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그를 봤던 그때 그 느낌을 잊을 수 없다. 마치 온몸에 전기가 감돌고 있는 전기맨(?) 같았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 로비에 나온 젊고 낯선 배우는 차갑고 깊은 까만 눈빛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바로 MBC 드라마 에서 열연한 배우 한갑수(韓甲洙·48)다. 불꽃 카리스마로 연극 무대를 내달리더니 어느 날 갑자기 TV 속에 나타났다. 그것도 강아지 같은 함박웃음과 함께 말이다. 연기 인생 30년. 그 누구도 몰랐던 반전 연기로 사랑받은 배우 한갑수를 만났다. 아직도 사람들의 시선이 익숙하지 않다는 대세 배우의 삶과 가족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아이고 어른이고 많이도 알아봅니다
“촬영하고 있는데 아이들이 다가와서 친구 부르듯 그냥 이름을 불러요. 제가 아무리 ‘이놈! 아저씨한테!’라며 무서운 표정을 지어도 신이 나서 그러는 거예요.”
MBC 주말 드라마 는 한갑수에게 드라마 하나 끝난 것 그 이상의 의미 있는 작품이 됐다. 배우로 살면서 처음 가져보는 기분을 안겨줬다고나 할까. 무대에 올라 관객의 박수를 받아왔지만, 조명이 없는 거리로 나서면 박수갈채는 온데간데없었다. 이 드라마는 달랐다. 촬영장에 모인 아이들은 한갑수를 “아바디”를 목 놓아 외치는 또래 친구 대훈이로 대했다. 드라마가 끝난 다음에는 사람들이 알아봐도 너무 알아보니 인기를 실감할 수밖에 없었다. 말 그대로 인생을 바꿔준 대박 드라마가 된 것. 지금 와서 하는 얘기이지만 한갑수는 방송 연기 초반 배우로서 자존심이 상해 고사하는 일이 많았다.
“캐스팅 디렉터들이 제 연극을 봤는지 연락을 해오더라고요. 한 회 잠깐 출연할 수 없냐고요. 그런데 처음에는 기분 나쁘다고 안 한다고 했어요. 내가 연극을 몇십 년 했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연락을 해오던 디렉터 중 한 명이 한갑수의 마음을 움직였다. 연극은 많이 했어도 카메라 연기는 안 해봤으니 경험해보라 권유했다. 미디어 매체에도 시선을 줬으면 한다고 말해줬다. 연극을 많이 했지만 생각해보니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이후 경찰이건 면접관이건 주어지는 역할은 작건 크건 열심히 해냈다. 한갑수가 시청자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 작품은 MBC 드라마 과 이다. 많이 나오는 것도 아니었지만 강한 인상을 심어줬다. 특히 이휘향에게 간 이식을 해주는 오빠 역할을 했던 은 인생작 로 가는 도움닫기 역할을 해주었다.
“의 김사경 작가님이 을 보시고 저를 추천하셨어요. 당시 북한 외교관 태영호씨가 한국으로 들어왔는데 제 역할이 그와 비슷한 북한의 고위직이라더군요. 이제는 좀 지성인을 연기하나 싶었죠. 드라마가 시작하고 한참 지나 제가 등장하는 대본이 나왔다며 작가님이 연락하셨어요. 그런데 열 살 아이 연기가 가능하냐고 묻더라고요.”
연극 에서는 피바람을 일으키는 윤원형을, 유진 이오네스코의 잔혹극 에서는 잔인한 방법으로 수학을 가르치는 교수 역할을 했던 그다.
무대 위 선 굵은 배우, 아이를 연기하다
잔인함과 공포를 연기하던 배우가 열 살 아이 지능을 가진 연기라니.
“네? 저는 열 살 연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어요. 바보냐고도 물어봤어요.”
걱정돼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일상의 언어로 흐르는 드라마에 나이 든 남자가 아이처럼 연기하는 것이 과연 어울릴까 걱정에 걱정을 더해갔다. 이에 김사경 작가는 두 가지를 요구했다. 아이처럼 본능대로 말할 것과 북한 아이만의 순수함을 표현해 달라고 했다.
“순수를 어떻게 하지? 일단은 맑게 웃자는 것이 큰 콘셉트였어요. 내가 눈도 크고 쌍꺼풀도 있으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걸 시청자가 귀엽게 봐줬던 거 같아요. 그리고 이휘향 선배님과 (임)수향이가 너무 악한데 제가 팍팍 시원하게 요즘 말로 사이다처럼 이야기하니까 많이들 좋아하신 것 같아요. 두 분이 잘했기 때문에 제가 덕 본 겁니다. 드라마 속에서는 사이가 나빴지만 평소에 제일 친했어요.”
연기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던 영역이었다. 시청자에게 이렇게까지 사랑받을 줄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에 자신의 능력보다 함께한 선후배의 도움이 컸다며 겸손하게 공을 돌리는 배우 한갑수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얼굴, 꽤 쓸모 있습니다
경남 거창 출신인 한갑수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지역의 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을 도우며 연극을 시작했다. 무일푼 극단 생활 3년 만에 배우로 무대에 오른 그는 경남에서 열리는 거의 모든 연극제의 연기상을 휩쓸었다. 괴물 같은 연기력을 눈여겨본 연출가 이윤택이 2001년 그를 서울 무대에 올려세웠다. 30대 중반의 한창 물이 오른 남자 배우의 연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의 역할은 늘 실제 나이에 비해 한참이나 많았다. 지금도 주어지는 역할은 실제보다 열 살 이상 많다. 현재 방송되고 있는 KBS 2TV 저녁 일일 드라마 에서도 주인공의 아버지로 등장한다. 나이가 많은 선배 연기자가 아들로 혹은 동생으로 등장하는 일은 이제 다반사다. 본인의 나이와 맞지 않은 역할을 하는 게 서운하지 않을까? 아니라고 했다.
“연출가들이 좋아하더라고요. 이번 드라마를 하면서도 연출가님한테 흰머리가 좀 있는데 염색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어요. 그런데 하지 말라고 하시더라고요. 제 헤어스타일이 좋다면서요. 한 촬영 감독님은 오히려 제가 늙어 보이는 것이 장점이라고 말씀해주셨어요. 왜냐하면, 실제 나이가 육십이 넘어가면 대사 암기가 좀 어렵고 50대 연기는 남자 배우나 여자 배우나 할 수 있는 배역이 많이 없다더라고요. 제가 사실 많이 하는 역할이 주인공 아버지 역할입니다. 대부분 60대 역할일 수밖에 없죠.”
이번 드라마 촬영을 하면서도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있었다. 상대 배역으로 등장한 배우가 예순두 살이었는데 한갑수가 오히려 나이가 더 들어 보였던 것. 결국, 상대 배역을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하려고 분장팀이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했다.
“나는 내가 노안이라는 걸 알아요. 어디 가서 나이 얘기하면 깜짝 놀라더라고요. 변희봉 선생님이 저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봐서 ‘오십입니다’ 했더니 ‘애’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또 좋은 건 역할도 역할이지만, 나이가 한참 들어 보이니까 사람들이 함부로 대하지 않더라고요(웃음).”
천생 배우 어린 아내의 특급 매니지먼트
한갑수는 소속 회사 없이 아내 변혜경(39)씨와 촬영 현장을 다니고 있다. 아내가 한갑수의 매니저인 셈. 드라마를 하게 되면서 단 하루도 떨어져본 적이 없다. 드라마 촬영 현장에 가면 사람들이 아내 변혜경씨를 더 많이 찾는다. 배우 이휘향도 그랬다.
“미스 변 어디 있느냐고 이휘향 선배님이 그러세요. 밥 먹으러 가야 한다고요. 나랑 가자는 게 아니라 이 사람이랑요. 감독님도 너무 좋아하셨어요.”
아내는 현장 스태프와 친해질 수 있게 해주는 촉매제 역할을 했다. 잘 웃고, 모르는 사람들한테도 인사를 잘했다.
“만약 저 혼자 다녔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제 스타일이 원래 연기에 집중해야 하니까 누구랑 말도 안 하고, 친해질 수 없거든요. 그런데 옆 사람이 분장이나 의상 스태프랑 친하니까 편안하게 이것저것 부드럽게 부탁합니다. 우리 집사람 덕분에 참 좋죠. 현장에서 저 혼자 있으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을 아내가 해주고 있습니다.”
배우 한갑수의 아내로 매니저로 사는 변혜경의 직업 또한 배우다. 그것도 천부적인 연기실력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 무대 위에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관객과 호응하던 모습이 생생한 멋진 배우였다. 열 살 차이 어린 여배우는 2001년 무대에서 연기 연습을 하는 한갑수를 보고 반해버렸다.
“거창에서 연희단거리패로 옮겨서 연극을 할 때였는데 밀양에서 합숙생활을 했어요. 아내는 연희단 소속 배우였고요. 아침마다 단원들이 조별로 다 모이는데 한 달 내내 아내가 ‘한갑수 내 꺼다’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정말 장난인 줄 알았어요. 저리 가라고도 했어요.”
장난 같던 아내 변혜경의 고백은 사실이었다. 결국 연극의 주인공으로서 공연을 닷새 앞두고 아내는 사랑의 탈출(?)을 하고야 말았다. 장례가 촉망되는 여배우의 결혼을 극단은 반겨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혼하고도 극단 대표인 이윤택 선생님 마음에 우리가 남으셨나봐요. 진주에서 신혼살이할 때 그 지역으로 강연을 오신 적이 있었어요. 강연하시다가 ‘한갑수 저놈이 우리 혜경이를 훔쳐갔어요’ 그러셨답니다(웃음). 이 선생님이 아내를 딸처럼 예뻐해서 상심이 크셨을 거예요.”
최악의 궁합을 이기고 최고 부부가 되다
“결혼 전에 저희가 결혼하면 아내가 죽는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애를 못 낳거나 낳아도 불구가 될 거란 말을 들었어요. 다행히 애도 낳고 별일 없는가 싶었는데 아내가 아이 낳고 100일 만에 쓰러졌습니다.”
