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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도 크고 통은 더 큰 사람 백범, 그가 머문 숲
- 걷기 쉬운 둘레길이다. 산이 높지 않고 구간 거리도 짧은 편이니까. ‘백범 명상길’ 2코스(3km)를 걸을 경우 한 시간 반이 소요된다. 볼 것 많은 거찰, 마곡사 답사도 즐겁다. ‘정감록’은 마곡사 일대를 난리를 피할 수 있는 십승지의 하나로 꼽았다. 마곡사(麻谷寺) 들머리. 노보살의 허리가 기역자(子)로 휘었다. 향초가 들었을까? 야윈 등허리에서 작은 배낭이 대롱거린다. 그마저 무거워서겠지. 발걸음은 추를 매단 듯 더디다. 하지만 아랑곳없다. 안간힘을 다해 오르고 또 오른다. 노인은 오늘 불단 앞에 엎드려 알량한 아들놈의 복덕을 빌려나? 까마득한 고대에도 우리네 어머니들은 저렇게 절을 찾았을 게다. 부처 아니고선 기댈 언덕이 없어, 삶의 절박한 굽이를 만날 때마다 산을 올랐을 게다. 모든 어머니의 모든 기도는 시공을 초월해 애절하다. 불자들만 절을 찾는 건 아니다. 세상 쓴맛을 본 사람들도 곧잘 절집을 찾아든다. 백범 김구. 그도 마곡사에서 짧은 한때를 보냈다. 보리심(菩提心)에 이끌린 출가가 아니었다. 몸을 숨기려는 입산이었으니까. 간도 크고 통은 더 컸던 사람. 그의 행보엔 거침이 없어 파란도 많았다. 1896년, 백범 나이 스물하나 때엔 이른바 ‘치안포 사건’을 야기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일본에 대한 분노가 들끓던 때였다. 혈기 방장했던 청년 백범은 일본군 특무장교 하나를 척살했다. 이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집행일 직전, 탈옥(고종의 형집행정지 명령으로 가출옥했다는 설도 있다)에 성공했다. 그 뒤 마곡사에 은신했던 거다. 마곡사는 태화산 품에 안긴 절이다. 마곡사로부터 산 곳곳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엔 ‘백범 명상길’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백범이 명상했던 길이란다. 세상의 명명(命名)들은 왜 이렇게 화려할까? 도망자 신세가 된 백범의 뒤엉킨 젊은 가슴에 명상이 고일 자리가 있기나 했을까. 억울하고 서러워 갈피없이 흔들리지 않았을까. 그저 백범을 명상하는 길이라 읽자. 백범의 굳센 기개를, 은신의 고독을, 시대에의 울분을 헤아리며 천천히 걷기에 좋은 둘레길. 산이 있으니 물이 흐르고, 절이 있으니 향내가 번진다. 마곡사 경내엔 진초록을 뿜는 향나무 한 그루가 있다. ‘백범 향나무’다. 광복 직후인 1946년, 어느덧 노경에 접어든 백범이 마곡사를 다시 찾아 심은 나무라지. 옹골차게도 자랐다. 거목은 아니지만 거목이다. 백범이라는 거인의 아우라 아롱져서. 그렇다면 저 고결한 향나무, 백범이 후세에 건넨 숭고한 봉헌이라 해두자. 변하지 않는 세상의 실없음과 누추함을 질책하는, 신랄한 역설의 봉헌. 산길을 오른다. 도회의 익숙한 길에서 빠져나온, 이 들썩이는 기분은 해방감? 상가와 차량으로 너절한 도시에서와 달리, 숲에서 둘러보면 모든 게 순도를 머금고 다가온다. 풀들은 낮은 바닥에서도 얼마나 태연한가. 나뭇가지를 툭 치며 세차게 날아오르는, 저 조막만 한 새의 생존은 얼마나 자립적인가. 어쩌면 산에 사는 것들이야말로 진실을 구현한 존재다. 사람만 부질없다. 진실을 캔다 하고서 제 무덤을 판다. 그게 사람만의 일도 아니지. 역사도 시대정신도 대개 진실과 거리가 멀다. 암살로 생을 마친 백범의 불행이라니. 어처구니없음이라니. 궁색한 잡념을 굴리다 백련암에 들어선다. 백범이 은거해 도를 닦았다는 암자다. 산중턱 작은 암자라 별안간 앞이 탁 트인다. 모든 별안간 탁 트이는 순간들은 희열을 가져다준다. 그마저도 말 그대로의 순간일 뿐이고, 이내 기갈(飢渴)이 몰려든다. 백범은 작은 암자에서 어떻게 견뎠을까. ‘백범일지’를 보면, 그는 ‘굴갓 쓰고 염주 걸고 바랑 지고’ 한동안 중 생활을 했다. 개울가에서 삭발례를 하고, 원종(圓宗)이라는 법명까지 얻었으니, 위장 은신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는 아무나 닦는 게 아니다. 절구통처럼 진득이 눌러앉는 취미가 있는 자여야 수행에 목을 걸 수 있다. 백범은 그런 개성이 아니다. 그가 한 마리 잉어라면, 자기 배만 채우고 마는 게 아니라, 강물을 통째 퍼다 모든 배들을 채워줘야 직성이 풀리는 잉어가 아니었을까. ‘백범일지’를 또 보면, 그는 ‘중놈’이 된 것을 ‘자소자탄’하며 마곡사의 날들을 견디었다. 한마디로 고(苦)라! 진통제를 삼키고 돌아가는 세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었으니. 승냥이 우는 산방에 홀로 머물며 소나기처럼 울고 난 뒤였을까? 백범은 어느 날 홀연히 절을 떠났다. 은사에겐 금강산에 공부하러 간다 했다. 그러곤 광복운동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숲길 군데군데, ‘백범 명상길’ 팻말이 걸려 있다. 명상은 오간 데 없으나, 마음엔 샘물이 고인다. 백범의 행장 한 자락 훔쳐보자니.
