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한 길을 걸어온 사람은 진실하고 솔직하다. 소박하고 따뜻하다. 무엇보다 겸손하다. 우선 내 진로를 모색하고, 그 도상에서 주변 사람들을 챙기고, 사회로 시선을 확장하며 꾸준히 쉼 없이 걸음을 뗀다. 이런 사람을 우리는 성실하고, 사람답고, 정의롭다고 말한다. 고영회는 그런 사람이다. 그는 보통 사람들은 하나도 갖기 어려운 전문 자격증을 셋이나 갖고 있다. 변리사이자 이공계의 꽃이라 불리는 2개 기술 분야의 전문가다. 시쳇말로 꽃길만 걸어온 것일까. 함께 그가 걸어온 길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
서울대 합격한 알밤, 몸 팔러 중동으로
“보리밭에서 김을 매고 있다가 서울대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 고향이 진주 동편의 진양군 금산면 시골인데 서울에 사시던 6촌 형님이 전화 연락을 주셨고, 그 전화를 받은 동네 사람이 헐레벌떡 달려와 알려주신 거죠. 학교 다니는 틈틈이 농사를 돕고 지게를 지고 땔감을 구하러 다녀야 했던 곤궁한 시절이었죠. 중학교 1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의 밀린 병원비, 그 후 형제들 학비, 생활고로 인한 이런저런 빚에 눌려 집안 형편이 상당히 어려웠지요. 아버지의 폐암은 젊은 시절 7, 8년간 일본에서 광부 생활을 하셨던 게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빈곤의 대물림을 끊어보려고 돈 벌러 갔던 것이 오히려 병환을 불러왔으니 가난은 더 험상궂은 얼굴로 우리 가족을 덮쳤던 거지요.”
어릴 적 그의 별명은 알밤. 머리가 크고 영특해서 그렇게 불렸다. “알밤, 이리 와봐라. 네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아버지가 어떻게 해서든 대학까지 보내주마.” 돌아가신 아버지와의 추억이 받아든 합격 통지서에 여울졌다.
1977년, 서울대 자연계열로 들어간 후 건축학과를 택했다. 학비와 생활비 마련이라는 생존의 꼬리표가 늘 붙어 다녔던 고달픈 대학 시절이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로 버텨나갔지만 간혹 끼니를 거를 때도 있었다. 건축과를 나오면 100% 취업이 되던 때라 국내 경기 호재와 함께 중동 건설 붐을 타보자 결심했다. 1982년,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을 통해 공사 현장 기사로 파견됐다.
“그 당시 중동에 가는 걸 ‘몸 팔러 간다’고 했어요. 국내에서 30만 원 월급쟁이가 거기 가면 80만 원 이상 받을 수 있었어요. 2.5배나 많았던 거죠.”
그는 4남 2녀 중 넷째 아들이지만 선친이 집안 살리려고 일본 광산에 돈 벌러 갔듯 그도 사우디아라비아로 향했다. 아버지 돌아가신 후 빚에 눌려 고 씨 가족이 야반도주할 거라는 소문까지 동네에 돌던 때였다. 바람이 불었다 하면 모래가 비처럼 내리고 모래밭에 달걀을 묻으면 익어서 나오던, 말 그대로 열사의 땅이었다. 그렇게 3년 3개월을 모래 섞인 밥을 먹으며 돈을 벌어 집안의 빚을 얼추 갚고 나니 20대가 저물고 있었다. 중동의 모래 열기처럼 식을 줄 몰랐던 건축 경기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경기 좋을 때는 고용했다가 일이 없으면 그냥 잘라버리거나 가차 없이 책상을 빼버리는 현실을 보면서 제 미래도 암울하게 느껴졌습니다. 말로는 기술 강국을 지향한다 하면서도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대우와 처우는 실망스러웠지요. 전문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저 소모품 다루듯 했으니까요.”
기술사란 별을 두 개나 땄으나
그에게 도전은 일상이다. 길이 아니다 싶은데도 뭉개고 있을 이유가 없다. 미래를 다지기 위해 엔지니어로 전문성을 갖추기로 마음을 다잡고 퇴근 후 독서실로 직행해 자정까지 공부했다. 말 그대로 주경야독의 노력으로 1991년 기술계의 최고봉이라 할 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건축시공 기술사와 건축기계설비 기술사, 기술 분야 최고의 타이틀을 두 개나 갖게 되었다. 합격률은 5% 미만, 이공계에서 기술사는 그만큼 영예로운 이름이다. 그렇게 엔지니어로서 자긍심을 갖는가 싶었으나 제도적 구멍과 허점은 여전했고 깊숙이 들어갈수록 실망스러웠다.
이렇게 하늘의 별을 두 개나 땄지만 제대로 빛이 나지 않은 대신 그의 근성이 빛을 발했다. 모순과 불합리에 정면으로 맞서는 그의 근성 말이다. 단합된 목소리와 응집된 힘을 내기 위해 2002년 대한기술사회를 발족, 초대 회장이 되어 기술사 제도 개선 운동을 펼쳤다. 문제가 있는데도 덮어두면 구성원들이 고통을 받고, 그 신음에 무심하면 사회 전체가 병들기 마련이니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기술사에 대한 처우가 제대로 되어 있었다면 변리사가 되지 않았을 거예요. 기술사의 제 위치 찾기를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다시금 회의가 일면서 이대로 고여 있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방향 전환의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수험생 가장, 37세 늦깎이 변리사로
엔지니어로 소위 잔뼈가 굵어가던 때, 인생을 전환하기엔 늦었다면 늦은 나이라 할 수 있는 30대 중반에 그는 변리사 시험에 도전한다. ‘그간 무수한 시험을 치렀고 따지고 보면 인생 자체가 도전과 통과의 시험 치르기가 아닌가. 최선을 다해보고 안 되면 그때 포기하면 된다. 세상을 살면서 할걸, 하지 말걸 하는 후회는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6개의 눈동자’가 있었다. 여우 같은 아내와 토끼 같은 두 딸을 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진로 변경에 대해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겪어왔지만 고생 중에 돈 고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수험생 가장’이 된 후 새삼 절감했다. 기술사 준비할 때와는 또 다른 압박감 탓인지 연거푸 두 번을 낙방했다. 첫 시험에서 1.1점 차로 떨어졌기 때문에 두 번째 시험에서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지만 막상 성적을 받아보니 결과는 더 나빴다. 또 한 번 고배를 마시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마지막이란 각오로 세 번째 도전에서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고 공부에만 매달리느라 집에 생활비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설상가상, 하루는 독서실에서 돌아와 보니 네 살 딸애가 피를 쏟고 있는 거예요. 병원에서 진단 내린 ‘특발성 혈소판 감소증’이란 병명조차 무서웠지요. 원인 모를 피를 쏟고, 쏟았다 하면 좀체 멈추질 않는 거예요. 한방 치료를 통해 체질을 완전히 바꾸고 나서야 근 5년간 지속된 병세가 잡혔지요. 아내는 당시 둘째 아이를 가졌던 터라 만삭인 상태에서 큰애를 데리고 병원을 다녔는데 출산을 앞두고는 어쩔 수 없이 시골 어머니께 도움을 청했지요. 그런데 얼마 안 지나 이번엔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셨어요. 아내는 둘째를 이집 저집에 맡긴 채 입원 중인 큰아이와 어머니를 간병해야 했고, 저는 퇴근과 동시에 작은애를 찾아 데리고 병원으로 달려갔지요. 심청이 젖동냥하듯 작은애가 고생했지요.”
돌이켜보면 그때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위기였다. 재정적·가정적 위기를 딛고 고진감래하여 1995년 변리사가 된 기쁨은 그래서 더욱 컸다. 그해 응시자는 5000여 명, 이 가운데 30명이 합격했으니 약 150대1의 경쟁을 뚫은 것이다. 그는 1958년생 동갑 응시생과 함께 최고령 합격자로 37세에 늦깎이 변리사가 되었다.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법제화 이루다
변리사 자격 취득 후 성창특허법률사무소를 내고 한숨 돌리나 했더니 기술사 세계에서 보아온 불합리한 관행이 변리사 세계에도 고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발견했다.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자동으로 부여하는 제도가 그중 하나.
이 관행을 뜯어고쳐 법에 명시된 변리사 고유 권한을 되찾고자 그는 37대 대한변리사회 회장(2014~2016년)에 취임했다. 관성적으로 주어지던 변호사의 변리사 자격 자동 취득 금지를 법제화하기 위해 4000여 변리사회 회원의 수장이 되어 임기 2년 동안 총력전을 펼쳤다. 2015년 12월 31일, 회장 임기 만료 2개월을 앞두고 마침내 변리사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다. 변호사가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기 위해서는 6개월의 실무교육을 받도록 한 것이다. 이후 매년 300~400명이 받던 자동 자격이 30~40명 선으로 줄었으니 법 효율은 90%에 달한 셈이다.
변호사에게 자동으로 주어지던 변리사 자격이 고 회장에 의해 75년 만에 사실상 폐지된 것이다. 변리사회 출범 이래 전례 없던 법 개정이자 고 회장의 승리였다. 그 일이 실제로 성사될 것이라 믿은 사람은 없었다. 4만 회원이 등록된 변호사회는 덩치만 해도 변리사회보다 10배나 크고 국회 상임위, 법사위 등의 80~90%를 변호사가 장악하고 있는 현실에서 자기 집단에 불이익이 되는 법안을 통과시켜줄 성싶냐는 게 상식이었고 또한 지배적 견해였기에.
