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은메달, 2004년 아테네올림픽 은메달 그리고 아시아 최초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이라는 기록의 중심엔 핸드볼 선수 임오경이 있었다. 1990년대 한국 여자핸드볼의 전성기를 이끈 임오경(林五卿·48)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만났다.
금메달의 밑거름이 된 ‘지옥 훈련’
1988년 서울올림픽에서 한국 여자핸드볼팀이 금메달을 딴 직후 여자핸드볼팀의 대대적인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때 임오경 감독도 국가대표로 합류하게 되면서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다. 생애 첫 올림픽 무대를 앞두고 부담스럽진 않았냐는 물음에 그는 “부담감보다 긴장감이 더 컸다”며 “오히려 태릉선수촌에서의 ‘지옥 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답했다.
“눈 감는 것도 두렵고 눈 뜨는 것도 두려웠어요. 눈을 감으면 다음 날 아침이 오고, 눈을 뜨면 하루가 시작되니까요. 그중에서도 매주 한 번씩 불암산을 뛰어 올라가야 하는 산악훈련은 그야말로 공포였어요. 기록을 매번 단축해야 했거든요. 훈련이 끝나면 울면서 태릉 귀신한테 기도했어요. 우리 감독님 제발 좀 데려가라고.(웃음)”
매일 혹독한 훈련이 이어졌지만 동료들과 서로 격려하고 의지하며 견뎌냈다. 해를 거듭할수록 성장하는 모습을 보며 그도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메달 가능성을 보게 됐다고 고백했다.
“처음엔 한국이 메달을 딸 거라고 예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어요. 올림픽 직전 독일에서 열린 5개국 초청대회에서도 꼴찌를 했으니까요. 저희끼리도 동메달을 목표로 할 정도였죠. 지금 돌이켜보면 노력에 대한 결과이기도 했지만 운도 잘 따라줬던 것 같아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한국이 한 번도 이겨본 적 없는 러시아 팀이 다른 조로 배정되면서 우리 선수들은 순조롭게 준결승까지 갈 수 있었다.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독일과의 경기에선 아슬아슬하게 한 점 차로 이기면서 결승에 올랐다. 그때 한국 팀에게 또 하나의 희소식이 전해졌다. 노르웨이가 러시아를 한 점 차이로 제압하고 결승에 올랐다는 내용이었다.
“러시아가 떨어지고 노르웨이가 결승에 올라갔다는 소식에 저희 선수들 다 뒤로 자빠졌습니다. 예선전에서 노르웨이랑 맞붙었을 때 저희가 큰 점수 차로 이겼거든요. 결승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었죠. 그때 ‘아, 3년 동안 지옥 훈련을 견뎌낸 선수들을 위해 하늘이 기회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한국은 결승에서 다시 만난 노르웨이를 28대 21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일궈낸 쾌거였다.
“선수들이 시상 단상에 올라가면 눈물을 흘리잖아요. 그 눈물엔 기쁨의 의미도 있지만, 그동안 힘들었던 순간이 생각나서 흘리는 눈물도 있어요. 그때 저는 깨달았어요. ‘피나는 훈련이 있었기에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구나. 그렇게 힘들었던 시간들은 결국 나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과정이었구나’ 하고요.”
일본에서의 새로운 도전
올림픽이 끝나자 그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구단의 러브콜이 이어졌다. 그는 일본의 2부 리그 신생 팀인 ‘히로시마 이즈미’를 선택했다. 올림픽에서 메달만 따면 은퇴하겠다고 마음먹었던 그가 핸드볼 강국 유럽 팀의 제안도 뿌리친 채 일본에서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이유는 뭘까.
“일본에서 너무 적극적으로 제안을 하더라고요. 그래서 3년 안에 팀을 정상에 올려놓고 유럽에 가자 했는데, 일본에서 14년을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죠.(웃음) 당시 제가 선수들을 직접 스카우트했는데, ‘내가 스카우트했으니 끝까지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떠나질 못했습니다.”
그는 히로시마 이즈미에서 감독 겸 선수로 14년간 활동하면서 리그 8연패를 포함해 총 27회의 우승을 달성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일본 기자단이 선정하는 인기투표에서 8년 연속 인기상을 받을 정도로 일본의 핸드볼 스타플레이어로도 인정받았다.
“한국에서는 짱구? 이마가 많이 튀어나왔다고 그런 별명이 있었는데 일본에서는 카미사마(かみさま, 신)로 불렸어요. ‘내가 왜 신이야?’라고 물어봤더니 핸드볼을 너무 잘한다고….(웃음) 팬도 엄청 많았어요. 재일교포가 대시도 하고요. 어느 날은 아들이 상사병 걸렸다고 한 번만 만나 달라고 찾아오신 분도 있었어요. 별일 다 겪었죠.”
아쉬움 남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
임오경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영화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이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배경으로 한 ‘우생순’의 실제 주인공이기 때문. 2004년 아테네올림픽은 그에게 유독 아쉬움이 많이 남는 대회다. 한국은 결승에서 만난 덴마크와 연장전에서도 승부를 가르지 못해 결국 페널티 스로로 승부를 결정지었다. 임오경은 두 번째 주자로 나섰다.
“대회를 일주일 정도 남기고 발바닥 부상을 당했어요. 항상 베스트 멤버로 뛰다가 벤치에 앉아 있으니 자존심도 많이 상하고 스스로에게 화가 굉장히 났죠. 페널티 스로를 앞둔 상황에선 부상 때문에 몸도 유연하지 못했고 자신감도 떨어진 상태였어요. 던지고 싶지 않다고 말했는데 제가 무조건 던져야 한다고 하니 어쩔 수가 없었죠.”
그가 던진 슛은 덴마크 골키퍼의 오른쪽 다리에 걸리면서 실패하고 말았다. 여기에 그다음 주자였던 문필희 선수의 슛도 막히면서 최종 스코어 2대 4로 은메달에 머물고 말았다.
“그동안 잘해왔는데 마지막 순간, 그 한 번의 실수로 인해 제 핸드볼 인생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생각에 많이 아팠어요. 무엇보다 운동선수는 부상이 없어야 한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죠. 그리고 경기장에서 뛸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벤치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마음을 좀 더 헤아리게 됐죠.”
그는 2008년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까지 서울시청 여자핸드볼팀 감독을 맡고 있다. 한국 최초 여성 핸드볼팀 지도자라는 점에서 어려움은 없었을까.
“첫해에는 눈물도 많이 흘렸어요. 저희 팀이 이기고 있는 상황에서 여자 감독이 이끄는 팀이라는 이유로 심판 판정도 이상하게 해서 불리하게 만들고. 심판실에 따라 들어간 적도 많아요. ‘나 오늘부터 서서 볼일 볼 테니 나를 남자라고 생각해 달라’고 말한 적도 있어요. 몇몇 고비를 넘기면서도 조금씩 다가가니 결국은 손을 내밀어주더군요. 근데 처음엔 정말 힘들었어요.”
핸드볼과 함께한 지 30여 년이 넘는 세월, 그는 이제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핸드볼을 시작하면서 선수가 됐고, 선수를 하면서 지도자가 됐고, 대한민국의 애 엄마도 돼봤어요. 여러 가지 도전을 하면서 새로운 시도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지더라고요. 그래서 최근엔 또 다른 도전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왕이면 제가 지도자와 선수생활을 모두 해본 사람으로서,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스포츠 문화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싶어요.”
