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감독원 출신이라는 프로필만 봤을 때는 차가운 이미지를 연상했다. 그러나 안용섭(安龍燮·58) 전 금감원 부국장의 인상은 소탈하고 구수했다. 감독기관 특유의 딱딱한 몸가짐이 배어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선입견도 바로 사라졌다. 안 전 부국장은 퇴직 후 금융교육 전문강사로 제2의 꿈을 이뤄가는 중이다. 그의 털털한 모습과 말투가 무척 자유로워 보였다.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으 찬자리에.”
시내 한복판의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강의 노하우에 대해 설명하던 그가 난데없이 춘향가의 ‘쑥대머리’를 한 곡조 뽑았다.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시작할 때 자주 쓰는 방법 중 하나라고 했다. 이렇게 약간의 흥을 돋우고 나면 금융교육을 낯설게 생각하던 어르신들도 강의 내용에 대한 집중력이 좋아진다고 설명을 이어갔다. 노랫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눈길을 돌렸지만 안 전 부국장은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갔다.
금융강사로 인생 2막, ‘꿈’ 위해 철저한 사전준비
1982년 한국은행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한 그는 은행감독원을 거쳐 지난해 6월까지 금감원에서 일했다. 우리 사회에서 소위 ‘잘나가는’ 직장이다. 하지만 퇴직은 어느 직장이나 공평하게 찾아온다. 더욱이 금감원은 공직자윤리법상 재취업이 제한된다. 안 전 부국장은 나이가 50대에 접어들자 두려워졌다고 했다. 은퇴 후 무슨 일을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은 그때부터였다.
진지하게 개인의 진로를 고민하고 택해본 적이 없었다. 음악을 좋아했지만 법대에 진학하고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생각지 못한 사고로 시험을 포기하고 한국은행에 입사할 때도 진로에 대한 고민보다는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앞섰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은퇴를 앞둔 50대가 돼서야 처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꿈’을 생각해 본 셈이다.
업무 노하우를 살리면서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했다. 말하는 것을 좋아하니 강의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목표가 정해지자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단순히 내가 어디 출신이니 하는 것만 가지고 비슷한 바닥을 두드리는 차원은 아니었다. 한국은행과 금감원에서 근무했던 ‘프리미엄’이야 있겠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최대한 노력하고 준비했다”고 말했다.
먼저 실제 소비자 입장에서 어려움을 느끼는 부분을 파악하고 싶어 민원업무에 지원했다. 충청도와 강원도에서의 민원업무를 통해 가야 할 길에 대한 확신이 섰다. 퇴직 전 18개월가량은 본부의 금융교육국에서 3개 팀을 두루 돌며 행정업무를 익혔다. 금융교육이 이뤄지는 과정을 익히기 위한 것이었다. 교육 관련 서적을 독파했다. 그가 은퇴준비에 들인 기간만 총 4년가량이다.
강의는 쉽게… ‘금융은 어렵다’는 선입견 깨기
서민, 초·중·고등학생, 다문화가정, 교도소 재소자 등 금융교육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다양하다. 하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금융교육 프로그램은 다양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금융 자체를 어렵게 생각했다. 안 전 부국장은 금융교육에도 여러 수요자에 맞춘 ‘커스터마이징(Customizing)’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민 끝에 나름의 강의 노하우를 만들었다. 그의 유연한 사고방식은 장점이 됐다. 그는 “예술을 좋아하는 집안 내력 덕을 본 것 같다”고 말했다.
그의 금융 강의는 금융과 관계없어 보이는 것들로 시작한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면 연예인 동영상과 함께 “여러분, 연예인 중에 최고의 부자 1, 2, 3위가 누구일까요?”라는 질문을 던진다. 학생들의 눈이 초롱초롱해지면 연예인들의 금융관리 이야기로 넘어간다. 이렇게 하면 다짜고짜 어려운 용어나 숫자를 들이미는 것보다 훨씬 전달력이 높아진다. 소재는 매번 달라진다. 음악도 이용한다. 상황에 맞는 예화를 풍부하게 제시하기 위해 그가 들고 다니는 여러 개의 USB 메모리는 강의에 사용할 동영상,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무엇보다 딱딱한 금융용어는 최대한 쓰지 않으려 노력한다. 소비, 지출, 대출, 상환 등의 한자어는 벌기, 쓰기, 빌리기, 갚기와 같은 우리말로 순화했다. 중요한 개념들에는 음을 붙여 노래로 만들어 쉽게 익힐 수 있도록 만들었다. 안 전 부국장은 “책으로 배우고 시험문제를 풀 수 있는 금융교육이 아닌 ‘생활에 녹아드는 교육’을 지향한다”고 말했다.
그의 노력은 곳곳에서 좋은 평가를 얻고 있는 중이다. 한 민간금융사에서 처음 시작했던 강의가 입소문을 탔다. 한국YWCA연합회, 금융투자협회, 청소년금융교육협의회 등에서 강의 요청이 잇달았다. 최근에는 금감원으로부터 국내 첫 금융교육 강사 인증을 받았고, 국회에서 마련된 금융 관련 포럼에 전문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활동범위도 넓혀가는 중이다.
