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마트폰 등으로 상품이나 서비스 주문을 받아 오프라인으로 해결해주는 ‘O2O 서비스’(Online to Offline Service). O2O 서비스 앱 중 가장 보편화된 것이 배달음식 앱이나 택시 부르기 앱 등이다. 그밖에 활용해볼 만한 몇 가지 앱을 소개한다.
도움말 SNS 소통연구소 이종구 소장
◇ 크린 바스켓
세탁 수거·배달 서비스 앱이다. 원하는 세탁물의 종류와 수량을 체크하고 세탁 수거 및 배달 일시를 선택해 이용할 수 있다. 오전 10시부터 자정까지 운영하며, 실시간 세탁물 추적·관리가 가능하다.
◇ 당신의 집사
집 안 청소 가사 도우미를 부를 수 있는 앱이다. 집 안 구조(방, 욕실, 부엌 등 선택), 청소 시간을 직접 입력해 견적을 낼 수 있다(기본 2시간, 2만6000원). 원하는 날짜·시간을 예약하면 엄격한 면접과 현장 실습을 통해 선발된 집사 클리너가 방문한다.
◇ 세차왕
출장 세차 예약과 세차장 검색을 손쉽게 할 수 있다. 세차 종류, 일자, 시간, 차량 정보를 입력하면 세차왕(직원)이 직접 사용자의 차량이 있는 곳에 찾아가 세차 서비스를 한다. 친환경 워터리스 세차법으로 물 사용량과 외부 손상을 최소화했다.
결혼식에서 말한다. '이 결혼을 통하여 이제 몸과 마음이 한 몸이니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되도록 서로 사랑하며 살라’고. 그러나 사람들은 사랑하기보다는 싸우며 파뿌리가 되기도 한다. 부부는 한 몸이 되어 자식을 낳고 연대감을 가지며 가족을 보살피고 양육의 의무를 나눈다. 이러는 사이 사랑으로 몸과 마음과 영혼이 한 몸 인줄 알고 일을 벌이면 알 듯 모르겠고 모르는 듯 알 것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오죽하면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라고 하겠는가.
결혼 초 시집에서 함께 살았다. 필자는 막내 며느리였고 근처에 시누 두 사람이 살았다. 필자는 남편과 7년의 열애 끝에 결혼을 했고 시어머니는 늘 몸이 안 좋았다. 형제가 10명 이었다. 기본적으로 시부모님을 좋아했다. 시아버님의 근면한 모습과 시어머니의 후덕한 부분이 좋았다. 남편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했고 온화한 가정의 분위기를 만드시는 분에 안도했다.
그런데 신혼이었지만 남편은 함께 저녁을 먹기 힘들 정도로 귀가 시간이 늦었다. 필자는 종일 시부모님의 손님과 시누들의 접대로 쉴 새 없이 차를 타고 과일을 깎고 식사를 준비하느라 바빴다. 가사 도우미도 있었지만 안방에서 들려오는 ‘아기야’ 소리에 언제라도 튀어나갈 준비를 하고 지냈다. 손님이 많은 날은 방문객이 20여명 일 때도 있었다.
어느 날, 남편이 귀가하자 오늘은 다리가 아파서 힘들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벌떡 일어나더니 엄마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했다.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렸다. 필자가 원하는 것은 한 마디였다. “수고했구나.”
남편이 첫 월급을 가져오는 날이었다. 내미는 봉투가 뜯겨 있었다. 명세표를 보니 돈이 비었다. 순간 필자는 “혼자 벌은 것이니 혼자 쓰든지 다 채우라”고 했다. 미리 시부모 용돈과 자신이 쓸 것을 빼고 남은 금액이라 얼마 되지 않았다. 화를 내어 고쳐졌고 그 후 필자는 살림을 도맡아하기 시작했다. 제할 것도 필자가 했다.
남편은 회식이다 접대다 많은 출장으로 얼굴 보기 힘들었다. 그러다 필자보다 먼저 귀가하면 벼락이 떨어졌다. 육아와 살림과 일을 하는 필자는 늘 종종거리며 다녔다. 동등한 관계를 원하면 대책 없이 하는 말이 있었다.“힘들면 하지 마.“ “남자랑 여자랑 같니?" 그리곤 슬며시 다리 안마를 해줄까 물어오곤 했다.
