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모가 중요하지 않았던 세상이 있었겠느냐마는 오늘날처럼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추앙이 심한 적은 없었을 듯하다. 겉으로는 공정한 척하지만, 입사면접에서 외모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임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TV 예능 프로그램에도 미모를 앞세운 프로가 인기를 얻고 심지어 교양 프로그램에서도 소위 ‘뇌섹녀’가 뜬다. 어찌 되었든 일단 미모를 갖추면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니 강남에 한집 건너마다 성형외과가 빼곡히 들어서는 것이 이상할 것 없다. 옛날에는 여자들만 아름다움에 관심이 있는 듯이 보였지만, 요즘은 남자도 알게 모르게 얼굴을 고치고 화장품을 바른다. 이러한 풍조가 과거에는 그저 체념하고 살았던 얼굴들이 너나없이 공공연히 새 삶을 살게 되었으니, 좋은 말로 하면 외모의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나 할까. 아무튼, 아름다워진 세상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세상이 되다 보니 전과 다른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우선 원본(originality)의 상실이다. 그러지 않아도 21세기는 과학기술의 발달로 정교하게 복사본을 만드는 게 어렵지 않은 세상인데 개인의 얼굴마저도 미학적 감수성이 부족한 의사에 의해 비슷비슷하게 카피 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의 얼굴 원본을 찾으려면 자식을 낳아봐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우습지만은 않다.
사실 인간이 가장 공포를 느끼는 모습은 무섭게 보이라고 창조한 영화 속의 괴물보다는 인간과 닮은 유사한 물체를 볼 때라고 한다. 예컨대 시체라든가 좀비 같은 데서 느끼는 오싹함이 그것이다. 우리가 길에서 미모의 얼굴임에도 얼굴 근육이 자연스럽지 않은 사람을 만나면 누구나 약간의 공포감을 느끼지 않는가. 짙은 화장의 가부키 배우나 중국 경극 배우에게서 느끼는 섬뜩함도 이와 다르지 않다.
미모의 민주화가 만드는 또 다른 문제의 현상은 미의 이념화가 아닐까 한다. 오로지 미에만 집중하다 보니 다른 가치들을 잃는다는 점이다. 과거가 좋다는 것은 아니지만, 얼굴도 모르고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집안끼리 정혼하여 결혼하던 시절까지는 아니라도 대부분 중매로 결혼하던 시대에는 상대의 얼굴보다 다양한 장점과 가치를 어쩔 수 없이 중시하였다. 미모는 오히려 분란의 씨앗으로 여기지 않았던가.
미가 이념화하면 모든 가치가 왜곡된다. 오늘날 들불처럼 번지는 성추행 ‘미투’ 현상도 이러한 가치관의 전도가 가져온 사회현상이 곪아 터진 것이 아니던가. 인간의 보편적 가치보다 성적매력을 우선하다 보면 인격의 본질은 무시된다. 물론 사랑의 시작이 외모에 대한 본능적 이끌림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모르지 않지만, 그 미모가 사랑의 지속을 담보하지는 못한다는 뜻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이 결혼하지 못 하는 이상한 전염병에 걸려 있다. 사회적인 여러 이유도 있겠지만, 진정한 반려자를 고르는 눈에도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외모지상주의가 저출산 현상의 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오로지 외모만을 찾아 헤매다 내면의 가치를 소홀히 한 결과 그나마 결혼한 이들마저 성급히 이혼으로 내달리는 이유일 것이다.
어느새 미모가 권력이 되었다. 진선미에도 들 듯이 미는 매우 중요한 가치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미모가 밥 먹여 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진(眞)과 선(善)이 빠진 미(美)는 지속 가능하지 않고 공허할 따름이다. 그래서 미는 세 번째인 것이다.
카랑카랑한 목소리에서부터 이 사람은 싫고 좋은 게 분명할 것이며 그 점을 드러내는 데 거리낌이 없으리라는 인상을 준다. TV 밖 현실 속에서 만난 배우 박정수의 첫인상은 어떤 단호함 혹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한 이가 주는 강인함이었다. 얼마 전 드라마 ‘데릴남편 오작두’를 끝낸 그녀는 마침 인터뷰를 한 날 미국으로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학생 시절 청춘스타로 화려한 데뷔, 긴 휴식, 복귀, 그리고 이제는 안정된 중견 배우로 그 이미지를 각인시킨 그녀를 만나 연기자로서의 삶, 묵직한 여정에 대해 물어봤다.
“요즘은 드라마 끝나면 일해야겠다는 생각만 들어요. 젊은 시절에는 드라마 끝나면 어디로 놀러 가야지, 쉬어야지 했는데 이제는 하도 쉬어서 일해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드라마가 끝나면 다음 일을 생각한다는 배우 박정수의 말은 바로 그녀가 워커홀릭이라는 짐작을 하도록 만들었다. 그런데 워커홀릭인 그녀가 지금 미국을 거쳐 캐나다 로키산맥으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원래 즐겁게 여행하는 걸 좋아하지만 매우 힘들 때도 여행을 떠난다고 말했다. 뭔가 이상했다. 그녀는 지금 일을 준비해야 할 때인 것 같은데 여행을 준비하고 있으니…. 말하자면 그녀가 힘들다는 의미 같았다.
정상에 도착하기 전, 날이 저물다
그녀의 대학 시절 전공은 경영학과였다. 입학은 제약학과로 했다. 그리고 정작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미술이었다. 지금도 가방과 구두를 유독 좋아하는 그녀는 미술을 계속했다면 패션 디자이너가 됐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가 선택한 삶의 지점들이 여러 갈래인 이유는 가족 때문이다. 교육자 집안의 아버지는 딸이 미술을 하는 걸 반대했고 그녀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대학교 재학 시절 탤런트 시험을 봤는데 합격을 하면서 신데렐라 같은 연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화려한 연예계는 그녀에게 보람보다는 환멸을 더 줬던 것 같다. 탁월한 미모의 연예계 총아였던 그녀가 갑작스러운 은퇴를 결심했기 때문이다.
“내 뜻과는 달리 연기자 생활을 시작해서, 남들보다 빨리 자리를 잡았어요. 그런데 주인공 몇 번 하다가 이 생활이 싫어서 시집을 갔죠. 그러다 15년 후 서른아홉 살에 다시 밑바닥에서부터 연기를 시작했어요.”
불혹을 앞두고 복귀한 연예계에서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엑스트라 연기까지 하면서, 그녀는 악착같이 돈을 벌었다. 혼자서 딸 둘을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의무감이 힘이 됐을 것이다. 그렇게 수십 년을 살았다. 그리고 예순여섯의 나이, 지금 그녀는 기자에게 연기자 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회의에 대해 말하고 있다.
“산을 올라가고 있는 중인데… 그런데 정상에 도착하기 전에 날이 저물었어요. 다시 내려와야 하는 거야. 그래서 길을 잃은 거예요. 지금 내 마음이 딱 그래. 딜레마죠. 이걸 계속해야 해? 이 길을 가야 할까? 너무 힘드니까 고민이 돼요.”
또 다른 자신 마주하기
그녀는 자신이 이런 고민에 빠졌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워 보였다. 재작년까지는 이런 고민을 해본 적이 없다고도 말했다. 연기자의 길은 당연히 자신의 길이라 확신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진실하면 무조건 통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어요. 그런데 작년에 나이 든 것을 처음 느꼈죠. 나이를 먹으니 도태되는구나 하고 현실을 직시하게 됐어요. 그리고 나를 돌아봤어요. 너무 행운아였더라고. 정말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그 운이 다한 거예요. 운이 다했는데, 이걸 밀고 나갈 힘이 있을까? 몸은 늙었고 늙다 보니 마음도 작아지고 겁이 나더라고요.”
물론 그렇다고 그녀가 은퇴 선언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외려 정반대로, 그녀는 연기 외의 다른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 일을 언제까지, 어디까지 감수할 수 있을까’라는 고민이 여전히 둥둥 떠다니며 그녀를 괴롭혔다. 말하자면 그녀의 딜레마는 자신의 업에 대한 확신과 함께, 그 업의 한계를 잔인하게 체감하면서 시작된 듯했다.
애초에 기자는 적절한 시점에 그녀에게 ‘행복하냐’고 물어보려 했는데, 이런 상황에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질문이 되어버렸다. 잠시 동안 그녀가 겪은 삶의 굴곡을 생각해봤다. 그녀는 정상에 올라갔다가 길이 안 보여서 내려왔고, 다시 길을 올라가다가 또 길을 잃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는 지금의 박정수는, 어쩌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또 다른 자신을 마주한 상황이 아닐까?
바닥을 치고 올라오기 위해 더 가라앉다
“저는 제 아집이 너무 셌기 때문에 이렇게 됐다고 생각해요. 운 좋게 이 자리까지 왔지만 좀 더 열린 마음이었으면 오늘보다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어요. 내가 그런 걸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독선이 강했지, 실패가 없었으니까. 뒤를 돌아볼 시간이 전혀 없었던 거예요.”
그녀의 자기고백은 그녀가 하고 있는 고민의 깊이를 느끼게 해줬다. 동시에 그녀가 그렇게까지 자신을 진단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람이라는 걸 알게 해줬다.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자신을 알아챈 그녀는 자신이 늪에 빠져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그 늪은 고민에 대한 해답을 줄 수 있는 늪이기도 했다.
“늪은 허우적거리면 더 빠져들어가죠. 그러니까 내가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를 확인한 다음, 바닥을 치고 나오는 게 좋겠다 싶어요. 끝까지 제가 감당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더 깊숙하게 자신을 침잠시켜 답을 구하겠다는 다짐은 자아에 대한 자신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브라운관 너머에서 살아가는 여자 박정수가 더 궁금해졌다.
절제하는 배우가 갖게 된 연륜
“누군가 제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너는 사막에 떨어지면 전갈을 씹어먹고서라도 살아남을 사람이라고.(웃음)”
그 말처럼, 겉으로 보이는 박정수는 독하다. 너무 이른 나이에 경험한 연예계, 그리고 홀로 키워야 했던 두 딸. 그녀는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는 생활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았다. 그 책임감은 그녀의 연기에도 영향을 미쳤다.
