먹고 회사 가는 일을 수십 년 동안 반복하다 보니 아침이면 몸과 마음이 자동으로 반응했던 것이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관성(慣性)의 법칙이란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모든 물체는 현재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는 것을 말한다. 정지한 물체는 계속해서 정지한 채로 있으려고 하며 운동하던 물체는 계속해서 등속, 직선 운동을 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수십 년 동안 정해진 시간에 일정한 방향으로 내달리다 보니 방향만으로도 낯선 환경이 실감났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방향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이번에는 속도가 문제였다. 어느 날 오전, 소파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내가 이 시간에 왜 이러고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출근을 안 하면 뭔가라도 하고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갑자기 나를 허둥대게 만든 것이다. 평소 누려 보지 못한 시간이 주어졌는데도 고마워하긴 커녕 불안감에 자리를 털고 일어선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후 나름의 계획을 세우고 행동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백팩 메고 공부도 하러 다니고 배움길에서 새롭게 만난 친구와 함께 생전 해보지도 않던 일 등도 하다 보니 언제 3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세월이 후딱 지나갔다. 그런데 만 3년의 세월이 지나자 이제야 겨우 생각의 속도가 늦춰지기 시작함을 느낀다. 속도의 관성이 서서히 약해지자 비로소 그간의 내 행동에도 눈을 돌릴 여유가 생겼다. 지금도 매일 아침 출근 시간이면 일어나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늦잠을 자고 일어나면 하는 것도 별로 없이 하루해가 금방 가던 실망스런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소중하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멍 때리는 하루가 있어도 그날에 연연하지 않는다. 익숙한 생각이 모두 나쁜 것은 아니겠지만 나 자신은 물론이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이 바뀌었으니 생각의 관성도 바꿀 필요가 있지 않을까? 퇴직 후 삶의 기준을 전반기와 같이 할 수는 없으니 시간이나 생각과 마찬가지로 행동도 바꿀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내 경우는 우선 생각이 많이 바뀐 것 같다. 과거에는 나쁜 일이 발생하면 ‘왜 하필이면 나에게 그런 일이 발생했을까?’ 하는 생각에만 집착해 불쾌해하고 짜증을 냈다면 지금은 ‘새옹지마(塞翁之馬)’로 흘려버리는 일이 실제 많이 늘어났다. 운전을 하다가도 전방의 신호등에 빨간불이 켜 있으면 초록색 불이 켜 있을 일만 남았다는 생각으로 마음을 편하게 이끌려 하고, 연속해서 초록색 불이 켜 있으면 오늘의 뜻하지 않은 행운에 감사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려고 한다. 물론 약속 시간에 늦었을 경우는 거리의 신호등을 모두 내 차에 맞췄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그럴 일은 이제 별로 많지 않다. 상대적으로 시간이 많으니 조금만 일찍 출발해 세상 구경하면서 걸으면 운동도 되고 기분도 좋아진다. 좋은 생각의 관성은 나를 기분 좋게 하고 행복하게 이끈다. 결국 생각의 관성을 잘 만들어 내는 것이 핵심인 것이다. 요즘 뜻하지 않은 계기로 캘리그라피(Calligraphy)를 배우기 시작했다. 컴퓨터의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폰트와 달리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캘리그라피는 글자의 의미 외에 그 자체로 제작물의 내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갖고 있어 방송의 타이틀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도구다. 그래서 거의 모든 것이 디지털화된 방송국에서도 이것만은 사람이 직접 붓으로 글씨를 쓴다. 코로나의 영향으로 기존의 문화센터 수업이 끊겼다가 새롭게 개강을 하게 되자 당시 여러 가지 조건이 캘리그라피와 맞아 시작을 하게 된 것이다. 캘리그라피에 조금씩 눈을 뜨게 되자 그림에도 곁눈질이 간다. 이전에 봤던 판화가 이철수 님이 그린 촌철살인의 문장과 글씨체 그리고 단순하면서도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그림을 흉내내고 싶은 마음이 생긴 것이다. 그림을 배우면 나도 흉내를 낼 수 있을까? 그림이라고는 국민학교 시절에 파스텔을 도배하다시피 그린 것으로 가작(佳作)을 받은 게 최고의 결과였다. 과연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는 그림을 제대로 배워본 적도 없는 것 같다. 단지, 반(班)에서 나보다 잘 그리는 친구들이 많았고 그래서 나는 그림에 소질이 없나 보다 생각하고 지레 포기했을 뿐인 것이다. 내가 지금 그림을 그려서 공모전에 출품할 것도 아니고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뭐가 두려워서 시도조차 못한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시작해서 꾸준히 해보자는 쪽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고 느긋하게 마음 먹으니 전에 없던 용기도 생긴다. 혹시라도 아나? 내가 이쪽에 소질이 있다면 나는 생각지도 않던 작가가 되는 것이다. 기분 좋은 상상을 하면 몸도 마음도 덩달아 상쾌해진다^^ 안 된다고 생각하면 될 일도 안 된다. 이래서 포기하고 저래서 포기하면 남은 시간에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지금이, 지난 세월이 덧없다고 생각하는 지금이, 이만하면 잘 살았다고 자족하는 지금이 생각을 바꾸기 위한 적기(適期)라고 생각한다. 좋은 생각과 좋은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긍정적인 방향으로 유도할 것이고 나쁜 생각과 나쁜 습관은 나를 계속해서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아갈 것이다. 생각은 나를 점점 강하게도 만들고 약하게도 만든다. 바로 관성(慣性)의 힘이다. •수상소감 - 우수상 산문 김영창 “우리는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것이지, 우리의 인생을 그만둔 것이 아니다.” 글쓰기는 퇴직 이후에 시작한 것인데 첫 공모전 출품에 상까지 받게 되니 용기백배입니다. 코 로나19가 진정되길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축하 파티를 해야 하거든요. 정보를 얻기 위해 몇 가지 뉴스레터를 구독하는데 거기에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소식이 올라와 있더군요. 제가 우리 인생학교 카톡 동기방에도 소식을 퍼 날랐습니다. 코로나 때문에 서로 만나지도 못하고 카톡에서만 글을 주고 받는데 혹시라도 동기 중 누가 당선이라도 되면 단톡방이 왁작거리지 않겠어요? 제가 지금 동기회장이라 어떻게든 분위기를 살려야 하거든요. 덕분에 목적을 100% 달성했습니다.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발췌를 해가면서 읽었어요. 다 읽고 나면 핵심이 되는 문장을 인용한 후 거기에 제 생각을 엮어서 독후감을 마무리 하곤 했지요. 다 쓰고 보니까 뭔가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인용한 문장은 거의 대부분 빼어난 문체이거나 깊이가 있는 글이거든요. 이렇게 요약한 글은 외부에서 강의를 할 때도 자주 인용을 한답니다. 서울시50플러스재단의 교육 프로그램 중 ‘1인 창직과정’이 있었어요. 그때 맥아더스쿨의 정은상 교장 선생님이 매주 한 권의 책을 소개하고 독후감을 올리라고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정말 요약만 했지요. 그러다가 “이러지 말고 조금 더 다듬은 문장을 만들어 보자”하고 시작한 게 본격적으로 글을 쓰게 된 계기가 됐습니다. 블로그를 만들었으니 빈 공간을 채울 콘텐츠도 필요하고 해서 산문 형태의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이걸 읽어 본 창직 동기들이 용기를 주더라고요. 당신 글에 공감 가는 게 많다고요. 제가 칭찬에 특히 약한 팔랑귀라서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살아가면서 느끼는 단편적인 생각들을 모아 보려고 합니다. 지금은 제 인생에서 가장 변화가 극심한 때거든요. 언제 까지고 다닐 것 같은 회사를 나왔지, 마땅한 일도 없지, 늙어갈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면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어요. 그렇다고 무기력하게 살고 싶지는 않고. 퇴직 후 인생2막을 시작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저와 같은 생각이 아닐까 싶어요. 글을 통해 솔직히 토로도 하고 용기와 격려를 주고받는 그런 글을 쓰고 싶습니다. 글을 쓸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신 정은상 선생님과 창직 동기들 그리고 우리 인생학교 중부2기 동기들을 꼽고 싶습니다. 이 분들은 모두 제가 퇴직 이후에 만난 사람들이지만 누구보다 제 삶에 용기와 격려를 많이 해 주신 분들이거든요. 아! 또 한 분 있네요. ‘눈부시게 아름다운 노후’의 저자, 헤닝 쉐르프님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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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왕릉의 전설