스코틀랜드의 긴 역사가 고이 간직된, 천년고도 에든버러. 대영제국이 된 지 300년이 흘렀어도 근원은 스코틀랜드일 뿐이다. 남자들은 킬트 줄무늬 치마를 입고 길거리에서는 백파이프 연주가 흐른다. 스코틀랜드의 민족성과 풍습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이외에도 스튜어트 왕가와 귀족들, 월터 스콧, 애덤 스미스, 데이비드 흄, 로버트 번스 등 세기의 작가들 흔적이 남아 있다. 회색빛의 고풍스러운 건축물에 서리서리 스며 있는 역사의 이야기는 긴 겨울밤을 하얗게 지새우게 한다.
스코틀랜드의 대문호 월터 스콧 기념탑
에든버러 공항에서 버스를 타면 시내 중심까지 한 시간이 채 안 걸린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 탓일까? 아니면 약간 구릉진 언덕 위에 자리를 잡은 고색창연한 건축물들 때문일까? 에든버러 겨울의 첫 느낌은 ‘회색빛’이다. 어쩌면 버스정류장 앞쪽에 우뚝 서 있는 스코틀랜드 대문호인 월터 스콧(1771~1832)의 기념탑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오래된 것처럼 보이게 해달라는 스콧의 유언에 따라 시커먼 사암석으로 만든 뾰족한 탑. 61m 높이의 기념탑은 왠지 기괴하고 음산하다. 이 탑을 만들 때, 잉글랜드에 대한 경쟁심으로 영국에서 제일 높은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기념탑보다 5m 더 높이 올렸다는 후일담이 있다. 287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에든버러 시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지만 포기하고 스콧 기념탑 아래 프린세스 정원의 국립 갤러리, 로열아카데미를 찾는다. 모두 무료 입장이다. 관광객으로서는 매우 반가운 일. 미술관에 걸린 수준 높은 명화를 마음껏 감상하면서 미소 짓는다.
에든버러의 국교는 장로교
에든버러는 남북을 가로지르는 프린스 스트리트를 경계로 북쪽의 올드 타운과 남쪽의 뉴타운으로 구분된다. 구시가지는 15세기부터 스코틀랜드 왕국의 수도로 행정, 문화의 중심지였다. 신시가지는 18세기 이후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조성된 주택, 상업지구. 1985년, 유네스코는 신·구시가를 묶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시선도, 마음도 구시가지에 다 빼앗긴다. 무조건 ‘고성(古城)’을 기점으로 걷는다. 고성까지 걸어가는 길목에서 화폐 박물관, 뉴대학을 만난다. 대학 건물은 해묵은 향기를 뿜어낸다. 토마스 찰머스(1780~1847) 목사의 동상이 있는 이 대학은 스코틀랜드 장로교 교구가 있던 곳. 16세기경, 이곳은 매우 중요했다. 1560년, 스코틀랜드가 국교로 지정한 장로교를 잉글랜드와 미국으로 전파하는 중심지였다.
스코틀랜드-잉글랜드 격전지, 에든버러 성
에든버러 성은 오래전 활동을 중단한 화산 꼭대기(133m)에 있다. 성 뒤쪽은 거대한 바위산이 버티고 있는데 3면이 깎아지를 듯한 절벽을 이루고 있다. 딱 봐도 요새로 최적이다.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동쪽이 출입구. 이 성은 현재 영국군 사령부 역할을 하고 있는데 전통 복장을 한 두 명의 근위병이 성을 지키고 있다. 한겨울에도 킬트를 입은 채 맨살을 보여주는 근위병은 여행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고 있지만 정작 그들은 관광객들의 시선에 무심하다. 에든버러 성은 6세기에 지어졌다는 설이 있지만 정확한 기록은 없다. 1018년부터 조금씩 형태를 갖추기 시작했고 현재의 건물들은 16~18세기 혹은 그 이후에 지어졌다. 이 성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격렬한 투쟁사를 보여주는 현장이다. 수 세기에 걸쳐 여러 차례 성주가 바뀌었다.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가 수많은 전투를 치르는 동안 이 성은 이긴 자의 차지였다.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끝으로 결국 잉글랜드 차지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성내에는 가장 오래된 12세기 초기의 건축물인 세인트 마가렛 예배당이 있는데 대부분 군사 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타탄 무늬 제품의 천국 도시
에든버러의 백미는 구시가지 거리 로열마일이다. 에든버러 성과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을 연결하는 1.6km 남짓의 도로. 과거 왕가에서 쓰던 전용 도로로서 길이가
1마일이나 되어 ‘로열마일’로 불린다. 왕족들만 다닐 수 있는 로열마일 때문에 서민들은 좁은 클로즈 골목을 이용해야 했다. 대로 옆으로 무수한 클로즈 골목이 눈에 들어왔다. 클로즈는 한국의 피맛골 거리와 엇비슷하다. 로열마일 양쪽으로는 역사를 간직한 옛 건축물들이 즐비하다. 기념품 숍, 식당, 호텔 등도 무수히 이어진다. 로열마일에서 가장 흥미로운 곳은 브로디스(Brodie’s) 클로즈다. 18세기, 낮에는 저명한 인사로 지내고 밤에는 도둑으로 살았던 윌리엄 브로디(1741~1788)의 이름을 따서 붙인 골목이다. 론마켓에서 캐비닛을 만드는 장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낮에는 경건하고, 부유하고, 훌륭한 시민이었다. 1781년에는 시의 조합장(deacon)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그러나 밤에는 강도짓과 도둑질을 했고 도박꾼으로 방탕하게 살았다. 그는 두 번째 부인과 살면서 돈을 많이 써댔다. 1786년에는 시립은행의 열쇠를 복사해 800파운드를 훔쳤다. 또 부유한 집안에 일하러 다니면서 열쇠를 따로 복제했다. 주변 상인들도 도둑질에 끌어들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의 교활함과 뻔뻔함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결국 성 자일스 교회에서 교수형을 당했다. 브로디의 이중적인 캐릭터에 영국 소설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1850~1894)이 영감을 얻어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는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나 그 진위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현재 그의 집은 카페로 이용되고 있다.
애덤 스미스 동상과 세인트 자일스 대성당
로열마일의 가장 번화한 광장에 과거 스코틀랜드 국회의사당, 청동 말과 동상으로 만들어진 버클루 공작의 기념비, 애덤 스미스의 동상과 성 자일스 성당 등이 몰려 있다. ‘국부론’으로 잘 알려진 애덤 스미스(1723~1790) 동상은 랜드마크 역할을 한다. 애덤 스미스 동상 앞에 있는 성 자일스 성당(1495년 건립)의 노르만 양식의 탑이 인상적이다. 이 교회는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을 이끌었던 곳. 종교개혁가 존 녹스는 프로테스탄트 동지를 규합했다. 성당 앞에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양식의 18세기 시청사가 있다. 시청사 옆 리얼 마리 킹 클로즈는 ‘귀신 나오는 골목’으로 관광 트렌드가 되었다. 이 광장에서 조금 밑으로 내려가면 콕번 스트리트를 앞두고 데이비드 흄(1711~1776)의 흉상이 있다. 흄은 에든버러 근교인 나인웰스에서 태어났지만 에든버러에서 대학을 다니는 등 인연이 깊다. 우여곡절이 많은 그의 인생 이야기가 참 재미있다. 흄은 “철학자가 되어라. 그러나 철학 가운데서도 여전히 인간이어라!”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메리 여왕이 살던 홀리루드 하우스
흄 흉상을 지나면서 길은 한가해진다. 길 끝에 홀리루드 하우스 궁전이 있다. 홀리루드 하우스는 1128년 데이비드 1세가 지은, 성 아우구스티누스회의 성당이었다. 1498년, 제임스 4세의 명에 따라 궁전으로 다시 지었고 1530년대에는 제임스 5세가 자신과 왕비인 기즈의 메리를 위해 탑을 덧붙였다. 1560년대에는 이들의 딸인 스코틀랜드의 여왕 메리가 살았다. 메리는 1565년, 이 수도원에서 사촌 단리와 두 번째 결혼을 했다. 하지만 단리가 살해되자 얼마 되지 않아 남편 살해 용의자 보스웰 백작의 아이를 임신한 채 이 궁전에서 결혼했다. 메리는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졌다. 메리와 단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제임스 6세는 에든버러에 머물 때는 홀리루드 하우스를 이용했으나 1603년, 그가 영국으로 떠난 뒤로 이 궁전은 왕가의 방문이 있을 때만 사용되었다. 2002년에는 왕실이 소장한 예술작품을 전시하는 ‘퀸스 갤러리’가 만들어졌다.
