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삶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면? 아마도 누구나 현재의 삶과 다른 쪽으로 ‘나’를 데려갈 것이다. 금쪽같은 여생을 진정 자신이 원했던 방식으로 누리고자 할 것이다. 절박하면 길을 바꾸게 마련이다. 중년 이후의 귀촌은 머잖아 닥쳐올 노년, 그 쓸쓸한 종착에 대한 대책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절박한 기색을 머금는다. 노후의 안정과 평안을 성취하려는 의도엔 ‘거사’라고 할 만한 결연한 포부가 서려 있기 십상이다.
김미경(54)씨는 수려한 강변에 산다. 금강의 초록 물살이 살갑게 여울지는 시골에 둥지를 틀었다. 동갑내기 남편 강희씨와 함께 살아간다. 귀촌 이전엔 죽 서울에서 살았다. 남편은 가구를 손수 만들어 파는 사업으로 가장 역할을 했으며, 김씨 역시 직장인으로 서울이라는 각축장을 열심히 누볐다.
이채로운 건 부부 공히 연극판에서 활약한 이력. 남편은 무대조명이나 무대감독으로, 김씨는 배우로 활동했단다. 젊었던 날의 근 15년쯤을 극단에서 뛰었다지. 짧지 않은 세월이다. 하지만 이 부부에겐 이미 강 너머로 고스란히 사라진 과거사일 뿐이다. “다 잊었어요!” 연극인으로 살았던 옛일을, 그녀는 그저 그렇게 덤덤하게 돌이킬 따름이다. 연극에 빠졌던 나날들의 열성과 꿈이라는 게 이젠 무의미한 한 줌 기억으로 잔존한다는 투로. 현재의 삶 속으로 온전히 파고드는 게 현명하다는 투로.
김미경씨 부부는 10년 전에 이곳으로 귀촌했다. 서울에 더 이상 애착도 미련도 없어서였다. 이게 단순한 이유처럼 들리지만 숙고에 숙고를 거듭했으리라. 서울에서 겪은 파란과 애환에 지친 나머지 전원생활의 목가적 풍미를 선망했을 수도 있다. 서울에서 품었던 인생의 목표를 시급히 수정해야 할 필요에 직면했을 수도 있겠지. 아무려나 절이 싫어 떠나는 중처럼, 이점도 매력도 많은 서울과 선선히 결별하는 일엔 특유의 절박한 고심이 선행되었을 게다. 그녀의 얘기를 들어볼까.
“서울생활에 의욕과 재미를 잃었어요. 수많은 차량과 인파, 경쟁과 긴장과 스트레스로 점철되는 게 서울이잖아요. 복잡하고 답답한 대도시에서 저희 부부가 원하는 좋은 삶을 추구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죠. 서울의 혼탁한 공기도 너무 싫었어요. 서울에서 인생을 탕진하고 싶진 않았어요. 차츰 노년기에 접어들 텐데, 원하지 않는 공간에서 노후를 맞이할 수는 없단 생각을 했지요. 노후엔 시골의 자연 속에서 편하게 살자! 그런 결심이 섰던 거예요. 이왕이면 한 살이라도 더 젊은 나이에 귀촌을 해 시골생활을 익히는 게 가장 충실한 노후 준비라는 생각을 했던 거죠.”
노후 준비라는 것. 과거엔 없었던 숙제다. 평균수명이 짧았던 시절엔 모두들 그냥 살았다. 열심히 살다가 일찍 조용히 죽으면 그만이었다. 부양할 자녀들도 많았다. 그러나 100세 시대엔 다르다. 60세쯤의 은퇴 이후 긴긴 세월을 자력으로 살아갈 갖가지 채비를 미리 해두려고 모두들 용을 쓴다. 무엇보다 노후자금 마련에 관한 강박감으로 현재를 만족스럽게 즐길 소비와 기회마저 가급적 보류한다. 자금으로만 안전한 노후를 보장받을 수는 없다. 자기 계발, 인간관계, 여가, 소일거리, 건강 등도 노후의 안락을 위해 미리 북돋워야 할 종목들이니까. 이 모든 과제들의 완수가 귀촌으로 가능하다고 보았다. 김씨 내외 말이다. 이제 귀촌 10년. 그들의 귀촌은 어느 고지에 올라섰을까.
한동안 곤궁에 시달려
“서울을 벗어난 건 좋은 선택이었어요. 여러 면에서 만족할 만한 경험을 하며 살고 있으니까요. 일례를 들자면, 제가 서울에선 피부질환에 늘 시달렸어요. 아무리 약을 써도 낫지를 않았죠. 과중한 스트레스가 가져온 질환이기 때문이었어요. 그런데 시골에 살며 피부가 깨끗하게 회복됐어요. 잔병치레도 사라졌고요. 귀촌을 통해 지독한 스트레스를 크게 줄여나갈 수 있었던 거죠.”
“대체로 도시의 아내들은 귀촌에 거부감을 느끼죠. 불편 요소들이 많다고 보기 때문에. 남편의 강권에 이끌려 귀촌했다가 끝내 적응을 못하고 홀로 도시로 돌아가는 사례도 있어요.”
“우선은 시골과 취향이 맞아야겠죠. 저는 그게 맞았어요. 원래 제가 도시적 풍물보다 산골의 자연 풍경에 마음이 더 편해지는 성향입니다. 서울에 살면서도 화초를 많이 길렀어요. 이사할 땐 한 트럭 분량의 화분들을 싣고 내려올 정도였죠.”
“자연만 바라보고 살 수만은 없는 게 인생이죠. 경제활동은 순탄했나요?”
“전혀 순조롭지 않았어요(웃음). 사람과의 관계도 자연과의 관계도 도시보다 한결 만족스러운 쪽으로 이끌어갈 수 있는 게 시골이라는 건 분명해요. 심지어 나만의 지상 천국을 누릴 수도 있다고 봐요. 하지만 경제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기란 도시나 마찬가지로 시골에서도 만만치 않다는 걸 실감했어요. 아아, 초기 3년 정도는 정말 힘들었어요. 저희는 고작 시골집 한 채를 지을 정도의 자금만 지니고 귀촌했는데, 3년여가 지나고 나자 자금이 바닥나더라고요. 진땀을 흘려야 했어요.”
가령 고매한 정신세계조차 최소한의 물적 토대가 갖춰지고서야 지속 가능하다. 지겹고 힘겹지만 면제받을 길이 없는 게 돈벌이다. 세상은 우습게 돌아가지만 결코 우습게 여길 수 없는 게 또한 그것이다. 부(富)를 경멸하는 제스처를 취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는 이미 가진 자이기 십상이다. 김씨는 마치 예상하지 못한 복병을 만난 듯이 한동안 난처한 곤궁에 시달렸던 모양이다. 어쩌면 귀촌을 낭만적으로 가늠한 탓에 빚어진 사단일지도 모를 일.
“곤경을 벗어나기 위해 부부가 열심히 일을 찾아 덤볐어요. 남편은 이 지역의 한 대안학교에서 목공 강사로 일했어요. 하지만 박봉에다 적성이 맞질 않아 그만두고 읍내에 목공 공방을 차렸어요. 저 역시 읍내에 나가 닥치는 대로 일을 했어요.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기도 했죠. 어휴, 눈물 나던걸요. 이러자고 내가 귀촌을 했나? 서울로 다시 돌아갈까? 슬픔과 회의가 마구 몰려들더라고요.”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을 해도 역경이 쉬 물러나지 않도록 각본을 짜둔 이는 누구일까. 그런데 말이죠, 시골에선 소득이 너끈하지 않더라도, 소박한 방식으로 원만히 살아갈 여지가 있진 않나요?”
“그런 얘기, 귀촌 이전에 많이 들었어요. 시골에 내려가 살면 생활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고. 그게 귀촌의 장점 가운데 하나라고. 그러나 살면서 겪어보니 현실은 달랐어요. 오히려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가더라고요.”
“저런! 제가 만났던 귀촌자들은 흔히 생활비 절감 효과를 귀촌의 최대 이점으로 꼽았어요. 특별한 경우이겠지만, 월 지출 50만원으로 무탈하게 사노라는 부부도 만났어요. 그들은 소비 욕망의 관성에서 벗어난 검박한 생활이 더 만족스러운 삶일 수도 있다는 걸, 사람이 물질의 노예는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았어요.”
“놀라워요. 저희는 힘들었어요. 일을 하기 위해서는, 생필품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읍내나 인근 대전을 드나들어야 하는데요, 남편 차와 제 차, 두 대의 차량이 필요했어요. 군내버스는 하루에 두 차례 운행할 뿐이라서 이용하기 어려웠죠. 대중교통망이 발달한 서울에선 교통비 부담을 느끼지 않고 살아도 되지만 시골은 달라요. 차량 유지비 비중이 너무도 커요. 아무튼, 귀촌 3년째가 숨 가쁜 고비였습니다. 경제상의 한계로.”
“귀촌 3년쯤을 경과하면 보통 풍월을 읊을 시점이죠. 비로소 시골생활 물정에 익어 정착이 가능해지는 시기라는 거죠. 3년까지는 버거운 수련기간이라는 얘기이기도 할 테고.”