“저는 연기를 해도 어디까지는 가는데 선을 넘지는 않아요. 그런데 이건 배우로선 나쁜 점이에요. 배우라면 갖고 있지 말아야 할 감수성을 갖고 있는 거니까요. 미쳐야 미친다지만 미치도록 미치지는 않는 거죠. 감정을 절제하기 위해 다 내보내지 못하고 늘 참아요. 그게 아버지 영향이 크지 않았나 싶어요. 아버지도 교육자, 외할아버지도 교육자인 집안이었으니까요.”
그녀가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려 하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려 하는 것은 교육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늘 합리적인 선택을 하려 했다. 그런데 사실 이런 행동과 성격은 연기자보다는 CEO에 더 어울리는 자질이다.
“그래서 배우로 성공 못했나봐.(웃음) 기획을 너무 잘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거든요. 그러다가도 ‘박정수, 네가 하는 거나 잘해’ 그렇게 스스로 말하죠.”
그렇게 ‘하는 거나 잘한’ 박정수가 얻은 것은 연기 연륜이다. 선을 넘지 않으면서도 남들이 보기에는 선을 넘은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능력. 젊었을 때는 상황을 너무 객관적으로 보며 몰입하지 못하는 감정이 단점이었지만 지금은 큰 걸림돌이 아닌 이유다.
너무 하고 싶은 영화
나이 들어서도 잃고 싶지 않은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내 자존감, 그리고 총명함이에요. 옛날에는 스마트하다는 말 참 많이 들었는데… 나이 들어가면서 총기를 많이 잃었죠.”
그녀 삶의 낙은 여행과 여행에 관한 독서, 그리고 영화 감상이다.
“여행은 머리와 몸을 싹 비워줘요. 그곳의 문화에 젖어서 사는 거죠. 연기자로서도 도움이 돼요. 제가 워낙 새로운 곳의 새로운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하는데… 아마 호기심이 많아서겠죠.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은 없어요. 사람을 만나기 싫은 것은 사람에게 치여서, 부대끼는 게 싫어서 그런 것이지, 누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좋아해요.”
그러고 보니 인터뷰를 하면서 그녀가 영화를 너무 좋아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넌지시 영화에 출연하고 싶은 생각은 없냐고 물었다.
“정말 하고 싶죠. 그런데 예전에 영화계를 모르던 시절에 개런티를 많이 받고 출연한 적이 있어요. 당시엔 그 개런티가 파격적이었나봐요. 그때는 내가 인기가 좀 있었던 때니까. 그런데 그다음부터 영화계에서 ‘박정수는 비싼 배우’로 낙인을 찍었어요. 그리고 영화계는 사단이 형성되어 있어 늘 같이 하던 사람만 세트업되더라고요. 이게 굉장히 큰 장벽이구나, 진작에 하자고 할 때 할걸 너무 배짱을 부렸나 했죠.(웃음)”
시니어 감정을 표현하는 연기 하고파
그녀에게는 아직 여자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을 때 해보고자 하는 연기 욕심이 있다.
“요즘은 과거에 비해 나이 드신 분들이 감정을 교환하는 게 복잡해졌을거예요. 사랑과 미움 등의 감정도 이제는 심플하지 않잖아요? 그런 부분을 잘 살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있다면 해보고 싶어요.”
그녀의 말은 시간과 함께 시대를 자신의 연기 속에 녹여내고 싶은 여배우들 모두의 소망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TV 속에 나오는 나이 든 여자를 단순하게 ‘어머니’의 이미지로만 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우리 삶에서 만나는 나이 든 여자는 모두 ‘어머니’로만 존재할까.
그녀가 새삼 여성스럽게 느껴진 건 이 지점에서였다. 다소 거침없어 보이는 면모는 삶의 부침을 겪다 보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놓은 그녀만의 방어기제가 아닐까.
마음의 평정을 찾은 사람이 멋있다
다시 그녀가 겪고 있는 딜레마로 얘기가 돌아왔다. 삶의 좌표를 안다는 것은 중요한 일이다. 박정수는 그걸 알기 때문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내면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결국 뭐든지 내가 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을 듣자 그녀가 강인한 사람이지만 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배우로서는 만족스러운데… 극복해야죠. 사실 이런 딜레마는 배우가 아니라 다른 누구도 겪는 거니까요. 그걸 딛고 일어서지 못하면 패배자가 되는 건데,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죠. 다만 얼마만큼 시간이 걸릴지, 어떻게 해야 할지가 문제죠.”
그녀는 나이 들어서도 멋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마음의 평정’을 꼽았다. 그렇다면 현재 마음이 평온하지 않은 그녀는 자신의 기준에서 멋있는 사람일 수가 없기에, 어떻게든 답을 찾아내려 할 것이다. 그 순간 그녀에게 준비된 질문 중 폐기될 뻔한 질문을 꺼낼 수 있었다. ‘10년 후의 박정수는 어떤 사람일지’에 대한 물음이었다.
“질문이 너무 슬프게 만드네.(웃음) 이걸 다시 뛰어넘고 더 행복해질 수도 있고…. 저도 모르죠. 모르겠지만, 좌절하고만 있을 것 같지는 않아요.”
마지막 대답은 그 어떤 말보다 그녀다웠다. 모든 것을 잃더라도 자신만은 절대 잃지 않을 것이라는 단호한 다짐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가 찾아낼 길이 어떤 모습이든, 그것은 자신이 선택하고 납득한 길일 것이다. 배우 박정수의 새로운 길을 믿고 지켜볼 가치가 있는 이유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그녀의 핸드폰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그녀는 슬럼프에 빠진 배우의 모습에서 바삭한 미소의 여자로 변신했다. 역시 ‘배우 박정수답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그녀의 표정에는 스스럼없고 당당한, 그렇지만 자존감을 잃지 않으려는 자기애가 스며들듯 젖어 있었다.
김영철(59) 바인그룹 대표는 가방에 MP3를 네댓 개씩 갖고 다닌다. MP3마다 영역별로 다운받은 강의 파일이 담겨 있다. 산책할 때도, 러닝머신에서도, 심지어 출장 갈 때도 늘 강의를 듣는다. “리더의 에너지는 공부에서 나온다. 공부는 가장 확실한 자기충전 방법이다. 리더가 직원들에게 나눠줄 것은 에너지다. 내가 매일 공부하는 이유다.” 김 대표의 지론이다. 알고 보니 그는 유도선수 출신. 무릎 연골 부상으로 유도를 그만두고, 출판사 영업사원으로 동화책과 백과사전을 팔러 다니던 그는 35세의 나이에 1995년 교육전문기업 ‘동화세상 에듀코’를 창업한다. 동화세상 에듀코는 유아에서 성인까지 온·오프라인 교육을 망라, 티칭과 코칭을 아우르는 교육전문기업이다. 2017년 에듀코를 모체로 교육·유학·여행·외식·무역·건설 등을 계열사로 아우르는 바인(vine)그룹으로 전환했다. 말 그대로 포도송이처럼 선한 열매를 알차게 맺자는 의미에서의 새 출발 선포다.
신설동에 소재한 바인그룹 사옥은 마치 자기계발 실행의 모델하우스를 방불케 했다. 대표 집무실엔 실행 플랜 게시판과 2095년까지의 미래비전 백년달력이 걸려 있다. 직원 화장실엔 벽마다 눈 돌릴 틈 없이 명언이 빼곡하다. 그뿐만이 아니다. 김영철 대표가 건네는 명함엔 ‘나 김영철은 한평생 끊임없이 수양해 자신을 누리며 남들에게 기쁨이 되어주는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명선언이 담겨 있다. 명함 타이틀도 바인그룹이 아니라 바인벤처다. 스타트업 벤처의 유연하면서도 맹렬한 야생정신을 배우겠다는 자기다짐의 의미다.
사옥 분위기뿐 아니라 김영철 대표도 마치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를 접하는 느낌입니다. 실제 저자들보다도 실행을 더 잘하시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교육의 힘을 믿습니다. 제가 그 덕을 실제 체험했고요. 자꾸 드러내서 가시화해야 실행할 수 있기 때문에 저부터 솔선하고 직원에게도 권합니다. 유도선수인 제가 사회에 나와 영업의 고수가 되고, 또 경영자로 변신할 때 사회에서 받은 강의, 교육이 큰 힘이 됐습니다. 저는 지금도 어디에서든 교수, 강사란 말을 들으면 모르는 사람이라도 벌떡 일어나 90도로 감사인사를 합니다.”
김 대표는 직원들 교육에는 예산의 한도를 정해놓지 않고 좋은 프로그램은 아낌없이 받도록 한다. 권장을 넘어 아예 의무화해 놓았다. 아이디어 창조, 마인드, 스피치, 리더십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한 교육, 지닉스 교육을 받는다. 지닉스는 Genie(잠재력)+Explore(탐험·여행)의 합성어로 ‘내 안의 잠재력을 찾아가는 여행’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기존 교육에 매번 새로운 교육이 더해지니 교육비 예산도 올라가게 마련이다. 직원의 성장판을 열려면 회사 예산의 천장을 없애야 한다는 게 그의 확고한 소신이다. 직원을 이용해 회사 성과를 올리기보다, 회사를 이용해 직원이 성장하도록 해야 한다는 나름의 경영철학에서다. 본인의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게 학력, 경력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자는 인재철학이다. 그는 “사과 씨 안엔 사과가 없지만 사과가 되지 않느냐”며 잠재력을 읽고 육성하는 게 바로 진정한 리더의 능력이라고 말했다. 잠재력이야말로 학력, 경력보다 확실한 인생 전공이기에 그것을 읽어주고 그것을 살펴볼 환경을 만드는 것이 리더의 소명이라 생각한다.
젊은 시절부터 자기계발을 잘하셨습니까?
“하하. 웬걸요. 강원도 산골 가난한 농가 출신이라서 학교 다니는 것도 사치였어요. 유도를 하게 된 것도 고등학교, 대학교를 장학금으로 갈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으니까요. 그런데 돌아보니 책 공부 말고 사람 공부도 큰 것 같아요. 동네 어른들께 어깨너머로 배운 예의범절, 더불어정신 등이 인생의 큰 공부더라고요. 남들은 흘려듣는 이야기도 저는 좋게 말하면 곧이곧대로, 나쁘게 말하면 고지식하게 귀담아들었어요. 유도하면 장학생 된다고 해서 유도 시작하고, 유도 국가대표 선수되려면 술, 여자, 담배를 멀리해야 한다고 해서 실천했고요. 그것도 자기계발의 하나라고 볼 수 있을까요. 하하.”