깨소금 냄새나는 신혼생활도 잠시, 시련의 연속이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아내 변혜경씨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났다. 알 수 없는 말을 늘어놓았고 급기야 상대방의 말도 왜곡돼 들린다고 하다 정신을 잃었다. 뇌전증이라고 했다.
“병원에 다녀도 원인이 나오지 않았어요. 한의원에도 갔었고, 심지어 신병이란 말도 들었어요.”
처가에서 아이를 대신 키워주고 병원비 대부분을 지원했지만, 가족 부양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장인어른이 서울대병원 앞에 가서 시위도 했어요. 딸의 머리라도 한 번 열어봐 달라고요.”
발병 7년 만에 아내 변혜경씨는 뇌 수술을 받았다. 수술 두 번째에 문제의 위치를 찾아냈고, 세 번째 누운 수술대에서 원인을 제거했다. 수술 직후 만난 아내는 딸도 한갑수씨도 못 알아봤다고. 그래도 젊은 사람이라 의료진이 놀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이 좋아졌다.
배우가 숙명인 한갑수의 해피스토리
작년 하반기 한갑수는 가족과 함께 경남 진주에서 서울 근교로 이사 왔다. 이곳으로 오고 얼마 안 있어 드라마를 하게 된 것뿐만 아니라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의 직업이 가진 숙명적 불안감과 사랑 사이에서 여전히 고민하는 진짜 배우였다.
“배우는 오래가기 쉽지 않습니다. 소모되고 금방 잊히죠. 평생 숙명처럼 배우를 하고 싶다고 해서 무대에 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나를 찾아줘야죠.”
한갑수라는 배우가 지금보다 선명해질 때까지 소속사에 들어가는 일 없이 아내와 함께 일할 생각이다. 지금의 상태로 소속이 되면 다작을 해야 하거나 정체성이 모호해질 것을 우려한다고 했다. 그리고 아내가 다시 배우를 할 수 있었으면 한다.
“우스갯소리로 ‘10년 후에는 나는 일을 좀 쉬고 아내가 열심히 연기했으면 한다’고 말합니다. 이제 몸도 완쾌되고 아이도 다 키웠으니 아내도 연기를 많이 하고 싶어 해요. 하지만 조급해하지 말라고 말해줍니다.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오히려 혜경이가 나이 들면 연기자로서 더 빛을 낼 것이라고 봅니다. 현장을 같이 다니는 이유가 많이 보고 배웠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거든요.”
현장을 함께 다닌 덕에 아내 변혜경씨도 잠깐이나마 에 얼굴을 비치기도 했다. 매니저 일을 하는 틈틈이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아내가 대견스럽다.
“부부생활 15년을 해보니 조금씩 서로 알게 된 거 같습니다. 힘든 것이 좀 거쳤으니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그녀는 철없고 순진하다. 세 번의 이혼과 파산 등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고생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10대에 이미 화려한 스타로 누릴 대로 누리다가 편안하게 그대로 곱게 중년이 되어버린 여자처럼 보인다. 40대가 되면 누구나 얼굴이 책임지고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고 말하는데 이상아의 얼굴은 반칙이다.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그녀와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박규민
CF 여왕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스타 이상아도 별수 없게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어버렸겠지 하며 큰 기대를 안 한 채 그녀를 만나러 일산의 MBC 드라마세트장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방영하고 있는 MBC 드라마 에서 이상아는 50대 사모님 역으로 나오고 TV조선의 에서는 사춘기 딸과 전쟁을 벌이는 철부지 엄마의 이미지로 비춰지기에 천하의 이상아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가 없겠지 지레 판단하고 덤덤하게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의 섣부른 상상은 1초도 안 돼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먹만큼 작은 얼굴은 설탕처럼 하얗고 거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망울은 보석처럼 빛이 나서 한량 이봉규도 어쩔 수 없이 덜컹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고 말았다.
참고로 나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한량으로 자부하기에 이상아처럼 전형적인 예쁜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효진, 박소담, 김고은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내 아내도 전형적인 예쁜 얼굴이 아닌 묘한 매력이 있는 외모의 소유자다. 그런 미적 가치관을 가진 이봉규도 이상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불행했던 결혼생활
사람들이 왜 이상아가 예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아마 美의 보편적인 상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상아는 세 번의 이혼, 파산, 술장사까지 해야만 했던,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찌든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아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TV 화면이나 사진을 보면 늙어진 모습이 그대로 나와서 거짓말을 못합니다”라는 그녀의 평가가 희한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TV로 볼 때는 그녀가 이토록 밝고 예쁜지 몰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 이후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어두운 모습을 상상했는데 오늘 만난 이상아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을 발표할 때 16시간 동안이나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최순실을 이겼잖아요!”라며 깔깔대고 웃는다.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인데도 이상아의 세 번째 이혼 소식은 온 국민의 화제였다. 최순실 뉴스를 이긴 것이 대단하다고 이상아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젠 아픔을 충분히 극복했고 이혼하길 잘했다는 자평일지도.
하여간 이상아는 철없고 순진하다. 독설가의 이미지가 강한 이봉규를 만나기로 해서일까? 그녀의 표정이 처음에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 저 인간이 나의 불행한 과거 얘기를 독하게 물고 뜯으려 하겠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30분 정도 흐른 뒤부터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의 이혼 얘기는 물론이고 아팠던 과거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술술 풀어내놓았다. 그녀는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두 자매를 부양해야 했던 삶이 버거워 현실도피 차원에서 했던 첫 결혼에 실패했고 이후 두 번의 이혼을 더 겪으면서 공황장애에 빠진 것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심지어 딸과도 자주 싸울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방송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연애는 생각도 못한 채 고독한 생활은 연장선상에 있다.
또 다른 사랑, 아직 버겁다
한번은 점을 봤는데 “결혼을 열 번도 더 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 점쟁이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 남자 만나기가 겁이 나기도 하지만, 딸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딸은 엄마에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엄마를 뺐길 것 같아 불안해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세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는 더 이상 상처를 안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짝을 만나면 또다시 외톨이가 될까봐 겁을 내는 딸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이해하면서도 이 정도에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라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00세 시대에 아직 창창한데 이렇게 아름다울 때 빨리 평생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나마나한 빤한 조언을 하면서 “소개팅 시켜줄 테니 어떤 남자가 좋은지 말해보라”고 미끼를 던졌더니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금방 문다. “나는 전형적인 B형 여자인데 B형 남자가 잘 맞는다. 불꽃 튀게 싸워도 빨리 풀어지고 뒤끝이 없어서 좋다”고 포문을 열더니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연하의 남자가 좋다”고 털어놓는다. 미끼를 금방 물 정도로 다루기가 정말 쉬운 순진한 여자다. 순진하기에 그동안 남자들에게 많이 당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혼도 세 번이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 직하다.
열두 살 띠동갑 연하의 아내와 행복한 재혼생활을 즐기는 이봉규가 목소리를 높여 또 충고했다. “나처럼 나이 많은 남자와 살면 내 마누라처럼 행복해진다”고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녀는 “탤런트 길용우씨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친구 소개시켜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길용우 선배는 나보다 무려 열일곱 살이나 많은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라며 질색을 했다. 내친김에 더 집요하게 물었다. “연하의 남자라면 연예인 중에 어떤 스타일의 남자가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배우 강하늘이 젊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면서 “야비한 역할도 어울리고 청순한 이미지도 있는 다중 인격적인 매력이 있다”고 답한다. 잽싸게 강하늘의 나이를 검색한 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알려주니까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세 번이나 이혼하고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이상아는 영원히 철부지 소녀로 늙을 것 같다.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포인트다. 그래서 아직도 이토록 예쁜 얼굴을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부지라서 나이를 먹지 않고 어려 보여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다고 한다. 선후배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연예계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대선배인 이상아를 어려워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많단다. 털털하고 철없는 이상아도 참고 참다가 어떨 때는 학번이나 나이를 들먹이며 교통정리를 한 적도 있다. 어려 보이고 철이 없어서 사회생활에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은데 딸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딸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다가도 갑자기 싸우고 또 속상해하면서 펑펑 울기도 한다.
딸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한번은 방송 에서 딸 서진이가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더 잘됐을 거 같았다”고 충격 고백을 했다. 이상아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태어난 걸로도 감사한 줄 알아라. 그냥 ‘아빠가 그 아빠가 아니었으면’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 방송에서 이상아와 딸의 관계에 대해 역술가에게 물었더니 “둘이 절대 안 맞는다. 창과 방패다. 누군가 하나는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모녀가 계속 충돌하는 이유는, 이상아 입에서 칼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 부분이 이상아의 복을 차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역술가는 딸 서진의 사주에 대해서도 독하게 평가했다. “엄마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남자 부분이 겹친다. 세상 어떤 남자가 와도 만족을 못한다”는 직설적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은 “미래의 내 남편 직업은 무엇이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역술가의 평가와 달리 인생 육십을 산 한량 이봉규가 볼 때는 철부지 엄마와 당돌한 딸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기에 티격태격 싸우면서 같이 울고 웃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아닐까? 딸은 커가면서 엄마 이상아의 아픔까지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자존감이 없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상아의 자조적인 자기진단이다. 내성적이면서도 철없고 순진한 여인 이상아가 지금까지는 남자 복이 없었지만, 세 번의 이혼을 통해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았기에 앞으로 아름답고 예쁘지만 약하고 철없는 이 여인을 완전히 감싸줄 푸근하고 강한 남자가 곧 나타나서 그녀의 남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행복을 차용하는 날이 100세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녀는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 노란색과 인연도 깊다. 탤런트 면접시험 때도, 첫 CF(마요네즈 광고) 때도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상아의 집은 노란색 벽지로 덮였다. 노란색은 희망, 기분 좋음, 즐거움,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연예인의 특성과 아주 잘 맞는다. 이제부터 하는 일과 사랑 찾기 게임에서도 노란색의 의미가 잘 발휘될 것으로 믿는다.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사극은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해 현재적 의미를 부여한 뒤 생명력을 불어넣고 오늘날의 사람들과 만나게 한다. 그동안 이순신, 정조, 사도세자, 장희빈, 이성계, 광해군, 연산군, 허준, 윤동주, 김원봉 등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새로운 시각에서 극화됐다. 또한 드라마 의 장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 역사적 의미와 존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사극의 역사적 인물의 소환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시대의 아이콘을 창출하는 진원지 역할도 한다.
