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즐거운 건 살고 싶은 대로 살 때다. 그러나 살고 싶은 대로 살기 쉽지 않다. 살고 싶은 삶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고 그냥 대충 살기 십상이다. 이럴 때 삶이란 위태한 곡예에 가깝다. 곡예 역시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점에서 진실일 수 있다. 하지만 이왕지사 한 번 태어난 인생, 심란한 곡예보다는 평온한 활보로 삶을 즐기는 게 낫겠지. 이 사람을 보라. 살고 싶은 대로 산다. 남들이 어떻게 살건, 남들이 뭐라 하건 상관없다. 내 방식대로, 내 지향대로 산다.
사는 것처럼 사는 건 어떻게 사는 거지? 좋은 삶이란 뭐지? 나답게 잘 산다는 건 어떤 거지? 김형태 목사(50)는 그런 궁리를 일찍부터 줄기차게 해왔던 모양이다. 뭐시라? 누군들 그런 생각 안 해보겠어? 그리 따질 입들이 많겠지만, 김 목사의 모색은 한결 심각하고 절실한 것이었다. 이미 신 안에 사는 사람이었지만, 해서 잡다한 혼선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삶이었겠지만, 그러나 그는 현재의 삶을 새롭게 하는 일에 늘 관심을 두었던 것 같다.
심지어 화두였다지.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문제. 어떻게 살긴, 그냥 생긴 대로 사는 게 인생인걸, 무슨 거한 포부가 있기에 화두까지 타셨나? 그리 또 따질 입들이 있겠지만, 김 목사는 화두를 파 궁구한 나머지 마침내 만족할 만한 결론에 도달했다. 귀농 행(行)! 바로 그거.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내와 함께, 아이들과 함께 삶과 교육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주변에 공동체생활의 이상과 실천을 말씀하시는 스승들도 많아 영향을 받았고요. 도시의 복잡하고 팍팍한 삶에서 벗어나 대안적 삶을 실천하고 싶다는 거. 그게 제대로 사는 길이라는 결론을 얻고 산골로 내려왔습니다.”
여기 합천 땅 황매산 기슭으로 내려온 건 6년 전. 이곳에 오기 이전, 청송과 산청에서도 한두 해 시골살이를 했는데, 그건 워밍업이었단다. 이미 몸을 풀고 링에 올랐기에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었더란다. 기쁨에 들떠 산골에 입장했다니 행복, 혹은 행복의 조짐을 움켜쥔 셈이었다.
아까 나는 이 집 입구에 도착해서 탄성을 내질렀다. 오! 근사한걸! 집 뒤편으로 좍 병풍을 친 산경이 기차게 삼삼해서였다. 아울러 그의 거처가 아름다워서였다. 마당 너른 집에 들어앉은 자못 큼직하고 미끈한
2층집이니 말이다. 수려한 산봉들이 우아한 코러스를 공연하는 터전이니 땅값부터 겁나게 나가겠는걸! 난 속물답게 그리 여기며 은근히 부러웠더랬다. 하지만 그게 아니구나. 김 목사는 이 집에 세 들어 산다. 우리를 자주 속 터지게 하는 ‘쩐’이라는 거, 그 요상한 물건을 그는 거의 지니질 않고 살아온 사람이다.
“종잣돈이라도 마련한 뒤 귀농해야 하는 거 아냐? 이런 생각에 한동안 귀농을 망설였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존경하는 스승께서 말씀하시더라고요. ‘언제까지 준비만 하고 앉아 있을 텐가? 떠나라, 유목민처럼 서슴없이 떠나라!’ 그래 그냥 따랐지요.”
“맨손으로 내려왔다는?”
“별로 손에 쥔 게 없었어요. 목회를 했던 교회에서 준 퇴직금 2000만 원이 전부였어요. 그런데 제가 이 마을에 들어와 복을 많이 받았습니다. 좋은 주민들과 돈독한 인연을 맺게 됐으니까. 이 집 주인도 그중 한 분이에요. 저의 대안적 삶에 관한 포부를 듣고 집을 임대해줬을 뿐만 아니라 개축까지 거들어줬거든요.”
“‘토기장이의 집’이라는 북 카페를 운영하시는군요. 이 집 쥔 양반은 토기를 굽나보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어요.”
“‘토기장이’란 성경의 토기장이 이야기에서 따왔어요. 아내와 딸이 북 카페를 운영합니다. 저는 농사에 주력하고.”
“목회는?”
“카페 공간을 예배당으로 여기지만, 간혹 신도가 찾아오지만, 여길 와서 제가 목사라는 걸 밝히지도 않았습니다. 땀 흘려 정직한 농사를 짓는 일, 농약으로 오염된 땅을 살리는 일, 이웃들과 어울려 품앗이를 하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노래하는 삶, 그 무엇보다 자연이 주는 영성으로 사는 일 자체가 이미 목회라 여기며 삽니다.”
자연의 영성 안에서 살기
목회라는 건 할 만큼 했으니 이젠 내려놨다는 얘기라기보다는 한결 진정한 목회자의 실천적 삶으로 접어들었다는 얘기일 테지. 그가 외로운 떠돌이로 산 바가 없었겠으나, 귀농으로 드디어 조용한 포구에 정박했다는 투의 안심과 자부심이 비친다. 그런 그에게 산골이란, 자연이란, 농사란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이상적 조건일 게다. 도시의 빌딩 숲속에선 이상 구현이 어려운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야야, 어디서건 네가 너의 임자로 살면 참인 것이야! 불가에 전해지는 뉴스가 그렇다. 도시에서 그는 무엇에 식상했을까?
“사는 장소가 도시이냐 시골이냐는 물론 중요하지 않지요. 어떻게 사느냐에 문제가 있을 뿐이니. 그런데 도시에서는 마음을 돌보며 살기 어렵지 않던가요? 나를 돌아볼 짬조차 없질 않던가요? 남을 딛고 일어서야 한 발이라도 앞설 수 있지 않던가요? 산골에 산다는 건 자연의 영성 안에 사는 건데요, 가령 흙을 만지고 있으면 사람이 단순해집니다. 놓쳤던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에선 얻을 수 없었던 힘이 생겨요.”
“농사란 여전히 못 믿을 직업으로 간주되고 있어요. 나오는 것 없이 골병만 든다고들 하죠. 김 목사님 농사는 무난할까?”
“애초 이 마을에 어떤 사람들이 사는지 전혀 몰랐는데요. 와서 보니 저와 같은 가치관과 철학을 가진 분들이 이미 살고 있더라고요. 시인 서정홍 선생님을 비롯해 유기농을 하는 ‘열매지기 공동체’의 아홉 농가 사람들, 이분들의 도움과 가르침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어요. 오랫동안 구상하고 추구했던 공동체적 삶 속으로 빠르게 섞여 들어간 거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농사 규모는 얼마나 되죠?”
“초기엔 200평이었으나 현재는 1200평으로 늘었어요. 마을 분들이 빌려준 밭이에요. 여기에다 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수수, 생강, 양파, 콩 등의 작물을 재배합니다. 아직 이렇다 할 수익은 없지만, 기계를 쓰지 않고 오직 몸을 써 일하기에 조금 고되지만, 그러나 만족합니다.”
“땀 흘려 노력을 했을 텐데 아직 수입이 발생하질 않다니, 이걸 어쩌나?”
“자급자족은 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게 없지요. 소출이 적더라도 우선은 땅을 살려놓고 보자는 게 유기농의 정신입니다. 문제는 요즘의 심각한 기후변화에 있어요. 노련한 토박이 농부들조차 대책을 찾지 못해 고심합니다.”
만물만상이 변하는 건 이치이지만 21세기의 날씨 변동은 왜 이 모양인가. 괴상한 게 기후뿐이랴. 나 하나, 내 가족 하나만 잘살면 장땡이라는 식으로 일쑤 남을 짓밟기를 장기자랑하듯 해대는 이 시대의 이기적 세태는 또 얼마나 수상한가. 모름지기 학교 교육부터 창의적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소리가 왁자하지만 정작 바뀌는 게 없으니 썰렁한 농담이다. 일찍이 이런 파행에 불신을 느낀 탓일 테지. 김 목사는 자식 셋 모두를 공교육에 맡기는 대신 홈스쿨링으로 양육했다. 불안해하지 않았을까? 아이들 말이다. 폼나는 학력을 걸치지 않고선 흑싸리 껍데기 등외품 취급을 당할 세상임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어릴 땐 많이 불안했다 하대요. 불안과 마주앉아 자기 고민들을 많이 했다고. 근데 그게 필요한 고민이었다는 걸 알았다는 겁니다. 고민과 함께 내적 성장을 한 것 같아요. 학교나 학원에서 찾기 어려운 답을 스스로 배워 찾아냈다고 봅니다. 야생의 어떤 감성으로 나답게 갈 수 있는 길을 찾았다고나 할까.”
“성적 경쟁의 격투장인 학교에서 심히 시달리며 세상의 명암을 알아가는 건 딱히 부정적이기만 할까요? 고난을 겪고서야 근본이 강해지는 법인데.”
“공교육은 개개인의 성향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자기다움을 용납하지 않는 거죠. 제 아이들은 너무도 잘 자랐어요. 각자 자기 색깔이 있는 일을 찾아 하고 있어요. 모두 경제적 자립을 했고요. 일테면, 막내인 아들은 올해 스물두 살인데 어엿한 청년 농부입니다. 지적 욕구가 강해 책을 무섭도록 읽어대요. 저희 북 카페가 운영하는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물리학이나 죽음을 주제로 한 강의도 하는 아이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어도 된다
어쩌면 위험한 모험일 수 있는 홈스쿨링으로 자녀를 야무지게 키우고, 물적 토대 없는 용감한 귀농에 자족하고, 눈앞의 현실만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들에겐 환상적일 수 있는 ‘자연의 영성’이라는 걸 가슴에 담고 사는 조용한 삶. 줏대와 슬기가 아니고선 꾸려내기 어려울 경관이다. 땅에 쏟는 떳떳한 노동과 자연을 향한 겸손한 순응 역시 맑은 생활의 원천이자 길일 테지.
