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어떤 여성 개그맨이 “한 방에 훅 간다”는 말을 유행시킨 적이 있었다. 그땐 그저 우스갯소리로 여겨지던 이 말이 요즘 와서 절실하게 피부에 와 닿는다. 전혀 흔들리지 않을 듯이 공고하게 자신의 위치를 구축한 것처럼 보이던 인물들이 하루아침에 추풍낙엽처럼 나가떨어진다. 이윤택, 고은으로 시작한 미투 태풍이 김기덕, 오달수, 조민기, 조재현 등 영화계를 거쳐 어느덧 정치 거물 안희정까지 다다랐다.
지금 알려진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이 받는 충격이 이미 엄청나게 큰 상태지만, 중요한 건 이 바람이 아직 시작인지 끝인지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이미 불길한 예언들이 여기저기서 흘러나오고 있다. 문제는 이 바람에 옷깃을 스치기만 해도 변명은커녕 뼈도 못 추릴 정도로 치명적이라는 사실이다. 안타깝지만 분명한 것은 이 바람이 한때 지나가는 계절풍은 아닐 것이라는 전망이다.
역사가 전개되는 섭리는 참으로 오묘하다. 답보 상태인 듯이 보이는 역사의 흐름이 아주 사소한 계기에서 변화의 동력을 얻는다. 처음에는 우연인 듯 가벼운 나비의 날갯짓으로 등장하지만, 마지막은 언제나 필연의 태풍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미투 운동도 미국 등지에서 그저 몇몇 바람둥이들의 스캔들로 끝나며 살랑살랑 불던 미풍처럼 잦아들겠지 했었는데 어느새 대한민국에 상륙하면서 태풍이 된 것이다.
이쯤에서 지금 눈앞에 전개되는 일련의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문명사적 변화의 힌트는 무엇일까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분명 이 현상은 과거라면 꿈도 못 꿀 일이다. 그동안 낯선 이에게 당한 성폭행을 제외한 가까운 사이에 벌어진 성 관련 범죄는 대부분 쉬쉬하거나, 혹은 불거져 나오더라도 피해자인 여성이 꽃뱀으로 몰리는 등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본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덮이기 일쑤였다.
어떤 이는 이런 변화를 오랜 페미니즘 운동의 결과물로 본다. 하긴 남녀 사이의 위상이 과거보다 많이 달라지기는 했다. 젊은이들 간에는 남자와 여자가 거의 동등한 듯 보인다. 또 다른 시각은 한국인의 유별난 기질에서 찾기도 한다. 일본 모 신문의 한국특파원 여기자는 이런 미투 현상이 일본에선 거의 불가능하다고 고백하며 한국에서 나타나는 현상에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러나 이 사태의 본질을 유심히 살펴보면 남녀 간의 문제라기보다 권력의 문제로 보는 편이 옳을 것이다. 벌어진 현상의 공통점은 대부분 어떤 형태로든 상하관계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대한민국에서 일어나는 미투 현상은 몇몇 용감한 여성들에 의해 공고하던 권력의 허상이 깨져나갔다는 데 그 중요성이 있다. 어떤 학자가 언급했듯이 이른바 ‘포스트 가부장제’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뇌 과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뇌는 머나먼 과거 파충류의 뇌로부터 시작해 진화해 온 것이 아니라 신기하게도 그 뇌들이 모두 함께 잔류해 있단다. 다시 말하면 우리 뇌에는 본능을 관장하는 파충류의 뇌와 포유류 시대의 뇌, 그리고 유인원의 뇌 위에 현생인류의 특징인 전두엽이 발달한 상태가 모두 공존하고 있다는 말이다.
포유류나 유인원은 대개 권력을 쟁취한 우두머리가 모든 암컷을 소유한다. 어쩌면 무수한 폭로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자그마한 권력에 취하여 주변의 여성들을 암컷들로 여겼는지 모른다. 그러니까 그들은 현생인류로 진화하지 못한 포유류, 기껏해야 유인원 수준에 머물러 있는 수컷이었다는 이야기다.
천운을 타고나 이룰 것 다 이뤘는데도 탁구 천재 현정화의 눈매는 아직도 살아 있고 견고한 에너지를 방출 중이다. 시사평론가 이봉규의 강한 스매싱(?)과 날카로운 서브를 넣어도 그녀의 핑퐁 토크는 명불허전이었다. 역시 레전드와의 만남이었다.
