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성산으로 추앙받는 백두산(白頭山·해발 2744m). 그러나 내 길을 잃고, 남의 땅을 거쳐 오르내린 지 어언 수십 년에 이르니 그곳이 진정 내 나라, 내 땅인지 의구심이 드는 것도 솔직한 심정입니다. 그런 어리석은 마음을 꾸짖기라도 하려는 듯 어느 순간 눈앞에 나타난 꽃 한 송이가 백두산과 백두평원, 그리고 남한 땅이 식물학적 동질성을 가진 같은 땅임을 일깨워줍니다. 털개불알꽃, 애기작란화 등으로도 불리는 털복주머니란이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풀과 나무 등 자생식물의 수는 모두 4100여 종. 이 중 77종을 국가에서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습니다. 자생지는 물론 개체 수가 극소수라 특별히 관리하지 않으면 머지않은 장래에 아예 종 자체가 사라질 위험이 크기 때문이지요. 그중에서도 특별히 9종을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분류해 특별 관리하고 있는데, 털복주머니란이 바로 그 9종의 하나입니다. 남한에선 강원도 함백산(咸白山·해발 1573m) 두문동재에서만 자랍니다. 환경부와 산림청은 단 두 곳뿐인 이곳 자생지에 각각 철조망을 두르고 감시카메라까지 설치해 특별 보호하고 있습니다.
털복주머니란은 역시 멸종위기 야생식물 1급으로 지정된 광릉요강꽃과 2급인 복주머니란과 함께 국내에 자생하는 복주머니란 속(屬) 3대 난초 중 하나로 키는 20~40cm, 꽃의 지름은 3~5cm로 전체적인 몸집이 광릉요강꽃이나 복주머니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함백산 자생지에서는 주로 6월 초순에 꽃이 피는데, 철책까지 두르고 보호 중인 총 개체 수는 두 곳을 합해 모두 100여 촉, 그중 꽃을 피우는 개체 수는 절반 정도에 불과합니다. 함백산 이외에 설악산에서도 발견되었다는 기록은 있으나 현재 확인된 바 없으니, 그야말로 철책으로 둘러싼 두 곳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7월 초순 천지를 보기 위해 지프를 타고 백두산 북쪽 능선을 오르는 길에서, 그토록 귀하디귀한 털복주머니란이 차창 밖으로 펼쳐진 백두평원에 무더기로 피어 있는 걸 보았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지 짐작하시겠지요. 먼저 ‘고향 사람’을 만난 듯 반갑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남의 땅, 남의 길을 통해 오르는 백두산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우리의 땅임을 절감했습니다. 두 번째, 한시라도 빨리 백두산으로 향하는 내 길, 내 땅을 복구해 그곳에 자생하는 우리 꽃, 우리의 자연유산을 되찾아야 한다는 강한 의무감을 느꼈습니다. 남한 땅에서 사라져가는 북방계 희귀식물의 보고이자 고향인 백두산과 드넓은 백두평원을 자유롭게 걸으며 만발한 야생화의 천국을 만끽하고 싶은 욕망이 솟구치는 걸 느꼈습니다.
줄기와 이파리는 물론 꽃잎 등 온몸에 솜털 같은 하얀 털이 빼곡히 나 있어 국명에 ‘털’ 자가 들어간 털복주머니란은 우리나라 외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자라는 북방계 난초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백두산과 함백산에서 자란다는 것은 털복주머니란이 한반도의 중심 산줄기인 백두대간(白頭大幹)을 따라 분포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한반도에서의 털복주머니란 자생지로, 백두산이 북방한계선이 되고 함백산이 남방한계선이 되는 셈이지요. 꽃 피는 시기는 함백산이 6월 초[사진1], 그리고 백두산이 7월 초이니 두 곳의 ‘꽃시계’가 딱 한 달 차이 날 뿐 같은 식물이 자라고 똑같은 꽃을 피우는 하나의 땅임을 말없이 일러줍니다. 그리고 이는 백두산에서 함백산 사이 백두대간 줄기에 놓여 있는 북한 지역의 고산지대에도 당연히 많은 털복주머니란이 자생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불[火]의 계절 여름입니다. 붉은 태양이 땅 위의 모든 것을 태울 듯 이글거리는, 사계절 중 불의 기운이 가장 성한 시기입니다. 그런 화기(火氣)를 달래려는 듯 사람들은 너나없이 물가를 찾습니다. 계곡으로, 강으로, 바다로 갑니다. 장맛비는 물론 소낙비라도 내리면 금세 사위를 삼킬 듯 사납게 질주하는 계곡물과 흰 이빨을 드러내며 달려오는 성난 파도….
여름이면 만나곤 하는 성난 물의 모습은 여름이 곧 불과 물이 정면으로 맞서는 계절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런 7~8월 불과 물이 상극(相剋)하는 틈새에서 피는 각별한 꽃이 있습니다. 태양의 열기를 온몸으로 받아 식히려는 듯 그늘 한 점 없는 연못, 흐르지 않는 저수지에 커다란 이파리를 잔뜩 깔고 보랏빛 영롱한 꽃을 피우는 물풀이 있습니다. 바로 100년 만에 꽃을 피운다는 가시연꽃입니다.