“현실적인 감각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걱정을 많이 합니다. 산 속에서 뭘 먹고 사느냐, 신도 한 사람이라도 찾아오겠느냐고. 하지만 저는 만족하며 삽니다. 특히나 귀농으로 맺어진 좋은 인연, ‘열매지기 공동체’ 사람들을 만난 건 정말 만족스러워요. 커다란 행운이에요.”
“많은 공동체가 종단엔 실패를 하더군요. 그 가치는 아름답지만, 원초적 이기주의자인 인간이라는 종을 공동의 틀 안에 모아 함께 움직인다는 게 어떻게 가능할까?”
“어려운 일이죠. 그러나 필요한 일이죠. 같은 길을 가되 구성원들의 다양성이 인정되고 존중되는 공동체라면 문제가 없을 거라 봅니다. 저는 귀농 후 자연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열매지기 공동체’를 통해서 알게 된 것도 많습니다. 마음자리를 늘 돌아보는 눈이 생겼어요. 예전 같으면 용납 못했을 일도 아하,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고 받아들이는데, 이게 마음이 좀 넓어진 덕분이겠죠.”
“모두들 물귀신 같은 물신에 덜미를 잡혀 사는 세상이에요. 소박한 소유로 자족하는 김 목사님에겐, 가령 노후 불안 같은 건 없을까?”
“아무런 대책이 없으나 불안도 없어요. 늙어 병들면 그냥 죽으면 되지 않겠어요? 최소한의 물적 조건은 필요하겠지만, 그 필요라는 건 먹고 입고 잠잘 수 있는 정도라면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미 저희 부부의 라이프스타일이 돈 들어가지 않게 짜여 있어서 더더구나 문제될 게 없지요. 게다가 시골에선 굶어죽기가 아주 어렵습니다.(웃음) 온 산야에 먹을 것 지천이고, 경로당에서 뭔가를 챙겨주고 하니까.”
이루면 더 이루고 싶고, 하면 더 하고 싶은 게 욕망이다. 이미 가졌으면서도 더 가지고 싶어 하고 다 가지고 싶어 하는 게 인간의 관성이다. 이런 삶에서, 그는 벗어나고 싶은 게다. 벗어나고 싶어 하는 척하는 시늉이 아니라 안팎이 두루 한결같은 실천이자 실력이라면, 그건 내공이겠지.
“자연 속에서는 내가 아무 것도 아니어도 됩니다. 자연 속에 가만히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답게 변하는 것 같더라고요. 요즘은 더욱 소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힘을 빼고, 의도를 가지지 않고, 누구를 설득할 것도 없이, 그저 넉넉한 마음으로 살고자 해요. 죽음이 찾아오면 인디언처럼 산에 들어가 조용히 사라지면 그만이겠죠. 자연이 그렇잖아요? 있다가 없어지는 거.”
있다가 없어지는 것. 누구나 그 평범한 진리 하나를 몸에 붙이고 산다면 과히 걸릴 게 없겠지. 물신도 귀신도 사신(死神)도 두려울 것 없을 게다.
김형태 목사가 주는 귀농준비 Tip
•귀농을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자. 그래야 정붙이고 살 수 있다.
•은퇴자 귀농의 실패 확률은 매우 높다. 농사로 몸 건강을 망칠 수 있어서다. 도시와는 다른 시골 풍습에 적응하지 못할 경우에도 낭패를 볼 수 있다.
•귀농 초기엔 찍소리 안 하고 지내는 게 좋다. 원주민들과 융화하기 위해서는.
•땅으로 재테크하지 말자. 귀농인들 때문에 시골 땅값이 근거 없이 오르는 사례가 많다. 그럴 경우 대안적 삶을 원해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피해를 본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학교 문예창작과와 동대학원 졸업. 광주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IMF 외환위기 때 귀농·귀촌하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아무 준비도 없이 귀농하는 사람이 많아 정부가 ‘귀농·귀촌 종합대책’이라는 제도까지 마련했다. 2013년부터 집계해온 귀농인 통계에 의하면, 2017년 말 귀농 인구는 1만9630명에 이른다. 농촌 공동화(空洞化)를 막고 영농후계인력 확보, 나아가 농업 일자리 창출이라는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정부의 노력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40~50대가 귀농 인구의 62%를 차지하는 기현상도 눈여겨봐야 한다. 한 사회학자는 귀농을 ‘사회적 이민’이라고 표현했다. 도시생활에 익숙한 이들의 농촌 지역으로의 이동은 ‘이민’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경기도가 지원하는 귀농교육을 받은 수료생들의 귀농은 10명 중 3명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역(逆)귀농 상황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에 언론은 이러한 귀농정책의 실패를 심심찮게 꼬집으며 ‘귀농인턴제’를 도입해볼 것을 제안하고 있다.
사실은 2004년부터 10여 년간 착실히 시행되어오다가 2015년 무렵 정책 통합으로 슬그머니 사라진 이른바 ‘농산업 인턴제’가 있었다. 2009년 농림축산식품부는 ‘귀농·귀촌 종합대책’을 내놓으면서 ‘농산업 인턴제’를 대폭 확대하려 했다. 그러나 44세로 연령을 제한한 이 제도는 4050세대가 귀농인의 62%를 차지하는 현실을 전혀 반영하지 못했다. 농촌 현장에서 귀농 인구의 연령 분포가 실버 세대 위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이들의 성공적인 귀농을 도울 수 있는 ‘귀농 인턴제’가 없다는 점은 현 정책의 허점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내가 2005년 2월에 방문했던 일본 홋카이도 벳카이초(別海町)에서 30년 가까이 운영하는 ‘낙농연수원목장’ 인턴제도는 매우 체계적이며 정교한 후원 제도까지 갖췄다는 점에서 눈여겨볼 만하다. 우선 귀농을 원하는 도시민 중에서 부부 또는 예비부부(부모인증)를 인턴으로 선발해 3년간 훈련을 시킨다. 매년 3~4쌍만 선발하는 인턴은 연수원 목장과 인근 협력 목장에서 동일한 매뉴얼로 교육을 받는다. 선발된 인턴은 지자체 계약직 근로자로 인정되고 주택과 생활비(130만 원/1인당)를 지원받는다. 이들은 새벽 4시 30분에 시작해 저녁 6시 30분에 끝나는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주 1회 휴가(농번기 제외)도 있다. 교육 수료자에게는 홋카이도 지방자치단체가 1982년부터 시행해온 ‘홋카이도 농장리스(lease) 제도’ 지원 자금으로 리모델링한 폐업 농장이 주어진다. 1982년부터 1995년까지 105호의 취업 농가가 ‘농장리스 제도’의 지원을 받았다고 한다. 목장 개업 자금은 정부가 절반 지원하고 나머지는 20~25년간 거의 무이자 조건으로 빌려준다.
귀농인 통계는 중요하지 않다. 일본은 지역 단위로 혹독한 귀농 교육을 하고 있다. 귀농인과 농장이 상생하는 제도가 정착된다면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인 귀농인 배출이 가능해질 것이다.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 안간힘을 쓰는 정부의 귀농 정책에 귀농 인턴제도는 쏙 빠져 있다. 시급하게 필요한 정책이다.
겨울 칼바람이 맵차게 몰아치는 산골이다. 마을의 품은 널찍해 헌칠한 맛을 풍긴다. 산비탈 따라 층층이 들어선 주택들. 집집마다 시원하게 탁 트인 조망을 자랑할 게다. 가구 수는 50여 호. 90%가 귀촌이나 귀농을 한 가구다. 햐, 귀촌 귀농 바람은 바야흐로 거센 조류를 닮아간다. 마을 이장은 김종웅(76) 씨. 그는 이 마을에 입장한 1호 귀농인이다. 김 씨의 이주 이후, 그의 소개나 추천에 이끌려 이곳으로 덩달아 귀촌한 지인들도 많다고.
귀농 이전, 김종웅 씨는 줄곧 서울에서 살았다. 특별할 것도 모자랄 것도 없이 무난하게.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서울을 벗어나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서울에서 살다간 목숨을 보존하기 어렵겠는걸!” 그런 투의 독백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절절하게 치올라 목으로 터져 나오는 걸 깨닫고서였다. 몽둥이를 높이 쳐든 빚쟁이들에게 주야로 쫓겨서가 아니었다.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거나 발칙한 범죄를 자행해서도 아니었다. 그는 선량한 소시민의 노릇을 다하며 살아왔노라 자부하는 인물이다. 사적으로 원한을 사거나 공공의 적으로 몰릴 행장 따위를 눈곱만치라도 지은 바가 없었기에.
그렇다면 뭣 땜에? 단순하고도 절박한 이유 하나가 있었다. 몸이 자지러지는 적색경보를 울렸던 것. 심혈관질환을 가지고 있었던 김 씨는 어느 날 졸도를 해 응급실 신세를 졌더란다. 뇌졸중이었다지. 다행히 위기를 잘 넘기긴 했으나 불안과 두려움이 엄습했다. 이쯤에서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하면 하나밖에 없는 명줄을 졸지에 놓칠 수도 있는 상황임을 직시하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던 것 같다. “옳다구나, 시골로 가자!” 여러 밤을 잠 못 이루고 눈을 끔벅이며 심오한 연구를 하다 어느 아침에 내린 결론이 그랬다. 얘기를 들어볼까.
