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영섭 변호사는 독특한 이력을 갖고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건축학과를 나와 중앙대학교에서 건설경영학과 석사와 건축시공 및 건설관리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군 시절에는 카투사로 복무하다가 자원해 미 2사단 공중강습부대에 배치되었고, 제대 후에는 ‘공대생’으로 사법시험에 합격해 건설 부동산 분야의 법적 분쟁 해결을 위한 법률사무소를 운영했다. 그러던 중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정치계에도 뛰어든 그에게 변호사 이후에 꿈꾸는 제2의 인생은 무엇일지 들어봤다.
집주인은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
그렇다면 건축 전문 변호사의 입장에서 봤을 때, 시니어들은 스스로 만드는 집을 어떤 의미로 봐야 하는 걸까?
“집짓기를 스스로 하겠다는 분들은 자신이 ‘소비자’가 아닌 ‘사업자’임을 깊이 인식해야 합니다. 스스로 땅을 사서 집을 짓는 건축 행위는 분양을 받거나 매수하는 것에 비해 이익률이 훨씬 높습니다. 이익률이 높다는 것은 그만큼 리스크가 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상당한 자본을 고위험 사업에 투자한 것입니다. 고위험 사업에서 ‘무엇을 몰랐다’는 것은 전혀 변명이 안 됩니다. 소비자는 약자지만 사업자는 강자입니다. 법원 소송과정에서도 땅과 자본을 가진 건축주는 시공업자보다 훨씬 사회적으로 가진 자로 간주됩니다. 자신이 스스로 사업을 행할 준비를 철저히 하셔야 합니다.”
사업자로서 자신에 대한 자각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원변호사의 충고는 스스로 만드는 집에 대해 엄격해야 한다는 관점이 담겨 있었다. 그렇다면 본격적인 초고령 사회로 진입하는 한국에서 시니어들을 위한 주택의 방향성은 어떻게 이뤄져야 하는지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나이 들면 공기 맑은 한적한 곳에 전원주택을 짓고 농사나 지으며 편하게 살겠다는 분이 많지만 생각처럼 쉬운 게 아니다”라며 그 이유를 설명했다.
고령자를 위한 가장 좋은 주택은?
“어르신들은 응급상황이 발생할 수 있어 병원과 가까워야 하고, 자식들과 사람들의 관심이 필요하기에 도심에 있어야 합니다. 각종 편의시설을 가장 많이 필요로 하는 분들도 고령자입니다. 결국 고령자를 위해 가장 좋은 주택 유형은 아이러니하게도 주상복합 아파트입니다. 신축 아파트를 많이 공급하고, 오래된 아파트를 쉽게 재건축할 수 있도록 제도를 정비하는 것이 최고의 고령자 주택 정책입니다.”
아파트 공급량을 늘리고 쉽게 재건축하게 법을 바꿔야 한다는 원 변호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재개발과 재건축 정비 사업에서 유독 많은 갈등이 발생하고 있다는 게 떠올랐다. 이 분야에서 전문가인 그가 봤을 때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는 소송과 최근 추이는 어떤 양상일까?
“재개발 및 재건축 정비 사업은 다수의 이해관계자가 조합이라는 단체를 구성해서 의사를 통일해가는 과정입니다. 그러기에 조합장 선임 등 여러 안건에 대한 총회의 결의가 가장 중요한데, 이 과정에서 총회 결의의 효력을 다투는 소송이 일어나게 됩니다. 특히 정족수와 통지, 동의 방식 등이 문제가 됩니다. 판례의 방향은 과거에 비해 결의의 절차적인 부분을 점점 엄격하게 보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IMF 시절부터 정치를 꿈꾸다
원 변호사의 이력에는 변호사로서뿐만 아니라 정치인으로서의 경력들도 있다. 그는 꾸준한 총선 도전 기록을 갖고 있으며 지난 총선에서는 자유한국당의 비례정당 TF팀장으로서 자매정당인 미래한국당을 만들기도 했다. 그가 처음 정치에 눈을 뜬 것은 IMF 시절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 IMF를 겪고 나라의 의사를 결정하는 정책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정치는 법을 만드는 과정입니다. 사법시험을 본 것도 비록 건축학도지만 법을 알아야 정치를 잘할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단순히 정치 낭인이 아니라 확실히 자기 분야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된 후 정치를 시작하고자 했습니다. 전쟁터나 다름없는 서초동 변호사 시장에서 제가 일해온 분야의 지식과 경험을 정리한 전문 서적을 여러 권 내고 10년 이상 활동하면서 어느 정도 전문성을 확보했습니다. 앞으로 건설 부동산 정책 및 입법 분야에서 제 능력을 발휘해보고자 합니다.”
인생 2막을 정치인으로 열겠다는 그의 포부는 계속되고 있는 중이다. 현재 그는 국민의힘 중앙당 윤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된 상태다. 그의 입장에선 고향인 부산에서 치러지는 오는 4월 7일 부산시장 보궐 선거에 대해 할 말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전임 부산시장의 불미스러운 일로 갑자기 치르게 된 보궐선거입니다. 여당은 자기들의 당헌 당규에 따라 보궐선거 후보를 내지 말아야 합니다. 야당은 1년 정도 짧은 기간의 임기임을 감안해, 부산 시정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그동안의 업무 공백을 신속히 안정화할 수 있는 후보를 내야 합니다.”
부동산 시장은 2021년에도 불안정할 것
2020년 부동산 시장은 다사다난했다. 정부의 과도한 시장 개입이 사실상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이어졌고 결국 이를 보완하기 위해 24번째의 추가 대책을 내놓으면서 응급 대응을 양산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원 변호사에게 올해 부동산 상황은 어떨지 물어봤다.
“여전히 국토교통부 장관 내정자는 공급 확대를 할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경기 침체로 내수는 줄고 산업 투자는 활성화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중의 유동성은 많고, 그 유동성이 빠져나갈 부동산의 공급이 없기에, 부동산 시장이 쉽게 안정화되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그는 또한 최근 정국의 화제인 검찰 개혁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였다.
“검찰 개혁의 본질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입니다.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검찰을 조종하여 검찰권을 행사해왔다는 의혹에서 자유롭지 못하기에 검찰 개혁의 열망이 있는 것입니다. 윤석열-추미애의 갈등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운 검찰이 아닌 권력에 굴종하는 검찰을 만들기 위한 작업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청와대와 법무부 장관의 폭주를 보면 검찰 개혁이 무엇이 되어야 하는지 자명합니다. 우선 검찰총장의 임기를 보장해야 하고, 검사징계위원회의 자의적인 구성을 막아야 하며, 검찰총장의 인사권도 보장해야 합니다.”
이제 40대 중반. 인생으로 보면 중년이지만 정치인으로선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 변호사는 과거와 지금의 자신이 조금은 달라졌다고 본다.
“옛날에는 뭐든지 잘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제는 잘할 수 있는 일과 잘할 수 없는 일을 구분하려고 합니다. 지금 무엇을 잘한다는 것은 단순히 능력과 적성만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경험까지 녹아 있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그 고생과 경험을 인정하기에 반대로 ‘잘함’에 대한 선망이 없어졌고, 제 자신이 무엇에 더 집중해야 하는지 분명해졌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만들고, 그 의견을 설파할 때 사람들의 지지를 얻는 과정 등 무엇 하나 쉬운 것이 없었다고 말한다. 현실과 이상의 조화는 끊임없이 지혜와 용기를 요구한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낙선과 공천 실패는 말도 못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경험입니다. 인지도를 만들기 위한 쉬운 길의 유혹으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나 한 정치인의 뜻이 세상 사람들에게 적용된다는 그 무게감을 인식한다면, 이런 힘든 과정은 당연하다는 생각도 듭니다.”
그는 정치는 수학의 미적분과 같다고 말한다. 그동안 경험하고 배운 모든 것들이 정치를 하기 위해 준비해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제2의 인생, 정치인으로서의 삶을 생각하면서 상당히 길고 먼 길까지 각오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인생 2막의 성공률을 높이려면 자신이 일평생 해온 업무 범위 내에서 가장 새로운 일을 찾아 사회적 가치에 무게중심을 두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낙숫물이 바위에 구멍을 내듯, 완벽한 이상향이 아니라 과거보다 발전된 미래를 만든다는 생각으로 부단히 노력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다듬고자 합니다.”
절친한 친구 사이, 우애 좋은 형제자매의 로망. 그림 같은 집을 짓고 함께 사는 일이다. 꼭 그리 살아보자 약속을 했어도 지내다 보면 관계가 소원해질 수도 있고 누군가는 멀리 떠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꿈만 같은 상상을 현실로 만든 사람이 있다. 경기도 여주에 모여든 세 친구, 서울시 은평구 한옥마을에 둥지를 튼 삼남매. 이들의 집을 설계한 건축사 대표를 만나 집 짓기 이야기를 들어봤다.
사진 제공 요앞건축사 사무소, 삼공사건축사사무소
◇ 세 친구, 럭셔리하면서도 소박하게
요앞건축사사무소 김도란·류인근 대표
남한강이 잔잔히 흐르는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내양리에 중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던 세 사람이 지은 집이 있다. 418㎡의 땅에 이들 부부가 사는 집 세 채와 공동생활을 위해 지은 커뮤니티 돔 한 채가 길게 들어서 있다. 같이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했던 이들은 종종 귀촌해서 함께 살자고 했다.
김도란 대표 세 분이 오랜 친구이고 지금 60대 중반입니다. 공무원 생활과 개인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곧바로 집을 지었어요. 친구들이 커뮤니티를 형성해서 귀촌한 케이스죠. 여주에는 아무런 연고도 없어요. 10여 년 전에 남한강에 놀러갔다가 풍광에 반해서 매물로 나온 땅을 즉시 매입했답니다. 세 분이 3필지를 샀어요. 공동소유입니다.
2015년 설계를 시작해 2016년에 완공된 세 친구가 사는 집. 건축주 3명과 그들의 아내까지 총 6명. 서로 의견을 조율하다 보면 작은 잡음이 생기곤 하는데 그런 일은 없었을까.
김 대표 없었어요. 구체적인 계획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같이 살자! 처음에는 건물 한 채 지어 함께 살겠다는 생각만 있었죠.
