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李御寧·83) 전 문화부장관은 언제나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싶어지는 분이다. 이 시대의 멘토, 아무도 따를 수 없는 기억장치, 외장하드다. 어제 만났더라도 오늘 다시 만나면 새롭고 신선한 이야기가 샘솟는다. 그사이 언제 이런 걸 새로 길어 올렸을까 싶을 정도로 그에게는 늘 말이 차고 넘친다. 스스로 ‘아직도 비어 있는 두레박’, ‘여전히 늘 목이 마른 두레박’이라고 말하고 있을 만큼 새로운 ‘샘’에 대한 열정과 욕구가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사회적 자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지금은 한중일비교문화연구소 이사장직만 유지하고 있는 그를 만나 AI(인공지능)와 산업혁명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문명과 시니어 세대의 삶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이 글은 10월 중순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의 대면 대화와 그 뒤의 이메일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우선 시니어의 관심사인 건강문제부터 질문했다. 올해 83세인 이 이사장은 종전 그대로 활기차게 말했지만 4년 전 병을 만나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투병이나 치병(治病)이 아니라 병과 함께하는 친병(親病)을 말하고 있었다.
요즘 어떠신가요.
“글 쓰는 사람들이 병이 나면 글을 못 쓰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불행한 일은 글로 쓸 수 있으니 불행까지도 재산이 됩니다. 그러나 병은 그렇지 않지요. 병이 나면 서양에서는 구술을 많이 하지만 우리말은 논리적 바탕이 약해 말한 걸 풀어놓으면 주술(主述)관계가 안 맞고 비논리적인 경우가 생깁니다. 그래서 구술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나는 컴퓨터를 일곱 대나 가지고 있는데 병이 나니 그게 다 소용이 없더군요. 우선 키보드를 치기 힘들고 모니터 보기도 힘들고. 그래서 전자펜으로 필기를 해 텍스트 파일로 바꾸고 있어요. 그런데 나는 조사(助詞) 하나 가지고 온종일 씨름할 정도로 까다로운 사람인데 불편할 수밖에 없지요. 병이 나자 글도 못 쓰고 구술도 못 하고 써야 할 글은 많은데 아무것도 못 쓰니까 병 자체가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대로 글을 쓰는 재산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부디 건강하세요. 나처럼 병으로 시달리지 마시고.”
병의 문학적·문화적 의미가 크군요.
“사람들은 병이 나면 피해요. 피병(避病)이야. 병은 자랑하라지만 실제로는 직장인이건 정치인이건 밝히면 손해니까 속이고 피하지요. 그런데 지병(持病)이라는 말이 있잖아? 휴대전화처럼 병을 갖고 다니는 거지요. 옛날 선비들의 글을 보면 ‘강호(江湖)에 병이 깊어’ 이렇게 읊거나 답장에 꼭 병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늙고 병든 몸이라는 걸 내세워 정치적 수난을 피하고 정쟁의 위험으로부터 피했어요. 병을 자기 재산으로 쓰는 사람들이 있더라는 거지. 그래서 한국에서는 병이 갖는 문화적 의미가 큽니다. 당쟁 사화(士禍)가 많았던 시절, 병이 오히려 목숨을 지켜준 일이 많았지요(웃음). 근데 병은 원수도 그런 원수가 없어요. 내가 건강했더라면 하고 땅을 쳐도 시원찮아. 그런데 병까지도 인간을 이길 수 없게 하는 방법은 친구로 삼는 거지요. 적으로 맞서 싸우면 병에 이길 수 없어요.”
그동안 그런 마음을 작품으로 쓰신 게 있으면 소개해주십시오.
“많이 썼지요. 그런데 다 메모 정도이고 알파고 때문에 쓴 시 하나가 생각나는 군요.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다는 내용입니다.”(‘이어령의 근작 시’ 참고)
이사장님은 은퇴를 선언했지만 정보시대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 거지요?
“은퇴 후 스마트폰을 없앴으면 신문사 전화를 안 받았을 것이고 그랬으면 알파고에 대해 전화 인터뷰를 하고 봇물 터지듯이 라디오 TV에 나가 말을 하지 않았겠지요.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의 저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는 은퇴에 관한 책 한 권을 썼지만 정보시대에는 은퇴가 불가능합니다.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지요. 그래서 TV, 인터넷, 휴대전화 일체를 일정 기간 플러그 오프하는 것을 정보단식이라고 합니다. 요즘 아이들에게 영화배우 사진을 보여주고 그 표정에 나타난 감정을 물으면 제대로 읽고 대답할 줄 아는 아이가 반도 안 된다고 해요. 하지만 스마트폰을 빼앗고 1주일 동안 캠프생활을 하게 한 뒤 같은 테스트를 하면 훨씬 능숙하게 사진 속 인물의 감정을 읽어요. 스마트폰 대신 서로의 얼굴을 보고 감정을 나눈 결과죠. 사람의 안면을 보지 않고 화면을 보는 시대의 아이러니라 할 수 있습니다.”
혹시 자찬명(自撰銘) 같은 글을 써놓으신 게 있는지.
“그런 건 없습니다만 스스로 묘비명을 쓰라고 한다면 ‘평생 퍼내도 퍼내도 항상 갈증을 느껴 우물을 판 사람’이라고 말하겠어요. 영원히 두레박의 갈증을 가지고 평생 살아온 사람. 두레박은 늘 비어 있어야 물을 퍼낼 수가 있지요. 이 비어 있는 것이 갈증입니다. 영원한 갈증이지요.”
스스로 우물을 파는 사람이라고 말해오셨는데, 요즘 어떤 우물을 찾고 있습니까?
“지금 파고 있는 우물은 아주 특이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판 우물은 주로 글로, 펜으로 판 것입니다. 문학평론, 에세이, 소설, 희곡, 그리고 시나리오까지 많은 땅에서 우물을 파왔죠. 그런데 이번에는 글이 아니라 말입니다. 이야기꾼이 되는 것입니다. 이젠 문학평론가나 인문학자가 아니라 나무꾼처럼 이야기꾼이 되는 것이지요. 책을 읽기 전 어렸을 때 나는 할머니, 어머니로부터 옛날 얘기를 듣다가 잠들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건 꼬부랑 할머니가 꼬부랑 지팡이를 짚고 꼬부랑 고개를 넘어가는 이야기였지요. 꼬부랑 할머니가 한 고개도 미처 넘기 전에 잠이 들었지요. 꼬부랑꼬부랑, 꼬부랑길을 따라 고개를 넘다 보면 어느새 잠이 듭니다. 이제는 내가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줄 차례입니다. 팔십이 지난 이제야 그 꼬부랑 할머니가 한국인인 우리를 낳아주신 생명력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힘없어 보이는 그 할머니가 바로 보릿고개를 넘고, 나운규와 같이 일제 압박시대에 아리랑고개를 넘고, 전쟁과 가난과 모든 수난의 고개를 넘어온 영웅이었던 것이죠. 노자가 ‘곡신불사(谷神不死) 현빈(玄牝), 즉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이를 현묘한 암컷이라고 한다’고 했듯 그것이 바로 할머니의 생명력의 원천이었던 거죠. 그리고 그 지팡이는 미사일이나 원폭이 아니라 생명력을 지탱해주는 자연의 힘이었던 겁니다. 마녀의 요술지팡이도 아니고 신선의 지팡이도, 개화기 때 개화장(開化杖)이라고 했던 서양의 단장도 아니었던 겁니다. 한마디로 폭력의 몽둥이가 아닙니다.”