“저라고 그걸 몰랐겠습니까. 하지만 직접 뛰어들어보니 본질과 이치가 들어옵디다. 입으로만 떠들지 말고 몸으로 뛰어보면 답이 나옵니다. 골리앗을 이기는 다윗이 종종 나오는 게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는 여세를 몰아 연임에 도전했다. 변리사회 회장의 연임 금지 규정이 폐지된 점 또한 도전을 부추겼다. 한 번 더 회장이 되면 변호사의 변리사 자동 자격 금지 제도 법제화에 이어 이번에는 법에 규정된 특허침해소송 대리권을 변호사로부터 오롯이 되찾아올 기회였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불거졌다. 변리사회 회원 중 변리사 자격을 가진 변호사 50여 명이 조직적으로 투표를 한 것이다. (변리사회는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회원, 변호사로서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는 회원, 특허청 출신 회원, 이렇게 한 지붕 세 가족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자동 자격 제도 폐지로 불이익을 당하자 대한변호사협회에서 고 회장의 재선을 저지하고 나선 것.
‘눈엣가시이자 미운털 고영회’를 떨어뜨리기 위해 상대 후보를 적극 지지, 상대 후보와의 표 차는 투표한 변호사 수만큼 벌어져 465대415로 고 회장이 낙선했다. 이른바 역선택을 당한 것이다. 이후 시험 출신 젊은 변리사들의 선거 복기로 부정선거 정황이 드러나면서 신임 회장의 탄핵안이 통과되었다. 37대 고영회 회장에 이은 38대 회장이 두 달 만에 해임되어 변리사회 초유의 불명예를 안게 됐다. 사필귀정이었다.
물오른 인생 3막, 다시 쓰는 통합이력서
변리사 업계에 전대미문의 업적을 남기며 20여 년 혼신으로 일했던 변리사에서 최근 그는 기술사 업무로 다시금 방향을 전환했다.
“인생은 돌고 도는 거라더니 싫어서 나갔던 집을 30년 만에 돌아왔다고 할지, 환갑 즈음부터 처음 배운 도둑질인 기술사 업무에 나중 배운 변리사 업무를 병행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변리사로서는 경쟁력이 점점 떨어지는 점도 작용했고요.”
현장 경력, 전문 기술사 경력, 법률 문제에 정통한 변리사 경력 등 제각기 핀 꽃이 연륜으로 버무려져 건설 분쟁 해결 전문가로 독보적 지위에 올랐다. 40년 경륜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이력서로 인생 3막을 연 것이다. 속된 말로 변리사로서는 한물갔지만 기술사로서는 한창 물이 오르고 있다.
“하나의 목표를 향해 곧장 그 길을 가는 사람도 있지만, 돌아간다 싶었던 길을 지금 와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30년 전 일이 다시 본업이 된 저처럼 말이지요. 현실이 고통스럽다 해도 그 고통이 미래의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고통 자체도 지나고 보면 경험이란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하지요. 당장은 죽을 맛 같아도 인생 전체를 놓고 보면 태어났으니 고생도 해볼 수 있는 것 아닌가요?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고, 긍정적 마음이 긍정적 결과를 낳는다는 보편적 진리를 믿고 한세상 살아내야지요.”
이런 인생관을 가진 그에게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조차도 ‘참 좋은 시절’이 보장된 셈이 아닌가!
신섭(83) 씨는 젊은 시절 약품을 옮기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시작해 30대에 수십 개 회사를 운영하는 CEO로 발돋움했다. 뜻하지 않은 시련으로 몇 번의 좌절을 겪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재기했다. 은퇴 후 현재는 시니어 모델로 활동 중이다. 그를 만나 7전 8기의 여정과 더불어 포기하지 않는 삶의 가치와 의미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두산 등 대기업에서 본부장 및 대표이사를 두루 역임하고, 업계에서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며 가는 곳마다 경영인으로 승승장구했다. 그간의 경험을 바탕으로 CEO, 지자체장과 같은 리더를 대상으로 리더십 및 동기 부여에 대해 강연했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팬데믹이 닥쳤고,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또 다른 전환을 엿볼 수 있는 시간이 됐다.
“1년의 반은 해외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했는데, 팬데믹 때문에 출국이 요원해졌어요. 처음엔 좀 갑갑했지만, 나중엔 방전한 것을 채우라고 준 기회로 여겼죠. 바빠서 못 읽었던 책들도 읽고, 구상했던 책을 출간하기 위해 틈틈이 글도 썼어요. 건강을 위해 사이클도 다시 시작했는데, 우연히 한 방송국에서 진행하는 시니어 모델 공고를 봤어요. 밑져봐야 본전이라 생각하고, 그때부터 모델 아카데미에 다니기 시작했죠.”
젊은 시절 주위에서 모델을 해보라는 권유가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형편이 어렵고 먹고사는 게 바빠서 차마 도전하지 못했던 모델의 꿈이 인생 후반전에 그렇게 찾아왔다.
“그간의 커리어와 다른 길이었지만 정말 열심히 했어요. 모델 아카데미 1등 출석을 한 번도 놓친 적 없을 만큼 열정을 다해서 임했죠. 모델 도전은 처음이라 서툰 게 많았고 힘들기도 했어요. 청년 시절에 운동을 꽤 많이 했던 터라 몸으로 하는 건 자신 있었는데, 모델 동작을 익히는 게 쉽지 않았어요. 머리와 몸이 따로 노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래도 다시금 이렇게 설렘을 맛볼 수 있어서, 새로운 삶을 사는 기분이었죠.”
첫 무대와 캐스팅
지난 5월 패션모델 선발대회 ‘2020 더룩오브더이어 클래식’(THE LOOK OF THE YEAR CLASSIC)에 시니어 모델로 처음 참여했다. 첫 무대에 선 기분은 어땠을까?
“오랜 세월 강연자로 무대에 섰기 때문에 첫 무대 자체에 대한 두려움은 다른 참가자에 비해 덜했어요. 오히려 연습할 때가 더 힘들었지요. 워킹은 굉장히 근사해 보이지만, 직접 해보니 신체적으론 다소 불편한 걸음이에요. 숙달하려면 적어도 만 번 정도는 연습해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 않더군요. 타고난 끼나 재능은 부족했기에 노력을 많이 했어요. 동작 하나라도 몸에 익숙해질 때까지 최선을 다해서 연습했어요. 다행히 본무대는 긴장하지 않고 무사히 마쳤는데, 운 좋게도 포토제닉상을 받았어요. 정말 상상하지도 못했고, 모델로 나아가는 데 용기를 불어넣어준 상이에요”
한편 포토제닉상은 또 다른 기회로 이어지는 교두보가 됐다. 바로 전속모델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캐스팅을 제안한 알렉스 강 EMA 대표는 “모델에 대한 간절한 의지가 눈망울에서부터 느껴졌다. 7전 8기의 삶에서 마주친 시련 속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다시금 재기한 끈기와 인내의 여정이 시니어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고, 내면의 미를 가진 모델로서의 가능성을 보았다”라고 말했다.
자전거에서 고급 승용차로
모델 이전의 그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교사 자격증까지 취득했다. 하지만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회사가 부도나면서 집안 형편이 어려워졌다. 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그는 자전거 핸들을 잡았다.
“당시 교사 봉급으론 동생들 뒷바라지하기에 턱없이 부족했죠. 사업가로 자수성가해서 집안을 일으키고 싶었어요. 차근차근 시작하기 위해 서울의 약국에 약품을 배달하는 자전거 배달원으로 살았어요. 후발주자였던 탓에 도심의 약국으로는 물건을 납품할 수 없었고, 서울의 변두리로 많이 다녔죠. 지금이야 길이 워낙 좋지만, 그 당시엔 정말로 길이 험했어요. 약품 상자를 가득 싣고 무악재 고개 같은 곳을 넘어 다니는 건 상상 이상의 중노동이었죠.”
그는 고구마 하나로 끼니를 때우는 일이 부지기수였지만, 영어사전을 곁에 두고 늘 단어를 외웠다. 몇 달 지나자 고정 거래처도 생겼고, 짬이 날 때마다 영어 단어를 외운 덕분에 웬만한 도매상보다 약품을 더 해박하게 알 정도였다.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차 한 대 분량의 물건을 대형 제약회사로부터 받아 일주일 안에 판 것이 도매상으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됐다.
“처음 도매상을 할 때는 화물차를 임대해서 전국으로 다녔어요. 배달량이 많아진 이후로는 아예 화물차를 샀어요. 그것을 발판 삼아 나중엔 운수회사를 차렸죠. 운수회사와 더불어 주유소와 가스충전소도 운영했어요. 그렇게 건설, 중장비 등 관련 있는 사업체를 하나둘씩 늘려서, 30대 초반에 재벌 소리 들을 정도로 경영인으로 성공했죠. 20대 시절 기필코 10년 안에 자전거 대신 고급 승용차를 운전하겠다는 꿈을 세웠는데, 6년 만에 그 꿈을 이뤘어요.”