용인시에 있는 ‘현정화 탁구교실’에 들어서서 그녀를 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분명 얼굴은 현정화가 맞는데 마치 고등학교 탁구선수가 훈련을 준비하는 것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비쩍 마른 체구에 얼굴은 조막만 하고 짧은 머리가 영락없는 고교생 이미지였다.
6~7명의 중·고생 탁구 유망주들이 그곳에서 현정화의 지도를 받기 위해 준비운동을 하고 있었는데 문밖에서 보니 나이 오십인 현정화도 그 학생들과 또래처럼 보였다. 걱정도 되고 궁금하기도 해서 “왜 이리 말랐나?” 하고 물었더니 “나태한 걸 싫어한다. 많이 일하고 움직이다 보니까 살찔 시간이 없는 것 같다”고 대답하면서 건강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고 안심시킨다.
몸매도 몸매이지만 눈매도 아직 배고픈 선수처럼 살아 있었다. 탁구선수로 최고의 위치까지 올라갔고 지금도 부러울 것 없는 탁구 지도자 생활을 하고 있는데도 눈매가 살아 있는 것이 신기했다.
인터뷰하는 동안 한시도 흐트러짐 없이 목소리도 카랑카랑했다. 이 같은 눈매와 자세가 그녀를 만리장성의 벽을 깨고 세계 최고로 만든 원동력이었으리라 짐작된다. 이룰 거 다 이루고 나이도 오십쯤 되었으니 이젠 느슨해질 때도 되었건만 아직도 그녀는 견고한 힘을 유지하고 있다.
기러기 엄마, 독수리 엄마
현정화의 강직한 힘을 빼기 위해 한량 이봉규가 슬쩍 찔러봤다. “당시 현정화 선수는 실력이나 외모 등 지금의 김연아급 인기를 끌었는데 실감했나?” 그러자 담담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미없게 살았다. 탁구만 쳤다. 운동 잘하는 선수로 국민들이 인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현정화의 대답에 다시 꼬리를 물었다. “예쁜 얼굴에 인기 절정의 현정화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없었나?” 급작스런 질문에 현정화는 몇 초간의 인터벌을 갖더니 “당시 선수촌에서 남자 상비군인 연습 파트너와 짜릿한 비밀 데이트를 했다”고 털어놨다.
다소 어안이 벙벙해진 표정의 이봉규를 달래기라도 하듯 곧바로 “그 남자와 10년 후 결혼했다”고 마무리를 했다. 당시 다른 선수들은 몰랐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녀에게 아마 다 눈치 채고도 남았을 텐데 현정화 본인만 그 사실을 몰랐을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이에 그녀는 “그래봤자 탁구 잘 치면 그만이다”라며 당당한 표정이다.
중2 딸과 고2 아들을 둔 지금에 와서야 편하게 말하는 것이겠지만 당시 인기 절정의 현정화가 선수촌에서 몰래 데이트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007작전을 방불케 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연애가 결실을 맺어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지금 두 아이는 미국에서도 유명한 명문 학군인 캘리포니아 얼바인에서 아빠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른바 ‘기러기 엄마’인 셈이다.
현정화 본인은 ‘독수리 엄마’로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가고 싶을 때 언제든지 갈수 있기 때문에 기러기가 아니라 독수리라는 해명이다.
남편은 미국에서 탁구 레슨을 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고 있다. 현정화 감독도 시합이 끝나면 무조건 미국으로 달려가 일주일 정도 머물며 가족들과 함께한다. 다행히 딸이 미국의 대입시험인 SAT 1600점 만점에 1500점이라는 높을 점수를 얻어 스탠포드대학교나 존스홉킨스 의대 진학을 희망하고 있다. “엄마 아빠가 운동선수 출신인데 왜 운동을 안 시켰나?” 하고 따지듯 물었더니, “일부러 운동을 안 시켰다. 운동은 너무 힘들어서”라고 말꼬리를 힘없이 흩뿌렸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아이들이 중간만 하고 살면서 행복하면 좋겠다”는 것. 즉 평범하게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는 뜻이다.
본인이 훈련에 힘들었고 온 국민의 기대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해서 자식들에게는 그러한 고통을 물려주기 싫었을 것이다. 현정화는 “육체적 훈련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실토했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
운동 얘기가 나온 김에 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남북 단일팀 이야기로 넘어갔다.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 구성에 대해 현정화는 결과적으로 단일팀은 선수들에게 나쁘지 않은 결정이었다고 했다.
