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G의 실적과 주가가 힘을 잃은 모양새다. 지난해 4분기 실적은 시장 기대치를 밑돌았고 주가는 바닥을 찍었다. 다만 증권사들은 KT&G에 대한 투자의견으로 ‘매수’를 유지했다. KT&G 주가가 반등할 가능성이 존재한다는 분석이다.
◇중동향 수출 해결과제
KT&G 주가가 지난해 10월 이후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17일 9만300원에 거래를 마치며 최근 1년 사이 가장 낮은 주가를 기록했다. 지난해 같은 날 9만9500원보다 9200원이 빠진 금액이다.
또한 지난해 4분기 연결 매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9% 증가한 1조2007억 원, 영업이익은 4.6% 감소한 2518억 원을 기록했다. 지배주주 순이익은 기부금 증가와 환 관련 이익 감소로 8.7% 줄었다.
별도기준 매출액은 9.5% 증가한 7479억 원, 영업이익은 12.4% 늘어난 2698억원을 기록했다. 하지만 DB금융투자는 KT&G의 지난해 4분기 별도기준 영업이익은 시장 기대치를 8.8% 상회했으나 연결 영업이익은 예상치를 15%가량 하회했다고 분석했다.
KT&G의 실적 부진은 한국인삼공사(KGC)의 판관비 투자가 지속되고 해외와 기타 연결법인 실적의 예측 가능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또 내수 담배 시장 점유율은 상승한 반면 수출 담배 판매량이 줄어든 탓도 있다.
차재헌 DB금융투자 연구원은 “부동산분양 매출을 빼면 근본적인 수익성 개선이 제한적”이라며 “결국 수출부문이 회복되기 전까지 강한 이익 모멘텀이 발생하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고 전망했다. 다만 “KT&G의 가이던스를 종합해 보면 올해도 증익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조미진 NH투자증권 연구원은 “해외 시장은 KT&G의 중장기적 성장 동력이다. 담배 해외법인과 신시장 수출은 호실적을 보이고 있으나 중동향 수출은 해결해야 할 과제”라며 “최근 발표한 구매관리자지수(PMI)를 보면 전자담배의 해외 시장 진출은 긍정적 방향성이라고 판단된다”고 내다봤다.
NH투자증권은 KT&G에 대한 투자의견 ‘매수’를 유지하고 목표주가는 기존 13만5000원에서 12만 원으로 11% 하향 조정했다. DB금융투자은 예상치를 하회하는 지난해 4분기 실적을 반영해 올해 목표주가를 기존 13만3000원에서 12만2000원으로 8.3% 내렸다. 유안타증권도 ‘매수’를 유지했으나 목표주가는 11만3000원으로 7% 하향했다.
나이 들어 젊은이들에게 인기를 얻으려면 ‘지갑은 열고 입은 다물라’고 한다. 나이든 꼰대( 꼰대라는 말은 나이 많은 걸인을 일컬었다. 나중에 아버지나 선생님을 비하하는 은어로 사용되고 있다. 백과사전에서 인용)들에게 하는 말이다. 젊은이들이 숨어서 하는 은어에 대해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나이든 사람마저도 젊은이의 위세에 눌려 비굴하게도 참 맞는 말이라고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옆에 있는 나이든 사람에게 그렇게 행동하라고 옆구리까지 찔러댄다. 시니어들을 상대로 하는 교육장의 강사들도 무슨 대단한 노소화목(老小和睦)의 진리를 발견한양 그렇게 해야 한다고 떠드는 사람이 많음을 보고 나도 모르게 탄식이 절로 나왔다.
동방예의지국이니 경노사상이니 이런 거창한 것을 내세우지 않더라도 무한 존경받아야할 아버지나 선생님을 늙은 거지인 꼰대로 취급하는 것도 참지 못하겠는데 ‘돈은 내고 입은 다물어라!’니 이런 불공평한 처사가 어디 있는가. 돈을 냈으면 말이라도 하게 해줘야 당연하지 않는가.
우리는 미국이나 선진국 사람들에 비해 기부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지만 당신은 기부만 하고 경영에는 일체 참여하지 말라는 지나친 간섭배제를 지향하는 것도 기부를 망설이는 이유 중에 하나다. 일본의 국왕이 통치는 하지 않지만 왕으로서 위엄을 갖고 있는 것처럼 기부한 사람에게도 그만한 대접을 해줘야 기부를 팡팡할 것이 아니겠는가!
외국에는 기부를 한 사람이 경제적으로 갑자기 어려워 질 때 자신이 기부한 금액에서 일정금액을 되돌려 받는 제도까지 있다. 줬다가 뺏어간다는 생각을 하기보다 기부자의 삶이 어려워지면 역으로 도움을 받았던 기관에서 보살펴야 한다는 인간애가 흘려야 옳다.
돈을 내면 말이라도 하게하자. 내가 낸 돈을 허투루 쓴다면 되돌려 받는 제도도 만들어야 한다. 기부금을 냈으면 낸 것으로 끝내고 우리가 회사(단체)를 말아먹든 말든 아무런 간섭을 하지 말라는 것이 도리에 맞지 않는다. 학비를 대주는 아버지가 아들의 학업성적표를 보자는 것이 당연하다. 자식이 보내준 학비로 무슨 짓을 하던 말하지 못한다면 형평에 어긋난다. 돈을 낸 사람은 주주와 같은 사람이다. 알아야 되고 말할 권리가 있다.
‘기업과 나라 걱정으로 가득한 사람’. 권오용(權五勇·63) 효성그룹 고문과 인터뷰를 진행하면서 느낀 그를 단 한마디로 정의하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재계에서 ‘뼛속까지 홍보맨’의 요직을 거치면서 여러 굴지의 오너와 인연을 갖게 된 그는 국가와 사회, 미래에 대한 고민으로 채워진 사람이다. 그가 상임이사로 일하는 한국가이드스타(이사장 최중경 전 지식경제부 장관)는 비영리 공익법인 평가를 전문으로 하는 기관이다. 이곳에서 6년째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가 발견한 자신의 의무와 책임, 그리고 공동체 모두가 잘 사는 길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제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예요.(웃음) 2015년 1월호를 창간하기도 전에 정기구독 신청을 했고 지금까지 계속 보고 있죠. 평생 구독 회원이 될 것 같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매거진 제1호 독자, 권오용 고문은 단순히 여가를 활용하고 문화만을 즐기는 게 아니라 현실 사회까지 다루는 중량감 있는 시니어 매체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바로 그러한 바람이 구현된 잡지다.
“여가와 문화만을 즐기기에는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급변하고 있으니까요. 이런 상황에서 시니어의 역할이 필요합니다. 강물처럼 흘러서 사라지는 게 아니라 마치 저수지처럼, 필요할 때 좋은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시니어라고 봐요.”
부자는 돈을 잘 쓰는 사람
전경련 기획홍보 본부장을 거쳐 금호아시아나그룹, SK그룹 홍보실장, SK 사장, 효성그룹 홍보 고문까지, 스스로 재계에 취직했다고 하는 그가 공익법인 평가 법인에서 봉사로 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부터 그의 국가관을 들어봐야 한다.
“선진국의 기준이란 뭘까요? 바로 오랫동안 잘사는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중요한 건 기간이죠. 그런 의미에서 최고 선진국은 유럽이고, 그다음이 미국이죠. 그리고 일본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갔습니다. 중국에는 소득이 5만 달러 이상인 사람이 1억 명이나 된다고 해요. 그런데 잘사는 나라로 보여도, 기간으로 보면 졸부예요.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돈을 잘 쓰는지를 따지면, 그 부분에 있어선 선진국이 아니예요. 돈이 많은 사람이 부자가 아니라 돈을 잘 쓰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빌 게이츠나 워런 버핏이 부자인 이유는 돈을 잘 쓰기 때문이죠. 평생을 쓰레기 주워 모은 돈을 장학금으로 내놓은 할머니는 빌 게이츠 못지않은 부자입니다. 이런 부자가 많은 나라가 선진국입니다.”
세금을 안 내면 투명성으로 보답해야
돈을 잘 써야 공동체가 잘 산다. 기부가 대표적인 방법이다. 그런데 권 고문이 보기에 우리나라의 기부 문화는 많은 문제가 있다.