“아이쿠, 이러다가 나 죽겠구나, 칠십도 안 된 나이에 그럴 순 없지, 설령 죽을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산골에서 죽자, 과수 농사를 지어 좋아하는 과일이나 실컷 따먹다가 죽자,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어요.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 살다 보니 건강이 엄청 좋아지더라고. 그 무엇보다 서울에서 받고 살았던 스트레스라는 게 사라진 덕분이라 봐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먹거리도 도움이 됐겠죠. 귀농으로 얻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건강 회복은 가장 크게 얻은 선물입니다.”
사람의 몸뚱이는 내남없이 조만간 땅에 묻혀 한 줌 풋거름으로 돌아간다. 그러하니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최선을 다해 남은 시간을 선용해야 한다. 김 씨는 산골을 요번 인생 최후의 근사한 정처로 점찍은 뒤 미련 없이 서울생활을 청산했다. 미련이 남을 만큼 화려하거나 열광할 만한 서울생활도 아니었다. 근면과 성실을 인생의 교사로 여기고 오로지 바지런히 일하고 또 일했을 뿐이다. 그로써 처자를 어엿하게 건사하고, 아울러 건전한 세상과 명랑 사회 건설에 암암리에 이바지했던, 그지없이 평범하고 떳떳한 서울살이였다.
일 중독이 행복한 에고이스트
김 씨는 오랫동안 전파상을 운영했다. 전파상이 사양길에 접어들면서부터 자동차 정비일을 했다. 그의 별명은 맥가이버. 드라이버 하나면 뭐든 뚝딱 뜯어 고치고 헤집어 살려낸다. “누가 뭐래도 난 유능한 전자 기술자야!” 그런 자부심으로 자신의 직분에 충성과 충실을 다했던 모양이다. 도대체가 방황이나 일탈은 물론, 시련과 굴곡이 없는 인생이었다는 거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신비할 지경이지만, 운명의 신은 보디가드처럼 그를 각별히 수호해 이 살벌한 세상의 파랑을 사뿐히 건널 수 있도록 도운 것 같다.
그런 김 씨에게 귀농이란 어쩌면 생애 최초이자 최후의 도전이거나 반전일 게다. 그는 아내 방성녀(71) 여사에게 ‘고지식한 남정네’라는 소리를 넌덜머리나도록 숱하게 들으며 살아왔다. 그러고 보면, 조용하고 점잖은, 좀 딱딱한 이 남자의 돌연한 산골 이주란 ‘남산 위의 저 소나무’가 도봉산으로 이사 간 것만큼이나 신기하고 기발한 행보라 할 수밖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난제를 기어이 풀어야만 할 특유의 사정이 그만큼 절박했겠지. ‘건강 회복’이라는 미션 말이다.
“전파상이 호경기일 땐 수입도 짭짤했어요. 하루에 쌀 두세 가마에 해당하는 수입을 올렸으니까. 그것참, 그 당시 재테크에 눈떴다면 꽤나 재미를 봤을 테지만, 그런 재주, 도통 없었기에 그저 저축이나 부지런히 했어요. 서울을 뜨려고 자산을 정리해 보니 7억 정도의 자금력이 되더라고. 이것의 절반가량을 귀농 비용으로 썼어요. 농토 구입과 집짓기에 필요한 자금으로.”
“귀농하신 지 9년이 지났죠? 일흔 나이를 목전에 두고서 농사를 택하셨어요. 그게 무모한 선택은 아니었을까? 최대치로 몸을 쓰는 게 농사라서. 게다가 건강에도 적신호가 왔는데.”
“제가 천성적으로 일을 좋아해요. 나는 왜 사는가, 무엇이 가장 즐거운가, 어느 날 제가 조용히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오직 일이 좋아 일에 사는 사람이더라고요. 서울에서도 열심히 일했지만, 서울보다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시골에선 더욱 자발적으로 열심히 일하게 되더라고요. 농사는 제게 적격이거든요. 게다가 과일을 좋아해 과수원을 하고 있으니 일석이조라 할까.”
“오직 일을 좋아한다는 말씀, 얼른 곧이들리질 않아요.(웃음) 일보다 더 즐거운 것들이 많은 게 인생이지 않나요?”
“집사람이 저를 두고 말하길, 너무나도 부지런한 사람, 불쌍할 정도로 일만 아는 남자, 놀아본 적이 없어 노는 방법 자체를 모르는 남자라 합니다. 그러나 어쩌나? 저는 일에서 성취감을 느껴요. 아마도 일종의 일 중독자이겠으나 저는 그게 만족스러워요.”
“과수원의 수익성은 어때요?”
“지금은 사과농사를 하지만 몇몇 작목을 두루 경험해봤어요. 매번 신통치 않더라고. 농사 기술 자체가 서툴기도 했지만 판로가 늘 문제였어요. 현재는 사이버 판매망을 구축해 그럭저럭 무난하게 굴러갑니다. 부부 두 사람의 인건비 정도 건지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행운이지 않겠어요? 이 늙은 나이에 일하고 싶은 만큼 실컷 일할 수 있다는 건 농사가 주는 최상의 즐거움이고요.”
사람이 너무 한가하면 수상한 생각이 몰려든다. 그러나 오직 일벌레로만 살 수 없는 게 사람이라는 동물이다. 휴식과 놀이도 일종의 생필품이지 않겠는가. 저 명랑하고도 흥겨운 옛날 유행가가 외쳐대듯이, 우리는 틈틈이 ‘노세 노세 젊어서 노세’를 구현해야 하는 것이며, 늙어서도 짬짬이 잘 놀아야만 한다. 카를 마르크스가 얘기했듯이, 단지 노동에만 매몰된 인간은 짐승보다 불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김 씨는 일을 숭상하기를 단 한 번도 포기하지 아니한 채 살아왔다. 마르크스가 아니라 마르크스 할아버지가 왕림해 뭐라 고상한 조언을 해도 자신의 소신을 수정할 용의가 전혀 없는 인물이다. 서울에서도 그랬듯이, 지지구재재구 귀여운 새들이 종일 노래를 하는 목가적인 전원에 내려와서도 그는 자신에게 일의 대가(大家)라는 임명장을 수여하고서 쾌재를 부른 것 같다. 이렇게 자신의 몸을 오직 자신의 일을 위해 고용한 사람의 집 안팎은 먼지 한 점 없이 청결하다. 농장일을 마쳤더라도 밤늦게까지 외등을 밝혀 마당을 쓸고 닦고 다듬어야 직성이 풀려 비로소 발 뻗고 편한 잠을 자는 사람! 일테면 하늘이 와지끈 무너진다는 특급 뉴스가 들려온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은 기어이 오늘 당장 완수하는 사람! 그의 아내 방성녀 여사의 증언이 그렇다. 아내는, 이런 일벌레 남편과 사는 일이 때로 끔찍하지 않을까? 숨 막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잠깐 방 여사님의 얘기를 들어보자.
“한마디로 일에 미친 양반이에요. 죽기 전엔 못 고칠 버릇이라 봐요. 귀농할 땐 이제 좀 즐기며 부부가 자유롭고 행복하게 살고자 했지만, 이미 몸에 밴 습성이 안 바뀝디다. 한잔합시다, 하면 안 해! 놀러갑시다, 하면 싫어! 개미처럼 일하고 다람쥐처럼 굴레 속에서 빙빙 도는 인생이지요. 건전하고 씩씩한 남편이지만 일 중독을 행복으로 여기는 에고이스트예요. 무엇으로 어떻게 이 양반을 뜯어말릴꼬? 남편으로서도 일이 오직 즐거울 리 있으랴, 하는 생각에 새삼 연민을 느끼기도 해요. 언젠간 저 양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가득 맺히더라고요. 아, 당신, 힘들어하는구나, 덧없이 흐르는 노년을 아쉬워하는구나. 둘이서 껴안고 함께 엉엉 울었어요. 그러면 뭐하나? 이튿날이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는걸.(웃음)”
한 달 생활비는 50만 원
일의 대가 김종웅 씨의 일 종목은 농장일과 가사에 그치지 않는다. 귀농 이후 뒤늦게 독학한 컴퓨터 실력을 바탕으로 괴산군청 사이버 기자로 맹활약을 해왔다. 충북 도지사가 임명한 충북 귀농 홍보대사로도 활동한다. 게다가 마을 이장까지 맡아 동분서주! 76세 노인이 후루룩 손쉽게 해치울 수 있는 일들은 아니니 가히 장관이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노구에다 청년의 정신을 이식하는 방법을 일찌감치 터득한 사람일 수도 있다.
귀촌·귀농인들은 흔히 동네 이장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그래야만 정착이 빠르다고 널리 알려졌다. 이장을 마을의 절대 권력자로 보는 눈들도 있지 않던가. 하나, 김 씨의 생각은 다르다.
“이장의 횡포나 전횡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만, 제 경험으로는 그게 다 옛날 얘기예요. 요즘 이장들은 엄청 심한 시집살이를 합니다. 마을 심부름꾼일 따름이에요. 업무도 너무 많아요. 공무원 일의 절반쯤은 도맡아 하니까. 활동비 20만 원이 나오지만, 무척 힘이 들고 내 시간 빼앗기고, 봉사정신이 아니고선 감당하기 쉽지 않을 거라.”
“봉사정신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고충이 많겠죠?”