“금융교육 저변 넓히는 전도사 되고 싶어”
그는 금융이 지식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 학생들의 금융 관련 지식은 통계적으로 높게 나오지만 실제 집에 돌아가서 가계의 대차대조, 손익계산이나 비목별로 관리하는 식으로 연결되는 비율은 낮다고 생각된다”며 “금융교육이라는 것은 행동화, 태도화, 습관화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고민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강의를 시작한 뒤로 꿈의 범위를 넓혀가는 중이다. 사회적으로 금융교육이 확산될 수 있도록 말단의 역할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갖고 있다. 그는 “미국, 영국, 일본 등 세계 금융 강국은 금융교육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인다”며 “우리나라도 금융이 필수과목이 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며, 금융교육의 저변을 확대하는 전도사 역할을 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금융교육이란 흔히 말하는 ‘재테크’와는 다른 ‘공교육’의 개념이다. 국민 전반적으로 금융원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지면 국가경제 전체적으로도 순기능이 많아질 수 있다는 얘기다. “고층건물을 지으려면 기반이 튼튼해야 하듯이 경제에 금융을 고도화하는 작업도 기초가 튼튼해야 가능합니다. 전반적으로 기초적인 이해가 높아졌을 때 응용할 수 있는 조합도 생산적이고 창의적으로 나올 수 있는 거죠.” 꿈을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Q & A
꿈을 이루지 못했던 이유?
어린 시절 꿈은 사법고시를 패스하는 것이었다. 절에 들어가서 고시공부하다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큰 고비를 겪었고, 그래서 예기치 않게 공부를 그만두게 됐다. 더 먼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음악을 해 보고 싶기도 했다. 음악을 좋아하는 집안 내력이 있다.
꿈에 다시 도전하게 된 계기?
다시 사법고시를 보려는 것은 아니니 서로 다르다. 지금의 생활을 계획하게 된 것은 은퇴를 준비하면서였다. 그리고 현재 하고 있는 강사생활을 하면서 꿈을 좀 더 구체화하거나 넓히게 됐다.
어릴 적 꿈 vs 중년의 꿈?
어린 시절 법률가가 되려던 꿈은 법률가로서 각별한 포부가 있다기보다 자연스럽게 갖게 된 것이었다. 출세의 기회가 한정된 그 시절에는 다 그러지 않았나. 나이를 먹은 뒤에는 자신의 커리어를 고려해 좀 더 실현 가능한 꿈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꿈을 이루기까지 어려웠던 점?
충분히 고민해서 방향을 선택했고, 충분히 준비를 거쳤다. 그래서인지 아직까지 큰 어려움은 없다. 다만 나이를 먹어갈수록 체력관리가 필요하다는 점은 절감한다. 어려움이라면 앞으로의 건강 아닐까.
당신의 꿈은 무슨 색?
꿈에 색깔을 붙인다면 푸른색을 붙이고 싶다. 푸른색을 활동적이고 에너지가 넘치는 색이다. 꿈이란 동기를 부여하고 활기를 갖게 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꿈을 이루고 난 뒤 좋은 점?
놀지 않고 머리를 계속 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은퇴 후에도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지낼 수 있다는 것이 좋다
어느 민족에게나 영웅은 있다. 다만 양상은 제각각이다. 국민성이나 이해관계에 따라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영웅들을 규정하고 파악한다. 때로는 어떤 민족에게 영웅인 인물이 다른 민족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이 어떤 영웅을 어떻게 떠받드는지 살펴보면 국민성의 일단을 검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글 김유준 프리랜서 dongbackproject@gmail.com
우리에게 영웅은 어떤 의미인가? 이웃 나라 일본이나 중국의 그것과는 어떻게 다를까? 21세기 들어 요즘처럼 한중일의 관계가 긴박하고 날카롭기는 처음이다. 더불어 세 나라의 진정한 모습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아지고 있다. 그들의 영웅들을 우리와 비교해보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흥미로운 작업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되 현실적이지 않은 중국 영웅들
먼 옛날부터 중국의 영웅들에게는 도교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의 영웅 관우가 번성 전투에서 패하고 참수된 이래 관성제군(關聖帝君)으로 신격화된 것은 대표적인 예. 정사(正史)인 진수(陳壽)의 삼국지에는 “강이자긍(剛而自矜)의 단점으로 패망했으니 이수(理數)의 상례”라 기록된 장수가 민담과 설화 차원에서는 신선의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관우의 사당이 무묘(武廟)라고 불리는 것도 같은 맥락. 공자의 사당을 문묘(文廟)라 일컬으며 문을 대표하는 인물로 떠받들듯 중국 사람들은 관우를 자국의 무를 대표하는 인물로 숭앙한다. 여타 영웅들에게서도 도교(또는 도교적 세계관을 기반으로 한 토착신앙)의 영향은 거의 빠짐없이 드러난다. 의 모사 장량이 신선에게 태공망의 병법서를 전수받는 과정이 그렇고, 에서 제갈량이 남동풍을 불러오거나 자신의 수명을 늘릴 때의 묘사 역시 그렇다. 그 바탕에는, 인간이 신선의 경지에 올라 삼라만상을 다스릴 수 있다는 믿음이 깔려 있다. 에서 손오공이 요괴들을 물리치며 천축국으로 향하는 여정에도 도불습합(道佛習合)의 정신세계가 고스란히 반영돼 있다. 를 비롯한 민담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중국 문학의 커다란 줄기인 무협소설에도 이런 경향은 짙게 나타난다. 세계적 거장 이안 감독이 영화화한 왕두루의 소설 에서 주인공 리무바이는 최고수의 경지에 이른 뒤 죽음을 맞이하고 또 다른 주인공인 용은 거친 물길에 스스로 몸을 던져 생을 마감한다. 소설에서 그들의 죽음은 또 하나의 경지에 이르는 단계로 묘사된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에서 두 사람의 죽음을 이렇게 해석한다.