자살미수와 판매왕
그것도 잠시, 그가 자수성가로 쌓은 부와 명예는 한순간에 먼지처럼 전부 사라졌다. 그때 그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
“당시 제가 마약을 한다는 등의 음모성 투서부터 시작해 각종 루머와 더불어 세무사찰이 진행됐어요. 물론 모두 무혐의로 풀려났지만 사업을 원활하게 진행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 결과적으로 회사를 도산해야 했어요. 정말 하늘이 무너진 기분이었죠. 피땀과 눈물로 이룬 성취가 하루아침에 무너지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어요.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만, 그때는 그 구멍조차 생각할 여력이 없었어요. 삶을 포기하려고 두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어요. 물론 가족이나 친척에 의해 미수로 그쳤지만요. 제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이었죠.”
당시 아내의 권유로 3년 반 정도를 기도원에서 지내면서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세상에 대한 분노와 스스로에 대한 실망 등 부정적인 감정을 떨쳐버리고, 부와 명예를 추구하는 마음을 버릴 수 있었던 시간이었어요. 몸이 불편한 장애인을 돌보는 것이 제 주요한 일과였는데, 봉사하면서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으로 살고 싶다는 꿈을 품었어요. 힘들다고 삶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더욱더 보람차게 살기 위한 워밍업을 그때 한 거죠. 술과 담배, 골프 같은 유흥도 그때 끊었고, 지금까지 안 하고 있어요. 새로운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이자 맹세였거든요. 그곳에서의 시간은 재기의 큰 밑거름이 됐어요.”
기도원에서 나와 미국 브리태니커 한국지사 외판원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당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질은 고급 승용차 한 대 가격과 맞먹었다. 경영인 출신을 우대한다는 공고만 보고 지원했는데 바로 합격했다.
“외판원 이외에는 뾰족한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었거든요. 아이들은 뿔뿔이 남의 하숙집에서 살고, 아내는 아프고, 가족이 한 집에 모이려면 돈을 벌어야 했죠. 그때 체면과 자존심을 다 내려놓았어요. 첫 고객은 회장 시절 운전기사였어요. 가서 무릎 꿇고 사달라고 부탁했죠. 저의 간절함을 보고 흔쾌히 사주더군요. 하지만 파는 일이 마냥 쉽지는 않았어요. CEO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갔는데 회사 앞에서 잡상인 취급받고 쫓겨나기도 했어요. 마지못해 산 친구에게는 다음 날 육필로 쓴 전보를 보냈어요. 정말 미안하고, 앞으로 성공하면 이 빚을 제대로 갚겠노라고. 우여곡절이 참 많았죠.”
그는 “노크를 하고 들어간 방에서 팔지 못하면 시신으로 나오겠다”라는 심정으로 그 일에 임했다. 받을 수 있는 수수료가 매출액의 16%에 불과했지만, 그는 첫 달 월급으로 단칸방을 얻을 만큼 성과를 올렸다. 덕분에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과 함께 살 수 있게 됐다. 그의 절박함과 진심을 눈여겨본 고객들은 그에게 다른 고객들을 추천해주기도 했다. 덕분에 그는 54개국에서 판매 성적 1위라는 기록을 세웠고, 외판원 시절 글로벌 판매왕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비우는 삶
판매왕 이후 동아프라임, 한미약품, 일양약품 등 유수의 기업으로부터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경영인으로 성공 가도를 달렸다. 하지만 너무 혹사한 탓일까? 원인 모를 고열로 병원에 40일간 입원하며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왔다.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후 택시 기사로 한동안 살았죠. 그 이후 삶이 더욱 소중해졌어요. 스스로 몸과 마음을 돌보면서 작게나마 선한 영향력을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싶었어요. 당시 IMF 시절이라 스카우트 제의도 뜸했고, 서울에서 오랫동안 살아 지리에 밝았어요. 내비게이션도 없을 때였지만 서울 구석구석을 누비면서 손님들과 좋은 얘기를 많이 나눴죠. 기사를 하면서 손님들로부터 좋은 기운을 얻은 덕분에 다시 재기할 수 있었고요.”
택시 기사, 외판원 등 자존심과 체면을 내려놓는 선택을 했을 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그래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아내와 가족의 묵묵한 응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은 우리 가족을 만난 것이에요. 사모님 소리 듣던 사람이 외판원, 택시 기사 아내로 변했는데도 한 번도 만류한 적이 없어요. 묵묵한 내조 덕분에 지금 이 자리에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해요. 택시 기사나 외판원을 할 때 자식들이 저를 창피해하지 않았어요. 그게 제일 고맙고 미안해요. 형편이 어려워서 아내가 면사포를 쓰지 못한 채 시집을 왔는데 올해 아내 생일날 자식들 덕분에 리마인드 웨딩을 할 수 있었어요. 애들의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KO를 당하고 다시 일어나 경기에 임하는 권투선수처럼 고비마다 난관을 헤치고 나아갔다. 이러한 삶으로부터 그는 무엇을 배웠을까?
“시련은 위장된 축복일지도 몰라요. 뜨는 해는 언젠가 지는 법이에요. 해가 진다고 해서 슬퍼하지 않잖아요. 해가 사라지면 별이 가득한 밤을 볼 수 있죠. 그래서 낙심하지 않는 자세가 중요해요. 건강한 사람에게도 마음의 고통이 있듯이, 알게 모르게 누구나 아픔과 상처가 있죠. 시련 속에 있을 때 너무 자책할 필요 없어요. 자신을 믿고 조금씩이라도 정진하는 자세. 최선을 다하려는 마음.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는 의지. 그게 필요해요. 걸림돌이 디딤돌이 되면 더 멀리 가요.”
끝으로 인생 2막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조언과 더불어 앞으로의 계획을 밝혔다.
“부둣가에 묶어만 두면 배는 영원히 출항하지 못해요.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실천하는 자세가 필요해요. 삶이라는 항해에서 출항하지 않는 배로부터는 배울 수 있는 게 적어요. 출항을 시작했으면 목표를 세우고 끝까지 완수해야죠. 인생 2막의 목표는 비우는 삶이에요. 옷이나 책도 다 정리해서 어려운 이웃에게 기부했어요. 산문집과 마케팅 서적을 출간할 예정인데, 이 책의 수익도 다 기부하려고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을 간소하게 살고 싶어요. 모델이란 꿈을 이뤘지만, 명예에 목을 매고 싶지는 않아요. 무대에 선 그 순간을 즐기는 모델이 되고 싶어요.”
잠시나마 엿본 그의 삶은 마라토너를 닮았다. 그에게 시련은 마라톤의 사점(死點)과 같았다. 마라톤에서는 극한 고통이 따르는 사점을 넘어야 완주가 가능하다. 그는 시련을 극복하면서 자신만의 레이스를 완주했고, 더 나은 단계로 조금씩 나아갔다. 그것은 1등을 하겠다는 조바심이 아니라 완주를 목표로 한 간절한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서양의 유명한 철학자는 인간은 방황하는 한 노력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방향성 없는 방황은 애매한 재능만큼 괴롭다. 시련 속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자신을 믿고, 남들이 비웃을지언정 자신만의 방향성을 잃지 않은 덕분이었다. 걸림돌을 디딤돌로 바꾸는 힘은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뚝심과 한 발짝이라도 나아가겠다는 의지가 만들어낸 결과다. 새로운 삶의 출발선에 놓인 그가 새로운 레이스를 멋지게 완주하기를 응원하며 마친다.
아파트 시장에 리모델링 열풍이 불고 있다. 재건축이 정부의 각종 규제에 부딪히자, 재건축 수요가 리모델링 시장으로 옮겨가고 있다. 노후 아파트에 사는 시니어라면 살펴볼 필요가 있지만, 관련 정보가 재건축보다 상대적으로 부족하다. 아파트 리모델링 활성화의 원인을 짚어보고, 리모델링 투자 시 유의해야 할 사항을 소개한다.
최근 아파트 시장에서 재건축의 대안으로 떠오르는 것이 ‘리모델링’이다. 일반적으로 리모델링은 인테리어 시공의 개념으로 받아들이지만, 건축법상 리모델링은 노후 아파트의 기능 향상을 위해 건축물 일부를 증축 또는 개축하는 행위다. 이는 세대 내부의 변화뿐만 아니라, 커뮤니티 시설, 지하 주차장 등 다양한 편의 시설을 조성한다. 다만 재건축과 달리 기존 내벽을 유지한 채 평면을 앞뒤로 늘려서 면적을 키우거나, 층수를 올리는 방식이다.
실제로 리모델링 시장은 작년부터 가파르게 성장 중이다. 한국리모델링협회에 따르면 8월 기준 리모델링 조합설립을 마친 아파트는 전국 85개 단지, 6만4340가구에 달한다. 지난해 12월 54개 단지, 4만551가구와 비교하면 8개월 만에 가구 수가 60% 가까이 증가했다. 한국건설산업연구원 관계자는 “비주택 리모델링은 꾸준히 수요가 있었는데, 주택의 경우 노후 아파트가 증가하고 재건축 규제로 인해 공동주택 리모델링 수요가 늘어나는 추세다”라고 설명했다.
