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무들 휘늘어져 산사 초입이 시퍼렇다. 나무 중 매양 으뜸으로 치는 게 소나무다. 고난이 덮쳐도 떠나지 않는 친구가 소나무라 했다. 사명대사는 한술 더 떠 ‘초목의 군자’라 일렀다. 솔에 달빛이 부서지면 그걸 경(經)으로 읽는 게 수행자다. 산사에 꽉 찬 솔의 푸름을, 그린 이 없이 그려진 선화(禪畵)라 해야 할까보다.
오래 묵어 한결 운치 있는 암자 세 곳을 둘러볼 수 있는 숲길이다. 매표소 앞 공터에 주차한 뒤, 봉정사와 영산암을 거쳐 1km쯤 산길을 오르면 개목사다. 천등산(해발 574m) 정상까지 오른 뒤 하산하는 코스(4km)엔 두 시간 반 정도가 소요된다.
안동 봉정사. 규모보다는 잘 늙은 전각들로 이름난 절이다. 국내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극락전을 비롯해 국보와 보물이 많다. 늙어 쇠락하기는커녕 웅숭깊은 격조로 아름다운 전각들. 풍상을 겪으면 겪을수록 환한 진면목이 드러나는가. 오랜 침묵과 풍화로 이미 해탈한 전각의 고색창연에 형언하기 어려운 깊이가 서려 있다. 법당의 갈라진 기둥에 시간의 불가해한 손길이 아른거린다. 시간은 그냥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무수한 빗금으로 터진 기둥이 통째로 시간의 족적이지 않은가.
고승의 법문은 심오해 더러 지루하다. 무심히 낡고 닳은 전각에 더 끌린다. 하염없이 늙었으니 가만히 조는 게 나의 일, 무슨 말이 필요하랴! 전각이 전하는 뜻이라면 그쯤일 게다. 그 완전한 방임에 마음이 평온해진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진다. 전에 한국을 방문한 엘리자베스 영국 여왕이 “가장 한국적인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해 데려간 곳이 봉정사다. 여왕은 이곳에서 무엇을 보았나. 무애행(無碍行)으로 세상을 건넌 경허. 그는 “홀연히 생각하니 몽중(夢中)이라” 했다. 집착도 욕망도, 풍경도 법당도 헛꿈 아닌 게 없더란 얘기다. 꿈에서, 미망에서 조속히 깨어나는 걸 깨달음이라 했다. 전각만 곱살하랴. 깨친 눈엔 미추(美醜)도 생사도 하나일 게다.
큰 돌 잔돌 잘 끼워 맞춰 쌓은, 길고 높은 계단을 오르면 영산암이다. 봉정사와 이마를 맞댄 암자다. 절이 쌍으로 앉았으니 겹으로 포개진 극락인가. 초목들이 기차게 뿜는 초록 속에 앉아 있기는 영산암도 마찬가지다. 작아서 안온하고, 고요해서 그윽한 암자다. 뜰에선 꽃이 핀다. 부처의 말씀을 머금고 다소곳이 개화해 향화(香火)처럼 갸륵하다. 전각들의 노구마다 인자한 미소 같은 게 어려 통으로 관음보살이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을 이 암자에서 찍은 까닭을 짐작할 만하다.
제자들이 어느 날 조주에게 물었다. 달마가 서쪽에서 온 이유를. 이에 조주가 아주 알쏭달쏭한 답을 했다. “옜다, 판치생모(板齒生毛)다!” 판때기 이빨에 털 났다는 뜻이다. 이게 무슨 썰? 다 닥치고 의단(疑團, 의심을 일으키는 실마리) 하나로 맞짱 뜨라고 던져준 솔루션이었다. 불가의 전언들은 묘해서 일단 골치 아프다. 그러나 멍청이가 아닌 이상 끝내 쿨하게 알아먹지 못할 게 없다.
암자 뒤편으로 난 산길을 오른다.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 소사나무 등속이 평범하게 어우러졌다. 아뜩한 벼랑이 없어 볼만한 게 드물지만, 술렁술렁 한가하게 걸을 만한 숲길이다. 스님들이 포행삼아 오르내리는 길일 게다. 불당만이 도량이랴. 금칠을 자신 불상만이 불상이랴. 삼라만상이 화엄경이니 나무도 숲도 경전으로 족하다. 곰삭은 둥치에 새 가지들 돋아 길길이 치오르는 저 고목을 보라. 죽어가며 살아 있으니 굳세어 선객(禪客)이다. 한 번 태어난 이승, 그냥 가기 섭섭해 마지막 기름을 짜 불을 댕기나? 백척간두진일보! 이미 종을 친 생이나 한 발 더 허공으로 내딛는다. 내가 삶에 바치고 싶은 기도는 대체로 저런 모습이다.
나무들이 분비하는 에테르를 머금어 공기는 그지없이 청량하다. 산 아래엔 바이러스가 들끓는다. 구차한 일상에 감염병까지 겹쳤다. 모두들 마스크로 입을 틀어막고 돌아다니는 세상을 상상이나 해봤던가. 모두들 용을 쓰나 저놈이 쎈 놈이다. 황소고집을 부린다. 코뚜레를 뚫을 곳이 없다. 천국의 한 치 곁에 지옥이 있고, 지옥의 한 치 곁에 천국이 있다 했다. 불가의 화법으로는 절체절명과 고립무원이 오히려 찬스다. 아픈 세상, 함께 아파하며 갈 수밖에 없다. 나무들처럼 사람도 더불어 살면 숲이다. 숲에 무슨 낙심이 있으며 무슨 패닉이 있겠나.
산길이 끝나는 자리엔 또 암자가 있다. 개목사다. 여기엔 바람소리와 새소리만 있다. 스님은 고적해 간혹 좀이 쑤실 게다. 오늘은 일삼아 일을 만든 날? 연장을 들고 활개 치는 몸짓이 흥겨워 댄스는 저리 가라다.
※ ‘운수 좋은 날’은 운세 전문 사이트 '운세사랑'으로부터 띠별운세 자료를 제공받아 읽기 쉽고 보기 좋게 재구성한 콘텐츠입니다.
◈ 쥐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배보다 배꼽이 크다고 작은 일이 큰일로 나타나니 미리 조심하라. 눈앞에 이익만을 생각하다 후에 화를 입을 수 있으니 신중히 결정하는 것이 길할 것이다. 성급한 속단은 금물이니 자중하라.
•84년생 : 답답한 하루이니 가던 길을 조용히 감이 재수를 부르는 길이다.
•72년생 : 재운이 침체되고 머리 아픈 사건이 생길 조짐이니 단속하라.
•60년생 : 요행수는 무리이고 공들인 만큼은 들어오는 운이다.
•48년생 : 재수는 좋으니 어떤 일에 나서기보다는 바보가 되면 얻음이 크다.
◈ 소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상)
오늘의 일진은 믿고 살아야 하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믿을 사람이 없으니 힘만 든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혼자하기에는 여력이 부족하다. 타의 손을 빌리고자 하나 귀인은 멀리있구나. 일신이 곤고해진다.
•85년생 : 재수는 길하나 친구 애정 문제가 힘들어 애먹는 운이니 잘 돌 보라.
•73년생 : 원앙 문서이니 초대받아 인연 생기고 재수도 길하다.
•61년생 : 문서 단속만 잘하면 재수는 대길하니 투자도 좋다.
•49년생 : 우선 할 일을 다하고 다른 일을 생각하면 잘 풀려 나간다.
◈ 호랑이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뜻밖의 일로 구설이 분분하니 어떤 일이 생기는지 잘 관찰하라. 예상하지 않은 난관에 부딪히게 되니 일신이 곤고해진다. 일을 행하기 이전에 잘 살펴봄이 길 할 것이니 망동하지 말라.
•86년생 : 어려운 고비는 넘어 갔으나 다시 성의를 다해야 뒤가 쉬운 법이다.
•74년생 : 연인과 다툼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다투면 큰 일이 생긴다.
•62년생 : 친구를 찾아봄이 문제 해결의 열쇠가 되고 도움을 받는다.
•50년생 : 고목에 꽃이 피는 격이라 오래는 못 가니 속전 속결로 처리하라.
◈ 토끼띠총운 (금전운 : 상, 애정운 : 상,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용기와 힘을 줄 수 있는 좋은 말을 해보면 다 함께 좋으리라. 어려운 환경에서 서로에게 의지하며 일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니 서로에게 위안이 되는 말은 큰 힘이 될 것이다.
•87년생 : 친구에게 칭찬해준 일이 이제 나에게로 돌아오니 일이 쉽다.
•75년생 : 다정한 말 한마디가 막혔든 사이를 풀어주니 재수도 대길하다.
•63년생 : 재수는 없으니 오히려 말조심하고 지내면 무사하리라.
•51년생 :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 한 마리도 못 잡으니 한가지만 충실하라.
◈ 용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모든 준비는 마음이 제대로 정리됨이니 안정되면 모든 것을 해낸다.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먼저 스스로를 잘 다스려야 할 것이다. 어지러운 마음으로 행하다 화를 당할 우려가 있다.
•76년생 : 좋은 일만 생기는 하루가 되니 마음을 활짝 열면 안 되는 일이 없다.
•64년생 : 초조불안은 하나 하나씩 해결기미가 보이니 안정하고 정진하라.
•52년생 : 사방에 문서가 난동하니 문서 도장을 조심해야 손해가 적다.