“온 세계가 주목하는 올림픽에서 일생의 큰 경험과 기회가 됐을 것”이라고 단일팀을 경험해 본 선배로서 의견을 비췄다. 그런데 1991년 일본 지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는 사정이 좀 달랐다고 설명했다. 참가규정 인원이 5명인데 당시에는 이번 여자 하키 단일팀과 달리 국가별 참가 선수 인원을 늘려주지 않았다. 만약에 단일팀을 꾸리지 않았다면 “다른 남한 선수들이 출전 기회를 얻었을 테고 설령 금메달은 따지 못했어도 은메달이나 동메달은 딸 수 있지 않았을까”라며 과거를 회상했다.
그러면서도 “국가가 있어야 선수도 있고 국민도 있다”고 강조한다. “태극마크에 대한 소중함을 안다”고 부연 설명도 한다. 당시 같이 출전 못한 국가대표팀 동료에게 다소 미안한 마음도 있었겠지만 국가의 결정을 따르는 것이 대표선수의 당연한 의무였기에 복잡한 심경이었으리라 이해된다.
어쨌든 당시 현정화는 북한의 리분희와 함께 단일팀으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으니 복 받은 선수임에 틀림없다. 본인도 “나는 정말 운을 타고난 운동선수”라고 겸손하게 인정했다.
천운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선수
현정화의 타고난 운은 사실 88서울올림픽이었다. 그때 탁구 종목이 처음으로 채택됐는데 그 대회를 위해 국가는 수년 전부터 어린 꿈나무를 육성시켰다. 그 선수들 중 한 명이 현정화였다. 당시 현정화는 중학교 1학년이었다. 시대적 상황으로도 천운이라 할 만했다. 그때 그녀는 복식에서 양영자 선수와 함께 금메달을 땄다. “우리는 금메달 딸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복식에서 금메달을 따야 한다고 해서, 단식을 접고 복식 연습을 3년간 하루에 서너 시간씩 했다. 나중에는 눈만 쳐다봐도 언니가 뭘 원하는지 알 정도로 서로가 완벽하게 호흡이 잘 맞았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평창올림픽에서 아이스하키 단일팀이 화제가 되었다. 단일팀의 원조격인 현정화에게 탁구 남북 단일팀 결정으로 인한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물어봤다.
“사실 진짜 제 속마음은 ‘이거 왜 하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만들어져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면 빨리 우리가 단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했다. 또 나는 개인적으로도 성적을 잘 내는 걸 원하는 선수였기 때문에 서로 간에 합심해서 성적을 잘 낼 수 있도록 노력하자, 그런 마음으로 했다. 우리가 한 달간 합숙훈련을 하고 보름을 같이 시합해서 45일 정도 함께 지냈는데, 절대로 긴 시간이 아니었다. 양영자 선배랑 복식 3년을 준비한 것처럼 준비를 해도 메달을 딸까 말까였는데, 남북 단일팀이 한 달 만에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을까 그런 의구심은 들었다. 그냥 결승만 올라가도 우리는 할 일을 다 하는 거라는 생각으로 시합을 했다. 북한의 에이스가 리분희이니까, 그 선수도 마찬가지 심경이었을 것이다. 나는 또 대한민국의 에이스이니까 책임감을 갖고 시합을 해야 한다,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그녀는 차분하게 자신의 심경을 설명했다.
남북 단일팀과 리분희에 대한 추억
“북한의 에이스 리분희 선수가 간염으로 아팠다. 그래서 훈련을 제대로 소화 못했기 때문에 예선전부터 계속 리그를 치러야 하는 부담감이 고스란히 나한테 왔다. 북한 선수가 한 명 나가고 내가 나가서 함께 힘을 합쳐 해야 하는 경기여서 정말 부담스러웠다.” 현정화로서는 리분희 선수가 컨디션이 나쁜 걸 아니까 그래서 더 파이팅을 하고 또 집중했을 것이다.
그 결과 만리장성의 벽을 남북 단일팀으로 넘을 수 있었다. 현정화와 리분희는 서울올림픽 때 만나서 1993년 세계선수권대회 때 한 번 보고, 그 후로 25년 동안 한 번도 못 봤다. 이번 평창 패럴림픽 때 리분희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사도 있었다. 이에 관해 현정화는 “얼마 전에 리분희가 인터뷰한 걸 봤는데, 현정화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 중 한 명이라고 얘기해서 사실 감동받았다”고 말한다. 그 표정을 보니 온 마음을 다해 리분희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는 눈치다.