“전엔 원주민과 귀촌·귀농인 사이에 갈등과 충돌이 잦았어요. 그걸 중재하고 화해시키는 일, 그게 이장 몫이라 여기고 나름 애썼어요. 지금은 원주민 비율이 확 줄어 텃세 같은 걸 부릴 세력 자체가 거의 사라졌지만.”
“아마도 이 마을에 전무후무한 일꾼 이장이 납셨다고 정평이 났을 듯.”
“깐깐한 이장이기도 해요. 시골사람들은 흔히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고 태우는데요, 전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질 못하겠더라고. 속으로 꾹꾹 누르고 참노라면 스트레스 받으니까.”
“한 달 생활비는 얼마나 쓰시죠?”
“도시에서보다 지출을 크게 줄일 수 있다는 게 귀농의 장점입니다. 우리 부부는 한 달 평균 50만 원쯤 쓰며 살아요. 그 이상 지출할 때도 있지만, 남아도는 달도 많았어요.”
“앗! 겨우 50만 원?”
“돈 들어갈 게 없습디다. 먹거리는 거의 자급자족을 해요. 술, 담배 안 하지, 외식 안 하지, 불가피한 외출 외엔 틀어박혀 일만 하지, 뭐 돈 들게 있을까나. 약간의 부식비, 공과금, 차량 유류비 정도만 해결하면 되니까. 애당초 집사람이랑 50만 원으로 살자 다짐하고 귀농했는데 자연스럽게 실행되더라고.”
눈치 빠른 독자라면 뒤에 이어진 김 씨의 언설을 이미 미루어 짐작하리라. 돈보다 귀한 가치, 돈 주고 살 수 없는 만족과 행복의 요소에 관한 견고한 철학의 표명이 있었으니, 그건 일에 관한 예찬이 아니면 달리 무엇일 수 있으랴.
인터뷰를 마치며 마지막 질문을 거창하게 해보았다. 열심히 사시는 당신에게 남모를 회한이 있다면 그건 뭐냐고. 한참을 생각하다 들려준 답은 뜻밖에도 정감에 찬 것이었다.
“허무하게 늙어가는 아내를 농장에 내놓아 얼굴을 그을리게 만든 것. 그 하나예요.”
김종웅 씨가 들려주는 귀농 준비 Tip
•비빌 만한 언덕이 있는 곳으로 내려가는 게 현명하다. 인척이든 지인이든 연고가 있을 경우엔 적응이 빠르고 외로움을 덜 수 있으니까.
•시골에서 만족할 만한 소득을 올리기는 어렵다. 어느 정도의 자금력은 필수다.
•원만한 처세를 하지 않을 경우 원주민들에게 상처를 받을 수 있다. 다분히 보수적인 시골 풍토를 이해, 충돌만큼은 피하는 게 상책이다.
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귀농·귀촌은 시대적 화두다. 그러나 막상 도시인이 귀농·귀촌을 하려고 하면 막연하기 그지없는 게 현실이다. 어디서 정보를 얻고 어떻게 준비하고 행동해야 하는지를 생각하면 막막하다. 당연히 지역과 지자체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다. 평창군은 귀농·귀촌 인구를 위한 다양하고 실제적인 준비들을 진행하고 있다. 평창군농업기술센터 김상래 기술지원과장과 황창윤 귀농·귀촌 담당과의 인터뷰를 통해 평창 귀농·귀촌의 현재, 그리고 귀농·귀촌 인구를 위한 조언을 듣고 준비된 상황을 짚어봤다.
2015년 6월 평창군으로 귀농해 여름 딸기를 재배하고 있는 이철성 ‘아빠랑 딸기랑 아이랑’ 대표는 11브릭스 이상의 당도를 자랑하는 고품질 딸기를 연간 60여 톤 생산하고 있다. 6월부터 국내 유명 백화점에 독점 공급을 시작한 그는 해외 수출도 준비하고 있다. 그 외에도 태아와 임신부, 출산부를 위한 여름 딸기 비영리 공급 사업을 통해 대한민국 여름 딸기 알리기에 나서고 있다. 또한 비영리 교육기관인 ‘미션 코리아 스쿨’ 프로그램을 통해 아이들을 위한 영어, 수학, 과학 및 예체능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하는 등 사회 공헌에도 앞장서고 있다. 그는 호주에서 평창군으로 귀농했다. 거리로 따지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 거리에서 귀농·귀촌한 사람으로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잘 준비된 계획과 나눔의 마음으로 성공적 귀농·귀촌을 이루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귀농·귀촌의 딜레마
최근 일선에서 본격적인 은퇴를 시작한 베이비붐 세대는 그동안 잊고 있었던 고향으로 향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또한 고도화된 도시생활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도 삶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눈여겨보고 있다. 귀농·귀촌에 관한 TV 프로그램은 일정 시청률 이상을 보장하는 분명한 트렌드가 됐다. 그러나 이러한 긍정적인 흐름에도 불구하고 귀농·귀촌은 여전히 큰 틀에서 조직적으로 이뤄지기보다는 개인들 각자가 온갖 시행착오를 겪어가며 치르는 복마전에 가깝다. 그래서 고향으로 내려갔다가 빈약한 인프라와 텃세에 실망해 다시 도시로 돌아오는 사람들도 부지기수다. 평생을 한자리에서 산 고향 사람들은 고향 사람들대로 도시인들의 ‘뜨내기 기질’에 질려서 스트레스받는 게 현실이다. 귀농·귀촌이 이뤄지는 지역 단체의 적극적인 중개자적, 중재자적 역할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그런 점에서 평창의 사례는 눈여겨볼 만하다.
평창군이 사람들에게 각인된 것은 무엇보다도 ‘2018 평창동계올림픽’의 공이 컸다. KTX도 개통되어 예비 귀농·귀촌인에게 큰 관심을 받고 있는 지역인 평창은 2017년 기준 귀농 가구가 114가구로 강원도 전체 1074가구의 약 10.6% 정도다. 그중 약 75%인 86가구가 1인 가구로 구성되어 있다. 통계를 보면 지난 5년간 귀농인구는 100여 가구 내외, 귀촌 인구는 1200가구 내외를 유지하고 있다. 다만 귀농인구의 경우 2016년 대비 2017년 귀농 가구 수가 27% 증가했고, 귀농 가구원 수도 9.5% 증가하는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정착 지원을 위한 금융 프로그램 제공
평창군도 다른 지역 지자체와 비슷하게 저출산과 초고령화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농업·농촌의 지속가능성 확보와 귀농인의 안정적인 정착이 절실한 상황. 그를 지원하기 위해 평창군은 여러 가지 금전적인 지원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우선 ‘귀농 농업 창업 및 주택 구입 지원사업’이 있다. 귀농인이 안정적으로 농촌에 정착할 수 있도록 농업 창업 및 주거공간 마련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농지 구입이나 농업용 시설 설치 등의 농업 창업에 3억 원, 주택 구입이나 신축에 7500만 원을 연리 2%, 5년 거치 10년 원금균등 분할상환 조건으로 융자받을 수 있는 사업이다.
지역을 젊게 만들기 위한 ‘귀농인 정착지원금 지원사업’도 시행하고 있다. 이는 청·장년층을 귀농인으로 적극 유치해 미래 농업인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으로 20세 이상 45세 이하의 귀농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1년 차 농업인에게는 월 80만 원, 2년 차에게는 월 50만 원의 정착지원금이 지원된다. 또한 주거 환경 개선을 위해 1개소당 500만 원의 주택 수리비가 지원되고 농업기계, 농업용 시설, 농업 자재 등의 구입비 50% 지원하고 있다.
교육과 창업으로 귀농·귀촌 성공 유도
평창군은 귀농인 정착 지원이 때로는 인구 늘리기 정책의 일부가 되는 것에는 논란의 여지가 없지만, 본래의 의미가 퇴색되고 소모적인 경쟁 사례가 발생하는 것을 문제로 보고 있었다. 이 점을 유념해 실제적인 귀농인 정착 지원이 될 수 있도록 정책을 펼쳐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그 핵심은 교육과 창업이었다.
김상래 과장은 “귀농·귀촌은 생활의 거주지가 도시에서 농촌으로 변동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귀농·귀촌은 삶의 큰 패러다임이 바뀌는 것이다. 어쩌면 귀농·귀촌을 적극적으로 고려할 정도로 나이를 먹은 상당수의 사람들은 세상을 알 만큼 아는 사람들이기에 오히려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김 과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귀농에 대한 관심이 꾸준하게 이어지고 있고, 더불어 우리 사회의 거대한 ‘트렌드’로 자리매김할 것으로 예측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귀농인 스스로의 철저한 준비다. 새로운 곳에 둥지를 트는 만큼 극복해야 할 현실의 벽은 엄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귀농·귀촌에 대한 기본정보 숙지하라
김 과장은 개인의 귀농·귀촌 준비를 위해 우선 귀농·귀촌 종합센터(www.returnfarm.com)에서 제공하는 다양한 정보를 확인하도록 권했다. 귀농·귀촌종합센터 홈페이지에서는 온라인 교육은 물론 민간기관 공모교육, 현장실습 교육장, 귀농·귀촌과 관련한 기본 공통교육, 청년교육, 소그룹 강의 등 귀농·귀촌과 관련한 교육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귀농인이 선택한 품목에 대한 보다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싶다면 강원도 농업기술원에서 제공하는 교육을 받는 게 좋다고 설명했다.