올해도 MBC 사극 의 홍길동, 영화 의 독립운동가 박열 등 전통사극, 퓨전사극, 타임슬립 등 다양한 형태의 사극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소환하고 있다. 올해 사극을 통해 만나는 인물 중 단연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되는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이후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이영애에 의해 표출되고 있는 사임당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바로 1월 2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SBS 퓨전사극 다. 사임당을 사극으로 이끌어낸 이유는 뭘까.
“현모양처라는 박제된 이미지의 ‘신사임당’의 틀을 깨고 여자로, 예술가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 사임당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드라마 제작에 돌입하며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다.
‘현모양처’ 이미지 탈피 노력
극본을 쓰고 있는 박은령 작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든 일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극 중 사임당의 아버지 유언이 ‘삶을 선택하라’였다. 사임당이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윤상호 PD는 “대한민국 사임당을 드라마화하기 위한 기획 의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위한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해 현대(서지윤)와 조선시대(사임당)를 오가며 1인 2역을 하는 이영애의 사임당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500년 전 사임당도 지금 5만원권에 박제된 듯한 모습을 원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의 사임당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 인물로 만드는 게 재밌었다.”
는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시간강사인 워킹맘 서지윤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임당 일기에 얽힌 비밀을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타임슬립 퓨전사극이다. 는 일기 속에 숨겨진 천재 화가 사임당의 불꽃같은 삶과 ‘조선판 개츠비’ 이겸과의 불멸의 인연과 사랑을 아름답게 담았으며 현모양처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사임당이 아닌 워킹맘이자 예술가로서의 열정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적 여성상 반영할 수 있을까
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라는 획일화한 표상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게 사실이다. 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고정화한 이미지와 그녀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은 사임당의 삶이 아닌 후대의 필요에 의한 해석과 의미부여 작업으로 초래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육영수 여사의 국모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등장하면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이 확대 재생산됐다.
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현모양처의 표상이었던 사임당을 시대와 운명, 남성 중심의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주체적 인간의 아이콘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2017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의미와 현실로 다가오는 ‘워킹맘’이라는 문양으로 말이다.
최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 직업을 갖는 여성도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도 일하는 워킹맘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이 엄존해 있고 남녀차별 더 나아가 여성혐오 행태마저 빈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는 의도가 개입된 획일화한 해석으로 우리에게 ‘현모양처’, ‘전통적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온 사임당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업을 통해 2017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제시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시선과 의미가 투영된 사임당으로의 전환은 지난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사임당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가 시청자, 특히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현재적 가치를 체화한 2017년의 사임당을 잘 구현해야 한다. 또한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자연스럽게 걷어내면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의 의미를 담보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사회에 엄존해 있는 남녀차별적 시선과 여성혐오적 행태를 무력화하는 긍정적 이데올로기를 드라마에 완벽하게 승화하면서 구현해내야 한다.
는 정치적 시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극에서 좀처럼 소환하지 않았던 신사임당을 오늘의 시청자와 만나게 하고 있다. 사극으로 부활한 사임당은 올해 시대정신을 담보한 새로운 인물 아이콘으로 눈길을 끌며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부상할 수 있을까.
뭐든지 척척, 생각하고 말하는 대로 잘되는 사람을 보면 ‘도대체 어떻게 살았기에 뭘 해도 저렇게 운이 잘 따르나’ 싶다. 부럽다가도 얄밉고, 성공 비법이 뭘까 궁금할 때도 있다. 막걸리 전문 주점 ‘가제트 술집’은 8년 전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 변두리 골목에 7평 남짓한 좁디좁은 공간에 문을 열었다. 개업 첫날부터 문전성시를 이루더니 맛집으로 널리 알려지면서 매스컴도 꽤 탔다. 현재까지 전국 12개 ‘가제트 술집’이 매일 밤 손님맞이를 위해 불을 밝힌다. 스스로도 ‘운이 좋았다’고 평가하는 ‘가제트 술집’의 ‘가제트 오빠(?)’ 김경범(45) 대표. 그의 인생역전 운빨 성공기를 좀 들춰보자.
6년 전 괜찮은 술집이 있다는 지인을 따라 나섰다가 ‘가제트 술집’을 알게 됐다. 그런데 막걸리 집이라니. 홍대 옆 합정동이 지금처럼 번화하지 않을 때였다. 막걸리도 지금처럼 즐겨 찾는 이가 흔치 않았다. 그런데 웬걸? 술집 안은 빈틈없이 손님으로 가득 찼다. 술집이다! 회전율이 빠른 국수집, 밥집도 아닌 술집 대기 줄이 길기도 길었다.
“그때는 그랬어요. 요새는 경기가 안 좋은 것도 있고 본점과 2호점이 인근에 있어서 기다리지는 않아요.”
안경 쓴 얼굴, 수줍게 웃으며 이야기를 꺼내는 이 사람이 바로 가제트 술집 김경범 대표다. 왜 굳이 술집 이름이 ‘가제트 술집’이냐고 묻는다면? 사진을 보면 대충 감이 잡히지 않을까? 그런데 그의 얼굴이 애니메이션 주인공 가제트만큼 낯이 익다. 소소하게나마 TV 드라마와 영화에 얼굴을 비추는 현역 배우이기 때문이다. 최근 MBC 예능 프로그램 ‘2016 무한상사’에도 얼굴을 내비쳤고, SBS 드라마
과 영화 등에도 출연한 바 있다. 막걸리집 사장님이라는 직함은 배우의 삶이 이끌어준 또 다른 삶 중의 하나인 셈이다.
배우 인생에 막걸리 들어오다
인기 배우가 아닌 이상 배우로서의 삶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다. 언제 들어올지 모를 캐스팅 기회 때문에 일정한 일을 갖는 것이 부담스럽다. 배우인 김경범 대표도 술집을 열기 전 여러 직업을 섭렵했다. 연기 선생은 기본이고 오징어 장사, 목수 등 분야도 다양하다. 카타르 현장 취업을 며칠 앞두고 양국 간 마찰로 해외 일자리를 포기했고, 중국 내 유통 사업도 생각했지만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단념했다.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것이 막걸리 아이템이었다.
“2009년 9월이었는데 막걸리 박람회를 한다는 소식을 신문으로 접하고 기록해놓았어요. 그런데 마침 박람회 날이 이사하던 날이더라고요. 박람회가 열리는 곳으로 이삿짐 차를 몰고 갔어요. 막걸리 붐이 일어나기 전이었죠. 그런데 막걸리 맛이 정말 다 다른 거예요. 이거다 싶었습니다.”
이를 계기로 막걸리 파는 술집을 열겠다고 다짐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겁 없는 결정이었다.
올(all) 빚, 올(all) 도움으로 가제트 술집 문 열다
“그때 어떻게 시작했나 몰라.”
잠시 회상에 젖은 김경범 대표. 이 사업이 인생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가난한 배우에게는 대출도 허락되지 않았다.
“대출이 되겠어요? 고맙게도 후배 중 주차 요원이었던 놈 하나가 전세자금담보대출로 1000만원을 꿔줬어요. 그리고 지인한테도 1000만원을 꿨고요.”
오로지 주위 사람의 도움으로 기반을 마련했다. 그저 운이 좋았다고 했다. 전부 다 빚이었고 도움이었다고 했다.
“당시 홍대 근처 상권이 점점 넓어지고 있어서 권리금이 어마어마했어요. 물어보는 곳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돈으로는 갈 수 없었어요. 포기할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허름하고 작은 부동산 하나가 보였습니다. 제가 교회를 다니는데 부동산 이름이 엘 샤다이(전능하신 하나님)더라고요. 그곳에서 지금의 가제트 술집 본점 자리를 안내해줬습니다.”
체계적인 상권 조사도 없었다. 가끔 가는 근처 닭집이 월 800만원 수익을 벌어들인다는 게 정보의 전부였다. 그리고 인테리어가 관건이었다. 당시 빈티지 인테리어로 꽤 유명했던 시나브로 자매가 가제트 술집의 대표 분위기를 연출했다.
“메일을 보냈어요. 구구절절했죠. 시골에서 상경해 연극을 하다 보니 먹고는 살아야겠고, 절박한 심정으로 부탁드립니다, 아니 감히 여쭤보겠다면서 인테리어를 부탁했어요. 솔직히 한 명은 반대, 한 명은 찬성했다더라고요. 결국 저랑 만나고 난 다음에 해주기로 하셨어요. 솔직히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으로 해주셨어요. 빈티지 핸드메이드라는 것이 작품과 상업의 중간인데 미안하고 또 너무 고마웠습니다.”
한 달에 80만원만 벌면 좋겠다
2009년 11월, 가제트 술집이 드디어 오픈했다. 열자마자 사람들이 계속 들어왔다. 사람들이 줄을 서는지도 처음에는 몰랐다.
“지금도 전화가 와요. 웨이팅(대기) 시간 얼마나 걸리느냐고요. 신기해요, 옛날 생각하면. 그런데 욕심이 없었기 때문에 잘된 거 같아요.”
한 달에 딱 80만원 벌 생각으로 가게를 열었다. 돈 욕심이 없었다. 80만원 벌려고 한 사람이 150만원 버니까 너무 좋았다.
“손님이 앉아서 죽치는 거도 신경 쓰지 않았어요. 즐겁게 하니까 잘된 거예요.”
김경범 대표는 1년 반 만에 지인에게 빌렸던 돈을 다 갚았다. 그런데 지금 누가 자기처럼 창업한다고 하면 뜯어 말린다. 본인은 운이 좋았던 것이지 빚은 원래 못 갚는 것이 빚이기 때문이다. 배우의 길을 잠시 접어두고 김경범 대표가 얻은 것은 너무 많다. 부인이 생겼고 아이가 태어나면서 가정을 이뤘다. 창업을 열망하는 후배, 현역 은퇴자의 조언자로 나서 창업을 도왔다. 그래서 10개의 가맹점과 2개의 직영점을 가진 이른바 프랜차이즈 가제트 술집으로 거듭났다.