주인의 무덤 지킨 충견, 보비
에든버러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보비의 동상이다. 존 그레이의 양치기 개 보비. 존은 보비와 여행을 하던 중 병으로 객사했다. 존의 시신은 보비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든버러 그레이프라이어스 교회 묘지에 묻혔다. 당시 두 살이었던 보비는 죽을 때까지 무려 14년간 매일 밤 존의 무덤을 지켰다. 보비의 감동적인 이야기는 스코틀랜드 전역은 물론 해외까지 퍼졌고, 에든버러의 아이들은 용돈을 모아 보비에게 목걸이를 선물했다. 보비가 집 없는 개로 오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잡혀가거나 사살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보비는 개로서는 유일하게 에든버러 시 명예시민권을 부여받았고, 죽은 뒤에는 특별허가를 받아 존 옆에 묻혔다. 보비의 동상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해리포터’의 작가인 조앤 롤링(1965~)이 즐겨 찾았다는 카페가 있다. 이혼 후 에든버러에 정착한 그녀는 아이 분유 값을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동화를 쓰기로 결정한 그녀는 집 근처 카페에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완성했다.
Travel Data
항공편 스코틀랜드까지 가는 직항편이 없다. 인천→영국 런던행 직항편을 이용해 히드로공항까지 약 11~12시간 소요.
교통 런던 빅토리아 코치 역에서 에든버러까지 내셔널익스프레스 버스가 운행된다. 런던 킹스크로스 역에서는 매일 20여 회 기차가 운행된다.
시차우리나라보다 9시간 늦다.
음식 ‘하기스(Haggis)’가 유명하다. 양의 내장을 잘게 다져 곡물과 섞은 것을 양의 위장에 채워 삶은 음식. 스코틀랜드의 전통 요리로서 매시포테이토와 순무를 곁들여 먹는다.
주류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것 중 하나가 스카치위스키다. 몰트위스키와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만드는 블렌디드 위스키가 가장 일반적이고, 한국인들이 즐겨 마시는 종류다.
숙박 게스트하우스,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된다. 고급 호텔은 25만 원 이상의 비용이 들지만 평균 8만~10만 원대에서 이용 가능하다.
화폐 파운드
여행 포인트 시간 여유를 갖고 북부 고지대에 있는 ‘하일랜드(Highland)’ 지역을 연계하면 좋다. 에든버러 시내 여행사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전대미문의 발견이었다. 대작이 전시장에 걸려도, 이번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예술품이라고 소리 높여 말해도 콧방귀도 안 뀌던 전문가 집단이 수군거렸다. 흔하디흔한 골동품이라며, 귀신 붙은 그림이라며 내다버리고 없애버린 민화. 곱게 단장하고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던 순간 사람들은 바로 무장해제돼 버리고 말았다. 고집불통 깐깐한 개인의 취향에 몰입하며 수많은 민화와 미술품을 수집해온 김세종(金世鍾·62) 평창아트 대표를 만나봤다. 기나긴 세월, 호랑이 눈으로 발견한 가치가 담긴 예술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예술계에 한 방 날리다
“나는 잘 알지도 못하는 기자(?)가 내 책에 대해 썼다는 거예요. 난생처음 책이라는 걸 썼는데 사람들이 알아줄지 몰랐어요. 출판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책이 거의 다 나가 또 인쇄한다더군요. 글은 제가 다 썼어요. 이 내용을 쓸 사람이 대한민국에 저밖에 없거든요.”
김세종 대표의 등장을 1990년대 돌풍을 일으켰던 서태지와 견주어도 될까? 새바람처럼 천지개벽 같은 울림이 깊게 파고들었다. 7월 간행된 김세종 대표의 저서 ‘컬렉션의 맛’은 나오자마자 빠르게 각종 언론을 통해 소개됐다. 특히 김세종 대표가 ‘잘 알지 못하는 기자’라고 언급한 이는 전 중앙일보 문화전문기자 출신인 정재숙 신임 문화재청장이었다. 문화계 통(通)으로 불리던 정재숙 청장의 눈에 들었다는 것은 보석 같은 예술을 발견했다는 뜻과도 같다. 김세종 대표가 실제로 민화 소장품을 들고 세상에 나왔을 때는 “이런 현상이 최근에 있었나” 싶을 정도였다. 7월 18일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판타지아 조선’ 전시 첫날. 기자회견장에 온 기자만도 50명 가까이 됐다. 그간 이름 높기로 유명한 예술가 전시회에 고작 열댓 명 기자가 와서 자리를 해도 성공적이라고 입을 모았다. 기자회견장에 의자를 계속 내놓아야만 했다. 이 자리에서 한 통신사 기자가 “현대화랑과 민화 가격을 올리기 위한 의도 아니냐”며 김세종 대표에게 물었다. 현대화랑 박명자 회장은 김세종 대표의 민화에 대한 강한 집념을 알고 난 뒤 꾸준하게 지원하고 있는 숨은 조력자다. 예술의전당 전시 일주일 전 현대화랑에서는 ‘조선시대 꽃그림_민화, 현대를 만나다’라는 제목의 민화 전시전을 열어 김세종 대표 행보를 알리고 응원했다. 한국 미술계 영향력 1인자로 회자되는 박명자 회장이 합세했다니 기자의 얄궂은 질문은 어쩌면 예견된 것이었다. 17년 동안 아무도 모르게 민화를 독립운동하듯 찾아 모아온 김세종 대표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했어요. 우리나라가 해방된 지 벌써 몇 년인데 우리 것에 대한 정립이 안 됐냐는 말이었죠. 정신 차리고 제대로 똑바로 보자. 외국 사람들은 조형으로 회화로 민화를 바라봐요. 우리는 맨날 귀신으로만 보려 한단 말이에요. 중국 책 찾아서 무슨 뜻이라고 해석하고요. 우리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정작 중요한 것을 몰라요. 민화는 순수 회화이고 예술이다. 세계 최고다. 기자들이 자꾸 말하라고 해서 평소에 말 잘 안 하는데 마이크 잡고 한 시간 이십 분은 떠든 것 같아요.(웃음)”
다음 날 이례적으로 ‘판타지아 조선’ 전시와 관련해 정성들여 쓴 기사들이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올라왔다. 질문을 했던 기자는 용서를 비는 마음으로 밤새워 기사를 썼다고 김세종 대표에게 전화했다. 책이 나오고 전시가 진행되면서 인터넷 사이트에는 김세종 대표는 물론이고 민화와 관련한 다양한 글과 사진이 쏟아졌다. 전시장을 다녀간 관람객들도 각종 SNS에 사진을 올렸다. 젊은 학생부터 시니어까지 우리 민화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나누었다. 김세종 대표는 그저 하루하루가 신기할 뿐이라고. 좋은 민화 작품을 찾아다니고 수집하는 사람에게 문화계가 큰 관심을 가져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판타지아 조선’은 8월 말 예술의전당에서 전시 일정을 마무리하고,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으로 자리를 옮겨 10월 말까지 전시를 이어갔다.
