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떠나 긴 세월에 내 청춘 어디로 가고 삶에 매달려 걸어온 발자취 그 누가 알아주랴 두 주먹 불끈 쥐고 살아온 날들 소설 같은 내 드라마…’ -케니 김 1집 ‘내 청춘 드라마’ 케니 김(70). 그는 LA의 트로트 가수다. 한국에서 온 연예인도, 주체할 수 없는 끼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한 성격에 낯가림도 심하던 그가 무대 위에서 그것도 뽕짝을 부르는 가수가 됐다. 연매출 200만 달러의 식품회사 경영권도 아내에게 넘기고 말이다. 올해로 데뷔 7년 차. 1집 ‘노신사의 노래’에서 따끈따끈한 신곡 ‘무명가수’까지. 그의 노래 속에는 43년간의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25개의 직업, 불도저 케니 김
1946년 경북 대구에서 나고 자란 그의 집안은 지독히 가난했다. 하고 싶은 것이 많아서 가슴이 터질 것 같았던 20대.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돈 없고 빽 없고 가방끈까지 짧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별로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작은아버지 공장에서 허드렛일을 하다가 군대에 지원해 월남에 갔어요. 월남전 막바지라 참 위험했는데 나에게는 막막한 세상으로부터의 탈출구 같았습니다.” 베트남에서 처음 만난 미국은 풍요로움 그 자체였다. 꿈을 꾸는 누구에게나 평등한 나라, 가난하고 힘없고 배운 것 없어도 열심히 일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때마침 미국의 이민법이 개정되면서 한국에도 미국 이민 문호가 활짝 열렸다. 머나먼 그곳에 친척 고모 한 분이 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일단 그곳으로 가기로 했다. 기술 하나는 있어야 할 것 같아서 고압용접 자격증을 땄다. 1973년, 스물다섯의 청년 김종길은 그렇게 고국 대한민국을 떠나왔다. 그리고 미국 땅에서 케니 김이 되어 살아온 지 어느덧 43년이다. “먼 친척 고모뻘 되는 분이 살고 있는 오하이오 주 데이톤으로 무조건 갔죠. 물론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고요. 300달러 손에 쥐고 공항에 내렸는데… 이상하게 겁이 하나도 안 나더라고요. 오히려 정말 원했던 것을 이뤘다는 희열을 느꼈어요. 걸리는 것은 딱 하나, 한국에 두고 온 약혼자 순이였죠(웃음).” 용접기술을 배워간 덕분에 취업도 쉬웠다. 하루 종일 말 한마디 없이 작업에만 열중하는 그를 사장들은 좋아할 수밖에 없었다.영어를 알아듣지 못해 말을 하지 못했던 것인데도 말이다. 6개월 만에 비행기 티켓을 마련해 약혼자에게 보냈고 꿈에 그리던 순이는 미국으로 와서 케니 김과 결혼했다. 지금의 아내, 우순이(68)씨다. 이듬해 두 사람은 뉴올리언스로 이주한다. 당시 뉴올리언스는 석유 시추의 선봉에 서 있었다. 시추선에서 작업하는 고압용접 기술자는 흔하지 않았기 때문에 최고의 대우를 받을 수 있었다. 그만큼 위험하고 고된 일이었다. “망망대해에 떠 있는 석유 시추선에 한 번 오르면 2주일은 그곳에 머물러야 했어요. 물론 동양인은 나 하나였죠. 그래도 일만 하면 되니까 괜찮았는데 문제는 아내였죠. 당시 첫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거든요. 나 없을 때 아기가 나오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설마설마하던 일이 진짜 생기더라고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병원에서 아내는 홀로 아기를 낳았다. 첫딸 제인이었다. 어쩔 줄 몰라 울기만 하던 아내와 시추선 위에서 발만 동동 구르던 남편. 이제는 웃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지만 참 고단하던 시절이었다. “둘째 지나가 태어난 이후로는 정말 손이 무르도록 일만 했어요. 아내가 일했던 세탁소와 가발가게가 두 딸의 놀이터였죠. 겨우 돈을 좀 모아 자동차 바디숍을 인수했는데… 불이 나서 잿더미가 됐어요. 후에 미시시피 강에서 모래를 파 올리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그해 여름 허리케인으로 모든 것이 다 떠내려갔고요. 주저앉아 울 틈이 어디 있어요? 새끼들 데리고 살아야 하는데. 그야말로 산전수전 공중전을 다 겪었지요.” 시푸드 레스토랑의 성공으로 기반을 다진 부부는 1994년 지금 살고 있는 샌디에이고로 이주한다. 이곳에서는 농사꾼이 되어 오이, 참외 등을 기르기 시작했다. 농사의 ‘농’ 자도 모르던 케니 김씨는 한국농촌진흥청까지 날아가 오이농사 비법을 배워왔고 결국은 농장 사업도 크게 성공시킨다. 하지만 또다시 시련이 찾아온다. 지인으로부터 멕시코 농장 투자 사기를 당한 것. 김씨는 수십만 달러의 빚더미에 올라앉게 된다. 돈도 돈이었지만 믿었던 사람의 배신은 오랫동안 김씨를 괴롭혔다. “화재로 잿더미에도 앉아보고 홍수로 다 떠내려가기도 했고 사업도 수차례 망해봤지만 한 번도 좌절한 적은 없었어요. 다시 시작하면 됐으니까요. 그런데 믿었던 사람한테 속은 것은 정말이지… 힘들더라고요. 홀로 멕시코 시골에 틀어박혀서 1년을 지냈는데 그때 인생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요.”
가수 선언! “나도 가수다”
가발가게, 세탁소, 피자가게, 시푸드 전문점, 패스트푸드점, 야채농장, 광산개발, 부동산, 콩나물 공장… 어느 날은 부부가 작정하고 미국에서 했던 일들을 하나하나 헤아려봤다고 한다. 종사했던 비즈니스가 25가지나 되었다. 이들 부부가 남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케니 김씨의 역할이 크다. 우순이씨는 남편에게 ‘불도저’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뭐 하나에 꽂히면’ 기필코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마디했다. “추진력 하나는 끝내주는 양반이에요!” 김씨는 1998년 해조류 가공업체 ‘켈프누들’을 설립, 재기에 성공한다. 다시마를 가공해 만든 국수 ‘씨탱글’이 주력 상품이었다. 그는 에스콘디도 산자락 불모지에 공장을 지었다. 버려진 컨테이너로 공장 건물을 올리고 국수를 뽑아내는 기계는 직접 설계해 만들어냈다. 대부분 고물상에서 구입한 고철들을 용접으로 붙여가며 이루어낸 작업이었다. 이어 영어에 능통한 딸들을 불러들여 시장을 공략했는데 그의 예상은 적중했다. 때마침 불어닥친 웰빙바람으로 ‘씨탱글’은 무섭게 팔려나갔다. 현재 켈프누들 제품은 홀푸드, 마더스 마켓 같은 미국 최대의 유기농 마켓에 납품되며 유럽 등 10개국에도 수출되고 있다. 연매출 200만 달러에 이르는 알짜배기 기업이다. 전쟁 같던 이민생활에 조금씩 평화가 찾아오고 어느덧 두 딸도 짝을 만나 슬하를 떠났다. 이제 겨우 숨 좀 돌리려고 보니 어느덧 환갑을 훌쩍 넘긴 나이.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하던 친구가 병을 얻어 덧없이 가는 것을 보고는 가슴이 헛헛했다. 장례식을 다녀온 날 김씨는 큰 결심을 하고 가슴에 꼭꼭 숨겨놓았던 이야기를 꺼내놓았다. “그래, 나 하고 싶은 것 한번 해보자 했죠! 중학교 때 학원비 떼어먹으며 배운 기타가 내 음악 인생의 전부이지만 한 번도 가수에 대한 꿈을 저버린 적은 없었어요.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이야기겠지만 진심으로 가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하하하.” 가장 놀란 사람은 아내 우순이씨였다. 남편의 트로트 사랑이 유별난 것은 알고 있었지만 가수라니. 그것도 자기 노래를 만들어 앨범을 내는 진짜 가수가 되겠다는 것이었다. 허투루 말하는 법이 없고 한 번 결심하면 무슨 일이든 해내는 사람인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아내는 기분 좋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자기를 위해서는 평생 1달러도 안 쓰던 사람이에요. 야채 농사를 지어 LA로 배달을 나갈 때 왕복 4시간 운전을 하면서 노래를 부르던 모습이 떠올랐어요. 아, 이 사람이 정말 하고 싶은 것이었구나… 마음이 찡하더라고요. 그래 그렇게 열심히 살았으니까 선물을 하자. 그래서 하고 싶은 거 하라고 했죠. 그런데 앨범 하나로 끝날 줄 알았는데 벌써 4집까지 나왔네요. 하하하.” 아내의 허락(?)이 떨어지자 과연 불도저답게 밀어붙였다. 한국에 나가 고시텔에 묵으며 직접 가사를 쓰기 시작했고 곡을 붙여줄 작곡가를 수소문했다. 작곡가 김준규씨와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이었다. 김준규씨는 1980년대 가수 주현미를 스타로 만들었던 트로트 메들리 앨범 ‘쌍쌍파티’의 제작자다. 2010년 케니 김 1집 ‘노신사의 노래’가 나오기까지는 꼬박 1년이 걸렸다. 매일 4시간씩 노래 지도를 받았고 모든 노래 가사를 직접 썼다. 케니는 따근따끈한 자신의 앨범을 훈장처럼 품에 안고 돌아왔다. 그렇게 케니 김은 63세에 늦깎이 가수가 되었다.