류인근 대표 미팅하러 여섯 분이 함께 오셔도 남편들은 빠지셨어요. “나는 뭐만 있으면 돼!” 이러고 세 분이서 당구 치러 갔다가 한두 시간 후 사무실로 들어와서는 “집에 가자” 그러기도 했어요.(웃음) 아내들이 대부분 아이디어와 의견을 냈습니다.
디자인이 나오기까지는 크게 세 번 정도 방향을 틀었다. 집을 길게 붙여도 보고, 특히 집 방향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다. 방향이 잡히고 난 뒤에는 세부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류 대표 집 방향이 사실 좀 문제였습니다. 남한강이 북쪽이거든요. 거실에서 강을 바라보느냐. 방에서 강을 바라보느냐가 관건이 됐습니다. 결국 거실에서 북쪽의 강을 보는 걸로 결정을 내렸어요. 대신 천장에 큰 창을 달아 직광이 들어올 수 있게 설계를 했습니다. 천장을 그렇게 처리하니 남쪽의 빛이 꽤 많이 들어오더라고요. 침실에서 보는 풍경도 좋아요. 논이 보이는데 사시사철 바뀌는 모습이 아름다워요.
세 친구가 구상했던 집은 죽을 때까지 살아야 할 공간이었다. 자연스레 시니어가 살아가기에 불편함이 없는 집을 건축하게 되었다.
김 대표 노년을 위한 집이기 때문에 100㎡ 규모의 단층으로 설계했어요. 다락도 있는데 주로 자녀가 방문할 때 사용합니다. 기본적인 공간은 1층에 다 있어요. 동선을 긴밀하게 연결했고 구성도 콤팩트하게 처리했어요. 사실 이 집은 더 먼 훗날 노년의 삶을 위해 만든 공간입니다. 지금은 아직 젊잖아요. 손주들이 자주 놀러 오는 모양입니다. 아이들이 오면 공간이 좁게 느껴질 수도 있는데, 북적거리고 좋다 하더라고요.(웃음)
세 채의 집 형태는 모두 같다. 똑같이 만드는 것이 목표이기도 했다. 같은 액수의 돈을 투자해서 진행을 했기 때문에 개인의 의견이 반영되면 공사비의 균형이 깨질 수도 있어 미리 합의한 사항이었다.
류 대표 실내 건축에 대한 의견은 별다른 게 없었는데 바깥 환경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었습니다. 텃밭과 관련해서는 구체적이었어요. 커뮤니티 돔 뒤에는 부뚜막과 장독대를 놓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옆에는 황토방을 만들고, 손주들이 와서 놀 수 있게 수돗가에 수영장 기능을 할 만한 공간을 넣어 달라는 주문도 받았어요.
김 대표 커뮤니티 돔도 만들었어요. 남편들은 여기에 전용 당구장을 만들고 싶어 했어요. 아내들은 밥 같이 먹는 공간이 되길 바랐고요. 그런데 당구대 설치는 사실 아내들이 더 원했어요. 남편들이 밖으로 나갈까봐요.(웃음) 나가서 술 먹으면 운전해서 오기도 어렵고, 걱정이 되잖아요. 함께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오픈형으로 만들었어요. 손님이 오면 잘 수도 있어요. 폴딩 도어를 설치해 날씨 좋은 날은 활짝 열어놓아요.
◇ 삼남매의 집 Privately, But Together
삼공사건축사 사무소 김덕호·윤효중 소장
어린 시절의 좋은 기억을 간직한 삼남매가 함께 살기 위해 집을 지었다. 북한산 국립공원 능선이 한눈에 들어오는 서울 은평구 진관동에 들어선 그들의 집. 완공한 지는 올해로 1년을 갓 넘겼다. 진한 회색 벽돌로 지어진, 현대적인 감각의 건물이 보인다면? 바로 삼남매의 집이다.
김덕호 소장 모두 50대이시고 1남 2녀 삼남매입니다. 이분들 중 둘째가 학교 선생님인데 방학기간을 활용해 저희와 의견 조율을 했습니다.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아직 결혼 안 한 여동생이 있다고 했어요. 삼남매가 같이 산다고 해서 처음에는 의아했습니다. 그런데 평소에도 자주 만나 식사도 하고 술도 한잔하고 노래방도 같이 가고 정말 가깝게 지낸답니다. 우애가 깊어 보였습니다.
2017년도에 시작해 설계 6개월, 시공 후 완공까지 9개월이 소요됐다. 430㎡ 규모의 땅에 지은 2층짜리 건물 내부에는 방 8개, 주방 3개, 화장실 6개가 들어섰다. 첫째와 둘째가 함께 쓰는 공용 대문이 있고, 미혼인 막내 동생은 대문을 따로 냈다. 특별한 공간은 오빠의 집 욕실에 마련된 건·습식 사우나. 집에서 사우나도 하고 찜질도 즐길 수 있는 공간 마련은 내가 살 집을 직접 짓는 거라 가능했다.
김 소장 우리나라 사람들은 아파트 생활을 많이 하기 때문에 시니어라도 집 지어본 분이 드물어요. 처음 지어보는 것이니 당연히 선호하는 스타일도 없죠. 그래서 설계할 때 정말 여러 가지 수를 제시합니다. 대문을 다 따로 만들어보기도 하고요. 집 형태보다는 밀도를 높여 사용하기 편하게 해주는 걸 최우선으로 했습니다.
그려볼 수 있는 도면이란 도면은 다 그렸다. 앞마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해서 원하는 방향에 그려 보여주기도 했다. 그렇게 삼남매의 의견을 반영해 지금의 집이 탄생했다. 삼남매의 추억에서부터 시작됐지만 각각의 이해관계도 작용했다. 출장이 잦아 자주 집을 비울 수밖에 없는 오빠, 오빠의 아들 또한 직장일로 외국에서 생활하고 있고, 둘째의 아들도 유학 중이다. 그래서 남은 가족이라도 가깝게 모여 사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누가 집을 비우면 서로의 집을 돌봐줄 수도 있고, 돌아왔을 때는 가족이 기다리는 푸근한 정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삼남매의 집은 앞의 세 친구 사례와는 다른 점이 있다. 투자 비율도 다르고, 각자의 사생활을 존중해, 함께하는 커뮤니티 공간은 만들지 않았다.
윤효중 소장 이 집은 누가 얼마만큼 투자했느냐에 따라 각각 평수도 다르게 잡았어요. 가장 많이 투자한 오빠는 2층과 다락과 옥상테라스를, 둘째는 1층과 함께 이어진 중정마당을, 막내는 독채를 쓰면서 나머지 귀퉁이 땅을 선택했어요. 오빠와 둘째는 공용 대문을 사용하지만 각자의 현관 스마트키가 따로 있죠.
투자비에 따라 공간을 정확하게 나눴지만 오빠 집에 모여 자주 밥도 먹고 돈독함을 자랑한다.
윤 소장 이 집의 콘셉트가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면서 함께 살자’이거든요. 내 공간에 함부로 들어올 수 없으니 공동 주거의 개념은 아니죠. 둘째도 중정 조경을 따로 했으니까요. 설계 혹은 건축 과정에서 의견 충돌이 있었다면 추진되기 어려운 프로젝트였어요. 둘째 분이 중간에서 상황 정리를 계속했습니다. 형제의 우애가 아무리 좋아도 이렇게 모여 살기는 쉽지 않은데,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세 친구와 삼남매 집에 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세 가지 공통점을 찾아냈다. 첫째, 친하다는 개념 그 이상으로 서로를 존중한다. 둘째, 투자나 재산의 목적이 아닌 노후까지 생각하며 오래 살 집을 지었다. 셋째, 집을 지으면서 의견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다.
처음 마음과 달리 누구든 살면서 서로 부딪칠 수도 있다. 집을 짓기도 전에 의견이 맞지 않아 갈등이 생긴다면 함께 사는 걸 포기하는 편이 낫다. 같이 거주할 집을 꿈꾼다면 각자의 생활 패턴에 대한 디테일한 이해와 존중이 우선 있어야 하겠다.
충북 제천의 한 마을 산자락. 작은 집 짓기 마무리 작업을 위해 모인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수강생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8㎡(5.5평) 규모의 목조 주택을 8일 만에 완성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보니 침실, 욕실, 주방은 물론 작은 거실까지 갖춰져 있다. 일명 자크르 하우스를 통해 미니멀 라이프의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현장이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벌써 300여 명이나 이 학교를 다녀갔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사는 집’이라는 말이 있다. 조부모가 산 집의 빚을 손자 세대에 가서야 비로소 갚는다는 의미다. ‘사는(live) 공간’이어야 할 집이 ‘사는(buy) 물건’으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 “집 한 채 구입하려면 은행의 노예가 되어 인생 절반을 꼬박 바쳐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쏟아지는 현실이다.
어쩌다 현대인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괴상한 꿈까지 꾸게 된 걸까.
다행히도 다른 한편에서는 망치와 못을 들고 자기 삶의 진짜 주인이 되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이들의 선봉장 역할을 자처한 이도 있다.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이하 작은집학교) 교장 문건호(文建晧·53) 씨가 바로 그이다.
살인적인 집값에 지쳐가고 허리케인, 지진 해일과 같은 대형 자연재해로 살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자 사람들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타이니 하우스(Tiny House) 열풍. 이동식 초소형 주택인 타이니 하우스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보다 빚을 지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매력도 크게 작용했다. 바람은 금융위기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미국에서 먼저 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거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스몰하우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학교
작은집학교는 올 연말까지 수강생이 다 찼다. 혹여 예약자에게 사정이 생겨 자리가 나면 추가 모집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문을 연 첫해(2015년)에는 수강생보다 스태프가 더 많았지만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 접수마감 문패를 일찌감치 내다 걸 때가 많다.
수강생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시니어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성 수강생 비율도 10%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 오는 목적은 다 다르지만 8일 동안 이론 강의도 듣고 건물 내·외장, 전기 설비, 도배, 도장, 난방 시공 등 집 짓기의 전 과정을 실기로 배운다. 숙식을 같이하면서 짓는 집. 목조 바닥과 벽체를 만들고 지붕을 올리면서 함께 땀을 흘리다 보면 첫 만남에 서먹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수강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도 동기생 중 누가 집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기꺼이 달려가 품앗이도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자크르 하우스(‘딱 알맞게 좋다’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에서 한솥밥 먹은 사람들의 우정이고 힘이다.