“우리나라 기부금이 1년에 12조 원 정도 됩니다. 그중 7조 원이 종교단체에서 나와요. 그리고 5조 원은 공익법인이 마련한 기부금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기부금 시장이 양적으로는 굉장히 늘었는데, 어떻게 썼는지는 불투명하다는 게 문제입니다.”
공익법인 기부금의 어마어마한 액수에 기자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동시에 수많은 문제들도 떠올랐다. 당장 얼마 전 한국 사회를 전율시켰던 ‘어금니 아빠’ 이영학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행각 뒤에는 그저 ‘장애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의 풍족한 생활을 뒷받침해준 소위 ‘눈먼 기부금’이 있지 않았는가.
“세금은 국회를 통해 어떻게 쓰이는지 파악되지만 기부금은 잘 쓰이고 있는지 국민이 관심이 없어요. 막연히 잘 쓰이고 있겠지 생각만 하죠. 미국의 공익법인도 우리처럼 세금을 안 냅니다. 그런데 세금을 내지 않기 때문에 조세정의의 관점에서 일반 기업보다 훨씬 많은 투명성의 책임이 부여돼요. 우리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냥 방관하는 편이죠.”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한국가이드스타는 공익법인이 세금을 면제받는 대가로 국세청에 매년 제출하는 재무보고서를 분석 소스로 삼는다. 재무보고서를 분석해 운영을 제대로 하는지 안 하는지 검토하고, 결과를 점수화해 매년 공개하고 있다. 작년에 처음 발표했는데, 반응이 꽤 컸다고 권 고문은 자평했다.
“물론 평가는 다 싫어하죠. 학교도, 신문도, 개인도 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금을 내는 입장에서는 제대로 평가해주길 바라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어요? 그리고 이런 걸 정부에서 하면 탄압한다는 얘기를 듣게 돼요. 그래서 민간 쪽에서 하는 게 맞죠.”
한국가이드스타는 어떻게 보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를 실행하고 있는 셈이다. 모두가 필요한 일이라고 말은 하지만 여론을 주도하는 시민단체를 건드리는 일이기에 지원을 주저할 수 밖에 없다. 쉽지 않은 길이었고 ‘이 일을 내가 왜 하나’라는 후회가 들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올해도 3월 14일 우리나라 공익법인 8993개를 대상으로 투명성과 책무성을 분석해 93곳만이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좋은 평가를 받은 곳에서는 좋아하지만 나머지는 무슨 자격으로 평가를 하느냐고 항의가 쏟아졌다.
지원이 불가능했던 미르·K 재단 사건
“작년에는 데이터를 통해 공익법인의 생태계를 바꾸겠다는 저희 취지를 긍정적으로 보고 큰 지원금이 들어오기도 했습니다. 한국가이드스타 평가를 중요한 참고 정보로 활용하는 기업도 생겼습니다. 보람 있죠. 공익법인에서는 싫어하지만.(웃음) 그러나 의무감을 갖고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권 고문은 공익법인 평가가 반드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면서 정권 교체의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미르·K 재단 사건을 언급했다.
“권력을 이용해 자금을 요청하는 미르·K 재단 같은 곳은 어느 정권에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전경련에 공익법인들에 대한 운영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적이 있어요. 그 가이드대로라면 미르·K 재단은 돈을 줘선 안 되는 단체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돈을 주는 바람에 기업 회장들이 구속되고 전경련은 해체 위기에 몰렸으니…. 미안한 심정이죠. 공익법인 평가는 기업으로 하여금 그런 비정상적인 재단에 돈을 안 줄 수 있는 정당한 명분을 마련해줍니다.”
배려가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든다
그는 최근 오너십 체제와 기업 경제, 국가 발전이 함께 이뤄질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다. 또 지금까지 변화된 오너십과 사회 환경의 장점들을 합쳐 한국만의 독자적인 모델이 개발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예전에 전경련에서 일할 때, 전경련 조찬이 7시 30분에 있는데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7시 35분에 도착한 일이 있었죠. 그때 그분이 회의가 늦게 끝나 미안하다고 말했던 게 기억납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했더니 새벽 5시부터 이미 회의를 하나 끝내고 온 거였어요. 촌음을 아껴 시대를 누빈 선배 경제인들의 열정에 우리 경제가 여기까지 온 거죠.
정주영, 이건희, 구자경, 김우중, 최종현 등 오너의 삶과 성과를 바로 옆에서 본 사람답게, 그는 한국의 정치와 경제 관계를 정경일체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열정과 실행력이 일으킨 변화의 긍정적인 면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에 평창동계올림픽에 사람들이 얼마나 감동을 받았어요? 그런데 그걸 유치한 게 이명박 전 대통령과 이건희 삼성 회장이에요. 정경일체가 되어 국가적 목표를 달성한 거죠. 서울올림픽도 마찬가지였죠. 감동과 투자는 별개가 아니에요. 그 과정도 봐야죠.”
그는 시니어를 ‘보이지 않는 자산’이라고 표현했다. 보이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이뤄지지만 보이지 않는 자산에는 투자가 잘 안 이뤄진다. 그러나 정말 중요할 때 자신의 역할을 다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자산이다. 여기서 그는 공자의 ‘겨울이 되어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는 사실을 알게 된다’(歲寒然後 知松栢之後凋)를 인용하기도 했다. 그는 보이지 않는 곳을 보는 배려의 힘이야말로 효율을 지속가능하게 만들어주는 열쇠라고 말했다.
“올림픽이 그다음에 열리는 패럴림픽으로 이어지는 것이야말로 효율이 배려가 되는 교훈을 보여줬죠. 올림픽이 몇 초를 기록으로 서로 경쟁하는 ‘효율’을 목표로 한다면 패럴림픽은 ‘배려’없이는 가능하지 않은 경기입니다. 그런데 패럴림픽이 88서울올림픽 때부터 시작됐다는 걸 아세요? 사실 우리나라가 효율과 배려를 세계 최초로 시행한 나라입니다.”
재계에 취직했다는 사람답다. 전문성을 갖고 일가를 이룬 만큼, 이제 그는 봉사라는 기회를 통해 청춘을 다시 찾아가고 있다. 철학이 샘솟듯 봉사활동을 통해 사회를 아름답게 만드는 권오용 고문. ‘브라보 마이 라이프’ 1호 독자의 행보라서 그런지 더욱 진한 여운이 남는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가 보면 안다. 많은 한국인이 이 도시를 떠나지 못하고 장기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유를 말이다. 매력이 넘치는 바르셀로나는 영화 로케이션 장소로도 큰 인기다. ‘내 남자의 여자도 좋아’, ‘비우티풀’, ‘스페니쉬 아파트먼트’ 등은 모두 바르셀로나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다. 또 몬주익 언덕에는 마라톤 선수 황영조 기념탑이 있다.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때 우승을 안겨줬던 도시. 낯선 나라에서 한글을 보면 가슴이 짜르르해지고 눈시울이 젖는다.
100년 넘게 공사 중인 대성당
스페인 북동부의 카탈루냐 자치주의 주도인 바르셀로나는 17세기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바르셀로나는 최근 카탈루냐가 스페인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시도하고 있어 국제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이곳은 관광도시로 유명한데 특히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i, 1852∼1926)의 건축물은 탁월한 명소다.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카사 밀라, 카사 바트요는 건축 문외한의 눈길도 저절로 이끈다. 특히 라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은 여행자들의 필수 방문지다. ‘사그라다 파밀리아’의 뜻은 ‘성 가족’이라는 의미로 예수 그리스도, 마리아, 요셉을 뜻한다.
이 성당의 원 설계자는 가우디의 스승인 비야르. 성 요셉 축일(1882년 3월 19일)에 착공을 했으나 건축 의뢰인과 의견 충돌로 중도 하차했고 이듬해부터 가우디(당시 31세)가 맡게 된다. 가우디는 1926년까지, 총 12년간을 오로지 이 성당에만 매달린다. 그러나 성당을 완공도 하기 전, 그는 전차에 치여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다. 그가 사망할 당시 이 성당은 ‘예수 탄생’ 파사드, 종탑 한 개, 네 개의 탑, 지하 납골당만 완성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 공사는 끊임없이 진행되었고 가우디 사후 100년(2026년)이 되는 해 완공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성당은 천천히 자라나지만, 오랫동안 살아남을 운명을 지녔다”는 생전 가우디의 말이 이뤄질 것 같다. 입장료가 비싸지만 매표소는 늘 장사진을 친다. 매표 요금은 완공을 위한 기부금 형태로 쓰인다.