•40년생 : 좋은 새로운 연분이 생기는 운이라 만나보면 마음에 든다.
◈ 뱀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많이 있을 때 절약하는 정신을 살리는것이 어려움을 당해도 이겨낸다. 재운이 기하여 많은 재를 취하게 될 것이나 후에 어려울 시기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자세가 필요할 시기이다.
•77년생 : 주머니에 구멍난 듯 재물이 새는 운이라 출입에 신경을 써라.
•65년생 : 손재수가 붙어오니 두문불출하면 일부는 막을 수 있으리라.
•53년생 : 마음은 불편하더라도 주석을 만들어야 일이 풀려나간다.
•41년생 : 마음을 비웠다면 조용한 가운데 상큼한 일이 나를 반겨준다.
◈ 말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려운 고비를 넘어보지 않으면 힘든 세상을 살아가기가 어렵다. 스스로를 채찍질 할 것이니 좀더 나은 미래에 대한 노력이 될 것이다. 다소 어려운 난관에 부딪히더라도 잘 이겨내는 지혜가 필요하다.
•78년생 : 좋은 방책을 찾기 전에 일에 무리하는 것을 먼저 삼가라.
•66년생 : 동료와 구설수로 마음은 불편하나 금전 면에 이익이 있다.
•54년생 : 가기 싫고 하기도 싫은 일도 해보니 예상외로 소득이 크다.
•42년생 : 힘 빠지는 일만 생기고 속상하는 일이 많으니 출입을 삼가라.
◈ 양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도리를 지킴은 사람이 살아가는 근본이니 잘 지키면 나에게 더 좋다. 인간관계를 돈독히 할 것이니 후에 길함이 함께 할 것이다. 자신의 사리사욕만 채우지 말고 두루 살핌이 길할 것이다.
•79년생 : 사고력이 떨어져 실수할 염려가 많으니 조심해서 진행하라.
•67년생 : 분통터지는 일이 생길 수가 있으니 사전에 미리 보완하라.
•55년생 : 주장도 누가 받아줄 때 하는 것이니 상황을 잘 살펴서 처리하라.
•43년생 : 터무니없는 일로 답답한 운세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
◈ 원숭이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비가 오는 곳도 있고 맑은 곳도 있으니 희비는 엇갈리는 것이다. 길흉이 번갈아 있으니 도모하는 일이 있다면 잘 살피어 행하는 것이 길할 것이다. 세상사 사람 마음먹기에 달렸으니 노력하라.
•80년생 : 기분만 가지고 덤비면 힘드는 일이 많으니 잘 살펴보고 진행하라.
•68년생 : 오전은 흐리고 오후가 맑으니 어려운 일은 오후에 잡음이 길하리라.
•56년생 : 갈등이 심하니 모든 일에 냉각기를 가져봄이 해결의 근본이 된다.
•44년생 : 금강산 구경도 식후경이라 기분이 안 좋아도 먹을 것은 먹고 생각하자.
◈ 닭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하,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하늘과 땅 사이 넓고 좁음을 시시비비 말고 순응함이 득이 되리라. 일신에 곤고함이 찾아 들 것이니 망동은 금물이다. 구설과 시비가 분분하니 하루를 자중하며 보내라.
•81년생 : 이성으로 인한 망신수가 비치니 조심하면 재수는 안 막힌다.
•69년생 : 감 나라 배나라 하는 곳에 가지 마라. 시비가 사람 잡는다.
•57년생 : 울창한 숲도 겨울에는 앙상해지니 때를 읽을 줄 알면 능히 해결하리라.
•45년생 : 대접받을 일이 생겨 즐겁고 새로이 들어오는 것이 많다.
◈ 개띠총운 (금전운 : 중,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떤 일이든지 결단력을 필요로 하니 때가 되었을 때 내리는 것이다. 지지부지하다 흐지부지 되는 것과 같으니 적절한 시기에 빠른 판단력으로 길함을 받을 것이니 시기를 놓치면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
•82년생 : 싸움에서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니 지고도 이기는 법을 배우자.
•70년생 : 한 번은 크게 얻으리라. 어려운 결정에 이익이 크다.
•58년생 : 욕심을 내어보는 운이니 꾀임만 조심하면 재수가 대길하리라.
•46년생 : 문서 일이 조금 늦어지나 좋은 소식으로 일이 성사된다.
◈ 돼지띠총운 (금전운 : 하, 애정운 : 중, 건강운 : 중)
오늘의 일진은 어차피 한 번 시작한 인생이라 명분만 세운다면 어려운 일이 없다. 실리를 추구하기 보다 일신의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후에 길할 것이다. 눈앞의 작은 실리는 명예를 실추 시킨다. 망동은 금물이다.
•83년생 : 묘수가 사람 죽이는 일이 되니 잔꾀를 부림은 화를 자초한다.
•71년생 : 잡힐 듯 하던 일이 어긋나니 새로 점검해봐야 길이 열린다.
•59년생 : 머뭇거림은 오히려 손해를 초래함이라 밀고 나감이 좋으리라.
•47년생 : 일은 잘 돌아가는데 돌아가는 만큼 소득이 안 오르니 답답 하도다.
얼마 전 박수근 그림 한 점을 강원도 양구군에서 사들였다는 기사가 났다.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 시리즈 6점 중 한 점이다. 구매 가격이 무려 약 8억 원이다. 시골 재정이 어려운데도 이러한 과감한 결정을 한 양구군에 경의를 표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나는 여행을 좋아해 방학이나 휴가철에 자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지구촌 사람들 삶의 모습이나 환경을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다. 힐링도 하고,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신비로운 자연경관은 말할 것도 없고 나라마다 찬란한 문화유산은 자랑거리다. 여행 중 어디를 가든 빼놓지 않고 가는 곳이 박물관이요 미술관이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다빈치의 ‘모나리자’ 그림을 봐야 하고, 네덜란드에 가면 뭉크의 ‘절규’를 봐야 한다. 유명한 그림 한 점이 있는 곳에는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사진 한 장 찍기도 어렵다.
지난번 오스트리아 빈에 갔을 때 벨베데레 궁전을 들렸을 때이다. 구스타프 클림트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처음 그의 진품 ‘키스’작품이 공개된다는 거였다. 우리가 사진이나 서적을 통해서 많이 봐왔던 작품이다. 그런데 그의 진품이 100년 만에 전시되는 것이고 또다시 진품을 만나려면 100년을 기다려야 한단다. 이번에 못 보면 내 생애 진품은 구경도 못 하는 것이 된다. 아니나 다를까 기념관에 도착하니 관람 인파로 가득하다. 요즘은 사진기술도 발달하고 복제품도 얼마든지 있는 시대다. 유튜브에는 클림트의 ‘키스’작품 제작 방법까지 알려져 많은 사람들 따라 그리고 있다. 그렇게 쉽게 볼 수 있건만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가 무엇일까? 의문을 품고 몇 시간을 기다려 진품 앞에 섰을 때의 그 짜릿한 느낌과 감동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평생을 두고 잊히지 않을 것 같다. 마치 작가의 고뇌와 영혼이 전이되어 오는 느낌이다.
또 한 번은 일본 다카마쓰 나오시마 지중미술관을 갔을 때이다. 모네의 ‘수련’시리즈 몇 점이 전시되어있다고 했다. 또 긴 줄을 서야 했다. 여긴 더 엄격하다. 한 번에 꼭 열다섯 명씩만 들어간다. 앞 조가 다 보고 나서야 다음 조가 들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봐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려 들어간 전시장은 쾌적하기 그지없었다. 사람들로 빽빽이 붐비던 생각을 하면 천양지차이다. 모네의 진품 한 점이 지역경제에 큰 힘이 되는 셈이다. 유명 화가의 진품을 보는 것 자체만도 감동이었지만 그 쾌적한 공간에 그림 감상을 한 경험이야말로 특별히 대우를 받은 느낌이었다. 사진 촬영이 금지라 사진 한 장 없지만, 눈과 마음으로 찍어온 감동이 지금도 짜릿하게 전해온다.
양구군이 박수근(1914~1965)의 대표작품 '나무와 두 여인' 을 7억 8750만 원을 들여 구매했다고 한다.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다. 1년 치 작품구매 예산을 몽땅 투입해 27×19.5cm짜리 손바닥만 한 그림에 투입한 셈이다. 소장자도 박수근 미술관을 위해 1억 원의 통 큰 할인을 했다고 한다.
이 그림은 특히 소설가 박완서 ‘나목(裸木)’의 영감이 된 작품으로 유명하다.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2년 당시 미군 기념품 판매점 내 초상화 부에서 박수근과 박완서가 있었다. 훗날 작가 박완서가 함께 일했던 당시를 회상하며 박수근을 주인공으로 쓴 작품이 나목이다. 처음엔 잎도 없는 ‘고목’이라 생각했으나 그 그림이 시든 ‘고목(古木)’이 아니라 언젠가 싹을 틔울 봄날을 기다리는 ‘나목(裸木)이었음을 깨닫는다’는 이야기다. 박수근의 이 그림은 당시 가난했던 서민의 삶의 모습을 연민의 시선을 담아 그린 그림이라 한다.
이러한 미술품이 장차 지역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 문화 브랜드임을 믿는다. 그림 구매를 위해 백방으로 뛰며 설득한 미술관 관장과 이를 만장일치로 찬성한 양구 군청의 결정에 찬사를 보낸다. 이 작품은 오는 5월 6일부터 열리는 특별전 ‘나목: 박수근과 박완서’에서 선보인다고 하니 나도 꼭 찾아가서 관람을 해야겠다.