‘한국인 이야기’를 쓰고 계신다는 거군요. 신문에도 연재하고 방송에서도 들려줬던 그 글을 마무리하시는 건가요?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시즌1밖에 쓰지 못한 ‘한국인 이야기’를 전부 정리하면 12권이 됩니다. 물론 그것을 정리 중이지요. 하지만 전혀 새로운 이야기의 우물 파기는 알파고에 관한 것입니다. 왜 하고많은 땅 다 두고 일본, 중국 제쳐놓고 구글이 개발한 인공지능 알파고가 서울 광화문에 와서 전 세계에 AI 시대를 선포했겠습니까. 바둑을 두기 위해 온 게 아니라 알파고는 바로 우리 호주머니 속 스마트폰의 혁명을 일으키고 자율자동차가 되어 세계 모든 도시의 길을 달리게 될 겁니다.
그뿐이 아니죠. 병실의 환자들 머리맡에, 소외된 장애인들 곁에, 전쟁과 테러의 현장이나 폭력의 골목 속에서 알파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인류를 위협하는 것이 되느냐, 또는 꼬부랑 할머니의 지팡이처럼 인류를 도와주는 기능을 갖게 될 것이냐 그것이 한국인 손에 달렸다는 거죠. 할머니의 꼬부랑 지팡이는 곤봉이 아니기 때문이죠.”
왜 하필 알파고에 대한 이야기입니까?
“이유가 있어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학을 떠날 때의 내 마지막 강의가 바로 인공지능에 관한 것이었지요. 당시 미국의 컴퓨터과학자 빌 조이의 ‘왜 미래는 우리를 필요로 하지 않는가(Why the future doesn't need us)’라는 글을 학생들에게 읽히고 리포트까지 받았어요. 그 글은 ABC(Atom, Bio, Chemical) 기술(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화생방 기술이죠)이 21세기에는 GNR(Genome, Nano, Robotics)로 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어요. 인공지능, IT(정보기술)가 이 기술들과 결합되면 인류는 파멸할 것이라는 경고였죠. 그런데 레이 커즈와일이라는 미국 기업인은 그러한 시대를 싱귤래리티(Singularity)라 부르면서 2045년이면 천지개벽해서 인간이 불로장생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커즈와일이 바로 알파고를 만든 구글의 AI 분야에서 고문직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AI는 과학기술이 아니라 인류 문명의 문제이고 그 기술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특히 바둑권 문화인 아시아에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을 위한 한국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지요.”
AI와 4차 산업혁명 등은 아주 중요한 화두이지만 시니어 세대는 낯설고 어려워합니다. 이런 시대에 어떤 생각과 자세로 살아야 할까요.
“4차 산업혁명은 생각 혁명으로 연결돼야 합니다. 그동안 전문 분야에서 인간처럼 생각하는 도구는 일부 있었어요.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해서 탄도탄 발사 거리를 계산하는 식으로 군사용으로 사용되고, 이어 기업에서 물자를 만들 때 컴퓨터를 썼어요. 군에서 IT나 컴퓨터를 사용하면 강병(强兵)이 되고, 기업이 사용하면 부국(富國)을 이루었던 거지요. 그런데 IT를 금융과 연결해 금융공학을 만들어 파생상품을 판 결과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이제 산업사회와 부국강병의 패러다임은 끝났습니다. 4차 산업혁명에서 노동과 작업은 인공지능(AI)이 합니다. 사람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검색에 매달리지 말고 사색을 해야 합니다.”
AI를 잘 활용해야겠군요. 시니어 세대일수록 백세건강, 수명연장을 위한 인공지능의 기여에 관심이 높습니다.
“알파고는 사람보다 글을 잘 쓰지 못합니다. AI가 효도를 하고, 사랑을 알겠습니까. 그러나 AI 시대의 의학은 치료 위주에서 병을 미리 가려내주고 발병의 위험을 알려주는 예방의학, 미리 수술해주는 선제의료, 나아가 개인별 건강을 설계해주는 맞춤의학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부작용도 참 많지만 좋은 목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인공지능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지능이 문제입니다. AI가 발달했다고 무서워할 게 없습니다. AI가 하지 못하는 심성이나 덕성, 아름다움, 봉사를 사람이 하면 됩니다. 이제 가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합니다.”
지금까지 늘 즐겁게 일을 해오셨는데, 그런 자세야말로 은퇴 세대, 시니어 세대에게 절실하다고 생각됩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지금까지 누가 시켜서 일을 한 적이 없어요. 다 좋아서 한 거지요. 장관도 안 한다고 고사하다가 초대 문화부장관이라고 해서 했습니다. 각종 이벤트를 많이 했는데, 먹고 놀면 안 됩니다. 놀면서 먹어야 합니다. 내가 돈벌이하자고 책 쓰고, 88서울올림픽을 하고, 교수를 했으면 다 실패했을 겁니다. “지지자불여호지자 호지자불여락지자(知之者不如好之者 好之者不如樂之者,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공자님 말씀대로입니다. 인터넷 시대의 지지자(知之者)는 인간이 아니라 AI입니다. 지지자 위가 호지자(好之者)이고, 또 그 위가 낙지자(樂之者)입니다. 바로 지호락(知好樂)이지요. 연애가 노동이라면 비 맞아가며 연인을 기다리겠어요? 골프가 땅을 파는 노동이라면 18홀을 돌 마음이 들겠습니까? 이 지호락을 추구하면서 임도 보고 뽕도 따는 마음과 자세로 사는 게 중요합니다.”
이어령의 근작 시
차멀미가 나면 내리시게.
그게 자동차라면 길 이름 묻지 말고
그게 기차라면 역 이름 알 것 없이
얼른 내리시게나.
그런데 그게 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게 비행기멀미라면 어쩌시겠나.
그래도 눈 딱 감고 뛰어내리시게나.
바다 속이면 발광어(發光魚)가 되고
하늘이라면 별똥별이 되겠지.
그러나 묻지 마시게.
그게 TV, 인터넷, 정보멀미라면 어쩌시겠나.
옛날 사람들은 ‘사람’멀미가 나면
산림 속으로 숨었지만
정보시대에는 숨을 곳이 없으니
황진이의 시조 한 수라도 읊어보시게.
‘나도 몰라 하노라’
중소기업 중앙회는 분기별로 협동조합이나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오전 7시부터 조찬회를 겸한 강연을 한다. 12월 6일 포럼의 주제는 ‘패권과 행복의 비밀’이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은 지난번 강의 ‘은퇴가 없는 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듣게 되었다. 김 교수 강연의 특징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제와 연구로 경제와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해주는 데 있다.