2m에 이르는 거대한 이파리로 1년 중 가장 강한 여름 불의 기운을 받고, 뿌리로는 강 대 강(强 對 强)으로 맞서는 물의 기운을 흡입해서인지, 생김새는 물론 꽃이 피는 과정 등 모든 것이 예사롭게 않습니다. 먼저 그 이름은 온몸에 가득 가시가 박혀 있어 함부로 다가가 멋대로 휘저을 수 없는 존재임을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이파리(앞면뿐 아니라 물에 잠기는 뒷면까지)는 물론 줄기와 뿌리, 꽃받침까지 식물체 전체에 길게는 1cm쯤 되는 가시가 촘촘히 나 있습니다. 전초에서 가시가 없는 부분은 꽃잎과, 가시가 송송 돋은 열매 안에 든 완두콩 모양의 씨앗뿐입니다.
가시만큼 위압적인 것은 커다란 이파리입니다. 보통 가시연꽃이 자라는 수면은 그 잎으로 뒤덮일 정도로 개체마다 여러 개가 달릴 뿐 아니라, 타원형의 잎 하나가 어른 한 사람을 휘감을 만한 크기까지 자라납니다. 한해살이 물풀이 한두 달 만에, 줄기는 어른 엄지손가락보다 굵고 잎은 2m까지 크려면 하루에 무려 20cm씩 자라야 하기에 그 과정이 눈에 보인단 말이 나올 법합니다.
이렇듯 까칠한 가시연꽃이지만, 그 꽃은 모두를 단숨에 사로잡을 만큼 매력적입니다. 물론 꽃이 피는 과정도 촘촘한 가시나 넓은 잎에 못지않게 기이합니다. 생살을 찢는 고통 속에 새 생명을 낳듯, 가시연꽃도 가시가 촘촘히 박힌 봉오리로 역시 가시투성이의 두꺼운 잎을 뚫고 올라와 지름 4cm 안팎의 꽃을 피웁니다. 꽃은 오전에 열었다가 저녁이면 오므리기를 사나흘 되풀이하다 물속으로 들어가 씨앗을 생성하는데, 꽃봉오리가 맺혔다고 해도 수온과 수심, 기후와 일조량 등이 맞아야 열리기 때문에 활짝 핀 모습을 보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까다롭기로 치면 개화(開花)보다 씨앗의 발아(發芽)가 훨씬 정도가 심합니다. 계명대 김종원 교수에 따르면 ‘자연 상태에서 가시연꽃의 종자 발아율은 4% 이하’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낮은 발아율이 역설적으로 가시연꽃의 기적을 만들어냅니다. 즉 발아가 안 된 씨앗이 수년이든 수십 년이든 발아력을 유지하다가 수온과 기후 등이 최적의 조건이 되면 발아해서 뿌리를 내리고 커다란 잎을 펼치고 마침내 꽃을 피우는 것이지요. 휴면 상태의 씨앗 속에 내재된 생명이 되살아나며 ‘백 년 만에 피는 꽃’이라는 신화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실제 2010년 강원도 경포호에서 가시연꽃이 나타나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는데, 연원을 추적한즉 1960년대 농경지 개간 이후 휴면 상태에 있던 가시연꽃의 종자가 습지 복원 사업으로 생육 조건이 맞자 반세기 만에 다시 발아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Where is it?
가시연꽃은 발아도, 개화도 까다롭지만 그렇다고 1급수 청정지역에서 자라는 것은 아니다. 큰 잎에서 알 수 있듯 영양분이 풍부한 수질, 즉 적당히 부영양화(富營養化)된 연못에서 잘 자란다. 최대 자생지로는 경남 창원의 우포늪이 꼽힌다. 우포늪을 둘러싸고 있는 마을 이름이 아예 가시연꽃마을인데, 가시연꽃 등 우포늪의 수생식물을 그대로 재현해놓은 생태체험장도 있다. 수도권에선 경기도 시흥의 관곡지가 유명하다, 충남 홍성의 역재방죽공원과 부여의 궁남지, 강원도 강릉의 경포호 등 전국적으로 20여 곳에서 자란다. 진못(사진) 등 오래된 연못이 많은 경북 경산과 영천에도 자생지가 여럿 있다.
“누구든 누군가에게 말을 걸면서 자신을 알린다. 꽃은 향기로 자신을 알리고, 해는 찬란한 햇살과 노을로, 새는 새소리로 살아 있음을 표현한다.”
그렇습니다. 신현림 시인의 말대로 꽃은 향기로 자신을 알립니다. 특히 한여름 해발 1400m가 넘는 고산에 피는 백리향(百里香)은 향기로 자신을 알리는 것은 물론, 삼복더위에 ‘내로라’하는 꽃쟁이들에게 비지땀을 흘리고라도 자신을 알현(謁見)하라고 호령합니다.
낮 최고기온이 35도 안팎까지 오르며 폭염 경고가 발령되곤 하는 7월 하순, 전국의 꽃쟁이들은 백리향의 초대에 군소리 없이 카메라 가방을 둘러메고 경남 합천의 가야산을 오릅니다. 경북 성주의 백운동 탐방지원센터를 출발해 서성재와 칠불봉을 거쳐 정상인 해발 1430m의 상왕봉까지 4km의 산길을 오르고 또 오르면서 목표로 삼는 것은 오직 하나. 폭염 속에서 피어나는 백리향을 만나는 것입니다.
