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제천의 한 마을 산자락. 작은 집 짓기 마무리 작업을 위해 모인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 수강생들은 분주히 움직였다. 18㎡(5.5평) 규모의 목조 주택을 8일 만에 완성했다니 믿기지 않는다. 들여다보니 침실, 욕실, 주방은 물론 작은 거실까지 갖춰져 있다. 일명 자크르 하우스를 통해 미니멀 라이프의 철학을 배우고 실천하는 현장이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벌써 300여 명이나 이 학교를 다녀갔다고 한다.
‘3대에 걸쳐 사는 집’이라는 말이 있다. 조부모가 산 집의 빚을 손자 세대에 가서야 비로소 갚는다는 의미다. ‘사는(live) 공간’이어야 할 집이 ‘사는(buy) 물건’으로 변질된 지는 이미 오래. “집 한 채 구입하려면 은행의 노예가 되어 인생 절반을 꼬박 바쳐야 한다”는 자조 섞인 푸념도 쏟아지는 현실이다.
어쩌다 현대인들은 ‘내 집 마련의 꿈’이라는 괴상한 꿈까지 꾸게 된 걸까.
다행히도 다른 한편에서는 망치와 못을 들고 자기 삶의 진짜 주인이 되어보겠다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났다. 이들의 선봉장 역할을 자처한 이도 있다. 한겨레작은집건축학교(이하 작은집학교) 교장 문건호(文建晧·53) 씨가 바로 그이다.
살인적인 집값에 지쳐가고 허리케인, 지진 해일과 같은 대형 자연재해로 살던 공간이 하루아침에 사라져버리자 사람들은 집에 대한 인식을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의 운동으로 나타난 것이 타이니 하우스(Tiny House) 열풍. 이동식 초소형 주택인 타이니 하우스는 ‘단순한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가슴을 뛰게 했다. 무엇보다 빚을 지지 않고 내 집을 마련할 수 있다는 매력도 크게 작용했다. 바람은 금융위기로 수백 만 명의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았던 미국에서 먼저 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주거 트렌드가 변화하면서 스몰하우스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졌다.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지는 학교
작은집학교는 올 연말까지 수강생이 다 찼다. 혹여 예약자에게 사정이 생겨 자리가 나면 추가 모집도 순식간에 이루어진다. 문을 연 첫해(2015년)에는 수강생보다 스태프가 더 많았지만 이후 입소문을 타면서 입교를 원하는 사람들이 넘쳐 접수마감 문패를 일찌감치 내다 걸 때가 많다.
수강생들의 연령대는 20대부터 70대까지 다양하다. 시니어가 거의 절반을 차지하고 여성 수강생 비율도 10%나 된다고 한다. 이곳에 오는 목적은 다 다르지만 8일 동안 이론 강의도 듣고 건물 내·외장, 전기 설비, 도배, 도장, 난방 시공 등 집 짓기의 전 과정을 실기로 배운다. 숙식을 같이하면서 짓는 집. 목조 바닥과 벽체를 만들고 지붕을 올리면서 함께 땀을 흘리다 보면 첫 만남에 서먹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수강을 끝내고 돌아간 뒤에도 동기생 중 누가 집을 짓는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기꺼이 달려가 품앗이도 한다.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자크르 하우스(‘딱 알맞게 좋다’라는 뜻을 지닌 순우리말)에서 한솥밥 먹은 사람들의 우정이고 힘이다.
제대로 판 벌인 부부 작가
문 교장은 아내 손정현(孫禎賢·51) 씨와 학교에 마련된 11㎡(3.4평)짜리 집에 살면서 강의도 하고 수강생들 밥도 챙겨주고 시시콜콜한 정도 나눈다. 이곳에서 부부는 ‘작가님’으로 불린다. 알고 보니 문 교장은 홍대 미대 조소과를 졸업했고 아내도 동양화를 전공한 미술학도. 자신들도 건축의 길에서 환상의 호흡을 자랑할 줄 몰랐다.
