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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석4조의 즐거움, 문화관광해설사
- 젊은 시절 외국에 가고 싶은 마음에 해외공사를 많이 하는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업무상 유럽으로 자주 출장을 가서 주말에는 출장지 부근 관광지를 다닐 기회가 많았다. 덕분에 현지의 많은 관광가이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자긍심과 열정이 넘쳤고, 내가 그들 나라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세월이 흘러 퇴직을 앞두고 앞으로 할 일에 대해 고민하던 중, 문득 유럽 관광지에서 만났던 관광가이드들이 떠올랐다. 그래서 관광가이드가 되기로 마음먹고, 소양을 갖추기 위해 우선 한국관광공사가 발급하는 영어 분야 관광통역안내사 자격증을 땄다. 그리고 관광가이드로 일을 시작했는데, 그 무렵 서울시에서 문화관광해설사를 모집한다는 광고를 보고 지원, 높은 경쟁률을 뚫고 해설사가 되었다. 해설사들은 서울을 방문하는 국내외 관광객에게 서울의 대표적인 관광지 해설을 제공한다. 서울시에는 현재 203명의 해설사가 활동하고 있다. 해설 코스는 청계천, 경복궁 등 25개 코스로 구성되어 있고 한 번에 소요되는 시간은 도보로 약 2시간 정도다. 나는 2009년도에 서울시 해설사가 되었다. 이 일을 시작한 지 벌써 9년째다. 보통 일주일에 두 번 정도 해설을 하니 지금까지 약 900팀의 관광객에게 해설을 한 셈이다. 이 일을 하다 보면 다양한 관광객을 만난다. 한번은 네덜란드의 가족을 만났는데, 부모와 딸이라고 했다. 그런데 부모는 서양인, 딸은 동양인이었다. 알고 보니 딸은 한국에서 태어나 네덜란드로 입양된 여성이었다. 관광이 끝난 후 “친부모를 만날 때 통역을 해줄 수 있느냐?”고 부탁해 흔쾌히 수락했고, 실제로 만났다. 친부모가 별거 중이라 따로 만나는 수고가 있었지만, 한 사람이 평생 그리워했을 부모를 만나는 데 도움이 되어 무척 보람 있었다. 한국을 방문하는 관광객에게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과 보람 외에도 해설사 활동으로부터 오는 이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다양한 세계인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해설활동을 할 때마다 두 시간 정도 걸으니 건강에도 좋다. 또한 영어공부에도 도움이 된다. 이 밖에 해설사들의 평균연령이 60대 중반인데 외로울 수도 있는 노년기에 서로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져서 좋다. 매월 월례회를 통해 해설 활동과 관련한 의견을 교환하고 친목도 도모한다. 노년에 자기계발을 원하면서, 역사와 문화 그리고 외국어에 소양이 있는 분이라면 문화해설사가 되어 우리나라를 알리는 민간 외교관의 역할을 해볼 것을 적극 권하고 싶다.
- 2018-09-04 0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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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② 보은 법주사(法住寺)
- 우리나라의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 두 번째는 보은 법주사이다.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에 위치한 법주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로 사적 제503호이며, 속리산 천황봉과 관음봉을 연결한 그 일대는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었다. 속리산은 해발 1057m의 천황봉을 비롯해 9개의 봉우리가 있어 원래는 구봉산이라 불렀으나, 신라 때부터 속리산이라 부르게 되었다. 법주사는 553년(진흥왕 14) 의신(義信)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져와 이곳 산세의 웅장함과 험준함을 보고 불도(佛道)를 펼 곳이라 생각하고, 큰 절을 세워 이름 붙였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의신 조사가 법주사를 창건하고 진표 율사가 7년을 머물면서 중건하였다고 하나 ‘삼국유사’ 4권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전하는 바는 조금 다르다. 진표 율사가 금산사에서 나와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진표 율사가 금산사와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房)으로 돌아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이 와서 진표 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 그때 진표 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 하였다. 이에 영심 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 법회를 열었다고 하니, 현재의 법주사는 진표 율사의 뜻에 따라 영심 스님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진표 율사가 세운 금산사와 이곳 법주사는 모두 미륵 신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석가모니불이 입멸한 후 56억 7000만 년이 지나 미륵이 오면 용화수(龍華樹) 나무 아래서 세 번에 걸친 설법(龍華三會)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니 금산사가 제1도량, 법주사가 제2도량, 금강산 발연사가 제3도량으로 창건한 용화삼회(龍華三會) 설법도량인 것이다. 고려 문종의 아들 대각국사 의천의 동생 도생 승통(導生 僧統)이 절의 주지를 지냈으며 1363년(공민왕 12)에는 왕이 절에 들렸다가 양산 통도사에 칙사를 보내 부처님의 사리 1과를 법주사로 옮겨 봉인토록 하였으니 지금도 법주사 내에 모셔져 있다. 조선 세조 때에는 신미 대사가 주석하면서 크게 중창되어 이후 60여 동의 건물과 70여 개의 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이었으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인해 거의 모든 건물이 불타버리고 말았다. 사명대사 유정 스님이 20년에 걸쳐 팔상전을 중건하였으며 벽암 각성 스님이 황폐화된 절을 중창하였고 그 뒤 수차례의 중건, 중수를 거쳐 지금에 이르고 있다. 고려 인조 때까지도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과 '동문선'에 속리사라는 제목의 시가 실린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되지만 정확하게 규명되지는 않았다. 