향기가 나는 식물을 이른바 ‘허브(herb)’라고 일컬으니, 백리향을 허브의 한 종으로 분류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해외에서 수입된 외래종 허브가 아닌, 토종 허브의 대표로 꼽아도 전혀 손색없는 백리향. 꽃은 물론 줄기, 잎 등 전초에서 진한 향기가 납니다. 인도에서는 ‘천국으로 가는 문을 연다’는 멋진 말로 허브 향의 강렬함을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한술 더 떠 그 향이 사방 백 리를 간다며 아예 백리향이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혹자는 그 향이 직접 백 리까지 번진다는 게 아니라 신발에 묻은 향이 백 리를 걸어도 가시지 않는다는 뜻이라고 설명하지만, 어찌 됐든 분명한 건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듯, 발 없는 향이 백 리를 간다’는 말이니 대단한 과장법이라 하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참, 삼복더위 속 가야산 산행이 무척 덥고 힘들지 않냐고요? 천만의 말씀! 청량한 계곡물이 흐르면서 한여름의 열기를 날려주고, 또 무성한 이파리는 햇살을 가려주고, 오르내리는 산길은 너른 숲 그늘에 잠기고… 그야말로 여름의 고산은 산 전체가 시원한 냉장고 속과 같습니다.
게다가 이왕이면 일출까지 보자며 어둠을 헤치고 산을 오른다면, 사진을 담는 내내 저 멀리 첩첩 산봉우리 사이로 흰 구름이 넘나들며 장쾌한 풍광을 만들고 바로 앞 둔덕에선 백리향이 연분홍 꽃물결을 이루는 걸 보며, ‘아, 이런 게 바로 황홀경’이라며 탄성을 지르게 됩니다. 덧붙여 백리향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한 향이 폐부를 찌를 듯 파고들면서 온몸은 무한한 행복감에 빠져듭니다.
Where is it?
전국적으로 30곳 이상의 자생지가 있으며 개체 수도 풍부하다지만 어디서나 백리향을 만날 수 있는 건 아니다. 남한 최고봉인 한라산을 비롯해 설악산과 지리산, 가야산, 운무산 등 높은 산 바위지대까지 올라야 한다.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가야산의 경우도 주봉인 상왕봉(1430m)과 최고봉인 칠불봉(1432m·사진) 등 고봉 주변에 주로 자생한다. 백리향보다 줄기가 더 굵으며, 옆으로 가지를 뻗는 섬백리향은 울릉도에서만 자라는데, 북면 나리동의 섬백리향 자생지는 제52호 천연기념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6월 말에서 8월 초까지 분홍색 꽃을 피우는 백리향과 섬백리향 모두 뿌리와 줄기, 잎 등 전초를 말려 지초(地椒)라는 약재로 사용한다. 강장 효과가 크고 우울증과 피로 해소 등에 효험이 있다고 한다.
6월 녹음이 짙어지면서 자잘한 풀꽃들은 흔적도 없이 스러집니다. 이른 봄 숲에 생기를 불어넣었던 봄꽃들이 사라진 자리엔 어느새 산앵도나무와 때죽나무, 쪽동백, 박쥐나무 등 나무 꽃들이 붉거나 노랗거나 하얀 꽃들을 풍성하게 피우며 숲의 주인 행세를 합니다. 이에 질세라 큰앵초와 감자난초 등 제법 키 큰 풀꽃들도 우뚝 솟아나 벌·나비를 부르는 경쟁 대열에 합류합니다. 민백미꽃도 그중 하나입니다. 큰 것은 1m 이상 자랍니다. 훤칠한 키에 꽃송이를 가득 달고 선 줄기가 곧고 단단해 얼핏 키 작은 관목으로 착각하지만 엄연히 풀꽃입니다.
“연분홍 꽃 색을 처음 보는 순간 심장이 녹아내리는 줄 알았다. 그 어떤 목석같은 사내라도 연분홍 민백미꽃의 아름다운 충격에 움찔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 꽃 동무가 홍색(紅色)의 민백미꽃을 본 감동을 이렇게 말합니다. 흰색 꽃만 있다고 생각한 민백미꽃이 연분홍 꽃을 피운다는 말에, 그리고 ‘심장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는 찬사에 구미가 당겨 물어물어 자생지를 찾았습니다.
꽃 찾아다니면서 겪는 일이 있는데, 꽃마다 만나게 된 사연이 다르고 또 일종의 징크스 같은 게 얽히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민백미꽃이 ‘세상사, 인연이 따로 있다’는 걸 알게 해주었습니다. 보고 싶어 한다고, 찾는다고, 찾아간다고 다 만나지는 게 아니고 인연 따라 만나기도 하고, 못 만나기도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전국의 산과 들에 흔히 자생한다는 민백미꽃.
그런데 초기 수년간 이 산 저 산 다녔지만 단 한 송이도 보지 못해 꽤나 애를 태웠습니다. 그러다 수년 전 6월 중순 영실에서 윗세오름까지 한라산을 오르는 동안 초록의 숲에 눈이 내린 듯 핀 민백미꽃을 숱하게 만났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서울에서 가까운 연천의 지장산에서 다시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번에 색색의 변이종 민백미꽃까지 만났습니다. 역시 한 번 보기가 어렵지, 길 트면 수시로 만나게 된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습니다.