- ‘헉! 이거 뭐지? 혹시 그날 아람이가 얘기했던 게 이건가?’ 누리는 미술관의 다섯 번째 전시실 모퉁이에 걸린 그림을 보다가 놀라 뒷걸음질 쳤다.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마침 까만색 유니폼을 입고 목에는 스태프 라고 쓰인 표를 달고 있는 남자가 느린 걸음으로 5전시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아저씨! 저 그림 좀 이상해요.” “응? 뭐가?” “그러니까 저게...” 하면서 누리가 다시 그림을 보니 그림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멀쩡했다. 검은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고 갸름한 얼굴에 눈에는 슬픔이 가득 담긴 채 마치 맞은편에 있는 남자 그림을 바라보는 것 같은 모습. 조금 전 누리가 봤던 그 놀라운 모습이 아니었다. “저- 그게 저 그림이... 아, 아니에요.” 직원은 누리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짓더니 다시 천천히 걸으며 다음 전시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림을 보는 게 아니라 전시실에 상태를 살피는 거 같았다. 누리는 자기가 착각을 한 걸까 생각하면서도 이상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 전시를 오픈하던 날, 아람이가 했던 말이 떠오르자 자기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닐 거라고 확신했다. 누리는 다시 그 여자그림 앞으로 가려다가 그만 두었다. 무슨 괴기 영화나 환타지 영화에서 본 일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싶으면서 지금 이 순간을 함께 해줄 사람이 그리웠다. 아람이랑 얘기를 하고 싶었다. 전시 개회식은 일주일전 목요일 오후 5시에 있었다. 할머니는 미술관을 놀이터 드나들 듯 좋아하는 누리 때문에 미술관에 자주 가시게 됐다. 그러다가 지난 가을부터 미술관에서 하는 도슨트 교육을 받으셨다. 도슨트는 미술관에서 관람객에게 전시에 대한 여러 정보와 전시물,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설명해주는 봉사자라고 한다. 그날 할머니가 누리에게 전시 오픈식에 참석해서 작가들을 만날 거라고 함께 가자고 하셨다. 누리는 미술관엔 자주 가서 그림과 조각들을 보았지만, 작가들을 직접 만나본 적은 없었다. 더구나 오픈식이 끝나면 맛있는 다과 파티도 있다는 할머니 말씀에 누리는 냉큼 할머니를 따라 나섰다. 그렇지만 아람이는 시큰둥했다. 이란성 쌍둥이로 태어난 아람이와 누리는 불과 32분 차이로 세상에 나왔다. 아람이는 12월 31일 밤 11시 49분, 누리는 다음 해 1월 1일 0시 21분. 부모님은 출생신고를 하면서 잠깐 같은 날로 올릴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결국 병원에서 기록한 그대로 출생신고를 해서 아람이는 학교도 한해 먼저 들어갔다. 4학년이 된 아람이는 걸핏하면 3학년 보다 4학년이 되니 할 일이 너무 많다며 유세를 부렸다. 쌍둥이지만 둘은 비슷한 것보다 다른 면이 훨씬 많다. 아람이는 책을 좋아하고, 누리보다 덩치는 작지만 야무져서 누나답다는 얘길 많이 듣는다. 누리는 활발하고 덜렁거리는 편이다. 그렇지만 게임이나 그림 그리는 것, 만들기는 아람이보다 선수다. 그래서 할머니와 엄마는 ‘금손 누리’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오픈식 때, 아람이가 미술관 건너편에 있는 학원에서 수업이 일찍 끝났다며 미술관으로 왔다. 전시 담당 큐레이터가 인사를 하고 전시 기획의도를 알려주는 동안 할머니는 메모장을 들고 제일 앞쪽 자리로 가서 앉으셨고, 누리는 다과가 차려지는 쪽 가까이 앉았는데 아람이는 지루했는지 혼자 전시실로 들어갔다. 문화재단 대표이사가 활짝 웃으며 조선 왕릉이 세계문화유산의 반열에 오른 것은 역사적인 사건이라며 오랫동안 얘기 했다. 그다음엔 그 왕릉 중 8기가 우리 시에 있으니 큰 자랑거리라고 시장이 더 길게 길게 얘기했다. 누리가 보니 가슴에 꽃을 달고 한쪽에 쭈-욱 앉아 있는 사람들이 작가들 같았다. 작가들도 지루한지 얘기하는 시장을 보다가 바닥을 보다가 자기 손을 맞잡았다가 했다. 그때 얼굴빛이 빨갛게 상기된 아람이가 누리 옆으로 오더니, “누리야, ‘류원’이란 화가는 어디 있어?” 하고 물었다. 행사 식이 끝나면 재빨리 좋아하는 케잌을 먼저 집으려고 음식물들이 있는 상을 보고 있던 누리는 “나도 몰라. 아직 작가들은 인사 안 했어. 저쪽에 있는 사람들 중에 있을 거야.” 하며 작가들 쪽을 가리켰다. 그때, 드디어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누구에게 감사하고, 또, 또 누구에게 감사말씀을 전하는 바라고 말하던 시장님 얘기가 끝나고 작가들 인사 차례가 되었다.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인물과 관계된 것인지 어떤 방법과 의도로 제작한 것인지를 짧게 얘기했다. 그런데 여덟 명의 얘기가 다 끝났는데 ‘류원’이란 작가는 없었다. 사회를 보던 큐레이터가 말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작가는 총 11명인데 그중 세 분은 개인 사정과 해외 전시에 참여하느라 못 왔으니 양해바랍니다.” 아람이는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왜 그러는데?” 누리가 이상하다는 듯 묻자, “글쎄- 내가 잘 못 본 걸 수도 있어서......” 하다가 누리를 빤히 보며 물었다. “너 다음에 또 올 거니?” 누리는 전시가 열리는 동안 적어도 두세 번은 관람을 하곤 했다. 집에서 10분 거리인데다가 시립 미술관이라서 입장료도 저렴하다. 또 미술관 간다고 하면 엄마는 늘 입장료에 1,000원을 더 얹어 준다. 그러니 누리에게 미술관 관람은 그야말로 1석 2조, 아니, 1석 3조도 넘는 거다. “당연하지. 오늘은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볼 수도 없을 걸.” “그럼 다음에 올 때 5 전시실에 있는 ‘류원’이란 화가 그림 좀 자세히 봐줘. 정말 이상했거든.” “뭐가?” “그건 네가 그림 보고난 다음에 얘기 할 게.” ‘그래. 아람이도 그날, 분명 나랑 같은 걸 봤을 거야.’ 마음이 급해진 누리는 여섯 번째, 일곱 번째, 그리고 마지막 전시실도 그냥 지나쳐 집으로 내달렸다. 현관문 번호단추를 빠르게 눌렀다. 운동화는 벗겨져 날리듯 흩어졌지만 그건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아람아, 아람아 너 그거 봤지?” 급하게 자기를 찾는 누리를 보면서도 아람이는 소파에 앉아 동화책을 읽다가 느긋하게 한 마디 했다. “저런~ 누나라고 불러야지. 3학년 꼬마야.” “웃기지마. 너 그거 봤지, 맞지?” “음- 너, 지금 미술관 갔다 온 거구나?” “그래. 그 ‘류원’이란 화가가 그린 여자 그림 봤어.” “어땠는데? 너도 이상했어?” “있잖아. 꼭 ‘헤리포터’ 영화에서 본 그림들처럼 움직이고 나한테 말을 거는 같았어.” “그래? 내가 볼 때도 그랬어. 근데 그거 너 혼자 봤어? 무슨 말을 했어?” “몰라. 무서워서 뒤로 물러섰더니 원래대로 안 움직이는 그림이 됐어. 넌?” “나도 잘 모르겠어. 갑자기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같아 얼른 밖으로 도망쳤지. 다른 사람이 하나도 없었거든.” “나는 거기 직원 아저씨한테 물어보려고 했는데, 그림이 그대로 안 움직이는 거야. 그래서 미쳤다는 소리 들을까봐 그냥 한참 동안 서 있다가 너랑 얘기하려고 얼른 온 거야.” “마법 그림인가? 그런 게 정말 있는가봐. 그치?” 아람이가 일어나며 말했다. “이상해, 이상해. 우리 지금 가 보자.” “안 돼. 지금 가도 소용없어. 미술관은 6시까지만 연단 말이야.” 아람이가 다시 소파에 앉으며 무슨 큰 결정이라도 내리는 듯 누리에게 나직이 말했다. “우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고 우리끼리 비밀을 풀어 보자.” “무슨 비밀?” “그림 속 여자는 왜 우리에게 말을 건 것인지, 정말로 그림이 움직이는 게 우리 눈에만 보인 건지. 이유가 있을 것 같아. 왜 있잖아, 동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거. 우리가 그 여자의 원한이나 비밀을 푸는 순수한 아이들로 선택된 걸지도 모르잖아.” 아람이는 야무지게 말했지만, 누리는 그런 거 같기도 하고 아닌 거 같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었다. “누리야, 우선 이번 전시의도를 알아야 하고 ‘류원’이란 화가는 왜 그런 그림을 그렸는지 알아야 해.” “그건 어렵지 않아. 전시가 설명된 리플릿도 있고 10시, 11시, 오후 2시, 3시엔 전시를 설명해 주는 선생님들도 있거든. 아, 이번부터 할머니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하니까 할머니한테 물어보면 간단하겠다.” “아냐. 그럼 재미없지. 우리가 선택됐으니까 우리가 해결하는 거야. 어른들에겐 비밀로 하고.” 아람이는 다시 눈동자를 굴리며 입술을 옴찔거리며 생각을 모으느라 애썼다. “그래. 우선 전시 리플릿부터 보자. 너 갖고 있지?” “물론이지. 난 여태껏 전시 리플릿은 다 모았다니까.” 누리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뒷주머니에서 리플릿을 꺼내 놓았다. 아람이와 누리는 머리를 나란히 하고 전시 설명이 담긴 네 면으로 된 리플릿을 읽었다. 앞면엔 전시 제목과 대표 작품 사진, 전시 날짜가 적혀있고, 안쪽 두 면에는 전시 내용과 사진 두 개가 있었다. 왕릉의 전설 -조선 왕족들의 미술관 행차- 은 조선왕조 500년을 이끌어 왔던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가장 화려한 삶의 중심에 있었으면서도, 권력과 명분 획득을 위한 피비린내 나는 전장에서 혹독한 고독과 괴로움을 겪어야 했던 증언자들이기도 하다. 이들 왕족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주인공으로 8인을 선정하고 각 존재들에 대한 시각적 대화를 시도하는 작가 11명의 작품을 소감형식으로 구성한 전시이다. 전시의 소재가 된 왕족은 인수대비, 폐비 윤씨, 인종, 소현세자, 숙종, 희빈 장씨, 의빈 성씨, 그리고 철종이다. 왕릉이라는 신들의 정원에는 그들이 마저 이루지 못한 꿈에 대한 전설이 전해온다. 인간의 삶이 언제나 그러하듯 온전하게 충족되지 못한 애절한 마음은 후손인 우리의 심정을 흔들어 생각을 일으킨다. 사실 조선왕조의 역사적 의의가 갖는 무게에 비해 현대인들의 그에 대한 관심은 가벼웠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은 그 표현 중심에서 과거와 현재를 관통하는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치열한 꿈의 허상을 새로운 예술적 형식으로 보여줄 것이다. 여기까지 읽고 나자 누리가 투덜거렸다. “이게 뭔 말이야아~? 난 짜증나.” “어른들한테 보여주는 거라 그래. 어쨌든 조선시대 왕족들 얘기를 그린 작품이란 말이지 뭐.” “그럼, 류원이란 화가는 누구 얘길 그린 걸까?” 누리가 마음이 급해져서 뒷장으로 넘겼다. 뒷면에는 참여 작가 11명의 이름과 간단한 작품 내용이 있었다. 문경은, 태인주, 노장현, 박영훈, 류원, 신희경, 백승민, 최원범, 우정석, 김화준, 이민숙. 누리와 아람이는 류원 작가 옆에 있는 글만 소리 내어 읽었다. “류원은 신비한 전설 속 이야기를 끊임없이 제작하고 있는 작가이다. 이번 전시에는 고양시 서삼릉에 있는 정조의 후궁 의빈 성씨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데, 그동안 작가가 그려오던 기법에서 크게 벗어난 새로운 시도를 엿볼 수 있다.” “의빈 성씨 얘기라고?” 아람이는 의빈 성씨를 아는 거 같은 표정이었다. “그게 누군데? 너 알아?” “응.” “어떤 사람인데?” 아람이가 좀 뻐기는 표정으로 누리에게 말했다. “누나, 아니 '누님 알려 주시옵소서.'하면 가르쳐 주-지.” “야! 겨우 32분 먼저 태어났다고 그 소릴 듣고 싶냐? 나 같으면 그냥 친구먹자고 하겠다.” “싫음 말구.” “어-휴!” 치사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궁금증이 풀릴 열쇠인 것만 같아서 누리는 ‘이번만’하는 맘으로 더 과장되게 아양을 떨었다. “누님, 저는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매우, 매우, 매우 궁금하옵니다. 알려 주시옵소서.” “좋다! 내 알려주지. 잠시만 기다리거라.” 그러더니 아람이는 누리에게 의빈 성씨가 누구인지 얘기는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왜? 가르쳐준다면서 왜 가?” 아람이는 책 한 권을 들고 나오며 말했다. “내가 좀 똑똑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걸 다 외우는 건 아니쥐이. 여기 봐-.” 아람이는 ‘조선왕조실록’이란 만화책권을 펴서 195쪽에 있는 ‘제 22대 정조 가계도’를 손가락으로 톡톡 가리켰다. 거기엔 정조 밑으로 ‘효의왕후 김씨(1753~1821)- 후사 없음’ 이라 적혀 있고, 그 다음 줄엔 ‘의빈 성씨(1753~1786)-1남, 문효세자 일찍 죽음’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림 속 여자가 이 사람이구나. 그런데 그래서 뭐가 어떻다는 거야?” “이거 봐. 의빈 성씨는 겨우 서른네 살에 죽었어. 그러니까 뭔가 사연이 더 있을 거야. 이 책에서 보면 화빈 윤씨가 미워한 거 같거든.” 아람이는 입을 야무지게 다물더니 말했다. “그래서 화빈이 의빈 성씨를 죽였대?” “아니. 그런 건 없어. 그렇지만 아직 풀리지 않은 원한이 있어서 우리한테 말을 걸었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내야지. 