포럼의 주제도 그러하다. 국가 경제가 발달한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과 후진국인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기업가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고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선진국에서 사업이 훨씬 더 잘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라의 기업가나 국민은 후진국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 추구라면 우리는 과거에 왜 불행했는가? 김 교수는 이 질문으로 강의의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서양보다 기술력이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가까운 나라 일본과 똑같이 인식하면서도 대처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인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강조했다. 즉 일본은 19세기 중반 뛰어난 기술력을 앞세운 외세의 개방 압력을 받았다. 요시다 쇼인과 같이 대양이(큰 서양 오랑캐)를 인정하고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정책으로서 산업혁명을 이룬 전기를 마련했지만 우리나라는 위정척사를 앞세워 척화비를 세우고 과거 성리학에 집착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람들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눈 대분기점이었다고 강조했다. 제1차 산업혁명 때 영국이 석탄, 금속, 직물 부문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면 제2차 산업혁명 때는 독일과 미국이 화학, 전기, 강철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산업혁명을 주도한 나라가 지배자로 등극한 사실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처음 언급한 제3차 산업혁명은 1970년대 ICT와 신재생에너지 기술에 의해 일어났고 오늘날은 이른바 클라우드 슈밥이 말한 제4차 산업혁명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Bio Technology, Nano Technology 등 초연결 기술이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1963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로 125개 국가 중 101위에 머물렀던 우리나라는 공업인구 2.7%, 농업인구 68%였다. 이제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맥킨지 보고서는 새로운 성장 방식을 창조한 한국 스타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 대한 맥킨지 보고서 내용은 다소 부정적이다. “북핵보다 한국 경제가 위기다”라고 썼고 “1997년 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에 잘못된 진단과 처방은 한국경제의 동력을 상실시켰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1차 산업혁명이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옮겨가는 1차 대분기점이라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은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 넘어가는 2차 대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산업혁명은 어떻게 오는가? 김 교수는 시장에서 정부와 기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할 때 저절로 온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산업혁명, 네덜란드의 산업혁명 등이 그런 사례로 언급된다며 4차 산업혁명을 위해 현재 부처에 소속된 일반 행정관료(Generalist)를 전문정책관료(Specialist)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젊은 엘리트의 힘을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대거 집중시켜 산업 역군으로 써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세계화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켰듯이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기업들과 함께 나아간다면 2차 대분기점에서 선도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는 김 교수의 말은 공감이 갔다. 강의의 결론은 “행복은 기업과 기술에서 나온다” 는 말에 집약되어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의 근원은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공학을 전공한 김 교수의 행복에 대한 시각은 그만의 특성을 잘 함축한 말이라 아주 인상적이었다.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문명의 역사를 파헤친 명저 의 저자 유발 하라리는 최근작 를 통해 현생인류를 대체해 신이 되고 싶은 새로운 인류의 미래상을 그려내 충격을 안긴 바 있다. 오늘날 4차 산업혁명의 키워드로 일컬어지는 인공지능(AI), 유전자조작 등의 신기술을 통해 그동안 신의 영역이었던 생명체 창조를 인간도 해낼 수 있기에 호모 사피엔스는 새로운 신적 인류로 진화해 갈 것이라는 예언이다.
사실 그러한 징조는 이미 곳곳에서 확인되고 있다. 작년도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에서 우리는 인공지능의 놀라운 능력에 경악했다. 유전자가위라는 신기술은 인류의 유전병을 미리 차단하여 생명 연장에 기여할 것이고, 우리가 먹는 식재료도 유전자변이(GMO)를 통해 생산량을 획기적으로 늘려 인류의 기아해방에 기여하리란다. 인류는 생명체를 조작하고 궁극적으로 창조하는 데까지 나아갈 것이다.
인간이 창조하는 인공지능에 대해서는 낙관과 비관이 교차하고 있다. 낙관주의자들은 인공지능은 어차피 인간의 보조 수단에 불과하다고 하고, 비관주의자들은 언젠가 인간을 넘어서는 순간이 오고 그 이후는 통제가 어렵다고 걱정한다. 스티븐 호킹 박사 같은 이는 “AI는 인간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단언한다. 미래를 상상하는 많은 SF 영화들도 대부분 비관주의에 가세한다.
그런데 이와는 전혀 다른 시각의 영화가 있다. 바로 다. 이 영화는 1982년 그러니까 무려 35년 전에 나왔던 의 속편 격인데 인간이 창조한 인조인간 리플리컨트를 통해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꽤 진지한 영화다. 놀라운 것은 지금이야 인공지능이 실제로 실현되고 있어서 어느 정도 공감이 가지만, 1982년에 이런 상상을 했다니 리들리 스콧 감독은 천재다.
드니 빌뇌브 감독은 이 영화 곳곳에 전편에 대한 오마주를 심어 리들리 스콧 감독에 대한 존경을 표한다. 스토리도 상당 부분이 이어지기 때문에 전편을 보지 않은 관객은 이해하는 데 불편이 따른다. 보통 영화계에 ‘형만 한 아우 없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로 성공하는 속편이 드문데 이 영화에 대한 평가는 그리 박하지 않다. 다만 너무 길어 중간에 졸 수도 있다는 점이 약점이다.
리플리컨트 K(라이언 고슬링)는 도망친 리플리컨트를 색출해 사살하거나 붙잡아 오는 것이 임무인 블레이드러너다. 본래 전편에서 ‘넥서스6’ 모델은 수명이 4년으로 설정되어 있어서 그들의 수명 연장의 꿈과 좌절을 다루었다면, 이 영화에서는 만약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생식능력을 갖게 된다면 그들을 인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니까 역으로 인간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인 셈이다.
K는 수사 중 임신의 흔적이 있는 리플리컨트의 유골을 발견하면서 격랑에 휩쓸린다. 만약 이 사실이 퍼지면 그들을 자극해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비밀리에 수사를 진행할수록 자신이 그 아이라는 심증을 굳혀간다. 마침내 아버지로 추측되는 늙은 데커드(해리슨 포드)를 만나 자식이 아님을 알았다. 데커드를 처치하라는 임무였지만, 그를 살려주고 딸을 만나게 한 후 눈을 맞으며 숨진다.
너무 길어 짧은 지면에 요약하기 불가능해 큰 줄거리만 소개했지만, 사실 스토리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것은 지구를 황폐하게 만든 인간들은 별로 보이지 않고 온통 리플리컨트로 의심되는 존재들이 등장하여 인간적인 고뇌를 드러낸다는 사실이다. 그들이 보여주는 혈육의 문제, 정서적 공감, 역경에 처한 상대에 대한 도움과 배려 등 따지고 보면 모두 우리 인간이 잃어버린 가치가 아닌가.
인류는 이제까지 자연 속의 상대들은 대부분 정복했고 더 이상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들이 만든 인조인간 때문에 고뇌하고 그들을 통해 잃어버린 가치를 이야기하는 설정이 흥미롭다. 말하자면 인간은 창조주가 되고 싶어 했으나 창조한다는 일이 얼마나 고단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인공지능의 미래도 그러하리라. 역시 피조물로 사는 게 마음 편하다.
서강대 언론대학원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동문회가 11월 3일 저녁 8시 제1회 을 개최한다.
서강대 언론대학원 설립 25주년을 기념하여 열리는 이번 포럼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스포츠·엔터테인먼트’를 주제로 서강대학교 가브리엘관 대강의장(GA109호)에서 진행된다.
김균 서강대 언론대학원장의 환영사를 시작으로 블러썸 엔터테인먼트 주방옥 대표, 전직 프로농구 선수 서장훈, BMC 크리스권 대표, 성신여대 현대실용음악학과 박병건 교수, 리코스포츠 이예랑 대표가 강연자로 나선다.