바꿀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처럼 시간이 지나면서 날선 요구보다 포기를 익히게 된다. 부부싸움이 ‘칼로 물베기’라고 하는 이유는 처음 사랑했던 순간의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무엇이든 참아낼 수 있으며 오히려 배려를 즐길 수 있게 되기까지 한다. 엄마들이 많은 세월 남편도 품고 자식도 품고 친척도 품고 품으며 살은 과정을 이제 나도 가는 것이다.
필자는 1944년 2월 16일 태어났다. 당시는 각박한 삶의 시대이기도 하지만 여명이 바로 문밖인 시기이기도 하였다. 어머니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로 일제가 최악의 모습을 보였던 시기라 민간의 식량이 부족할 대로 부족했기 때문에 산모가 영양을 충분히 공급받지 못했다. 애를 낳았는데 자라지 못하여 큰 쥐만 하더라”는 말을 곧잘 했다. 좋은 점이라면 출산이 무척 쉬웠다는 것이다.
돌 지나고 6개월이 되어 나라를 되찾았는데 우후죽순의 지도자들과 새로운 정치ㆍ사회 조류가 물밀듯 쏟아져 들어왔다. 급변하는 시대에 걸맞는 야망을 가진 사람들의 시대였다. 우선 산다는 것으로도 허덕이는 서민의 삶은 더 어렵고 고달팠다는 기억이 희미하지만 있다. 특히 대구의 10.1사건 때는 좌파의 폭력을 피하여 한적한 곳으로 피신하는 아버지를 따라 거처를 옮겨야 했었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해에 병사하고 말았다.
취학 전 여자 아이부터 고등학교 2학년인 아들, 두 딸 아이에 필자까지 네 명의 자녀들이 일터 없는 어머니에게 맡겨진 부양가족이었다. 대구 중심가에서도 더러더러 초가지붕이 보이는 시절 기와집이 필자 집이라 가난에 대한 물질적인 아픔은 없다. 필자의 가난은 끼니를 거르는 가난은 아니었고 문화 욕구에 대한 가난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낀다, 절약한다, 쓰지 않는다는 방어소비에 집착했다. 세금, 교육비, 식비 외에는 돈을 쓰지 않았다.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지팡이는 자녀를 지켜내야 하는 모성본능과 체면과 자존심뿐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 안 드는 놀이로 우리와 시간을 보냈다. 작은 돌 주워 하는 공기놀이, 반들거리는 흙마당에 가느다란 선을 귿고 하는 땅뺏기, 선교사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은 탄력성 있는 공으로 삼박자 노래 부르며 다양한 모양으로 공차기 등이었다.
다만 책에는 아끼지 않아 집에 책이 풍부했다. 그래서 필자는 동화책은 물론 소설책도 읽을 수 있었다. 아마도 ‘소공자’, ‘소공녀 같은 외국의 책들도 그 무렵에 읽은 것 같다. 책 내용 가운데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는 게 태반이지만 독서는 지루한 시간을 즐거운 시간으로 바꿔주는 마법 상자이었다. 언니는 ‘태양계’란 이름의 동네 구멍가게 겸 책대여점에서 부지런히 신간잡지를 빌려왔다. 필자는 이것도 열심히 탐독했다. 10대를 위한 잡지 ‘학원’은 한 회도 빠지지 않고 읽었다. 연재된 조은파의 ‘얄개전’은 익살스런 행동이 얼마나 기발했던지 지금도 흥분이 느껴진다. 익살의 세상이 휴전 직후의 가난과 닫힌 사회에 답답해 하는 청소년에게 스트레스 분출구 역할을 했다. 이상스러운건 대구 시절 어떻게 넉넉한 책이 주어졌던가 하는 것이다. 한참 성장기의 아동이었을 때 세 끼니의 밥만으로 채울 수 없는 이채로운 먹거리에 대한 허기가 가끔 기억나지만 놀이와 독서에 대한 허기는 없었다는 기억이다. 특히 필자 집은 새 책 살 형편이 아니었는데 무슨 돈으로 책을 샀는지 궁금하다.
