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피어 있는 길’, ‘울산 큰애기’,
‘대머리 총각’ 등의 노래들로 국민가수의 삶을 살았던 김상희. 그녀는 1961년 고려대학교 법학과 학생 신분으로 가수 데뷔를 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여성이 법학과 엘리트라는 점도 특별했지만, 그런 사람이 소위 ‘딴따라’ 가수를 한다는 게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과감한 선택은 성공이라는 보답으로 돌아왔다. 다양한 히트곡을 발표하며 1960~197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살았던 그녀에게는 50여 년을 함께한 사랑하는 남편, 그리고 지난 시대의 역사가 있다. 삶의 지혜 가득한 그녀의 얘기를 들어봤다.
김상희와의 인터뷰를 시작했을 때 특유의 보이시한 저음이 매력적으로 들려왔다. 밝고 힘 있는 목소리 톤에서는 에너지가 느껴졌다. 그녀는 1943년생, 올해 행운의 숫자 7을 두 개나 갖는 나이가 됐다. 믿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를 만나자마자 그토록 젊음을 유지해주는 원동력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야 우리 남편이죠. 남편은 우리 집 원동력이고 아주 좋은 친구예요.”
김상희의 남편은 유훈근 씨. KBS PD 출신인 그는 1968년 그녀와 결혼해 어언 52년간을 함께해왔다. 이혼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졸혼이 유행처럼 얘기되고 있는 요즘, 이 부부의 서로에 대한 신뢰와 애정은 단단해 보였다. 상대를 배려하는 마음이 있기에 가능했을 터다.
행복의 근원은 남편의 배려심
“대학 4년 동안 그야말로 남자 대학 같은 곳에서 공부했어요. 당시엔 여학생들이 별로 없었거든요. 또 밖에 나와서 만나는 방송계, 언론계 사람들도 다 남자들이었고요. 말하자면 남자들 세계에서 생활한 셈인데, 남편이 혹시 기분이 안 좋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내색은 안 하고 편하게 대해줬죠. 친정 부모님은 내가 가수생활 하는 걸 정말로 싫어하셨어요. 시댁에서도 그랬죠. 그러나 양가 어르신들께 용감하게 입장을 말씀드리고 결혼을 했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내 곁을 지켜주고 있는 남편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남편은 등대이자 나무 그늘이었다고 표현했다. 전혀 불평도 안 하고 감싸주고 보살펴주니 그녀로선 당연히 남편을 인생의 동반자처럼 항상 이해해주는 사람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부부는 서로에게 마음을 다 주고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게 가장 현명한 것 같아요. 특히 상대의 자존심은 꼭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아픈 부분은 절대 건드리지 말아야 하고요. 예를 들어 남편은 잔소리, 특히 한 말 또 하는 걸 아주 싫어해요. 부부생활은 철저한 일상인데, 상대의 잘못은 잘 보이고 내 허물은 잘 안 보이기 마련이죠. 그래서 잔소리는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자주 해요.”
그녀는 남편과의 관계를 ‘눈만 보고도 웃을 수 있는 사이’라고 말한다. 밤에 자다가 문득 눈이 떠질 때가 있는데, 그때 옆에 있는 남편을 보면 너무 든든하다는 생각이 든단다. 그저 고맙기만 하다고.
“요즘 남편이 ‘내가 이럴 줄 알았으면 옛날에 돈 버는 일을 좀 더 많이 하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할 때가 있어요. 그러면 내가 ‘돈 벌었잖아, 우리 살렸잖아. 그런데 왜 자꾸 그래’ 하고 말해주곤 해요.”
정치와 연을 끊은 사연
남편의 후회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이 부부의 돈독한 관계와 달리, 부부를 둘러싼 외부 환경은 거칠기 그지없었다.
“시댁은 정치하는 집안이었어요. 시아버지가 5선 국회의원이고, 시숙부도 4선 국회의원이었죠. 종갓집 맏며느리로 할일도 많았고 마음고생도 엄청 했어요. 주변에는 늘 우리 집안을 사찰하는 사람이 있었고요. 무슨 움직임이 없나 이런 거 말이죠.”
어느 날 PD였던 남편에게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가 함께 일하자고 찾아왔다고 한다.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그 요청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자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남편에게도 정치가의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친정어머니는 결혼을 허락할 때 남편한데 정치를 안 하겠다는 언약을 받았어요. 그래서 남편이 고민할 때 나도 생각이 많았죠. 그러나 ‘나도 친정에서 그렇게 반대하는 결혼을 했는데 저 사람은 오죽할까’ 싶었어요. 그래서 하고 싶으면 하라고 했죠.”
남편은 결국 김대중 당시 신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무렵은 서슬 퍼런 1980년대 독재정권 시절이었다. 야당 의원 공보비서가 된 남편과 그런 남편을 둔 가수를 정권에서 곱게 볼 리 없었다. 남편은 어쩔 수 없이 해외로 정치적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 시간 동안 김상희는 방송 출연과 공연 금지를 당해야 했다. 그때 그녀는 시간이 좀 여유가 있어서 햄버거 장사도 해본 적 있다.
“그런데 가게를 운영하다 보니 내가 계산을 잘 못하는 데다 원가와 이익 구분도 못 하겠더라고요. 장사를 하면 안 될 사람이었어요. 나중에 귀국한 남편이 그 사실을 알고는 마음 아파했죠. 그렇게 먹고살 게 없었느냐고. 사실 그렇게 부족한 처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시댁에 가서 돈 얘기를 일절 안 했거든요.”
그러나 남편의 정치 도전은 끝이 좋지 못했다. 마침내 사면을 받고 귀국한 그는 전주시 갑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 도전했다. 남편에게 전주 갑은 아버지의 지역구였기에 의미가 컸고, 모두들 그가 당연히 국회의원 후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막상 당에서 공천 명단을 발표했을 때 남편은 떨어지고 변호사 출신 인사가 후보가 됐다. 남편은 분노했다. 그래서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그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 일로 환멸을 느낀 남편은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10월 26일, 뒤통수가 얼얼했던 날
어쩌면 그런 ‘팔자’였을까. 김상희에게도 정치계와 관련된 비화들이 있었다. 최근 개봉한 영화 ‘남산의 부장들’로 다시 주목받고 있는 10·26 사건과 그녀가 인연이 있다는 건 뜻밖이었다. 그녀는 유신정권 시절, 대통령 앞에서도 당당히 할 말을 했던 에피소드들을 들려줬다.
“어느 날 밤 청와대에서 공연을 하라고 부른 적이 있어요. 나이트클럽과 계약이 되어 있었던 터라 못한다고 했죠. 그랬더니 문화공보부 장관이 몇 시 스테이지냐고 묻더라고요. 9시, 11시라고 했더니 그럼 그 전에 보내주면 되지 않느냐고 해서 갔죠. 그런데 노래를 끝내고 나왔을 때 아무도 없는 거예요. 청와대 입구까지 혼자 어떻게 걸어 나와요. 그래서 냅다 소리를 질렀죠. 장관 이름을 부르면서.”
청와대 한복판에서 소리를 지르다니 대단한 ‘깡’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부르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그 소리를 듣고 나타난 사람은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박 대통령은 그녀를 장난삼아 ‘깡패’라고 부르곤 했다는데, 그녀의 대찬 기질을 알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어이, 깡패. 왜 그러는 거야’ 하고 묻더군요. 그래서 ‘공연 때문에 나이트클럽에 가야 하는데 내보내준다고 해놓곤 연락이 없다’고 말했어요. 그랬더니 박 대통령이 비서들에게 ‘여기 봐!’ 하더니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 할 거 아냐’ 하고 혼을 내더라고요. 그래서 쏜살같이 공연하러 갈 수 있었죠.”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서로를 편안하게 생각하는 관계였기에 박 대통령의 사망 소식은 그녀에게 큰 충격을 줬다.
“10월 26일 저녁에 청와대 연회 공연이 있었어요. 공연을 끝내고 저는 돌아왔고요. 그런데 그 후 안가에서 사건이 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머리가 띵하더군요. 바로 전에 만났는데….”
다양한 장르 섭렵한 멀티 플레이어
전직 대통령들과의 에피소드는 그쯤에서 끝이 났고, 이제 그녀의 음악세계를 들여다보기로 했다. 요즘 김상희는 대중가요보다는 클래식이나 품격 있는 공연에 더 어울리는 느낌이다. 양재무 음악감독이 이끄는 남성합창단 이마에스트리와 함께하는 공연도 그렇다. 이마에스트리로선 창단 이후 최초로 대중가요 가수와 협연하는 공연이기도 하다. 그런데 60년 가수생활 동안 그녀는 가요만 부른 게 아니었다.
“이탈리아 가곡을 우리나라 말로 번역해서 부른 게 있고 동요도 불렀어요. 일본에선 재즈 앨범도 만들고 뮤지컬 넘버를 발췌한 앨범도 냈어요. 내가 생각해도 정체성이 뭔지 모르겠어.(웃음) 뮤지컬도 하고 영화도 찍고 할 거 다 했거든요. 이번에는 클래식과 함께하는데 이질감이 없어요.”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즐기는 사람’, 뭐든지 잘 흡수하는 ‘한지 같은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그러나 스스로 분석하기에 문제가 좀 있다고 했다. 게으르다는 것이다.
“처음엔 잘해요.(웃음) 그런데 내 몫만 하는 타입이죠. 요즘은 젊었을 때보다 노래의 깊이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해석하는 방법이 달라졌으니까요.”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강직함
김상희는 지금도 밥공기에 밥풀 한 알 남기는 일 없이 먹는다. 그녀가 어린 시절부터 배운 ‘밥상머리 교육’ 때문이다. 사실 그녀의 친정은 상인 집안이었다.
“친정아버지가 무역을 했어요. 굉장한 재력가셨죠. 외화도 수입하고 극장도 운영하셨는데, 돈을 흥청망청 쓰는 걸 아주 싫어하셨어요. 어쩌다 떨어진 밥풀을 보면 우리더러 다 먹으라고 할 정도였어요. 아버지 명을 어기기 힘들었죠. 그때부터 남김없이 밥을 끝까지 먹어치우는 버릇이 생겼어요.”
친정어머니도 강직한 사람이었다. 자식들이 실수를 하면 누구 하나의 책임이 아닌 연대 책임을 지도록 가르쳤다. 그래서 나중에는 형제들끼리 실수가 없도록 서로 단속하고 관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지금도 김상희에게서 느껴지는 꼿꼿함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짐작하게 해주는 이야기였다. 그래서 그녀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도 부모님 속을 썩인 것이란다.
달이 뜨면 어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
김상희의 본명은 최순강이다. 가수가 되기 위해 집안을 속여야 했기에 가명을 썼다.
“나는 좋아하는 걸 하게 되면 밀어붙이는 타입이에요. 그런데 엄마에겐 대못을 박았구나, 깨달은 적이 있어요.”
김상희의 둘째 아들도 그녀가 졸업한 고려대학교 법대에 입학했다. 그런 아들을 사랑스러운 자식이자 자랑스러운 후배로 여겼다. 법대에 들어간 만큼 사법고시는 언젠가는 도달해야 할 목표였다. 아들은 여유만만하게 고시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시험을 치르고 발표가 났는데 낙방이었다. 얼굴이 새까매진 아들은 “전 고시할 팔자가 아닌 거 같습니다. 오늘 부로 접겠습니다”라고 선언했다.
“그 말을 듣고 하늘이 노랬죠. 친정어머니도 내가 가수한다며 법 공부 안 했을 때 남산을 세 번을 돌면서 울었다고 했어요. ‘아, 우리 엄마가 얼마나 힘들었을까’ 알게 됐죠. 아들에게는 ‘괜찮아. 네가 좋아하는 거 하면서 행복을 찾아’라고 말하고 돌아서는데 눈물이 핑 돌았어요. 요즘도 둥그렇게 보름달이 뜨면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요.”
나이 들어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
사단법인 한국연예인한마음회 이사장이자 가요계의 원로로서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그녀에게 사람들과 잘 지내는 비결을 물어봤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소통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누구와도 소통이 되면 외롭지 않아요. 어떻게든 귀를 열어 듣고, 얘기할 때는 나잇값을 하기 위해 노력해야죠. 사실 나잇값하는 게 제일 힘들어요. 서로가 열린 마음을 가져야 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요즘은 일단 듣고, 의견을 물으면 맨 마지막에 해요. 너무 나서지 않고요. 특히 ‘내 나이가 얼만데’, ‘나 때는 말이야’ 이런 말은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그녀가 살면서 가장 잘한 일로 양가에서 결사반대했는데 결혼한 것을 꼽았다. 그리고 그렇게 결혼했어도 가족이 화목하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고 했다. 그녀가 지키는 삶의 법칙은 절대 남에게 험한 얘기를 안 하는 것이란다. 화가 나도, 상대에게 상처 주는 말은 평생 해본 적이 없다. 그렇게 해서 얻은 좋은 기운이 그녀의 삶을 굳게 지켜준 것인지도 모른다.
“가수로, 엄마로, 아내로, 나로서 잘 살다 간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요. 내가 죽었을 때 슬퍼할 사람들이 있다면 잘 산 거겠죠? 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을 거 같아요. ‘정말로 감사합니다’라는 인사도 하고요.”
바람에 휩쓸리지 않고 쉽게 꺾이지 않는 코스모스 같은 그녀의 노래가 깊은 내면 속으로 울려 퍼졌다.
든든한 아내, 듬직한 세 자녀의 사랑을 한몸에 받으며 행복한 일상을 채워가는 가수 최성수(60). 고등학생 늦둥이 아들에게는 친구 같은 아빠이며, 아내에게는 집안일도 기꺼이 도와주는 평범한 남편이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의미가 있고 어떤 일을 겪든지 다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가 나이가 들수록 매력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도 다 의미가 있나보다.
‘남남’, ‘동행’, ‘해후’, ‘풀잎사랑’, ‘기쁜 우리 사랑은’ 등등의 메가 히트곡들로 1980년대를 휘어잡았던 대표적인 미남 가수 최성수. 얼마 전에 그는 ‘복면가왕’에 출연해 화제가 됐다. 하림, 카더가든, 혁오 등 수십 년의 나이 차이가 나는 까마득한 후배들이지만 음악성으로 인정받는 가수들의 노래를 과감히 선곡해 특유의 미성으로 완벽하게 소화했기 때문이다. 그가 가왕에 오르지 못한 것은 고작 5표 차 때문이었다. 그 결과는 1983년에 데뷔한 이 베테랑 가수의 감각과 에너지가 지금 세대에게도 여전히 통한다는 의미였다. 감성을 채우면서 60세의 나이에도 변치 않는 젊음과 소통의 아이콘으로 청춘을 노래하고 있는 그다.