바르셀로나를 빛내는 건축가 가우디
일단 엘리베이터를 타고 맨 꼭대기 층으로 올라가 400여 개의 회오리계단을 따라 내려오면서 구경하면 된다. 가우디의 유해는 지하 박물관에 있다. 1869년(17세), 가우디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형이 이미 가 있는 바르셀로나로 터전을 옮겨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고향과는 달리 큰 도회지인 바르셀로나에서 처음은 적응이 어려웠지만 그 시절, 많은 자극과 동기를 받는다. 1874년(22세),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건축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그의 특이한 창조성은 호평보다는 혹평을 많이 받는다. 그는 늘 말이 없고 허름한 차림새에 이상한 실험들을 일삼았기에 평생 괴짜라는 꼬리표를 안고 살아야 했다. ‘귀족적이면서 천박한, 댄디(dandy)이자 방랑자, 박식하지만 오락가락하는, 기지가 넘치지만 재미없는 사람’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근대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1887~1965)가 있었다. 그는 가우디를 천재라고 칭찬했다. 사후 30년 뒤인, 1960년대부터 그는 인정받기 시작했고 바르셀로나를 영원히 빛내고 있다.
카사 밀라에서 구엘 공원까지
바르셀로나에는 성 가족성당 말고도 가우디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로 꼽히는 카사 밀라가 있다. 산을 주제로 디자인하고 석회암과 철을 이용해 만들었다는 독특한 건축물로 파도가 치는 것 같은 곡선이 인상적인 건물이다. 또 바다를 주제로 디자인한 카사 바트요(200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는 도자기 타일과 유리 모자이크가 아름답다. 그러나 가장 마음에 드는 곳은 구엘 공원(1984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이다. 가우디와 구엘 백작의 합작품.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 백작은 이상적인 전원도시를 만들 목적으로 바르셀로나의 펠라다 지역 땅을 매입한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영국의 전원도시를 모델로 해서 그리스의 팔라소스 산과 같은 신전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공원 부지가 돌이 많은 데다 경사진 비탈이어서 작업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럼에도 가우디는 자연스러움을 살리기 위해 땅 고르는 것도 반대했다고 한다. 그는 이 단지를 위해 무려 14년(1900~1914)이나 매진했지만 결국 자금난 등으로 미완성으로 끝났다. 1922년, 바르셀로나 시의회는 구엘 백작 소유의 이 땅을 사들여 이듬해 시영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자연 친화적 건축물, 구엘 공원
구엘 공원은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이고 독특한 공원 중 하나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는 사람은 꼭 방문해봐야 하는 곳으로 손꼽힌다. 멀리 지중해와 바르셀로나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언덕바지에 구엘 공원이 있다. 초콜릿을 닮은 듯한 돌기둥, 과자의 집처럼 생긴 건물, 반쯤 기울어져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인공 석굴, 계단 위에 타일로 만들어진 도롱뇽, 기념품 파는 건물 등 가우디만의 색깔이 분명한 건축물이 오롯이 모여 있다. 또 그리스 로마 신화에 관심이 많았던 구엘 백작의 요청으로 만든 도리아식 기둥도 눈길을 끈다. 녹색 식물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들어앉은 독창적인 건축물들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연을 거스르지 않은 채 만들어졌고 사방팔방으로 시내가 조망되어 가슴속까지 시원해진다.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점까지 가세하면 두말할 필요 없이 행복한 공간이다. 단 과거 가우디가 살았던 집은 박물관으로 공개해 유료다. 가우디가 사용했던 침대, 책상 등 유품과 데드 마스크가 전시되어 있다.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한 독특한 가구들이 감상 포인트다.
Travel Data
찾아가는 방법 대한항공, 아시아나항공 등 직항이 운행된다. 소요시간은 13~14시간.
현지 교통 바르셀로나는 규모가 커서 대중교통을 필히 이용해야 한다. 지하철이 제일 편리하다. 도심이 복잡하므로 1일권을 사서 무제한으로 이용하는 것이 좋다.
음식정보 보케리아 시장에서는 해산물을 구입해 즉석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을 때는 근처의 레스토랑을 이용하자. 흥정으로 절반짜리 해산물 요리를 먹을 수 있다.
숙박정보 바르셀로나는 관광도시라 물가가 비싼 편이다. 고급 호텔 가격은 1박당 50만 원 이상. 아파트, 한인 민박, 호스텔 등을 이용하면 비용을 줄일 수 있다. 아파트 숙박은 1박당 10만 원 정도.
화폐 유로화 통용.
날씨 바르셀로나의 4월 평균 최저기온은 8.5℃, 평균 최고기온은 17.6℃로 서울의 4월 중순 기온과 비슷하다. 예측 없이 비가 내릴 수 있으니 비옷과 우산은 꼭 챙겨서 외출하자.
시니어 여행 포인트 바르셀로나는 서둘러 여행하는 곳이 아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둘러봐야 할 도시다. 몬주익 언덕은 꼭 올라가 봐야 한다. 도시를 한눈에 전망할 수 있다. 경기장 근처로 내려오면 차도 옆으로 황영조 동상이 있다. 차도를 따라 내려가면 미로 미술관을 만난다. 바르셀로나를 기점으로 근처 소도시 여행은 꼭 해야 한다. 몬세라트 성지와 타라고나를 적극 권한다. 누드 비치에 관심이 있다면 바르셀로나에서 30분 거리에 있는 시체스(Sitges) 해변을 찾으면 된다.
독지가란 ‘사회사업 따위의 비영리사업이나 뜻있는 일에 특별히 마음을 써서 협력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연말이면 신문에 종종 독지가 얘기가 실린다. 이름도 알리지 않고 좋은 일에 써달라며 큰돈을 기부하는 사람들이다. 영수증도 안 받아갔으니 세금 감면을 받기 위한 회사 차원의 기부도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궁금했었다.
필자가 이끄는 KDB 시니어브리지아카데미 동문회는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사회 공헌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기본적인 재원은 연회비로 하고 있으나 자발적인 참여의 열기가 약해 기금 모음이 어려운 실정이었다.
그런데 지난해 12월 상계동 연탄 배달 봉사에 참여했던 한 회원이 100만원을 기부했다. 총동문회가 사회 공헌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보고 기부를 결심했다는 것이었다. 그간 여러 가지 행사에서 본 기부나 후원은 금액도 크지 않았고 마지못해 내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이렇게 자발적으로 기부금을 내며 용도를 묻지 않겠다고 하니 고마운 일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만나보고 싶었다. 어떤 마음으로 기부를 쾌척하는지도 알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돈이 많으냐고 물었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한때는 잘 벌었지만, 그때는 그만큼 기부를 많이 했고 지금은 무직 상태라서 수입도 없다는 것이었다.
독지가라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지 알아보고 싶어 과거사를 물었다. 너무나 가난해서 공장에 다니고 있을 때 외국 기관의 후원으로 야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보험회사에 취직해서 보험 왕까지 올라갔다는 것이다. 그 때 그 사람들의 후원이 없었다면 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고 공장 생활을 이어갔을 것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 덕분에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 은혜를 갚고 싶다는 것이었다.
기부는 중독성이 있다고 했다. 잘 나갈 때는 1억 원이 넘는 돈도 기부한 적이 있고 크고 작은 기부를 많이 했다는 것이었다. 기부하고 나면 기분이 날아갈 것 같고 희한하게도 그 만큼의 수입이 따라 오더라는 것이다. 혹시 종교가 있느냐고 물었다. 아니란다. 종교계의 기부 풍토와 완전히 다른 것이다.