“세종문화회관에서 전시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안 그래도 예술의전당 전시 일정이 좀 짧게 느껴져 서운했는데 기회가 좋았죠. 9월, 10월 전국 여섯 곳에서 국제 비엔날레 행사가 열렸습니다. 외국 작가들이 한국으로 많이 들어올 텐데 서울 한복판에서 우리의 것을 세계에도 알릴 수 있으니 시기도 좋잖아요. 서울 전시 끝나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의전당으로 넘어가서 순회 전시도 합니다. 민화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계기가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냥 얻어지는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김세종 대표가 인터넷과 각종 매체를 통해 갑자기 등장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면면을 보면 한국 미술계에서 잔뼈가 굵은 고수 중 고수임을 알 수 있다. 갑자기 책이 나오고 문턱 높은 전시관 세 곳에 소장 작품을 걸 수 없다. 예리하고 넓은 식견으로 예술품을 바라보고 의미를 찾아가며 미술품을 대한 것만도 40년 세월이다.
“중학교 때 충남 보령에서 서울로 혼자 와 하숙을 했는데 춥고 가난해 정말 힘들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 중국 문학평론가 임어당의 ‘생활의 발견’과 펄 벅 소설에 심취하다가 철학에 빠졌어요. 그러다가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이후 미아리 산동네에서 하숙을 하면서도 인사동 서예학원에 찾아가 청소를 대신 해주며 무료로 붓글씨를 배웠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수도공업고등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는데 어린 김세종 대표가 꿈꾸는 이상과 현실이 많이 달라 힘들었다. 지방에서 올라와서 친구도 잘 사귀지 못했다. 그때 해방구가 바로 박물관이었고 미술관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달려가 양질의 그림과 다양한 작품을 꼼꼼히 보며 감각을 익혀갔다. 각 박물관을 천 번 이상은 갔다. 수년을 발품 팔아가며 예술품을 감상했더니 눈썰미가 생겨났다.
“서예를 배울 때였는데 학원에서 천재 화가로 불리는 소산(小山) 박대성 선생님을 만났어요. ‘나한테 들어와서 그림 공부해라’ 그러셔서 한 2년여 함께 있었습니다. 그러니 대학교 들어갈 생각도 못했지. 돈도 없었어요.(웃음)”
군대 전역하고 사회에 나오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눈은 높아질 대로 높아졌는데 그림 그리는 재주는 손에 남아 있지 않았다. 막노동도 해보고 살아보려 서울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지나게 된 충무로에서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디자인이었다. 미적 감각도 있었고 서예도 배웠으니 승산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광고계에 뛰어들어 당시 아파트 지면 광고에서 방송 광고까지 손 가는 대로 할 수 있는 한 광고기획을 했다. 업계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업체 대표들을 만나고 다녔던 시기가 20대 후반이었다. 쾌속 질주는 계속됐다. 그러던 중 취미에 눈뜨기 시작했다.
“정적인 걸 좋아해서 20대 중반부터 난초와 수석을 수집했어요. 오랜 시간 모았는데 회의가 들었습니다. 우리 문화가 아니고 중국과 일본 문화였어요. 가만 보고 있자니 화분도 우리 정서에 맞지 않았고요. 몇 년 뒤 한두 개만 남기고 다 남들 나눠줬습니다.”
취미생활을 접은 뒤 그는 무턱대고 미술품 수집에 뛰어들었다. 사기를 당해 집 두 채 값을 날려 먹은 적도 있다고. 때마침 광고기획사 사무실 옆에 한국 고미술 상인 1세대이자 큰손 김재숭 선생이 있다는 것을 알고 찾아갔다. 그때부터 스승으로 모시고 3년 동안 미술품에 관한 공부를 이어갔다. 비슷한 시기 일본 민예 연구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의 책을 접하면서 수집에 대한 이해도 넓혀갔다.
“미적인 눈은 야나기 선생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국립박물관 문지방이 닳도록 다니면서 오랜 세월 시각적 관점이 생겼고요. 소산 선생께 그림 수업을 듣고 서예도 배웠습니다. 서른 살 이후부터 김재숭 선생님 돌아가시기 전날까지도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책에도 썼지만 단순한 지식만이 아니라 살아 있는 진리를 배운 것이죠. 이후에 추사 김정희,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김환기 화백 작품 등을 수집했습니다.”
서른여섯에 잘하던 광고기획 일을 그만두고 IMF 때까지 미술관으로 가서 작품만 감상하며 살았다. 벌어놓은 돈은 잘도 없어지고 사라졌다. 마음치유를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
공기 좋고 시원한 곳에 아지트가 있다
어느 날 우연히 종로구 평창동에 들렀다가 지금의 갤러리 공간을 발견했다. 17년 전 작게 화랑 문을 열어 민화와 옹기 등을 모으고 미술과 관련한 책을 읽고 공부하면서 공력을 쌓았다.
“민화에 관심을 갖게 된 건 화랑을 열기 3년 전부터였어요. 민화가 너무너무 좋은데 왜 이렇게 안 알려진 거야? 어렸을 때부터 수천 번 넘게 미술관, 박물관을 다녔는데 왜 내 눈에 보이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민화는 내가 찾아서 수집해야겠다’ 마음먹고 갤러리를 하게 된 거죠. 나이 먹고 생일잔치하듯 소박하게 한번 해보자. 그렇게 미술품 수집을 하게 됐습니다.”
갤러리에는 종종 예술계 대가들이 찾아와 김세종 대표와 얘기를 나눈다. 새로운 문화 패러다임을 모색하기 위해 이곳에 앉아 머리를 맞대기도 한다. 현대화랑은 물론 김한 JB금융지주 회장 등 이름만 대면 다 아는 인사들이 김세종 대표가 추구하는 소위 ‘민화운동’의 지지자이고 후원자다. 학연, 지연, 혈연이 아닌 김세종 대표의 진정성이 구심점이 됐다.
“무엇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화예술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필요합니다. 자존감을 회복해야 합니다. 민화도 그렇고, 지금 우리는 번지수 잘못 잡고 방황하고 있어요. 조형성, 아름다움, 예술성을 머리에 새기고 우리의 미를 바라보면 알 수 있을 겁니다. 품격높은 예술성을 가진 민족이라는 것을요.”
작년 초, 2기 동년기자 발단식에 범상치 않은 여인이 나타났다. 망사와 레이스로 된 코사지를 머리에 올려 쓰고, 화려하게 빛나는 공단 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상냥한 어투로 자신을 핑크레이디라고 소개하던 그녀는 어느새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없어서는 안 되는 대표 인물로 자리매김하는 중. 최근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영상 제작에도 참여하며 그 누구보다 활발히 동년기자 활동을 넓혀가고 있는 그녀다. 잘 영근 숙녀의 삶 속에는 어떤 우여곡절이 숨어 있을까?
동년기자 리포터 가능할까요?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자주 가는 장소가 어디냐고 물으니 서울 강남에 있는 서초문화원이라고 했다. 현재 이곳에서 모델워킹 수업과 시창작 수업을 듣고 있다고. 대부분 시간을 주로 강남 일대에서 보내는데 1분 1초도 아깝지 않게 살뜰히 모아 사용하고 있다.
“2012년부터 다니기 시작했어요. 평택에서 컴퓨터 선생님으로 교사생활 33년 하고 나서 서울로 이사왔습니다. 이곳에서 수필창작, 영어회화, 시낭송, 왈츠를 등록해 열심히 다녔어요. 패션학원도 등록해서 다녔어요.”