제대로 판 벌인 부부 작가
문 교장은 아내 손정현(孫禎賢·51) 씨와 학교에 마련된 11㎡(3.4평)짜리 집에 살면서 강의도 하고 수강생들 밥도 챙겨주고 시시콜콜한 정도 나눈다. 이곳에서 부부는 ‘작가님’으로 불린다. 알고 보니 문 교장은 홍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했고 아내도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 자신들도 건축의 길에서 환상의 호흡을 자랑할 줄 몰랐다.
“젊었을 때는 작품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했어요. 공연 무대장치, 광고 세트장 등 손기술로 가능한 일들은 다했죠. 그러다가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크게 망했습니다. 빚이 5억 깔려 있으면 3억짜리 일을 수주해서 돌리는 식으로 무리하게 운영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어린 딸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게 괜찮나?’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밤낮없이 일을 해도 빚만 늘어나는 사업에 회의감도 들었고요. 접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당장 손을 떼면 빚만 떠안게 되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어요. 결국 고민 끝에 접었죠.”
이를테면 자발적 파산이었다. 그 후 부부가 힘들게 마련했던 집은 전셋집에서 월셋집으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지인이 내어준 반지하 방이었다. 급기야는 쌀 살 돈도 없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그 시절 아내가 시집살이를 좀 했다고 문 교장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손 작가는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저희를 많이 헤아려주셨죠. 그래도 여자들에게 시집이 편한 곳은 아니잖아요. 시부모님도 불편하셨겠죠. 방 한 칸 내어주셔서 1년 정도 살았는데 죄송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과수원 한쪽에 우리 세 식구 지낼 수 있는 조그만 집을 한번 지어보자 했어요. 곧바로 시동을 걸었죠. 둘 다 실패를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때는 돈 한 푼 없어 누구한테 공사를 맡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어요.”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풍족했다. 부부는 작은 집을 지으며 미대 출신자들답게 맘껏 솜씨를 겨뤘다. 창 하나의 위치를 두고 즐거운 실랑이도 벌였다. 그렇게 방 두 칸에 화장실과 거실이 딸린 15평짜리 집이 완성됐다. 두 사람이 손수 지은 첫 번째 집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이 밀려오는지 손 작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첫눈이 펑펑 내렸던 날이었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흰 눈에 덮인 산과 들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눈 위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보는데 가슴이 마구 뛰더라고요. 그 순간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제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풍경이에요.”
자연 속에서 살며 무엇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알게 된 부부는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접었다. 물론 그 뒤에도 몇몇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충북 제천으로 오면서 시골살이는 더 깊어졌다. 귀촌한 사람들과 건축 협동조합 법인을 만들었다가 공중분해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작은 집 짓기 운동을 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보자고 프로그램을 짜고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심신이 고단했어요. 빚도 또 졌고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절망스럽지는 않았어요. 건축 일 하면서 자기 집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제대로 읽었거든요. 저로서는 아주 중요한 해답을 얻은 셈이죠. 작은집학교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마침 지인이, 조합 만들 때 짜놓은 프로그램이 아깝다면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한번 넣어보라는 조언을 했고,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전을 해봤다. 그 결과 1기생 수강생 8명 모집. 그는 뜻밖의 화답에 놀라 부랴부랴 교장이 되었다.
작은 집에 담은 큰 철학
작은집학교에서는 주문을 받아 집 짓는 일이 없다.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관계는 갑을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건축,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하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문 교장의 목표는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야 집 짓는 과정이 행복하다는 지론을 펼친다.
“집을 짓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로망을 펼치는 일이에요. 여기에 그 꿈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겠다는 계산도 끼어듭니다. 반면 건축가는 무조건 이익을 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게 되는 이 필드에선 어느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 합니다.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도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클라이언트는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뒤늦게 ‘창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저기 있네’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곤 한다. 문 교장은 집을 직접 지어보지 않으면 이런 분쟁은 영원히 피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작은집학교가 클라이언트를 원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이 지은 집은 수강생들에게만 판매가 됩니다. 집을 가져가는 사람은 동기생들과 땀 흘리며 지은 집이라서 내부 구조를 잘 이해하고 어디가 고장이 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관리는 이제 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집 짓기의 전 과정을 단기간에 가르쳐주는 곳은 없어요. 여기 오면 다들 빡빡한 작업량에 힘들어하지만 수업료와 노동이 아깝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내 집 마련의 계획을 작은 집으로 수정한 사람도 꽤 돼요.”
그러나 궁금해졌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어도, 세컨드 하우스를 구입한다 해도, 땅이 없으면 장밋빛 환상일 뿐이지 않을까. 문 교장은 괜찮은 정보 하나를 귀띔해준다.
“시골에는 10년, 20년 임대 가능한 토지들이 있어요. 땅을 살 때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니까요. 일단 마을 이장님을 만나 빌릴 수 있는 땅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아요. 요즘은 농사짓기 힘들어서 그런지 몇 년간 내주고 월세 받는 걸 더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1년에 100만 원 정도 연세로 계약하면 이동식 주택 가져다 놓고 살 수 있어요. 그렇게 살다가 정들면 그때 가서 땅을 사도 늦지 않아요.”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동안 문 교장에게서 은퇴자들의 열정과 꿈, 잠재력, 융복합, 작은 집 마을 등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바탕 고민한 시간들이 전해주는 통찰의 메시지다. 그 속에는 기발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우리 사회가 시니어의 에너지와 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워요. 은퇴 후 여기 오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가치 있는 일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기회가 되면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저는 이곳에서 집 짓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선순환 관계로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젊은이들 집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그 해결 방안들도 같이 모색해보고요. 작은집학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적극 해나가겠습니다.”
젊은 시절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가 5평도 안 되는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2년 여를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언제까지 집 짓는 즐거움을 목수에게 넘겨줄 것인가?” 일단 그 즐거움부터 되찾아 와야 할 것 같다. 물론 교장선생님과 함께.
요즘 감성도 아니고 ‘갬성’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감성의 신조어로 ‘감성+추억’쯤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아날로그적 향수가 그립다면 나주여행을 떠나보자.
나주는 천년 고도인 도시다. 고샅길(시골 마을의 좁은 골목길)을 따라 나주 시내를 걸으며 갬성 나주와 마주할 수 있다. 뜨거운 국물을 여러 번 붓는 토렴이라는 과정을 거쳐 75℃의 먹기에 알맞은 온도로 나오는 나주곰탕과 입천장이 훌러덩 벗겨질 정도로 톡 쏘는 영산포 홍어는 나주여행의 특미다.
나주여행의 요즘 테마는 쉼이다. 특별한 잠의 추억을 만들고 싶다면 한옥게스트하우스에서의 하룻밤을 추천한다. 1939년 나주 근대문화를 2017년에 마중한 카페이자 갤러리, 게스트하우스인 ‘39-17마중’에서 한옥의 창호가 자연과의 소통임을 느끼며 잠을 잔다. 두 겹의 미닫이 문 너머에 금목서, 은목서, 느티나무, 회화나무 잎이 흔들리고 대숲을 지나는 시원한 바람소리가 밤새 소곤거린다.
난파고택으로 불렸던 이곳은 동학농민혁명을 막아낸 공로로 해남군수에 제수된 정석진의 큰 아들 정우찬이 살았던 집터다. 정우찬의 손자인 정덕중이 1939년에 어머니를 위해 다시 집을 지어 드리며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는데 전남의 유일한 건축가였던 박영만이 설계하고 대목 김영창이 시공하였다.
한·일·양 건축의 좋은 점을 취합한 목서원은 내부 창호, 온돌은 한식, 붙박이 수납장과 집안을 지탱하는 뼈대와 구조는 일본식, 여기에 서양의 방갈로 느낌까지 가미하였다. 목서원은 건물 앞과 옆에 100년이 넘은 금목서, 은목서 두 그루가 자라고 있어서 최근에 붙여진 이름이다. 어머니가 쓰실 공간에 대한 편리성과 가옥의 멋을 함께 추구하고 있어 이채롭다. 게스트하우스로 운영되는 방에는 사용하던 소품들이 그대로 남아있고 일본식 수납장을 열면 천연염색 소재를 사용한 이불이 정갈하게 개켜있다.
언덕 위에 아담한 한옥 난파정도 게스트하우스로 이용되고 있다. 난파(蘭坡)는 정석진의 호로 ‘난이 가득 피어있는 가파른 언덕’을 의미한다. 난파정은 본래 제당으로 지어졌다. 정우찬이 아버지 정석진을 추모하기 위해 1915년에 지은 건물을 복원하고 재단장 하였다. 나주천이 내려다보이는 볕 좋은 남향에 위치한 난파정은 대나무 숲에 둘러싸여 있어 멋스러우나 금성산을 끊어내듯이 광주, 목포간 고속화 도로가 지나고 있음이 옥에 티다.
예전 쌀 창고자리였던 곳을 개조한 카페 바로 옆에는 나주향교가 있다. 카페에 앉아있으나 감각적으로는 옛 나주의 한가운데에 홀연히 떨어진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된다. 마당 곳곳에는 야외 테이블이 놓여있다. 금목서 그늘 아래에서 시원한 음료 한 잔을 앞에 두고 바람을 느낀다. 시간이 현재와 과거를 자연스럽게 넘나들고 마음은 한껏 여유롭다.
옛것을 최대한 살려서 복원한 목서원, 난파정과 나주향교, 석류꽃 가득 핀 작은 골목길들을 걸으며 만나는 금성관, 서성문까지... ‘갬성 나주’에 반하지 않을 수 없다.
무더운 여름의 한복판 7월, 시원한 음료 한잔하며 읽을 만한 신간을 소개한다.
◇ 박막례, 이대로 죽을 순 없다 (박막례, 김유라 공저ㆍ위즈덤하우스)
71세 유튜브 크리에이터 박막례와 할머니의 행복한 노후를 응원하는 손녀 김유라가 함께 쓴 에세이다. 7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우여곡절을 겪으며 살아온 박막례의 인생 전반전부터, 유튜브 크리에이터로 전향한 뒤 펼쳐진 인생 후반전까지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어느 날 치매 위험 진단을 받고 온 박막례를 ‘그대로 죽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생각한 손녀는 다니던 직장까지 그만두며 할머니와 호주 여행을 결심한다. 그렇게 시작된 동행이 두 사람의 인생에 전환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들의 여행기 영상은 조회수 100만을 훌쩍 넘겼고, 이를 계기로 박막례는 전 세계인이 주목하는 차세대 유튜브 스타로 떠올랐다. 박막례는 “부침개처럼 인생이 확 뒤집혔다”고 호쾌하게 말하지만, 책을 읽다 보면 70여 년 인생을 충실히 살아온 그녀 스스로가 만든 결실임을 깨닫게 된다. 더불어 손녀 김유라가 관찰한 할머니의 삶에 대한 애정과 존경심을 느낄 수 있다.