사진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이야기를 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화면 속에 있는 피사체 자체만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면 속의 피사체와 관련되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바깥의 이야기를 함께 엮는 방법이다.
앞의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진은 호명산(경기도 가평군 소재) 산행을 마친 후 귀가하기 위해 상천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역 앞 시골 마을에서 발견한 장면이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농가 앞에 고목이 된 감나무가 서 있고 굳어진 시멘트 부대 위에 고양이 한 마리 졸고 있다. 때마침 따사한 석양 빛줄기가 고양이를 비추고. 낡은 삽 한 자루가 한가롭게 농가 벽면에 세워졌다. 기자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한 편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고양이 잠 깨울까 조심하며.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사용하던 삽자루를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새참으로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신 후 툇마루에 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낮잠을 즐기고 있겠지. 한 줄기 석양의 따사한 빛줄기를 즐기며 함께 졸고 있는 고양이. 시골의 나른한 오후 풍경” 카메라로 한 편의 이야기를 그린 셈이다. 사진 화면 속의 피사체(고양이, 삽자루, 농가, 감나무, 석양 빛줄기 등)와 그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화면 바깥의 다른 장면을 상상하도록 했다.
또 하나의 사진(앞 사진 참조)을 예로 들어보자. 정년퇴직한 후 사진 취미에 몰입하여 나름의 독특한 사진을 만들고 있는 유병창(70세) 작가의 사진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개인 전시회로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보여준 작가다.
이 사진은 제주도 주상절리를 촬영한 것의 극히 일부분이다. 화가가 그린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하나의 수채화라 해도 좋을 듯. 유 작가는 화산으로 생긴 기묘한 그 모습만을 보지 않았다. 화면 속의 장면에서 지구 변화의 숱한 이야기도 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이 들어 있는 사진첩의 제목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The Echo from A Distant Time(먼 옛날의 메아리)”.
피사체를 통해 먼 옛날 우주의 소리를 느끼게 한다. 화면 바깥세상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처럼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복사하듯 찍을 수도 있으나 화면에 보여주는 피사체와 연결된 바깥의 이야기도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사진 역시 그림이나 조각 등과 같이 한 분야의 예술이기에 그렇다. 셔터 누르기에 앞서 그런 메시지를 생각해 보면 새로운 사진이 만들어질 것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천문학자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색약 판정으로 꿈을 저버리고 만다. 절망으로 보낸 질풍노도의 시기, 그를 붙잡아준 건 한 그루의 나무였다. 어떤 악조건에도 가지를 뻗어가는 나무가 보여준 단단한 삶의 태도. 그렇게 얻은 인생의 가르침을 보은으로 여기며 우종영(禹鍾榮·64)은 아픈 나무들을 위해 나무의사가 됐다. 어느덧 인생 후반, 나이가 들수록 제 속을 비우고 작은 생명들을 품는 고목을 보며 그는 다짐한다. 남은 날들을 꼭 나무처럼만 살아가자고.
나무의사 우종영은 그동안 나무로부터 얻은 삶의 지혜와 깨달음을 나누고자 에세이 ‘나는 나무에게 인생을 배웠다’를 펴냈다. 20년 전 출간한 ‘나는 나무처럼 살고 싶다’와 메시지는 비슷하지만, 중년 이후 인생의 깊이가 더해지며 한층 더 성숙해진 모습이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했어요. ‘자연은 늘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 말을 번역하는 것은 인생의 경험이다.’ 나무뿐만 아니라 어떤 생명이든 우리에게 말을 걸고 표정을 짓는데, 그건 저마다의 경험에 비춰 해석하게 된다는 거죠. 연륜이 쌓인 만큼 자연이나 사회를 대하는 시각과 깊이가 달라졌어요. 나무를 바라볼 때도 단순히 특성보다는 그 품성을 이해하려 하고요.”
그는 누군가를 만날 때면 줄곧 그이와 닮은 나무를 떠올리곤 한다. 전에는 겉으로 보이는 성향을 두고 비슷한 나무를 찾았다면, 이제는 사람과 나무가 지닌 사연과 태도에 주목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닮고 싶은 나무’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단다.
“한때는 소나무를 닮아야지, 대나무를 닮아야지 그랬다면, 이제는 꼭 어떤 나무를 정하지 않아요. 가령 산에 가면 바위틈에 자라는 작은 팥배나무를 볼 수 있는데, 이 나무가 산 아래 계곡에서 뿌리를 내리면 어마어마한 거목이 돼요. 그러니 산에 있던 팥배나무는 자신이 뿌리내린 곳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자신의 본성을 억제한 거죠.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으니까요. 우연히 만난 팥배나무에게 인내와 강인함을 발견하듯, 요즘은 그때그때 마주치는 나무들의 품성을 본받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요.”
높아질수록 뿌리와는 멀어진다
척박한 땅에서도 하늘을 바라보며 자라던 나무들은 어느 순간 성장을 멈추기 시작한다. 계속 자라기만 하면 하늘에는 가까워져도 뿌리와는 멀어져 양분이 고갈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성장을 멈추는 것이다. 그는 나무가 멈춤의 시기를 갖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위에서 찍은 숲 사진을 보면 나무들의 키가 거의 일정합니다. 그건 숲에 사는 나무 간의 약속이에요. 한 나무가 자라면 또 다른 나무도 더 자라려고 경쟁을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공존을 위한 동맹을 맺는 겁니다. 그에 반해 인간 사회는 경쟁이 난무하죠. 과도한 욕심을 버리고, 더불어 살기 위해 스스로 멈출 줄 아는 나무의 자세는 우리가 배울 점이라 생각해요.”
이러한 나무의 성장과 멈춤은 ‘우듬지’가 조절한다. 우듬지란 나무 맨 꼭대기의 줄기인데,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자라게 하는 동시에 아래 가지들이 제멋대로 뻗는 것을 통제한다. 인간으로 따지면, 우듬지는 곧 삶의 구심점이자 목표, 방향 등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우듬지는 나무가 나이를 먹을수록 점차 소멸한다. 그는 자신 역시 우듬지가 거의 사라진 상태라며, 그것이 순리에 맞다고 설명했다.
“젊을수록 우듬지는 왕성하죠. 일종의 줏대이기도 하고, 때론 희망이나 꿈의 역할을 하니까요. 그러나 나무가 우듬지를 소멸시키듯, 사람도 나이가 들면 스스로 멈춰야 할 때를 알아야 해요. 과거와 똑같이 경쟁하고, 벌고, 쓴다는 건 무리입니다. 덜 경쟁하고, 덜 벌고, 덜 쓰면서 그 안에서의 행복을 찾아야죠. 나무는 자신에게 필요한 햇빛을 쬘 만큼의 하늘만 확보되면 더는 욕심부리지 않습니다.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그것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자기만의 하늘을 가진 거라고 봐요. 그땐 우듬지가 사라져도 길을 잃거나 방황하지 않죠.”
그는 나이가 들수록 우듬지보다는 ‘틈’이 더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역시 나무에게서 얻은 깨달음이란다.
“오래된 숲일수록 적당한 틈이 존재합니다. 어른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찬 숲에 틈이 없다면, 키 작은 어린 나무들은 햇볕을 쬘 수 없잖아요. 그보다 더 아래에서 사는 풀이나 꽃, 곤충 등은 더 심할 테고요. 숲에 틈이 있어야 빛이 들고, 새로운 희망이 자랄 수 있는 겁니다. 큰 나무는 그런 틈을 내어줍니다. 동시에 어린 생명들이 안전하게 자라도록 비바람과 눈보라를 막아주는 버팀목 역할도 해주죠. 우리네 인생에서도 이런 큰 나무 같은 어른이 많아져야 합니다.”
수목장의 불편한 진실
마지막 순간까지 주변을 보듬고 살다 미련 없이 흙으로 돌아가는 나무처럼, 그는 자신의 인생 말미 또한 그러하길 바라고 있다. 그렇게 삶의 끄트머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는 수목장과 관련해 한마디했다. 친환경적인 장례 방식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자연의 입장에서 보면 가혹한 행위라며 우려를 내비쳤다.
“대개 나무 아래 유골함을 묻는 방식인데, 그러면 뿌리가 다칠 수밖에 없어요. 뿌리가 상한 나무는 오래 살 수가 없습니다. 나무에게도 고인에게도 불편한 상황이 벌어지는 거죠. 수목장이 발달한 스웨덴은 ‘회상의 숲’을 만들어 운영해요. 우리와 다르게 지정된 숲에 유골을 뿌리는 식이죠. 산골(散骨) 장소를 별도로 표시하거나, 숲에 들어가거나 꽃, 나무를 심는 것도 금지합니다. 유족이 그 장소나 식물을 망자의 흔적이라 여겨 집착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자연을 훼손하지 않기 위함이죠. 또 나무 앞에서 추모하는 일도 없습니다. 대신 숲 둘레길 등을 걸으며 고인을 회상합니다. 그게 숲을 건강하게 지키면서 고인을 편안히 모시는 길이라 여기는 겁니다.”
어떻게 사느냐와 더불어 어떻게 죽느냐까지 고민해야 하는 세상. 그는 웰다잉의 한 방법으로 ‘나무 심기’를 제안했다. 물론 나무의사로서의 당부도 잊지 않았다.