그가 자녀는 물론 직원들에게 늘 책, 이론 공부 못지않게 강조하는 게 정신 자세, 세상 공부, 즉 더불어정신이다. “혼자 열심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다. 더 큰 성과는 옆 사람, 다른 분야와의 협업에서 나온다”고 강조한다. 그는 자기계발이 성공 처세술이 아니라 공동체 정신이라고 말한다. 박수 받는 것 못지않게 박수 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설명이다. 그가 이번 평창 동계올림픽 때 직원들과 비인기종목 외국선수팀 응원을 굳이 간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늘에 관심을 기울이고, 나누어주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자기계발이고 참교육이다.
유도와 경영, 얼핏 보면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데 어떤 게 서로 통하는지요.
“유도를 하며 몸으로 익힌 정신력, 위기관리 능력, 팀워크, 후배를 챙기고 선배와 스승님을 모시는 진심이 도움이 됐습니다. 그건 어느 분야, 어느 곳에서든 통하더군요. 그 외에 두려우면 피하기보다 부딪친다는 실행력, 모든 것에는 길이 있다고 생각하는 긍정성 등 몸으로 배운 것이 영업, 사업을 할 때 많은 도움이 됐습니다.”
유도를 하다 다치시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출판사 영업사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최고성과를 내서 시쳇말로 영업의 달인으로 이름을 날리셨다고 들었습니다. 비결이 뭐였습니까.
“운동선수가 가진 승부근성과 체력이 도움이 됐어요. 좌절되니까 영업을 통해서라도 승부를 내겠다. 자존심도 회복하고 싶다는 생각으로 매달렸지요. 그러다 보니 서서히 풀리기 시작하더군요. 유도만 보고 달려온 인생이라서 제 잠재능력을 잘 몰랐는데, 또 다른 내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리고 영업뿐 아니라 조직관리에 강점이 있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됐어요.”
선수를 그만둘 무렵 90kg에 육박했던 몸무게가 60kg대로 떨어질 정도로 힘들었지만 체력과 승부근성으로 넘길 수 있었다는 회고다. 영업사원 초기엔 거절당하면 상처도 많이 받았단다. 그냥 안 사면 되는데 모욕을 주며 거절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 영업사원의 근성이 있는데 그냥 물러설 수 없지 않은가. 때로는 덩치 좋아 보이는 그에게 시비조로 싸움을 거는 남자 고객도 있다. 어쩔 수 없이 한판 붙더라도 차마 때릴 수는 없으니 흠씬 두드려 맞고… 분한 눈물을 삼켰지만 그때 성질이 많이 순화됐다는 회고다. 그는 늘 현장정신을 강조한다. 관리직 직원들이 현장 경험을 필수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이는 두 아들에게도 예외 없이 적용했다. 아버지의 궤도를 그대로 밟아 유도 국가대표 선수를 거쳐 현재 경영 수업을 받고 있는 큰아들 김광섭 상무 역시 현장 경험을 거쳤다. 작은아들은 대학 때 아프리카에서 6개월 봉사를 하도록 했단다. 현장에서의 쓴맛은 인생에서 두고두고 위대한 자산이 된다는 것을 스스로 경험해서다.
35세의 나이에 창업을 하셨지요. 23년간 사업을 해오시면서 위기의 격랑이 많으셨을 것 같은데요.
“제 인생에서 가장 큰 역경은 몸을 다쳐 유도를 그만둔 것입니다. 그 후에는 위기도, 역경도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어떤 상황이든 역경으로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했거든요. 제 평생 취미는 결심입니다. 창업을 하면서 결심했어요. ‘정상에 도전할 때 어떤 이유도 대지 않겠다,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문제 삼지 않겠다, 나는 일이 힘들다고 불평 안 한다’라고요. 내 안의 잠재력을 작동시키려면 강렬한 의식을 계속 불어넣어줘야 해요. 나는 매일매일 결심해요. 고민하면 걱정이 생기지만 결심하면 꿈이 커집니다. 문제는 작아지고요. 말이 씨가 된다고, 말을 초긍정으로 하면 그것이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더군요.”
습관이 운명이라고 하는데요. 운을 부르는 좋은 습관을 갖고 계실 것 같습니다.
“운동과 신문 스크랩입니다. 사람은 배신당할 때 제일 상처가 깊다고 하는데요. 정작 사람들은 스스로를 배신해요. 자신의 건강을 과신해 돌보지 않거든요. 그러다가 내 몸은 내가 잘 아는데, 이런 증세가 올 리가 없는데, 병에 걸릴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하며 후회하지요. 자기 몸을 함부로 대해 배신을 당하는 것이지요. 배신을 당하지 않기 위해 운동습관을 생활 1순위로 놓고 있습니다. 평일 아침에는 달리기나 수영, 주말엔 가족과 등산 등을 규칙적으로 하려 해요. 그 외에 조간신문 6개 정도를 통독하고 직접 스크랩합니다. 한 달이면 얼추 스크랩 한 권이 채워집니다. 나중에 아들들에게 읽어보라 권하지요.”
정말 걸어 다니는 자기계발서이시네요. ‘하면 된다’ 산업화 세대의 구호이지만 요즘 신세대는 ‘되면 한다’ 주의 아닙니까. 직원들과의 소통은 어떻게 하시는지요.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과거의 경력, 학력보다 미래의 잠재력을 믿어주면 서로 통하게 돼 있어요. 그들도 신임한다는 것 다 알더군요. 다만 7대 3의 법칙은 필요하다고 봅니다.
7은 잘해주고 3은 요구하고 지적해야 해요. 무조건 잘해주기만 하면 자만심을 갖게 돼요. 반면에 지적만 해대면 심리적으로 위축돼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힘들고요. 인재 육성을 할 때는 무조건적인 자애보다는 신념을 갖는 게 필요하다고 봅니다. 이는 자녀교육에도 적용됩니다.”
김 대표는 “한국 사람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다. 특히 인정해줄 때 능력을 엄청나게 발휘한다”고 말한다. 그는 전 직원 4500명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를 공개했다. 이 번호로 하루에 200통의 문자가 온단다. 그중 제일 기쁜 내용은 “내 꿈을 이룰 계기를 마련했다. 과거의 내가 아닌 새로운 나로 바뀌었다”며 ‘비포 앤 애프터’의 성장기다. 직원들에게서 온 핸드폰 문자를 다시 읽는 그의 얼굴에 흐뭇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요즘 같은 저출산 시대에서도 기업이 매년 성장했습니다. 또 영역을 확장, 바인그룹으로 전환하셨는데요. 어떤 포부를 갖고 계십니까.
“창업할 때만 해도 말 그대로 한 맺힌 성공, 돈 많이 벌어 출세하고 싶다는 욕망이 컸습니다. 이후 기업의 가치관을 생각하게 됐어요. 성장을 통해 직원과 고객에게 긍정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기업을 만들고 싶습니다. 직원성장, 고객성장을 통해 회사도 성장할 수 있는 백년기업으로요.”
김영철 대표는 앞으로 바인그룹은 엄청난 모습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며 3년 후의 인터뷰를 부탁했다. 직원들의 잠재력을 믿기에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이 떠올랐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하략)
리더가 팔로워를, 어른이 젊은이를 어마어마한 만남으로 서로 생각해 환대하고 대우할 때 우리 사회는 저절로 행복해지지 않을까.
김영철 바인그룹 회장
1960년생 강원도 양구군 출신으로, 학창시절 유도선수로 활동하였다. 대학시절 부상으로 유도의 꿈을 접고 출판사 영업사원을 했다. 1995년 교육전문기업 ㈜ 동화세상에듀코를 설립했고 2017년 10개 계열사를 운영하는 바인그룹으로 전환했다. 사람의 성장을 핵심가치로 둔 인재경영철학을 실천하고 있다. 그간 중소기업청, 중소기업중앙회 선정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상’ 수상, 대통령 표창 등을 수상하였다.
71세라니? 전혀 믿기지 않는다. 주혜란 박사의 몸매와 패션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사람은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자칭 타칭 한량인 이봉규가 그동안 수많은 여인을 만나봤지만 70세가 넘은 섹시한 여성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나보다 열 살이나 많은 누나인데 딱 달라붙는 원피스에 망사스타킹을 입고 춤추며 노래하는 모습은 언뜻 스치듯 보면 40대로 보인다.
아무리 자세히 관찰해도 스테이지에 선 그녀의 모습은 최소한 스무 살은 젊어 보인다. 한량의 잣대로 좀 더 솔직하게 외모를 분석한다면 몸매는 30대이고 얼굴은 50대, 목소리는 60대로 보인다. 71세에 신인 가수로 활동하면서 제2의 인생을 만끽하고 있는 그녀는 인생은 70부터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갓 잡아 올린 생선처럼 에너지가 넘친다.
프랭크 시나트라의 ‘My Way’와 레이 찰스의 ‘I Can′t Stop Loving You’를 멋들어지게 부르면서 흑인들이나 취할 수 있는 몸짓을 한다. 얼마 전 그녀의 하우스콘서트에서 라운지를 꽉 메운 100여 명의 관객들은 그녀의 노래와 춤과 섹시한 모습에 흠뻑 취했다.
주혜란 박사의 과거가 얼마나 화려했고 집안이 대단하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지금 주혜란의 70대 가수 인생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습에 박수를 보낼 뿐이다.
콘서트를 지켜보고 있노라면 그녀의 재능도 대단하고 용기도 높이 평가하고 즐길 줄 아는 철학도 존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는 무대에서 마치 ‘Bravo My Life!’를 온몸으로 토해내는 것 같다.
사실 그녀가 살아온 이력과 집안 내력을 알면 지금 스테이지에서 열창하는 모습은 조금 생소하고 과하게 보일 수도 있다. 1975년 고려대학교 의대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충북 청원군에 있는 작은 마을 보건소에 소장으로 부임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보건소장이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그 후 UN과 워싱턴 정가에서 에이즈 퇴치운동 등 각종 국제적인 사회활동을 하면서 특유의 친화력과 유창한 영어 소통 능력으로 이름을 알렸다. 힐러리 클린턴, 카터 전 대통령 부부와도 인연이 깊다.