“귀촌을 만만하게 여겼구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충분치 못했구나, 반성이랄까 깨우침이랄까 그런 게 몰려들었어요. 3년이나 지나고서야 말이죠. 뭔가 확실한 다른 방식을 찾아야만 했어요. 읍내에 나가 허드렛일이나 하는 식으로는 미래가 보이질 않는다는 것, 우리만의 집중된 일을 찾자는 것, 남편과 숙의 끝에 내린 결론이 그랬어요.”
낡은 지도 버리고 새 지도에서 찾은 좌표
귀촌 3년 어간에 맞닥뜨린 ‘깔딱 고개’. 목표는 좋았으나 방법을 잘 몰랐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한 셈이다. 화급히 해결하고 조속히 극복해야 할 문제가 발등에 떨어진 상황. 사람의 저력이나 진면목은 대체로 그가 위기에 처했을 때 드러난다. 김미경씨 부부는 낡은 지도를 버리고 새 지도에서 좌표를 찾았다. 부부는 이제 농사를 통해 갑갑한 터널을 벗어나기로 작심했다. 와송(瓦松) 재배에 돌입했던 것. 이는 썩 적절한 선택이었다. 시골생활에 비로소 탄력을 붙일 힘으로 작용했다.
“와송에 함유된 약성이 알려지면서 재배 바람이 막 불기 시작하던 즈음이었어요. 승산이 있다 봤지요. 농토를 빌려 비닐하우스를 조성하고 재배에 나섰어요. 제가 농부의 딸로 태어난 것도 아니고, 난감하게도 농사엔 완전 초심자였지만 금산군농업기술센터나 이웃 농가들을 찾아다니며 부지런히 기술을 배웠어요. 결과는 좋았습니다. 재배 첫해부터 쏠쏠한 수익을 올렸으니까.”
“농사는 작목 선정이 관건이라 하죠. 그러나 어떤 작물이 유망하다 싶으면 모두들 덤벼드는 통에 몇 해 안 가 과잉생산, 가격하락이라는 악조건에 봉착해요.”
“와송 농사도 예외는 아닙니다. 괜찮다 싶어 농장 규모를 1600평까지 늘렸으나 해가 갈수록 수익구조가 악화됐어요. 그걸 타개하기 위해 생초나 건초 판매보다 가공에 주력, 와송 발효액을 만들어 팔았어요. 농장 규모도 400평으로 줄이고 고품질 소량 생산으로 채산성을 도모했어요. 음, 아무튼 와송 농사를 계기로 생활상의 맥락을 잡아나갈 수 있었습니다. 일의 영역과 활동 반경을 넓혀나가기 시작했죠. 자신감이 붙고 재미있고 즐겁고, 비로소 저의 성향에 맞는, 본성에 부합하는 활달한 차원으로 삶이 전환되고 있다는 만족감을 느끼면서 말이죠.”
“얼어붙었던 강물이 훈풍에 다시 녹아 쾌활하게 흐르듯이? 일테면 그런 거예요?”
“일 속으로, 사람들 속으로, 세상 속으로 활기차게 뛰어들어 산다는 실감으로 즐겁습니다. 귀농인들과 연합해서 갖가지 활동을 펼치고, 프리마켓을 기획해 판매를 위한 공연 연출도 하고, 유쾌한 팜 파티도 즐기고, 이젠 할 일도 너무 많고,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어요. 남편이 하는 말은 이래요. 아니, 당신이 그토록 활동적인 여자였어? 거참, 물 만난 고기 같네!(웃음)”
우왕좌왕, 전전긍긍의 시간을 거쳐 이젠 안도할 만한 궤도에 올라섰다. 즐길 만한 삶의 방식을, 지속적으로 불 지필 희망을 가지고 산다는 건 일종의 경사! 그녀는 기껍다. 순순한 성정 그 반대 기슭에 깃들인 자신의 활달한 외향성을 밖으로 끄집어내 삶의 동력으로 삼게 됐다는 사실에. 그것으로 귀촌의 나날들에 긍정과 낙관을 부여할 수 있다는 사실에. 경제야 여전히 궁하지만.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아산시 광덕산 자락으로 귀촌한 이웅기(66)씨는 시골을 홍보한다. ‘도시에 사는 시니어여, 시골로 가시라!’ 삭막한 회색 건물 숲에서 탈출하라는 얘기. 시골 자연 속에서 인생 후반을 흡족하게 누리라는 전갈. 도시라고 매력이 없으랴. 건강한 삶이 도시에선들 불가하랴. 그렇지 아니한가? 하지만 이씨의 생각은 다르다. 도시보다 수준 높은 게 시골의 여건이란다.
이웅기씨는 죽 도시에서 살았다. 도시에서 남들보다 밀리거나 뒤진 게 없었다. 그는 천안시에 있는 선문대학 사회복지학과 교수였다. 누릴 거 대충 다 누렸을 게다. 응분의 실력으로 도회의 풍속을 기민하게 섭렵했을 게다. 그러나 미련 없이 시골행 열차를 탔다. 행선지를 바꾼 여행자처럼 인생행로를 변경했다.
“은퇴 이후에도 흔히들 은퇴하지 않은 것처럼 부대끼며 삽니다. 도시에선 마음의 여유를 갖고 살기 어렵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왜 굳이 답답하게 서울에 눌러 살까. 서울의 그 비싼 아파트를 팔아치우면 얼마든지 시골에 근사한 집을 지을 수 있을 것을. 집 짓고도 여윳돈이 남아도는 것을. 귀촌처럼 안전한 노후대책이 드물다는 생각이에요.”
시골에 구미가 당기면 과감하게 털고 내려오라는 얘기다. 자연을 애호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귀촌이 자연스럽다는 판단이다. 이웅기씨의 귀촌에 각별한 결단은 필요치 않았다. 시골살이는 오랜 꿈이었기에. 마음은 진즉 앞장서 산골에 가 있었기에. 아내(안경희씨·62) 역시 귀촌 지망생이었기에. 사직을 하고, 아파트를 팔고, 주변인들과 쾌히 작별인사를 하고, 일사천리로 일을 추진했다. 아하, 땅을 사는 과정엔 지체와 곡절이 있었더란다.
살터를 찾는 일은 시장에서 두부를 사는 일과 달라 신중을 기해야 하는 법. 기다렸다는 듯 맨발로 달려 나와 품에 안기는 땅이란 존재하지 않는 법. 한동안 전국을 누볐다. 그는 풍수에 일가견이 있다. 그의 눈은 매섭게 보고 깐깐하게 따지는 눈이다. 발품을 판 만큼 일쑤 눈에 드는 게 있었다. 그러나 계약 단계에서 땅을 거둬들이거나 값을 올려 포기해야 했다지. 인연은 뜻밖에도 천안 인근, 수려한 산촌에서 맺어졌다. 소풍 삼아 찾아간 산골 물가에서였다. 물가의 밝은 둔덕, 초승달 모양새의 땅덩이 1000평을, 그는 쾌재를 부르며 사들였다. 거기에 서둘러 집을 짓고 벽송재(碧松齋)라 당호를 붙였다. 푸른 솔숲에 에둘린 집이구나.
풍광을 보는 눈들은 엇비슷한 모양이다. 산수의 미모를 기차게 추구하는 이들이 이 골짝에 일찌감치 입장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 숫자가 많다. 삼삼한 터 여기저기에 멀끔한 전원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펜션도 많으니 휴가철엔 꽤나 버글거릴 게다. 덩달아 땅값도 뛰었다지. 산촌치고는 화려한(?) 현주소! 그래도 대자연이 압도해 시간조차 나른히 흐르는 것만 같다. 적막으로 채워진 공간은 고즈넉해 참신하다. 사방에서 일어서는 멧부리에선 우뚝한 맛이 난다. 골짜기는 깊숙한 멋을 풍긴다. 지겨운 세속의 난리블루스를 잊기에 족하다.
시골 살더라도 일은 놓지 말아야지
이씨의 집 곳곳엔 장항아리들이 즐비하다. 왜? 그는 된장을 담가 판다. 간장, 고추장, 청국장도 품목으로 삼았다. 산중에서 그저 노닐거나 빈둥거리기란 그의 적성에 맞질 않다. 일이 그의 본분사! 또는 일에서 낙을 찾고, 일로 만족을 구가하는 게 그의 본분사! 그는 날마다 고속도로처럼 분주한 눈치다. 된장 사업은 성업 중이고.
“시골에 살더라도 일을 가지는 게 좋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야 생동하니까.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며 세월을 흘려버릴 순 없는 일 아니겠어요? 70세까진 뭐든 직업 활동을 하자는 작심으로 일을 찾았어요. 된장 사업이 적격이라 본 건 아내의 손맛을 믿어서였죠. 이게 무모한 판단일 수 있었지만 귀촌 초기에 즉시 일에 뛰어들었고, 열심히 매달렸고, 덕분에 썩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비결이 뭐죠?”
“운도 따랐겠지만, 최상의 전통 장류를 생산하겠다는 초심을 견지했어요. 이 산골의 자연 환경, 즉 깨끗한 공기, 맑은 물, 풍부한 일조량도 장류 숙성에 호조건입니다. 순수한 천일염과 죽염을 재료로 장을 만든다는 점도 특장이에요. 방부제, 발효억제제, 조미료 등을 철저히 배제, 최상품 장류 생산에 주력했어요.”
“귀촌을 해 장을 담가 파는 사람들이 드물진 않죠. 시골에 살며 택할 수 있는 일거리 중에 비교적 유망한 업종일까요?”