“나무를 심고 10년만 지나면 그 그늘 안에서 책을 읽고 쉴 수 있습니다. 여유 땅이 있다면 나무를 심어보길 권해요. 이때 내가 좋아하는 나무보다는 그 땅을 좋아할 나무, 내가 심고 싶은 곳보다는 나무가 잘 자랄 수 있는 위치를 골라야 건강하게 잘 키울 수 있습니다. 나무의 생명력은 인간의 수명을 뛰어넘죠. 우리 세대의 손으로 키운 나무들이 먼 훗날 후손들에게도 위안과 지혜를 준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바람에 실려’, ‘밤에 떠난 여인’ 등으로 7080세대 청년들의 마음을 울렸던 하남석. 최근 24세의 나이로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 ‘천화’와 나이 들어서도 꿈을 꾸는 청춘의 노래 ‘황혼의 향기’가 유튜브에 소개되며 그가 다시 대중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철학을 표현하는 올곧은 뮤지션으로 여전히 노래를 부르는 그는 1949년생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젊은 정신으로 무장해 있었다. 여전히 지혜와 담론이 담긴 노래를 부르길 멈추지 않겠다는 몽상가, 칠순의 하남석이 꾸는 꿈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1974년, 포크와 싱어송라이터의 전성시대에 자신의 이름을 깊이 새긴 가수가 대중 앞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하남석. 데뷔 앨범 ‘바람에 실려/밤에 떠난 여인’에는 총 10곡이 실렸고 타이틀곡인 ‘바람에 실려’와 ‘밤에 떠난 여인’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이후 TBC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그 시대의 다운타운가를 장식했다. 나지막하면서도 쓸쓸한 음색의 목소리로 청춘의 아이콘이 된 그는 7080세대의 가슴에 남게 됐다.
청춘들을 위로해온 목소리
그가 첫 앨범을 발표한 지 어느새 45년이 흘렀다. 강산이 다섯 번은 바뀌었을 그 긴 시간 동안 하남석은 결코 지치거나 꺾이지 않았다. 그동안 낸 앨범이 무려 14집. 소위 ‘대박을 친 노래’가 없어서 대중의 시야에서 멀어졌다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그는 자신만의 음악세계를 절대로 놓지 않고 있었다.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해온 그 긴 시간이 놀랍다. 대표적으로 그의 14집 앨범에 실린 타이틀곡 ‘몽상가’를 들어보면 그가 자신의 음악적 스펙트럼을 어떻게 넓혀왔는지 알 수 있다. 재즈 음악을 기반으로 한 편곡에 블루지한 색채의 관조적인 목소리 톤이 잘 어울리는 이 곡은 칠순이 넘는 가수의 노래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세련되면서도 고급스럽다. 그가 젊었을 때보다 도리어 더 젊어진 감각으로 자신의 음악세계를 계속 발전시키고 있다는 걸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젊었을 때보다 더욱 젊게 사는 70대
하남석이 최근 푹 빠져 있는 가수는 호주 출신으로 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라이 엑스(RY X)라고 한다. 그는 아예 그들처럼 공연을 해보고 싶은 게 꿈이라 말한다. 처음에는 싱어송라이터라고 하기에 자신처럼 포크 싱어송라이터로 활동하는 가수로 생각했단다. 그런데 확인해보니 포크와 일렉트로니카를 결합시킨 포크트로니카 장르의 뮤지션에 온갖 악기들을 활용하는 다채로운 스타일의 가수였다. 보컬 스타일도 요즘 팝 음악계에서 소위 ‘대세’인 얇고 호소력 있는 고음을 구사한다. 심지어 국내에는 많이 알려지지도 않은, 아는 사람만 알고 있는 젊은 실력파였다. 하남석의 음악적 감각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데뷔가 1973년이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가 가수를 하게 된 데에는 그보다 먼저 1960~70년대를 풍미한 형 하남궁의 영향이 컸다.
“형은 프랭크 시나트라, 앤디 윌리엄스 등 주로 팝송 레퍼토리로 노래를 불렀던 중후한 중저음의 목소리를 가진 가수였죠. 특히 김희갑 씨가 형 목소리를 좋아해 곡을 많이 줬어요. 그런데 1973년에 형이 가수를 그만두고 미국으로 떠나버렸죠.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수에 대한 꿈이 있었어요. 그래서 형의 빈자리를 채우면서 노래를 하게 됐죠.”
진정한 뮤지션으로서 묵직한 존재감
그러나 그는 형의 빈자리를 채우는 것에만 만족할 가수가 아니었다. 장르를 넘나드는 창법, 그리고 트렌디한 작곡과 작사 등 예상 가능한 부분이지만 그는 자신의 목소리를 발전시키는 데도 게으르지 않았다.
“요즘 매일 산에 다녀요. 그 이유가, 사람들이 잘 안 다니는 길을 알게 돼서죠. 거기가 지금 제 아지트가 됐어요. 사람들이 없으니까, 산에 갈 때면 그곳에 꼭 들러 음악 들으면서 연습을 하거든요. 옛날에는 소리를 지르는 노래가 별로 없었어요. 저음 가수를 선호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승철, 김종서, 김건모 등 고음을 잘 지르는 가수가 세상에 나오게 됐어요. 저도 시대를 따라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쪽으로도 창법 연습을 하고 있어요.”
그가 최근 발표한 노래를 들을 때 느낄 수 있었던 세련된 변화는 그러한 꾸준한 연습 덕분으로 보였다.
“30대부터 연예인이 아닌 진정한 뮤지션이 되고 싶었죠. ‘진정 좋은 음악을 이 세상에 남기자’ 그게 원동력이 돼서 지금까지 활동한 거예요.”
사회의 약자들을 보듬는 ‘몽상가’
시간이 흐르면서 더욱 젊어지고 있는 하남석의 감각은 시대의 아픔과 정서를 놓치지 않고 있었다. 그가 2004년에 내놓은 ‘거리의 아이들’은 방황하는 가출 청소년들을 보듬는 노래이고, 2010년에 나온 ‘넌, 특별한 사람이야’는 장애우들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만든 노래다. 2011년에 발표한 곡 ‘길 위의 남자’는 노숙자들의 애환을 담았고 최근에 작사·작곡한 ‘천화’는 태안화력발전소의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어 사망한 비정규직 청년 김용균을 추모하며 만든 곡이다. 그런 이야기들을 노래로 만드는 이유에 대해 묻자 그는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가더라고요” 한다. 그가 가수 활동을 시작했던 시절의 포크가 청년의 정서를 대변했던 만큼, 여전히 청년의 마음을 지녔다면 시대의 고통에 관심을 두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지도 모른다.
“제 노래는 돈 많고 신나게 사는 사람들을 위한 노래는 아니죠. ‘몽상가’처럼 살아왔고 ‘몽상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세상에 던진 이상 그렇게 계속 해야죠.”
사회, 정치, 음악, 문화가 너무 흔들리고 있다며 각 분야가 주체성을 갖고 가고자 하는 길을 확고하게 가야 한다고 말하는 그의 얼굴에는 이 세상에 대한 안타까움이 서려 있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에서 노래를 건지고 그 노래가 삶과 어긋나지 않도록 노력하는 이였다.
결국 뮤지션일 수밖에 없더라
하남석의 노래들 중 ‘나이 듦에 대하여’는 제목 그대로 나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담은 노래다.
나이 듦에 대하여 걱정 말아요
나이 들어가면 갈수록 그대는 더욱 멋지고 아름답죠
더 깊고 더 넓게 세상을 바라보죠
커다란 고목나무 그 나무처럼
더 많은 그늘을 만들어 사랑을 주죠
나무가 되어 그늘을 만들고 그 그늘을 통해 사랑을 주자는, 나이에 대한 철학이 담긴 노랫말을 보고 문득 궁금해졌다. 45년이 넘는 긴 시간을 같은 일을 하면서 그 또한 지치고 힘들 때가 있었을 것이다. 그는 그 시간을 어떻게 견디며 지냈을까?
“현실은 항상 돈 문제가 있으니까, 위기의식은 늘 있었죠. 그래서 미사리, 평택에서 가게도 하면서 꾸준히 라이브를 했지요. 그런데 장사를 하려면 철저한 장사꾼이 해야 해요. 자존심 다 버리고 어떻게 해서든 악착같이 돈을 벌어야 한다는 프로의식이 있어야 하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죠. 노래 부르는데 술 취한 사람이 올라와 방해하면 굉장히 자존심이 상했고. 그런 게 쌓이면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을까’ 하며 자괴감이 들었죠. 결국 작년 8월에 가게는 정리했어요.”
자신이 할 일이 아닌 것 같아서 그만뒀다는 것은, 결국 하남석은 가수이자 뮤지션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자각에 다름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최근 후배들에게도 곡을 주기 시작했다.
“후배들에게 준 곡이 많지는 않아요. 저는 전문 작곡가도 아니고 싱어송라이터니까, 주제넘게 누구에게 곡을 주나 싶은 생각도 했고. 그런데 그동안 200곡 정도를 만들었는데, 알려지지 않으면 그저 묻혀버리는 것 아니겠어요? 히트나 상업적인 결과를 원하는 것은 아니에요. 이제부터라도 주변 후배들에게 주자는 마음이 든 거죠.”