블러썸 엔터테인먼트의 주방옥 대표는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비즈니스의 발전을 위해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노력하자는 취지로 이번 포럼을 개최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은 스포츠·엔터테인먼트와 관련된 각 분야 전문가들의 강연을 무료로 들을 수 있으며 참가 신청은 온라인(https://onoffmix.com/event/117344)을 통해 가능하다. 스포츠·엔터테인먼트 동문회는 이번 포럼을 시작으로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의 다양한 비즈니스 모델을 정착시키기 위해 지속적으로 포럼을 진행할 계획이다.
영화 에서 주인공(스티브 맥퀸 분)이 꿈속에서 무죄를 주장한다. 재판관은 이렇게 판결한다. “너의 가장 큰 죄는 인생을 낭비한 죄다.” 영화 대사이지만, 인생을 살면서 공감할 수 있는 말이다.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지 고민해볼 필요성이 있는 시대를 살고 있지 않을까? 마냥 바쁘게 살다 보면 어느 순간 제대로 살고 있는지 의문이 갈 때가 있다. 너무 사소한 일에 매달리기도 한다. 때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간다는 단순한 의미에서 세태를 받아들인다. 그중의 하나가 SNS 사용에 너무 많은 시간을 쓰고 있다는 점이다. 혹자는 SNS 친구가 8000여 명이라고 자랑하기도 한다. 그 많은 친구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SNS 사용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자기의 SNS 계정에 관심을 보이지 않으면 자기도 상대에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KISDI) 조사(2017, 1)에 따르면 스마트 폰 사용시간이 20~30대는 2시간, 40대 1시간 30분, 5060대 1시간 40분이다.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 24시간 중 잠자는 시간, 식사시간, 화장실 가는 시간 등 생리적 필수 시간과 근무시간, 은행 가는 시간 등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시간을 제외하면 하루에 사적으로 쓸 수 있는 시간은 4시간 정도에 불과하다. 자기 인생을 위해 써야 할 그 시간 중에서 절반인 2시간을 스마트 폰 사용에 할애함은 생각해 볼 문제다. 서양인의 격언에 이런 문구가 있다. “나쁜 포도주를 마시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다.” SNS 사용이 나쁜 일은 아니어도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내용을 단순히 옮기는 일이라든지 상대방이 이미 알고 있거나 바라지 않는 정보를 생각이 없이 퍼다 나르는 일이 그렇다. 소통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카톡이나 밴드에서도 비슷한 일이 비일비재하다. 너무 많은 시간을 불필요한 데 쓰고 있다. SNS 사용의 장점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사용하지 않아도 될 일에 시간을 쓴다면 귀중한 인생을 낭비하게 된다.
4차 산업혁명의 변화가 눈앞에 다가온 오늘날 전문가로 성공한 사람들은 스마트 폰 사용시간을 최소화하고 있다는 점을 관심 있게 보아야 한다. 인공지능의 세계적 전문가이며 의 저자로 유명한 인공지능의 세계적 전문가 유발 하라리 교수는 아예 스마트 폰을 사용하지 않는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다. 카카오 이사회 의장 김범수 씨도 비슷하게 산다. “나는 카카오톡 등 SNS를 최대한 안 한다. 검색에 의한 지식과 정보는 잡식이기 때문이다”라 하였다. 대신에 “매일 1시간 정도를 온전히 책 읽기에 할애한다.”라고 말한다. 인간은 주어진 인생을 제대로 쓸 의무가 있다. 의무를 소홀히 한다면 죄를 짓는 바와 진배없다. 영화 대사처럼 인생을 낭비하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SNS 뿐만 아니라 과연 우리는 인생을 낭비하고 있지 않나 되돌아 볼 필요가 있다. 수명이 길어졌다고는 하나 우주의 억겁 시간에 견주면 극히 짧은 인생이다. 낭비할 시간이 없다.
“는 좋았어. 너무 신비스럽고 재밌으니까. 아홉 살 때 봤는데, 지금 봐도 재밌어. 김산호 작가는 나와는 띠동갑인데 대단한 분이야.” 진심에서 나오는 우리나라 최초의 슈퍼히어로 만화인 에 대한 거듭된 찬사. 현재까지 이어지는 자신의 추억에 대한 감탄을 전하는 ‘ 동호회 회장’이자 시사만화계의 전설인 박재동(朴在東·65) 화백의 모습에는 세월을 고스란히 관통해온 천진함이 느껴졌다. 그 자신이 만화가이지만 그 누구보다도 만화를 많이 읽으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다운 모습이었다. “만화가 얼마나 재밌어요? 만화에 안 빠지는 사람은 이해할 수가 없어.”
박재동 화백은 만화가게를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어릴 때부터 만화에 빠져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원체 책을 좋아하셨죠. 원래는 서점이었는데 만화가 늘어나며 만화가게가 됐어요. 얼마나 행복하겠어. 집이 곧 보물섬이었으니 남들이야 뭐라건, 멋진 상상과 그림으로 가득한 만화책들을 매일 원 없이 볼 수 있다는 게 무지 행복했어요. 그 만화들에서 받은 영향이라는 건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전 지금도 그때 열광케 했던 만화가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문화예술이 주는 가치를 이젠 만화가 채워주기 시작한 거죠.”
등록금이 싸서 서울대를 가다
그러나 그가 자랄 당시만 해도 만화에 대한 편견은 강했다. 사실 그때에 비하면 세상이 수십 번은 변한 지금도 만화에 대한 시선은 그리 고운 편만은 아닐 정도니, 그 편견의 역사적 깊이를 짐작할 수 있다.
“만화를 못 보게 하는 어르신들이 많았지. 하지만 만화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공부도 잘해요. 그 자체가 독서거든.”
만화가 곧 공부가 된다는 말은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지금은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리라.
“그림을 그릴 수 있는 대학교면 어디든 좋았지. 그런데 서울대를 가야 내가 대학을 다닐 수 있었어요. 왜냐하면 등록금이 쌌거든.”
전교 1등과 전교 꼴찌를 넘나들다
서울대를 들어갔을 만큼, 그는 공부를 잘했다. 전교 1등도 해본 적 있다. 그러나 그는 좀 독특한 전교 1등이었다. 전교 꼴찌(꼴등)를 해본 적도 있기 때문이다.
“공부 잘하는 애들이 내가 꼴찌하는 걸 보고 이해를 못했지. 별세계 아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꼴찌도 기술이야. 천운이 있어야 해.”
그는 심지어 전교 꼴찌를 ‘쟁취하기 위해’ 계획적으로 꼴찌가 된 적도 있었다.
“나랑 꼴찌를 다투는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에게 대신 시험을 봐달라고 했더니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렇게 하면 이젠 자기가 꼴찌가 아닐 수 있으니까. 우선 내 책걸상을 없앴어. 누구도 모르는 곳에 숨겨놨지. 그렇게 숨겨놓으면 선생님이 볼 때 결석이 없단 말야. 그리고 그 꼴찌 친구가 ‘선생님, 답지 하나 모자릅니다’라고 하면 선생님이 그랬나 하며 답지 한 장을 더 줘. 그러면 그 친구가 자신의 답안지와 똑같이 내 답안지를 쓴 후에, 자신이 확실히 아는 것도 일부러 틀리게 쓰는 거야. 그렇게 내가 꼴찌를 쟁취했었지(웃음).”