- 2019-10-02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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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윷판에 두 번째 인생을 던졌습니다”
- 평범한 세일즈맨의 일생이었다. 그저 그 누구보다 안정적이고 무난한 삶을 원하는 이 시대의 가장. 똑같이 반복되는 하루 또 하루를 지내다 보니 어느덧 베이비붐 세대라는 꼬리표와 함께 인생 후반전에 대한 적잖은 고민을 시작해야 했다. 지금까지 숨죽이고 조용히 살았으면 됐다 싶어 너른 멍석 위에 윷가락 시원하게 던지듯 직장 밖으로, 세상 밖으로 나와버렸다. 전반전 인생이 무채색이었다면 후반전은 돌고 도는 윷판 속에 수만 가지 이야기를 담아내고 싶다는 윷놀이연구소의 조광휘(趙光彙·56) 소장을 만났다. 용산구 효창원로 백범김구기념관에서 멀지 않은 오래된 주택가 한 모퉁이에 윷놀이 연구소가 지난 5월 문을 열었다. 벽에는 다양한 의미가 담긴 윷판이 부착돼 있고 박스와 작은 선반마다 윷놀이 세트가 눈에 들어왔다. “집이랑 가까워서 이곳에 연구소를 차렸습니다. 월세도 싸고요.” 한복을 입고 반갑게 많이 하는 조광휘 소장은 찾느라 고생이 많았다며 시원한 물과 커피를 내놓았다. 그저 명절이 되면 누군가 어디선가 꺼내 달력 뒤를 펴서 도, 개, 걸, 윷, 모 윷판을 매직펜으로 그려놓고는 동전 혹은 바둑알 색으로 편을 나누어 윳놀이를 한다. 언제부터 윷판 그리는 것을 기억해놓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다들 잘도 그린다. 윷판 위에 말을 올리고 놓는 것도 수준급. 다들 알고 있는 이 윷놀이에 무슨 매력이 어떤 새로운 점이 있어 윷놀이 연구소까지 열었는지 궁금했다. “저는 베이비붐 세대의 끝자락인 1963년생입니다. 부산 출신으로 KB국민은행에서 27년 6개월 동안 일하다가 2017년 희망퇴직했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윷과 함께 맞이했습니다.” 그가 회자될 때 불리는 직함은 바로 우리나라 1호 윷놀이전문강사(노사발전재단 금융센터 전문강사 양성과정 인증). 30년 가까이 고객 응대하던 친절한 행원이 한판 흥겨운 윷놀이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고 알리는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뭘 좀 준비하고 회사 밖을 나왔어야 하는데 사실 그러지는 못했습니다. 제가 입행할 때 130명이 들어갔는데 현재 29명이 남아 일하고 있습니다. 나이가 좀 많으면 빨리 퇴직하더군요. 그리고 지점장까지 오른 사람들도 회사생활을 마감하고요. 지점장이 안 된 사람들은 오래 근무를 하더라고요. 지금까지 받아오던 임금의 반을 받으며 정년까지 일하는 임금피크제를 선택하든가 아니면 퇴직을 하는 거죠. 팀원 내에 계속 남아 있는 동기들은 여러 가지 사연 때문에 근무를 선택한 거죠. 저는 지점장은 아니고 팀원으로 퇴직했습니다. 굳이 진급 못한 이유를 굳이 따지자면 상급자에게 잘하는 방법을 잘 몰랐습니다.(웃음)” 은행의 지점에서 일한다는 것은 영업과 직접적인 연관관계가 있다. 만만치 않은 스트레스가 있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정년까지 근무하는 선배들의 뒷모습은 아련하기만 했다. 어제까지 선배 대우 잘해주던 후배도 임금피크제로 보직이 변경된 선배에게 색안경 끼고 행동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저렇게까지 이곳에서 일해야 할까?’ 하는 의문과 회의감마저 들었습니다. 희망퇴직도 기간에 대한 보상이 있거든요. 특별 퇴직금이 있었어요. 제 인생을 생각해보니까 60세에 은퇴하면 할 수 있는 것도 못할 거 같았어요. 내가 좋아하고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보자 하고 은행을 나왔습니다. 인생 후반전을 설계할 수 있는 기회비용을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사실 별생각 없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한 우물과도 같은 직장을 박차고 나왔으니 솔직한 마음으로 앞이 캄캄했다. 은행에 다니면서 땄던 자격증은 금융기관이 아니면 써먹을 곳이 없었다. 새 삶을 살려면 옛것을 버려야 했다. 지금까지 했던 것 말고 무엇을 하고 싶었고 어떤 것을 추구했는지 체크해볼 필요가 있었다. “구직활동을 해야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잖아요. 이력서도 내고 면접도 보고 시험도 보러 다녔습니다. 백세시대이다 보니 제가 노노(老老)케어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쪽 일을 하려면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필요하더라고요. 자격증의 필요함을 느꼈다면 현직에 있을 때 땄겠지만 그때는 조직에 충성하기도 바빴습니다. 주5일 근무제가 되어 시간이 많아졌다지만 자기계발하는 친구가 주변에 없었습니다. 생각보다 스트레스 많은 직종이기도 하죠. 돈을 다루고 고객을 대하는 일이요. 지금은 비대면이 많지만 저는 온전하게 대면하는 은행원의 삶이었죠. 아무 대책 없이 인생 2막을 생각한 것이 후회스럽긴 합니다.” 은행 생활에서 윷놀이를 발견하다 윷놀이에 대한 관심은 은행원 시절부터 있었다고 했다. 조직에 있을 때 서무파트 담당을 많이 하다 보니 야유회나 체육 행사 계획을 도맡게 됐다. “1박 2일 혹은 당일 코스로 계획을 짤 때마다 윷놀이를 포함했습니다. 소통 놀이로요. 은행에 팀이 4개였는데 토너먼트로 윷놀이를 하면 분위기가 너무 좋았습니다. 그때마다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놓았는데 사람들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퇴직 후 보통 실업급여를 받기 위해 하는 활동 중 하나는 실질적인 구직활동이고 다른 하나는 노동부에서 인가한 단체에서 교육을 받는 것이다. “공덕동에 있는 노사발전재단에 좋은 프로그램이 많았어요. 그중 하나가 금융전문강사 양성과정이 있었어요. 처음 1주 과정을 마치고 나니 저더러 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더군요. 다른 사람들은 스피치를 준비할 때 재무관리, 은퇴설계, 노후관리 등을 대부분 고르더라고요. 저는 금융강사가 되어보겠다는 절박함이 없었고 실업 급여를 받으려고 간 거였어요. 그래서 그냥 자유롭게 윷놀이로 주제를 정했습니다.” 은행에 다닐 때 사람들 앞에 나서서 마이크 잡고 말해본 적이 없었다. 50세 넘어 도전 과제가 생겼다. 남들 앞에서 뭔가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바로 프레젠테이션이었다. “금융전문강사 강습을 받고 스피치를 준비하면서 지금까지 신경써보지 않았던 것을 배웠어요. 윷놀이로 5분 스피치를 했더니 잘했대요. 그래서 그런가보다 했습니다. 그 뒤 심화과정 있다고 해서 들었는데 이번에는 15분 스피치를 준비하라고 했습니다.” 그때도 윷놀이가 주제였다. 반응이 또 좋았다. “15분 스피치 마치고 나서 며칠 후에 노사발전재단 강원센터에서 2시간 강의를 해보라는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2017년 1월에 퇴직했는데 그해 8월 윷놀이로 첫 강의를 했습니다. 정말 짧은 기간에 강사로 서게 됐습니다. 어느 누구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삶을 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는데 제가 강사로 사람들 앞에 섰습니다.” 윷판에 우리 역사와 삶을 담다 처음에는 어떻게 두 시간 동안 강의할까 걱정했는데 나중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말을 놓는 윷판에는 29개의 밭이 있습니다. 꺾어지는 곳은 모퉁이 밭이라고 해요. 윷판은 하늘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북두칠성이기도 하고, 땅위의 밭이기도 합니다. 윷판을 골똘히 보면서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울릉도와 독도를 인터넷 검색으로 동서남북을 잡아 배치해서 윷판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근대사와도 접목했는데 그게 백범 김구 선생과 안중근 의사였어요. 그분들 일대기의 키워드를 윷판에 담았어요.” 윷판은 세상의 이치와 역사, 지도, 절기를 적절히 담아 설명할 수 있는 스토리보드였다. “첫 강의에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어 강의를 하니까 두 시간이 거짓말처럼 지나갔습니다. 스토리를 담은 윷판을 제작해 윷놀이 세트로 17개나 출시했죠. 인터넷 쇼핑몰에서 판매하는데 교육기관에서 관심을 가지고 구매하시더라고요. 오늘도 주문받아서 납품해야 해요. 기자님 가시면요.(웃음)” 윷놀이연구소의 든든한 조력자는 바로 노사발전재단에서 함께 금융전문강사 과정을 들었던 동기들이라고 했다. 과정을 모두 이수한 13명 중 10명이 윷놀이연구소 연구원으로 들어와 같이 의견을 나눈다고 했다. “노인대학처럼 인원이 많은 곳에 가면 200에서 300명 정도 되니까 혼자 가서는 감당을 못해요. 연구원 분들이 같이 가서 윷놀이 심판도 하고, 진행도 하십니다.” 물론 강사비가 발생하면 함께 나눈다. 앞으로 윷놀이 관련 강사 자격증도 만들 생각이다. “SNS에 윷놀이 전문 강사라고 띄워놓았는데 딴지거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 보니 제가 1호가 맞나봐요.(웃음) 인터넷을 쭉 훑어봤는데 예전에도 윷놀이가 너무 좋은 전통놀이니까 판을 키우려고 노력했던 분이 좀 있었나봐요. 수요가 따라주지 않으니 중도에 그만두셨더라고요.” 윷놀이판을 벌여놓았으니 할 일이 많기도 많다. 우리 전통놀이라고는 하지만 윷놀이에 관련한 제대로 된 자료가 없다. “구한말이던 1895년 미국 민속학자 스튜어트 컬린 교수가 한국, 중국, 일본의 놀이를 정리해서 쓴 ‘한국의 놀이(Korean Game)’에 보면 ‘한국의 윷놀이는 전 세계에 걸쳐 존재하는 수많은 놀이의 원형으로 볼 수 있다’라는 기록이 있어요. 아직까지도 이를 반박하는 논문이 없더라고요. 그리고 윷놀이가 인도문화에도 영향을 미쳤어요. 인도에도 윷이라는 것이 있더라고요. 동물 뼈로도 많이 하고요. 윷놀이는 원래 조개로 했는데 고동으로도 할 수 있어요. 제대로만 정리하면 윷으로 대단한 발견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윷을 제대로 만나면서 시간가는 줄 모른다고 말하는 조광휘 소장. “몰라요. 윷에 미쳤습니다. 하루가 정말 즐겁게 갑니다. 일단 윷놀이는 없어지지 않을 겁니다. 옛날에도 우리와 함께했고 먼 미래에도 남아 있을 거예요. 친구들이 너무 부러워합니다. 며칠 전에 윷 문화와 관련한 자료를 찾아보려고 민속박물관에 갔다가 천문도에 대해 강연하는 80대 강사를 봤습니다. 솔직히 내용보다도 나이 들어서 강의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나도 저렇게 가야겠다. 그때 딱 영감을 받았습니다. 나는 이제 다른 것을 안 본다. 윷놀이만 보자. 은퇴하고 오십 훌쩍 넘어 발견한 제 인생 최고의 아이템이 바로 윷입니다.”