그림 속 여자가 우리한테 하려고 하는 말도 뭔지 알 수 있고, 영혼을 달래줄 수도 있겠지.” “하~ 아람아! 내가 보기엔 넌 이상한 책을 너무 많이 읽은 거 같아.” “뭐라구? 너도 그림이 움직이면서 말하는 거 봤다며? 얼마나 억울하면 그림이 말을 다 하겠니?” “엄마랑 아빠한테 물어 보자. 아니 이따가 할머니한테 물어 보는 게 낫겠다.” “안 돼, 안 돼. 하지 마! 이렇게 재밌는 사건이 우리 평생에 얼마나 있겠어? 어쩌면 이건 우리 생애 최고로 짜릿한 비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란 말이야.” “치~ 비밀 만들고 싶은 거야?” “동화를 읽다보면 비밀이나 엄청난 사건이 생겨서 주인공이 재미난 경험을 하는데, 우린 언제 그런 일이 생기겠어? 만날 똑같은 날이니... 그러니까 너랑 나, 둘이서만 이 문제를 풀어보자고. 내가 너한테 슬라임 전부 다 줄게.” “진짜? 앗~싸~. 그러지 않아도 만들고 싶은 게 있어서 엄마한테 사달라고 조르려고 했는데... 좋아! 어떻게 하면 돼?” “우선, 의빈 성씨에 대한 자료를 더 찾는 거야. 그리고 미술관에 가는 거야. 사람들이 없는 시간에.” “사람들이 없는 시간을 어떻게 알고? 5 전시실에서 사람들이 나가길 기다려야 하나?” “그렇지! 자, 이제 자료를 어떻게 찾는다? 도서관에 가야 할까?” “에이 바보! 컴퓨터로 인터넷 검색을 하는 게 빠르지.” 아람이는 민망한 듯, “아하하... 그렇구나. 근데 조금 있으면 엄마랑 아빠 집에 올 시간이야. 그니까 일단 오늘은 숙제 하는 척 하면서 이 책을 보고, 내일 학교 갔다 와서 찾아봐야지.” “와~ 철저하네. 난 그냥 내일 학교 끝나고 곧장 미술관에 가서 의빈 성씨랑 단판을 내고 싶구만...” 다음 날 오후, 누리는 학교 운동장에 땀을 흘리며 친구와 축구공으로 놀고 있는데 아람이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누리야, 누리야아~~ 지금 미술관 가자~~” “너네 누나도 미술관 좋아하냐? 이상한 남매야. 나도 이제 학원 가야겠다.” 하며 친구가 교문밖으로 나갔다. “나 입장료도 없단 말이야.” 누리는 아람이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야! 내가 누구냐? 초대권을 할머니한테 두 장 받았어. 그리고 인터넷 검색은 아까 점심시간에 도서실에서 해놨고.” “역시! 짱인데.” “학습지 선생님 올 시간 맞추려면 빨리 갔다 와야 해. 뛰자~” 1 전시실에서 4 전시실까지는 건너뛰고 5 전시실로 들어간 아람이와 누리는 다른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의빈 성씨의 그림 앞으로 다가갔다. 아주 잠깐, 그림은 그림인 채로 있었다. 그런데 그림 앞 1m 정도로 바짝 다가가자 그림이 움직이며 말을 걸었다. “어서오세요.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헉! 정말요? 왜요?” 누리가 깜짝 놀라 물었고, 아람이도 서둘러 말했다. “무슨 사연이 있으신 거죠? 혹시 억울하게 죽음을 당하셨나요?” “아~ 글쎄... 왜 그렇게 생각지?” “내가 다 찾아봤어요. 이름은 성덕임이고, 정조 임금님이 무척 사랑했고, 아들인 문효세자는 다섯 살에 죽고, 딸도 태어나서 첫돌도 안 돼서 죽었잖아요. 또 세 번째 아기를 낳기 두 달 전에 죽은 것도 알아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아닌가요?” “어머나! 나에 대해서 많은 걸 공부했구나? 고맙다. 그렇지만- ” 그때, 세 사람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누며 5전시실로 들어 왔다. “아니, 이게 누구야? 우리 아람이랑 누리네! 책가방도 메고 있는 걸 보니 학교에서 곧장 왔구나?” “네, 할머니.”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며 그림을 돌아보니 그림은 다시 멈춰 있었다. 아람이와 누리는 눈을 맞추고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설였다. 그런데 그림이 다시 움직이며 말을 시작했다. “정조 임금님과 나는 금슬 좋은 부부였지요. 정조 임금님은 내가 죽은 후 저를 애도하는 글을 많이 써 주셨지요. 저는 지금도 그분이 그리워 이렇게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답니다.” 눈이 휘둥그레진 누리와 아람이와는 달리 할머니와 다른 두 분은 웃으며 그림을 향해 인사했다. “수고가 많아요. 박선생님!” 다시 또 놀란 누리가 물었다. “할머니! 어떻게 된 거에요?” “이런 작품은 누리도 처음 보지? 이런 작품을 ‘인터렉티브 아트’라고 하는 거야. 테크놀러지가 결합되어 관객을 만나야 완성되는 작품. 관객들이랑 얘기도 나눌 수 있어.” “그럼 그림 안에 AI라도 들어 있는 거예요?” 이번엔 아람이가 물었다. 할머니가 바닥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그건 아니고 여기 이 지점에 사람이 서면 센서가 작동해서 관람객이 있다는 걸 알려주고, 그림 뒤에 숨어 있는 분이 말을 하는 거지. 그러면 디지털로 된 그림이 움직이는 거야.” “그림 뒤에 있는 분은 우릴 볼 수 있어요?” “소리는 들을 수 있지만 보지는 못 해. 컴퓨터를 앞에 놓고 검색어를 치면서 여러 가지 질문에 답도 해야 하니까. 하하, 내가 비밀로 해도 될 걸 너무 많이 알려준 건가?” 그제야 아람이와 누리는 모든 게 이해되었다. 그러면서도 누리는 디지털 그림이 너무나 감쪽같아 놀라웠고, 아람이는 신비한 경험을 놓친 거 같아 크게 서운했다. 나중에 아람이와 누리에게 둘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얘기 듣고, 할머니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애들아! 할머니는 너희들 덕분에 미술관에서 새로운 걸 많이 배우고 또 그걸 여러 사람과 나눌 수 있어서 참 좋구나. 더구나 그림 하나가 호기심을 자극해서 이렇게 배워나가는 아람이랑 누리를 보니 얼마나 좋은지 몰라!” •수상소감 - 우수상 동화 배홍숙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 생각이 신기해 기분이 좋아져요” 감사합니다. 블로그에 동화를 몇 편 써 두고 공개는 안했는데,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에 처음 응모해서 이렇게 상을 받으니 많이 기쁩니다. 독서 동아리 회원이 공모전이 있다고 단톡방에 링크를 걸어주셨어요. 그 분도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응모 부문에 동화가 있어 용기를 내봤습니다. 어쩌면 50대 이상이 참가하는 거라면 동화 부문 응모자가 적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글쓰기 관련 책을 보기도 하고, 강의도 가끔 듣습니다. 함께 독서동아리 활동을 하는 친구들과 가족, 제가 하는 모든 활동이 글쓰기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적극적인 글쓰기엔 특별한 동기가 필요한 거 같아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이후에 다른 공모전이 있나 살펴보고 있습니다. 어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고 요청이 온다면 글쓰기에 더 큰 동기부여가 될 것 같네요. 내가 쓴 에세이는 항상 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동화나 그림책을 쓸 땐, 내가 해낸 생각들이 신기해서 기분이 좋아지고요. 그래서 새로운 아이디어로 동화나 그림책 글을 계속 쓰면서, 감동을 주는 좋은 수필도 쓰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공모전 정보를 주셨던 선생님, 잘못된 파일 경로를 수정하라고 알려주신 담당자에게 감사드리며, 독서동아리 친구들과 어린 시절에 많은 얘기를 들려주셨던 엄마와 외할머니, 응원해 주는 식구들에게도 감사함을 전합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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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륙에서 길을 묻다
- 길을 잃다 지천명(知天命)의 나이에 길을 잃었습니다. 사업이 무너지니 가정도 파탄되고 종교생활도 다 무너졌습니다. 그동안 알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하고 싫었습니다. 자격지심(自激之心)인지 저의 현재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는 것에 비참함을 느꼈습니다. 방황하며 현실을 도피했습니다. 일부러 서울을 떠나 아무도 모르는 타지(他地)에 가서 머물렀습니다. 그러다가 중국까지 도망치듯 오게 되었습니다. 흔히 인생을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합니다. 태어나서 죽기까지 매번 선택하며 사는 것이 인생이라는 뜻입니다. 그중에 중요한 3대 선택을 결혼, 직업, 종교라고 하는데, 나이 50세에 이 모든 것들의 기반이 한순간에 붕괴된 것입니다. ‘과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어떤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지나온 저의 50년을 곰곰이 반추해보았습니다. 나의 1차 꿈 저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1·4후퇴 때 월남해온 이산가족입니다. 남한에 친척이 없었고 저의 어머님을 중매로 만났지만 가정에 정(情)을 못 붙이시고 한평생을 유랑하듯 밖으로만 떠도셨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홀로 저희 3남매를 키웠습니다. 어머님의 고생을 익히 보고 자란 저는, 빨리 커서 돈 벌어 어머님께 집 한 채 사드리는 것이 1차 목표였습니다. 대학 갈 때쯤 우연히 저의 주민등록초본을 떼어보았는데, 거기에는 제 나이보다도 주소지 이전 횟수가 훨씬 많았습니다. 그만큼 더 싼 곳으로 자주 이사를 다녔다는 의미입니다. 대학 시절엔 저를 특별히 아끼시는 교수님께서 제게 미국에서의 7년간 석·박사 유학 코스를 권하며, 공부하고 돌아와 우리 대학의 교수가 되라고 기회를 주셨는데, 저는 거절했습니다. 제게는 현재의 대학생도 과분하며, 저는 제가 교수되는 것보다, 빨리 돈을 벌어 어머님을 편히 모시는 게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교수님께서는 “사람이 돈을 쫓으면 추해진다. 돈이 너를 쫓아오도록 해야지” 하시며 저를 훈계하셨지만, 그때 저는 그 말이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군(軍) 입대할때도 경제생활을 고려해 장교를 선택했고, 대기업에 입사했다가 1년 반 만에 대형 증권사로 이직(移職)을 합니다. 거기서 3년 만에 드디어 꿈을 이룹니다. 드디어 어머님께 집을 사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때의 제 나이가 서른 살이었습니다. 이후 증권사에서 저는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고 승승장구합니다. 고민이 시작되다 그리고 이어 제가 서른한 살에 아들을 낳았는데, 그때에 아들 이름을 지으며 저는 처음으로 인생에 대해 고민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저처럼 좋은 집을 사고 좋은 차를 타며, 가족끼리만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일까? 그 이상의 인생은 없는 걸까? 나중에 크면 아들에게 인생이란 무엇이라고 말해줘야 할까?’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아들의 이름을 지었습니다. ‘금강산(金剛山)’. 저의 성이 김(金)이니, 김강산이나 금강산이나 한자(漢字)의 표기는 같았습니다. 제가 그때는 교회도 열심히 다닐 때였기에, ‘역사의 하나님’께서 앞으로 우리 민족의 미래를 열어주실 때, 제 아들 녀석을 ‘금강산 찾아가는’ 통일의 도구로 써주십사 하는 의미였습니다. 