김대중 대통령을 오빠라고 부르는 누나
1984년에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도 만나 친해졌다. ‘오빠’라는 호칭으로 스스럼없이 지낼 정도였다. 그녀의 두 번째 남편인 임창렬(전 경기지사) 씨와 데이트를 하면서 결혼을 망설일 때도 DJ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고 털어놓았다. “똑똑한 사람 같다”는 DJ의 말에 결혼을 결심했다.
임창렬 전 지사와는 산전수전 다 겪고 살다가 이혼하고 지금은 친구처럼 지낸다고 한다. 임창렬 전 지사와 부부 관계일 때 정치적으로 성공해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유명해진 탓에 불필요한 오해도 많이 받고 살았다. 그때만 생각하면 천당과 지옥을 한꺼번에 오간다. 그 당시 구속도 당하면서 “이것이 정치구나!” 통감했다고 회상한다. 세월이 지난 지금 또다시 그때의 일을 자세하게 묻는 것은 실례가 될 수도 있고 행복한 그녀의 지금 삶을 방해하기 싫어서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 당시 노래가 아니었다면 아마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서 진작 죽었을지도 모른다. 양평 강가에서 스트레스 풀려고 목이 터져라 노래하면서 돌아다녔다”고 주저 없이 말하는 주혜란의 모습에서 처음 어두운 표정이 묻어나온다.
부친 주인호 박사 그리고 100세 모친
주혜란이라는 이름과 ‘Helen Chu’라는 영문 이름은 이승만 박사가 지어줬다고 한다. 예방의학계의 개척자이자 주혜란 박사의 부친인 주인호 박사는 27세 때인 미군정 시기 의정국장(醫政局長, Medical Police) 자리에 있었는데 인연이 된 이승만 박사가 딸(주혜란)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주인호 박사는 함경도 함흥 출신으로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보건’이라는 단어를 한국에서 처음 사용했고 한국에 노인대학을 최초로 설립한 분이다(2000년 80세로 타계). 아프리카 대륙을 돌본 한국의 슈바이처로 알려진 분이기도 하다.
그는 1996년부터 17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세계보건기구(WHO) 수석고문관으로 활동하면서 각종 전염병 퇴치에도 앞장섰다. 세계 최초로 일본뇌염바이러스 분리에 성공한 의학자로서도 명성이 자자하다. 이 정도로 세계가 알아주는 의사였는데도 “아버지는 평생 자가용보다는 버스나 전철을 이용하시고 검소한 삶을 사신 분이었다”고 딸 주혜란은 말한다. 아버지 생각만 하면 존경심이 저절로 묻어나온다.
주인호 박사의 제자 중 한 명은 2000년 8월 9일 중앙일보 홍혜걸 의학전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3남 4녀 모두 해외로 유학을 보냈기 때문에 일부에선 재력가로 알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국전쟁 이후 지금까지 왕십리에 있는 허름한 18평 자택에서 살고 있다. 무소유의 철학을 평생 실천하고 사신 분이었다”고 평가했다. 그녀의 어머니도 신여성 엘리트로서 아버지 못지않았다.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고 서울여자의대(현 고려대 의대 전신) 출신의 의사였으며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 러시아어, 일어, 이탈리아어 등 6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올해 100세인데 작년까지만 해도 아침에 피아노와 가야금을 연주할 정도로 총명했고 혼자 미국 여행을 할 만큼 건강했다. 그런데 3월 초에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아 지금은 병원에서 요양 중이다. 갑자기 치매가 발명한 이유는 올해 미국을 방문하려니까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갑자기 가져오라 하더라는 것. 어머니는 “내가 의사인데… 내가 건강하게 여행을 할 수 있다는데… 100세가 되었다고 작년까지 요구하지 않던 진단서를 요구하다니… 나도 이젠 죽을 때가 되었구나!” 하는 마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래서 치매로 이어진 게 아닌가 하고 주혜란 박사는 추정하고 있다.
71세 된 딸이 100세 어머니가 조만간 자기 곁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들어 바쁜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병원을 찾는다 한다. “70년 동안 ‘엄마’를 부르며 살다가 엄마의 삶이 얼마 안 남았다고 생각하니 슬프다”고 말하며 그녀의 눈은 어느새 충혈된다.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분위기를 바꿀 겸 해서 조심스레 물었다. “100세나 되시고 작년까지 미국 여행도 다니실 정도로 건강했으면 어머님이나 딸인 주 박사도 여한이 없는 것 아닙니까? 욕심이 크신 것 아닙니까?”라는 이봉규의 우문(愚問)에 주혜란의 현답(賢答)이 돌아왔다. “어머님이 몇 년 만이라도 더 건강하게 살아주셔서 행복한 시간을 같이 보내주길 바라는 것이 인간의 욕심”이라고 말하며 살짝 미소를 띠웠기 때문에 분위기가 다소 진정되었다.
사실 그녀의 어머니는 아프리카 지역 5개 나라 대통령의 주치의를 하셨고, 불과 몇 년 전까지 연천 통증의학과에서 90대 중후반의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열심히 환자를 돌보셨기 때문에, 비록 100세라고는 하지만 갑자기 치매 판정을 받은 사실을 어머니나 주혜란 박사도 믿지 못하고 충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가 100세 직전까지 왕성한 활동을 하셨기 때문일까. 주혜란은 늘 “노인들이여, 움직여라, 행복할 때까지!”를 주창하고 다닌다. 대한노인회에서 의료봉사단장을 비롯해 문화, 예술 등 다방면으로 활동하면서 최근 서울시노인회의 행복건강이사를 맡아 ‘노인행복전도사’를 자청하고 나섰다. 본인도 71세의 노인이지만 “너무 바빠서 늙을 시간도 없다. 신바람 나게 생활하면 젊어진다”고 힘을 주어 강조한다.
유식하고 에너지 넘치고 늙음을 거부하는 주혜란은 어느 인터뷰에서 멋진 말을 남긴 적이 있다.
“If I rest, I rust!(쉬면 녹슨다). 이 말은 플라시도 도밍고가 인생의 모토로 삼고 있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이 말에 100% 동감합니다. 노년이라는 상황을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봉규가 아무리 평론가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주혜란의 과거 사교계와 정치계의 경력을 이제 와서 가타부타 평가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71세의 나이에 가수로 제2의 인생을 신바람 나게 한바탕 놀고 있는 그녀가 지금은 무척 존경스럽다.
‘좀비보험’이 될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앞서 출시된 정책보험인 노후 실손보험과 비슷한 길을 걸으리라는 관측이었다. 지난해 선보인 노후 실손보험의 4월 한 달 판매 건수는1626건에 그쳤다. 하지만 뚜껑을 열자 전혀 다른 반응이 튀어나왔다. 4월 첫선을 보인 유병력자 실손보험의 흥행 돌풍이 만만찮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4월 2일부터 유병력자 실손보험을 판매하고 있는 7개 손해보험사(삼성·한화·흥국·현대·메리츠·KB손보·DB손보)의 판매 건수를 집계한 결과, 4월 말 기준 총 4만 9385건을 기록했다. 성공적인 데뷔전을 치른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과연 초반 흥행 기세를 계속 이어갈 수 있을까. 유병력자 실손보험의 매력은 무엇일까.
가입심사 완화, 유병력 고령층에 적합
실손보험은 전 국민 3명 중 2명이 가입한 ‘제2의 국민건강보험’으로 불린다. 보험 가입자가 쓴 의료비의 80~90%를 보험금으로 돌려주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병원비 걱정을 덜어주는 필수 보험으로 꼽힌다. 문제는 나이가 많거나 만성질환으로 치료 중이면 실손보험에 가입하고 싶어도 ‘심사’의 문턱을 넘을 수 없다는 것. 금융당국은 이러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지난해 최대 75세까지 가입이 가능한 노후 실손보험을 내놓은 데 이어, 올해는 가입심사를 간소화한 유병력자 실손보험 개발을 추진해왔다.
새롭게 선보인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상품명’처럼 혈압이나 당뇨병 등의 질병 이력이 있는 유병력자도 가입이 가능한 것이 특징이다. 다만 가입자의 병력을 전혀 심사하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심사 항목을 기존 18개에서 6개(병력 관련 3개, 직업, 운전 여부, 월 소득)로 축소했다. 5년 전까지 살피던 치료 이력도 2년 내로 축소했다. 혈압, 당뇨병, 심근경색, 뇌출혈·뇌경색 등 질병 이력이나 만성 질환이 있어도 2년 내 치료 이력이 없으면 가입이 가능해졌다. 투약 여부는 아예 따지지 않는다. 5년 내 치료 이력을 살피는 것은 ‘암’(백혈병 제외) 1개뿐이다.
기본적인 보장 범위는 일반 실손보험의 기본형과 같다. 두드러진 차이점은 통원치료를 하며 의사에게 처방받는 약제(처방조제)에 대해 보험금을 받을 수 없다. 우스갯소리로 “밥보다 약을 많이 먹는다”는 고령층이 가입 전 유의할 부분이다. 보장한도도 다소 축소됐다. 입원 한도는 5000만 원(동일 질병·상해당)으로 일반 실손보험과 동일하나, 외래 진료 보장 한도는 회당 30만 원에서 20만 원(연 180회)으로 줄었다.
일반 실손보험에서 비급여 특약 보장항목으로 선택할 수 있는 도수·체외충격파·증식치료비, 비급여 주사료, 비급여 자기공명영상(MRI)·자기공명혈관조영술(MRA) 검사비도 제외됐다.
반면 의료비 중 가입자 본인이 부담하는 자기부담률은 높아졌다. 기존 일반 실손보험은 보장대상 전체 의료비 가운데 가입자가 10% 또는 20%를 부담하지만,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30%를 가입자가 내야 한다. 입원 시에는 최소 10만 원을 자기부담금으로 내야 한다. 통원 외래진료 시 최소 자기부담금은 1회당 2만 원이다. 보험료는 1년마다 갱신되고, 보장 범위 한도와 자기부담금 등 상품 구조는 3년마다 조정된다.
가입 가능 연령은 최대 75세(보험 나이 기준)까지이고, 회사별로 차이가 있다. 4월 기준 유병력자 실손보험 가입 연령을 살펴보니, 60대 이상이 40.8%로 가장 많았다. 이어 50대(37.4%), 40대(13.5%) 순으로 주로 중장년층이 가입했다.
