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성인의 절반은 점심 먹고 칫솔질을 안 하고, 6명 중 1명만 스케일링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다. 이 기사는 치아 건강이 오복 중 하나인데 상당히 무신경한 수준이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여자들의 경우는 잘 모르겠지만, 점심 먹고 바로 칫솔질하는 남자들은 흔치 않다. 직장생활을 할 때라면 몰라도 점심 먹고 나면 또 다른 볼일을 위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하기 때문이다. 칫솔질을 하려면 적어도 치약과 칫솔은 가지고 다녀야 한다. 그러나 여행을 가는 경우가 아니면 치약 칫솔을 가지도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지금은 과거보다 많이 나아졌지만 지저분하고 냄새가 나는 화장실이 많았다. 결코 칫솔질할 마음이 안 생기는 장소다. 지저분한 세면대의 수도꼭지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깨끗할까 의심이 될 정도로 지저분한 곳이라면 이 닦는 일이 흔쾌하지 않다.
필자의 경우 아침식사 후 한 번, 저녁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 번씩 하루에 두 번 이를 닦는다. 대부분의 성인 남자들이 그럴 것이다. 점심식사 후에 사무실에 들어오면 칫솔질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간단하게 치간 칫솔을 이용한다.
칫솔질은 습관이 중요하다. 우리 시니어들은 어린 시절 이 닦는 일을 게을리했다. 당시에는 칫솔질이 여자들의 화장 정도로 치부되거나 치아 건강을 위한 칫솔질의 필요성을 제대로 몰랐기 때문이다. 치약이 나오기 전에는 굵은 소금을 썼다. 그 뒤 나온 것은 치마분이라는 가루치약이었다. 냄새와 맛이 이상해서 그리 친숙하지 않았다. 또 먼저 사용한 사람이 치마분 봉지에 물에 적신 칫솔로 물기라도 남기면 더 꺼림칙했다.
사극을 보면서 옛날 왕들은 식사 후 어떤 방식으로 이를 닦았을지 했을지 궁금했다. 아마 당시에는 치아 건강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을 것이다. 평균수명이 얼마 안 되어 풍치가 생기기 전에 죽는 경우가 많아 이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요즘은 치아 미백까지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다. 하얀 치아를 가진 여자 배우들을 보면 정말 예쁘다. 칫솔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기분이다. 칫솔이야말로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다.
요즘은 애완동물들에게도 칫솔질을 해주는 세상이다. 15년 남짓 수명을 가진 애견의 치아를 건강하게 잘 지켜주기 위해, 입 냄새를 없애주기 위해 그렇단다.
스케일링을 하려고 치과에 가는 일은 드물다. 치통 등 자각 증상도 없는데 1년에 두 번 스스로 일정을 정해놓고 치과에 간다는 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치아에 이상이 생겨 치과에 갔다가 함께 스케일링을 하는 정도다. 건강보험이 적용되기 전에는 스케일링 비용이 비쌌기 때문에 기피한 이유도 있다. 지금은 본인 부담금이 1만6000원이다. 단골 치과를 정해놓고 6개월에 한 번씩 정기검진을 받으며 함께 스케일링을 하는 방식이 권할 만하다. 잊고 있어도 치과에서 때가 되면 연락을 해주기 때문이다. 스케일링은 풍치를 예방하는 간단한 조치이므로 6개월에 한 번씩은 필히 받는 것이 좋다. 살다 보면 충치보다 풍치가 더 무섭다. 나이가 들면 치아가 충치에는 강해지는데 풍치에는 약해진다. 어느 날 갑자기 외관상으로는 멀쩡한 치아들을 풍치 때문에 발치해야 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 오래 살기 위해서는 잘 먹어야 하고, 잘 먹으려면 건강한 치아가 받쳐줘야 한다.
얘기하다 보니 3분 만에 성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요약하자면 투명하고 맑은 느낌이다. 마치 자신이 부른 노래들의 영롱함을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고나 할까. 그 주인공은 ‘사랑 사랑 누가 말했나’, ‘꿈을 먹는 젊은이’ 등의 명곡들로 80년대 초중반을 장식한 포크 가수 남궁옥분이다. KBS가요대상 신인가수상, MBC 10대 가수상 등 가수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녀는 가수로서만이 아니라 방송 MC, 광고 모델, 라디오 DJ로도 활약하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 이제 ‘그토록 기다렸다고’ 하는 60을 맞이하며 여전히 행복하게 활동하고 있는 그녀의 현재와 인생관을 들어봤다.
글 김영순 사진 박규민 parkkyumin@gmail.com
인기 DJ 이종환이 1973년 종로2가에서 문을 연 음악감상실 쉘부르는 무교동에 자리한 세시봉의 뒤를 잇는 1970년대 대표적인 음악감상실로 수많은 포크 가수와 진행자 들을 배출했다. 그 쉘부르 출신의 남궁옥분은 포크로 대변되는 청년 문화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가수였다.
그 시절의 청년다운 건강함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60을 맞이하고 있는 남궁옥분이 기자 앞에 있었다. 첫 인상은 섬세하고 차분했다. 그러면서도 호탕하다는 인상을 줬다. 이런 이미지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책임져 온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에너지가 있기에 가능하기 마련이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
“윤회에 대해서 오래 전부터 확신하고 살아왔어요. 그래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전생의 업보겠지 하죠.”
남궁옥분은 108배를 17년 동안 했다. 정신적 수련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었다. 윤회 사상과 108배를 봐도 알겠지만 그녀의 세계관에는 불교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고 그 불교적 영향력은 삶에 대한 달관적인 시선으로도 드러나고 있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하지 못해요. 새장 안에서 사는 새는 새장 안에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도 있죠. 나도 내 영역을 가진 것이니까 행복한 거예요. 누가 나를 보면 답답해 보일지라도, 내 기준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사는 것이 내가 후회하지 않을 일이기 때문에 합니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행복한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말은 ‘후회하지 않을 일을 한다’는 말과 함께 남궁옥분의 생각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즉, 그녀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세계를 마련한 사람에게서 발견되는 외고집이 있다.
“애초에 돈이나 명예에 관한 욕망이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그 어떤 직책도 안 맡았었죠. 그러다가 최백호 오빠가 운영하는 한국음악발전소에서 이사를 맡게 됐어요. 과거에는 그런 일을 안 했지만, 이제는 선배가 후배들에게 큰 우산이 되어줘야 한다는 생각이 있어요. 나도 그 역할을 하고 싶어진 거죠.”
한국음악발전소는 최백호가 독립음악인들의 창작 지원을 위해 운영하고 있는 사단법인이다. 그녀가 한국음악발전소에 몸을 싣게 된 것은 최백호에 관한 믿음 때문이었다. 최백호가 하는 일이라면 타협하지 않으면서 공공적인 선의를 구현할 수 있으리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사람을 그토록 전적으로 신뢰하는 경우는 흔치않다.
인터뷰 중 그녀는 물질보다는 관계에서 오는 고통이 더 크다고 말했다. 유명인이 되고 연예인으로서 방송계 일을 하게 되면서 인간관계에서 오는 크고 작은 상처들을 무수히 겪어야 했고, 심지어 허술한 인간관계로 인해 아예 2년 동안 방송을 완전히 안 한 시기도 있었다. 오죽하면 자신을 키운 게 사람이라고 말할까.
오랜시간 다른 사람의 삶을 읽을 수 있게 된 그녀에게는 산과 사람이 있었다고 털어놨다.
“많은 사람 안에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스승이에요. 사람은 사람을 통해서 크는 것이죠. 제가 사람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때는 자신이 다져지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었을 거예요. 지난 시간 동안 저는 피해자의 입장으로 보는 법을 배웠다고 생각해요. 그런 게 없었으면 정신적으로 단단해지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리고 언젠가는 진실이 밝혀지리라는 생각이 저를 지탱시켜주죠. 그래도 사람으로 만들어진 상처는 사람이 치유해줘요.”
노력한 만큼의 댓가는 확실히 있다고 믿는 그녀
그녀는 자신을 밟고 올라가서는 그 전과는 완전히 바뀐 사람들을 수없이 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가 봤을 때 그들이 걷는 그 길은 잘못된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잘못 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그녀는 무작정 분노하기보다는 스스로를 가다듬는 쪽을 택했다.
“난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되고 싶으니까요.”
디딤돌의 마음가짐으로 고통을 깨닫고, 고통이 지나가는 과정을 여러 번 겪으면서도 맥없이 절망에 빠져 버리지 않은 것은 그녀가 가진 인간적 역량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힘은 평등과 박애로 무장되어 있는 어떤 의지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에 관한 얘기를 들으며 그러한 그녀의 박애 정신은 어쩌면 천성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는 1993년에 돌아가셨어요. 1922년에 태어나셔서 지주 집안도 아니고 가장 평범한 사람의 한 명으로서 대한민국의 가장 힘든 시기를 살다 가셨죠. 근검절약이 몸에 배신, 완전 보살이셨어요. 주변 사람들에게는 중심축과 같은 역할을 하셨죠. 김장철이 되면 김장을 엄청나게 해서는 어려운 동네에 갖다 주시곤 했죠.”