“요즘 노래들은 굉장히 세련됐어요. 예전에는 우리 가요를 우습게 생각하고 팝만 들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사람들이 팝을 안 듣고 가요를 듣죠. 케이팝이 그만큼 세계인의 공통된 노래가 됐고 우리 것이 세계 것이 될 정도로 잘 만들어지고 있다는 의미죠.”
최신 트렌드에도 자연스러운 최성수의 모습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다. 그는 얼마 전 디지털 싱글 ‘린도마니’를 발표한 데뷔 37년 차의 여전한 현역이자 건국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 겸임교수. 말하자면 최근의 트렌드에 더없이 민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된 데에는 그의 기질에서 비롯된 바도 있다.
열등의식이 나를 키웠다
“제 첫 번째 직업은 가수죠. 사업가, 교수 등 여러 가지 일도 할 수 있지만 업(業)으로서는 끝까지 뮤지션이에요. 노래 부를 때 가장 행복하고 감사해요. 힘들 때도 노래만 부르면 시간이 지나갔거든요.”
의외로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최성수는 자신의 히트곡 대부분을 작사 작곡한 싱어송라이터다. 그런 그에게 가수로서의 깊이를 더해준 터닝 포인트가 1990년대 중반에 있었다. 서른다섯 살에 미국으로 훌쩍 유학을 떠난 것이다. 그가 향한 곳은 음악인이라면 누구나 동경하는 버클리 음대였다.
“서른다섯에 미국에 가서 프로페셔널 뮤직 전공으로 마흔에 학사를 받았죠. 그리고 돌아왔다가 다시 UCLA에 들어가 뮤직비즈니스 마스터를 하려고 했지만 익스텐션을 받는 걸로 정리했어요. 미국은 뮤직비즈니스를 노동법에 기초해 배우도록 되어 있어서 도저히 못하겠더라고요. 그래서 귀국했고, 중앙대학교에서 예술 경영을 공부해 석사학위를 받았죠.”
최성수는 서른다섯 살 이후 계속 공부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요즘 그는 미학 분야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공부에 대한 그의 열정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궁금했다.
“제 삶의 터닝 포인트는 열등의식이에요. 못살아서 잘살려고 했고, 잘살기 위해 노래를 했고…. 계속 노래를 하다가 보니 어느 순간 상처를 받았고 공부해야겠다는 터닝 포인트가 생겼죠. 노래를 하고 히트를 해도 공부에 대한 미련이 끊임없이 남아 있었거든요. 그리고 요즘은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까 교수법도 깊이 알아야겠더라고요. 지식에 대한 욕구 그리고 열등의식이 저를 이만큼 만들어줬어요.”
때때로 열등의식은 자신을 바라보는 토대가 된다. 과거보다는 나은 자신을 만드는 동력이 된다. 최성수는 그 표본이었다.
노래 안에 시를 담은 가수
그는 가수로서의 본분을 절대 잊지 않으려 한다. 특히 노래를 잘하려면 많은 책을 읽고 스스로를 키워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래야 노래에도 깊이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20대의 최성수와 60대의 최성수가 부르는 노래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그때는 히트하는 게 꿈인 가수였죠. 지금은 다르죠. 요즘은 노래를 부르면서 두렵기도 하고 행복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이 노래를 불렀을 때 좋아해줄까?’ 하면서 저 혼자의 노래라기보다는 노래를 듣는 사람을 많이 생각하게 돼요.”
그의 정규 10집 앨범은 2007년, 그리고 11집은 2017년에야 나왔으니 무려 10년 만에 나온 셈이다. 노래 발표 주기가 점점 길어지는 것은 노래가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력에 대해 보다 숙고하게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11번째 정규 앨범 ‘시가풍류방’(詩歌風流房)의 콘셉트는 시의 멋과 풍류다. 타이틀곡 제목은 김현 시인의 시 ‘고맙다 사랑, 그립다 그대’에서 따왔다. 젊은 남녀에게 진실한 사랑과 일상의 작은 기쁨을 소중히 여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이외 도종환 시인의 작품 ‘구름처럼 만나고 헤어진 많은 사람 중에’, 김용택 시인의 ‘달이 떴다고 전화를 주시다니요’, 안도현 시인의 ‘그리운 당신이 오신다니’가 가요로 거듭 태어났다. 시를 좋아했던 그는 오래전부터 유명한 시인들의 시를 가사로 쓰며 다양한 곡을 만들어 왔다.
2019년 싱글 ‘린도마니’가 나오는 데도 2년여가 걸렸다.
‘최성수 독창회’를 작년에 이어 올해도 준비하고 있다. 3월 19일 인천 청라 엘림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이번 공연도 콘서트보다는 약간 클래식한 분위기로 그냥 목소리 하나랑 피아노, 성악가들이 함께한다.
“3월에 열리는 제 콘서트 이름을 ‘독창’이라고 지은 건 제 오랜 꿈이에요. 교회 성가대를 하면서 클래식에 대한 꿈이 남아 있었던거죠. 사실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를 불러봤으면 하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어요. 그 노래를 들으면 정화되는 느낌이 들어요. 그래서 콘서트가 아니라 독창회라 이름 붙였죠.”
최성수의 미려한 목소리와 바리톤 성악곡에 있어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슈베르트의 ‘겨울 나그네’의 결합. 상상만 해도 흥미가 생기는 그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에게 소중한 노래인 만큼 조심스럽게 접근하고자 하는 듯했다. 어쩌면 우리가 최성수에게 기대할 수 있는 또 다른 터닝 포인트로서의 영역이 미래에 준비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기관리도 철저하다. 담배는 아예 안 하고, 술을 먹으면 다음 날 노래가 잘 안 되는 걸 몇 차례 느껴 아예 술을 끊었단다.
그는 노래를 위해 술과 담배 등을 멀리하는 절제된 생활을 해왔기에 열심히 사는 게 가능했다고 말한다. 그가 생각하는 좋은 아티스트 요건도 슈베르트의 삶처럼 절박하고 절실한 사람이다.
하루 통화의 절반은 아내와
1990년대 중반에 떠난 미국은 최성수에게 또 다른 선물을 안겼다. 한참 힘들게 지내던 시절, 지금의 아내와 만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어쩌면 그때가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죠. 돈이 없어서 햄버거를 반으로 나눠 먹고 딸에게 1달러짜리 멜론도 못 사주고 했지만…. IMF 때 한국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안 될 때 저를 버티게 해준 건 아내와 하나님이었어요.”
애처가로 소문이 난 그는 요즘도 하루 통화의 절반을 아내와 한다. 무슨 얘기를 그렇게 많이 하느냐고 물었더니 주된 화제는 아이들이라고 대답한다.
최성수의 아내는 전 남편과 사별한 후 그와 재결합했다. 전 남편과의 사이에 아들과 딸을 둔 상태였다. 그 아들이 지금은 서른다섯 살, 딸은 서른한 살이 됐다. 현재 아내와의 사이에는 고등학생 아들이 하나 있다.
“제가 자식들이 편하게 생각하는 아빠이긴 해요. 엄마를 무서워하거든.(웃음) 아내는 악역을 자처한 거고, 저는 아이들 편에 서기로 한 거죠. 이제 열심히 일해서 막내아들 대학만 보내면 되겠죠.(웃음)”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요즘 삶에 대해 “하루하루가 감사하다”고 말하는 최성수는 자신의 삶을 롤러코스터에 비유했다.
“계획대로 되는 게 없으니까요. 제 뜻대로 살아본 적이 없고.(웃음) 그러니 하루하루 소소하게 행복해하고 감사해야죠.”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에는 얼마 전 있었던, 가수 인순이 씨와 아내가 법정까지 갔던 갈등이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짐작됐다. 그가 힘들 때 가장 힘이 났던 말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좋은 끝이든 나쁜 끝이든 끝은 반드시 있다”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바람대로 사건은 어느 정도 마무리가 된 듯하다.
“억울하죠. 하지만 지나가고 있는 일이에요. 그것도 감내해야 할 제 일이죠. 그런데 제가 사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텐데….”
사람은 매번 순간순간, 어떤 때는 행복하지만 어떤 때는 힘들다.
“그런 매순간 자기 판단의 기준에 의해서 이겨내는 힘의 원천을 따져보면, 희망과 가족 덕이죠. 무조건 버텨야 해요.(웃음)”
그는 힘들 때마다 종종 지금보다 더 힘들었던 과거를 떠올린다고 한다. 그러면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게 된단다. ‘내가 어떻게 살았는데 이걸 못할까’ 하는 마음이 훅 들면서 뜨거운 물에 샤워할 수 있는 것만도 너무 감사하게 된다고 한다.
편협한 생각 버려야 현재와 어울릴 수 있어
다소 가벼운 얘기로 돌아갈 시간이 됐다. 최성수에게 지금까지 나온 앨범들 중 가장 아끼는 게 있냐고 물어봤다.
“2집이 저를 만든 앨범이었죠. 1집의 ‘남남’이 저를 바꾼 터닝 포인트였다면 2집의 히트는 소포모어 징크스를 사라지게 해줬어요. 수록곡이 다 히트를 쳤고 지금까지 버티게 해준 앨범이죠. 1집이 씨앗이었다면 2집은 주렁주렁 열린 열매였다고 해야 할까요.”
그는 자신이 가수가 안 되었다면 기술을 배워 공장에 다니고 있었을 거라고 말했다. 아버지가 기타를 부숴버릴 정도로 음악하는 것을 반대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제게 바란 건 오로지 기술을 익히는 거였어요. 오죽하면 제가 직업훈련소에 가서 자동차 정비를 배웠을까요. 그런데 결국 그만뒀어요. 그 무렵 사람들이 사우디엘 많이 갔는데, 기술을 계속 배웠다면 사우디에서 일하는 기술자가 됐겠죠?”
그가 자동차 정비공이 안 된 덕분에 한국 가요계는 선물을 얻은 셈이다. 그는 자신이 노래만 부르는 가수가 아니라 음악으로, 아티스트로 기억되길 바란다. 그가 공부를 계속하고 책을 보고 시를 쓰고 여행을 가는 건 모두 깊이 있는 노래를 만들기 위해서다. 그런 생각이 그로 하여금 계속 현 시대와 어울려 살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는 듯했다. 그래서 그에게 시니어가 젊은 세대와 잘 어울릴 수 있는 방법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중년 남자들이 자격지심에 가끔 ‘나를 무시하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그런 편협한 사고는 버려야 한다고 봐요. 꼰대가 되는 상황은 전적으로 자격지심 발로와 연관된 경우가 많거든요. 서로 존중하면 된다고 봅니다. 자신이 속해 있는 조직에서, 자기 위치를 스스로 확인하려고 동물의 왕국에서 영역 표시하는 것 같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도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았는데, 어떤 때는 제게서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놀랄 때가 있어요.”
가족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최성수는 태도에서 많은 문제들이 발생한다고 본다. 그가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것 또한 같다.
“요즘 아이들은 지식이 너무 많아서 지식을 가르치기엔 제가 부족할 정도죠. 그것보다는 근본적인 걸 가르칩니다. 예를 들어 음악하는 친구들에게는 인사 잘하고 시간 약속 잘 지키면 인생의 반은 먹고 들어간다고 말해요. 첫인상에서 뭘 알겠어요? 인사 잘하고 시간 잘 맞추는 게 기본이죠. 그리고 리더라는 위치에 서려면 팔로워가 많아야 하는데 팔로워에게서 존경의 눈빛이 있어야 해요. 그 눈빛의 가치가 바로 성공의 척도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려면 진심으로 열심히 하는 모습, 공감과 진정성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새해 들어 가장 중시하는 건 뭘까?
“집안일 잘하자.(웃음) 어제도 일 끝나고 와서 미뤄뒀던 설거지를 했고요. 하루하루 열심히 감사히 사니까 편해요.”
가족이 없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의 관심은 온통 가족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그가 말하는, 나이를 잘 먹어가는 비결처럼 보였다.
“인생에서 진짜 잘한 일이요? 하나님을 만나고, 마누라를 만나고, 우리 아이들의 아빠가 되고, 마지막으로 노래를 한 거예요.”
1955년생, 베이비붐 세대로서 1978년에 데뷔해 올해로 예순다섯 살. 그러나 이치현의 모습에서 그 세월을 느끼는 건 불가능하다. 1980년대를 휘어잡던 순간의 ‘이치현과 벗님들’ 리더 이치현이 세월을 뛰어넘어 그대로 내 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여전한 젊음과 변치 않은 감미로운 목소리, 그리고 음악적으로는 더 성숙하고 테크니컬해진 그의 라이브를 보면 시간을 거꾸로 먹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정도다. 심지어 신곡을 준비하면서 내년부터는 ‘전투를 치르듯’ 전국 라이브 투어를 시작하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있는 그를 만나 그의 음악과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1980년대를 대표하는 밴드로 올해로 벌써 41년째 롱런 중인 이치현과 벗님들은 흔히 ‘한국의 비지스’라 불린다. ‘당신만이’, ‘사랑의 슬픔’, ‘다 가기 전에’, ‘집시여인’ 등의 히트곡들은 이국적이면서도 세련된 밴드 사운드의 진가를 보여주는 곡들이며 여전히 애청되고 애창되는, 시대를 초월한 명곡들이다. 이치현과 벗님들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이치현에게는 여전한 젊음과 특유의 우수가 있었다. 그 말을 듣자 그는 쾌활하게 웃으며 말했다.
“우수에 젖었다기보다 ‘이 일이 내가 맞는 건가,(웃음) 어쩌다 이렇게 됐지?’ 하며 생각이 많아서 그런 표정이 나오는 거죠.”
반쯤은 농담처럼 한 말이지만, 그는 사실 가수가 될 꿈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만든 명곡들과 그의 감미로운 음색을 생각하면 의외의 얘기였다.
어쩌다 가수가 된 기타리스트
“내가 음악을 시작한 것은 순전히 산타나 때문이었어요. 그래서 기타리스트가 되고 싶었죠. 그런데 우리나라 실정에서는 연주자가 활동하기가 어렵잖아요? 더구나 유명하지도 않았으니 누구에게 곡을 줄 수도 없었고. 그럼 어쩔 수 없이 내가 불러야지.(웃음)”
산타나는 1960년대부터 활동한 라틴 록 기타리스트의 전설이다. 사실 잘 살펴보면 이치현이 그에게 영향을 받은 흔적은 곳곳에서 드러난다. 탁월한 기타리스트로서 여전한 실력을 유지하고 있는 점, 대표 히트곡 ‘집시여인’, 그리고 그의 최근 라이브에서 들려주는 노래들이 라틴 스타일로 더욱 세련되게 편곡됐다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라틴 록과 밴드 사운드에 기반을 뒀지만 그가 한 가지 장르만 했던 것은 아니다. 팝 발라드에서부터 신스 팝, 로큰롤까지 다양한 음악적 접근을 해왔다. 그룹사운드를 하면 한 장르를 계속 파야 하지만, 그보다는 음악적 변화를 시대에 따라 맞춰야 한다고 봤기 때문이다.