물론 평창군도 준비하고 있는 것들이 있다. 평창군은 농업·농촌에 대한 이해 증진과 농업경영 마인드를 함양하고 성공적인 농촌 정착을 돕기 위한 취지로 ‘신규 농업인 기초영농교육’ 과정을 운영하고 있다. 귀농인의 농촌 정착 환경 조성뿐 아니라 귀농·귀촌인들이 소통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이 되고 있으며, 농촌 정착에 필수적인 인적 네트워크 형성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는 게 김 과장의 설명이다. 여기서는 소득작목선정 방법, 미래형 농업 마케팅 전략, 지역 주민들과의 갈등관리와 소통 등 다양한 영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귀농인 현장실습교육’을 마련해 신규 농업인과 지역 선도 농업인이 함께하는 영농 실습 교육 프로그램으로 실질적인 영농 방법과 기술을 전수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평창군에서는 현장실습에 소요되는 교육훈련비 귀농인 월 80만 원, 선도농가 월 4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그리고 ‘귀농 창업 지원 사업’은 귀농인의 귀농 창업 우수 아이템 발굴 및 소자본 창업 지원으로 귀농인의 소득기반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이다. 귀농 창업 아이디어 발굴과 지적재산권 확보, 농업 기반 조성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귀농 교육 우수 수료자를 대상으로 1000만 원을 지원하고 있는 중이다.
공유하고 나누다 보면 지혜 터득
귀농·귀촌인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지역민의 텃세다. 도시인은 특히 타인에 대한 믿음에 익숙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래서 평창군은 매년 ‘평창군 귀농·귀촌 페스티벌’을 진행하고 있다. 1박 2일 코스로 진행되는 귀농·귀촌 페스티벌은 예비 귀농·귀촌인을 초정해 정책 안내, 영농 체험, 선도농가 방문, 평창군 투어 등으로 이뤄진다. 이는 예비 귀농·귀촌인이 지역 주민과 교류할 수 있는 계기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귀농·귀촌인과 지역 주민이 함께하는 공동체 문화 조성을 위해, 귀농·귀촌 화합 프로그램도 운영 중이다. 귀농·귀촌 화합 프로그램은 귀농·귀촌에 관심이 있는 마을을 대상으로 귀농·귀촌인과 마을주민 간 갈등 해소 및 소통을 위한 갈등 해소 교육을 실시하고 화합 행사를 개최하는 등 마을 여건에 맞는 세부 계획을 수립해 추진하고 있다.
“귀농해 농촌생활을 꿈꾸는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여건이 다르더라도 자신에게 맞는 농촌형 삶을 선택하고 준비한다면 자연에 몸을 맡기려는 도시민들의 어깨는 한결 가벼워질 것”이라고 말하는 김 과장은 더욱 알차고 다양한 귀농·귀촌 지원 프로그램을 마련해 귀농·귀촌인의 안정적인 정착 기반 마련에 최선을 다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귀촌 관련 인터뷰 글을 연재하며 다수의 귀촌·귀농인들을 만나봤다. 어떤 이들은 만족을 표했다. 어떤 이들은 고난을 주로 토로했다. 만족을 표한 이들 역시 정착에 이르기까지의 시련 술회하기를 생략하는 법 없었으니, 귀촌·귀농이란 대체로 일련의 애환과 동행하는 장정임을 알 만했다. 과연 시골생활의 활보는 어떻게 해야 가능할까? 조용하고 강인한 고라니처럼 시골살이를 힘차게 구가하기 위해서는 어떤 방책이 필요할까? 두 가지 단편적인 사례를 통해 귀촌·귀농의 성패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적성에 맞춘 귀촌의 이상적인 삶
외진 산간 숲속으로 귀촌을 해 서점을 운영하는 A 씨 부부. 산속에서 서점을? 이는 웬 만용이란 말인가. 그러나 서점은 순항하고 있다. 찻집과 게스트하우스를 함께 운영해 안정적인 살림을 꾸려나간다. 갖가지 콘서트나 문화 행사를 펼쳐 지역의 명소로 부상했다. 시발은 미미하고 궁색했다. 부부가 손수 지은 작은 흙집에 살며 활로를 모색하느라 어지간히도 진을 뺏던 것 같다. 그러다 서점에 착안한 건 썩 자연스럽고 현명한 판단이었다. A 씨는 원래 출판업자였다. 서울에서 출판사를 운영했던 그가 귀촌을 한 건 마음이 줄기차게 시골로 흘러갔기 때문이었다지. 산골의 자연 속에서 살며 다가올 노후를 대비하고 싶었던 것. 도시에서 시골로 삶터를 바꾼다는 건 상류의 물고기가 물살을 따라 유유히 하류로 내려가는 것과는 다르다. 시행착오와 우왕좌왕이 잦게 마련이다. 도시에서 몸에 익힌 삶의 과욕과 과속을 적절히 털어내기 쉽지 않아서다. 하지만 A 씨의 포부는 옹골차게 실현됐다.
A 씨의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그는 자신의 적성에 맞춰 노후의 이상적인 삶을 설계했다. 일찍부터 자연주의자를 자처해온 그는 산골의 공기와 풍정을 숨 쉬고 사는 게 옳다고 보았다. 자연 속에서 자아를 부양하며 사는 게 한 번뿐인 아까운 삶을 흥미진진한 쪽으로 밀어붙일 수 있는 길이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 같다. 육신은 물론 영혼을 위해서도 자신의 적성, 취향, 지향에 맞는 시골살이를 선택하는 게 온당하다 판단했던 거다.
귀촌 희망자여, 당신의 적성부터 면밀히 점검하시라! 나는 그렇게 권유하고 싶다. 때로 어처구니없는 바보짓을 태연히 자행하는 게 인간이지만, 자신의 적성 진단을 소홀히 한 채 자연과 더불어 살며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겠다는 식의 환상을 가지고 귀촌을 후다닥 결행하는 일처럼 위험한 우행도 드물다. 등산을 좋아하거나, 숲을 흔드는 물소리 새소리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다고 내 적성이 시골생활에 부합하리라 속단해선 안 된다. 짧으면 한두 달, 길어야 두어 해 사이에 질리기 쉬운 게 자연이다. 자연은 놀이터가 아니라 생활의 장이다. A 씨의 활보는 무심한 자연 환경에 도대체 권태를 느끼질 못하도록 민감하게 작동하는 적성의 힘에서 추동되었다.
아내와의 의기투합도 A 씨의 귀촌 순항을 돋운 저력이다. 귀촌 문제를 놓고 부부간에 대번에 죽이 맞을 확률은 낮다. 대체로 남정네들이 먼저, “가자, 시골로!” 그렇게 선창을 하며 나서는 수가 많지만, 웬걸, 영특한 종족인 아내들은 십중팔구 반기를 들게 마련이다. 그녀들은 모기에 뜯기고 뱀에 시달리기나 할 뿐, 자칫 따분하고 외로워질 가능성이 있는 시골살이에 환상적으로 입문할 일이 아님을 이미 눈치 채고 있는 것이다. 이 경우엔 신사도를 발휘해 아내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게 좋다. 나는 억지로 아내를 끌고 시골로 들어갔다가 4년 만에 이혼을 하고 털레털레 도시로 귀환한 부상병의 사연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진 적이 있다. 그럴싸한 집요한 세뇌로 아내의 생각을 바꿔놓을 자신이 없다면 귀촌의 꿈을 차생에서 실현하는 게 낫다.
A 씨는 시골에서 남은 평생 즐기며 일할 수 있는 종목을 찾아냈다는 점에서도 귀감이다. 산중 서점 사업이라는 기발하고도 진취적인 업종은 그에게 두 가지 만족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는 경제상의 안정을 가져다줬다는 점. 물적 궁핍이 곧 불행과 직결되는 건 아니지만 꽤나 성가시고 불편하다. A 씨도 넉넉할 게 없었기에 남몰래 전전긍긍이 많았으리. 하지만 해결했다. 다른 한 가지 만족 요인은,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을, 가장 좋아하는 일을, 노후까지 지속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는 데 있다. 비축 자금이 많거나, 연금이 다달이 척척 들어오는 사람들의 경우에도, 귀촌생활에 생기를 부여하기 위해선 즐거이 몰두할 수 있는 일 하나를 갖는 게 필수다.
마을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불찰
이제 사뭇 다른 사례를 볼까. 공직 은퇴자인 B 씨. 그는 60대 중반쯤 도시에서의 지루한 일상을 견디다 못해 후미진 시골로 들어갔다. 평소 동경했던 멋진 정원을 가꾸며 한적하게 노닐고 싶어서였다. 그는 너른 터를 사들여 큼직한 집을 지었다. 그리고 정원 가꾸기에 온갖 공을 들였다. 신명이 실린 쾌조의 나날들이 이어졌지만 2년여가 지나 상황이 급변했다. 다양한 수목과 화초로 채운 너른 마당은 어느 사이 가혹한 근로의 공간으로 바뀌었으니 땅의 임자는 그가 아니라 풀들이었던 것. 강철 같은 기세로 들고 일어서는 풀과의 전쟁에 그는 지쳐 나동그라졌다. 어깨, 허리, 무릎, 팔, 어느 하나 성한 게 없는 자신의 참상에 그는 울상을 지었다. 사교성 결여로 원주민들과 거의 단절된 생활을 하는 사이에 누적된 고독감마저 하늘에 뻗친 걸 비로소 절감하고 거듭 울상을 지은 것도 그즈음이었다.
게다가 도시에선 그토록 명랑했던 아내가 우울증에 걸려 약을 먹기 시작했다. 더욱 끔찍한 소동은 이웃 원주민이 휘몰아왔다. 마을의 몇몇 삐딱이 가운데 하나였던 그 원주민은 고지식하고 딱딱한 스타일인 B 씨네 집 길목을 제 땅이라며 철조망으로 막아버렸다. 땅을 고가에 팔아먹자는 흉계였다. B 씨는 결국 헐값에 집을 처분하고 도시로 돌아갔다.