당신께 바치는 노래
이때부터 아내 우순이씨는 가수 케니 김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이 됐다. 한인 라디오 방송국 ‘라디오코리아’에 남편의 앨범을 보냈고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는 곧 방송을 탔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가수 케니 김의 사연과 노래가 미 전역의 이민 1세들의 심금을 울린 것이다. 그들 모두가 척박한 미국 땅에서 눈물과 땀을 쏟아냈던 또 다른 케니 김이고 우순이였다. 방송이 나간 후 팬이 되고 싶다는 전화와 편지들이 쏟아졌고 부부는 이들에게 하나하나 앨범을 선물했다. 밑지는 장사였지만 케니 김은 행복했다. “애당초 음반을 팔아 돈 벌 생각은 추호도 없었어요. 그저 힘들게 위로가 되었던 노래가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렇게 부른 노래가 또 누군가에게 위로가 된다면 그보다 귀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데뷔 7년. 어느덧 케니 김은 4집 앨범까지 낸 어엿한 중견가수가 됐다. 크고 작은 한인 행사에 초대가수로 불려가고 종종 한국에서 오는 가수의 공연에 오프닝 무대를 장식하기도 한다. 하지만 돈벌이는 여전히 안 된다. 초대받은 행사에 가서 출연료는커녕 기부금까지 내고 오기 일쑤다. 몇 해 전부터는 5월 어버이 날이 되면 100여 명의 노인들을 집으로 초청해 효도잔치를 하고 있다. 그 역시 효도를 받을 나이이지만 누군가를 섬길 수 있다는 것을 큰 기쁨이자 보람으로 생각한다. “어느 해 집 주위에 매실이며 살구가 너무 실하게 열렸더라고요. 우리 둘이 먹기에는 너무 많아 주위의 노인분들에게 오셔서 따가시라 했죠. 너무들 좋아하시더라고요. 미국에 살면서 나들이도 제대로 못하며 살았다는 말을 듣고 마음이 아팠어요. 잔치 한번 열어드리려 한 것이 연중 행사가 되어버렸어요. 맛있는 것 실컷 먹고 노래 실컷 부르면서 즐기시는 거 보면 덩달아 기분 좋습니다. 친구 생각,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도 나고요. 뭐 이게 사는 재미 아니겠습니까.”
아메리칸 드림이 별거 있더냐
케니 김씨는 자신만을 위해 시작한 노래를 이제 다른 이를 위해 부르고 있다. ‘수많은 날들 비바람에도 쉬지 않고 걸어온 우리, 여보 정말 고생 많았소~’ 덤덤한 노랫말이 인상적인 ‘무지개’는 사랑하는 아내를 위한 노래이고, 귀에 착 감기는 미디움 템포의 ‘아메리칸 드림’은 먼 이국땅에서 꿈을 향해 달리고 있는 모든 이민자들에게 바치는 노래다. 성공을 위해 별의별 일을 다 해본 이민자 케니 김은 아메리칸 드림은 별게 아니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의 진솔한 고백이다. “아메리칸 드림이요? 이루었죠! 돈을 많이 벌어서가 아니에요. 돈은 믿을 게 못 됩니다.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생기죠. 많은데도 늘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가 하면, 없어도 많은 것처럼 살 수도 있어요. 중요한 것은 나에게 꿈과 희망이 있냐는 것입니다. 한국을 떠나오는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꿈을 꾸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실패해도 두렵지 않았던 것은 또다시 꿈꿀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꿈을 향한 그의 열정과 집념은 삶의 원동력이다. 열심히 바쁘게 살면 늙을 시간도 없다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불도저 케니 김이 요즘 푹 빠져 있는 것이 있다. 바로 뮤직비디오 제작이다. 아마추어 친구들이 힘을 모아 ‘아메리칸 드림’ 뮤직비디오를 만들어 유튜브에 올렸는데 무척 재미있는 작업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이 훨씬 쉽게 노래를 가까이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래를 부르고 듣기에도 참 좋아진 세상이에요. 저는 좋아하는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겨우 구해서 늘어질까봐 아끼고 아껴서 듣던 시절에 살았어요. 캘리포니아에 이사 오면 한국어로 라디오가 나오고 트로트를 실컷 들을 수 있겠다 싶었는데 당시엔 샌디에이고까지는 잘 안 나오더라고요. 얼마나 속상하던지… 아무튼 노래듣기에도 가수하기에도 참 편하고 재미있는 세상입니다.” 지난 4월, 따끈따끈한 새 음반이 두 장이나 나왔다. 하나는 ‘쌍쌍파티’의 리메이크 앨범 ‘케니 김 주연하의 쌍쌍파티’, 또 하나는 케니 김의 4집 앨범이다. ‘쌍쌍파티’는 현재 한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절찬 판매중이다. 지난달 음반 판매 수익금 88만원도 받았다. 데뷔 7년 만에 처음으로 번 돈이다. 4집 앨범의 타이틀 곡은 ‘무명가수’, 흥겨운 댄스곡이다. 물론 이번에도 직접 가사를 썼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노래 불러요
스트레스 날리고 장단에 맞춰
박수치며 노래 불러요
행복의 바이러스 드리겠어요
나는나는 무명가수야
우리들에게 행복의 바이러스를 주겠다는 LA의 무명가수 케니 김. 그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꿈이 자리 잡고 있다. 장인의 노래가 18번이라는 든든한 첫째 사위와 CCM가수인 둘째 딸 지나와 함께 가족 콘서트를 여는 것이다. 딸과 함께 부르는 트로트 메들리도 멋지지 않겠나. 매니저이자 팬클럽 회장에서 이제는 의상 코디며 메이크업까지 담당하고 있는 아내는 가만히 미소짓는다. 아내의 미소는 늘 케니 김에게 든든한 힘이 되어주곤 했다. 머지않아, 그의 새로운 도전이 또다시 시작될 것이다.
체코, 오스트리아, 폴란드에 끼인 지리적 위치 때문에 ‘유럽의 배꼽’이라 불리는 슬로바키아는 한국인에게 여행지로 잘 알려진 곳이 아니다. 유명세는 적지만 매력이 폴폴 넘치는 곳. 사람들은 흥이 많고 무엇보다 물가가 싸니 이보다 좋은 곳도 드물다. 한국 기업들이 속속 자리를 튼 이유일 것이다. 슬로바키아 수도 브라티슬라바는 유럽에서 가장 작은 수도다. 시내라고 해야 차로 20분이면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다.
11세기의 브라티슬라바 성에서 다뉴브 강 조망
한국의 많은 이가 아직도 슬로바키아를 ‘체코 슬로바키아’로 안다. 현지인들에게 나라 명을 잘못 말하면 발끈하면서 다시 일러줄 것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여러 우여곡절 끝에 1993년 1월 1일, 독립국으로 분리되었다. 슬로바키아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시내는 걸어서 여행해도 충분하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호조로 광장에는 대통령 관저가 있다. 1760년에 건축된 그라살코비크 궁전을 현재 관저로 이용하고 있다. 광장에서 고개를 들면 브라티슬라바 성이 보인다. 테이블을 거꾸로 놓은 듯해서 ‘테이블 캐슬’이라 부른다. 말 그대로 납작한 사각형 상이 뒤엎어져 상다리 4개가 솟아오른 듯하다. 11세기에 지어진 후 1800년대 헝가리의 지배 때 파괴됐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건된 성이다. 성안에 스바토플룩
1세와 모라비아인 동상이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아의 영토를 최대로 확장시킨 가장 위대한 군주였기 때문이다. 성 내부는 갤러리로 이용하고, 외부에는 성녀 엘리자베스의 동상과 부서진 유적들이 흩어져 있다. 무엇보다 성 니콜라이 교회의 첨탑 밑으로 보이는 구시가지의 지붕들, 다뉴브 강을 잇는 노비 모스트(Novy′ Most, 새로운 다리란 뜻), 성곽 옆으로 훤히 내려다보이는 강변 풍치가 아름답다. 간헐적으로 운행되는 도심 투어용 빨간 꼬마 열차도 예쁘다.
중세의 물결 일렁대는 올드 타운에 남은 교회와 건물들
성곽을 비껴 조약돌이 박힌 옛 골목길을 걸어 성벽 샛길로 들어서면 올드 타운이다. 성벽 앞에는 십자군 중세 군인 복장을 한 젊은이들이 관광객들에게 체험을 유도하고 있다. 카피툴스카 좁은 골목에서 만난 바는 와인이 맛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듯, 포도 줄기를 넝쿨 채 치장했다. 해묵은 골목 바에 앉은 연인들의 속닥임이 잘 숙성된 포도주 향처럼 진하게 번진다. 회색빛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 마르틴 대성당(2002년 국가문화재로 지정)은 웅장하고 고풍스러움이 가득하다. 무려 230여 년(1221~1452)에 걸쳐 완성된 성당에서는 합스부르크 왕 11명의 대관식이 치러졌고 베토벤(1770~1827)이 4년 동안 매달려 만든 ‘장엄미사(1823년 완성)’가 초연되었다. 이 도시를 사랑한 베토벤은 ‘월광 소나타(1801년 작곡)’를 만들었다. 프란츠 리스트(1811~1886)는 살아생전 15번이나 방문했다. 특히 브라티슬라바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리스트는 사망하기 1년 전(1885년)에도 이 성당을 찾았다. 그는 이곳에서 영혼의 안식을 찾곤 했다고 한다. 또 성 프란시스칸 교회와 성녀 엘리자베스를 봉헌한 성 엘리자베스 교회도 유명하다. 특히 성 엘리자베스 교회는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축물로 건물 내·외부가 모두 푸른색이라 ‘블루처치’라고도 불린다. 헝가리 왕 앤드류 2세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는 14세에 독일 튜링가와 정략결혼을 했으나 20세에 미망인이 된다. 이후 그녀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해 혼신을 다 바쳤다.
골목 속에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 찾기
올드 타운으로 깊숙이 들어갈수록 골목은 더 규칙 없는 미로다. 국민 시인, 파볼 오르사그 흐비에즈도슬라브(1849~1921)의 이름을 붙인 광장에는 1572년, 막시밀리안 2세가 만든 분수대(롤랑드)가 있다. 이 도시에서 가장 오래되었다. 주변에는 구시청사, 국립미술관 등을 비롯해 온통 유서 깊은 건축물들이다. 특히 숨은 스토리텔링 조각상들을 찾는 재미가 있다. 메인 광장 벤치에서 ‘대화를 엿듣는 나폴레옹’, ‘추밀(Cumil)’은 맨홀 뚜껑을 열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엿보고 있다. 추밀의 동상 머리가 반질반질한 것은 만지면 행복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 또 벽 뒤에 숨은 파파라치, 중절모를 벗고 인사하는 노신사 등. 모두 예술가들의 아이디어로 만든 볼거리들이다. 길거리 퍼포먼스를 하는 사람과 쉽게 구분되지 않아 동상을 발견할 때마다 기분이 좋아진다. 구시청사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린다. 때마침 중세 복장을 한 까마귀 무술단원들이 공연시간을 알리면서 손님몰이를 한다. 펜싱과 총을 들고 싸우는 전통극의 스토리 이해는 불가능하지만 현지의 속살을 들여다본 듯 흐뭇하다. 타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14세기의 미하엘 성문이 있는 벤투르스카 거리에 이른다. 옛 도시 성벽의 4개 성문 중 유일하게 남은 성문 주변은 중세 분위기다. 오래된 약국은 박물관이 되었고 연륜 깊은 레스토랑에는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 있다. 길거리에서는 ‘섹시한 여성’이 와인 시음판을 펼치고 있다. 옛 모습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브라티슬라바. 경제 발전이 되지 않아 그대로 간직된 유적들이 여행객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준다.