법주사가 보유한 문화유산으로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팔상전(국보 제55호)·석련지(국보 제64호)·사천왕석등(보물 제15호)·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신법천문도병풍(보물 제848호)·대웅보전(보물 제915호)·원통보전(보물 제916호)·법주괘불탱화(보물 제1259호)·소조삼불좌상(보물 제1360호)·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철확(보물 제1413호)·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희견보살상(보물 제1417호)·복천암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보은 법주사 동종(보물 제1858호) 등이 있으며, 주변에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정이품송(천연기념물 제103호)·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이 있다. 속리산(俗離山) 법주사(法住寺)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에 걸쳐있는 명산으로 예로부터 우리나라 8대 경승지로 전해지며 해발 1058m 천황봉을 중심으로 관음봉·비로봉·경업대·문장대·입석대 등 해발 1000m 내외의 산봉우리들이 있다. 그중 문장대는 속리산의 빼어난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경승지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데 그 남쪽 수정봉 아래 좋은 자리에 법주사가 자리 잡고 있으며 속리산 일대는 1970년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지금은 터널을 뚫어 보은에서 법주사까지 쉽게 갈 수 있지만 예전에는 꼬불꼬불 열두 굽이를 돌아 올라가는 말티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갯길은 고려 태조 왕건이 법주사에 행차할 때 닦은 길이라고 전해지며 조선 세조는 즉위하기 전 상환암에서 백일기도를 올렸으며, 즉위 후에는 복천암에서 사흘간 치병(治病) 기도를 올리기도 하였다. 고개를 올라서면 세조에게 벼슬을 제수받은 정이품송이 있고 이어 옛 사하촌(寺下村)이었을 산채백반 식당들이 빼곡한데, 그 이후 일주문까지는 길 양쪽으로 떡갈나무 숲이 아름다운 오리숲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정이품송과 식당가를 지나 산사 7곳 중 가장 비싼 입장권(4000원)을 끊고 떡갈나무 우거진 맑은 계류(溪流)를 따라 오리 숲길을 걸어 들어가노라면 일주문이 나오는데 ‘호서제일가람(湖西弟一伽藍)’, 즉 호서(충청)지방 제일의 절집이라는 현판을 달았으며 그 아래 안쪽에는 ‘속리산대법주사(俗離山大法住寺)’라고 씌어 있어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낸다. 오리 숲길을 산책하듯 걸어 일주문을 지나면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와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가 나오는데 역사적인 의미가 있으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살펴보는 것이 좋다. 속리산사실기비는 1666년(현종 7)에 세운 것으로 비문은 우암 송시열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이 썼는데 명산 속리산에 세조가 행차한 사실과 수정봉 위 거북바위를 당 태종이 자르게 했다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고 한다. 비각 속에 보호되고 있으며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이다. 벽암대사비(碧巖大師碑)는 법주사를 크게 중창한 조선중기 고승 벽암대사의 행적을 기록한 것이다. 1664년(현종 5)에 세워졌으며 비문은 정두경이 짓고 글씨는 선조의 손자 낭선군이 썼는데 커다란 암반 위에 홈을 파서 비석을 세웠다. 오리 숲길을 벗어나 계류에 걸쳐진 다리를 건너면 비로소 법주사 경내로 들어서는 사실상 첫 관문인 금강문이다. 마곡사가 해탈문이 첫 관문이듯 법주사는 금강문인데 그 안에 모셔진 분들은 문수, 보현보살과 금강역사로 똑같다. 다만 마곡사는 보현과 문수 모두 동자상을 모셨는데 법주사는 어린 동자상이 아닌 보살상을 모신 점과 해탈문이 아닌 금강문으로 부르는 점이 다르다. 금강문으로 들어서면 산중에 위치한 산사(山寺)지만 전체적으로 평지 지형에 크고 작은 당우(堂宇)들이 자리 잡고 있다. 금강문 오른쪽에 있는 쇠솥(鐵鑊, 보물 제1413호)은 신라 성덕왕 때 당시 승도(僧徒) 3000명을 먹일 쌀 40가마가 들어간다는 것인데, 반대편인 왼쪽 끝에는 우리나라 최대크기인 80가마가 들어가는 돌솥(석조(石槽),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70호)이 있어 대조적이다. 철당간 옆에 있는 석련지(石蓮池)는 원래 용화보전 앞에 희견보살상, 사천왕석등과 한 줄로 서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용화보전이 없어지면서 본래의 자리를 잃고 그 축(軸)을 벗어나 있는 것이라고 한다. 법주사의 중앙에는 팔상전(八相殿)이 있다. 우리나라 현존하는 유일한 목탑인 팔상전은 사찰 창건 당시 의신 조사가 초창했다고 전하나, 정유재란 때 불탄 후 사명대사와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다고 하며 지난 1968년에는 완전 해체, 수리하였다. 팔상전에서 대웅보전으로 이어지는 중간에 쌍사자 석등이 있다. 사자를 조각한 석조물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으며 매우 독특한 형태다. 디딤돌 위에 선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을 맞대고 앞발과 주둥이로는 윗돌인 화사석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사자의 갈기와 다리 근육 등이 매우 사실적인 통일신라 석등의 대표작이다. 법주사 금강문을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철확(쇠솥)이 있고 왼쪽으로 철당간과 석련지, 돌확(석조)이 있다. 금강문 정면으로는 두 그루 나무가 버티고 선 사천왕문이며 팔상전을 지나면 쌍사자 석등이 있고 이어서 대웅보전이다. 마침내 부처님이 계신 곳이다. 법주사는 법상종 사찰이며 미륵신앙 도량이기에 대웅보전과 미륵전(용화전) 양대 불전이 핵심이다. 미륵전은 조선 말기 대원군 때 훼손되었기에 천년고찰 법주사의 주불전은 바로 이 대웅보전이며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근래에 다시 지어 팔상전 왼쪽에 우뚝 서 있다. 