평창 패럴림픽 개막식이 3월 9일인데 이 잡지가 나간 후 아마 둘이서 만나는 장면이 각 언론사 톱뉴스로 실릴지도 모르겠다. 25년 만의 현정화와 리분희가 다시 만날 때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지을지 또 어떤 옷을 입고 TV 화면에 나타날지 몹시 궁금하다. 천운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치열한 노력을 해야 한다. 천운을 타고난 현정화의 여정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현재 예매 순위 1위이며 개봉하자마자 최대 관객 동원 기록을 세우고 있다는 영화이다. 그러나 네티즌 평점은 7.4 정도로 이런 화려한 기록에 비해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영화 전문 기자 평점은 6점대라서 더 떨어진다.
인기 웹툰을 바탕으로 만든 김용화 감독 작품이며 주연에 하정우, 차태현, 주지훈, 김향기, 김동욱 등이 나온다.
소방관으로 일하는 자홍(차태현 분)은 화재 현장에서 여자 아이를 구하고 죽음을 맞이한다. 여자 아이는 부모가 인사도 없이 데려 간다. 자홍은 잠시 어이없어 하는 사이에 저승 차사 해원맥(주지훈 분)과 덕춘(김향기 분)이 나타나서 자홍이 죽었음을 알려준다. 그러나 어머니에게 먼저 저승길을 떠난다고 인사하지도 못한 것을 안타까워 하지만, 저승 차사들은 그를 정의로운 망자이자 귀인이라며 그를 데려 간다. 그리고 저승법에 따라 사후 49일 동안 7번의 재판을 거쳐 환생 여부를 결정 받게 된다고 설명해준다. 저승 입구에서 또 한명의 차사 강림(하정우 분)이 자홍 일행과 합류하여 저승길 7개 관문을 인도한다. 이들 차사들이 자홍을 호위하고 변호하여 무사히 7개 관문을 통과시키면 본인들도 같이 환생할 수 있다는 염라대왕의 약속이 있었다. 그러나 각 관문마다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자홍의 소소한 과거와 원귀들의 방해가 나타난다.
7개의 관문이란 살인, 나태, 거짓, 불의, 배신, 폭력, 천륜을 심판하는 관문이다. 사람이 일생 동안 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정해 놓은 규범이다. 사실 특별한 범법자나 나쁜 사람이 아니면 해당되지 않는 사항들이다. 살인과 천륜을 빼고는 다른 항목은 보통 사람들도 조금씩 해당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래서 반드시 남의 일만은 아닌 것이다. 더구나 자홍의 젊은 나이에 수많은 곡절을 겪었을 리 없다.
이 영화는 사실 필자의 구미에 맞는 영화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매율 1위라며 인기가 있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필자는 웹툰에 대해 문외한이다. 그래서 사실성이 떨어지는 웹툰의 세계에 친숙하지 못하다.
사후 49일 동안 망자가 구천에 떠돈다는 것은 한국적인 풍습에 의한 것이다. 묘하게 이것을 빗대어 저승의 세계를 그려 본 것이다. 기존 영화에서 저승사자들이 기묘한 모습으로 검은 옷과 검은 갓을 쓰고 나타나지 않고 현대식 의상을 차려 입은 것도 특이하다.
7개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는 발상도 하나의 긴 여정을 지루하게 연결 하지 않고 각각 다른 형태로 보여준 것도 요즘 젊은이들의 취향에 맞는 것 같다. 삼장법사를 보시고 가는 손오공의 긴 여정을 보는 것도 같고 아직 가보지 않은 미지의 세계여행을 가는 기분도 난다. 골프코스에서 홀마다 다른 모양의 코스가 있어 지루하지 않은 것도 비슷할 것 이다.
이 영화는 컴퓨터 그래픽에 대한 칭찬이 많다. 마벨시리즈에 못지않게 잘 만들었다는 것이다. 게임의 세계에 들어간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 시니어들은 그런 장면들이 시끄럽고 정신없다. 큰 기대보다는 요즘 영화의 트렌드를 본다는 기분으로 보면 될 것 같다.
30년 동안 부부동반으로 만나는 모임이 있다. 원래 7커플이 모였으나 지금은 4커플만 모인다. 죽은 사람도 있고 이민 간 사람, 스스로 탈퇴한 사람도 있다. 그동안 국내 여행은 몇 번 다녀 왔다. 각 집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보니 거칠 것 없이 친하다. 송년 모임을 하다 보니 또 단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그동안 수없이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으나 번번이 무산되었다. 적금을 붓기도 했지만, 때가 되면 한 팀이 못 갈 사정이 생겼다며 빠지면서 없던 얘기가 되곤 했던 것이다.