민백미꽃은 본디 꽃 색이 아니라 뿌리가 희고 가늘어서 백미(白薇)란 약재로 쓰이는 백미꽃의 유사 종으로, 열매에 털이 없다는 뜻에서 ‘민’ 자가 붙었습니다. 그런데 털의 유무뿐 아니라, 꽃 색도 다릅니다. 백미꽃은 이름의 이미지와 달리 흑자색 꽃을, 민백미꽃은 흰색 꽃을 피웁니다. 또 다른 유사 종인 푸른백미꽃은 녹색이 감도는 꽃을 피웁니다. 그런데 분홍색과 자주색, 살구색 그리고 옅은 녹색 등 색색의 꽃이 피는 민백미꽃이 있다는 말에 “그럴 리가…”라는 마음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흰색 일색이 아닌, 다양한 색의 꽃이 달린 것을 확인했습니다. 민백미꽃은 꽃대와 꽃자루가 꽃보다 길어 꽃들이 대롱에 매달린 채 우산처럼 공중에 떠 있다고 하는데, 실제 본 모습은 도감 설명과 똑같습니다. 덧붙여 애간장을 녹인다는 찬사, 더도 덜도 아닌 딱 맞는 말이었습니다.
Where is it?
민백미꽃은 제주도를 비롯해 전국의 산지에서 자생한다. 키가 1m 정도까지 자라고 5~7월 흰색 꽃이 우산 형태[傘形]로 달리는데, 녹음이 짙은 숲에서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다. 6월 제주도 한라산을 오르면 숲 위로 돋아난 흰색의 민백미꽃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연분홍 및 진한 자주색, 살구색, 연두색 등 다양한 색의 변이를 보여주는 민백미꽃은 강원도 홍천 내면의 한 야산에 자생한다. 인근 지역에서 분홍색 은방울꽃이 발견되는 것으로 미뤄, 홍천 지역의 석회질 지질이 꽃 색 변이에 영향을 주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어느덧 5월입니다. 꽃피는 춘삼월이 엊그제였던 것 같은데, 숲은 어느새 짙은 초록으로 변해갑니다. 통상 3월부터 5월까지를 봄으로 분류하지만, 지구온난화 등의 여파로 인해 몇 년 전부터 종종 한낮 기온이 30도를 웃돌며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되는 등 봄이란 말이 무색하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이런 흐름을 나 몰라라 하겠다는 배짱인지, 5월 중순의 시기에 ‘봄맞이’란 이름이 들어가는 야생화가 여전히 피고 있다는 말에 의아해하며 만나러 갔습니다.
“그래, 귀하다는 꽃, 나도 좀 자세히 보자.”
“뭐야? 이것 보자고 이 무더위에 서너 시간 달려왔단 말이야?”
꽃 보러 가는 길, 가끔 “바람이나 쐬러 가자. 아주 귀한 꽃 보여주겠다”며 친구들을 설득해 동행합니다. 짙푸른 바다도 보고, 시원한 바람이나 맞자며 즐겁게 떠났습니다. 다만 멀리 동해까지 가는 동안 내심 실제 보면 그리 대단해 보이지 않을 텐데, 공연히 귀한 시간 빼앗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역시나 첫 반응은 신통치 않았습니다.
“정말 귀한 꽃이야. 원래는 북한 땅에 가야만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최근 남한에서도 동해안 서너 곳에서 자생하는 게 확인됐어. 워낙 희귀종이어서 국가에서 보호 대상 식물로 지정, 관리하고 있어.”
갯봄맞이의 희귀성, 중요성 등을 애써 강조하지만, 반응은 여전히 심드렁합니다.
“그런데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고 했듯, 5월 중순이면 봄이라기보다 여름이라고 할 수 있잖아. 실제 폭염주의보까지 발령되는 날씨인데, 식물명에 ‘봄맞이’가 들어 있으니 어째 어색하지 않니? 그게 바로 이 꽃의 유별성(類別性), 즉 주로 북한 지역에 자생하는 북방계 식물의 특성을 보여주는 거야. 옛날 봄이 늦은 함경도 바닷가에서 5~6월에 피는 이 꽃을 보고 갯봄맞이란 이름을 붙인 거라고….”
나름대로 설명을 이어가자 겨우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열심히 보고 사진 많이 찍어라” 하며 응원합니다. 먼 길 오느라, 찾느라 바빴던 마음을 진정하고 찬찬히 꽃을 들여다봅니다. 바다와 분리되어 있다지만 비바람이 강하게 불면 바닷물과 모래가 수시로 넘어올 성싶은 해안 호수, 이른바 석호(潟湖) 가장자리 모래밭에 핀 갯봄맞이. 키가 작은 건 5cm 안팎이고, 제법 큰 것은 20cm를 넘을 정도이지만 무리 지은 모습은 영락없이 ‘잡초’처럼 보입니다. 통통한 줄기에 잎이 좌우로 다닥다닥 달리고, 줄기와 잎 사이 겨드랑이마다 아주 옅은 붉은색이 도는 흰 꽃이 역시 다닥다닥 돋아나 있습니다. 꽃 색이 아예 흰 것도 있다고 합니다. 새끼손톱만 한 꽃은 끝이 다섯 갈래로 갈라지고 그 가운데 수술 다섯 개와 암술 한 개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런데 잎과 꽃 모두 자루 없이 줄기에 바싹 달라붙어 있어 개개의 꽃을 예쁘게 담기가 쉽지 않습니다. 자생지는 극히 소수이지만, 자생지에서 만나본 갯봄맞이의 개체는 수백, 수천을 넘을 만큼 풍성해 멋진 군락 사진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멸종위기 야생식물 1, 2급으로 지정된 77종 가운데 광릉요강꽃과 털복주머니란 등 대부분이 자생지와 개체 수가 극히 적은 데다 빼어난 관상 가치에 따른 남획 등 인위적인 위협 요인이 더해지면서 멸종위기를 맞고 있다면, 갯봄맞이와 같은 일부 북방계 식물은 지구온난화 등 자연 환경적인 요인으로 인해 남한 땅에서 사라질 위기를 맞고 있어, 종 다양성 유지 차원에서 각별한 보전 대책이 필요해보입니다.