저는 비록 제 가족밖에 모르는 인생이지만, 제 아들만큼은 그 이상의 가치 있는 인생을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산물이었습니다. 한편 증권사 시절은 가히 저의 전성시대였습니다. 최연소 영업추진부장, 지점장, 연수원장, 홍보실장, 강남본부장(11개 지점 총괄), KBS 라디오 증권방송 등 종횡무진(縱橫無盡)했고, 급여도 억대 연봉이었습니다. 20여 년 전에 연봉 1억 원이면 거의 상위 1% 수준이었습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위치였는데, 언제부터인가 왠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습니다. 경제적인 풍요가 더 이상 나를 행복하게 하지 않았고, 가시적 1차 목표가 사라진 인생은 조금씩 허무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히 IMF 때 저는 증권사 신촌지점장이었는데, 문득 제가 하는 일에 회의(懷疑)가 생겼습니다. ‘조국 대한민국은 현재 달러가 없어서 국가부도 사태인데,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이 혼란 속에서도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좀 더 벌게 해주는 역할 정도가 아닌가? 과연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걸까?’ 본질적인 고민이 시작되었습니다. 결국 증권회사에 사표를 제출하게 되었을 때, 저를 아끼셨던 사장님께서 제게 물었습니다. “지금 잘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사표를 내는가?” 그때에 저는 ‘재미가 없어서요’라고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진심이었습니다. 그 말에 사장님께서는 씨익 웃으시며 “사표는 유보할 테니, 유급으로 한두 달 푹 쉬고 충전해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고 실제로 그렇게 처리해주셨지만, 저는 결국 사표를 철회하지 않았습니다. 헤드헌터(Head Hunter)사의 유혹 증권사 퇴직 얼마 전부터 강남의 유명 헤드헌터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대기업이나 국가기관이 소수의 전문가를 특별 채용하고자 할 때는 공개채용을 하지 않고, 헤드헌터사가 보유한 분야별 전문 인력 풀에서 추천을 받곤 합니다. 어찌된 일인지 그쪽 추천 리스트에 저도 포함되어 있었나 봅니다. 기분 나쁘지 않았고 신기했습니다. 첫 번째 제안은 외국계 증권사의 홍보팀장이었는데 제가 거절했습니다. 우선은 IMF 시기에 외국 회사라는 게 싫었고, 저의 공식적인 답변은 그쪽 역할이 지금보다 작고, 연봉도 저의 현재 수준이 더 높다는 이유였습니다. 그러자 2개월 후 다시 제안이 왔습니다. 이번엔 역할도 크고 연봉도 맞춰주겠다고 했습니다. 그게 우리금융그룹 홍보실장이었습니다. 일단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우리금융은 IMF 때 공적자금을 받은 5개 은행을 통합하여 만든 우리나라 최초의 금융지주회사인데, 빨리 회생하여 주가를 높여야 우리나라가 IMF로부터 벗어나는 상황이었습니다. 일단 면접이라도 보아달라는 헤드헌터사의 거듭된 요청을 받아들여, 면접을 보고 결국 입사를 결정하게 됩니다. 가서 만나보니, 하나은행을 성공적으로 경영하셨던 윤병철 회장님께서 우리금융그룹 초대회장으로 오셨고, 이후에 금융감독원장이 되신 전광우 부회장님이 제 직속 상관이셨습니다. 두 분 모두 능력도 탁월하시고 인품도 훌륭하셨습니다. 특별히 저를 많이 아껴주시고 믿어주셔서 가까이서 많은 일들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근무여건은 녹녹지 않았습니다. 산하의 은행들은 지주회사를 마치 점령군처럼 인식하여 노조를 중심으로 사사건건 반발했고, 언론도 호의적이지 않아, 매일 밤 언론사를 찾아가 부정적인 기사를 막아내는 것이 저의 주된 업무가 되었습니다. 또다시 흘러가는 시간이 아깝게 느껴졌고, 저는 결국 1년 만에 최종 사직을 합니다. 저의 사표에 대한 답신으로 윤병철 회장님이 써주신 덕담 가득한 친필 서한(書翰)에, 저는 한 번 더 감동하며 고별인사를 드렸습니다. 새로운 세상을 엿보다 총 18년간의 직장생활을 정말 미련 없이 정리하고 나서는, 직장인 시절에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일들에 관심을 갖고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째는 각종 동문회 참가였고, 둘째는 강사 활동이었습니다. 동문 모임으로는 서울시립대학교 대학동창회와 ROTC 총동기회가 있었는데, 나름 열심히 하다 보니, ROTC 21기 총동기회장으로 전국을 누볐고, 당시 ROTC 중앙회장이셨던 5기 차인태(전 MBC 아나운서) 회장님과도 좋은 신뢰를 쌓았습니다. 이어 회사 다닐 때부터 간간이 요청이 있었던 몇몇 대기업에서의 강의 요청을 이제는 편하게 다닐 수가 있어서 좋았습니다. 삼성그룹, 효성그룹, 푸르덴셜생명 등에 리더십, 프레젠테이션, 커뮤니케이션, 네고시에이션(협상기술) 등을 주제로 4~8시간까지 강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푸르덴셜생명으로부터 한 가지 큰 제안을 받게 됩니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는 ‘한국 메이크어위시(Make A Wish) 재단’의 초대 사무총장을 맡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제겐 생소한 분야였지만, 자원봉사자 선발 및 교육, 소원행사 감동연출 및 홍보, 그리고 기업으로부터 후원금 조달업무 등을 총괄하는 역할이어서, 저를 적임자로 평가한 것 같았습니다. 저에 대한 기대도 감사하고 좋은 일이어서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한국 메이크어위시 재단의 사단법인 인허가 설립부터 총 2년여를 봉사했는데, 미국재단으로부터 매뉴얼 교육을 받고, 소아암병원으로부터 소원 대상자를 추천을 받아, 최선을 다해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수십 건의 소원성취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때에 저는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았습니다. ‘약값이나 치료비를 지원하지 왜 소원성취인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어린이들에게 단 한 번의 소원은 무얼까? 인간에게 진정한 소원이란?’ 이런 물음을 통해 사회봉사에 대해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고, 이런 생각은 후일 중국에 와서도 나름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새로운 큰 도전, 그리고 실패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깊이 생각한 것은, 돈 이상으로 의미 있고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한류문화 관광사업’ 이었습니다. 이 사업을 선택한 이유는 첫째, 우리 문화를 사랑하고 상품화하는 것은 제가 잘할 줄 아는 분야였고, 둘째, IMF를 겪고 보니 국가적으로 달러 버는 일이 중요했는데, 이 일이 바로 그쪽 분야의 일이었고, 셋째는 우리나라 환율이 오르니, 이른바 인바운드(inbound, 한국 입국) 관광사업에 경쟁력이 높아졌던 시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 맞춰서 일을 시작하려던 계획이었는데, 여기저기 세상을 엿보다가 좀 늦어져서 2004년에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한국에 오는 외국 관광객들에게 한국적 감동을 추가로 전하며, 1인당 100불씩 더 쓰게 하자는 내부 경영목표를 세우고, 독창적 한류문화 전시 및 상품개발 사업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김포공항 국제선 제2청사 지하 1층에 약 1000㎡ 규모로 ‘한류스타 홍보관’을 제법 호화롭게 개장했습니다. 전시관 조성에만 총 9억 원을 투자했습니다. 당시 일본에 한류 붐이 있었고, 국제선 제2청사는 도쿄 하네다공항을 직행하는 항공편이 매일 16편이 있었습니다. 김포공항의 한국공항공사는 물론, 문화관광부, 한국관광공사 등의 기대와 관심을 한껏 받으며 사업을 자신감 있게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초기에 공동으로 지분투자를 약속했던 일본 도쿄의 파트너 관광사업자가 약속을 어기면서 틀어지기 시작했고, 개장 6개월 후부터 갑자기 일본의 한류 붐이 식으면서 위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래서 직접 일본 도쿄돔에서 열린 한류 페스티벌 행사에도 참가하고, 말레이시아와 중국 등에도 직접 진출을 시도했습니다. 중국은 그때 처음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수익 다변화를 위해 국내 이벤트 기획사로도 사업영역을 넓혔습니다. 당시 오세훈 시장 시절에 서울시 장애인 예술제도 연출했고, 노인협회 주관의 세계노인문화예술제를 8개국을 초청하여 속초와 설악산에서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포천 양귀비 꽃 축제, 대기업 행사 등을 수주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불황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고, 개장 4년 만에 전시시설을 김포공항에 기부체납하면서 사업장의 문을 닫게 됩니다. 이 과정에서 부채청산을 위해 모든 개인 재산 정리를 했고, 가정도 파탄을 맞습니다. 돌이켜보면 뜻만 좋았지 저 자신이 자신감을 넘어 너무 교만했고, 위기대응 준비가 충분하지 못했고, 모두가 저의 부덕한 탓이었습니다. 어머님이 계시기에 졸지에 더 이상 갈 곳도 없고 반기는 곳도 없었습니다. 낮에는 대인기피증이 생겼고, 밤에는 극심한 불면증에 시달렸습니다. 몸도 마음도 피폐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나쁜 생각도 참 많이 했었지만, 그때마다 어머님이 슬퍼하실 얼굴이 떠올라서 참고 참았습니다. 어머님은 당시에 큰아들이 고생한다고 제가 사드린 집을 처분하여 제게 마지막 힘을 보태주셨는데, 저는 그 기대마저도 부응하지 못하고 무너진 것입니다. 저 때문에 졸지에 어머님마저도 다시 사실 곳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실은 그 몇 해 전부터 어머님은 몸이 많이 상하셔서 거의 거동을 못하시는 상태셨습니다. 한약방에서는 맥박도 약하고 보약도 효험이 없다고 주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업이 망하고 가정파탄마저 겪게 되자, 어머님은 기적처럼 아픈 몸을 털고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이유는, 갈 곳 없는 저의 끼니를 챙기시고 저의 옷을 세탁해주기 위해서였습니다. 정녕 어머니는 위대하다는 말을 저는 그때 다시금 느꼈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인가, 원인도 모른 채 제가 밤새 심한 복통으로 끙끙 나뒹군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님은 두 손으로 저의 아픈 배를 계속 문지르시며, 당신은 평소 불교 신자셨는데 제가 믿는 하나님을 외치시며 ‘우리 큰아들을 제발 살려달라’고 밤새 우셨습니다. 너무도 아프고 길었던 그날 밤, 어머님의 그 뜨거운 눈물과 안타까운 외침 소리를 저는 결코 잊지 못합니다. 중국으로 떠나오다 그런 어머님을 뒤로하고 저는 중국행을 선택합니다. 당시 중국과는 비록 지지부진했지만, 고구려의 420여 년간 수도였던 집안시(集安市) 정부 관료들과 제가 고구려축제를 협의하던 중이었던 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고, 아니 그것을 핑계로 한국을 도망치듯 떠납니다. 어쩌면 아무도 없는 무인도(無人島)를 찾는 마음이란 표현이 더 솔직할 겁니다. 