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의 젖줄인 제민천을 따라 걸으면서 도심을 여행했다. 골목골목 걷는 내내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는 문장이 공주를 표현한 듯 느껴졌다. 공주는 풀꽃처럼 소박하고 소탈한 도시였다. 풍경도, 사람도, 음식마저도. 그래서 자세히 보고, 오래 봐야 진가를 알 수 있었다.
걷기 코스
공주시외버스 산성정류소(구터미널)▶ 공산성▶ 산성시장▶ 공주역사영상관(구읍사무소)▶ 풀꽃문학관▶ 충청감영 터(현 공주사 대부고)▶ 카페 ‘반죽동247’과 이미정갤러리▶ 하숙마을▶ 반죽동 당간지주(대통사 터)▶ 공주제일교회 (기독교박물관)▶ 루치아의뜰▶ 산성정류소 또는 공주역
금강 변 공산성과 산성 아래 산성시장
공주 산성정류소에 하차하면 공주의 자랑인 공산성이 코 닿을 거리에 있다.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걸으니 공산성 매표소에 닿는다. 공산성은 공주가 백제의 수도였을 때 금강 변 야산에 지은 산성이다. 산 능선에 조성한 성곽이 물결처럼 울렁울렁 춤춘다. 성곽의 등을 타고 공산성을 한 바퀴 돌 수 있으며, 90분 남짓 걸린다. 성곽길이 이끄는 대로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공산성의 서문인 금서루를 통과해 성곽에 오르자마자 시원한 강바람이 반긴다. 바람을 얼싸안고, 발아래로 흘러내리는 성곽과 반짝이는 금강, 나지막한 공주 시가지를 여유롭게 굽어본다. 오랜만에 탁 트인 풍광을 마주하니 여행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산성을 일주한 뒤, 다시 터미널 앞을 지나 산성시장으로 향한다. 공산성 아래에 있어 산성시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82년 역사를 지닌 공주 대표 시장이다. 그만큼 규모가 크다. 5개 구획마다 갖가지 생필품과 식자재, 식당들이 즐비하다. 특히 요기할 만한 먹을거리가 풍성하다. 맛 좋기로 전국에 소문난 ‘부자떡집’의 쫄깃한 떡, 줄 서서 먹는 ‘대박난찹쌀호떡’의 달달한 호떡, 가끔 생각나는 ‘단골닭강정’의 매콤달콤한 닭강정, ‘청양분식’의 잔치국수, ‘간식집’의 잡채만두 등이 있다. 대부분 소박한 음식이다. 맛도 그렇다. 공주 사람들은 어떤 음식을 좋아할까 궁금하다면 하나씩 맛보는 것도 좋겠다.
풀꽃 시인 나태주와 풀꽃문학관
시장통을 벗어나면 이내 공주역사영상관(등록문화재 제443호)에 닿는다. 1923년에 지어진 충남금융조합연합회관 건물로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섞어 쌓아 올린 근대건축물이다. 백제시대부터 현재까지의 공주 역사를 담은 디지털 영상기록물을 전시해두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5분 정도 걸으면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이국적인 목조 건물 한 채가 보인다. 1930년대에 지은 적산가옥을 개조해 나태주 시인의 ‘풀꽃문학관’으로 조성한 곳이다. 야생화가 오종종히 피어 있는 뜰과 오래된 목조 건물의 조화가 멋스럽다.
나태주 시인은 금요일에만 문학관을 방문한다. 문학관 앞에 자신이 타고 다니는 자전거를 세워놓아 문학관에 있음을 알린다. 문학관 내부는 다실과 강연 공간으로 구성돼 있으며, 모두 다다미방 형태다. 벽면 곳곳에 나태주 시인이 쓰고 그린 시화가 걸려 있다. 마침 나태주 시인이 다실에서 방문객들이 가져온 시집과 엽서에 정성껏 시를 써주고, 덕담을 건네는 중이다. 다실에서 웃음소리가 끓이지 않는다.
풀꽃문학관을 내려와 공주대학교 사범대학 부속 고등학교 정문이자 옛 충청감영의 정문이었던 포정사 문루 앞을 지난다. 으리으리한 문루를 통과해 등교하는 학생들의 기분은 어떨지 궁금하다. 제민천 방향으로 내려가다가 지인이 추천한 카페 ‘반죽동247’에 들른다. 평일인데도 손님이 꽤 많다. 소문대로 커피 맛이 좋다. 시원한 카페라테 한 잔을 홀짝 비우고, 카페 2층에 있는 이미정갤러리 구경에 나선다. 공주 출신 서양화가 이미정 대표가 지역 작가의 작품을 전시하고, 종종 기획전을 여는 공간이다. 방문할 때마다 수준 높은 작품들을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유학생들의 제2의 고향, 제민천 변 하숙마을
제민천 대통교 앞에 이르자 ‘하숙마을’이 보인다. ‘하숙마을’은 옛 약국과 옆 건물 4채를 개조해 한옥 숙박시설 및 마을 안내센터 역할을 하는 곳이다. 공주와 하숙마을은 어떤 관련이 있을까. 공주는 예로부터 교육의 도시로 명성을 떨쳤다. 명문으로 알려진 공주대학교 사범대학과 공주사대 부속 고등학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970~80년대에는 전국에서 학생들이 공주로 유학을 왔다고 한다. 자연스레 학교 주변에 하숙집이 많이 생겨났다. 명문대 진학률이 높은 하숙집 주인은 자부심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선배가 후배에게 하숙집을 물려주거나 같은 하숙집에 산 인연으로 부부가 되어 부부 교사가 늘어나는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고. 단발머리 여고생과 까까머리 남고생들이 수없이 거쳐갔을 비좁은 하숙집 골목길을 거닐며 당시 풍경을 상상해본다.
하숙마을 옆, 사대부고 학생들이 참새방앗간처럼 들르는 중앙분식을 지나 반죽동 당간지주를 만나러 간다. 동네 한복판 작은 쉼터에 527년(백제 성왕 5년) 백제 최초로 지어진 대통사의 당간지주(보물 제150호)가 홀로 서 있다. 당간지주 옆에는 1903년에 설립된 공주제일교회가 자리하고 있다. 충청도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이었으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곳으로 유명하다. 유관순 열사와 조병욱 박사가 이 교회에 다녔다. 지금은 기독교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후미진 뒷골목을 밝히는 등불들
다시 제민천으로 돌아와 대통교를 건넌다. ‘백성을 구제하다’라는 뜻을 지닌 제민천은 공주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담고 유유히 흐른다. 주민들이 대통교 그늘에 앉아 다리를 담그고 더위를 식힐 만큼 수질이 좋다. 제민천 변 건물 담벼락에는 옛 하숙마을 풍경 사진과 나태주 시인의 시, 하숙집 학생들의 모습을 담은 벽화가 전시돼 있다. 담벼락을 구경하며 한옥 찻집 ‘루치아의뜰’로 향한다. ‘맛깔’식당과 ‘이안게스트하우스’ 사이의 터널 같은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야 발견할 수 있다. 파란 대문 너머로 야생화가 만발한 뜰과 한옥 한 채가 반긴다. ‘루치아의뜰’은 차 문화 전문 사범인 아내 루치아와 쇼콜라티에인 남편 요한이 운영하는 찻집이다. 보이차, 홍차, 커피, 디저트를 판다. 폐허나 다름없던 집과 골목을 부부가 살뜰히 가꾼 덕에 공주 명소로 거듭났다. 도시 재생 성공 사례로도 손꼽힌다. 공간 못지않게 루치아가 차려내는 찻상 또한 작품처럼 아름답다. 찻상을 바라보고, 차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진다.