재건축 vs 리모델링
1기 신도시 아파트에 거주 중인 장모델(67) 씨는 준공된 지 30년을 앞둔 노후 아파트에 거주 중이다. 아파트가 오래되면서 녹물이 자꾸 나오고, 장마철에는 비가 새는 등 여러모로 불편하다. 30년이 넘으면 재건축 기준을 충족할 수 있지만, 초과이익환수제, 기부채납 등과 같은 각종 규제 때문에 재건축이 망설여진다. 재건축과 비교해 규제가 상대적으로 덜하고, 사업 속도가 빠른 리모델링이 괜찮다고 하는데 정말로 그럴까?
리모델링은 재건축과 비교해서 사업 속도가 빠르고, 상대적으로 조합설립 인가를 위한 동의율이 낮다. 재건축은 준공 30년 이상 아파트부터 가능하지만, 리모델링은 15년 이상부터 가능해서 빨리 시작할 수 있다. ▲조합설립 ▲안전진단 ▲건축심의 ▲행위허가 ▲이주 및 착공 ▲입주 순으로 이루어지는데, 사업시행 및 관리처분계획인가 단계가 포함된 재건축에 비해 간소하다. 조합설립에 필요한 주민동의율도 66.7%로 재건축(75%)보다 낮다. 부동산114 관계자는 “재건축은 평균 10년 정도 소요되고 리모델링은 7년 정도 걸린다. 일반적으로 수직 증축 리모델링은 안전진단 문제로 인해 소요 기간이 상대적으로 긴 편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규제도 덜하다. 재건축은 안전진단에서 D나 E등급을 받아야 사업 추진이 가능한데, 안전진단 요건이 까다로워지면서 통과하기 어려워졌다. 반면 리모델링은 층수를 높이는 수직증축은 B등급 이상을 충족하면 되고, 면적을 늘리는 수평·별동 증축은 C등급 이상이면 된다. 재건축과 달리 용적률 제한이 없고, 초과이익환수제, 조합원 지위 양도 제한 등과 같은 규제를 받지 않는다. 다만 일반분양 물량이 30가구 이상이면 분양가상한제가 적용된다.
리모델링은 한계도 뚜렷하다. 안전의 문제로 내력벽을 그대로 활용하는데, 내부 구조 설계에 한계가 발생한다. 세대 간 내력벽 철거가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기존의 2베이에서 앞뒤로 늘어나는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신축 아파트의 4베이 구조와 비교해서 선호도가 떨어질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베이를 늘리면 채광이 잘 되고 전면 발코니 확장을 통해 실사용 면적을 늘릴 수 있어 선호도가 높다.
재건축과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사업성이 낮다. 수평 증축은 전용면적의 최대 30% 이내(85㎡ 미만 40%)로 늘릴 수 있다. 수직 증축은 15층 이상이면 최대 3개 층까지 증축할 수 있다. 세대 수는 최대 기존 가구 대비 15%까지 늘릴 수 있다. 부동산 관계자는 “증축 수와 가구 수 증가에 제한이 있기에 일반분양 물량이 적다. 이로 인해 재건축보다 상대적으로 사업성은 부족하다. 다만 입지에 따라 가격 상승을 기대할 수 있다”라고 말했다.
+ Plus 주목해야 하는 리모델링 추진 단지
성지아파트
송파동 성지아파트는 사업승인을 받고 분양과 착공을 준비하고 있다. 15층 2개 동 298가구 규모이며, 대부분의 리모델링 아파트들이 수평 증축을 조건으로 건축 심의를 통과하고 있는데, 현재 수직 증축으로 허가받은 곳은 성지아파트가 유일하다.
둔촌 현대2차
지난해 10월 둔촌 현대2차는 안전진단에서 C등급을 받았고, 둔촌 현대3차도 안전진단에서 C등급을 받아 사업 추진이 가능해졌다. 리모델링 완성 후에는 1만2000여 가구가 들어설 둔촌주공의 북측에 위치해 초대형 규모 단지 인프라를 함께 누릴 것으로 기대된다.
한솔마을 5단지
1기 신도시 내 리모델링을 추진하고 있는 아파트 중에서 사업계획을 승인받은 곳은 한솔마을 5단지가 처음이다. 전국적으로도 1000가구 이상의 대규모 리모델링 추진 단지 중 최초 사례다. 원래는 수직 증축을 계획했으나, 까다로운 조건으로 인해 수평 증축으로 바꿨다.
왕년 전성기에 누렸던 최고의 영웅담이나 에피소드. 류춘수 건축가의 과거 그때의 시간을 되돌려본 그 시절, 우리 때는 이것까지도 해봤어. 그랬어, 그랬지!! 공감을 불러일으킬 추억 속 이야기를 꺼내보는 마당입니다.
세상에는 ‘운이 좋았다’고 할 만한 일과 ‘운명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있다.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의 일생은 후자에 속한다. 언뜻 보면 그는 기가 막히게 운이 좋은 사람 같지만 그의 인생과 건축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운명적 문고리가 설계되어 있다.
2002년 서울월드컵경기장과 88서울올림픽 체조경기장을 비롯해 리츠칼튼호텔, 한계령휴게소, 박경리문학관과 사저, 동숭동 샘터사 등 그가 설계한 건축물은 국가의 위상과 국민의 일상에 맞닿아 있다. 한양대 건축과,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을 졸업한 국내파 건축가로서 일본, 중국, 말레이시아, 이란 등지에 기념비적인 건축물을 세우고, 영국, 미국, 중국, 싱가포르 등에서 강연한 그는 젊은 건축인이 뽑은 대한민국의 가장 바람직한 건축가에 두 차례나 선정되는 등 정상을 지키고 있다.
건축가의 꿈과 불교의 운명적 만남
어려서부터 그림을 잘 그렸던 그는 1962년 대구고등학교 2학년 때 경북학생사생대회에서 대상을 받았다. 안동에서 막 전학 온 ‘촌놈’이 대구, 경북의 미대 지망생들을 휘저은 ‘사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영남고등학교 출신 이두호가 2등을 했으니. 이두호가 누군가? ‘임꺽정’을 비롯해 김주영의 장편소설 ‘객주’ 전권을 만화화하고, 머털도사를 탄생시킨 한국 만화계의 국보급 작가가 아닌가. 더 재밌는 것은 당시 그가 하숙하던 주인집 아주머니의 친정에서 어린이 잡지를 발간하고 있었는데 그때 고교 2학년생 이두호가 거기서 그림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대상을 받았다고 하니까 ‘이두호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리는 학생이 있었다니, 그것도 우리 집 하숙생 중에!’ 하면서 놀란 입을 다물지 못하셨죠. 하하.”
그림을 잘 그릴 뿐 아니라 기하, 수학 등에도 소질이 있었던 그는 진로 적성검사를 할 때마다 뚜렷하게 건축과로 나왔다. 그의 꿈은 확고했지만 봉화 면서기였던 선친은 1남 2녀의 외동아들이 건축가가 되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셨다. 건축가에 대한 변변한 인식조차 없던 시절, 상대 나와 은행원이 되는 것을 최고로 여기던 때였으니. 아버지를 설득해 정작 허락은 받았지만 대학 입시에서 연거푸 두 차례나 낙방하고 만다.
“초라한 삼수생의 몰골로 고향 봉화 문수산 첩첩산중의 작은 암자인 축서사로 들어갔지요. 마음 다잡고 공부하겠다고 2년간 절에 있었던 게 건축가로서 의미 있는 첫 단추를 꿰는 인연이 될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예민한 성정의 소년기에서 청년기로 옮겨가는 변곡점에서 불교는 제 인생과 제 건축 밑그림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졸업 작품부터 동기들과는 차별적이었다. 한국 불교의 중흥과 중생제도의 구심점을 세운다는 포부 아래, ‘대한불교조계종 대본산 계획안’을 설계했던 것이다. 불교와의 첫 인연의 고리를 꿴 순간이었다. 하지만 졸업 후 생활은 막막했다. “제 월급이 1만 원이었어요. 은행원은 3만 원을 받던 시절이었죠. 쪼들리며 살던 때 대한불교조계종에서 불교 미술 공모전을 하길래 졸업 작품을 응모해 1등을 했습니다. 상금이 5만 원이었으니 무려 제 한 달 급여의 다섯 배였죠. 덕수궁에서 전시도 했고요. 그런데 며칠 후 조계종 총무부장이 연락을 해왔어요. 부산 대각사의 10층짜리 불교회관 설계를 맡아달라고. ‘스님 돌았소?’란 말이 툭 튀어나올 뻔했죠. 그때까지 집 한 채도 설계해본 적 없는 초짜한테 할 제안인가요, 어디? 근데 스님 말씀이, 무조건 불자가 설계를 맡아줘야 한다는 거예요. 불교와의 인연이 또 들먹여진 거죠. 더 놀란 건 그때 부산까지 동행해준 스님이 축서사에서 동고동락했던 분이었어요. 스님도 ‘절에 있었던 그 춘수 학생이 설계를 맞게 된 거냐?’며 깜짝 놀라셨죠. 그때가 경부고속도로 개통 일주일째 된 때였어요. 멋들어진 그레이하운드를 타고 부산에 내려가 30만 원을 선금으로 받고 총비용 60만 원에 달하는 설계를 계약서도 없이 구두로 맡게 되었습니다. 일사천리로 진행된 일이었지요. 부처님의 가피라고 여겨집니다.”