“리무바이는 강호를 떠나려는 순간 최고의 무공에 도달한다. 최고의 무공은 다스리지 않고 조화하며 삼라만상의 기운과 조응하는 자기 내면의 기를 끌어낼 때 완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깨달은 리무바이도 용의 질주하는 욕망, 젊음의 활기를 은근히 부러워한다. 그것도 세상이치다. 어느 쪽도 결핍이다. 진정한 자유는 그 결핍을 인정하는 것. 영화 마지막에는 그 결핍을 초월하는 용의 해결방식이 나온다.”
서극 감독의 이나 정소동 감독의 은 더하다. 이들 영화에서 주인공들은 빠짐없이 장풍을 쏘고 하늘을 날아다닌다. 2000년에 리메이크된 ‘촉산전’에서 아미파의 본산인 아미산(촉산)은 숫제 구름 속에 둥둥 떠 있다. 이수민의 으로 대표되는 이런 무협소설 속에서 중국의 무술 고수들은 죽기도 전에 이미 비현실적 경지에 이르러 있다.
이런 경향이 단지 고대 영웅들에게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덩샤오핑에 의해 ‘문화대혁명은 내란’이라 규정되었음에도 모든 중국 인민폐(人民幣: 런민비)에 초상이 그려진 마오쩌둥은 중국인들이 영웅을 신격화하는 가장 가까운 예라 할 수 있다.
중국의 영웅들은 그리 현실적이지 않다. 그들은 인간세상을 번민의 각축장으로 해석하고 끊임없이 도탄을 초월하려 애쓴다. 그 시도가 성공적이든 아니든, 중국인들은 그들 영웅이 마침내 인간의 한계를 넘어섰다고 믿으려 한다. 머나먼 고대에서부터 그런 영웅들이 활개쳐온 세상이기에 그들은 그들의 제국이 다름 아닌 세계의 중심, 중국(中國)이라 여긴다.
지극히 현실적인 일본의 영웅들
중국과 달리, 일본 영웅들의 머리 위에 신의 면류관이 얹히게 될 가능성은 극히 낮다. 천황이라는 존재 때문이다. 아마테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 天照大神) 이후 신격화의 자격은 오직 왕족에게만 부여된다.
물론 수백, 수천의 잡다한 신들이 신사(神社)에 모셔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을 본격적 믿음이라 부르기 힘든 것은, 일본 토속신앙인 신도(神道)를 본격적 종교로 인정하기 힘든 까닭과 궤를 같이한다. 지방의 신사에 모셔진 신격화의 대상들은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면 영향력이 국소적이고 제한적이다. 정순분이 쓴 의 한 구절을 살펴보자.
“일본 신화는 천상신(天上神: 天津神)과 지상신(地上神: 地津神) 간의 투쟁이 중심축을 이루는 점이 특징으로, 지상신은 천상신에게 지배당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일본의 첫 통일 정권인 야마토 조정의 지배층인 황족이나 귀족이 믿었던 신이 천상신이 되고, 평정된 지역의 사람들이 믿었던 신이 지상신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당시의 정치적 패권을 잡은 야마토 조정의 신화가 문자로 서술되어 남고, 그 밖의 토속적·자연적 신화는 점차 사라져버리게 되었던 것이다.”
토속적 신화가 절멸된 결과, 일본 사람들을 사로잡는 영웅들은 새롭게 구성돼 현실과 맞닿아 있게 됐다. 일본의 대표적 설화인 모모타로(桃太郞)가 현대에 이르러 묘사되는 방식은, 일본 사회가 어떻게 영웅을 소비하는지 알 수 있는 바로미터다.
모모타로는 복숭아에서 태어났다는 전설 속 영웅이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귀신들을 쫓아냈다고 전해진다. 교활하게도 일본의 군국주의는 이 모모타로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을 고무시키는 방법으로 이용했다. 영국과 미국을 귀축(鬼畜)으로 규정하고 군인들에게 ‘모모타로가 되어 귀신들을 물리치자’고 부추긴 것이다( 같은 충신들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목적으로 사용됐다).
종전 이후 모모타로는 방송에서 탐관오리를 벌하는 영웅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드라마에서 모모타로는 40분쯤 악당들의 악행을 지켜보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이 되면 일본 장구 소리를 배경으로 귀신 가면을 쓰고 “복숭아에서 태어난 모모타로” 하고 나타난다. 그러고는 단칼에 악당들을 베어버리고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귀신을 물리치는 비현실적 영웅이 정의의 사도라는 현실적 영웅으로 재탄생한 셈이다.
모모타로에게서도 발견되는 ‘떠돌이 정서’ 역시 일본 영웅을 특징짓는 중요한 축.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가 두 자루 검으로 고수들과의 대결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일본을 평정한 이래, 전국 방방곡곡을 떠돌며 무용담을 펼치는 사무라이의 이야기는 일본 대중예술의 단골소재가 됐다. 드라마와 영화로 수없이 만들어졌을 만큼 히트한 제니가타 헤이지(?形平次) 시리즈(이름에서 알 수 있듯 주인공은 동전 던지기가 특기이며 오라로 포박하는 데도 능하다), 영화와 드라마로도 히트한 만화 ‘아기를 동반한 무사’, 주인공이 막부의 특명을 받고 전국을 떠돌며 사건을 해결하는 ‘다비가라스의 사건수첩’(미소라 히바리의 남편으로 유명한 고바야시 아키라가 주연했다) 등은 대표적 예라 할 만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르게 나타났다가 귀신같은 솜씨로 사건을 해결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일본 영웅들의 전형적 여정이 ‘헐크’나 ‘도망자’ 같은 미국 드라마 시리즈에서도 발견되는 현상은 꽤 흥미롭다. 일본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이 모모타로 또는 미야모토 무사시라면 미국 떠돌이 영웅들의 출발점은 ‘OK 목장의 결투’의 와이어트 어프라 할 만한데, 양쪽 모두 허무한 정서 또는 요즘 유행하는 말로 ‘쿨한’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다.