그 누구도 원치 않았던 꼴찌를 차지한 ‘괴짜’ 박재동의 일면이다.
“아버지는 내 성적이 어느 정도였는지 몰랐어요. 우리 반에 우리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인 애가 있었거든. 걔한테 통지표에 도장을 찍어 달라고 부탁하고 그걸 학교에 낸 거야. 그래서 내 성적 통지표가 아버지에게 간 적은 한 번도 없었지. 그런데 전교 꼴찌가 되니 학교에서 아버지를 호출했어.”
자신이 전교 472명 중 472등이라는 말을 들은 아버지는 별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어도, 말을 안 해도 알 수 있었지. 속으로 화를 삭이신다는 걸.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그래 ‘꼴찌는 너무 했다, 공부를 해야겠다’ 결심하게 됐어.”
‘진짜’ 꼴찌와의 만남
전교 꼴찌를 경험한 그에게는 나름의 ‘꼴찌 철학’이 있었다. 꼴찌인 아이들을 봐도 그는 자신 또한 꼴찌였기에 다가갈 수 있었다고 말한다.
“꼴찌한 아이에게 ‘저 새끼, 왜 맨날 꼴찌해?’ 하는 마음이 없거든. 되려 친구처럼 친근한 생각이 들지. 그리고 전교 꼴찌였던 나는 그놈한테 뭐라고 말을 할 수 있는 거야. 그런 아이들에게는 꼴찌 아닌 사람이 말하면 먹히지 않는 게 있는 것이고.”
그리고 사실, 그는 ‘진짜배기 꼴찌’에 대한 묘한 콤플렉스가 있었다.
“내가 어른이 되어 서울민예총에 갔을 때 거기서 전국 꼴찌를 만난 거야. 난 전교 꼴찌라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전국 꼴찌였지. 그런데 이 친구가 정말 사람이 좋아. 독특해. 나하고 뭐가 다르냐 하면, 나는 꼴찌를 했지만 진정한 꼴찌는 아니야. 먹물이지. 그래서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을 집으로 다시 돌아가게 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사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는 그 아이들을 존중하지 못하는 거지. 그런데 그 사람은 그런 생각 자체를 안 해. 가출한 아이들을 만나면 그냥 친구로 지내. 그게 훌륭한 거야. 진정한 전국 꼴찌야. 하지만 나는 수법을 써서 꼴찌가 됐으니 평범한 사람이지.”
고 김근태 의원은 노동운동을 하면서도 자신이 노동자들과 완전히 일치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문제로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그 자신이 서울대학교 출신의 엘리트였기 때문이다. ‘나는 진짜 꼴찌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박재동의 고민도 그와 비슷했다. 그것은 그들이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이들과 동반자로서의 삶을 추구하기에 안고 갈 수밖에 없는 화두이기도 했다.
시사만화의 전설로 거듭나다
‘시사만화는 박재동의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평을 받는 그이지만, 막상 그는 만화가가 될 생각이 그리 없었다.
“미대를 나와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민중미술가가 됐지. 그런데 민중미술은 메시지가 강해서, 저렇게 무섭게 하는 것보다는 만화가 낫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어.”
그러나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장 만화를 시작하지는 않았다. 교사로서의 삶에 푹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미술교사를 하는데 너무 행복한 거야. 아이들에게 사랑을 주면 백 배로 돌아와.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극치감을 느꼈지. 그런데 나는 그림을 그려서 극치감을 느끼고 그림으로 인생에 승부를 걸어야 하는 사람인데, 교육으로 극치감을 느끼면 그림이 필요 없어지는 것이니까. 그림을 안 그려도 불안하지 않다는 게 불안한 거야. ‘어유, 큰일 나겠다’ 싶어 학교를 그만뒀어.”
그는 학교를 그만둔 후 출판사 일러스트레이터로 일했다. 그러면서도 그림을 ‘죽도록’ 그리고 싶었다.
“한겨레가 창간하면서 시사만화가를 모집했지. 후배가 해보라고 했고 응모를 했는데 된 거야. 그때만 해도 내가 만화가가 된 건 만화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시 노태우 군사정권에서 민주화운동을 한다는 개념이었어. 그러다 보니 8년 동안 했는데, 하다 보니 내가 이 일에 맞다, 잘한다는 생각이 들었지. 덕분에 진짜로 그림을 죽도록 그리게 됐어(웃음).”
시사만화를 그만둔 그는 현재 다시 한 번 교육자로서의 삶을 이루고 있는 중이다. 그에게 이상적인 교육이란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교육은 뻑뻑한 게 있지. 선생이 어떤 수업을 해야 할까를 고민하지 아이들에게 뭔가를 배우겠다는 생각은 별로 못해. 그건 아이를 정말로 존중하는 게 아닌 거지. 새로운 시대의 교육은 아이들을 믿고 맡겨야 해. 좋은 교육을 하려면 선생들끼리만 모여서 토론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함께 얘기를 해야 한다고. 과거 교육은 어떠했고, 현실적으로 기업에서는 이런 것을 원하고, 4차 산업혁명은 이렇고, 입시는 이런 식으로 되어 있고 등등 이 모든 것을 아이들과 공유하고 얘기를 해야 한다고 봐.”
그는 또한 아이들이 일찌감치 자신의 직업을 확정해 그것에 몰두하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사를 할 사람은 초등학교 때부터 계속 장사와 관련된 공부를 하는 거야. 장사 외의 다른 과목들은 교양 삼아서 배우면 되잖아. 장사를 할 게 확실한데 영어가 필요하면 영어를 배우도록 하면 되는 거고. 의사가 되어야겠다면 의사 공부를 어릴 때부터 해야 해. 그리고 그걸로 돈 버는 경험도 해야 해.”
무언가에 푹 빠져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많아졌으면 하는 것이 그의 바람이다.
교육과 통일에 자신을 바치고 싶다
예순 중반을 넘었지만 교수 박재동이 아닌 인간 박재동은 여전히 미래를 향한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 개인적인 꿈은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섞인 것을 만들고 싶어. 그쪽에 나같이 ‘산만한 놈’이 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이라는 영화를 만든 배용균 감독 때문에 한때는 영화배우가 될 뻔도 했지(웃음).”
그는 일각에 있었던 교육감 제안에 대한 얘기에는 손사래를 쳤다.
“그거 내 절대 안 하지. 그걸 하면 난 완전히 다른 길로 가는 거니까. 그래서 ‘난 안 한다, 작품할 거다’라고 대답해줬어. 그런데 그쪽에서 ‘아니, 선생님. 아이들이 행복한 얼굴이야말로 선생님의 작품 아닌가요?’라고 되묻는데 어휴 쒸…(웃음).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아니야. 고사했지.”
박재동은 천생 자유인일 수밖에 없다. 장르에 대한 편견 없는 자유와 자신의 활동을 자신이 온전히 다루고자 하는 자유. 그리고 그 자유로 이루고 싶은 큰 꿈이 있다.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자기를 찾아서 자립해서 살 수 있는, 당당하게 살 수 있게끔 해주고 싶어. 그리고 남북관계가 잘돼서 막힌 혈이 확 뚫리면서 새로운 꽃이 피게끔 하는 것.”