B 씨는 신중함을 결여한 채 충동구매와도 같은 귀촌을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 무엇에 앞서 그는 마을의 분위기를 미리 파악했어야 했다. 시골이라고 인심이 퍼덕퍼덕 살아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는 운수 사납게도 텃세 심하기로 소문난 마을로 귀촌을 했다는 걸 뒤늦게야 깨달았다. 끝내 깨닫지 못한 자충수도 있다. 원주민들이 B 씨에게 불편한 존재였듯이, 오불관언으로 일관한 B 씨 역시 원주민들에겐 수상하고 불편한 이방인으로 행세했을 뿐이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주민과의 융화라는 문제에 대부분의 귀촌·귀농인들은 심혈을 기울인다. 그러고서도 수월치 않아 머리칼을 쥐어뜯으며 고민하기도 한다. 어이하나? 마을 일에 적극적인 참여자는 되지 못할망정 냉소적 방관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사람 전원을 내 가족으로 생각하는 태도를 취한다면 복이 돌아올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귀촌생활이란 수신(修身)의 기회이기도 하다. 명랑사회 건설에 이바지하는 길이겠고.
도시에 살다 농촌으로 삶터를 옮기는 것을 귀농 또는 귀촌이라고 한다. 농촌을 떠났던 사람들이 다시 농사를 지으러 가는 것은 ‘귀농’이고, 고향을 찾아가는 것은 ‘귀촌’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요즘 시골을 찾는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위해 가는 것보다 여유를 즐기기 위해 이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또한 자신이 살던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가는 사람이 늘었다. 전원생활이 목적인 사람들은 연고는 없지만 새로운 삶의 터를 마련하기 위해 시골을 찾는다.
1960~70년대 산업화의 바람이 불어왔을 때, 농촌에서 지내던 많은 사람이 도시의 새로운 일자리와 희망을 찾아 자신이 살던 곳을 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도시로 떠났다. 이것을 ‘이농(離農)’이라 했다. 이농의 사전적 의미는 ‘농민이 다른 산업에 취업할 기회를 갖기 위해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동하는 현상’이다.
그렇다면 도시에 살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살기 싫어 떠나는 것, 즉 희망을 찾기 위해 터전을 새로 마련하는 것은 ‘이도(離都)’라 표현해야 맞다. 귀농이나 귀촌처럼 다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터전을 찾아 도시를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도시에서 가까워 교통 여건이 좋고 경치가 빼어난 곳에는 ‘다시 돌아온 사람들’이 아니라 ‘이도’해온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들로 인해 마을이 새롭게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나 충청도처럼 수도권과 경계하는 지역을 둘러보면, 화전민이 살다 버리고 간 땅을 개발해 전원주택을 짓고 사는 사람이 많다. 도시생활로 넉넉해진 사람들은 먹고살기 힘들어 버리고 갔던 땅을 개발해 집을 짓고 여유롭게 살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들은 귀농·귀촌자가 아니라 새로운 삶과 희망을 찾아 농촌으로 오는 사람들, 즉 이도해온 사람들이다.
작고 소박해진 전원생활
이렇게 도시에서 살다 시골에서 살고 싶어 내려오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움직임은 예전과 많이 다르다. 가장 대표적인 특징은 전원생활의 목표가 작고 소박해졌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 예전과 같이 별장형 전원주택을 짓는 대신 노후생활의 대안으로 귀농·귀촌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거품도 많이 빠졌다. 평균수명 100세 시대가 되면서 노후를 어디서 무엇을 하며 보낼 것인가가 매우 중요해졌다. 또 어디서 사느냐에 따라 필요한 노후자금 규모도 달라진다. 노후생활비를 줄이려면 아무래도 도시보다는 시골에서의 삶이 유리하다. 하지만 경치나 감상하고 좋은 공기, 맑은 물이나 마시며 살겠다는 꿈은 없다. 폼 잡고 사는 게 답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현실적인 투자를 하게 되고 그 결과 화려한 정원이 있는 집이 아니라 작고 소박한 집을 찾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도시를 버리지 않는 귀농·귀촌자들이 늘었기 때문이다. 도시를 영원히 떠나 농촌에 정착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도시와 농촌을 오가며 이중생활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다. 전원생활을 꿈꾸는 마음이 있어도 대다수 사람은 도시를 떠날 입장이 못 된다. 아직 현역으로 활동하거나 은퇴할 나이가 아니어서 가족의 반대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시골에서 살 자신이 없고 두려운 사람도 있다. 그동안 살아왔던 도시를 떠나는 것이 이래저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도시에서 절반 살고 시골에서 절반 사는 반쪽 전원생활을 계획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다 시골생활에 자신이 붙거나 기회가 만들어지면 그때 도시를 떠나도 늦지 않은 것이다. 최근 주말주택, 세컨드하우스가 유행처럼 번지는 이유다. 도시를 떠나지 않고 시골생활을 해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다 보니 무리한 투자를 하지 않는다. 다랭이논 한 뙈기, 컨테이너 박스 하나로도 좋은 집과 정원이 될 수 있다.
수익형 전원생활
단순히 자연이나 즐기자는 목가적 귀농·귀촌도 많이 줄었다. 농촌으로 내려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른바 귀농·귀촌 창업이 그것이다. 앞으로 ‘수익형 전원생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아질 것으로 전망되는 이유다. 생활비가 넉넉하다면 주말형 또는 별장형 구조의 집을 짓고 유유자적 사는 게 큰 부담이 되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를 걱정해야 한다. 은퇴는 빨라지고 수명은 점점 늘고 있다. 직장에서 퇴직을 한 후에도 30년 이상을 더 살아야 하는데, 이 시간을 도시에서 보내든 시골에서 살든 수입이 있어야 한다. 은퇴자들의 가장 큰 화두다.
수익 없이 살 수 있는 은퇴자들은 별로 없다. 은퇴자가 늘고 귀촌자가 많아지면 수익형 전원주택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날 것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이미 펜션에서 증명됐다. 시골에서 살며 민박집을 운영해 수익을 내는 것이 펜션이다. 지금이야 시들해졌지만 불과 5년여 전만 해도 전원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펜션은 인기 창업 아이템이었다. 전원주택도 짓고 수익도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농장을 하든 펜션을 하든 전원카페를 운영하든 전원생활을 통해 수익을 낼 수 있어야 시골로 이주한 은퇴자들의 노후가 윤택해질 것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시니어에게 최근 전원주택 시장에 나타난 수익 모델을 하나 추천할 수 있다. 바로 ‘임대형 전원주택’이다. 펜션처럼 단기 임대의 형태는 이미 큰 시장이 됐다. 하지만 월 단위나 연 단위로 임대하는 전원주택 시장은 아직 없다. 작업, 힐링, 요양을 위해 전원주택을 장기 임대하려는 수요가 점점 늘고 있지만 체계적이지 못하다. 개인들끼리 알음알음 전원주택 임대가 행해지고 있는데 도심의 원룸이나 아파트 임대와 비교해볼 때 수익률이 매우 높다. 특히 놀리는 땅이 있다면 시도해볼 만하다. 물론 토지부터 구입해야 한다면 투자비가 크겠지만 토지가 있다면 가볍게 접근해볼 수 있다.
‘시골 체질’인지 고민해볼 것
마음은 귀농·귀촌하고 싶은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생각해야 할 것도 두려운 것도 많다. 하지만 마음이 있다면 지금이 바로 결정할 때다. 당장 실행해야 한다. 서둘다 금전적인 손해를 본다 해도 전원생활을 통해 얻는 것이 더 많다. 좋은 땅을 고를 수 있는 기회의 폭이 먼저 결정한 사람에게 더 넓다. 하루라도 일찍 시작하면 정착도 빠르다. 정원에 나무를 하나 심어도 시작이 빨랐으니 그만큼 더 자라 꽃도 빨리 보게 되고 텃밭의 작물도 먼저 여문다.
실제로 귀농·귀촌해서 사는 사람들 중 ‘더 빨리 오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사람이 많다. 어차피 시골에서 살 마음이 있다면 서두르는 게 좋다.
“산속에서 심심하게 사는 것은 아닐까? 자녀들 혹은 친구들이 자주 올까? 아프면 병원이 멀어 위험할 텐데, 시장 다니기도 힘들고, 교통도 불편하고, 뱀이나 벌레도 많고, 또 시골 사람들 텃세가 만만치 않다는데 왕따 당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걱정들은 살다 보면 ‘괜한 걱정’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정작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다. 바로 “내가 시골에서 살 수 있는 체질인가?”에 대한 판단이다. 이런 질문을 했을 때 “딱 내 체질이야!” 하는 답이 나와줘야 한다. ‘강남 스타일’이 시골에서 살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만약 마당의 풀을 뽑고 화단을 가꾸고 나무를 심고 집 고치는 일이 재미있다면 ‘시골 체질’이다. 당장 시골생활을 해도 문제없다. 그러나 별장 같은 집을 짓고 잔디 위에 파라솔 펼치고 친구들 불러 바비큐 파티나 하고 커피 마시는 상상이 좋으면 얼마 못 가 다시 도시로 올라와야 한다. 이런 사람은 ‘도시 체질’이다. 어떤 시골생활을 꿈꾸는지를 잘 고려해봐야 한다.