평균대 위를 오르다, 배우와 가제트 사이
반면, 김경범 대표는 무대와 촬영 현장을 그리워하는 배우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배우로서의 삶이 까마득히 멀어져 간 것 같아 부쩍 아쉽다. 그래서 요즘 중국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인터뷰가 잡혀 있던 날도 중국어 수업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중국어는 솔직히 반반이에요. 배우적인 측면과 비즈니스적 측면이 있어요. 솔직히 내 생활에서 배우 생활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우리나라는 아직까지 오디션보다는 감독, 작가, 스태프를 자주 만나야 해요. 지금 사드문제 때문에 한류가 단절됐다지만 언젠가 다시 좋아질 거잖아요. 그때 김경범이라는 배우가 중국어를 할 줄 안다고 하면 캐스팅에서 유리하지 않을까요(웃음)? 그리고 사업적인 면에서는 먹고살아야 하잖아요. 내가 전문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고 가제트가 계속 승승장구할 거란 보장도 없고 말이죠. 블루오션인 중국에 치킨도 삼겹살도 아닌 막걸리 전문점은 어떨까. 강남이 아닌 합정동 뒷골목에 막걸리라는 아이디어를 들고 들어왔던 것처럼요.”
물론 사업을 하면서 배우로서의 센스가 다양하게 발휘됐다. 가게를 운영하는 것도 하나의 기획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김경범 대표가 맛으로 손님을 대하는 자세가 꼭 무대 위 배우의 모습과 닮아 있다.
“대다수 음식점 주인이 자기 음식은 다 맛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에요. 관객이 재미없으면 재미없는 건데 우기면 무슨 소용이에요. 관객에게 연기로서 만족감을 주듯, 납득할 만한 맛으로 손님에게 다가가야죠. 계속 손님의 입맛을 맞춰간 것이 주요했던 거 같아요. 최고의 맛이 아니라 만족감으로 사람 마음을 움직이잖아요. 공연할 때 배우와 관객과의 관계처럼 손님이 과연 맛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지속적으로 고민해요.”
그렇다면 김경범 대표의 앞으로의 계획은? 커가는 아이와 화가인 부인을 위해 사는 것은 기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자신의 꿈을 위해 다시 한 발짝 다가서고 싶다고 한다.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 오래전부터 있었다. 굳이 배우를 하지 않더라도 문화 전반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다가갈 계획이라고.
“지금도 차 안에 유튜브에 관한 책이 있어요. 예전에는 돈을 좀 무시했는데 이제는 더 열심히 벌어보려고요. 배우가 꼭 아니어도 다양한 문화 콘텐츠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밑바닥 배우 인생에서 우리 동네 뒷골목 세련된 막걸리 집으로 손님 취향 제대로 저격한 김경범 대표. 이제 다시금 꿈의 무대로 향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운빨을 모으고 모아 또 한 번 날려보겠다는 홈런 한방! 그럼 두 손 모아 기다려볼까?
글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knbae24@hanmail.net)
2017년 정유년(丁酉年)의 새해가 밝았다. 힘찬 닭 울음소리로 새해를 희망차게 여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닭띠 연예인들이다. 닭띠생은 지능과 지모에 뛰어나고 앞을 내다보는 예견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날카롭고 단정하며 체계적이고 결단력도 있다는 말도 많이 듣는다. 이 때문에 연예인 스타 중에는 닭띠가 유독 많다.
정유년을 자신의 해로 만들겠다는 닭띠 연예인은 누구일까. 대중과 만나며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2005년생 12세 아역 스타 김유빈에서부터 1933년생 84세 원로가수 명국환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연예인이 닭띠다.
가장 어린 2005년생 12세 닭띠 연예인에는 아역 스타 김유빈, 김지영, 홍화리와 리틀 싸이 황민우 등이 있다. 1993년생 24세 닭띠 연예인은 드라마 , 으로 스타덤에 오른 박보검, 가수와 연기자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이유·정은지, 국민 남동생으로 뛰어난 연기력을 펼치고 있는 유승호가 있다. 이 밖에 1993년생 닭띠 연예인에는 힙합 스타 비와이, 최고 아이돌 그룹 엑소의 디오, 오디션 프로그램 스타 로이킴과 백아연 등이 있다.
1981년생 36세 닭띠 연예인 중에는 대중의 뜨거운 사랑을 받는 톱스타들이 아주 많다. 요즘 시청자들과 만나고 있는 드라마 에서 여자 주인공으로 나와 국내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최고 인기를 얻고 있는 톱스타 전지현, 등 수많은 영화에서 강력한 흥행 파워를 자랑하고 있는 최고 미남 스타 강동원, 드라마와 영화를 오가며 여성들의 절대적인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조인성이 대표적인 36세 닭띠 연예인이다.
뛰어난 가창력으로 사랑을 받으며 드라마 OST 여왕으로 등극한 거미와 린, 저음과 고음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목소리 하나로 대중을 감동시킨 9연승에 빛나는 록밴드 국카스텐의 하현우, 매력적인 목소리로 여성 팬들의 가슴을 뒤흔드는 박효신과 케이윌, 여자 힙합 뮤지션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윤미래, god 출신으로 시원한 가창력이 강점인 김태우 등이 36세 닭띠 가수들이다. 원조 걸그룹 SES의 요정에서 연기자로 변신한 유진, 드라마에서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소유진, 예능과 드라마를 오가며 활동하는 송지효, 강렬한 연기로 존재감이 확실한 김래원, 부드러운 감성을 드러내는 이상윤, 훈남 이미지의 이동욱은 36세 닭띠 연기자이고 개그맨 허경환도 1981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1969년 48세 중년의 나이에도 대중에게 강렬한 존재감을 발산하며 왕성하게 활동하는 닭띠 연예인도 적지 않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코믹 연기는 물론 중후한 연기까지 해내며 다양한 캐릭터 연기를 소화하고 있는 김승우, 작곡가·가수·예능 프로그램 MC로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윤종신과 주영훈, 한국 엔터테인먼트 업계를 선도하는 YG엔터테인먼트의 양현석 대표, 모델 출신 연예인 이소라, 높은 인기를 누리며 연기자로 맹활약하고 있는 하희라, 신애라, 윤유선이 48세 닭띠 연예인이다.
신세대 스타를 능가하며 전방위 활동을 펼치고 있는 1957년생 60세 닭띠 연예인도 많다. 최근에도 신곡을 발표하며 가수로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노사연과 최진희, 이용, 김수철, 팔색조 연기로 시청자와 관객의 눈길을 사로잡고 있는 송승환, 김갑수, 강석우, 김보연 등이 대표적인 60세 닭띠 연예인이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 영화, 무대 등을 통해 대중과 만나는 1954년생 72세 닭띠 연예인은 조영남, 임현식, 선우용녀, 현철, 이상해, 박인환, 박인희, 박일남, 장용, 최주봉, 김도향, 서유석 등이고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며 여전히 무대에 서는 원로가수 명국환, 원로 코미디언 임희춘 등은 1933년생 닭띠 연예인이다.
2017년 정유년, 자신의 해를 맞은 닭띠 연예인들의 새해 포부는 무엇일까. “건강이 허락하는 한 무대와 방송에 계속 출연하겠다. 84세라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 가수로서 열정과 노래에 대한 애정, 그리고 팬이 존재하는 한 노래를 부르겠다. 2017년에는 닭띠 해인 만큼 더 많이 활동하겠다.” 원로가수 명국환의 새해 포부다.
조연 연기자로 최고의 위치에 오르며 수많은 드라마에서 감초 연기로 빛을 발하고 있는 중견 스타 임현식은 “1969년 MBC 공채 1기로 연기활동을 시작한 이후 한 번도 연기를 하지 않은 해가 없었다. 지난 48년 동안 드라마와 영화,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 시청자와 관객들을 만난 것처럼 올해도 드라마 등을 통해 시청자와 만나고 싶다. 특히 올해는 노년의 사랑을 멋지게 소화하는 멜로 연기에 도전하고 싶다”며 새해 바람을 피력했다.
여전히 청춘스타의 외모와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60세의 강석우는 “나이 들어가면서 더 절감하게 되는 것은 가족의 소중함이다. 연예인이라는 직업의 특성상 생활이 불규칙해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많지 않다. 올해는 라디오 DJ와 드라마 활동을 하면서 가족과 함께 보내는 시간도 많이 갖고 싶다. 연예인으로서뿐만 아니라 가장으로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소박한 소망을 밝혔다.
세 아이와 함께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48세의 신애라는 “미국 캘리포니아 히즈 유니버시티에서 밟고 있는 기독교 교육학 박사과정을 충실하게 공부하고 싶다. 아이들이 건강하고 밝게 자랄 수 있도록 보살피는 것도 소중한 일이다. 미국에서 부모를 잃는 한인 청소년들이 급증하고 있는데 한인들이 입양해서 맡자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올해 더 열심히 노력해서 미국의 많은 한인들이 부모가 없는 한인 청소년들을 입양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새해 목표 중 하나다”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왕성하게 펼쳤던 사랑 나눔을 미국에서도 여전히 실천하는 모습이었다.
지난해 2월 출산해 아이 엄마가 됐지만, 여전히 빼어난 외모를 자랑하는 36세의 전지현은 “현재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 새해 목표다”라고 말했고 여성 팬뿐만 아니라 남성 팬도 많은 조인성은 “올해는 이전과 다른 모습과 분위기를 보여줄 수 있는 캐릭터나 작품을 선택해 시청자와 관객들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많은 중년 여성 팬들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는 국민 남동생 박보검은 “새해에도 좋은 작품에 출연하고 싶다. 국내외 팬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작품마다 최선을 다하는 것이 닭띠의 해인 2017년 정유년의 가장 큰 목표다”라며 원칙적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바람을 드러냈다.