고등학교 시절은 격변의 시기다. 3.15부정선거를 고등학교 1학교, 4.19혁명을 고등학교 2학년, 5.16군사쿠데타를 고등학교 3학년에 맞은 것이다. 특 , 5.16군사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권은 일사천리로 대학입시제도를 무 토막내듯 확 바꾸어버렸다. 국가고시 점수를 개별 대학 입시에 100% 반영하고 각 대학은 오로지 체력장과 면접만 시행했다. 그런데 필자는 제도 변경의 희생양이 되고 말았다. 체력장의 한 과목에서 완전히 빵점을 먹은 것이다. 할 수 없이 대구 한 대학의 약학과에 진학했다. 그러나 서울로 진학하고 싶어하는 열망은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다음 해에 서울 연세대학으로 튀었다. 약학과 팔촌쯤 되는 화학과였다.
필자는 18년 동안 내륙의 소도시 대구서 살았다. 어디 여행간 적도 없었다. 그러니 대처에 대한 선망이 강할 수밖에 없다.
필자는 원래 가족과 함께 대구의 교회를 다녔는데 서울로 옮기면서 교회도 다른 곳으로 옮겼다. 교회를 옮기자 가슴에 한 줄기 신선한 바람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필자는 YMCA에서 하는 ‘대학생을 위한 기독교 사상 강좌’를 들었고 일요일에는 연세대학 교회를 출석했다. 당시 필자는 서울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에 가슴 벌렁거렸다. 기독교가 기성복이 아닌 시대별 노력과 아픔 및 정서를 담아 걸어왔다는 것, 큰 테두리에서 문화와 사회 및 역사를 배경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이해되기 시작하였다. 이 이해는 인간, 고고학에 대한 호기심을 안겾줬다. 또 종교와 인간관계, 역사를 만들어 가는 인류 복합체로서의 인간, 생각하는 존재로의 인간 등 참으로 많은 분야의 인문학적인 호기심도 갖게 했다.
전공이 화학인데 인문학에 홀딱 반하였으니 이 노릇을 어쩌란 말이냐. 그렇다고 또 전공을 바꿀 수도 없다. 이미 약학과에서 화학과로 한 번 바꿔서다. 덕분에 대학의 전공 성적표는 엉망이다. 이 성적표 때문에 졸업 후 20년 동안 대학을 말하지 않는 결백증이 있었다.
71년 4월 5일 식목일 공휴일에 결혼했다. 그리고 80년엔 아프리카 수단에서 1년 간 살게 된다. 고온 건조한 나라 수단은 정부의 정체가 공산국가인지 자본주의 국가인지를 구별할 필요가 없는 산업의 불모지대다. 수단은 남북한 공관이 공존하는 나라다. 포장되지 않은 고속도로를 달리다보면 소나 양같은 동물들이 차에 치여 죽은 모습을 쉽게 보는데 단 시간에 건조되어 부패하지 않고 박제가 된 모양을 본다. 중동에서 제왕이라도 죽으면 그날로 매장하는 문화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다.
그 척박한 땅, 공기 중에도 물기라고는 없는 갈증의 땅 바위틈에서 자라나는 초록의 생명체를 볼 수 있는데 생명력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실감하였다, 생명의 주인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해다. 사람은 태양열에 지치고, 영국의 지배 200년 동안 문명인의 안면무치 이기심에 착취당하면서 비옥한 땅이 물을 만나지 못하여 석녀처럼 생산이 불가능한 지독한 가난으로 기력이 없다 아이들의 손으로 밀쳐도 무너질 것 같다. 개를 싫어하는 무슬림의 나라에서 들개들은 늘씬하게 잘난 모양이고 기름기까지 돈다. 떼 지어 다니는데 들개 떼가 수단인보다 더 위풍당당해 보인다.
우습게도 한 대접의 물로 목욕하는 물이 귀한 나라, 상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 곳에서 필자는 공짜로 미터기 없는 전기 물 풍족히 쓸 수 있었다. 핫(hut)이라는 원두막만한 집에서 살고 있는 원주민의 땅에서 필자의 사택은 큰 저택쯤으로 여겨진다. 지금도 필자 아이들은 수단에서 살았던 집이 가장 훌륭한 집이었다고 이야기한다. 이태리 가구를 갖추고, 에어컨이 방마다 있으며, 냉장고에 냉동기까지 구비한 그 사택은 원주민의 생활상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주거환경이었다. 필자가 근무한 곳은 나일의 지류인 백나일의 물을 인공수로로 끌어들여 사탕수수 농사를 짓고 설탕까지 생산하는 그 나라 기간산업체였다. 인공 수로에서 쉽게 낚시한 물고기로 회도 뜨고 매운탕도 만들어 먹었다. 한국인들이 낚시하는 것을 보고 수단인들도 낚시하기 시작하였는데 수단인들의 극성스런 낚시가 시작되고 두어 달 지나니 수로에는 거의 고기가 낚여지지를 않았다. 무계획 노획이 자연을 해칠 수 있다는 걸 확실하게 볼 수 있었다.