그런데 석가모니가 주불이라면 대웅보전이 맞겠으나 비로자나불을 주불로 모셨다면 대적광전이나 대광명전으로 불러야 하는데 옛 기록에 대웅대광명전이 흥선대원군 시절 미륵장륙상을 헐어갈 무렵 대웅보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또한 대웅보전에 오르는 중앙계단의 넓은 폭과 중앙의 답도(踏道)가 특이하며 좌우 소맷돌 위쪽에 새겨진 원숭이 석상도 눈길을 끈다. 이렇게 금강문을 들어서서 사천왕문, 팔상전을 지나 쌍사자 석등과 대웅보전까지 남북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화엄 신앙축이라면 팔상전에서 왼쪽으로 사천왕 석등과 석연지, 희견보살상을 연결 후 용화보전으로 이어지는 축선이 미륵 신앙축이었는데, 용화보전과 장륙상이 없어지는 통에 이 축선은 없어지고 중간에 있었던 석연지와 쌍사자 석등이 흩어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전체적으로 배치와 조화가 무너지고 산만해 보인다. 게다가 최근에 과거 용화보전 자리에서 남쪽으로 자리를 옮겨 금동미륵대불과 용화전을 우뚝 세우니 법주사의 상징 팔상전이 눌려 보이는 점이 다소 아쉽다. 대웅보전 앞 오른쪽으로는 네모꼴 모양의 원통보전이 있는데 관세음보살을 모셔 관음전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창건 당시 의신조사에 의해 지어진 건물로 임진왜란 때 소실 된 후 1624년 벽암대사가 다시 복원하였으며 안에는 목조관음보살이 모셔져 있다. 원통보전 옆에는 희견보살상이 세워져 있는데 앞서 언급한 대로 옛 용화보전 앞에 있었으나 지금은 위치가 변경된 상태이다. 희견보살은 법화경의 소신(燒身)공양을 실천하는 모습을 세운 것인데 부처님께 최대의 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1200년 동안 자신의 몸에 향과 기름을 바르고 먹고 마신 후 스스로 불을 붙여 1200년 동안 태워서 공양하였다는 것이다. 금동미륵대불은 원래 용화보전에 미륵장륙상을 봉안하였으나 정유재란 때 미륵장륙상이 사라지고 난 후 중건할 때 금동미륵장륙삼존상을 다시 모셨으나, 이도 대원군이 경복궁 중건 시 당백전 만들려 헐어갔고 용화보전도 무너져 초석만 남았다는 것이다. 1939년에 미륵불상 조성이 다시 시작되었으나 조각을 맡은 사람이 요절하는 바람에 중단되었다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의 희사로 재개되어 1964년 완공됐지만, 아쉽게도 시멘트로 만든 불상이었다. 1986년에 이를 헐고 25m 높이의 청동미륵상과 8m 높이의 기단부에 용화전 등을 준공한 것이 1990년이며 2002년에는 청동불에 개금불사를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법주사 경내는 대략 돌아보았다. 물론 대웅보전 앞 왼쪽으로 사대부 솟을대문과 담장을 두른 선희궁 원당이 있는데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씨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중에 위패를 모셔가 조사당으로 쓰고 있다거나 금동미륵불 남쪽으로 통도사에서 모셔온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모신 세존사리탑과 능인전 등이 있다. 또한 진영각, 삼성각, 명부전 및 선원을 포함한 스님들 요사채 등 당우들이 많지만 특별하게 눈길을 끄는 곳은 청동미륵대불 아래 바깥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거기 새겨진 마애여래의좌상이다. 한국의 대표 산사(山寺)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속리산 법주사. 깊숙한 산속이지만 오붓한 평지에 자리 잡고 있으며 최근 세운 거대한 미륵불 외에는 옛 절집 모습 그대로 남아 천년고찰의 역사와 향기를 가득 품고 있는 호서제일 가람이다.
- 2018-08-31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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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복궁이 먼저다”
- ‘중국’ 하면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게 더 많이 떠오른다. 아마도 ‘점철되어온 괴로움의 역사’가 생각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물리적으로 비교하면 작아도 한참 작은 국가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으로 중국이라는 ‘거대 문화 권력’을 지척에 두고도 예로부터 아주 다른 문화적 정체성을 지켜온 사실이 신기할 정도다. 그런데 우리 주변에는 생각보다 ‘문화적 패배주의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지식인이 많다. 1887년 우리의 경복궁(景福宮) 저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乾淸宮)에서 전깃불[電球]이 동양 최초로 어두운 밤을 밝혔다. 일본이나 중국보다 앞서 전기를 사용한 것이다. 1879년 토머스 에디슨(Thomas Edison, 1847~1931)이 전구를 발명하고 고작 8년 만의 일이니 놀라운 역사의 발자취가 아닐 수 없다. 당시 에디슨은 이런 말을 남겼다 한다. “오! 동양의 신비한 왕궁에 내가 발명한 전등이 켜지다니 꿈만 같다.” 실로 많은 것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처럼 현대 첨단 과학의 시발점이기도 한 건청궁은 바로 일본이 제국의 군병(軍兵)을 동원해 명성황후(明成皇后)를 무도하게 살해한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오늘날 우리 건축 문화를 대표하는 경복궁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많은 이가 중국의 자금성(紫禁城)을 모델로 지었다고 믿지만, 이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경복궁을 건립한 것은 1395년 9월 29일(태조 4년)이다. 반면 중국 베이징의 자금성은 1420년에 건축했으니 정확하게 사반세기 앞선 시점이다. 아울러 623년 전 광화문(光化門) 앞에 조성한 육조(六曹) 거리의 폭이 그대로 오늘의 광화문 거리로 이어졌다는 사실 또한 예사롭지 않다. 그 ‘넉넉한’ 공간에 담긴 우리 선조들의 눈높이가 새삼 존경스럽다. 이런 자랑스러운 유산을 외면하고 ‘문화적 패배주의의 덫’에 갇혀 있다는 건 또 다른 사대주의와 다름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이성낙 현대미술관회 前 회장 독일 뮌헨의대 졸업(1966), 연세대학교 의대 피부과 교수, 아주대학교 의무부총장, 가천의과대학교 총장, 가천의과학대학교 명예총장(현), 한국의약평론가회 前 회장, 간송미술재단 이사.