프란츠 리스트의 운명을 가른 도시
벤투르스카 골목의 데 파울리(De Pauli, 11번지) 궁 외벽에는 세기적인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를 기념하는 명판이 새겨져 있다. “9세에 이 연주회를 발판으로 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하다”라는 문구가 씌어 있다. 당시 헝가리 땅 도보르얀(현재 오스트리아의 라이딩)에서 태어난 리스트. 그의 아버지는 헝가리 귀족 에스테르하지(Esterha′zy) 가의 토지 관리인이면서 궁정 오케스트라의 첼로 연주자였다. 6세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하자마자 신동으로 주목받았던 리스트는 9세(1820년 11월 26일) 때 이 궁전에서 첫 연주회를 갖는다. 당시 이 도시의 귀족은 모두 참석한 자리였다. 리스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베토벤의 작품을 연주하고 그다음에는 즉흥 연주를 했다. 몇몇 귀족이 내민 악보의 난해한 곡도 거침없이 연주해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완전한 음악교육을 시킬 만한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귀족들은 즉시 기부금을 모았고 더 나아가 그를 6년간 재정적으로 후원하기로 했다. 후원자 중에는 아버지가 일하고 있는 에스테르하지 가의 니콜라우스 후작도 있었다. 예술을 대대적으로 사랑하는 이 가문은 당시 궁정음악가로 하이든을 두었다. 이후 리스트는 19세기 전반에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뛰어난 기교를 자랑하는 피아니스트로 명성을 날렸다. 리스트가 이 도시를 잊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올드 타운의 관광안내소 건물은 음악가 요한 네포묵 후멜(1778~1837)이 태어난 곳이다. 그는 피아노 교본을 써서 이름을 널리 알린 인물로 오스트리아 빈에서 모차르트에게 가르침을 받은 후 유럽 여러 곳에서 활동했던 피아노의 거장이다. 당시 베토벤과 비교될 정도로 뛰어난 작곡가였지만 사후에는 거의 잊히고 말았다. 또 이 도시가 음악의 도시임을 알려주는 멋진 국립극장도 있다.
Travel Data
가는 길 한국에서 체코 프라하나 오스트리아 빈 직항을 이용하면 된다. 빈의 수드반호프 역에서는 평균 한 시간 단위로 열차가 다닌다. 1시간(50㎞ 정도) 정도 소요된다. 프라하나 부다페스트에서 버스나 열차를 이용하면 된다.
물가 정보 오스트리아, 체코 프라하보다 저렴하다.
맛집과 숙박정보 올드 타운의 레스토랑에서는 적당한 가격에 푸짐한 음식을 즐길 수 있다. 한국인 입맛에도 잘 맞는다. 또 도시에서 가장 큰 즐라테 피에스키 호수 옆 해산물 요리가 일품이다. 역피라미드 모양의 시내 라디오 방송국의 송전탑 위의 회전 레스토랑에서는 브라티슬라바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다. 주류로는 와인은 물론 자두 증류주인 슬리보비츠가 괜찮다. 숙박은 올드 타운이나 시내 중심가를 이용하면 된다.
시니어 한 달 여행 포인트 슬로바키아 북서부의 트르나바 주에 있는 피에스타니는 슬로바키아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스파 도시다. 수질과 효능이 좋아 유럽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온천 단지다. 숙박시설 등을 잘 갖추고 있어 휴양지로 아주 좋다. 또 폴란드의 슐레지엔(Schlesien, 폴란드어로는 실롱스크, 체코어로는 슬레스코, 영어로는 실레지아) 산간 지역에도 수많은 온천이 있다. 슬로바키아 하면 떠오르는 ‘의적’ 유라이 야노식(Juraj Ja′nos˘k, 1688~1713)이 태어난 테르초바에서는 유네스코에 지정된 전통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 외에도 오스트리아, 체코, 헝가리 등 동유럽을 여행하면 3개월 이상도 모자랄 것이다.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즐겨도 경제적 부담이 적은 나라, 기억해둬야 할 곳이다.
지난 호까지 우리는 5070 액티브 시니어 은퇴재무설계에서 큰 축의 하나인 자산관리를 살펴봤다. 이번 호부터는 3회에 걸쳐 소비에 대해 집중 분석하고자 한다. 소비는 생산에 대비되는 말로 생활의 두 수레바퀴 중 하나다. 5070세대의 자산관리가 생산시기에 축적한 잉여물의 유지 및 보관에 초점을 맞춘 재무설계의 한 측면이라면, 소비관리는 그 잉여물을 합리적으로 사용해 사용연한을 늘리는 데 초점을 맞춘 재무설계의 다른 측면이라 하겠다. 자산관리와 소비관리는 동전의 양면이자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저울추다.
3040세대는 사회의 핵심 노동계층이자 가계의 수입을 책임지는 주축들이다. 이에 비해 5070세대는 사회의 부양계층이자 가계의 소비계층으로 서서히 이행하면서 노년을 대비하는 사람들이다. 5070세대 중에는 여전히 일을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머지않아 노동시장에서 물러나야 한다. 싫어도 어쩔 수 없다. 이건 거의 자연의 법칙이다. 순리대로 사는 게 행복의 첩경이다. 5070세대의 은퇴재무설계가 일 중심에서 합리적 소비로 방향을 바꿔야 하는 이유다. 5070 은퇴재무설계가 합리적 소비에 중점을 둘 필요가 있는 이유를 3가지 측면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제한적인 수입
5070세대 중에는 수입 측면에서 지금 인생의 정점을 찍고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고 봐야 한다. 명퇴라는 미명하에 멀쩡한 자리에서 물러나 파트타이머 및 비정규직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거나 또 다른 곳에서 정규직으로 일한다 하더라도 임금피크제 적용의 주요 타깃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가계는 소비보다 수입이 많아야 그 잉여물을 자산으로 축적해 미래의 다양한 이벤트에 대비할 수 있다. 즉 ‘자산=수입-지출’ 공식을 생각해보면 된다. 5070세대는 자산 축적의 핵심 수단인 수입이 줄어드는 국면에 진입한 사람들이다. 주 수입원도 근로 및 사업소득에서 점차 연금 및 이전소득으로 전환되는 이행기에 있는 사람들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쌓아온 자산의 감소를 최소화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자산이 소진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출 관리를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출은 크게 소비 지출과 비소비 지출로 구성된다. 비소비 지출은 ‘조세+연금+사회보험+기타 비소비 지출’로 구성된다. 기타 비소비 지출에는 이자비용, 경조비 등 가족 간 이전, 기부금 등이 포함된다. 지출에서 비소비 지출을 뺀 나머지가 소비 지출이다. 한마디로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 들어가는 의식주 관련 지출, 사회활동에 들어가는 교통비·교제비, 보건 및 통신비 등이 소비 지출의 주요 항목들이다. 통계청의 가계동향조사에 의하면, 2016년 4/4분기 현재 가계지출에서 소비 지출이 차지하는 비중은 76.1%다. 지출의 4분의 3 정도가 소비 지출인 셈이다. 이는 지출 관리의 핵심이 바로 소비 지출에 있음을 뜻한다.
줄여야 하는 자산 감소의 속도
성인 자녀의 경제적 독립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노년 부모의 재무적 자립이다. 성인 자녀가 경제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면 부모는 등골이 휜다. 반대로 노년 부모가 재무적으로 자립하지 못하면 자녀의 가계에 생채기가 생기고 형제애와 부부애에 금이 갈 수 있다. 이를 바라는 부모는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재무적 자립은 액티브 시니어의 삶을 살아가는 초석이 되어야 한다.
3040세대가 경제적 독립을 성취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수입과 지출의 격차를 확대해 자산을 더 크게 늘리는 것이다. 수입이 줄어드는 5070세대가 재무적 자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출이 수입을 초과하지 않도록, 초과하더라도 그 폭을 최소화하는 데 중점을 둘 필요가 있다. 목표는 분명하다. 돈과 생명이 벌이는 죽음의 경주에서 생명이 먼저 결승 테이프를 끊도록 만드는 것이다. 최소한 장례비 정도는 남겨둬야 하지 않겠나. 이를 위한 최선의 방법은 자산이 감소하는 속도를 줄이는 것이다. 그 해답은 바로 합리적 소비에 있다.
행복한 인생을 위해
소유의 크기와 행복의 크기가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의 소비 행동을 보면 갸우뚱해질 때가 많다. 현대 사회학의 거장인 장 보드리야르는 저서 를 통해 사람들의 이러한 이율배반성을 날카롭게 파헤쳤다. 소비는 단순한 생존 수단의 구매가 아니라 관계의 능동적 양식이라고 보는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세탁기는 도구로 사용되는 것과 함께 행복, 위세 등 요소로서의 역할도 한다. 이 후자야말로 소비의 고유한 영역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생활의 필요 때문에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적 만족을 위해 소비한다는 의미다.
경제적 측면에서 성장가도에 있는 3040세대는 주관적 만족에 자극을 받아 또 다른 성장에 도전장을 내민다. 하지만 5070세대는 주관적 만족을 위한 소비를 지속할 여력이 부족하고, 성장 궤도에서 내려온 이상 필요에 기반한 소비습관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다. ‘만족에 기반한 소비에서 필요에 기반한 소비로의 순조로운 이행’이 필요한 지점에 서 있는 사람들이 바로 5070세대다. 5070세대의 소비 관리는 무조건 소비를 줄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줄일 곳은 줄이되 늘릴 곳은 늘려야 한다. 100세 시대에 5070세대는 아직 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가능성을 추구하기 위해 늘릴 곳은 과감하게 소비를 늘려야 한다. 이는 5070세대에 맞는 생활의 리듬을 찾아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지막에 웃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라는 말처럼 인생에서도 말년에 웃는 사람이 행복한 인생을 산 사람들이다. 5070세대에게 합리적 소비를 강조하는 궁극적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고도성장 경제에서 저성장 경제로 구조적 전환이 이뤄질 때 여기저기서 많은 어려움과 갈등이 일어난다. 가계도 마찬가지다. 가계수입이 증가하던 국면에서 줄어드는 국면으로 진입하면 많은 고통이 뒤따른다. 합리적 소비습관 들이기는 이를 슬기롭게 극복하는 방법이자 노후의 안정적 삶을 지켜주는 파수꾼이다. 궁극적으로는 행복한 인생의 주춧돌을 놓는 일이다.