월 평균 보험료는 50세 남자 3만5812원, 여자 5만4573원 수준이다. 1인당 평균 보험료가 일반 실손보험(1만8043원)에 비해 3배 가까이 높은 수준이다. 이같이 상대적으로 높은 보험료에 대해 금융위 관계자는 “4월 유병력자 실손보험 가입자의 78.2%가 50대 이상으로, 보험료가 높은 중장년층이 다수 가입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보험사별, 최대 보험료 30% 차이
4월 기준으로 삼성화재, 한화손해보험, 흥국화재, 현대해상, 메리츠화재, KB손해보험, DB손해보험 등 7개 보험사가 먼저 유병력자 실손보험을 출시했고, 5월 초 NH농협손보가 가세했다. 6월에는 삼성생명과 NH농협생명이 판매에 나선다.
주목할 것은 이들 회사에서 판매하는 유병력자 실손보험의 보장 내용과 한도는 기본적으로 동일한테, 보험료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4월 기준 유병력자 실손보험 전체 담보에 가입한다는 조건으로 각 보험사의 보험료를 비교해보면, 50세 남성의 경우 DB손해보험의 보험료가 3만4263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50세 남성 가입자의 경우 보험료가 가장 비싼 곳은 삼성화재로 4만238원이었다. 50세 여성의 경우 메리츠화재의 보험료가 4만9154원으로 제일 저렴했고, 삼성화재는 6만3838원으로 가장 비쌌다. 이들 회사의 보험료는 최대 1만5000원 차이로, 약 30%의 격차가 벌어졌다.
60세 남성의 경우 KB손해보험의 월 보험료가 5만770원으로 가장 낮았고, 삼성화재는 5만8532원으로 제일 비쌌다. 60세 여성도 KB손해보험의 월 보험료가 6만4635원으로 가장 저렴했다. 가장 비싼 곳은 한화손해보험으로 7만8578원이었다.
보험 업계에 종사하는 한 관계자는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보장 내용은 동일한데도 각 보험사마다 적용하는 위험률에 따라 보험료 차이가 발생할 수 있어 가입 전 꼼꼼한 비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복 가입도 유의해야 한다. 기본적으로 실손보험은 실제 부담한 의료비 내에서 보장을 받을 수 있다. 만일 입원비로 400만 원의 의료비를 지출한 보험 가입자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여러 개의 실손보험이 있다 해도 총 400만 원 내에서 자기부담금을 제외한 금액만을 보험금으로 받을 수 있다.
유병력자 실손보험 관련 Q&A 자료 및 도움말 금융위원회
Q 경미한 치료 이력이 있지만 건강한 편인데, 유병력자 실손보험에 가입해야 하나?
A 건강한 사람이나 경미한 치료 이력만 있는 경우 일반 실손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과거 치료의 이력 때문에 일반 실손보험에 가입할 수 없는 소비자를 위한 상품이다.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가입심사요건을 완화하는 대신 일반 실손보험보다 보험료가 비싸고, 일부 보장이 제한된다.
Q 현재 고혈압 약을 지속적으로 복용 중이고, 정기적으로 병원에 내원해 처방전을 받고 있는데 유병력자 실손보험 가입이 가능한가?
A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을 가진 경우에도 약 복용만으로 해당 질환이 잘 관리되고 있고, 최근 2년간 별다른 치료 이력이 없는 경우에는 유병력자 실손보험 가입이 가능하다. 다만 최근 5년간 암(백혈병)과 관련한 진단 또는 입원, 수술 등 치료 이력이 있는 경우에는 가입이 제한된다.
Q 일반 실손보험과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어떻게 다른가?
A 유병력자 실손보험은 통원 시 약국에서 처방받는 처방조제비를 보장받지 못한다. 이를 제외하면 현재 판매되고 있는 일반 실손보험 기본형과 보장 범위가 동일하다. 다만 일반 실손보험의 비급여 특약 보장 항목인 도수·체외충격파·증식치료비, 비급여 주사료, 비급여 MRI·MRA 검사비는 보장하지 않는다. 또한 과도한 보험료 상승을 막기 위해 자기부담률을 30%로 상향했고, 최소 자기부담금(입원 10만 원, 통원 2만 원)도 내야 한다.
지금은 흔히 쓰이는 말인 ‘섹시 디바’.
그 말에 어울리는 가수로 민해경(본명 백미경·56)을 꼽으면 수긍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대는 인형처럼 웃고 있지만’, ‘보고 싶은 얼굴’, ‘어느 소녀의 사랑 이야기’, ‘사랑은 이제 그만’, ‘미니스커트’ 등의 히트곡은 민해경 특유의 이국적인 인상과 더불어 한국 대중가요계의 이단아 같은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독보적인 섹시함과 고혹적인 보이스, 시원한 가창력 등은 한국 가요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그녀만의 독특한 탤런트였다. 최근 소극장에서 열린 ‘대학로 릴레이 콘서트’를 통해 관객들과 특별한 시간을 함께한 그녀를 만났다.
민해경이라는 가수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인상들이 있다. 열정, 섹시한 눈빛, 파격, 허스키한 목소리, 카리스마 등등…. 그 인상들을 공통적으로 관통하고 있는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민해경은 쎄다’. 그런데 과연 무대 뒤의 그녀 또한 정말로 그토록 ‘쎈’ 사람일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니다’.
“사람마다 사람을 보는 시선은 다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요. 어떤 연예인이든 TV 화면을 통해 보이는 게 그 사람의 전부는 아니죠.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보여드릴 순 없으니 느끼는 대로 그대로 생각하는 것도 고마운 일이긴 해요. 하지만 사람의 진심은 언젠가는 통하리라 믿거든요.”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 가수 민해경
올해가 데뷔 40주년. 민해경은 지난 시간을 ‘만만치 않았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그녀는 과거에 메여 사는 사람이 아니다. 과거나 추억에 집착하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다. 과거가 있어 자신이 있는 것이 맞지만 현재에 더 많이 집중하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지론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그녀의 태도는 미래를 대할 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뭔가 계획을 세우고 그에 맞춰 사는 삶을 거부한다. 그 이유는 그녀가 이미 그런 삶을 너무나도 치열하게 살았기 때문이다.
“살면서 굉장히 중요한 게 마음의 평화잖아요. 돈이 없다고 해서 무조건 불행한 것도 아니고요. 내가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삶이 힘들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행복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노래를 하든 안 하든 예전보다 지금이 훨씬 더 평화로워요. 돈이 없어도 평화로운 사람들이 있듯이. 생계 때문에 노래를 해야 했고 너무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아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최선을 다해 견뎌온 삶이잖아요.”
말하자면 그녀에게 있어 과거와 미래는 현재보다 중요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철저한 현재형 인간이다.
남편과 딸이 있어 너무 행복하다
민해경에 대해 대중들이 갖고 있는 이미지는 그녀가 실제로는 현재형 인간이라는 데서 깨져버린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차가운 도시 여자 같고 자유로울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정작 그녀는 저녁 여덟 시 반에 잠들고 새벽 네 시에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이다. 또한 집 밖으로는 거의 나가지 않는다. 집에서의 삶을 철저하게 즐기는 소위 ‘집순이’다. 궁금해서 물어봤다.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할 일이 그렇게 많냐고.
“많죠. 일단 커피를 마시고, 신문을 보고 하루 동안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요. TV는 거의 안 보고 대신 영화를 많이 보죠. 이런 패턴이 앞으로도 변할 것 같지는 않아요.”
거의 집 안에서만 지내며 가족만을 기다리는 생활. 외롭지 않을까?
“전 외로움을 잘 못 느껴요. 혼자 있어도 집안일 하느라 너무 바빠요. 완전 잘 놀아요. 사람들이 그런 저를 보면 이상하다고 하는데 혼자 있는 게 너무 좋아요. 집에 들어올 사람만 잘 들어오면 되고요. 바로 남편이랑 딸이죠.(웃음) 그 외에는 제가 사람에게 원래 관심이 없어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사모님처럼 자기에 관한 일 빼고 모든 일에 관심 없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그런데 내가 관심 가진다고 그 사람이 잘되는 것도 아니고, 나도 바쁘고.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얘기나 뒷담화를 싫어해요. 좀 무심하죠.”
집에서 혼자 놀기를 즐기는 원조 디바라니, 상상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예상 밖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의 모습에서는 어색하거나 꾸며진 티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자신에게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었다. 아주 자연스럽고 은근한 매력이었다.
‘독함’이 아닌 ‘일관성’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는 힘은 예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사실 그녀는 요즘 주변 사람들에게서 이전의 민해경 같지 않다는 말을 곧잘 듣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는 솔직히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모습으로 충실히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제가 스스로를 열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닌 것 같아요. 저 자신은 과거와 똑같은데 과거에는 주변에서 사람들이 다가오지 못한 부분이 있었죠. 제가 표현할 수 있는 시간도 없었고.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제가 사람들과 좀 더 소통을 하고 있고 그런 저를 사람들이 알아주게 된 거라고 봐요.”
그동안 사람들은 민해경에 대해 단절된 모습만 보고 말하곤 했다. 그녀의 진짜 모습을 가족은 알았다. 그래서 남편이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아내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쎄고 건방지고 교류 없고…. 제가 많이 들은 얘기들이에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여자, 지지 않는 사람. 그런 것들이 제 내면에 있긴 하겠죠. 그게 없었다면 여기까지 올 수 없었을 테고요.”
진정 하고 싶은 꿈은 뒤로 하고 내키지 않는 노래로 가정을 지켜야 했던 삶. 그러면서 기복이 심할 수밖에 없는 연예계에서 정상에 올라 10여 년 동안 거듭 그 자리를 지켜냈다. 언뜻 생각만 해도 쉽지 않은 일, 그게 가능하려면 기본적으로 어떤 종류의 ‘독함’이 필요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녀가 받는 오해들은 그 독함을 위한 일관성에서 비롯된 바가 아닐까 싶었다.
“그럴 수도 있어요. 그걸 이기적이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죠. 그런데 개의치 않아요. 제 욕을 해도 제게 들리지만 않게 하면 돼요.(웃음)”
노래는 곧 나 자신
지난 3월 민해경은 새로운 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소극장 공연을 치렀다.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져서 쉽지는 않았던 공연 준비였다. 그러나 그녀는 베테랑이었다.