그녀는 자신이 어머니 나이가 되면서 느끼는 바가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어머니가 50대에도, 60대에도, 70대에도 여자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여자임을 포기하고 엄마로만 살다가 돌아가셨죠.”
그녀는 소위 엄마로서의 삶만을 강요당하는 것을 거부한다. 여기서 남궁옥분을 설명하는 단어가 또 떠올랐다. 바로 ‘자유’다. 스스로 원칙을 세우고 그를 단호히 지킴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앞서 그녀가 말한 새장이란 표현은 그녀가 추구하는 법도의 다른 말이기도 할 것이다.
항상 60이 되기를 기다렸다
남궁옥분은 그녀 스스로가 말하듯이 긍정적인 사람이다. 그런데 그녀가 말하는 긍정론은 극단적이고 무조건적인 행복을 강요하는 게 아니다. 대신 그녀는 “안 행복하다고 불행한 게 아니다”라고 말한다. “행복은 적을 수도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즉, 행복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많느냐 적느냐의 문제라는 것. 행복과 불행이라는 양 극단의 정의가 아닌 행복의 높낮이를 주시하는 그녀의 태도에는 삶을 관조하면서 보다 침착해진 사람의 시선이 담겨 있었다.
“얼마 전에는 가수 선배를 만나서 얘기를 할 일이 있었어요. 그러면서 우리 나이에 싫은 일에 굳이 시간을 갖지 말자고 결론을 내렸어요. 코드가 안 맞는 사람과 시작된 일은 뭔가 트러블이 생겨요. 그럼으로써 잃게 되는 게 있죠.”
남궁옥분은 60 이전이 인연법에 의한 삶이었다면 60 이후부터는 자신이 지난 60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의 모습이 보이는 출발선이라고 정의했다. 그 말을 증명하는 것처럼 그녀는 죽을 만큼 힘들었지만 멋지게 살아온 것에 자신을 기특하다고 여기며 바쁘게 살고 있었다. 윈드서핑과 볼링 등 운동을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인터뷰가 끝난 다음에는 김해 공연과 라디오 출연, 봉사활동 등등의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또한 그녀는 미술가로서도 활동하고 있었다. 개인전에 관한 제안은 꾸준히 들어오고 있는 중이다. 문필가로서의 능력을 살려 책을 집필하려는 계획도 있다. 그녀는 이 모든 것들을 아울러서 보다 복합적인 프로젝트를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200석 정도 되는 작은 공간에서 책과 전시, 공연을 합친 이벤트를 하고 싶다는 것이다. 60을 새로운 출발선이라고 정의한 사람답게 그녀의 머릿속은 창의적 시도들로 가득한 것처럼 보였다.
“지난 20년 전, 그러니까 40대부터는 정리를 해야 하는 법이죠. 사실 60에 의미를 두고 살아서 그런지 작년부터 뭔가 열매가 맺어지는 것처럼 느껴져요. 60만을 기다렸다고 사람들에게 얘기하고 다니고(웃음). 너무 행복하게 맞아들이고 있어요. 주변의 상황과 함께 할 때 시너지가 생기는 법인데 요즘이 그런 것 같아요.”
사유와 자기 성찰에 전념하다
여전히 무명인 가수 선후배들을 챙기는 남궁옥분은 자신의 그런 행동의 이유를 “힘이 되고 싶어서”라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드러내는 증거이자 앞으로도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의 표명이기도 했다. 40대부터 60까지 열심히 치열하게 살아온 자신이 대견하고 사랑스럽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의 삶의 보람에 대해 “돈보다 멋진 기억들을 얻었다”고 말한다.
“나에게 만족하는 삶, 그리고 타협을 허락하지 않는 삶이 제가 원하는 삶이에요. 천억 원을 준다 해도 불의와는 타협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나를 가치 있게 만들고 싶어요.”
그녀는 죽음을 절대로 알리지 않고 떠날거라고 한다. 시간이 지나 오랫동안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이 그녀를 ‘명예롭게 퇴진하는구나’는 정도의 말을 듣는 게 좋겠다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오래 지나지 않아 바로 발견하는 누군가가 ‘아무 소리 없이 떠났는데 이걸 해놨네?’라는 말을 하게 만드는 그런 삶. 딱 그 정도가 남궁옥분이라는 존재가 세상에게 가지고 있는 소박한 욕심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한 욕심보다는 크게, 아직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있다.
자기 원칙과 소신과 기준이 있는, 그리고 여백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 남궁옥분이 머지않아 60을 맞이하는 방법은 그렇게 단단하게 다잡고 있었다.
오늘도 그녀의 밴드 에는 행복한 것과 안 행복한 것에 기준을 아는 팬들은 그늘을 내어주는 그녀의 수다로 미소가 번졌다.
중견 배우 백일섭은 30여 년의 결혼생활 끝에 졸혼(卒婚)을 선언한 뒤 독립해 직접 청소도 하고 요리도 하며 혼자 생활한다(KBS ). 마라토너 출신 방송인 이봉주는 강원 삼척시 처가에서 장인과 함께 옥신각신하며 시간을 보낸다(SBS ). 지난해 결혼한 배우 구혜선과 안재현은 강원 인제에서 달콤한 신혼생활과 신세대 부부의 문화를 보여준다(tvN ). 예능인 김구라는 이혼 뒤 함께 사는 아들 동현이와 때로는 격의 없는 친구처럼 때로는 근엄한 아버지로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채널A ). 가수 황혜영, 정치인 김경록 부부의 부모들은 함께 식사하며 나들이도 하고 요즘 사돈 관계의 문양을 드러낸다(MBN ).
요즘 눈길을 끄는 예능 프로그램들이다. 최근 주요한 트렌드 중 하나가 바로 이전과 달라진 가족 형태를 보여주는 다양한 예능 프로그램의 증가다. 미혼, 비혼, 졸혼 등으로 혼자 사는 1인 가구를 전면에 내세운 예능 프로그램에서부터 실제 결혼한 부부와 가상 부부, 이혼 가족, 처가와 함께 사는 사위, 혈연 가족은 아니지만 함께 살며 정을 나누는 유사 가족 등 다양한 가족 형태를 드러내는 예능 프로그램이 속속 시청자와 만나면서 인기를 끌고 있다. 또한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남편, 생계를 책임지는 아내 등 가족 구성원의 역할 변화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도 봇물 터지듯 쏟아지며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연예인과 일반인이 출연해 다양한 가족 형태와 변모한 가족 구성원의 역할을 드러내는 예능 프로그램이 주요한 트렌드이자 인기 예능 키워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가족 형태가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은 현실을 반영하기도 하고 현실 속의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 변화와 트렌드를 선도해나가기도 한다. 최근 사회와 산업구조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가족의 형태에서부터 가족 구성원의 역할 역시 크게 변했다.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자신의 책 에서 밝혔듯 가족은 능동적으로 변화한다. 가족 형태, 가족 구성원의 역할, 가족생활 스타일 등은 사회·경제적 상황 변화에 따라 크게 변모한다.
근래 들어 우리 사회는 취업난, 100세 시대, 빨라진 은퇴 나이, 고령 인구 급증 등으로 미혼, 이혼, 비혼, 졸혼이 크게 늘면서 1인 가구가 증가했고 가족 구성원의 역할도 이전과 다른 양태를 보이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은 이 같은 가족과 관련된 실태와 변화, 그리고 트렌드를 수용해 다양한 포맷으로 보여주고 있다.
급증하는 1인 가구의 생활, 문화 등을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은 최근 38세의 토니 안부터 47세의 박수홍, 50세의 김건모까지 혼자 사는 30~50대 남자 연예인들의 생활과 문화를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다(SBS ). 김국진·강수지·김완선·김광규 등 이혼, 미혼 등의 이유로 혼자 사는 40~50대 연예인들이 여행하며 연애와 결혼, 생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SBS), 중견 연기자 김용건부터 개그우먼 박나래까지 혼자 사는 연예인의 일상을 담은 (MBC), 최근 졸혼을 선언한 뒤 혼자 살며 요리와 빨래 등 살림살이를 배우고 있는 백일섭 등이 출연하는 (KBS)도 1인 가구의 생활과 문화를 보여주고 있다.
혼자 밥 먹는 혼밥족들의 다양한 모습과 실태를 보여주는 (올리브TV), 혼자 술을 먹고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올리브TV), 혼자 여행하는 모습을 담은 (스카이 트래블), 혼자 사는 사람들을 위한 편의점 활용법과 편의점 음식을 활용한 요리 만들기 등을 알려주는 (tvN) 등도 1인 가구를 다루고 있거나 다룬 대표적인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전과 다른 신세대 신혼부부의 변화된 결혼생활과 문화 그리고 연애 트렌드를 보여주는 프로그램도 크게 늘었다. 지난해 결혼한 구혜선·안재현 부부가 출연해 요리하는 남편, 가구 등을 만드는 아내 등 기성세대 부부와 사뭇 다른 신세대 부부의 생활과 문화를 보여준 (tvN), 가상 신혼부부와 재혼 부부를 통해 요즘 부부의 결혼 풍속도를 드러내는 (MBC), (JTBC) 그리고 미혼 남녀 연예인의 전화 통화 데이트를 통해 요즘 신세대의 연애 트렌드를 살펴보는 (tvN) 등이 이전과 다른 부부 생활과 연애, 결혼 풍속도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으로 인기가 높다.