이어 미국에서 이민생활이 시작됐다. 우선 유학이 아니고 이민으로 미국 땅을 밟는다는 것부터 필자 속은 무척 상했다. 그리고 미국은 필자 꿈 실현의 땅이 아닌 생존의 땅으로 전락했다. 선배들이 버리라는 학력, 경력, 배경이 낯섦에서 버틸 수 있게 하는 유효한 수단인 것도 알게 됐다.
필자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육체노동의 미숙함이다. 해보지 않았던 일을 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숙제였다. 바느질이 필수인 세탁소를 인수했을 때도 필자는 재봉틀에 실 꿰는 법도 모르는 상태였다 인계한 전 주인이 어쩌려고 무조건 가게를 사느냐고 더 걱정을 하였다. 기술을 쉽게 익히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가스실로 데려갔다는 유대인 집단수용소 체험기가 필자를 독려했다. 하지 못하면 죽으리로다란 명제 앞에 누군들 해내지 못하겠는가. 두 아이들의 똘망거리는 눈망울도 필자의 용기에 보탬이 되었다. 덕분에 필자는 주민의 95%가 백인인 부촌에 세탁소를 소유하게 되었다.
다는 아니지만 미국 사람들 중에 좋은 사람도 많았다. 특히 한 남자 단골손님은 하루 12시간 주 6일을 일하는 필자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우호적이었다. 필자 글씨체와 암산 실력이 학력을 증명해주었기 때문이다. 이 손님에게서 “네 나라에서는 화이트칼라 잡을 가졌을 거야”라는 말을 종종 들었다. 남편과 큰 소리로 다툼하는 현장을 본 이 손님은 남편에게 “ 내 아내는 일하지 않으면서 가사 도우미를 두는데 하드워킹 아내에게 무얼 불평하느냐” 하는 내정간섭에 가까운 일격을 날리기도 했다. 백인이건, 흑인이건, 교육 수준이 높든 아니든 미국 남자는 여자와의 다툼은 꺼렸다. 일종의 배려였다. 이런 작은 차이가 신사문화를 이루는 근본이 아닌가 생각하였다. 오랜 동안 일만 하자 피로가 누적되기 시작하였다. 그래도 아침 일어날 때의 피로는 첫 손님이 내미는 달러에 확 가셨다. 난산의 아이도 돈을 보이면 달려 나온다는 유머가 생각났다.
1994년 남편이 준비도 이별사도 없이 떠나버렸다. 시폰처럼 흰 눈이 투명한 3월의 어느 일요일, 늦은 기상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는 중 목이 깔깔하다고 물 가지러 간 사이 심장마비의 공격을 받고 평화의 나라로 갔다. 필자는 남들의 두 배에 이르는 노동에 시달렸으니 10년 미리 은퇴하여 문화적인 욕구를 채우리란 약속을 자신과 가족과 하였다. 그러나 남편 떠나고 4 년 후에야 가게를 팔았다. 남편 보내고 금방 가게 처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놈의 돈 때문이다.
가게 처분하고 파트타임 일했다. 여유 시간에 시립대학에서 강의도 들었다. 이런 학구적인 활동이 경직된 내면을 많이 부드럽게 만들어 주었다. 머리가 멈추고 손발만이 분주하였던 시간이 머리와 손발이 함께하는 시간으로 전환하였다. 그리고 필자가 공부와 일을 병행하는 바로 그 시기에 영원히 걸 프렌드를 못 만날 것 같던 두 아들이 차례로 결혼했다.
드디어 형식도 내용도 필자 혼자가 된 것이다. 미리 계획하고 준비한 대로 은퇴 후 제주도로 갔다. 역이민이라고 말하는데 필자는 그냥 이사한 기분이다. 여기서도 저기서도 마이너리티인 필자에게 어디고 완전한 행복의 파라다이스는 없다. 두 땅 서양과 동양의 지구촌 마을이 필자의 삶터다. 더 넓어 좋고, 더 다양하여 좋고, 더 배워야 하여 좋다.