자신들의 해를 맞은 수많은 닭띠 연예인들이 2017년 정유년에 어떤 활동을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크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서양 속담이 있다. 환경 변화에 대응하는 삶의 지혜를 말하고 있다. 필자는 어느 날 인생 1막에서 인생 2막으로의 변화에 대응해야 했다. 그리고 ‘용도변경’이라는 적극적인 자기 변신을 통해 활기찬 후반 인생을 맞이하게 되었다. ‘용도변경’은 필자의 이름 ‘변용도’를 원용해 만든 단어다. 한자의 의미는 다르지만 일상에서 많이 사용하는 용도(用途)와 한글 표기는 같다. 필자는 이 단어로 가족을 위한 그동안의 헌신적 삶에서 자신을 위한 삶으로의 전환을 선언했다. 또 생업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접어두었던 꿈에 다시 도전해보기로 했다. 47세의 조기퇴직, 금융위기 등 매우 열악한 환경이었지만 ‘용도변경’된 삶을 통해 사진작가, 강사로 거듭나 현재는 인생이모작의 결실을 거두고 있다. 손해보험사에서 일하다가 퇴직한 필자는 이후에도 보험과 관련한 일을 하면서 사는 것이 편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혀 새로운 분야에 도전했고 지금은 평생 일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스토리를 오늘 들려드리려고 한다.
47세에 용도 폐기되다
필자는 대학교 졸업 직전 고려화재해상보험에 입사해 20년을 다녔고 촉망받는 직장인이었다. 20년 전에는 임원으로서 부산·경남 본부장을 맡았고, 1977년 12월 말에 해임되었다. 회사에서 쓸모가 없는, 즉 용도가 없어진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필자는 이름에 빗대어 ‘용도폐기’되었다고 우스갯소리처럼 말한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금융위기(IMF)까지 닥쳐 재취업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고, 밥벌이를 위해 고육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다. 만화방으로 시작해 부대찌개 음식점까지 열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먹고살기 위해 또 다른 일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급여의 많고 적음을 신경 쓸 처지가 아니었다. 월 40만원을 받으며 작은 회사 조경관리사로 취업해 매일 아침 긴 대나무 빗자루를 들고 회사 마당을 쓰는 마당쇠 역할도 했다. 일당을 벌으려 MBC 드라마 의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다. 퇴직 후 10년간은 정말 다양한 경험을 했다. 지금은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자존심이 많이 상하기도 했다.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보고 용도변경된 삶을 살기로 하다
필자의 나이 57세 때 두 친구를 갑자기 잃었다. 모두 심장에 이상이 생겨 어느 날 유명을 달리한 것이다. 친구의 죽음을 보면서 진정한 삶이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퇴직 후 잡다한 일을 하며 보낸 10년을 되돌아보았다. 분명 열심히 살았으나 세월만 쏜살같이 지나가고 내로라할 만한 성취는 없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두 친구처럼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게 될 것 같았다. 100세 장수시대에 어떻게 하면 보람 있는 후반 인생을 보낼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40, 50년이 될지도 모르는 노후의 긴 시간이었다. 필자와 같은 세대는 가족을 위해 하기 싫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것은 내 인생이면서 주인공이 아닌 조연으로 사는 삶이었고, 타인을 위한 용도, 즉 타(他) 용도로 사는 삶이었다. 뒤늦게나마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제는 주인공으로 내 인생을 살아보자!” 필자는 먹고사느라 오래전에 접어둔 꿈을 생각했다.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들은 꿈을 실현하는 데 쓰기로 마음먹었다. 먼저 사진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은퇴하면 언덕배기에 캔버스를 세우고 그림을 그리는 꿈을 꾸곤 했는데, 그 꿈과 유사한 사진으로 바꾸었다. 붓 대신 카메라를 든 인생 2막의 길이었다.
60세에 늦깎이 사진작가가 되다
필자는 지리산 청학동에서 태어나 유·소년 시절을 그곳에서 보냈다. 자연과 함께하며 감성을 키웠고 초등학교 시절에는 수채화를 자주 그렸던 기억이 있다. 사진은 직장에서 홍보 업무와 사보편찬 업무를 담당할 때 흥미를 키웠다. 잘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어 60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사진을 배울 용기를 가졌던 것 같다. 2010년 7월, 필자는 고양시 무료사진 교실에 참여했다. 환경은 열악했다. 초보자 솜씨에 카메라 장비 또한 콤팩트 카메라가 전부였다. 함께 공부한 다른 수강생의 고가 카메라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현실과 형편을 인정하고 사진 실력 향상에만 몰입했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지 3개월 후부터 공인 사진작가 공모전에 도전했다. 공인 사진작가 인증을 받으려면 공모전에 출품해 입선이나 입상으로 일정 점수를 얻어야 했다. 이 목표를 이뤄내고 싶었다. 그러나 일 년에 스물여덟 번 응모해 절반을 낙선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많았지만 멈추지 않고 도전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2011년 9월에 드디어 인증을 받아 공인 사진작가가 되었다. 그 뒤에도 새로운 목표를 설정해 도전을 이어갔다. 그리고 사진을 배운 지 3년째 되던 해 국전에 입선했고 부산일보가 주최한 전국사진대전에 출품한 작품 ‘닭장’이 좋은 심사평으로 우수상을 받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주관한 8만 시간 디자인 공모전 사진 부문에서 ‘몰입’이라는 작품이 우수상으로 뽑혀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이러한 결과의 이면에는 사진을 통한 재능기부가 큰 역할을 했다. 좋은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스스로 더 많은 공부를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게 배우는 것이라는 말은 옳은 말이었다.
40만장을 찍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2010년 7월부터 지금까지 6년 4개월을 매일같이 사진에 빠져 살았다. 지금까지 찍은 사진의 숫자는 무려 40만장에 이른다. 역산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200여 장을 찍어야 나오는 숫자다. 어느 날은 파파라치로 오인되어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뒤늦은 나이에 도전해 좌절과 고난의 순간도 있었지만 몰입하고 작업을 계속 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가 있었기 때문이다. 2014년 11월 24일에는 KBS 1TV 에 사진작가로 출연함으로써 삶의 정점을 찍기도 했다. 최근에는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 열린 (사)은퇴연금협회와 머니투데이 방송이 주최한 ‘The Senior 2016’에 사진 전시 초대를 받아 ‘카메라로 그린 수채화 10선’을 주제로 사진을 전시했다. 판매 목적이 아니었는데 작품 모두가 팔려나가 기쁨을 맛보기도 했다.
사진을 바탕으로 명강사에 도전장을 내밀다
카메라를 들면 하루가 빠르게 지나간다. 시간이 짧기만 하다. 이제 사진은 취미가 아닌 일상이 되었고 카메라는 필자의 또 다른 친구다. 100세 장수시대가 두렵지 않다. 은퇴 전의 직업과 전혀 다른 분야의 일을 뒤늦은 나이에 시작했지만 참 잘 선택한 결과가 됐다. 이후 필자는 사진을 바탕으로 또 다른 영역 확대를 꾀하기 시작했다. 사진을 통한 여가관리의 모범적 사례가 되면서 그 경험을 배우려는 퇴직 예정자와 은퇴자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필자는 62세에 또 다른 분야인 강사 활동에 도전장을 내밀었고 여가설계, 변화관리 강사로 활동을 넓혀나갔다. 이제는 사진작가로서의 활동보다 강사로서의 활동이 더 많아져 기업체와 국가 산하 인력개발원, 대학교의 평생교육원, 사회종합복지관 등의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KBS 1TV , SBS라디오 러브에프엠의 프로그램에 3년간 고정 출연, 토마토TV와 머니투데이 방송에서 특강, 한국직업방송 로 출연도 했다.
열악한 환경을 기회로 전환하는 ‘용도변경’의 삶이 성공의 핵심
필자는 사진작가, 강사로서 삶의 보람을 만끽하면서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제2직업으로 자리매김하기 전에는 열악한 환경 속에 있었지만 과거를 내려놓고 현실을 인정하며 몸집 줄이기(다운사이징)로 환경 변화에 적절하게 대응한 ‘용도변경’의 생활 방식이 성공의 핵심 역할을 해줬다. 뱀이 고통을 참으면서 허물을 벗어야 살아갈 수 있듯 환경 변화에 대한 꾸준한 자기 변신, 즉 용도변경을 통한 2차 성장은 인생 2막의 선택사항이 아닌 필수라 생각하고 실천한 결과다.
베풀고 나누면서 다 쓰고 가리라
필자의 오늘은 많은 사람의 도움과 은혜로 이루어졌다. 이제 그 은혜에 보은할 할 때라 여긴다. 이웃과 사회를 위해 경험과 지혜를 베풀고 나누는 사회공헌을 위해 또 다른 용도변경, 즉 ‘공(公)용도’를 인생의 최종 목표로 삼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이 과정의 하나로 두 권의 책, 와 를 출간했다. 아직 많이 부족하고 가보지 않은 길도 많음을 느낀다. 현재에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꿈을 꾸며 도전을 멈추지 않으리라. 필자의 소소한 경험담이 같은 길을 가려는 분들에게 조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희망해 본다.
한 번 빠져들면 출구 찾기 힘들다는 배우 금보라를 돌직구 시사평론가 이봉규가 만났다. 중년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금보라는 지나간 삶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지며 아름답고 당당한 삶을 열어 가고 있었다. 그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으나 또 많이 달라져 있기도 했다. 그간 몰랐던 그녀의 진짜 모습을 리얼하게 보여 주면서 그녀와 그는 꽤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녀의 자취가 ‘센 언니’처럼 보이겠지만 금보라는 도시락 싸주는 엄마, 현모양처로 살고 있었다.
글 이봉규 시사평론가
최근 MBC 주말드라마 에서 ‘명품연기’를 보여 주고 있는 금보라와의 데이트 약속을 잡고서는 설레었다. 거침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쏟아 낼지 궁금해서였다. 나와는 TV조선의 라는 프로그램에서 몇 달간 같이 방송을 한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그녀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에 분명 깜짝 놀랄 이야기가 쏟아져 나올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 금보라는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듯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폭주했다. 특히 분위기가 무르익자 정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더니 눈이 반짝거리면서 폭탄발언을 와장창 쏟아 냈다.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정치인들 미친 거 아닙니까?” 라고 핏대를 세우더니 “우리 집 앞에 사드를 설치하라고 데모라도 하고 싶다”면서 “대한민국 국민이 어떻게 이렇게 안보에 무책임 할 수 있나?”하고 광분한다. 그녀의 평소 성격대로 솔직하고 꾸밈이 없이 민감한 정치적 발언도 서슴지 않는다. 연예인이 예민한 정치적 발언을 하면 자칫 구설수에 올라 상당히 곤란을 겪을 수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그녀 성격에 이봉규가 ‘보수 꼴통’이라서 분위기를 맞추려고 하는 이야기기는 절대 아닐 것이다. “나 금보라야!”라고 금방이라도 소리칠 것 같다.