비록 외로울지라도 할 수밖에 없다
“삶의 의미와는 상관없이 오로지 돈만 벌고…. 제가 활동하는 통기타 쪽은 애초에 그런 것과는 거리를 둬야 하는 것 같아요. 의미 있는 이야기를 가사에 담고 싶고…. 이 나이에 판 팔고 다시 인기 얻으려고 음악하겠어요? 좋아서 하는 거고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싶고, 그게 삶의 ING죠. 그래서 안주하고 있는 동료 가수들을 보면 속으로 화가 날 때가 있어요. 선배가 후배들에게 가교역할을 해야지 옛날 노래만 갖고 인사나 하고 돈이나 벌려고 하는 그런 모습들이 참….”
그는 자신과 같은 이른바 ‘선배 가수’들이 후배들에게 모범이 되지 못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일들에 대해 얘기하면서 점점 목소리를 높였다. 어쩌면 가수들 중에서도 그이라서 볼 수 있었던 드문 격정이었다.
“나라도 하자, 외로울지라도. 하다 보면 멜로디가 생각나고 책을 보다가 이게 좋겠다 싶으면 노래로 풀어나가고…. 어차피 완성은 없지만 그래도 근사치에 가까워지는 것, 그래서 계속 할 수밖에 없는 일을 하는 거죠.”
‘책과 음악 그리고 자연’. 그는 자신이 생각하는 황혼의 향기가 이 세 가지라고 말한다.
“정말 좋은 음악을 남기고, 누군가가 나중에 인정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말하는 그를 보면서 젊음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 그에게 시간의 흐름은 자신의 목적과 비교하면 큰 의미를 갖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나이가 들어 불편할 수 있고, 달라지는 부분들 또한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변치 않을 것을 끝까지 품에 안고 있는 사람이었다. 젊음이란 그렇게 영원히 변치 않는 것을 가진 사람이어야 지켜지는 것 아닐까. 여전히 치열하게 도전하는 하남석의 노래가 펼쳐 보일 젊음에 기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보다 더 오래 남게 될 그의 노래에 실릴 새로운 꿈을 응원한다.
독기 탓에 추위에도 옷을 벗게 되나 (衣緣地瘴冬還減)
근심이 많으니 한밤 술은 되레 느네 (酒爲愁多夜更加)
그나마 나그네 시름 덜어주는 한 가지 (一事纔能消客慮)
동백이 설도 되기 전에 활짝 피었네 (山茶已吐臘前花)
1801년 겨울,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중년에 막 접어든 39세 나이에 ‘하늘에 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떠밀려(北風吹我如飛雪)’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 좌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급사 후 천주교도로 몰려 저 멀리 남녘땅까지 쫓겨난 것이지요.
죄인 신세가 된 다산을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으나, 다행히 강진에서 한 노파가 안쓰럽게 여겨 집을 내주고 밥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당시 ‘강진에 내려와 밥집에 기거하던 시절(南抵康津賣飯家)’의 심경을 ‘객중서회(客中書懷)’란 글로 남겼는데, 한겨울 붉게 핀 동백꽃이 곤궁했던 유배생활에서 마음의 큰 위안이 되었나봅니다. 지금도 겨울이면 매서운 강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경기도 남한강가에서 나고 자란 다산에게는 그야말로 설 명절도 지나지 않은 동지섣달에 붉게 핀 동백꽃이 생소하면서도 각별한 볼거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로부터 39년 뒤인 1840년 겨울, 제주도로 유배된 ‘조선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가 정월 그믐께부터 3월 사이 제주도 마을마다 동네마다 핀 수선화를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고 격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말처럼 ‘조선 최고의 지성’ 다산과 추사 선생에게는 ‘겨울꽃’ 동백과 수선화가 바로 피안의 창이 아니었을까요? 이렇듯 동백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으로 유명한데, 시인 박홍점은 ‘동백꽃’이란 시에서 “봄부터 맺었던 동백이/ 하필 설날 아침에 터졌다/… 따순 동백꽃 두 송이/ 아직 천방지축인 아이들과 둘러앉아/ 왁자지껄 세배를 한다”며 다산과 마찬가지로 동백이 설을 전후한 시기에 꽃망울을 활짝 연다고 꼬집어 이야기합니다.
동백(冬柏)이란 한자 이름은 한겨울에도 잣나무나 측백(側柏)나무처럼 잎이 푸르다고 해서 생겨났는데,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니 잣나무보다 낫다(亦能開雪裏 細思勝於栢)”면서 “동백이란 이름이 옳지 않다(冬栢名非是)”고 일찍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다산이 말한 산다(山茶)가 곧 동백인데, ‘본초강목’에는 산다와 산다화(山茶花)로 기록돼 있습니다. 학명의 종명에 일본을 뜻하는 ‘자포니카(japonica)’가 쓰일 만큼 일본 전역이 주요 원산지인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타이완에서도 폭넓게 자생하는, 동아시아의 대표 식물이라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동백나무는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입니다. 벌·나비가 거의 없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 사이 꽃이 피기에, 곤충보다는 새에 의지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새는 사람의 눈처럼 붉은색을 붉게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백꽃은 이런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붉게 더 붉게 타오른다고 합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의 농밀한 꿀을 빨면서 꽃가루받이를 돕는 새인데, 그 이름도 동백나무에서 따왔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를 비롯해 오동도와 거문도 등 남해 섬과,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대청도와 백령도 등 섬 지역에서 특히 많이 자란다. 내륙에서는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서천의 마량 동백나무숲, 부산의 동백섬 등이 동백나무 군락지로 유명하다. 이름난 군락지는 아니어도 충청 이남의 웬만한 산사(山寺) 주변에 동백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는 걸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방화림(防火林)으로 활용되어온 결과로 추정된다. 제주의 올레길은 한겨울 동백꽃을 완상하는 최고의 길 중 하나다. 제주의 숲과 골짜기, 마을과 골목을 찬찬히 걷다 보면 키가 10m 넘는 자생 동백나무는 물론, 수십에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룬 군락지, 나지막한 현무암 담장 위에 올라앉은 동백나무 등 다양한 형태의 나무와 붉은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강진의 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가에서도 고목은 아니어도, 수십 년 된 동백나무에 핀 꽃 몇 송이를 만날 수 있다.
엄청난 반전 혹은 거대한 진실과 마주한 느낌이었다. 수도 없이 오가던 길목이었지만 분명 미용실은 없었다. 옷가게, 카페, 떡볶이집, 구둣가게가 생겨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는 곳. 스마트폰이 가리키는 장소에 당도했지만 역시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요즘은 외국 나가서도 하지 않는 일을 끝내 하고 말았다. “혹시 장성미용실이…?” 길을 물었다. 서울 종로구 삼청동, 외국인 관광객 물결 속에서도 45년 한자리를 고목처럼 지키고 앉아 옛 손님을 기다리는 신삼순(64) 미용사를 만났다.
북적대는 핫 플레이스 옆 작은 미용실
사람 눈길 단번에 끄는 화려한 가게 숲 사이에 그 흔한 간판 하나 없는 미용실. 문을 열면 손님을 반기듯 석상과 화분이 놓인 좁은 복도가 펼쳐진다. 엘리스의 토끼 굴을 지나듯 그 길을 걸어 들어가면 과거로 이동한 듯 기분 묘한 미용실 안으로 인도된다.
“저는 벌교 출신이에요. 간판만 없지 이름은 장성미용실입니다. 1960년대에 여기서 미용실 했던 분이 장성 분이셨어요. 제가 뭘 그렇게 쉽게 바꾸는 성격이 아니라 그 이름 그대로 썼습니다. 지금은 오실 분만 미용실에 오세요. 그러니 간판은 사실 필요가 없어요.(웃음)”
손님은 하루 한 명, 두 명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했다.
“지금도 멀리서도 손님들이 오시는데 친구들이랑 같이 오시는 분이 더러 있어요. 근데 여기가 자리도 좁고. 딱 한 사람만 하고 가면 그거로 끝이에요. 그래서 한번은 ‘댁만 오세요. 뭐 친구까지 모시고 오고 그래요’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머리카락 자르고, 파마 말고, 중화제 발라서, 파마 풀고 머리카락 감기는 전 과정을 혼자 하니 힘도 제법 든다. 파마, 커트, 고데 세 가지만 고집하는 이유다. 파마도 구불구불, 바글바글 말아주면 제대로 고객이 만족하는 파마가 된단다. 단골들만 알아서 미용실을 찾아오니 손님 맞춤 머리 스타일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된다. 가격도 꽤 저렴하다. 파마 3만 원, 고데 2만 원. 서울 중심지 파마 가격이 싸도 너무 싸다.
“따님들이 다른 미용실 가자고 해서 따라가 보면 가격만 비싸다고 하세요. 나이 잡수신 분들 그냥 빠글빠글 해드리면 되거든요.(웃음) 요즘 미용사들은 그걸 잘 못하잖아요. 또 파마가 오래가는 것도 싫어하고요. 다른 미용실 다녀온 손님들은 파마한 것 같지 않다고들 말씀하세요.”
가끔은 젊은 손님이 파마를 해달라고 전화를 걸어오기도 한다. 그런데 젊은 사람은 정중히 거절한다. 머리숱도 많고 키도 크고 게다가 뭘 해달라는 요구사항이 많기도 많다.