필자도 시각장애인 파트너를 처음 만났을 때 기부라는 것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당시 60대 후반부터 70대 후반 사람들인데 현역에서 물러난 상태라서 수입이 없으니 대부분 생활이 어려웠다. 어차피 이 세상 떠날 때 빈손을 갈 것인데 자녀들은 이미 자립했으니 더 이상 필자 도움이 없어도 되고, 이런 사람들을 위해 돈을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막연하게 얼굴도 모르는 불우 이웃을 위해 써달라며 돈을 기부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에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분들은 곧 은퇴를 했고 30대~40대 시각장애인들이 들어왔다. 대부분 현역에 일하고 있는 사람들이라 오히려 필자보다 나은 사람도 많았다. 그 바람에 흐지부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 만난 독지가와 얘기해보면서 기부라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부는 특별한 사람이나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라는 것을 몸소 실천하며 다양한 활동을 이어가는 시니어 치어리더팀 '낭랑18세'가 추운 겨울을 맞아 온정을 베푸는 행사를 열었다. ‘낭랑18세’는 지난 12월 9일 동숭동소극장(서울시 종로구 혜화로)에서 ‘12월의 밤 후원행사’를 열고 혼자 사는 같은 연배 시니어를 위한 기부금 마련과 후원행사를 가졌다.
낭랑18세가 소속한 (사)세계전통문화놀이협회의 유소년 시범단인 아꿈세(아이들이 꿈꾸는 세상) 리더스쿨과 달존팀도 함께 후원의 밤 행사에 출연해 깜찍한 공연을 펼쳤다. 이날 모인 수익금과 후원금은 독거노인과 불우이웃을 돕기 위한 연탄기부와 후원금으로 전달됐다.
(사)세계전통문화놀이협회의 조혜란 대표는 “이번 행사를 통해 사회 소외계층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우리 사회가 따뜻한 관심을 가지고 사랑의 온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 대표는 “이번 공연 연습과정과 진행에 있어 낭랑18세 치어리더팀의 자발적인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고” 귀띔했다. 낭랑18세는 치어리딩 공연 뿐 아니라 시니어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연극을 무대에 올려 관객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어려운 이웃을 돕고싶은 마음이 함께 모여 그 어떤 행사보다 감동적이고 따뜻한 자리였다는 후문.
현재 우리나라의 독거노인 수는 125만 명으로 작년엔 386명이 고독사로 사망했다. 2035년에는 독거노인의 수가 343만 명으로 증폭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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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보 앙코르 라이프
우리는 잘 늙고 잘 죽기 위해 잘 살려고 한다. 그래서 인생 후반기 여러 필수교양 지침 가운데서도 비우기, 내려놓기, 나누기를 배우고 훈련하고 싶어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바로 이런 게 아닐까.
시니어 세대는 일밖에 모르고 살았다고들 이야기한다. 돈을 벌어야 하고 모아야 하고 자녀들에게 해주어야 하는 강박 속에서 성실하게 노력하고 희생하며 살았다고 하는 그 공로를 돌이켜보면 사실 나와 가족을 위한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하다. 다른 사람 또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재능이나 금전을 기부하고 자원봉사를 한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는 ‘기부’문화에 익숙지 않았다.
가정에서도 학교에서도 배운 적이 없다. 미국의 워런 버핏, 빌 게이츠, 마크 저커버그 같은 사람들은 미국 사람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삼성 같은 대기업도 사회공헌 차원에서 기부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겠지만, 개인이 기부를 하는 일은 아주 드믄 일이다. 기부 DNA가 아예 없는 사람들은 그렇다 하더라도 보통의 사람들도 특별한 계기가 없는 한 기부는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기기 쉽다.
퇴직을 하고 일정한 가처분소득 없이 사는 마당에 기부하고 싶어도 형편이 그렇다. 대부분 이런 생각일 것이다. 퇴직 후 지속적으로 경제활동을 하든지, 연금이나 일정 자산소득이 있든지 간에 어느 정도의 기간이 될지 불투명한 자신의 노후를 생각하면 불안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향후 30~40년을 위한 준비를 충분히 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보통의 시니어라면 말이다. 얼마가 있어야 안심이 될까? 준비가 되어 있다 해도 소유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행복하지 않다. 단언컨대.
인생 후반기 시니어의 차이 나는 경영 노하우는 빼기와 나누기다. 인생 후반기야말로 기부하는 일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다. ‘소득의 일정 부분을 기부한다’는 말 대신 소비하는 금액의 일정 부분을 줄이고 빼서 기부금 명목으로 지출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얼마큼씩 빼기를 할 것인가. 물질적으로 나를 비워가는 과정 또한 나를 내려놓는 일 이상으로 중요하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것, 매달 생활비에서 10퍼센트 혹은 13퍼센트는 떼어서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나 공익을 위해 애쓰는 단체에 기꺼이 기부하고 나누어 쓰겠다고 마음을 먹고 행동에 옮기는 순간 삶의 가치는 고양된다. 사회에 기여하고 있다는 자긍심은 물론, 줌으로써 누리는 행복감은 나만을 위한 소비가 주는 행복감보다 훨씬 큰 의미를 준다. 신기하게도 기부는 투자의 효과로 내게 어떤 형태로든 돌아온다는 것이다.
기부하는 일에 어린이, 어른, 노인을 구분할 필요는 없지만, 우리에게 기부문화가 그리 친숙하지 않다는 점에서 각 세대에 맞는 기부문화를 확산하기 위해 공감할 만한 동기부여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몇 달 전에 지인들 몇몇과 다음과 같은 궁리를 해봤다.
당신이 누구이든 기부할 돈도 재능도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하시라. 우리나라 국민은 만 65세가 되면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을 받는다. 필자도 2년 내에 소위 지공족에 편입된다. 웃음도 나고 머쓱한 기분도 드는 게 사실이다. 이런저런 대화 중에 지하철 무임승차로 한 달에 적어도 4만여 원의 지하철 교통비가 절약된다는 점에 주목하게 되었다. 외출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2만원 정도는 절약될 것으로 짐작된다. 이거야말로 공돈인데 이럴 때 과감하게 월 2만원을 기부해보라. 이름하여 지공펀딩 캠페인을 벌여보자고 5명의 예비 지공족이 모여 논의했다. 지하철이 공짜라는 희화적 의미의 ‘지공’을 ‘지공(至公)’이라 표기하고 공익을 위해 기금조성을 하기로 한 것이다. 열 명, 스무 명, 백 명, 천 명, 그 이상으로 지공족이 참여한다면 그야말로 지공문화의 새로운 지평을 열게 될 것이고 시니어 문화가 사회적 변화를 일으키는 시금석이 될 만하다.
성실하게 일하고 절약하며 살아온 세월은 어디로 가고 무임승차족, 사회비용부담 세대로 비하되고 있는 지금의 시니어에게 비타민 같은 기회로서 기꺼이 동참하고 싶은 제안으로 받아들여지길 기대하고 있다. 공개하기도 전에 벌써 동참의 뜻을 보내온 사람이 30여 명이다. ‘기부한다는 생각을 한 적도 없지만 기부해 달라고 요청하는 이도 없는데 누구한테 기부하라는 거냐’ 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다. 이 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공감할 만한 명분이 있고 믿을 만한 단체라면 나도 기꺼이 지공 멤버가 되어 기부자가 되겠다는 의미다. 본격적으로 이런 운동을 전개하면 ‘나도 기부를 한다’는 자부심과 즐거움에 행복해하는 시니어가 많아지리라 본다. 이 운동의 목적이나 목표를 구체적으로 소개하기에는 적합한 지면이 아니어서 더 이상의 언급은 하지 않겠다. 단, 기부의 마음만 있으면 기부할 돈과 재능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경우는 없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설사 기부를 하고자 해도 누굴 믿고 기부를 하겠는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작금의 사회 분위기가 기부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것도 사실이다. 어금니아빠 사건, 새희망의 씨앗 전화사기 사건, 미르재단에 이르기까지 최근 1년 사이에 부패한 재단, 기부금 횡령사건이 줄을 이어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다. 그래서 진정 목적에 잘 쓰이고 있는지 믿을 수 없어 더 이상 기부하지 않겠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부정적 대응이 해법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세먼지가 가득하고 탄소 배출이 증가해도 우리는 숨을 쉰다. 숨쉬기에 필요한 산소는 여전히 공기 중에 존재한다. 기부는 하지 않는 것보다 하는 것이 사회를 더 좋게 변화시키는 데 기여한다고 믿는다. 그리고 기부문화가 성숙해가면서 스스로 사회의 자정 장치까지도 만들어낼 것으로 믿는다.