Where is it?
갯봄맞이는 황해도와 함경도 등 주로 북한 지역에서 자생하는 북방계 자생식물로 알려져왔다. 그러다가 2000년대 이후 강원도 고성과 경북 포항, 울산 등 동해안 일대 서너 곳에서 자라는 것이 확인되자 환경부가 2012년 7월 멸종위기 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했다. 남한에서 가장 북쪽인 고성에서는 해수와 담수가 섞여 있어 염담호(鹽淡湖)라고도 불리는 송지호의 가장자리 일부 모래밭에서 자생한다(사진). 밑으로 내려와서는 포항의 구룡포 인근 해안, 그리고 최남단인 울산 북구 해안에서 각각 자생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란춘성(花爛春盛)이라고 했던가요. 꽃이 만발(滿發)하고 봄이 무르익는 4월, 따듯한 남쪽 나라 제주도는 더할 나위 없습니다. 발 닿고 닿는 곳마다 연분홍 벚꽃잎이 휘날리고, 노란색 유채꽃이 휘황찬란하게 빛을 발합니다. 아니 ‘춘사월(春四月)’ 제주도에선 벚나무와 유채가 아니라도, 풀이든 나무이든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가 꽃을 피우는 듯 섬 전체가 꽃으로 흐드러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데 그런 제주의 봄에 화룡점정(畵龍點睛)을 하는 야생화가 따로 있습니다. 뭍에서는 만날 수 없는 꽃, 제주의 특산 야생화라 일컬을 수 있는 꽃, 하지만 너무 귀하지는 않아 누구나 보고 즐길 수 있는 꽃, 바로 뚜껑별꽃입니다.
해안이나 높지 않은 오름의 양지바른 풀밭에 자생한다고 하는데, 처음엔 뜬금없이 ‘저지곶자왈’ 주차장 길섶에서 뜻밖의 조우를 했습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순간 강렬한 보라색 꽃 색에 넋을 잃었습니다. 그리고 앙증맞은 생김새에 다시 또 기함했습니다.
개별꽃이니 쇠별꽃, 큰개별꽃 등 다른 ‘별꽃’들과 마찬가지로 뚜껑별꽃도 키가 10~30cm 정도로 작습니다. 하지만 뚜껑별꽃은 꽃 색이나 생김새가 유별난데, 석죽과에 속하는 다른 별꽃들과 달리 앵초과로 족보를 달리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가지런히 돌아 나는 다섯 장의 꽃잎은 지름이 1cm 안팎에 불과할 정도로 아주 작지만, 독특한 보라색 꽃 색만은 단번에 보는 이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꽃잎 중앙의 수술과 암술 둘레에는 흰색과 자주색, 진보라색의 띠가 2, 3중으로 둘러쳐지면서 노란색 꽃밥과 어우러져 멋진 색의 조화를 보여줍니다. 게다가 5개의 수술대엔 붉은색 잔털이 수북하게 나 있어, 보면 볼수록 신비감이 들 정도입니다.
동그란 열매가 영글면 종자를 퍼뜨리기 위해 가운데가 갈라지면서 뚜껑이 떨어져 나가듯 벌어지고 별 모양의 꽃받침이 도드라지게 드러납니다. 꽃 피는 모습이 아니라, 바로 열매 맺은 뒤의 이런 모습에서 뚜껑별꽃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독특한 꽃 색을 따서 보라별꽃으로, 또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만큼이나 총총하게 핀다고 해서 별봄맞이꽃으로도 불립니다. 뚜껑별꽃이 활짝 핀 모습을 보려면 게으름을 피운다 싶을 만큼 시간적 여유를 갖고 다가가야 합니다.
학명 중 속명인 ‘Anagallis’는 ‘해가 뜨면 다시 핀다’는 뜻이라고 하는데, 날이 저물면 꽃잎을 닫고 해가 중천에 올라올 즈음에야 다시 활짝 열리는 뚜껑별꽃의 속성이 그대로 담긴 용어라 생각됩니다.
Where is it?
뚜껑별꽃은 전 세계적으로 24개 종이 온대와 열대에 분포한다. 국내에서는 제주도와 추자도, 그리고 전남의 일부 섬에만 1개 종이 자생한다. 아직은 대륙성 기후에는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방식물, 남부 도서지방이 분포의 북방한계선인 아열대 식물인 셈이다. 제주도에서는 남쪽 바닷가의 현무암 틈새나 올레길 길섶 등지에서 비교적 흔하게 만날 수 있다. 특히 4월 서귀포의 명승지인 외돌개에 가면 현무암 바위틈 곳곳에서 풍성하게 꽃 핀 것을 만날 수 있다. 석양 무렵 외돌개에서 맞는 일몰(사진)도 일품이다.