◇ 할매의 탄생 (최현숙 저ㆍ글항아리)
‘할배의 탄생’의 저자 최현숙 구술생애사 작가가 이번엔 대구의 한 산골짜기 마을에 사는 할머니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다. 농촌, 젠더, 노년 등 다양한 이슈에 대해 이야기한다. 사투리와 정제되지 않은 언어까지 고스란히 담아냈다.
◇ 100세 철학자의 인생, 희망 이야기 (김형석 저ㆍ열림원)
김형석 연세대학교 명예교수는 행복한 삶의 중요 조건으로 ‘성장하는 인생’을 꼽았다. 그런 그가 제안하는 성장하는 삶 속 진짜 행복을 발견하는 방법에 대해 ‘인생의 조건’, ‘행복한 인생을 위하여’ 등 총 4부로 나눠 설명한다.
◇ 나만의 시크릿 홈카페 (예나 저ㆍ레시피팩토리)
레시피 제공뿐만 아니라 홈카페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고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다. 홈카페 추천 도구, 식재료, 식기를 비롯해 예쁜 얼음 만드는 법, 풍성한 우유 거품 내기 등 저자만의 다양한 노하우를 전수한다.
◇ 전원주택 짓고 즐기며 삽니다 (정문영 저ㆍ청림Life)
은퇴 전 전원생활의 로망을 이룬 저자가 경험을 통해 터득한 좋은 땅 보는 법, 건축주가 알아야 할 예산 설정법, 시공업체 선정기준 등을 공개한다. 전원주택 구매자를 위한 99가지 체크리스트 등 유용한 정보도 함께 제공한다.
농어촌 지역의 빈집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것은 고령화와 인구감소 등과 직결되어 있다. 농어촌 주택이 노후화 되면서 매매나 임대가 되지 않아 이로 인한 쓰레기 무단 방치, 화재, 범죄 등의 위험에 노출되어 농어촌 환경문제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에 따르면, 전국 빈집현황 중 농어촌 읍·면 지역의 빈집은 읍 지역 14만 1000호, 면 지역 27만 3000호 등 총 41만 4000호로 집계됐다. 한국국토정보공사는 ‘대한민국 2050년 미래 항해 보고서’에서 2050년 전국 빈집 수는 300만 호를 넘어설 것이고, 전체 10채 가운데 1채가 빈집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 국회입법조사처 ‘빈집 현황과 정비를 위한 정책과제’ 보고서에 따르면 토지 이용 효율성 저해와 쓰레기 무단 투기 등 주변 생활환경 악화, 범죄·탈선을 유발하는 우범지대로 전락하게 될 가능성과 화재 위험성 등 때문에 빈집을 사회적인 문제로 꼽았다.
이렇게 관리의 부재로 생긴 문제가 커져가고 있어 정부나 지자체의 대책마련과 효과적 정책실행이 시급한 실정이다. 특히 빈집 문제가 심각한 곳으로 제주도를 꼽을 수 있는데, 2016년 기준 제주지역 빈집은 2만 1469호인데 2015년보다 16.2% 늘어났고 전체 주택의 10.4%에 해당한다. 제주특별자치도관광협회 통계에 따르면 연간 1500만 명으로 상징되는 관광객이 밀려들고 있고, 제주도는 관광사업을 바탕으로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현재 제주에는 양질의 숙박시설이 부족하기에 좀 더 발전적이고 효율적인 관광휴양산업을 위해서는 확실한 솔루션이 필요한 시점에 직면하였다.
빈집 활용한 지역 경제 활성화
이러한 현실 속에서 빈집을 새로운 시장으로 개척해나가면서 부가가치와 일자리까지 창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업체가 있어 화제다. 바로 한국형 주택공유 서비스를 제시한 협동조합덤하우스 이사장과 SU그룹㈜ 대표이사인 이태희 대표가 그 주인공이다.
이태희 대표는 2016년 8월에 제주시 일주동로에 협동조합 법인 덤하우스를 설립, 국내 최초로 빈집에 공유경제 체제를 도입하여 관광지 숙박난 문제를 해결하였고, 빈집과 청년일자리를 동시에 해결한 혁신적인 주택공유 서비스로 이용객들에게 엄청난 호응을 얻고 있다.
덤하우스는 집주인이 상시 관리할 수 없는 빈집을 상호 연결하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으며, 덤하우스에서 빈집을 임차하거나 매입하여 리모델링 후 새로운 숙박공간으로 제공하는 방식이다. 덤하우스는 1998년도의 IMF 관리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일어난 실천운동, 이른바 ‘아나바다 운동’을 뛰어넘은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을 전개하며 국민적인 관심을 받은 바 있는 이태희 대표가 2014년 특허출원한 브랜드다.
덤하우스는 이 대표가 전개한 ‘온 국민 고쳐 쓰기 운동’과 추구하는 가치가 일맥상통한 브랜드로서 지역 특성을 그대로 살려 빈집을 재발견하는 과정을 갖추면서 초가집, 판잣집 등의 우리 고유의 모습을 지키고 갖춘 이른바 ‘빈집을 재탄생시키는 구조’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초가뿐만 아니라 판잣집도 우리 고유 집인데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는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무조건 철거할 것이 아니라 살릴 수 있는 주택은 살려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빈방’이 아니라 ‘빈집’의 재발견
자신의 주거지 일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숙박공유 서비스 에어비엔비는 숙박 제공자와 이용자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구조이지만 덤하우스는 ‘빈방’이 아니라 ‘빈집’을 대여하여 무인시스템으로 출입이 자유롭고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며 사생활 침해를 받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덤하우스의 소유주는 토지와 건축물의 실 소유로 인한 부가가치를 얻을 수 있고, 내 땅과 내 집을 내 맘대로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덤하우스만의 특화된 면이라 할 수 있다.
이태희 대표는 “전국의 빈집을 지역별 특성을 살려 복원하고 각 지역을 찾는 다양한 방문객의 숙소뿐 아니라 체험공간으로 활용함으로써, 빈집으로 인한 사회적 문제가 해소가 되고, 빈집 소유주에게는 수익을 발생하게 한다. 더 나아가 지역경제의 활성화로 새로운 일자리 창출과 지역문화를 홍보하는 것이 협동조합덤하우스 설립 목적”이라고 밝혔다.
결국, 빈집 소유주에게 안정적인 임대수익을 보장하고, 운영자는 필요한 시설을 완비해 이곳을 찾는 이용객에게 합리적인 가격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유지 및 관리는 전문 업체가 맡고, 지역주민에게는 현장관리 일자리를 제공하기에 덤하우스는 지역경제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는 설명이다. 그 외에 청정의 땅 제주에서 동화 같은 집을 짓고 안정된 고수익을 창출할 수 있다는 덤하우스의 신축마을 사업규모는 현재 제주민속마을 총 13동, 제주민속마을풍차상가 총 6동, 신전과동화두모마을 총 8동, 풍차와동화 총 6동, 신전과동화금악마을 총 10동이 진행 중이다.
덤하우스는 집을 빌려주는 임차인 입장에서는 집이 관리 되어 좋고, 집을 빌리는 이용객 입장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집 전체를 빌릴 수 있어 일석이조(一石二鳥)의 효과를 얻을 수 있다. 더군다나 숙박기간 내 1가구 1차량 무상지원과 커피·음료 무제한 무료제공은 물론 여러 가지 오락시설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이러한 덤하우스를 이용하여 혜택을 누리기 위해서는 게스트 또는 호스트 자격으로 협동조합에 가입하고 협동조합의 조합원이 되어야 한다. 일단 조합원이 되면 조합이 추진하는 모든 사업에 참여할 수 있으며 조합이 운영하는 시설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투명성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 마련
이 대표는 “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사업지 활용 토지 확보가 완료되어 있기에 투자방식과 수익구조는 기존 모델과 근본적으로 다르고 메리트가 있다”고 전한다. 보통 부동산투자의 일환으로 집을 두 채 이상 보유하거나 수익형 부동산을 보유하게 되는 경우 실제 사용빈도는 낮고 수익 또한 운영사의 운영능력에 따라 천차만별이라 부도내고 방치되기가 다반사다. 무엇보다 공급과잉으로 언제 분양될지 알 수 없이 장기간 방치되어 있는 미분양주택은 사회적 문제가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이태희 대표는 “덤하우스로 활용하면 이렇게 불안하게 소유하고 있는 주택들도 수익형 주택으로 바꾸어 분양하는 데 탁월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며 “세계 100여 개국의 수백 개 모델하우스 중 본인이 주택을 선정하고 토지와 건축물을 구입하면 연 숙박률 50%에도 10%의 수익을 얻는 덤하우스의 주인이 되는 구조”임을 강조했다.
협동조합덤하우스의 사업방식은 첫째, 협동조합 분양은 일반 분양보다 대략 20% 저렴하다. 조합이 시행사 업무를 맡기 때문에 토지매입에 대한 대출이자와 건설사 마진, 마케팅 비용과 같은 각종 부대비용을 줄일 수 있어 일반 분양보다 15~20% 정도 가격이 저렴하다. 둘째, 투명성을 높이며 조합원의 안전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지역주택조합 사업은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 매입이 관건인데 이를 100% 확보하기가 쉽지 않은 단점이 있다. 하지만 “협동조합덤하우스는 이미 사업지로 활용할 토지를 사전에 확보했기에 사업에 지장이 있거나 추가로 비용이 발생하는 일이 없다”고 이 대표는 밝혔다. 마지막으로 덤하우스에 참여하려 해도 소유하고 있는 빈집이 없는 경우에는 덤하우스가 기획하고 설계, 시공하는 여러 테마하우스를 분양받아 덤하우스에 등록하는 방법이 있다.