집안시의 고구려 프로젝트는 3개월 뒤 결국 무산됩니다. 제가 한국인이라는 이유였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한국인이 중국에서 고구려를 거론하는 것은 그 자체가 금기시되는 일이었습니다. 집안시 정부 책임자도 처음에는 그 정도로 민감한 문제인 줄을 미처 몰랐던 것 같았습니다. 집안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지만 저는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 없었습니다. 아무런 대책도 목적도 없이 그저 좀 더 중국에 머물기로 하고 지인이 있는 곳을 찾았는데, 그곳이 바로 단동시(丹東市)였습니다. 단동은 압록강을 사이로 북한 땅 신의주와 마주하고 있으며, 북한 대외무역의 약 80%가 단동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단동은 한마디로 우리말 백화점이었습니다. 당시 단동에는 중국 조선족이 1만 5000명, 북한 사람이 1만 명, 북한에서 태어난 중국 화교(華僑)가 1만 명, 요동대학교 한국·조선(북한)어과 학생들이 1000여 명, 그리고 한국인이 총 2000명 정도 살고 있었습니다. 대부분 대북사업 관계자이거나 선교사였습니다. 누구를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일과도 없는 저는, 매일 새벽 혹한의 추위에도 저를 채찍질하듯 하염없이 압록강 산책로를 걸었습니다. 새벽 교회당을 찾아 무릎 꿇고 홀로 숨죽여 울었습니다. 그리고 매일 밤, 강 건너 불 꺼진 북한의 신의주 땅을 멍하니 넋 놓고 바라보았습니다. 그렇게 저의 ‘살아남아 버티기’의 중국 생활이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살고 있었네 그렇게 한두 달을 보내다 보니, 점점 주변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도 저와 똑같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여러 해 전 소설가 황석영이 북한을 다녀와서 쓴 책의 제목이었던 ‘사람이 살고 있었네’가 생각났습니다. 한인교회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접하고 단동한인회도 구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제가 시간이 많으니 한인회 봉사를 제의받아, 당시 막 설립한 단동한국문화원의 부원장직(원장은 한인회장이 겸직)과 한인회 사무국의 사무총장으로 무료봉사를 시작했습니다. 단동한인사회는 대부분 1992년 한중수교 직후와 1997년 IMF 전후로 중국에 건너오신 소상공인 분들이 많았던 바, 아마도 저와 같은 대기업 출신의 사회 경험자가 드물어, 오자마자 졸지에 감투를 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봉사의 길에 들어서다 뜻밖에 할 일이 생긴 저는, 대기업에서의 기획력과 이벤트 기획사 대표로서의 경험을 되살려 많은 일들을 추진했습니다. 우선 요동대학교 한국·조선어과를 찾아서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와 글쓰기 대회, 그리고 합동 문화공연을 매년 추진했습니다. 재외동포재단에는 기획서를 보내 한인회관 건축지원금을 50% 받고 나머지는 현지 모금하여 3층짜리 아담한 단동한인회관을 건립했습니다. 한편, 장기체류 단동 한인들의 대부분이 현지인과 결혼한 다문화가족들이었는데, 이들에 대한 지원체제가 없어, 문화원 내에 다문화가족 복지센터를 만들고, 당시 단동을 방문한 국회 통일외교안보위의 박선영 국회의원님과 심양총영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문화가족 합동결혼식과 단체 한국 신혼여행을 추진했습니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가보니, 70% 이상 대부분 학생들은 부모가 한국에 돈 벌러 가서 없는 결손 가정이거나 조부모 위탁상태였고, 소학교를 졸업해도 별도 우리말도 잘 못하고 중국어도 잘 못하는 언어수준에다, 문화예술 방면 재능교육 발견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비록 몸은 건강해도 스스로는 아무것도 꿈꾸지 못하는 조선족 아이들이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문화원에서 조선족 학생들을 대상으로 우리말 교육과정을 시작했고, 해마다 한국어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여 수상자들에게 한국문화체험여행을 제공했습니다. 제가 단동에 머문 4년 동안 총 140여 명의 학생들이 한국을 방문했는데, 여행비용은 경기문화재단과 한국 지인들의 개인적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조선족 학생들의 예술적 잠재력을 끌어내기 위해, 나아가 그들 스스로가 무언가를 꿈꾸게 하기 위해, 제가 예술단장이 되어 직접 학교에 가서 학생 67명을 선발하여 ‘압록강 청소년예술단’을 공식 발족하였습니다. 그 뒤 8개월간의 훈련 후에 5성급 호텔에서 1000여 명의 학교관계자과 학부모들을 모시고 ‘내 마음의 북두칠성’이라는 제목의 예술단 창단공연을 성공리에 추진하였습니다. 대부분 첫 무대를 경험하는 것이라 감동은 컸고, 학교를 향한 후원금도 쏟아졌고, 부모님들은 눈시울을 붉혔습니다. 심양으로 진출하다 이런 저의 활동들이 인근 지역에도 소문이 났던 모양입니다. 심양총영사관에서는 당시 조백상 총영사님의 파격적 배려로 저를 총영사관의 경제문화행사 기획자 겸 사회자로 발탁해서 일을 맡겼습니다. 마침 한중수교 20주년도 겹쳐서, 각 도시마다 한중우호의 밤 행사가 있었고, 중국 동북3성(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 27개 대학을 대상으로 한 ‘한국어 말하기 대회 및 K-Pop 경연대회’, 그리고 한국 국경절(개천절) 기념 총영사관 한복패션쇼 등의 행사를 연출했습니다. 그러면서 항일유적연구소장과 동북3성 한국인연합회 사무총장을 맡게 되어 동북3성 최대도시인 심양으로 진출하게 됩니다. 심양은 단동의 10배 규모로, 외곽까지 도농(都農)인구 합계가 총 2000만 명인 대도시입니다. 중국 동북3성에 와서 알게 된 사실은, 전 세계 한민족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중국에 있고, 중국 항일유적지의 3분의 2가 동북3성에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인은 물론 조선족들도 우리의 항일역사에 대해 잘 모르고, 항일유적지 찾기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항일유적연구소였습니다.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의 항일역사에 대해서도 많은 공부를 했습니다. 저는 연구소장으로서 연구원을 모집하고, 안중근 13일간의 이동경로와 거사일정을 뒤따라가 보기도 했고, 윤동주의 생가, 신흥무관학교의 발자취 등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한국에서는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많은 항일열사들의 발자취도 찾아다니며 공부했습니다. 그런 중 우리나라 3대 독립선언 중 하나이자 최초의 독립선언인 ‘무오독립선언’의 내용과 의미를 분석, 발굴하여, 심양총영사관과 국가보훈처의 협조 아래 저희 항일유적연구소가 주관하여, 중국 현지 최초로 ‘무오독립선언 기념식’을 개최하였습니다. 저의 가장 큰 보람 중 하나인 이 행사는, 민주평통 선양협의회의 주관으로 지금도 8년째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하다 대도시 심양에 와서 저는 새로운 결심을 하게 됩니다. 그동안 제가 잡다하게 벌여놓은 문화예술 봉사활동과 조선족학교 지원, 그리고 항일역사연구와 유적지 방문활동 등을 종합하여, 체계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시스템과 공간 확보의 필요성이 커진 것입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한중교류문화원’을 설립 추진합니다. 한중교류문화원은 심양의 코리아타운 지역인 서탑가 인근에 약 2000㎡ 규모로 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아 2014년 7월 19일 설립하였습니다. 자체적으로 130여 석 규모의 강당을 갖게 된 문화원은 많은 교육활동과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연출합니다. 그중에 최고의 대박상품은 ‘실버대학’입니다. 제1기 실버대학은 2014년 가을에 약 15주의 과정으로 진행되었는데, 50세 중반부터 80세 전후의 조선족 어르신들 93명이 첫 신입생으로 입학했습니다. 노래교실, 역사문화특강, 10년 젊어지기 미용특강, 핸드폰 사용법, 기본생활영어, 도전 골든벨, 그리고 졸업여행에 이어 사각모와 졸업가운 입고 졸업식하기 등의 행사에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습니다. 실버대학은 제가 문화원장으로 재임한 약 3년 반 동안 총 4회가 이어졌습니다. 한편, 실버대학은 제가 특별한 의미로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한국에 두고 온 저의 어머님을 생각하며 만든 행사입니다. 사실 한국에 있을 때, 어머님의 집에 가면 마음으로는 늘 눈물겹게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하지만, 대부분의 우리 세대 장남들이 그러했듯이 다정다감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무뚝뚝한 아들이었습니다. 사실은 어머님과 재미있게 놀아드리고도 싶었는데, 그러지 못한 죄송스러움과 한(恨)을 실버대학을 통해서 조선족 어머님들께 재롱도 부리며 조금이나마 풀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일까요? 실버대학 어머님들의 공통된 감사인사 표현은 “우리 아들도 못 해준 호강을 실버대학에서 받았네요, 너무 행복합니다!”였습니다. 저도 응답합니다. “아닙니다. 행복하시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그밖에도 한중교류문화원에서는 항일사진전, 어린이 K-Pop대회, 한국가수 김광석 가요제, 중국가수 등려군 가요제, 장예모 감독 영화제, 한국영화제, 조선족학교 돕기 프로젝트, 청춘콘서트, 사물놀이 강습, 한국 만화도서관 개관, 한중친선 배구대회와 탁구대회 등의 행사를 연출하였습니다. 동주학당, 동북에 물들다 그렇게 3년 반의 초대원장 자리를 마치고, 조선족에게 한중교류문화원 2대 원장을 물려주었습니다. 경영의사결정 과정에서 오해와 어려움도 있었고, 제가 너무 강하게 한국 문화를 중국 조선족들에게 전파한다는 정치적 오해가 깊어져서, 부득불한 조치였습니다. 대신에 저는 조선족 지식인들과 함께 윤동주의 이름을 딴 ‘동주학당(東柱學堂)’이란 모임을 만들고, ‘한중 문화융합연구소’라는 개인연구소를 차린 후, 다시 독립하여 조선족들을 향한 집중 봉사활동을 재개합니다. 동주학당은 민족시인 윤동주를 한민족 디아스포라(Diaspora)의 대표인물로 생각하여 ‘한민족 디아스포라 사랑방’을 추구하는 가운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을 표방했습니다. 우선 심양에서 ‘윤동주 100주년 기념 시낭송음악회’를 연출했고, ‘동주학당, 대련에 물들다’, ‘동주학당, 치치하얼에 물들다’, ‘동주학당, 영구에 물들다’ 등 동북3성 여러 지역을 순회하며 ‘찾아가는 민족문화원’의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또한 심양 남부 소가툰 지역에 ‘윤동주 문화원’을 건립하여 실버대학도 성황리에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거의 최북단으로, 3만 명의 조선족이 거주하는 흑룡강성 치치하얼에도 ‘치치하얼시 조선족문화원’ 설립을 지원하고, 제가 명예원장을 맡아, ‘치치하얼시 조선족 아리랑 예술제’ 및 대동제를 개최하였습니다. 이어 거기서도 같은 마음으로 실버대학을 진행했는데, 제가 중국에서 총 6번째로 진행하게 된 ‘치치하얼 조선족 실버문화대학’은 무려 1200km 거리(심양-치치하얼)를 3개월간 매주 고속열차로 달려가서 진행한 것이었습니다. 