또한 부모와 자식이 출연해 변화된 부모-자식 관계를 드러내는 예능 프로그램도 크게 늘었다. 김종국, 허경환 등 미혼 남자 연예인과 어머니가 함께 여행하며 어머니와 아들 관계를 살펴보는 (TV조선), 김구라·이한위·이수근 등이 출연해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변화한 부자 관계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채널A), 이승연 등 여자 연예인과 자녀와의 생활을 통해 변모한 모녀·모자 관계를 생각하게 해주는 (TV조선) 등이 전통적 관계와 다른 오늘날의 부모 자식 간 관계를 조명하는 예능 프로그램들이다.
이밖에 사위가 장인, 장모가 함께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달라진 사위와 처가와의 관계 또는 장인, 장모에 대한 사위의 생각을 전달하는 (SBS), 부부의 부모들이 함께 여행하거나 생활하는 모습을 통해 변화된 사돈 관계를 보여주는 (MBN) 등은 과거 어렵게만 여겨졌던 처가와 사돈 관계가 요즘에는 어떻게 변했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 예능 프로그램이다.
이처럼 예능 프로그램들은 현실 속 변화된 가족의 형태와 가족 구성원의 역할, 부부생활, 결혼과 연애 풍속도, 자녀에 대한 인식을 재미로 잘 포장해 보여주고 있다. 이들 예능 프로그램은 많은 사람에게 가족과 가족 구성원의 변화한 트렌드와 정보를 제공해줄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가족으로의 변화를 유도하는 긍정적인 영향도 미치고 있다. 하지만 남성 우월주의, 가부장주의, 1인 가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심화 등 일부 예능 프로그램은 현실과 동떨어진 모습을 보여주거나 가족에 대한 왜곡된 시선과 편견을 조장하는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다행히 대부분의 시청자들은 다양한 가족 형태와 가족 구성원 역할 변화를 보여주는 예능 프로그램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다. 새로운 가족 형태와 구성원 역할 변화에 대해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게 해줄 뿐만 아니라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처음 만난 사람은 누구일까?
베드로나 야곱이나 비중 있는 제자들이 아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다. 그녀에게 처음 나타나신 이유가 있다. 남자들은 입이 무거워 설명도 잘 못하고 여기저기 말을 옮기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광고효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 여자가 선택된 것이다. 특히 여성들 앞에서 절대 알리지 말라 하면 얘기는 더 빠른 날개를 달고 날아간다.
하느님이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누가 선악과를 따먹었느냐고 묻자 아담은 이브가 따서 주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고자질인 셈이다. 그런데 남자들은 이 대목에서 유혹에 넘어간 여자가 말썽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브에게 설득당한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면서. 여자는 남의 말을 듣기도 잘하고 옮기는 능력도 대단한 것이 증명된 셈이다.
남의 얘기를 듣고 공감하며 또 소통하는 능력이 탁월한 여자가 바로 인류를 결속시키고 지탱시킨 것이라고 해도 지나친 억측은 아닐 것 같다. 남자들을 한 공간에 모아놓으면 얘기가 스타카토처럼 토막이 난다.
“안녕하세요. 날씨 좋죠?”
“네, 그렇네요.”
더 이상의 대화는 끝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모이면 다양하고도 재미있는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날씨, 요리, 육아, 미용 등 이야깃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래서 여자들은 몇 시간을 통화하고 나서도 나머지 자세한 얘기는 만나서 다시 하자고 한다. 남자들은 그렇게 수다를 떨어놓고도 부족하냐고 의아해한다. 그러나 이런 다양성과 풍부함이 바로 가정을 꾸려나가는 자질이 되는 것 같다. 가족 간의 갈등을 조정할 수 있고, 용기를 주기도 하고, 꾸짖기고 하는 역할이 가능한 것이다.
‘숨이 붙어 있는 한 희망이 있다’는 격언처럼 버티고 지켜야 상황이 바뀔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의미다. 밝고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희망을 바라보는 삶은 불가능을 물리친다. 그것은 과거가 아닌 현실을 새롭게 사는 것이고 매 순간 부활하는 것과 같다.
여자들의 공감 능력은 상대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서 나온다. 이건 태어날 때부터의 남녀의 차이일 뿐이지 모자라고 우수하고의 차이가 아니다. 남자들은 체계화 능력이 있는데 이는 어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가를 잡아내는 능력이다. 그래서 길눈이 밝다. 그러나 바로 앞 냉장고에서 물건을 찾아내는 일은 잘 못한다.
여성들은 나약하고, 머리가 나쁘다고 말하는 남자들을 종종 본다. 여자들은 여성을 비하하는 발언이라고 분개한다. 그러나 전혀 그럴 필요 없다. 세상은 남자가 움직이고 여성은 남자를 움직인다. 이를 감지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하는 소리다. 여자는 때로 보이지 않는 손이다. 자신이 해놓은 일을 남자들이 한 것처럼 슬쩍 밀어놓기도 한다. 그걸 모르는 남자들은 자기가 다 한 줄 알고 우쭐댄다. 이런 일은 타고난 능력이 달라서 빗어지는 일이다. 다만 외향적인 남자의 힘이 여자의 부드러움 보다 눈에 쉽게 띌 뿐이다.
4월 14일 동년기자단 2기 발단식이 열렸다. 지난 1년간 감동과 연륜이 묻어나는 글로 두각을 나타냈던 1기 동년기자 26명을 포함한 총 48명의 2기 동년기자단이 꾸려졌다. 각자의 인생과 삶의 철학은 다르지만, ‘동년(同年)’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게 될 그들이 첫 만남을 가졌다.
3월 1일부터 15일까지 온라인 지원과 서류 심사를 거쳐 선발된 48명의 동년기자가 설렘을 안고 한자리에 모였다. 이날 발단식 이후, 이듬해 3월까지 1년간 각자의 역량에 따라 활발한 활동을 펼칠 계획이다. 2기 동년기자들은 1942년생부터 1966년생까지, 평균나이 61세로 1기 동년기자단(평균나이 54세)보다 연령대는 높지만, 저마다의 깊은 연륜과 강한 열정으로 앞으로의 활동에 기대를 불어넣고 있다.
공감과 감동이 있는 기사 기대돼
이날 행사는 명함 및 기자수첩 수여, 윤리강령 채택, 동년기자단 1기 활동 보고, 개인 프로필 및 단체사진 촬영, 자기소개 등으로 이뤄졌다. 발단식에 참석한 길정우 이투데이 총괄대표이사는 “동년기자들의 눈높이로 일상의 행복한 일, 감동을 주는 이야기 등을 기사로 쓴다면 중장년 독자와의 공감대를 잘 형성할 수 있을 것”이라며 “좋은 글을 많이 써서 우리 주변에 행복과 기쁨을 나눠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이어 강혁 이투데이PNC 대표이사는 “매호 동년기자의 글을 감동적으로 읽고 있다. 1기 동년기자단의 활동 덕분에 문화체육관광부 선정 우수콘텐츠 잡지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며 2기 동년기자단의 활약을 기대했다.
보람만큼 책임감 더한 기사로 발전하길
동년기자단 1기를 이끌었던 강신영 단장은 “처음에는 얼떨떨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시행착오도 있었지만, 모두 액티브 시니어로 활동하는 분들이라 잘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며 지난 활동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했다. 아울러 “블로그나 SNS 등에만 쓰던 내 글이 잡지와 온라인 사이트에도 실리는 것에 무척 보람을 느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보게 되는 만큼 글과 사진의 수준을 올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동년기자단’을 작명한 임철순 이투데이 주필 겸 이사는 “동년이란, 같은 나이라는 뜻도 있지만, 과거 시험에 함께 합격한 이들을 일컫기도 한다. 서로 나이는 차이 나지만, 친구로 동무로 어울리며 망년지교(忘年之交)하길 바란다. 열심히 글을 쓰고 보람찬 활동을 하면 좋겠다”며 그 의미를 되새겼다.
남자 25명, 여자 23명 / 50대 20명, 60대 23명, 70대 5명 / 평균나이 61세
가나다순 48명
가재산(63·남), 강신영(65·남), 김수영(64·여), 김영선(65·여), 김종범(61·남), 김종억(64·남), 김진주(57·여), 김태형(57·남), 박기원(51·남), 박미령(63·여), 박수남(54·여), 박애란(66·여), 박정하(51·여), 박종섭(62·남), 박혜경(65·여), 배인휴(65·남), 백외섭(66·남), 변용도(67·남), 성경애(60·여), 성미향(54·여), 손웅익(59·남), 신용재(68·남), 안영란(55·여), 안영희(70·여), 양복희(60·여), 옥선희(59·여), 육영애(71·여), 윤영애(56·여), 윤재훈(58·남), 윤정자(75·여), 윤종국(70·남), 이경숙(65·여), 이두백(67·남), 이미숙(56·여), 이석현(56·남), 이찬만(58·남), 이현숙(59·여), 장영희(61·여), 전용욱(59·남), 정성희(57·여), 정원일(60·남), 조왕래(66·남), 주상태(51·남), 최원국(61·남), 최은주(54·여), 최현식(64·남), 한정수(71·남), 홍재기(57·남)
웅장하게 펼쳐진 겹겹의 산속에는 지난날의 기억들이 어른거렸다.