◆ 성공적인 시골 정착을 위한 8가지 단계 ◆
01 결심 | 귀농·귀촌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결심이다. 농촌으로 이주해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농업에 종사하겠다는 생각으로 귀농을 준비한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농촌과 농업에 대한 충분한 이해다. 도시 회피식, 목가적인 생각만으로 결정을 내린다면 위험하다. 스스로 농촌에서의 삶을 상상해보고 즐겁겠다는 생각이 들 때 옮겨도 후회하지 않는다. 단순하게 농촌을 동경하고 좋아하는 마음만 갖고 귀농·귀촌을 시작하면 실패할 확률이 높다.
02 가족 동의 | 귀농·귀촌해 사는 남자들이 이주할 때 가장 힘들었던 점은 아내 설득이다. 가족의 동의를 얻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가족들과 함께하는 귀농·귀촌이라야 성공할 수 있다. 특히 귀농은 배우자의 동의가 필수다. 정신적인 동료이고 노동력 도움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은퇴 후 귀촌하는 사람들은 터를 잡을 때도 자식들 잘 올 수 있는 곳, 집을 짓더라도 자식들이 편히 쉬다 갈 수 있도록 방을 만들고 집을 키운다. 그러나 이 경우 대부분 후회를 한다. 자녀들이 부모의 생각만큼 자주 찾아와주지 않기 때문에 계획은 엉망이 되어버리고 큰 방도 비게 된다. 이를 명심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03 자금 계획 | 빠듯한 예산으로 귀농·귀촌 계획을 세우면 실패하기 쉽다. 농업시설을 마련하고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비용을 훨씬 초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때 자금이 모자라면 그동안 진행했던 것들마저 수포로 돌아갈 수 있다. 특히 땅을 사고 집을 짓는 과정에서 예상하지 못했던 비용들이 발생한다. 토지 인허가 및 공사 과정에서 시행착오를 겪을 수도 있고 변수도 많다.
04 할 일 선택 | 귀농·귀촌한 후 할 일을 정하는 것은 진행 단계 전반에서 가장 중요하다. 귀촌일 경우에는 꼭 수익이 목적이 아니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야 한다. 귀농자라면 어떤 작목을 선택할까를 정해야 한다. 작목은 가족의 노동력과 자본능력, 기술수준 등에 따라 결정한다. 어떤 농사를 짓느냐에 따라 준비해야 할 토지의 규모가 다르고 거기에 알맞은 농기계도 필요하다. 또 작목 종류에 따라 고도의 기술이 필요한 경우도 있다. 작목을 선택할 때는 지역별 특산품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다. 각 도의 농업기술원이나 시군 농업기술센터를 이용해보자. 작목을 선택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05 기술 습득 | 작목을 선택했다면 재배, 가공, 홍보 마케팅 등에 대한 기술과 노하우도 필요하다. 영농기술은 다양한 귀농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을 수 있고 선진 농가를 견학, 체험, 연수할 수도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농어촌 지역에 정착한 귀농인에게 현재 재배 작목 등의 심층 연수 또는 이주 초기 관심 있는 분야의 작목 재배기술 등을 지원한다. 선도농업인(농업법인) 또는 성공 귀농인으로부터 도움을 받는 영농 분야 등에 대한 기술 습득, 정착 과정, 상담 멘토 등이 그것이다.
06 정착지 결정 | 정착지는 자신이 선호하는 지역이나 정해진 지역이 있다면 문제가 없다. 할 수 있는 일, 작목을 찾는 일은 그다음의 일이다. 하지만 정해진 지역이 없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선택한 후 정착지를 결정해야 한다. 귀촌이라면 선택의 폭이 넓겠지만 귀농의 경우 선택한 작목에 맞는 지역을 찾기가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시설원예와 같은 일은 도시 근교가 적당할 것이다. 벼농사, 채소, 밭농사는 평야 지역이 유리하다. 과수, 약초, 축산을 한다면 당연히 준산간 지역을 선택해야 좋다. 정착하기 위해서는 생활할 주택의 인허가를 비롯해 교통 여건, 생활 여건, 이웃 등도 검토해야 한다.
07 농지 및 주택 마련 | 농지는 영농 형태에 따라 규모나 토질, 물 사용 여건 등을 고려해서 구입한다. 농업용으로 구입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농림지역’ 농지법 상의 ‘농업진흥지역’의 농지를 선택하는 것이 좋다. 만약 주택용, 펜션, 전원카페, 식당, 숙박시설 등 다른 용도로 사용할 때는 ‘국토의 계획과 이용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관리지역’이라야 한다.
주택을 마련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기존 주택을 구입 또는 여유자금이 부족하다면 임대를 고려한다. 땅을 사서 신축하거나 빈집을 수리해 사용할 수도 있다. 이때 과도한 욕심은 금물. 주택에 무리하게 투자해 후회하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농촌의 빈집은 대체로 간단한 수리만 해서는 사용하기 어렵다. 예상보다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니 잘 점검해야 한다. 아울러 집이 들어서 있는 땅이 대지인지, 땅 주인과 집주인은 같은지 등도 꼼꼼히 확인해보자.
08 운영 및 생활 | 모든 준비를 끝내고 이주를 했다면 드디어 전원생활의 시작이다. 이때 여유자금을 충분히 갖고 있지 않다면 수익을 위한 경제활동이 필요하다. 하지만 당장 농사를 지어도 적게는 6개월에서부터 몇 년을 투자해야 돈을 벌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귀농·귀촌에 성공하려면 기술, 여유자금,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다.
귀촌 5년째. 김석균(55) 씨는 흙집에 푹 빠져 살고 있다. 그간 수십 채의 집을 지었다. 흙집 일색이다. 흙의 내부는 거대하다. 식물을 기르고 벌레를 양육한다. 생명의 출처다. 흙의 이런 본성과 모성이야말로 자연의 표상이다. 사람의 몸처럼, 흙집 역시 수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김 씨는 자연의 생태와 순환을 거스르지 않는 흙집의 미덕에 심취했다. 시골로 이주한 이유가 거기에 있다. 흙집의 본거지인 시골에 눌러 살며 맘껏 흙집을 짓고, 널리 알리고, 두루두루 건축공법을 보급하고 싶었던 것.
한낮의 나른한 정적이 감도는 시골마을 찻길 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이라는 간판을 단 건물 한 채가 있다. ‘마을건축학교’라는 현수막도 걸려 있다. 교장은 김석균 씨. 건물의 외양도 내부도 말쑥하다. 원래 낡고 빈 농협 창고였다. 그걸 사들여 본때 있게 고쳤다. 이 공간에서 흙 건축 사업과 교육과 작업이 이루어진다. 전북 순창군 동계면에 있다.
귀촌 이전, 김 씨는 도시를 전전하며 다채로운 경험을 쌓았다. 전북대학교에서 철학을 전공한 그는 청춘기를 예인(藝人)으로 신바람 나게 노닐었다. 연극배우로 무대에 섰고, 근 10여 년 풍물패에 섞여 장구를 쳤다. 이후 서울의 병원 원무과 직원으로 일하다가 다시 행선지를 바꿨다. 강원도 원주의 ‘자연학교’에서 고명한 생태철학자 무위당(無爲堂) 장일순 선생(작고)의 강연을 듣고서였다지. 무위당이 설파하는 생명사상과 ‘모심’의 뉴스에 귀가 번쩍 뜨여 생태적 삶을 실천하는 쪽으로 진로를 돌렸던 것. 그는 이후 한동안 천연염색이나 전통차 제조로 자연이 실린 생활을 꾸려나갔다.
생태건축에 강렬한 감흥을 느낀 것도 그즈음이었다. 해서, 부지런히 전통 한옥의 이론과 기술을 책에서 현장에서 대학원에서 배우고 익히고 다듬었다. 10여 년을 그렇게 내닫아 흙 건축 전문가로 도약했다. ‘끼’와 ‘깡’이 발동하는 방향으로 운신한 덕이다. 성향과 취향이 흐르는 쪽으로 길을 닦은 셈이다. 이는 시중에 흔한 재능이 아니렷다. 그러나 김 씨는 손사래를 친다.
“저를 지도해주셨던 선생님 왈, 어이, 석균이! 자네는 왜 그렇게 재주가 없는가? 하핫. 재주는 없는 대신 제가 뭐든 열성은 다합니다. 좌우명이 하나 있는데요, 매사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보자! 그겁니다. 어떤 상황이건 적극 부닥쳐 확인해보자는 거죠. 문제는 ‘깊이’에 있다는 생각이에요. 이왕지사 건축업계에 들어섰다면 깊이 있게 들어가야 한다는 신념, 그거 하나는 놓지 않고 살았어요.”
김 씨는 흙건축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일찌감치 쓰윽 존재감을 드러냈다. ‘담틀집’을 많이 지어서였다. ‘담틀집’이란 거푸집 안에 흙을 다져넣어 지은 집이다. 지금의 그는 ‘생태 단열’의 복음전도사다. 그게 뭔가? 흔히 건축 단열재로 스티로폼을 쓰지만 그는 극구 배척한다. 볏짚과 왕겨, 이 자연 재료들이야말로 탁월하고 안전한 최상의 생태 단열재라는 거다.
“사람에게 옷은 제2의 피부, 집은 제3의 피부입니다. 그런데 현대 건축의 자재 대부분은 석유화학 제품이라 인체에 해로울 수밖에 없어요. 반면 흙이나 나무는 공기정화 능력을 발휘합니다. 볏짚이나 왕겨로 단열처리를 할 경우, 스티로폼으로는 기대할 수 없는 습도 조절 효과까지 거둘 수 있어요. 왕겨는 물에 잘 썩지도 않아 볏짚보다 더 뛰어나고요.”
“흙과 나무와 돌로 지은 시골의 오래된 집들이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어 아깝더라고요. 비록 현대 주택에 비해 불편하고 열악한 구조이지만, 우리 부모 세대의 숨결이 서린 주거 문화이자 정서적 유적이지 않겠어요?”