춘삼월(春三月)이라고는 하나, 산골짝의 계절은 아직 봄이라기보다는 겨울에 가깝습니다. 나뭇가지는 여전히 깡말랐고 산기슭과 계곡엔 갈색의 낙엽이 무성하게 쌓여 있습니다. 낙엽 밑엔 미끌미끌한 얼음이 숨어 있어 함부로 내딛다가는 엉덩방아를 찧기 십상입니다. 저 멀리 남쪽에선 2월 하순부터 보춘화가 피었느니 변산바람꽃이 터졌느니 화신(花信)을 전해오지만, 높은 산 깊은 계곡에선 3월 초순 잘해야 너도바람꽃 한두 송이가 가냘픈 꽃송이를 치켜들 뿐입니다. 그렇듯 메마른 3월의 산중에서도 눈 밝은 동호인은 파릇파릇 돋아나는 묘한 야생화를 찾아냅니다.
“이게 정말 꽃이 맞아요?”
“무슨 꽃이 이렇게 생겼을까!”
“꽃잎은 어디에 있나요?”
처음 보는 이는 익히 알던 꽃과는 전혀 다른 형태에 신기해합니다. 그러곤 이런저런 질문 끝에 ‘앉은부채’란 이름을 그럴싸하다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앉은부처’로 잘못 알아들었음을 알고선 다시 갸우뚱합니다. 한가운데 도깨비방망이처럼 생긴 게 일견 불두(佛頭)를 닮아 ‘앉은부처’라고 불린다고 이해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뭔 사연인지 설명해달라고 채근합니다.
앉은부채는 우선 촛불 모양의 독특한 꽃으로 눈길을 끕니다. 꽃잎인 듯싶은 자갈색의 타원형 이파리는 불염포라 불리는 꽃 덮개입니다. 그 안의 도깨비방망이가 육수(肉穗)꽃차례라고 불리는 꽃 덩어리인데, 거북의 등처럼 갈라진 조각조각이 4장의 꽃잎과 4개의 수술, 1개의 암술을 갖춘 각각의 꽃송이입니다. 부처의 광배(光背)를 닮은 꽃 덮개와, 역시 부처의 머리를 닮은 육수꽃차례로 인해 ‘명상에 잠긴 부처’라는 별칭으로 또는 ‘앉은부처’로 잘못 불리기도 하지만, 원래는 꽃이 진 뒤에 무성하게 나는 잎이 부채처럼 넓다고 해서 앉은부채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앉은부채가 가장 우리를 놀라게 하는 건 강인한 생명력에 있습니다. 이른 봄, 눈 속에서 꽃 덮개를 뾰족뾰족 세운 앉은부채는 마치 백상아리가 등지느러미를 곧추세우고 망망대해를 유영하듯 대견스럽습니다. 꽁꽁 언 땅속에 1m 넘게 뿌리를 내리고, 그 깊은 뿌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얼음 구들을 녹이고 독특한 형태의 꽃을 피우는 앉은부채의 놀라운 생명력은 경이 그 자체입니다. 강원도에선 겨울에서 봄 사이 부채처럼 넓게 이파리를 펼치다 보니 겨울잠에서 갓 깨어난 곰이나 산짐승들이 가장 먼저 먹는 풀, 즉 ‘곰풀’로 불렸다고도 합니다. 또 지방에 따라 삿부채, 우엉취, 취숭(臭崧) 등 여러 이름으로도 불립니다. 유독성 식물로 잎은 풍성하지만 먹을 수 없다고 하여 ‘호랑이 배추’라는 별칭도 얻었습니다.
꽃 덮개가 노란 앉은부채의 경우 정명은 아니지만 ‘노랑앉은부채’로 불리는데, 어쩌다 귀하게 만난 노랑앉은부채를 보고 있노라면 염화시중(拈華示衆)의 미소로 겨울을, 꽃샘추위를 저만치 물리치는 듯한 진한 따스함이 전해져옵니다. 학명 중 속명 심플로카르퍼스(Symplocarpus)는 결합한다(symploce)와 열매(carpos)라는 그리스어 합성어로 씨방이 열매에 붙어 있다는 뜻, 종소명 레니폴리우스(renifolius)는 콩팥 모양의 잎을 가졌다는 의미입니다. 영어로는 스컹크 캐비지(Skunk Cabbage)라고 합니다.
Where is it?
전국에 분포하는데, 수도권 인근에선 천마산이 개체 수도 풍성하고 ‘노랑앉은부채’도 만날 수 있는 자생지로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충북 청원군 낭성면의 한 작은 산 입구에는 앉은부채 자생지라는 안내 표석(사진)이 세워져 있다.