“어렸을 때는 잘 안 되는 게 있으면 화도 내고 짜증도 내고 그랬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되는 상황을 빨리 접고 다른 대안을 찾는 게 내게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걸 알게 됐어요. 거의 하루 만에 제가 연출을 다 했죠. 아무래도 대중가수가 히트곡만 들려주는 것은 흔한 레퍼토리죠.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어요. 관객들은 민해경이란 가수가 보여줄 수 있는 멋이나 맛, 카리스마에 대한 기대가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녀가 선택한 방법은 어린 시절까지 아우르는 자신의 인생을 무대에서 풀어내는 것이었다. 가수는 무대로 말한다고 했던가. 그녀의 인생 이야기에 관객들의 호응은 뜨거웠다.
“저는 그대로 꾸밈없이 절 보여줘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다는 보여줄 수 없지만. 사람들이 많이 울고 감동받았다고 말씀을 주셨어요. 저 여자가 쎄 보여도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있었구나 느끼신 거겠죠. 무대에서는 그게 다 보인대요. 제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사람들이 좋아해서 고마웠어요.”
다소 빤한 질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 지점에서 그녀에게 노래란 어떤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진짜 많이 들은 질문이에요. 돈이다, 생명이다 얘기 많이 하잖아요. 얼마 전에 생각해봤는데, ‘노래는 나와 같구나. 그래서 그 노래를 그렇게 표현할 수 있었구나’라고 생각했어요. 노래는 곧 저예요.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숙성된 느낌으로 부르게 돼요. 한 번 부를 때보다는 열 번, 열 번 부를 때보다는 백 번 부를 때가 점점 나와 같아지는 느낌이죠.”
위로가 되는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점점 자신과 노래가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민해경이 지금 가수로서 가지고 있는 마음가짐이 궁금했다.
“저는 본분이 가수여서 계속 머릿속에 있을 거 같아요. 그런데 ‘이것을 해야지, 그걸 해야지’ 하지는 않아요. 그런 시기는 지났으니까요. 무언가를 해보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그냥 주어졌을 때 그걸 잃지 않고 잘 유지하고 싶은 거죠. 그게 베테랑이라고 봐요.”
그녀는 최근 신곡 ‘We Love You’를 발표했다. ‘바람 바람 바람’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이후 녹색지대의 앨범을 제작한, 성공한 프로듀서이자 가수인 김범룡이 작곡한 노래다.
“처음 노래는 원래 작곡가 본인이 부르려고 했던 남자 노래였어요. 그런데 제가 받아서 잘 풀어나가게 됐죠. 순수하게 제가 선택해서 가사를 만든 노래인데, 제 마음이 이 노래의 가사와 같아요. 비유법도 은유법도 없는 순수한 가사로 누구에게나 위로가 되는 노래로 만들고 싶었죠.”
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위로가 되는 사람은 남편이라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한다. 여느 평범한 여자처럼 그녀도 남편을 만난 것을 정말 잘한 일로 꼽았고 딸을 낳아 키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잘한 일이라고 했다.
“결혼은 항상 마지막 관문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볼 때 너무 감사해요. 지금 결혼한 지 22년이 됐는데, 그 전에는 여유가 없기 때문에 뒤돌아볼 수 없었던 것을 결혼 후에 조금씩 알게 됐어요.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일 또한 돈을 주고 할 수 없는 경험이죠.”
열정, 화려함, 사랑… 장미 같은 그녀
삶에 더없이 만족하는 사람. 민해경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만족 못하는 부분이 있다. 바로 가수로서의 삶이다. 수십 년을 최고의 가수로 살았던 사람이 가수가 어렵다는 말은 일견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무대와 함께 살았기 때문에 무대의 엄중함을 알고 있었다.
“남편이 힘들게 생각하지 말고 즐기라고 하는데, 안 돼요. 그래서 힘든 거죠. 무대는 서면 설수록 어려워요. 지금 더 많이 느껴요. 옛날엔 못 느꼈죠. 완벽한 무대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고. 지금은 안 그래요. 하면 할수록 어려워서 즐기지 못하는 거 같아요. 물론 막상 무대에 서면 괜찮지만 서기 전까지의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하죠.”
그것은 그녀가 가수이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가장 기본을 잊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뿐이다.
무대를 즐기는 게 중요하다고 말하는 그녀를 보면서 어쩌면 그녀가 더욱 진화하는 모습을 좀 더 오래도록 확인하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정으로 무대를 즐기게 된 가수로서의 민해경이 미래에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대 모습은 장미’, 민해경의 노래처럼 역시 세월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 모습은 장미 같았다.
지구상에서 세계화와 문명화라는 이름으로 고유의 전통을 지키는 곳이 점점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오직 한 나라, 그런 노력을 기울이는 희귀한 나라가 있으니 바로 부탄이다. 전 세계가 GNP(국민총생산)만을 부르짖으며, 효율과 편리라는 기치 아래 경제성장에 목을 맬 때도, GNH(국민총행복지수)를 최고 정책으로 삼고 있는 나라. 지구상에서 환경보호에 가장 민감하며, 영적인 것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나라. 세계에서 가장 늦은 1999년에 텔레비전이 도입되었고, 유일한 금연 국가로 담배 제조 및 판매가 금지되어 있다. 새들의 목에 줄이 걸릴까 염려되어 전깃줄을 잇지 않는 나라. 지극한 불심에서 우러나온 윤회사상으로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을 부모처럼 섬기고 아끼는 나라. 나무 한 그루를 벨 때도 국가의 허가증이 필요한 나라가 부탄이다. 이 나라를 여행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점점 늘고 있지만 부탄은 환경과 전통 보호 차원에서 일일 관광객 숫자를 제한하고 있다. 돈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는 듯한 분위기가 팽배한 나라에서 살아온 나는 도대체 무엇이 이토록 도도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하는지 궁금했고 그 비밀을 찾아 부탄으로 날아갔다.
국민 행복이 국가 정책인 나라
히말라야 동쪽에 위치한 불교 왕국. 북으로는 티베트, 남쪽과 동쪽으로는 인도, 서쪽으로는 인도 시킴 주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곳. 전체가 산악 지형(해발 150m에서 7000m)이고, 자신들의 고유 언어인 종카어를 쓰는 나라. 수백 년 동안 외부 세계에 문을 닫고 폐쇄적으로 살아왔으며, 한 번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거나 식민지였던 적이 없는 독립심 강한 나라.
부탄이 결정적으로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이 척박해 보이는 나라가 선진국들을 다 제치고 국민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랭크되면서부터다.
이상적인 지도자를 국왕으로 둔 행복한 국민들
“세상에 그런 지도자가 어딨어?” 정치가들에게 실망할 때마다 우리가 하는 말이다.
그러나 ‘이상적인 지도자’를 국왕으로 둔 행복한 국민들의 나라가 있으니 바로 부탄이다. 부탄의 집집마다, 거리마다 국왕과 왕비의 사진이 넘쳐난다. 그 이유를 알기 전까진 잔뜩 의심스러웠다. ‘행복 국가라더니 여기가 북한도 아니고 국왕 사진이 너무 많잖아!’ 마치 충성을 강요하는 것처럼 보여 실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부탄 국민들의 국왕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실로 대단했다. 그들은 1대 국왕부터 5대 국왕까지 모두 다 존경하지만 특히 3대, 4대, 5대 국왕에 대한 사랑은 절대적이다. 3대 국왕이었던 지그메 도르지 왕축은 현명하고 빠른 판단으로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부탄의 독립을 지켜냈다. 그러나 3대 국왕은 일찍 사망하고 만다. 그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4대 국왕은 고작 17세였지만 국민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국가로의 초석을 다졌다.
과거의 미덕을 돌아보게 하는 백미러 같은 곳
행복에 관한 연구들은 전통과 문화를 지키는 삶이 가져다주는 강한 정체성이 행복감에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의상에서부터 가옥, 노인 공양에 이르기까지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한 부탄 왕국의 모습은 세계 어디를 가든 똑같은 패션과 풍경을 보게 되는 여행자에겐 신기하고도 이색적인 풍경이 된다. 부탄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 중 하나는 언제나 전통 의상을 입고 생활하는 사람들이다. 남자들의 의상은 ‘고(goh)’, 여자들의 의상은 ‘키라(kira)’라고 하는데 학교에 갈 때는 물론 농사를 짓거나 일상생활을 할 때도 늘 전통의상을 입고 있다. 부탄인 가이드도 더운 날씨임에도 전통 복장인 ‘고’를 갖춰 입었다. 법으로 정해져 있어 지켜야 한다면서 땀을 뻘뻘 흘렸다. 부탄 국적을 가진 사람은 전통 복장을 입는 것이 법으로 정해져 있다 하니 이 나라가 전통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몸부림치고 있는지 알 만했다.
도출라 고개에서 맛보는 장엄한 대서사시, 히말라야 파노라마
팀푸에서 17세기에 부탄의 겨울 수도였던 푸나카(Punaka)로 가는 길, 해발 3140m의 도출라(Dochu-la) 고개에서는 히말라야 파노라마를 감상할 수 있다. 등반을 하지 않고도 눈 덮인 히말라야의 장관을 눈앞에서 볼 수 있는 행운은 부탄 여행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일 것이다.
여름 수도였던 파로(Paro)에는 부탄의 상징과도 같은 절벽사원 탁상 곰파가 있다. 차를 타고 2600m까지 올라갈 수 있지만, 3140m 탁상 곰파까지는 무조건 걸어서 가야 한다.
영화 ‘리틀 부다’의 촬영지였던 파로종에서는 아름다운 꽃들과 나무들이 마치 지상의 것이 아닌 양 환상적인 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그 사이사이로 자줏빛의 승복을 입은 꼬마 승려들과 마니차(불교 경전을 넣은 경통)를 들고 코라(탑 주변을 시계 방향으로 도는) 의식을 하는 순박한 사람들도 만났다.
파로종 옆에 있는 오래된 나무다리에서는 학교에 가는 순수한 얼굴을 만났다. “쿠주장폴라(Ku-Zu Zangpo-la, ‘안녕하세요’라는 뜻의 부탄어)”라고 인사하니, 수줍은 듯 “쿠주장폴라” 하고 답한다. 사진기를 들이대니 바쁜 걸음을 멈추고 기꺼이 모델이 되어준다. 여러 컷을 찍는 동안 가만히 기다리는 소년에게 이제 충분하니 가도 좋다고 신호를 보내니 그제야 발걸음을 옮긴다. 순간 부탄의 속담 한 구절이 떠올랐다.