일본 영웅들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서민들 속에 파묻혀 있어 영웅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붙이기가 민망할 정도다. 툭하면 아무데나 ‘신(神)’을 갖다 붙이는 일본 사람들의 속성은 이처럼 현실과 맞닿아 있는 영웅들의 실상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의 영웅은 영웅이되 영웅이 아니며, 일본의 신은 신이되 신이 아니다.
우리들의 독특한 영웅들
우리 영웅들의 모습은 중국이나 일본의 그것과 사뭇 다르다.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일본과 비슷하지만 알고 보면 숫제 정반대라고 할 수도 있다. 영웅들을 신처럼 떠받드는 경향이 전혀 없지는 않지만 중국인들의 떠들썩한 양상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다.
우리의 영웅들은 일본과 중국 사이 어딘가가 아니라 완전히 동떨어진 어딘가에 위치해 있다. 먼저 (역사 속 위인들을 제외하면) 우리 영웅들은 정체가 불분명하다.
임꺽정을 예로 들어보자. 조선 중기 때 양주의 백정 출신인 그가 일당들과 함께 구월산을 중심으로 신출귀몰하며 3년 가깝게 관군들을 농락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史實). 그러나 그가 관곡을 털어 백성들에 나눠준 의적인지, 살육을 일삼은 포악한 도적인지는 확실치 않다. 확실한 것은 곤궁한 시대가 그를 도둑 또는 영웅으로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록을 들여다보자.
“나라에 선정이 없으면 교화가 밝지 못하다. 재상이 멋대로 욕심을 채우고 수령이 백성을 학대해 살을 깎고 뼈를 발리면 고혈이 다 말라버린다. 수족을 둘 데가 없어도 하소연할 곳이 없다. 기한(饑寒)이 절박해도 아침저녁거리가 없어 잠시라도 목숨을 잇고자 해서 도둑이 되었다. 그들이 도둑이 된 것은 왕정의 잘못이지 그들의 죄가 아니다.”
장길산도 다르지 않다. 황석영의 소설에서 이갑송을 비롯한 장길산 무리들은 절대적 의리로 똘똘 뭉쳐 유토피아를 건설하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로도 그랬는지는 알 길 없다. 조선 숙종 때 광대 출신인 장길산이 뛰어난 기지와 탁월한 용맹으로 도적들의 수괴가 됐고, 이후 황해도와 평안도, 함경도 일대를 주름잡았으며, 나아가 역적모의까지 감행했다는 것만 사실로 확인될 뿐이다.
정체가 모호한 의적을 논하다 보면 흥미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조선 후기 때 실학자 이익은 에서 임꺽정, 장길산과 더불어 홍길동까지 포함시켜 ‘조선 3대 도둑’이라 칭했는데, 여기에서 질문 한 가지. 홍길동은 실존 인물일까, 아닐까.
홍길동은 실존 인물이다. ‘연산군 시절에 관군에 붙잡혔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기록은 부실하지만, 서자 신분으로 무리를 이끌고 관가를 습격했다는 등의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허균이 쓴 의 주인공은 이 인물을 바탕으로 그려진 게 틀림없다.
소설 속에서 홍길동은 의적 활동에 그치지 않고 조정으로부터 병조판서 제의까지 받으며 나중에는 아예 도술로써 괴물까지 퇴치한다. 그리고 활빈당 무리들을 이끌고 율도국(栗島國)으로 건너가 그곳 왕을 굴복시키고 이상향을 일군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이라는 점이 아이로니컬하게 느껴질 만큼 도교의 영향이 짙은 것이다. 은 민초들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사회상을 비판하려는 의도에서 쓰였지만, 주인공의 모습은 실제로 민초들이 떠받든 영웅들의 면모와 거리가 좀 있었다.
그에 비하면, 조선시대 최대의 혁명이라 할 만한 동학농민혁명의 주체들은 실체(?)가 분명하다. 녹두장군 전봉준을 비롯한 수많은 실존 인물들은 민초의 주장을 대변한 진정한 영웅들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역사적 영웅으로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암살’에 등장하는 김원봉 같은 독립투사들 역시 마찬가지. 우리 영웅들은 누구 못지않게 영웅적이었지만, 우리는 오랜 기간 그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와 대한제국에 이어 일제 강점기와 독재라는 슬픈 역사를 거치며 한때 낭만적 목적만으로는 영웅을 이야기하지 못했다. 어떤 인물을 묘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대적, 정치적, 경제적 해석이 뒤따라야 했고 그 해석을 심의하는 주위의 눈길은 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때문에 대중매체가 건드릴 수 있는 영웅의 세계는 한계가 뚜렷했다. 시간을 몹시 거슬러 올라가 건국 신화를 건드리거나 고작해야 암행어사 같은 비현실적 영웅들을 부각시킬 뿐이었다. 그 결과, 우리는 한동안 영웅 없는 시대에 살아야 했다.