당장은 특별한 일은 없지만 교육과 통일을 위해 자신을 던지고 싶다는 그의 말은, 그의 육십 년 넘는 만화 사랑만큼이나 오랫동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게 만들었다. 자유로운 문화예술인으로서 묵묵히 자신만의 깊은 우물을 파고 있는 그의 모습이 우회해서 드러내고 있듯이.
“꿈이 많아서 힘들어, 하지만 그래서 행복해요.”
한국인들은 기계처럼 일해왔다.
그게 한국을 2차 산업의 승자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계처럼 일하는 인간은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다.
인간으로의 회귀,
그것은 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멍청해져야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보다 양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패가 용인되는 사회,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
똑똑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사회,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창조적 사회이며,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한국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다고 믿고 싶다.
30대 중반인 아들이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야! 물무지개다!"
감탄하며 어린 아들의 고사리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주 작은 물웅덩이에 차에서 떨어진 기름이 번져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였다. 아들은 필자를 깨우쳐줬다. 사물을 다른 눈으로 보라고.
"엄마 아까부터 올챙이들이 계속 내려오고 있어요."
"어디? 어! 정말이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버스 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정말 고물고물 움직이는 올챙이 같았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한 날이었다.
어린이는 모두 천재이고 시인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모두 아름답고 신기하다.
어린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엄마 나 내릴래."
"왜?"
"엄마 힘들까봐."
아들이 네 살 때였다. 퇴근해 힘없이 누워 있는 아들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부랴부랴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그런 말을 해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소에도 곰살맞은 아들은 필자가 안아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자를 더 꼬옥 안아주곤 했다. 아픈데도 엄마를 걱정해주던 아들. 아들의 고운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가을 밤길
귀뚜라미 귀뚤귀뚤 우는 밤길을
나 혼자 걸어봅니다.
소리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소리를 쫒아버릴까봐 조심조심
나 혼자 가을 밤길을 걸어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쓴 시다.
'소리를 밟을까봐'라는 탁월한 표현에 감탄해 동료 국어선생님들께 보여드리니 타고난 시인이란다.
"엄마 저를 자유롭게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몇 년 전 아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고3때도 학교에서 강제로 시키는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에서 자유롭게 공부했다. 좋아하는 바로크 음악을 들으며. 어차피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피아노, 컴퓨터, 성악, 발레, 지점토, 홈패션, 영어, 수영, 일본어, 태권도, 미술 등 학원을 열 곳 이상 다녔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시켰더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학원 가는 게 싫다고 하면 언제라도 그만두게 했다.
"억지로 시키면 창의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들의 주장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욕심 많고 의욕이 넘쳤던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너무 하고 싶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하늘하늘 춤추고 싶었다. 피아노도 치고 싶었다. 정말로 미치도록 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어느 것도 못해봤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즉시 배울 수 있게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필자의 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들, 엄마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테니 너는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열여덟 어린 나이의 아들을 홀로 일본에 보내며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드님은 분명 한국을 빛낼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부장님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IT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
‘글을 잘 쓰는 패션 디자이너’
필자의 후반생 꿈이다.
2012년 퇴직한 후 하고 싶은 일들을 적어봤다. 패션 디자인, 패션 모델, 발레와 왈츠 그리고 탱고 배우기, 영어회화, 서유럽 여행하기, 좋은 수필 쓰기, 오페라와 발레 감상하기, 인문학 공부하기 등 많기도 했다. 사람이 살아갈 때 무엇이 중요할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필자는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선생님이 되어 30여 년을 정말 즐겁고 행복하게 일했다. 퇴직을 했어도 공무원 연금이 나와 최소한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 우리나라 노인들의 빈곤은 정말 심각하단다. 절반이 빈곤층이라고 한다. 그래도 필자는 평생 원하던 일을 하고 퇴직 후에는 최소한의 생활까지 보장이 되니 이처럼 다행스런 일이 없다. 지금부터는 필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살 수 있는 것이다.
인문학 공부는 주로 집에서 한국방송 통신대 강의를 통해 충족한다. 요일별로 국문학과 철학, 역사와 서유럽 문화기행, 패션 일러스트레이션 등의 강의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한창 자랄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어 의지만 있다면 TV와 인터넷 그리고 서울 각 구의 문화원에서 무료로 혹은 가성비 높은 비용으로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다. TV를 바보상자라면서 멀리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필자는 제자들에게 ‘정보의 바다’라고 표현했다. 인터넷에서 전복을 구하느냐 미역을 건져 올리느냐는 매체를 이용하는 사람의 마음가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엔 방송대 강의도 그렇고 교양 프로그램과 양질의 다큐멘터리 등 좋은 콘텐츠가 넘쳐난다. 방송대 강의가 너무 재밌어서 외출을 못할 때도 있을 정도다.
호기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의욕에는 세월도 못 당한다. 필자는 퇴직 후 제일 먼저 강남 라사라 학원에 등록했다. 패션디자인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어릴 때 선생님 다음으로 하고 싶었던 것이 패션디자인이었다. 이곳에서 패션디자인 과정 초급 3개월, 중급 3개월을 마치고 서울시 창업스쿨에서 2개월간의 패션디자인 과정을 수료했다. 패션에 대한 열정은 아마 평생 가지고 가게 될 것 같다. 발레는 어려서부터 필자의 로망이었기에 패션디자인 과정을 마친 후 바로 시작했다. 아름다운 선율에 맞춰 발레를 할 때마다 얼마나 큰 행복을 느끼는지 모른다. 발레가 어린 시절의 로망을 실현시켜주는 취미 정도라면 왈츠와 탱고는 능숙하게 아주 멋들어지게 추고 싶다. 운동할 때는 인내심을 요구하지만 왈츠와 탱고를 출 때는 어느새 끝나는 시간이 되곤 한다. 건강을 위해, 바른 자세를 위해, 힐링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춤이라고 생각한다. 스웨덴에서는 팔십이 넘은 노인들도 발레를 한다. 노인분들의 표정이 참 행복해 보인다.
서초문화원에서는 수필을 잘 쓰기 위한 수업을 받고 있으며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기자단으로 활동하며 쓴 글이 96편이 될 정도로 글쓰기가 생활화되어 있다. 틈틈이 압구정역에 있는 무지크 바움에 가는 것도 잊지 않는다. 몇 해 전에는 강남시니어플라자의 모델워킹반에도 등록했다. 주 1회 모델워킹을 연습하고 있다. 2년 동안 패션쇼도 다섯 번 했다. 개성 강한 동료들의 기상천외한 옷차림을 보는 것도 쏠쏠한 재미다. ‘옷차림은 전략이고, 옷 입는 것도 일종의 예술 행위’다. 기왕이면 예쁘게 입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가장 훌륭한 액세서리는 젊음이다. 젊은이들을 값싼 옷을 입어도 예쁘지만 나이 들면 옷차림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물기 빠진 피부에 옷차림까지 추레하면 볼품이 없기 때문이다.
녹화가 있는 토요일은 될 수 있으면 여의도로 간다. 서포터즈로 활동하기 때문이다. 5포세대, 혼밥, 실업문제, 4차 산업혁명 등 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을 다루며 그 해결책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이다. 메인 브로드캐스터가 강연한 후 미래참여단 서포터즈들이 질문하는 형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현장에서 녹화에 참여하면 더 생생한 공부가 된다. 20대 젊은이에서 70대 시니어까지 다양한 세대와의 만남도 즐거움 중 하나다. 주 2회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주관하는 서울 둘레길 걷기에 참여한다. 둘레길 걷기는 주 3회 30분 이상 운동을 해야 하는 시니어들에게 유익한 프로그램이다.