‘음악 그만둘까’ 싶었던 순간들
그렇게 대중가요 가수이지만 밴드 사운드에 기반하고 있는 그가 끊임없이 활동을 하고 있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우리나라에서 밴드를 뚝심 있게 이끌어간다는 것은 외국처럼 장수하는 밴드가 없다는 점을 봐서도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그에게도 위기가 있었다.
“위기는 자기 자신과의 갈등에서 와요. 경제적인 위기는 능숙해요. 워낙 바닥을 치며 올라갔고 무명생활도 오래해서.(웃음) 가장 힘든 게 ‘내 스타일의 음악을 계속해야 하나? 그만둘까?’ 하면서 내 음악에 한계를 느낄 때죠.”
그가 자신의 음악에 한계를 느끼는 것은 시대적인 문제와도 결부된다. 라이브 밴드를 추구하는 음악인들이 설 자리가 많이 사라졌고 가요계의 주류도 밴드 사운드를 유지하기에는 불가능하다 싶을 정도로 변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는 얼마 전 7080세대에게 논란이 됐던 KBS의 ‘콘서트 7080’ 폐지 건이 그렇다. 그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콘서트 7080’이 폐지된 데는 물론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죠. 7080시절 음악했던 사람들을 막상 찾아보면 지금 음악을 안 하는 사람들이 더 많거든. 새 앨범을 내지 않고 ‘추억팔기’만을 하는 가수들이 출연하게 됐어요. 그러다 보니 시청률이 떨어지게 됐고요. 음악은 추억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어야 하고 뮤지션은 신곡 활동도 꾸준히 병행해야 하잖아요.”
지나친 쏠림 현상 안타까워
요즘 사회나 기업체들을 보면 7080세대가 주류가 됐다. 이치현과 같은 시대의 가수들이 각광받는 시대가 다시 돌아온 것이다. 그런데 최근 ‘미스트롯’의 성공으로 트로트가 7080세대의 음악적 대세가 되어가는 중이다. 그 물결이 너무 거세다 보니 쏠림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라이브 밴드가 설 자리가 점점 없어지는 현실에 그는 더욱 힘들어하고 있었다.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근본적인 차원, 음악적 현실에 대한 고통이었다.
“시대의 변화이겠지만, 요즘 가수들은 거의 탤런트가 돼야 해요. 사람들에게 어필해야 하고. 난 그러고 싶진 않거든요. 내 음악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꾸준히 하고 싶은 거니까요. 그래서 억지로 비즈니스를 하고 싶지는 않은데 그러다 보니 이 모양이지.(웃음)”
변화된 음악 현실에 방황도 깊어졌다. 그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2년간 계속 방황했다.
“작년 가을과 겨울 사이 미국을 네 번 왔다 갔다 했어요. 한국에 있기 싫어서 미국에서 공연하려고요. 환경이 안 변하면 내가 못 살겠기에. 곡은 안 써지니 밤마다 괴롭고…. 내가 해야 할 음악의 장르를 못 잡는 거예요. 안 그랬거든요.”
소극장 투어로 팬 저변을 넓히다
그래도 그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좋은 경치를 봤다고 좋은 곡이 나오는 건 아니다’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내년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는 중이다. 우선 2016년에 내놓은 정규 앨범 14집 이후 오랜만에 싱글 앨범을 제대로 준비해 선보일 계획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도전에 나섰다. 바로 소극장 공연 투어다.
“한 해가 끝날 때 되면 ‘올해 잘 보냈나?’ 싶죠. 나이가 드니 비보도 많이 듣게 되고, 시간도 확 가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버킷리스트는 아니더라도 머릿속에 있는 걸 실행하자고 결심했어요. 그게 내년 3월부터 시작할 전국 소극장 공연이죠. 깨질 때도 있고 힘든 상황도 있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든 부딪쳐볼 거예요.”
그는 이미 1984년부터 5~6년간 무려 1000회가 넘는 소극장 공연을 가진 바 있다. 즉, 소극장 무대의 맛과 즐거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다. 사실 그래서 작년에는 그런 소극장 무대를 다시 한 번 부활시킨 적도 있다.
“관객들이 예전에는 학생들이었는데 이젠 다들 어른이 되어 주차장이 없어서 힘들어했는데(웃음) 공연은 꽉 차서 끝났어요. 그분들이 말하길 불편해도 시간이 지나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하더라고요. 소극장에서 얼굴 표정을 다 읽고 땀 흘리고 그러는 걸 보면서 함께 공연하는 거니까요.”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과 같다
지금까지 본 그의 성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짐작 가능하겠지만, 그는 앞으로 나와서 ‘나대는’ 성격이 전혀 아니다. 자신의 성향과 다르게 행동하는 걸 너무 싫어하는 쪽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성향이 남아 있기에, 그의 젊은 시절은 지금보다 더했을 수밖에 없다.
“가수는 꿈에도 없었는데, 운명이란 게 있는 듯해요. 제게 음악은 밥 먹고 숨 쉬는 것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었어요. 원래 남 앞에 못 서는 성격인데도 한 거니까요. 그래서 1984년에 4집 앨범 녹음하며 방송을 접고 대학로에 들어갔죠.”
그의 소극장 공연은 대박이 났다. 그리고 가수로서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었다. 그가 인간적으로 변화하게 된 계기였다.
“물론 여대생들 앞에서 1000회를 공연한다는 게, 그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죠. 그런데 그때 성격이 변했어요. 대화하는 법을 억지로 힘들게 익힌 거예요. 지금도 저는 제가 봐도 어색해요. 그래서 방송 녹화한 게 있으면 가족들하고 안 보죠. 나 혼자만 보면서 반성할 게 뭐 있나, 왜 저랬을까 합니다. 그게 본 성격인 거 같아요.”
무대와 객석은 구분되는 게 품격
그는 프로답게 자신이 대중음악인이라는 사실을 확실하게 자각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인터뷰 내내 계속해서 ‘음악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고 말한 것과도 관련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느리긴 해도 끊임없이 자신을 대중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 노정이 어쩌면 이치현이 지속적으로 발전한 근원이었을지도 모른다.
“저는 좀 까다로워서 무대 같지 않으면 안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작년부터 후배들이 도와달라고 하면 라이브 카페 같은 데서 공연하기도 했죠. 당연히 환경이 열악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좋아하고 손님들이 많이 찾아와 잘되는 걸 보니 거기서 매력이 느껴지더라고요. 대중과 마주하되 자신의 격만 안 떨어뜨리면 되겠다 생각한 거죠. 물론 무대와 객석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합니다. 그게 품격이니까요.”
칠순이 다가오는 나이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음악을 고민하며 밤잠을 설치는 그를 뒷받침해주는 것은 역시 팬들이다. 그의 팬클럽은 회원 수 1500여 명이 가입한 ‘늘벗회’다. 1980년대부터 꾸준히 그를 지지해준, 역사가 깊은 탄탄한 팬들로 그의 공연에 항상 힘이 되어주고 있다. 서로를 이해하며 함께 나이 들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즐거움이자 위안 아닐까.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될 것
음악이 운명이라는 말처럼, 그의 딸 둘도 음악과 관련 있는 일을 하고 있다. 딸 얘기를 하는 것 자체가 행복한지 목소리가 바뀌었다.
“첫째 딸은 플루트를 해요.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와서 올해 동창하고 결혼했죠. 결혼 안 시키려 했어요. 들어간 돈이 얼만데.(웃음) 사실 재밌게 살고 있어요. 둘째도 원래는 음악하려고 했는데 너무 힘들어해서 음악심리학으로 바꿨어요. 작은애는 지 편한 대로 자유롭게 살길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자신과 가족들 모두가 음악과 관련이 있지만, 정작 다시 태어나면 음악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음악은 본인과의 싸움이 너무 심해요. 다시 태어나면 건축가가 되고 싶어요.”
건축가라니, 의외라는 생각이 들지 모르겠지만 그는 중학교에서 미술 관련 상을 휩쓴 기대주였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 예고에 진학하지 못해 미술인으로서의 꿈은 접혔다. 하지만 아직 미련이 남아서 지금도 외국에 나가면 건물의 건축 재료를 살펴보고 두들겨본다고 한다.
“음악은 사람을 너무 좁게 만들어요. 물론 음악의 세계는 굉장히 넓죠. 그러나 음악인으로서의 삶은 좁아요. 음악 대신 빌딩 하나 지어보고 싶고 그렇죠.(웃음)”
아름다운 황혼의 시간을 기다린다
이치현의 가족들 중 음악과 관련이 없는 사람은 그의 아내다. 교육학과를 나온 아내는 도서관에서 살며 자녀들 교육에 평생 매달렸다. 요즘 그는 부쩍 아내에 대한 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아내에게 못해준 게 너무 많아요. 젊었을 때는 같이 못 놀아줬고 ‘여보, 여보’ 하며 살갑게 다가가는 성격도 못 되고…. 우리나라 부부들이 나이를 먹으면 각자 놀잖아요? 그런데 유럽에 가보면 서로 목도리를 해주며 손잡고 다니면서 카페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하는 흰머리의 노부부가 많아요. 그래서 저도 칠십부터는 같이 손잡고 다니면서 외롭지 않게 해줘야겠다 생각하고 있어요.”
음악은 같은 감성을 함께 느끼는 것이라는 확고한 철학을 가진 그는 감성과 추억으로 버무리고 채워질 소극장 라이브를 준비하면서 벌써부터 신이 나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거듭 아내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표현했다. 그리고 자신의 미래에 아내와 함께 지내는 시간을 그리는 듯했다. 그런 모습을 보니, 우선 그가 도달해야 할 음악적 성공의 지지자로 응원해야 할 것 같다. 자신의 할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그가 아내와 함께 만들게 될 아름다운 황혼을 기대한다. 그 희망이 오늘 이치현을 또 설레게 할 것이다.
1983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려오던 노래가 있었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이라면 제목을 몰라도 “몸~ 바쳐서~ 몸 바쳐서~”라는 후렴구만은 기억할 수밖에 없는 그 노래, 바로 ‘논개’다. ‘논개’ 돌풍을 일으켰던 주인공 이동기(65)는 현재 2700여 명이 가입한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이다.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살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올해로 14년째 하는 일이다. 그리고 이제 그는 무려 32년 만에 10집 앨범 타이틀곡 ‘약국집 딸’을 내놓았다. 지나간 수십 년의 세월 속에서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어보기 위해, 일단 그가 처음 이름을 날린 1983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1983년에 발표한 노래 ‘논개’는 4집 앨범에 실렸어요. 1집은 1978년에 나왔죠. 그런데 내 1집, 2집, 3집 앨범들에 관심이 많았던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 대표가 서라벌레코드 사에 있던 나를 데려와서는 3년 전속으로 계약을 맺었어요.”
일단 계약을 했으니 노래를 만들어야 했던 이동기는 친하게 지내던 작사가 이건우에게 가사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10분도 안 되는 시간에 곡을 붙여 만든 곡이 바로 ‘논개’였다. 이 에피소드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논개’에 대한 기대치가 전혀 없었다. 4집 앨범에 실린 11곡들 중 맨 뒤에 ‘논개’를 밀어 넣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0분도 안 걸려 만든 노래 ‘논개’
4집 앨범을 발표했을 때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이었고 처자식도 있었다. 3집 앨범까지 낸 6년 차 가수였지만 그는 그리 잘나가는 가수가 아니었다. 그런 그가 4집을 들고 라디오 공개방송의 일인자였던 KBS 신광철 PD를 만난 사건으로 삶을 뒤바꾼다.
“신광철 PD가 나한테 ‘그만해, 노래. 가서 농사나 지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분이 마음속으로 저를 아껴서 밀어줬는데 해도 해도 안 되니까 그리 말한 거였어요. ‘네가 백이 있냐, 돈이 있냐, 얼굴이 있냐. 그만해’라고 말하는데, 몇십 장 가져간 음반을 그 자리에서 떨구고 무지하게 울었어요. 그리고 ‘그래, 난 안될 거야’ 하고 포기했죠. 그러고선 곧바로 고향 음성으로 내려갔어요.”
4집을 가장 완성도 있게 만들었다는 자부심이 있었는데, 30대를 코앞에 두고 처자식까지 있었는데, 노골적인 비아냥을 들어야 했던 자신의 처지가 그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그러나 얘기가 여기서 끝났으면 지금의 이동기는 존재하지 않았다. 마침 신 PD 옆에 있던 사람이 ‘이 사람아, 판 만들어 왔는데 울게 만들면 어떡해’ 하며 그를 나무랐고, 신 PD는 이동기가 놓고 간 4집 앨범에서 ‘논개’를 듣고 귀가 번쩍 뜨였다. 그리고 그는 그 곡을 집중적으로 틀기 시작했다.
“시골에서 지내고 있는데 어느 날 TV에서 귀에 익은 노래가 들려오는 거예요. 그게 내 노래인 줄도 몰랐죠. 아무래도 이상했어요. 지구레코드 사에 6개월 만에 전화를 했더니 ‘너 빨리 올라와라, 노래 뜨고 있다’ 하더군요. 가봤더니 짐차에 내 앨범들이 막 실려 나가고 있더라고요.”
순식간에 슈퍼스타가 되다
이동기의 ‘논개’는 불같이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는 한사코 TV 출연을 피했다. 외모에 자신이 없었고, 전에 발표한 노래들도 어느 정도 뜨다가 그가 TV에만 나가면 인기가 떨어졌던 걸 기억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MBC의 신종인 PD는 집요했다.
“자기가 PD로 입봉하는 첫 프로그램인 ‘영 일레븐’에 내가 출연하면 좋겠다 하더군요. 피했지만 세 번째 찾아왔을 때 ‘대신 얼굴을 잡지 말고 멀리서 잡아라, 그 약속만 하면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영 일레븐’에 출연했는데, 이 양반이 바스트만 잡은 거예요. ‘왜 약속을 어겼느냐’고 항의하러 갔죠. 그런데 방송국 가는 길에 사람들이 내가 누군지 알아보더라고요. 어떻게 이렇게 세상이 바뀔 수 있나 싶었죠.(웃음)”
1985년, 망하다
‘논개’가 대박 난 이후에도 그의 성공은 한동안 이어졌다. 다음 해인 1984년에 낸 5집에서는 ‘바보 바보’가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러나 그의 발목을 잡게 된 일이 터졌다. 그 일은 조영남과 관계가 있었다.