공주에서 루치아와 요한 부부처럼 이 도시를 사랑하는 이를 많이 만났다. 공주대학교 대학원에 재학 중인 김조연 씨도 그중 한 명이다. 서울에 사는 그는 공주 사랑이 대단하다. “공주는 관광객들을 끌거나 관광 트렌드에 발맞추기 위해 치장하지 않아서 좋아요. 다소 투박하고 촌스럽지만, 옛날 시골 동네 모습이 곳곳에 남아 있어 맘이 편안해져요. 이게 공주 원도심의 매력이죠.” 그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오래 보고, 자세히 보면 그처럼 공주와 사랑에 빠지고 말 것 같다.
주변 명소 & 맛집
단골들이 추천하는 ‘중앙분식’
제민천 대통교 앞에 있는 중앙분식은 즉석떡볶이, 쫄면, 비빔만두 등을 판다. 떡볶이 1인분을 주문해도 커다란 냄비에 2인분은 됨직한 양을 내놓는다. 쌀떡, 쫄면과 당면사리, 양배추, 어묵을 듬뿍 넣어준다. 국물이 자작자작해질 때까지 졸여 먹어야 제맛이 난다. 맛의 비결은 안주인장이 만든 특제 소스에 있다고. 학생 때부터 즐겨 찾던 단골, 소문 듣고 찾아온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올 8월 중순 공주우체국 옆으로 이전한다.
공주시 제민천1길 67, 041-856-1497, 10:30~19:00, 월요일 휴무
전국에서 소문난 ‘부자떡집’
1982년 산성시장 안에 창업한 떡집이다. 좋은 재료를 사용하고, 당일 생산·당일 판매를 원칙으로 삼는다. 작업장이 공개돼 있어 제작 공정에 대한 신뢰감을 준다. 영양떡인 부자떡이 대표 메뉴이며, 헤이즐넛 호두설기는 이곳에서만 파는 제품이다. 공주의 특산품인 밤을 넣어 만든 알밤찹쌀떡 세트가 선물용으로 인기가 많다. 쫀득한 찹쌀떡 안에 밤이 통째로 들어 있다. 부자떡집의 떡은 달지 않아 부담 없다.
공주시 용당길 11, 041-854-5454, 08:00~19:00, 연중무휴
추억을 부르는 잡채만두집 ‘간식집’
산성시장 내 분식집이다. 잡채만두, 김밥, 떡볶이를 판다. 대표 메뉴는 잡채만두. 통통한 만두 안에 당면이 가득 들어 있다. 대구 납작만두의 통통만두 버전 같다. 만두피와 당면만으로 이루어진 만두가 특별히 맛있는 줄은 모르겠으나, 공주 사람들이 한 봉지씩 사간다. 간장 대신 초장을 찍어 먹는 것이 독특하다. 만두 맛보다 만두를 구울 때 나는 자글자글 소리가 정겹다.
공주시 산성시장1길 46, 041-852-4812, 화요일 휴무(1, 6일 장날 제외)
담백한 육수가 일품 ‘고가네칼국수’
공주는 예로부터 면 요리가 발달해 칼국수집이 많다. 고가네칼국수는 칼국수를 상에서 끓여 먹는 방식이다. 한우 사골, 양파, 무, 파, 닭발 등을 넣어 담백하게 끓인 육수에 각종 채소와 우리 밀 면을 넣어 익힌다. 직원이 우리 밀 면은 더디 익는다고 알려준다. 고가네칼국수는 저염식 식단을 추구해 칼국수 맛이 심심한 편이다. 배추겉절이와 섞박지로 간을 맞춰 먹는다. 1인분도 주문할 수 있다.
공주시 제민천3길 56, 041-856-6476, 10:00~21:30, 일요일 휴무
걷기 Tip
❶ 4월 5일부터 11월 30일까지 매주 금·토요일에 산성시장에서 공주 밤마실 야시장이 열린다. 오후 6시부터 밤 10시까지 운영한다.
❷ 5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주말에 공산성에서 수문장 교대식을 진행한다.
‘남원’ 하면 춘향, ‘춘향’ 하면 광한루원만 생각났다. 남원에는 진정 광한루원 말곤 갈 데가 없을까 궁리하던 때에 마침 김병종미술관이 개관했다. 미술관이 좋아 남원에 들락거렸더니 식상했던 광한루원이 예뻐 보이기 시작했다. 오래된 동네 빵집과 걷기 좋은 덕음산 솔바람길도 발견했다. 이 산책로가 미술관과 연결되는 것을 알고 얼마나 기뻤던지. 남원을 여행하며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는 나태주 시인의 ‘풀꽃’ 시가 종종 생각났다.
걷기 코스
남원역(남원시외버스터미널)▶차량 이동▶광한루원 북문▶남문▶요천 섶다리▶덕음산 솔바람길 입구▶전망대 레스토랑▶남원국립국악원▶그네매점(또는 약수터매점) 뒤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남원항공우주천문대▶춘향테마파크(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
상상 속 달나라를 구현한 광한루원
광한루원에는 남문(정문)과 서문, 북문이 있다. 오늘 걷는 코스는 북문으로 입장해 남문으로 나가는 것이 동선상 편하다. 북문 앞에는 고품격 한옥 호텔인 남원예촌과 규모 있는 한정식 전문점들이 자리했다. 이 일대는 남원 제일의 관광단지라서 거리가 깔끔하고 작은 쉼터도 조성돼 있다.
주중 낮 동안 일반인 관람이 허용되는 남원예촌을 잠시 둘러본 뒤 광한루원 북문으로 입장한다. 광한루원의 중심 건물인 광한루(보물 제281호)와 춘향사당이 코앞이다. 조선 중기 사람들은 달나라에 옥황상제와 선녀가 산다고 생각했다. 이 상상을 지상에 구현한 것이 광한루원이다. 광한루는 옥황상제가 머무는 달나라 궁전이며, 광한루 앞 연못은 은하수를 상징한다.
연못에 섬처럼 떠 있는 세 개의 섬은 지상낙원, 즉 영주산(한라산), 봉래산(금강산), 방장산(지리산)을 뜻한다. 중국 ‘사기’에 등장하는 전설 속 세 산(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을 본떠 일컬은 것이다. 나무다리로 연결된 세 섬을 차례로 들러본다. 팽나무가 우거진 영주산 영주각에 올랐다가 봉래산의 대숲을 지나고, 방장산 숲에 숨은 작은 방장정에선 잠시 쉬어간다.
방장정 옆으로 연못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돌다리 오작교가 보인다. 견우와 직녀가 은하수를 건널 때 걸었던 오작교를 본떠 만들었다. 다리 길이가 57m에 달하는 국내 최장 연지교다. 조선 후기 소설 ‘춘향전’에서 성춘향과 이몽룡이 처음 만났던 장소로 등장하기도 한다. 오작교를 건너며 연못을 굽어보니 잉어 떼와 천연기념물인 원앙 수십 마리가 떼 지어 노닌다. 광한루원은 원앙과 잉어에게도 지상낙원인 듯하다. 연못가 버드나무와 짝꿍처럼 잘 어울리는 수중 누각 완월정에 올랐다가 남문으로 나선다.