“젊었을 때는 작품활동도 열심히 했지만 결혼하고 아이가 생긴 뒤에는 먹고사는 일이 더 중요했어요. 공연 무대장치, 광고 세트장 등 손기술로 가능한 일들은 다했죠. 그러다가 인테리어 사업에 뛰어들었는데 크게 망했습니다. 빚이 5억 깔려 있으면 3억짜리 일을 수주해서 돌리는 식으로 무리하게 운영했지요. 그러다 어느 날 어린 딸아이의 자는 모습을 보면서 ‘이렇게 사는 게 괜찮나?’ 질문을 하게 되더라고요. 밤낮없이 일을 해도 빚만 늘어나는 사업에 회의감도 들었고요. 접어야 하는 건 맞는데 그렇다고 당장 손을 떼면 빚만 떠안게 되는 상황이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어요. 결국 고민 끝에 접었죠.”
이를테면 자발적 파산이었다. 그 후 부부가 힘들게 마련했던 집은 전셋집에서 월셋집으로 바뀌었고 서울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곳은 지인이 내어준 반지하 방이었다. 급기야는 쌀 살 돈도 없어 시골에서 과수원을 하는 부모님 집에 얹혀 살아야 했다. 그 시절 아내가 시집살이를 좀 했다고 문 교장이 우스갯소리로 말하자 손 작가는 손사래를 친다.
“오히려 저희를 많이 헤아려주셨죠. 그래도 여자들에게 시집이 편한 곳은 아니잖아요. 시부모님도 불편하셨겠죠. 방 한 칸 내어주셔서 1년 정도 살았는데 죄송한 마음이 점점 더 커지더라고요. 그래서 남편에게 과수원 한쪽에 우리 세 식구 지낼 수 있는 조그만 집을 한번 지어보자 했어요. 곧바로 시동을 걸었죠. 둘 다 실패를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은 아니거든요. 게다가 그때는 돈 한 푼 없어 누구한테 공사를 맡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어요.”
물질적으로는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은 풍족했다. 부부는 작은 집을 지으며 미대 출신자들답게 맘껏 솜씨를 겨뤘다. 창 하나의 위치를 두고 즐거운 실랑이도 벌였다. 그렇게 방 두 칸에 화장실과 거실이 딸린 15평짜리 집이 완성됐다. 두 사람이 손수 지은 첫 번째 집이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감동이 밀려오는지 손 작가가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 있어요. 첫눈이 펑펑 내렸던 날이었죠. 아침에 눈을 떴는데 창밖으로 흰 눈에 덮인 산과 들밖에 안 보이는 거예요. 눈 위를 뛰어다니는 노루를 보는데 가슴이 마구 뛰더라고요. 그 순간의 감정은 어떤 말로도 표현이 안 돼요. 제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을 풍경이에요.”
자연 속에서 살며 무엇이 행복한 삶으로 이어지는지를 알게 된 부부는 도시생활에 대한 미련을 말끔히 접었다. 물론 그 뒤에도 몇몇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인생의 전환점은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충북 제천으로 오면서 시골살이는 더 깊어졌다. 귀촌한 사람들과 건축 협동조합 법인을 만들었다가 공중분해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작은 집 짓기 운동을 해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보자고 프로그램을 짜고 머리를 맞댔지만 결과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심신이 고단했어요. 빚도 또 졌고요. 하지만 못 견딜 정도로 절망스럽지는 않았어요. 건축 일 하면서 자기 집에 대한 인간의 욕망과 집착을 제대로 읽었거든요. 저로서는 아주 중요한 해답을 얻은 셈이죠. 작은집학교의 기반이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때 마침 지인이, 조합 만들 때 짜놓은 프로그램이 아깝다면서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한번 넣어보라는 조언을 했고, 그는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도전을 해봤다. 그 결과 1기생 수강생 8명 모집. 그는 뜻밖의 화답에 놀라 부랴부랴 교장이 되었다.