암과 같은 질환 환자의 말기는 무척이나 힘겹다. 진통제가 투여되어도 고통은 잘 가시지 않고, 치료를 중단하고 빨리 죽게 해달라고 빌고 싶어도 말을 꺼내기 힘든 상태가 된다. 그리고 환자 입장에선 무의미할 수도 있는, 인간다운 삶을 살기 힘든 상황이 몇 달 혹은 몇 년 지속될 수 있다. 올 8월 이러한 악순환을 막기 위해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긴 이름의 법이 시행된다. 그리고 이 법의 중심에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라는 한 장의 서류가 있다.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 약칭 연명의료결정법은 흔히 ‘김할머니 사건’으로 불리는 사건의 촉발 계기가 됐다. 이 사건은 2008년 세브란스에서 고인의 뜻에 따라 김할머니의 가족이 병원 측에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병원 측은 연명의료 중단을 거절했고, 결국 1년여에 걸친 법적 공방 끝에 법원은 연명의료(인공호흡기 사용) 중단을 허용했다. 하지만 얄궂게도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이후에도 김할머니는 200여 일을 자가호흡으로 생존했다. 이 사건은 국내 최초로 존엄사를 인정한 사례로 기록되면서 우리 사회에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죽음을 결정할 수 있는 환자의 ‘자기결정권’에 관한 문제와 의료기관이 중단을 결정할 수 있는 연명치료의 범위는 어디까지인가에 대한 의문 등이다.
이런 연명의료 거부에 관한 법률은 전 세계적으로 사례가 많은 편은 아니다. 가까운 일본만 하더라도 아직 관련 법률이 제정되어 있지 않다. 다만 엔딩노트 등을 통해 자신이 앓고 있는 병의 종류와 여명에 대한 고지 여부, 연명의료와 존엄사에 대한 의견 또는 장기기증, 의학용 시신기부를 위한 등록 유무를 작성해 가족에게 알리도록 유도하고 있다.
연명의료결정법이란?
김할머니 사건으로 인해 촉발된 환자의 자기결정권 문제는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보건복지부의 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지난해 2월 제정됐고, 올해 8월 4일부터 정식으로 시행된다. 그러나 연명의료 중단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명의료 중단의 결정을 위한 관리 체계나 이행과 관련한 법률의 일부 조항은 2018년 2월 4일에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상 연명의료 거부는 내년에나 가능한 셈이다.
연명의료결정법을 요약하면 이렇게 설명할 수 있다.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로 인해 회복 가능성이 없고 수개월 이내에 사망할 것으로 예상되는 말기 환자가 임종 과정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해 연명치료 중단을 요청할 수 있고, 담당 의료진은 환자의 의견과 환자 상태 등을 고려해 연명의료 중단을 결정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여기서 연명의료는 김할머니 사건에서 핵심이 됐던 인공호흡기뿐만 아니라 심폐소생술, 혈액투석, 항암제 투여 등을 의미한다. 통증 완화를 위한 의료 행위나 물, 산소, 영양분 공급은 중단할 수 없다.
연명의료 거절 방법
연명의료결정법에서 규정한 환자의 연명의료 거절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환자가 본인이 치료받고 있는 병원(의료기관)에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구하는 방법이다. 연명의료결정법에서 정한 말기 환자가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 작성을 요청하면, 의사는 연명의료 중단 결정이나 호스피스 이용 여부 등을 논의한 내용을 포함해 서류를 작성하게 된다. 물론 환자의 서명이나 담당의사의 서명은 필수다.
말기 환자는 아니지만 본인의 신념에 따라 사전에 미리 연명의료에 대한 중단 의사를 정해놓고 싶을 때 등장하는 것이 사전연명의료의향서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의료기관뿐만 아니라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 관한 사업을 수행하는 비영리법인이나 단체에서도 등록이 가능하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에는 연명의료 중단에 관한 결정과 호스피스 이용 여부, 작성 일시와 의향서의 보관 방법 등을 기재하도록 되어 있다. 실제로 아직 법 시행 전이지만 일부 사단법인에서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양식을 공급하고, 작성된 의향서를 보관하거나, 의향서 기록에 관한 카드를 제작해주는 서비스를 진행하고 있다. 비영리기관의 형태를 띠지만 일부 서비스를 받기 위해서는 소액의 기부금을 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현재 운영되는 사단법인이 연명의료결정법의 본격 시행 이후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등록기관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 또 등록기관으로 공식적인 활동을 할 수 있다 해도 이들이 현재 제공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법에서 정해놓은 규정과 다르거나 시행 전 개정 등으로 인해 무용지물이 될 수도 있다는 점 역시 주의해야 한다.
의료계에서는 여전히 논란 중
이 법 시행에 대해서는 아직 의료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대상 환자가 사실상 암이나 후천성면역결핍증, 만성폐쇄성호흡기질환, 만성간경화 환자로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그 외 죽음을 앞둔 많은 환자들의 권리는 보장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논란이 되고 있다.
또한 법에서 정한 임종 과정이나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 등의 표현이 모호해 이를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이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에게만 적용하는 보수적 태도를 취하면 오히려 연명치료 중단을 원하는 환자의 고통을 늘려 원래의 법 취지를 상실할 수 있다는 의견도 있다. 법의 구조상 환자가 본인의 연명의료 거부를 분명히 밝히더라도 최종 집행에 관한 결정권은 의료인과 의료기관에 있는 셈이기 때문이다.
원활한 제도의 시행을 위한 여러 가지 보완 노력은 정부 부처와 의료계를 통해 지금도 이뤄지고 있다. 이로 인해 본격적인 시행이 이루어지는 내년 2월에는 시행령이나 시행 규칙에 따라 현재의 예상과 달라질 수 있다. 때문에 연명의료결정법이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의 확실한 윤곽은 제도의 시행 시기까지 기다려봐야 할 것으로 보인다.
365mc 비만클리닉은 서울365mc병원 김하진 대표병원장이 기부금 1억5000만원을 경북 청송에 위치한 양로원인 ‘소망의 집’에 기부했다고 8일 밝혔다.
365mc측은 기부금 전달식을 4월 29일 서울성모병원 대강당에서 진행했다. 기부금 전달식에는 소망의 집을 운영하는 황금련 원장과 소망의 집 사무국장 김병환 목사도 참석했다.
365mc병원·비만클리닉의 공동설립자인 김하진 대표병원장은 “현대사회의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고향의 자리도 좁아지는 것 같다”며 "마음의 고향과 같은 소망의 집에 도움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소망의 집은 365mc가 2010년 전달한 기부금 4억원을 기반으로 2011년 10월 건립됐다. 소망의 집은 60세 이상의 노인이 입소할 수 있으며, 기초생활수급 대상자는 무료로 입소받고 있다.
시니어 기관 워크숍에 참여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시니어들 모임은 물론 어떤 단체이든 오래 활발한 활동을 하려면 기금이 마련되어 진행비가 있을 때 좀 더 모임이 활성화된다. 그래서 예상되는 지출 비용보다 회비를 더 많이 걷어 모아뒀다가 1년에 한두 번 큰 행사를 할 때 사용하곤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일일찻집을 하거나 경매 행사 등을 통해 기본 진행비를 마련하기도 한다. 야유회 때 기부금을 받는 경우도 많다. 오랜 기간 회비를 모으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기관에 제안서를 넣어 비용을 제공받아 단체 성격에 맞게 사용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커뮤니티를 만들면 활동비를 적게는 50만원에서 몇천만원까지 제공받기도 하다. 구성원에 대한 정보와 단체 운영 내용을 제대로 작성해 보고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지만 이 같은 방법으로 기금을 제공받아 활동하는 곳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으로 알고 있다. 특히 창업과 창직에 관해서는 청년은 물론 시니어 대상으로 기금까지는 아니더라도 회의나 모임 장소를 제공받을 수 있고 간식이나 식사비용, 그리고 강의가 이어질 경우 강사비도 제공받을 수 있다.
시니어 모임에서 만원의 행복으로 참여하신 분은 매번 본인의 식사와 차 한 잔 비용밖에 안 되기 때문에 입회비 명목으로 혹은 회비 명목으로 미리 1년 회비를 한꺼번에 받기도 한다. 어떤 모임에서는 자신이 아끼는 물건 중에 덜 필요한 물건을 경매 물건으로 내놓도록 해서 워크숍 행사 중이나 연말 송년회나 신년회 때 경매 행사를 열어 기금 마련 시간을 갖기도 한다. 하지만 만원의 행복에서 이런 모임으로 이어지는 것은 친목 모임이든 배우는 모임이든 많아지면 부담이 되는 것은 분명하다.
지난 4월 22일, 워크숍 참여기간 중에 기금을 모으기 위해 경매시간을 갖게 되었다. 단체기금을 마련해보는 시간이었는데 놀라운 결과가 있었다. 전체 인원 39명에 여성 참여자들이 17명, 남성 참여자들이 22명이었는데 놀랍게 여성 참여자들이 더 고가의 경매가를 불렀고 남성 참여자들은 훨씬 여성 시니어 참여자들에 비해 경매가가 약했다. 이번 경매 행사를 통해 여성 시니어들의 경제적 결정권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특히 연세가 많아 보이는 한 여성분께서 마치 지름신이 강림한 듯 높은 경매가를 불러 참여자들이 모두 놀랐다. 행사가 끝난 뒤 비용을 많이 쓰게 되셨는데 괜찮으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가격을 부르셨냐고 물었다. 그러자 우문에 현답을 하셨다. “어디를 가도 자신이 가장 나이가 많은 축에 속하는데 한쪽 구석에 쭈그러져 있는 것보다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 분위기도 고조시키고 뭔가 모임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며 그렇게 나잇값을 하고 산다”고 말씀하셨다. 그 깊은 뜻에 모두가 옷깃을 여미며 숙연해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형님이 되고, 왕언니가 된다는 것은 대접만 바랄 것이 아니라 다양한 책임도 함께 짊어져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날이었다.
199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 백인 경찰의 흑인 폭행으로 시작된 흑백 갈등이 엉뚱하게도 코리아타운으로 불똥이 튀었다. LA폭동이었다. 미국 매스컴들의 편파보도는 살림 잘하고 있던 한 한국 아줌마를 ‘욱’하게 만들었다. 현모양처가 꿈이었던 그녀는 그 길로 정치판으로 뛰어든다. 이 드라마틱한 스토리의 주인공은 미셸 박 스틸(62). 미주 한인 커뮤니티에서 가장 사랑받고 있는 여성 정치인이자, 현 캘리포니아 오렌지카운티 슈퍼바이저 위원장이다. 그녀를 미국 현지, 산타에나 오렌지카운티 청사에서 만났다.