‘배움이 이어지면 기회가 이어진다’고들 한다. 지금 같아서는 지구촌에서의 시간이 끝날 때까지 배움에 대한 열정이 식을 것 같지 않다.
이래도 되는 거야?
삶이 이렇게 재밌어도 되는 거냐고요!
어제는 너무 좋아서 기절하는 줄 알았다. 올해 4월부터 활동하게 된 온․오프라인 잡지 에 필자 글이 실렸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온라인에만 꾸준히 실렸는데 잡지사에서 정해준 주제 ‘으이구! 주책이야!’에 맞춰 쓴 글 ‘교재를 망가트려 죄송합니다’가 7월호에 실린 것이다. 제시한 주제에 맞춰 처음 써낸 글이었다.
'사람을 사귐에 있어 버릴 건 버리고 취할 건 취한다.‘ 사람을 너무 좋아하는 필자가 가지고 있는 철학이다. 에서 주관한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필자와 함께 온 사람들은 대부분 필자 스타일을 좋아하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모두들 성격이 활발하고 적극적인 분들이다. 하는 일도 인터넷 기자, 사회복지사, 공예가, 모델, 시인, 수필가, 교수 등 다양하다. 서초문화원 문화기행 프로그램에서 만난 분도 있고 동대문 제일평화시장 구두매장에서 필자 스타일에 필이 꽂혀 인연을 맺게 된 분도 있다.
평택여고에 재직할 때 필자는 제자들에게 말했다. “사람을 대할 때는 정성껏 대하라. 그 사람이 나와 어떤 인연으로 맺어질지 모른다.” 서둔야학 단톡방, 서민동 단톡방, 서울시 낭송회 시음 단톡방, 왈츠 단톡방, 명견만리 서포터즈 단톡방, 꿈방송 단톡방, 뉴시니어 리더스포럼21 단톡방, 강남시니어프라자 해피미디어단 단톡방, 모델워킹 단톡방, 서리풀 문학회 단톡방, 오페라 동호회 모임,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친구들 등 단체회원 단톡방만 해도 만만치 않은 인적 네트워크다. 살아보니 사람이 가장 큰 재산이다. 2년 전 메르스 사태로 KBS 시사교양 프로그램 에서 녹화에 참여할 사람을 모집하느라 고심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때 필자가 강남시니어플라자에서 모델워킹하는 동료들과 해피미디어단 회원들을 왕창 모시고 갔다. 담당 PD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모른다.
필자는 바람잡이 역할을 즐긴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에서 행사를 할 때는 담당 PD를 초대해 분위기를 조성했다. 필자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 각자의 재능을 활용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을 좋아한다. 시니어 헬스 콘서트에 참석한 분들도 너무 재밌었다고 상기된 표정으로 필자에게 말했다. 다음 행사에도 초대해주기를 바란다면서. 아자아자! 이런 것이 바로 윈윈이다.
날개를 달아준 에 감사해하며 오늘도 필자는 저 푸른 하늘을 향해서 힘차게 날갯짓을 한다. 지금 필자의 삶은 글자 그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다. 이런 삶이 수어지교다.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기쁨!
따봉, 원더풀!
한 분야의 장인을 만나는 것은 늘 즐거운 일이다. 이번에 만난 이도 마찬가지였다. 철강 산업 분야에 반평생을 몸담은 만큼 국내 철강 역사와 관련한 에피소드들이 끝없이 쏟아진다. 묻지도 않은 이야깃거리도 저절로 나온다. 평범한 사람은 물을 수도 없는 스토리다. 평생을 철강 업계에서 보내던 그가 이제는 다소 독특한 철강 칼럼니스트란 직종을 창직(創職)해 활동 중이다. 바로 전 동국제강 상무 김종대(金鍾大·63)씨다.
“함께 일하던 작가가 그러더라고요 책 한번 내볼 생각이 없냐고. 순간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그동안 회사와 업계의 대표선수 중 한 명이라고 자부심을 갖고 살았는데, 생각해보니 내 이름으로 출간한 제대로 된 책 한 권 없었던 것이죠.”
그가 칼럼니스트로 변신하게 된 결정적 순간의 이야기다. 동국제강 창립 50주년 사사(社史)를 준비하던 당시, 함께 일하던 작가에게 받았던 그 질문은 그의 두 번째 인생에 큰 영향을 줬다. 아직 회사에 몸담고 있던 시절이었다. 퇴직 전까지 그는 동국제강 홍보를 담당하는 상무로 활약했다.
새로운 직업을 찾다
철강 칼럼니스트. 한 분야에 대해 전문적인 지식을 바탕으로 한 칼럼을 전문적으로 쓰는 작가는 많다. 최근에 각광받는 음식 칼럼니스트들은 대중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이들도 꽤 많고 정치나 음악, 대중문화에 대한 칼럼니스트들도 있다. 하지만 철강이라니 다소 생소하다.
“처음부터 철강 칼럼니스트를 생각한 것은 아니에요. 30년 가까운 인생을 보낸 철강 분야의 이야기를 책으로 써보자고 마음먹고 조금씩 준비를 해왔죠. 먼저 주변에서 칼럼 청탁이 들어오면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그러다 아예 연재를 하면서 글을 하나하나 모아가면 하나의 책으로 완성하는 데 수월할 거라 생각했죠.”
그에게 글쓰기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회생활을 기자로 시작했고, 홍보 일을 하면서 각종 연설문이나 축사 등을 자주 썼고 매체에 기고하는 일은 업무의 일부이기도 했다. 지금 그는 ‘철이 미래다’라는 주제와 부정 철강제품 추방에 대한 글을 1년 동안 쓸 계획에 있다. 현재 쓰고 있는 글들은 한국철강협회 간행물과 동국제강 블로그, 그리고 업계 전문지에 게재되고 있다.
원고 청탁이 많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철강 칼럼니스트가 됐다. 그리고 은퇴 후 그는 자연인이 된 자신을 소개할 때 철강 칼럼니스트라고 말한다.
정권에 의해 운명이 바뀐 두 번의 변곡점
그가 철강업계에 몸담게 된 사연은 좀 기구하다. 1954년 인천에서 태어난 그는 경희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에서 홍보를 전공했다. 첫 직업은 신문사 편집기자였다. 현장을 뛰는 기자는 아니었지만 꽤 적성에 맞는 일이었다고 기억한다.
“일을 빨리 배우고 싶어 꾀를 부렸죠. 선배들이 신문의 면을 구성하는 것을 어깨너머 배우기 위해 소조(小組)들을 집에 챙겨왔어요. 소조는 면 구성을 메모해놓은 종이인데, 기사의 분량이나 제목, 속보 등에 따라 최종결정이 나기까지 여러 차례 바뀌기 마련이거든요. 선배들이 버린 소조들을 사환을 시켜 확보해놨다가 하숙집 천장에 잔뜩 붙여놓고 편집 공부를 했죠. 선배들이 가르쳐주지 않아 몰래 모으느라 애먹었어요(웃음).”