이번 연말모임에서도 또 해외여행 얘기가 나왔다. 멀리 캐나다, 베네수엘라 얘기도 나왔고 가깝게는 일본 중국 필리핀 여행 얘기도 나왔다.
그런데 가장 연장자인 70대 수원 사는 사람이 있다. 사람이 좋아 꿈속에 사는 사람 같다. 이번에도 베네수엘라 등 해외여행 얘기를 꺼냈다. 안 될 줄 알면서도 그런 얘기를 하는 과정이 즐겁다. 그런데 앞에 있던 일산 친구가 정면으로 70대 연장자에게 그동안 해외여행 프로젝트를 여러 번 깬 장본인이라며 비난했다. 순식간에 분위기는 얼어붙고 언쟁이 계속 되나 했더니 70대 연장자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가버렸다.
나이 들어 이렇게 다퉈도 되나 싶었다. 일산 친구가 웃으면서 “얘기해봐야 성사도 안 될 것이니 지나가는 얘기로 하자”고 했으면 되었을 것을, 정색을 하며 그동안 쌓인 감정을 폭발시키다 보니 싸움이 된 것이다. 나이 들었다는 것이 헛말이 되었다. 모든 면에서 자제하고 상대방을 이해해주는 입장이 되어야하는데 친한 사이끼리 이런 일이 벌어지니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갈수록 서로 어린 애로 가는 느낌이다. 이러다가는 30년 모임이 깨질 수도 있을 것 같다.
서로 잘 알고 너무 속속들이 알다 보니 조심성이 없는 것이다. 부부모임이라 그런 것 같다. 남자들끼리는 속 얘기를 별로 안 한다. 남자들은 술이나 마시며 바깥세상 돌아가는 얘기나 한다. 그런데 여자들은 집안 얘기부터 다 한다. 결혼 전부터 만났으니 그동안 아이들 커 온 얘기며, 남자들 흥망성쇠를 다 안다. 그러면서 친하다는 이유로 거침이 없는 것이다. 자존심을 건드리기도 한다.
형제들 모임도 그렇다. 너무 서로의 사정을 잘 알다 보니 자존심을 건드려 싸움으로 번지는 일이 많다. 이 경우도 여자들까지 포함되다 보니 소소한 얘기까지 불씨가 되는 경우가 많다.
‘낯선 사람 효과’라는 것이 있다. 낯선 사람 앞에서는 좋은 이야기만 한다. 자존심을 건드리지 않도록 서로 조심하고 예의를 지킨다. 서로 잘 모르니 호기심도 있고 기대감도 있다. 과거에 뭘 했는지 묻지도 않지만, 본인이 스스로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므로 자존심 상하는 일이 없다. 그래서 나이 들면 새로 만나는 사람들 모임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잘 아는 사람끼리 만나면 너무 허식이 없어 피곤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주변에 얼마든지 많다. 이 나이에 남에게 신세 질 일도 없고 일부러 잘 보이려 할 필요도 없다 보니 기본을 망각하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 사람에게는 사람들이 붙지 않는다.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지난 달 건국대 새천년관에서 재미있고 유쾌한 토크 콘서트가 열렸다. 주제는 성 평등이었다. 깊이 들어가면 그리 유쾌할 수만은 없는 남녀의 차별 문제도 제기되었다. 그래도 시종일관 분위기가 밝았던 건 사회를 본 최광기 여사 덕인 것 같다. 본인의 이름으로도 큰 웃음을 주었고 태어났을 당시 자매들의 출생신고가 아무렇게나 되었는데 딱 하나 아들을 낳자 그날로 출생신고를 하셨던 아버지를 예로 들며 태어나자마자 차별을 받았다고 고백해 청중을 웃겼다.
딸만 셋이었는데도 지극한 사랑을 주셨던 아버지 덕에 필자는 남녀차별을 전혀 모르고 자랐다. 주변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에는 아들과 딸의 차별이 아주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밝게 꾸며진 콘서트홀은 왠지 즐거운 일이 일어날 것 같은 기분을 들게 했다. 미국인이지만 이미 대한 미국인이라 불리는 '타일러'가 패널로 나와 특히 기대가 되었다. '타일러'는 요즘 모 방송의 '비정상회담' 원년 멤버로 나오고 '문제적 남자'라는 프로그램에서 대단한 뇌섹남으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친정엄마와 필자는 타일러의 열성팬이다.