미국에서 돌아와 자리 잡은 곳이 태릉과 멀지 않은 퇴계원이었다. 복잡한 도심과는 거리가 먼듯하고 경기도가 시작되는 서울의 끝자락이다. 여기저기 뚫려있는 도로와 교통량이 그나마 적고 어딘가 모르게 미국의 정서가 남아있는 듯해서 선택한 곳이었다.
더구나 공기가 맑고 쾌청해서 바로 옆 서울과는 비교가 되는 곳이었다. 아파트 앞에는 용암천이라는 개울이 흐르고 조금 멀리 시야에는 웅장하게 드리워진 불암산의 자태가 지난날의 추억들을 불러일으켜 잠자던 동심을 자아내기도 한다.
대학 1학년 시절부터 알게 된 남편의 절친한 친구 여섯 명이 있었다. 그들은 육의 제라는 이름을 맺고 가족처럼 때로는 의형제처럼 젊은 시절 함께 청춘을 불태웠다. 그중에 키가 크고 아주 잘생긴 멋들어진 친구 하나가 영어실력이 유창했다. 그 친구는 유독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두 눈에 색기를 품으며 영어로 친절을 베풀었다.
더구나 집안도 아주 부유해서 수원에서는 제법 유지였으며, 집도 그 흔치않은 99칸 한옥 집에 살고 있었다. 그 친구 어머니는 상당한 인텔리로 그 옛날 이대 나온 그야말로 멋과 지를 함유한 여성이었다. 아버지 역시도 고위급 관직에서 오랜 세월 자리를 해 집안에 명성은 널리 알려진듯했다. 그러나 그 친구 어머니는 아버지가 전처를 사별하고 만난 후처라고 했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그 친구 어머니는 기품을 소유한 훌륭한 어머니로 기억이 되었다.
불암산 일대가 그때는 거의 그 친구 집안의 것이라고 했다. 남편의 의형제들과 함께 필자도 불암산에 있는 유스호스텔이라는 곳으로 1박 2일 MT를 갔다. 그곳이 남편 친구 집안의 소유였기에 별 불편함이 없이 여기저기 편안하게 즐기며 저녁 내내 이야기꽃을 피웠다. 널찍한 마당 한가운데에 장작불을 지펴대고 캠프파이어를 즐기며 손뼉 치고 노래하며 누구를 의식하지 않고 시간 가는 줄을 모르는 밤을 지새웠다.
여기저기 산속에도 어슴푸레 어둠이 몰려오고 그윽한 산 내음과 나무들의 속삭임이 바람소리에 살랑대면 초저녁의 정서는 설렘을 더해주었다. 기타를 치며 부르는 청춘들의 불타오르는 젊음의 노래는 활활 타오르는 장작불에 활기를 더해주었고 모두의 얼굴에는 시뻘겋게 열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이 살아있는 붉은 피의 들끓는 젊음이었다.
모두들 나이를 먹고 하나둘 가정을 이루기 시작하며 친구들 각자는 자기의 삶에 열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젊은 만남의 시간들은 차츰 횟수를 줄여갔고 그저 가끔씩 전화로만 소식을 주고받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황당한 연락이 왔다. 그 가장 잘생기고 부유했던 불암산의 장손이 객사를 했다는 것이었다. 무슨 날벼락 영문인지 모르니 일단은 달려가야만 그 정확한 소식을 알 수가 있었다.
갑작스러운 비보에 의형제가 함께 모였다. 40을 넘기지 못한 새빨간 청춘에게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상주는 다름 아닌 5살 배기 어린 남자아이, 그리고 7살짜리 여자아이를 남기고 잘생긴 남자가 훌쩍 그렇게 떠나갔다. 미망인은 고인과는 10살 이상 차이나는 가녀리고 앳된 젊은 여자였다. 그녀는 그 친구의 두 아이 엄마였고, 의형제 모두는 처음으로 그녀와 인사를 나누는 어색한 자리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은 고인이 지난날 살아온 과정들을 하나밖에 없던 남동생에게서 겨우 들을 수가 있었다. 그 친구는 젊은 시절 명동에서 아주 근사한 칵테일 바를 운영했고, 그곳에서 늘씬하게 크고 멋들어진 한 여성을 알게 되었다. 키가 크고 이국적인 그 친구에게는 아주 잘 어울리는 멋진 여성이었다. 필자는 그 여자친구를 어디선가 어렴풋이 한번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두 사람은 진실로 사랑을 했으나 그의 어머니가 강력하게 반대를 했다. 그 후로 그 친구는 집을 나와 방탕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어머니는 깊은 근심에 쌓였으나 어찌할 방도가 없었고 결국 엇나가는 관심 속에서 부잣집 장남이 형편없는 떠돌이로 객지 생활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는 마지막 그 젊은 여인과의 만남을 끝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 것이다.
육의 제의 가장 맏형이 눈에 눈물을 글썽이며 말을 잊지 못했다. 불과 몇달 전쯤에 돈을 조금만 융통해달라고 연락이 왔었다는 것이다. 그 형은 영문을 모르고 모처럼 전화해서 돈을 요구하니 냉정하게 자르고 말았다며 안타까워했다. 결국 고인은 폐병이라는 몹쓸 병으로 피 같은 나이에 가장의 책임감은 뒤로한 채 어린 자식들과 젊은 아내만을 남기고 이 세상 하직을 한 것이다.
그 장례식 이후로는 고인의 남은 가족도 연락이 끊기고 말았다. 젊은 여자가 두 아이들을 데리고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머니와 남은 동생이 미국 LA에서 조촐하게 산다는 소식만을 어렴풋이 전해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많던 재산은 어디론가 풍비박산이 나고 지금의 불암산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멀리 바라보이는 산의 웅장함만이 초라하게 다가와 지난날의 모든 것들이 그저 덧없음으로 느껴져왔다.
결국 무엇이 문제였을까? 부라는 많은 재산과 그 철저했던 집안의 가풍과 명예가 결국 자식을 가차 없이 낭떠러지로 몰아간 것은 아니었을까? 지난날에 숱한 의문점만 외롭게 남아있었다. 지나온 시간, 자식들을 키우며 견뎌 온 세월 속에 돌아보면 참으로 많은 성찰이 남기도 한다. 어찌 부모의 마음을 자식이 알 것이며 뱃속으로 난 자식이라지만 부모 맘대로 되지 않는 것이 또 자식 교육인 것만 같다. 자식 잘 되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멀리 바라다 보이는 불암산의 웅대한 자태가 홀연히 젊음의 추억을 가져다준다. 또 한때의 피 끓는 과거가 어쩌면 진정한 인생의 의미를 느끼게도 해주며 잠시 회한도 불러일으켜준다. 결국 돈도 명예도 어느 순간에 다 그렇게 없어지고 마는 헛된 것이었다. 한치 앞도 모르는 삶의 뒤안길에서 그저 순리대로 욕심내지 않고 남은 인생의 색깔을 곱게 물들여 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삶이라고 자위를 해본다.
그 옛날, 풋풋함이 넘치던 청춘 시절, 그 잘생겼던 키가 크고 이국적인 한 남자가 불암산 꼭대기에서 윙크를 하며 미소를 짓는다. 한껏 다하지 못한 세상 아쉬움만 남는다고 씁쓸한 고뇌와 여운을 남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 생생한 소리로 깔깔거리며 젊음을 논하고 싶다고 불암산 자락의 추억이 손짓을 해왔다.
시간은 흐르는 것, 남아있는 삶 앞에 최선을 다하며 후회 없이 살고만 싶다.
교육 좀 안다는 사람에게 전혜성(全惠星·88)이라는 이름은 낯설지 않을 것이다. 그녀 자신이 24년간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냈으며, 4남 2녀를 모두 명문대에 입학시킴으로써 자녀교육의 전설적인 대가로 일찌감치 알려졌기 때문이다. 그때 화제가 됐던 그녀의 자식들은 지금 교수 또는 미국 정부 차관보로 지내는 등 사회의 최고 엘리트로서 활동하고 있다. 여전히 교육에 있어 현역 활동을 하고 있고 그 와중에 한국을 찾은 전혜성 박사에게서 특별한 교육철학과 인생의 보람에 대해 들어봤다.