- 2018-07-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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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대야로 잠 못 이루는 밤, 읽기 좋은 신간들
- 두 발로 만나는 우리 땅 이야기 1·2 (신정일 저ㆍ박하) ‘길 위의 시인’, ‘현대판 김정호’ 등으로 불리는 신정일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 이사장이 전국 방방곡곡을 직접 걸으며 완성한 도보답사기다. 시리즈의 제1권 ‘서울’ 편에는 한반도 5000년 역사 속에서 주요한 위치를 점해온 서울의 역사를 살펴보고 해설사와 함께 곳곳을 답사하는 형태로 구성돼 있다. 경복궁, 창덕궁, 덕수궁 등 5대 궁궐과 종묘, 한양도성 성곽길, 한강 등을 따라 걸으며 도심 속 근대 유적을 면밀히 둘러본다. 특히 마지막 8장에서 서울의 지명 속에 숨겨진 역사에 대해 소개한 점이 흥미롭다. 동시에 출간된 제2권 ‘경기도’ 편에서는 1981년 경기도에서 분리된 인천을 포함해 경기 각 지역을 위치와 성격에 따라 8개의 장으로 나눠 설명한다. 지역마다 문화유산을 소개하고, 이곳을 살다간 선조들의 발자취를 돌아본다. 아울러 경기도 곳곳에 숨겨진 아름다움과 지역민들의 사연을 담아 그동안 몰랐던 경기도의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강과 길의 철학자 신정일 이사장의 이야기를 듣노라니 정말 걷고 싶었다”면서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으며 우리 땅에 깃든 문화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는 그는 우리 시대 또 하나의 희망으로 기억될 것”이라며 이 책을 추천했다. 소심 소심 소심 (인민아 저ㆍ북산) 미술, 서예, 수필 등 다양한 예술 장르를 넘나드는 인민아 작가가 삶을 돌아보며 얻은 깨달음과 인생의 단면들을 풀어냈다. 군더더기 없이 담백한 문장으로 채운 글과 작가 특유의 따스한 감성이 묻어나는 문인화가 함께 어우러져 잔잔하면서도 깊은 여운이 느껴진다. 왜 자꾸 죽고 싶다고 하세요, 할아버지 (하다 게이스케 저ㆍ문학사상사) 할아버지의 존엄사를 위해 간병을 시작한 손주의 이야기. 제153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이자 NHK 방송에서 화제를 모은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다. 세대 간 갈등과 고령화 사회, 청년 실업, 웰다잉 등의 문제를 재치 있게 그려냈다. 나이 든 반려견을 돌보는 중입니다 (권혁필 저ㆍ팜파스) 노령견의 일상 돌봄과 더불어 죽음 준비까지 다뤘다. 각 장의 끝에 실린 저자의 에세이를 통해 반려견을 돌보는 즐거움과 사랑하는 마음, 이별의 과정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동물보호단체, 반려동물문화교실에서 만난 반려견과 보호자의 사연도 함께 담았다. 죽음을 이기는 독서 (클라이브 제임스 저ㆍ민음사) 문화비평가로 잘 알려진 클라이브 제임스가 2010년 백혈병 확진을 받은 후 써낸 다양한 문화비평 중 일부를 엄선해 엮었다. 저자는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과 맞서며 책을 읽고, 영화와 드라마를 보며 마지막 순간까지 신랄하고 생명력 넘치는 문장을 탄생시켰다.
- 2018-07-16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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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옆 후궁들의 신당, 문을 활짝 열다
- 조선 제21대 왕 영조가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7세 남짓 어린 나이에 무수리로 입궁했다. 그 후 숙종에게 성은을 입기까지 15년 동안 궐내에서 온갖 천한 일을 도맡아 하며 힘들게 살았다. 어머니가 침방 나인 시절에 세누비가 가장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영조는 평생 누비옷을 걸치지 않았다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영조는 어머니를 떠올릴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생모인 숙빈 최 씨 외에도 중전마마인 인현왕후를 비롯해 어머니로 모셔야 하는 분이 많았기 때문에, 마음 놓고 어머니를 어머니라 부르지 못했다. 평생을 애처롭게 그리워한 어머니가 죽은 뒤에는 사당을 지어 극진히 모셨다. 종로구 궁정동 1번지에 가면 영조가 재위 기간 중 200번이 넘게 찾으며 어머니를 그리워했던 ‘육상궁’이 있다. 근래에 들어선 육상궁보다 칠궁(七宮)이란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역대 왕들의 친어머니로서 왕비에 오르지 못한 7인의 신위를 모시고 있다. 육상궁 외에 경종의 생모 장희빈의 대빈궁, 사도세자의 생모 영빈 이 씨의 선희궁, 순조의 생모인 수빈 박 씨의 경우궁 등 현재 총 7개의 궁이 있으며, 이를 통틀어 ‘서울 육상궁’이라 부른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 후원이었지만, 부근에 청와대가 들어서며 경복궁 담장 밖에 위치하게 됐다. 건물 앞에는 정문과 재실이 있고, 건물을 둘러싼 정원에는 정자와 소나무, 연못, 축대 등이 어우러져 사당이라기보다는 잘 가꿔진 정원 모습이었다. 문화해설사의 안내에 따라 7명의 신위를 모신 5채 신당을 둘러봤다. 드라마 속에서 왕을 사이에 두고 암투하던 후궁들이 한 담장 안에 잠들어 있다고 생각하니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졌다. 청와대 인근에 이렇게 아담하고 정갈한 공간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웠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존재 자체가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문화재청은 그동안 청와대 특별 관람객에게 제한적으로 개방하던 칠궁을 6월부터 시범 개방했다. 청와대 관람을 하지 않더라도 화~토요일 매일 5회(오전 10‧11시, 오후 2‧3‧4시), 회당 60명씩 무료로 볼 수 있게 됐다. 입장일 6일 전 경복궁 누리집 웹사이트에서 예약하면 참여할 수 있다. 칠궁을 관람하고 나오는 길에 청와대 사랑채 1층에서 열리는 청와대소장품 특별전을 둘러보자. 청와대가 수집한 작품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정권이 바뀜에 따라 수장고를 오가다가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전혁림 화백의 ‘통영항’도 전시했다. 4·27 남북정상회담 때 판문점에서 남북 정상이 앉았던 곳을 재현한 포토존도 있으니 기념사진을 남기기에도 좋다.