하지만 그런 노력은 얼마 가지 못했다. 그가 일했던 신문사는 1980년 언론통폐합을 통해 경향신문에 흡수 합병된 신아일보였다. 갓 입사한 신입기자였던 그는 결국 회사를 나와야 했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익혀뒀던 기술은 후에 빛을 발했다. 당시는 인쇄, 편집기술이 대중화되지 않아 수요가 많았는데, 그는 직접 회사를 차려 대학교 학보나 회사 사보 편집을 대행해주는 일을 했다. 그리고 그의 실력을 알아본 관계자의 추천으로 국제상사 홍보실에 입사하게 된다. 그곳에서 사보 의 편집장이 되면서 홍보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워낙 정치적으로 어수선했던 시기니까요. 그래도 언론통폐합 한 번으로 변곡점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시다시피 국제상사는 1985년 신군부에 의해 해체되는 고초를 겪죠. 저 역시 그 과정에서 국제상사에서 연합철강으로 적을 옮기게 됐고, 연합철강은 동국제강으로 경영권이 넘어갔어요. 그때부터 동국제강 사람이 됐죠.”
편집기자에서 철강 홍보맨으로
‘철강맨’이 된 그는 동국제강이라는 회사의 소식을 외부에 전하는 ‘입’이 되었다.
“사실 철강회사 홍보팀을 대단치 않게 여길 수 있어요. 철강산업 자체가 대중을 소비자로 상대하는 곳이 아니고, 철강 소비자들은 모두 기업이니까요. 게다가 초창기 철강산업은 제품만 만들면 팔리는 잘나가던 사업이었어요. 경제성장기에는 공급이 수요를 따라주지 못해 너도나도 먼저 제품을 사가겠다고 줄을 서던 시절이니까요. 그런데 무슨 홍보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겠어요.”
그래도 그는 때로는 회사를 상대로 때로는 언론을 상대로 때로는 경쟁업체와 기관을 상대로 치열한 길을 걸었다. 한때는 ‘물을 먹였다(특종을 놓치게 했다)’는 이유로 한 매체가 부정적 기사를 연이어 게재하는 바람에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기자를 찾아가 단판을 짓기도 했다. 기업 홍보실 책임자의 비애였다.
철강업계에 그가 남긴 족적은 또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6월 9일 ‘철의 날’이다.
“협회에서 홍보 담당자들끼리 회의를 하는데 우리도 기념일을 하나 만들자고 제안했어요. 업계가 다 함께 기념할 수 있도록 말이죠. 처음엔 다들 시큰둥해하더라고요. 하지만 꾸준히 제안해 6년 만에 철의 날이 제정되었어요. 그게 2000년 6월의 일이에요.”
한국철강협회의 철의 날이 6월 9일로 지정된 것은, 국내 철강 역사상 처음으로 고로가 가동된 날짜를 기념하기 위해서다. 포항제철소 1고로에서 국내 최초로 쇳물을 생산한 날짜는 1973년 6월 9일이었다. 또 국내 사진계에서 손꼽히는 행사로 인정받는 철강사진전과 마라톤대회의 창설 역시 그의 작품이다.
은퇴 후 직업을 위한 일상의 원칙들
은퇴 후의 삶을 살고 있는 그에게 다행스러웠던 점은 남들과 다르게 은퇴를 미리 경험해볼 수 있었던 것. 그는 2012년 말 첫 번째 은퇴를 한다. 사규에 따른 것으로서 정상적이었다면 회사와의 인연은 거기서 끝나야 했다. 하지만 회사에 오너리스크가 발생하자 그만 한 적임자가 없다는 경영진의 판단에 회사로 다시 되돌아올 기회를 얻는다.
“제겐 행운이나 다름없었죠. 2년 6개월의 은퇴를 미리 경험할 수 있었으니까요. 예상했던 퇴직과 실제로 경험했던 삶은 완전히 달랐어요. 준비를 많이 해야 한다는 주변 선배들의 얘기가 실감나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엔 단단히 준비해야겠다 맘먹었죠.”
그가 은퇴를 준비하면서 가장 먼저 마련한 것은 서재다. 은퇴 후 허송세월을 보내지 않으려면 은퇴 전과 다름없이 ‘출근’하는 기분을 유지하는 것이 좋다는 추천 때문이었다. 그 역시 짧은 은퇴 경험을 하면서 그 필요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다행히 장가 간 아들 방이 비어 있어 그 방을 서재로 쓰겠다고 했죠. 아내도 제 설명을 듣고 이해해줬어요. 덕분에 매일매일 규칙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아침에 강아지와 산책하며 글의 윤곽을 대강 구상하고, 낮에는 글로 구체화하는 작업을 해요. 그렇게 초고를 써놓고 일주일에 두 번 정도는 밤을 새서 다듬기를 반복하면서 탈고 과정을 거쳐요. 처음에는 글이 제대로 써지질 않아 애를 먹었어요. 책상 앞에 앉았는데 도통 진도가 나가질 않더라고요. 몸이 아직 적응하지 못했던 모양이에요.”
완성된 원고는 반드시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평가를 해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글의 완성도를 높여갔고, 또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알리는 계기로도 삼았다. 자신에게는 자극이 되는 과정이었다.
“은퇴 후 제대로 글을 써보겠다 생각하고 공부한 철강 분야에 대한 학습량은 30년 회사생활 동안 한 공부보다 더 많을 거예요. 막상 글을 쓰려니까 모르는 것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래서 국가기록원 등 철강산업의 발전과 관련한 곳들을 모두 찾아다녔어요. 다행히 오래 접했던 분야라 그런지 흥미로웠어요.”
그가 회사생활을 하며 꾸준하게 모았던 다이어리, 스크랩들도 집필에 도움이 되고 있다. 최고경영진과의 대화와 메모, 그리고 경영상의 위기나 불황을 겪으면서 상황 타개를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이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최근에는 이 자료를 보다 편하게 볼 수 있도록 디지털 파일로 전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돌아보면 ‘鐵’이 보인다
김종대씨는 이제 여행을 다닐 때도 ‘鐵’이 보인다고 이야기한다. 직업병 때문인지 독일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철강문화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남들은 관광 명소로 생각하는 에펠탑도 그에게는 철의 문화이자 역사의 상징으로 보였다.
그가 철강 칼럼니스트로서 앞으로 쓰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지금 남아 있는 철강산업의 역사는 포항제철(현 포스코)에만 집중되어 있어요. 물론 포항제철이 국내 철강산업에 큰 획을 그은 것은 맞지만, 일제 강점기 때부터 우리의 철강산업 역사는 이어져왔어요. 이 시기에 대한 자료나 학문적 연구가 부족한 것이 사실이에요. 이런 현실이 조금이라도 개선될 수 있도록 돕고 싶어요.”
그의 또 다른 바람은 철강산업에 대한 인식 개선이다.
“철강산업은 굴뚝산업이라는 대중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요. 최근 4차 산업혁명 시대가 열리고 있다는데 철강산업도 예외는 아니에요. 최첨단 제품을 개발하는 데 있어 소재 개발은 기본 중에 기본이죠. 국내 철강산업은 미래에도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하고 있어요. 이런 부분들이 대중에게 알려지고, 종사자들이 좀 더 자부심을 갖고 일하는 환경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싶은 것이 저의 바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