후반기, 다시 시작하되 자장격지(自將擊之)의 자세로 한다. 과식하지 않을 줄도 알고 내 몸의 상태에 맞춰 행동을 조심할 줄도 안다. 그러지 않으면 탈이 나니까 어쩔 수 없기도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상황이 과히 나쁘지 않다. ‘스스로 가지려고만 하지 않고 주려고 한다. 더하기, 곱하기보다 빼기, 나누기를 좋아한다.’ 이런 현상은 연륜의 지혜가 주는 자정기능이고 자기균형 효과라 생각한다. 나이에 걸맞게 노쇠해가는 것이 노익장을 과시하고 노욕을 부리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보기에 자연스럽다. 몸도 마음도 물질도 스스로 비워야 하고 빼야 하는 줄 알게 되니 기쁘다. 나와 내 자녀에게만 주는 것보다 이 사회의 더 많은 사람, 더 필요로 하는 곳에 주면 내가 실제로 준 것보다 더 큰 몫으로 가치가 증대된다. 기부는 소비가 아니라 투자이고 생산이다. 기부하는 사람은 투자자이고 보람과 기쁨이라는 배당을 받는다. 우리 사회의 명예로운 주주가 되는 것이다. 사회를 더 좋게 변화시키는 일에 시니어가 동참하는 것이다.
평범한 당신이 죽기 전에 기부의 즐거움을 누리고 사회에 공헌하는 사람으로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이보다 더한 축복이 어디에 있을까.
세상에 이기지 못할 것이 운발이라고 한다. 운칠기삼(運七技三), 운이 70%라면 재능과 노력은 3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심지어는 운11. 기 마이너스 1이란 이야기조차 있다. 운이 좋아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윤은기(66) 한국협업진흥협회장은 그 답을 협조와 협업에서 찾는다. 그는 개인이나 기업이나 공생, 상생하는 것이 운을 좋게 만들고, 지속가능경영을 가능케 한다고 말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가 아니라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가 그의 신조다. 남과 나눠야 운이 따른다. 운은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것이라기보다 후천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이야기다. 별명이 ‘미스터 콜라보(Mr. collabo)’인 그를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윤 회장께선 일찍이 미래의 물결, 정보화사회를 이야기하는 등 미래 트렌드를 남보다 앞서 예측하시고 강의해왔습니다. 그런데 운 이야기를 강조하시는 게 좀 모순 같습니다.
“정보화를 넘어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운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내가 말하는 운이란 덕행의 인과법칙입니다. 지극히 과학적입니다(웃음). 남을 돕지 않는 자에겐 운이 따르지 않아요. 아무리 똑똑하고 잘난 사람도 남이 도와주지 않거나 방해를 하면 성과를 낼 수 없습니다. 성공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신의 노력뿐만 아니라 남의 도움을 크게 받았다는 점입니다. 귀인을 만나야 운이 좋아질 수 있습니다. 귀인을 만나려면 먼저 인간 존중, 인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최근 를 쓴 일본의 원로 변호사 니시나카 쓰토무도 국내 언론 인터뷰에서 ‘운=도덕과학’이라고 풀이한 바 있다. 니시나카 변호사는 “도덕적 과실이 운에 미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라도 갚지 않으면 운이 나빠진다. 은혜를 받기만 하면 ‘도덕적 부채’로 쌓인다”고 말했다. 도덕적 선행과 나눔이 운을 불러온다면, 도덕적 부채와 독과점은 금전적 부채보다도 더 큰 불운을 초래한다는 지적이다.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보다 남을 돕는 자를 돕는다’는 말은 과학적 근거가 있다. 남을 돕는 봉사를 하고 난 뒤에는 거의 모든 경우 심리적 포만감, 즉 ‘하이(high)’ 상태가 며칠 또는 몇 주 동안 지속된다. 의학적으로도 혈압과 콜레스테롤 수치가 현저히 낮아지고 엔도르핀이 정상치의
3배 이상 분비되어 몸과 마음에 활력이 넘친다. 이른바 마더 테레사 효과다. 기업의 사회적 공헌(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리더층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 Personal Social Responsibility) 실행은 이타적이라기보다는 운을 불러들이는 이기적 행위인 셈이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란 말은 많이 합니다. 반면에 일반 개인의 사회적 공헌(PSR)은 그만큼 강조되진 않지요.
“‘사회 공헌, 기부’ 하면 거대 담론으로만 생각합니다. 나중에 여유 생길 때 기부한다고 미뤄두면 평생 하기 힘듭니다. 기부는 물질적 여유가 아니라 평상시 태도, 습관입니다. 저는 재능기부 차원에서 군에 강의를 갑니다. 또 공군 순직 조종사 유자녀 장학금을 매년 1000만원씩 지원하는 일을 7년째 해오고 있습니다. 기부를 꾸준히 하는 것은 남을 위하는 것을 넘어 스스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입니다.”
그는 “돈이 많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하며 앰뷸런스를 이용하며 운전기사로부터 들은 이야기를 소개했다. “부자들은 앰뷸런스에 시체가 실리는 순간부터 가족이 싸우는 경우가 많다는 거예요. 그렇게 산다면 부자인들 무슨 삶의 의미가 있겠습니까. 저는 있어야 나누는 것이 아니고 나누어야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진짜 부자는 돈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을 나누는 사람입니다.”
1년에 기부금 1000만원을 약정하고 꾸준히 하는 것, 쉬운 일은 아닌데요. 사모님도 처음부터 동의하셨는지 살짝 궁금합니다.
“저는 집사람을 설득해야 할 때 집에서는 절대 말을 꺼내지 않습니다(하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이나 술집에 데려가 이야기를 시작하지요. ‘사는 게 뭐 별것 있나, 잘사는 인생이란 무엇인가’ 등등으로요. 먼저 길을 닦고, 마음을 촉촉하게 적신 뒤 본론을 꺼내지요. ‘우리 여행 한 번 덜 가고, 골프 한 번 덜 치자, 소비를 조금 줄이더라도 좋은 일을 해보자, 돕고 사는 게 재미지, 혼자 잘사는 게 무슨 재미인가’ 하고요. 똑같은 이야기라도 반응이 전혀 달라요. 집사람이야 콩나물값 깎아가면서 알뜰살뜰 살림하는 전업주부인데 처음엔 좋아하지 않았지요. 하지만 지금은 저보다 더 기부에 적극적이랍니다.”
윤 회장은 스스로의 전공을 심경학, 즉 심리경영학(그는 학부는 심리학, 석·박사는 경영학을 전공했다)이라고 말하곤 한다. 심리를 경영할 줄 안다는 의미에서다. 그는 “정의파, 대의명분파들이 설득에 실패하고 저항에 부딪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옳으냐’로 ‘좋으냐’를 무시하거나 압박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진정한 소통은 ‘옳다’를 넘어, 마음속으로 ‘좋다’고까지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은 이성보다 감성에 의해 움직이기 때문에 이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베스트셀러 비결도 사모님과의 심경학 소통 덕분이라면서요.
“하하. 네. 제 책의 첫 독자, 안테나 마켓은 집사람입니다. 작가에겐 책 내용이 정리돼 영감이 오는 ‘유레카’의 순간이 있습니다. 한밤중이라도 깨워 한바탕 책 내용을 설명하지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고 심드렁해하면 책의 콘셉트 혹은 틀을 바꿉니다. 베스트셀러가 된 책은 대부분 집사람이 한밤중 잠결에 들어도 흥미롭게 들은 책, 말 된다고 집사람이 동의를 표한 책이었습니다(웃음).이번 협업 책도 그렇고요.”
진정한 소통은 같은 세대, 같은 수준의 말을 쓰는 사람뿐 아니라 이질적 그룹의 사람과 통하는 것이다. 그의 강의가 폭넓은 호응을 얻는 것도 그 덕분이다. 이장우 브랜드마케팅그룹 회장, 차동엽 신부, 장용동 목사 등 숱한 명사들이 윤 회장의 강의를 ‘내 인생에 영향을 준 명강의’로 꼽는 것도 소통력 때문이다.