- 2018-06-14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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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으로 보고 궁궐에서 찾는 '궁궐의 우리 나무'
- 창경궁에는 영조 38년(1762), 뒤주에 갇혀 죽어가는 사도세자의 모습을 지켜본 나무 두 그루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바로 선인문 앞 금천 옆 회화나무와 광정문 밖의 아름드리 회화나무다. 이렇듯 우리 역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나무들을 궁궐에서 찾아보는 것 어떨까? 유익한 안내서가 되어줄 ‘궁궐의 우리 나무’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궁궐의 우리 나무’ 박상진 저 자료 제공 눌와 5대 궁궐 안 나무를 한눈에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종묘, 덕수궁에서 자라는 나무들의 위치를 하나하나 표시한 지도가 담겨 있다. 궁궐별로 나눠 각 파트의 첫 장에 앞서 말한 지도를 펼친 면으로 보여주고, 나무마다 상세 위치를 확인할 수 있도록 확대된 지도도 제공한다. 실제 궁궐에 방문하게 된다면 두꺼운 책 대신 부록으로 들어 있는 한 장짜리 지도를 가져가자. 5대 궁궐 안 나무 위치뿐만 아니라 건물, 탑, 장승, 시설물, 탐방로, 음수대 정보까지 한눈에 볼 수 있어 편리하고 유용하다. 이파리 모양으로 나무 찾기 각각의 나무를 소개하기 전 서두에 나무 이름 아래 이파리 사진을 먼저 보여준다. 형태가 비슷해 헷갈리거나 이름을 모르는 나무의 경우 이파리 모양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옆 페이지에는 나무의 전체적인 모습을 찍은 사진이 나온다. 물론 계절이나 궁궐의 조경관리, 자연재해 등에 따라 조금씩 외형이 변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을 통해 나무에 대한 기본 정보 및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동의보감’ 등에 기록된 다양한 이야기까지 엿볼 수 있다. 종에 따라 다른 나무 구별법 벚나무만 하더라도 왕벚나무, 산벚나무, 올벚나무, 능수벚나무 등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종류만 10가지가 넘는다. 이처럼 같은 듯 다른 나무들을 구별해볼 수 있도록 사진과 함께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그밖에 회화나무와 주엽나무, 매화나무와 살구나무 등 종은 다르지만 생김새가 비슷해 헷갈리는 나무들에 대한 구별법도 살펴볼 수 있다. 나무껍질이나 꽃, 열매 등도 사진으로 실려 이파리 모양과 더불어 참고하면 나무 찾기에 도움이 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plus1 고궁 나들이를 가는 날 시기가 맞는다면 ‘2018 고궁음악회’를 즐겨보는 것도 좋겠다. 6월 중 경복궁에 방문하면 수정전 일원에서 고궁음악회를 관람할 수 있다(주간: 7월 29일까지 매주 금·토·일요일 15:30~16:15/야간: 6월 17~30일 20:00~20:55). 창경궁에서는 5월 20일부터 6월 2일까지, 7월 22일부터 8월 4일까지 야간공연을, 창덕궁에서는 8월 31일부터 10월 28일까지 주간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plus 2 복사나무, 즉 복숭아나무 숲은 흔히 무릉도원이라 불리며 신선사상과 이어져 유토피아의 대명사가 됐다. 조선 세종 29년(1447),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본 복사나무 숲에 대해 화가 안견에게 이야기한다. 이에 안견은 그 광경을 사흘 만에 그림으로 완성했는데 그때 그린 작품이 바로 ‘몽유도원도’다. 이밖에 천도가 열리는 복숭아 과수원을 지키는 손오공의 이야기가 담긴 ‘서유기’, 시인 도연명의 ‘도화원기’ 등 다양한 작품에서 이상향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복사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plus 3 창덕궁과 창경궁의 전경을 조감도식으로 상세하게 담은 조선시대 궁중회화 ‘동궐도(東闕圖)’에 그려진 나무 중 현재도 볼 수 있는 나무들이 있다. 창덕궁 돈화문 주변의 회화나무들과 봉모당 뜰 앞 향나무가 그 대표적인 예다. 특히 동궐도에서 보면 동서로 길게 뻗은 향나무 가지들을 6개의 받침목이 지탱하고 있는데, 현재도 당시와 흡사한 모습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 2018-06-04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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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문화와 만나는 길