누군가에게 소중한 것의 크기는, 자신의 재물과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것에 비례한다는 말을 저는 온전히 믿습니다. 치치하얼이 제겐 그런 곳입니다. 그곳에서 만난 조선족 동포 분들이 제겐 그랬습니다. 한중 갈등에 아파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새 10여 년이 흘렀고, 50세에 길을 잃고 도망치듯 중국에 왔는데, 뜻밖에 어쩌다 길이 되어버린 조선족 대상 봉사활동을 하다, 어언 환갑을 지나 올해 63세에 이르렀습니다. 앞에서 제가 제법 많은 일들이 성취되었음을 자랑하듯 나열했는데, 그러나 돌이켜보면 과정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고, 어렵고 힘든 문제들은 지금도 계속 발생되고 있습니다. 특히나 한중관계가 어려워지면 중국에 거주하는 한국인들은 숨이 막힐 만큼 생존에 위협을 느낍니다. 평소에도 역사문제는 중국의 동북공정과 부딪치며 민감해서 매우 조심해야 했지만, 설상가상 사드 사태 등 정치적으로 꼬이면 한국인은 택시 탑승을 거절당할 만큼 배척됩니다. 지금도 한중관계가 소원해지면 겁부터 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동주학당이 야심차게 윤동주문화원을 설립했으나, 윤동주의 국적문제가 불거지면서 설립 1년 만에 활동을 접어야 했고, 개인적으로는 문화간첩으로 오해받아 특정 지역에 출입이 막힌 적도 있었습니다. 살펴보면, 중국인들은 조건 없는 봉사를 믿지 않습니다. 조선족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분명히 숨겨진 다른 목적이 있다고 의심합니다. 그리고 문화는 정치라고 생각합니다. 문화침투 등 정치적인 오해로 몰면, 어느 친구도 나서서 저를 변호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게 중국이고 그게 조선족의 입장임을, 너무 아프고 안타깝지만 이제는 이해하고 인정합니다. 한편, 한때는 한국 정부도 저를 오해해서, 제가 북한과 중국의 국경지역인 압록강 지역을 자주 오고가니까, 인천공항에 입국할 때마다 혹시 친북간첩이 아닐까 조사를 받기도 했습니다. 어쩌다 한국과 중국이 모두 저를 의심하는 웃지 못할 상황도 있었습니다. 흔히 우리나라 외교를 ‘안미경중’(安美經中)이라고 말합니다. 안보는 미국이요, 경제는 중국이라는 뜻입니다. 양쪽 사이에서 위태로운 줄다리기 외교만큼, 재중 한국교민들의 마음도 불안하고 위태롭습니다. 어찌되었거나 서로 신뢰하고 미래지향적으로 협조하는 훈훈한 한중관계를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조선족 전성시대’가 온다 제가 중국에서 만나본 조선족들은 현재 중국인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고, 아울러 한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지만, 그 내면을 살펴보면 어디 가도 비주류요, 이방인처럼 살고 있습니다. 1950년대 초에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조선족으로 편입되어, 그동안 중국인으로 산 세월이 미처 70년이 되지 않습니다. 아직 중국의 주류인 한족들과의 융화가 문화 차이로 쉽지만은 않고, 마찬가지로 모국인 한국에 와서도 여전히 차별받는 비주류요, 이방인입니다. 현재 조선족 부모와 자녀들은 매우 고민합니다. 중국에서는 점차 조선족에 대한 우대조치가 사라지고, 얼마 전 조선족학교를 향해 앞으로 조선말이 아닌 중국어로 교육하라는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그동안 조선어로 시험 보아 다소 유리했는데, 앞으로는 대학시험도 중국어로 쳐야 합니다. 그러자 조선족 유치원과 학교에는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있습니다. 빨리 중국 한족학교로 옮겨가야 그나마 중국 학생들을 따라갈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조선족 학생들이 한족 학생들과 경쟁에서 이기기는 어렵습니다. 대학을 나와도 갈 곳이 거의 없습니다. 얼마 전 조선족 대학생연합회 대표들과 대화했는데, 그들의 대다수가 원하는 꿈이 커피숍이나 식당을 꾸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아마도 그 외에는 별다른 기회가 없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 조선족들에게 저는 이제 곧 ‘조선족의 전성시대’가 온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입니다. 이는 굳이 정치적 통일이 아니더라도, 상호간 화해협력을 기반으로 북한이 경제적으로 개방하는 시대를 의미합니다. 이때가 되면 조선족 역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바, 이를 잘 준비하자는 것입니다. 저는 외칩니다. “조선족은 어디 가나 비주류요 이방인이 아니라, 향후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모두가 필요로 하는 핵심인재들입니다. 그래서 하늘이 미리 점지(點指)하고 100년 전부터 중국 땅에 선발대로 보낸, 최고의 일꾼들입니다.” 저는 이런 점들을 우리 조선족들에게 분명히 가르쳐주려 합니다. 저의 그런 주장의 근거는 세계적인 투자자 짐 로저스의 분석에 기초합니다. 이제부터 다시 시작하는 제 인생 이모작의 꿈도 거기서 같이 출발합니다. 20년 전부터 중국의 획기적 성장을 예견했던 짐 로저스는, 이제 일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앞으로는 북한의 개방을 주목하라고 말합니다. 북한의 개방은 분명 대한민국과 한민족의 미래에 가장 큰 기회가 될 것이라고 호언장담합니다. 저도 이 주장에 100% 공감하며 진실로 기대하며 설렙니다. ‘조선족 희망전도사’의 꿈 한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중국에서도 가끔은 강의를 할 기회가 생깁니다. 대부분은 조선족단체 모임이고, 한국국제학교 학생들에게도 할 기회가 있습니다. 그때마다 공통적으로 빠지지 않고 제가 설파(說破)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것은 ‘조선족이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의 실무주역이 되자!’ 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독일 통일 이후의 상황에 주목합니다. 1989년 서독과 동독이 통일할 때 양국의 경제력 차이는 8:1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난 32년간 동독의 발전을 위해 엄청난 투자를 한 결과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서독과 동독은 아직 2:1 이상의 격차 상태라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과 북한은 3년 전 기준으로 경제력 차이가 무려 44:1입니다. 이 격차를 해소하자면 적어도 향후 50년 이상의 투자와 인적교류가 무조건 필요합니다. 그때에 필요한 실무인력으로 조선족보다 더 경쟁력 있는 집단은 없다고 저는 감히 주장하고 있습니다. 만약 북한이 문을 열면, 서울 청년들이 평양 청년들과 별 갈등 없이 일할 수 있을까요? 저는 매우 어렵다고 봅니다. 당장에 한국인과 조선족도 문화인식 차이가 작지 않은데, 남북한 간에는 불가피하게 갈등해소 시간과 비용이 엄청나게 많이 소요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한국의 자본주의도 충분히 알고, 중국의 공산주의 체제에도 잘 적응하고 있는 조선족만의 실무역할 영역이, 다가올 남북한 평화경제시대에 차별적 블루오션(Blue Ocean)으로 분명히 생겨날 것이라 저는 판단합니다. 앞으로 적어도 50년 동안은 조선족을 필요로 하는 시대가 활짝 열릴 것입니다. 그러하니 조선족이라면, 기본적으로 우리말은 무조건 똑똑히 배워두고, 능력이 되면 한국의 기술이나 장점을 잘 공부해두라는 조언을 조선족 청년과 부모들에게 진심을 다해 전해줍니다. 그렇게 강의하며 말하고 다니다 보니, 일부 조선족들이 제게 붙여준 별명이 ‘조선족 희망전도사’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 별명이 참으로 과분하지만 제 마음에도 흡족하게 스며듭니다. 더 노력해서 진짜 ‘조선족 희망전도사’로 살아보자는 꿈도 생겨났습니다. 대륙에서 길을 묻다 나라 잃은 슬픔 속에서 민족시인 윤동주는 그의 시 ‘길’을 통해 이렇게 말합니다.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 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게 나아갑니다.’ 아마도 나이 50에 직업과 가정과 신앙의 동반 몰락을 경험하면서 도망치듯 중국으로 넘어온 때의 제 심정과 조금은 닮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려, 작고 소박하지만 같은 민족으로서의 안타까움과 애정을 담아, 혹시라도 저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곳에, 특별히 조선족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달려갔던 중국에서의 지난 10여 년을 정리해봅니다. 중국의 대문호 노신(魯迅) 선생이 청년들에게 희망을 이야기하면서 말했던, ‘처음부터 길은 없었다. 사람들이 다니면서 비로소 길이 되었다’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처음엔 미처 길인 줄 몰랐는데 저도 어찌어찌 십여 년을 지나고 보니, 이젠 나름 하나의 길처럼 느껴집니다. 제 몸 하나 추스르지 못했던 한심한 존재가, 어쩌다 타국 땅에서 문화 봉사를 통한 희망전도사로 모질게 살아남아 있습니다. 30~40대의 젊고 풍요로울 때 그렇게도 갈구했으나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 의미와 가치를, 어리석게도 60을 훌쩍 넘어 늙고 가난해지면서 비로소 조금씩 깨닫고 배워갑니다. 그동안 중국에 와서 개인적으로 절망하며 힘들었을 때, 제게 특별한 위로가 되어준 시(詩)가 있습니다. 정호승(鄭浩承) 시인의 ‘봄 길’입니다. 봄 길 -정 호승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있다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이 되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봄 길이 되어 끝없이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강물은 흐르다가 멈추고 새들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하늘과 땅 사이의 모든 꽃잎은 흩어져도 보라 사랑이 끝난 곳에서도 사랑으로 남아 있는 사람이 있다 스스로 사랑이 되어 한없이 봄 길을 걸어가는 사람이 있다 ‘김영식이 있다’ 이제 고백합니다. 정호승 시인의 ‘봄 길’은, 제가 대륙에 와서 길을 묻다가 십 수년 만에 찾아내어 저 스스로에게 답한 길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때때로 저는 시의 마지막 구절 뒤에 한 줄을 더 보태어, ‘김영식이 있다’를 다짐처럼 홀로 외치기도 했습니다. 오늘도 길을 잃고 다시 길을 찾는 분들에게 지난날 저의 절망도 작은 위로 중 하나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깜깜한 절망 속에서 위로를 받았듯, 많은 분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앞으로 살면서 서로에게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봄 길’의 내용처럼 희망이 되어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만약 하늘이 허락하셔서, 제게도 ‘인생의 이모작’이 가능하다면, 우선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태어난 것에 무한 감사하며, 이제부터는 중국 땅에서 한 핏줄 동포를 향한 희망전도사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나아가 더 축복해주신다면, 30여 년 전 제가 아들 이름을 ‘금강산(金剛山)’이라 지었던 그 기도의 응답까지 받아서, 북녘의 아버지 고향 땅에 달려가 입 맞추고, 거기 그분들을 뜨겁게 보듬다, 그곳에서 그분들과 함께 묻히고 싶습니다. 