“껍데기는 가라/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
(신동엽의 ‘껍데기는 가라’에서)
겨울나무 사이로 바람이 붑니다. 앙상한 겨울나무 사이로 찬바람이 붑니다. 지난여름과 가을 무성했던 숲에 대한 기억은 날로 희미해져 가는데, 꽃 피는 봄날은 아직 멀리 있습니다. 겨울의 끝자락이라고는 하지만 2월의 창밖은 여전히 황량합니다. 겨울, 날이 차진 뒤에야 비로소 소나무와 잣나무가 푸르다는 걸 알게 된다는,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를 낳은 계절 겨울에 소나무와 잣나무 못지않게 존재감이 드러나는 식물이 있습니다. 바로 겨우살이입니다. ‘껍데기는 가라’는 시인의 외침에 호응하듯 무성하던 ‘나무껍데기’가, 이파리들이 우수수 지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무 꼭대기에 웅지를 튼 겨우살이가 겨우 눈에 들어옵니다. 물론 이때 보이는 것은 꽃이 아니라 늘 푸른 잎과 줄기, 그리고 연노랗거나 붉은 열매입니다. 이 시기 짙푸른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겨우살이 열매를, 흰 눈이 겨우살이 위에 가득 쌓인 멋진 장면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야생화 동호인들은 강추위를 무릅쓰고 겨울 산 오르기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정작 봄이 한창인 4월경 가지 끝에 노랗게 피는 겨우살이의 꽃은 크기가 자잘한 데다, 숙주인 큰 나무의 이파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아 야생화를 사랑하는 이들에게조차 주목받지 못합니다.
다른 나무와 풀이 동면(冬眠)하는 겨울에도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고 해서 겨울+살이, 겨우살이란 이름을 얻었습니다. 다른 나무에 기생해 겨우겨우 살아가는 나무란 뜻이기도 합니다. 스스로 광합성을 하기는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해 다른 나무에 뿌리를 박고 흡기(吸器)라는 기관을 통해 물이나 영양분을 빼앗아 생장하는 반기생식물. 땅까지는 뿌리를 내려보지 못하고 사시사철 공중에 뜬 채 살아가는 가련한 식물입니다. 하지만 한겨울 저 홀로 푸름을 자랑하는 특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동서양을 막론하고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등의 능력을 갖춘 영초(靈草)라 불리며 신비와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겨우살이의 번식은 새를 통해 이뤄집니다. 먹이가 부족한 겨울철 높은 나뭇가지에 가득 달린 겨우살이의 열매는 새들에겐 최상의 먹잇감이 됩니다. 그런데 그 열매엔 끈적끈적한 점액이 가득 들어 있습니다. 새들은 열매를 먹을 때 부리에 달라붙는 점액을 한사코 다른 나무의 껍질에 비벼서 닦습니다. 이때 끈끈한 점액에 묻어 있던 씨앗이 나무껍질에 달라붙어 새로운 싹을 틔우게 되는 것이지요.
◇ Where is it?
국내에 자생하는 겨우살이는 모두 5종.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겨우살이는 한겨울 참나무나 밤나무, 팽나무, 물오리나무 등의 앙상한 나뭇가지 위에 까치집 모양으로 등장한다. 겨우살이의 열매는 연노란색이다. 반면 붉은겨우살이는 이름 그대로 붉은색 열매가 돋보이는데, 눈 덮인 한라산을 비롯해 내장산, 덕유산 등을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다. 상록수인 여느 겨우살이와 달리 꼬리겨우살이는 낙엽 활엽 관목으로 겨울이면 잎은 지고 샛노란 열매만 주렁주렁 달린다. 태백산과 구룡령, 소백산 등지에서만 만날 수 있는 희귀종이다. 가는 줄기가 모여 작은 선인장의 모양을 한 동백겨우살이는 숙주인 동백나무가 자생하는 남쪽 바닷가와 섬, 제주도에서 볼 수 있다. 참나무겨우살이는 참나무보다는 동백나무나 후박나무 등 제주도 서귀포 일대 상록수에 주로 기생한다.
김인철 야생화칼럼니스트
9월이면 겨울이 시작돼 산 정상에 늘 흰 눈이 쌓여 있어 ‘흰머리산’이라는 뜻의 백두산(白頭山)으로 불리는 산. 그곳에도 6월이면 새싹이 움트는 봄이 시작돼 8월까지 여름·가을이 한꺼번에 밀어닥칩니다. 3개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300여 종에 이르는 북방계 야생화들이 앞을 다퉈 피어나면서 수목한계선 위쪽 고산 툰드라 지대는 천상의 화원(花園)으로 변모합니다. 그런데 하늘을 향해 삐죽빼죽 솟아오른 높은 봉우리 사이사이 음지 곳곳에 잔설(殘雪)로 남은 만년설(萬年雪)과는 차원이 다른, 제3의 흰색 벌판이 여기저기 눈에 들어옵니다. 한여름 백두 평원 곳곳이 여전히 흰 눈을 뒤집어쓴 듯이 하얗게 빛이 납니다. 관목과 초본·이끼류·지의류가 잔디밭처럼 드넓은 평원을 이루는 백두산 툰드라 지대를 하얗게 수놓는 꽃, 바로 노랑만병초입니다.