우리 어머니 혹은 아버지가 치매 판정을 받는다면? 아무리 효자라도 악몽이라는 생각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여기 7년 동안 치매 어머니를 모시고 산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 치매로 말미암아 가족 모두를 변화시킨 어머니도 있다.그 사연은 무엇일까?
“아빠는 책상 앞에서 하루 종일 책 읽고 일하면 중간에 허리도 좀 펴고, 스트레칭도 좀 하지 지금 죽으려고 작심한 거야?”
일주일에 20권의 책을 읽고, 수도 없이 많은 원고를 쓰며 책상 앞에서 일을 놓지 않았던 한 소장에게 그의 딸이 언성을 높인다. 딸에게 30분 정도 호되게 야단(?)을 맞으면서도 귀엽다는 듯이 아이를 쳐다본다. ‘얼마나 나를 사랑하면 저럴까?’
방에서 소란이 일자 다른 방에 있던 한 소장의 어머니 박외조씨가 지팡이를 짚고 그 광경을 지켜본다. 치매로 인해 이성을 잃을뻔했지만 손녀에게 역정을 내지도 않고 그저 지켜만 볼 뿐이다. 30분 정도가 지나 소란이 잠잠해지자, 슬그머니 한 소장의 옆으로 다가온 어머니가 한마디 한다.
“네가 이렇게 힘들게 일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네.”
사실 일과 어머니를 한꺼번에 돌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때문에 모시기로 결심한 초기에는 가사 도우미를 고용해 그가 집에 없는 시간에 어머니를 돌볼 수 있도록 했다. 처음 2년은 어머니와 정서적으로 교감을 잘하는 아주머니가 많은 도움을 줬지만, 그녀가 관두고 난 뒤에는 모두 못 버티고 그만두기 일쑤였다.
그러면서 한 소장은 생각했다. ‘내가 어머니를 너무 모르고 있는 것이 아니었나?’라고. 그러고는 결심했다. 단둘이 지내보기로 말이다. 그 일은 큰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몇 개월 지내며 어머니가 파악되면, 어머니 성격에 맞는 다른 도우미 아주머니를 모시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7년동안 어머니를 모시며 새로운 깨달음과 영향을 받았다. 그 전까지는 몰랐던, 아니 알면서도 사소한 것으로 치부해 지나쳤을 수 있는 것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것은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무엇보다 한 소장 자신의 인생에 더 큰 변화를 준 사건이었다.
◇찌개를 끓이는 남자
한 소장의 아버지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자 홀로 된 어머니를 잘 모셔야 한다고 동생들은 아우성이었다. 퇴행성관절염 수술을 위해 병원에서 한 달하고도 보름이라는 시간을 보낸 어머니는 온몸의 감각을 잃어버린 듯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아들의 안부 전화를 얼마 전에 받아 놓고도 그 사실을 까맣게 잊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치매가 시작된 것이다. 그렇다고 어머니를 무턱대고 병원 신세를 지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 한 소장의 입장이었다. 그래서 어머니를 책임지기로 했다.
그런 어머니를 위해 한 소장은 매일 아침과 저녁에 어머니를 위해 찌개를 끓인다. 아침에 끓인 찌개가 남아 있어도 저녁에는 새로운 메뉴를 요리한다는 것이 그만의 철칙.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치매를 앓고 계신 어머니에게 유일한 낙은 자는 것과 먹는 것이죠. 그중에서도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먹을 것을 해결해드리는 일인데, 그것을 잘할 수 없으니 죄송할 따름입니다.”
한 소장은 요리를 하면서 어머니에 대해 너무 몰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사소한 어머니의 음식 취향조차 말이다. 이러한 고민을 자신의 블로그에 올리자 많은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기도 했다. 도움이라고 해봐야 치매 어머니에게 해 드릴 만한 음식 레시피를 공유해주는 것 정도였지만, 요리에 서툴렀던 한 소장에게는 천금과 같은 내용이었다.