어렸을 때 꿈 중 하나가 교사였는데 이것은 벌써 이뤘고, 다른 하나는 패션디자이너라고 했다. 교사직을 맡고 있을 때도 꿈을 이루기 위해 평택과 서울을 오가며 패션 특강을 들었다고. 한국폴리텍대학교에서 패션디자인 야간과정을 6개월 정도 밟기도 했다. 순간마다 패션의 길로 접어들까 고민한 적도 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대신 패션 공부했던 경험을 실생활에서 활용하고 있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입고 두르고 가지고 다니는 것 대부분이 스스로 리폼한 제품이다.
“어렸을 때 바느질을 좋아했어요. 내 옷은 내가 리폼하고요. 이 가방도 다섯 번도 넘게 끈 부분을 갈았어요. 레이스를 손바느질로 덧대고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나만의 명품가방을 만든 거지요.”
퇴직하고 난 이후에 더욱더 열심히 사는 박애란 동년기자다.
“생각을 바꿔야 해요. 퇴직 전은 전반생, 그 후는 여생이 아니라 후반생. 전반생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고 살았다면 후반생에는 의무감에서 벗어나도 괜찮아요.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살면 돼요. 그래서 후반생은 내가 하고 싶은 거 하며 사는 거죠. 내가 또 몸치이기는 한데 왈츠도 배우고 탱고 동호회도 나가고 있어요. 발레도 하고요. 이 나이에 몸이 잘 늘어나겠어요? 왜 내가 내 돈 들이면서 이 고생하나 하다가도 우아한 발레 음악 들으면 엄청 행복해집니다.(웃음)”
인터뷰 바로 전날에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서 제작하는 영상 프로그램 촬영을 다른 동년기자들과 마친 상태였다. 이후 의학 관련 영상에서는 리포터로도 활약했다. 검증된 끼와 재능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간판 리포터(?)로 벌써부터 점쳐졌던 인물이 박애란 동년기자였다.
“아무래도 시작이다 보니 어떤 사명감 같은 것이 생기더라고요. 안 그래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도 영상을 시도할 만한데?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시작하더라고요. 동년기자들이 대단한 내공을 가진 시니어잖아요. 내 생각이 그대로 옮겨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브라보 마이 라이프’에 대한 애정은 이뿐만이 아니다. 누군가를 만날 때마다 “품격 있는 시니어라면 반드시 봐야 하는 잡지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며 홍보 멘트를 꼭 날린다. 우리 잡지에 처음 자신의 기사가 실렸을 때는 너무 좋아서 기절할 것 같았다고 회상했다. 생각해보니 당시 기자 앞에서도 본인 기사가 실린 잡지를 열어보고는 방방 뛰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웃는 얼굴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슬프고 착한 아이, 애란을 만나다
“내 패션이 다른 사람들하고 다르지? 왜 이런지 물어봐주실래요?”
한껏 하늘을 날 것처럼 깃털 같은 얘기를 이어가다가 갑자기 기자에게 질문했다. 별 얘기 아니려니 하고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뜻밖의 소재로 이야기가 바뀌었다.
“옷을 이렇게 입게 된 건 언니 때문이었어요. 어린 시절 아빠가 언니만 사랑해줬어요. 언니가 아버지를 닮았거든요. 한번은 언니랑 싸우는데 아빠가 싸우지 말라고 우리를 다그치다 저랑 언니를 톱자루로 엉덩이를 한 대씩 때렸어요. 정말 너무너무 아팠어. 그때 든 생각은 ‘언니도 아프게 때렸을까?’ 였어요. 나도 사랑받고 싶었어요.”
이때의 기억은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후스트레스장애)로 남아 있었다. 똑같이 때렸을 거란 기자의 말에 “아니, 아닌 거 같아요”라고 맞받아쳤다.
“어느 날 언니가 책을 산다며 아버지한테 용돈을 달라고 했어요. 저한테도 ‘돈이 필요하지 않냐?’고 아버지가 물었어요. 그런데 저는 ‘됐어요. 그동안 제가 모아놓은 돈으로 사면 돼요’라고 했어요. 누가 착한 아이야?”
이 말에 기자는 “아버지가 속으로 많이 상처를 받았을 거 같다”고 답했다. 이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그게 왜 상처냐고 되물었다. 아이 입장에서는 ‘돈 잘 모은 행동’을 칭찬받고 싶었겠지만, 아버지 입장에서 ‘용돈을 주겠다’는 말이 일종의 사과였고 화해의 사인이지 않았을까. 박애란 동년기자의 말에 따르면,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너는 도대체 애다운 맛이 없다”며 나무랐다. 화해의 손을 놓아버린 고집 세고 질 줄 모르는 애어른으로 아버지는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 그때 박애란 동년기자가 아버지한테 “저도 책이 사고 싶어요, 돈 주세요”라고 했으면 어땠을까. 아버지는 분명 화해를 표했던 것이라고 꼭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얘기하고 싶다. 어린 시절 언니를 편애하던 아버지 이야기가 끝나고 나니 초등학교 시절 너무 예뻐서 한 치도 따라잡을 수 없었던 두 친구 이야기로 흘렀다. 외모 콤플렉스에 관한 이야기였다. 선생님께 예쁘게 보이기 위해 길에서 주웠던 군번줄을 목걸이처럼 목에 걸고 학교에 갔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줬다. 아버지에게 거부당한 사랑은 선생님에 대한 과도한 기대와 사랑으로 표출됐다. 이쁨받기 위해 고운 옷을 골라 입었고, 모자 쓰기를 좋아했다. 말을 하는 내내 박애란 동년기자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졌다. 아직도 그렇게 서러운 걸까. 밝은 웃음 뒤에 철저하게 감추고 있었던 상처받은 어린 박애란이 바로 눈 앞에서 울고 있었다.
그나마 박애란 동년기자 인생에서 다행인 것은 어린 시절의 아픔을 서둔야학에서 대신 치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이다. 서둔야학은 박애란 동년기자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들어간 야학으로 서울대학교 농대 재학생들이 주축이던 곳이다. 작년 말에는 서둔야학당터에서 ‘서둔야학 홈커밍데이’ 행사를 열었는데 본지가 찾아가 탐방 취재를 하기도 했다. 선생님 모두 착한 아이로서 박애란 동년기자를 인정해주었고 예뻐해줬다. 훗날 박애란 동년기자의 교사 꿈을 이루게 해준 놀라운 곳도 바로 서둔야학이다.
박애란 동년기자가 울컥할 때 주문처럼 되뇌는 마법과도 같은 말이 있다.
“울면 안 돼, 짜장면은 돼!”
세상의 모든 낭만적이고, 슬프고,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순간에 박애란 동년기자는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아픔을 덮어주는 이불과도 같은 말. 이제는 좀 따뜻한 마음으로 사그라지고 아물고 용서할 수는 없을까.
백설공주처럼 예쁘게 안녕
“큰일날 뻔했어. 이 좋은 세상 못 보고 이생을 하직할 뻔했잖아.(웃음)”
상황 불문 눈물, 콧물 짜며 소녀감성 폭발하는 박애란 동년기자. 세상을 비관하고 꽃다운 나이에 자살을 시도했던 일화도 꽤 오랜 시간 털어났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야학에서 공부를 하고 나니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결국 선택한 곳은 대한방직이었다.
“나는 책을 좋아하고 책에 빠져 있는데 현실은 공장이잖아요. 숨이 턱턱 막혔어요. 내 방에 공주들 사진을 붙여놓으면 아버지는 그런 것을 벽에 붙이면 귀신 나온다며 떼어버리라고 그러셨고요.”