사람들이 답답해서 할 말이 많아도 토론하기를 꺼리는 세월호에 관해서도 거침이 없다. “세월호 침몰은 부도덕한 기업의 잘못으로 일어난 비극적 사건인데 왜 대통령을 욕하냐?”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는다.
내친김에 정치 이야기를 더 끌고 나갔다. 금보라는 충청남도 당진이 고향이라 같은 충청도 출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대통령 되는 걸 바랄 줄 알고 그에 관해 물었더니, “반기문 절대 안 찍겠다”고 잘라 말한다. 그 이유는 “벌써 자기가 대통령이 된 줄 알고 거품이 잔뜩 들어가 있어서 싫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새누리당에서 이정현 대표가 요즘 괜찮아 보인다고 말한다. 그의 인생 스토리가 드라마와 같아서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는 분석이다. 어린 나이에 배우로서 안 해 본 역할이 없을 정도로 간접 경험을 많이 해 본 터라 인생스토리가 중요함을 깨달은 것은 아닐까. 필자도 대통령이 될 사람은 인생스토리가 국민들에게 감동을 주어야 표로 연결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서 그녀의 분석이 날카롭게 꽂힌다. 정치평론가 누구도 아직 확신을 가지고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될 수도 있다고 예언하지 않는데 금보라가 말한 것이다. 정치평론가 보다 오히려 일반 시민들이 잘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냥 마음속에 와 닿는 대로 평가하기에 이심전심으로 통하고 그게 선거 결과로 그대로 반영 될 수 있다는 논리다. 물론 이정현 대표가 지금 상황으로 볼 때 대통령이 될 확률은 그리 높아 보이지 않지만 혹시 모를 일이다. 만약 이정현 대표가 대통령이 된다면 아마 대한민국의 유명인사들 중에서는 금보라가 처음 맞추었을 것 같다.
필자가 진행하는 TV조선의 에 게스트로 초대해서 본격 정치토론을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요청하자 그녀는 흔쾌히 응했다. 조만간 금보라가 정치토크에서 열변을 토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개봉박두! 기대해도 좋을 듯!
두 번째 남편, 먼저 자빠뜨린 남자
이혼의 아픔을 겪고 난 후에 지금의 남편과는 정말로 행복해서 “비행기 타고 가다가 이대로 떨어져 죽어도 한이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금방 “아니지! 지금은 행복하니까 죽으면 아깝지”라고 번복한다. 지금의 남편과는 우연히 만났는데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서 “나하고는 안 되겠다”하고 지레 겁먹었다고 털어 놓는다. 그래서 이판사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런 그녀의 털털하고 솔직한 모습에 반해서일까 그와 결혼에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남편과 만난 지 8개월 만에 금보라가 먼저 결혼하자고 프러포즈를 했단다.
남편 이야기가 나오니까 입에 모터를 달아 놓은 것처럼 자랑을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다. “통통하고 생긴 것도 마음에 들지만 경상도 ‘상남자’에다 배려심이 많다”며 그녀는 한마디로 남편을 존경한다고 한다. 결혼 전에 남편과 데이트 할 때 그녀가 밥값과 술값은 도맡아 냈을 뿐만 아니라 지갑이나 벨트 등 선물 공세를 펼쳤다는 것이다. 다른 여자들과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금보라처럼 예쁘고 대한민국이 다 알아주는 스타인데 금상첨화로 매너까지 좋다면 어느 남자가 반하지 않을까? “나는 늪이거든~”이라고 또 자랑 질이다. 한 번 빠지면 절대로 헤어날 수가 없단다. “인간 금보라를 제대로 알려면 사계절은 지나야 한다”고 목청을 높인다.
그녀가 아직도 남편과 아이들 도시락을 직접 싸 준다니 믿기 어렵다. 밤샘 촬영을 하고 지쳐도 도시락은 꼭 자기 손으로 정성스레 싸 준다니 이봉규가 금보라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자기가 남편보다 뛰어난 것이 없기 때문이란다. “남편에게 잘 해 줘서 내가 없으면 불편하게 만들어 내 소중함을 어필하자는 작전”이라는 것이다. 라는 프로그램에서 같이 방송 할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예쁘고 거친 여우’임에 틀림없다.
그런 그녀도 “이혼 후 아이들 문제로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고 털어 놓는다. 아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어린이날 운동회를 갔는데 ‘아빠와 달리기’ 경기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에는 재혼 전이라서 아빠가 없었었기에 참가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옆에서 한 학부모가 대신 아빠 역할을 해 주겠다고 했지만 기분이 상해 주최 측에 ‘부모와 달리기’로 바꿔 달라고 항의했다. 결국 그날 엄마와 뛴 사람은 우리 아들뿐이었다”며 당시의 안타까운 사연을 말한다. 금보라는 아들과 열심히 뛰었지만 아빠들과 뛰는 아이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이가 위축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엄마가 못 뛰어서 졌다”고 속상해 했지만 “자기 혼자 아빠 없이 엄마와 뛰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고 한다. 아마 깔끔한 성격은 엄마를 닮은 것이 분명해 보인다. 여배우 처지에 아빠와 달리기 경기에 엄마가 뛰게 해달라고 우겨서 참가했으니 그녀도 참 어지간하다.
그녀에게는 지금의 남편이 데리고 온 25세의 딸이 있는데 최근에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명품 신발을 사와 속상했다. 아직 명품을 살 나이는 아니라는 평범한 엄마와 같은 생각이다. “13년 동안 자기 딴에는 정성껏 잘 키웠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것 같다”는 고백이다. 소리 지르면서 야단치면 폭발할 것 같아서 카톡으로 차분하게 주의를 줬다고 한다. 그리고는 주말에 반품을 하는지 지켜보고 아니면 어떤 형태로든 응징을 할거라며 결과를 지켜보고 있다고.(추후에 반품했다는 메시지가 왔다.) 남편의 금보라에 대한 평가는 “가방끈은 짧아도 똑똑하고 아는 건 많지 않아도 현명한 여자다.” 남편의 평가대로 그녀는 현명하게 장문의 카톡으로 딸을 꾸짖었다. 그 내용을 지면으로 그대로 옮긴다.
어제 일은 내가 수십 번을 생각하고 생각해도 결코 옳지 않은 일이라 잠까지 설치는구나. 나름 딸내미를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잘 키웠다고 자부했건만 솔직히 약간은 쇼크라고 할까?
여하튼 속상하고 화도 났다.
어떻게 네 나이에 그런 쇼핑을 할 수 있는지? 아무리 명품 신발이 신고 싶다고 해도 그건 아니라고 본다.
세상 살면서 네 말대로 없는 게 더 많을 수 있지만 그 반대로 넌 다른 네 또래보다 많은 걸 가졌고 넘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설사 네가 돈을 많이 번다 해도 사치와 허영에 들떠서 생각 없이 명품만 쫓는 한심한 여자로밖에 난 생각이 안 들었다.
...(중략)...
아빠와 엄마가 너를 언제까지고 보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너 스스로 살아가려면 절제도 배우고 참을 줄 알고 그래야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단다. 너의 가치관으로 볼 때 내 지적이 틀린다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로서 널 위해 하는 말이다. 그래도 네가 옳다면 이것만은 알아 두길 바란다.
명품 신고 입고 든다고 사람이 명품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거. 올바른 삶을 살아갈 때 사람은 비로소 빛난다는 걸.
존경하고 사랑하는 남편이 데리고 온 딸이 내가 낳은 자식보다 더 애틋하고 사랑스러워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그녀의 글 속에 절절히 묻어난다. ‘계모는 이래도 계모고 저래도 계모’라는 내용의 책을 쓰고 싶다는 금보라의 속내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마도 기른 정이 낳은 정보다 깊다는 말일 것이다.
지금 인터뷰하고 있는 서울 강남구 청담동 극동빌딩 6층의 ‘M바’대표에게 직원들 빨리 퇴근시키라고 야단치면서도 뒤로는 직원들에게 택시비를 슬며시 건네는 금보라의 마음 씀씀이로 볼 때 딸에 대한 꾸짖음도 끔찍한 사랑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어느 보석이건 나를 빛나게 해 주지 않았다. 오직 남편만이 나를 빛나게 해줬다”고 하니 금보라의 딸에 대한 꾸짖음과 사랑은 정당해 보인다.
“마누라가 천국”이라고 말하는 자신감은 그녀의 일상에 배어 있을 것 같다. 외모만큼 섹시한 금보라의 일상을 염탐하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살면서 참 잘한 일이구나 생각되는 일이 있다. 10여 년 전 어느 날 국민연금 가입하라는 안내장을 받았다.
연금의 개념도 잘 몰랐고 돈을 버는 사람도 아닌 주부의 입장에서 관심이 가지 않았다.
쓰기에도 바쁜데 매달 일정한 금액을 10년간 내야 한다는 게 부담스러워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위층 사는 선배 언니가 가입해 놓으라고 권했다.
직장인으로 수입이 있는 사람만 가입할 수 있는 줄 알았지만, 경제생활 하지 않는 사람도 들을 수 있으니 가입해 놓으면 언젠가 도움이 될 거라는 조언이었다.
필자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런데도 참 경제 활동엔 무심해서 별로 달갑게 들리진 않았어도 언니의 조언대로 가입신청을 했다.
처음엔 5~6만 원대로 시작했었지만 해가 갈수록 금액이 늘어나 마지막 몇 년간은 매달 10만 원가량을 내야 했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10년이 지나 더는 돈을 내지 않게 되었는데 필자가 60세 되는 해부터 연금이 나왔다.
얼떨떨하기도 하고 공돈이 생긴 것 같아 매우 기분이 좋았다. 적은 금액을 냈었기 때문에 많이 나오진 않지만 30만 원 정도를 받고 있다.