충무공의 무용담을 재조명한 ‘명량해전’에 이어 올해는 이라는 영웅들의 이야기가 성공적으로 소개됐다. 그와 같은 문화 현상이 각별히 기쁜 이유는 달리 없다. 영웅 없던 나라에 바야흐로 영웅들의 시대가 찾아온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김유준
1966년생. 20여 년 동안 영화전문지 , , 남성교양지 등에서 기자로 일했다. (도서출판 현재) 등을 번역했다. 현재 자유기고가로 활동 중.
후덥지근한 여름이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오싹한 공포영화. 고급 장비와 기술을 통해 한 차원 더 무서워진 공포물을 즐길 수 있는 요즘이지만, 가끔은 고전 공포영화의 침침한 화면 속 삐거덕거리는 움직임이 더 무서울 때가 있다. 지금 보아도, 다시 보아도 여전히 섬뜩한 추억의 공포영화들을 다시 만나 보자.
글 이지혜 기자 jyelee@etoday.co.kr
1967년·권철휘 감독·강미애, 박노식, 도금봉, 정애란, 황해 출연
한국인이 가장 많이 기억하고, 또 오랜 시간 사랑받아온 공포영화를 꼽자면 가 압도적이다. 애인과 오빠의 옥바라지 때문에 기생이 됐다가 억울하게 죽어 귀신이 된 월향의 이야기인데, 이는 사연 있는 귀신 유형의 시초가 됐다. 당시에는 변사의 내레이션이 함께 나와 공포와 신파의 분위기가 함께 어우러지기도 했다.
1980년·감범구 감독·유광옥, 강명, 홍윤정, 김왕규 출연
는 스페인 좀비 영화 를 모사한 작품이다. 당시 포스터에는 ‘죽은 지 3일이 지난 용돌이가 되살아났다.’는 문구가 있는데, 바로 이 용돌이가 묘지 관리인을 먹고 있는 모습에서 한국식 좀비 캐릭터가 등장한다. 역시 좀비 영화답게 팔을 벌리고 느린 걸음을 걷는 시체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위협한다.
1980년·박윤교 감독·지미옥, 박암, 정세혁, 전숙, 김기종 출연
한국 공포영화계의 거장 박윤교 감독의 영화에는 ‘한(恨)’의 정서가 담겨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는 , , 등 ‘한’ 시리즈에 이어 그만의 집념이 가장 잘 드러나는 영화 을 내놓았다. 이듬해에는 선우은숙 주연의 가 개봉됐다.
1986년·이혁수 감독·김기종, 석인수, 이계인, 김윤희, 홍윤정 출연
30년이 지나고 보아도 섬뜩한 장면이 있다. 바로 에서 피눈물을 흘리는 시어머니 얼굴이다. 하얗게 까뒤집힌 눈동자와 눈과 입 주변을 타고 흐르는 선명한 핏줄기, 드라큘라를 연상하게 하는 표정까지. 사실 이 작품이 더 주목받는 이유는 특수효과의 사용에 있다. 물론 지금에 비하면 투박하고 어색하지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다.
1960년·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앤서니 퍼킨스, 베라 마일즈 출연
드라큘라, 좀비, 유령 등 현실에 없는 존재로부터 느끼는 공포가 아닌, 사람에게서 느낄 수 있는 섬뜩함과 심리적 불안감을 그려낸 영화다. 서스펜스의 제왕 알프레드 히치콕은 를 통해 현대인의 욕망, 죄의식을 자극해 공포와 두려움이라는 심리로 전환했다. 샤워커튼 뒤로 다가온 살인마가 여주인공을 난도질하는 장면은 여전히 명장면으로 남아 있다.
1973년·윌리엄 프리드킨 감독·막스 폰 시도우, 엘렌 버스틴, 린다 블레어 출연
4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장 무서운 영화로 손꼽히는 영화다. 악령이 들린 소녀 리건이 점점 험악하게 변해가는 과정을 그려냈는데 당시의 분장은 지금 보아도 경악할 정도다. 특히, 몸을 뒤집은 채 계단을 내려오는 리건의 모습은 압권이다. 여기에 단순한 선율이 반복되는 메인 테마곡과, 긴장감을 주는 효과음까지 탁월하게 어우러져 작품의 완성도를 더한다.
1984년·웨스 크레이븐 감독·존 색슨, 로니 블랙클리 출연
“하나 둘, 프레디가 온다. 셋 넷, 문을 잠가라. 다섯 여섯, 십자가를 쥐어라. 일곱 여덟, 늦게까지 깨어 있어라. 아홉 열, 절대로 다시 잠들지 마라!” 일명 프레디 송으로 불리며 프레디의 등장을 경고하는 노래다. 프레디는 꿈에 나타나 갈고리 장갑으로 사람들을 괴롭히고 조종하는 초자연적인 존재로 살인마보다 강한 생명력을 과시한다.
1988년·톰 홀랜드 감독·캐서린 힉스, 크리스 서랜던 출연
은 아이들의 친구인 인형을 통해 가장 끔찍한 공포를 선사한다. 영화 속 인형 처키는 어른들 앞에서는 착하고 귀여운 인형이다가도 아이들 앞에서는 사악하고 잔인한 행동들을 벌인다. 처키는 공포 영화의 주인공이지만 인형이라는 친근함 덕분인지 현대에도 각종 패러디나 캐릭터 상품으로도 자주 활용되고 있다.
