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진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의 목록을 죽 적어본 적이 있다. 그랬더니 좋은 습관보다 나쁜 습관의 개수가 더 많았다. 내가 오죽잖은 인간인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습관 따라 성격이 만들어지고, 성격 따라 운명이 정해진다 했던가. 좋은 습관이 좋은 삶을 가져온다는 기본을 뻔히 알면서도 실족한다. 좋은 습관은 몸에 붙이기 어려운 반면, 나쁜 습관은 나도 모르게 도둑처럼 스며들어 따개비처럼 들러붙는 게 아닌가.
나쁜 습관 중에 최고봉은 분노의 감정을 처리하지 못해 스스로 고통을 불러들이는 멍청한 짓을 반복하는 버릇이다. 평소 지인들은 나를 따뜻하고 다정해 화를 모르는 사람이라 하지만 그거 오진이다. 내 생각에 천국이란 분노가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세상이다. 그래 나름 마음을 다스려 분노를 관리함으로써 천국 건설에 이바지하려 하지만 자주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다.
나는 남들에게 웬만해선 크게 화를 내지 않는 편이다. 이견으로 충돌해도, ‘그래?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넘겨버린다. 알고 보면 사람은 누구나 꽤나 이상하고 꽤나 이기적이고 꽤나 애처로운 존재이니, 가급적 보듬어 내 상처를 줄이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나 화를 품고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흔하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뿐, 속에선 화가 부글거리는 것이다.
가족 앞에선 더 좀팽이가 된다. 특히 아버지와의 관계에 전전긍긍이 많다. 천하무적 분노의 화신인 아버지는 여차하면 화를 앞세우는 분이다. 화를 생산하는 장기 하나를 몸 안에 가지고 있는 양 작은 일에도 쉽게 격분하는 캐릭터다.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아 분노의 번갯불을 내리칠 때는 정말이지 죽을 맛이다. 때로 대거리를 하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고령의 아버지에게 그럴 수는 없는 일. 끝내 참아내지만 안에서 들끓는 화가 사라지는 건 아니라서 괴로움을 겪는다. 참는 척할 뿐, 이미 나 역시 분노의 정상에 올라선 당장의 실정을 알기에 고통스럽다. 결국은 고통이 겹이다. 꾹 참아내는 고통과, 속에서 올라오는 분노가 가져다주는 고통이 이중으로 겹친다. 참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분노할 것 없이 감정의 평정을 유지하고 싶지만 그게 쉽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일상에서 올라오는 크고 작은 분노의 감정을 능히 해치울 묘안이 내게 있을 리 없다. 다만 내가 모자란 인간이라는 걸 자각하는 것으로 나 자신과 협상한다. 문제의 원인이 내게도 있음을 자인하는 거다. 그 왜 있잖은가? ‘내 탓이오!’ 상대의 분노에 맞서기보다 까짓것 대범하게 받아들여 나의 분노를 허공으로 날려버리지 못한 내 탓!
나는 절집에 관한 책 두 권을 낸 바 있는데, 취재를 위해 돌아다닌 절이 많은 편이다. 궁금한 건 도(道)며 해탈이 무엇인지, 어떻게 마음을 닦아야 걸림이 없어지는지, 뭐 그런 거였다. 도를 말하는 승려들의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고매하고 오묘한 언어로 도를 말하는 방식인데, 너무 관념적이고 어려워 귀에 맺히는 게 별로 없었다. 다른 하나는 아주 쉬운 말로 도를 말하는 방식이다.
나에겐 후자가 구미에 맞았고, 믿음이 갔으며, 소낙비처럼 시원해 두고두고 반추하는 맛이 났다. 이를테면 첩첩산중 암자에서 만난 어떤 노스님은 이렇게 말했다. “승려는 한마디로 웨이터라고. 남에게 서비스를 하는 게 본분이며, 완벽한 서비스 맨을 일컬어 도인이라 하는 것이야!” 쉽고 시원하지 않은가? ‘도란 중생의 똥을 치워주는 데에 있다.’ 일찍이 원효도 그렇게 가르쳤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의 원효 버전이다. 모름지기 남에게 나를 아낌없이 쏟으라는 충고들이다. 이타(利他)의 바다에서 살면 수행자이건 중생이건 통한 자라는 메시지다. 나는 이런 언설이 좋다. 내게 쓸모가 커서다. 따뜻한 말 한마디에 인색해질 때, 나쁜 습관의 노예로 헤맬 때, 분노를 통제하지 못할 때 이 말씀들을 새기면 힘이 된다. 문제의 원인이 알고 보면 비좁은 나의 이기심에 있다는 걸 깨우쳐주기 때문이다.
관계의 불화나 분노로 야기되는 고통이 결국은 그릇 작은 내 탓임을 인정하면 뜻밖에도 환하게 밝아지는 것들이 많다. 그러나 매사 내 탓으로 돌리고 초연하게 처신하기가 어렵다. 따지고 보면 내 탓이 아님이 자명해 앙앙불락 괴로워지는 경우도 있고, 내 탓임이 분명할지라도 그런 줄을 모르거나 외면한 채 날뛰는 경우는 더 많기 때문이다. 결국은 도돌이표처럼 돌아가 악습과 분노의 처리에 무능한 모습을 드러내기 십상이다.
무엇으로 대책을 삼아야 하나. 정토회 법륜 스님의 얘기에 귀 기울일 만하다. 요점은 이렇다. 명철하고 재미있고 화통한 이 스님에 따르면, 사람의 몸에 붙은 습관과 성격은 고치기 어렵다. 화 역시 습성이 되면 뜯어내기 힘들다. 화가 솟구칠 때마다 전기충격기로 한 번씩 몸을 지지는 충격요법이 가장 확실한 대책이지만 그건 고문이라 잔혹하다. 그렇다면 화가 붙은 대로 태연하게 사는 게 답인데, 이 경우엔 과보(果報)를 감수해야 한다고 한다. 화를 떼어내려고 고통을 겪느니 그냥 놔두고, 대신 창의적으로 살아 인생을 보완하는 방법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그런데 법륜 스님이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다. 화가 치솟아 뚜껑이 열릴 때면 아하, 지금 내가 화를 내고 있구나, 그렇게 자신을 주시해 알아차리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화를 내는지도 모르는 채 무의식적으로 화를 내는 우행에서 벗어나라는 충고다.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또렷이 인식하기를 거듭하다 보면 참회와 각성이 일어나면서 서서히 화의 규모를 줄여나갈 수 있고, 언젠가는 분노 처리에 유능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 방법은 상당한 효험이 있다. 내가 사용해본 경험으로는 약발이 ‘짱’이다.
<이 기사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BRAVO My Life) 2021년 9월호(VOL.81)에 게재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