카운티 슈퍼바이저(County Supervisor). 우리에겐 무척 생소하니 단어 정리부터 해보자. 카운티는 미국 주 정부의 하부 행정 구역으로 캘리포니아 주(州) 오렌지카운티 안에는 총 34개의 시(市)가 포함되어 있다. 캘리포니아에서는 세 번째, 미국 전체에서는 여섯 번째로 크다. 인구 320만 명에 한해 예산만 6조원에 이르는 오렌지카운티는 한국의 광역시와 비슷한 규모의 자치단체다.
카운티는 각 지역구에서 선출된 5명의 슈퍼바이저(슈퍼바이저 위원회)가 이끌어 가는데 박 위원장은 2014년 선거에서 한인 최초의 슈퍼바이저로 당선됐다. 지난 1월에는 만장일치로 위원장에 선출, 그녀는 명실상부 오렌지카운티의 행정 수장이다.
“한국뿐 아니라 이곳 한인분들도 낯설어했어요. 당선되고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슈퍼바이저가 뭐하는 자리냐는 거였으니까요. 그만큼 한인 정치인이 없었다는 말이기도 하죠. 저는 한마디로 오렌지카운티의 모든 살림을 맡아서 합니다. 법을 만들고 집행도 하지요. 소방국, 경찰국, 보건국 관리는 물론 교육, 사회복지, 심지어 쓰레기를 수거·처리하는 일까지 모두요.”
얼마나 바쁘냐는 질문에 다이어리를 살핀다. 존웨인공항의 리모델링과 국제선 비행기의 공항 사용료 문제, 야생 코요테의 사체 처리 법안, 등·하교시간 교통 체증에 대한 주민 항의, 노숙자 샤워와 숙박시설 허가…. 박 위원장의 수첩을 꽉 메우고 있는 현안들이다. 오늘 잡힌 미팅만 4개. 자잘한 방문 약속까지 소화하려면 오늘도 칼퇴근은 어렵겠다며 웃는다. 그녀의 기분 좋은 미소 뒤로 성조기가 아닌 태극기가 눈에 들어온다.
그녀가 정치인이 된 이유
한국 이름 박은주. 그녀의 고향은 서울 성북동이다. 어린 시절 뛰놀던 학교 운동장이며 창경원(現 창경궁)에 놀러갔던 일, 경복궁에서 스케이트를 타던 추억이 그녀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이었던 아버지가 일본 한국교육문화원으로 발령이 나면서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고 동경여자대학교 영문학과 1학년이던 1975년 미국으로 이주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페퍼다인대학(Pepper dine University)에서 경영학을 전공할 때만 해도 박 위원장의 꿈은 현모양처였다. 예쁜 앞치마를 입고 쿠키를 구우며 아이들을 키우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고. 1981년 테니스 동호회에서 만난 전도유망한 청년 변호사 션 스틸과 결혼해 예쁜 두 딸도 얻었다. 그렇게 현모양처의 꿈을 이루는 듯했지만 그녀의 길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
“LA에서 홀로 옷가게를 운영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국세청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어요. 세금을 속였다며 정말 어마어마한 벌금을 부과했더라고요. 분명히 잘못된 것이었어요. 어머니는 한국과 일본에서 교편을 잡았던 분이세요. 평생 정직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사셨던 분이 탈세라니… 너무나 억울했지만 아무도 우리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으로 소수계가 당하는 부당함과 설움을 알게 됐어요. 거기에 불을 지핀 것이 4·29 폭동이었고요.”
LA 4·29 폭동은 박 위원장에게 ‘행동하지 않으면 변화하지 않는다’는 신념과 자신이 ‘한국인’임을 각인시켜준 사건이었다. 1992년 4월 29일 흑인 로드니 킹을 폭행한 백인 경찰관들이 무죄 선고를 받자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몰려나왔다. 공권력은 부유한 백인들이 살고 있는 비벌리힐스를 보호하기에 바빴고 결국 폭도들에게 한인 타운으로 가는 길을 내준 꼴이 되었다. 맨손으로 일군 삶의 터전을 지키기 위해 한인들은 직접 총을 들었고 미국 매스컴들은 앞다투어 한·흑 갈등으로 몰고 갔다.
닷새간 이어진 방화와 약탈로 2300여 한인 업소가 피해를 입었고 피해액만 5억달러에 이르렀다. 돈 벌기 위해 너무 앞만 보고 달렸다는 각성의 목소리도 나왔지만 그 대가치고는 너무나 참혹했다. 한인 타운은 그야말로 잿더미로 변했다.
“한마디로 미디어의 횡포였어요. 뉴스, TV 쇼에서 잘못된 내용을 말하고 있는데 누구 하나 정정하는 사람이 없었으니까요. 뭔가 내 안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어요. 정치인 친구들이 많았던 남편에게 부당함을 쏟아냈고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거라고 말했어요. 정말 뭐라도 해야 할 거 같았어요. 남들 앞에 나서기를 지독히도 싫어하던 제가 말이죠.”
1993년 LA시장에 출마한 리처든 리오든 선거캠프 자원봉사를 시작으로 그녀는 미국 정치판으로 뛰어들었다. 안 하면 안 했지 적당히 하는 꼴은 못 보는 한국 아줌마의 힘은 어디서나 단연 돋보였다.
시장에 당선된 리오든 시장은 그녀를 LA소방국 커미셔너로 전격 발탁했고 이후 LA공항, LA아동복지국 커미셔너를 역임했다. 커미셔너는 해당 분야의 정책자문 역할을 하면서 시의 전반적인 행정에 간접적으로 관여하는 직책이다.
박 위원장은 이어 1999년 한미공화당협회 회장, 2001년 부시 행정부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자문위원을 거치며 차근차근 정치 이력을 쌓게 된다.
한인 커뮤니티가 사랑하는 선거의 여왕
사실 박 위원장이야말로 ‘선거의 여왕’이라 불릴 만한 전력의 소유자다. 24년 정치인생에서 세 번의 선거에 출마, 모두 승리했다. 특히 2006년 당시 ‘듣보잡’ 후보에 가까웠던 그녀가 도전한 ‘캘리포니아 조세형평국 위원’은 캘리포니아 조세 정책을 총괄하는 막중한 자리였다.
그녀는 이 선거에서 정치 거목이었던 상대 후보를 꺾고 60.5%라는 득표율로 압승했다. 한국 커뮤니티는 물론 그녀가 속한 공화당 내부에서도 놀란 결과였다. 목소리까지 가냘퍼 보이는 그녀의 이런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박 위원장은 서슴없이 ‘한국인의 DNA’ 덕분이라고 말한다.
“처음 출마선언을 하고 후보 인준을 받기 위해 연설을 한 날이었어요. 얼마나 무서웠던지 연설을 마치고 나와서는 자동차 뒷좌석에서 결국 울음이 터졌죠. 옆에 앉은 분이 걱정이 되어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라고요. 전화를 끊고 아무 말이 없길래 남편이 뭐라고 하더냐 물었더니 그냥 놔두라고 했대요. 금방 다시 씩씩해질 거라고. 미셸은 한국 여자라고요(웃음)!”
박 위원장은 2010년 재선에서도 거뜬히 승리하면서 8년간 조세형평국 위원으로 재직하게 된다. 이 기간 동안 그녀의 이름 앞에는 ‘가주 내 한인 최고위 선출직 공직자’,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공화당원’ 등의 수식어가 붙게 된다.
미셸 박 스틸의 러닝메이트는 바로 한인 커뮤니티다. 그녀는 한인 커뮤니티로부터 과분한 사랑을 받고 있다며 지금의 자신을 있게 한 것은 모두 한인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미국의 선거는 선거자금이 당락을 결정짓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미국 정치인들에게는 선거자금 캠페인, 모금행사 등이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기부금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한인들에게는 이것이 낯설기만 하다. 또 사는 게 바쁘다 보니 유권자 등록이나 투표는 늘 딴 세상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아쉬운 이야기이지만 한인 유권자 등록률과 투표율은 아시안 커뮤니티에서 늘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셸 박 스틸이 출마하는 선거는 유독 한인들의 투표율이 높다. 박 위원장이 슈퍼바이저로 당선된 지난 2014년 선거에서 오렌지카운티의 한인 유권자 투표율은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미셸 박 스틸만큼은 밀어줘야 한다는 분위기다. 이렇다 보니 미주 한인사회의 오랜 숙원인 연방하원에 입성할 인물로 박 위원장에게 기대를 걸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박 위원장도 마찬가지다. 그녀의 시정에서는 한인 커뮤니티를 어떻게든 메인스트림으로 끌고 들어오려는 노력이 느껴진다. 카운티에 공식적으로 미주 한인의 날을 만드는가 하면, 한인 단체가 벌이는 행사를 카운티가 공식 후원함으로써 힘을 실어주고 있다.
조세형평국 시절에는 정부 공식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문을 올리기도 했다. 부당한 세금이 청구된 납세자가 있다면 자신에게 연락하라, 혐의가 입증되기 전에는 무혐의로 믿고 끝까지 보호하겠다는 취지의 글이었다. 그녀 어머니가 당했던 억울함을 한인들에게 다시는 없게 하겠다는 의지였다. 강철 벽처럼 느껴지는 주 정부 홈페이지에 한글로 된 안내물이라니… 어찌 한인들이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에요. 메인스트림 안에서 한인을 대변하기 위해 정치를 시작했으니까요. 임기 동안 하나라도 더 정착시켜놓으려 합니다. 제가 이 자리를 떠나더라도 카운티 차원에서 계속 이어질 수 있도록요. 그만큼 어깨가 무겁기도 하지만 보람도 있습니다. 초심을 잃지 않으려 해요. 내가 왜 이 자리에 오려 했는가를 생각하죠. 정치인은 유권자의 선택으로 살아남는 사람들이에요. 유권자가 내려가라 하면 내려가야죠. 다행히 아직까지는 저를 많이 사랑해주고 계세요(웃음).”
박 위원장은 내년 그녀의 네 번째 선거를 치러야 한다. 슈퍼바이저 재임에 도전하는 것이다.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역시 선거자금을 모으는 일이다. 이제 곧 후보들 간의 모금 현황부터 비교하며 당락 가능성을 점치는 언론들의 보도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다시 전쟁이다.