여자는 등 뒤에서 두 손을 나의 양 어깨에 얹었다. 뭉친 어깨를 풀어주는 안마 포즈. 어깨를 몇 번 주무르더니… 어럽쇼, 흐느끼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게 우는 소리인 줄 몰랐다. 어떤 여자가 안마를 하려다 말고 흐느끼겠는가. 그것도 처음 만난 여자가 등 뒤에서 말이다. 기분이 좀 ‘야시꾸리’해지는 사이에 흐느낌은 굵은 눈물방울이 되어 (뒤늦게 동석했던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긴데) 그녀는 눈물범벅이 되었다고 한다. 나는 (언제나처럼) 이미 꽐라(술에 만취한 상태를 이르는 말) 상태였으므로 사태를 파악할 힘이 없었지만 기분은 한껏 ‘야시꾸리’해졌다.
글·사진 윤동혁 PD
인사동 골목 중에서도 가장 으슥한 곳에 자리 잡은 한정식 술집에서 그 여자는 우리 방에 들어왔다. 마담 언니의 친구라고 했다. 그녀의 안마로 지병을 고친 사람도 있다고 마담이 말했다. 혈관에 피를 잘 통하게 해주고 있노라면 안마 받고 있는 사람의 전 생애가 보인다고 했다.
지금도 길 가다가 빨간 깃발, 흰 깃발이 기다란 대나무에 매달려 있는 걸 보면 똥개나 참새처럼 조급해지는 내가 아닌가. 아니 나의 추억이 엑스레이에 비친 내장처럼 훤히 보인다는데, 그냥 고맙고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어깨를 맡겼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서럽게, 격렬하게 울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불쌍한 인간이 다 있느냐. 어떻게 이런 슬픔의 덩어리들을 가슴 가득 품고 살아가느냐.” 그녀는 대충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불쌍하다고? 슬픔의 덩어리? 다른 사람의 엑스레이하고 바뀌었나. 혹시 슬픈 일들이 많았는데 워낙 인생의 깊이에 관해서는 멍청한지라 슬렁슬렁 흘리며 살아왔던 것일까.
나는 애써서 나의 지난날들 중에 정말 슬픈 요소들이 있었는지 치약 짜듯 과거를 저 밑에서부터 짜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고 보니 그 여자가 울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슴 아린 일들이 줄줄이 엮이는 것이었다.
목포 유달산 기슭에서 나는 정자, 난자의 도킹에 성공했으나 엄마 뱃속에 들어 있는 상태로 주거지가 이동되었다. 절반은 목포에서, 나머지 절반은 제주에서 기다리다가 세상에 나왔다. 이른바 나의 사주에 낙인으로 찍혀 있는 ‘천고역마(天孤驛馬)’의 시작이다. 형을 형이라,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그 누구처럼 나는 제주도를 나의 고향이라고 말하지 못 한다. 다섯 살 때 제주도를 떠났다. 아무것도 모르고 (산 게 아니라) 살아졌지만 나의 몸에는 제주 4·3사건의 피비린내와 언제 징집될지 모르는 아버지의 불안, 그리고 고부(시어머니-며느리) 전쟁의 파편들이 무수히 박혀 버린 모양이다.
단지 다섯 해를 살고 태어난 곳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대양이나 다름없는 두 바다를 건넜다. 제주에서 부산까지 하루 종일 흔들리고 가서 하루인가 이틀 쉬고 또 배를 탔다. 포항까지 가서 바다가 잔잔하기를 기다려 세 번째 배를 타고 총 닷새 만에 도착한 곳이 울릉도.
그때도, 그 후로도 한참 동안 울릉도엔 ‘바퀴’가 없었다. 자동차는 물론이고 리어카나 자전거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징어는 많았다. 그러나 모두 팔 물건이어서 감시가 심했다. 집집마다 오징어를 쌓아둔 채 군대 천막 같은 것으로 덮어놓고 육지에서 값이 오르기를 기다렸다. 학교 앞 구멍가게에는 커다란 유리병 속에 ‘눈깔사탕’이 가득 들어 있었지만 우리들이 먹을 수 있는 간식은 오직 오징어, 그중에서도 다리밖에 없었다. 스무 마리를 한 축으로 정확히 묶어놓았기 때문에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는 한 한 마리를 통째로 훔친다는 것은 거의 자살행위였다.
다리를 한 개씩 뽑아 먹었는데 영민한 부모들은 산만큼 쌓아놓은 오징어 다발들 속에서 단 한 개의 다리가 사라진 오징어를 귀신처럼 찾아냈다. 그 아이는 그날 죽는 날이었다. “육지에 나가서 제값 못 받는다”고, “이 오징어 잘 팔려야 느이 형 포항으로 학교 보낼 수 있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거나 매를 맞거나 했다.
그런데 오징어 다리는 우리 몸에 흔적을 남겼다. 그러면 부모들은 오징어 다발을 낱낱이 조사하지 않고도 ‘흠, 이 녀석이 또 훔쳐 먹었구나’ 하고 금방 알아차렸다. 바로 부스럼인데 오징어만 먹으면 팔뚝에 둥근 원이 몇 개씩 그려지는 부스럼병을 우리 모두 갖고 있었다. 울릉도에 살면서 오징어를 다리 말고 몸통까지 먹는 게 우리들의 꿈이었다.
우산국민학교에 들어가 2학년에 올라갔을 때, 무선전신국에서 근무하던 아버지는 강릉으로 발령 받았다. 두 번째로 포항 땅을 밟았는데 이때부터 컬처 쇼크(문화충격)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많은 ‘바퀴’들을 만났고 바퀴 수만큼 나는 어지러웠다. 게다가 합승이라고 쓴 차를 ‘합승’이라고 읽어야 할지 ‘승합’이라고 읽어야 할지 난감했다. 그러나 ‘바퀴’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강릉국민학교 2학년 몇 반에 전입한 나는 첫날부터 스스로 맴을 돌아야 하는 바퀴가 되어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이 그때 이미 있었다. 전쟁고아들이 반마다 몇 명씩 있었고 그들은 나로 인하여 색다른 기쁨을 얻었다.