솔숲이 우거진 덕음산 솔바람길
광한루원 남문으로 나오면 바로 요천변이다. 요천 제방에 올라 벚나무 가로수길을 걷는다. 가로수가 우거져 그늘이 짙다. 덕음산 솔바람길로 가려면 승월교나 섶다리를 이용해 요천을 건너야 한다. 흔한 시멘트다리 대신 섶다리를 선택해 건넌다. 이 섶다리는 옛날부터 요천에 섶다리 두 개가 있었다는 기록을 바탕으로 근래에 만든 쌍섶다리다. 섶다리를 건너면 춘향테마파크와 식당, 놀이공원, 국립국악원 등이 있는 춘향촌 입구가 보인다. 춘향촌 입구 왼쪽에 ‘덕음산 솔바람길’ 입구가 있다. 나무계단을 조금 오르면 솔숲길이 이어진다. 잔잔한 오르막길을 10분 정도 걸었을까. 숲길이 전망대레스토랑 앞 전망대로 인도한다. 이곳에 서서 남원 시내를 굽어본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분지 같고, 도심 가운데로 요천이 흐른다. 남원의 젖줄 요천은 섬진강으로 흘러 들어가 남해까지 간다.
탁 트인 남원 풍광을 감상하고, 포장도로를 따라 국립민속국악원 방면으로 내려간다. 국립민속국악원은 판소리의 성지인 남원의 국악 수준을 잘 보여주는 공연장이다. 주말마다 국내 최고 수준의 전통 공연을 선보인다. 주말에 이 길을 걷는다면, 공연시간을 미리 알아두는 게 좋다. 국립민속국악원 뒤쪽으로 이동해 덕음산 솔바람길의 또 다른 입구를 찾는다. 나무계단을 오르자 김병종미술관까지 이어지는 데크 산책로로 연결된다. 길 곳곳에 전시돼 있는 시, 그림, 캘리그래피 작품을 감상하고, 솔숲 향기를 맡으며 느리게 걷는다. 데크에서 내려오면 바로 김병종미술관이 보인다. 국립민속국악원에서 미술관까지는 15분 정도 걸린다.
남원의 뜨는 명소 김병종미술관과 화첩기행 북카페
2018년 3월 개관한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은 남원 출신 한국화의 거장 김병종이 자신의 작품을 남원시에 기증하면서 건립이 기획됐다. 덕음산 기슭에 위치해 있어 실내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눈길 닿는 곳마다 푸른 숲이다. 김병종 화가의 작품은 1층 상설전시실에 전시돼 있다. 김병종 화가의 초기작이자 그의 이름을 미술계에 알린 ‘바보예수’ 시리즈를 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은 이해하기 쉽고, 동심이 느껴져 절로 미소 지어진다. 김병종 화가는 여행 에세이 ‘화첩기행’을 저술해 문학가로서도 뛰어난 면모를 보여줬다.
상설전시장 옆에는 화첩기행 북카페 ‘미안’도 자리해 있다. 남원에서 나고 자란 청년 카페지기가 ‘미술관 안에 있는 카페’라는 뜻을 담아 ‘미안’이라 이름 지었다며 환하게 웃는다. 카페 한쪽 벽면에는 김병종 화가의 작품과 그가 기증한 미술, 인문학, 문학 관련 도서 등 약 2000여 권이 진열돼 있다. 나머지 벽면은 통창을 설치해 물이 가득한 정원이 손에 닿을 듯 가깝게 보인다. 오랜만에 맘에 쏙 드는 미술관과 카페를 만나 걷는 즐거움이 커진다. 볕 잘 드는 창가에 앉아 맛있는 커피와 빵을 먹으며 지친 다리를 쉬어간다.
춘향테마파크 걸을까, 오감만족숲을 걸을까
미술관에서 걷기를 마치고 광한루 쪽으로 내려가도 되고, 더 걷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항공우주천문대를 거쳐 춘향테마파크 또는 덕음산 오감만족숲으로 내려가도 좋다. 어느 쪽으로 가더라도 광한루원이 멀지 않다.
항공우주천문대는 미술관 뒤쪽으로 난 길 끝에 있다. 미술관에서 약 300m 거리다. 오르막을 살짝 오르면 돔 형태의 지붕을 얹은 천문대를 만난다. 여러 대의 천체망원경을 통해 낮에는 태양의 흑점을, 밤에는 달과 별자리를 관측할 수 있다. 기상이 좋지 않으면 관측을 할 수 없으니 날씨를 봐가며 입장해야 한다.
천문대 뒤쪽, 솔바람길 이정표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춘향테마파크 뒷문이 나온다. 이 문은 춘향테마파크의 가장 위쪽 구역에 있으니 아래로 내려가면서 관람하면 된다. 춘향테마파크는 춘향을 주제로 한 문화예술공원이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춘향뎐’의 촬영세트장이 남아 있다. 뒷문 근처에는 월매집, 춘향과 이몽룡이 첫날밤을 보냈던 월매집 부용정, 춘향이 변 사또에게 고초를 당했던 관아 등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춘향테마파크에 입장하지 않고, 뒷문 앞에서 이정표를 따라 오감만족숲/광한루 방면 숲길로 5분 정도 내려가면 오감만족숲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오감만족숲은 2017년에 덕음산 기슭에 조성한 공원으로 걷기 좋도록 지그재그형 산책로를 만들어놓았다. 산책로를 따라 내려가면 승월교로 바로 연결된다.
주변 명소 & 맛집
전통시장의 정취가 물씬 남원공설시장
광한루 서문 앞에 있는 상설시장이다. 오일장날에는 아침부터 붐빈다. 남원에는 산과 강이 있어 농수산물이 풍부하다. 특산물을 구경하며 다니는 재미가 쏠쏠하다. 특히 남원산 미꾸라지가 흔하다. 시골 시장에서도 보기 드문, 오래된 뻥튀기 가게도 있다. 온갖 곡식은 물론 무까지 튀겨준다. 남원 사람들이 이 시장에서 즐겨 사 먹는 또 다른 인기 메뉴는 닭발 튀김. 뼈를 발라낸 닭발에 튀김옷을 입혀 바삭하게 튀겨낸다. 맥주 안주로 제격이다. 남원시 의총로 51, 4와 9로 끝나는 날이 오일장.
맛의 고장 남원 맛집
남원에서는 남원산 미꾸라지와 된장을 넣고 푹 끓인 추어탕이 유명하다. 광한루원 서문 쪽 요천변에 추어탕 거리가 형성돼 있다. ‘새집’, ‘현식당’, ‘부산집’이 입소문 났다. 광한루원 북문 앞에 있는 남원 한정식 전문점 ‘종가’도 추천할 만하다. 보리굴비 정식을 주문하면 홍어찜, 육회, 전복구이 등 맛깔난 전라도 음식을 다양하게 맛볼 수 있다. 돌솥비빔밥 전문점인 ‘반야식당’도 광한루 인근에서 오래 장사한 소문난 집이다. 최근 뜨고 있는 ‘집밥, 담다’는 ‘따뜻한 가정식 한 끼’를 표방하는 젊은 감각의 음식점이다. 정갈한 식단으로 호평받고 있다. 예약은 필수.
남원 사람은 다 안다는 명문제과
남원에서 오래 장사한 동네 빵집이다. 가게는 작고 허름하다. 다른 빵집에서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빵을 개발해 인기를 얻었다. 남원에서는 이미 유명한 곳인데 ‘백종원의 3대천왕’에 출연한 뒤로 손님이 더 많아졌다고 한다. 평일에도 줄을 서며, 오후 늦게 가면 인기 빵은 동나 살 수 없다. 3대 인기 빵은 생크림소보로, 꿀아몬드, 수제햄빵이다. 광한루원 북문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에 있다. 남원시 용성로 56.