무려 24년 동안 예일대학교 교수를 지낸 전혜성 박사는 그녀 자신의 커리어도 커리어이지만 무엇보다도 자녀교육의 대가로 유명하다. 큰딸 고경신씨는 중앙대 화학과 교수였으며, 장남 경주씨는 미국 매사추세츠 주 보건후생부 장관을 지냈다. 2남 동주씨는 매사추세츠 주립대 의대 교수이며, 3남 홍주씨는 미국 연방정부 국무부 인권담당 차관보를 지냈다. 차녀인 경은씨도 예일대 법대 교수이며 4남인 정주씨는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그야말로 일일이 경력을 따지는 게 무의미할 정도로 미국 이민자 가정이 이뤄낼 수 있는 최고의 엘리트들을 키운 그녀의 자녀교육 철학은 수많은 부모들에게 귀중한 영감이 되었다. 미국 사회에서 그녀는 한국의 위대한 어머니이자 세계적인 사회학자로서 ‘교육의 대모’로 불리며 그녀의 자녀교육법은 오바마 정부의 교육부에 의해 아시아계 미국인 가정교육의 성공사례로 연구됐다.
골든 에이지, 전혜성이라는 이름이 가지는 무게
전 박사는 주미대사관 공사를 역임한 남편 고광림 박사(1989년 작고)와 함께 동암문화연구소(ERI)를 설립, 소장으로 재직하면서 한-미 문화교류에도 큰 역할을 했다. 저서로는
(1972년), (1982년), (1996년), (2006년), (2010년), (2012년)가 있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에 걸쳐 계속 만들어진 책들은 그녀가 자신을 꾸준하게 단련하는 학자임을 우회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그녀의 공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그녀가 입주한 실버타운은 미국에서 최고급에 속하는 곳으로 총장급을 비롯한 교수 사회의 지식인층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선 사회에서 은퇴했지만 인생에서는 은퇴하지 않은 시니어들이 살아가고 있다.
“실버타운에 입주했을 때 미국 사회의 새로운 세계로 들어간 느낌이었어요. 그런데 짐도 풀기 전에 한 할머니가 저에게 한국 문화에 관해 강의해달라고 요청하더군요. 자기가 어시스턴트를 해주겠다고. 알고 보니 헌법 교수였어요.”
그녀가 한국 문화에 대한 교육 프로그램을 개설하니 첫 강의에 34명이 등록했다. 그런데 재미있었던 일은 34명 중 70%는 그녀가 아는 사람이거나 지인 또는 자녀들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버타운 사람들은 그날 아침 를 읽지 않으면 저녁을 먹으러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세상에 대해 끊임없이 공부하는 사람들이었다. 함께 저녁을 먹으면 책 한 챕터는 쓸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갸륵한 라이프 스토리가 있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한국 문화 강의를 요청했던 헌법 교수는 겨울에 나가서 깡통을 집어와요. 그걸 팔아서 번 돈을 기증하기 위해서죠. 항상 남루한 옷만 입고 다니는 그녀가 한번은 화려한 옷을 입었길래 어디서 구했냐고 물어보니 중고장터에서 산 옷이라고 하더군요. 가족의 백그라운드가 하버드대 교수들로 이뤄진 집안의 딸이 청빈을 유지하며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는 거죠.”
휘트니 센터라고 불리는 이 실버타운에는 동아리가 19개가 있다. 음식에서부터 강의 커뮤니티 등등. 전 박사는 계속 배우고 누릴 수 있는 삶이 만족스러워 마치 “천당에 온 것 같다”며 실버타운 생활은 기대 이상이라 했다.
“그런데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어요.”
나이 들었다고 하루하루를 그저 흘려보내는 사람은 주변에 아무도 없다며 미국에는 이처럼 독립적으로 시니어들이 자랑스럽게 삶을 연장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돼 있다고 했다.
열정적이되 지치지 않게
평생을 공부하는 사람답게, 전 박사는 공부를 시작하면서 16세 때부터 마음먹은 것이 있다고 말했다.
“해방 후에 감옥에서 우국지사들이 나와서 정치를 했는데, 정책적인 아이디어가 너무 없었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떻게 해서든 한국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싶었죠. 그걸 위해선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 서울여자대학교 설립자인 고황경 박사가 여러 가지 활동을 했지만, 결혼을 안 하니 주변에서 인정을 안 하더군요. 그래서 한국에서 인정받으려면 혼인하고 아이를 낳은 후 박사 학위를 가져야겠구나 하고 결심하게 됐어요.”
이화여대 영문과 2학년을 마치고 미국 유학에 나섰고, 22세가 되던 해에 결혼한 그녀는 고광림 박사와 하버드대에서 최초로 한국학 과정을 신설했다. 사회 참여적 인물로서 그녀의 의지는 그만큼 확고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준비되고 예상한 대로 흘러간 것은 아니다. 전 박사는 자신의 결혼생활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유교사상이 너무 강한 집안이었어요. 고단했고 할 일도 많았고…. 집을 나가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녔죠. 그런데 내가 선택한 것이니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극복했어요. 더구나 내가 명색이 비교문화 사회구조를 연구하는 사람인데 싶었고(웃음).”
부모는 행동과 실천으로 아이를 설득해야
고통스러웠던 결혼생활 끝에, 전 박사는 ‘이런 도전을 주신 것은 하느님이 필시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다’ 라고 인정하게 됐다고 한다.
“바깥의 고통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니 스트레스가 사라지더군요. 그리고 사람을 바꾸는 건 어렵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아들을 잘 키워서 며느리들은 편하게 해주자 싶었죠(웃음).”
시간이 흐르면서 예상치 못한 일들도 일어났다.
“아이들은 서양식으로 자랐으니까, 아버지에게 여기가 미국인데 왜 한국식으로 사시냐고 따지는 일도 일어났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난 항상 중간 역할을 하게 됐어요. 나중에 남편이 없을 때 자식들과 함께 지내게 되면 내가 남편 역할을 하기도 했죠.”
전 박사는 본의 아니게 남편 역할을 하게 되는 일이 종종 생기면서 깨달음을 얻었다. 바로 자녀교육에서 ‘아버지는 어떻게 해야 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들은 정답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밸런스였다.
“부모 중 한 사람만이 아이를 키우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에요. 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해야 하는 일입니다. 아이들을 키우려면 닦달하고, 쉬게 하고, 사랑도 하고 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기 위해서 부부 두 사람이 공동 목적이 서면 역할 교환이 잘되더군요.”
대를 이어가는 자녀교육 철학
전 박사는 부모의 역할 모델이 가장 중요하다고 재차 강조했다. 간단히 말하면 “공부해”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아이들과 같이 공부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녀는 말이나 기계적인 지식의 한계를 알고 있었고 지극히 회의적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행동의 중요성을 믿고 있었다.
“말의 효과는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말로 하면 23%가 전달되고, 몸소 행동으로 실천하면 100% 전달됩니다. 말보다 행동이 더 중요한 거지요. 자녀교육의 핵심은 부모가 열심히, 성실하게, 그리고 봉사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행동으로 보여줬습니다. 가정 내에서 의사소통이 계속 이뤄질 수 있도록 아침식사를 늘 같이하며 아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꾸준히 귀 기울였어요. 요즘에는 아이들이 우리가 모르는 걸 더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아이들 하나하나를 한 명의 성인으로 보고 대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기 위해선 가족 공동의 목적을 세워 그걸 이루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방법이 좋겠죠.”
사실 전 박사의 삶의 저변에도 부모님의 존재가 두텁게 드리워져 있다.
“어머니는 과거부터 여자도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어요. 그리고 아무리 똑똑해도 덕망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죠.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공부를 해야 한다고 늘 말씀하셨어요. 사실 제가 아버지 어머니에게 약속한 걸 성취하려고 평생을 살았다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그녀 자신도 부모님의 성공적인 자녀 교육의 영향권 안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녀교육의 철학은 대를 이어 내려오고 있다.
부모가 삶의 목적을 먼저 세워라
미국 최고 대학의 교수이자 여섯 남매의 어머니, 그리고 엄격한 유교 집안의 며느리로 살아야 했던 전 박사의 삶은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러한 삶에서 ‘일과 가족’은 새의 두 날개와 같다고 말하며 자신이 속한 사회와 가족을 한데 묶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제대로 날 수 없다고 강조했다. 좋은 아내, 현명한 엄마라면 사회에 대해 그만큼 알아야 하며 일과 가족 사이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 쉽지 않은 모든 것들을 겪어내면서 어떻게 자신에 대한 힐링을 했는지 물어봤다.
“나는 의식하지 못하고 한 일인데 그 일이 젊은이들에게 큰 도움이 돼서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나에게 다시 찾아오는 일이 있어요. 정말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오죠. 그게 제 자부심을 높여줍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 후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서 사는 삶이 그녀가 말하는 가치 있는 삶임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녀는 마지막으로 “삶의 목적이 뚜렷하고, 자식들과 대화할 수 있는 부모가 되면 아이들이 잘된다”고 말했다. 부모가 자식의 삶의 모범이 되면 자연스레 아이들은 따라온다는 것이다.
성공보다는 성취에 목적을 두고 삶의 목적을 분명히 세워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삶이 정립되면 부모와 아이들 인생 모두는 성공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것이야말로 자식을 잘 키우면 노후가 행복해질 수밖에 없는 필연적인 이유다.