필자가 죽을 때까지 받을 수 있다니 연금이란 제도가 참으로 고맙다.
그런 만큼 연금에 얽힌 이야기도 많이 있고 연금 사기라는 말도 들어 보았다.
필자는 미드(미국 드라마) 마니아다.
예전에 TV라면 KBS, MBC, SBS, 그리고 EBS밖에 몰랐는데 위성방송을 설치하고부터는 몇백 개나 되는 채널이 방송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한 번도 안 본 채널이 대다수이고 선호하는 채널이 몇 개 생겼다. 그때부터 손쉽게 미드를 보기 시작했는데 CSI 범죄 수사 시리즈물부터 인기 있다고 소문 난 미국 드라마를 열심히 찾아보게 되었다.
그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드라마가 위기의 주부들이다.
미국 부시 대통령 시절 영부인이 인터뷰하다가 위기의 주부 할 시간이라며 자리를 떴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기 있는 드라마이다.
게브리얼, 브리, 수잔, 르넷 등 매력적인 4명의 주부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기상천외한 우리 정서와는 다소 맞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이야기들이지만 한 편 한 편의 에피소드가 나를 사로잡았다. 위기의 주부들은 시즌 8로 종영되었으니 내가 다 본 에피소드는 100여 편이 넘는다. 다 통쾌하고 재미있지만, 그 중 인상적인 에피소드가 생각난다.
동네 아이들이 숨바꼭질하다가 이웃의 매클러스키 할머니 집의 지하실로 숨어들었다. 아이스크림이라도 꺼내먹으려고 냉동기를 열어보니 그 속에 할아버지 시체가 냉동되어 있었다. 살인자인 줄 알았는데 경찰에 잡혀간 할머니에 의해 밝혀진 진실은 20년 전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혼인신고를 못 하고 살아온 할머니는 연금을 받을 수 없는 게 두려워 남편이 죽은 사실을 숨기고 20년간을 냉동된 남편과 살며 연금을 받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때는 그 할머니가 살인자가 아닌 것에 안심했고 불쌍하다고 생각되어 이해를 해주었다.
그런 일이 실제로 우리나라에서도 있다고 한다. 신문에 보니 유령과의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부산의 한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13년 가까이 남편의 사망신고를 안 하고 연금을 받아 왔다는 것이다. 드라마에만 있는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실제로 이런 일이 있다니 놀라웠다.
그런데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는 것이며 그로 인해 새 나가는 세금의 액수가 엄청나서 각종 복지비를 지급하는 기관이 유령과의 전쟁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동안 부정으로 받은 돈은 환수한다고 한다. 마음이 혼란스럽고 심란하다.
안됐다고 생각해야 하는 건지 법을 어겼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해야 할지...물론 잘못한 일이니 바로 잡아야 하고,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제도를 튼튼히 해서 미리 방지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드라마로는 재미있었지만 참으로 씁쓸한 연금에 대한 이야기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 대중은 이 말을 이 전 대통령의 육성이 아닌 한 성우를 통해 더 많이 들었다. 1964년 방송된 라디오 드라마 · 등에서 이 전 대통령 역을 맡은 성우 구민(92)이다. 아직도 구민하면 이승만 대통령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아저씨, 나 추워요.” 1964년 개봉된 영화 의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다. 이 대사의 목소리 주인공은 배우 엄앵란이 아니다. 성우 고은정(80)의 목소리다. 1950~1970년대는 화면을 먼저 촬영하고 그 화면에 따라 대사, 음악을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으로 영화를 제작했다. 이때 화면 연기는 배우가, 대사 연기는 성우가 담당했다. 1960년대 최고의 여자 스타, 문희 남정임 엄앵란 김지미의 대사 연기는 모두 고은정이 도맡았다.
무명 신인이던 최진실을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1989년 삼성전자 CF다.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라고 말하는 최진실에 대중은 환호했다. 그런데 이 광고 목소리 연기를 한 사람은 최진실이 아닌 성우 권희덕이었다. 권희덕(60)은 유지인 임예진 등 1970~1990년대 스타들이 모델로 나선 CF의 목소리 연기를 한 유명 성우다.
라디오 시대이자 후시녹음 영화 시대였던 1950~1970년대 최고의 대중문화 스타는 성우였다. ‘얼굴 없는 배우’라 불리던 성우들은 ‘영화와 방송의 꽃’으로 평가받으며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한국 성우의 역사는 라디오의 역사와 궤를 함께한다. 1927년 경성방송국 개국으로 라디오 시대가 열렸다. 일본어로 방송하던 경성방송국에서 1933년부터 한국어 방송을 시작하며 등 라디오 드라마를 본격적으로 제작해 청취자의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 성우의 어머니’로 불리 우는 복혜숙 등 성우들이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해 청취자의 사랑을 받았다.
1945년 광복과 함께 서울중앙방송국(현 KBS), 1954년 기독교방송, 1959년 문화방송, 1963년 동아방송, 1964년 동양방송이 잇따라 개국하면서 라디오 방송 전성시대를 열었다. 서울중앙방송국이 1953년 성우를 최초로 채용하면서 성우라는 직종이 하나의 전문직으로 자리 잡았다.
‘청실홍실 엮어서 무늬도 곱게 티 없는 마음속에 나만이 아는 수를 놓겠소’로 시작되는 주제가를 아직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은 (1956년 10월~1957년 4월 방송)을 비롯해 등 라디오 드라마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 각 방송사들이 한 해 평균 150여 편의 라디오 드라마를 내보냈을 정도다. 청취자들은 성우들의 목소리 연기로 펼쳐지는 다양한 라디오 연속극에 빠져들었고 성우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는 대중 스타로 우뚝 섰다.
1963년 동아방송 공채 1기로 성우가 된 박웅(76)은 “30여 명 뽑는 성우 시험에 3500여 명이 몰렸다. 1960년대 성우의 인기는 엄청났다. 성우의 수입이 탤런트 등 다른 연예인의 수입을 압도했다”고 말했다.
또한, 1950~1970년대 동시녹음이 아닌 후시녹음으로 영화가 제작되던 시기에 성우들의 활약은 영화배우 못지않았다. 신성일 엄앵란 주연의 을 비롯한 수많은 한국영화가 성우들의 대사 연기로 완성됐다. 의 신성일이 연기한 남자 주인공의 대사 연기는 성우 이창환이 한 것이다. 여자 주연 엄앵란의 대사 연기는 고은정이, 트위스트 김이 연기한 건달 역의 목소리 연기는 오승룡(81)이 각각 했다.
고은정은 “1950~1970년대 한국영화는 동시녹음 기술이 없어 배우들이 연기한 뒤 성우들이 화면을 보고 대사를 녹음하는 후시녹음 시스템이었다. 이 당시 신성일 씨가 연기하는 모든 영화의 배역은 성우 이창환 씨가 맡아 대사 연기를 한 것처럼 특정 배우와 특정 성우 관계가 형성됐다. 나는 문희 엄앵란 김지미 남정임 안인숙 등 여자 주연 목소리 연기를 전담했다”고 말했다. 지금도 가끔 패러디되는 영화 의 안인숙이 맡은 여자 주인공, 경아의 “꼭 안아주세요”라는 대사 연기는 바로 고은정이 한 것이다.
성우들은 라디오 연속극과 영화뿐만 아니라 시사교양 프로그램 진행자로도 맹활약했다. 1962년부터 1972년까지 방송된 MBC 시사고발 라디오 프로그램 은 서민들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풀어줬는데 이 프로그램을 이끈 주역이 성우 오승룡이다.
오승룡은 “은 서민들이 하고 싶은 말을 속 시원하게 대신해 준 프로그램으로 청취자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생방송으로 진행된 이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아플 수도 없었고 휴가도 갈 수 없었다. 방송사고 없이 오랫동안 이어갈 수 있었던 것은 청취자의 열띤 반응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1950~1970년대 최고의 수입과 인기를 누리며 성우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성우는 구민 고은정 장민호 신원균 정은숙 김소원 윤미림 이혜경 남성우 심영식 주상현 오승룡 오정한 천선녀 이춘사 김영옥 사미자 김용림 나문희 전원주 등이었다.
청취자들은 실제 모습을 보지 못한 채 목소리만 듣고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상상하는 경향이 많았다. 라디오 연속극에서 주인공을 연기하거나 멋진 혹은 예쁜 목소리를 가진 성우들에게 팬레터가 쏟아졌고 심지어 연인이 돼 달라며 방송사를 찾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사미자는 “청취자들은 목소리만으로 성우의 외모와 성격을 파악했다. 목소리가 예쁘면 외모도 성격도 예쁠 것이라고 단정했다. 목소리와 다른 외모를 가진 일부 성우들을 보고 실망하고 돌아가는 청취자들도 적지 않았다”며 웃었다.
1980년대 들어 TV 수상기 보급이 확대되면서 라디오는 대중의 사랑을 잃기 시작했다. 또한, 한국 영화가 동시녹음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에 따라 대중의 폭발적인 사랑을 받았던 성우들의 인기가 급락하며 존재감도 급감했다.
1980년대 이후 성우들은 명맥을 유지하던 라디오 연속극에 출연하면서 TV에서 방송하는 외국 영화와 애니메이션의 더빙, 다큐멘터리 내레이션을 병행했다. 이 시기 김기현, 송도순, 박일, 배한성, 양지운 등이 외화 더빙이나 라디오 연속극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인기 성우로 눈길을 끌었다.
배한성은 “라디오 전성시대가 가고 텔레비전 시대가 열리면서 성우의 존재감은 축소됐지만 정확한 발음과 뛰어난 목소리 연기 등으로 외화 더빙과 내레이션 부분에선 성우들의 역할은 커졌다”고 말했다. 또한, 권희덕을 비롯한 일부 성우들은 각종 CF에서 목소리 연기를 펼쳤다. 권희덕은 “목소리 출연 CF는 3000여 편에 달하고 더빙한 외화 작품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말했다.
1990년대 이후 의 강희선, 의 이규화와 서혜정, 의 최덕희를 비롯해 김영선, 김승준, 정미숙, 구자형, 김서영 등이 외화와 애니메이션 더빙 등을 통해 인기 성우 명맥을 잇고 있다.