걷기 Tip
❶ 5월 8일부터 12일까지 광한루원과 요천 일대에서 제89회 춘향제가 열린다. 광한루원은 야간 조명을 밝히는 밤에 산책해도 좋다.
❷ 4월 24일부터 5월 19일까지 바래봉 철쭉제도 열린다.
딸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날은 일본에서 살고 있는 딸이 우리 집에서 열흘간 머물다 떠난 날이었다. 김포공항에서 딸을 배웅하고 미용실에 들렀는데 일본에 잘 도착했다고 전화를 한 것이다. 딸과 통화 중에“네가 내 딸이라 고마워”라고 하자 이 말을 들은 미용실의 한 손님이 “참 듣기 좋은 말이네요”라고 했다고 원장님이 웃으며 전해줬다.
서둔야학 시절 나는 이별을 자주 했다. 야학생들을 가르쳤던 선생님들이 1년 정도 봉사활동을 하다가 그만두는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선생님들이 떠날 때마다 너무 슬퍼서 새로 오시는 선생님들에게는 절대로 정을 주지 않기로 다짐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정을 주지 않은 줄 알았는데 선생님들이 떠날 때마다 나는 또 울고 있었다. 마음 아프지 않겠다고 아무리 다짐을 해도 안 되는 것 중 하나가 이별인 듯싶다. 딸과도 매년 두 번씩 만나 며칠간 같이 있는데 헤어질 때마다 울게 된다. 정 많고 눈물 많은 내가 어쩌다 하나밖에 없는 딸과 떨어져 살게 되었는지…. 이것도 운명이겠지!
딸은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나를 위한 이벤트를 기획해서 온다. 2017년에는 딸의 배려로 예술의전당에서 열렸던 '보그전'을 봤는데 너무 아름답고 멋졌다. 패션을 좋아하는 내게 최고의 선물이었다. 보그전은 패션디자이너와 패션모델, 그리고 사진작가와 현장 감독의 환상적인 콜라보레이션이 빚어낸 결과물이다. 색채의 향연과 빛의 향연 속에서 모델들은 마음껏 아우라를 내뿜었다. 그야말로 극치의 아름다움이었다.
나태주 시인이 말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라고.
"야~~ 멋있다!" "정말 환상적이다!"
딸애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볼 때마다 흥분해서 감탄사를 연발하는 나를 지켜보며 뿌듯해했다.
지금은 스마트시대다. 내 가슴속에 각인된 멋진 그 시간은 휴대폰에 고스란히 남아 있기에 이따금 꺼내 보며 딸과 즐거웠던 추억을 떠올려본다.
2015년에는 뮤지컬 '엘리자벳'을 같이 관람하는 호사를 누렸다. 오스트리아의 황제 요제프의 왕비인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침어낙안(沈魚落雁)이라 칭할 만큼 빼어난 미인이며 몸매도 아름다운 그녀는 화려한 궁중 의상이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린다. 그녀의 모습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완전 내 취향이라서 한눈에 빠져버렸다. 요제프 왕세자는 그녀의 언니와 혼인하기 위해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가 아름다운 그녀를 보고 첫눈에 반해 그녀와 결혼한다.
추운 겨울이 다가올수록 밖에서 노닐기보다는 따뜻한 집 안에서 즐길 만한 것을 찾게 된다. 뜨개질로 목도리나 장갑을 만들거나, 책을 읽으며 여가를 보내기도 한다. 최근에는 프랑스 자수, 보태니컬 자수, 꽃 자수 등 다양한 형태의 자수가 주부들의 취미로 사랑받고 있다. 아기자기한 야생화 자수와 더불어 풀꽃 시인 나태주의 아름다운 시를 함께 감상할 수 있는 ‘야생화 자수, 시가 되다’를 책방에서 만나봤다.
참고 도서 ‘야생화 자수, 시가 되다’ 글·자수 김주영, 시 나태주 자료 제공 웅진리빙하우스
한 땀: 야생화 자수, 시와 만나다
책의 첫 장인 ‘한 땀’에서는 ‘개망초’, ‘수수꽃다리’ 등 나태주 시인의 대표 시 30여 편과 김주영 작가의 야생화 자수 작품을 나란히 보여준다. 수록된 시 중
9편은 시인이 책을 위해 새롭게 창작한 작품이다. 꽃처럼 아름다운 시어는 알록달록한 색실로 한 땀 한 땀 수놓은 야생화와 한 폭의 그림처럼 조화를 이룬다. 중간마다 작품의 모티브가 된 실제 꽃 사진도 엿볼 수 있다. 촘촘한 실의 짜임과 섬유의 질감을 살린 이미지가 자수의 매력을 더욱 잘 드러낸다.
두 땀: 야생화 자수, 일상이 되다
한복이나 보자기 외에도 다양한 소품에 야생화 자수를 응용해볼 수 있다. 책의 두 번째 장에서는 일상에서 적용해볼 만한 자수 아이디어를 제공한다. 손주를 위한 배냇저고리를 짓거나 셔츠를 리폼할 때 올망졸망한 자수를 놓아 포인트를 줄 수도 있고, 리넨으로 집 안에서 쓸 룸슈즈나 앞치마 등을 만들며 좋아하는 패턴을 넣어도 좋다. 평범한 소품에 야생화 자수를 더한 꽃송이 티매트나 매화다포, 장미파우치 등은 선물용으로 안성맞춤이다.
세 땀: 처음, 자수를 시작하다
야생화 자수는 손재주가 좋거나 세심한 성향인 이들에게 적합하리라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작품의 크기를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고 수정 작업도 가능해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즐길 만한 취미다. 마지막 장에서는 자수에 도전하는 초심자들을 위한 준비 과정을 정리했다. 재료와 원단을 고르는 방법부터 자수가 완성되기까지 전 과정을 다룬다. 마무리 단계에서는 직접 마음에 드는 야생화 도안을 그리고 수를 놓는 노하우를 전수한다.
책에서 발견하는 또 다른 즐거움
# plus 1
나태주 시인의 시와 함께 나온 자수 작품들의 도안과 그에 대한 설명이 부록으로 담겼다. 먼저 색감을 알 수 있도록 컬러 일러스트로 크게 작품을 보여준다. 그 아래 실선만 따로 그려 러닝 스티치, 롱앤드쇼트 스티치, 체인 스티치 등 스티치 기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달았다. 완성 작품과 비교해볼 수 있도록 실제 자수 이미지를 작게 첨부하는 등 세심한 배려도 돋보인다.
# plus 2
자연에서 만난 야생화를 보고 자수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하겠지만, 책에서 보여주듯 시 한 편이 영감을 주기도 한다. 풀꽃시인 나태주의 신작 ‘나태주 육필시화집’에는 그가 직접 쓰고 그린 시와 그림이 어우러져 있다. 자연을 소재로 한 그의 작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손끝에서 자수가 피어날 준비를 하는 듯 하다. 꼭 자수 아이템을 찾지 않더라도 찬찬히 시집을 읽으며 잠시 쉬어가는 것도 좋겠다.
plus 3
책에 꼼꼼하게 설명이 잘 나왔지만 손기술이 필요한 일이다 보니 간혹 이해가 덜 되는 부분이 생긴다. 그럴 땐 동영상의 힘을 빌려보자. 구독자 4만2000여 명의 선택을 받은 유튜브 채널 ‘뭐든지 바느질 프랑스 자수’에는 200여 개가 넘는 다양한 자수 관련 동영상이 있다. 자수의 기초 매뉴얼부터 다양한 소품 활용법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직장을 퇴직한 시니어 중 하는 일 없이 그저 하루하루를 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남달리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도 의외로 많다. 바로 액티브 시니어다.