- 요즘은 ‘둘레길 걷기’가 대세다. 매일 30분에서 1시간 정도 집 근처에서 산책하고, 둘레길 걷기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 하는 것이 좋다. 걷기 왕초보인 필자가 걸어보니 건강을 지키는 데 알맞은 거리와 시간은 10km 안팎의 3시간 정도다. 아무리 건강을 위해 걷는다 해도 무작정 걷기만 하는 곳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걸으면서 역사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길이 좋다. 성곽 따라 낙산공원 한양도성박물관을 관람한 뒤, 성곽길을 따라 올라간다. 낙산 성곽은 영화나 드라마 촬영이 많이 이루어지는 곳인데, 석양과 야경이 특히 아름답다. 낙산공원 전망대에서는 서울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성 밖으로 나가면, ‘지봉유설(芝峰類說)’을 쓴 이수광이 살았다는 ‘비우당(庇雨堂)’이 있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가 빨래를 하면 자주색 물이 들어서 ‘자지동천(紫芝洞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샘도 있고, 정순왕후가 기거했던 정업원(淨業院)도 있다. 낙산공원에서 내려오는 길에는 이화동 벽화마을과 이승만 대통령이 해방 후 귀국해서 살았던 이화장(梨花莊)도 관람할 수 있다. ✽동대문역 10번 출구→동대문성곽공원→한양도성박물관→낙산공원→중앙광장→동숭동 어린이집 길→이화동 벽화마을→이화장(사전예약) 성북동 동네 한 바퀴 길상사는 법정 스님의 저서 ‘무소유’를 읽고 감명을 받은, 요정 ‘대원각’ 주인 김영한이 대원각을 기증해 만든 사찰이다. 길상사에는 특별한 것 3가지가 있다. 김영한과 시인 백석의 사랑 이야기가 담긴 시비(詩碑), 법정 스님의 유품실인 진영각, 성모 마리아 상을 닮은 관세음보살 상이다. 최순우 옛집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혜곡(兮谷) 최순우가 살던 집이다. 이곳에서 그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집필했다. 최순우 옛집을 나와 대로변을 따라 위로 걸어가다 보면 덕수교회가 나온다. 이종석 별장은 덕수교회 뒤편에 있으며 교회에서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 별장은 마포에서 젓갈을 팔아 대부호가 된 상인 이종석이 지은 별장이다. 마지막 코스인 심우장(尋牛莊)은 독립운동가 만해 한용운이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왔을 때 지인이 마련해준 곳으로, 한용운의 유품과 그가 직접 심은 향나무가 있다. ✽한성대입구역 6번 출구→길상사(마을버스 02번 이용)→최순우 옛집→이종석 별장→심우장 조선의 정궁(正宮), 경복궁 경복궁 안에는 왕실의 역사와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고궁박물관과, 서민의 생활 문화를 알 수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이 있다.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5번 출구로 나가면 바로 고궁박물관이 나온다. 관람을 끝내고 경복궁을 돌아본 뒤, 신무문(神武門)을 통해 청와대 정문 앞길로 나와 경복궁 담을 따라 걸으면 다시 경복궁역 3번 출구 방향이다. 여기서 횡단보도를 건너면 ‘세종마을 음식문화거리’가 있다. 일명 ‘체부동 먹자골목’이다. ✽경복궁역 5번 출구→국립고궁박물관→경복궁
- 2018-04-06 14: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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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중교통으로도 다녀올 수 있는 길
- 시니어가 걷기 좋으려면 무리하지 않고, 대중교통으로 쉽게 갈 수 있고, 쾌적한 길이어야 한다. 피톤치드 향기 가득한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원시림 부암동 백사실 계곡, 도심의 섬 아차산을 걷기 좋은 길로 추천한다.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은 관악산 입구에서 석수역까지 7km에 이르는 서울 둘레길 5-2구간의 중간 호압사 뒤에 있다. 지하철 2호선 신림역이나 서울대입구역에서 버스를 갈아타면 관악산 입구에 쉽게 갈 수 있다. 관악산자연공원 입구에서 산책로를 잠시 걸으면 우측으로 서울둘레길 이정표가 나온다. 능선으로 곧장 걸으면 등산로이고, 중간 둘레길이 호암산 잣나무 삼림욕장으로 가는 길이다. 예전에는 흙길이었으나 몇 년 전 휠체어나 유모차를 가지고 갈 수 있는 무장애길이 함께 조성되었다. 취향에 따라 마음에 드는 길을 선택하면 된다. 잣나무 잎이 두툼하게 쌓인 이곳은 남향이라서 눈이 많은 겨울철에도 따뜻하다. 올해처럼 강추위가 몰아칠 때 꼭 찾고 싶은, 서울에서 보기 드문 천혜의 삼림욕장이다. 늘 푸른 잣나무의 피톤치드 덕분에 여름철에도 하루살이, 모기 등 해충이 없다. 쾌적한 공기에 가슴이 뻥 뚫리는 곳이다. 그늘이 크고 시원해 자리 깔고 쉬어가기에도 좋다. “내년 여름에는 여기에서 꼭 피서를 해야지!”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서 한 번쯤 터지는 감탄사다. 원시림 부암동 백사실 계곡 부암동 백사실 계곡은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창의문까지 걷거나 버스를 타면 갈 수 있다. 서울이면서도 서울 같지 않은 곳, 나무와 바위에는 푸른 이끼들이 가득하다. 계곡에는 1급수에만 산다는 버들치가 떼를 지어 놀고 있다. 울창한 나무가 하늘과 햇빛을 가려 낮에도 어스름한 달밤 같다. 옛 여인들이 모여 빨래를 하던 풍경이 절로 떠오르는 펑퍼짐한 바위도 보인다. 군데군데 도롱뇽, 두꺼비, 개구리가 서식하는 아름다운 생태 지역을 보존하자는 팻말이 보인다. 도심 속 원시의 비경이 오래도록 보존되면 좋겠다. 도심의 섬 아차산 아차산은 지하철 5호선 광나루역, 아차산역, 7호선 용마산역에서 바로 오를 수 있다. 일출과 일몰이 좋고 야간 산행도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산이다. 야트막하고 산세가 험하지 않아 누구나 오르기 쉽고, 산책로도 잘 조성되어 있어 아이들과 다녀와도 좋다. 연결된 용마산이나 망우리 공원까지 산행을 즐길 수도 있다. 동쪽은 구리시 전경이 같은 듯 다른 모습을 뽐내어 보여주고 남쪽은 푸른 한강이, 서쪽에는 도심의 건물들이 조개껍질처럼 발아래 엎드려 있다. 마치 도심의 바다에 떠 있는 작은 섬 같다. 