- 2019-09-06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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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千佛千塔 이야기① 공주 마곡사(麻谷寺)
- 지난 6월 30일(현지시각), 바레인 수도 마나마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WHC) 제42차 회의에서 한국의 산사(山寺) 7곳이 세계 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로써 한국은 열세 번째 유네스코 세계 유산을 갖게 되었으니 7곳 산사는 양산 통도사, 영주 부석사, 안동 봉정사, 보은 법주사, 공주 마곡사, 순천 선암사, 해남 대흥사다. 당초 통도사와 부석사, 법주사, 대흥사 등 4곳만 등재될 듯하였고, 봉정사, 마곡사, 선암사 등 3곳은 보류될 처지였으나 세계유산위원회의 21개 위원국이 만장일치로 한국이 신청한 7곳 모두를 받아들여 등재되었다. 문화강국 대한민국의 쾌거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등재된 7개 산사 외에도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대단한 절집들, 예컨대 송광사나 해인사, 화엄사, 직지사, 수덕사 등은 왜 누락되었는지 궁금해졌다. 그래서 그 과정을 살펴보았다. 세계유산 등재를 신청하기 위하여 전국의 절집들을 대상으로 전통사찰, 산지입지,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여부 등을 1차 선별기준으로 적용하여보니 전통사찰법에 의거 인정된 곳이 952곳이었으며, 이중 산지입지 조건을 충족시킨 곳이 785곳, 여기에 국가지정문화재 보유 기준을 대입하니 63곳이 일차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여기에 7~9세기 창건 여부와 창건 시기를 증빙할 자료를 확인해본 결과 다음 25곳으로 압축되었으니 관룡사, 귀신사, 금산사, 기림사, 내소사, 대흥사, 마곡사, 무량사, 무위사, 범어사, 법주사, 봉암사, 봉정사, 부석사, 불영사, 쌍계사, 선암사, 선운사, 수덕사, 용문사, 운문사, 장곡사, 전등사, 직지사, 통도사 등이었다. 마지막으로 선원(禪院)의 운영과 원래 지형을 유지하는지 여부 등을 확인하니 최종적으로 위 7곳이 선정되어 등재 신청되었다고 한다. 그러면 쟁쟁한 사찰들이 누락된 이유는 무엇인가.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인 송광사의 경우, 9세기 무렵 길상사라는 암자로 시작하였으나 지금의 대찰은 12세기 후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한 것이다. 7~9세기 창건에 한참 늦었으며 삼보사찰 중 팔만대장경을 보유한 법보사찰 해인사의 경우 9세기 창건의 기록은 확인되었으나 이후 고려시대의 상황을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팔만대장경은 조선시대에 해인사로 옮겨진 것이며 특히나 근래 사찰의 원형을 변형시킬 만큼 많은 공사가 있었음이 그 이유였다. 또한 화엄사의 경우 고려부터 조선 초기까지 사찰의 중수나 중창 자료가 불충분하며 직지사나 범어사, 선운사 등은 건물의 상당 부분이 변형되거나 원형 유지가 애매한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여기서 최근 유서 깊은 절집들의 무분별한 중창불사나 대규모 확장 건설공사가 역사성이나 문화적 가치에 반하는 일임이 드러났으니 경각심을 가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제 열세 번째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한국의 산사 7곳을 하나씩 답사해보기로 한다. 태화산(泰華山) 마곡사(麻谷寺) 충청남도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의 태화산 동쪽 산허리에 자리 잡은 마곡사는 대한불교 조계종의 제6교구 본사이다. 기록에 따르면 마곡사는 백제 무왕 41년(640)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며 고려 명종 때인 1172년 보조국사가 중수하고 범일대사가 재건하였다고 한다. 신라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삼밭의 삼대, 즉 마(麻)와 같다 해서 마곡사(麻谷寺)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도선국사가 다시 중수하고 각순대사가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조선 세조가 이 절에 들려 ‘만세에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忘之地)’이라 평가하고 영산전(靈山殿) 현판을 사액한 일도 있었다. 마곡사가 위치한 공주 유구 지역은 정감록 등 각종 비결서(秘訣書)에 전해오는 ‘십승지지(十勝之地)’에 해당되는 곳으로 그만큼 명당이라는 얘기이며, 춘마곡(春麻谷) 추갑사(秋甲寺)라고 하여 봄날 생기 움트는 나무와 봄꽃들이 아름다운 곳이라는 뜻이다. 마곡사에 아쉽게도 국보급 문화재는 없으나 5층 석탑(보물 제799호), 영산전(보물 제800호), 대웅보전(보물 제801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과 감지은니묘법연화경 제1권(보물 제269호)과 제6권(보물 제270호)이 있으며 범종과 청동향로 등 지방문화재와 세조가 타고 왔다가 두고 갔다는 연(輦)이 있어 오랜 전통과 유서 깊은 절임을 말해준다. 또한 마곡사는 김구 선생이 명성황후시해사건 때 일본군 장교를 살해 후 숨어들어 승려로 지내기도 했던 곳으로 해방 후 찾아와 심은 향나무가 지금도 자라고 있어 자주독립 정신의 표상이 되고 있는 곳이다. 불화(佛畵)를 그리는 화승(畵僧)들이 많이 활동하여 오늘날까지 화승들을 추모하는 다례제를 지내는 화소사찰(畵所寺刹)이다. 예전에 마곡사는 개울을 멀리 돌지 않고 허리를 뚝 잘라 옆구리로 진입하기도 하였으나 최근에는 진입로를 잘 정비하고 주차장을 갖추어 놓아 누구나 자연스럽게 입구로 들어와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다리를 건너 북원 마당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됐다. 진입로 중간에 있는 일주문은 세운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사실상 해탈문(충남문화재자료 제66호)이 마곡사의 첫 관문인 셈인데, 정면 3칸, 측면 2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정면 중앙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면서 양편에는 금강역사상(인왕상)과 문수 및 보현동자상을 봉헌하였다. 해탈문을 지나면 사천왕문(충남문화재자료 제62호)이 나오는데 사천왕은 고대 인도에서 숭상하던 신으로 불교에 귀의하여 부처님과 수미산을 지키는 수호신이 되었다. 마곡사 사천왕상은 조선 후기 소조불로 봉안되었으며 발밑에 악귀상이 다양하게 표현되어 눈길을 끈다. 이렇게 해탈문과 사천왕문을 지나 왼쪽의 영산전 영역은 나중에 보기로 하고 계류를 흐르는 다리를 건너니 마곡사의 중심영역인 오층석탑과 대광보전, 대웅보전이 나타난다. 오층석탑(보물 제799호) 꼭대기에는 보기 드물게 청동제 머리 장식을 얹었는데 고려 말 원나라의 영향을 많이 받아 그들의 라마탑을 본떠서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 1층 남쪽에는 자물쇠 모양을 새겼으며, 2층에는 사방에 불상을 새겼고 지붕돌 네 귀퉁이마다 풍경을 달았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5층 지붕돌에만 1개가 매달려 있다. 마곡사의 중심 법당인 대광보전(보물 제802호)은 진리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이 서쪽에서 동쪽을 바라보며 모셔져 있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의 아미타불과 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은 서방극락세계의 주인으로 서쪽에 앉아계신다지만 비로자나불을 왜 서쪽에 앉혔는지는 알 수 없어 궁금하다. 대광보전 뒤에 솟아오른 2층 지붕은 대웅보전(보물 제801호)인데 안에는 석가모니와 서쪽에 아미타, 동쪽에 약사여래를 모셨는데 약사여래불이 약합을 들지 않고 아미타여래와 같은 수인을 하고 있다. 마곡사의 중심 영역 서쪽에는 백범 김구 선생이 머물다 간 백범당(白凡堂)이 있으며 그 옆으로는 1946년 이곳을 다시 찾은 김구 선생이 심은 향나무가 잘 자라고 있다. 마곡사 개울가에는 김구 선생이 삭발했던 삭발 바위가 있어 또 다른 명소가 되었다. 이렇듯 마곡사 이곳저곳을 둘러본 후에 돌아 나오는 길에 해탈문과 사천왕문 옆 영산전을 찾아본다. 영산전(보물 제800호)은 이 절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며 세조가 김시습을 만나러 찾아왔다가 못 만나자 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마곡사. 승가 공동체의 생활과 전통양식을 잘 보전하여 ‘한국의 산사’ 7곳에 포함되었고 불화를 그리는 유명 화승(畵僧)들의 맥을 이어가는 절집이다.