바쁘든 바쁘지 않든 그동안 살아온 인생 경험과 전문성을 살려 왕성한 에너지로 책을 쓰고 글을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목적을 위해 내가 10년 전에 시작한 것이 ‘책과 글쓰기 학교’다. 2년 전까지는 ‘에세이 클럽’이라는 이름으로 전문 수필가를 모시고 수필 쓰기 중심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책쓰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현재 밴드 회원이 불과 1년 만에 30명에서 3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글을 잘 쓰려면 전문성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뭐든 쓰는 습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이를 위해 오프라인에서 매월 두 번째 화요일 모임을 갖고 있다. 현재 네이버 밴드에 가입한 회원 중 70여 명은 연회비(30만 원)를 내고 있다.
월례회 모임은 1, 2부로 진행된다. 1부에서는 책을 많이 낸 전문 작가 선생님이 한 시간 특강을 하고, 2부에서는 회원들이 써온 글을 작가 선생님이 하나하나 교정해준다. 자신이 써온 글을 직접 교정받는 과정을 통해 제대로 글쓰는 방법도 배우고 자신감도 키운다. 실력 향상에 크게 도움이 되는 시간이다.
책·글쓰기 학교는 단지 글쓰기 공부에 그치지 않고 책쓰기에 대한 특강도 하고 문학기행도 한다. 책쓰기는 책을 한 번도 내보지 않은 왕초보 회원들에게 책쓰기에 대한 기본은 물론, 기획서 작성 등 전체 프로세스를 알려주고 출판사까지 연계해주어 결과물이 조기에 나오도록 도움을 주고 있다. 지금은 한 달에 2~3명이 책을 출간하고 있다. 금년 말에는 회원들이 쓴 글들을 모아 10주년 기념 문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문학기행은 1년에 한두 번 하고 있는데 작년 하반기에는 풀꽃으로 유명한 나태주 문학관을 다녀왔고, 금년 상반기에는 중국 길림성에 있는 용정의 윤동주 문학관을 다녀왔다.
이제는‘2060’시대라 한다. 20대부터 80세까지 60년 동안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로 60세도 20년은 현역으로 움직여야 한다. 책쓰기와 글쓰기는 자신이 포기하지 않는 한 해고가 없다. 누구든 나이에 관계없이 용기를 내어 평생학교에 입학하라. 책쓰기, 글쓰기 학교라면 더욱 좋다.
김성예 여사, 참 오랜만이에요. 이런 편지는 언제 썼던가? 결혼을 하고 나서 이듬해던가, 그 이듬해던가 내가 학교 선생으로서 강습이라는 걸 받기 위해 잠시 고향 집에 당신을 남겨놓고 대전이나 공주에 머물러 있을 때 몇 차례 짧은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심정인 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망설여봅니다. 생각해보면 엎어지고 잦혀지면서 가늘고도 길게 이어온 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이 1973년 가을이니까 45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입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고 별다른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혼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고 그 이후의 생활도 줄곧 힘이 들었지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문제와 가난과 질병 때문에 그랬지요.
우리에겐 아이가 쉽게 생겨주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임신이 잘못되어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당신은 평생을 병약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요. 그 뒤 겨우 아이 둘을 얻었으나 아이 키우는 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에 또 당신은 힘겨워했지요.
그다음은 가난한 집안 살림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 우리 집안은 형제가 여섯이나 되고 논 여섯 마지기뿐인 빈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은근히 우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부부싸움을 했다 하면 시댁 문제와 돈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아예 봉급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둘은 돈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요. 이미 쓸 돈이 바닥난 형편에 누군가 남들한테 돈을 빌려서 써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 수준은 매우 열악했고 오늘날 있는 상여금 제도나 성과급 같은 것도 없어 더욱 힘겨운 형편이었지요. 더구나 자주 앓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우리로서는 의료보험 같은 혜택도 없어 매양 휘청거려야만 했지요.
그동안 살면서 당신은 여섯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나 또한 네 차례나 대수술을 받은 사람이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열 번 깨진 항아리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지요. 참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 고비들을 넘겼는지 아득한 일들이에요.
그다음으로 우리가 함께 살면서 힘들었던 이유는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본디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게 바로 나란 사람이었지요. 게다가 자기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니 함께 살아주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과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며 살아줘서 참으로 감사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와 어른이 되어서 만난 당신일 거예요. 그 두 사람이 나를 오늘의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할 거예요.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이었지만 나의 삶의 목표는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교직은 직업이고 시인은 본업이라는 괴변을 하면서 살았지요. 이렇게 까다롭고 뒤틀리는 인간과 살았으니 아마도 당신의 괴로움은 배가되었을 줄 압니다.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바로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인 데다가 대학도 나오지 않아 서울에 연줄도 없고요, 그렇다고 잡지나 문학 단체와의 유대도 없을 뿐더러 이념적인 배경도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야말로 그것은 자갈밭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꿈꾸는 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한 사람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100권도 넘는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주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에 풀꽃문학관을 세우고 또 풀꽃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져주면서 함께 살아준 결과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인생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정말로 당신과 같은 아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들 말하지만 정말 나는 팔불출이 되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비록 당신은 내가 하는 문학과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이해하고 참고 견디려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1박 2일로 문학강연을 떠날 때면 동행해주는 당신의 배려가 더없이 고맙습니다. 일주일마다 하는 공주문화원에서의 시창작 강의에서도 빠지지 않고 내 강의를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끔 나한테 부족한 점, 잘못한 점을 지적해주는 당신이지요.
이것만 봐도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당신 덕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정말로 당신의 존재를 빼내고 나의 인생은 이제 불가능한 인생입니다. 오로지 나의 인생은 당신에게 업힌 인생이고 당신에게 신세지는 인생이지요. 그야말로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며 동행인이고 마지막 보루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아내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나에게 행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당신에게는 악운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안스럽고 송구한 일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당신에게 의존도가 높아갑니다. 이제는 한순간도 당신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집 안에서 글을 쓰다가도 가끔은 당신을 찾곤 하지요.
여보, 지금 어디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나 여기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집 안 어디에선가 대답을 해주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계속 쓰지요. 참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걱정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요. 나의 소망은 이러한 삶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도 아니고 다만 날마다 날마다 이어지는 평안이고 무사안일이에요.
이 무사안일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목표이자 보람입니다.
여보, 앞으로도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셔요. 나도 가능한 대로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오래 고맙고 미안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당신에게 드리는 인사. 여보, 잘 잤어요? 그 인사가 내일도 또 내일도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태주(羅泰柱) 시인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했다.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으며, 2010년부터 공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 ‘풀꽃’이 있으며 10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
우리에게 근대의 흔적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우리 역사에서 근대는 일반적으로 개항의 기점이 된 강화도조약(1876년)에서 광복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1945년까지로 본다. 조용했던 나라 조선에 서양문물이 파도처럼 밀려와 변화와 갈등이 들끓었던 시기. 그 시기의 유산들은 한국전쟁과 경제개발을 거치며 사라졌다. 조용히 걸으며 당시의 건물들을 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장소에 공주시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백제문화의 중심지로만 알려진 공주의 숨겨진 근대 시대 모습은 어떨지 찾아가보았다.