남편, 그리고 엄마
박 위원장의 정치인생에 없어선 안 될 사람이 있었다면 그것은 남편 션 스틸 변호사(공화당 전국위원회 위원)와 어머니 정옥희 여사(2011년 작고)다. 박 위원장이 정치를 시작하면서 함께 살기 시작한 세 사람에게는 소소한 추억들이 많다. LA 문단에서 수필가로 활동하기도 했던 정옥희 여사의 수필집 곳곳에는 딸과 사위 이야기가 있다. 특히 사위 스틸 변호사에 대한 묘사에는 애정이 그대로 담겨 있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사람. 우리나라 함경도 사람처럼 일하며 처자 권속을 확실히 지키는 사람. 내가 여행이라도 가는 날이면 손에 돈과 정을 같이 쥐어줄 줄 아는 사람이 우리 사위다. 집에 돌아오면 조용한 집 안을 장터같이 활기차게 만들고 장모의 김치볶음밥과 순두부찌개가 최고라고 치켜세우는 사위는 가정을 지키는 것이 생애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기는 사람이다’. (정옥희 수필집 모음 중에서)
결혼 36년 차의 남편은 박 위원장에게 늘 휴식 같은 존재다. 캘리포니아 공화당협회 의장까지 지냈지만 정치적 조언보다는 시정에 지친 아내를 살피는 일이 우선이다. 타고난 유머감각으로 박 위원장을 늘 웃게 만들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지난해 큰딸 채안(29)이 결혼하면서 박 위원장은 사위를 봤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엄마 생각’(박 위원장은 꼭 엄마라고 불렀다)이 더 잦아졌다고.
“참 강하고 현명하셨던 거 같아요. 그때는 엄마로서 이민자로서 살기가 지금보다 훨씬 힘들었던 시절이었는데 말이에요. 처음 일본에 가서 말도 못하고 친구가 없는 저를 보고 엄마는 늘 웃으라고 했어요. 내가 웃기만 하니 아이들이 ‘아호(바보)’라고 하더군요. 엄마는 그래도 계속 웃으라고 했어요. 정치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소리가 미셸은 잘 웃어서 좋다는 말이에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엄마라면 뭐라고 했을까 생각하곤 합니다. 엄마가 딸을 위해 내어놓는 솔루션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박 위원장은 자신이 엄마를 추억하듯, 훗날 딸들이 자신을 그렇게 추억해주기를 원한다. 그녀의 뒤를 이어 한인 커뮤니티를 대표할 차세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들의 삶에 덕이 되고 싶고, 길을 먼저 가는 선배로서 그들이 올 길을 조금은 편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정치적 야망이요? 그렇게 거창한 표현은 안 어울리고요. 정치인으로서 잃고 싶지 않은 것은 있어요. 민심과의 소통, 발로 뛰는 열정 그리고 정직이요. 어디까지 가든 소통과 열정, 정직 없이 가게 될까봐 겁이 납니다. 연방하원… 가야죠. 제가 아닌 누구라도 가야 합니다. 제가 갈 수 있다면 최선을 다해 갈 것이고 혹 나보다 더 좋은 후보가 나타난다면 저는 미련 없이 그를 밀 것입니다.”
인터뷰 말미, 그녀가 고향 성북동의 안부를 묻는다. 두어 차례 한국 지자체의 초청을 받아 남편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지만 정작 추억 어린 곳은 찾지 못했다고 한다. 서울 시내 곳곳이 너무 많이 바뀌었지만 성북동은 아직 옛 정취가 많이 남아 있다고 하니 아이처럼 반가워한다. 남편과 함께 꼭 가볼 거라고 코를 찡긋거리며 웃는 그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으며, 열정적이고, 그대로의 자신을 내어 보이는 미셸 박 스틸은 아름다웠다.
모바일 웹진 와 함께 반려동물 이야기를 연재하면서 유기동물 이야기 또한 짚고 넘어가야 했다. 잊어서는 안 될 이야기다. 사랑하는 반려동물이 집을 잃어버린 후의 삶을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사설 유기견 보호소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에 다녀왔다.
행복한 강아지들이 사는 집(이하 행강집·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백봉리)은 동물보호 비영리 민간단체로 운영되는 사설 유기견 보호소다. 백암터미널에서도 마을버스로 한참을 달려야 행강집에 이를 수 있다. ‘행강대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박운선(59) 소장은 2004년부터 유기견 보호소를 시작했다. 2003년, 애견 번식에 손을 댔던 박 소장은 인간이자 생명으로서 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사업을 접었다.
“수익을 얻기 위해서는 강제로 강아지 젖을 떼야 해요. 강아지들을 철창에 가둬서 강제로 교배를 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1년 동안 하다 보니까 이것만큼 나쁜 짓이 없더라고요.”
번식장에 있던 종견과 모견 모두 중성화 수술을 시켜서 입양을 보냈다. 그 자리에 유기견들이 하나둘 채워졌다. 번식장을 할 때는 강아지를 팔았기 때문에 사료값이라도 벌 수 있었다. 유기견은 전혀 수익이 되지 않았다. 같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자리를 비우지 않고 유기견을 돌보면서 할 수 있는 일, 애견 호텔을 병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래서 유기견 보호소와 함께 애견 호텔을 운영하게 됐다.
“대한민국의 모든 유기동물 보호소는 기부금이나 후원금에 의존해 운영됩니다. 보호소나 기부금 후원을 받기 위해서는 개인 구조자들이나 일반인들이 구조한 유기견을 보호소에 입소시켜야만 돈이 들어와요. 후원금을 모으려면 열악한 시설과 고생하는 애들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잖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게 싫었습니다. 아내와 함께 이 일을 시작했어요. 우리가 살던 방 하나를 비워 가정견을 맡아 관리해줬습니다. 한 마리를 한 달 돌봐주면 10만원을 받는데 그걸로 사료를 사고 행강집을 운영했죠.”
현재 행강집은 애견 호텔에서 나오는 수익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머지 부족한 운영비는 후원금과 기부금을 통해 도움받고 있다.
넘쳐나는 유기견, 방치라는 또 다른 학대의 시작
행강집에서 유기견 480마리까지 돌봤던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원치 않는 학대가 이뤄졌다.
“방치는 학대입니다. 어떤 때는 사료통 밑에 곰팡이가 난 것을 모르고 지나칠 때가 있어요. 그 많은 유기견의 수만큼 일손도 필요한데 한계가 있죠. 그래서 내가 돌볼 수 있을 만큼만 돌보자 했습니다.”
지금도 일주일이면 두세 차례 동물을 받아달라는 전화를 받는다. 행강집으로 전화를 하는 40%가 유기를 목적으로 실제 주인이 전화하는 것 같다고 박 소장은 말한다.
“40%는 주인이 데리고 와서 버린 개들입니다. 안 된다고 하면 밤에 슬그머니 묶어놓고 가는 사람도 있어요. 60%만 거리에서 데려온 유기견, 학대견들이죠. 사실 감당하기 힘들어요. 이렇게 가다 보면 1000마리 되는 건 순식간이죠.”
유기동물보호센터에서 안락사되는 유기견들
유기견이 발생하면 각 지역에서 운영하는 유기견보호센터로 보내진다. 전국적으로 360여 곳이 있다. 현행 ‘동물보호법’에 따르면 유기동물 보호기간은 10일(7일 이상 공고 포함). 이 기간 안에 주인을 찾지 못하면 보호 조치된 동물의 소유권은 자치구로 귀속된다. 10일이 지난 후에도 새 주인을 찾지 못한 동물들은 대부분 인도적 처리(안락사) 대상이 된다. 입양이 안 되면 안락사밖에 없다는 것. 물론 안락사시키는 날을 10일로 딱 못을 박아 시행하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의 경우 10일(보호·공고 10일)에서 입양 대기 10일을 추가한 20일로 연장 시행하고 있다. 유기견의 수명은 각 지자체의 의지로 유연하게 연장할 수 있다. 물론 질병으로 회생 불가능한 유기견은 안락사시킨다. 몇몇 지자체는 계류기간이 끝나자마자 유기견의 건강, 나이 불문하고 안락사를 시행한다고.
“사설 유기견보호소는 없어져야 합니다”
사설 유기견보호소 소장의 말이 의미심장하다. 20마리, 30마리 정도 보호·관리하는 유기견 쉼터가 있다. 이곳은 꾸준히 유기견들을 관리하고 사진을 찍어 공고도 올리고 입양도 보낸다. 하지만 유기견 100마리가 넘어가면 매일 목욕하고 관리하고 입양 공고 내는 것이 힘들다는 것.
“솔직히 이곳에서는 유기견을 씻길 수 없습니다. 봉사자들이 올 때만 씻기는데 이때도 같이 산책하고 청소하다 보면 하루가 다 가거든요. 사설 보호소에서는 그곳에서 주는 밥 먹고 나이가 들어요. 그 안에 들어간 유기견은 죽어야 나옵니다.”
현재 행강집의 있는 유기견은 모두 250마리다. 물론 입양 보내고 싶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1년에 열 마리가 입양을 가면 정말 잘 가는 것. 하지만 이마저도 유기견들의 안전 때문에 꺼려진다. 입양 한 마리 보내려다가 한 마리가 죽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입양할 사람이 들어오면 매달려 있다가 자기들끼리 싸우기 일쑤다. 사설 보호소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하면서도 안락사로 죽어야 할 유기견이 너무 많은 것이 또 문제라고 말하는 박 소장.
“유기동물센터에서 바로 입양 가는 시스템이 돼야 해요. 시 보호소에서 안락사된다고 불쌍하다고 다섯 마리 열 마리 끌어다가 사설 보호소에 집어넣는 것은 옳은 행위가 아닙니다. 일단 여기는 안락사가 없잖아요. 인위적으로 죽이지는 않아요. 사설 보호소에 보내면 책임을 다했다고 느낄지 몰라도 이 아이는 죽을 때까지 보호소 생활을 해야 합니다.”
박 소장은 유기견 보호소를 열면서 동물복지에도 관심을 갖게 됐다. 법 개정으로 유기동물들이 줄어들고 사람과 동물이 함께 잘사는 세상이 됐으면 한다고 말했다.
나의 작은 관심과 노력으로 아픈 아이들의소원이 이뤄질 수 있다면 멋지지 않을까.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기부를 하면 그것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 바로 ‘기부의 마법’이다.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은 이처럼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찾아 그에 맞는 재능기부자를 연결하는 곳이다. 재단의 도움을 받아 소원을 이룬 아이들의 따뜻한 사연을 모아 봤다.