이곳이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의 각축장이었다는 사실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아차산 보루군은 분포 지역으로 볼 때 고구려가 5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을 진압한 후 신라와 백제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6세기 중반까지 한강 유역을 둘러싼 3국의 정세를 규명하는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 고구려정, 해맞이광장, 아차산 5보루 등 전망 좋은 곳이 많아 굳이 정상까지 가지 않아도 아차산의 매력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 2018-03-2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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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나들이 어디로 갈까
- 봄바람 살랑살랑 불어오는 요즘. ‘방콕’이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분들 계신가? 부부가 혹은 가족끼리 또는 동성 친구끼리 모두가 즐길 수 있는 곳, 게다가 ‘먹방’까지 기대할 수 있는 곳으로 안내해볼까 한다. 경춘선 기차여행[김유정역]_실레마을 이야기길 따라 점순이를 만나다 7호선과 경의중앙선이 교차하는 만남의 장, 상봉역. 춘천 가는 기차는 대성리, 가평을 지나 출발한 지 72분 만에 멈춘다. 내린 곳은 근대문학 ‘봄봄’, ‘동백꽃’의 산실, 실레마을이 있는 김유정역. 역사 맞은편으론 ‘비단으로 병풍을 두른 산’, 금병산이 포근하게 안아준다. 역사를 빠져나와 약 5분 정도 걸었을까. 버선발로 마중 나온 ‘점순이’를 만난다. “그새 좀 컸는가? 반갑단 말보다 다짜고짜 키부터 재 보는데 잘 봐야 내 겨드랑 밑에서 넘을락 말락. 또 고갤 숙일밖엔 도리가 없다. 딸이 더 자라야 성례를 시켜줄 수 있다며 차일피일 미루고 일만 시키는 장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하면서 나를 충동질해대는 점순이, 반발하다가도 끝내 이용만 당하는 나는 정말 어리석은 머슴이던가. 빙장님, 올가을엔 꼭 성례를 시켜줘요. 더 이상은 못 참아요. 장인의 약속을 반신반의하며 뒷골 콩밭으로 향한다. 아침부터 부슬부슬 내린 비로 안 그래도 고즈넉한 잣나무, 소나무 숲 사이 길은 더없이 폭신폭신. 그 순간이다. 왁자지껄하는 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그녀들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결코 머물 수 없는 눈웃음의 그녀들이.” 아주 치명적이었던 들병이들 ‘눈웃음 길’을 스치듯 빠져나오면서 그 들병이 꾐에 빠졌던 근식이가 걷던 그 ‘한숨사연 길’을 돌아본다. 오죽하면 자기 집 솥을 훔쳤을까? 세월의 무게만큼 겹겹이 쌓인 잣나무 가지들을 밟고선 심호흡 여러 번에 팔다리도 죽죽 펼쳐본다. 오전 10시에서 12시 사이에 가장 많이 뿜어낸다지 아마. 이윽고 마주한 두 갈림길. 어느 쪽을 택할 텐가? 동백꽃(생강나무) 길 따라 정상도 좋겠고 산골나그네 길 따라 터벅터벅 걸어도 좋겠고. 오늘은 기어코 산골나그네가 병든 남편을 끌고 사라진 으슥한 산 저편으로 가볼 텐가? 김유정역 실레마을에선 김유정문학촌을 구경하고 난 다음 둘레길인 ‘실레마을 이야기길’을 반드시 한 바퀴 산책해야 한다. TV 프로그램 ‘알쓸신잡’의 그곳, 인쇄박물관이 지척에 있는데 많은 분들이 모르고 그냥 지나치고 만다. 김유정 선생이 귀향해 야학을 일으켰던 곳, 금병의숙(錦屛義塾)에서의 인증샷도 의미 있겠고 기차카페로 개조된 폐김유정역에서 타임킬링도 가성비 있다. 인근엔 레일바이크 장도 있고. 또 '먹방'도 빠질 수 없으리. 춘천 하면 닭갈비 아닌가? 역전에서 ‘점순네’를 찾으시라. 꽃 피고 새 우는 고궁 산책[창덕궁]_덕혜옹주가 남긴 마지막 메모를 찾아서 4월 어느 날. 마침 하늘빛은 미세먼지를 걷어내고 바깥 기운도 그리 차갑지 않다. 어제 생일을 챙겨주지 못한 아내를 위해 함께 집을 나섰다. 막상 어디로 가야 하나? 눈치를 살피는데 그냥 ‘가까운 곳’으로 가잔다. 더 어려운 숙제라고?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반겨주는, 다리품 많이 팔지 않아도 되는, 5대 궁궐 중 유일하게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창덕궁은 어떨까. 1405년 태종 때 제2의 왕궁으로 창건되어 임진왜란 이후 불타버린 경복궁을 대신한 곳. 마지막 임금 순종 때까지 약 270여 년간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한 곳. 그나마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고 ‘시크릿 가든’인 후원이 있어 자연과의 조화미와 전통의 조경미를 만끽한 적 있으신지. 그러나 오늘의 관심사는 따로 있다. 바로 낙선재! 경복궁의 건청궁이 그러하듯 창덕궁 내 단청을 하지 않은 유일한 곳. 여인의 '비운' 같은 게 서려 있다고나 할까? 일본에 볼모로 끌려갔다가 우여곡절 끝에 고국으로 돌아온 고종의 외동딸 덕혜옹주가 말년을 보낸 곳(정확히는 낙선재의 우측 끝에 있는 수강재). 두리번두리번 돌아서 드디어 만난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어쩌면 혼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것일까. 그녀의 마지막 편지(메모)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낙선재에서 오래오래 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 보고 싶습니다. 대한민국 우리나라.” 옹주는 1989년 4월 12일, 향년 77세로 이곳 낙선재에서 운명한다. 