“장 담그는 사람들의 80% 정도는 실패합니다. 세상의 일들이 대부분 그렇듯이 소수만 성취한다는 것. 부지가 넓어야 하고, 공장 지어야 하고, 항아리 가격 비싸고, 초기 투자부터 부담되는 분야이지요. 그러나 유망한 측면도 있어요. 가령, 초중고 급식 재료로 안전한 전통 장류를 채택하는 추세가 확산될 텐데요, 고품질 장류를 만드는 사람들에겐 두세 배의 매출 확대를 꾀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장류가 아니더라도, 여하튼, 시골에서 오히려 더 나은 일, 더 좋은 찬스를 찾을 수도 있다는 건 분명해요.”
귀촌한 지 어언 10년. 이웅기씨는 이제 노련한 시골생활자. 소일거리 삼아 시작한 된장 사업의 규모는 점진적으로 증가했다. 연간 매출은 2억 원. 내년부터는 아산시에 소재한 모든 중고교에 된장을 공급한다. 그렇게 되면 매출은 두세 배 는다. 그는 지자체가 운영하는 귀촌귀농인 대상의 각종 지원 사업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장류 관련 지원 사업 공모에 응모, 1억 원의 자금을 지원받은 바 있다. 그걸 밑천 삼아 사업을 전개했던 것.
소소하게 시작한 일이 사업화되면서부터 그는 엄청 바빠졌다. 도시에서 우리는 흔히 숨 막히게 바삐 돌아가는 일상에 탄식을 한다. 이씨는 그게 싫어서 귀촌을 했다. 그러나 시골에 와서도 다람쥐처럼 부산히 움직인다. 그러나 그는 기껍다. 삶에 자연이 붙어 있기 때문이겠지. 현실 도피처로 낭만적인 시골생활을 꿈꾸는 사람이 있지만, 어딜 가더라도, 시골에 살더라도, 삶의 끔찍한 증상은 따개비처럼 들러붙는다. 꾸역꾸역, 고독이나 권태가 밀려든다. 어쩌나? 이씨는 내 마음 안에, 내 몸 안에 자연을 담는 게 상책이라 본다. 그는 자연의학에 관한 한 전문가를 자처한다.
마음을 좋게 쓰는 게 좋은 삶
“귀촌 이후 저의 만족, 저의 행복의 대부분은 자연과 함께하는 데에서 비롯하고 있어요. 몸과 마음으로 자연이 들어오고, 그런 와중에서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것, 이게 행복이라 봐요. 그렇게 되면, 비로소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게 됩니다.”
“병이 나기 전까진 몸을 기계처럼 부리는 게 사람이죠. 아무거나 맛있는 음식이면 뱃속에 잔뜩 집어넣죠. 자연의학의 요체는 뭐죠?”
“몸이 원하는 걸 알아채는 거. 바로 그겁니다. 건강하지 않고선 행복이고 성공이고 다 소용없어요. 건강하긴 위해선 몸이 원하는 걸 섭취해야 해요. 일례로, 입에서 쉰내가 나면 신 음식을, 단내가 나면 단 음식을 먹어줘야 해요. 그 무엇보다 사람의 병은 마음에서 온다는 걸 알아야겠지요. 건강 문제는 결국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예요.”
“뭐든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모르는 바보는 없겠죠. 그러나 마음은 날뛰는 망둥이를 닮았어요.”
“예컨대, 아파트 위층에서 애들이 뛰는 소리에 분개해 살인까지 하는 경우가 있더군요. 마음을 잘 써 위층 애들이 내 손자라고 생각했다면 어땠을까? 노력을 해야죠. 마음을 좋은 쪽으로 쓰는 게 좋은 삶의 길이니까.”
“천사라 부를 수밖에 없는 젊은 사람이 중병에 걸려 사경에 처하기도 해요. 신기하게도 다 죽어가던 사람이 산골에서 풀을 주로 뜯어먹고 건강을 회복하기도 하죠.”
“의학적,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지만 현대의학이 못 고치는 병도 자연의학은 고칩니다. 자연식을 통해 기적적 회생을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공기 좋은 산골에서 오염되지 않은 산야초를 먹게 되면 건강이 좋아질 수밖에 없어요. 몸 아픈 사람들에겐 귀촌귀농이 큰 도움이 될 겁니다.”
놈들은 명물이다. 힘이 세다. 산야초 또는 잡초 말이다. 잡초는 그 강한 생명력으로 사람에게 이치를 가르친다. 뛰어난 약성으로 사람을 돕는다. 보잘것없는 잡초야말로 미래 식량의 대안이라 보는 관점도 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실은 보잘 것 많은 잡초. 잡초 밟기를 극구 삼가는 사람이 있다. 남의 얼굴을 구둣발로 밟고 지나는 건 결례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잡초를 극진히 대접하긴 사실 힘들다. 그러나 자연 안에서 모든 생명들은 동등하고 존엄하다는 인식은 갸륵하다. 귀촌 생활은 자연과 생태에 관한 인식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기회와의 조우이기도 하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관을 활짝 열 수 있다면 쓸쓸한 삶을 더 잘 견딜 수 있겠지.
아름다운 건 자연만이 아니다. 여자도 아름답다. 아내도 아름다운 존재다.
“대부분의 아내들은 귀촌이나 귀농을 싫어합니다. 불편이 많아서죠. 제 아내는 흔쾌히 동의했어요. 딱히 서로 정서가 비슷해서는 아니고, 묵묵히 남편을 따라준 거죠.”
“혹시 독재를 일삼는 남편? 마초?(웃음)”
“제가 여성 예찬론잡니다. 남자는 하염없이 나약한 동물이지만 여자는 강해요. 정글에서도 암컷들이 훨씬 강해요. 여자들에겐 별다른 단점이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남자보다 여러모로 나아요. 지구력, 지속력, 생명력 등등에서 더 우월하니까. 아내를 통해 그걸 실감해요. 수굿하고 진득한 이 사람은 평생 불만이라는 걸 내비치질 않았어요. 아, 팁 하나! 귀촌은 반드시 아내와 대동해야 합니다. 남편이 먼저 내려와 자리를 잡은 뒤 합류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간 필경엔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시골생활엔 여자가 할 몫이 너무도 많다는 걸 알아야 한다는 것! 특히나 원주민들과의 융화엔 안식구의 역할이 절대적이지요.”
인터뷰를 마치자마자 부부가 서둘러 된장 작업장으로 들어간다. 교수에서 장류업체 사장으로 변신한 이씨의 어깻죽지에 의기양양이 비친다. 상상력이란 창작의 영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귀촌에도 상상력이 필요하다. 상상력이 창의를 가져오고, 마침내 만족할 만한 일거리를 찾아내게 한다. 전에 해보지 않았던 일에의 도전은 어쩜 최상의 회춘 전략!
‘살어리 살어리랏다, 청산에 살어리랏다/ 멀위랑 다래랑 먹고 청산에 살어리랏다… ’ 요즘 ‘청산별곡’을 부르는 사람이 크게 늘었다.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꿈꾸는 사람이 많아진 것이다. 지난해 귀농·귀촌한 사람도 50만 명에 달한다. 자연과 농촌, 어촌, 산촌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높아진 관심이 TV 화면 속으로 옮겨졌다. 자연·자연인 열풍이 TV를 강타하고 있다.
최근 들어 자연과 농촌·어촌·산촌·오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일상을 담은 교양 프로그램과 예능 프로그램들이 급증하고 있다. 시청자의 반응도 높아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들은 진화를 거듭하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전면에 내세운 프로그램으로는 오지, 산골 등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사연과 일상, 자연에 대한 생각들을 들어보는 MBN의 , 전국 방방곡곡 산간 오지를 찾아 그곳의 생활을 경험하는 TV조선의 , 오지를 찾아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꾸미지 않은 삶과 생활을 보여주는 SBS의 등이 있다. 또한 도시생활에 지친 연예인들이 자연으로 떠나 그곳에서 만난 젊은 자연인(30~40대)과 함께 생활하며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O tvN의 , 강호동·김희선·정용화 등 도시에서 사는 연예인들이 섬에 일정 기간 머물면서 섬사람들의 생활과 일상을 경험하고 도시인이 생각하는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단상을 보여주는 올리브TV의 , 농촌이나 어촌에서 생활하며 먹거리를 직접 구해 식사를 해결하는 tvN의 등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예능 프로그램으로 재미를 주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자연과 자연인을 여행이나 체험 등 다양한 소재·형식과 결합해 만든 프로그램들도 양산되고 있다.
외국의 오지 사람들을 만나 용기, 지혜, 위로를 얻는 MBC의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이 제주에서 생활하는 이효리·이상순 부부 집에 일정 기간 민박을 하며 바다와 자연을 접해보는 JTBC의 , 김병만·이상민 등 연예인들이 어촌과 바다를 찾아 혹독한 미션을 수행하며 어촌 생활과 먹거리의 진정한 의미를 알아보는 SBS의 등도 자연·자연인의 모습과 의미를 엿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이밖에 귀농·귀촌인이 많기로 소문난 충남 홍성군 홍동면 사람들의 일상을 방송한 KBS의 (6월 25일 방송분) 등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도 최근 들어 자연인과 귀농·귀어·귀촌하는 사람들을 소재로 하는 경우가 크게 늘었다.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어촌·산촌의 사람들과 그들의 모습을 전달해주는 KBS의 은 근래 들어 코너도 다양해졌고 시청자의 관심도 높아졌다.