“제가 당시 5대 도시 콘서트를 했는데 기획자에게 조영남 씨를 게스트로 추천했어요. 그때 인연이 되어 친해졌죠. 그런데 조영남 씨가 가사를 쓴 곡 중에 ‘숨겨진 노래’가 있었어요. 내가 그걸 듣고 완전히 반한 거예요. 그래서 1985년에 발표한
6집 앨범에 넣었죠. 그게 잘못된 판단이었어요. 나는 젊은 취향이었는데 그 노래는 성인가요였던 거예요. 나와는 안 맞았어요. 실패했죠. 그때부터 고전하기 시작했어요.”
6집 앨범이 잘 안된 것도 문제였지만 그는 ‘논개’의 인기에도 돈을 벌지는 못했다. 속사정을 들어보니 그 시절다운 일이었다.
“대한민국 군부대가 정말 많았던 시대잖아요. 게다가 군사 정권이었고요. 아주 적은 돈을 주고 봉사 차원이라며 전방이고 후방이고 데리고 다녔어요. 그래서 어마어마하게 바쁘긴 했는데 돈은 못 벌었죠. 그렇다고 안 돌면 방송 출연이 금지되니까 어쩔 수 없이 갔거든요. 기름 값도 없고 운전기사에게 돈 줄 형편도 못 됐어요.”
우연히 이루어진 일본 진출
9집 앨범을 낸 1987년, 돈은 못 벌면서 계속 실패한 그에게 앞날은 어둡기만 했다. 그때 홀리데이 인 서울 무대에서 공연을 하던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찾아왔다. 와세다대학교를 나온 엘리트 재일교포 2세 출신의 야쿠자 두목이 그를 발견하고 일본에 초대하고 싶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나는 돈을 벌고 싶다고 했죠. 그랬더니 그렇게 해주겠다고 하더군요. 정식으로 초대를 받아 일본에 갔어요. 당시는 15일짜리 관광비자밖에 안 나오던 때였는데, 13일 만에 2000만 원을 벌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한 달에 겨우 300만 원을 받고 그것을 소속사와 나누던 때였는데….”
그래서 그는 4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한국에서는 꿈에도 생각 못한 액수의 돈을 벌었다.
“일본에서도 ‘논개’가 유명했죠. 논개가 사연이 있잖아요? 노래를 부르기 전에 그 얘기를 먼저 했죠. 일본 사람들은 비록 논개가 임진왜란 때 일본 장군을 죽인 기생이지만 역사적 사연이 아름답다는 점을 높이 샀어요.”
가수들의 권리를 위한 활동
오랜 일본 활동을 마치고 철수한 그는 한국에서 컴백을 위한 음반을 준비했다. 그런데 기획사를 하는 친구가 시장 환경이 안 좋으니 음반을 내지 말라고 조언했다. 작업을 멈춘 그는 그 후로도 앨범을 내려고 했지만 마음에 드는 곡이 나오지 않아 계속 미뤄야만 했다. 그러던 중 2005년에 가수들을 위한 노동운동가로 변신한다.
“우리나라 가수들은 참 사회적 약자예요. 당시 가수들의 권리와 권익을 대변하는 곳은 한국연예예술인협회 가수분과밖에 없었거든요. 방송국이 매년 그곳과 협상을 하긴 하지만 갑을관계가 강했죠. 부위원장 입장으로 협상에 참여할 때마다 일방적 양보를 요구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2005년에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위원장 이경호 씨를 만나게 됐어요. 알고 보니 연기자들은 이미 28년 전에 노동조합을 만들어 방송사와 동등한 파트너십으로 일하고 있더라고요. 노동조합이 있으면 방송사가 가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고 갑을관계가 아니라 상생할 수 있으니 반드시 만들라고 강력하게 권하더군요.”
그는 그 말을 듣고 당시 활발하게 활동하는 가수들을 만났다. 남진, 나훈아, 정훈희, 김도향, 김수희 등등 선배 가수들은 그의 설명을 듣더니 일리 있는 얘기라고 동의해줬다. 그래서 2005년 7월 1일 교원공제회관에서 300여 명이 모여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을 만들었고 그를 초대위원장으로 임명했다. 그로부터 그는 14년간 위원장 활동을 해왔다.
가수들이 착각하는 게 있다
그가 볼 때 연기자들은 자기권리를 위해 수많은 투쟁을 했다. 노동조합이 중심이 돼서 모두가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그러나 가수들은 그렇지 못했다.
“딱 한 번 2009년에 MBC에서 연기자들과 함께 연대 파업을 했어요.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관철됐죠. 그러나 그 후에도 투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자 호소했지만 이뤄지지 않았어요.”
그는 가수들이 착각하는 것이 있다고 했다. 바로 TV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것을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안타까워한다는 점이다.
“다른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정기적으로 가수들이 공연하는 쇼 프로그램이 없어요. 미국도 일본도 중국도 다 폐지했어요. 프로그램이 사라져도 그 시대의 대중가요는 꼭 히트하게 되어 있죠. 매체가 있든 없든 노래는 유행하는 거예요. 반드시 방송사 프로그램이 있어야 히트가 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는 방송사의 쇼 프로그램이 사라져야 가요계가 살아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 가수들은 음원 저작권과 공연이 수입원인데 우리나라는 그걸 TV와 지역 행사에서 무료로 제공하니 음원과 티켓이 안 팔린다는 진단이다.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된 이유
사실 이동기가 새 앨범을 못 낸 이유에는 가수들의 권익과 관련한 문제들도 있다.
“음반을 내놓으면 방송사 PD들 찾아다니며 PR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노조위원장이면서 그러고 다니면 조합원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죠.”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섭외가 들어오면 “얼마 줄 겁니까?” 하고 물어본 뒤 기준에 맞지 않으면 안 갔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니 자연스레 TV에서 볼 수 없는 가수가 되었다.
“히트곡은 달랑 ‘논개’밖에 없는데 그래도 되냐고 염려하는 사람도 있었죠. 그래도 ‘이렇게라도 권리를 찾는 모습을 보여줘야 다른 가수들에게 롤 모델이 될 수 있다’고 말했어요. PD들에게도 그런 속내를 설명하니 존중해주더군요. 사실 일선에 있는 PD들은 저희들 출연료 처우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우리가 협상할 때는 PD들과 하는 게 아니라 방송국 노무 담당자들과 하니까 거기서 갭이 생기는 거죠.”
요즘은 자꾸 고향 생각이 난다
그렇게 불도저, ‘무데뽀 투쟁’의 화신이었던 이동기가 새 앨범을 낸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활동해온 위원장직을 내려놓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제 그는 새 노래 ‘약국집 딸’을 내놓은 가수로서 활동해야 한다.
“열정과 사명감이 있는 후배에게 넘겨줘야죠. 한국방송가수노동조합 위원장직은 내년 5월 30일에 임기가 끝나요. 이번 앨범은 예전처럼 저돌적으로 PR하지는 않을 거예요. 아직까지 이동기가 가요계에서 노래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서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진솔한 이야기를 내놓는 거죠. 히트와는 상관없이.”
그는 요즘 자꾸 고향이 그리워진다고 했다. 산속에 들어가 자연과 더불어 나머지 인생을 보내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담대함을 가진 동시에 굉장히 인간적이고 소탈한 뚝심으로 살아온 그는 이제 칩거의 꿈을 꾸고 있다. 그는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말했다.
“처음 노동운동을 할 때는 온몸에서 피비린내가 났어요. 사나운 매파였죠. 그런데 나이를 먹고 오랫동안 노동운동을 하다 보니 전략적 평화주의가 됐어요. 이제는 노사관계를 대화로 풀죠. 노동운동 초창기보다 지금 사람들이 더 많이 따라요. 고마운 사람들이 참 많구나 싶어서 감격스럽죠.”
가수는 자기 노래를 닮는다고 했던가. 이동기는 사랑보다는 의리와 우정을 위해 ‘몸 바쳐서’ 살았다. 그가 몸을 바침으로써 조금 더 나아진 세상에서 가수들이 누릴 평화가 있길 기원해본다.
누가 뭐라고 해도 대한민국 블루스계의 전설 같은 남자.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이런 표현을 싫어할 아티스트. 바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가 그 주인공이다. 김현식, 한영애, 이광조, 이정선 등 대가의 경지에 도달한 뮤지션들과 함께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의 영원한 리더인 그는 여전한 블루스 기타리스트로서, 어느새 40년에 도달한 음악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드러나는 걸 싫어하는 천성 때문일까. 여전히 은자(隱者)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그를 찾아 공연 전 술자리에서 막걸리 한 잔과 함께 만났다.
한국 가요사를 말할 때 절대로 지나칠 수 없는 밴드가 있다. 바로 신촌블루스. 이름 그대로 신촌 지역에 거점을 잡고 1980년대 언더그라운드를 휘어잡았던 신촌블루스는 가요와 블루스의 결합이라는 실험을 통해 다수의 명반을 만들었다. 김현식, 이정선, 한영애, 이광조, 강허달림, 이은미 등 한국 가요사에 묵직하게 새겨진 이름들이 한 번씩 거친 밴드이기도 하다. 신촌블루스에는 ‘아쉬움’, ‘골목길’, ‘그대 없는 거리’, ‘이별의 종착역’ 등 들으면 잊히지 않는 노래를 부른 네임드 멤버들이 있다. 엄인호는 바로 그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신촌블루스가 갖는 음악적 무게감과 밴드를 거쳐간 솔로 아티스트들의 화려한 면면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 중심을 지킨 엄인호는 대중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데뷔한 지 올해로 40년이지만 아직도 숨겨진 인물이며 야인으로서 존재한다. 자칭 타칭 히피로서의 삶과 언더그라운드라는 포지션, 그리고 쇼비즈니스에 대한 거부감이 많은 그의 천성 때문일 것이다.
언더그라운드의 전설, 그리고 40년
엄인호를 만난 것은 지난 10월 3일. 서울 청파동 코리아블루스씨어터 공연을 앞둔 시간이었다.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그가 씩 웃으며 막걸리 한 잔을 따랐다. 공연 전에는 물과 술 외에는 아무것도 안 먹는다는 그는 술을 마셔서 그런가…. 눈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얼마 전에 백내장 수술을 해서 시력이 좋아졌는데, 안경을 벗으면 내 이미지가 아니라 안경을 쓰는 거지. 수술 덕에 멀리 있는 건 잘 보이는데 노안이라 가까이 있는 건 잘 안 보여요.”
그에게서 백내장 수술 얘기가 나오다니 세월이 참 많이 흐르긴 흘렀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원한 청춘처럼 보였던 그도 나이를 먹긴 먹었다. 물론 동료들도 함께.
“(신촌블루스) 멤버들과 시간 맞추기가 힘들어요. 각자 세컨드 일을 하고 있으니까. 한 친구는 지방에서, 한 친구는 서울에서 가게를 합니다. 기타리스트 노병기는 자기 블루스 밴드가 있는데 이번 라이브 녹음을 위해 세션으로 초대했죠.”
‘장발 전과 27범’이 만든 새로운 음악
송창식, 윤형주, 김세환, 김도향 등이 포진해 있던 명동의 쎄시봉이 포크로 1970년대 가요계를 휘어잡는 동안 신촌은 변방이었다. 그리고 변방인 만큼 마이너리티들이 모이는 지역이 됐다. 그들은 OX, 츄바스코, 하렘 등 몇몇 음악감상실에 모여 술과 음악에 빠져 살았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양친을 잃고 독학으로 기타를 배운 엄인호 또한 그들 중 한 명이었다. KBS 합창단에서도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오기도 하고 ‘누가누가 잘하나’라는 프로그램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던 추억도 있었다. 사춘기에 염세주의에 빠진 적도 있었던 그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신중현 노래를 듣고 음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1974년에는 부산에 내려가 DJ 생활을 하다 그 후 전국을 유랑하며 한국형 히피로 살았다. 장발단속령이 떨어졌던 그 시절, 히피족 같았던 장발은 그를 ‘장발 전과 27범’으로 만들었다. 그 당시는 “거의 유치장에서 살았다”며 웃으며 추억한다. 지금도 여전히 그때와 같은 장발이다.
문화의 새로운 시대는 주류가 아닌 비주류가 개척해서 나타나기 마련이다. 1979년, 엄인호는 신촌에서 만난 이광조, 이정선과 함께 ‘풍선’이라는 이름으로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하지만 활동은 오래 이어지지 못했다. 이어서 박동률, 라원주, 양영수 등 신촌 멤버들과 함께 ‘장끼들’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큰 반응을 얻지 못했고 3년여의 활동 후에 해체됐다. 그리고 1986년, 신촌블루스가 탄생한다.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함께 신촌의 레드 제플린이라는 카페에서 활동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 집결하다
“(레드 제플린은) 원래 선배가 운영하던 카페였는데 장사에 신경 안 썼지. 그래서 망해가던 곳이었는데 나한테 운영을 해달라고 했어요. 그때 나는 돈이 없어서 운영권 대신 출연해서 가게를 유지해가면 되겠다 싶어 오케이했죠. 그래서 다 살려놨는데 손님이 많아지니 가게를 다른 주인한테 넘겨버리더라고요. 섭섭했지. 그래도 그렇게 인기가 있어서 관객이 점점 많아졌고 ‘공연을 뭐 이 따위로 하냐 극장이라도 빌려서 해라’는 주위 지인들의 권유로 동숭동 파랑새 소극장을 빌렸어요. 당시 사람이 너무 많이 와서 계단에 앉아서 보기도 하고 그럴 정도였죠. ‘역시 인호 형이 끼니까 뭔가 다르네’ 하는 말도 듣고요. 거기서 시작된 거예요 신촌블루스는.”
그렇게 언더그라운드의 전설이 시작됐다. 1집을 성공시킨 뒤 2집은 개그맨 전유성의 소개로 알고 지냈던 김현식이 참여해 또 명반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러한 음악적 성과들에도 불구하고 신촌블루스는 엄격하게 조직된 밴드가 아니어서 다소 느슨한 공동체처럼 운영됐다. 그래서 멤버들이 수시로 바뀌었고 보컬과 여러 명의 객원 보컬들도 동원됐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질적인 성향의 기라성 같은 아티스트들이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활동이 가능했는지도 모른다.
가장 단적인 예로 신촌블루스에서 가장 무게감 있는 멤버인 엄인호와 이정선만 비교해도 그렇다. 일렉트릭 기타 블루스와 포크의 조화,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오랜 시간 이별과 만남을 거듭하며 음악적 자장을 넓혔다.