벌교 처녀 서울 입성과 고마운 인연
어린 시절 신삼순 씨가 미용 기능사 자격증을 따게 된 데는 양복기술자였던 아버지의영향이 컸다. 앞으로는 기술 있는 사람이 대우받는 세상이라며 기술을 강조하신 덕분에 지금까지도 미용사 고수 소리 들으며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는 셈이다.
“자격증은 고향에서 땄어요. 초창기 몇 달은 벌교에서 일하다가 1974년도 열아홉 됐을 때 서울로 올라왔어요. 당시 중앙동에서 먼 친척 언니가 미용실을 하고 있었어요. 거기서 한 3개월 있다가 여기 왔어요.”
직업 소개를 미용 재료상이 하던 때였다. 마침 친척 언니 미용실을 오가던 상인이 지금의 장성미용실을 소개해줬고 길고 긴 인연으로 이어졌다.
“여기 와서 굉장히 좋은 분을 만난 거죠. 그때도 종업원들이 적당히 일하면 나가게 하고 그랬는데 여기 사장님은 우리들을 끝까지 책임지던 그런 분이셨습니다. 제가 언니라고 부를 정도로 막역했고요. 저희 부모님과는 19년 살았지만 그분과는 26년을 함께 살았습니다. 그런데 쉰아홉 한창 나이에 돌아가셨어요. 저에게 이 미용실을 거의 주다시피 했습니다. 굉장히 귀중한 인연이에요. 저는 늘 언니를 위해서 기도합니다. 언니가 1996년도에 돌아가시면서도 저더러 일 많이 하지 말라고, 몸 챙기며 살라고 유언하시고 떠났어요. 언니가 나를 너무 반듯하게 잘 키워줬어요. 이곳에서 줄곧 일할 수 있는 힘을 주셨고요.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 손님 친구 모십니다
긴 세월 같은 자리에서 스타일과 기분 한껏 살리는 머리 만지는 작업에 매진하다 보니 어느덧 60대 중반이 됐다. 손님들 또한 긴 세월 함께 길을 걸어준 고마운 동반자다. 취재 갔던 날에는 30년 단골이라는 이준자 씨가 와서 파마를 하고 있었다. 머리 모양이 마음에 쏙 들어 다른 사람에게 머리를 맡기는 일 없이 장성미용실을 찾는다. 짧은 머리카락이라 한 달에 한 번은 찾는다는 이준자 씨는 함께 밥도 먹고 절에도 같이 가는 친구 사이다.
“제일 나이 어린 손님이 50대, 주로 70대, 80대, 나이 많은 분은 내일모레 90. 우리 집에서 97세, 98세 어르신도 파마를 하셨죠. 두 분 다 작년, 재작년에 돌아가셨어요.”
새로운 손님을 만나기보다는 지금까지 함께 나이 들어가는 손님들 머리를 마지막까지 만져드릴 수만 있으면 하는 마음이다.
“여기 오시는 분들이 돈이 없어서 이곳에 오는 거 아닙니다. 아무래도 젊은 사람들 가는 미용실에 가면 불편하잖아요.”
신삼순 씨는 파마를 할 때 맨손으로 머리카락을 로드에 마는 일이 많다. 그만큼 순하고 좋은 파마 약을 쓴다고. 매무새도 흐트러짐 없다. 단정하게 빗은 올림머리에 봉선화 꽃으로 물들인 손톱. 미장원 대표의 포스를 한껏 자랑한다. 이 모든 것이 오랫동안 손님을 맞이하는 자세이자 배려다.
“하루에 한 분이 오시더라도 손님을 맞이할 때 긴장감이 있습니다. 아무리 오래된 손님이라도 말입니다. 파마를 해드릴 때는 정성이 들어가야죠. 오며 가며, 내가 여기 있으니까 지나다가 마음 편하게 들르십니다. 여기 이곳에서만 45년 세월인걸요.”
긴장을 늦추지 않으면서도 편안함을 유지하다니. 고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일 듯싶다.
우정으로 쌓여간 파마 시간
원래는 지금보다 꽤 공간이 넓은 미용실이었다. 10여 년 전 50세가 넘더니 몸에 이곳저곳 고장이 나기 시작했다. 미용실을 접을 생각으로 매장을 세 줘버렸다. 일종의 정년퇴직이었다.
“환갑 지나면 손을 놓아야지 했어요. 형제들도 못하게 했고요. 뭣 하러 그렇게 이 좁은 데서 일하느냐 해서 안 하려고 했더니 손님들이 자꾸 오고 또 지금 이 공간이 놀고 있으니까 주변에서 미용실을 다시 열라고 했어요. 그렇게 10년을 또 했네요.”
돈을 많이 벌 생각은 전혀 없다. 몇 안 되는 단골손님 머리를 책임지는 것이 1순위다. 겨울에는 가스비, 여름에는 에어컨 사용료만 좀 벌면 그걸로 끝이란다.
“그런데 젊은 사람들은 해야 돼. 왜냐하면 앞이 창창하니까. 50대까지는, 55세까지는 나도 열심히 했으니까. 이 목숨이 다할 때까지는 열심히 살아야죠. 60대쯤 되면 욕심은 좀 내려놓고 그저 남한테 돈 안 빌리고 밥만 잘 먹고 살면 되잖아요.”
이 골동품상회 같은 미용실에는 지금도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는 오래된 물건들이 많다. 구식 고데기에 파마 잘 나오게 도와주는 열 기계 장치, 파마 로드 등은 다른 미용실에서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옛것이다. 40여 년 전 물건 그대로이지만 여전히 잘 사용하고 있다.
“저거 고장 나면 나도 끝이여.(웃음)”
기계가 망가지면 그 무거운 것을 들고 전파상 즐비한 세운상가에 가서 고쳐오곤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래된 기계를 수리해주던 기술자를 찾는 게 예전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웃으면서도 애잔함이 전해진다. “칠십이 될 때까지도 파마를 계속 말고 있을 거 같냐?”는 질문을 던졌다.
“그때까지 이걸 붙들고 있겄어?(웃음) 아직 4년 남았네요. 손님도 많지 않고 그때 가봐서 생각해야지 않을까요?”
그때도 고운 모습 그대로 웃음으로 손님을 맞이하는 미용 고수 신삼순 씨를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란다.
소청도를 출발한 ‘코리아킹’은 불과 10여분 남짓 달려 대청도 선진포항의 선착장에 닿았다. 멀리서 봐도 아담하고 각양각색 지붕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선착장에는 미리 연락을 받고 여행사에서 버스 한 대를 대기시켜놓고 있었다. 아직은 저녁 먹을 시간이 어중간하여 일단 해안을 돌면서 일몰구경하기로 했다. 대청도 선진포항은 고려에 이어 조선시대부터 중국 상선의 이동이 많았던 지역이다. 중국 선원들은 항해하다가 쉬어갈 곳을 찾던 중 이곳이 정박하기에 적합하다고 하여 여장을 풀곤 했다. 또한 선진포항은 일제 강점기 포경회사의 기지가 있던 곳이기도 하다. 1918년 일본인들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던 고래잡이는 1944년까지 이어졌다고 한다.
농여해변
대청도는 주민들의 90%이상이 어업에 종사하고 있다. 섬 일주 해안도로를 따라 아름다운 해변과 절경들이 이어져 있는 곳이 대청이다. 버스를 타고 얼마를 지나 해안선에 도착했다. 썰물이 시작되었는지 바다가운데 모래언덕이 드러나 있었다. 썰물에 드러난 모래언덕을 ‘풀등’이라고 했다. 드러난 풀등을 구경하면서 농여해변을 걸었다. d이곳은 일몰이 아름다운 해변이다. 고운모래가 사각사각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한참을 걷다보니 기이한 모양의 바위 하나가 우뚝 솟아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가운데 구멍이 뚫어진 형상을 하였는데, 고목바위라고 했다. 바위에 새겨진 결은 보통 가로무늬 결인데, 이 바위에는 유독 세로로 결이 나 있었다. 지구의 나이를 46억년 정도로 친다면 고목바위의 나이가 20억년정도 되었다고 한다. 수십억 년 전에 바닷 속에 퇴적물들이 쌓였다가 지진이나 융기현상에 의해 생성되었다. 그러니까 예전에는 고목바위가 서 있는 곳도 깊은 바다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물결무늬는 바닷물이 하루에 두 번씩 밀물과 썰물현상으로 생긴 ‘연흔’이다. 바위에 있는 ‘연흔’을 ‘화석연흔’이라고 하고 바닥에 있는 가로연흔을 현재 생존하는 ‘현생연흔’이라고 하여 지질학적 가치가 큰 해변으로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고목바위 앞에서 인증 샷을 남기고 걸음을 재촉했다. 농여해변을 지나 미아동 해변까지 걷다 보니 어느덧 어둠이 장막처럼 내려오기 시작했다. 일몰이 가장 예쁘다는 ‘농여해변’이었지만 해무로 인해 일몰을 볼 수는 없었다.
바닷가 모래사장을 걸으면서 절경이 이어진 해변을 구경하다보니 배도 고프고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 위해 도착한 음식점에서는 이미 근사한 상차림이 준비되어 있었다. 특‘히 싱싱한 홍어회와 소라, 그리고 갑오징어 요리가 한상 가득 채워졌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독점하던 고래잡이는 1930년대 이후 쇠퇴하고, 지금은 홍어, 우럭, 광어, 농어 등이 대청앞바다에서 많이 잡힌다. 그중에서도 홍어가 많이 잡히는데, 홍어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흑산도와 목포를 떠올리지만 사실은 홍어의 70%가량이 대청도에서 잡힌다고 했다. 여기서 잡힌 홍어는 흑산도와 목포 쪽으로 내려가 가공되어 팔린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삭힌 홍어가 아닌 싱싱한 홍어를 회로 썰어냈다.