이러다 평생 여공으로 살 것 같았다. 그러느니 죽자. 수면제가 가장 깨끗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을 듣고 수면제를 사다 모았다. 사랑으로 감싸준 서둔야학 선생님들에게 선물하기 위해 헝겊으로 꽃을 만들었다. 죽음 초읽기에 들어갔다.
“1968년도 5월 15일에 야학당에 가서 스승의 날 꽃이라며 선생님들 가슴에 달아드렸어요. 정말 눈물을 꾹 참고요. 내 나이 열여덟 살이었어요.”
죽을 때 죽더라도 예쁘게 죽겠다는 생각에 하늘색 브라우스에 스커트를 입고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입 안에 수면제를 털어넣었다. 천운이었을까, 일어나보니 하늘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막 우시더라고요. 그래도 아버지가 고와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초등학교 때 맞았던 사건 이후로 아버지한테 사랑받기를 포기했어요. 무엇보다 아버지는 가족들 앞에 무력했습니다. 그땐 절망이었습니다.”
기운을 차리고 야학당으로 가서 그곳에 계신 대학생 선생님들에게 자신의 자살소동과 관련한 얘기를 했다고.
“그때 번뜩 정신을 차렸어요. 선생님이 제 얘기를 듣고 놀라기도 했어요. 선생님 하시는 말씀이 ‘누가 너 죽은 모습을 보고 아! 아름답다’ 하겠냐고. 백설공주를 본 왕자는 아름답다고 외쳤는데. 암튼 그때 제 생각에 꽃이 달린 모자를 쓰고 죽으려 했던 것이 너무 낭만적이었던 것이죠. 그런데 반전은 죽었으면 큰일날 뻔했어. 지금 사는 게 너무 재밌거든. 요즘 생각하면 죽기 정말 아까워요.”
여직공, 여교사 되다
“되게 힘들게 살긴 했네요. 고비, 고비. 길고긴 고비. 내가 산전, 수전, 지하전, 공중전까지 다 겪은 사람이에요. 처음에는 수원에서 딸기를 땄어요. 그다음에 버스회사 사환을 했어. 방직공장에 들어갔어요.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에 일반직으로 이십대 때 근무했어요. 그다음에는 타자학원 강사로도 일했고요. 그리고 결국 스물아홉 살에 중등교사자격시험에 합격했어요. 이후에 공립학교 임용고시에 붙어서 선생님으로 33년 살았잖아요. 교사자격증을 손에 쥐었을 때 눈물이 강물이 되도록 울었어요. 시험에 합격하고 나서 말씀드렸는데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는 거예요.”
서울대학교 농대에서 일할 당시 선생님이 되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농대 학장은 유독 박애란 동년기자에게 “우리 여 선생님 오셨네”라고 하셨다.
“일반직 여직원이 80명이 넘는데 저한테만요. 내가 주장하고 싶은 건 꿈은 이루어진다는 겁니다. 제가 학교와 선생님을 좋아했어요. 제게 학교로 가는 길을 만들어준 것이라고 생각해요.”
트라우마를 조금씩 치유하고 어릴 적 자신과 타협하며 매일 조금씩 나아가며 살아가는 박애란 동년기자는 화려하게 보이는 일은 물론이고 매일 공부하며 사는 하루가 행복하다고 했다. 현재는 문화원에서 다양한 공부를 하는 것 이외에도 방송통신대학교에서 미디어영상학과를 전공하고 있다. 지금까지 농학과, 국어국문학과, 가정학과와 문화교양학과에 이어 미디어영상학과까지 5번째 입학이다.
“우리 집 TV는 방송대 채널에 고정돼 있어요. 예능프로그램은 볼 생각해본 적 없고 클래식 음악 채널이나 다큐채널을 틀어놓아요. 지금이 내 인생의 황금기인 거 같아요.”
압구정 날라리는 폼생폼사?
인터뷰도 하기 전에 이런 제목이 어떨까 하고 물어온 박애란 동년기자. 저 느낌이 본인 캐릭터라고 밝게 웃는다.
글쎄 눈물의 근원과 굴곡진 인생 얘기를 듣고 나니 그녀가 가볍게 폼생폼사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없다. 오히려 마감할 뻔했던 삶을 치유하고 보듬으며 매일을 기똥차게 열심히 사는 시니어, 내면에서 흐르는 진정한 멋을 가진 여인으로 느껴졌다. 앞으로 더 깊고 고운 아름다움으로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빛내는 동년기자로 함께해 주시길 부탁드린다.
브라보 3기 동년기자 릴레이 인터뷰를 본지 에디터가 진행합니다.
‘2018 한국마임’이 오는 5일부터 9일까지 성북구 삼선교 (4호선 한성대입구역 2, 5, 6번 출구 근방 소극장과 야외 공간) 일대에서 열린다. ‘삼선三仙과 놀다!’ 라는 부제가 달린 이번 축제는 거리에서 열리는 공연이라면 누구나 무료 관람할 수 있다. 1989년부터 시작해 서른 번째를 맞이한 ‘한국마임’ 축제는 ‘춘천국제마임축제’의 효시이자 대한민국 마임계 오랜 주축으로 자리 잡아 왔다.
마임 예술의 대중화에 앞장선 사다리움직임 연구소의 인기작 ‘휴먼 코미디’를 비롯해 다양한 형태의 마임극이 삼선교 일대는 수놓는다. 무엇보다 야외무대에서 즐길 수 있는 공연들이 눈에 띈다. 세대, 지역 불문 누구든지 즐길 수 있는 재미난 공연으로 꾸며졌다.
무뚝뚝한 게 무조건 매력이라는 안동윤의 ‘경상도 비눗방울’, 관객과 함께하는 저글링 공연 강한구의 ‘궁금해?’, 어릿광대의 시들어가는 화분 되살리기 프로젝트 홍창종의 ‘어릿광대쇼’, 현대철과 삑삑이의 ‘신출귀몰 야외공연’과 호모루덴스 컴퍼니의 ‘달걀귀신 퍼포먼스’ 등 재기발랄한 대한민국 광대의 공연을 제대로 만날 기회다. 마임축제는 유머로 가득 찬 광대들의 익살스러운 공연을 물론이고 진지하고 우아한 몸짓 언어의 서정성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이번 한국마임 축제는 공연예술의 대명사인 대학로를 벗어나 바로 옆 동네인 삼선교에서 진행한다. 성북구(삼선교)는 서울에서도 문화예술인이 가장 많이 거주지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이웃의 모습이 아닌 공연자로서 관객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가고자 했다. 공연뿐만 아니라 남녀노소가 함께하는 체험행사도 준비하고 있다. 서울문화재단과 성북문화재단이 후원하는 ‘2018한국마임’ 소통의 본질은 개개인의 몸에 있다는 근본적 진리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게 될 것이다.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주 52시간 근로 제도가 시행됐다. 다양한 의견과 논란이 나오고 있다. 그 바탕에는 4차 산업혁명이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삶에 대한 큰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다가올 미래엔 어떻게 변할지도 예측이 어려울 정도다. 산업혁명이 삶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여러 가지 변화 중에서 급격히 늘어날 여가 관리가 크게 주목받고 있다. 여가 혁명이라는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지금 살고있는 마을은 벼농사를 짓는 논으로 둘러싸여 있다. 모내기 철이면 농기계를 이용하여 논의 써레질과 모내기를 혼자서 손쉽게 마친다. 과거에 논을 고르는 일은 소를 이용했고 모내기는 사람 손으로 했다. 농사철이면 귀신도 일손을 돕는다고 했을 정도였다. 기계화에 따라 소나 사람의 역할은 크게 줄어들었다. 이러한 기계화에 이어지는 4차 산업혁명은 더욱더 사람의 노동력을 크게 줄여 한가한 시간, 즉 여가는 많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는 여가의 개념을 은퇴한 후의 분야로 생각했다. 여가 관리나 여가 설계는 노후 생활의 한 방편으로 취급하여 노후설계 강좌엔 필수 항목으로 들어간 이유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여가는 직장인이나 사업가, 정년퇴직한 사람에게 적용이 다를 수 없다. 사람이 하던 많은 부분을 인공지능 로봇이나 사물인터넷, 3D프린터 등으로 대체해 가고 있다. 당연히 그 시간이 여가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늘어나는 여가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가장 큰 고민거리로 등장한다. 국내 어느 대학의 한 교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류가 임금을 받는 노동에서 완전히 해방되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일주일에 50~60시간 일하던 것을 10시간 내외로 줄일 수 있을 것”이라 내다봤다. 여가가 넘쳐나는 미래가 오고 있음이다. 이런 예측은 어제오늘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1930년쯤에 영국의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2030년이 되면 인류는 주 15시간 일할 것이고 무한한 여가를 보내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 했다. 4차 산업혁명으로 그동안 인간이 하던 모든 작업을 대신하게 되고 그 시간을 사람들은 예술과 드라마, 춤, 상상이 만들어낸 삶에 몰입함으로써 여가를 풍부하게 즐길 기회가 많이 늘어날 것이다. 그야말로 여가 혁명 시대가 오고 있다.