백두 평원서 함께 자라는 장지석남과 월귤, 홍월귤, 들쭉나무, 가솔송 등이 수줍음을 타는 소녀처럼 이파리 뒤로 몸을 숨긴 채 손톱만 한 꽃을 겨우겨우 피워낸다면 노랑만병초는 ‘올해도 어김없이 깨어났노라’고 세상을 향해 외치는 듯 어른 손바닥만 한 꽃잎을 활짝 펼쳐 보입니다. 풀 ‘초(草)’를 이름 뒤에 달았지만, 엄연히 나무인 노랑만병초는 월귤 등 다른 키 작은 나무들과 마찬가지로 백두산 수목한계선 위 고산 툰드라 지대에서 살아가는 전형적인 북방계 관목입니다. 남한에서는 1963년 설악산에서 발견됐다는 보고가 있은 뒤 잊혔다가 40여 년 만인 2007년 설악산 정상에서 다시 발견돼 현재 멸종위기야생식물 2급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체 개체 수가 600여 그루에 불과할 정도로 매우 희귀할 뿐 아니라 털진달래 등 다른 관목의 위세에 눌려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발 2750m인 ‘민족의 영산’ 백두산에서 자생하는 노랑만병초는 6~8월 끝없이 펼쳐지는 고산 평원 여기저기에 축구장 크기만 한 꽃 무더기를 피워낼 정도로 규모가 방대합니다. 꽃 색은 흰색에 가까운 노란색으로, 한낮 쏟아지는 햇살을 받은 꽃 더미는 한겨울의 설원을 보듯 장관입니다. 국가생물종정보시스템(국생종)에 따르면 높이 1m까지 자란다고 돼 있는데, 실제 백두산에서 만난 노랑만병초는 30~50cm 정도로 어른 무릎에도 못 미칠 만큼 키가 작았습니다. 국생종은 또 흰색 꽃이 피는 만병초, 진한 홍색 꽃이 피는 홍만병초가 따로 있으며 둘 다 키가 노랑만병초의 4배인 4m까지 자란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두 평원에서는 노랑만병초와 뒤섞여 있는 백색과 홍색의 만병초 꽃을 여기저기서 함께 만났는데, 그 키는 노랑만병초와 다름없이 30~50cm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처럼 백두산의 추위와 바람 때문에 만병초나 홍만병초의 키가 작아진 것인지, 아니면 같은 노랑만병초의 변색일지 추후 확인하고 연구할 과제라 생각합니다.
어느덧 세모(歲暮)의 달 12월입니다. 2016년 한 해도 이제 역사 속으로 영영 사라져가니 아쉽기는 하지만 해가 기운다고 속상해하지는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스러짐이 마냥 슬픈 것은 아닙니다. 석양이 만드는 저녁노을은 그 얼마나 황홀합니까. 얼마 전 흘려보낸 만추의 가을은 얼마나 화려했습니까. 만산홍엽의 단풍 사이로 난 오솔길이 갈수록 그윽하고 다정다감하게 다가오듯, 나이를 먹을수록 그만큼 삶도 농익고 완숙해지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치는 한겨울이면, 그리고 ‘고요한 밤 거룩한 밤~’ 노랫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유난히 소개하고픈 야생화가 있습니다. 경기·강원·충북·경북 등 여기저기서 가을에 피는 좀바위솔입니다. 바위솔·정선바위솔·연화바위솔·포천바위솔·둥근바위솔·가지바위솔·울릉연화바위솔·난쟁이바위솔 등 국내에 자생하는 8~9종의 바위솔 중 하나로, 바위솔에 비해 전초도 꽃차례도 작아서 ‘좀’이란 접두어가 붙었습니다.
그런 좀바위솔이 유독 세모에 생각나는 까닭은 천지가 울긋불긋 물든 깊은 산중 커다란 바위 겉에 오뚝 꽃대를 세우고 있는 모습에서, 황혼 무렵 세상이 제아무리 요동을 쳐도 아랑곳없이 의연히 자신의 길을 가는 작은 거인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인생 2막인 ‘브라보 마이 라이프’를 그렇게 살아가고 싶은 마음 때문이겠지요. 게다가 만추의 계절 좀바위솔이 자생지인 높은 산이나 깊은 계곡에 무더기로 활짝 피어 있는 광경은 그 자체가 멋진 가을 풍경화가 되기도 합니다.
좀바위솔은 끝이 뾰족한 비늘 모양의 녹색 잎 수십 개가 빙 둘러 난 정중앙에 9~10월쯤 길어야 어른 손가락만 한 이삭꽃차례를 곧추세웁니다. 여러해살이풀이어서 뿌리가 다치지 않으면 해마다 연분홍색의 꽃을, 벼나 보리 등의 곡식 이삭처럼 다닥다닥 피웁니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각종 바위솔 식물들이 암 치료 효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암암리에 뿌리째 남벌되는 수난을 겪고 있는 게 우려스러운 현실이기도 합니다. 실제 깎아지른 절벽과 유유히 흐르는 옥색의 강물, 불이라도 붙을 듯 붉게 물든 단풍 등 3박자와 어우러져 최고의 좀바위솔 자생지로 꼽히던 한탄강 변의 좀바위솔 자생지가 몇 해 전 괴멸되었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자연은 스스로 대단한 치유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겠다는 듯 작년부터 하나둘씩 좀바위솔이 다시 피어나고 있어, 또다시 못된 손만 타지 않으면 수년 내 집채만 한 바위를 가득 덮었던 장관이 되살아나기를 기대하게 합니다.
Where is it?
경기·강원·충북·경북의 몇몇 좀바위솔 촬영지가 야생화 동호인에게 알려지면서 자생지가 그 주변 지역으로 국한된 듯 이야기되지만, 실제로는 훨씬 더 폭이 넓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에서 말했듯 강원도 철원 한탄강 변 자생지(사진)는 지금은 많이 훼손된 상태다. 철원의 상해계곡에서도 수는 많지 않지만 만날 수 있다. 경기도 연천의 지장산과 고대산, 가평의 화야산 등에는 제법 많은 개체가 자생한다. 강원도 인제군 상남면 미산계곡, 충북 단양의 송림사와 경북 봉화의 청량사 등의 주변 바위에서도 좀바위솔이 앙증맞게 핀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