새들이 우짖고 꽃들이 피어나는 4월이면 다시 찾아오고 싶은 곳. 올봄에 방문하신다면 한 가지 추가할 곳이 생겼다. 작년 말에 재개관한 창경궁 대온실이 바로 그곳. 후원 쪽으로 가면 이웃한 창경궁과 연결되는 출입구가 있는데 지척이니 함께 둘러보면 ‘엄지 척’ 장담할 수 있다. 세종마을 도보여행_이 골목 저 골목 헤매기 좋아라 세종마을은 인왕산 동쪽과 경복궁 사이에 있는 청운효자동과 사직동 일부 지역을 말한다. 경복궁 서편에 있다 하여 북촌에 대비해 ‘서촌’으로 소문난 곳이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입구를 나와 대로를 따라 걷노라면 이윽고 우리은행 건물이 나타난다. 도보여행은 여기서부터 ‘딱’이다. 좌측 골목길로 접어들면 세종마을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인 ‘이상의 집(터)’이 나온다. 백부의 권유로 건축과에 입학한 시인은 1929년 3월, 수석으로 졸업하는데 화가의 꿈을 늘 간직하고 있었다고. 얼핏 카페 같은 이곳엔 비밀의 문이 있는데 그곳을 통하면 잠시나마 그와 호흡할 수 있다. 한 걸음 두 걸음 올라선 다음 이내 날개를 펼쳐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훨훨 날아올라보라. 이걸 놓치고선 여길 다녀갔다 말할 수 없으리. 할머님과 며느님께서 푸근한 미소와 여유로 차근차근 귀엣말하시듯 이곳저곳 소상히 들려주셨던 ‘이야기가 있는 헌책방’이 다음 코스다. 고인이 된 창업주 할아버지가 결혼하면서 부부의 가운데 이름을 따서 상호로 정했다는 곳, 대오서점이다. 분수를 아는 즐거움 정도로 해석되는 가훈 이야기, 다락방 사연, 풍금 이야기, 드라마 ‘상어’의 주인공(손예진과 김남길) 뒷담화(둘은 흥행작 ‘해적’에서 다시 인연을 이어간다)까지 줄줄 풀어놓으셨는데 그동안 세월이 좀 흘렀나보다. 없던 액세서리 진열대도, 사진 촬영금지 팻말도 보이고 그새 입장료(2500원)도 훌쩍 인상됐다. 오늘따라 주인장도 안보이고 대신 시니어 알바께서 맞이해준다. 가수 아이유가 앨범사진을 찍었다는 상업적 내음 물씬 나는 설명엔 노코멘트할밖에. 좀 걷다 보면 공통으로 생각나는 건 뭐? 때맞춰 신기하게 나타난 곳이 ‘통인시장’이다. ‘골라먹는 맛과 구경하는 재미가 있는 곳’이다. 잡도리 쉼터 파라솔 아래에서 ‘셀프’로 즐기기도 편하다. 먼저 1인 5000원 하는 도시락을 구입하면 되는데 엽전 열 냥을 제공하니 하나에 500원인 셈. 그 복잡한 골목길에서 기다랗게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 박노수미술관을 지나서 수성계곡 물소리를 벗 삼아 기린교를 건너는 상상도 분명 힐링이다. 다리품을 팔아 ‘시인의 언덕’에 오르면 북한산은 물론 북악산 아래 청와대, 경복궁 일원이 한눈에 들어온다. 교통 편리한 역세권에 세종대왕, 정철을 비롯해 수많은 다양한 인물들이 살다 간 흔적이 이리도 집약된 곳 또 어디에 있을까? 종로구에 신청하면 해설사와의 동반 투어도 가능하니 봄날엔 놓치지 마시라. 서촌에 바람이 부는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가? 봄날은 가고 있다.
- 2018-03-07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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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년 설날, 서른 번째 설날연휴
- 올해 설날은 2월 16일 금요일로 주말을 포함해 나흘의 연휴를 즐길 수 있다. 지난해 추석 황금연휴처럼 쉬는 날이 많지는 않지만, 30년 전만 해도 음력설에 이러한 연휴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1989년, 민속의 날로 정했던 ‘구정’을 ‘설날’로 개명하며 동시에 이틀의 연휴가 더해졌으니 말이다. 한편 당시 3일 동안 쉴 수 있었던 신정연휴가 2일로 단축되며 설날연휴에 고향을 찾는 귀성객이 점차 늘어났고, 연휴를 여유롭게 즐기러 고궁과 테마파크 등을 찾는 이도 많아졌다. 설날 귀성 열차표 대란 1994년 설날연휴를 맞아 고향에 내려가기 위해 서울역에서 기차에 탑승하고 있는 가족의 모습. 당시만 해도 설날 귀성 열차표를 구하려면 수개월 전부터 추운 날씨에 담요를 뒤집어쓰고 기다려야만 했다. 그해 철도청은 승객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한 예매제도 개선책으로 컴퓨터 추첨 방식 도입을 추진하는 등 귀성 열차표 예매 묘안을 찾기 위해 대규모 여론조사를 벌이기도 했다. 고속터미널에 시찰 나온 서울시장 1986년 설날(당시 민속절) 당일 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의 풍경. 새벽부터 귀성객으로 붐빈 터미널에 염보현 서울시장이 방문해 시민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그해 교통부는 귀성인파 총 200만 명 중 고속버스를 이용한 승객을 45만5000명으로 추산했다. 한복 입고 고궁나들이 1989년 첫 설날연휴가 시행되던 해, 일찍 세배를 마치고 귀경한 시민들은 한복을 입고 경복궁과 덕수궁 등 고궁나들이를 즐겼다. 또 가볍게 극장가, 어린이대공원, 대학로 등을 찾거나 스키장, 온천 등에서 여유를 보내는 이도 많았다. 당시 포근한 날씨와 긴 연휴 덕분에 거리에는 색동옷 차림의 아이들과 한복을 입은 어른들이 여느 해보다 많았다. 흥겨운 민속놀이 1990년대 초 설날을 맞아 가족이 함께 한복을 입고 널뛰기를 즐기는 모습. 당시 설날연휴 동안 서울 시내 고궁에서는 풍물과 남사당놀이 등 민속예술과 널뛰기, 투호, 윷놀이 등 다양한 놀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1988년 개장한 국내 최초의 테마파크 서울랜드와 1989년 개장한 롯데월드 등에서 열리는 놀이마당과 풍물패 공연 등을 보러 가는 것도 인기였다.
- 2018-02-09 10: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