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배국남 대중문화 평론가 knbae24@hanmail.net
사극은 역사 속 인물을 소환해 현재적 의미를 부여한 뒤 생명력을 불어넣고 오늘날의 사람들과 만나게 한다. 그동안 이순신, 정조, 사도세자, 장희빈, 이성계, 광해군, 연산군, 허준, 윤동주, 김원봉 등 역사적으로 잘 알려진 수많은 역사적 인물이 새로운 시각에서 극화됐다. 또한 드라마 <대장금>의 장금처럼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을 발굴해 역사적 의미와 존재감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라 영화와 드라마 사극의 역사적 인물의 소환은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시대의 아이콘을 창출하는 진원지 역할도 한다.
올해도 MBC 사극 <역적>의 홍길동, 영화 <박열>의 독립운동가 박열 등 전통사극, 퓨전사극, 타임슬립 등 다양한 형태의 사극 영화와 드라마를 통해 다양한 역사적 인물을 소환하고 있다. 올해 사극을 통해 만나는 인물 중 단연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되는 인물은 신사임당이다.
<대장금>이후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한 이영애에 의해 표출되고 있는 사임당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바로 1월 26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SBS 퓨전사극 <사임당, 빛의 일기>다. 사임당을 사극으로 이끌어낸 이유는 뭘까.
“현모양처라는 박제된 이미지의 ‘신사임당’의 틀을 깨고 여자로, 예술가로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며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는 여자 사임당의 이야기를 그리고 싶었다.” 드라마 제작에 돌입하며 제작진이 밝힌 기획의도다.
‘현모양처’ 이미지 탈피 노력
극본을 쓰고 있는 박은령 작가는 “엄마로서, 아내로서의 삶도 중요하지만, 예술가로서의 삶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한 여자가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적극적으로 개척해나가는 모습에 주목했다. 워킹맘으로 살아가는 일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힘든 일인데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극 중 사임당의 아버지 유언이 ‘삶을 선택하라’였다. 사임당이 삶을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적극적으로 개척해서 살아가는 모습을 조명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연출을 맡은 윤상호 PD는 “대한민국 사임당을 드라마화하기 위한 기획 의도는 대한민국 국민의 자긍심과 자부심을 위한 좋은 드라마를 만드는 것과 연결된다”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13년 만에 드라마에 복귀해 현대(서지윤)와 조선시대(사임당)를 오가며 1인 2역을 하는 이영애의 사임당에 대한 생각은 어떨까.
“500년 전 사임당도 지금 5만원권에 박제된 듯한 모습을 원하진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자로서의 사임당에 생명을 불어넣어 새 인물로 만드는 게 재밌었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한국 미술사를 전공한 대학 시간강사인 워킹맘 서지윤이 이탈리아에서 우연히 발견한 사임당 일기에 얽힌 비밀을 조선시대와 현재를 넘나들며 풀어내는 타임슬립 퓨전사극이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일기 속에 숨겨진 천재 화가 사임당의 불꽃같은 삶과 ‘조선판 개츠비’ 이겸과의 불멸의 인연과 사랑을 아름답게 담았으며 현모양처라는 고정된 이미지의 사임당이 아닌 워킹맘이자 예술가로서의 열정에 초점을 맞췄다.
현대적 여성상 반영할 수 있을까
사임당은 율곡 이이의 어머니이자 현모양처라는 획일화한 표상으로 수많은 사람에게 각인된 게 사실이다. 사임당 하면 떠오르는 고정화한 이미지와 그녀에 대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은 사임당의 삶이 아닌 후대의 필요에 의한 해석과 의미부여 작업으로 초래된 것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박정희 정권 시절 육영수 여사의 국모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이른바 사임당의 현모양처 이미지를 강화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5만원권 지폐의 인물로 등장하면서 불편한 시선과 편견이 확대 재생산됐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전통적 여성상으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투영된 현모양처의 표상이었던 사임당을 시대와 운명, 남성 중심의 인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삶과 사랑, 예술을 적극적으로 개척한 주체적 인간의 아이콘으로 전환하는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그것도 2017년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에게 다양한 의미와 현실로 다가오는 ‘워킹맘’이라는 문양으로 말이다.
최근 들어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하다. 직업을 갖는 여성도 급증하고 있다. 그리고 출산을 하고도 일하는 워킹맘들도 많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아직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인식이 엄존해 있고 남녀차별 더 나아가 여성혐오 행태마저 빈발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사임당, 빛의 일기>는 의도가 개입된 획일화한 해석으로 우리에게 ‘현모양처’, ‘전통적 여성상’으로 인식되어온 사임당을, 역사적 사실과 작가의 상상력이 어우러진 작업을 통해 2017년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공감과 희망을 제시하는 주체적 여성상으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 새로운 시선과 의미가 투영된 사임당으로의 전환은 지난한 작업일지도 모른다.
이 작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돼 사임당이 새로운 문화 트렌드와 아이콘으로 부상하기 위해서는 <사임당, 빛의 일기>가 시청자, 특히 이 땅의 수많은 여성이 공감할 수 있는 현재적 가치를 체화한 2017년의 사임당을 잘 구현해야 한다. 또한 사임당에게 덧씌워진 편견과 왜곡된 시선을 자연스럽게 걷어내면서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오늘의 의미를 담보해야 한다. 그것도 우리 사회에 엄존해 있는 남녀차별적 시선과 여성혐오적 행태를 무력화하는 긍정적 이데올로기를 드라마에 완벽하게 승화하면서 구현해내야 한다.
<사임당, 빛의 일기>는 정치적 시선,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등 여러 가지 이유로 사극에서 좀처럼 소환하지 않았던 신사임당을 오늘의 시청자와 만나게 하고 있다. 사극으로 부활한 사임당은 올해 시대정신을 담보한 새로운 인물 아이콘으로 눈길을 끌며 강력한 문화 트렌드로 부상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