윤 회장께서 살아오시면서 겪은 가장 큰 고비는 무엇인가요.
“1980년도에 발간된 앨빈 토플러의 을 읽고 우리나라가 살 길은 정보화사회에 빨리 도전하는 것이라는 신념을 갖게 됐습니다. 잘 다니던 종합무역상사에 사표를 내고 1983년 여의도에 정보전략연구소를 차렸는데 2년 만에 퇴직금까지 모두 까먹고 엄청난 부채를 지게 된 거예요. 하루가 지나면 부채는 늘고 철수하자니 빚 감당을 못하겠고. 그때가 내 인생의 최대 위기였습니다. 마침 1985년 앨빈 토플러가 방한해 붐이 일어나면서 극적으로 위기를 벗어나게 됐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은 세상 모든 일은 반드시 때가 있다는 거였습니다. 너무 늦어도 안 되지만 너무 빨라도 안 된다는 겁니다. 이후, 무슨 일이든 최적의 타이밍을 찾아내려고 심사숙고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아이디어가 생기면 자신감이 넘쳐 성급하게 뛰어드는데 그러면 실패하기 십상이지요.”
우리나라 최초의 골프 칼럼니스트로 골프와 경영을 접목한 글로 인기를 끄셨지요.
“우리 사회의 내로라하는 인사들치고 저랑 골프를 치지 않은 사람은 드물지요. 골프를 치면서 인생의 깊은 내공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것을 글로 써본 것이지요. 특히 김종필 전 총리랑 골프를 치면서 들은 인생 허업(虛業) 이야기가 제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정치는 허업이야. 잘났다고 하는 저 사람(정치인)들이 하는 일이 뭐가 있어? 온갖 폼은 다 잡지만 남는 게 뭐 있어? 정치는 자기들끼리 싸우다 다 잃는 거야. 제일 어리석은 직업이 정치야’라고 허무하게 말씀하신 게 기억에 남아요.”
인생의 산전수전을 다 겪은 분께 그런 이야기를 들었기에 허명(虛名), 허업(虛業)에 대한 내려놓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지나치게 욕심을 많이 부리면 반드시 터지거나 넘어지게 돼 있다. 윤 회장은 인생의 욕심을 풍선과 계단오르기에 비유해 설명한다.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면 문제가 없지만 한꺼번에 많이 오르려 하면 반드시 고꾸라지는 게 인생의 법칙이다. 풍선도 마찬가지다. 있는 힘껏 풍선을 끝까지 불 수는 있지만 그러다가 터질 수도 있다. 그래서 80~90% 정도만 불고 남겨둬야 한다. 너무 빵빵하게 불면 언제 터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힘을, 마음을 내려놓아야 하는 이유다.
탈속의 이야기만 했네요. 세상 이야기로 돌아와 볼까요. 정보화사회, 협업 등 늘 기업 경영의 화두를 먼저 설정, 새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또 시(時)테크, 골드칼라 등 시사용어를 선도해 유행시키셨는데요. 그 촉(觸)의 비결이 무엇인지요.
“지도자라는 것이 무슨 의미겠습니까. 선지자, 선견, 먼저 보는 사람 아니겠습니까. 지도자는 지도를 가진 사람입니다. 즉 방향성을 제시하는 게 중요합니다. 청년기에 군에서 훌륭한 리더를 만나 생각의 틀을 다진 게 제겐 큰 도움이 됐습니다. 청년 장교(중위) 때 투스타 김동호 장군의 부관을 하다 보니 엄청난 용량의 공부가 필요했습니다. 인생의 한창때 존경할 만한 롤모델을 만나는 것은 큰 운입니다. 책 100권, 아니 1000권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책 에서 귀인효과를 말씀하시는데요. 김동호 장군이 윤 회장님의 귀인이셨나보군요.
“맞습니다. 김 장군은 영어, 일어 등 외국어 실력도 뛰어나시고, 유도, 검도 유단자에다 특히 인품이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한마디로 지덕체, 문무를 겸비하신 분이었습니다. 김 장군이 면접하는 모습을 보고 단번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제 실력을 묻는 게 아니라 자신의 이력, 종교, 꿈을 들려주시며 리더로서 이렇게 노력하겠다고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겁니다. 당시 제 주변 동료 장교들은 퇴근 후 취직 공부를 해야 한다며 24시간 근무해야 하는 부관을 기피했어요. 저는 퇴근 후 두 시간 공부보다 이분을 모시는 게 훨씬 큰 공부가 되겠다는 느낌이 한 번에 오더군요. 존경받는 것도 기쁘지만, 존경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는 것이 더 기쁜 일입니다.”
윤 회장은 그 후 4년간을 한결같이 김 장군을 곁에서 ‘모셨다’. 제대하는 토요일, 오후 3시까지 초과 근무를 자청한 것은 초급 장교 중 전무후무해 공군 본부에서 화제가 될 정도였다. 윤 회장은 김 장군과의 인연을 40년째 이어오고 있다. 지금도 1년에 두세 차례씩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고 예전 어록과 교훈을 같이 추억하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한다.
김 장군도 훌륭하시지만 그분을 한눈에 알아본 윤 회장님도 대단합니다. 더구나 20대 중반의 청년 장교 때요.
“그런가요.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알아보는 용인술도 중요하지만,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알아보는 ‘역용인술’도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롤모델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스스로 찾아보려고 노력하진 않거든요.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반쪽 인생이에요. 한 번도 사랑해보지 못하고 죽는 것보다 더 불행하고 불쌍한 삶이지요. 어려운 의사결정을 할 때 ‘김 장군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자기객관화가 되면서 답이 보여요. 존경할 대상이 생기면 상대의 장점 DNA가 보이고 배워야 할 사항이 쏙쏙 들어와요. 존경하는 사람을 가지면 인생이 달라집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지요.
“앞으로 10년 정도는 우리나라 모든 영역, 모든 분야에 협업문화를 확산시키는 일에 매진할 계획입니다. 그 후에는 청소년 시절부터 꿈이었던 소설가로 데뷔하고 싶습니다. 소설은 현실에서는 추진할 수 없는 이상향을 마음껏 그릴 수 있으니까요. 제가 존경하는 소설가 김주영 선생님도 수시로 만나고 있고 최근에는 김홍신 선생님도 몇 번 만났습니다. 평생 동안 경험한 일들과 상상했던 일들을 융합시켜 멋진 소설을 쓰는 게 내 인생의 마지막 직업이 될 겁니다.”
김성회 CEO리더십연구소 소장>>
연세대학교 졸업. 경영학 박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겸임교수. 리더십 스토리텔러. 세계일보에서 CEO 인터뷰 전문기자로 활약했다. 세계경영연구원(IGM)과 삼성경제연구소 등에서 강의했다. 저서로는 , , 등이 있다.
한참 지난 오래된 잡지를 정리하는 중이었다.
언젠가 사회연대은행 두드림 기자활동을 할 때 만나서 인터뷰했던 대표님의 ‘아름다운 유산’에 관한 기사가 실린 책을 펼치게 되었다.
‘아름다운 유산’은 파키스탄이나 중앙아시아 오지의 소외된 아동을 후원하는 모임이다.
‘아름다운 유산’ 대표는 원래 히말라야 정상정복을 꿈꾸던 산악인인데 다니다 보니 너무나 열악한 환경의 아이들이 많아 이들을 돕기로 했다고 하는데 돕는 방법이 독특했다.
아주 힘든 사막 마라톤이 있다. 사막 마라톤을 하면서 1km 걸을 때마다 일정액을 지인들로부터 성금으로 받아 기금을 마련해서 파키스탄의 어려운 고아에게 고아원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사하라 사막과 애리조나 사막 나미비아사막 마라톤을 완주하고 기금을 모았다고 한다.
인류애, 행복,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소중한 가치로 생각하며 활동영역을 중앙아시아로 확장하고 글로벌 자선단체를 지향하며 UN에 등록하는 것을 꿈꾸고 있다는 ‘아름다운 유산’ 대표님의 모습은 참으로 천진난만하고 소년 같은 순박함과 인자함이 느껴졌다.