- 2018-08-23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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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문화의 힘
- 우리나라는 사계절이 있어 경치와 물이 좋아 아름다운 금수강산이다. 이처럼 좋은 나라에 태어난 나는 문화인인가, 혹은 야만인인가? 지성과 교양이 있는 사람은 문화인(文化人)이고, 그 반대는 야만인이다. 또 문화에 관한 일에 종사하는 지식인들을 가리켜 문화인이라고도 말한다.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시키는 나라.’ 이는 김구 선생이 꿈꾸었던 우리나라를 일컫는다. 몇 년 전, 직장에서 퇴직하고, 향토문화해설사 교육을 받았다. 그때 국가지정문화재인 국보, 보물과 사적 등을 비롯해 서울시지정문화재에 관해 배웠고, 해설을 할 때 설명을 해 주며 자원봉사도 했다. 하루는 해설을 하러 서울 봉화산에 갔다. 1963년 서울시에 편입되어 1971년 봉화산 근린공원으로 문을 열었던 곳이다. 전에는 산책이나 등산 등 여가를 즐기러 다녔으나, 해설가로 임무가 주어졌을 때는 그곳에 있는 문화재들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했다. 친구들은 복잡하게 뭣 하러 그 일을 하느냐고 했지만, 공부를 할수록 그동안 몰랐던 것이 너무나 많았고, 유익한 것들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우재는 해발 160.1m로 문화재가 두 개 있어 서울특별시와 담당 문화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정상에 있는 아차산 봉수대지는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15호(1993)로 지정문화재로 복원했다. 조선시대 전국 5개 봉수로 함경도 경흥에서 시작해 강원도를 거쳐 남양주 한이산에서 올린 봉수를 받아, 남산(목멱산)으로 연결하는 제1봉수로의 마지막 봉수대가 있던 자리다. 주민들은 이 봉수대 부근에서 음력 3월 3일 삼짇날 무형문화재 제34호(2005)인 봉화산 도당제를 지낸다. 이때는 국내외의 관심 있는 이들이 모이는데, 친구들을 초청해 공연을 보여주고 맛있는 음식으로 잔칫상을 푸짐하게 대접한 일이 있다. 그때야 친구들은 부푼 배를 두드리며, 나처럼 해설가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한때는 골치 아프고 복잡한 일을 왜 하느냐고 핀잔했으나, 지금은 나를 자주 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당시 친구들에게 문화인이 되려면 지성과 교양을 쌓아야 하며, 야만적인 행동을 하면 안 된다고 역설했다. 나 역시 문화인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루아침에 바로 되는 것일까? 문화란 세상이 깨고 발달하여 문명이 개화되는 것이다. 즉 인간이 이상을 실현해 가는 과정을 말한다. 이제 우리는 문화의 발전과 향상을 지상목표로 삼는 나라인 문화국가(文化國家:cultured nation)에서 문화인다운 삶을 지향하며 살아갔으면 좋겠다. 김구 선생은 가장 부강한 나라가 아니라 가장 아름다운 나라를 꿈꾸었을 것이다. 우리가 주연배우로 세계무대에 등장할 날을 위해 강조한 그의 이야기가 귓가에 아스라이 메아리쳐 오는 듯하다. 나 역시 ‘문화의 힘으로 세계를 감동하게 하는 나라’를 위해 사명감을 갖고 친구들과 더불어 해설가로서 최선을 다해 활동해보려 한다. 수년 전에 배웠던 수업자료들을 친구들에게 주려고 차곡차곡 정리하는 중이다. 소중한 자료를 넣을 예쁜 봉투를 준비해 친구들에게 줄 반가운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본다.
- 2018-05-29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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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 선생 일대기
- 우리가 김구 선생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임시정부 주석을 역임하였고 경교장에서 안두희에게 암살당한 것 정도의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 후 귀국했으나 이승만 정권과 뜻이 안 맞아 역사적으로 묻힌 부분도 많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에 치우치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는 김구 선생에 대해 어느 정도 알게 해줬다. 그러나 영화 제목만으로는 ‘대장 김창수’라 하여 민란의 대장 정도로 알고 봤다. 영화의 끝 부분에 가서야 김창수가 나중에 개명하여 김구 선생이라는 것을 밝힌다. 그제야 영화가 다소 밋밋했던 것들이 이해된다. 김구 선생은 1876년에 황해도에서 태어났다. 이 영화의 배경은 1896년이니 김구 선생이 20살 때부터 시작된다. 명성 황후를 시해한 일본인을 맨 손으로 때려죽이고 체포된다. 인천 감옥소에 수감된 동안 남 다른 행동은 더 힘든 나날이었다. 국모의 원수를 갚았는데 죄가 되지 않는다고 버틴 것이다. 결국 친일 내각의 재판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입장이지만, 글을 배운 것이 있어 거기서 간수들에게 인정받는다. 여러 가지 행정 민원도 처리해주고 하여 같은 죄수들에게도 글을 가르치는 특혜를 누린다. ‘쇼생크 탈출’의 앤디 듀프레인을 떠 올리게 한다. 당시 문맹률이 높아 계몽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소설 ‘상록수’ 등에서 국민 계몽 부분이 자주 나오는 것도 그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사형수이기 때문에 결국 사형 집행 날짜가 잡힌다. 떳떳하게 죽으라며 어머니가 보낸 하얀 한복으로 갈아입고 사형장에 선다. 그러나 그때 고종 황제가 사형 집행을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죄수들이 집단으로 황실에 사면 요청한 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이 장면에서는 사형 직전에 살아난 러시아 문호 토스토예프스키를 떠올리게 한다. 다시 살아났으나 사형수만 면했을 뿐이지 감옥소 신세는 마찬가지이다. 경인 철도 공사에 투입되어 더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다. 김창수는 탈옥을 결심하고 결국 탈옥에 성공한다. 한편으로는 감옥소장이 경인 철도 공사에 죄수들을 투입해 임금을 가로 챈 것을 보여주는 장부를 황실에 보내 감옥소장의 비리를 고발한다. 이 부분도 쇼생크 탈출과 비슷하다. 영화는 여기까지만 나온다. 그 뒤는 나레이션으로 김창수가 김구 선생이며 한일합방 후 상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 주석이 되었고 해방 후 귀국했다가 암살당한 것까지 설명해 준다. 차라리 상해 임시정부 시절을 포함하여 귀국 후 암살당한 것까지 시나리오를 연결했으면 역사 영화로서 더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을 것 같다. 당시 일본이 거의 전권을 휘두르던 시절이라 황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대세가 기울었으니 고관들의 생각도 일본에 나라 팔아먹을 궁리만 할 때이다. 감옥소장도 비리를 저지르고도 일본인들의 배경을 믿고 오히려 큰 소리를 친다. 백성들이라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갈 것인지 알고 있어야 했는데 철 따라 농사나 짓는 농민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문맹률이 높으니 글부터 깨우치는 국민 계몽이 필요한 때였던 것 같다. 이원태 감독 작품으로 김창수 역에 조진웅, 감옥소장 역에 송승헌이 나온다. 김구 선생 영화라 해서 평점이 8.7로 높은 편이다. 그러나 영화적 요소는 다소 미흡한 편이다.