당시 그가 살던 서울 휘경동 집값이 90만 원이었다. 그때 받은 60만 원으로 부친 생전에 진 본인의 학자금 빚을 갚고, 동생 대학 등록금까지 댔으니, 홀어머니를 모신 장남으로서 가장 노릇을 톡톡히 할 수 있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부터 투시도를 그리는 아르바이트생으로 이름을 날렸다. 이화여대 조감도를 그리는 데 합류하여 직장 월급의 절반에 해당하는 월 5000원을 받는 ‘꿀 알바생’이었던 것. 졸업 후 3년 만에 집을 샀을 정도로 일이 넘치게 들어온 그때가 일생에서 돈을 가장 많이 벌었던 때였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동료들은 설계 사무실보다 봉급이 서너 배 많은 현대건설, 주택공사 등으로 이직을 했죠. 제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쇄도했지만 배를 곯아도 건축 설계를 한다는 결심이 흔들린 적이 없었어요. 만약 그 결심을 지키지 못했다면 지금의 류춘수는 없었겠죠.”
김수근의 ‘공간’에서 류춘수의 ‘이공’(異空)으로
20세기 한국 대표 건축가이자 건축계의 우상인 김수근의 ‘공간’에 새 둥지를 튼 것은 그에게 또 다른 변곡점이 되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설계를 하는 공간을 거치지 않고 어떻게 한국에서 건축을 한다고 할 수 있겠냐’는 자문이 강하게 일었다. 무작정 공간을 찾아가 함께 일하고 싶다고 하자 김 대표 왈, “자네가 지금 일하는 곳은 내 친구 회산데 의리상 그럴 수는 없지.” 그 길로 다니던 회사에 무작정 사표를 내고 다시 찾아갔다. 이제 입사 자격이 갖춰졌다고 하자, ‘그럼 내일부터 출근해’ 이러시는 거예요. 제가 또 이랬죠. ‘사표를 냈으니 좀 쉬었다가 일주일 후부터 나오겠습니다.’ 돌아온 대답은 ‘야, 이놈 봐라’였지요. 하하.”
1974년 9월에 입사, 김 건축가가 55세에 간암으로 타계한 1986년까지 만 12년을 함께 일하며 88서울올림픽공원과 체조경기장 등을 맡아 설계했다. 류 건축가는 돌아가신 스승을 대신해 잠시 공간의 대표직에 있다가 ‘이공’(異空)으로 독립한다. ‘이공’은 단순히 ‘다르다’(different)는 의미가 아니라 ‘다름 그 너머의 보다 나은’이라는 의미인 ‘비욘드’(beyond) 스페이스를 뜻한다. 의미심장한 이름의 ‘이공’은 그의 나이 41세였던 1986년에 탄생해 75세인 지금까지 35년째 대한민국 대표 종합건축사 사무소로 건재하고 있다.
‘끝날 때까진 끝난 게 아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은 저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임에 틀림없습니다. 서울시로부터 VIP석에 제 이름을 새긴 ‘건축가의 의자’를 지정받기도 했으니까요. 전례가 없는 파격 대우지요.” 서울월드컵경기장은 ‘거인 골리앗을 이긴 소년 다윗’의 상징으로 회자되는 건축업계의 전설이다. 골리앗은 현대건설을, 다윗은 류춘수를 뜻한다.
1998년 IMF 경제위기 여파로 월드컵경기장은 애초 건설 계획이 없었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을 고쳐서 사용하기로 하고 개조 작품 공모전을 실시했는데 류 건축가가 당선된다. 잠실 올림픽경기장은 김수근의 작품이니 제자인 그가 월드컵경기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은 의미 있는 일. 그런데 새로 짓기를 원한 정몽준 당시 축구협회 회장이 김대중 대통령과 김종필 총리를 설득, 정부 3분의 1, 서울시 3분의 1, 축구협회 3분의 1 각출로 2000억 원 예산의 공사가 결정됐다. 시공은 당연히 현대건설 측이 맡는 조건이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내가 꼭 그 꼴이 됐지요. 개조안이 무산되었으니. 게다가 시공회사가 설계회사를 지정하는 턴키 방식으로 공사가 확정됐지요. ‘턴키’란 설계와 시공을 패키지로 하여, 완공 후 발주자는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면 된다’(Turn Key)는 의미의 건축업계 용어죠. 당시 현대건설은 건축계의 왕이었어요. 지금보다 100배는 센 기업이었던 무소불위의 현대건설은 ‘공간’을 설계 파트너로 지명했어요. 공간에 있을 때부터 원주체육관, 부산야구장 등 한국의 스포츠 건축물은 99% 제가 설계했어요. 말레이시아체육관 등 해외 스포츠 시설 설계 경험도 있었고요. 그럼에도 제 존재는 깡그리 무시됐죠.”
턴키 방식은 설계 실력으로 하는 게 아니라 로비 실력으로 하는 거라는 말이 건축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던 때였다. 현대, 대우, 삼성, 엘지, 대림, 포스코 등 한국 6대 기업이 컨소시엄을 짰지만 현대의 들러리에 불과한 요식적 몸짓일 뿐이었다.
“삼성엔지니어링에서 저를 찾아왔어요. 자기들과 함께 응모해보자고. 삼성 계열사라 하지만 공장이나 지어봤지 일반 건축은 해본 경험이 없는 곳이었죠. 맏형인 삼성이 이미 현대와 조인트를 한 상황인데 조무래기가 어디 감히 설치냐며 같잖다는 반응이 들렸어요. 같잖기는 저도 마찬가지였죠. ‘일반 건설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번 기회에 공부 좀 하고 싶어서 그럽니다. 류 건축사님 설계를 부탁합니다’ 이러는 거예요. 전 이미 다 포기하고 머리 식히러 미국에 나가려던 차였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 되더라고요. 1만분의 1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해보고 싶었어요. IMF 사태로 제가 경제적으로 매우 쪼들렸던 이유도 한몫했지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돌팔매를 하기 위해 주머니 속 돌을 만지작거리는 순간이었죠.”
요식적이나마 실시한 현상공모 기간은 세 달, 그로서는 목숨을 건 3개월이었지만 같은 기간 현대건설은 대학의 건축과 교수 등 심사위원 내정자들을 해외 유람까지 시키며 로비를 펼쳤다. 이런 상황에서 그도 단 한 명의 심사위원이라도 안면을 터야 했지만 기회는 어이없이 빗나갔다. 하필 박세직 월드컵조직위원장과 신라호텔에서 조찬 모임이 잡힌 것이다. 심사위원들은 이미 수유리 아카데미 합숙에 들어가버렸으니 배는 이미 떠났다. 다 내려놓는 마음으로 박 위원장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설계자가 자기 도면을 설명할 기회를 달라고. 국제적 관례가 그렇다는 근거를 내세워. 실낱같은 희망으로 그 말을 하고는 한강을 건너는데 서울시에서 전화가 왔다. 수유리에서 설명회가 ‘혹시’ 있을 수도 있으니 준비하라는 전화였다. 그 ‘혹시’는 불과 몇 시간 만에 ‘역시’로 드러났다.
“제 순서가 먼저였어요. 발표 30분, 질의응답 30분, 한 시간이 주어졌죠. 어차피 두 팀밖에 없었으니 넉넉한 시간이었어요. 100% 현대건설 측으로 낙착된 일이니 들러리들은 이미 다 떨어져 나갔고 저하고 현대만 남았던 거죠. 그때 ‘류춘수가 저리도 해박하게 강의를 잘할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는 수군거림이 들리더군요. 반면 현대 측 설계사는 엉망이었어요. 발표 준비를 했을 리가 없잖아요. 어차피 떼어놓은 당상이었으니까요. 설계자 둘 간의 실력 차가 너무 나니 안 뽑아줄 수가 없었던 거죠. 27명 심사위원 중 심사위원장, 부위원장을 제외한 25명이 저를 지지했습니다. 만장일치였다고 해야겠죠.”
끝날 때까지 끝나지 않았던 것이니, 신문 등 매체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겼다’고 대서특필했다. 소감을 묻자 “골리앗, 그들은 기도하지 않았습니다”라는 말로 류 건축가는 마지막 한 방을 제대로 먹였다. 피 말리는 운명의 3개월, 그의 꿈은 월드컵경기장으로 실현되었고 현대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현대건설 측에서는 지금도 ‘류춘수’라면 경기를 일으킬 정도라고. 턴키 방식에 의해 시공은 삼성물산에게 돌아갔다.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의 인연으로 영국의 필립 에든버러 공이 2020년 5월 그를 버킹엄 궁에 초청한 일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방문 날짜를 세 개 주면서 그 가운데 가능한 날을 고르라고 했던 것. “정말 감동했어요. 박원순 시장과 비교되었기 때문이지요. 박 전 시장이 70여 명의 건축가를 초청한 일이 있는데 일방적으로 날을 잡더라고요. 그러더니 하루 전날 취소 통보가 옵디다. 일주일 후로 연기하겠다고. 그러다가 그마저도 시간이 안 된다며 무기 연기를 하더라고요. 필립 공의 겸손하고 진정 어린 마음과는 대조적인 처사여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물론 서울월드컵경기장에 내 자리를 만들어준 것은 박 전 시장의 고마운 배려지요.”