SU그룹㈜ 부동산 주요사업인 11개 마을의 제주세계민속마을은 9만 5000㎡ 규모의 신축 덤하우스다. 상상과 고대의 세계마을이 조성된 1차 마을 사업으로, 파키스탄 레드씨 그룹에게 투자의향서를 발송하였고 결국 MOU를 체결, 진행하면서 마침내 2018년 4월 제주세계민속마을 건설공사 프로젝트에 2억 달러 계약을 성사시켰다고 한다. 또 중동국가의 요청으로 세계민속마을 2차 10개 마을의 사업을 추진하면서 사우디 3억 달러 세계마을 사업 투자유치를 목표로 매진하고 있다.
이 대표는 “제주시 구좌읍 행원리에 초가와 기와집이 혼재하는 마을을 완공하고, 한경면 두모리에는 신전과동화라는 동화 속 마을이 진행 중이며, 한림읍 금악리에는 풍차마을이 시작되었고 이후 콜로세움인제주, 피라마드마을, 기차마을, 만리장성, 아라비안나이트 등의 콘셉트도 추후 덤하우스로 등록될 예정이다”고 밝혔다.
아울러, 이태희 대표는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궁극적으로는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적으로 덤하우스를 확대하여 조합원들이 전국 어느 지역을 가든 편리하게 해당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만들겠다”는 계획을 내비쳤다.
올해 제주도에 ‘빈집 숙소’를 30호까지 늘리는 목표
마을 특화사업을 구축하여 경제적 부가가치와 일자리 창출을 도모하고 이를 통해 지역경제 발전에 이바지하고자 하는 이태희 대표는 그 일환으로 지역별 청년이장제도를 도입해 청년들이 운영, 관리하는 덤하우스 설립을 지원하고, 지역특산품을 비롯한 다양한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지역 경제 활성화에 이바지하는가 하면, 관광정보지 ‘하하코리아’의 지역별 신문 발행으로 정확한 지역 정보를 제공한다.
또 지자체로 하여금 덤하우스를 관리하는 청년들에게 기본급여로 청년실업수당을 지원받게 하는 것은 물론, 덤하우스의 운영으로 발생되는 수입은 조합의 배당금을 제외하고 청년들이 자체적으로 관리하도록 하는 등 지역발전을 위하여 다양한 방안을 계획 준비 중에 있다.
협동조합덤하우스 이태희 대표는 “공공의 이익과 협동조합 조합원의 권익을 위해 양심적인 삶을 살아왔고 한국형 공유경제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앞장서고 있지만 정부나 지자체가 덤하우스 사업 이해부족에서 오는 편견과 배척을 통한 여러 가지 제도적 불리함이 무척 힘들다”며 “정부와 지자체의 인식 개선과 적절한 정책적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00세 시대라고 한다. 과연 100세를 산다는 것은 모든 이에게 축복일까. 저출산과 맞물린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여러 면에서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주거 문제도 마찬가지다. 라이프사이클이 바뀌면서 시니어들에게 집은 더 크고 빈 공간이 된다. ‘노후에 어디서 살고 싶은가?’라는 설문에 많은 시니어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살고 싶다’는 답을 한다. 살고 있는 집에 정이 든 이유도 있고 지역을 잘 알고 있어 편리한 면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그동안 그 지역에서 살면서 형성한 인간관계를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이다. 아파트는 좀 예외이지만 단독주택이나 빌라에 오랜 세월 살아온 분들은 동네에 친하게 지내는 이웃이 많다. 여러 가지 면에서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계속 사는 것이 편하고 안정적이다. 단독주택이나 빌라 등은 좀 불편한 점이 있으나 집의 구조나 가구 등은 시니어에게 맞게 고쳐나가면 된다.
요즘에는 주택설계 단계에서부터 유니버설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고 있으며 기존 주택의 리모델링도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가족구성원이 줄어들어 혼자 남게 되었을 때가 문제다. 집은 외부와 단절된 공간이 된다. 외부와 단절된 1인 가구가 증가하면서 고독사를 비롯한 많은 사회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 특히 고령자 1인 가구는 더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휴대폰 하나로 집 안의 각종 전자기기가 다 조작되는 스마트홈으로의 진화는 어쩌면 인간을 더 고립시키는 결과로 이어질 것 같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대안으로 서울 지자체마다 ‘한지붕 세대공감’이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아파트의 남는 방을 대학생들에게 주변 시세보다 저렴하게 임대하도록 연결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시니어들은 빈방을 지속적인 수익 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다. 방 수리비로 100만 원까지 지원도 해준다. 학생들에겐 주거비 부담이 줄어드는 혜택이 있다. 무엇보다 시니어들이 대학생들과 같이 살면서 세대 간 교류가 가능하다. 그러나 자기 자식과도 소통이 어려운 시대에 이런 관계가 그리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도시에서 계속 살고 싶은 시니어를 위한 주거 유형으로 셰어하우스가 있다. 셰어하우스는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개인 공간과 넓은 공유 공간을 마련해 입주자가 서로 교류하고 나누는 주거 개념이다. 개인 공간으로는 작은 방이 하나씩 있고 거실, 욕실, 세탁실 등을 공유한다. 주방을 공동으로 사용하고 식사는 함께 모여서 한다. 일본에는 이러한 시니어용 셰어하우스가 일반화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는 이제 모색 단계에 있다. 순번을 정해서 식사를 준비하니 시간 여유도 생긴다. 각자 가진 재능을 나누기도 하고 취미생활을 같이하기도 한다. 뜻이 맞는 이웃과 함께 여행을 가기도 한다. 건강에 문제가 생기면 서로 도움을 줄 수 있다. ‘따로 또 같이’를 표방하는 셰어하우스는 타인과 같이 살면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보다 함께함으로써 얻는 이득이 훨씬 많은 주거 유형이다. 서울의 대학가 주변에 학생들이나 직장 여성들을 위한 셰어하우스가 최근에 많이 생겼다.
그러나 많은 장점에도 불구하고 시니어용 셰어하우스는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셰어하우스 공급자들이 시니어를 대상으로 하는 사업을 꺼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그 원인은 시니어들에게 있는 것 같다. 필자가 그동안 많은 시니어 커뮤니티에서 활동해본 경험으로 보면 시니어들이 모여 살기 힘든 이유가 몇 가지 있다. 그중 가장 심각한 문제는 타인에 대한 배려 부족이다. 목소리가 크고 말이 많은 것, 자기주장이 강한 것, 과거의 자랑을 반복하는 것 등도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없는 행위다. 최근에 시니어가 셰어하우스에 입주한다면 어떤 에티켓을 지녀야 할지 지인들과 논의해본 적이 있다. 다음은 그 내용이다.
1 사생활, 사적 공간을 침해하지 않을 것, 너무 늦게 다니지 말기.
2 남의 물품 허락 없이 사용 금지, 컴퓨터, 책도 마찬가지.
3 외부인 들여 재우기 금지, 가족, 친구도 숙박 금지.
4 집 안에서 흡연 절대 금지, 술·담배·마약·도박 금지.
5 자기 집 주변과 주방, 욕실 등 공유 공간 사용 후 청소하기.
6 반려동물 자제, 관리 철저.
7 나이·과거의 지위·경력을 잊을 것, 자식자랑도 정도껏 하기.
8 정치와 종교에 대한 논쟁 금지.
9 어느 정도 복장에 신경 쓸 것, 내의·등산복 차림 곤란.
10 서로 의논해 만든 규약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지킬 것.
열 가지 내용 모두 그리 어렵지 않은 에티켓이다. 그러나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부족한 사람들에겐 어느 것 하나도 쉽지 않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시니어가 많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살아온 복잡한 도시를 떠나 노후에는 자연과 함께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막상 도시를 떠나려 하면 두려워지고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해진다. 토지를 구입하는 일도 어렵지만 설계하고 집짓는 일도 복잡하다. 토지 사기꾼도 많고 엉터리 시공회사도 많다. 건축허가가 불가능한 땅을 교묘하게 포장해서 팔기도 하고 남의 땅을 조작해서 팔기도 한다. 엉터리 공사로 지은 지 몇 년 만에 하자투성이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칫 실수하는 날에는 평생 모은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 어렵사리 전원생활을 시작하고도 원주민들과의 갈등이 생기면 전원생활을 유지하기 어렵다. 도시로 유턴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그렇다면 시니어를 위한 전원마을은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할까. 우선 도시의 편리를 일부 공유할 수 있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특히 의료시설은 시니어에게 필수 시설이다. 규모는 최소 300호 이상으로 입주자들의 집은 작게 하고 공동 시설인 커뮤니티 시설을 크게 하는 개념이다.
이는 셰어하우스에서 개인 공간을 최소화하고 공유 공간을 크게 하는 개념과 똑같다. 집의 유형은 단독이거나 빌라, 타운하우스 등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게 한다. 집에서 식사를 할 수도 있고 커뮤니티 시설에 모여서 함께할 수도 있다. 취미생활을 같이하기도 하고 재능나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한다. 식재료는 대부분 주민들이 재배해서 사용한다. 이러한 코하우징 모델이 지속가능하려면 젊은 사람들이 같이 살아야 한다. 젊은 층을 유치하려면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방문객이 많아지면 여러 가지 일자리도 가능해진다. 집과 마을이 아름다워서 꼭 방문해보고 싶고 살고 싶은 곳이라는 소문이 나면 방문객이 자연스럽게 지속가능한 마을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이상적인 마을이라 해도 서로 관계 형성이 제대로 안 된다면 같이 살기 어렵다. 결국 함께 사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러나 내 마음에 맞는 타인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살기로 마음먹었다면 나를 변화시켜야 한다.
>>손웅익 동년기자
(주)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주)아쿠아건축사무소 대표 등을 역임했다. 현재 시니어주거아카데미 앙코르스쿨 ‘주거분야’ 전문강사,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동년기자, 실버산업전문가포럼 부회장, 미술심리 상담사 등으로 활발한 인생 2막을 설계 중인 건축가이자 수필가.
공무원 시험 열풍이다. 시험은 거의 고시 수준이다. 공무원 시험에 도전하는 젊은이들은 해가 갈수록 늘고 있다. 노후가 보장되지 않는 나라에서 그나마 안정된 직업으로 인기가 높은 것이다.
공무원은 국가의 녹을 먹고 사는 사람이다. 즉 그들에게 월급을 주는 사람은 국민이라는 이야기다. 그런데 과거에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공무원이 많았다. 하위직, 고위직 가리지 않고 민원인인 국민 위에 군림하는 공무원이 많았다. 선출직 공무원들은 선거기간 동안 가장 선량한 얼굴로 포장한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사하고 악수하고 친한 척한다. 피해서 지나가려 하면 쫒아와서까지 아는 체한다. 그러다가 당선이 되면 다음번 선거까지는 얼굴을 볼 수가 없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선거철이 되면 또 나타나 귀찮게 한다. 이런 행태를 수없이 봐온 터라 살면서 피부로 느끼는 불편이 없는 선출직 공무원들의 행태엔 별 관심이 없다.