- 2018-01-09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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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 라이프] 2017년 정유년 대중문화 트렌드와 스러진 별들
- 2017년 정유년의 한 해도 저물고 있다. 올해는 국정농단으로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헌법재판소에 의해 파면되는 초유의 일이 벌어져 5월 9일 조기 대선을 통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19대 대통령에 당선돼 취임하는 등 격변의 한 해였다. 대중문화계 역시 세월호 특별법 서명, 야당 후보 지지 등의 이유로 송강호, 정우성, 김혜수 등 수많은 연예인을 포함한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인 블랙리스트와 김여진, 문성근, 김미화, 김제동, 김규리 등 82명의 연예인을 좌파 연예인으로 규정해 여론 조작, 방송계 퇴출 등을 시도한 이명박 정부의 국정원 보고서가 공개돼 큰 파문이 일었다. 또한 사드로 촉발된 중국 당국의 한한령(限韓令·한류금지령)으로 대중문화 산업계가 직격탄을 맞는 등 크고 작은 일이 많았다. 2017년 대중의 눈길을 사로잡고 유행을 선도한 대중문화 트렌드와 키워드는 무엇일까. 우선 영화계에선 역사적 사건과 인물 등 실화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쏟아져 흥행에 성공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트렌드다. 한국 민주화에 큰 역할을 한 광주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 병자호란 당시 고립무원의 남한산성을 소재로 한 김훈 작가의 동명 소설을 영상화한 , 2007년 미 의회 공개 청문회에서 일본군 위안부 사죄결의안 통과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이용수 할머니의 가슴 아픈 실화를 모티브로 한 , 일제 강점기 일본 하시마 섬에 강제 동원된 800여 명의 조선인 참상을 다룬 , 3·1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일본으로 가 항일운동에 매진했던 독립운동가 박열을 전면에 내세운 , 1986년 명성황후 시해범을 죽이고 사형선고를 받는 등 청년기의 김구 선생을 다룬 등 많은 영화가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뤄 눈길을 끌었다. 가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해 한국 영화로는 15번째 1000만 영화로 등극하는 등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다룬 실화 영화들이 흥행도 호조를 보였다. 올해 방송 드라마의 가장 큰 특징은 ·· 등 검사나 변호사, 재벌 등 권력과 자본의 탐욕과 비리를 다루거나 · 등 언론계를 조명한 작품들과 을 비롯한 갑질을 소재로 한 드라마들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거나 화제가 됐다는 점이다. 이들 드라마는 지도층의 부패가 심각하고 갑질이 심화하는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줬다. 대중문화계의 큰손으로 등장한 20~40대 여성들의 절대적 지지로 영화와 드라마에서 남자 스타들이 압도적 흥행 성적을 거둔 것도 2017년 대중문화계를 지배한 트렌드 중 하나다. 1218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송강호 주연의 , 718만 명이 본 현빈, 유해진 주연의 를 비롯해 ··· 등 올해 들어 흥행 상위를 차지하는 영화들이 한결같이 남자 주연 영화였다. 드라마 역시 마찬가지다. 케이블 TV 드라마 사상 최초로 20%대를 돌파한 공유 주연의 (tvN), 28% 시청률을 기록한 지성 주연의 (SBS), 20%대를 유지한 남궁민 주연의 (KBS2) 등 성공한 드라마 모두 남자 주연 작품이다. 대중의 관심이 높은 예능 프로그램은 (SBS), (MBC에브리원), (JTBC), (JTBC2), (JTBC), (OLIVE), (KBS1), (TV조선) 등 외국인 출연 예능과 (채널A), ·(tvN), ·(TV조선), ·(E채널), ···(SBS), (KBS2), (KBS드라마), (MBN) 등 연예인의 남편, 아내, 자녀, 부모 등이 출연한 연예인 가족 예능이 대세를 이뤘다. 또한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지 말고 지금의 삶을 즐겁고 행복하게 살자는 ‘욜로(YOLO)’와 혼술·혼밥 등 급증하고 있는 ‘1인 가구’의 문화가 예능 키워드로 등장해 (SBS)에서부터 (MBN)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예능 프로그램의 소재로 활용됐다. 2017년 대중음악계는 신세대 가수와 아이돌 그룹의 1970~1990년대 히트곡 리메이크 열풍이 강타했다. 양희은이 1991년에 불러 인기를 얻은 ‘가을 아침’과 1970년대 정미조가 불러 히트한 ‘개여울’이 올해 아이유의 노래로 재탄생해 음원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는 등 큰 인기를 얻었다. 아이유는 9월 발표한 리메이크 앨범 ‘꽃갈피 2’에서 정미조의 ‘개여울’,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 김건모의 ‘잠 못 드는 밤 비는 내리고’ 등 1970~1990년대 히트곡을 완성도 높게 리메이크해 큰 관심을 모았다. 걸 그룹 마마무의 솔라도 김도향의 ‘바보처럼 살았군요’, 여진의 ‘그리움만 쌓이네’, 해바라기의 ‘행복을 주는 사람’ 등을 리메이크한 앨범을 발표해 젊은층뿐만 아니라 50~60대 중장년층의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올해 대중음악계를 관통한 리메이크 트렌드는 젊은 세대에게 과거의 명곡들을 소개하는 동시에 중장년층에게는 추억을 선물하는 효과가 높아 대중음악의 수용층을 확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대 간 이해의 접점을 확대했다. 1996년 H.O.T. 데뷔를 시작으로 젝스키스, S.E.S., 핑클 등 1990년대 중·후반 본격화한 아이돌 그룹 시대는 2000년대 들어 2PM, 슈퍼주니어, 원더걸스, 소녀시대 등 2세대 아이돌 그룹 중심으로 세대 교체가 됐다. 올해 들어 원더걸스, 씨스타 등 많은 아이돌 그룹이 해체되고 소녀시대의 멤버 서현이 탈퇴하는 등 2세대 아이돌 그룹들이 본격적으로 퇴장했다. 올해는 방탄소년단, 트와이스, 여자친구, 블랙핑크 등 2015년 전후로 데뷔한 3세대 아이돌 그룹이 국내 음악계를 평정하고 K팝 한류를 이끄는 주체로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연예계에 안타까운 일도 많았다. 큰 사랑을 받던 스타들이 숨져 대중의 곁을 영원히 떠났다. KBS2 주말극 촬영을 끝낸 지 얼마 안 된 4월 9일 중견 스타 김영애가 췌장암으로 66년간의 삶을 마무리했다. 46년간 연기자 생활도 끝나는 순간이었다. “연기는 내게 산소이자 숨구멍 같은 의미예요. 배우가 아닌 나를 생각할 수가 없어요. 다음 생에 태어난다면 다시 배우를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할 정도로 천생 배우였던 김영애는 20세에 연기를 시작해 , , , , , , , 까지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서 정교한 연기력과 빼어난 캐릭터 창출력으로 시청자와 관객에게 감동을 줬다. 와 사극 등에서 보인 강렬한 카리스마 연기에서 영화 의 일상적 연기까지 스펙트럼 넓은 연기로 관객과 시청자에게 기쁨을 준 중견 배우 윤소정은 패혈증으로 6월 16일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73년의 삶 중 연기자로 살아온 세월이 55년에 이를 정도로 윤소정에게 있어 배우라는 직업은 삶의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57년 동안 연극무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TV 화면에서 빛나는 조연 연기와 사투리 연기로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던 중견 배우 김지영도 폐암으로 2월 19일 79년간의 삶을 마감했다. 2017년 10월 30일에는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영화와 드라마에서 빼어난 연기를 선보이며 왕성한 활동을 펼친 김주혁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이다. 김주혁은 선 굵은 연기로 대중의 사랑을 받았던 김무생의 아들로 1998년 SBS 탤런트로 연예계에 데뷔한 뒤 드라마 , , , , 영화 , , 등 수많은 작품에 주연으로 나서 아버지를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20년간의 배우생활을 마감하고 세상을 떠난 김주혁의 나이는 45세였다.