사실 공주에게 근대 시기는 즐거운 추억이 많지 않다.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철도 경부선이 공주를 비켜가면서 악몽이 시작됐다. 조선시대의 공주는 충주, 청주, 홍주와 함께 충청도의 4대 목(牧)이었고, 임진왜란 후에는 충청감영이 공주로 이전해왔다. 충청도의 제1도시였던 셈이다. 그러다 대전역이 생기면서 산업체와 인구는 대전으로 빠져나갔고, 전라선까지 대전을 거치면서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됐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근대화, 산업화와는 조금 비껴나게 되었지만 대신 공주를 위안한 것이 있었다. 종교였다.
근대화의 중심 ‘공주제일교회’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서 공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바로 공주제일교회의 존재 때문이다. 공주제일교회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02년 김동현 전도사가 초가 1동을 구입한 것이 시초가 된다.
이후 교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예배당이 절실해졌는데, 1909년 우산을 쓴 익명의 후원자가 나타난다. 그의 헌금으로 교회는 새로운 예배당을 지을 수 있었고, 교인들은 후원인을 기리는 마음에서 이곳을 협산자(挾傘者, 우산을 쓴 사람) 예배당이라고 이름 붙였다.
이 협산자 예배당도 좁아지자, 교인들은 1931년 지금의 ‘문화재 예배당’을 건립한다. 장소는 협산자 예배당과 멀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다 문화재 예배당은 한국전쟁에 휘말린다. 폭격으로 일부 벽과 굴뚝만 남긴 채 파괴되었지만 교인들은 실의에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중대한 결심을 한다. 새 예배당 건립을 위해 이웃해 있던 협산자 예배당을 자재로 활용하기로 한 것이다. 재건 과정에는 교인들만 참여했다. 1956년의 일이다. 1979년에는 스테인드글라스를 교회 전면에 배치하는 등의 증축이 이뤄졌다.
역사 속에서 공주제일교회는 종교기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공주 지역의 학교, 유치원, 병원 등 주요 시설의 건립에 교회와 선교사들이 관여했다. 또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일 공주에서도 만세시위가 있었는데, 이 독립운동의 한가운데에 공주제일교회의 현석칠 목사와 감리회 공동체가 있었다.
현재 교회 건물은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다. 공식 명칭도 ‘공주기독교박물관’이 됐다. 2층으로 구성된 박물관에는 공주 지역 기독교 역사와 성장 과정, 문화재 예배당 건축사, 독립을 위해 힘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각종 역사적 사료가 전시되어 있다.
역사를 체험하는 ‘공주역사영상관’
공주제일교회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는 공주역사영상관이 있다. 공주의 역사적 배경이나 당시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다면 이곳이 제격이다. 이 건물은 1920년 충남금융조합연합회 회관으로 건립됐다. 그래서인지 건물 규모에 비해 입구가 웅장하고, 1층의 천장도 높다. 1930년부터 1985년까지는 공주읍사무소로 쓰이다 1986년 공주시로 승격되면서 건물도 ‘시청’으로 승진했다. 1989년 새 건물로 시청이 옮겨가면서 실직했다가, 2010년 공주시의 구도심 활용 계획에 의해 지금의 모습으로 변신했다. 1층에는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만한 각종 영상 자료와 멀티미디어 장비가 갖춰져 있고, 2층은 역사 속 모습을 감상할 수 있는 사진자료실로 꾸며져 있다.
공주역사영상관에서 충청남도 역사박물관 방향으로 다시 20분 정도 걸어가면 천주교 중동성당이 나온다. 서양의 고딕양식을 따르면서도 화려하지 않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성당이다. 1898년 프랑스 출신 진 베드로 신부가 이곳에 교당을 세우고 교지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게 됐다. 본당과 사제관이 나란히 있는데, 사제관은 현재 교육관으로 사용된다. 1997년 설립 100주년을 기념해 성당 건물을 대대적으로 보수했고, 1998년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지정됐다.
숨겨진 근대 건축물 ‘풀꽃문학관’
다시 남쪽으로 2km 정도 내려와 영명고등학교 뒤편 언덕 마을로 올라서면 선교사 가옥이 보인다. 3층짜리 건물이다. 미국 감리교회 소속 선교사들이 머물던 곳으로, 역사적으로는 공주 지역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영명학교의 활동이 시작된 장소로도 의미가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관순 열사도 영명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다 이화학당으로 편입했다.
이곳은 관리가 잘되는 문화재는 아니지만, 산책 삼아 가볼 만하다. 공주고등학교 정문에서부터 이어진 언덕길 풍경은 고즈넉하고 평화롭다. 선교사 가옥 옆으로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선교사 묘역을 만날 수 있다. 대규모로 조성되어 있지는 않지만, 일찍 세상을 떠난 선교사 자녀들의 작은 무덤들이 당시 그들의 삶이 어땠는지 대변해주는 것 같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주의 근대 건축물 중 하나는 바로 2014년 설립된 풀꽃문학관이다. 시집 로 잘 알려진 나태주(羅泰柱) 시인의 작업공간이기도 하다. 이곳이 과거 헌병대장의 관사 건물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1932년에 지어진 건물을 공주시가 사들여 문학관 측에 관리를 위탁했다. 지금은 공주 지역 문인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꿈꾸는 시인' 나태주는 백편의 시를 쓰는 것보다 한편의 시가 백사람에게 알려져야 좋다고 하였다. 이분은 특이하게도 젊은 날 좋아하는 여성에게 차인 얘기를 이력에 써 넣는다고 하였다. 완전 자존감 쩌는 남자였다. 자못 흥미로웠다. 그 아픔으로 그는 엎어져서 울었다고 하였다.
'문학은 고통을 먹고 자라는 나무이다'
그 실연의 고통이 그를 시인으로 탄생시켰다고 하였다. 이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한 여자는 나를 시인으로 만들어줬고 한 여자는 나를 남편으로 만들어줬다." 고.
수필가 피천득은 '봄'이라는 수필에서 첫사랑은 만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서로가 세월이 할킨 자국에 실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도 그녀를 다시 만나보지는 않을 거라 했다.
풀꽃이 탄생된 배경은 그림을 그리려니 풀꽃을 자세히 볼 수밖에 없었단다. 자세히 보니 예쁘더란다.
그는 말했다.
"시의 특성은 개별성 보편성이 있어야 한다. 시는 모든 인류가 이해하고 유용한(유명한이 아닌) 시여야 한다."고.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그 사람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면 행복한 사람이 된다"고도 했다.
"사람들이 왜 시를 외면하는데요? 어려우니까 그렇지요. 시를 어렵게 쓸 필요가 있나요?"
그렇다.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위로해 주는 것이 시의 역할이다.
광화문의 교보빌딩 꼭대기에는 커다란 글판이 있다. 거기에 적혀 있는 69개의 글귀 중 1위가 나태주시인의 풀꽃이다.
풀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양지 바른 곳에 호젓하게 자리한 풀꽃문학관에는 그의 시가 적힌 병풍이 있었다. 그는 그림도 잘 그리셨다. 시에 들어간 삽화들도 직접 그린 것이라고 하였다.