장수가 악몽이 되는 노후파산은 일본만의 문제가 아니다. 이미 다양한 사회 지표는 우리 사회에 노후파산에 대한 경종을 울리고 있다. 누구나 아름답고 행복한 노년을 꿈꿀 수 있지만 아무나 행복수명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녀 교육이든 노후 문제이든 일생을 염두에 두고 계획적으로 삶을 설계해야 한다는 전 박사의 조언이 긴 여운으로 남았다.
서울에 왔을 때 실버타운을 가보니 제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과는 너무나도 운영 시스템이 달랐어요. 한국은 사우나와 골프장이 몇 개씩 있지만 호사만 시키는 거지, 사회에 기여를 해서 사는 보람을 느끼게 하는 프로그램은 없더군요
신라호텔 룸에서 만난 백발의 전혜성 박사는 다리만 빼고 다 건강하다고 말한다. 한국과 비교해서 실버타운 생활을 얘기하던 중에 그녀는 “오래 사는 것보다 보람 있게 사는 게 더 중요하다”며 “자녀 교육 못지않게 부모의 노후 대비도 중요하다”고 말했다.
국민 드라마 의 바르디바른 둘째 아들 용식, 뜨거운 열정과 헌신으로 무대에서 빛나는 베테랑 연극인, 그리고 막말 논란으로 시끄러웠던 문화체육부 장관까지. 어느새 올해 67세를 맞이한 유인촌의 이미지는 이렇듯 여러 갈래로 만들어져 있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매스컴의 요란한 스포트라이트에서 어느 순간 사라져 연극인으로 돌아간 그는 OBS의 대담 프로그램 MC를 맡아 3년째 드라이빙하고 있다. 광대로서, 그리고 뼛속까지 순간예술인임을 자각한 유인촌과의 만남 뒤로 생각보다 진중한 얘기가 있었다.
유인촌은 자신이 맡은 OBS 의 방향성이 최근의 방송 트렌드와는 다르게 진중한 점이 좋다고 한다. 뭐든지 예능화되는 요즘 TV 프로그램들과 비교하면 그가 과거에 진행자로서 인기를 얻었던 에 가까운 느낌이다.
“요즘 방송은 장점보다는 단점을 드러내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고…. 그래서 이 프로그램만은 정말 좋은 점, 장점, 들어서 감동할 수 있는 점을 중심으로 만드는 게 좋겠다 싶었어요. 물론 그렇다 보니 방송이 원하는 자극은 없어요. 그러나 보고 나면 따뜻해져요. 다행히 OBS가 그걸 지켜주고 있습니다. 매주 다른 분을 만나기에 그분들에게 보고 배우는 게 많아요.
1년에 50여 명을 만나니 지금까지 150여 명을 만난 셈이죠.”
그는 기억에 남는 사람이 많지만 특히 이어령 박사,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을 꼽았다.
“이어령 선생은 첫 방송에 모셨고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분이죠. 이명현 전 교육부 장관은 과거에 김영삼 정부 시절에 교육부 장관을 하셨던 분인데 인생 스토리가 너무 놀라웠어요. 한국전쟁 전에 걸어서 월남한 뒤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하시다가 검정고시로 서울대 철학과를 입학한 분이죠. 김희수 건양대학교 총장은 김안과를 만드신 분인데, 지금도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학교에 간다는 얘기를 듣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죽을 때까지 연구할 게 생겼다
유인촌을 의 영원한 둘째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그가 어느새 67세라는 나이에 이르렀다는 사실이 아주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제가 공직에서 나와 다시 연극을 하면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지금이 전성기다.”
유인촌에게 전성기라는 개념은 철저히 연극인 유인촌으로서의 입장에서 할 수 있는 말이다. 연극에서의 시간은 보통 삶의 시간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영상은 젊은 사람들이 잘할 수 있지만 무대는 달라요. 희곡 작품 자체가 일상이 아니라 어렵거든요. 그런 것들이 소화되고 공감대를 가질 수 있으려면 남자는 40이 넘어야 해요. 그 전에는 아기 같아요. 사실 40대까지는 대학생 역할을 했었어요. 성인 남자의 역할은 40대 후반에서 50대가 되어야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지금이 전성기’라고 얘기한 거죠.”
그것이 4년 전 얘기. 지금 유인촌은 또 다른 전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금은 개인으로서 하려 했던 일은 거의 다 했다고 생각해요.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그동안 했던 걸 모두 지우고 연기자로서 새로운 뭔가를 다시 시작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연기 외의 다른 사업이라든지 기관장이라든지 말고요. 순수하게 내가 배우로 뭘 한다고 하면 그동안 쭉 쌓아왔던 걸로는 다 했어요. 그래서 공부를 다시 하고 있어요. 기본적으로 배우 훈련입니다. 발성부터 다시 공부하고 있어요.”
연극인 유인촌이 발성부터 다시 배운다? 납득이 되지 않는 얘기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동안 해왔던 작업이 겉으로만 보였던 거라면 이제는 마음 깊은 곳에 있는 것들에 집중하고 싶어요. 특히 저는 우리만의 전통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양복을 입고 있어도 한국 사람이 갖고 있는 전통의 멋이나 깊이를 체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이제부터 그런 연구를 시작하고 정리해 죽을 때까지 할 계획입니다. 수련하는 느낌으로.”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 주고파
근본으로 돌아가 새로운 길을 찾고자 하는 그는 올해부터 의미와 가치에 중점을 둔 계획을 여러 가지 세우고 있다.
“사실 극장도 내가 퇴직하고 나와서 대관료를 만원 받으며 운영했었어요. 젊은 친구들 하라고. 그걸 3년을 했네요. 올해는 청소년, 특히 소년원과 쉼터에 있는 아이들이나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자아를 찾는 기회를 주기 위해 자전거 여행 프로그램을 계획하고 있어요. 여름방학 기간에 4박
5일 동안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라이딩 투어를 준비하고 있죠.”
그러고 보니 그는 소문난 자전거 마니아이기도 하다. 그와 자전거는 어떻게 인연이 맺어진 걸까?
“오래전부터 탔죠. 그런데 옛날에는 그냥 설렁설렁 타다가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한 건 한 15년쯤? 늘 탔지만 취미 내지는 생활처럼 된 건 그 정도 됐죠. 저는 배우를 했잖아요. 연기를 하기 위해 모든 기능적인 걸 다 배워야 했어요. 수영, 자전거, 바이크, 펜싱, 검도, 스쿠버다이빙, 윈드서핑…. 다 연기할 때 필요한 것들이었죠. 그러다 보니 적당히 한 게 아니라 업계에서 알아볼 정도로 했죠. 승마도 장애물까지 할 정도였으니까. 지금은 다는 못하고 걷기, 자전거, 수영, 스키, 스노보드 정도만 하고 있죠.”
그는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어야 직성이 풀린단다. 취미도 운동도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다. 특히 걷기는 그가 여전히 좋아하면서 계속할 수 있는 취미이자 운동이다. 670km를 걸어서 종단한 경험이 있는 그는 아직도 웬만하면 걸어 다닌다. 장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삶의 보람을 일깨운 마지막 햄릿
연극인으로서의 성공, 정치인으로서의 논란. ‘개인적으로 할 건 다했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유인촌의 삶의 그래프는 급격하다. 그가 ‘내가 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는 언제였을까?
“작년에 이해랑연극상 수상자들과 함께
공연을 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나는 햄릿을 하면 안 된다’고 했어요. 60대 중반 넘어선 사람에게 왕자 역할 하라고 하면 욕먹는다고. 그런데 이해랑연극상 받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이 없었어요. 윤석화가 전체에서 가장 막내였고 내가 그다음이었으니. 그래서 결국 내가 햄릿 역할을 하게 됐는데, 굉장히 책임감이 느껴졌죠. 다행히 유종의 미를 거뒀어요. 어떻게 보면 그게 저의 햄릿 역할의 마지막이었습니다. 내 연기 인생의 전반부가 으로 정리가 됐어요. 그러면서 연기하고 연극하길 참 잘했다고 처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계산하지 않는 스타일이라고 정의했다. 물질적 계산보다는 명분과 충분한 목적과 필요성이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그가 세운 극장도 처음에는 한 달에 2500만원씩 빠져나갔는데 그때마다 다른 곳에서 일한 돈으로 메꾸면서 운영했다고 한다. 꼭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기에 저질렀다는 그의 말에서 평소의 신념과 의지를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는 내 일에 더 집중하려고 해요. 주변에 여러 가지가 연관이 되어 있는데 정리하고 있어요. 제게 섭섭한 것도 있고 아쉬운 것도 있겠지만 좀 좁히려고요. 이제 와 일을 벌이는 건 안 좋다고 생각해요. 연극도 1년이나 2년씩 구상하고 준비해서 하려고 해요. 작년에는 의도치 않게 연극 일이 많았지만, 올해는 쉬면서 지금까지의 삶을 정리하는 책을 써볼까 합니다.”
나이는 장애가 아니다
“젊다는 것은 젊어서 좋은 거예요. 그것 외에는 크게 장점이 없어요. 그러니까 늙는다는 것은 핸디캡이 아니에요.”