필자는 꽤 오랫동안 건축설계 일을 하면서 소위 갑(甲)질하는 사람들에게 질렸다. 건축주는 그냥 갑이다. 시공자는 건축주에게는 을이지만 설계자에게는 갑 행세를 한다. 가끔은 시공비를 받고 난 뒤 건축주에게도 갑질을 하는 시공자들이 더러 있다. 시공현장 주변의 민원인 아주머니들은 당연히 갑이다. 그들에게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문제는 공무원이다. 특히 건축과 공무원들 중 갑 행세가 몸에 밴 공무원이 많았다. 자기 업무를 하면서 민원인인 건축사를 쳐다보지도 않고 말대꾸도 잘 안 하는 공무원을 만나면 속에서 화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그러나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면 좋은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그냥 을인 척한다. 상당히 공손한 어투로 재차 관심을 요청 할 수밖에 없다.
좀 오래된 이야기이지만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속에서 불같은 것이 올라오는 사건이 있다. 주택을 설계해 건축허가를 신청했을 때였다. 지금도 그렇지만 건축법 중에 아주 애매한 조항들이 있다. 법규가 자주 바뀌기도 하고 그 많은 사례에 대한 해석을 다 규정해놓을 수도 없으니 최종 판단은 공무원의 재량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다. 그날 주택 건축허가를 접수하러 갔더니 한두 가지 서류 보완을 요청해서 다시 사무실을 왔다 갔다 했다. 두 차례나 사소한 것을 트집 잡더니 세 번째는 입구 구분 면적 계산을 문제 삼았다. 좀 애매하긴 했지만 법적으로나 판례로 봐서 문제될 것이 없는데도 도면을 수정하라고 고집을 피웠다. 트집을 잡기 위한 트집으로 생각되는 순간 더 이상 이성적인 대화가 불가능한 상황이 되었다. 공무원의 보신과 편의를 위해 계속 서류와 도면을 보완해줘야 하는 ‘을’의 인내에 한계선이 왔다. 필자는 두터운 도면 뭉치를 건축과 사무실 가운데로 던져버렸다. 그리고 “건축 때려치운다. 너희들도 가만 안 둔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사무실로 들어와버렸다. 사무실에 도착하니그 건축과 공무원이 허가 처리 다 되었다는 전화를 해왔다고 했다.
설명으로 안 되면 힘으로 해야 된다는 걸 실감했지만 뒷맛이 별로 좋지 않은 허가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권리를 찾을 수 있는 방법도 학습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이런 방식으로 허가를 받은 적이 있다. 필자의 방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으나 갑질하는 공무원에겐 특효약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며칠 전 구청 복지정책과에 갔더니 상담 중에 시원한 오미자차를 내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세상이 바뀌었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은 별명 ‘ 다이소 누님’과 ‘건달’로 유명하다. 2007년 최고경영자로 승진, 현재 장수경영자로 10년째 성가와 성과를 함께 올리고 있다. 인터뷰 당일, 그녀는 살구색 재킷에 인어 스타일의 샤방샤방한 스커트 차림으로 나타났다.
심기석 세일ENS 사장(63)의 별명은 ‘다이소 누님’이다. 등산을 갈 때면 자신의 155cm의 가냘픈 체구보다도 더 큰 집채만 한 배낭을 지고 나타난다. 가파른 산을 올라가면서도 다른 사람에게 짐을 넘기는 법이 없다. 1착으로 올라가 산마루에서 자리 펴놓고 일행들에게 바리바리 싸온 것을 풀어 먹인다. 짧은 일정의 여행에도 그는 거의 이민 갈 태세의 큰 가방을 밀며 나타나기 일쑤다. 그 커다란 산타자루 아니 트렁크에선 구호품(?)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온다. 과일, 홍삼액, 심지어는 플라스틱 소주 컵, 야외 주방도구 일습에서 이쑤시개까지…. 사랑을 퍼주고 나눠주는 선샤인, 아니 문샤인 리더십 덕분에 그의 주변에는 남녀노소가 늘 끊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심 사장이 전통적 의미의 퍼주고 헌신하는 100% 모성형 리더만은 아니다. 그녀의 또 다른 별명은 ‘건달’이다. 바로 건배사의 달인이란 뜻이다. 술자리에선 능숙하게 소맥을 제조하고, 멋진 모습으로 술을 따르는 퍼포먼스를 연출한다. 씩씩한 건배사로 분위기를 선도하는 그녀는 일자리에선 쓴소리를 피해가지 않으며 군기를 세게 잡는다.
심 사장에 대한 조직 내외의 공통된 평가의 핵심은 양수겸장 리더십이다. 호탕한 형님과 따뜻한 누님의 장점을 다 갖고 있다는 것이다. 남자 같지는 않지만 남자처럼 일하고, 여성성을 내세우진 않지만 여성성을 최대한 살린다는 평이다. 심 사장의 양극단 별명 조합처럼 건달 누님 리더십이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어중간한 중성의 평균 타협이 아니다. 상황별로 각각의 장점을 살려 평형을 맞추는 게 심 사장 리더십의 특성이다. 아낌없이 베풀며 모범을 보이되, 돌직구 직언도 아끼지 않는 ‘어른의 품격’을 보여준다. 지인들은 심 사장을 가리켜 요즘 시대에 흔치 않는 ‘어른의 롤모델’이라고 입을 모은다.
‘건달 누님 리더십’은 그녀가 전문건설 설비업계 세일ENS에서 뼈가 굵어 최고경영자에 올랐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건설업은 일반적으로 남성 주도의 업종으로 알려져 있다. 전문 공조업이란 ‘여름엔 얼마나 시원한가, 겨울엔 얼마나 따뜻한가와 관련한 냉난방 배관설비를 건축물 내에 시공하는 사업’을 뜻한다. 거대한 건물 속의 모세혈관을 유지하는 일로서 세심한 손길과 관리가 필요하다.
초창기(1970년대 초반)에 책상 두 개와 직원 세 명밖에 없었던 작은 규모의 회사는 이제 직원 100여 명, 일용근로자 2300명 내외의 튼실한 전문건설 설비업계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재수하던 중 전화나 받는 자리로 잠깐 취직한 회사에서 ‘불독 신세’로 사무실만 지킨다며 찔찔 울던 10대 소녀는 그 사이 60대 초반의 통 크고 손 큰 ‘건달 누님’이 됐다.
원래부터 성격이 담대하고 씩씩했나요?
“아니에요. 환경 탓이 큽니다(하하). 살아남기 위해 변화한 겁니다. 건설업계가 남성 주도 업종이다 보니 여자 관리자는 고사하고 직원조차 드물었습니다. 어느 자리이고 참석하면, 홍일점이란 이유만으로 눈에 띄는 겁니다. 회사 안에서나 밖에서나 직급과 상관없이 ‘한 말씀’을 요청받는 경우가 많았어요. 하다못해 자기소개 인사말이라도 하라고요. 이때 ‘준비 안 해 못 한다’고 하거나 ‘시킬 줄 몰랐다’고 수줍은 척 뒤로 빼면 ‘능력 부족’으로 못나 보이잖아요. 이왕 할 거면 제대로 하자, 기억에 남도록 하자는 생각에 늘 공들여 준비했어요. 저는 여자 후배들 교육시킬 때도 ‘건배사 제대로 하는 법’부터 가르칩니다. 차례가 돌아오기보다 자원하라고 말해줍니다. 또 두루 쓸 수 있는 범용 건배사와 자신만의 특성을 살린 필살기 건배사 두 가지를 준비해두라고 강조하지요. 각자 맡은 분야에서 실력은 노력하면 되지만 네트워킹, 사회적응 훈련은 산전수전, 공중전을 겪은 선배로부터 배우는 게 효과적이니까요.”
입에 척척, 귀에 쏙쏙 감기는 건배사가 허투루 즉흥적으로 튀어나온다고 생각하면 오해다. 심 사장은 책, 신문을 읽다가도 응용할 것이 있으면 메모하고, 변형하고, 외우고 연습한다. 사자성어로 신조어 건배사를 만들기도 한다. 최근의 히트 건배사는 인사불성(인간을 사랑하라는 말은 불경에도 나와 있고 성경에도 나와 있다), 적반하장(적당한 반주는 하느님도 장려하신다) 등이다. 술을 따르더라도 진기명기의 방법을 개발해 한편의 그럴듯한 퍼포먼스로 승화시킨다. 지방출장을 가든, 해외여행을 가든 사람들의 사는 모습, 먹는 모습, 마시는 모습은 관찰의 대상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 퍼포먼스와 아이디어에 스파크를 일으킨다. 관찰과 사고, 연습의 조합에서 의미와 재미와 흥미의 창조적 아이디어가 탄생한다.
고교 졸업하고 1973년에 취직해 44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했습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오른 성공 비결은 뭐라고 생각하나요?
“내 일처럼 생각한 것입니다. 비결이라고 말할 것도 없이 평범하지만 진실입니다. ‘시간이든 돈이든 비용을 덜 들이고, 더 효과적으로, 더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궁리하는 게 재미있었어요. 사원, 정확하게는 전화 받는 사환으로 온갖 궂은일을 할 땐데요. 세금계산서가 들어 있는 편지봉투를 그대로 버리는 게 아까운 거예요. 글자가 쓰인 부분만 자르고 봉투 뒷면을 사무실 내에서 메모지로 썼지요. 내 것이란 생각으로…. 구매 일을 할 땐 견적을 뽑아보고 어떻게 협상해야 보다 좋은 제품을 싸게 살 것인가를 고민했어요. 예전보다, 항상, 남보다 최고 2% 싸게 사는 작전과 목표를 세워 실천했습니다.”
구매 일을 하면서 사람 보는 법도 부가적으로 배웠다고 말한다. ‘저 사람은 곧 그만두게 될 사람, 독립할 사람, 독립해서 공장까지 지을 사람’ 등 나름대로 사람 보는 눈이 생기더라는 것. 10명 중 7명은 심 사장의 예상대로 운이 풀렸다. 족집게 적중률의 근거는 바로 주인의식이란다. ‘내 일처럼’ 진실, 성실, 창조적으로 하는 사람이 독립해서 사업도 잘하더라는 게 나름의 경험상 얻은 결론이다.