어느 디자이너가 말했다. "새로운 디자인은 없다"고. 기존의 것을 재해석하여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글도 마찬가지라는 느낌을 받았다.
"사랑은 서로가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20세때 본 소설, 막스 뮐러의 에 나오는 말인데 나시인도 그런 요지의 문장을 구사하였다.
적산가옥이 그의 문학관이 됐는데 아주 소박하고 인간미가 넘치는 그와 잘 어울렸다. 그의 문학 강의가 얼마나 맛있던지 홀딱 빠져서 들었다. 시인의 어머니는 시인이란다.
"김용택의 어머니는 입으로 시를 쓰고 김용택 시인은 글로 씨를 쓴다"고 하였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본 후 뵙고 싶었던 신영복 교수님을 끝내 못뵈었다. 나목'을 읽은 후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박완서 작가님도 세상을 떠나셨다. 나태주 시인을 직접 뵙고 강의를 들으니 너무 좋았다. 다른 분들도 이분이 살아 계실 때 만나 뵙고 그의 달관한 인생관과 가슴이 따스해지는 문학 강의를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퇴임하셔서 풍금도 잘 치셨다. 그 풍금소리에 맞춰서 '오빠 생각'과 '어머니의 마음'을 제창했다. 어머니의 마음을 부르며 나는 또 질곡의 삶을 살아낸 우리 엄마를 생각하며 엉엉 울 수밖에 없었다.
'만하루'가 있는 산에는 노오란 은행잎 비가 내리고 있었다. '휘잉'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 커다란 몸짓으로 내리고 있었다. 나뭇잎들은 미련 없이 나무를 떠나가고 있었다.
서울시민청 태평홀에서 힘찬 박수가 터져나왔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창단 3개월 만에 무대에 오른 ‘그랑기타5중주단’의 감미로운 선율을 즐기고 있었다. 전문가의 뛰어난 솜씨에 견줄 수는 없지만 아낌없는 박수와 앵콜을 외치는 소리는 여느 무대 부럽지 않았다. 화사하고 낭랑한 목소리의 시낭송이 이어지고 회원 중 하나가 임상아의 뮤지컬을 경쾌하게 부르자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마지막엔 검은 정장에 빨간 드레스를 입은 한 쌍이 등장해 능숙한 댄스 솜씨로 장내를 뜨겁게 달구었다. 각자 동아리 활동을 통해 기르고 닦은 장기를 유감없이 발휘해 모인 사람들의 발수갈채를 받았다. 100석의 좌석을 꽉 채우고도 자리가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한 이날 행사는 완벽한 축제의 장이었다
이 자리는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창립 2주년 행사로 마련됐다. 시니어들이 블로그를 통해 재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이 날 이들이 보여준 끼와 재능은 ‘즐겁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었다. 2015년 봄부터 매주 3시간 걷기를 시작하여 1년 6개월 동안 시니어들이 걸은 길을 정리하여 만든 ‘서울걷기여행 3시간의 유혹 60코스’ 동영상을 발표 상영하는 시간이 마련돼 있었다.
처음엔 서울둘레길 걷기부터 시작했다. 서울시로부터 ‘서울둘레길 완주인증서’를 받아들고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우리가 살고 있는 멋지고 아름다운 서울길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서울둘레길 22개 코스, 한양도성길 4개 코스를 포함하여 도심 옛길 11개 코스, 대공원길 7개 코스, 한강 물길 6개 코스, 지하철 코스 10개 코스까지 총 60개 코스를 개척했다. 3시간 씩만 잡아도 180시간이 소요되는 엄청난 일이었는데 1년 6개월 동안 36.6도의 혹서기에도 영하 16도의 혹한에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개망초꽃에 취한 한강물길이 너무나 아름다워 가족과 함께 4번이나 걸은 회원도 있었다. 지하철1호선 역사문화코스는 종로3가에서 서울역까지 종묘, 탑골공원, 보신각,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성공회대성당, 서울시 신구청사, 덕수궁, 약현성당 등 역사문화 현장을 둘러볼 게 무척 많았다. 지하철로만 다니던 지하철 코스를 걸은 덕분에 남의 동네 공원, 골목 뒷길도 돌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이 걷기에 부담없는 평지나 둘레길을 3시간씩 걸으니 회원들의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1년 6개월 동안 연인원 1,000명이 걸었다. 코스마다 다 중요하고 아름다워서 빼 버릴 곳이 하나도 없었다.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김봉중 회장(66세)은 나태주 시인의 싯구를 인용하며 “자세히 알면 사랑하게 된다는 시인의 말대로 서울의 곳곳을 내 발로 다니며 내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이제 서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며 서울길 걷기 예찬을 이어갔다. 이 기록은 한국시니어블로거협회 카페(http://cafe.naver.com/sbckorea)에 각 코스별로 사진, 글, 동영상이 수록되어 있다. 다른 시니어단체는 물론 서울길에 대해 더 자세히 알기 원하는 시민들에게 도움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또한 우리나라에 오는 외국인 여행자들에게 서울의 아름다움과 역사 문화를 소개하기 위해 영문 홈페이지(http://blog.naver.com/soon80808)도 따로 만들었다. 60개 코스 중 35개 코스의 번역을 완료했고 나머지도 곧 완성될 예정이다. 김 회장은 “서울여행 3시간길 60코스가 관광한국, 관광서울에도 충실한 길잡이가 되길 기대한다”고 소망을 드러냈다.
시가 시대를 장식한다는 것이 이런 것일까?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라는 글귀로 시작되는 시 을 한 번이라도 보지 않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문학의 죽음이 얘기되고 시가 소수에게만 향유되는 취미가 된 현재를 비웃듯 은 단 세 문장으로 많은 이들의 마음을 지금도 저릿하게 만들며 끊임없이 회자되고 있다. 을 쓴 시인이자 현재 공주문화원 원장을 맡고 있는 나태주(羅泰柱·71) 시인은 요즘 시의 인기와 더불어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일흔이라는 나이를 넘겼음에도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하게 움직이는 그를 만나 시, 삶, 그리고 죽음에 관해 물어봤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너도 그렇다’
사람들은 시 의 이 마지막 연에서 굉장한 위로를 받는다.
“지쳐 있고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이니까요. 그것이 제가 생각해왔던 시의 의도나 작업과 이 세상의 의도나 필요와 맞아 떨어진 거죠. 내가 시를 엄청 잘 써서가 아니라 내 작업과 세상 사람들의 요구가 맞아 떨어진 것입니다.”
단 세 문장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시 의 나태주 시인은 요즘 강연과 초청의 연속으로 부쩍 바빠졌다. 하지만 그런 현상에 대해 나 시인은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잠시 나한테 몰렸다고 봐야죠. 귀찮다고 소홀히 대하면 교만해졌다고 할 테니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웃음)”
시는 사랑처럼 유용해야 한다
시는 자신을 살리는 밥이고 물이고 공기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시가 다른 사람에게는 울리고 응원하고 살리는 정신적인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게 안 될 때는 시가 필요 없습니다. 저는 그러한 내용의 러브레터를 세상에 수없이 보냈어요. 그런데 그중의 몇 개가 세상과 맞아 떨어져서 세상이 수용을 한 거죠. 덕분에 바빠졌고 세상 사람들이 요구하는 사람이 됐어요. 웬만하면 그 요구들을 다 들어주고 싶어요. 그것이 시인이 가져야 할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생각해요.”