- 2017-12-11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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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과의 마지막 눈인사, 영정사진 찍으셨나요?
- 우리의 근대사 속 중요한 장면에서 등장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영정사진이다. 부산의 이태춘 열사의 사진을 든 노무현 전 대통령과 옆에 나란히 선 문재인 대통령의 사진이나, 이한열 열사의 영정사진을 든 이상호 의원의 사진은 그 장면만으로 아직까지도 상징성을 인정받고 회자된다. 영정사진은 고인이 누구였는가 설명하는 생의 마지막 수단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영정사진을 마련하는 일을 꺼려하고 좀 더 뒤로 미뤄놓고 싶어 한다. ‘장수사진’이라는 선의가 느껴지는 명칭으로 바뀌어 불리는 것은 이 때문일 것이다. 영정사진이 언제부터 우리의 장례 문화에 자리 잡았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가장 오래된 기록을 꼽자면 1934년 11월 일본 총독부에 의해 발표된 의례준칙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의례준칙 전문 중 기제(忌祭)의 서(序) 첫 번째 항목에 ‘제주지방(祭主紙榜) 또는 사진(寫眞)을 제위(祭位)에 봉안(奉安)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그 전까지 영정(초상화)은 지금의 용도와는 조금 달랐다. 조선시대까지는 장례나 상례 때 등장하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신주나 지방 대신 사용했다. 사당을 이전에 영당(影堂)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일제에 의해 영정사진 탄생 실제로 일본에서는 훨씬 더 이전에 영정사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 개항을 통해 사진이란 문물이 수입된 이후 일본에선 사진을 찍는 것이 유행했다. 또 세이난전쟁(1877년) 때 난을 진압하기 위해 파병되는 군인들에게 사진을 한 장씩 찍어줬다는 기록도 나오는데 이때의 사진을 일본의 최초 영정사진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이 전통은 청일전쟁(1894년)에도 이어졌다. 국내에 사진이 본격적으로 들어 온 것은 1883년. 한성순보에 촬영국이라는 사진관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데, 황철이란 사람이 세운 사설 사진관이다. 이후 지운영은 1884년 고종의 어진을 찍었다. 이들을 통해 많은 인물사진이 촬영된 것으로 전해지나 남은 기록은 거의 없는 상태다. 일제강점기 시절 영정사진 자료 역시 찾기가 쉽지 않다. 일제강점기의 고종 황제나 순종 황제 장례식에도 영정사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완용의 매일신보 부고 기사에는 그의 초상사진이 쓰였지만, 경성일보에 게재된 그의 장례식 보도사진 속 제위에도 영정사진의 모습은 없다. 광복 후인 1945년 7월 5일 당시 주한미국공보원에 근무하던 한국인 직원이 촬영한 백범 김구 선생의 장례식 영상자료에는 백범의 영정사진이 등장한다. 그의 사진은 운구행렬과 효창공원까지 함께했다. 을지대학교 장례지도학과 이철영 교수는 “과거 국내에선 장례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데 인색해 영정사진의 기록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발견되는 오래된 사진도 대부분 1960년대 이후의 것”이라고 설명하면서 “일제의 의례준칙에 기록이 남아 있는 만큼 일본의 영향을 받아 장례 때 영정사진을 쓰기 시작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장의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1982년을 기준으로 영정사진의 대중화가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론도 있다. 당시 부산에서 일본식 장례 상품을 그대로 들여온 상조회사가 영업을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의 영정사진 문화가 함께 들어왔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실제로 일본에서 영정사진이 장례식에 대중적으로 사용된 것은 1970년대 중반 이후라는 의견이 있다. 인식 바뀌어 웃는 사진 쓰기도 불과 얼마 전까지 영정사진 제작은 남겨진 자녀나 가족의 몫이었다. 따로 영정사진을 찍어두는 것은 죽음을 재촉하는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 그러나 정작 가족이 사망했을 때 준비되는 영정사진은 증명사진이나 주민등록증 사진을 확대해 인화한 조악한 수준의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사전 준비의 필요성이 점차 커져갔다. 그러다 사진 장비와 기술 보급으로 사진관이 많아지고, 영정사진 촬영을 일종의 봉사활동 수단으로 삼는 사진가들이 늘면서 사진에 대한 걱정은 줄어들게 됐다. 또 이를 통해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도 상당히 개선됐다. 영정사진 촬영 봉사활동을 꾸준히 하고 있는 한 동호인은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영정사진을 찍어주겠다고 하면 불같이 화를 내는 노인이 많았다”며 “그러나 최근에는 영정사진이 장수사진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사진찍기를 즐기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고, 심지어 2~3년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자신의 변화된 모습을 촬영해두는 이들도 적지 않다”고 말한다. 이제는 동네 노인정 등을 통해 영정사진을 파일 형태로 공동 보관하는 문화까지 생겼을 정도라고. 그렇다면 영정사진은 어디에서 준비하는 게 좋을까. 제일 만만한 곳은 역시 사진관이다. 영정사진에 대한 인식이 긍정적으로 바뀌면서 가족사진을 찍는 날 영정사진까지 함께 찍어두는 사람들도 있다. 또 최근에는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기 위한 인물사진 전문의 흑백사진관도 서울 북촌이나 연남동 등 일부 지역에서 생겨나고 있다. 가장 대중화된 사진 크기는 28×36㎝다. 현직 사진사들은 아직까지도 본인이 직접 와서 찍는 영정사진보다 생전 사진을 바탕으로 합성해 만드는 게 많다고 말한다. 물론 요즘은 자신의 장례식에 쓸 영정사진을 미리 준비해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추세다. 솜사탕 사진관 고용주 실장은 “영정사진을 찍으러 오시는 분들의 태도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져 치아가 보이게 웃거나 심지어 선글라스를 쓰고 측면 모습을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면서 “만약 의상이 문제라면 평상복을 입고 촬영한 뒤 한복이나 양복으로 간단히 합성할 수 있고 비용도 6~7만원 선으로 장례식장에서 만드는 비용보다 저렴하니 미리 준비해두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 2017-10-27 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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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늘푸른 연극제
- ‘늘푸른 연극제’는 지난 해 ‘원로 연극제’로 시작했다. 한 평생 연극에 몸 바쳐 온 원로 연극인들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만든 행사이다. 7월 28일부터 8월 27일까지 한 달 간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4개의 연극을 공연한다. 그 중 노경식 작가의 ‘반민특위’ 연극을 감상했다. 권병길, 정상철, 이민철, 김종 구 외 극단동양레퍼토리에서 20여명의 배우들이 출연했다. 반민특위는 우리 역사에 있었던 사실이다. 조선 말 매국노들이 나라를 팔아먹고 일제 36년을 거쳐 해방이 되었다. 새 나라를 건국하고 이승만 정권이 들어섰다. 국민들은 일제에 협력했던 매국노들을 잡아 징벌하라는 요구가 빗발쳐 국회에서 아들을 징벌하기 위해 반민특위가 결성되었다. 그러나 대통령 이승만은 미국에서 건너온 인사로서 국내에 배경이 없었다. 자싱의 배경이라고는 오로지 미국과 일제시대에 일본에 빌붙어 있던 세력들뿐이었다. 그러므로 이승만은 반민특위를 좋아할 리 없었다. 반민특위는 화신백화점 사장 박흥식을 비롯하여 고등부 형사 김태석, 노덕술 등 일제에 빌붙어 권력과 부를 축적하던 매국노들을 구속하는 등,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계를 망라하여 매국노들을 잡아냈다. 그러나 대통령의 비호 아래 유령단체가 등장하여 반민특위의 활동을 방해한다. 경찰은 못 본 체한다. 결국 반민특위는 6.6 사건으로 기록된 유령단체의 습격으로 비극적 파탄을 맞는다. 우리 역사에서 매국노들을 징벌하지 못한 것은 두고두고 흠으로 남아 있다. 이승만을 좋지 않게 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해방 후에도 일제에 협력한 사람들은 경찰 계통 등 공직은 물론 사회 각계각층에 포진하고 있었다. 존경 받아 오던 사람들이 일제 편으로 전향하고 매국노 노릇을 했다. 제자를 정신대에 보낸 사람, 일제를 찬양하는 노래와 시, 문학으로 일제에 빌붙었던 사람 등, 별의 별 사람들이 많았다.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며 연전연승하던 시절 일제가 영원할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날 까지도 이들에 대한 평가는 곱지 않다. 이 연극에서 또 하나 기억해야 할 것은 미국의 매카시 선풍 같은 빨갱이 매도 시류이다. 1949년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10여명의 반 정부 국회의원들을 제거하고 6월 26일 김구 선생이 암살당했다. 이승만 정권에 반대하던 세력들을 제거하고 이승만 정권은 독재의 길로 들어 선 것이다. 그리고 다음 해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이승만은 한강 다리를 끊어 놓고 국민들에게는 안심하라면서 자신은 부산으로 피신했었다. 프랑스의 드골 대통령은 2차 대전 당시 프랑스가 함락되어 있던 시절 나치 독일에 협력하던 부역자들을 종전 후 단호히 처벌했다고 한다. 사실주의 학자 카뮈도 이런 과거의 매국을 처벌하지 않는 것은 미래의 매국노에게 용기를 주는 일이라며 처벌을 지지했다. 지금도 정권이 바뀌면 ‘적폐 청산’이라 하여 전 정권에 있던 사람들은 찬 서리를 맞는다. 한편으로는 보복 정치라며 비난하지만, 잘못한 것은 비판 받아 마땅하다. 권력은 영원하지 않다. 세상이 바뀌게 되었을 때도 떳떳해야 한다.