회사와 함께 개인적으로도 성장하셨는데요. 회사가 급성장하면 창업공신의 성장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도태되는 경우도 있더군요.
“중간관리자 시절, 선행학습을 충분히 한 게 도움이 됐습니다. 중간관리자는 말하자면 조직의 관절이에요. 윗사람, 아랫사람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학습하게 되지요. 그러면서 각 입장을 고루 관찰하고 이해하고, 내가 해야 할 일을 선행학습할 수 있었습니다. 또 마흔 넘어 영업을 하며 고객의 외부적 시각, 내부의 시각을 다 고려해보게 되더군요. 결국은 단계별로 자기의 그릇을 키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릇이 작으면 상을 차려줘도 밥을 못 챙겨먹습니다. 그릇을 키우는 게 먼저입니다.”
먼저 베풀고, 내 일처럼 하는 회사일, 좋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신세대들은 헌신하다 소진하고 탈진돼 헌신짝된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일을 통해 기쁨을 얻는 것 그 자체가 아닐까요. 남의 보상이나 인정을 갈구할수록 실망할 일이 많아집니다. 오히려 남에게 의존적이 되고요. 내가 열심히 하고, 배우는 것을 우선순위로 놓으면 활용당하거나 보상이 적다고 실망하는 일이 적어집니다. 결국은 자기 실력으로 쌓이는 것이거든요. 자신의 시간에, 삶에 충실하지 않고 대충 일하는 것이야말로 책임, 인생 유기이니까요. 성실히 일하면 단기적으로 손해 같지만, 장기적으론 투자입니다. 비유하면 농사와도 같습니다. 씨앗을 많이 뿌린다고 해서 모두 싹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씨앗을 많이 뿌리지 않으면 싹이 날 확률이 줄어듭니다. 일단 노력과 열정을 기울이는 것이 먼저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는 젊은이를 만나면 ‘잘나가는 것만 부러워하지 말고 어렵고 힘든 부서에 가서 몇 년만 버텨보라’고 말합니다. 나만의 노하우를 쌓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면, 다른 회사, 다른 부서, 어디에서든 잘할 수 있거든요.”
쓴소리 잘해서 ‘비즈니스계의 윤여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흔히들 ‘밥은 사고 말은 참는 것’이 어른의 의무라고들 하는데요.
“사람들이 싫어한다고 해서 올바른 소리를 피하는 것은 진정한 어른이 아니지요. 그저 뒤에서 혀만 쯧쯧 차기보다는 뭇매를 맞더라도 옳은 말을 해주는 게 어른의 역할입니다. 당장은 듣기 싫더라도 행동에 도움이 된다면 해야지요. 열 명에게 얘기해서 한 명이라도 받아들여 변화되고, 사회를 밝게 한다면 해줘야 한다고 봅니다. 제가 나서서 쓴소리를 하는 이유입니다.”
‘사원에서 사장까지’ 성공신화 뒤에 숨은 콤플렉스는 없었는지 궁금합니다.
“왜 없었겠습니까. 지금이야 예순을 넘었으니까 조금 자유로워지긴 했지요. 한창때엔 고루고루 콤플렉스투성이였습니다. 보다시피 제가 인물이 좋습니까, 키가 큽니까, 가방끈이 깁니까. 지금 이 나이니까 어느 정도 풍화됐지만 그때는 정말 고민이 많았어요. 영업을 할 때는 ‘내가 팔등신 미모에 좋은 학벌, 돈 많은 사람’이라면 얼마나 큰 도움이 됐을까 많이 아쉬웠지요. 또 내가 처음에는 술을 잘 못했거든요. ‘소주 두 병만 마실 수 있으면 업계 판도를 바꿨을 텐데’ 등등 별의별 생각을 다 했어요(웃음). 돌이켜보니 콤플렉스, 결핍이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부족하고 모자라서 더 노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모님께서 수수하게 낳아주신 것에 감사하고요. 실력과 학력이 부족한 걸 알기에 더 노력했고 안간힘을 썼습니다.”
건배사 개발도 술을 많이 못 먹어 술자리나 재미있게 만들자는 궁여지책에서 시작됐다. 그가 국내든, 국외든 자주 들르는 곳이 있는데 바로 전통시장이다. 이곳에서 컵 홀더 등 특이하고 스토리가 있는 소품들을 사와 지인, 고객들에게 마음을 담아 선물한다. 골프를 치고 오면 같이 간 일행들의 골프 폼과 대화 등 후일담을 메일로 전하기도 한다. 심 사장에겐 마음을 나누고,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는 기쁨의 선순환이 사업가로서,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의미요, 재미다.
이야기가 인맥 쪽으로 좀 흐른 것 같습니다. 모든 관계에서 개척 못지않게 중요한 게 유지관리 아닙니까.
“맞습니다. 잘나갈 때는 누구나 잘해줄 수 있습니다. 위기 때의 태도가 신뢰의 증표입니다. 진정한 신뢰는 못나갈 때도 한결같이 잘해주는 것입니다. 직원들에게 늘 말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 세일은 이익이 날 때뿐 아니라 밑지더라도 잘하자!’ 도장을 찍었으면 이유 불문 책임을 지고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자 합니다. 돈을 잃을망정 사람까지는 잃지 말자는 것입니다. 품질이든, 원가든 당초 약속을 반드시 지키자는 것이지요. 평판은 얻기는 힘들지만 잃기는 쉬운 법이거든요. 우선 나부터 충실하고 튼실해져야 합니다. 내가 급급해하면 남을 챙기고 지켜줄 여유를 갖기 힘듭니다. 개인이나 회사나 다 똑같습니다.”
심 사장은 밑질 때의 마음 다스리기 법을 들려주었다. 가령 5억이 남을 줄 알았는데 5억이 밑지면 일반적인 셈법으로 ‘10억을 손해봤다’며 억울해한다. 그는 신용을 지켰으니 3억만 밑진 것으로 나름의 가감승제법을 적용한단다. 당장의 손해가 앞으로 어떤 이익을 가져올지 모른다고 ‘투자’라 생각하며 위로를 한다는 내공 어린 고백이다.
경영자 등산모임 ‘시애라’의 회장도 맡고 계시지요. 최근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봉 트레킹을 열흘간 다녀오시기도 했는데요.
“여행은 가슴 떨릴 때 가야지, 다리 떨릴 때 가면 안 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산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더 나이 들기 전에 도전해보고 싶었어요. 육체적 자신감은 물론이고 심리적 에너지를 많이 얻었습니다. 웅장한 자연도 좋았지만 그보다 의미 있는 것은 절대고독의 시간이었습니다. 몸을 뒤척이기조차 힘든 옹색한 싱글 방에서 휑뎅그렁하게 있으며 나를 만나는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일에 대한 욕심까지도 포함해서 세속의 먼지를 떨어내고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공한 경영자들이 의외로 가정 경영은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더군요. 여성 경영자로서 애환이 더 많았을 것 같은데요.
“‘아침밥은 얻어먹고 다니십니까?’가 내조 점수 체크 질문이지요. 저는 남편이 아침밥을 차려준답니다. 행복하고도 감사한 일이지요. 저는 계란 프라이가 있어야 아침을 먹는데요. 한번은 출장을 갔는데 지인에게 그 사실을 알려줬어요. 밖에서도 계란프라이를 먹도록 챙겨줄 정도예요(하하). 어차피 집안일, 회사일을 다 잘하긴 힘들어요. 솔직히 말해 사장 되고선 주방 들어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차라리 잘하는 일을 선택해, 집중하는 게 효과적이에요. ‘집에선 당신 부인이지만, 밖에선 남의 부인으로 생각하라’고 말할 정도로 전투적으로 산 게 우리 시대, 여성 리더의 생존전략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서로 소통하고 이해를 구하고 신뢰를 쌓는 것, 그것 이상의 방법은 없다고 봅니다.”
마지막으로 은퇴 계획을 묻고 싶습니다.
“‘박수칠 때 떠나자’는 게 제 신조입니다. 외부 평가보다 내부 평가가 더 좋은 리더로 기억되고 싶고요. 우선 3년 후에 있을 회사 50주년 행사 준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퇴 후에는 제 장점을 살려 나만의 재미나는 놀이터를 만들고 싶어요. 가깝고 편한 사람들끼리의 작은 공간, 행복살롱을 만들고 싶습니다.”
3시간여 격정적인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데 심기석 사장이 필자의 명함을 다시 꺼내들었다. 건달 누님 리더십의 직설본능이 발휘되는 순간이었다. 긴장하는 순간 아니나 다를까, 조언이 쏟아졌다.
“명함의 글자가 너무 작아요. 글자 배치도 조금 앞으로 와야겠군요.”
어른이 내리치는 죽비소리는 아프기보다는 시원한 법이다. 요즘 신세대들이 기성세대를 꼰대라고 탓하는 것은 ‘발언 내용’의 문제가 아니라 ‘발언 자격’의 문제가 아닐까. 어른의 품격은 바른 소리가 아니라 바른 소리를 할 수 있는 자격에서 우러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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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테레사 수녀의 통신에 따르면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의 하룻밤’이다. 덧없고 허무한 게 삶이라는 얘기다. 과연 그렇지 않던가? 부평초처럼 떠돌다 허둥지둥 저승에 입문하기 십상인 게 삶이다. 그저 따개비처럼 견고하게 들러붙은 타성의 노예로 간신히 살다가 파장을 보기 쉽다. 어이하나? 저마다 나름의 대책과 궁리가 있을 터인데, 백발의 사진가 이종원씨(72)는 산골로 들어가는 일을 방책으로 삼았다.