“야, 너 일어나서 책 읽어!”
쉬는 시간에 그들은 나에게 책을 읽으라고 했다. 잘 아시다시피 제주도에서나 울릉도에서나 일어나서 책을 읽을 때는 표준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표준어로 읽으면 나를 괴롭혔다. 머리를 쥐어박고 발로 정강이를 걷어찼다.
“울릉도 말로 읽으란 말이다. 갱상도 말로.”
나는 맞는 것이 무섭고 싫었지만 그 보다는 억울했다. 그러나 억울함은 가슴 깊은 곳으로 쑤셔 넣고서 이 불합리하고도 불편한 상황을 어떻게 타개하면 좋을까 궁리했다.
당시 강릉은 전 지역에서 사람들이 공을 찬다고 할 만큼 축구 붐이었다. 어린아이들도 골목에서 공을 찼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쉬는 시간, 점심시간 할 것 없이 열정적으로 축구를 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들도 점심을 굶어가면서 (고아원에서 도시락을 안 싸주니까) 공놀이를 했는데 밥도 굶는 녀석들이 변변한 축구공을 가졌을 리 만무했다.
아버지 주머니에서 돈을 꽤 훔쳤다. ‘정식’ 축구공을 사서 영웅들에게 주었다. 그날 그리고 며칠간은 내가 감히 센터포워드를 맡아서 영웅들과 함께 그라운드를 누볐다. 단 며칠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런 행복을 위해서라면 또 돈을 훔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부 전쟁은 이제 파편이 튀는 단계를 지나 집이 불타는 수준에 이르렀다.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낀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고서 매일 술을 마시고 통금 사이렌과 함께 집에 들어오셨다. 그러던 와중에 아버지를 사랑한다는 여자(나는 그 여자가 우리 엄마보다 더 좋았다)까지 나타나자 어머니는 짐을 싸서 친정 식구들이 많이 사는 전라남도 송정리로 이사해 버렸고, 그 짐 보따리 속에는 나도 끼어 있었다.
바다가 보이지 않는 첫 번째 땅 송정리. 그곳에서 나는 토끼를 키웠다. 열심히 전라도 말을 익혀서 금방 네이티브 발음이 되었기 때문에 매를 맞거나 하지는 않았다. 토끼는 새끼를 자주, 많이 나아서 금방 시장에 내다팔았다. 그 돈으로 필통이며 연필을 샀다. 여름엔 토끼풀을 뜯다가 괜스레 지나가는 뱀을 낫으로 찍어 죽이고, 보리가 한창 영글 땐 보리밭 속을 파고들어가 보리피리도 불었다. 가장 좋았던, 평화로웠던 그 세월은 단 1년 만에 끝나고 인천 송도로 이사 갔다. 아버지가 그리로 발령받았기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아버지가 ‘바보천치’여서 ‘와이로(뇌물)’를 먹이면 될 것을 이리저리 떠다니며 돈을 모으기는커녕 생고생을 시킨다고 눈에 날을 세웠다.
1962년께 송도는 그냥 황무지 갯벌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인가 뭔가를 열심히 외우며 갯벌에 나가 조개를 주웠다. 뒷동산엔 야생 부추(그땐 전부 야생이었지 뭐)가 풀처럼 자라고 있어서 부추조갯국을 끓여먹을 수 있었다. 우리 마을엔 낡은 권투 장갑이 두 짝 있었고 어른들이 심심하면 우리들을 풀밭 링에 올려서 ‘싸움질’을 시켰는데 그때 눈에서 불이 번쩍 튀는 경험을 많이 했다.
6학년은 인천 시내 학교(인천에서는 변두리)로 옮겨 공부를 좀 하다가 일류 중학교라고 하는 데에 들어갔고, 그때부터 학교와 학교를 떠돌아다니는 긴 여정은 끝이 났다. 같은 운동장을 사용하는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6년이나 다녔으니 인천이 내 고향이 되고 말았다. 그 중학교를 졸업하고 역시 명문이라고 하는 고등학교에 합격했다. 나는 외갓집에 가서 놀고 오겠다고 말하고 호남선 완행열차를 탔다. 느린 뱀처럼 밤새 꿈틀꿈틀 기어간 기차가 송정리역에다 나를 내려놓았다. 역에서 외삼촌 집까지 걸어갈 때 여명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
사단은 이때 났다. 어른들에게 인사하고 앉아 있는데 둘째 외사촌 누나가 감은 머리를 수건으로 닦아내며 방으로 들어섰다. 나는 화살을 이마에 맞았다. 그 화살은 나를 사랑의 지옥으로 떨어뜨렸다. 이제껏 방황하던 나의 영혼이 전심전력하여 한 여인(?)을 사랑하게 만들었으니 슬프도다, 어찌하여 외사촌 누나를… 누가 듣기만 해도 해괴하고 망측스러운 일이 아닌가.
그냥 마셨다. 막걸리, 소주 안 가리고 마셨다. “이런 미친놈이 있나.” 엄마가 도마 위에 내 손을 올려놓고 식칼로 내리치려 할 때도 얼른 손을 빼서 달아났고 또 마셨다. 예비고사 1기생인 나는 시험 보기 1주일 전에 ‘생누룩’ 막걸리 석 되를 마시고 한겨울 논바닥에서 잤다. 그리고 (오로지 막걸리 원 없이 마시려는 욕망 하나로) 고려대에 들어가서 마시고 또 마셨다.