- 2017-08-18 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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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 시인 고은 <초혼>을 노래하다, 곁에 두고 그리워하는 나의 평생 친구 '죽음'
- 새해가 밝으면 저마다 새로운 계획과 소망으로 기분이 들뜨곤 하지만, 고은(高銀·84) 시인은 인생에 해가 더해질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가 살아온 80여 년의 세월 동안 먼저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넋들과 앞으로 생을 이어가며 맞이하게 될 죽음들에 대한 가책과 슬픔이 늘 그의 세상에 공존하기 때문이다. 생과 사의 엇갈림 속에서 살아남은 자로서의 사명을 다하는 방법으로 그는 오늘도 시를 쓴다. 시로써 삶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자신의 길이라는 그는 역시 시로써 자신의 뜻을 나누고자 한다. 고 시인은 시집 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한다. 에 실린 시 ‘초혼’은 원고지 130장에 이르는 장시(長詩)다. 김소월의 ‘초혼(招魂)’과 제목도 같고 먼저 떠난 영혼들을 기린다는 점에서 의미도 함께한다. 고 시인이 직접 낭독하는 데만 1시간이 걸렸을 정도로 깊은 애도의 뜻이 담긴 진혼곡 같은 시다. 그런 그의 시와는 달리 죽음을 경계하고 자신의 삶, 꿈, 자아에만 열중하는 이들을 보면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 없다는 고 시인이다. “‘떠난 사람을 기억하는 게 대체 내 인생과 무슨 상관이냐’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그건 자신을 이루고 있는 세계를 과소평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를 존재하게 한 내 부모, 또 내 부모의 부모, 그 부모의 부모를 헤아려보면 끝없이 뻗어 있잖아요. 내 밑으로는 또 어떻습니까? 내 자녀, 손주, 손주의 자녀 등 그 또한 한없이 뻗어 나가겠죠. 그렇게 생각하면 나는 결코 분리된 나 하나가 아니에요. 그물망처럼 촘촘히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빼놓을 수 없는 존재죠. 이 광대한 세상에서 하나의 삶을 구성하는 티끌로만 보이겠지만, 이 티끌이야말로 모든 우주를 담고 있어요. 나 자신은 곧 우주의 크기와 같죠. 그 안에서 죽음은 늘 우리와 함께합니다.” 혼자가 아닌 삶, 공적인 삶에 대한 의무 그는 나와 연결된 세상과 사람들을 인식했을 때 삶을 바라보는 태도가 신중해진다고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이 개인의 노력으로만 유지되는 것이 아니기에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고. “6·25, 4·19, 성수대교 붕괴, 세월호 참사 등 역사에 남을 죽음뿐만 아니라 우리가 기억하지 못할 죽음까지 얼마나 많은 죽음이 우리 세상에서 일어납니까? 그런 의식 없이 나 혼자만 잘살겠다는 건 후안무치한 태도죠. 나는 정말 나 혼자가 아니에요. 예를 들어 내 속엔 수많은 기생충이 살고 있죠. 내가 입고 있는 옷은 누가 만드나요? 여러 사람의 기술과 손길이 닿아 있죠. 내가 쓴 모자, 안경, 마시는 커피까지 무엇 하나 나 혼자 이뤄낸 게 없어요. 그런데 어찌 내 존재만을 과시할 수 있겠어요. 나는 언제나 타자와 함께, 그들의 희생 속에 존재하는 거죠.” 고 시인은 이러한 인식이 자신을 미미한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닌 삶을 더욱 풍성하게 채워준다고 조언했다. “늘 떠난 자들의 넋을 어깨에 지고 애도하는 것이 산 자의 의무라고 생각해요. 얼핏 이타적인 삶이라 느낄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자신에게 이로운 점이 많아요. 혼자라고만 생각하면 그런 죽음 앞에 나는 참 비겁하고 가난한 존재잖아요. 그러나 나는 누군가를 기억하는 존재라고 느끼면 절대 공허하지 않죠. 나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자책할 것이 아니라 세계 속에 있는 나의 존재를 인식해야 해요. 그러면 삶의 책임감이 강해지고, 비로소 죽은 자 옆에 있을 수 있게 되죠. 이때 누군가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가책이 생기기도 해요. 참 미안한 일이잖아요. 그럴 땐 그들의 못다 한 삶을 내가 대신 살아야 한다는 공적인 자아를 만들어내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더 최선을 다해 살 수밖에 없어요.”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 에 실린 시 ‘작은 노래 9’를 보면 ‘이 세상은/ 오래/ 오래/ 있어야 할 곳 아니셔/ (중략) ‘슬픈 열대’ 100세여/ 좀 염치코치 없으셔’라는 내용이 나온다. 죽음을 멀리하고 삶에 연연해하는 이들을 항해 고 시인은 ‘염치코치 없다’고 재치 있게 표현했다. “요즘은 100세 시대라고 하잖아요. 나에게도 사람들이 100세 되면 기념 시집을 꼭 내라고 이야기하는데 겉으로는 웃지만 속으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살다 보면 살아지는 것뿐이지, 그렇게 바라보면서 가지는 않으려 해요. 이 세상의 시간은 나의 것이기도 하지만 타인의 것이기도 하잖아요. 다 가지려고 하는 건 탐욕이죠. 나이 들수록 생애 집착하기보다는 더 의연한 자세로 살아야 하는데, 오히려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을 부여잡으려 하니….” 삶과 죽음에 대한 고 시인의 허심탄회한 감정은 ‘삼거리’라는 시에서 ‘나 또한 오지 않는 임종 같은 지긋지긋한 나이거니’라는 시구로 드러난다. 고 시인은 “죽음? 올 테면 오라!”고 초연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한 가지 염려스러운 부분은 있다고 고백한다. “죽음이라는 건 나 역시 겪어보지 않았는데, 두려움이 왜 없겠소. 그러나 이런들 저런들 찾아오고야 마는 죽음이라면 즐겁게 받아들이자는 거지. 술자리 1차에서 2차를 가듯 신나게 생각하려 해요. 다만 지상에서의 사랑은 늘 아픔을 전제하는 법, 내가 죽고 나면 아내나 딸이 슬퍼할 것 아니에요. 어쩔 수 없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결국엔 누군가 먼저 죽는데, 그때 살아남은 이가 얼마나 가슴 아프겠어요. 먼저 간 이도 더 사랑하지 못하고 떠나니 원통할 테고. 이렇게 끝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의 사랑인데, 어찌 보면 모순이지요. 나의 죽음으로 인해 슬퍼할 이들만 아니라면 나는 내일이든 모레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어요.” 시인생활 59년, 시집 여럿 근래 나온 그의 시집을 보며 인상 깊었던 점이 있다. 맨 앞장 시인의 소개란에 적힌 글귀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한 면을 가득 채울 정도로 화려한 경력이 빽빽했는데 이제는 단 열 자 남짓한 글귀만이 그의 시인 인생을 축약하고 있다. 지난해 나온 에도 그의 이름 두 자와 ‘시인생활 58년, 시집 여럿’이라는 문장 외에는 어떠한 수식어도 찾아볼 수 없다. 흰 종이 위 단출한 이력을 에워싼 여백은 빈 것이 아닌, 그의 겸손과 내공으로 이미 가득 차 있었다. “사람들은 자꾸 뭘 쓰게 만들어요. 화려한 경력, 베스트셀러 그런 걸 자꾸 드러내고 채우려고 하는데 난 그게 싫더라고요. 시를 정말 많이 썼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 시들을 다시 들춰보고 새기고 하는 건 아니거든요. 뭐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겠고. 우물에 물이 고여 있다고 그 물이 옛날의 그 물은 아니잖아요. 