도움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 www.wish.or.kr
◇돌고래를 좋아하는 혜서의 소원은…
“저는 커서 돌고래 사육사가 될 거예요.” 유달리 동물을 좋아하는 여덟살 강혜서양은 이루고 싶은 소원이 있느냐는 질문에 한껏 힘을 준 목소리로 대답한다. 또래보다 어휘력이 풍부하고 자기표현이 확실한 아이다.
혜서의 머리가 아프기 시작한 것은 유치원 입학 후부터였다. 병원에서는 뇌종양의 일종인 ‘수모세포종’이라고 했다. 100만 명 중에 5명 정도에게 생기는 병인데 원인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작년에만 서른 한 번의 방사선 치료를 했고 올해부터는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좋아하는 동물을 직접 보러 가보고 싶지만 밖에 나갈 수 없었다.
TV에서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혜서는 눈을 떼지 못했다. 혜서는 특히 돌고래를 좋아했다. 돌고래를 보면 기분이 밝아졌다. 조련사의 말을 알아듣고 재주를 부리는 모습이 신기하고 사랑스러웠다. ‘돌고래를 돌보는 사람은 매일 돌고래와 같이 있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까.’ 혜서에게는 돌고래 사육사가 되고 싶다는 소원이 생겼다.
난치병 어린이들의 소원을 이뤄 주는 ‘한국메이크어위시재단’에 혜서의 소원이 전해졌다.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비영리단체와 기부 참여자들이 프로젝트에 동참했다. 인터넷기업 ‘11번가’가 후원을 약속했고 약 1만1000명이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주도에 위치한 한 아쿠아리움에서 혜서를 돕겠다고 나섰다. 소속 사육사가 재능기부에 나섰다.
모르는 사람이 많았고 실내는 웅성거렸다. 다소 낯가림을 하는 혜서는 굳어 있었다. 하지만 돌고래 ‘세나’를 만나자 이내 긴장감이 사라졌다. “돌고래도 충치가 생기나요?”, “돌고래도 감기가 걸려요?” 아프지 않길 바라는 혜서의 아이다운 질문이었다.
혜서는 직접 돌고래를 지휘했다. 많은 이들의 바람이 돌고래 세나에게도 전해진 것일까. 세나를 매일 돌보던 사육사는 평소보다 더 활발한 세나의 모습이 놀랍다고 했다. 그토록 좋아했던 돌고래를 만난 혜서가 까르르 웃었다. 혜서의 웃음소리가 공연장 곳곳을 채웠다. 많은 이들의 따뜻한 ‘관심’이 모여 동물을 좋아하던 한 아이의 소원이 이뤄지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퍼레이드
지난 9월 경기도 용인 에버랜드에서 진행된 퍼레이드는 아주 특별했다. “예쁜 공주가 돼서 멋진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다”던 여섯살 김연우양의 소원이 이뤄지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연우가 세살이었던 2012년, 연우의 아랫배에 뭔가 딱딱한 것이 만져졌다. 병원에서 ‘난소종양’ 진단을 받았다. 활발하지만 눈물이 많은 아이였다. 6번의 항암치료를 거치며 참 많이도 울었다. 만화 속에 나오는 공주처럼 항상 예쁘고, 항상 행복하게 웃고 싶었다.
삼성전자 부품사업부(DS)가 후원하는 대학 봉사팀 ‘위시 엔젤(Wish Angel)’이 소원을 이뤄 주기 위해 연우를 만났다. 연우는 금발에 분홍 드레스를 입고 왕자님과 퍼레이드를 하고 싶어 했다. 사람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나눠 주는 착한 공주가 되고 싶다고 했다. 삼성전자 임직원과 에버랜드가 연우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나섰다. 연우의 소원이 이뤄지는 날의 기억을 사진으로 남겨 주기 위해 황영철 사진작가가 재능기부에 나서기로 했다.
“공주님, 이제 백성들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왕자님과 함께 퍼레이드에 오르실 시간입니다.” 원하던 대로 공주가 된 연우가 환하게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달리던 차가 잠시 멈추자 연우는 차에서 내려 가방 속에 담아 온 과자와 사탕을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연우가 자라는 동안 큰 용기와 희망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모아 사람들이 박수를 보냈다. 함께 힘든 시간을 보낸 어머니 박윤서(가명)씨가 딸의 손을 꼭 잡았다. 박씨는 “이 정도까지 우리 아이의 소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면서 “공주가 되고 싶다던 소원을 이뤘으니 이제 앞으로 연우가 커서 무엇을 하든지 다 할 수 있겠다”고 말했다.
◇드론으로 넓은 세상을 보고 싶어요
김규현(15)군은 또래의 평범한 아이들처럼 활발한 소년이었다. 2013년 1월, 스키캠프에서 다리가 부러져 병원을 다닐 때까지도 뼈가 붙기만 하면 다시 두 발로 뛸 거라고 생각했다.
치료 3개월째가 되던 때였다. 갑자기 고열이 생기고 염증수치가 높아졌다. 황급히 찾아간 큰 병원에서 뼈에 악성 종양(골육종)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 뒤로 세 번의 큰 수술과 여섯 번의 항암치료를 받았다. 전처럼 걷거나 뛸 수 없었지만 규현이는 장애진단을 원치 않았다.
규현이는 차분한 성격에 말수가 적은 성격이지만 ‘레고’ 이야기가 나오면 눈망울을 빛냈다. 자유롭게 날고 싶은 규현이의 방에는 레고로 만든 비행기가 많았다. 규현이는 ‘드론(무인비행기)을 갖고 싶다고 했다. “다리를 다쳐서 산에도 못 올라가고 움직이는 게 불편하니까 저 대신 드론을 높이 띄워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보고 싶어요.”
9월 어느 날, 한 식당에서 규현이를 위한 깜짝 이벤트가 열렸다. 식사를 마치고 산책을 하러 밖으로 나간 규현이의 눈에 무언가 보였다.
“저거 새야?” 맑은 하늘에 떠 있는 낯선 물체는 규현이에게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드론이었다. 규현이의 사연을 들은 한 드론교육 전문가가 재능기부로 조종법을 알려 주기 위해 경기도에서 청주까지 달려왔다. 드론 조종기를 손에 쥔 규현이의 얼굴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소원이요? 이제 이뤘는데요.” 규현이는 하늘을 마음껏 날아다니는 드론을 조종하는 동안 자신이 자유롭게 뛰어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기부자가 먼저 알아야 할 사실 10가지
기부 문화는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다. 빌 게이츠는 사회로부터 얻은 재산을 사회에 돌려주는 것이 기부운동에 참여하는 이유라고 말했다. 기부자들은 의미있는 일, 관계하는 일, 확실한 목적에 쓰여지는 일에 기부를 원한다. 기부자들의 동기부터 따져보자.
1. 기부의 종류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기부에는 먼저 기부자가 특별한 용도를 지정하지 않는 ‘순수 기부’가 있습니다. 반면 기부자가 특정한 사업을 후원할 목적으로 지정해서 기부하는 ‘조건부 기부’도 있고요. 또 개발사업 등을 진행할 때 시행자들이 국가나 지자체에 제공하는 ‘채납형 기부’,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에 예술작품을 제공하는 ‘기증형 기부’도 있습니다.
2. 우리나라 기부 현황이 궁금해요
아름다운재단 ‘기빙코리아’의 기부금 집계를 보면 2011년 한국인의 연평균 기부금액은 21만9000원으로 직전 조사년도인 2009년의 18만2000원에 비해 20% 이상 늘었습니다. 기업의 경우 상장기업(1700개사)의 한 해 평균 기부금은 8억3700만원, 비상장기업(1만5651개사)의 평균 기부금은 4500만원 수준입니다.
3. 개인들은 어떤 동기에서 기부를 하나요
아름다운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기부 동기로 ‘동정심’이 62.1%로 가장 높게 나타나 ‘불쌍하다’는 감정이 여전히 기부 동기 가운데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사회적 책임감’의 비중이 2009년 54.8%에서 59.4%로 상승하여 기부에 대한 인식도 높아지고 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우리나라에서 기부액이 많은 기업은 어디인가요
기업의 기부금(2012년 재무제표 기준) 지출 1위는 삼성전자입니다. 삼성전자는 2353억4900만원을 기부했습니다. 2위는 현대중공업(1329억2700만원), 3위는 삼성중공업(1115억2430만원) 등입니다. 이밖에 케이티, SK텔레콤, 포스코, 현대자동차, 삼성디스플레이, CJ제일제당, 한국전력공사 순으로 10위권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5. 정부에도 기부할 수 있나요
우리 법률은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모금활동을 할 수 없도록 하고 있습니다. 정부나 지방자치단체, 공공기관은 개인과 기업에 상대적으로 우월한 지위에 있어 이들 기관이 모금활동을 한다면 암묵적인 강요로 변질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6. 기부금에 대한 세제혜택은 어느 정도입니까
먼저 기부하고자 하는 단체가 어떤 단체인지 알아봐야 합니다. 기부금대상 민간단체와 지정기부금단체로 지정된 곳에 개인이 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3000만원 이하인 경우 소득금액의 30% 이내에서 15%의 세액공제, 3000만원이 넘는 기부금에 대해서는 30%의 세액공제를 합니다. 법정기부금 단체의 경우 기부자의 소득금액 100% 한도에서 15% 세액공제를 받을 수 있습니다.
7. 기부금 영수증만 있으면 세제혜택을 받을 수 있나요
영수증을 발급한 기관이 ‘지정기부단체’나 ‘기부금대상민간단체’로 등록돼 있어야 합니다. 이 같은 단체를 세제적격단체라고 부릅니다. 당국에 기부금품 모집등록을 한 단체라고 해도 세제적격단체 선정을 받으려면 별개의 자격과 등록이 필요합니다. 모집단체가 세제적격단체가 아니라면 기부금과 후원금에 대한 세액공제 혜택이 없습니다.
8. 현물기부의 경우 기부금액을 어떻게 산정하나요
기부금 단체에서도 현물의 기부금품 가액의 기준을 얼마로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현물의 기부금은 ‘현재 시장에서 유통되는 정당한 매매가격’으로 계산합니다. 아울러 세월호 참사 당시의 진도군과 안산시, 태안기름유출사고 등에서의 태안군처럼 법률상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된 지역은 그 곳에서의 자원봉사도 기부금으로 산정될 수 있습니다.