작은 집에 담은 큰 철학
작은집학교에서는 주문을 받아 집 짓는 일이 없다.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관계는 갑을 관계가 될 수밖에 없다는 이유에서다. 건축,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하며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문 교장의 목표는 클라이언트와 건축가의 경계를 없애는 것. 그래야 집 짓는 과정이 행복하다는 지론을 펼친다.
“집을 짓는다는 건 누군가에게는 평생의 로망을 펼치는 일이에요. 여기에 그 꿈을 최소한의 비용으로 해결하겠다는 계산도 끼어듭니다. 반면 건축가는 무조건 이익을 내야 하는 사람입니다. 서로 다른 욕구가 충돌하게 되는 이 필드에선 어느 누구도 쉽게 물러서지 않으려 합니다. 팽팽한 기 싸움이 시작되는 거죠.”
도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클라이언트는 입체적 공간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그래서 뒤늦게 ‘창이 여기 있어야 하는데 저기 있네’ 하면서 불만을 터뜨리곤 한다. 문 교장은 집을 직접 지어보지 않으면 이런 분쟁은 영원히 피할 방법이 없다고 말한다. 작은집학교가 클라이언트를 원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곳에서 수강생들이 지은 집은 수강생들에게만 판매가 됩니다. 집을 가져가는 사람은 동기생들과 땀 흘리며 지은 집이라서 내부 구조를 잘 이해하고 어디가 고장이 나도 크게 걱정하지 않습니다. 그 정도의 관리는 이제 할 수 있게 된 거지요. 집 짓기의 전 과정을 단기간에 가르쳐주는 곳은 없어요. 여기 오면 다들 빡빡한 작업량에 힘들어하지만 수업료와 노동이 아깝지 않다고들 말합니다. 내 집 마련의 계획을 작은 집으로 수정한 사람도 꽤 돼요.”
그러나 궁금해졌다.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고 싶어도, 세컨드 하우스를 구입한다 해도, 땅이 없으면 장밋빛 환상일 뿐이지 않을까. 문 교장은 괜찮은 정보 하나를 귀띔해준다.
“시골에는 10년, 20년 임대 가능한 토지들이 있어요. 땅을 살 때는 고민을 많이 해야 합니다. 여러 가지 변수가 발생하기도 하니까요. 일단 마을 이장님을 만나 빌릴 수 있는 땅이 있는지 알아보는 게 좋아요. 요즘은 농사짓기 힘들어서 그런지 몇 년간 내주고 월세 받는 걸 더 좋아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1년에 100만 원 정도 연세로 계약하면 이동식 주택 가져다 놓고 살 수 있어요. 그렇게 살다가 정들면 그때 가서 땅을 사도 늦지 않아요.”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동안 문 교장에게서 은퇴자들의 열정과 꿈, 잠재력, 융복합, 작은 집 마을 등의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바탕 고민한 시간들이 전해주는 통찰의 메시지다. 그 속에는 기발하고 반짝이는 아이디어도 있었다.
“우리 사회가 시니어의 에너지와 지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워요. 은퇴 후 여기 오시는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가치 있는 일에 관심이 많더라고요. 방법을 잘 몰라서 그렇지 기회가 되면 참여하고 싶다는 말씀들을 하십니다. 저는 이곳에서 집 짓기를 통해 만난 사람들이 선순환 관계로 계속 이어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젊은이들 집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주고, 그 해결 방안들도 같이 모색해보고요. 작은집학교가 그 구심점 역할을 적극 해나가겠습니다.”
젊은 시절 호숫가 숲속으로 들어가 5평도 안 되는 작은 통나무집을 짓고 2년 여를 살았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언제까지 집 짓는 즐거움을 목수에게 넘겨줄 것인가?” 일단 그 즐거움부터 되찾아 와야 할 것 같다. 물론 교장선생님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