최광기 씨의 사회로 여성가족부 정현백 장관과 방송인 타일러, 개그맨 황영진, 좋은 연애연구소 김지윤 소장이 무대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어린 시절의 고정관념이 남녀의 성차별에 큰 영향을 준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남녀의 역할은 따로 있다는 식으로, 남자아이에게 “남자가 울면 어떡하니?”라고 하고 여자아이에게는 “여자가 칠칠치 못하게”라는 표현을 무의식으로 써왔다는 것이다. 이렇게 무심결에 한 말이 고스란히 아이에게 각인되어 결국 성차별이라는 고정관념이 생겼다는 설명이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약간의 걱정이 생겼다. 며칠 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세 살짜리 손자가 여섯 살짜리 손녀에게 용감한 포즈를 취하며 "누나는 내가 보호해줄 거야!"라고 했다. 아기가 한 그 말이 너무나 사랑스럽고 귀여워서 마구 칭찬해주며 "그래, 누나는 여자니까 남자가 보호해줘야 해" 했는데 성 평등에 어긋나는 표현이었을까 우려가 됐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고정관념이 사라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평등으로 완성되는 나라다운 나라'의 주제로 진행된 토크쇼는 대한민국 남녀가 바라는 성 평등은 어떤 모습일지, 왜 지금 성 평등을 주장하는지에 대해 담론했다.
20~30세대 2000명에게 다시 태어나 성별을 바꾸고 싶은지 묻는 설문조사에서 남자는 37%, 여자는 무려 49.5%가 그렇다고 했다. 여자가 느끼는 성차별이 더 크다는 의미다. 정현백 장관은 50년 이상 지속되어온 호주제에서의 폐해와 똑똑한 여 제자가 취업할 때 받았던 불이익을 예로 들어 말해줬다. 그러나 새 정부도 여성 장관 기용 30% 공약을 지키는 등 새로운 시대가 요구하는 변화의 바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남녀의 역할을 정하지 않고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해결책도 나왔다. 형광등은 꼭 남자가 갈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키가 좀 더 큰 사람이 하면 된다는 의견에 모두 찬성했다. 김지윤 소장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역할을 정해야지 성에 따라서 할 일이 정해져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도 먼저 귀가한 사람이 식사 준비를 하면 되고 덜 피곤한 사람이 청소를 해야 한다는 의견에 많은 사람이 공감했다.
세계적으로도 성 평등 운동이 많이 일어나고 있는데 UN이 추진하는 연대운동인 ‘He for She’는 성 평등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글로벌 캠페인이다. '화이트 리본'은 사라 제시카 파커와 카메론 디아즈 등 유명 할리우드 배우들이 참여해 화제가 되었다. 우리나라에도 45명의 남성이 성 평등을 실천하는 '성 평등 보이즈'라는 모임이 있다.
두 시간의 토크쇼가 마무리되면서 패널들에게 던져진 마지막 질문은 '내가 꿈꾸는 성 평등 대한민국은?'이었다. 정현백 장관은 '소통하고 이해하는 성숙한 민주 사회'라고 했고 김지윤 소장은 '누구나 원한다면 안전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라 했다. 필자가 좋아하는 대한미국인 타일러는 '아직 멀었다'라고 따끔하게 현실을 꼬집었다.
부르는 곳도, 갈 곳도, 챙겨야 할 날도 많은 한 해의 마지막 한 달. 어떤 자리에서도 당신을 초라하게 만들지 않을 연말 패션 전략을 준비해봤다.
‘옷장 파먹기’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유행하는 음식문화가 있다. 특별한 날 고가의 화려한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 대신, 자신의 집 냉장고에서 먹다 남은 재료를 꺼내 근사한 음식을 완성한다. 일명 ‘냉장고 파먹기’라 불리는 이 식문화가 패션에도 전이되고 있다. 즉 이젠 무엇을 입는가보다는 어떻게 입는가가 더 중요한 시대라는 얘기. 지금 줄줄이 소시지처럼 연이어 잡혀 있는 연말 모임을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건 쇼핑이 아니라 당신의 옷장을 탐색하는 일이다.
