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한국을 2차 산업의 승자로 만들어왔다.
그러나 이제는 기계처럼 일하는 인간은 기계를 이기지 못하는 세상이 왔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는 게,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이다.
인간으로의 회귀,
그것은 보다 많은 실패를 경험해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천천히 가야 한다는 말이고,
그것은 보다 멍청해져야 한다는 말이며,
그것은 보다 양심적인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실패가 용인되는 사회,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하는 사회,
똑똑하지 않아도 재미있고 기발한 아이디어가 가득한 사회,
그리고 도덕적인 사회,
그것이 바로 창조적 사회이며, 4차 산업혁명을 이끌 사회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국이, 한국인들이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다고 믿고 싶다.
30대 중반인 아들이 오늘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다.
"야! 물무지개다!"
감탄하며 어린 아들의 고사리 손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아주 작은 물웅덩이에 차에서 떨어진 기름이 번져 있었다. 시외버스 터미널에서였다. 아들은 필자를 깨우쳐줬다. 사물을 다른 눈으로 보라고.
"엄마 아까부터 올챙이들이 계속 내려오고 있어요."
"어디? 어! 정말이네?"
어린 아들의 말을 듣고 보니 버스 창을 타고 내려오는 빗물이 정말 고물고물 움직이는 올챙이 같았다. 비 오는 날 아이들을 데리고 나들이한 날이었다.
어린이는 모두 천재이고 시인이다.
어린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은 모두 아름답고 신기하다.
어린이들과 같이 있다는 것은 세상의 아름다움에 눈을 뜨게 되는 축복의 시간이다.
영국의 계관시인 워즈워스는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엄마 나 내릴래."
"왜?"
"엄마 힘들까봐."
아들이 네 살 때였다. 퇴근해 힘없이 누워 있는 아들의 이마를 만져보니 열이 펄펄 끓었다. 부랴부랴 아들을 업고 병원으로 달려가는데 그런 말을 해서 순간 눈물이 앞을 가렸다. 평소에도 곰살맞은 아들은 필자가 안아주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필자를 더 꼬옥 안아주곤 했다. 아픈데도 엄마를 걱정해주던 아들. 아들의 고운 마음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가을 밤길
귀뚜라미 귀뚤귀뚤 우는 밤길을
나 혼자 걸어봅니다.
소리를 밟을까봐 조심조심
소리를 쫒아버릴까봐 조심조심
나 혼자 가을 밤길을 걸어봅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들이 쓴 시다.
'소리를 밟을까봐'라는 탁월한 표현에 감탄해 동료 국어선생님들께 보여드리니 타고난 시인이란다.
"엄마 저를 자유롭게 키워주셔서 고마워요."
몇 년 전 아들이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고3때도 학교에서 강제로 시키는 자율학습을 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집에서 자유롭게 공부했다. 좋아하는 바로크 음악을 들으며. 어차피 공부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어려서부터 아이들은 배움에 대한 의욕이 넘쳤다. 피아노, 컴퓨터, 성악, 발레, 지점토, 홈패션, 영어, 수영, 일본어, 태권도, 미술 등 학원을 열 곳 이상 다녔다.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시켰더니 결과적으로 이렇게 많은 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학원 가는 게 싫다고 하면 언제라도 그만두게 했다.
"억지로 시키면 창의성이 나올 수가 없어요."
아들의 주장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욕심 많고 의욕이 넘쳤던 필자는 어렸을 때부터 발레가 너무 하고 싶었다. 잠자리 날개 같은 옷을 입고 하늘하늘 춤추고 싶었다. 피아노도 치고 싶었다. 정말로 미치도록 치고 싶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어느 것도 못해봤다. 그래서 필자는 아이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있으면 즉시 배울 수 있게 했다. 우리 아이들에게는 필자의 한을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던 강렬한 의지 때문이었다.
"아들, 엄마는 한국에서 살아남을 테니 너는 일본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열여덟 어린 나이의 아들을 홀로 일본에 보내며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아드님은 분명 한국을 빛낼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 될 거예요."
아들의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학생부장님은 필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은 일본의 명문 게이오대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IT 디자이너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