그는 ‘어차피 늙는 건데 (인생을) 잘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침 그가 주연과 연출을 맡았던 연극 중 톨스토이의 중편소설 를 원작으로 한 라는 작품이 있는데, 늙어감에 관한 총체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가 유난히 애착을 가진 작품이기도 했다.
“제가 를 1997년에 호암아트홀에서 초연했는데 지금까지 매번 적자였어요. 그러나 작품의 의미나 형식이 너무 좋아서 적자가 나는데도 계속 공연을 하고 있어요. 이 작품의 대사 중에 ‘중후하게 늙을 것인가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 중후하고 가련하게 늙을 것인가’라는 말이 나와요. 그 질문을 관객에게 계속하는 거예요.”
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삶을 관조하는 늙은 얼룩말을 맡았던 연기자 유인촌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간이다.
는 병든 말 ‘홀스또메르’를 통해 인간 삶을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화자인 얼룩말은 다양한 역경을 겪은 늙은 말이다. 이 얼룩말의 시각을 통해 이야기되는 사랑과 고통, 아름다움과 추함, 젊음과 늙음 등은 인간사 희로애락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예술의 보람과 감동을 알기에 놓을 수 없다
“‘인간은 자기 땅이라고 하면서 밟아보지도 않아. 자기 사람이라고 하면서 그 사람을 욕해. 내 여자라고 말하면서 다른 여자와 살아.’ 는 이런 인간의 속성을 말의 입장에서 말하고 있어요. 관객 중에 홀스또메르가 말하는 이런 사람이 꼭 있어요. 그 사람은 나와 눈을 못 마주쳐요. 그래서 흥행은 안 되죠(웃음). 하지만 나이 들어 이 연극을 보신 분들은 공연이 끝나도 일어나지를 못해요. 자신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되는 거죠. 그리고 울기도 합니다. 저도 그 작품을 생각하면 지금도 두근두근해요.”
한번은 사업을 하다 부도를 내고 자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 친구 때문에 를 보게 됐는데 이 연극을 본 후 죽으면 안 되겠다는 걸 깨달았다고 그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는 거지. ‘내가 꼭 성공하겠다, 그리고 당신을 후원하겠다’는 내용이었어요. 제가 얼마나 감동을 받았겠어요. 그걸 보면서 예술로서의 목적이 달성됐다고 생각했어요. 사실 그런 편지 하나 때문에 연극 일을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돈으로 계산할 수 없는 거니까요.”
궁금했다. 유인촌은 어떤 이유로, 어떤 힘으로 연극이라는 자신의 세계를 이렇게 끌고 올 수 있었을까? 그 의문이 다소 풀리는 순간이었다.
기억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제가 같은 작품을 했는데 어떻게 늙어갈지를 왜 생각하지 않겠어요?”
그렇다. 지금의 유인촌은 그 고민의 결과다. 예술은 사람에게 화두를 던질 수 있고 그 화두를 접한 사람은 더욱 발전할 수 있다.
“운동을 하기 싫지만 취미를 갖고 싶으면 예술을 가까이 하는 게 좋아요. 일본의 단카이 세대들은 동호회가 많이 활성화돼 있어요. 그래서 박물관의 날, 미술관의 날 등을 정해서 집중적으로 예술을 접합니다. 돈을 모아서 강연회를 열기도 해요. 아주 지적인 취미생활인 거죠. 우리도 할 게 많아요.”
기자가 늘 놓치지 않고 묻는 마지막 질문, 그에게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지를 물었다.
“예전부터 그랬어요. 저는 기억되지 않는 게 좋다고. 가족에게도 내가 죽으면 화장해서 뿌리라고 말해뒀어요. 광대 팔자라는 게 그런 거예요. 남기지 않는 게 좋다. 연극은 순간예술이에요. 시간이 지나면 없어지는 거죠. 저는 저를 영상으로 남기는 게 어색하거든요. 그래서 영화를 안 했어요. 필름은 50년, 70년 돼도 남는 것이라 부담스럽거든요.”
방송에 나오지 않으니 젊은 사람들은 이미 자신을 몰라서 지하철을 타도 아무 불편이 없다는 말을 하면서 그는 살짝 웃었다.
“사람마다 저에 대한 느낌을 갖고 있겠죠. 누군가에게는 방송인으로, 누군가에게는 배우로. 그냥 그렇게 각자의 나름대로 가벼이 기억에 남아 있는 게 좋겠어요.”
유인촌과 ‘홀스또메르’가 오버랩되면서 옳다 그르다 선을 긋기 전에 인생역정 겪고 마침내 거울 앞에 선 그에게 다시 오는 것과 오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큰 의미가 없을 듯하다. 편협한 생각으로 나눴던 대화, 그끝에 알게 된 건 그가 영원한 연극인이라는 거다.
그녀는 철없고 순진하다. 세 번의 이혼과 파산 등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고생한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10대에 이미 화려한 스타로 누릴 대로 누리다가 편안하게 그대로 곱게 중년이 되어버린 여자처럼 보인다. 40대가 되면 누구나 얼굴이 책임지고 살아온 인생을 투영한다고 말하는데 이상아의 얼굴은 반칙이다.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는 그녀와 한바탕 수다를 떨었다.
이봉규 시사평론가 박규민
CF 여왕이었고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최고의 미녀 스타 이상아도 별수 없게 그저 그런 아줌마가 되어버렸겠지 하며 큰 기대를 안 한 채 그녀를 만나러 일산의 MBC 드라마세트장으로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최근 방영하고 있는 MBC 드라마 에서 이상아는 50대 사모님 역으로 나오고 TV조선의 에서는 사춘기 딸과 전쟁을 벌이는 철부지 엄마의 이미지로 비춰지기에 천하의 이상아도 세월의 무게는 어쩔 수가 없겠지 지레 판단하고 덤덤하게 그녀를 만나러 갔다. 그런데 대기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나의 섣부른 상상은 1초도 안 돼서 무너지고 말았다. 주먹만큼 작은 얼굴은 설탕처럼 하얗고 거기의 절반을 차지하는 커다란 눈망울은 보석처럼 빛이 나서 한량 이봉규도 어쩔 수 없이 덜컹 의자에 쓰러질 듯 주저앉고 말았다.
참고로 나는 보통 남자들과는 다른 한량으로 자부하기에 이상아처럼 전형적인 예쁜 얼굴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공효진, 박소담, 김고은처럼 독특한 매력이 있는 얼굴을 좋아한다. 굳이 따지자면 내 아내도 전형적인 예쁜 얼굴이 아닌 묘한 매력이 있는 외모의 소유자다. 그런 미적 가치관을 가진 이봉규도 이상아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한순간에 송두리째 흔들렸다.
불행했던 결혼생활
사람들이 왜 이상아가 예쁘다고 하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 그것이 아마 美의 보편적인 상식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상아는 세 번의 이혼, 파산, 술장사까지 해야만 했던, 여배우로서는 너무나도 가혹한 상황을 견디며 살았는데 찌든 모습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이상아 본인의 생각은 달랐다. “TV 화면이나 사진을 보면 늙어진 모습이 그대로 나와서 거짓말을 못합니다”라는 그녀의 평가가 희한하게 맞는 것 같기도 하다. 사실 TV로 볼 때는 그녀가 이토록 밝고 예쁜지 몰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 이후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사실을 뉴스를 통해 알고 있었기에 어두운 모습을 상상했는데 오늘 만난 이상아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세 번째 이혼을 발표할 때 16시간 동안이나 포털 실시간 검색어 순위 1위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내가 최순실을 이겼잖아요!”라며 깔깔대고 웃는다. 최순실 사태가 터졌을 때인데도 이상아의 세 번째 이혼 소식은 온 국민의 화제였다. 최순실 뉴스를 이긴 것이 대단하다고 이상아 본인 입으로 자랑하는 것은 분명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이젠 아픔을 충분히 극복했고 이혼하길 잘했다는 자평일지도.
하여간 이상아는 철없고 순진하다. 독설가의 이미지가 강한 이봉규를 만나기로 해서일까? 그녀의 표정이 처음에는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아마 저 인간이 나의 불행한 과거 얘기를 독하게 물고 뜯으려 하겠지!”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시간이 30분 정도 흐른 뒤부터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질문도 하지 않았는데 세 번의 이혼 얘기는 물론이고 아팠던 과거사를 아주 자연스럽게 술술 풀어내놓았다. 그녀는 무능한 아버지를 대신해 어머니와 두 자매를 부양해야 했던 삶이 버거워 현실도피 차원에서 했던 첫 결혼에 실패했고 이후 두 번의 이혼을 더 겪으면서 공황장애에 빠진 것은 물론 그녀의 어머니와의 관계도 원만치 않았다. 심지어 딸과도 자주 싸울 정도로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렸다. 최근에는 방송활동을 다시 활발하게 하면서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도 갚아야 할 빚이 있어서 연애는 생각도 못한 채 고독한 생활은 연장선상에 있다.