왜 이처럼 자연과 자연인, 귀농과 귀촌 등을 다룬 TV 프로그램들이 급증하는 것일까. 의 박상혁 PD는 “많은 사람, 특히 도시 주민이 일, 건강(힐링), 가치관의 변화 등 여러 가지 이유로 농촌·산·숲·바다·섬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대해 관심이 많이 늘었다. 이러한 사람들의 욕구와 관심이 자연과 자연인을 소재로 한 프로그램 증가 원인이 됐다”라고 분석했다. 치열한 경쟁이 일상화하고 돈과 물적 가치를 중요하게 여기는 도시의 삶에 염증을 느끼거나 아픔을 겪은 사람들이 진정한 행복을 꿈꾸며 자연 속의 삶을 동경하기 시작한 것도 자연과 자연인 관련 프로그램의 증가를 초래했다. 또 환경 변화와 의학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연장됐지만, 은퇴시기가 빨라져 인생 2막을 열어야 하는 장·노년과 산업화로 고향을 떠나 서울 등 도시에서 살던 사람들 중 여생을 농촌이나 어촌에서 일하면서 보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욕구가 자연·자연인 프로그램 제작으로 이어졌다.
일자리가 감소하고 높은 주거비와 생활비로 어려움을 겪는 도시에 비해, 새로운 일자리가 생겨나고 주거비와 생활비도 저렴해 생활환경이 크게 개선된 농어촌을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현상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부부가 결혼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은 따로 하는 졸혼 등 새로운 가족 형태가 등장하면서 그동안 가족 때문에 선택하지 못했던 자연인의 삶을 사는 사람도 증가했다. 이러한 사회적·문화적 현상을 프로그램에 수용하는 방송 제작진의 움직임이 자연과 자연인을 다루는 프로그램의 양산으로 연결된 것이다. 통계청이 발표한 ‘귀농어·귀촌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귀농·귀촌을 선택한 사람은 49만 6100명에 달했다. 도시에서 읍·면으로 이주한 사람 중 농·축산업에 종사하는 귀농인은 2만 600명, 읍·면으로 거주지를 옮겼지만 농업에 종사하지 않는 귀촌인은 47만 5500명이었다. 자연과 자연인을 다룬 프로그램은 대중, 특히 도시에 사는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함께 힐링과 위로의 시간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귀농과 귀촌을 하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는 등 긍정적 효과가 적지 않다. 서울에서 사업하는 박문수(57)씨는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을 보면서 도시의 피곤한 일상에서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받는다. 노년에 서울을 떠나 농촌으로 내려가 생활하고 싶은데 이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얻어 좋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자연과 자연인, 농어촌과 농어민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의 폐해도 적지 않다. 이들 내용이 농어촌, 농어민의 현실과 실상이 거세된 것들이 주류여서 시청자에게 자연과 자연인에 대한 왜곡된 환상을 심어주기도 하기 때문이다. 미디어 비평가 레이먼드 윌리엄스가 에서 미디어가 농촌 현실과 농민의 노동을 도외시한 채 농촌을 목가적 이상향으로 그리거나 촌스러운 곳으로 취급한다고 비판했듯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다룬 TV 프로그램의 상당수가 자연과 자연인의 삶을 이상적인 삶의 전형으로만 현시하는 데만 열을 올린다. TV 프로그램에서의 농어촌과 자연은 각박한 생활에 지친 도시인들의 휴식 공간이자 도시에서 실패한 사람들의 재기 무대인 경우가 허다하다. TV 속 농어촌에는 심화하고 있는 도시와 농어촌의 양극화 문제, 1년 365일 일해도 빚만 느는 현실, 악화하는 가족 해체의 문제는 존재하지 않는다.
늙음 뒤엔 결국 병과 죽음이 대기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이를 먹는다는 건 하나의 애환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살아갈 길은 있다는 뉴스는 비 오듯 쏟아진다. 비곗살처럼 둔하게 누적되는 나이테에 서린, 쓸모 있는 경험과 요령을 살려 잘 부릴 경우, 회춘과 안락을 구가할 수 있는 게 아니겠는가. 문제는 삶의 후반전, 그 인생 2막을 열어 내딛는 발걸음의 방향에 달려 있다.
이 풍진 세상의 사이즈는 간장종지 같은 게 아니고 바다처럼 크넓다. 타성과 습성에 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전혀 새로운 삶의 파노라마 속으로 족히 여행하거나 방랑할 수 있으며, 그럴 때라야 세월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부질없이 낭비하는 결례를 범하지 않을 수 있다. 대전에서 학원을 경영하며 분주하게 살았던 진연순(57)씨 부부는 귀촌으로 인생 2막의 첫발을 내딛었다. 충북 옥천군 군북면의 시골마을이다.
진씨네 집을 들어서며 받은 첫인상은 매우 준수하고 청결한 공간이라는 점이다. 너른 살림채와 푸르른 농장 그 어느 구석 한 곳에서도 먼지나 잡풀을 찾아보기 힘들다. 난장판에 가깝도록 사물들을 널브러뜨린 채 살아가는 나에게는 거의 충격적인 풍경이다. 비지땀을 흘려 밤낮없이 근로를 하고, 청소를 하고, 미화작업을 하고서야 직성이 풀리게 되어 있는 성향의 부부가 사는 집임을 단박에 알게 한다. 사실 이 부부는 바지런하기가 헤집어놓은 개미굴 속의 병정개미와도 같다. 근면과 성실로 지상에 태어난 자의 사명을 다하길 습관처럼 거듭해 도시에서의 학원사업을 번듯하게 꾸려왔다. 그러다가 6년 전에 다 정리하고 후다닥 시골에 입장했다. 시골의 무엇이 이 부부를 호명했을까? 진연순씨에게 묻자 돌아오는 답이 이렇다.
“남편이나 저나, 나이 들면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전부터 있었어요. 도시와는 달리 시골에선 스트레스나 피로를 덜 느끼고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였죠. 그래서 10여 년 전에 남편의 고향인 이곳에 농토를 구입해 주말농장으로 활용했어요. 서둘러 귀촌하는 대신 미리미리 준비를 했던 거예요. 저희 슬하엔 남매가 있는데요, 이 녀석들이 커 독립을 한 시점에서,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년 전에 비로소 이곳으로 완전한 이주를 했어요. 시골 정착이 비교적 순조로웠던 건 그렇게 나름의 준비기간이 있었기 때문이죠.”
“수강생이 수백 명에 달했다죠? 멀쩡하게 잘 운영되던 학원을 정리하기 아깝진 않았어요?”
“사실 결혼하면서부터 부부가 함께 공들여 키워온 입시학원이라 애착도 있었지만 나이 들어가면서 여러모로 힘에 부치더라고요. 제가 전공인 수학을 강의하며 운영했는데요, 아이들은 나이 든 아줌마 강사를 좋아하지 않았어요. 게다가 입시철이면 피를 말리는 긴장을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만성적인 스트레스와 두통으로 늘 시달렸죠. 귀촌을 하고 나서는 그런 게 거짓말처럼 싹 사라졌어요.”
“저는 말이죠, 수학여행은 좋아했지만 수학은 참 싫었어요(웃음). 인생을 과목에 비유한다면, 수학 선생님이었던 당신의 인생은 어떤 과목을 닮았다고 보시죠?”
“흠. 도덕? 제가 원래 어떤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도덕적인 성격이에요. 모범생이라고 할까? 덕분에 큰 굴곡 없이 순탄하게 살아왔어요. 자유분방이라는 걸 용납하기 힘들었고요. 그런데 시골에 와서는 제가 천연염색에 푹 빠져 삽니다. 염색이라는 게 공예의 한 분야이고, 이른바 ‘끼’라는 게 요구된다는 걸 자주 실감하는데요, 그러고 보면 저에게도 뭔가 숨은 끼가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긴 해요(웃음).”
“남편은 아로니아 농장을 운영하고, 아내는 천연염색을 하고, 매우 이상적인 배합으로 보여요. 처음부터 그러자는 발상을 했을까?”
“아녜요. 제가 일찍부터 천연염색에 취미가 있긴 했지만, 그게 직업이 될 거라곤 상상도 못했어요. 남편의 농사 역시 처음엔 깨끗한 먹거리를 길러 식구들 건강이나 챙기는 정도의 소소한 수준에 불과했죠. 그런데 일이 커졌습니다.”
천연염색은 색채의 향연을 즐기는 일
취미는 삶에 재미와 흥미를 보태준다. 권태롭거나 지겨운 일상에 생기를 부여한다. 지나친 탐닉으로 허영과 낭비의 골짜기로 빠질 수도 있는 게 취미생활이다. 진연순씨의 취미는 썩 근사한 방향으로 비약했다. 대전에 살 때부터 틈틈이 천연염색 공부를 해왔던 그녀는 시골에 살며 한결 더 진도를 냈다. 재미가 있어서였다. 그게 하나의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효과를 자아낼 줄은 자신조차 미처 몰랐다지. 취미로 사귀었던 천연염색이 어느덧 직업으로 진화한 거다. 미리 예상하지 못했던 이 기꺼운 변동! 이제 그녀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아 인생을 만족스러운 쪽으로 끌고 가는 행운아의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다.