“좋은 집이란 뭔가? 바람 잘 통하고, 해 잘 들고,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집이라 정의할 수 있습니다. 시골집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단열 미비에 있어요. 여름엔 온실처럼 덥고 겨울엔 냉장고처럼 춥죠. 시골집 흙벽 자체가 워낙 얇기도 하거니와, 흙이나 돌이 단열기능을 가진 재료는 아니거든요.”
“보수하고 보강해서 잘 살려 쓸 방법은 없을까?”
“제가 ‘마을건축학교’를 운영하는 취지가 뭐냐 하면,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분들이 굳이 신축을 하기보다는 기존 시골집을 고쳐 쓰는 방법을 택하기를 바라서입니다. 소정의 교육을 이수하면 시골집 단열 작업을 어느 정도 손수 해낼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단열 보강만으로는 한계가 자명해요. 주거와 삶의 패턴도 이미 과거와 달라졌어요. 이래저래 퇴락한 시골집들의 여건은 불리합니다. 화학물질과 공해물질의 폐해가 여실한 현대 주택도 불안전하긴 마찬가지이지만 말이죠. 생태 단열재를 도입한 흙집이 대안이라 봅니다.”
“흙 건축엔 비용이 많이 든다죠? 입주 후 관리가 번거롭다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저비용 고효율 주택이란 세상에 없습니다. 집의 완성도나 형태에 따라 달라지는 게 건축비이고요. 관리 문제? 제대로 잘 지은 흙집이라면 신경 쓸 일이 전혀 없습니다.”
흙집이든 모던한 주택이든 허영과 허세의 덩어리가 아니라면, 취향과 실용에 부합한다면, 작고 소박하더라도 박새 둥지처럼 안락하다면 그게 바로 좋은 집이지 싶지만, 김 씨의 흙집 옹호엔 빈틈이 없다.
근성과 뚝심, 그리고 낙관의 힘
그는 손에 별로 쥔 것 없이 귀촌을 했다. 안빈낙도란 흔히 허풍선이의 과욕이라 바랄 일이 아니거니와, 가족 부양의 의무를 면제받을 순 없었으니 수말처럼 들입다 뛸 수밖에 없었을 테지. 앉으나 서나, 오나가나, 하품할 겨를 없이 분주하게 살아온 것 같다.
지난 5년 사이, 그는 많은 일을 벌였다. 마을 안통의 빈 건물을 개축, 청년 귀농인들과 함께 거주하는 공유주택으로 만들었다. 이 일곱 명의 청년들은 ‘흙건축 연구소 살림’의 주주이자 직원들이다. 지자체의 예산 지원을 받아 관내 시골집들을 보수해주는 일도 하고 있다. 근래엔 꽤 너른 임야를 사들여 아동들을 위한 숲속 생태놀이공간을 꾸미고 있다. 근성과 뚝심, 기민한 머리, 노련한 처신, 집요한 실천력이 아니라면 일구기 어려운 일들이다. 부채도 있고, 흙집 사업이 잘 돌아가는 것만도 아니라 하지만, 그는 낙관의 힘으로 어디까지나 기세등등하다.
김 씨는 한때 연매출 30억 원을 목표치로 잡았다. 이런 그에게 아내 이민선(42·‘흙건축 연구소 살림’ 대표) 씨가 어퍼컷을 날렸다. “당신, 그렇게 살면 행복할 거 같아?” 아내의 일격에 그는 코피를 쏟았던 모양이다.
“퍼뜩 정신이 들더라고요. 내가 과욕을 부리고 있구나, 일벌레로 추락하고 있구나, 그런 반성을 했던 겁니다. 가급적 일을 적게 하고, 가급적 많이 놀자! ‘광대 정신’을 다시 끌어내 쓰자! 그렇게 생각을 고쳐먹었어요.”
“광대 정신?”
“제가 과거 한때 풍물에 미치다시피 빠져 살았습니다. 장구 하나 짊어지고 전국을 6개월씩 떠돌곤 했어요. 어느 도시를 가건 그곳의 풍물패 광대들을 찾으면 대번에 통했어요. 어이, 나 전주의 김석균이여! 그렇게 기별하면 우르르 달려들 나와 반겨줬어요. 날밤을 새며 마시고 춤추고 놀았고 말이죠. 그 광대의 마음과 기질과 습성을 봉인해두고 일 하나에 몰두하며 50대 중반에 접어들었어요. 자유로운 정신을 스스로 가둔 채 말이죠. 이젠 봉인을 좀 풀자, 나를 풀어놓자, 욕심을 줄이자, 그런 다짐을 했던 겁니다.”
“현실의 규율과 틀에 사로잡히지 않는 방랑자. 사회의 보편적 속물이 되기를 거부하는 아웃사이더. 광대란 과거부터 그런 존재들이었죠. 방탕의 이미지가 따라붙기는 하지만, 본성적으로 자유분방한 나그네들….”
“악기 하나 달랑 들고 세상을 떠도는 삶이 가장 이상적인 삶일 수도 있죠. 내가 나의 진정한 주인으로 사는 길의 하나일 테니까.”
“일찍이 풍물과 더불어 한평생 살다 가겠다는 작심을 한 적은 없으셨고?”
“직업으로 삼을 생각은 하질 않았습니다. 재주에 빠지는 프로보다는 재미를 즐기는 아마추어로 만족했으니까. 그랬던 광대의 나날을 청산한 건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의 생태적·실천적 삶에 감화를 받으면서였죠. 풍물을 한답시고 줄창 술이나 퍼마셨던 시간들을 정색을 하고 되돌아봤던 겁니다. 스스로 부끄러워지더라고요. 그 무엇에 앞서 의식주부터 내 힘으로 떳떳하게 해결해야 할 필요를 절감했어요. 그 방편으로 흙집 건축에 착안했고요.”
떠들썩한 축제와 그 뒤에 고이는 허망한 정적. 그 양자의 괴리와 배치(背馳)에 삶의 하중이 얹힌다. 만족은 잠정적인 선물에 그치고, 모색의 시간이 다시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빈 잔처럼 여지없이 찾아든다. 고인 물처럼 썩지 않으려면, 정직하게 돌아보고 서둘러 변해야 하겠지.
‘배워서 남 주자!’
김 씨의 귀촌은 변화 욕구의 산물이자, 거듭 새로워져야 할 기회와의 만남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그 새로운 기회를 잘 활용해왔다. ‘전투적인 노동’으로 일에 전념했으며, 아내에 대한 존중심을 견지, 크고 작은 역경들을 힘 모아 함께 넘어설 수 있는 부부애를 구축했다. 풍물패와 유유상종하던 시절에 배양한 사교적이거나 낙천적인 에너지를 발휘해 주변과 친화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는 차갑고 객관적인 시각으로 귀촌을 바라본다.
“점점 확산되는 귀촌·귀농 현상은 기본적으로 매우 바람직합니다. 노인들만 남은 시골에 생기를 부여하고 인구 유지에 기여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시골살이란 만만한 게 아녜요. 흔히들 기존의 삶을 변화시키는 데에 귀촌의 목적을 둡니다. 이건 현명하고 정당하죠. 도시라는 수레바퀴에 어쩔 수 없이 휩쓸려 돈을 좇는 삶, 자신과 가족을 진정으로 사랑할 기회조차 박탈당한 삶이 좋은 것일 리 없으니까. 그러나 전원생활에 관한 낭만이나 동경을 앞세운 귀촌은 실패하기 십상입니다. 신중한 고려를 통한 귀촌이라 하더라도 원했던 걸 얻기까진 상당한 수고와 시간을 쏟아야 하고 말이죠.”
“충동구매처럼 무모한 귀촌을 할 경우, 시련의 시간은 한결 길어지겠죠. 끈질기게 버티다가 10년이 지나고서야 비로소 평온한 정착에 이르기도 해요.”
“처음 2~3년은 어어 하는 사이에 정신없이 지나더라고요. 5년은 지나야 서서히 자리가 잡히는 것 같아요. 저처럼 시골에서 경제활동을 할 경우엔 어려움이 더 커지죠. 실패 가능성도 많고요. 젊은 귀촌자들의 실패는 오히려 미래의 자산이 되겠지만, 시니어는 깊은 상처를 입을 수 있어요. 특히나 농사를 통한 돈벌이를 시도하다 보면 궁지에 몰립니다. 평생 농사만을 전공한 시골 사람들도 쩔쩔매며 산다는 걸 기억해야 해요.”
“원주민과의 관계에 감정의 골이 깊어져 외딴집처럼 고독해질 가능성도 많은 게 귀촌생활이죠.”
“세상엔 파락호도 있고, 괜찮은 사람도 있어요. 도시나 시골이나 마찬가지로요. 시골의 문화와 정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존중과 배려에 무신경한 채, 그저 원주민의 텃세를 타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원주민 입장에선 수상한 외지인이 내 동네에 이주해올 수도 있다는 긴장감을 가질 수밖에 없어요. ‘배워서 남 주자!’ 이건 우리 회사의 구호예요. 남에게, 이웃에게 기탄없이 나눠주고 배려하는 일은 언뜻 손해 보는 짓 같지만, 사실은 돌아오는 게 더 많아요.”
엉덩이에 뿔난 송아지는 어디에고 있다. 그런 인물은 미구에 걷어차인다. 골치 아픈 원주민 때문에 앙앙불락하기보다, 내가 먼저 골치 아픈 인간이 되지 않는 것. 그게 지름길이라는 것. 김 씨의 얘기인즉, 그런 귀띔이겠지.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