사실 삭힌 홍어에 길들여진 입맛이었기에 처음에는 별로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먹다보니 입안에 착착 감기는 맛이 별미였다. 특히 마지막에 신 김치를 숭덩숭덩 썰어 넣고 끓여낸 홍어애탕은 시원하면서도 감칠맛이 있어 한층 입맛을 돋우었다. 반주를 곁들인 저녁을 잘 먹고 숙소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선, 후배 동문 간에 정겨운 얘기가 끝없이 이어졌다. 특히 2년 후에 닥칠 개교 100주년 행사에 대한 토론이 진지하게 논의 되었다. 요즘 북핵폐기와 관련하여 남북 간의 화해무드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핫이슈인 서해5도는 백령도를 포함하여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대연평도, 소연평도) 그리고 강화도 위쪽으로 우도라는 섬을 일컫는다. 서해5도는 1953년도 정전협정 당시 육상의 DMZ는 합의 설정이 되었지만 해상은 그렇지를 못했다. 6.25전쟁당시 치열한 전투 끝에 확보한 서해5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UN사령부에서 일방적으로 그은 선이 NLL이다. 한반도의 화약고처럼 언제든지 무력충돌이 일어날 수 있는 지역이 바로 이지역인 셈이다. 근래의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같은 사건이 바로 이지역에서 일어났다.
경이로운 모래사막
다음 날, 아침을 먹고 다시 투어에 나섰다. 버스를 타고 옥죽동 해안사구로 향했다.
한국의 ‘사하라 사막’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옥죽동 해안사구는 오랜세월 모래가 바람에 날려 이동하면서 거대한 모래산을 이루었다. 옥죽동 해안사구는 계절에 따라 형태가 변화하는 활동성 해안 사구이다. 푹푹 빠지면서 모래산을 오르다 보면 실물크기의 낙타가 나타난다. 우리나라에 사막은 없지만 고비사막이나 사하라 사막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는 흥미로운 경관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버스를 타고 다시 이동하여 모래울 해변에 도착했다. 모래울 해변의 풍경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적송군락과 더불어 더욱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대청도에는 삼서 트레킹이 있다. ‘삼각산’으로부터 ‘서풍받이’로 이어지는 트레킹 코스라 앞 글자를 따서 ‘삼서’ 트레킹이라고 부른다. 대청도에서 제일 높은 삼각산은 높이 343m로 인천광역시에 가장 높은 계양산(354m) 다음으로 높은 산이다. 삼각산-기름항아리-마당바위-서풍받이-정자각으로 이어지는 코스의 총 길이는 약 7km 정도이며 소요시간은 대략 2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시간 관계상 삼각산 트레킹은 생략하고 서풍받이 트레킹만 하기로 결정했다. 서풍받이 트레킹이 시작되는 광난두정자각에서 단체로 인증 샷을 남기고 트레킹을 시작했다. 풍경을 보며 걷다 보니 어느새 숨은 차오르고 다리는 뻐근해지기 시작했다. 대청도는 작은 섬치고는 지형이 꽤나 울퉁불퉁하고 높은 편이다. 하늘전망대까지의 여정은 평소에 운동을 안 한 사람이라면 조금 힘들 수도 있다. 힘들게 헉헉거리며 하늘전망대에 도착하니 시원한 바람이 몸의 열기를 식혀 준다. 전망대 앞바다에는 대갑죽도가 있다. 모양은 사람이 입을 벌린 옆모습과 흡사하다. 하늘을 향해 어민들의 무사귀환을 기원하는 모습인
대갑죽도는 주민의 90%가 어민인 이곳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섬이라고 한다. 얼마나 걸었을까, 짧은 트레킹 코스의 반환점이자 대청도 최고의 경관을 자랑한다는 조각바위언덕 전망대에 도착했다. 전망대를 기준으로 오른쪽엔 서풍받이, 왼쪽엔 조각바위 언덕의 정상, 뒤로는 넓은 갈대밭과 둑바위 해안으로 이어지는 아담한 길이 있다. 잠시 땀을 닦고 숨을 골랐다. 어제 저녁에 못 다먹은 홍어회와 소주로 정상주를 한 잔씩 돌렸다. 시원한 해풍에 정상주 한 잔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더구나 최고의 경관을 바라보면서 먹는 싱싱한 홍어회는 우리 모두를 황홀감에 물들게 했다. 시간을 보니 ‘코리아킹’이 일행을 태우러 올 시간이 불과 1시간여밖에 남지를 않았다. 부지런히 하산을 했다. 선진포항 전망 좋은 음식점에서 성게 칼국수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나니 몸은 노곤하고 늘어졌지만 시간에 쫓겨 부지런히 항구로 내려왔다. 어느덧, 1박2일의 트레킹이 끝나가고 있었다. 비록 짧은 시간으로 소청도와 대청도의 모든 것을 보고 느낄 수는 없었지만 시간에 비해 많은 것을 보고 간다. 이 멋진 풍경들이 당분간은 잔상으로 남을 것이다.
작년 7월 손웅익 동년기자와 함께 동행 취재를 했다. 공장지대에서 문화의 거리로 탈바꿈한 성수동 거리를 걸어 다니며 공간을 소개하는 지면이었다. 그날은 손웅익 동년기자가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지 딱 일주일 되는 날이기도 했다. 마침표를 찍지 않았더라면 회사에 앉아 있어야 할 시간. 갓 내린 커피를 마시며 지금까지 살아온 얘기와 살아갈 얘기를 나눴다. 40년 건축 전문가로, 전문 경영인으로 살다 은퇴한 지 1년째. 지금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궁금해 또다시 데이트 신청을 했다.
“경희궁이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그곳을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만들어준 공간이라고 했다. 이곳은 일제강점기 경성중·고등학교였으며, 해방 후 1980년까지 서울고등학교의 옛 교정이 있던 자리다. 무시험고교입학제, 소위 ‘뺑뺑이 세대’로 불리며 명문 서울고에 입학한 58년 개띠 손웅익 동년기자가 고교 시절을 보낸 장소. 본래 모습을 되찾아가면서 교정은 사라졌지만, 다른 사람은 볼 수 없는 광경이 그의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의 서울역사박물관 자리가 대운동장이 있던 곳입니다. 경희궁 뒤에도 작은 운동장이 더 있었어요. 나무들도 그때 그대로입니다.”
인생 방향을 설정해준 운명의 장소로 꼽은 옛 서울고등학교이지만 그때를 생각하면 속상한 일도 많았다. 입학시험 관문 없이 명문고 대열에 무임승차한 자격미달 74년 고교 입학생이었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시험 쳐서 들어왔는데 저희는 아니잖아요. 선배들과 선생님들의 벽이 너무 높았어요.”
총동창회에 안 나오겠다는 졸업생도 많았다. 선배들 사이에서는 아예 74년 입학생을 후배로 인정하지 말자는 소리도 흘러나왔다.
“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제가 졸업하고 한 10년 정도 됐을 때 총동문회에서 마이크를 잡을 기회가 있었어요. ”
동문들 앞에 선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데도 58년 개띠생을 후배 취급할 생각이 아니라면 다른 이름을 만들어 1회 졸업생으로 나가겠다”고 했다.
“그리고 한 가지 질문을 던졌습니다. ‘이곳에 계신 선배님들 자식 중에 뺑뺑이로 서울고등학교에 들어오면 우리한테 대하듯 할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장내가 잠잠해지더라고요.”
손웅익 동년기자는 이날 동문들 앞에서 했던 이야기를 정리해 동문회지에 글로 실었다. 이를 계기로 선후배 간 관계가 재정립됐고 지금의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제가 공부했을 때가 제 인생 줄기의 큰 시작점인 것 같아서 이곳에서 뵙자고 했습니다. 힘든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제 경우는 많은 걸 깨달았어요. 학교 다닐 때 어린 마음에 반발심도 있었어요. 감성도 풍부할 때라 고목 주위에서 그림도 많이 그렸고요. 나중에 보니까 학교의 전통이나 정신이 알게 모르게 배어 있었습니다. 이곳의 추억이 벌써 40년 전인데 지금까지 맥락을 꿰뚫고 있더라고요. 그런 생각이 들어서 그때 그 자리로 오고 싶었습니다.”
마침 대학 졸업 후 첫 직장도 옛 서울고가 내려다보이는 피어선 빌딩에 있었다. 은퇴하고 나서도 학교 주위는 친숙하기에 자주 찾는다. 시청역에서 덕수궁을 지나 정동길을 걸어 커피 한 잔, 차 한 잔 하며 여유를 즐긴다. 경희궁 한 바퀴 돌고. 서울역사박물관도 구경하고 말이다.
척박한 서울살이를 이기다
경주에서 태어난 손웅익 동년기자는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 5학년 무렵 서울로 올라왔다. 성수동 카페거리 동행 취재 때 중랑천변 판자촌에서 살았던 이야기를 해준 적이 있었다. 비가 오면 집이 떠내려가기 일쑤였고,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횃불 들고 밤새 집을 지어야 했다. 그런 생활이 초등학교 5학년부터 중1 때까지 이어졌다고 했다.