“귀촌 초기에 저는 골방 하나를 놀이터 삼아 혼자 천연염색이나 즐기며 지냈어요. 당시엔 사실 시골생활이 외롭고 힘들었거든요. 그걸 견디게 해준 게 염색이었어요. 남편은 이 마을이 고향입니다. 낙향한 셈이죠. 마을의 많은 주민들이 남편의 친척이나 친지, 선후배들이에요. 그들을 만나 술도 마시고, 농사일도 거들고, 수많은 단체에도 가입하고. 아무튼 남편은 밖으로만 나돌았어요. 저는 외톨이처럼 그저 집에 틀어박혀 염색작업에 간신히 마음을 붙이고 지냈어요. 그러면서 서서히 실력이랄까, 솜씨랄까, 그런 게 늘었던 것 같아요. 자신감이 붙으면서 염색작업 내용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 블로그를 본 한 학교에서 학생들의 염색 체험학습 의뢰를 해왔습니다. 그게 직업화의 신호탄이었죠.”
“단기간에 널리 알려지고, 순조롭게 자리 잡힌 건가요? 천연염색을 직업으로 삼아 체험장을 운영하는 귀농인들이 가끔 있지만 시원치 않다고들 해요.”
“제가 운이 좋은 걸까요? 빠르게 자리가 잡혔어요. 많은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학교와 청소년 단체, 가족, 성인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수강을 해요. 시설도 점차적으로 늘렸어요. 실내외 교육장은 물론, 전래놀이 체험장, 잔디구장, 염료식물 재배장 같은 걸 구비했죠.”
“천연염색의 매력은 뭐죠?”
“순수하게 자연에서 얻어온 식물 재료들로 색채의 향연을 즐길 수 있다는 거죠. 자연물에서 갖가지 신비한 색들이 나온다는 게 마음을 사로잡아요. 나뭇잎에서는 그냥 연둣빛만 나올 것 같지만 노란색이나 빨간색도 나옵니다. 쪽풀에서는 가슴 시린 파란색이 나와요. 마치 마법처럼 신기해요. 매염제를 사용하면 더 다양한 색상을 만들어낼 수 있고요. 염색으로 수입까지 발생한다는 점도 매력!”
“금상첨화?”
“일거양득!(웃음)”
‘라온뜰 농촌문화체험농장’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진씨 부부의 거처에 말이다. 진씨가 천연염색으로 자신의 취향과 희망을 일구듯이, 남편 박용규(59)씨는 아로니아 농장에 심혈을 기울인다. 귀촌 즉시 사업이라는 걸 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단다. 이왕 시골에 살 거라면 유유자적까지는 아니라도 골치 아픈 속세의 일에서 해방돼 취미나 삼삼하게 즐기며 휘적휘적 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흥청흥청 주야로 신바람 나게 노니는 일에도 대찬 내공이 필요하거니와, 부부의 적성 자체가 ‘놀자’ 과(科)가 아니라서 무위(無爲)란 그들의 소관사항이 아니었으렷다.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하는 비결
부부는 도시에서처럼 자연스럽게 다시 일로 뛰어들었다. 아내는 천연염색을 또 하나의 배필처럼 감미롭게 맞이했고, 남편은 몸에도 좋고 벌이에도 유망하다는 아로니아 재배에 열애하듯 뜨겁게 뛰어들었다. 말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사람이라는 남편 백씨는, 근로를 숭상하고 농사를 애호하는 데에도 일가견이 있다고 하는데, 그는 전쟁을 연상시키는 농업 사업 특유의 경쟁에서 낙오될 위기를 겪기도 했으나 타고난 근면으로 안착에 이르렀다.
“남편의 농사엔 실패가 많았어요. 시행착오를 거듭했어요. 천마를 심었다가 실패했고, 왕벚나무를 심었다가 타산을 맞추기는커녕 포클레인으로 다 뽑아냈고요, 검정콩도 심어봤지만 본전도 건지지 못했어요. 이후 옥천군 농업기술센터의 지원을 받은 아로니아 재배로 비로소 수익을 올리기 시작했던 겁니다.”
“한때 블루베리의 채산성이 좋았지만 너도나도 덤벼드는 통에 과잉 생산이 돼 이젠 폐업하는 농가가 속출한다고 해요. 아로니아의 수익성은 아직 안정적일까?”
“아로니아도 이미 과잉 생산에다 수입산까지 마구 들어오면서 위기에 직면했어요. 살아남기 위해서는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해 단골 소비자를 확보해야만 해요. 남편이 생산하는 아로니아는 친환경 무농약 인증과 ‘GAP(우수농산물관리제도) 인증’을 받았어요. 덕분에 순항하고 있어요. 블로그와 홈페이지를 통해 전량을 직거래로 판매하고 있고요.”
“시골살이를 계획하는 사람들에게 농사를 권장할 생각은 있나요?”
“농사란 참 힘들어요. 아아, 너무 힘들었어요. 처음엔 풀인지 모종인지 구분조차 못해 다 뽑아냈어요. 지금은 남편이 농사를 전담하지만, 남편 역시 고생이 많아요. 초심자라면 시행착오를 각오해야 해요. 남들 말만 듣고 작물을 선택하는 건 필패의 비결이고요. 처음 몇 해의 부진을 감당하려면 자금력이 있어야 해요. 이건 매우 중요합니다. 염색의 경우에도 노동과 시간과 수고가 필요해요.”
“귀촌을 후회하진 않았어요? 도시도 매력적인 삶터인데 공연한 일탈을 했다는 의기소침이 없지 않았을 것 같다는….”
“후회할 정도로 바보스런 선택을 하진 않아야죠. 가장 힘든 건 마을 사람들과 어울리는 일이었어요. 남편은 빨리 적응했지만, 저는 너무도 더뎠어요. 혼자 집에 박혀 염색만 했으니까. 이웃들이 불편해하는 게 느껴지더라고요. 자칫 왕따 당할 상황이었죠. 그래서 태도를 바꿨어요. 마을 아줌마와 할머니들에게 염색을 가르쳐드렸고, 염색한 손수건을 선물했어요. 때론 식사 대접도 했고요. 이후 서로 흐뭇한 관계를 유지하게 됐어요.”
어린애는 볼수록 예쁜 짓을 하지만, 나이를 푸지게 먹어가면서는 미운 짓만 골라 하기 십상이다. 황혼의 광야에 서서, 마음 문고리를 안으로 닫아걸고 나 잘난 멋에만 안주하고서도 귀촌생활을 발랄하게 영위할 비결은 거의 없다. 자리이타(自利利他)라, 나도 좋고 너도 좋고! 아마도 그게 길이겠지.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 , 등의 저서가 있다.
박원식 소설가
구불구불 휘며 아슬아슬 이어지는 가파른 비탈길의 끝, 된통 후미진 고샅에 준수한 한옥 한 채가 있다. 집 뒤편으로 세상의 어미로 통하는 지리산 준령이 출렁거리고, 시야의 전면 저 아래로는 너른 들이 굼실거린다. 경남 하동군의 곡창인 악양면 평사리 들판이다. 광활한 들 너머에선 섬진강의 푸른 물살이 생선처럼 퍼덕거린다. 호방하고 수려한 산수 풍광을 한눈에 쓸어 담을 수 있는 요지(要地)에 터를 잡은 셈이렷다.
증권사 지점장 출신인 조동진씨(58)가 동갑내기 아내 고미선씨를 대동하고 이곳 지리산 자락으로 귀촌을 한 건 9년 전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지리산을 애호한다. 지리산의 너그러운 품에 병아리처럼 포근하게 안겨 오순도순 오붓하게 살아갈 꿈을 꾸기도 한다. 조동진씨가 그랬다. 서울에서, 분당에서, 증권맨으로 뛰었던 그는 휴가철이면 매번 지리산을 찾았다. 그렇게 지리산과 교제를 하는 사이 담뿍 정이 들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건 자연이건, 정 들어 사무치게 그리우면 투신하게 마련이다. 나, 퇴직하면 지리산에 살래! 그는 그렇게 안으로 다지고 밖으로는 광고를 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마침내 일을 저질렀다. 인생의 항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이 아니라 돛이다. 대양의 바람은 한 곳에서 불어오지만 돛의 향방에 따라 어떤 배는 동쪽으로 가고, 어떤 배는 서쪽으로 간다. 조동진은 의지의 돛, 지향의 눈을 돋워 지리산 산골을 겨누었던 것이다. 사연의 보따리를 헤쳐 볼까.
“악양의 산자락에 있는 감나무 과수원 3306㎡(1000평)를 미리 사들이는 것으로 거사를 도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이들은 대충 다 컸겠다, 아내만 끌고 내려가면 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아내가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집사람이 원래 도회적 성향이라서 시골살이에 아무런 매력을 느끼질 못했던 겁니다. 세뇌교육에 들어갔죠.(웃음) 그러던 중 아내가 원인 미상의 중한 폐질환에 걸렸습니다. 의사들이 말하길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 없는 병이라 하더군요. 그렇다면 이걸 어떡하나. 그래, 자연요법으로 고쳐보자. 이왕지사 땅도 사놨으니까 산골로 가자. 그렇게 아내와 합의를 보고 드디어 시골살이를 시작하게 되었던 겁니다.”