“신촌블루스 멤버 중 저를 성장하게 한 사람은 이정선 씨죠. 악보에서부터 여러 가지를 배웠으니까요. 원래 악보 보는 법을 몰랐거든. 그런데 작곡하는 사람이 악보도 못 그린다는 게 웃기잖아요. 그래서 이정선 씨에게 악보 보는 법을 배웠고 덕분에 쓰는 법도 알게 됐죠. 여러모로 내게는 참 고마운 사람이에요.”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냐?”
“전에 발표했던 ‘이별의 종착역’을 블루스로 꼭 만들고 싶었어요. 그래서 신촌블루스 3집에 싣기 위해 김현식에게 죽기 얼마 전에 불러 달라고 부탁하니까 현식이가 ‘이거 나 죽으라는 노래네?’ 하더라고.(웃음) 그런데 흔쾌히 허락했어요. 단칼에. 가사 기억이 잘 안 나니까 가사만 알려 달라고 하고 스튜디오에 아들과 함께 와서 한 번에 불렀죠. 김현식에겐 그런 매력이 있었어.”
엄인호는 아련한 듯 김현식을 추억했다. 생각해보면 그를 거쳐간 가수가 참 많았다.
“현식이, 한영애, 정경화, 이은미 등등 정말 준비된 가수들이었죠. 오랫동안 그 고집으로 쭉 버텨왔고. 나는 오버하는 가수는 싫어해요. 너무 멋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멋 부리지 않고 자기 색깔대로 부르는 가수가 멋지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계산된 창법은 안 좋아해요. 연주도 그렇죠.”
자연스럽고 절제된 스타일을 좋아한다는 그의 신조는 그의 음악적 애티튜드였다. 없는 듯 있으면서, 시간과 사연의 흐름을 타고 살아온 그의 인생을 생각하면 충분히 납득이 가는 부분이었다. 그렇게 올해로 40년째 음악인으로서 살아왔다. 10년 전 그는 거의 은퇴 직전까지 갔었다고 한다.
“갑자기 다 싫은 거야. 내가 쉴 때가 됐나보다 하고는 미국에 가서 거의 일 년을 놀다 왔지. 한편으로는 그대로 거기서 눌러살까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러려면 미국에서 다시 시작해야 하잖아? 과연 내가 정착할 수 있을까 싶었지. 그러다가 아들이 결혼한다고 해서 한국에 다시 들어왔다가 안 나가고 지금까지 살고 있어요. 할 것도 많았고.”
뮤지션에 대한 관객들의 예의
그의 아들 엄승현 씨도 현재 세션 기타리스트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아들의 실력을 인정했다.
“그런데 나하곤 일을 안 하려고 해. 야단맞으니까.(웃음) 참견하고 싶지 않아요. 가끔 조언을 해주고 싶은데 거절하더라고.(웃음) 뭐 음악이라는 건 스스로 알아서 해야 하는 거니까요.”
그는 자신처럼 라이브 공연으로 살아가는 후배들을 보면 안타깝다고 말했다.
“일본이나 해외 어디든 가서 공연하면 관객이 너무 부러워요. 뮤지션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거든. 특히 예의를 지킬 줄 알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관객들은 뮤지션에 대한 존경심이 없고 소모품으로 여기는 경향이 더러 있어요. ‘너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 하는 심정으로 바라보니까요. 관객이 밴드를 최대한 응원하고 자극하면 더 즐거운 공연이 될 수 있는데, 그걸 몰라요.”
얼마 전 클럽에서 연주를 하는데, 관객 중 한 명이 갑자기 무대로 올라왔다고 한다. “‘골목길’은 내가 더 잘 불러” 하면서. 또 무대 바로 앞자리에 앉아서 공연에 방해가 될 정도로 떠드는 관객도 있단다. 우리나라 공연 문화가 아직 낮은 수준임을 알게 해주는 상황들이라고 그는 안타까워한다.
“결국 뮤지션들은 그런 무대를 기피하게 돼요…. 이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지만 어휴, 입에서 욕이 나오려고 해.”
신촌블루스 원년 멤버 공연
그렇다면 그는 요즘 가요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소위 아이돌 위주로 재편되는 가요계 현실에 대해 그는 덤덤해했지만, 한 가지 주문하고 싶은 게 있다고 했다.
“어차피 대중음악은 유행 따라 흘러가는 것이기에 큰 불만은 없어요. 단지 우리가 예전에 갖고 있던 감성이 없다 보니까, 마치 아이들 일기에 쓸 법한 가사들만 나오니까… 물론 작사가들이 제대로 쓴 건 다르겠죠. 그런데 요즘 작사하는 친구들 보면 포커스를 모두 중학교 아이들에게 맞추는 거 같아요. 아무리 작곡을 잘해도 가사가 너무 자극적이거나 유치하면 불만스러워요. 안타까운 거라면 그거예요.”
현역으로서, 그는 데뷔 40주년을 맞이해 오는 11월 23일에 그의 음악적 고향 신촌에서 한발 떨어진 홍대 하나투어 브이홀에서 신촌블루스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번 무대가 특별한 이유는 원년 멤버인 이정선과 한영애가 함께 자리하기 때문이다. 과거 신촌블루스의 면모를 다시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더욱 기대가 된다.
“11월에 제 생일이 있기도 하고…. 김현식이 떠난 달이기도 한데, 그때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고 방황하게 되니까, 올해가 마침 데뷔 40주년이니 공연이나 해야겠다 싶었어요. 김현식과 함께 불렀던 노래 ‘바람인가 빗속에서’, ‘이별의 종착역’을 불러볼까 해요. 한영애, 이정선 씨도 함께하기로 했는데, 사실 귀찮아요. 그 친구들 나오면 연습도 따로 해야 해서요.(웃음) 그래도 이제 나이를 먹었으니까 현식이를 추모하며 그간 서운한 감정 있으면 다 없애고 가끔 이렇게 뭉치자고 하고 싶어요.”
자연스럽게 살다 가고 싶다
덤덤하게 사는 그는 딱 하나, 꼭 해보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여태까지 다 해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못해본 게 있는 거 같아요. 또 음악이지. 히트곡? 그런 건 아니고. 뭔가 엄인호다운 것.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꼭 한 번 해보고 싶은 그런 스타일이 있거든요. 음악적으로 세련된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런데 그게 내 생각대로 쉽게 되는 건 아니거든.”
그에게 남아 있는 단 하나의 꿈이란 것도 결국 음악이었다. 모호하고 바로 손에 잡히지는 않지만 그래서 더욱 좇고자 하는 음악의 경지였다. 그렇듯 엄인호라는 사람은 끝까지 음악이 아니면 설명될 수 없는 아티스트다.
엄인호는 신촌블루스 안에서 더욱 빛나는 자유로운 영혼이다. 한 시대를 풍미하고 다양한 음악적 실험을 주도한 그는 우리 음악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어떻게 기억되고 싶을까.
“누구에게 날 기억해 달라 하고 싶지는 않아요…. 그냥 자연스럽게 살다 가자. 그거면 돼요.”
가슴에서 훅 뜨거움이 쳐 올라와 냉큼 막걸리 잔을 비웠다. 공연이 끝난 후 우리의 술잔은 다시 못다 한 이야기와 함께 넘쳐흘렀다.
이보다 더 화려한 등장이 또 있을까. 건강미 발산하는 젊음의 무대를 요즘 말로 제대로 씹어 먹었다. 그저 걷게만 해달라는 심정으로 체육관 문을 두드렸을 뿐인데, 효과는 상상 그 이상이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소박한 소망을 빌었을 그녀는 15cm 유리구두 위에서도 위풍당당했다. 제25회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 피규어 38세 이상 부문에서 2위를 차지한 임종소(林鍾昭·75) 씨를 만났다.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시작하는 살맛나는 인생 이야기를 들어봤다.
방송을 보면 유명인이 이미지 변신을 위해 살을 뺀다거나 피트니스대회에 나가 건강한 근육을 자랑하는 모습을 종종 접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그때 잠시뿐. 화제성은 쉽게 가라앉고 만다. 하지만 지난 5월 WBC 피트니스 오픈 월드 챔피언십(이하 WBC)에 출전했던 75세 보디빌더 임종소 씨의 인기는 각종 매체를 타고 꾸준하게 전파되고 있다. 환한 미소에서 건강한 에너지와 밝은 기운이 느껴졌다.
“지금 제 모습이 저 처녀 때 성격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활달하고 똑 부러지는 성격이었거든요. 아버지가 부평에서 상업을 하셨는데 둘째 딸이었던 제가 장사를 거들었어요. 저 시집갈 때 친정에 가게를 사주고 온 사람이라니까요. 75세, 지금이 가장 행복한 것 같아요.”
싱그럽고 통통 튀는 목소리를 가진 매력녀가 불과 몇 달 전 관중들 앞에서 멋진 근육을 드러내며 완벽한 포즈를 취하던 임종소 씨다. 그녀를 만난 시간은 오후 3시.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일하고 왔어요. 주중 3시간씩 오전 11시 40분부터 오후 2시 40분까지 식당에서 설거지를 해요. 그 이후에는 체육관에 와서 운동하거나, 오늘같이 인터뷰가 있으면 약속 잡거든요. 저는 하루에 딱 3시간만 일하면 됩니다. 별거 없어요. PT(개인강습) 비용 내려고 다니는 거니까요.”
10년 전 남편과 사별하고 딸네 집에서 생활한다는 임종소 씨는 자녀들에게 부담 주는 것이 싫어서 돈 쓸 데가 생기면 필요한 만큼 벌어서 쓴다.
“처음 일하러 갈 때 나이를 살짝(?) 속였어요. 한 달쯤 되어 세금 정산을 한다고 해서 신분증을 사장님께 보여드렸더니 당황하시더군요. 그래도 한 달 동안 좋게 봐주셨나봐요. 1년 넘게 다니고 있으니까요.”
될성부른 보디빌더 알아본 관장님
그녀가 피트니스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허리 협착증 때문이었다. 맷돌을 다리에 맨 것처럼 몸이 늘 무겁고 힘들었다.
“땅에 발을 디디면 미칠 듯이 아프더라고요. 뼈가 내려앉으니까 못 걷는 거예요. 제가 에어로빅을 35년 했어요. 강사증만 없을 뿐이지 안 해본 동작이 있겠어요? 그렇게 활동적인 사람이 잘 걷지 못해 집에서만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봐요. 삶이 끝난 거잖아요. 진지하게 전동 휠체어를 사야 하나 하는 생각도 해봤습니다. 병원을 다녀도 잠시만 반짝 좋아질 뿐이었어요.”
담당의는 근육이 약해졌으니 근육강화운동을 해보라며 권했다. 마침 에어로빅 학원에 가던 길에서 봤던 체육관 입간판이 떠올랐다.
“예사로 쳐다보고 다녔는데 그때 생각이 나더라고요. 맞춤운동, 재활운동이라는 문구가요. 곧장 체육관으로 가서 의사와 했던 얘기를 박용인 관장님께 했어요. 의사와 같은 생각이라고 하시더군요. 그 자리에서 등록했어요. 그날 오전 11시쯤 체육관으로 들어갔는데 PT 받을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더군요. 두 시간 기다려 바로 운동을 시작했어요. 정말 절실했어요. 이거 아니면 죽는다, 여기서 못 고치면 절름발이가 되거나 휠체어를 타야 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운동을 했어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심정으로 관장이 권하는 훈련을 믿고 했다. 협착 증세는 한 달 만에 좋아졌다.
“휠체어를 타는 상상까지 하며 막막했는데 좋아졌잖아요. 정말 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꾸준히 운동했어요. 일주일에 3회 받던 코칭을 2회로 줄이고 한 3개월쯤 됐을 무렵, 관장님이 ‘보디빌더 한번 해보세요’ 하더라고요. 내 나이가 몇인데 그러냐며 웃어넘기려 했는데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게 작년 8월쯤이었어요.”
박용인 관장은 보디빌더 경력이 화려할 뿐만 아니라 각종 대회 심사위원 등으로 꾸준하게 활동해왔다. 임종소 씨가 임자를 제대로 만났다는 뜻이다.
“관장님이 저처럼 근육이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했어요. 제 근육이 예쁘대요.(웃음) 저는 옆에서 부추기면 진짜 그런가 하고 또 따라요. 시니어 부문에 출전하면 무조건 입상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저는 입상을 떠나 나이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었어요. 여러 사람들한테요. 나이 들어서 모든 걸 포기하고 앉아 있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관장님도 진짜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비키니는 잘못 없다
집중적으로 근육운동을 하면서 대회 준비를 하는데 비키니가 말썽이었다. 대회에 비키니를 입고 출전한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비키니를 입어야 한다는 거야. 그런데 관장님이 부천시장기 제7회 부천보디빌딩 및 피트니스대회에 출전한다고 이미 등록을 해버렸더라고. 비키니 가격이 만만치 않았어요. 보석이 박혀서 그런지 50만 원에서 70만 원이나 해서 깜짝 놀랐어요. 그거 살 능력 안 된다고 대회 출전 못하겠다고 했더니 예전에 출전했던 분의 옷을 빌려오셨어요.”
살아생전 입어볼 거라고는 상상도 안 해본 비키니를 입고 사람들 앞에 서야 했다. 옷을 가져다 놓고 안 입겠다고 이틀을 실랑이했다.
“출전할 만큼 몸이 다져졌으니 나가보면 절대 후회 안 할 거라고 관장님이 그랬어요. 등록도 해버린 상태이고, 그 상황에서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어요. 대신 15cm 유리구두는 제가 샀습니다. 집에서 비키니를 입고 연습했어요. 우리 손녀가 하나는 대학교 2학년이고 하나는 고등학교
2학년인데 ‘할머니 멋쟁이’라고 ‘예뻐 죽겠다’고 해요. 딸은 어이없는 표정으로 ‘아빠가 계시면 어림도 없어’ 하더라고요. 그래도 어차피 시작했으니까 열심히 하라고 응원해줬어요.”
첫 대회는 자유포즈와 지정포즈를 도대체 어떻게 하고 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떨리는 마음으로 치렀다.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가는데 사회자가 갑자기 인터뷰를 하자고 했어요. 어떻게 나오시게 됐냐고 묻더군요. 그래서 관장님이 권유해서 나왔고, 무엇보다 나이를 먹어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서 나왔다고 말했습니다. 그날 입상은 못했는데 인기는 좋았어요. 그러고 나서 20일 후에 WBC대회에 또 참가했어요. 이미 벗은 거 한 번 더 못 벗겠느냐고 했죠.(웃음)”
규모가 큰 대회이기도 했고 첫 대회에서 아쉬웠던 것들을 만회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자유포즈는 인터넷을 검색해 참고하면서 자신만의 개성 있는 포즈로 만들었다. 자다가도 연습할 정도로 자세를 외우고 집중했다. 그 결과 한창 젊은 선수들을 제치고 당당하게 2위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지금이 가장 화려한 시절
WBC대회 이후 각종 매체에서 임종소 씨를 주인공으로 하는 특집 다큐를 제작하고 보도를 이어갔다. 영국 BBC에서도 70대라고는 믿겨지지 않는 건강한 한국 시니어 여성이라며 소개했다. 대회 이후 그녀는 또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는 매체와 만나 영상을 찍고 인터뷰에 응해주는 일이 많아졌다. 그 와중에도 식당에 잠깐 나가 용돈을 벌고 운동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평일에는 관장님이랑 운동하고, 토요일에는 모델 워킹 연습도 합니다. 그리고 제가 사실 좋아하는 취미가 하나 더 있어요.”