매일 새로 솟아나지. 내 시도 마찬가지예요. 늘 새롭게 태어나기 때문에 지난 것들에 매여 있을 틈이 없죠.” 하루하루를 새롭게 느끼고, 만물을 신비로이 여기는 그는 이 세상엔 아직 시로 쓰인 것보다 써야 할 것들이 더 많다고 이야기한다. “아직도 노래할 것을 노래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고 시인의 창작에 대한 갈증과 애착은 그의 시집 의 서문에서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죽을 때도 죽어갈 때도 시를 쓸 수 있어?라고 내가 나에게 묻는다면 즉각의 자문자답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쓸 수 있다. 쓸 수 없다면 죽을 수 없을 것이다 라고.’ 평소 시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존재 이유라 말하던 고 시인다웠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시를 짓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요. 시는 내 인생에서 떼어놓을 수 없지요. 이 세상에 시로 쓸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내 생애 안에서 그 나이마다 느끼고 발견하는 것들이 있으니 우물물 솟듯 계속 생겨날 수밖에. 죽음도 시라고 생각해요. 의식이 있다가 없는 세계로 탁! 가잖아요. 시처럼 놀랍죠. 아침에 지저귀는 새들, 벼랑 끝에 부딪히는 파도, 이 세상이 다 시 아닐까요?” 나를 가장 정직하게 표현하는 한 권의 세계 1988년 시집 을 펴내며 그는 “6월 투쟁의 대열에 우선 발 벗고 나서야 했다. 최루탄은 눈물 없어진 나를 눈물단지로 바꾸어주었다”며 “이 시대의 당위가 나를 서재의 집념에 머물러 있게 하는 여지를 허용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전 30권 예정인 도 매듭지었고, 원로시인으로서 입지를 단단히 굳힌 그이기에 이제는 서재에서 오롯이 시를 위해 전념하는 시간이 늘지 않았을지 궁금했다. 그의 첫마디에 어리석은 질문이었음을 깨달았다. “이런 거(기자와의 인터뷰) 말이오. 이런 거 하느라고 시 쓸 시간을 빼앗기지. 또 다른 나라에까지 내 시가 알려지다 보니 해외 출장도 많아졌고. 그렇게 나가면 그냥 나가는 게 아니라 기조연설 쓰고, 그걸 또 외국어로 번역하고, 시도 낭송해야 하고. 가기 전이랑 다녀와서 이틀에서 사흘을 쉬어야 하니 이래저래 서재에 붙어 있을 시간이 없지요. 그런 상황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어요.” 요즘은 ‘초혼’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아주 긴 시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다고 했다. 조금 전 그의 고충을 들었던 터라 서둘러 그를 서재로 보내드려야 할 것만 같아 냉큼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 ‘명사와 함께하는 북人북’에 빠지지 않는 명사의 추천 도서 목록 요청이었다. 형식을 파해야 했지만, 짧지만 분명하고 확신에 찬 그의 조언을 그대로 담기로 했다. “나는 책으로 추천하고 싶지가 않아요. 그보다는 자기 자신을 아주 정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하나 있어요. 누구든 백범 김구 선생의 를 꼭 읽었으면 합니다. 더 추천할 것도 없어요. 우선 그것부터 읽어보라 하시오. 그러고 나면 자신에게 필요한 게 뭔지 스스로 알게 될 테니!”
- 2016-12-28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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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15기획… 내가 이 독립투사에 꽂힌 이유] 화서 이항로
- 항일 의병장 최익현에 대해서는 비교적 잘 알려져 있다. 74세에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에 대항하다가 잡혀 일본 쓰시마(對馬島)에 끌려갔다가 순국한 인물이다. 조선조 말에 고위직의 벼슬을 하면서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등에 반대하고 끊임없는 상소로 결국 대원군을 물러나게 한 주인공이다. 을사오적의 처단을 요구하고 단발령에도 반대했다. 강직한 성격에 눈부신 투쟁성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적국 일본에 끌려가 순국한 인물이다. 최익현의 이러한 활약은 스승인 화서(華西) 이항로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최익현은 14세 때 이항로의 제자가 되어 배웠다고 한다. 그의 학문은 최익현뿐 아니라 제자 유인석과 김평묵, 유중교, 백범 김구 등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정작 이항로는 관직을 고사하고 후학 활동에 전념한 관계로 그리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항로는 의병 활동의 정신적 지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최익현의 위정척사(衛正斥邪) 정신이 바로 화서학파의 근간이다. ‘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그릇된 것은 배척하자는 뜻이다. 이 사상은 원래 송나라의 주자가 주창한 것인데 오랑캐들에 의해 유교 사상이 어지럽혀지자 유교 사상의 정통성을 지키고자 체계화한 사상이다. 그러므로 화서학파의 뿌리는 송나라의 주자라고 볼 수 있다. 조선 말에 외세가 난무하며 국정을 어지럽히고 가치관이 흔들리자 기존 체제를 옹호하고 외세를 배척하자는 주장이다. 대원군의 쇄국주의와 같은 맥락이라 대원군의 정책에 호응했을 것 같은데 대원군의 경복궁 중건 등에 반대하자 이들도 배척했다. 결국 국모를 살해하고 온갖 음모를 꾸미던 일본을 경계하라는 위정척사 주장을 실제로 행동으로 옮긴 사람이 최익현인 것이다. 우연한 기회에 화서학회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이항로의 업적에 대해 재조명하자는 취지로 만든 민간학회이다. 지난 4월 21일 경기 용문산의 용문사 입구에서 이항로의 위정척사비가 한국독립운동기념비와 함께 세워졌다. 원래 화서학회 고 이종익 회장은 이항로와 같은 문중이라 후손으로서 더욱 책임감을 느끼고 이 학회를 만들게 되었다고 들었다. 단순히 형식적이거나 명예직으로 학회를 만든 것이 아니라 이항로를 ‘이달의 문화인물’ 등으로 선정되도록 했고 사재를 털어 전기를 발간하고 여러 차례의 학술대회도 열어 재조명했다. 이응로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고 이를 계승하여 전통 사상을 발전시킴은 물론 나아가 민족의 정체성 및 바른 역사관 정립에 이바지하자는 취지로 300 여명이 활동하고 있다. 위정척사비를 굳이 용문산 입구에 세운 이유는 선생이 1792년 2월 13일 경기도 양평군 서종면 노문리 벽계마을에서 출생하여 1868년 77세를 일기로 서거할 때까지 거주하던 지역이기 때문이다. 원래 벽계구곡이라 하여 산수가 아름다운 지역인데 이곳이 청화산을 기준으로 볼 때 서쪽에 있다 하여 선비들이 화서 선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항로 선생도 이를 기쁘게 받아들였다고 한다. 역사를 모르고 있으면 과거의 선열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생을 바쳐 구국의 선봉에 섰던 인물들을 모르고 있다는 것 또한 우리의 뿌리를 모르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국사 교육에 의견이 분분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발굴과 재조명도 중요하다.
- 2016-06-24 1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