만일 여성들끼리의 모임이라면 좀 더 튀는 스타일로, 부부 동반이라면 커플 분위기를 맞춘 격식 있는 룩이 어울린다. 전자의 모임에는 옷장 속에서 가장 손이 덜 탄 옷을 골라보자. 평소에 잘 입지 못했던 옷을 이번 연말 모임에서 ‘데뷔’시키자. 분명 안 입은 이유는 화려하거나, 불편하거나(대부분 사이즈에 관한 문제일 터) 둘 중 하나일 것이다. 모임에서는 튀어도 좋고, 조금 타이트해도 좋다. 평소의 나와 다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이니. 이번 시즌 트렌드 중 하나인 ‘원 컬러’ 스타일링에 도전해봐도 좋고, 믹스 매치로 패션에 재미를 더해봐도 좋을 듯. 영국 여왕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한 톤의 컬러로 통일해서 입으면 별다른 액세서리 없이도 눈에 띈다. 이때 12색 크레파스 같은 원색보다는 파우더리 핑크, 다크 그레이, 스카이 블루같이 ‘중간 컬러’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믹스 매치의 경우에도 캐주얼한 원피스에 포멀한 재킷을 더한다든지, 반듯한 화이트 셔츠에 화려한 디테일의 스커트를 매치한다든지 아이템들 사이에 온도 차이를 두어 지루하지 않게 룩을 완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포멀한 자리에는 스커트’라는 공식을 머리에서 지우고 팬츠에 눈을 돌려보자. 연말 시상식에 블랙 슈트 차림으로 등장한 김혜수를 기억하는가. 모두들 여성스럽게 입을 때, 오히려 매니시한 팬츠 슈트로 차이를 두는 것. 이것이 고수의 전략이다.
남자의 경우에는 터틀넥이나 컬러감 있는 스웨터를 이용하자. 나이 불문하고 터틀넥은 여자들을 설레게 한다. 머릿속에 콜린 퍼스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그의 시그니처 룩이기도 한 블랙 터틀넥과 속에 곰돌이 스웨터를 입은 모습이 자동으로 그려질 것이다. 그가 여자들이 꼽는 지구에서 가장 멋진 남자 중 한 명이란 사실에는 이 옷차림이 8할의 역할을 했다.
연말 패션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모임의 성격을 반영한 룩이다. 일찍이 파티 문화가 발달한 서양에서는 파티 초대장에 드레스 코드를 표시한다. 예컨대, ‘블랙 타이’나 ‘포멀’이라고 적혀 있으면 턱시도에 보타이 차림이나, 정장 슈트를 입으라는 것이고, ‘화이트 타이’라고 표시되어 있으면(하얀색 타이를 매라는 것이 아니라) 오후 5시 이후의 예복인 연미복을 입으라는 뜻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런 드레스 코드를 자주 지명한다. 만일 당신의 파티 초대장에 드레스 코드가 표시되어 있다면 그 의미를 잘 파악해서 입자.
너와 나의 연결고리, 커플 패션
부부 동반으로 참석하는 모임(특히 회사 모임)에는 단정하고 우아한 커플 룩을 연출하자. 이때는 옷의 디자인만큼이나 소재도 중요하다. 겨울 옷, 특히 포멀한 룩에서 고급스러운 소재는 생명이나 다름없다. ‘조명발’ 제대로 받는 벨벳, 자카드, 실크 같은 소재를 활용하자. 그리고 부부 사이에 연결고리를 만들자. 대놓고 커플 룩을 연출하기보다는 남편의 양말 컬러와 아내의 스카프 컬러를 맞춘다든지, 같은 소재의 아우터를 입는다든지, 작지만 요란스럽지 않게 커플 룩을 보여주는 것이다.
패션의 꽃, 액세서리
앞서 얘기했듯이 연말 모임을 위해 새 옷을 살 필요는 없다. 모임 룩에서 중요한 건 옷보다는 액세서리 연출이다. 포멀한 옷차림에서 액세서리의 역할은 더욱 커진다. 진주로 된 액세서리는 언제나 평균 이상의 멋을 내고, 화려한 스톤이 박힌 브로치는 이때가 아니면 옷장 밖으로 나오기 힘들다. 최근 젊은이들 사이에 가장 이슈가 되는 패션은 영국 전통 브랜드 버버리 프로섬의 패션쇼에서 선보인 브로치 스타일링 법이다. 가슴 한쪽을 가득 채운 빅 사이즈의 브로치(혹은 작은 브로치를 여러 개 레이어드한다)는 힘 없는 옷 혹은 주름진 얼굴로 갈 시선을 브로치로 집중하게 만든다. 평범한 니트에도 단번에 생생한 생명력을 선물하는 것이 브로치의 힘이다.
남자라면 보타이나 서스펜더, 모자 같은 액세서리에 눈을 돌려보자. 출근복과 파티 룩 사이에 쉼표를 찍어줄 아이템들이다.