“당신이 친절하다면 가난해도 상관없다. 당신이 관대하다면 게을러도 상관없다. 하지만 가장 나쁜 것은 거만함이다.”
어디서나 눈에 띄는 룽다 깃발과 초르텐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죽음을 직시하는 것이라 한다. 부탄에서는 매일 다섯 번 죽음을 생각하라고 가르친다. 삶과 함께 죽음을 바라보는 태도는 당장 눈앞의 일에 급급해하며 살아가는 것을 막아준다. 산악지대의 왕국 부탄을 여행하면서 특이하게 느낀 점은 묘지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죽음에 대한 불교적 태도 때문인데, 부탄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약 90%는 화장해 강에 뿌린다. 일부는 작은 탑 안에 재를 넣어두기도 한다. 주변엔 108개의 흰색 룽다(lungta) 또는 다르초(darchor)를 건다. 룽다는 티베트어로 ‘바람의 말[馬]’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바람 부는 곳에 룽다를 걸어놓는 것은 부처님 말씀이 널리 전해지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2세 미만의 아기가 죽었을 땐 조장(鳥葬)을 하기도 한다. 유명인이나 부자의 경우는 초르텐(chorten, 塔)을 세운다. 우리나라처럼 매년 제사를 지내지는 않고 2~3년에 한 번씩 간단한 추모식을 갖는다. 부탄 사람들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고 극락세계로 가는 과정이자 윤회의 한 고리일 뿐 슬픈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행
많은 사람이 히말라야 첩첩산중에 있는 은둔의 왕국 부탄을 찾는 이유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전 세계적으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의 사람들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서일 것이다. 부탄의 지도자는 국민들의 지속 가능한 행복을 위해서는 적어도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이 필요 없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 듯했다. 부탄을 여행하면서 그 현명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아무 문제가 없는 완벽한 나라는 아니었다. 텔레비전이 도입되면서 젊은이들은 변화를 겪고 있고 부탄에 와 있는 인도, 네팔인들과의 마찰도 왕왕 일어난다. 세상에 완벽한 국가는 없다. 그러나 부탄 여행은 국민을 참된 행복으로 이끄는 ‘이상적인 지도자’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의 삶이 ‘경쟁’과 ‘돈’이 아니어도 충분히 행복하게 공존할 수 있다는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들을 재발견하도록 해준다.
부탄의 한 사원에는 제2의 부처로 추앙받는 구루 린포체가 한 말이 새겨져 있다.
“변하는 것은 시대가 아니라 우리들 자신이다. 자신이 살아온 나쁜 업은 생각하지 않은 채, 평화도 없고 우주 만물의 조화도 깨진 시대 탓만 하는구나.”
전기 보급과 함께 빠르게 사라져버린 것이 있다. 등잔이다. 나무나 금속으로 만든 막대 사이에 흙으로 빚은 잔을 끼워놓은 것. 잔 안에 심지를 넣고 기름을 부어 불을 붙이면 어두웠던 세상이 밝아졌다. 과거 인간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지만 지금은 없다. 신문물의 등장으로 기억에서 빠르게 잊혔지만 등잔은 우리 삶에 있어 고마운 물건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 마구 버려졌던 가치를 마음에 새기고 100년 넘게 모아놓은 등잔을 마주하러 한국등잔박물관에 찾아갔다.
金家三代, 등잔의 소중함을 알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사람 길보다 바람 길이 더 많이 나 있는 인적 드문 곳에 한국등잔박물관(재단법인 한국등잔박물관 문화재단)이 있다. 같은 자리에서 박물관을 지키고 있는 세월만도 21년째. 한국등잔박물관의 전신인 고등기(古燈器)전시관(1969년 수원에서 개관)부터 따진다면 49년 전통에 특색까지 갖춘 독보적인 박물관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미래를 볼 줄 아는 한 가족의 뜻과 의지로 생겨났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2대에 걸쳐 관장을 역임하고 있는 김형구 관장은 선대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정성이 깃든 한국등잔박물관에 대해 찬찬히 설명했다.
“옛날부터 그림이나 골동품 등을 수집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한 목적으로 사서 모았습니다. 은행이 없을 때는 더 했었죠. 물론 저희 집안에서도 고가의 예술품을 모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저희 삼대가 열심히 모았던 것이 바로 등잔입니다.”
등잔은 모아봤자 돈 되는 물품이 아니었다. 전기가 들어오면서 쓸모없어져버리고 가치가 떨어져 애물단지가 됐다. 그러게 왜 돈 안 되는 등잔인가?
“우리 인간의 삶에 해가 지고 나서 전기가 없을 때 등잔이 없으면 밤에 생활이 안 되잖아요. 인생의 반이 밤이잖아요. 밤을 밝혀준 중요한 물건을 아무도 모으지 않는 거야. 수집하는 사람이 없어서 우리 집안에서 하게 된 겁니다. 나, 아버지, 할아버지가 100년 넘게 모은 등잔이 박물관 곳곳에 다 있습니다.”
가문의 재산이 모두의 자산이 되다
한국등잔박물관은 1대 관장이자 설립자인 김동휘(1918~2011) 관장이 운영하던 산부인과 2층에서 고등기전시관이라는 이름으로 개관했다. 김동휘 관장은 경기도 일대에서 유명하던 산부인과 의사이면서 예술에 조예가 깊어 경기 지역 문화 사업에 기여를 많이 해온 인물이었다. 은퇴 뒤 모아둔 유물의 관리, 보관 활용에 대한 고민이 박물관 개관으로 이어진 것이다.
한국등잔박물관은 현재 재단법인에서 운영하고 있다. 1999년 유물과 건물, 대지까지 150억 원 가까이 되는 재산을 재단법인 설립과 함께 사회에 환원했다. 대한민국이 있는 한 한국등잔박물관은 남아 있을 것이라고 했다.
등잔박물관은 왜 한국에만 있을까?
김형구 관장은 등잔이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라고 주장한다. 장례 문화였던 고인돌이 온돌 생활로 이어져 생겨난 민족의 슬기라고 강조했다.
“우선 온돌 문화는 고인돌에 쓰이는 돌을 깨는 기술에서 왔습니다. 온돌 바닥에 사용하는 구들장 깨는 기술로 전이된 것이죠. 바닥에 앉아서 생활하는데 등을 땅바닥에 그대로 놓아두면 빛의 효율이 떨어지잖아요. 앉아 있는 상태의 눈높이로 불을 끌어올려 허공에 띄워놓은 것이 등잔입니다. 전국이 온돌문화권이었으니 등잔을 사용한 곳은 우리나라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결국 세계 유일의 박물관일 수밖에요.”
한국등잔박물관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후기까지 다양한 등기구가 전시돼 있다. 불교국가로서 문화의 꽃을 피우던 고려시대 등잔대에서는 주로 염주와 연꽃 모양을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유교 국가였던 조선시대에는 의리와 절개를 상징하는 대나무의 죽절 무늬가 눈에 많이 띈다. 등잔을 재떨이로도 사용했고 새색시 혼수품으로 가져가기도 했다고. 박물관 1층에는 등잔을 사용하던 때 남자와 여자의 방, 부엌이 꾸며져 있어 당시 모습과 함께 등잔의 이용을 엿 볼 수 있다. 2층은 시대별로 등잔을 분류해놓았다. 실제 쓰던 대청마루를 원형 그대로 옮겨와 한국등잔박물관과 등잔 관련 기록들을 볼 수 있는 장소로 이용하고 있다.
관람안내
관람시간 (10월~3월) 오전 10:00 ~ 오후 5:00 / (4월~9월) 오전 10:00 ~ 오후 5:30
휴관일 월·화요일
입장료 (개인) 성인 4000원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500원
(단체) 성인 3000 / 중·고·대학생·노인·어린이 2,000 원
*부모동반시 미취학어린이 무료입장.
* 단체관람은 사전에 ☎ (031) 334-0797로 문의 예약.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채우기보다 비우기가 더 어렵다. 채우는 쪽으로 발육한 욕망의 관성 때문이다. 채우면 채울수록 더 허기지는 게 욕심이지 않던가. 지긋이 나이 들어서도 사람은 때로 갈피없이 흔들린다. ‘비우기’에 능하지 않아서다.
귀촌은 흔히 이 ‘비우기’를 구현할 찬스로 쓰인다. 욕망의 경기장인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서 가급적 빈 마음으로 생활을 운영해 한결 만족스런 여생을 누리겠다는 의도, 귀촌한 시니어의 내심엔 대체로 그런 게 들어 있다.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게 인생. 시간의 골목골목을 통과하는 사이에 그려지는 굴곡의 궤적들. 남들 눈엔 평범해 보이는 인생에도 고유의 행적이라는 게 있으며, 기복과 부침의 과거사가 서려 있게 마련이다. 예순의 나이에 접어든 임미숙 씨의 행장도 예외가 아니다.
대학에서 의상학을 전공한 그녀는 엉뚱하게도 건설업에 뛰어들어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사업은 순풍을 만나 쾌속 질주! 이 야무진 여자는 진로를 바꿔 쇼핑몰 사업에 자금을 투자했다. 이 역시 순항. 50명의 직원을 거느릴 정도로 규모를 키웠더란다. 그러다가 빙벽을 만나 한순간에 추락했다. IMF의 파랑에 침몰했던 것. 파도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엔 부채만 산더미처럼 남았다지. 간신히 부채를 정리한 그녀는 오랜 거점이었던 대구를 떠나 서울로 이주, 친구와 함께 커피숍을 차렸다. 그러나 그마저 신통치 않았다. 어이 하나? 고심이 첩첩 겹쳤을 테지.
“사업을 키워나갈 땐 남들의 칭찬도 많이 들었어요. 체구도 조그마한 게 통도 크고 간도 크다고. 자부심도 넘쳤죠. 하지만 추락하고 보니 심하게 주눅이 들더라고요. 지나온 세월을 찬찬히 돌아보게 됐어요. 사업상의 성취가 있을 때 누렸던 만족감, 행복감, 이런 것들이 사실은 근거가 부실한 자부심에 불과했다는 걸 알겠더라고요. 남들의 찬사도, 행복감도 단순히 돈의 힘에서 나온 거라는 걸 깨닫고 우울했어요. 본질적인 가치를 생각하기 시작했던 거죠. 물질적 조건에 매이지 않고 제대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어요. 그 결론이 귀촌이었죠.”