한번은 블로그 이웃이 추천해 준 레시피로 치아가 좋지 않아 고생을 하는 어머니께 갈치찜을 해드린 적이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음식을 기껏 해드렸더니 어머니는 두어 젓가락을 들고는 이내 내려놓았다. 짜증이 머리끝까지 났지만 어머니에게는 표현을 할 수 없는 노릇. 예전에 어머니를 모셨던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하고 나서야 알게 됐어요. 어머니가 갈치를 못 드신다는 것을요. 어머니가 천막 공장에서 일하셨을 때 한여름에 상한 갈치를 드시고는 크게 고생한 적이 있으셔서 그 이후로는 못 드신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그런 사소한 것조차 몰랐던 것이죠.”
◇침묵의 어머니
“어머니는 저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으셨어요. 어떤 걸 싫어하시고, 하루 종일 어떤 일이 있으셨는지 말이에요. 한번은 도우미 아주머니가 오후 내내 잠만 잤다는 걸 알아채서 어머니에게 왜 말 안 했냐고 여쭌 적이 있어요. 어머니가 그러시더군요. ‘내 걱정 할까 봐.’”
올해 83세인 어머니는 늘 그랬다. 시어머니에게 순종하고, 말없이 해야 할 일을 해가는 전형적인 한국의 어머니들처럼 말이다. 홀로 시부모를 모시고 6남매를 키웠던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연민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환갑이 지나서까지 시어머니를 모시며 고생이란 고생을 다 했으면서,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기 싫다며 칠순이 지날 때까지 일을 놓지 않았던 어머니였다. 한 소장은 요즘 이런 생각이 든다고 한다. ‘어머니에게 음식을 해드리는 것 빼고는 어머니가 나를 보호하는 건지, 내가 어머니를 모시는 건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어머니는 침묵으로 올바른 인간관계를 알려주신 스승님입니다. 치매로 정신이 없으시다가도 제가 잠을 자면 열이 많은 것을 알고, 창문을 살짝 열어주시고 가시곤 하죠. 이 나이가 돼서야 그 사소한 것에서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치매 어머니에게서 배운 것
“결혼을 한 뒤에 일에 빠져 있었고, 사람을 사랑하는 법을 잘 몰랐습니다. 여자도 사람도 말이죠. 하지만 어머니를 모시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알아야 사랑도 잘 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어머니는 어느 날 한씨에게 전기밥솥과 세탁기를 조작하는 법을 알려달라고 했다. 일터에서 끊임없이 일을 하고도, 집에 돌아와서는 집안일에 또 다시 일을 하는 아들에게 부담을 주는 느낌이었을 게다.
그도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의 건강이 최우선이었기 때문이다. 한 소장은 어머니의 그 말과 행동에서 어린 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봤다고 얘기한다. 어린 시절 자식들을 위해 헌신하고 배려했던 모습들 말이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분 좋은 일이었다. 어머니가 행하는 모성애는 치매에서 회복되는 모습이었을 테니 말이다. 이러자 한 소장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일밖에 모르고 살았던 때는 배려라는 감정을 잊고 살았다. 아내와의 결별도 그때 즈음이었다. 그런 그에게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는 배려와 공감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었다.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각을 해보니 사랑한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한 적이 없더라고요.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사랑한다고 표현하고, 뽀뽀하고, 안아드렸어요. 어머니도 처음에는 어색해하시다가 지금은 익숙해지셨나 봅니다.”
◇치매로 뭉친 가족
“어머니와 함께 지내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요? 우리 가족들의 우애예요.”
처음에는 침대 하나만 있으면 어머니를 모실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불철주야 일을 하면서 어머니를 돌본다는 것은 현실과의 싸움 이전에 자신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그러나 한 소장은 그런 어려움을 동생들에게 내색하지 않는다. 6남매의 장남으로서 당연히 짊어져야 할 책임이라고 느끼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를 홀로 모시는 것을 후회한 적도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마저도 어머니를 알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하는 그다.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에 어머니와 있었던 일들을 일기처럼 써놓곤 했죠. 그리고 어머니를 모시면서 생긴 에피소드를 담은 책을 내니 동생들이 많이 반성하더라고요.”
한 소장의 블로그에 글이 올라오고, 6월에는 는 책이 나오자 남매들에게 변화의 미동이 감지되기 시작했다. 생판 모르는 남들도 책을 보고 나서 눈물을 쏟아낸다는데, 누구보다 한씨의 사정을 잘 아는 동생들이 장남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동생들은 어머니에게 전화를 하거나 직접 찾아뵙는 횟수가 이전보다 많아지기 시작했다. 긍정적인 변화였다.
