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아침 터진 ‘겨울꽃’, 동백

기사입력 2019-02-01 11:56 기사수정 2019-02-01 11:56

[김인철의 야생화] 차(茶)나무과의 상록 활엽 소교목. 학명은 Camellia japonica L.

▲설날 아침 터진 ‘겨울꽃’, 동백(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설날 아침 터진 ‘겨울꽃’, 동백(김인철 야생화 칼럼니스트)


독기 탓에 추위에도 옷을 벗게 되나 (衣緣地瘴冬還減)

근심이 많으니 한밤 술은 되레 느네 (酒爲愁多夜更加)

그나마 나그네 시름 덜어주는 한 가지 (一事纔能消客慮)

동백이 설도 되기 전에 활짝 피었네 (山茶已吐臘前花)


1801년 겨울, ‘조선 최고의 지식인’ 다산 정약용이 중년에 막 접어든 39세 나이에 ‘하늘에 날리는 눈처럼 북풍에 떠밀려(北風吹我如飛雪)’ 강진으로 유배되었습니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뒤 홍문관수찬, 좌부승지, 형조참의 등을 지내며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정조 급사 후 천주교도로 몰려 저 멀리 남녘땅까지 쫓겨난 것이지요.

죄인 신세가 된 다산을 그 누구도 반기지 않았으나, 다행히 강진에서 한 노파가 안쓰럽게 여겨 집을 내주고 밥을 해주었다고 합니다. 다산은 당시 ‘강진에 내려와 밥집에 기거하던 시절(南抵康津賣飯家)’의 심경을 ‘객중서회(客中書懷)’란 글로 남겼는데, 한겨울 붉게 핀 동백꽃이 곤궁했던 유배생활에서 마음의 큰 위안이 되었나봅니다. 지금도 겨울이면 매서운 강바람이 뼛속까지 파고드는 경기도 남한강가에서 나고 자란 다산에게는 그야말로 설 명절도 지나지 않은 동지섣달에 붉게 핀 동백꽃이 생소하면서도 각별한 볼거리였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로부터 39년 뒤인 1840년 겨울, 제주도로 유배된 ‘조선 최고의 서예가’ 추사 김정희가 정월 그믐께부터 3월 사이 제주도 마을마다 동네마다 핀 수선화를 ‘천하의 큰 구경거리’라고 격찬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됩니다. ‘들꽃 한 송이에서 천국을 본다’고 했던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 말처럼 ‘조선 최고의 지성’ 다산과 추사 선생에게는 ‘겨울꽃’ 동백과 수선화가 바로 피안의 창이 아니었을까요? 이렇듯 동백은 겨울철에 꽃이 피는 것으로 유명한데, 시인 박홍점은 ‘동백꽃’이란 시에서 “봄부터 맺었던 동백이/ 하필 설날 아침에 터졌다/… 따순 동백꽃 두 송이/ 아직 천방지축인 아이들과 둘러앉아/ 왁자지껄 세배를 한다”며 다산과 마찬가지로 동백이 설을 전후한 시기에 꽃망울을 활짝 연다고 꼬집어 이야기합니다.

동백(冬柏)이란 한자 이름은 한겨울에도 잣나무나 측백(側柏)나무처럼 잎이 푸르다고 해서 생겨났는데, 고려시대 문인 이규보는 “눈 속에서도 꽃을 피우니 잣나무보다 낫다(亦能開雪裏 細思勝於栢)”면서 “동백이란 이름이 옳지 않다(冬栢名非是)”고 일찍이 주장한 바 있습니다. 다산이 말한 산다(山茶)가 곧 동백인데, ‘본초강목’에는 산다와 산다화(山茶花)로 기록돼 있습니다. 학명의 종명에 일본을 뜻하는 ‘자포니카(japonica)’가 쓰일 만큼 일본 전역이 주요 원산지인 것은 맞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타이완에서도 폭넓게 자생하는, 동아시아의 대표 식물이라는 게 식물학자들의 설명입니다.

동백나무는 대표적인 조매화(鳥媒花)입니다. 벌·나비가 거의 없는 늦가을부터 이른 봄 사이 꽃이 피기에, 곤충보다는 새에 의지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것이지요. 특히 새는 사람의 눈처럼 붉은색을 붉게 보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백꽃은 이런 새들의 눈에 잘 띄기 위해 붉게 더 붉게 타오른다고 합니다. 동박새는 동백나무의 농밀한 꿀을 빨면서 꽃가루받이를 돕는 새인데, 그 이름도 동백나무에서 따왔습니다.


Where is it?

제주도를 비롯해 오동도와 거문도 등 남해 섬과, 동으로는 울릉도, 서로는 대청도와 백령도 등 섬 지역에서 특히 많이 자란다. 내륙에서는 고창 선운사, 강진 백련사, 서천의 마량 동백나무숲, 부산의 동백섬 등이 동백나무 군락지로 유명하다. 이름난 군락지는 아니어도 충청 이남의 웬만한 산사(山寺) 주변에 동백나무가 무리 지어 자라는 걸 볼 수 있는데, 예로부터 방화림(防火林)으로 활용되어온 결과로 추정된다. 제주의 올레길은 한겨울 동백꽃을 완상하는 최고의 길 중 하나다. 제주의 숲과 골짜기, 마을과 골목을 찬찬히 걷다 보면 키가 10m 넘는 자생 동백나무는 물론, 수십에서 수백 그루가 숲을 이룬 군락지, 나지막한 현무암 담장 위에 올라앉은 동백나무 등 다양한 형태의 나무와 붉은 꽃송이를 만날 수 있다. 강진의 다산초당 옆 작은 연못가에서도 고목은 아니어도, 수십 년 된 동백나무에 핀 꽃 몇 송이를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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