이런 저의 마지막 소망이 너무 큰 욕심일까요? •수상소감 - 대상 미니자서전 김영식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 세상에 알리겠다” •대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수상 소감은? 저는 7살 어릴 적 시골에서, 코 흘리게 손수건을 왼쪽 가슴에 달고 소학교에 입학했습니다. 학교 가는 게 너무너무 좋아서,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1학년을 마치는 날, 담임선생님께서는 제 이름을 호명하시며 뜻밖에 1등 우등상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제게는, 태어나 받은 ‘첫 상(賞)’이었습니다. 우등상 상품은 공책 한 권과 연필 두 자루였습니다. 그걸 들고 낮은 언덕의 신작로 길을 뛰어 어머니께로 달려갈 때, 저는 얼마나 가슴이 뛰며 기뻤는지 모릅니다. 만나는 모든 분들에게 막 자랑하고 싶었습니다. 그로부터 어언 56년이 지났습니다. 어쩌면 ‘마지막 상(賞)’일지도 모르는 이번 상이 저에게는 그때만큼이나 기쁩니다. 그때만큼이나 설렙니다. 저에게 이렇게 설레고 행복한 순간을 선물로 주신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의 주최한 브라보와 신한은행의 관계자 여러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인사 드립니다. 이번에 제가 쓴, 미니 자서전 는, 어쩌면 교만했던 인생의 부끄러운 고백이고, 뻔뻔한 반성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에게 특별히 큰 상을 주신 뜻은,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저 나름 생각해 봅니다. 하나는, 다시 한 번 힘을 내서 ‘인생 이모작’에 도전하라는 따뜻한 격려로 느껴집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대만큼 열심히 새로운 길에 도전하며 살겠습니다. 또 하나 이번 상은, 제 글쓰기에 대해 숙제를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글쓰기를 통해, 세상에 조금이나마 ‘선한 영향력을’ 보태라는 명령입니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늘 정직하고 공감과 위로를 주며, 보존할 가치가 있는 글을 쓰겠습니다. 다시 한 번, 큰 상을 주신 브라보와 신한은행에 감사드리며, 끝으로, 조국 대한민국의 조속한 코로나 승리를 기도하고 응원하겠습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응모 배경이나 동기는? 저는 현재 중국 심양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과 중국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코로나로 인해 지난해 설 명절을 지내고 중국에 온 후, 한국에 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난해 말에는 운동 중 아킬레스건이 파열되어, 중국에서 수술을 받고 3개월을 치료한 후 현재는 재활 중입니다. 한국의 가족도 한국의 소식도 모두 그립습니다. 한국뉴스를 검색하다가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을 발견했습니다. 그중에 특별히 ‘50+’라는 표현에 많은 생각이 스쳤습니다. 제가 사업에 실패하고 도망치듯 중국에 온 것이, 바로 50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타향살이 어언 13년이 흘러, 갑자기 코로나로 멈춘 일상 속에서 지나온 저의 인생을 되돌아 반추해보는, 귀한 시간을 가져 보게 되었습니다. 뜻밖에 좋은 기회를 주셔서 정말로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시니어 공모전을 통해 ‘인생 이모작’도 새로이 꿈꾸게 되었습니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이라기보다는, 기왕에 제가 쓴 글이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며 더 잘 읽히면 좋겠다는 차원에서의 노력은, 제가 많이 부족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평소 저의 글은 딱딱하고 설명형입니다. 재미없는 제 성격과 꼭 닮았습니다. 게다가 글쓰기로 처음 상을 탄 것이 대학 때 논문공모대회였고, 대기업에서 기획담당자였기에 더더욱 저의 글은, 사사로운 감정이 담기지 않은, 그래서 재미와 감동이 ‘1’도 없는 필법(筆法)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지난 10여 년간, 중국에 와서 여러 종류의 한글 잡지를 만들고 배포했는데, 주된 독자층이었던 중국조선족들은 한국인들에 비해 우리말 어휘력이 30% 수준을 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제 글은 그저 수준 높고(?) 어려운 글이었습니다. 로 유명한 미국작가 훼밍웨이가 어느 회고문에서 자신의 독자로부터 받은 편지 하나를 소개했습니다. 전쟁 파병(아마도 한국전쟁) 중인 미군병사가 자신의 소설을 읽고 나서, 어려운 단어가 없어 ‘사전(辭典)찾기 ’없이도 100% 공감하며 큰 감동을 받았다는 감사편지였습니다. 저 역시, 쉽고도 감동적인 글, 그리고 오래 간직하고픈 글을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습니다. •글을 쓰는데 도움을 준 멘토나 동기부여 이유가 있다면? 직접적인 멘토는 아니지만, 제가 특별히 닮고 싶은 작가가 두 분이 있습니다. 한 분은 한국의 유명한 시인 류시화이고, 또 한 분은 의 저자이자 인류학자인 미국의 루스 베네딕트 교수입니다. 시인 류시화는 개인적으로 저와 고등학교 동기동창입니다. 본명은 안재찬이며, 대광고등학교 30회로, 고교 2,3학년을 같은 반에서 공부했습니다. 경희대학교 2학년 때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당선된 그는, 인도 여행을 다녀와서 쓴 수필집 및 시집 등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인기작가가 되었습니다. 그의 글은 쉬우면서도 깨달음을 줍니다. 저도 글을 쓴다면 그런 면을 배우며 닮고 싶습니다. 다음은 미국의 여성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 교수인데, 제가 단동에서 항일유적연구소장을 할 때, 그분의 저서 을 읽었습니다. 2차 대전 전쟁을 종료하기 직전에 미국이 일본에 대해서 분석한 책으로, 70여년이 지난 지금도 전 세계인들에게 일본과 일본인 분석에 관한 제 1의 필독서입니다. 같은 패망국인 독일과는 달리, 일본은 왜 끝까지 반성하지 않는가에 나름의 분석이 명쾌합니다. 일본에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상태에서 쓴 글이라는 점도 놀랍고, 냉철한 대안 제시가 전후(戰後) 미국과 일본의 관계설정에 기준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대단히 유효합니다. 일본에 대해 비판만하고 흥분만하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줄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는 나는 중국인에게 대한민국에 대해 얼마만큼 설명할 수 있는가, 또는 한국에 와서는 중국에 대하여, 그리고 제가 중시하는 중국 조선족에 대해서, 나는 얼마만큼 본질을 명쾌하게 공부했는가에 대해 통렬하게 반성하게 하는 책입니다. 중국판 같은 글에도 도전하고 싶은 이유입니다. •수상을 계기로 앞으로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 얼마 전 미국 아카데미상에서 영화 가 큰 주목을 받았습니다. 70년 전 조선인의 미국 이민사를 소재로 한 영화인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는 제 주변의 중국조선족들을 한 번 더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 100년 전후로 대륙에 이주해 왔고, 영화 미나리 이상의 휴먼 스토리가 얼마든지 있다고 저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향후 중국 조선족 100년의 이야기를 중국판 처럼 작품으로 써서 세상에 알리는 것도, 이번 상(賞)을 통하여 저에게 주신, 귀한 소명 중 하나라고 느끼고 있습니다.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고 싶은 분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있지만, 딱 한사람만을 꼽으라면 저는 주저 없이 저의 여동생 ‘김경희’를 말하고 싶습니다. 제가 교만한 실패와 방황, 그리고 대륙에서 길을 묻는 지난 10여 년 동안, 개인적으로는 부끄럽게도 맏아들로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저희 어머님께 제가 한 때는 자랑이던 아들이었지만, 이제는 걱정을 끼치는 아들로 살고 있는데, 그 빈자리를 저의 여동생이 말없이 채워주고 있습니다. 여동생 김경희는 제 인생에서 가장 미안하고 가장 고마운 존재입니다. 이번에 받은 저의 수상이, 제 여동생에게도 작으나마 위로가 되고 기쁨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21-08-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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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핫플레이스] 손주와 함께 떠나는 도심 속 항공 여행
- ‘덜커덩’ 캐리어 끄는 소리와 활주로에서 대기 중인 비행기, 어딘가 바삐 움직이는 승무원의 발걸음. 그리고 손에 쥔 비행기 표까지. 공항이란 장소는 여행이 시작되기도 전 가슴을 한껏 웅장하게 만드는 마법 같은 공간이다. 그 설렘을 잊고 지낸 지 어느덧 2년째다. 여행이 멈춘 세상이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휴가철이 되면 하늘 위로 훌쩍 떠나고 싶어진다. 그런 이들이 주목할 만한 곳이 있다.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서울 강서구 하늘길 177. 내비게이션에 적힌 주소에 도착하자 드넓은 평지 아래 자리 잡은 거대한 원통형 건축물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다가가 살펴보니 빗살무늬 구조물이 건물을 둘러싸고 반복되는 패턴을 그려낸다. 그 모습이 비행기의 동력 장치인 ‘터빈’을 연상케 한다. 비행기의 심장을 닮은 역동적인 외관에서부터 항공의 모든 것을 담아내겠다는 의지가 돋보이는 이곳은 지난해 7월 개관한 국립항공박물관이다. 연면적 1만8593㎡,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에 이르는 규모로, 그 이름처럼 하늘에서 펼쳐지는 거의 모든 이야기를 아우른다. 새의 날개에서 영감을 받아 글라이더를 띄우던 시대의 역사부터 우리나라를 오늘날 항공 강국으로 만든 각종 산업과 에어택시 가 날아다닐 공항의 미래상까지, 항공 분야의 면면을 다양한 전시물과 체험 시설로 소개한다. ‘하늘길’이라는 도로명 주소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공간이다. 상공에서 만난 민족의 얼 박물관의 정체성을 나타내던 외관의 구조물이 내부에서는 또 다른 각도로 존재감을 뽐낸다. 안으로 입장해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보면, 둥그런 천장이 빗살무늬로 퍼지는 채광과 만나 제트 엔진의 형상을 그대로 재현한다. 