“지리산의 그 무엇이 그렇게도 좋았을까?”
“제가 실은 대학을 다닐 때부터 지리산에 살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었는데요, 그 웅장한 풍경에 사로잡혔던 것 같아요. 게다가 저는 바닷가에 가면 힘이 쭉 빠지는 반면, 산에 가면, 특히나 지리산에 가면 힘이 난다는 걸 자주 느꼈어요. 체질적으로 기질적으로 잘 맞는 거겠죠.”
“한옥이 매우 근사해요. 저토록 야무진 한옥을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겠죠?”
“아내의 폐질환을 다스리기엔 한옥이 유리하다는 생각이었어요. 황토와 목재를 재료로 한 한옥은 숨 쉬는 집이라 하죠. 그러나 남들에겐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건축비가 너무 많이 들고, 공기(工期)도 길고, 관리도 힘드니까.”
“저는 말이죠, 이왕에 산골의 자연과 야생을 벗 삼아 살 거라면 작고 소박한 집을 짓는 게 마땅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왜 아니랴. 동감입니다. 그저 값싸고 편리한 현대식 집을 짓는 게 좋을 겁니다. 다만, 사랑채 정도는 제법 운치를 풍기는 작은 흙집을 짓는 것도 재미날 거예요.”
조동진씨의 거처 한편엔 나무로 골격을 세우고 흙으로 벽을 쌓아 지은 사랑채가 있다. 누각이 딸려 있는 소담한 별채로 조씨가 손수 설계해 지었다. 여자로 치면 음전하면서도 은근히 요염한 멋을 풍기는 가인을 닮은 집이다. 부부가 수시로 눈을 맞추며 단란하게 속닥이는 데에 사랑채의 용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멀고 가까운 곳에서 찾아드는 벗들과 마주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일에도 쓸모가 많겠지만 말이다.
농사일은 노동이 아니라 축제
조씨의 섬세한 조력과 자연의 협찬 덕분일 테지. 다행스럽게도 아내의 병증은 현저하게 개선되었다. 난생 처음 경험하는 시골 생활이지만 마을 주민들과의 관계에도 아무런 흠결이 없다고 한다. 감 농사도 순항이다. 한적한 산골에 입장했으니 그저 한가하게 노닥거리며 자연을 즐기면 그만일 성 싶지만, 조동진씨는 농사일이 오히려 구미에 맞다. 애초에 사들인 땅이 감 과수원이었기에 자연스럽게 감 농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
“노후의 직업으로 농사처럼 이상적인 게 없습니다. 정년퇴직 없지, 누가 간섭하지를 않지, 적당한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챙길 수 있지, 정직하게 땀 흘리는 농사일은 단순히 노동이 아닌 축제에 가까워요.”
“세상에서 가장 못 믿을 직업이 농사라고들 해요. 벌이가 되질 않는다는 거죠.”
“저도 경제적인 면에 관한 두려움이 많았지만 적절히 극복해 왔어요. 2314㎡(700평) 규모의 감 농사를 지어 곶감이나 감식초를 만들어 판매를 하는데 연간 1200만원에서 1500만원 정도의 수익을 올립니다. 그 정도면 무난해요. 시골에선 말이죠, 골프 할 일 없지, 노래방에 가서 도우미를 부를 일 없지, 수입이 적더라도 지출을 줄일 수 있어 생각보다는 여유를 부릴 여지가 많습니다.”
흔히 귀촌과 귀농을 구분해서 선택을 하거나 판단을 한다. 조동진씨는 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성공한 귀농인 사례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농사에 목을 걸다시피 들입다 땅을 파는 인물은 아니다. 농사에 생활의 한 자락을 걸침으로써 한결 뿌듯한 실속과 실리를 구할 수 있다는 이치를 터득했을 뿐이다. 그의 시골살이 촉이 이렇게 살아 있다.
“제 경우는 귀농을 가장한 귀촌인이라 봐야 정확할 겁니다. 그저 작은 텃밭을 일궈 소소한 먹거리를 거두는 귀촌 생활도 즐겁겠지만, 농사를 통해 수익을 창출하는 것도 신나는 일입니다. 남자는 퇴직을 했더라도 명함이 있어야 해요. 992㎡(300평) 이상의 농사를 지을 경우엔 누구나 명함을 만들 수 있어요. 일테면 ‘지리산 농원 대표이사’라거나, 그런 식으로 떠억 명함을 새길 수 있는 거예요(웃음). 992㎡(300평) 정도의 농사만 지으면 농업인 등록을 할 수가 있으며, 온갖 지원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걸 왜 마다할까? 가급적 농업인 자격을 획득하라고 권장하고 싶습니다. 한 달에 하루만 일해도 폼 잡을 수 있는 게 농사에요. 시골에선 말이죠, 하는 일 없이 늘 술이나 마시고 돌아다니면 욕먹습니다. 그러나 농업인으로서 일을 할 경우엔 술을 퍼마셔도 욕먹을 일이 없어져요.”
“사전에 열심히 귀농교육을 받고 입촌한 사람들마저 실패하는 경우가 많은 게 현실 아녜요?”
“도시 인구를 분산하고, 실업을 해소하고, 도농격차 해결을 위해 정부에서 농촌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이려는 갖가지 지원 정책을 펼치지만, 사실 허점이 아주 많습니다. 귀농교육이랍시고 억대 수입이니, 특작물이나 유기농을 운운하며 과도하게 분위기를 띄우지만 사실 허황한 얘기들에 불과해요. 가령, 농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유기농에 도전하는 건 독립운동을 하는 것처럼이나 어렵고 위험합니다. 제가 힌트를 하나 드리죠. 특수작물이나 유기농을 요란하게 하려 하지 말고, 그 지역의 특산물을 하라는 것! 그래야 생산이나 유통의 이점을 누릴 수 있으며, 원주민들과의 소통도 빨라져요.”
“빈손으로 귀촌할 경우엔 어떤 재주를 발휘해야 하죠?”
“도시에서는 움직이면 돈이 나가지만 시골에선 움직일수록 돈이 들어옵니다. 극단적으로 말해 양육할 자녀가 없이 부부만 귀농할 경우, 빈손으로 시작해도 무방해요. 퇴직을 한 시니어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의 건강만 있다면, 자세를 낮출 수 있다면, 늘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 일당 10만원짜리 일감을 찾는 건 일도 아니니까. 한 달에 열흘만 날품을 팔아도 그럭저럭 먹고살 수 있는 겁니다. 문제는 겸손한 마음, 열린 태도이겠죠. 퇴직을 뜻하는 리타이어(retire)는 ‘타이어를 교체한다’는 의미 아니겠어요? 은퇴 뒤 시골에서 살고자 한다면 마음 자체를 싹 바꿔야 합니다. 돈보다는 마음의 행복과 즐거움을 구하는 쪽으로 삶의 잣대가 변해야 하는 거죠.”
시골에서 오히려 진정한 문화생활 누려
사람들은 흔히 시골의 문화적 환경이 열악할 것으로 믿는다. 갖가지 공연과 전시회 따위가 펼쳐지는 도시를 벗어나 시골에 살다 보면, 그저 주야간에 앞산만 멍하니 바라보다가 자칫 우울증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한다. 조동진씨에 따르면 이는 미신에 가깝다.
“서울에서 공연 구경을 가는 건 어쩌다 한번 아닐까? 공연물이 많다지만 막상 향유하긴 어려운 게 도시살이에요. 요즘의 시골엔 지역축제나 산사음악회 같은 문화 행사가 잦습니다. 아이돌 가수에 밀린 7080 가수들까지 대거 참여해요. 저는 이곳 공연장에서 소찬휘라거나 김재동 같은 연예인들을 처음 봤어요. 게다가 관람료는 전적으로 무료에요. 뒤풀이엔 술과 음식이 푸짐하게 나오고요.”
“풍부한 상상력으로 바라본다면 산야 자체가 뮤지엄이겠죠.”
“제가 도시에 살며 열네 번이나 이사를 했어요. 이사 때마다 고려한 게 창밖으로 달을 볼 수 있느냐는 점이었어요. 여기 산골의 달밤은 얼마나 좋은지요. 사랑채 정자에 앉아 달빛 흥건한 마당을 바라보며 술 한 잔을 하는 일은 최상의 낙입니다. 달 없는 밤엔 별들이 허공에 모이죠. 때로 반딧불이가 공연을 하고, 빗소리가 악곡을 연주하고, 사시사철 모든 풍경이 장관입니다. 뒷산의 야생화들이 뿜는 향기의 잔치는 또 얼마나 행복한지요. 이 다양한 자연 현상들이 명약이자 보약입니다. 시골엔 의료시설이 빈약하다는 소리들이 있지만, 제 아내가 병을 다스린 걸 보면, 저 산야 자체가 하나의 병원이라는 실감을 할 수밖에 없어요.”
“앗! 시골 예찬이 극에 달하셨다(웃음). 도대체 아무런 불만이 없는 거예요?”
“제가 외환위기 때 쫄딱 망해 시장에서 전을 벌리고 옷을 팔기도 했어요. 박수를 치며, 싸요, 싸요! 외치면서요. 그런 고통의 시절을 겪은 게 인생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는 걸 나름 깨달았어요. 그러하니, 제가 원해서 들어온 산골에서 무슨 불만이 있겠어요? 이제 제가 해야 할 일 하나가 남았는데요, 귀촌을 희망하는 은퇴자들에게 뭔가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해서, 최근 지리산웰빙귀농학교라는 걸 세웠어요. 대차게 밀어붙일 참입니다(웃음).”