단순한 시간 보내기가 아닌 인간의 궁극적 목적인 행복 추구를 위하여 접근해야 한다. 개인이나 회사, 기관이나 정부 차원에서도 여가 혁명 시대를 슬기롭게 대응해 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한다. 언론 매체에도 구체 대안을 끌어내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그 시기는 상상 이상으로 빨리 올 수 있다.
노후에 가장 무서운 건 뭘까? 어렸을 땐 호랑이가 가장 무서웠고 이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귀신이 무서웠다. 사람이 만들어놓은 상상 속의 존재가 귀신이다. 구체적으로 누가 봤다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저 소설 속에서, 영화 속에서 본 것이 전부일 뿐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고 살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는 시골집에 사셨다. 자식들은 다 나가 살아 곁에 있는 자식도 없었다. 자식이 여섯이나 되어도 함께 사는 자식이 없으니 시골 큰 집에 어머니 혼자 계셨다. 아버지가 계실 때는 두 분이 계셔서 그런지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남는 방을 세놓으라고 말씀드리면 “방이 몇 개는 있어야 자식들 오면 엉덩이 붙일 곳이라도 있지” 하셨다.
그런데 집이 오래되어 여기저기 낡아 기둥도 삭아 있었고 모서리의 아귀도 맞지 않았다. 창문 틀도 안 맞아 바람이 들어오기도 했다. 큰 고장이야 없었지만 자질구레하게 손볼 곳도 많았다. 낡은 집이라 바람이 세게 불면 창문도 흔들리고 가끔은 서까래도 삐걱거렸다. 두 분이 사셨을 때는 별일 아닌 거로 넘겨버렸을 일이지만 혼자 큰 집을 사신 뒤로는 별별 생각이 다 드셨으리라. 도둑이 들거나 외부 침입자가 들어와 무슨 일을 저지를지도 모를 일이다. 무슨 소리가 날 때마다 신경이 곤두서셨을 것이다. 누구든 생각이 한쪽으로 몰리면 걷잡을 수가 없게 되는 법. 예민하신 어머니는 밤마다 악몽에 시달리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자식들이 내려가면 어머니는 무섭다는 말씀을 늘 하셨다. 그러면서도 또 사람이 그립다고도 하셨다. 속수무책의 외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시골집을 떠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무서워 못 살겠다고 막내딸에게로 가셨다. 자식들에게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렇다고 생업을 포기하고 내려가 같이 살아 드릴 수도 없는 처지였다. 기껏 드릴 수 있는 말은 “어머니 무섭긴 뭐가 무서워요”, “요새 귀신이 어디 있어요?”라는 말뿐이었다. 어쩌면 자식들의 무관심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는 결국 시골집을 포기하셨다.
어머니가 시골집을 떠나시고 몇 해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사람이 살지 않으니 마당 가득 망초며 엉겅퀴 그리고 억새 등 각종 잡풀이 무성했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풀씨들은 계단이며 처마 밑까지 빈틈없이 들어와 자랐다. 사람이 살던 집 같지 않았다. 썰렁해 보이고 을씨년스럽기까지 했다. 그렇게 시골집은 점점 황폐해져갔다.
그래도 넓은 시골에서 쾌적한 공기를 마시고 편히 사시기를 바랐는데 어머니는 불편하셨던 모양이다. 무엇보다도 하루 종일 대화할 상대가 없으니 그것이 가장 힘드셨던 것 같다. 무섭다는 말씀은 어쩌면 그립다는 말이었으리라. 그것을 자식들은 몰랐다. 자식들은 고향 시골집이 거의 폐허가 된 뒤에야 깨닫게 되었다. 어머니가 좁은 단칸방에서라도 자식들과 함께 지내고 싶으셨다는 것을….
필자가 어렸을 적부터 오랫동안 살았던 곳은 돈암동이다. 당시 돈암동 랜드마크는 태극당이라는 제과점이었다. 친구들과 약속을 정할 때 ‘태극당 앞 몇 시’ 하면 다 통할 정도로 유명한 곳이었다. 규모도 상당히 컸고 빵도 맛있고 고급이라는 이미지가 있어 자주 이용했으며 그땐 데이트도 제과점에서 하는 게 보통이었다.
중학교 때 필자는 전차 통학을 했다. 전차 종점도 태극당 바로 앞이어서 사람들도 많이 몰리는 장소였다. 요즘엔 성신여대입구역이 있어 명동 못지않은 복잡하고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지금도 태극당 제과점이 그 자리에 있지만 이전의 반 정도로 규모가 줄어서 아쉬운 느낌이다.
태극당에서 미아리 쪽으로 넘어가는 곳에 미아리고개라 불리는 언덕이 있다. 우리나라 사람이면 다 알고 있듯이 미아리고개는 ‘한 많은’ 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녔다. 한때 지자체에서 한 많은 미아리고개라는 이미지를 없애려 언덕 양편 축대 담벼락에 샛노란 개나리를 잔뜩 심어 개나리고개로 부르자는 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언덕 양편에 흐드러지게 피어 늘어져 있는 노랑 개나리가 매우 보기 좋았고 한 많은 미아리고개보다는 예쁜 개나리고개로 변신한 것이 즐겁기도 했는데 요즘은 아파트 공사가 많아서인지 봄이어도 개나리가 눈에 띄지 않는다.
미아리고개는 ‘단장의 미아리고개’라는 노래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 많은 미아리고개였다. 한이 많다는 표현에서 가슴 아픈 우리의 역사가 짐작된다. 필자가 6·25 전쟁 이후에 태어났기 때문에 전쟁을 겪은 세대는 아니지만, 전쟁이 끝날 무렵 퇴각하는 북한군이 우리나라의 고위인사나 죄 없는 사람들을 북으로 끌고 갔는데 그때 이 미아리고개를 통해 넘어갔다고 한다. 끌려가는 가족을 이 언덕에서 가족들이 지켜보았다니 정말 단장의 고개였을 것이다. 그 모습을 표현한 그림이나 노랫말을 들어보면 너무나 가슴이 아프고 슬프다.