임종소 씨는 35년간 했던 에어로빅을 나이 더 먹으면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교댄스를 배우고 있다고 했다.
“4~5년 정도 됐어요. 에어로빅은 격렬하잖아요. 다리 아파서 못 뛰게 되면 찬찬히 할 수 있는 춤을 춰야지 싶어서 배우고 있습니다. 왈츠, 탱고, 자이브 등을 춥니다. 함께 배우는 친구들이랑 소셜 모임에도 가고요. 남녀가 함께 추는 거라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우리들은 다 나이 먹은 사람들이니까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 없이 노후를 즐겁게 보내자 했습니다. 저는 왈츠가 좋아요. 제일 멋있는 거 같아요. 매일이 즐겁고 바빠요.”
에어로빅과 사교댄스를 배웠다는 얘기에 어느 정도 궁금증이 풀렸다. WBC대회 영상 속 임종소 씨의 동작이 유연하게 리듬을 타면서 연결되는 점이 인상적이었기 때문. 그저 1년 준비해서 갑자기 등장한 반짝 스타가 아니라 꾸준하게 관리해온 자신을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준 것이다.
“댄스를 위해 운동했지. 그래요, 맞아요. 건강을 잃으면 댄스고 뭐고 뒷방 늙은이 되는 거예요. 생각하면 기가 막혀요. 제가 좀 스타의식이 있나봐요. 많은 사람이 저한테 집중한다는 게 너무 기분이 좋은 거야.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제대로 즐겼습니다.”
임종소 씨는 결혼한 뒤 아이들과 남편, 가족만 생각하면서 살았다고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오로지 자신에게 집중하며 살고 있다.
“내 건강은 내가 지켜야지, 누가 대신 안 챙겨주잖아요. 효자, 효부가 있어도 대신 아파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나이 먹었다고 꿈을 접지 않았으면 해요. 자신감 잃지 말고, 뭐든 할 수 있으니 도전하자,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나이에도 열심히 사는 모습, 젊은 사람들에게 귀감이 됐으면 합니다.”
전주를 감싸고 있는 완주군은 전주보다 존재감이 덜할 뿐 매력이 차고 넘친다. 아마도 완주에 안 가본 이는 있어도 한 번만 가본 이는 없을 듯하다. 완주를 음식에 비유하면 담백하면서도 깊은 맛이 우러나는 ‘곰탕’ 같다고나 할까. ‘어느 날 문득, 무궁화열차를 타고 완주 삼례에 다녀오리라’ 했던 결심을 드디어 실행에 옮겼다.
걷기 코스
삼례역▶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책마을▶ 수도산근린공원▶ 비비정▶ 비비정예술열차▶ 호산서원▶ 비비낙안▶ 삼례역
느린 무궁화열차 타고 삼례 여행
완주 삼례에는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책마을, 비비정, 비비정예술열차, 카페비비낙안 등의 명소가 모여 있다. 모두 삼례역에서 도보 5~10분 거리에 있어 걸으며 둘러보기에 좋다. 호남선 무궁화호 열차가 정차하는 삼례역은 서울 영등포역에서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 긴 이동시간이 지루해지면 4호차에 들른다. 무궁화열차 4호차는 자유석 객차이며 창밖을 볼 수 있는 좌석이 있다. 이 좌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 풍경을 감상하거나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글을 쓰며 기차에 머무는 시간을 즐긴다. 연산역, 계룡역, 부황역, 개태사역 같은 낯선 간이역을 구경하다 보면 어느새 삼례역에 도착한다.
1920년대 양곡 창고의 대변신, 삼례문화예술촌
삼례역을 빠져나와 3분 정도 걸으니 삼례문화예술촌 입구가 나온다. 맹꽁이 조형물의 환영 인사를 받고 입장한다. 옛날 이 지역은 습지여서 개구리, 두꺼비, 맹꽁이들이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이 삼례 농민들에게 수탈한 쌀을 보관하기 위해 대규모 양곡 창고들을 지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 창고들을 개조해 문화예술공간으로 조성한 곳이 바로 삼례문화예술촌이다. 이로써 삼례에도 옛 건물을 공간 재생한 뉴트로 콘셉트 명소가 탄생했다.
삼례문화예술촌 안에는 어울마당을 중심으로 모모미술관, 문화카페 뜨레, 책공방, 커뮤니티 뭉치, 김상림목공소, 디지털아트관, 소극장 시어터애니 등이 자리해 있다.
삼례문화예술촌에 들어서면 모모미술관을 가장 먼저 만나게 된다. 녹슨 건물 외벽에 흰 페인트로 쓴 ‘삼례농협창고’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출입구 옆에는 로봇 태권브이 조형물이 문지기처럼 지키고 있다. 모모미술관에서는 다양한 장르의 미술 작품을 전시하고, 교육아카데미, 미술 체험 등을 진행한다.
모모미술관 뒤에 있는 문화카페 뜨레는 차를 마시며 음악 공연과 미술 작품까지 감상할 수 있는 힐링 공간이다. 천장이 높고 실내가 시원하게 트여 있어 갤러리 같은 느낌을 준다. 뜨레 옆에는 책공방이 있다. 컴퓨터가 없던 시절의 인쇄 기계들과 책 만드는 옛 공구들이 가득하다. 이곳에서 팝업북, 앨범북, 가죽다이어리 만들기 등의 체험을 진행한다.
건물 앞에 목재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곳은 김상림목공소다. 목공소 안에 들어서자마자 청량한 소나무 향이 풍겨온다. 전통 목가구 전시장과 목수들의 작업실 공간으로 나뉜다. 작업실 벽에 전시된 옛 목수들의 손때 묻은 연장이 눈길을 끈다.
김상림목공소에서는 김상림목수학교와 나무 브로치, 나무 목걸이, 나무 촛대 등의 소품 만들기 체험을 진행한다. 이밖에 VR기기를 통해 미술 작품을 입체 영상으로 감상할 수 있는 디지털아트관과 국악·마술 공연 또는 영화 상영을 하는 시어터애니가 있다.
삼례책마을에서 즐기는 독서삼매경
삼례문화예술촌 앞에서 길 하나만 건너면 삼례책마을에 닿는다. 잔디밭에 창고형 건물 세 동이 ‘ㄷ’ 자 형태로 자리 잡았다. 이곳 건물도 일제강점기부터 1950년대 사이에 지어진 양곡 창고를 공간 재생한 것이다.
삼례책마을의 중심 건물은 고서점, 헌책방, 북카페로 이루어진 북하우스다. 외벽은 붉은 벽돌로 지었고, 내부는 목조로 마감했다. 이곳에서 10만 권에 달하는 헌책과 고서를 만날 수 있다. 북하우스에 입장하면 옛 창고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천장에 시선이 먼저 간다. 천장 분위기와 어울리게 헌책방 서가도 아날로그 감성으로 꾸몄다. 곳곳에 있는 벤치는 관람객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준다.
2층 서가에는 1인 책상을 짜 넣은 코너가 있어 학창 시절 독서실에서 공부했던 추억이 떠오른다. 2층에서 고서점인 호산방이 한눈에 보이는데 서가의 높이가 아찔하다. 한국, 중국, 일본, 서양 고서까지 취급한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헌책을 사면 1층 북카페에서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다. 북하우스 옆에는 전시장, 공연장, 강연실, 자료실, 무인 헌책방 등으로 사용하는 건물 두 동이 있다.
기러기도 쉬어가는 경치 좋은 비비정마을
삼례책마을을 둘러보고 다시 삼례역 방면으로 가다 보면 문화생태탐방로 이정표를 만난다. 비비정 방향으로 걷는다. 삼례역사 왼쪽 담장을 따라가는 길로, 붉은 바닥에 자전거 표시가 되어 있다. 통행하는 이가 적어 자전거를 피해 걸어 다닐 일은 없겠다. 낯선 길에서 불안하던 참에 자전거를 탄 아이가 지나간다. 아이에게 비비정 가는 길을 물으니 모른다 한다. 다시 제 갈 길을 가던 아이가 잠시 뒤 자전거를 멈춘다. “가르쳐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제가 가본 적이 없어서요”라고 외친다. 삼례가 더 좋아진다.
삼례역 상공을 가로지르는 고가도로를 지나면 수도산근린공원이 나온다. 누군가 부르는 7080 대중가요를 엿들으며 구릉 같은 공원을 넘는다. 공원을 벗어나 오른쪽 찻길로 내려가다 보면 후정리 남쪽 언덕에 세워진 비비정을 만난다. 비비정은 조선시대 선조 때 정자인데 소실되어 1998년에 복원했다. 한자로는 ‘飛飛亭’이라 쓴다. ‘날아가던 기러기가 쉬어가는 곳’이라는 뜻이다. 옛날 선비들이 비비정에 올라 한내 백사장에 내려앉은 기러기 떼를 바라보며 풍류를 즐긴 것을 ‘비비낙안(飛飛落雁)’이라고 했다. 비비정 아래로는 한내라 부르는 삼례천이 흐르고 주변에 넓디넓은 호남평야가 펼쳐져 있다. 하얀 백사장에 기러기 떼가 내려앉은 옛 풍경은 사라지고, 갈대와 풀이 무성한 강변에 낚시꾼들만 보인다.
비비정에 오르면 한내를 가로지르는 옛 만경강 철교가 한눈에 보인다. 일본이 호남평야의 농산물을 반출하기 위해 세운 다리다. 2011년 근처에 호남선 철교를 새로 놓아 폐철교가 되었다. 폐철교 위에 놓은 비비정예술열차가 명물이다.
새마을열차 객차 네 량을 개조해 각각 레스토랑, 카페, 수공예품 가게, 갤러리 등으로 활용하고 있다. 맨 마지막 칸의 카페는 일몰을 기다리는 손님들로 늘 붐빈다. 비비정예술열차 카페에서 호남선 철교를 건너 삼례역을 오가는 열차를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비비정에서 언덕을 따라 10분 정도 걸으면 비비정마을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카페비비낙안에 도착한다. 사방이 탁 트여 가슴이 벅차다. 삼례에서 이처럼 트렌디한 카페를 만나게 될 줄이야. 카페 뜰의 옛 물탱크를 활용한 전망대에 오르자 마을 전경과 만경강, 호남평야가 와락 달려와 안긴다.
주변 명소 & 맛집
새참수레
새참수레는 완주시니어클럽에서 운영하는 한식뷔페 레스토랑이다. 65세 이상 어르신들이 완주 지역의 식자재를 이용해 슬로푸드를 만든다. 화학조미료를 넣지 않으면서도 음식을 맛깔나게 요리해 단골이 많다. 메뉴는 쌈채소, 샐러드, 꽃김밥, 한방수육, 두부까스, 잡채, 제철 나물 등 20여 가지나 된다. 삼례문화예술촌 앞에 있다. (봉동읍 봉동동서로 11)
호산서원
비비정 아래에 아담한 호산서원이 있다. 조선시대 순조 때 송시열, 정몽주, 김수향, 정숙주, 김동준을 추모하기 위해 송시열이 거주했던 비비정 옆에 서원을 세우고 위패를 모셨다. 누가 세웠는지는 알 수 없다. 흥선대원군이 서원 철폐령을 내렸을 때 헐렸다가 1958년 다시 세워졌다. 현재 홍살문, 강당, 외삼문, 사당 등이 남아 있다. (삼례읍 후정리 137)
삼례성당
삼례문화예술촌과 이웃한 삼례성당은 2016년에 개봉한 독립영화 ‘삼례’에 등장해 눈길을 끌었다. 1951년 한국전쟁 중에 본당이 창설되었고, 전쟁 직후인 1954년에 착공해 이듬해 8월에 준공했다. 붉은 벽돌 건물로 정면 중앙에 종탑이 우뚝 솟아 있고, 좌우에 8각 첨탑이 설치돼 있다. 종탑 아래 주 출입구와 보조 출입구를 아치형으로 만들어 장식미를 더했다. (삼례읍 삼례역로 65)
여행 정보 걷기 Tip
• 삼례 여행 전에 전북투어패스를 구매해두면 알뜰하게 여행할 수 있다. 삼례문화예술촌 안내소에서 전북투어 패스를 제시하고 무료 관람권을 받으면 된다. 삼례문화예술촌 내 모든 시설을 할인받아 관람할 수 있다. 비비정예술열차도 할인 혜택이 적용된다. 전북투어 패스 홈페이지나 네이버 예약에서 모바일 패스를 구매할 수 있다.
• 삼례문화예술촌은 장애인, 어르신, 영유아 동반 가족들이 편하게 이용할 수 있는 무장애 시설이다. 장애인 전용 주차장, 촉지 안내판, 장애인 화장실 등을 갖췄으며 휠체어 이동 동선을 안내한 브로슈어를 제공한다. 안내소에서 휠체어와 유모차도 대여해준다. 삼례책마을 북하우스는 시각장애인 겸용 도서관을 운영한다.
세월이 비켜간 듯한 목소리, 과거와 똑같은 외모. 30대 중반처럼 보이지만, 올해 그녀의 나이는 만56세. 믿기지 않는다. 절대 동안의 외모, 청아하면서도 파워풀한 목소리로 ‘난 너에게’, ‘내 사랑을 본 적이 있나요’, ‘환희’ 등을 히트시키며 1980년대를 대표하는 가수로 군림했던 정수라가 바로 그녀다. 작년에 데뷔 35주년을 기념하는 공연을 치르고 올해 초 신곡 ‘업고! 업고!’를 발표한 후 활동 중인 그녀는 11월에 있을 공연을 준비하며 쉼 없이 바쁘게 살고 있었다. 여전한 카리스마와 놀라운 가창력으로 무대를 휘어잡으며 오늘 현재를 철저하게 살아가는 그녀의 인생관, 그리고 가수로서의 삶에 대해 들어봤다.
“‘업고! 업고!’는 ‘업고 신나게 놀면서 우리 기운을 상승시키자’는 의미예요. 원래는 제목을 영어 그대로 ‘Up Go’(유피 고)로 하려 했는데 작사가 이건우 씨가 ‘영어로 하면 너무 아이돌 노래 같아서 우리 세대는 낯설 수 있으니까 한글로 가자’고 해서 그렇게 됐죠.”