연말 모임을 위한 메이크업
연말 모임 룩은 대부분 블랙을 바탕으로 하기 쉽다. 이때 메이크업은 평범한 룩을 특별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한다. 연말에는 뷰티 브랜드마다 ‘홀리데이 컬렉션’을 선보인다. 과거에는 컬러에 집중했다면 최근에는 ‘질감’이 중요하다. 어깨나 목 혹은 눈 부위에 화려한 질감의 메이크업을 더해주면 컬러 없이도 화려하게 만들어준다. 립의 경우는 반대로 벨벳처럼 부드러운 질감의 제품이 트렌드다. 얼굴 위의 컬러를 줄였다면, 대신 손끝에 힘을 주자. 펄이 더해진 네일은 다이아몬드보다 당신의 손을 더 빛나게 해줄 것이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바야흐로 죽는 것보다 사는 것이 더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 우리에게 익숙하던 삶의 방식들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고 생소하고 낯선 시간의 문 앞에 홀로 서 있는 기분이 든다. 과거 우리 부모 세대는 대개 60 언저리 혹은 70 이전에 세상을 하직하셨는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60대 중반을 바라보는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세상을 버릴 생각 없이 말짱하다. 요즘 같아서는 정말 100세 시대라는 말이 실감 난다.
그렇다면 좋은 세상이 온 건데 우울하고 두려운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그건 어쩌면 우리에게 덤으로 주어진 30년 정도의 시간이 주는 공포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과거 인류가 결코 경험하지 못했던 미지의 시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니 왜 걱정되지 않겠는가. 과연 그 긴 시간 동안 무엇을 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 그 긴 시간을 견딜 물질적 동력은 준비되기나 한 걸까?
간혹 신문과 방송 같은 미디어에 전문가가 등장해 길어진 수명에 대비하는 갖가지 대응책을 소개하고는 있지만 살아보지 않은 것은 저나 나나 똑같지 않은가. 100세가 다 되신 철학자 김형석 선생 같은 분 정도는 되어야 경험을 말할 수 있는데 어디 그분 같은 경력의 전문성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러니 각자 자신이 살아온 방식으로 각자 미래를 개척하는 수밖에는 없을 듯싶다.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소비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 취향에 맡겨놓는다 하더라도 마지막까지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핵심은 어떻게 그 긴 시간을 물질적인 걱정 없이 품위 있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경제 활동이 왕성한 시기에 이런 미래의 실상을 모른 채 부모 봉양하고, 자식 교육시키고, 결혼 비용까지 댄 어리석은 일들이 후회되지만 다 지난 일이고 어디 호소할 데도 없다.
미래를 예측한다는 분들은 TV에 나와 그러니 나이 들어도 일을 해야 한다고 뻔한 말들을 늘어놓지만, 그걸 몰라서 걱정하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 비록 건강이 염려 없더라도 이 나이의 고령자를 써 줄 곳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어떤 이는 그래서 평생교육이 필요하니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기 위한 교육을 받으라고 역설한다. 아, 앓느니 죽지! 취미로 교육받는 건 모르지만 취업은 언감생심이다.
고교 교사로 있는 가까운 친구 하나는 정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최근 딸이 직장 때문에 손자를 돌봐 달라는 바람에 낮에는 학교로 밤에는 딸네 집으로 출근하며 “늘그막에 이 무슨 고생이냐”며 죽을 맛이라고 하소연했다. 그러나 그는 최근 우리 친구들 사이에 최고로 부러운 존재다. “야, 2년만 버티면 죽을 때까지 생계 걱정이 없는데 무슨 소리야. 네가 제일 팔자 좋다.” 전화 끊고 입맛이 씁쓸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딸애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결혼하고 애 낳으면 회사를 그만둔단다. 자식을 먼저 잘 키운 뒤에 다시 프리랜서로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그 말도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런 생각이 여성들의 노후를 혼란스럽게 만든 원흉이 아닌가. 남편만 바라보다 물먹은 여자가 어디 하나둘인가! “얘, 무슨 소리야 힘들어도 내가 키워 줄 테니 열심히 다녀. 노후를 생각해야지. 나한테 양육비 주면 열심히 키워 줄게.”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나왔다.
나이 들고 가장 억울한 것이 소위 ‘경력단절’이라는 장벽이다. 과거에 아무리 화려한 경력이 있었어도 단절되고 나면 고철에 불과하다. 남성보다 여성의 노후가 불안한 이유이다. 애 키우는 거야 경험 많은 노인들이 더 잘하는 영역이고 노인 돈벌이에도 기여하니 힘은 들어도 윈윈 하는 길이 아닌가. ‘얘야 부디 끝까지 남아 임원 자리까지 해 보고 그만두렴.’ 여성이 떳떳하게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