박경리문학관, 한계령휴게소, 리츠칼튼호텔, 봉화 우리 집
“원주의 박경리문학관과 사저도 제가 설계해드렸는데, 작가님께 어떻게 짓길 원하시냐고 묻자, ‘지가 뭘 알아야지요. 선생님이 알아서 해주세요’ 이러시는 거예요. 모든 건축주는 자기가 더 잘 아는 줄 알지요. 그런데 천하의 박경리 선생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니 비범함이 느껴졌습니다. 문학을 안 했으면 건축을 했을 거라고 하셨어요. 그림도 잘 그리셨지요.”
한편 1979년, 33세에 설계한 한계령휴게소는 40년이 지난 최근에 프랑스 파리에 도면이 전시되어 극찬을 받았다. 한계령휴게소는 가파른 산비탈에 터를 잡아 철골과 목구조를 절묘하게 배치해 뼈대와 인테리어에 구분을 두지 않은 점이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다. 또한 그가 설계한 호텔 중에 가장 큰 리츠칼튼호텔에도 범상치 않은 운명적 요소가 작용했다. 대형 설계회사의 도면으로 지하 7층까지 땅을 파고 공사가 시작된 지 2년이 지난 후 그에게 설계 의뢰가 다시 들어온 것이다. 그때도 역시 산비탈을 살리는 오르막 콘셉트였는데 유니크한 그의 설계가 뒤늦게 인정받은 것이다. 공모전 낙선작이 2년 후 당선작으로 뒤바뀌며, 진행되던 공사를 중간에 갈아엎고 류춘수 버전으로 지금의 리츠칼튼호텔을 세운 것이다.
운명의 무늬를 그려온 드라마틱한 건축 행로에서 류 건축가 스스로가 꼽는 가장 애착 가는 건축물은 무엇일까. ‘봉화 우리 집’이라고 주저 없이 말하는 그를 통해 자연과 어우러진 그의 건축 정서를 또 한 번 느꼈다. 건축, 그 설계는 타인의 기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직업적 노력이라고 정의하는 그는 요즘, 유튜브 ‘류춘수 space TV’를 통해 대한민국 건축 역사와 오버랩되는 류춘수의 건축사를 편안하고 진솔하게 풀어내며 참 좋은 시절을 보내고 있다.
지난 7월, 우주여행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렸다. 7월 11일 오전 7시 40분에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7월 20일 오전 6시 12분에는 아마존 창립자 제프 베이조스.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가 달과 화성 탐사용 우주선 ‘스타십’을 개발해 그 뒤를 쫓고 있다. 앞다투어 우주로 떠나는 나이 든 ‘회장님’들은 로망으로 존재하던 우주여행을 현실로 만들고 있다. 아폴로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 달에 발을 딛는 우주인을 보며 상상만 했던 우주여행, 국내에서도 정말 가능한 걸까?
시니어가 우주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제각기 다양하다. 정달호 전 이집트 대사는 “기후 변화나 코로나19 사태를 보면 지구에 한계가 온 것 같다. 인류의 미래가 우주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주가 어떤지 직접 알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양승국 법무법인 로고스 대표변호사는 “영화처럼 몸이 둥둥 뜨는 무중력 상태에서 파란 지구를 내려다볼 걸 상상하면 짜릿하고 흥분된다”며 “실현 가능성이 낮을 것 같아 꿈만 꾸고 있지만, 기회가 생긴다면 첫 번째로 신청하고 싶다”라고 말하며 기대감을 드러냈다.
아직까지 한국인이 우주여행을 다녀온 사례는 없지만, 비슷한 사건은 있었다. 2008년 4월 소유즈 우주선을 타고 우주에 다녀온 한국 최초의 우주인 이소연 씨의 이야기다. 2006년 진행된 우주인 선발 프로젝트는 당시 큰 이슈였다. “인생의 마지막 열정을 우주에서 태우고 싶습니다. 우주의 아름다운 모습을 손자 손녀에게 얘기해주고 싶어요.” 당시 예순일곱의 나이로 최고령 도전자인 정재은 신세계그룹 명예회장이 남긴 메시지는 사회에 울림을 주었다. 이외에도 산악인 고(故) 박영석 대장, 카레이서 황진우 등의 명사가 도전해 더욱 화제를 모았지만, 우주행 티켓을 거머쥔 주인공은 한국항공우주연구원 소속의 이소연 박사였다.
이 씨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서 9박 10일간 머무르고 무사히 귀환했다. 이 씨는 전문적인 훈련 과정을 거친 직업 우주인으로, 그녀의 여정은 현재 이뤄지고 있는 민간 우주여행과는 결이 조금 달랐다. 그러나 당시 국민들은 ‘1호 우주인 탄생’이라는 경사를 지켜보며 머지않은 미래에 누구나 우주를 여행할 수 있기를 꿈꿨다.
실제로 이소연 씨의 귀환 직후 인터뷰는 시청률 조사회사 TNS미디어코리아 기준 17.2%의 시청률을 기록하며 높은 관심을 받았다. 당시 국민적 관심을 인식한 듯 국내 한 관광사는 유사 우주관광 상품을 내놓았다. 2008년 판매된 ‘우주에서 살아남기-우주항공 체험과 러시아 일주 6일’이 그것이다. 관광객들은 직접 우주로 떠나는 대신, 러시아 여행 중에 모스크바의 가가린 우주훈련센터를 방문했다.
로켓보다 열기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
실제로 우주여행을 다녀온 이들이 속속 늘어나고 있지만, 오히려 국내 분위기는 예전만 못하다. 바다 건너 미국에선 우주여행 티켓을 팔며 분위기가 달아오른 모양새지만 우리나라에선 13년 전의 유사 우주 관광상품마저 찾아보기 어렵다. 국내 기술로는 짧게 보면 10년, 길게는 100년이 걸릴 것이라고 주장하는 전문가들도 있다. 어릴 적 상상하던 ‘달나라로 떠나는 수학여행’은 정말로 요원하기만 한 걸까.
안형준 과학기술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기술력을 갖춘 어떠한 기업이 나타나 우주여행만을 목표로 기술 개발에 나서지 않는 한 10년 안으로는 어렵다고 본다”고 말했다. 우주여행 산업 진출을 꿈꾸는 국내 기업이 있냐고 묻자 “현재로서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선을 그었다. 한화그룹의 방산·항공 계열사인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측도 “구체적인 계획이 없으며, 아직 우주 산업 전반에 투자하는 단계라서 우주여행과 같은 세부적인 부분을 논의하기는 이른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휴성 한국건설기술연구원 미래스마트건설연구본부 본부장은 “기술이 안 되는 건 아니지만 문제는 돈”이라고 콕 집어 지적했다. 우주여행에 필요한 발사체를 제작하고, 우주정거장처럼 궤도를 도는 우주호텔을 건설하는 일에는 천문학적 비용이 들어간다. 우주로 여행을 떠나기 위해 필요한 비용도 수백억 원 수준이다 보니 일상화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다만 로켓 대신 열기구를 도입할 경우 시니어에게도 희망이 있다. 열기구를 이용하면 우주복을 입지 않고, 우주에서 적응하기 위한 훈련이나 체력 단련을 거치지 않아도 우주와 비슷한 환경에서 푸른 별 지구를 내려다볼 수 있어서다. 실제로 스타트업 ‘스페이스퍼스펙티브’(Space Perspective)는 특수 제작될 열기구 ‘스페이스십넵튠’(Spaceship Neptune)을 이용한 관광상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다.
열기구의 강점은 로켓보다 천천히 상승해 탑승자가 버텨야 하는 중력가속도로 인한 압력이 비교적 낮다는 데 있다. 즉 탑승자의 신체 조건이 완화된다. 현재 우주행 티켓을 판매 중인 블루오리진·버진갤럭틱의 우주여행용 로켓에 탑승하려면 2~3G를 버텨야 한다. 2~3G는 급회전을 하거나 추락하는 롤러코스터에서 느낄 수 있는 수준으로, 안형준 연구위원은 “롤러코스터를 탈 수 있는 건강한 분이라면 탑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떨어지는 시니어들이 ‘열기구 우주여행’을 노려볼 만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미래엔 국내에서도 우주여행을 성공해본 기업과 전략적 제휴를 맺는 기업이 등장할 수 있다. 허환일 충남대학교 항공우주공학과 교수는 “수요가 있다면, 외국 기업이 제작한 발사체를 타고 국내 기업이 우주관광 서비스를 제공하는 형태가 가능할 수 있다”며 “아주 빠르면 10년 후에도 일반인의 우주여행이 가능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러니 우주여행을 꿈꾼다면 지금부터 체크리스트를 챙겨 준비해보자. 꿈꾸는 자에게 불가능이란 없고, 기다리는 자에게 기회가 올 테니까.
내가 가진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목록을 죽 적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의 개수가 더 많았다. 내가 오죽잖은 인간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습관 따라 성격이 만들어지고, 성격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했던가. 좋은 습관이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기본을 뻔히 알면서도 실족한다. 좋은 습관은 몸에 붙이기 어려운 반면, 나쁜 습관은 나도 모르게 도둑처럼 스며들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게 아닌가.