10년 가까이 흐른 시골 생활을 통해 조씨는 어언 선수에 이르렀나? 귀촌에 관한 낙관과 긍정에 경계가 없구나.
>>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등의 저서가 있다.
고 장준하 선생의 서거 39주기 추모 세미나가 열린다.
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는 고 장준하 선생의 서거 39주기를 맞아 그가 평소 꿈꿔온 대한민국 농업개발과 국토균형 개발의 뜻을 알아보고 오늘날의 귀농과 연계시키는 자리를 마련했다.
18일 오후 7시부터 10시까지 강원도 고성군에 위치한 GRA 강원귀농아카데미에서 열리는 이번 행사는 장준하 선생의 농업관과 귀농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 가능하다.
이날 세미나에서는 이해학 주민교회 목사의 ‘장준하 선생의 겨레혼과 농업혼’ 강의를 시작으로 ‘감옥에서 만난 장준하 선생’(귀농사모 대표 정성근), ‘북한 농업 및 통일 귀농’(이용우) 등을 주제로 한 강연이 펼쳐진다.
세미나 이후에는 귀농사모 초보 회원들을 위한 ‘강원귀농창업 성공을 위한 특별 강연’도 이어진다. 아울러 귀농인 간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자리도 마련돼 귀농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될 것으로 보인다.
농촌에서 태어난 한국의 중·장년층들은 시골생활의 삶에 대한 짙은 향수를 가지고 있다. 최근 수도권에 은퇴자들을 위한 전원마을이 많이 만들어지고, 도시인들의 귀농(歸農)과 귀촌(歸村)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 것은 그런 현상을 반영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귀농과 귀촌을 비슷한 것으로 취급하지만, 내용 면에서 귀농과 귀촌은 상당히 다르다.
귀농은 도시민들이 도시생활을 그만두고 농사를 지으러 농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정부는 공식으로 도시에서 거주하다가 농촌의 읍·면으로 이사한 사람 중에서 각종 농업이나 축산업에 관련된 명부에 등록된 사람을 귀농인으로 정의하고 있다.
반면 귀촌은 그냥 시골로 돌아가 생활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다시 말해 귀촌은 시골로 돌아와서 농사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은퇴생활을 하면서 노는지 알 수 없는 개념이다. 가장 흔히 사용하는 전원생활이라는 말은 농촌으로 돌아가는 귀촌과 달리 꼭 농촌이 아니라 도시 주변에서도 전원을 가꾸면서 사는 생활을 말한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은퇴 후에 도시를 떠나 사는 생활은 크게 귀농과 전원생활 2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 빠르게 늘어나는 귀농·귀촌 인구
농림축산식품부의 조사에 따르면, 2013년 귀농 가구는 1만 923가구(1만 8825명)로 3년 연속으로 1만가구 이상이 귀농한 것으로 나타났다. 수년 전만 해도 귀농 가구는 연간 5000∼7000가구 수준에 머물렀으나, 2011년부터 연간 1만가구를 웃돌 정도로 큰 붐을 이루고 있다. 2013년 귀농 인구들이 많이 이주했던 곳을 살펴보면 경북이 2087가구로 가장 많았고, 전남과 경남, 전북, 충남도 1000가구를 넘어섰다.
또 귀농하는 가구주들의 나이는 평균 53.1세로 나타나 결국 40대와 50대가 귀농 인구의 주력 부대인 것으로 확인되었다. 특히 최근 들어 베이비붐 세대의 귀농이 활발한 것으로 조사되었는데, 과거에 농사를 지은 경험이 있든 없든 간에 노후생활 장소로 농촌을 선택하는 베이비붐 세대의 트렌드는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귀농은 앞에서 농사라는 비즈니스를 함께 하는 전원생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일거리를 겸해서 농사를 짓는 가구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어 귀농 인구의 작물재배 면적을 보면 0.5ha(1513평) 미만 경작이 전체의 72%를 차지하고 있다. 귀농 인구 10명 가운데 7명이 대략 1000∼1500평 정도의 땅을 경작하고 있다는 얘기다.
한편 농사를 짓지 않고 농촌에서 생활만 하는 귀촌 가구도 귀농 가구 못지않게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2013년의 경우 귀촌한 가구수는 2만 1501가구(2만 7665명)에 달해 처음으로 연간 3만명을 넘어섰다. 귀촌 인구가 많이 몰려 간 지역은 경기도가 8499가구(40%)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충북, 강원, 전북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수도권에 인접한 지방자치 단체와 전원생활 여건이 좋은 지역으로 귀촌 가구가 몰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귀촌 가구주는 40~50대가 대부분이다. 50대가 가장 많이 차지해서 전체의 28.5%를 차지하며, 다음으로는 40대가 22.1%, 30대 이하가 17.7%를 차지한다고 한다. 귀농가구에 비해 귀촌가구의 연령대가 다소 젊다. 베이비붐 세대들이 직장에서 퇴직하고, 농사 경험이 있든 없든 노후생활을 위해 농촌으로 회귀하는 현상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농촌의 생활비는 도시지역에 비해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노후 자금이 부족한 서민과 중산층에게 새로운 은퇴 모델이 될 수 있다. 이들이 간단한 농업기술을 배워 실패 확률이 낮은 농작물들을 재배함으로써 소일거리도 찾고 생활비도 일부 조달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귀농·귀촌은 젊은이들의 이탈로 인구가 급감하고 있는 우리 농촌을 되살리는 데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현상으로 풀이되고 있다.
귀농·귀촌은 ‘사회적 이민social immigration’이라고 할 만큼 개인적인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큰 사건이다. 거주지를 옮기는 단순한 이사가 아니라, 생활양식과 일터, 환경면에서 큰 변화를 동반하는 중요한 결정이라는 뜻이다. 성공적인 귀농과 귀촌을 위해서는 당연히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농사를 겸하는 귀농을 할 때에는 사전 교육을 충실히 받는 등 세심한 준비를 해야 한다.
만약 영농기술과 영농기반 없이 무작정 귀농하거나 귀농 후 마을 주민과 원만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최근 한 언론은 귀농에서 성공할 확률은 20∼30%밖에 되지 않는다고 분석하면서, 가능하면 40대 이전에 귀농하는 것이 실패 확률을 줄이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만큼 귀농이 어렵고 힘든 결정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귀농을 추진할 때에는 농사를 통해 자신이 얻을 수 있는 소득규모와 자녀교육에 대한 고려도 해야 한다. 시골생활은 도시생활과 교육여건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귀농 후에 농사를 지어 얻는 소득이 생각했던 것보다 적다면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특히 무엇보다 올바른 목표 설정이 중요하다. 내가 생각하는 귀농의 목표는 무엇인가? 농업에 정말로 관심이 있나? 이런 질문에 정확하게 답을 해야 농촌생활의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다.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생활하는 것은 ‘꿈’이 아니라 ‘현실’이다. 철저한 준비가 없으면 성공하기가 힘들다. 노후소득의 대부분을 농사로 조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최근 귀농자가 늘어남에 따라 정부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만들어 귀농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진행하는 귀농·귀촌 교육은 무료로 또는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하다. 수도권에 사는 사람들은 서울시농업기술센터(agro.seoul.go.kr), 경기도농업기술원(www.nongup.gyeonggi.kr), 경기농림진흥재단(www.ggaf.or.kr), 각 지자체 산하 농업기술센터에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여러 민간·공공기관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온·오프라인 귀농·귀촌 교육 과정은 그 선택의 폭이 넓다. 특히 농림축산식품부가 공모를 통해 지원하는 민간 오프라인 교육과정은 내용이 충실하다. 이 과정은 교육비의 70∼80% 를 국고에서 지원받는다는 점이 장점이다. 교육 참여가 아닌, 정보를 알고 싶은 사람들은 농어업인력포털(www.agriedu.net), 농진청 농촌인적자원개발센터(hrd.rda.go.kr), 농식품교육문화정보원(edu.okdab.com), 귀농·귀촌종합센터(www.returnfarm.com) 등을 이용하면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이투데이PNC가 운영하는 시니어 전문 미니어 '브라보 마이 라이프' (www.bravo-mylife.co.kr)는 회원수 16만명인 귀농사모와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기로 했습니다.
우선 오는 7월 18일부터 8월 17일까지 강원도 고성군 삼포2리 해변에서 열리는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 행사를 공식 후원하기로 했습니다.
또 장기적으로 귀농사모 회원들의 유기농산물 직거래사업도 공동으로 진행할 예정입니다.
◇ 행사 개요
1. 개최일시 : 2014년 07월 18일(토) ∼ 08월 17(일)
2. 장 소 : 삼포2리해변
3. 주 최 : 귀농사모/한국귀농인협회/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조직위원회
4. 후 원 : 강원도/고성군/속초경실연/양양귀농지원센터/고성군번영회/삼포2리해변어촌계/설악헬스케어귀농귀어타운/영농법인한백/국립한경대학교 평생교육원/강원관광대학/강원귀농인협회
5. 주 제 :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삼포2리해변 오토캠핑 귀농귀촌창업학교
6. 강 사 : 첨부서류 참조
7. 참가 예상 인원 : 연 6만명
◇ 행사 소개
제14차 귀농사모 여름로하스캠프 및 2014 삼포2리해변 귀농귀어캠프운영 계획
1. 목 적
◦ 귀농사모회원 16만명에게 귀농귀어체험 기회 제공.