내내 도시에서 살았던 그는, 인생의 다양한 골목골목을 편력했다. 공무원으로, 사진가로, 교수로, 언론인으로 뛰며 존재를 돋우길 거듭했다. 때로는 돌부리에 걸려 엎어지거나 뒤집어졌으나, 특유의 깡과 오기를 발동한 나머지 얻은 것도, 이룬 것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이, 마음은 늘 산골의 자연으로 향했다. 나 마침내 산중에 살리라! 그런 작심을 무시로 다지며 근 20년쯤을 고민하고, 모색하고, 탐색했다. 내가 발붙일 곳이 어디냐, 하며 여기저기 국토의 많은 곳을 훑었다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지금으로부터 11년 전에, 마침내 귀촌을 결행했다. 더 미룰 수 없는 결정적인 상황 때문에. 그가 애지중지하는 아내 이현숙씨(70)가 중병에 걸렸던 것. 두 종류의 암에다가 당뇨병까지 겹쳤으니 위중한 형편이었다. 공기 좋고 물 좋은 산골에서 요양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딱히 모아 둔 자금이라는 것도 없었지만 일을 서둘렀다. 그렇게 해서 옴팡지고 외지고 수려한, 충북 보은 땅 팔메실의 산골짝에 둥지를 틀게 되었다.
“제가 말이죠, 사진 장르 중에서도 생태사진, 특히 곤충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라는 1시간짜리 영화를 만들어 각광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면서, 생태사진을 실컷 찍으며 살아갈 수 있을 만한 산골을 갈망하고 찾았어요. 그러던 차에 아내가 중한 병에 걸린 겁니다. 뜸 들일 수가 없었어요. 용케 제가 원하던 산골을 찾아냈고, 곧바로 귀촌을 감행했어요. 모든 것을 다 내려놔야겠다는 생각으로, 갖고 있던 방대한 서적과 자료들까지 다 불 질러버리고, 새롭게 다시 태어나야겠다는 심정으로 산골에 들어왔어요. 아내에게 참회하기 위해서였죠.”
“그토록 참회할 게 많았어요?(웃음)”
“많았죠. 제가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무모하게 확 저지른 일들도 많았고, 사기를 당해 곤경에 빠진 일도 있었고, 우쭐대기도 했고, 마누라로서는 참 힘들었을 겁니다. 이제부턴 아내의 병 치료를 위해 순수한 남편 노릇을 해야겠다, 올인해야겠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산골살이를 시작했어요.”
“맘먹은 대로 됐나요?”
“노력한 만큼의 좋은 결과가 왔어요. 귀촌 이후 제가 살림살이를 도맡다시피 했어요. 가령 밥 짓고 국 끓이는 일을 전담했죠. 세상의 거의 모든 아내들은 남편을 위해 사오십 년을 뒷바라지하는데, 그 노고에 보답해야 하지 않겠어요? 적어도 10년쯤은 남편이 가사와 살림을 맡아 빚을 갚는 게 도리라 봅니다. 여하튼, 산골에 살면서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킬 수 있어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언젠가 작가 이외수에게서 들은 얘기가 있다. ‘우리 부부는 부부애가 아니라 전우애로 살았다!’ 아내란 사랑스러워 꽃향기를 뿜기 마련이다. 하지만 서방들은 흔히 교만과 방심을 일삼아 숱한 실수를 반복한다. 급기야 맹숭맹숭한 관계로 추락하거나 왕따를 자초한다. 어쩌면 세계평화보다 구현하기 어려운 게 부부간의 화평이다. 그러나 이종원씨는 귀촌을 통해 부부애를 고양했으니 이게 경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은, 귀촌 이후의 이종원을 두고 이런 논평들을 한단다. 당신, 새사람이 됐구먼.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까지 설치해
월든 호숫가 숲 속에 살았던 H.D소로는, 강인한 스파르타인의 정신이 아니고서는 산골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투의 얘기를 했다. 사실 귀촌이란 낙원으로의 입장 같은 것과는 다르다. 성공적으로 정착하기 위해선 응분의 고군분투가 따라야 한다. 이종원 역시 진땀과 비지땀, 팥죽땀을 쏟아야 했다. 솔바람과 꽃향기 그윽한 산중에서 오붓하게 누릴 수 있을 법한 한가한 풍류나 낭만은 오랫동안 그의 것이 아니었다. 그는 냇물이 돌돌돌 흐르는 산자락 둔덕에 터를 잡은 직후 지프차 안에서 잠을 자며 산골살이를 시작했다. 그 얼마 뒤엔 140만원을 주고 중고 컨테이너를 구입해 거처로 삼았다.
“땅은 샀으나 집이 없어서 집을 지어야 했어요. 아내와 함께 컨테이너에서 살며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궁리하고 설계하고, 나무를 심고 텃밭을 일구고, 그런 뒤에서야 집짓기에 착수할 수 있었어요. 힘든 시절이었죠. 이게 왜 이렇게 됐는가 하면,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어요. 제가 말이죠, 평생 돈 욕심 없이 살았는데요, 그럼에도 일을 늘 저질렀고, 결국은 성사시키고 그랬어요.”
“뚝심으로?”
“부단히 노력하는 근성으로.”
“이곳의 터전은 호방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선생의 집이 보기에 좋아요. 주변의 자연과 소박하게, 겸손하게 조화를 이룬 구색이라서.”
“제가 손수 지은 집입니다. 어떻게 하면 가장 좋은 집을 지을 수 있을지, 자나 깨나 연구를 많이 했어요. 전문가들을 찾아다니며 자문을 했으나 시원한 답이 나오질 않더라고. 돈을 덜 들이고 좋은 집을 짓는다는 게 사실상 이율배반이라는 걸 알게 되었죠. 그러나 밀어붙였어요. 내 손으로 집짓기의 모든 걸 감당하자는 작정을 하고서 말이죠.”
“건축에 문외한이었던 사람이 단독으로 127㎡(38평)짜리 집 한 채를 손수 지은 거예요? 그런 일이 어떻게 가능하죠?”
“소소하게 남들의 일손을 빌린 대목들이 있긴 하지만 거의 저 혼자 지은 집입니다. 미리 뒷산에 올라 나무를 베어다가 말려 기둥을 쓸 목재를 준비하는 일부터 시작했어요. 아울러, 건축 시공 현장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견학했고, 관련 책자들도 철저하게 독파했죠. 집의 설계 과정에선 아내의 의견을 100% 수용했습니다. 제가 원래 과학적인 성향과 재간이 좀 있는데요, 공부하고 연구한 건축 지식들을 토대로 상·하수도 배관, 정화조 설치, 전기 작업 등등 중추가 되는 공정들을 전부 혼자 해냈어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걸렸어요. 귀촌 4년 만에 착공을 했고, 이후 7년 세월을 이 집에서 만족스럽게 살아왔지만, 외벽 단장이라거나 아직도 미완성된 부분이 남아 있어요.”
“집을 지으며 염두에 둔 지향이 있었겠죠?”
“에너지 자립형 주택을 짓자는 게 목표였어요. 그게 상당히 성공적으로 구현되었어요. 단열을 철저히 하거나 태양열을 이용해 전력 소비를 줄이자는 것, 차가운 냇물을 끌어들여 냉방을 하자는 것, 그런 것들이죠. 집 앞 계곡에 수력 발전기를 설치하기도 했어요. 아직은 완성되지 않아 가동을 못 하고 있지만, 조만간 가동시킬 작정입니다.”
“수력 발전기까지? 놀랍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그렇게 많은 일들을 손수 해치운다는 게 너무 버겁진 않으세요? 그저 적당히 대충 작은 집을 지어 몸 고생을 더는 게 낫지 않나?(웃음)”
“경제적으로 시간적으로 탕진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집 짓다가 사람이 죽기도 한다던데, 그게 실감이 나더라고.(웃음) 그러나 뭐든 끝장을 보고서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서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어
장기간의 노역을 통해 근사한 집을 지은 그는 농사도 꽤 많이 짓는다. 몇 해 전에 구입한 6만6000㎡(2만 평)의 임야에 약초를 재배하기도 한다. 예사로운 힘이 아니다. 집념, 또는 깡. 이종원씨의 내부엔 그런 성분이 가득한 것으로 보인다. 살아온 날들의 굴곡을 정직하게 돌아보고, 살아갈 날들의 꿈과 상상을 실현하기 위해 산골에서 새로운 기반을 닦아가는 사람의 온몸에 박혀 있는, 짱짱한 패기. 그걸 열정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니 고희를 넘긴 이종원은 여전한 열혈 청년이다. 나로 말하자면, 이왕지사 인생의 늘그막에 조용하고 평온한 산림에 몸을 들였다면, 누추한 산방에서나마 가급적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이를테면 휘영청 달 밝은 밤이면 먼 곳의 벗을 불러들여 한잔 착실하게 걸치는 식의 도락을 누리며 느긋하게 사는 게 흐뭇할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종원씨에 따르면, 유유자적이란 가당치 않은 물건이다.
“시골생활에서 유유자적이라는 게 가능할까?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물론 집이나 터를 작게 잡아 살아갈 경우엔 여유를 부릴 수도 있겠고, 사실은 그게 가장 좋은 방법이긴 하지만, 저의 경우처럼 일을 많이 벌인 귀촌자들은 온몸으로 투신해서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게 마련이에요. 그런 상황을 자청해서 뛰어든 사람에게 그게 고역이랄 것도 없고 말이죠. 저는 육체노동을 아주 좋아합니다. 일상의 스트레스를 노동으로 풀고 있어요.”
“산골생활의 즐거움이 노동에 있는 거예요?”
“제가 말이죠, 일을 안 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웃음) 그렇다고 일만 아는 일벌레로 오해는 마시라. 저 역시 자연이 주는 기쁨과 행복에 충분한 즐거움을 누리며 사니까. 원했던 일을 실현해 나가고 있다는 성취감! 그게 무엇보다 큰 즐거움이고 말이죠.”
“선생께서는 산골에 살며 실컷 생태사진을 찍고 싶다 했어요. 그 점에서도 많은 성취가 있었나요?”
“사진가가 사진 작업을 하는 건 날마다 밥을 먹는 일처럼 일상이지 않겠어요? 저에겐 반드시 이루어야 할 일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귀촌 귀농에 관한 책, 사진이론에 관한 책, 한국의 자연 풍경을 집대성한 도감, 이 세 가지 책을 준비하고 있어요. 이곳에 사진박물관을 만들어 문화적 공간으로 가꿀 계획도 포기할 수 없고 말이죠. 자연 속에서 발견되는 미적 가치를 승화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는 겁니다.”
박물관까지라니. 웅장한 포부렷다. ‘늙음’은 때로 ‘낡음’일 수 있다. 그러나 안일하고 범속한 매너리즘을 거부한 채, 산골에서 기운 찬 숫말처럼 양양하게 뛰는 이종원씨는 낡음을 허하지 않는다. 아직은 미완인 게 많지만.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