한편 성우로 활동하다 라디오의 입지가 좁아지면서 영화와 텔레비전 연기자로 전업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7월 끝난 tvN 드라마 에 주연으로 나선 것을 비롯해 드라마와 영화,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력을 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하는 나문희, 드라마와 영화에서 개성적인 캐릭터를 잘 소화하는 변희봉을 비롯해 정혜선, 김영옥, 남일우, 한인수, 김용림, 사미자, 전원주 등이 성우 출신 연기자들이다. 이들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빼어난 연기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1961년 MBC라디오 공채 1기로 성우 생활을 시작한 나문희는 “성우로 일할 때 외화 더빙을 많이 했는데 이것이 연기자로 전업하면서 큰 도움이 됐어요. 외국 여배우의 캐릭터가 제각각이잖아요. 다양한 캐릭터의 목소리를 연기하며 캐릭터를 분석할 기회를 얻었지요. 이것이 드라마와 영화 연기할 때 큰 힘이 됐지요”라고 말했다.
영화와 드라마를 오가며 탄탄한 연기력을 보여주고 있는 배우 한석규 역시 성우 출신 연기자다. 한석규를 드라마 에 처음 발탁해 연기자로 데뷔시킨 장수봉 전 MBC PD는 “한석규를 비롯한 성우 출신 연기자들은 대사 연기가 뛰어나다. 오랫동안 발성 훈련을 받아 감정의 결을 살리는 대사 연기를 잘한다”고 말했다.
방송사가 성우 공채 제도를 폐지한 2000년대 들어서도 성우들은 게임과 외화, 애니메이션 더빙과 CF, 라디오 연속극의 목소리 연기, 다큐멘터리 내레이션 등에서 활약하며 여전히 대중화의 주역으로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10대 여고생은 박태준 작가의 를, 20대 여성은 조석 작가의 를 보고 있다. 30~40대 남성 직장인들은 윤태호 작가의 에 몰두하고 있다.
최고 인기 예능 프로그램 MBC 은 가스파드, 기안 84, 무적핑크, 윤태호, 이말년, 주호민 등 6명의 작가가 유재석 박명수 등 멤버들과 함께 만든 작품을 6월 18일부터 한 달 넘게 내보냈다.
900만 관객을 넘기며 흥행 대박을 터트린 이병헌 주연의 영화 이 눈길을 끈 데 이어 하정우, 차태현, 이정재, 김하늘, 김해숙, 오달수 등 초호화 멤버가 출연할 영화 에 대한 기대가 높다. 17.3%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 방송 내내 숱한 화제를 낳았던 드라마 이 시청자의 좋은 반응을 얻었고 뮤지컬 는 관객들의 박수를 받았다. RPG(롤플레잉게임) 은 인기가 높다.
하일권 작가의 은 영국 영화제작사 페브러리 필름에 영화 판권이 판매됐고 캐러멜, 네온비 작가의 는 중국, 대만과 출판 계약을 체결했고 호랑 작가의 , 윌로우 작가의 등 수많은 작품이 미국 네티즌의 높은 관심을 끌고 있다.
이 같은 모습을 관통하는 하나가 있다. 바로 웹툰이다. 하루 수십만 명이 보는 등 스마트폰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콘텐츠가 웹툰이다. 윤태호, 주호민, 기안84 등 인기 웹툰 작가들은 연예인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리고 월 1억원에 육박하는 엄청난 수입을 올린다. 영화 부터 게임 까지 수많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연극, 게임의 원작이 웹툰이다. 을 비롯한 인기 웹툰 작품들이 속속 해외에 진출해 한류 동력으로 부상하고 있다.
인터넷과 디지털 기술의 발달,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이용이 급증하고 있는 스낵 컬처(Snack Culture)의 대표주자, 웹툰은 이제 마니아의 문화를 넘어 가장 강력한 대중문화로 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게임의 원천이자 한류 상승의 기폭제 역할까지 하고 있다. 웹툰이 대중문화의 강력한 먹거리인 동시에 젖줄 역할을 하고 있다. 웹툰을 알지 못하고서는 대중문화의 주요한 흐름을 알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웹툰은 기존 만화가 인터넷으로 플랫폼을 이동한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새로운 인터넷 문화 형식으로, 새로움을 찾는 한국의 인터넷 사용자들에 의해 이미 그 효율성이 검증됐고 외국 이용자들에게도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다.” 홍석경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가 1월호에 게재한 ‘모바일 TV와 웹콘텐츠, 새로운 시너지의 시대’라는 글을 통해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 급부상하고 있는 웹툰의 성격을 설명했다.
10~20대 젊은 마니아의 문화로 치부되던 웹툰은 이제 30~40대 중년층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즐기는 대중문화로 자리 잡았다. 네이버 웹툰 하루 이용자만 620만 명에 달하는 것을 비롯해 웹툰 사이트 상위 5개사 누적 회원이 9590만 명에 이른다. KT경제경영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국민 3명 중 1명이 웹툰 서비스를 이용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자료에 따르면 2013년 1500억원에 달하던 웹툰 시장(2차 부가가치 시장과 해외수출 포함)은 2015년 4200억 원을 돌파했다. 2016년 올해 웹툰 시장 규모는 5845억 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되고 2018년에는 8805억 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용자 급증과 영화, 드라마 등 부가 시장의 성장, 수출 증가 등으로 웹툰 시장은 급성장하고 있다.
웹(web)과 카툰(cartoon)의 합성어인 웹툰은 이미지 파일 만화의 총칭으로 텍스트, 이미지, 사운드 등의 멀티미디어 효과를 동원해 제작한 인터넷 만화를 의미한다. 웹툰은 1990년대 후반 IMF로 출판 만화 시장이 침체하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출판 만화를 스캔해 올리는 형태로 출발했다. 이 시기에 개인 컴퓨터가 일반가정에 보급되면서 개인 홈페이지 제작이 인기를 끌었는데 개인 홈페이지에 짧은 에세이 형태의 만화를 연재하는 작가들이 속속 등장하고 이 만화들이 각종 커뮤니티에 공유되면서 새로운 만화의 형태인 웹툰이 눈길을 끌기 시작했다.
2003년 포털 다음의 ‘만화 속 세상’ 서비스가 시작되고 강풀의 가 연재되면서 이용자에게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긴 서사를 가진 작품을 비롯한 다양한 작품이 쏟아지고 포털과 언론사, 전문 웹툰 사이트가 앞다퉈 웹툰 시장에 가세하면서 웹툰은 질적, 양적으로 비약적 발전을 거듭했다. 2009년 스마트폰의 도입으로 웹툰은 또 한 번 도약을 하며 시장을 확대해나가고 있다.
네이버 등 포털에서부터 카카오페이지 등 모바일, 통신사 사이트, 언론사 사이트, 레진코믹스를 비롯한 웹툰 전문사이트 등 다양한 플랫폼에서 수많은 웹툰을 게재하고 있다. 2015년 한해 기준 네이버 웹툰은 연재작품 159편, 완결작품 318편, 다음은 연재작품 99편, 완결작품 403편, KT(올레마켓)는 연재작품 52편, 완결작품 20편, 카카오 페이지는 연재작품 70편, 완결작품 1편, 레진코믹스는 연재작품 170편, 완결작품 80편에 달한다. 2015년 한 해 동안 윤태호 작가 등 전문작가 4661명이 5300여 편의 웹툰 작품을 포털, 전문사이트를 통해 쏟아냈다. 수만 명의 웹툰 아마추어 작가들도 개인 홈페이지나 포털 사이트에 다양한 작품을 선보이고 있다.
웹툰은 독창적인 스토리와 형식, 장르로 눈길을 끌고 있을 뿐만 아니라 PC, 스마트폰, 태블릿PC 등 다양한 플랫폼을 이용해 짧은 시간 안에 간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이점 때문에 이용자가 급증하며 가파른 상승세를 보인다.
무엇보다 웹툰은 드라마, 영화, 웹드라마, 뮤지컬 등 다양한 대중문화 분야의 원작으로 활용되는 원소스 멀티유스(OSMU) 콘텐츠로 각광을 받으며 대중문화 산업과 한류의 강력한 먹거리로 부상했다.
올해 들어 시청자와 만난 을 비롯한 수많은 드라마와 등 적지 않은 영화들이 웹툰을 원작으로 활용했다. 그뿐만 아니라 등 웹툰 작품들이 뮤지컬로, 연극으로, 게임으로, 웹드라마로 재탄생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2015년 발표한 보고서 ‘웹툰 산업 현황 및 실태조사’에 따르면 레진 코믹스 등 웹툰 전문사이트에서 연재된 작품 중 판권이 팔린 작품은 73개 작품으로 이 중 영화와 드라마로 만들어지고 무대에 올랐던 작품은 50개에 달했다. 또한, 다음 카카오에서 영상화하거나 예정된 작품은 40개에 달하고, 네이버 웹툰 중 영상화한 것은 17개, 영상화 예정 작품은 9개, 60개 작품이 영상화 판권 계약을 마친 상태다.
웹툰이 드라마, 영화, 게임 등 다양한 대중문화의 원작으로 활용이 급증한 것은 참신하고 독창적인 소재나 내용, 장르가 많은 데다 영상화하기 쉬운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백석예술대학교 영상디자인학부 김재호 교수는 “웹툰은 사건을 빠르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돼 디지털에 맞춤화된 현대인의 눈길을 쉽게 사로잡을 뿐만 아니라 영상화 작업도 쉽게 할 수 있다”고 분석한다.
웹툰은 최근 한류 콘텐츠로도 급부상하고 있다. 네이버, 레진코믹스 등 다양한 플랫폼에 소개된 웹툰 작품이 일본, 중국, 미국 등 해외에 진출해 현지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고 하일권 작가의 이 영국 영화사에 판권이 판매되는 등 수출도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웹툰은 최근 들어 한류 킬러콘텐츠 역할도 톡톡히 하고 있다.
웹툰은 이처럼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대중문화의 한 분야로서 진화를 거듭할 뿐만 아니라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문화산업 시장으로서의 잠재력도 날로 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