나쁜 습관 중에 최고봉은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버릇이다. 평소 지인들은 나를 따뜻하고 다정해 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지만 그거 오진이다. 내 생각에 천국이란 분노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래 나름 마음을 다스려 분노를 관리함으로써 천국 건설에 이바지하려 하지만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남들에게 웬만해선 크게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이견으로 충돌해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겨버린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꽤나 이상하고 꽤나 이기적이고 꽤나 애처로운 존재이니, 가급적 보듬어 내 상처를 줄이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화를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속에선 화가 부글거리는 것이다.
가족 앞에선 더 좀팽이가 된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 전전긍긍이 많다. 천하무적 분노의 화신인 아버지는 여차하면 화를 앞세우는 분이다. 화를 생산하는 장기 하나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양 작은 일에도 쉽게 격분하는 캐릭터다.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분노의 번갯불을 내리칠 때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때로 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고령의 아버지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 끝내 참아내지만 안에서 들끓는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괴로움을 겪는다. 참는 척할 뿐, 이미 나 역시 분노의 정상에 올라선 당장의 실정을 알기에 고통스럽다. 결국은 고통이 겹이다. 꾹 참아내는 고통과,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이중으로 겹친다. 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분노할 것 없이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일상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능히 해치울 묘안이 내게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으로 나 자신과 협상한다. 문제의 원인이 내게도 있음을 자인하는 거다. 그 왜 있잖은가? ‘내 탓이오!’ 상대의 분노에 맞서기보다 까짓것 대범하게 받아들여 나의 분노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못한 내 탓!
나는 절집에 관한 책 두 권을 낸 바 있는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닌 절이 많은 편이다. 궁금한 건 도(道)며 해탈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걸림이 없어지는지, 뭐 그런 거였다. 도를 말하는 승려들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고매하고 오묘한 언어로 도를 말하는 방식인데, 너무 관념적이고 어려워 귀에 맺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아주 쉬운 말로 도를 말하는 방식이다.
나에겐 후자가 구미에 맞았고, 믿음이 갔으며, 소낙비처럼 시원해 두고두고 반추하는 맛이 났다. 이를테면 첩첩산중 암자에서 만난 어떤 노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승려는 한마디로 웨이터라고. 남에게 서비스를 하는 게 본분이며, 완벽한 서비스 맨을 일컬어 도인이라 하는 것이야!” 쉽고 시원하지 않은가? ‘도란 중생의 똥을 치워주는 데에 있다.’ 일찍이 원효도 그렇게 가르쳤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원효 버전이다. 모름지기 남에게 나를 아낌없이 쏟으라는 충고들이다. 이타(利他)의 바다에서 살면 수행자이건 중생이건 통한 자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런 언설이 좋다. 내게 쓸모가 커서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인색해질 때, 나쁜 습관의 노예로 헤맬 때,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 말씀들을 새기면 힘이 된다. 문제의 원인이 알고 보면 비좁은 나의 이기심에 있다는 걸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계의 불화나 분노로 야기되는 고통이 결국은 그릇 작은 내 탓임을 인정하면 뜻밖에도 환하게 밝아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매사 내 탓으로 돌리고 초연하게 처신하기가 어렵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님이 자명해 앙앙불락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고, 내 탓임이 분명할지라도 그런 줄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날뛰는 경우는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악습과 분노의 처리에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무엇으로 대책을 삼아야 하나. 정토회 법륜 스님의 얘기에 귀 기울일 만하다. 요점은 이렇다. 명철하고 재미있고 화통한 이 스님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붙은 습관과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화 역시 습성이 되면 뜯어내기 힘들다. 화가 솟구칠 때마다 전기충격기로 한 번씩 몸을 지지는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대책이지만 그건 고문이라 잔혹하다. 그렇다면 화가 붙은 대로 태연하게 사는 게 답인데, 이 경우엔 과보(果報)를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화를 떼어내려고 고통을 겪느니 그냥 놔두고, 대신 창의적으로 살아 인생을 보완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법륜 스님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화가 치솟아 뚜껑이 열릴 때면 아하,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그렇게 자신을 주시해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우행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또렷이 인식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참회와 각성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화의 규모를 줄여나갈 수 있고, 언젠가는 분노 처리에 유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방법은 상당한 효험이 있다. 내가 사용해본 경험으로는 약발이 ‘짱’이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 명예 등을 떠올린다. 반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인 습관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잘 들인 습관이 열 가지 노력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듯, 습관에는 노년기의 삶을 청춘의 것처럼 빛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습관의 물리학’을 다뤘다. 나쁜 습관의 최고봉인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이퇴계의 생활 습관, 습관적 사유와 행동 그리고 ‘약속하는 나’ 등의 콘텐츠를 담았다. 비대면 시대의 시니어가 SNS 사용 시 주의해야 할 나쁜 습관과 좋은 매너, MZ세대에게 배우는 리추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달라지게 만드는 웰에이징 습관은 시니어 독자로 하여금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해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웃겼다’는 탤런트 김성환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까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인생 철학은 무엇일까.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의 변죽 좋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스페셜 인터뷰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이병철 신한은행 퇴직연금그룹 부행장을 만났다. 은퇴한 시니어가 두 번째 인생을 즐기며 의미 있게 놀고, 행복한 인생을 스스로 만들기를 바란다는 그. 이 부행장에게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뒷얘기와 신한은행이 바라보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 가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참 좋은 시절에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올림픽체조경기장, 리츠칼튼호텔과 박경리문학관 등을 설계한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를 만났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를 맡을 때, 건축계의 ‘골리앗’ 현대건설을 상대로 던진 다윗의 승부수가 무엇이었는지 기사로 확인해보자.
추석 연휴가 있는 9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기분 좋게 대화하는 데 필요한 세대공감 소통법도 담았다. 배우 윤여정과 유튜버 밀라논나, 외식사업가 백종원 등 청년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 3인방의 소통 노하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인 우주여행 이야기도 담았다. 시니어들의 오랜 로망 우주여행이 국내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지, 트렌드 톺아보기에서 국내 우주여행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신문물 설명서에서는 5060세대에게 더 나은 쇼핑 ‘옴니채널’을 소개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쇼핑 채널의 장점만 모아 유기적으로 연결한 옴니채널을 이해하고 나면 쇼핑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추어탕, 판소리와 광한루의 고장, 남원.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거리 많은 이곳에 최근 여행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명소가 등장했다. 감성 솔솔! 미술관 여기에서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을 소개한다. 매혹적인 물의 정원과 ‘생명 작가’ 김병종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김병종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되어줄 ‘브라보 마이 러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상 수상작 ‘대륙에서 길을 묻다’ ▲재개발과 재건축에 투자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는 구해줘 부동산 ▲연금부자로 가는 지름길 TDF를 소개하는 생활 속 법률 상식 ▲나도 지구도 건강해질 수 있는 특별한 운동 ‘플로깅’을 소개하는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세상’ 등의 알찬 콘텐츠로 시니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고품격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최근 개관 1주년을 맞았다. 소감은?
코로나19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문을 열었음에도 1년간 관람객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우리나라 항공 기술이 이렇게 대단했나’, ‘이런 역사가 있었나’ 하시는 반응이었죠. 사실 항공 정책을 담당했던 저도 개관을 준비하면서 우리 항공 역사에 관해 새로 알게 된 사실이 많아요. 항공의 전 분야를 한데 모아 체계적으로 전시하는 곳이 많지 않거든요. 이 공간이 그 역할을 최초로 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자긍심이 있죠.
개인적으로 애착이 가는 전시물은?
아무래도 박물관 개관 날짜와 연관이 깊은 한인비행학교의 ‘스탠더드 J-1’이 가장 애착이 갑니다. 준비 과정도 쉽지 않았거든요. 당시 구매하려고 알아보니 전 세계에 세 대만 남아 있었어요. 그중 한 곳에 매입 의사를 밝히니 가격을 몇 배로 높여서 부르더군요. 예산에 한계가 있어 구매 대신 복원을 택했죠. 우리나라 최고의 복원 전문가와 함께 했어요. 어려운 결정이었지만 우리나라 사람이, 우리 기술로, 우리 최초의 비행기를 재현해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크다고 봐요.
박물관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있다면?
살아 있는 비행기를 들이는 거예요. 지금 박물관에 전시된 비행기는 극단적으로 말하면 죽어 있다고 봐야 해요. 겉면은 볼 수 있지만, 내부는 확인할 길이 없죠. 저희는 ‘디지털 수장고’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행기 엔진, 가스 등 내부 구조를 디지털로 재현하고 관람객이 직접 다뤄볼 수 있게 하는 겁니다. 이제 박물관은 시청각 자료만으로는 안 돼요. 저희뿐 아니라 대부분의 박물관이 체험 형식으로 탈바꿈하고 있죠. 그런데 교통수단 중에 가장 빠른 게 항공이니, 저희가 앞서가야 하지 않겠어요?(웃음)
어떤 공간이 되었으면 하는가?