본격적인 여행은 지금부터라는 듯, 천장 주변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거대한 항공기가 관람객을 반긴다. 전시는 국내외 비행의 기원과 발전을 살펴볼 수 있는 1층 ‘항공역사관’부터 시작된다. ‘인간에게 하늘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에서 출발해 미지의 세계를 두려워하면서도 갈망했던 옛 조상의 염원을 각종 유물과 문헌으로 소개한다. 다양한 전시물 가운데 라이트 형제보다 300여 년 앞서 우리나라에 이미 ‘하늘을 나는 수레’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기록물은 가히 인상 깊다. 임진왜란 당시 무관 정평구가 발명한 유인 비행체 ‘비거’(飛車)다. 이규경의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저작에 따르면, 왜군에 의해 진주성이 고립되었을 때 정평구가 오늘날의 글라이더와 유사한 비행체를 날려 적의 포위망을 뚫었다고 전해진다. 비거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학계의 논란이 분분하지만, 우리 항공 역사에 새로운 연구 과제를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의의를 지닌다. 그러나 우리 국민에게 비행은 하늘을 난다는 일차원적 의미, 그 이상의 가치를 갖는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되찾는 ‘구국’의 수단이자 전쟁 중 ‘호국’을 위한 무기였고, 첨단 기술을 활용한 각종 산업으로 ‘부국’을 이루는 계기였다. 그리고 그 출발점에는 한인비행학교가 있다. 1920년 7월 5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항일 운동을 목적으로 설립한 한인비행학교는 독립을 향한 우리 민족의 염원이 담긴 곳이자 오늘날 공군의 뿌리가 된 역사적인 활동이다. 국립항공박물관이 코로나19라는 악조건을 무릅쓰고 개관 날짜를 지난해 7월 5일로 고집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때 당시 훈련기로 사용했던 2인승 복엽기 ‘스탠더드 J-1’은 박물관을 대표하는 전시물 중 하나다. 스탠더드 항공사가 개발한 이 훈련기는 우리나라가 소유한 최초의 비행기로, 수직 날개에 태극 문양이 진하게 새겨 있다. 그로부터 2년 뒤 한국인을 태우고 우리나라 상공을 최초로 비행했던 ‘금강호’도 박물관의 빼놓을 수 없는 핵심 전시물이다. 조선 최초 비행사 안창남 선생이 몰았던 복엽기로, 당시 서울 여의도와 창덕궁 일대를 자유롭게 날던 금강호의 모습은 조국을 빼앗긴 우리 민족에게 긍지를 일깨웠다. 박물관에 설치된 금강호는 복원 모형이지만, 실물 크기를 그대로 재현해 그 압도적 규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이외에도 나라가 어려웠던 시절 국민의 성금을 모아 사들인 최초의 공군 전투기 ‘T-6 건국기’부터 영화 ‘빨간 마후라’에 등장한 한국전쟁의 영웅 ‘F-86 세이버’, 우리 자체 기술로 만든 초음속고등훈련기 ‘T-50 골든이글’ 등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항공기를 실물로 만나볼 수 있다. 하늘 위로 꿈을 펼치다 한 층 위로 올라가 볼까. 2층으로 향하는 길목에 설치된 ‘에어워크’는 나선형 경사로로 관람객을 부드럽게 안내하며, 걸어 올라가면서도 실물 비행기를 감상할 수 있도록 해 이동 과정에서 생겨나는 시간의 공백까지 촘촘히 메운다. 보딩 브리지(Boarding Bridge)를 통해 비행기에 오르는 느낌과 비슷해 여행 전의 설렘도 선사한다. 아이를 데리고 방문한 관람객은 2층에 다다르는 순간 아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짐 찾는 곳부터 입국 심사대, 세관 신고장 등 공항의 각종 시설이 재현돼 있다. 항공 운송 및 항공기 제작, 정비 등 오늘날 항공산업 전반을 다루는 ‘항공산업관’이다. 이곳에서는 수화물 이동 과정, 비행기 이착륙 원리 등 공항과 기내에서 느꼈던 크고 작은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다. 2층을 둘러보다 보면 한 가지 의문이 머릿속을 떠다닌다. 더 먼 미래, 인류는 무엇을 타고 이동할까? 비행기 그 이상의 것이 궁금해지는 순간이다. 이에 대한 해답이 3층 ‘항공생활관’에서 펼쳐진다. 이곳에서는 자율비행 드론과 자율비행 개인항공기(OPPAV), 수직 이착륙과 고속비행이 가능한 스마트 무인기 ‘TR-100’ 등 현재 개발 단계에 있거나 완료된 최첨단 교통수단을 전시하고, 미래 인류의 생활상을 예견한다. 이로써 항공의 과거, 현재, 미래를 모두 아우르는 공간이 완성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박물관의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최첨단 항공 시설로 생생한 비행 경험을 제공하는 체험형 교육·문화 공간이다. 관람객은 기내 방송으로만 듣던 안전교육을 전·현직 승무원에게 배워보고, 가상현실(VR)과 360도 회전 장비를 활용한 기기로 공군 특수비행팀 블랙이글스의 부조종석에 탑승하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5곳의 체험관 중 단연 인기인 것은 ‘조종·관제 체험’이다. 인천공항의 관제탑과 보잉 747기 조종실을 재현한 시뮬레이터에서 비행기 이착륙을 관장하며 관제사와 조종사가 되어보는 시간이다. ‘체험’일지언정 생생함은 실제와 견줄 만하다. 조종실 부기장석에서 이륙을 알리는 기장의 사인과 귓가를 멍멍하게 만드는 엔진 소리,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하늘을 온몸으로 느끼다 보면 앉아 있는 곳이 지상이라는 사실을 깜박 잊게 된다. 체험관을 비롯해 어린이 교육 프로그램 ‘항공다빈치클럽’ 등 박물관 곳곳에 아이들을 위한 콘텐츠가 눈에 띈다. 이는 어린이에게 항공인의 꿈을 키워주고자 한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의 소망이 반영된 결과다.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은 “박물관을 찾는 어린이들은 앞으로 항공 기술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며 “아이들이 이곳을 통해 꿈을 꾸고, 이루어가고, 먼 훗날 항공인이 되어 돌아와 꿈을 확인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매시 30분마다 조종사 또는 승무원 출신 도슨트가 전시 해설을 진행한다. 더욱 흥미롭게 관람하고 싶다면 시간을 맞춰 방문하는 것이 좋다. 국립항공박물관 관람 시간 매일 오전 10시~오후 6시, 월요일 휴무 입장료 무료(체험 비용 별도) 가는 길 지하철 5호선, 9호선, 공항철도를 이용해 김포공항역 하차. 김포공항 국내선 1층 국립항공박물관 안내표지를 따라 제2주차장 방면 게이트로 나와서 직진, 박물관까지 약 400m. 또는 국내선 1층 4번 게이트에서 공항순환버스 이용. ※블랙이글스 탑승 체험을 제외한 전 체험은 홈페이지(aviation.or.kr)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 2021-08-25 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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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체력저하? 눈 건강엔? 시니어 영양제 가이드
-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팬데믹으로 건강관리에 대한 필요성이 높아지며 영양제와 같은 건강기능식품(건기식) 열풍이 이어지고 있다. 특히 건강에 대한 우려가 깊은 시니어들이 영양제를 고를 때 고려해야 할 점과 주의사항은 무엇일까. 시중에 판매되는 영양제는 종류가 워낙 다양해 어떤 영양제를 골라야 할지 고민이 커진다. 영양제를 고를 때는 안전성과 기능, 복용 방법을 모두 고려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임상시험을 통해 안전성과 개선 효과가 입증되었는지 먼저 확인해야 한다. 또 식물성 캡슐로 제조되어 목넘김이 편하고 소화가 잘 되는 제품인지도 확인하면 좋다. 그렇다면 체력이 떨어지고 몸 곳곳에 이상이 발생하는 시니어들에게 어떤 영양제가 좋을까. 시니어들이 주로 고민하거나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신체에 필요한 영양제를 소개한다. ① 체력 체력저하는 에너지가 부족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비타민은 음식으로 섭취한 에너지원을 실제 사용하는 에너지로 바꾸는 일을 해 체력 회복을 돕는다. 비타민 중에서도 비타민B 복합제와 비타민C를 복용하면 체력저하와 만성피로에 도움이 된다. 다만 활성비타민은 매일 섭취하지 않는 게 좋다. 피로 회복을 돕는 활성비타민은 분자구조를 변형시켜 몸에서 흡수가 쉽도록 만들어 빠른 효능을 자랑한다. 그런데 이 활성비타민을 매일 섭취하면 체내에서 자연스럽게 이뤄져야 할 신진대사가 고장이 난다. 따라서 비타민을 살 때 활성비타민이 포함된 제품인지 아닌지 확인해야 한다. ② 노안 노안은 수정체가 탄력을 잃어서 생기는 일종의 노화 현상이다. 노안 지연에 도움을 주는 항산화 성분들에는 빌베리추출물, 비타민A, 비타민C가 있다. 또 70대 이상 노인 4명 중 1명꼴로 발생한다는 황반변성의 진행을 막는데 도움을 주는 성분으로는 루테인, 아스타잔틴, 지아잔틴이 있다. ③ 갱년기 스트레스 갱년기가 오는 중년은 감정 기복, 무기력증, 우울과 같은 증상을 겪는데, 이때 복용하면 좋은 영양소들이 있다. 갱년기 여성들은 여성호르몬 감소로 인해 우울증, 무기력증은 물론 안면홍조, 건망증, 수면장애와 같은 복합적인 건강 문제를 겪는다. 이소플라본과 승마 추출물은 여성호르몬 수용체를 자극해 이러한 증상을 완화하는데 도움을 준다. 갱년기 남성은 남성호르몬 저하로 인한 체력저하와 무기력을 주로 겪는데 이들에게는 아미노산 제제와 비타민B, 홍삼을 추천한다. ④ 영양결핍 영양결핍은 식사를 제대로 하기 어렵고, 식사를 해도 소화를 잘 못 시키는 노인들에게서 흔히 발생한다. 이들에게는 아미노산 제제와 멀티비타민 제제가 좋다. ⑤ 뼈와 치아 칼슘은 뼈 건강관리를 위한 필수 영양제로 손꼽힌다. 뼈와 치아가 약해지기 쉬운 중년 및 노년층에게 특히 권장된다. 칼슘과 같이 섭취하면 흡수율이 크게 상승해 시너지를 내는 성분으로는 마그네슘과 비타민D가 있다. 전문가들은 이 세 가지 성분을 ‘칼마디’라고 칭할 정도다. ⑥ 혈압 오메가3는 혈중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고 혈액이 원활하게 흐르도록 도와 혈압을 낮추는 효능을 가진다. 중년 이후 심혈관계 질환 위험을 감소시켜 40대를 넘어서면 반드시 챙겨먹어야 할 영양제로 알려져 있다. 나이가 들수록 여러 종류의 약을 먹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영양제를 고를 땐 전문가 상담을 받는 것이 좋다. 신현영 한양대학교 명지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영양제는 다다익선이 아니라 과유불급”이라며 “영양제를 여러 알 복용하거나 기존의 복용하던 처방약이 있는데 동시 복용하면 약물 상호작용으로 인해 효능이 증가하거나 감소, 심하면 부작용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예컨대 혈압을 낮추는 효능을 가진 오메가3는 협심증이나 심근경색 치료 시 먹는 아스피린이나 와파린과 같은 혈액응고억제제와 만나면 혈액이 지나치게 묽어질 수 있어 함께 섭취하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 영양제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진정한 건강을 위해서는 영양소가 풍부한 식사, 규칙적인 운동, 충분한 숙면 등 건강한 생활습관이 제일 중요하다. 건강한 일상생활과 함께 부족한 영양소를 영양제로 보충하는 건강한 시니어의 모습이 기대된다.
- 2021-08-18 18: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