좋은 일을 하면 다들 저렇게 해맑고 빛나는 모습을 갖게 되는 걸까?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당시 인터뷰에서 꿈이라고 하셨으니 지금은 당당히 UN에 등록되었는지 궁금하다.
설립취지문에서 ‘빨리 가고 싶으면 혼자 가고, 멀리 가고 싶으면 함께 가라, 그러나 빨리 가고 멀리 가려면 누군가와 함께여야 한다’ 는 말씀이 마음에 와 닿았다.
좋은 일에 누군가와 함께한다는 건 그만큼 든든하고 용기를 얻는 일일 것이다.
‘아름다운 유산’ 창립총회에 모이신 분들 모두 아름다운 마음을 가지셨을 거라는 생각에 다들 훌륭해 보였다.
그동안은 지인의 도움으로 기부금을 받았지만 이제 사단법인으로 태어났으니 더 많은 아름다운 사람들의 도움으로 좋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기부가 그리 어려운 건 아니다. 큰 부자나 기업에서 많은 액수를 내놓기도 하지만 필자처럼 평범한 사람은 작은 마음을 보탤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실은 필자도 그렇게 기부를 많이 하지는 못했다. 사는데 바빠서 남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는 변명을 마음에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그저 매스컴을 통해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어린이나 난민촌의 아이들 소식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전화 버튼을 누르는 정도였다.
예전에 우리 엄마는 적은 돈이지만 기부를 많이 하셨다. 돈암동 아리랑 고개 가는 길에 외방 선교회가 있었다.
외방 선교회는 다른 나라에 파견되어 나가서 선교활동을 하는 신부님을 후원하는 곳이다.
성당에 열심인 엄마가 후원금을 냈는데 그땐 직접 찾아갔다. 엄마의 심부름으로 대신 전달하러 몇 번 갔던 외방 선교회가 겉으로 볼 때엔 평범한 건물이지만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느껴지던 엄숙함과 경건함이 잊히지 않는다.
세계 오지의 어려운 여건에서 선교하시는 신부님들에게 아주 작은 보탬이 된다는 것에 엄마는 마음 뿌듯해 하셨다.
몇십 년 전 뉴스에서 서울대에 합격했는데 등록금이 없다는 학생의 기사를 보고 엄마의 심부름을 하기도 했다. 똑똑한 젊은이가 너무나 안타깝다며 성금을 내고 오라고 하셔서 광화문의 조선일보사에 찾아가 엄마의 이름으로 성금을 맡겼었다.
필자보다 마음이 따뜻한 엄마의 심부름을 하면서 따라가지 못하는 필자 자신이 미안하고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었다.
기부는 쓰고 남아서 하는 게 아니라 어려운 중에도 작은 마음을 나누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아직 실천을 못 하고 있다.
‘아름다운 유산’이나 ‘바라봄 사진관’ 같은 좋은 일을 하는 단체가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가 더욱 따듯해질 것이다.
자신에 맞게 이웃을 돌아보는 작은 마음들이 불꽃처럼 일어나서, 기부문화란 작아도 괜찮고 어렵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라는 관념이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식인의 멘토로 불렸던 노부부가 있었다. 정신과 전문의로 UC데이비스 의과대학에서 35년간 교수로 근무했던 故 김익창 박사와,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25년간 교사로 일했던 그레이스 김(한국명 전경자·86)씨다.
부부는 평생 소외받는 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데 힘썼고 그들의 권익을 위해 싸웠다. 53년을 함께하는 동안 그들은 최고의 동지이자 친구였으며 연인이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지 2년. 아내는 여전히 열심히, 행복하게 살고 있다. “You should keep going.” 당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 달라는 것이 남편의 바람이었다.
사랑스러운 사회운동가
“동호회에서 주최하는 클래식 음악회 준비로 정신이 없어요. 오후에는 신문사에 음악회 기사를 전달하러 가야 해요. 오늘도 너무 바쁘네요!”
그녀는 여전히 에너지가 넘친다.
3년 전, 애너하임의 한 노인병원에서 김익창 박사와 그레이스 김씨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때 김익창 박사는 파킨슨병으로 상당히 힘들어하면서도 아내와의 인터뷰를 무척이나 즐거워했다. 당시 인터뷰 주제는 ‘부부’였는데 김 박사는 “부부란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노를 젓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남편은 나를 커뮤니티 액티비스트(사회운동가)라고 별명처럼 불렀어요. 조용하고 신중했던 그와 달리 나는 말도 많았고 생각하면 바로 행동으로 옮기곤 했는데 남편은 그런 내 모습을 사랑해줬지요. 우리는 6·25전쟁을 눈앞에서 겪은 세대입니다. 모두가 못 배우고 가난한 시절에 그래도 배울 수 있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우리는 그것을 갚아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소외받는 곳,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늘 관심을 두게 되었어요.”
1931년 중국 상해에서 나고 자란 김씨는 해방이 되던 해 부친의 고향이었던 평안북도로 돌아왔고, 남북으로 갈리게 되자 다시 38선을 넘어 왔다. 이 과정에서 막내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을 때 거침없이 행동하는 것은 그의 부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상해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은 임시정부에 돈을 보내며 독립운동을 도왔고, 주위에 고학을 하는 한국 유학생이 있으면 장학금을 내놓기도 했다. 어머니 역시 그 시대에 평양신학교를 나온 신여성으로서 이웃과 나누는 것을 평생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었다고.
“여고 시절 내 꿈은 의사가 되어 아프리카로 가서 슈바이처 박사와 함께 일하는 것이었어요. 그래서 이화여대 의대로 진학했지요. 그런데 입학한 그해 6·25전쟁이 터졌어요. 산속으로 피난을 갔다가 와 보니 집이며 모든 것이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더라고요. 너무 화가 나서 당장 군에 입대해 총 들고 싸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어린 아가씨가 얼마나 맹랑했겠어요. 그때 영락교회를 다녔는데 목사님이 하루는 보여줄 곳이 있다면서 저를 데리고 가신 곳이 있어요. 바로 고아원이었죠.”
폭격을 맞고 부서진 학교 건물에 임시로 마련된 고아원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부모를 잃은 아이들은 밤낮으로 울부짖었고 아프고 굶주린 아이들을 돌봐줄 손길은 없었다. 그렇게 김씨는 여군 대신 고아원 선생님이 되었다. 전쟁이 끝나고, 김씨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에 재입학한다.
“등록금을 댈 형편이 아니었어요. 서울대 사범대가 등록금도 싸기도 하고 모자라는 교사를 길러내기 위해 장학금도 많이 준다고 하니 좋았지요. 또 고아원 선생을 하면서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도 알게 되었고요. 무엇보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으니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요?”
서울대학교 캠퍼스에서 그녀는 남학생들이 데이트 신청이 쇄도할 만큼 인기가 있었지만 모두 퇴짜를 놓아 별명이 ‘NO’였을 정도로 콧대가 높았다고 한다. 그중 유일하게 ‘YES’를 한 것이 남편 김익창 박사의 오페라 데이트 신청이었다고. 생전 김익창 박사는 인터뷰 때마다 첫눈에 반할 정도로 ‘탁월한 미모의 소유자’였다고 아내를 향한 무한 애정을 드러내곤 했다.
1956년, 김익창 박사가 미국 유학을 떠난 이후 6년 동안, 두 사람은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다. 그 사이 김씨는 숭의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거리를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위해 용산직업학교를 세워 불우한 형편의 아이들을 지도했다.
“6년 동안 우리는 떨어져 있으면서 각자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어요. 그때 얼마나 많은 이야기를 편지로 주고받았는지 몰라요. 삶에 대한 가치관, 철학, 문학, 음악, 예술, 종교에 대한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닮아 있는지 알게 되었죠. 그 시간 동안 다져진 신뢰는 남녀의 사랑 그 이상이었어요.”
‘Dear, Grace’
1962년, 마침내 두 사람은 미국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김익창 박사가 샌프란시스코 마운트 자이언(Mt. Zion) 병원에서 인턴십을 하는 동안 두 아들 데이비드와 다니엘이 태어났고, 남편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병원 응급실에서 일해야 했다. 잠을 잊고 살아야 했던 고된 시절이었다.