또 다른 사랑, 아직 버겁다
한번은 점을 봤는데 “결혼을 열 번도 더 한다”는 말에 기겁을 했다고 한다. 그 점쟁이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아 남자 만나기가 겁이 나기도 하지만, 딸 때문에 또 다른 사랑을 찾을 수가 없다고 털어놓는다. 엄마와 티격태격 싸우면서도 딸은 엄마에게 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엄마를 뺐길 것 같아 불안해한다는 것. 하지만 엄마가 세 번이나 이혼한 경력에는 더 이상 상처를 안 받는다. 그녀는 자신이 짝을 만나면 또다시 외톨이가 될까봐 겁을 내는 딸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뜻 연애 상대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런 점은 이해하면서도 이 정도에서 물러날 이봉규가 아니라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100세 시대에 아직 창창한데 이렇게 아름다울 때 빨리 평생 동반자를 만나야 한다고 하나마나한 빤한 조언을 하면서 “소개팅 시켜줄 테니 어떤 남자가 좋은지 말해보라”고 미끼를 던졌더니 철없고 순진한 이상아는 금방 문다. “나는 전형적인 B형 여자인데 B형 남자가 잘 맞는다. 불꽃 튀게 싸워도 빨리 풀어지고 뒤끝이 없어서 좋다”고 포문을 열더니 한술 더 떠서 “이제는 연하의 남자가 좋다”고 털어놓는다. 미끼를 금방 물 정도로 다루기가 정말 쉬운 순진한 여자다. 순진하기에 그동안 남자들에게 많이 당했을 것 같다. 그래서 이혼도 세 번이나 했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봄 직하다.
열두 살 띠동갑 연하의 아내와 행복한 재혼생활을 즐기는 이봉규가 목소리를 높여 또 충고했다. “나처럼 나이 많은 남자와 살면 내 마누라처럼 행복해진다”고 윽박질렀다. 그랬더니 그녀는 “탤런트 길용우씨도 비슷한 말을 하면서 자기 친구 소개시켜준다고 말한 적이 있다. 길용우 선배는 나보다 무려 열일곱 살이나 많은데 친구를 소개시켜준다니”라며 질색을 했다. 내친김에 더 집요하게 물었다. “연하의 남자라면 연예인 중에 어떤 스타일의 남자가 좋으냐?”는 질문에 그녀는 “배우 강하늘이 젊은 사람들 중에 가장 매력적”이라면서 “야비한 역할도 어울리고 청순한 이미지도 있는 다중 인격적인 매력이 있다”고 답한다. 잽싸게 강하늘의 나이를 검색한 뒤 열여덟 살이나 차이가 난다고 알려주니까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세 번이나 이혼하고도 아직 철이 들지 않은 이상아는 영원히 철부지 소녀로 늙을 것 같다. 그런 점이 그녀의 매력 포인트다. 그래서 아직도 이토록 예쁜 얼굴을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철부지라서 나이를 먹지 않고 어려 보여서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다고 한다. 선후배 군기가 세기로 유명한 연예계에서 자기보다 나이 어린 친구들이 대선배인 이상아를 어려워하지 않아서 서운할 때도 많단다. 털털하고 철없는 이상아도 참고 참다가 어떨 때는 학번이나 나이를 들먹이며 교통정리를 한 적도 있다. 어려 보이고 철이 없어서 사회생활에서 손해 보는 경우도 많은데 딸과의 관계에서도 예외가 아니라서 단점으로 작용한다. 딸에게 친구처럼 스스럼없이 대하다가도 갑자기 싸우고 또 속상해하면서 펑펑 울기도 한다.
딸은 그녀의 베스트 프렌드
한번은 방송 에서 딸 서진이가 “엄마가 내 엄마가 아니었으면 더 잘됐을 거 같았다”고 충격 고백을 했다. 이상아는 어이없다는 반응을 보이며 “태어난 걸로도 감사한 줄 알아라. 그냥 ‘아빠가 그 아빠가 아니었으면’이라고 말하는 게 낫지 않냐”라고 말하면서 울었다. 그 방송에서 이상아와 딸의 관계에 대해 역술가에게 물었더니 “둘이 절대 안 맞는다. 창과 방패다. 누군가 하나는 패턴을 바꿔야 한다”며 “모녀가 계속 충돌하는 이유는, 이상아 입에서 칼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이 오해를 많이 받는다. 그 부분이 이상아의 복을 차버렸다”고 냉정하게 평가했다. 역술가는 딸 서진의 사주에 대해서도 독하게 평가했다. “엄마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남자 부분이 겹친다. 세상 어떤 남자가 와도 만족을 못한다”는 직설적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서진은 “미래의 내 남편 직업은 무엇이냐?”고 당돌하게 물었다. 역술가의 평가와 달리 인생 육십을 산 한량 이봉규가 볼 때는 철부지 엄마와 당돌한 딸은 궁합이 잘 맞는다. 그렇기에 티격태격 싸우면서 같이 울고 웃고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는 것 아닐까? 딸은 커가면서 엄마 이상아의 아픔까지 사랑하고 이해해주는 베스트 프렌드가 되어줄 것으로 확신한다. “나는 자존감이 없다. 내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아직 모르는 것 같다.” 이상아의 자조적인 자기진단이다. 내성적이면서도 철없고 순진한 여인 이상아가 지금까지는 남자 복이 없었지만, 세 번의 이혼을 통해 충분히 예방주사를 맞았기에 앞으로 아름답고 예쁘지만 약하고 철없는 이 여인을 완전히 감싸줄 푸근하고 강한 남자가 곧 나타나서 그녀의 남은 빚을 갚아주는 대신 행복을 차용하는 날이 100세까지 이어지길 기대한다.
그녀는 노란색을 아주 좋아한다. 노란색과 인연도 깊다. 탤런트 면접시험 때도, 첫 CF(마요네즈 광고) 때도 노란색이 행운을 가져다주었다. 이상아의 집은 노란색 벽지로 덮였다. 노란색은 희망, 기분 좋음, 즐거움, 행복의 의미를 담고 있다. 연예인의 특성과 아주 잘 맞는다. 이제부터 하는 일과 사랑 찾기 게임에서도 노란색의 의미가 잘 발휘될 것으로 믿는다.
본인 동의 없는 개인정보의 수집과 활용은 개인정보보호법에 따라 금지됐다. 그런데도 얼마 전 경기 오산의 한 고등학교가 부모의 직업과 월 소득은 물론 월세 보증금 액수까지 적으라는 학생생활기초조사서를 배포했다가 학부모들의 몰매를 맞고 이를 회수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전쟁 정전 후 어려운 시기에 초등학생이 된 우리 세대에게 ‘가정환경조사’에 대한 아픈 기억이 많다. 성인이 된 후에야 전기가 들어온 산간벽지 내 고향은 문화시설이라곤 어느 집에도 없었다. 따라서 모두가 빈칸으로 조사서를 제출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선생님도 모든 형편을 다 알고 있어서 손을 들라는 말씀이 없었다. 조사서에 기재된 항목들을 보면서 도시에서는 신문도 보고 라디오도 듣는가 보다 나름 짐작만 하였다.
하지만 읍내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시골 동네와 문화차이가 많은 것을 느꼈다. 학교에서 지식이 아니라 수치심을 배웠다. 우리 집엔 단 하나도 없는 시계ㆍ라디오ㆍ전축 따위들이 친구들의 집에는 번듯하게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환경조사는 절대다수의 학생들은 내 집과 내 가족을 부끄럽게 생각하며 매번 신학기를 맞았다. 해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가난을 확인해야 하는 굴욕을 맛본 것이다.
그게 부끄러우면 거짓말을 해야 했다. 부모의 직업을 차마 쓰지 못하고 그냥 회사원으로 기재한 일, 국졸인 부모의 학력을 고졸이나 대졸로 쓴 일 등은 신학기 언론의 독자투고란에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며 매 학기를 맞이해야 했다. 그럼에도 가정환경조사서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학생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다는, 너무도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 때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학생의 능력과 별 관계가 없는 허망한 일이었다.
이제는 뿌리 깊게 내려온 가정환경조사 관행이 사라지고 자기능력을 검증하는 시대가 되었다. 취업현장에는 성별ㆍ나이 차별을 금지하고 있다. 남자 경비원을 모집하면서도 남자라는 표시를 하지 못하여 여자 지원자가 접수를 하고, 나이제한 공고를 하지 못하여 힘든 작업에 고령자가 찾아오는 웃지 못 할 일이 벌어진다. 이를 어기면 엄격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입사지원서에 학력기재 금지가 제도화할 예정이다. 입시 때 자기소개서에 부모 언급도 금지하며, 이를 어길 경우 아예 탈락시키는 방향이다.
대선정국이 열렸다. 각 진영의 선수들이 앞 다투어 내달리고 있다. 주자들의 자기능력 검증이 절실한 시점이다. 과거의 검증은 사돈네 8촌의 뜬소문까지 쫓다가 세월 다 보낸 경우가 많았다. 그들의 부동산 투기나 위장전입까지 문제 삼을 만큼 시간이 많지 않다. 선수의 배우자와 직계 존ㆍ비속만 검증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대선주자 자기능력 검증을 철저히 하여 허깨비가 등장할 수 없도록 하여야 한다. 또 다시 국정농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