무엇보다 형제간에 좋지 않았던 감정과 오해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된 것이 더 큰 소득이었다.
“책 팔아서 받는 인세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어머니에 대해 더 잘 알게 되고, 형제간의 우애가 돈독해진 것이 더 감사하죠. 이게 어머니가 살아 생전에 남기시려는 선물이 아닌가 싶어요.”
한 소장은 어머니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했다.
“동생들이 그럽니다.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아주 잘 살고 있다고요. 그래요. 어머니! 홀아비랑 과부 둘이서 연애하면서 잘 삽시다. (웃음)”
# 서울의 한 아파트에 사는 김모(39)씨는 아침에 일어나면 조식뷔페가 준비된 식당으로 내려가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집안 청소부터 세탁물까지 모두 프론트에 맡기고 출근한다. 퇴근 후 단지 입구까지 운전하고 오면 주차도우미가 주차서비스를 제공해줘 시간소요 없이 바로 집으로 들어온다. 김씨가 사는 아파트는 전용면적 59㎡의 국민주택형 규모다.
수십억원을 호가하는 대형 주상복합 아파트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최고급 호텔식 서비스'가 최근 중소형 아파트에 속속 접목되고 있다. 호텔식 서비스는 아파트 내 입주민의 비서역할을 하는 컨시어지 서비스를 비롯해 발렛파킹, 조식 뷔페 제공, 청소대행, 세탁 서비스 등 고급 생활편의 서비스를 뜻한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총 999가구 중 전용 59~84㎡가 99%에 달하는 삼성물산의 '래미안 강동팰리스'는 호텔의 컨시어지 개념을 도입, 주간 여성 컨시어지 1명과 야간 보안근무자 1명을 운영해 방문객 안내 및 택배보관 등의 서비스를 제공할 계획이다. 이와 함께 주방이나 화장실 배관 막힘 등의 문제가 있을 것을 대비해 보수관리서비스도 야간까지 운영할 예정이다.
래미안 강동팰리스 분양관계자는 "소비자들의 분양가 6억원 미만의 중소형 아파트에서 호텔식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다는데 만족도가 상당히 높았다"며 "이를 바탕으로 1,2순위 청약접수에서만 1796명이 몰렸고 초기 계약률도 90%가 넘는 등 성공적인 분양 결과로 이어졌다"고 설명했다.
두산중공업이 올 상반기 서울 성동구 성수동 서울숲 일대에 분양예정인 '트리마제(Trimage)' 아파트는 특급호텔 수준의 조식서비스와 린넨, 청소, 발렛파킹, 컨시어지 서비스 등을 도입할 예정이다. 이 단지는 전용면적 25~216㎡ 688가구 규모로 지어지며 이 중 전용면적 84㎡이하가 478가구를 차지하고 있다.
대우건설이 경기 남양주시 별내택지지구에 공급중인 '별내 푸르지오'는 전용 76㎡ 318가구, 84㎡ 782가구 등 총 1100가구의 대단지로 구성된다. 유지보수 서비스인 '더 사랑 서비스'와 평소 주부가 혼자하기 어려운 못박기, 전등교체 등의 가사를 도와주는 '대신맨 서비스' 등이 제공된다.
포스코건설이 경기 광교신도시 업무8블록에 전용면적 48~182㎡ 647가구 규모의 '광교 더샵 레이크파크'를 분양 중이다. 이 단지는 입주민들이 간편하게 식사를 해결할 수 있도록 커뮤니티센터 라운지에서 원가 수준의 식사를 하루 세끼 1년 내내 제공한다. 입주민이 요청하면 가든파티와 같은 리조트식 서비스도 받을 수 있다.
대한토지신탁과 대림산업이 충남 천안시 국철 두정역 인근에 분양중인 오피스텔 '아크로텔 천안두정'은 입주민들의 아침식사를 위해 국내 유명 캐터링 업체와 제휴, '조찬 서비스'를 계획하고 있다.
분양업계 한 관계자는 "중소형 아파트도 소프트웨어 차별화를 통해 좀 더 고급 아파트의 이미지를 주고 입주민의 눈 높이를 맞추려는 시도를 계속하고 있다"며 "소비자 입장에서는 다양한 형태의 종소형 아파트가 선보임에 따라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