◦ 강원출신 출향인인 지역 공동체로서의 연착륙 할 수 있게 일체감과 자긍심을 고취.
◦ 강원도와 고성의 문화를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귀농 귀어 창업체험학습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귀농인구 유치 및 지역경제 활성화.
2. 방 침
◦ 전국 및 도내 예비 귀농 귀촌 귀어인 및 도민을 대상으로 16만 회원의 Daum우수카페 귀농사모 홈페이지에서 신청을 받아 선정.
◦ 30일간의 가족이 동행하는 귀농 귀촌 귀어 체험 워크숍활동 중심 프로그램 운영.
◦ 건강하고 화목한 귀농과 지역민과 융화하는 행복한 귀농 만들기 프로그램 운영.
3. 세부 운영계획
◦ 일시 : 2014. 7. 19.(토) ∼ 8. 17.(일) 30일간.
◦ 장소 : 삼포2리해변
◦ 대상 : 귀농사모 회원 및 전국민
◦ 인원 : 30일간 연 6만명
◦ 숙식 : 오토캠핑 및 삼포2리해변 주변 팬션/민박/식당
◦ 프로그램 : 속초고성양양지역귀농체험워크숍/수산물 이용 치유식품개발 워크숍/힐링쿠킹쉐프전문과정/어린이귀농학교/애견해수욕리조트/소상공인해수욕장/여성귀농인워크숍/싱글귀농인워크숍/귀농귀촌아이디어클럽워크숍/귀농복덕방워크숍/지붕개량워크숍/DIY CCTV/귀농인의3D프린터워크숍/경원대학교총동문회워크숍/한경대학교귀농귀촌특화과정동문회워크숍/귀농귀촌인무료오토캠핑장/황토건축워크숍/목조주택워크숍/조입식주택워크숍/농막워크숍/원두막워크숍/원목구워크숍/용접워크숍/비닐하우스워크숍/칡소사육자워크숍/MBC예비귀농인워크숍/한국일보귀농동호회워크숍/KBS귀농동호회워크숍/한국노총귀농동호회워크숍/국방부귀농동호회워크숍/농협중앙회귀농동호회워크숍
◦ 숙박은 자부담 입장료 및 사용료는 유료
4. 운영 일정표
운영 일정표는 참가농가들 일정 조율 중으로 6월 30일 확정.
*프로그램은 기상변화 또는 일정에 따라 다소 변경될 수 있음
5. 준비사항
가. 행사장확보(삼포2리해변 일대)
나. 행사 사무국: 강원귀농귀촌학교내
사무총장 : 조재근(박사)
고문 : 최진규(약초전문가)
자문 : 정성근(한경대학교 교수)
다. 착안사항
• 안전중심의 안락 한 캠프
• 귀농사모+고성군민+전국민+지역경제 상생 프로그램
• 이 문건과 관련 문의사항은 010-7345-3344(정성근교수)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요즘 들어 인생2막을 시골에서 마무리하려는 귀농·귀촌인구가 급증하고 있다. ‘준비된 귀농’이 아니면 실패할 확률도 그만큼 높은 게 현실이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장기화로 인해 경기가 좋지 않으면 귀농인구가 늘어난다. 더불어 인터넷 귀농카페의 회원들도 급증한다. 다음 우수카페 귀농사모(cafe.daum.net/refarm)의 경우 최근 몇 년 사이에 회원수가 급증하여 16만명에 육박하고 있다. 요즘의 큰 특징은 50-60대의 귀농·귀촌이 늘고 있다. 최근 은퇴하는 베이비부머들의 영향이다.
필자가 귀농할 1997년 당시엔 귀농정보가 없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에서 ‘귀농’이란 단어로 검색하면 아예 검색어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귀농정보가 넘쳐난다. 아니 너무 많다. 그러다보니 검증 안 된 잘못된 정보도 많다. 당시의 ‘도피’성 또는 ‘낭만적’인 귀농형태가 지금은 ‘준비된’ 귀농으로 바뀌었다. 그동안 정부의 정책적 지원도 있었다. 귀농 교육도 다양화되어 가고 있어 무작정 귀농 하는 것보다는 차근차근 귀농교육을 받아 귀농현장을 체험한 후 귀농하는 추세이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귀농하는 이유는 연령대에 따라 다소 다르다. 3040세대는 대체로 아이들 건강과 교육을 위해서이거나 농사를 위해서이고, 5060세대는 여생을 농촌에서 자연과 함께 여유 있게 보내기 위해서이다. 즉 농촌에서 먹고 살아야 하는 생계형 귀농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자연환경이 주는 생태적인 ‘무형의 가치’를 추구하는 귀농도 최근 늘어나고 있다.
1020세대는 관심은 있으나 실행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농어촌이 차세대사업의 유망한 블루오션으로 판단한다면 깊게 고민하여 귀농하는 걸 권하고 싶다. 그들이 자연환경을 중시하는 차세대사회에서는 주류가 될 가능성이 많다.
‘패스트’라이프에서 ‘슬로우’라이프가 가능한 시대. 조금 여유 있는 삶 그게 매력인 것이다. 또한 ‘도시형 창업’은 포화 상태지만 ‘시골창업’은 아직도 미개척지이다. 요즘 TV방송의 예능프로그램이 거의 농촌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향후 농어촌이 젊은층의 창업대상이 되길 기대한다.
은퇴 후 전원생활을 위한 귀농은 단순한 전원생활보다는 농촌창업으로 봐도 좋을 듯하다. 도시에서 김밥집을 해도 교육받고 하듯이 귀농창업계획서를 작성하여 충분한 사전준비를 통해 귀농현장에 연착륙할 수 있는 나만의 귀농전략을 수립해야 한다.
영농기반이 없는 사람은 민관학계에서 하는 귀농관련 교육을 이수하여 도시의 경력과 연관 있는 분야의 창업을 추천한다. 귀농사모와 같은 온라인 카페에서 귀농창업선배들의 현장에서 경험을 쌓아 멘토로 삼고 귀농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농사지어서 돈 벌겠다’, ‘무작정 시골가면 먹고 살 수 있겠지’, ‘에라 모르겠다. 시골에나 가자’ 등의 무작정 대안 없는 귀농은 위험하다. 시골경제도도 도시경제만큼 어렵다. 시골창업시장이 블루오션이긴 하지만 3년간 철저한 준비 없이 귀농하면 3년 후 다시 도시로 갈 가능성이 많다.
심사숙고한 끝에 귀농을 결정했다면 가장 먼저 할 일은 귀농선배들의 경험담을 듣고 보고 경험한 후 가족동의를 구한다. 그런 후 ‘내가 왜 귀농하는가?’ 그리고 ‘난 귀농 안 하면 후회할 것 같다’고 생각되면 그때 귀농해야 한다. 그런 의지가 없으면 농어촌에서 난관에 봉착했을 때 극복하기가 어렵다.
귀농준비 시 농업·축산·어업·식품가공 등에 대한 사전지식을 충분히 익히는 시간이 필요하다.
다양한 농림수산 축산 식품 산업 분야를 체험해 보고 ‘머리보다는 손으로 경험해야’ 한다. 귀농 귀촌 장소 선정이나 토지구입, 주택 마련 방법과 관련해선 동호회를 통한 검증된 멘토를 통해 공개적으로 구입하는 게 좋다. 가끔 잘못된 멘토가 있긴 하지만 그런 건 동호회 내에서 걸러진다.
자신의 상황에 맞게 귀농자본을 설정해야 한다. 귀농의 이유와 목적 그리고 자신의 처지에 따라 무리하지 않는 게 좋다.
철저한 준비 속에 귀농을 했더라도 실제 농촌생활에서 닥치게 되는 변수가 많다.
제일 큰 변수는 날씨. 농사는 하늘과의 동업이라고 한다. 천재지변 때문에 의외의 어려움을 많이들 겪는다. 이웃과의 소통도 문제가 된다. 이건 순전히 귀농인들 잘못이다. 그래서 시골교육을 받고 가야 한다. 귀농운전자금도 신경 써야 한다. ‘귀농 전 자금’보다 ‘귀농 후 운전자금’을 준비해 둬야 한다.
귀농인 에게는 기존 농산물 유통망보다는 소비자 직거래가 대세이다 보니 인터넷을 통한 판매가 유리하다. 인터넷동호회를 통한 소비자와 소통 그리고 그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 별도 사이트 구축보다는 큰 연간 비용이 안 드는 온라인 카페에서 판로를 개척하는 게 유리하다.
도심형 창업은 100명이 창업하면 3명이 성공한다고 한다. 그러나 귀농사모 카페 회원들을 보면 60%는 성공한다. 이런 창업시장이 있을까? 그러나 귀농을 ‘창업’이라고 보지 않는데 문제가 있다. 도시형 창업만큼 만 준비하여 귀농하면 성공한다.
인생 2막을 농촌에서 보내는 건 나 자신을 위해서나 후손을 위한 우리들의 의무가 아닐까? 주저 마시고 귀농해 보시라! 당신의 마음 속 고향으로.
귀농사모 대표 정성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