“초등학교 때 통장을 의무적으로 만들어서 적금을 붓도록 했어요. 그런데 돈이 없어서 못 냈다가 교우들 앞에서 선생님한테 맞은 적도 있어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나는 지금도 부모님이 내 대학등록금을 어떻게 마련해주셨는지 잘 모르겠어요. 친구들한테 자주 민폐를 끼치면서 살았어요. 그야말로 빈대생활이었죠.(웃음)”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손웅익 동년기자는 미술대학 대신 한양대학교 건축과를 택했다.
“미술 대신 선택한 건축이 저랑 잘 맞았어요. 건축은 조형물이고 예술품이지요. 미술을 선택하지 못했던 한을 건축에서 충분히 풀 수 있었으니까 제가 40년 가까이 건축을 했겠죠.”
건축과 졸업 후 돈을 잘 벌 수 있는 건설회사 대신 건축설계 사무실에 들어갔다. 건설회사의 3분의 1 수준인 월급을 받고 설계 사무실에 앉아 도면을 그렸다. 현장에서 공사하는 것보다 도면 그리는 것이 적성에 맞아서였다.
“그때 건설회사로 간 친구들이 월급을 삼십만 원쯤 받을 때였어요. 설계 사무실은 십만 원이었고요. 그래도 나는 어쨌든 간에 도면이 좋았어요. 그림을 그리고 싶었고요. 나중에 건축사가 돼 설계 사무실을 차려 돈을 벌면 된다는 생각이었거든요.”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설계 사무실을 연 이후 일이 물밀듯이 밀려왔다. 건설 열기 덕분에 설계사 또한 바빠졌다.
“결혼하고 1년 뒤에 건축사 자격증을 따고 서른한 살에 설계 사무실을 차렸어요. 정말 그때는 일도 많고 성공적인 삶을 살았죠. 미국에도 가고 이탈리아, 스위스 종주여행도 하고요. 당시 유럽 왕복 티켓 가격이 비쌌거든요. 1990년대 초반에는 분당 신도시가 들어서면서 건설 열기가 또 어마어마했습니다.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일이 많았어요. 사무실 규모도 커지고 집도 사고 정말 내 세상이었어요. 말도 못할 정도로 가난하게 살았는데 30대 초반에 경제적으로 인생 역전했던 거죠.”
신나게 이야기가 흐를 때쯤 속도가 딱 끊기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다. 이 시대를 살아온 이들의 말문이 막히는 순간, IMF 금융위기 얘기가 이어진다.
“1997년부터 2000년까지. 직원들을 내보내지 않았어요. 내보내봐야 직원들이 갈 데도 없잖아요. 집 담보 잡히고 그냥 모든 걸 다 쏟아 붓고요. 이곳저곳에서 돈 빌려서 회사 사무실에 다 쓸어 넣었어요. 그 빚 갚는 데만 10년 걸렸어요. 경제적으로 제로인 상태에서 퇴직을 했습니다.”
10년을 준비한 은퇴, 퇴직 1년 차
작년 5월, 서울오션아쿠아리움 부사장 자리에서 물러난 손웅익 동년기자. 부사장이라기에 넉넉해서 그만두는구나 생각했는데 이전 상황에 대해 듣고 나니 왜 그만뒀는지가 궁금했다. 회사에서 제안도 있었고 좀 더 은퇴를 늦출 수도 있었지만 흔들림 없이 계획대로 은퇴 날짜를 잡았다.
“제가 은퇴 준비만 10년 했습니다. 자격증도 따고, 책도 내고, ‘이 정도면 부딪칠 만하다’고 생각했어요. 강의하고 글 쓰고, 건축 일을 평생 했으니까 또 건축과 관련해서 자문도 몇 개월 했고요.”
은퇴를 위해 미술심리상담사, 노인심리상담사, 자살예방지도사 등 자격증도 땄다. 중앙일보에 건축과 관련한 글을 1년 여 게재했고, 동년기자 활동도 꾸준히 하고 있다. 최근 우송정보대학교 리모델링 건축과 겸임교수로 임용돼 강의도 하고 있다.
“강의하는 게 재미있습니다. 반응도 좋고요. 참 체질적으로 나랑 잘 어울리는구나 생각합니다.(웃음) 작년 5월에 수필작가로 등단했어요. 이외에는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그림. 정말 그림을 다시 한 번 하고 싶어서 삽화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림 그리고 사진도 찍고 그게 글하고 또 연결되잖아요.”
은퇴하고 무엇보다 좋은 것은 시간의 속박에서 해방된 것이라고 했다. 은퇴하는 순간까지 출근시간은 늘 아침 7시에 맞춰져 있었다. 고교 시절에도, 설계 사무실을 운영할 때도, 큰 조직에서 중역을 맡아 일할 때도 시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일찍 출근해서 데이터 정리하고 글도 쓰고 사진도 정리하고요. 퇴근도 항상 늦었어요. 문제는 내가 정말 쉬고 싶어도 강제로 출근해야 되잖아.”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후배가 자리를 내주어 출퇴근할 장소가 있기는 하지만 시간에 얽매이지 않는다. 출근하다가 멈춰 설 수도 있고 어디론가 다른 길로 빠져서 내빼도 괜찮다. 사진 찍고, 산책하고, 집 근처 영화관에서 영화도 많이 본다고 했다.
“좋잖아요. 생각도 하고. 하여튼 뭐 여러 가지로. 과거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현재를 봐요. 글이나 그림 소재도 생각하고요. 그리고 길가다 사진도 찍어야죠. 바삐 가야 하는 사람들과 걸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니 혼자 걷습니다.”
베이비부머가 주거문화를 바꿔야 한다
그렇다고 손웅익 동년기자가 1년 동안 유유자적 한가롭게만 지낸 것은 아니다. 새로운 사업과 시니어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의견을 나누고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 중이다. 문 닫은 식당과 빈 공간들이 눈에 많이 띄어서 걱정이라고도 했다.
“베이비부머는 위로는 늙은 부모가 살아 계시고 아래로는 부양해야 할 자식들이 있습니다. 정말 조금이라도 자식들에게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국민연금에 기대기도 어렵고 퇴직연금을 들어놓은 사람도 흔치 않고요. 재산을 분배하네 마네를 말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생각도 줄이고 씀씀이도 줄여야 하고 실제로 우리가 사는 공간, 그러니까 집의 크기를 줄일 필요가 있습니다.”
개인 주거 공간의 평수를 줄이고 입주자가 함께 쓰는 공간을 늘려 조금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주거로 전환하자는 운동을 현재 손웅익 동년기자가 펴나가고 있다. 자식들 출가시키고 나면 덩그러니 부부만 남아 있으니 적당한 규모의 집에서 살고 남는 돈은 현금화해서 노후자금으로 돌리자는 의미다.
“내 공간은 최소화하고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는 구역을 만들어 여러 가지 활동도 하고 수익사업으로도 이어질 수 있게 하는 것이죠. 시니어 카페라든지, 요리를 잘하는 사람은 요리를 하고. 이런 공동 주택이 마을화가 되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와인을 마시러 혹은 빵을 맛보기 위해 방문할 수 있는 곳으로 발전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 또한 10년 넘게 연구했습니다.”
최근 정부의 잇따른 부동산 정책 실패로 혼란과 피로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서 생각을 골똘히 해보면 나쁘지 않은 구조이기도 하다. 투자와 돈을 만드는 도구로 변질된 집의 개념을 본래의 기능으로 되돌릴 수 있는 혁신 운동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액티브한 시너지를 기대한다
회사에 있으면서 해보지 못했던 것에 대한 갈증이 심한지 그가 매진하는 일들이 많기도 하다. 삽화뿐만 아니라 캘리그라피에도 관심이 많아 시간이 나면 꼼꼼하게 글씨를 쓰기도 한다.
“그림을 하다 보니까. 어떤 곳에서 책을 내는데 삽화를 그려 달라는 제의도 있었어요. 내가 그린 그림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면 SNS 활동도 열심히 해야겠구나 생각합니다.”
끝에 뭐가 있는지 어떤 것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지금 이 시간을 마음껏 누려보겠다는 마음밖에 없다.
“아무 준비도 없이 불확실한 미래를 그냥 기대하는 사람처럼 어리석은 이가 없다잖아요. 맞는 얘기죠. 그런데 제가 오랫동안 건축설계 사무실을 운영하고 크고 작은 기업에서 일도 해보고 했는데 그때마다 제것도 아니고요. 그냥 열심히 살다 보니까 여기에 제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중에 가장 핵심은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좋은 관계요.”
시니어 세대로 접어들면서 좋은 점은 관계 정리에 의연해졌다는 것이다. 정리도 할 수 있고 새로운 관계도 만들 수 있다. 오랜 경험을 쌓은 사람들이 모이니 친해지기도 쉽고 다양한 경험들이 서로를 자극하고 발전시킨다는 생각도 든다.
“굉장히 희망적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요. 동년기자단도 멋진 시니어가 모인 모임이잖아요. 앞으로 동년기자 활동도 잘해야 할 텐데요.(웃음)”
경희궁 처마 아래서 손을 내밀어 비와 마주하던 손웅익 동년기자 모습이 기억난다. 혼란스러웠던 시절. 힘들었던 세상과 맞서던 추억 속 고교생 시절 자신과 만나 듯 손 위로 떨어지는 비를 바라보고 있었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