정수라의 신곡 ‘업고! 업고!’를 들어보니 EDM(전자음악을 통칭하는 용어)이 가미된 남진의 노래를 정수라가 부르는 듯한 신나는 곡이었다. 정수라의 대표곡들이 워낙 듣는 사람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는 노래가 많기에 그런 이미지와도 부합했다.
“‘업고! 업고!’가 나오기 전에는 발라드곡을 발표했어요. 그런데 발라드보다는 힘찬 노래가 어울린다는 피드백이 오더군요. 물론 그런 반응들만 따라가는 건 아니지만, ‘환희’ 이후에 사람들을 업시킬 수 있는 노래를 만들었죠.”
‘아! 대한민국’으로 최고 인기가수
사실 대중이 아는 정수라는 에너지가 넘치면서도 청아한 창법이 특징인 가수다. 이런 이미지를 만든 노래가 바로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한 번 이상 들어봤을 ‘아! 대한민국’이다. 원래는 타이틀곡도 아니었고 음반에 의무적으로 들어가야 하는 건전가요로 만들어진 노래였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공전의 히트를 치며 제2의 애국가라는 별명까지 갖게 됐다. 지금도 대학가와 운동 경기장을 가면 자주 듣는다. 젊은 사람들도 이 노래를 부른 가수가 정수라인 걸 알면 놀라면서 신선하게 느끼지 않을까.
“‘아! 대한민국’은 그 시대에 만들어야 했고 불러야 했던 노래일 뿐이었어요. 그런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빵 뜬 거예요.(웃음) 정말 의외였어요. 그래서 정수라는 강하고 씩씩하고, 건전가요에 어울리는 가수라는 인상을 갖게 됐죠. 개인적으론 마음에 안 들어요. 덕분에 쎄 보인다는 말도 듣는데, 저 엄청 여려요.(웃음)”
엄혹한 시대에 숙명처럼 얽혀 슈퍼스타가 된 정수라였지만, 그녀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아! 대한민국’의 대성공 이후로도 꾸준하게 히트곡을 발표하며 1980년대를 상징하는 가수가 됐다. 또 ‘가요톱10’에서 총 21번 1위를 기록하며 역대 세 번째로 1위를 많이 수상한 가수가 되었다. 1980년대에 우리는 그녀의 노래를 들으며 살았던 것이다.
다른 세대와의 소통도 필요해
정수라는 중학교 3학년 때 연예계 데뷔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목소리를 인정받은 그녀는 일찌감치 광고음악을 통해 대중과 만났다. 학교보다 스튜디오를 더 많이 다녔다는 그 시절, 그녀를 가수의 세계로 이끌어준 사람은 ‘바람이었나’, ‘풀잎 이슬’ 등의 노래를 만들어준 작사가 박건호였다. 그 후로 36년간 연예계에서 활동한 그녀이지만, 젊은이들 위주의 프로그램이 많은 요즘 방송에서는 보기가 쉽지 않다. 혹시 그녀도 대중에게 잊힌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을까?
“무대 위에 올라가면 못 느껴요. 무대에서 내려와 일반 생활을 할 때, 내 연배들은 나를 알지만 그보다 연하인 사람들이 못 알아볼 때는 조금 느끼긴 하죠. 사실 저는 너무 숨어 있었어요. 예능도 안 하고 토크쇼도 안 하고. 카메라를 의식하는 방송울렁증이 있어서, 그리고 뻔한 게 싫어서 그랬죠. 그런데 요즘은 ‘내가 다른 세대와의 소통에 소홀히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차피 오래 노래하려면 나를 아는 세대하고만 만날 것이 아니라 모든 세대와 어울릴 수 있는 방법도 찾아봐야 하지 않나?’ 하며 되묻긴 하죠.”
얘기를 좀 하다 보니 그녀에게서 가수는 물론 방송인으로서의 욕심 또한 느껴졌다.
“‘불타는 청춘’에 나온 후에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나를 만난다는 게 얘깃거리가 된 거죠. 자연스럽게 있는 그대로의 저를 보여줄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으면 나가고 싶어요. 요리 예능요? 내가 요리를 못해. 그것보다는 요리를 배워보는 게 좋겠어요.(웃음)”
노래 안 했으면 연기했을 것
예능 얘기를 하다 보니 천생 가수인 그녀가 만약 노래를 안 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지 궁금했다. 그녀는 단숨에 ‘연기자’라고 대답했다.
“연기를 하면 다양한 인생을 살 수 있잖아요. 저는 너무 단순해요. 56세이지만 나를 다 못 보여준 거 같아서요. 사람들은 저에 대해 무대 위에서의 파워풀한 느낌만 기억하는 것 같아요. 원래 제 성격은 천방지축이거든요. 이젠 다양한 내면을 드러내고 싶어요”
정수라는 (매니저에게) “너 영화 쪽에 아는 사람 좀 없니?” 하며 웃었다. 요즘 아이돌은 데뷔 전 연기 교육도 기본으로 받는다. 아이돌 가수생활을 발판으로 삼아 향후 연기자로서의 미래까지 염두에 두고 하는 준비다.
“요즘 아이돌, 인정해야죠. 그런 가수들이 성공하는 시대가 된 거예요. 저도 오래 살다 보니 이런 시대를 만나게 된 거고요. 기회가 주어진다면 디제잉하는 친구와 조인해서 EDM을 하고 싶어요. 마돈나처럼, 그리고 인순이 선배가 조PD와 한 것처럼 말이죠. 일단 재밌잖아요.”
멀티플레이어 정수라의 욕심
대화를 나눌수록 그녀가 멀티플레이어 욕심도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문득 가수 권인하가 최근 유튜브에 채널을 열어 독보적인 가창력을 뽐내며 제2의 전성기를 열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노래가 성공하려면 유튜브를 반드시 해야 한다. 가창력 하면 정수라도 결코 뒤지지 않는 가수인데 유튜브를 시도해보면 어떨까?
“유튜브는 와 닿질 않아요. 내가 걸어가는 길이 있는데 굳이 거기에 맞추다가 자칫 잘못하면 마이너스가 될까 걱정되기도 하고요. 일단 게으름 피우지 않고 열심히 일하는 게 중요하죠.”
뜻밖의 보수적인 면모가 보였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녀의 그런 반응에는 타당한 이유가 있었다. 젊었을 때 근거 없는 악성 루머에 오래 시달렸고, 곧 가수 데뷔 40주년이 될 만큼 오래 연예계에서 일했지만 아직도 방송울렁증이 있다. 그런 경험이 있는 그녀에게 무턱대고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을 여과 없이 노출하는 유튜브는 당연히 거부감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수로서의 재능을 생각해봤을 때 유튜브야말로 그녀에게 최적화된 포맷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녀의 향후 행보가 궁금해진다.
하루를 충실하고 행복하게
“젊게 보인다는 것은 저에게는 플러스죠. 필라테스를 6년째 하는 중이에요. ‘내가 힘들 때 뭐하고 있었더라?’ 생각해보니 운동을 하고 있었더라고요.(웃음) 땀 흘리는 게 좋아요”
정수라는 기본적으로 승부근성이 있는 사람이다. 그녀의 노래들이 그렇듯이, 그녀는 지난 몇 년 동안 인생에서 벌어졌던 어려웠던 일들을 하나씩 극복해냈다.
“요즘 몇 년 동안 나 자신에게 ‘정말 대단한 정수라야’ 하며 스스로를 칭찬했어요. 저에게 내일은 없는 날짜이고, 어제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에요. 그래서 오늘이 가장 중요해요. 최선을 다하는 게 행복한 하루죠. 그리고 나뿐만 아니라 내 노래를 듣고 행복해하는 사람들 얼굴을 보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게 좋아요. 저는 살면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게 문제였죠. 바쁘게 주어진 일만 했고 세상 물정을 몰랐고 꼭두각시처럼 일만 했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세상에 치이고 사람에 휘둘려서 힘들었어요. 나이가 드니 나를 잘 챙기면서 하루를 충실하게 보내는 게 가장 행복한 일 같아요.”
아직 내려놓을 때가 아니더라
정수라의 롤 모델은 패티김, 남진, 조용필 등이다. 그들처럼 기억되는 게 그녀의 꿈이다.
“제가 음악적 자질은 그분들에 비해 많이 모자라요. 더 열심히 해야 했어요. 그래서 롱런하려면 공부를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어요. 선배님들이 롱런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까요. 나이를 받아들이고, 정말 자연스러움이 묻어나는 멋진 가수로 기억되고 싶어요. 스스로 ‘여기까지가 딱이다’ 할 때가 있을 거예요. 그때 내려놓으려고 해요. 그런데 아직은 아닌 거 같아.(웃음)”
훌훌 털어버리고 살자 하는 그녀에게 요즘은 큰 고민이 없다. 오로지 곧 있을 11월 공연에만 신경 쓰고 있다. 시스템을 제대로 갖추기 위해서 공연 연출을 위한 팀을 선정했고 아이디어와 연출을 더해가며 준비 중이다. 그런 하루하루가 그녀에게는 앞서 말한 행복의 이유들이 된다. 89세 어머니, 언니, 오빠와 사는 그녀에게 힘들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었다.
“어, 참 철없이, 열심히 살고 있어요.(웃음)”
허공을 보며 꾹꾹 눌러 웃는 그녀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참았다. 박건호 작사가 주제로 열린 ‘가요무대’ 대기실에서의 만남은 짧았지만 여운은 길었다.
점프슈트를 입고 카메라를 바라보는 방미가 소녀처럼 웃었다. 특유의 눈웃음, 그리고 다부진 몸매, 허스키한 목소리로 팬들의 마음을 흔들며 데뷔한 40년 전의 얼굴 그대로라면 믿겠는가.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하고 저자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요즘 ‘BangmeTV’ 제작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면서 맨 얼굴로 그날그날의 이슈와 생각을 이야기하면 할수록 재미와 의미가 더해지는 작업이란다.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사는 여자 방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봤다.
MBC 2기 공채 개그맨으로 1978년 연예계에 데뷔한 방미는 1980년 ‘날 보러 와요’로 한국 가요계를 휩쓸었고 동명의 영화 출연료를 종잣돈으로 국내 부동산 투자를 시작해 해외 부동산까지 성공, 서울 강남은 물론 제주도까지 섭렵하며 큰 부를 쌓았다.
“1983년 LA 공연차 미국을 방문한 뒤 해외 진출과 비즈니스를 꿈꿨어요. 그러다 1993년 ‘여자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발표한 후 연예계를 떠났고 미국 뉴욕으로 갔어요. 2007년 거기서 이모가 하던 주얼리숍 등을 운영하면서 뉴욕, 로스앤젤레스, 하와이 등의 부동산에 투자했어요. 성공을 거둔 건 맞아요. 이 모든 것들이 근검절약하고 노력한 덕분이라고 당당히 말하고 싶어요.”
연예인을 하면 돈 좀 벌 수 있을까 하고 시작했다는 그녀는 그동안 전심전력하며 열심히 살았던 젊은 날이 자랑스럽기만 하다. 육십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에 호탕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이 너무 반갑다.
사람들은 아직도 감칠맛 나는 그녀의 노래를 듣고 싶어 한다. 그녀를 ‘날 보러 와요’를 부른 1980년대 인기가수로만 여기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2007년에 가수생활 종료를 선언하고 재야의 부동산 투자 고수로서 활약한 지 오래다.
언니, 아직 죽지 않았다요?
서울 신사동 카페에서 만난 그녀는, 지금 한국 사회는 뭔가 안 풀리고 답답한 상태라며 쓴소리를 한다. 그 답답함이 너무 싫어서인지 자신의 생각을 풀어내는 그녀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그런 시원시원함이 나이를 거스르는 듯한 그녀의 외모와 잘 어울렸다.
방미는 2018년부터 유튜브를 통해 ‘BangmeTV’를 운영하고 있다. 그녀 삶의 이야기, 헬스, 부동산 투자, 정치에 대한 얘기들을 풀어내는 출구다. 그런데 그녀의 채널은 댓글을 달 수 없게 해놨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맥락 없는 비난을 차단하기 위해서다.
“사람들이 나를 꼴 보기 싫어해요. ‘너는 뭐냐. 뭔데 잘난 척이냐’라는 식으로 말하죠. 하지만 저는 전혀 신경 안 써요. 버닝썬 사건처럼 연예인들이 방송에서 잘난 척하는데 알고 보니 ‘바지사장’인 경우 많잖아요? 심지어 나를 사기꾼이라고도 하는 사람이 있는데, 내가 세금 안 내고 사기꾼이었으면 가만 놔뒀겠어요?”
그녀의 솔직 담백함은 지독히 가난했던 ‘흙수저’ 시절을 극복한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되는 듯싶었다.
“어린 나이에 너무 어렵게 살다가 출세를 하고 돈을 벌고 명예를 얻었죠. 돈을 벌기 시작한 건 ‘날 보러 와요’를 부를 무렵이었고, 버는 대로 저축했어요. 시작과 동시에 계획을 잘 짰어요. 돈에 대한 플랜을 말이죠. 적금을 부어 오백만 원을 모으면 차를 사고 전세를 얻을 수 있겠다 하는 식으로 구상이 늘 있었죠. 그게 습관이 됐어요. 그렇게 지금까지 계획에 맞춰 살아왔죠.”
물론 그녀의 삶이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스스로를 “젊었을 때는 굉장히 싸가지 없었다”라고 표현하는 그녀는 20여 년 전, 믿었던 사람에게서 10억 원에 달하는 막대한 사기를 당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구나’ 하고는 자신의 교만함을 반성하고 깨닫게 됐다고 한다.
잘 하는 일 보다 좋아하는 일을 하다
계획을 중시하는 방미답게 오래전부터 유튜브 방송도 차근차근 준비했다. 사실 그녀는 유튜브를 하기 전에 이미 10년 넘게 블로그 ‘악질 방미’를 개설해 운영하고 있었다. 블로그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가수를 그만뒀어도 ‘연예인’이라는 자신을 지키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 번 연예인은 영원한 연예인이죠. 방미가 죽으면 신문에 ‘가수 방미’라고 기사화될 테니까요. 그러니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가볍게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러면서도 행사를 하거나 신곡을 또 내기는 싫었죠. 새로운 도전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에요.”
블로거에서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또 다른 모험을 하며 그녀는 제작, 연출, 각본, 진행 등 실로 다양한 역할을 해내고 있는 중이다. 현재 구독자 수는 1만6000여 명.
“아직 폭발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지는 않고 있어요. 50대, 60대가 시청자의 주류이다 보니 구독자가 급격히 늘어나는 분위기는 아니예요. 그게 좀 아쉽지만 그래도 재미있게 하고 있어요. 제가 여전히 무대 체질인 거 같기는 해요. 유튜브를 하면 신나거든요.”