“대단한 정신력이 아니면 견딜 수 없는 일이었어요. 그렇게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면서도 3년 만에 박사과정을 끝내더라고요. 레지던트를 마칠 무렵 남편이 내게 공부를 해보라고 제안했어요. 너무 기뻤죠. 내가 너무나 원하던 거였으니까요.” 김씨는 그 길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원에 진학, 1969년 상담학과 아동발달학으로 교육 석사학위를 받는다.
캘리포니아의 진취적인 교육 도시 데이비스에 정착하면서 부부는 본격적으로 소수민족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치게 된다. 김익창 박사는 임상정신과 의사로서 평생 소수민족의 정신의학에 관심을 두었다. UC데이비스 의과대학 정신과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문화가 다른 환자들에 대한 의료진들의 이해’를 강조하며 대학에 강좌를 만들고 끊임없이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다문화 정신의학 분야의 권위자로 자리 잡았고 그의 노력으로 현재 미국 정신의학협회에는 ‘화병’이 정식 병명으로 등록되어 있다.
김씨는 데이비스 고등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면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소수인종 학부모들과 학교를 잇는 가교 역할을 자청했다. 특히 인종차별 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어떤 차별도 받지 않도록 앞장섰다.
특히 1980년부터 시작했던 미주 한국일보의 질문과 응답 형식의 칼럼 ‘Dear, Grace (그레이스에게)’는 폭발적인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어느 날 신문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부모들이 미국에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려움이 많다고요. 흔쾌히 하겠다고 했죠. 궁금한 것을 편지로 보내면 답을 주겠다고 했는데… 세상에, 편지가 어마어마하게 와서 너무 놀랐어요. 궁금한 것은 많은데 어디에 물을 곳이 없었던 거예요. 한국말을 하는 선생님이 없었던 시절이었으니까.”
부모와 자녀 간의 갈등, 학교와의 마찰, 인종문제를 비롯해 마약, 섹스, 가출 문제까지. 그레이스 김은 한인 학부모와 청소년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었고 칼럼은 1990년까지 계속됐다.
나눔, 그 위대한 유산
이들 부부에 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기부’에 대한 것이다. 젊은 시절부터 입양아 단체, 아시안 청소년 장학재단 등에 적지 않은 기부를 하고, 무료 진료와 상담 등의 봉사활동을 해왔던 부부가 은퇴하면서 제대로 일을 치른 것이다.
2006년 김익창 박사가 35년간 몸담았던 UC데이비스 대학에서 나왔을 때, 이들은 캘리포니아 실비치의 한 은퇴촌에 작은 집을 마련한 뒤 나머지 재산은 모두 사회에 환원했다. 20여 개 단체에 전달한 기부금은 적게는 5만 달러, 많게는 25만 달러에 이르렀다. 모두 익명으로 한 기부였다. 이 놀라운 기부는 당시 UC데이비스대학에서 이들이 내놓은 기부금 25만 달러로 ‘다문화정신의학센터’를 만들면서 세간에 알려졌다.
“사실 그만한 목돈이 생긴 데는 숨은 사연이 있어요(웃음). 젊은 시절 내가 하도 많이 기부를 하고 다니니까 남편이 매달 월급의 반만 받고 나머지는 은퇴연금으로 저축을 하자고 한 거예요. 은퇴할 때 그렇게 돈이 쌓인 줄 몰랐어요. 평소 돕고 싶었던 단체 리스트를 적어 내려가는데 얼마나 신이 나던지. 남편과 아주 펑펑 잘 썼어요!”
고마운 것은 부모의 결정을 기쁘게 받아들여준 두 아들이었다.
“그때 아이들이 한 말이 잊히지 않아요. 돈이 필요하면 지금 이야기하라고 했죠. 두 아이 모두 자신들을 키워준 것만으로 충분히 감사하다며 원하는 곳에 다 쓰라고 하더라고요. 아,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웠구나. 갑절로 행복해지더라고요. 두 아들 내외 역시 어려운 곳에 관심을 가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아요. 기쁘고 자랑스럽습니다.”
2009년 데이비드 김씨가 지난 오바마 정부의 교통부 차관보에 임명됐을 때, 그가 남긴 말이 있다.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마음만 있다면 언제나 남을 도울 힘이 있다고요.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또 다른 방식으로 도울 수 있다는 거죠. 바로 그 나눔의 정신이 우리 가족을 이 사회에서 당당하게 고개 들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아시아인은 돈을 많이 벌어도 미국 주류 사회에 들어가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부모님의 삶은 제 미래를 위한 최고의 투자였습니다. 부모님의 기부가 저를 성공적으로 키운 셈입니다.
상해에서 독립운동가와 유학생을 돕던 부모에게서 김씨에게로, 이것이 다시 김씨의 아들들에게로 이어진, 참으로 위대한 유산이다.
To my forever love…
‘김 여사의 해피 에너지’는 은퇴촌에서도 빛을 발했다. 김씨는 입주한 은퇴촌 실비치 레저월드의 한인회 회장이 되어 커뮤니티 간 화합에 앞장섰다. 한인 노인들을 위해 각종 세미나와 교양 프로그램을 속속 만들어내는가 하면 지역구 선거에 한인 후보자가 나오면 발벗고 나서서 선거운동을 도왔다. 물론 그 뒤에서 묵묵히 김씨를 돕는 사람은 남편 김익창 박사였다.
이 무렵 김익창 박사가 파킨슨병 진단을 받으면서 부부에게는 예상치 못한 슬픔이 찾아왔지만 이 또한 차분히 받아들였다.
“한동안 멍했지요. 왜 이런 병에 걸리게 됐을까. 젊었을 때 잠을 너무 못 자고 힘들어서였을까…. 하지만 남편은 곧 받아들이고 오히려 나를 안심시켰어요. 파킨슨병은 관리만 잘하면 당장 어떻게 되는 병이 아니라면서요. 그렇게 8년을 투병했지요. 그 사이 자신의 인생을 덤덤히 돌아보며 두 권의 자서전도 집필했고요.”
병세가 악화되어 노인병원에 입원하고 2년 동안, 부부는 다시 연애를 시작하는 기분이었다고. 아내는 매일 아침 예쁘게 화장을 하고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남편을 만나러 갔고, 남편도 눈을 뜨면 아내를 기다렸다. 전립선암이 발병했을 때는 상당히 고통스러웠을 텐데도 김 박사는 항상 웃는 얼굴로 아내를 맞아주었다. 병원 스태프에게 ‘She is my forever love’라고 소개해 사람들을 웃게 만들기도 했다.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 편지 한 장을 건네더라고요. ‘결혼해줘서 고맙고 행복했다. 아파서 미안했고 먼저 가서 또 미안하다. 하지만 당신은 지금까지처럼 계속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내가 남편의 죽음으로 인해 슬픈 삶을 살까봐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어요. 끝에는 늘 하던 말, ‘my forever love’라고 적어놓았더군요. 마지막 러브레터였어요(웃음).”
김익창 박사가 떠난 후, 그녀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 며칠을 먹지도 못하고 울기만 했다. 문득 자신이 이렇게 될까봐 걱정하며 병실에서 간신히 손을 움직여 편지를 썼을 남편이 떠올랐다.
“아니다. 남편이 가장 좋아했던 내 모습으로 끝까지 열심히, 즐겁게 살자. 그렇게 결심했어요. 나는 지금 아주 건강하고 행복합니다. 은퇴촌에서 음악회도 열고 노래도 부르고 세미나도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요. 그러다 남편이 너무 그리울 때는 조용히 말합니다. ‘하나님 나는 준비되었으니 이제 데려가셔도 됩니다. 루크를 만나게 해주세요…’ 라고요(웃음).”
오랜 대화에도 피곤한 기색 없이 열심히 포즈를 취해주는 그녀의 미소가 캘리포니아 햇살만큼이나 화사하다. 누구에게나 무엇을 하든, 최선을 다하는 이런 모습을 남편은 사랑했으리라.
“Good to see you!”
쿨하게 인사를 남기며 보무당당히 사라지는 ‘유쾌한 그레이스씨’. 그녀와의 다음 만남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