9. 기부금을 받은 단체가 돈을 손에 쥐고 있지는 않나요
기부금은 2년 내에 반드시 사용하도록 법률에 명시돼 있습니다. 만약 정해진 기한 내에 기부금을 사용하지 않으면 모금단체는 기부금을 기부자에게 반환해야 합니다. 등록관청에서도 기부금품을 어떻게 모금하는지, 어디에 사용하는지를 검사할 수 있습니다.
10. 기부금을 받은 단체의 활동을 상세하게 확인하고 싶어요
원칙적으로 기부금을 받은 모든 단체는 기부자에게 기부한 내용이 어떻게 사용됐는지 보고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모든 기부자를 일일이 접촉할 수 없어 대부분 ‘연차보고서’를 공개·제공합니다. 또한 모금기관은 모금액의 사용결과 ‘나눔포털’과 단체의 홈페이지 등을 통해 기부금 모집결과 및 사용결과를 게시 공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자료제공 서울시 기부 길라잡이
우리말 가운데 ‘이웃사촌’은 잘 보존된 전통이 아니라 다음 세대에 전해줄 살아 있는 미풍양속, 즉 미덕(美德)이어야 한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인 이상, 사회 속에서 그 가치를 발휘하며, 특히 더불어 살아야 하는데 이는 기쁨과 슬픔도 함께한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이웃을 돕는 행위는 크게 모금과 기부, 그리고 봉사로 나눌 수 있겠는데 최근에는 재능 기부의 형태로 크고 작은봉사 활동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있다. 금전적인 제공의 모금과 다르게 기부의 범위가 단순한 물품의 제공을 넘어서 점차 확산되고 있다.
모금은 재해로 인한 생명과 재산 피해를 입은 지역과 재해민에게 전달되는 의연금과 현지에서 지원 활동을 벌이는 단체들에 제공되는 활동지원금으로 분류되는데, 후자는 대개 ‘기금’이라고도 한다.
2011년, 그해 6월 일본 적십자사는 일본 코카콜라 주식회사와 손을 잡고 모금 기능이 딸린 자동판매기를 실현시켰다. 일본 적십자사는 그동안 자동판매기의 판매액 일부가 적십자사로 기부되는 ‘지원형자동판매기’를 설치하여 운영해 왔는데, 거기에 판매기 본체에 10엔과 100엔 전용의 모금 스위치가 설치되어 ‘이용자가 직접 모금할 수 있는’ 새로운 형태의 자동판매기를 추가한 것이다.
이런 시도는 2011년 9월에 활동을 시작한 특정 비영리활동법인 기부형자동판매기보급협회(kjf.or.jp)를 중심으로 현재 일반재단법인 일본 국제기아 대책기구, 특정비영리 활동법인 아시아 식림 우호협회와 국경 없는 의사단, 일본 국제자원봉사센터, 인정 NPO 법인 굿네이버스재팬과 난민지원협회 등 수많은 단체가 이용 중이다.
또한 아이치(愛知) 현 등 일본 전국의 지역자치단체에서 광역별로 지역 공동기금 조성에 기부형 자동판매기를 이용하고 있다.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부 행위에 따르는 번거로움과 기부의 투명성을 해결하기 위한 온라인 기부 사이트 기브원(www.giveone.net)이 운영 중이다. 기부 라이프의 실현을 위해 만들어진 이 사이트는 NPO프로젝트 단위로 기부할 수 있는데, 각 프로젝트의 내용 검색은 물론 각종 리포트를 통한 비교 검토도 가능하다.
사용자는 자신의 관심에 일치하는 기부를 골라 은행이나 우체국에 가지 않아도 그 자리에서 신용카드 기부를 할 수 있는 일본 최초의 온라인 모금 사이트이다. 또한 단체 지정을 하지 않더라도 같은 테마로 활동 중인 여러 단체에 기부를 균등하게 배분하는 테마 기부도 가능하다.
기부를 마친 사용자는 활동 리포트를 통해 자신이 기부한 프로젝트의 ‘자금’을 수시로 파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현재 환경, 마치즈쿠리(거리 만들기), 긴급재해, 문화 예술 스포츠, 국제협력, 고용 취로 지원, 인권평화, 어린이 청소년, 여성, 장애우 등 10개 분야에 235개 프로젝트가 운영 중이다.
불용품이 소중한 지원품으로
국제사회지원 추진회가 운영하는 월드 기프트(world--gift.com) 사이트를 살펴보면 일본 전국의 사용하지 않는 물품과 기증품을 받아 개발도상국에서 활동 중인 여러 NGO와 기금에 기부하고 모금을 지원하는 활동으로 쓰이고 있다.
지원물자는 헌옷, 인형, 잡화, 식기, 장난감 등 다양하며, 재사용 및 재활용으로 발생하는 이익금도 국경 없는 의사단, 세계자연보호기금, 유엔 식량지원기관인 WFP 등에 기부금의 형식으로 지원하고 있다. 또한 유치원과 보육원에는 문방구 등을 기부하고 있다.
한 이용자는 “인형과 의복, 그리고 문방구를 포장했는데, 모두 오래되고 그중에는 더럽혀진 물건도 있어 죄송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괜찮다면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이런 활동은 참으로 훌륭한 일이라고 생각이 드는데 다시 기회가 있다면 또 이용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철도회사의 자연사랑 실천
일본의 철도회사 오다큐( 小田急) 전철은 올해 5월 후지산이 보이는 도쿄 근교의 온천지역으로 유명한 하코네초( 箱根町) 마을사무소를 찾아 하코네초 자원보전기금 142만3896엔을 기부했다. 이는 오다큐 전철이 하코네초의 천연수를 사용해 2009년 4월 선보인 미네랄워터 ‘하코네의 숲에서’와 2012년 12월부터 발매된 ‘하코네 숲 녹차’가 판매될 때 한 병당 1엔을 기금으로 모은 돈이다. 2009년 4월부터 기부 총액은 1890만 엔에 달한다. 1년에 상반기와 하반기 두 차례 기부가 이뤄진다. 이들 두 음료수는 오다큐 전철이 달리는 노선의 각 역 매점과 자동판매기, 지역 슈퍼마켓과 편의점, 오다큐 그룹의 각 점포와 하코네초 사무소 등 관련 시설과 식당 내 자동판매기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는 지역자치단체와 철도회사의 상호 시너지 효과를 높인 좋은 예로 볼 수 있다. 이처럼 지역의 특산물과 관광명소를 살려 그 혜택과 이익금을 지역에 환원하는 예는 최근 유행하고 있는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이용한 각종 상품에서도 볼 수 있다.
21세기형 고향 사랑의 실천
일본은 2008년부터 ‘후루사토(고향) 납세’ 제도를 실시해 큰 호응을 얻고 있다.
후루사토 납세는 본인이 태어난 고향이 아니더라도 특정 지방자치단체에 개인적으로 내는 기부금을 뜻하는데, 구체적으로는 개인이 2000엔 이상의 기부금을 원하는 지방자치단체에 기부할 경우 본인이 현재 거주하는 지역에서의 세금이 환급 공제된다.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인구가 집중된 현재 구조로는 지방자치단체의 세금으로 충당하는 재정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후루사토 납세’는 거주지에 내던 세금의 일부를 본인이 원하는 임의의 지방자치단체로 분산해 대도시 중심의 세금 집중을 지방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얻고 있다.
뿐만 아니라 후루사토 납세를 통해 기부하는 이용자들에게는 기부하는 지역의 특산품을 제공하고 있다. 지방자치단체의 다양한 수산물과 농산물, 상품 등의 선물에서 지역온천의 숙박권, 그리고 인기 관광명소와 다양한 시설 이용권을 보내준다.
따라서 자신이 선택한 지방자치단체를 응원하면서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정확히 알고 납부할 수 있는 장점에 선물과 소득세 혹은 주민세의 공제 혜택까지 받을 수 있어 해마다 이용자들이 크게 늘고 있다. 도입 첫해인 2008년 기부자는 총 3만 명 정도의 수준이었지만, 2014년에는 총 15만 명이 참가했다.
사이타마(埼玉) 현에 거주하는 요시다 씨(32세)의 경우 맞벌이 부부로 세살짜리 딸이 있는데, 연간 세대 수입은 650만엔으로 ‘후루사토 납세’ 공제 한도는 약 12만4000엔에 실제로는 군마 현과 나가사키 현의 두 군데에 총 10만 엔을 기부하고 있다. 세금 환급으로 결국 자기부담 2000엔에 불고기와 스키야키 세트 1.1kg×5세트, 고시히카리 쌀 10kg×3세트, 양식 참치 400g×2세트 등을 선물로 받았다.
한편 ‘후루사토 납세’는 장기적으로는 도쿄와 오사카 등 대도시에 태어난 사람을 비롯해 해외 귀국 자녀, 그리고 일본 거주의 외국인들에게도 제2의 고향을 자신이 직접 만들어 간다는 효과도 얻을 수 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로서는 그 지역의 특산물을 일본 전국에 홍보하는 한편 각종 숙박권과 시설권으로 관광객 유치의 효과도 노릴 수 있어 2, 3차적인 경제적 연쇄효과가 기대된다.
일본 전국의 ‘후루사토 납세’ 특산품과 혜택, 그리고 기부금의 사용 용도를 한자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관련 사이트 운영도 점차 늘어나고 있어 새로운 비즈니스의 모델로 각광을 받고 있다.
일본 경시청 보고서는 2011년 당시 1만5878명 사망, 6126명 부상, 2713명 실종을 확인했다. 또한, 25만4204동이 반파되었을 뿐만 아니라 건물 12만9225동이 붕괴되었고 69만1766동은 부분적으로 손상을 입었음을 확인하였다.
기부금은 ‘마을자원보전기금’에 적립돼 자연환경 보전활동 등에 쓰인다.
매년 일본 전국의 대표 지역 홍보 마스코트를 대상으로 인기투표가 실시되고 있다. 2015년 그랑프리 투표 사이트 는 다음과 같다. www.yurugp.jp/vote/ 예를 들어 5만 엔까지 공제가 가능한 사람의 경우 ‘후루사토 납세’로 5만 엔을 지방자치단체에 보낼 경우 2000엔을 제외한 4만8000엔의 세금이 되돌아오며, 거기에 1만 엔당 3000~5000엔 상당의 그 지역 선물까지 받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다. 결국 ‘1만 엔을 기부하면 답례로 쌀 10㎏을 받을 수 있다’는 지방자치단체 5군데에 ‘후루사토 납세’를 하면 자기 부담 2000엔에 50㎏(10㎏×5)의 쌀을 손에 넣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