그러나 필자에게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픈 느낌만 있는 건 아니다. 중·고교 시절 미아리고개를 넘어가면 삼류극장인 미도극장이 있었다. 동시상영 극장이었는데 한 번 들어가면 두 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다. 학생은 출입 불가였지만 변두리 극장이어서 무사통과가 가능했다. 영화보기를 좋아했던 필자는 이곳으로 자주 영화를 보러 갔다. “선도부 선생님 떴다!” 하면 화장실로, 계단 뒤로 도망다니기도 했던 짜릿하고 신나는 추억도 있으니 필자에겐 미아리고개가 그렇게 슬프기만 한 고개는 아닌 것이다.
또 다른 기억도 있다. 돈암동 쪽에서 바라다보이는 미아리고개 왼쪽 언덕 위에 양옥집이 있었다. 귀신이 나오는 흉가라고 소문이 나서 친구들도 모두 무서워했다. 그 집을 싸게 사들이려는 사람의 음모였다는 소문도 있었지만 어쨌든 우리는 언덕 위의 그 양옥집을 보면서 오싹함을 즐기기도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양쪽을 가로지르는 구름다리와 아리랑 아트홀이라는 문화공간도 생겼다.
미아리고개를 넘으면 바로 길음 뉴타운이 있다. 고층 아파트가 들어서고 유명 여고를 유치하는 등 발전된 모습을 보이고 있어 더 이상 슬픈 동네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필자가 수십 년 지나다닌 미아리고개가 한과 슬픔의 이미지를 벗고 더욱 발전된 평화의 공간으로 거듭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비에 흠뻑 젖어도 걱정이 없었습니다. 추워 귀가 떨어져나가는 것 같아도 그랬습니다. 집에 가면 마른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고, 따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친구와 언짢은 일이 있어도 집에 가면 마음이 편했습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내 편이었으니까요. 어렸을 적에 집은 그랬습니다. 걱정이 없는 공간, 집을 그렇게 지금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늘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집의 소멸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전쟁은 집[家屋]도 집[家庭]도 산산이 부숴버렸습니다. 나는 집 없이 살아야 했습니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지면 으레 집에 가야 할 때가 되었다고 마음은 서두는데 막상 일어서면 망연하기 그지없었습니다. 갈 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이 얼마나 저렸던지 나중에 내 집을 지니고 잠자리에 들면서도 ‘어서 집에 가야지!’ 하는 생각을 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랬다고 딱히 말할 수는 없지만 이래저래 집을 꾸리고 장만하는 일은 내 삶의 목표이기도 했고 삶 자체이기도 했습니다. 집 한 칸도 없으면서, 나는 친구들보다 먼저 집을 꾸렸습니다. 둘 다 눈이 멀어서 그랬겠지만 아무튼 집은 둘이서 함께 장만하면 되지 않느냐는 사랑하는 여인의 말에 감동해서 벌컥 일을 저지른 셈인데 집 장만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쉽지 않을 정도가 아니라 집 장만 하느라 우리 둘의 세월을 다 보냈다고 해야 할 만큼 힘이 들었습니다. 셋방살이조차 방 넷에 부엌이 세 개인 산등성이 무허가 주택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꼽아보니 그 뒤로 정확하게 14번째 집에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집을 살아가면서’ 어줍지만 집을 나 나름대로 다듬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집은 지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더 정확히 말하면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집은 머무는 곳입니다. 하기야 집뿐이겠습니까? 세상의 어느 것도 누가 그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 사람처럼 어리석고 딱한 사람이 따로 없다고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실은 나도 별 차이가 없지만 나는 ‘소유라는 착각’, 그것의 비극성을 언제나 잊지 않으려고 의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자기 것이라 여겨 그것을 자기가 누릴 영구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거개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집도 다르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집이란 자기가 살 영원한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기의 꿈을 이루기 위한 온갖 정성을 집을 장만하고 집을 짓고 집을 꾸미는 데에 쏟아 붓습니다. 참 좋고 부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기술한 ‘집의 생애사’ 또는 ‘집의 편력’이 개인의 독백만이 아니라 어쩌면 ‘집 경험의 보편성’을 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유념한다면 ‘지니는 것으로서의 집’이 아닌 ‘머무는 곳으로서의 집’을 생각하면서 집에다 쏟아 붓는 정성을 조금은 ‘절제’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바꾸어 말한다면 소유의식의 과잉은 사치를 낳습니다. 그리고 사치라는 이름의 넘침은 늘 일컫듯 모자람만 못합니다. ‘지님의 의식’이 아닌 ‘머묾의 의식’은 그 사치를 억제하게 해줍니다. 그래서 집은 그저 ‘웬만하면’ 된다는 자족감으로 행복할 수 있어야지 내 것이니까 완벽한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골똘하면 뜻밖에 삶의 많은 부분을 나도 모르게 잃어버릴 수도 있게 된다는 생각이 집에 대한 나의 이해입니다.
그렇다면 집과 더불어 주목할 것은 그 집 안에서 이루어지는 ‘집의 삶’입니다. 디자인을 공부한 친구는 젊었을 때 나중에 자기는 자궁(子宮)과 같이 생긴 집을 짓겠다고 한 적이 있습니다. 까닭을 묻자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원초적인 평온(平溫)함 안에 머물고 싶으니까!” 평온을 일게 하지 못하는 집은 집이 아닙니다. 평온이 담기지 않으면 그 집은 집이 아닙니다. 집이 있어도 집은 없습니다.
세상의 집들은 참 여러 모습입니다. 인도네시아의 시골에서 어느 집에 들른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개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고 거기 거의 투명한 발이 처져 있어 방과 방을 구분한 그런 집이었습니다. 그래야 바람이 시원하게 드나들겠지만 사사로운 공간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당연하게 부부간의 은밀한 사랑을 어떻게 나누느냐고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꼭 집에서 나눠야 하나요?” 우리가 이해하는 집 안에서의 삶이 집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타이완의 한 고산족 집은 기어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집 안에서는 일어나 걷지 못합니다. 천장이 낮으니까요. 불편하지 않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일어나 걸을 필요가 있나요?” 집은 오로지 누워 휴식하는 공간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삶은 집보다 훨씬 넓고 높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몽골의 집 게르[包]는 둥근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어도 옆으로 새어 흘러 집이 날아가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아니면 이동하기 좋도록 한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의 지혜가 낳은 건축 기술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에스키모의 얼음집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도 전통적인 집들이 원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바람도 심하게 불지 않고 이동할 필요가 없는 곳인데도 둥근 집에서 삽니다. 둥근 집의 산재(散在) 현상은 무척 흥미롭습니다. 더 흥미로운 것은 문화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둥근 집을 설명하는 데에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모퉁이, 모서리, 구석에는 못된 귀신이 깃든다는 이야기입니다. 그 귀신이 집안 식구들을 병들게 하고 다투게 하고 온갖 못된 짓을 다 한다는 거죠. 그러니까 그것을 피하려면 모서리나 모퉁이나 구석이 없는 둥근 집을 지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는 어차피 집을 꾸리고 집을 짓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보니 집을 장만하느라 허리가 휘인 채 한살이가 훌쩍 지납니다. 겨우 집을 장만해놓았더니 꾸린 식구들이 훌훌 떠나가 텅 빈 집을 마련하느라 이렇게 힘들었나 싶기도 합니다. 애써 온갖 치장을 다하여 이상적인 집을 가꿨나 싶은데 이제는 내가 모든 것 버리고 떠나가야 할 때가 가깝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모든 노력이나 정성이 허무한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내 집에 모퉁이나 그늘진 구석이 없는 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집을 마련하려면 모퉁이 없는 둥근 집을 마련하십시오. 집을 꾸리려면 구석이 없는 환한 집을 꾸리십시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