유튜브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를 주고 싶은 마음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특히 비중을 두고 방송을 하는 분야는 재테크다.
“제가 현물은 잘 모르지만 부동산은 40년간 발로 뛰면서 많은 정보를 얻었어요. 그래서 알려줄 게 많아요. 20년은 한국에서, 20년은 미국에서 부동산 투자를 하며 보냈으니까요.”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
사실 방미는 그동안 세 권의 책을 낸 저자이기도 하다. 그녀가 가장 최근에 낸 책은 ‘나는 해외 투자로 글로벌 부동산 부자가 되었다’로,
5월 초에 발간되어 독자들의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무엇보다도 정보를 쉽게 얻기 힘든 해외 부동산 투자에 대한 내용을 다뤘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그녀가 실제로 수익을 낸 지역들을 예로 들어 비자 발급, 관련 용어 설명, 미국의 각 지역 정보에서부터 수수료와 세금까지 다양하고도 실전적인 투자 정보를 담고 있다. 해외 투자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라면 주목할 수밖에 없다.
해외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그녀는 지금도 국내외를 오가며 지내고 있지만 현재는 청담동에서 거주하고 있다. 사무실은 압구정동에 있다. 그리고 작년에 제주도에 리조트도 마련했다.
“해외에서 살다 보니 한국에 왔을 때는 꼭 자연을 충분히 느낄 수 이 있는 곳이어야 하더라고요. 이장희 ‘형’(그녀는 이장희에게 노래 ‘주저하지 말아요’를 받으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도 울릉도에 사는 이유가 그래서일 거예요. 산과 바다 등 자연을 보면 충만해지는 느낌이 들거든요.”
부동산 관련 책을 출간한 의미까지 듣고 나니 부동산 투자가로서의 방미가 궁금해졌다. 특히 제주도는 10여 년간 계속 투자가들의 관심을 끌었기에 그녀가 전문가로서 제주도의 부동산 가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슬쩍 듣고 싶었다. 독자들을 위해 제주도 투자에 대한 그녀만의 노하우를 청했다.
제주도 투자, 이것만은 명심하라
“제주도는 집을 잘 선택해야 해요.”
그 이유는 중국인들이 이미 많은 땅을 선점했고 매체의 영향으로 제주도 붐까지 일어나면서 난개발을 한 역사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 속에 지어진 집들이 문제점이 많다는 게 방미의 진단이다.
“제주도는 섬이고 초원이다 보니 야생동물, 바퀴, 개미 등 벌레가 많아요. 그리고 하수구 등 배수 문제도 있고요. 나이 들어서 거기 가서 영원히 살겠다? 그건 무리라고 봐요. 제주도 초원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누구나 있죠. 그런데 가서 막상 살면 한 달도 못 견뎌요.”
방미는 제주도에서의 집은 세컨드하우스 개념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세컨드하우스로 살 때 제주도의 분위기를 한껏 내보겠다고 검은 화산석으로 치장한 집을 사는 사는 사람들이 있어요. 저는 말리고 싶어요. 제주도 돌은 TV에서나 다른 사람 집 보면서 감상하고, 정말 편하고 세련된 집을 선택해야 해요. 집 밖으로 나갔을 때 KFC도 있고 스타벅스도 있는 편의성이 있는 곳에 마련하는 게 좋아요.”
그녀는 사방이 펼쳐져 마치 그림 같은 풍광을 자랑하는 곳은 오히려 불편함이 많다고 지적했다. 밖으로 나오면 바로 문화를 즐길 수 있고 편리함이 있는 곳, 인프라 접근성과 재밋거리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재야의 부동산 고수로서 한마디
“그래서 제주도는 바닷가 바로 앞에 있는 집을 사면 안 돼요. 그건 하와이도 그래요. 철칙인데 사람들이 잘 모르더라고.”
바닷가 앞에 있는 집에는 필연적으로 벌레들이 많을 수밖에 없다. 가뜩이나 습한 날씨가 많은 섬에서 바닷가까지 앞에 있으면 생활 환경이 최악이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제주도는 쉬려고 가는 곳이지 고생하려고 가는 게 아니라는 게 그녀의 관점이다. 얘기를 듣고 보니 그녀가 주택이 아닌 리조트를 선택한 것이 당연해 보였다. 리조트나 레지던스는 청소와 식사 등 필요한 서비스들을 기본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투자처로서의 제주도는 지금 어떨까? 그녀는 제주도의 부동산 경제 사정이 현재 최악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되려 그렇기 때문에 투자처로서의 가치는 높아질 수 있다고 조언했다.
“눈여겨보고 있어요. 올 하반기가 투자할 시점이 아닐까 생각해요. 삼방산 밑 지역과 서귀포 중문 관광단지 쪽이 괜찮아 보여요. 삼방산은 요즘 방송에서 많은 관심을 보이는데 예전부터 핫한 곳이었어요.”
최소한 10년 계획을 세운다
부동산 투자에서 전문적인 시각을 보여주는 그녀를 보니 현재의 방미에게 가수로서의 욕구는 더 이상 없다고 봐도 좋을 듯했다. 사실 그녀는 꼭 참석해야 할 행사가 있어도 가서 노래는 절대 부르지 않는다고 한다. 욕심을 부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설 수 있는 무대들은 이제 후배에게 물려줘야죠. 그 자리 외에도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자리들이 있을 테니까요.”
가수로서 최선을 다한 시절이 있기에 후배의 자리를 뺏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그녀에게서 인간에 대한 배려와 정의(正義)가 느껴졌다. 그렇다면 가수가 아닌 부동산 투자 강의를 하는 방미는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제 강의료가 1000만 원이에요. 그렇게 금액을 정한 건 강의를 꼭 들으려면 그만한 대가를 지불하시라는 의미도 있지만 너무 비싸니까 부르지 말라는 의미도 있어요. 하지만 정말 의미가 있는 자리에서 강연을 할 때는 돈을 받지 않으려고 해요.”
그녀는 삶을 충분히 즐겼다고 말한다. 해외에서의 삶도 풍족했다. 뉴욕에서 10년 번 돈으로 LA에서 5년 동안 즐겁게 살았다. 이제 그녀는 4~5개월은 한국에서, 3개월은 미국에서, 나머지는 여행을 하며 여생을 보낼 생각이라고 한다.
“지금까지 잘살았어요. 이제 내일모레가 칠십(?)인데 인생 정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봐야죠. 그러니 더 돈을 벌겠다, 다시 노래 좀 불러볼까 하는 욕심은 없어요.”
방미는 모든 계획의 단위가 최소한 10년이라고 했다.
내 마음대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
그녀는 유튜버 활동이 큰 욕심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어 매력이 있단다. 그걸로 돈을 벌기는커녕 되려 직원들에게 월급을 주며 운영하고 있다. 지금까지 열심히 살았으니 그 정도 자유는 당연하지 않냐는 게 그녀의 말이다.
“여기까지 오기까지 쉬운 길이 아니었어요. 그래서 앞으로 10년 동안은 내 맘대로 살고자 해요. 이제는 나한테 투자를 하고 싶어요. 우선 충분히 잘 멋지게 쓰고 행복해지는 데 집중하자, 그러니 미리 고민하지 말자는 생각이죠.”
물론 늘 계획하고 사는 게 습관이 된 그녀가 모든 걸 내려놓을 리는 없다. 우선 유튜브 구독자 수를 올해 말까지 3만 명 정도까지 늘리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스튜디오를 만들고 싶어요. 강연과 세미나, 공연, 요가, 운동, 놀이터 등이 가능한 만남의 공간을 마련하고 싶은 거죠. 요즘 시니어는 예전에 비해 훨씬 건강해요. 베네피트에 공감하며 함께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브라보는 젊은 애들이 잘 안 하는 말이다. 진정 우리 나이여야 할 수 있는 말”이라면서 멋지게 정리해버리는 방미는 그야말로 ‘브라보,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외칠 수 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녀의 ‘브라보’스러운 미래 계획은 또 어떻게 세울지 궁금해졌다.
수년째 폭염이 이어지고 있으니 일단 더위는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그런데 말이다.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 쐬는 것도 좋지만 전국 각 지역의 더위를 잊게 해주는 축제에서 가는 세월을 즐겨보면 어떨까? 더위! 피할 수 없으면 즐기자. 핫(?)한 여름을 책임질 전국 방방곡곡의 축제를 찾아봤다.
연재순서 ① 축제? 먹고 즐기자! ② 개운하게 한잔 촤악! 마시자 ③ 시원하게 솨악! 물놀이
사진 제공 각 지자체
축제? 먹고 즐기자!
잘 먹어야 더위도 이겨낼 수 있다. 축제에서 빠트리면 안 되는 것은 단연 먹거리 아닐까. 그 지역만의 문화와 먹거리 특산품을 전면에 내세운 놀이마당이 우리나라 축제의 특성. 지역의 정취를 느끼고 특산품을 현지에서 직접 맛도 보고 비교적 싼값에 구매할 수 있어 시니어 관광객들의 관심이 끊이지 않는다. 7월에는 여름 과일을 대표하는 수박축제가 열리며, 여름 야채인 토마토 는 5월부터 9월까지 부산, 화천 등지에서 수확 시기에 맞춰 축제가 열린다. 마침 7월과 8월 사이에는 올해 처음으로 열리는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이 있다. 시골 냇가에서 고기 잡아 먹던 추억에 젖게 해주는 은어축제와 섬진강 맑은 물길 따라 몸도 마음도 시원하게 해주는 재첩축제도 먹거리 축제 중 하나다. 향기 그윽한 연꽃을 주제로 연꽃차 등을 시음할 수 있는 축제도 있다.
봉화은어축제
올해로 21회째를 맞이하는 ‘봉화은어축제’는 조용한 산골마을을 들썩이게 한다.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에서 잃어버렸던 옛 시골 정취도 느끼고 냇가에서 놀던 추억을 소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낙동강 상류인 봉화 지역에서 회유하는 은어는 수라상에만 오르던 귀한 민물고기였다. 봉화의 역사와 함께해온 은어이기에 더 의미 있는 축제다. 은어반두잡이와 은어낚시, 맨손잡이 체험이 기다리고 있고, 은어를 이용한 다양한 요리도 맛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다슬기잡이와 물싸움 체험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기간 7월 27~8월 4일 장소 경북 봉화군 내성천 체육공원 일원
진안고원 수박축제
올해로 11회째인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청정 고랭지 지역인 전북 진안 동향에서 열린다. 동향수박은 20℃ 이상의 일교차가 큰 고랭지 기후의 영향으로 아삭한 식감과 12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자랑한다. 이번 축제에도 할인된 가격으로 동향수박을 무한 구입할 수 있다. ‘진안고원 수박축제’는 남녀노소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각종 체험, 전시, 판매 등 볼거리와 즐길거리가 풍부하다. 수박 공예를 비롯해 수박부채만들기, 수박터널걷기 등은 휴가철 가족 단위 관광객들이 좋아하는 체험 행사다. 체련공원 특설무대에서는 깜짝 수박경매, 수박퀴즈 등 다양한 이벤트가 펼쳐진다.
기간 7월 27~28일 장소 전북 진안군 동향면 체련공원 일대
부여 서동연꽃축제
백제 무왕 35년(634년)에 만들어진, 현존하는 대한민국 최고령 인공연못인 궁남지에서 펼쳐진다.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 축제 이름도 부여서동연꽃축제다. 매년 7월에 열리는 이 축제장에서는 백련, 홍련, 수련, 가시연 등 330여 m² 규모의 연못에서 자라는 50여 종의 다양한 연꽃을 한꺼번에 감상할 수 있다. 용을 품었다는 포룡정은 더없이 아름답고 연꽃 단지 곳곳에 추억 어린 원두막이 놓여 있어 나들이 장소로도 좋다. 또한 야생화와 수생식물이 많아 아이들의 자연생태학습장으로 인기가 높다. 무왕의 탄생과 서동과 선화공주 이야기를 담은 공연도 준비하고 있다. 연꽃쿠키 만들기, 연잎차 다도시연 및 시음, 연꽃디퓨저 만들기 등 연꽃을 소재로 한 다양한 체험을 즐길 수 있다.
기간 7월 5~14일 장소 충남 부여군 서동공원 일원
무안 연꽃축제
동양 최대 백련 서식지인 회산 백련지에서 펼쳐지는 무안 연꽃축제는 뜨거운 여름의 정점에서 열린다. 1997년부터 매년 열리는 이 축제에서는 백련을 비롯해 홍련, 수련, 어리연, 가시연 등 각종 연꽃과 함께 수생식물들을 만날 수 있다. ‘사랑, 소망 그리고 인연’이라는 주제로 소망등을 달고 백련가래떡 나눔잔치에 참여할 수 있다. 연차를 무료로 마실 수 있는 카페를 운영하며 연차시음 및 행다시연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이밖에 연꽃얼음물길, 연꽃우산거리, 안개분수거리, 바람개비동산 등 연꽃의 향기에 흠뻑 취할 수 있는 특별 산책로도 걸어볼 수 있다.
기간 7월 25~28일 장소 전남 무안군 회산백련지 일원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
경상남도 하동군의 대표 축제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알프스하동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7월 말을 시원하게 즐길 수 있는 축제로 손꼽힌다. 2015년부터 시작한 ‘섬진강문화재첩축제’는 먹거리뿐만 아니라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남녀노소가 참여하고 소통하는 축제로 인기다. 재첩홍보판매관 및 재첩시식관을 운영하고, 특산품 전시와 판매도 겸한다. 축제의 주요 행사로 ‘하동청년회의소와 함께하는 치맥페스티벌’, ‘정두수 전국가요제’, ‘황금(은) 재첩을 찾아라’, ‘섬진강을 날아라!(무동력 행글라이더대회)’가 열린다.
기간 7월 26~29일 장소 경남 하동군 송림공원 및 섬진강 일원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
토마토를 주제로 한 축제가 논산에서도 열린다. 세계 3대 축제 중 하나인 스페인토마토축제를 벤치마킹한 논산 토마토 페스티벌은 무더운 시기에 열리는 만큼 물총축제도 겸한다. 퍼레이드를 시작으로 토마토 던지기, 토마토를 주제로 한 요리와 샴페인 만들기에 참여할 수 있는 복합문화체험 축제다.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여름 페스티벌로 자리 잡을 계획이라고. 매일 밤마다 버스킹 공연이 이어지고 주말 저녁에는 K팝을 좋아하는 외국 여행객들을 위한 콘서트도 열릴 예정이다.
기간 7월 19일~8월 18일 장소 충남 논산시 성동면 원남리 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