방문객들이 박물관을 안마당처럼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어려운 곳이 아닌 재미있고 흥미로운 놀이 공간, ‘와우’ 소리가 절로 나오는 공간이요. 또 항공의 특징 중 하나가 ‘글로벌’이잖아요. 우리 국민뿐 아니라 공항의 환승객이나 외국인 관광객, 국내에 주재하는 외국인 방문객들도 찾아와서 우리나라의 항공 기술과 위상을 알아 갔으면 합니다. 어디서도 뒤처지지 않는 세계 1위의 항공박물관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노력을 할 겁니다.
앞으로의 운영 방향은?
박물관 주변 부지를 활용해 최첨단 교통 체험관 설립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에어택시를 비롯해 하이퍼루프 등 최신 교통수단을 직접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이죠. 직원들에게 ‘우리 박물관은 하늘길 177번지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라는 말을 자주 해요. 박물관 옆 김포공항과 한국공항공사, 그리고 옥상 위의 하늘까지 항공 교통과 관련된 모든 게 유산이라고 보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훗날엔 우주 왕복선 체험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주로 갈 수 있는 세상에 상공만 다루면 재미없잖아요. 최첨단이라는 말은 늘 꿈꾸게 하지 않나요?
최정호 국립항공박물관장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영국 리즈대학 대학원 교통계획학 석사, 광운대학교 부동산학 박사, 제28회 행정고시 합격, 건설교통부 육상교통국 육상기획관 서기관, 국토교통부 대변인, 국토교통부 항공정책실 실장, 국토교통부 기획조정실 실장, 국토교통부 제2차관, 전라북도 정무부지사, 현 국립항공박물관 관장.
어찌된 셈인지 가슴을 후벼 파는 일이 잦은 게 인생살이다. 애초 뜻밖의 고난을 만나 나동그라지도록 기획된 게 삶이지 않을까. 고통을 통하지 않고 도달할 수 있는 길이 없다는 소식은 비처럼 쏟아진다. 옛 선비들은 수상한 세상에 질려 일쑤 산야로 스며들었다. 소쇄옹(瀟灑翁) 양산보(梁山甫, 1503~1557)도 그랬다. 그는 잘나가던 스승 조광조가 훈구파에 몰려 유배되자 세상에 염증을 느껴 산골짝으로 들어갔다. 그러고선 줄곧 산중 원림을 가꾸며 살았다. 그게 소쇄원(瀟灑園)이다.
소쇄원의 들머리엔 대숲이 성성하다. 대나무를 청허자(淸虛子)라 이른 건 맑게 속을 비운 겸허의 표상이기 때문이다. 마디마디 단단하게 맺혀 올곧게 쭉쭉 자라는 품새는 절개를 상징한다. 세상의 풍상이 사납다고 굽힐까보냐, 부러질까보냐, 대나무가 하는 말이 그렇다. 양산보가 원림 초입에 대숲을 조성한 까닭이 쉬 읽힌다.
대숲 사이 조붓한 소로를 지나자 소쇄원의 내부가 훤히 드러나기 시작한다. 하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가 ‘천국’이라 탄복한 소쇄원의 가경(佳景)이. 이곳이 천국이라면 대숲 저 바깥은 감옥인가. 대숲으로 차안과 피안의 경계를 삼았다? 그리 봐도 지나칠 게 없겠다. 양산보는 권력의 횡포로 어지러운 속세를 헌신짝 버리듯 팽개치고 산야에 은둔했다. 소쇄원의 조영을 통해 꿈에서나 만났을 법한 이상 세계 건설을 추구했다. 지지고 볶는 세속만이 유일한 세계가 아니라는 걸, 자연 속에 몸을 두고 풍성한 내면의 선율을 즐기는 삶이 한결 낫다는 걸 오롯이 구현했다.
소쇄원의 구조물들은 깊지 않지만 옹골찬 맛을 풍기는 계곡 좌우의 경사지와 둔덕으로 펼쳐진다. 대청마루 정갈한 작은 집, 모정(茅亭), 연못, 담장, 화단, 외나무다리 등 세우고 꾸미고 덧붙인 것들이 많다. 그러나 짜임새가 좋아 답답한 구석이 없다. 탁 트인 느낌을 준다. 부지의 면적은 1400평쯤으로 널찍하다. 조선의 원림치고 이 정도 넓이를 가진 곳이 드물다.
일찌감치 젊은 시절에 세상을 등진 산림처사 양산보. 그에게 벼슬은 멀고 가난은 가까웠다. 그리운 건 그저 마음의 평화? 밖으로는 문을 닫은 대신 안으로는 광활한 사이즈의 자유를 들여놓고 유유자적하고 싶었을 테다. 그러하니 빈 마음으로 꾸린 원림이다. 그렇다면 오두막 하나와 탁족하기 좋은 계곡의 나무 그늘 하나 외에 무엇이 더 필요하랴. 양산보는 그러지 않았다. 대범하고도 활달하게 구조물들을 조성했다. 번듯한 원림으로 자신의 뜻과 지향을 면밀하게 드러낸 것이다.
이를테면 삿갓지붕을 올린 자그만 정자엔 대봉대(待鳳臺)라 이름 붙여 봉황을, 즉 성군(聖君)을 갈망하는 마음을 담았다. 소쇄원의 두 축인 광풍각(光風閣)과 제월당(霽月堂)의 당호는 송나라의 명필 황정견이 주돈이의 인품을 예찬하며 쓴 글귀 ‘광풍제월’(光風霽月)에서 빌렸다. ‘맑은 날의 바람, 비 갠 뒤의 달’을 닮은 인품을 선망했던 거다. 이렇게 보면 소쇄원은 세월을 낚는 낚시터가 아니다. 마음을 닦는 교실이요, 깨어 있는 정신의 전시장이다.
산중에 사는 이에겐 고독마저 기껍다. 적막이야 연인이고. 양산보가 공들여 소쇄원을 꾸린 건 내면의 웅장한 심지를 남들에게 티 내고 싶어서가 아니었을 거다. 우선은 내가 나를 만족시키고서야 이타(利他)도 헌신도 가능한 게 사람이지 않던가. 양산보는 유한한 인생을 산중의 독존(獨存)으로 요긴하게 활용했다. 유유하게 노닐었다. 지상의 주인으로 살았다. 그랬으니 소문나지 않을 리가. 양산보가 소쇄원을 꾸리고 소쇄하게(맑고 깨끗하게) 산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인걸들이 숱하게 찾아들었다. 기대승, 고경명, 정철, 송순, 임억령 등 당대의 스타급 문사들이 드나들며 학문을 논하고 시를 지었다는 게 아닌가. 기대승은 양산보를 일컬어 ‘만사를 낙관하는 군자’라 했다.
소쇄원은 아름다워 정들기 쉽다. 물소리 바람 소리는 귓전을 스치며 덧없는 세상을 너무 용쓰지 말라 한다. 매인 것 없이, 다툴 것 없이, 그저 살갑게 물처럼 구름처럼 흐르라 귀띔한다. 이래저래 경탄할 만한 옛날 정원이다. 놓치지 말 게 하나 있다. 정조 임금이 ‘호남의 공자’라 부른 하서 김인후의 ‘소쇄원48영시’다. 제월당 마루에 편액으로 걸려 있다. 소쇄원의 경관을 48수 오언절구로 노래한 것인데, 이 시편들은 소쇄원의 풍광에 혼을 훅 불어넣었다.
뜨거운 환경에 오랜 시간 노출돼 두통, 어지러움, 근육 경련, 피로감, 의식 저하 증상을 호소하는 온열질환자가 늘고 있다. 이 중 올해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는 18명으로, 관련 집계를 시작한 이후 두 번째로 높은 수치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5월 20일부터 지난 7일까지 ‘온열질환 응급실 감시체계’로 신고된 온열질환자는 1212명이다. 지난해 같은 기간 753명보다 2.6배 많다.
올해 온열질환 신고 현황을 보면 10명 중 7명은 오후 2~5시 또는 오전 10시~오후 2시에 발생했다. 발생 장소는 실외가 79.6%로 냉방이 안 되는 실내(20.4%)보다 많았다. 실외 장소 중에서는 건설 현장 등 실외작업장, 길가, 논밭 순으로 높게 나타났다. 남성(75.6%)과 50~60대(41.0%)가 특히 많았다. 단순 노무 종사자가 24.2%를 차지했다.
이 중 사망자는 18명으로 최근 3년간 최다 기록이다. 2019년과 지난해에는 각각 11명, 9명이었다. 감시체계가 운영된 2011년 이후로 넓혀보면 5월 20일부터 9월 11일까지 48명의 온열질환 추정 사망자가 나왔던 2018년에 이어 두 번째로 많다.
사망자 18명의 사망 원인은 모두 열사병이었다. 50대 연령층(6명)과 남성(13명)이 많았다. 발생 장소는 논밭 5명, 길가 4명, 냉방이 적절하지 않은 집 4명, 실외작업장 2명 등이다. 올해 가장 많은 사망자가 발생한 기간은 7월 25일부터 31일까지로 8명이 사망했으며, 이번 달에도 3명이 사망했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무더위 속에서 실외에서 일하시는 분, 어르신, 만성질환자는 온열질환에 취약하므로 예방을 위해 폭염 시 낮 시간대 작업과 외출을 최대한 자제해야 한다”며 “물·그늘·휴식 3대 수칙을 준수해달라”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