글을 쓴다는 건 세상에 대한 봉사라고 말하는 나 시인은 봉사의 기준을 자기가 태어난 세상보다 조금 더 낫게 만드는 것에 두고 있었다.
“많이가 아니에요. 조금. 우리나라 사람들은 많이에 집착해요. 누군가 삶에 대해서 말하길 ‘나는 모래밭에 와서 모래알 두세 개 만지고 간다’고 했어요. 그런 간편함이 있어야지 세상을 개혁하고 혁명한다는 얼뜬 인간들 때문에 세상이 어지러운 거예요.”
그가 좋아한다는 말은 온고지신(溫故知新). 그는 우리가 맨날 어떻게 바뀔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그래서 가지고 있는 것으로 조금 더 나아지는 삶이었으면 좋겠다는 게 그의 소망이었다. 그처럼 간단하고 소소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라는 시인의 말은 그의 시 세계와도 연결되어 있었다. 거창하게 쓰지 않고 간결하고 쉽게 와닿게 쓰라는 것이 그의 창작의 근원이다.
“심플(Simple), 숏트(Short), 이지(Easy), 베이직(Basic)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해요. 늘 우리는 아침으로 돌아가잖아요. 아침에 피는 꽃처럼 아름답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아야 해요.”
삶이란 계속 가야하는 길
나 시인은 삶에 행복은 없다고 단언했다. 그리고 삶은 계속되는 연장선일 뿐이며 그 과정에서 시야가 넓어지는 일이라고 정의했다.
“삶은 가지 않은 길이 아니라 계속 가는 길입니다. 저는 강연에서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요. 언제부터 여름이고 언제부터 가을인가. 가을은 낮에 오나 밤에 오나. 뻐꾸기는 밤에 울까 안 울까. 이런 것들에 대해 사람들이 너무 모르고 있어요. 무심한 거지.”
나 시인은 시인의 감성이 우리가 무심하게 지나가는 것을 세심하게 바라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영혼의 양식이고 영혼의 양식은 세미(細微)한 신의 소리에서 옵니다. 미세한 간극에서 오는 것입니다. 시도 세미한 틈을 타고 옵니다. 시장통이나 터미널에서도 시인은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와 세미한 틈을 볼 수 있는 눈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시는 의외로 쉽고 가깝고 작은 것입니다.”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다
나 시인은 글을 쓰는 시간을 따로 설정하지 않는다. 시라는 장르의 특이성 때문이다.
“산문은 시간을 정해야 하고 시는 시간을 정하면 안 돼요. 시는 언제라도 나오면 써야지 나올 때 안 써주면 가버려요. 휘발성이 강해서 보존이 잘 안 되거든요, 시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지 않고 시 쪽에 있어요. 언제 올지 기약이 없어요. 말 하나하나가 그때의 교감과 흥취에 따라 달라져요. 산문은 작정하고 쓸 수가 있어서 설계가 가능하지만 시는 계속 쓰면 본래 흥취에서 벗어나죠. 그래서 저는 퇴고를 잘 안 해요.”
시는 사람을 울리고 위로해주고 살려준다. 그는 이 세 가지 단계를 해줄 때 시를 안 읽을 사람은 없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우리나라 시인은 그런 시를 쓰고 있나요? 혹시 본인들만 잘나서 쓰는 게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 자식이 사무관이고 딸은 돈을 얼마를 벌고…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이 가라고 하죠. 그러나 ‘나는 얼마나 힘들게 여기까지 올라왔고 지금 작은 데서 만족하고 이것을 좋다고 생각한다.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라고 해야 사람들이 다가옵니다. 지금은 나하고 같이 울어주며 동행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지 가르치려는 사람이 필요한 때가 아니에요. 시는 투 티치(to teach)도 아니고 투 액션(to action)도 아니고 투 무브(to move)예요.”
그는 쉬운 걸 어렵게 말하는 건 아주 나쁜 짓이라고 비판했다. 예술적인 것은 어려운 걸 쉽게 말하는 것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예술의 대표적 접근은 초월이에요. 영혼과 초월로서 설명 없이 하는 것이죠. 성경을 보면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물어요. 그러자 베드로가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걸 주님도 아시나이다’라고 말하죠. 이게 영혼의 대화예요. 시의 바탕이 이거예요. 영혼끼리는 설명이나 분석이 필요 없어요.”
가장 중요한 일은 무겁고 느린 일
나 시인은 일에 있어 엄격한 자기관리를 하고 있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을 네 가지로 나눠서 다뤘다.
“일은 두 가지로 나뉘는데 일의 완급이 있고 경중이 있어요. 일의 1순위는 중하고 급한 겁니다. 예를 들어 집에서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면 그것이야말로 1순위죠. 2순위는 경하고 급한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걸 늘 빨리 해요. 2순위를 제일 먼저 하는 이유는 3순위를 잘하기 위해서예요. 제가 제일 열심히 하는 일이 3순위인 완하고 중한 것입니다. 이게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해요. 사실 사람들이 제일 하지 말아야 할 것은 4순위인 완하고 경한 거예요. 그런데 많은 이들이 거기에 시간을 쏟습니다. 그래서 저는 3순위를 늘 챙기라고 말하고 싶어요. 그렇게 하면 내 앞에 쌓이는 게 있어요.”
나 시인의 3순위는 당연한 것처럼 들리지만 ‘시 쓰는 일’이다. 그러나 동시에 가진 소원은 책과 글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쓴 책이 시집만 37권이고 총 93권입니다. 책과 글에서 해방은 안 될 거예요. 그런데 끝내 해방되고 싶은 심정으로 쓸 거예요. 열심히 써서 더 이상의 책이 없다, 더 이상의 글이 없다고 할 때가 제가 해방될 때예요. 내 안에 있는 걸 모두 끄집어냈을 뿐더러 더 이상 내가 쓴 글로는 돈을 벌 수 없다, 그렇게 됐을 때가 해방일 거예요.”
무엇보다도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내
나 시인의 나이도 일흔을 넘겼다. 아무래도 나이를 의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전에 부모님이 밥맛이 없다고 말할 때 이해 못했는데 요즘 내가 밥맛이 없어요. 모든 사람은 두 가지로 죽어요. 하나는 밥을 못 먹어서 굶어 죽고 둘째는 숨을 못 쉬어서 죽고. 마더 테레사는 숨을 못 쉬어서, 미당 서정주는 영양실조로 죽었죠. 나이 먹는다는 징후는 별게 아니에요. 숨쉬기 어렵고 밥 먹기 어렵다는 게 그것입니다.”
그는 세상에 사람으로 다시 오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이 들어서도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
“내가 누군가의 아들로, 친구로, 제자로, 아버지로, 선생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어요. 다시 한 번 시련을 당하는 건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요. 하나님이 안 시켜주셨으면 좋겠어. 그러기 위해서 날마다 열심히 살고 싶어요.”
집착하고 있지만 해방되고도 싶은 마음. 책과 글에 대한 나 시인의 이중적인 태도처럼, 삶과 죽음 또한 그렇게 이중적이다. 그 말에는 그렇게 치열하게 살고 그렇게 의미를 둔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아우라가 있었다. 그래서 그에게 이것만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는지 궁금해서 물어봤다.
“가족의 소중함, 이건 아주 흔한 거예요. 하지만 놓치면 안 돼요. 특히 부부는 더욱 그래요. 부부는 마지막 보루고 자식보다 중요한 거예요. 왜냐하면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혼하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한쪽이 죽으면 그게 바로 이혼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