‘마셔도 사내답게 막걸리만 마신다’라고 막걸리 찬가를 불렀지만 나는 마셔도 빚을 내서 마셨고, 전날 실수로 얼굴이 화끈거리면 그 창피를 덮기 위해 또 마셨다.
대충 여기까지 추억의 치약을 짜고 나니까 또 술발이 당기는구나. 그런데 그 여자는 나의 이런 생의 이력을 보고서도 눈물이 솟구쳤다는 말인가. 나는 단 한 번도 이념을 위해서 또는 노동자, 빈민을 위해서 나의 시간을 내거나 술잔을 든 적이 없다. 그냥 소소한 개인사, 남자들의 자잘한 일상사에 온몸 바쳐 술을 마셨을 뿐이다.
그러니 나의 어깨를 만지며 등 뒤에서 흐느꼈던 여인이여. 그대가 맥을 잘못 짚었던 게 틀림없소. 아니면 내가 꽐라 상태에서 헛것을 보았거나.
△ 윤동혁(尹東赫) PD
다큐멘터리 프로듀서로 한국일보 MBC, SBS 등을 거쳐 강원도와 경기도 땅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집도 절도 없으므로) 프리랜서PD로 일하고 있다. 로 방송대상 최우수 작품상을 받는 등 한국방송대상을 3회 수상했다. 라는 책을 펴내는 등 집필 활동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경로우대증’을 받는 내년 1월을 계기로 ‘나홀로 방송국’을 열 계획이다.
‘생생정보통’ 대게찜닭이나 차돌삼합이냐. 환상 궁합 자랑하는 요리들이 만났다.
28일 오후 6시 30분 방송되는 KBS 2TV 시사ㆍ교양 프로그램 ‘생생정보통’에서는 ‘이유 있는 맛집-환상의 짝꿍 맛집’ 코너를 통해 환상 궁합 자랑하는 이색요리를 소개한다.
대구 중구 삼덕동의 ‘닭귀신’과 서울 서초구 잠원동의 ‘진대감’이 그곳이다. 두 음식점은 모두 이색 궁합으로 미식가들의 입맛을 사로잡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우선 ‘닭귀신’의 대표 메뉴는 대게찜닭이다. 커다란 냄비에 대게 두 마리가 마치 ‘백허리’를 하듯 나란히 얹혀 있어 찜닭과 대게를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독특한 요리다.
다음으로 ‘진대감’은 차돌삼합으로 인기를 끌고 있다. 차돌박이와 키조개관자, 조개를 구워 갓김치, 깻잎, 부추 등에 싸먹는 요리로 차돌박이와 조개의 미묘한 하모니가 미식가들을 설레게 한다. 마무리는 남은 소스를 활용한 볶음밥이다.
자귀나무는 합환수, 합혼수, 야합수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데, 이는 모두 부부의 금슬이 좋음을 뜻한다. 밤이 되거나 날이 어두워지면 새의 깃처럼 생긴 작은 잎들이 서로 맞접고 붙어서 아침까지 수면운동을 한다. 단순하게 잠을 자는 것이 아니라 밤에만 야합(夜合)을 하는 것이다. 이것은 잎자루 아랫부분에 있는 엽침(葉枕)이 빛의 강약이나 자극으로 인해 엽침 속의 수분이 일시적으로 빠져나오기 때문에 잎이 닫히고 잎자루가 밑으로 처지는 현상이다.
일부에서는 자귀나무라는 이름이 ‘자는 데 귀신’에서 유래했다고 하는 것도 이 수면운동을 보고 붙인 이름이다. 일본 이름 ‘네무노키’ 역시 이러한 수면운동으로 잠자는 모양을 표현하는 이름이다.
아까시나무의 잎은 홀수깃꼴겹잎이어서 가운데 겹잎자루를 중심으로 포개면 맨 끝의 잎 하나가 남지만, 자귀나무는 짝수깃꼴겹잎이기 때문에 양쪽이 완전히 겹쳐져 외로운 홀아비가 생기지 않는다. 이 또한 부부 사이의 금슬이 좋음을 상징한다. 중국 이름 합환수도 부부의 원만함에서 유래됐다.
옛 사람들은 이 나무를 애정목이라 하여 집마당에 심으면 부부의 애정이 좋아지고, 가정이 화목해진다고 믿었다. 요즘같이 부부간에 불화가 많고, 이혼이 흔한 시대에 이 나무의 의미를 다시 한번 음미해 보는 것도 좋을 듯싶다.
자귀나무는 한여름 연분홍색의 강렬한 꽃을 피운다. 얼핏 보면 나뭇가지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인다. 혹은 한복 치마에 수놓은 공작새 같은 단아한 느낌을 주는 우아한 동양의 꽃이라고도 한다. 꽃의 질감이 비단같이 부드럽기 때문에 영어 이름은 ‘실크트리(Silk tree)’다.
속명 알비지아(Albizzia)는 18세기경 자귀나무를 유럽에 처음 소개한 이탈리아 귀족 아인슬리에(Whitelaw Ainslie)에서 유래됐으며, 종명 율리브리신(julibrissin)은 페르시아어로 ‘비단꽃(Silk flower)’이라는 뜻이다. 중국이 원산지이고, 우리나라 남부지방에는 우리나라 특산의 왕자귀나무가 자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