물적 토대를 잃은 뒤, 임미숙 씨는 삶이라는 숙제를 새로운 방식으로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조리를 따져 맹점을 찾아냈던 것 같다. 그동안 나를 기쁘게 했던 건 나 자신이 아니라 돈이었구나, 내가 나를 행복하게 해준 게 아니라 돈이 나를 행복하게 해줬구나, 미련한 나여! 보라! 모래 위에 지은 가건물처럼, 이토록 빈약한 행복은 종단엔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게 아니겠느냐? 그런 인식이 머릿속을 환하게 흘렀던 모양이다. 그게 터닝 포인트였다. 그녀가 서울생활을 청산하고 후미진 산골로 내려온 건 2011년의 일. 당시 나이 53세.
“시골의 그 무엇에 끌렸죠?”
“조용한 시골 풍경, 울퉁불퉁한 돌담장, 담장 아래 피어나는 봉숭아며 채송화, 그런 게 좋았어요. 한적한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짓고 살아보고 싶었어요. 노래 가사처럼,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음, 그런 꿈이었죠. 절실하게 꿈꾸면 언젠가는 이루어진다죠? 이 산골에 들어오며 드디어 원했던 삶이 시작된다는 생각으로 즐거웠어요.”
“경제활동에 한계가 있는 게 시골이죠. 생계 대책도 미리 세워둔 귀촌이었겠죠?”
“미리? 그건 아니었고 내려가서 부닥쳐보자, 까짓것 도시에서 이미 실패했는데, 더 이상 잃을 게 뭐람! 그쯤의 생각뿐이었죠.”
“비에 젖은 사람은 더 이상 비가 두렵지 않은 법이죠.”
“결심은 굳었어요. 귀촌을 계기로 싹 비우고 살자는 것. 좋다, 이젠 가늘게 먹고 가늘게 살자! 그 생각 외 별 고민도 궁리도 하질 않았어요.”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
거참, 두둑한 배짱이렷다. 가녀린 식물을 닮은 외양이지만 내부엔 깡이 서려 있는 모양이다. 천성의 산물이거나 세파를 거치며 단련된 근성이겠지. 물론 그녀가 철부지처럼 엄벙덤벙 무작정 산골에 덤벼든 건 아니었다. 믿을 만한 근거 하나가 있었으니 말이다. 선친이 남겨둔 1500평 규모의 땅과 집이 그것. 생시에 젖소 목장을 하려고 사두었던 부지로 오랫동안 방치된 상태였다. 그녀는 부친이 작고하기 전까지의 25년 세월을 심청이처럼 홀아버지를 모시고 살며 알뜰히 봉양했단다. 갸륵한 행장에 응분의 선물이 주어진 셈이다.
산등성이 외딴 곳에 있는 임미숙 씨의 거처는 수려하다. 갖가지 초목이 들어찬 터전은 널찍하다. 집의 외벽엔 흰 칠을 해 흐린 날에도 태깔이 밝다. 돌덩이와 흙, 목재, 통유리를 적재적소에 옹골차게 도입한 센스도 예사롭지 않다. 집 내부에도 미학과 리듬이 생동한다. 외양간을 개조한 사랑채 안 풍경은 특히나 멋스럽게 튄다. 골방의 절반을 침대처럼 높이 띄워 구들을 놓은 정경은 이색이며, 1인용 간이식 사우나탕은 성냥갑처럼 비좁지만 기발하다. 공간을 기능적으로 분할한 하얀 벽들은 이국정서를 야기한다.
햐, 한마디로 매력적인 집이다. 재활용 자재나 자연에서 무상으로 얻어온 재료를 적극 끌어들였다는 점에서는 참신하며 창의적이다. 별반 큰돈을 들이지 않은 대신 공은 잔뜩 들였다지. 이 집은 원래 금방이라도 와르르 허물어질 듯 퇴락한 고가였다. 어떻게든 손을 봐야 거주가 가능할 상황이었다. 개축을 할까, 자그마하게 신축을 할까, 그녀는 양자를 놓고 고민하다 귀농 관련 인터넷 카페 회원들에게 의견을 물었다.
“허름하게 기울어진 시골집 사진과 함께 글을 올려 조언을 구했어요. 용케 목수 한 분과 연결이 됐죠. 시골집을 철거하는 건 너무도 아깝다, 리모델링이 좋지 않겠는가? 그분의 얘기가 그랬어요. 바로 의기투합해 공사에 착수했죠. 제가 원래 인복이 많은데요, 저랑 코드가 맞는 유능한 목수를 만난 것도 행운이었죠. 비용은 3000만 원이 채 들지 않았지만 저의 취향이 충실하게 반영된 집, 예쁘고 실용적인 집이 한 달 만에 완성됐던 거예요.”
“시골집을 개축하느니 신축이 낫다는 경험담들도 많아요. 비용이나 편의성, 완성도를 따질 때 그렇다는 거죠.”
“귀촌 희망자들에게 집짓기에 관한 조언을 한다면?”
“동네 사람들에게 기죽지 않으려고 크고 화려한 집을 짓는 경우가 흔하지만, 반드시 후회해요. 유지와 관리에 진절머리를 내게 돼 있어요. 시골에서의 집이란 주로 잠자는 공간으로 쓰여요. 마당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많으니까. 가급적 작게 짓는 게 요령이죠.”
귀촌으로 얻은 값진 선물들
예쁜 집에 사는 된장녀. 주변 사람들은 임 씨를 흔히 그렇게 일컫는다. 그녀의 전공이 된장 사업이기 때문이다. 귀촌 이듬해부터 된장을 담갔으니 꽤 많은 세월이 흘렀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판로도 평판도 이젠 탄탄한 수준에 올라섰다.
된장은 일용할 양식이다.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으면 뚱뚱해져 식인종에게 잡혀 먹힐 수 있다. 된장은 탈날 게 없다. 누구나 좋아하며 누구나 먹는다. 비교적 수월하게 제조 기술을 익힐 수도 있다. 해서, 귀촌·귀농을 한 이들이 쉬 된장 사업에 뛰어든다. 하지만 경쟁이 치열하다. 흑자를 보는 된장 농가가 드물다. 사정이 이러하지만 임 씨는 기세를 돋우고 있다. 지난해엔 번듯한 된장 공장도 지었다. 현재의 연 매출은 5000만 원 정도. 김천 관내에 널리 알려진 강소농이다. 알찬 행진이다. 이건 단박에 쌓아진 탑이 아니다.
“어디에 갖다놔도 살아갈 여자, 제가 바로 그런 사람이에요.(웃음) 비록 돈 없이 귀촌했지만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해서건 밥은 먹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저에게 없었던 건 돈만은 아니었어요. 농사 경험 없지, 시골 물정 모르지, 아는 사람 없지, 한마디로 무지막지한 귀촌이었죠. 그렇다면 부지런하게 배우는 게 지름길. 귀촌·귀농 교육장을 찾아다니거나 밤새워 인터넷에서 필요한 정보를 수집해 익혔어요. 주경야독식으로 부지런히 공부했어요.”
“된장 사업은 교육장에서 권장한 종목?”
“아뇨. 이미 포화상태라며 뜯어말리던데요.(웃음) 그러나 저는 된장이 적격이라 판단했죠. 처음 한동안은 남들이 비웃을까봐 몰래 혼자 된장을 만들어 지인들과 나눠 먹었어요. 그런 수련기가 길었어요. 덕분에 실력이 늘면서 작년부터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고 있어요. 초기의 막막했던 기분은 어디론가 사라졌어요. 이제부터 본격적인 출발을 해야죠.”
“어디를 향한 출발?”
“흠. 일단은 된장 사업을 안정적 궤도에 올려놔야죠. 그렇다고 얄팍한 장사치가 되긴 싫어요. 된장을 통한 공감과 소통이 전 참 즐거워요. 저의 시골생활과 된장 이야기를 올리는 블로그로 맺어진 인연들이 많이 생겼거든요. 지역 귀농교육기관에서 가끔 강의도 하고, 견학차 찾아오는 방문자들도 많아요. ‘마음씨 예쁜 여자들’이 모인 ‘마녀 7인방’, 이 모임의 아줌마들과는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삽니다. 모두 귀촌한 분들이죠. 아차! 어디를 향한 출발이냐 물으셨죠? 궁극적인 목적은 여행입니다. 맘껏 여행의 자유를 누리며 살고 싶다는 것, 그럴 수 있는 기반을 빨리 다지자는 것, 이게 현재의 목표예요.”
귀촌을 통해 맺어진 믿음직한 인연들에 그녀는 기쁘다. 그건 귀촌으로 얻게 된 가장 값진 선물 아닌가. 그렇다 하더라도 외기러기처럼 일쑤 외롭지 않을까? 그녀는 독신이다.
“어서 빨리 똘똘한 마당쇠를 구하라는 성화가 빗발쳐요. 은근히 다가오는 분들도 있어요. 그러나 필이 통하는 사람이 없으니 이를 어쩌나. 일에 묻혀 사는 바람에 다른 생각을 할 겨를조차 없는 것도 사실이고요. 게다가 저에겐 병이 하나 있어요. 외로움이 없다는 것, 이건 지병일까? 외로워야 사랑의 갈증도 생길 텐데, 이거 참 문제죠?(웃음)”
“세상에 유일한 진실은 이성을 잃은 사랑에 있다. 뮈세의 말에요. 명심하시라.(웃음) 그런데 말이죠, 독신 여성의 귀촌, 이거 권장할 만한 거예요?”
“저를 보세요. 끄떡없이 잘 살고 있잖아요. 물론 표적이 될 수도 있어요.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저는 CCTV를 설치했지만, 처신을 똑떨어지게 잘하면 그만이에요. 사고가 나려면 명동 한복판에서도 나는 거 아니겠어요? 접시 물에 빠져 죽는 수도 있고 말이죠. 정 힘들면 짐 싸서 나가면 되지 뭐, 난 어디서건 잘 살 수 있어! 제게 그런 깡은 있어요.(웃음)”
시골생활의 새로운 문법과 맥락을 익히는 일. 이건 오솔길을 거니는 일과 달리 손쉬운 여정이 아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가듯, 시련도 불안도 나그네처럼 다 지나가게 마련이다. 길은 늘 그렇게 열린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