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예 여사, 참 오랜만이에요. 이런 편지는 언제 썼던가? 결혼을 하고 나서 이듬해던가, 그 이듬해던가 내가 학교 선생으로서 강습이라는 걸 받기 위해 잠시 고향 집에 당신을 남겨놓고 대전이나 공주에 머물러 있을 때 몇 차례 짧은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막막한 심정인 채로 컴퓨터 앞에 앉아 망설여봅니다. 생각해보면 엎어지고 잦혀지면서 가늘고도 길게 이어온 날들이었습니다. 우리가 결혼을 한 것이 1973년 가을이니까 45년, 반세기 가까운 세월입니다.
우리는 중매로 만났고 별다른 사랑에 대한 확신도 없이 결혼생활을 시작했지요. 그러나 우리의 신혼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못했고 그 이후의 생활도 줄곧 힘이 들었지요. 무엇보다도 아이들 문제와 가난과 질병 때문에 그랬지요.
우리에겐 아이가 쉽게 생겨주지 않았습니다. 첫 번째 임신이 잘못되어 두 차례나 큰 수술을 받고 나서 당신은 평생을 병약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요. 그 뒤 겨우 아이 둘을 얻었으나 아이 키우는 일, 아이들과 함께 사는 일에 또 당신은 힘겨워했지요.
그다음은 가난한 집안 살림입니다. 당신도 알다시피 원래 우리 집안은 형제가 여섯이나 되고 논 여섯 마지기뿐인 빈농이었지요. 그러다 보니 부모님은 은근히 우리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요구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래서 우리가 서로 부부싸움을 했다 하면 시댁 문제와 돈 문제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을 것입니다. 아예 봉급날이 가까워지면 우리 둘은 돈 문제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곤 했지요. 이미 쓸 돈이 바닥난 형편에 누군가 남들한테 돈을 빌려서 써야 했기 때문이지요.
그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봉급 수준은 매우 열악했고 오늘날 있는 상여금 제도나 성과급 같은 것도 없어 더욱 힘겨운 형편이었지요. 더구나 자주 앓고 병원 신세를 져야 하는 우리로서는 의료보험 같은 혜택도 없어 매양 휘청거려야만 했지요.
그동안 살면서 당신은 여섯 차례 대수술을 받았고 나 또한 네 차례나 대수술을 받은 사람이 되었지요. 그래서 우리는 열 번 깨진 항아리라고 말하면서 살고 있지요. 참 그것만 생각해도 우리가 어떻게 그 고비들을 넘겼는지 아득한 일들이에요.
그다음으로 우리가 함께 살면서 힘들었던 이유는 모두가 나한테 있는 것 같습니다. 본디 고집이 세고 변덕이 심하고 까칠한 성격을 가진 게 바로 나란 사람이었지요. 게다가 자기 좋은 일만 하는 사람이니 함께 살아주기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미안해요. 고마워요. 나 같은 사람과 그렇게 오랜 세월 견디며 살아줘서 참으로 감사해요.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많이 빚을 진 사람이 있다면 어린 시절에 나를 키워주신 외할머니와 어른이 되어서 만난 당신일 거예요. 그 두 사람이 나를 오늘의 사람으로 만들어줬다 할 거예요.
직업이 초등학교 선생이었지만 나의 삶의 목표는 좋은 선생님이 되는 것보다 좋은 시인이 되는 것이었지요. 그래서 나는 교직은 직업이고 시인은 본업이라는 괴변을 하면서 살았지요. 이렇게 까다롭고 뒤틀리는 인간과 살았으니 아마도 당신의 괴로움은 배가되었을 줄 압니다. 무엇보다도 시인으로 바로 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시골에서 사는 가난한 초등학교 선생인 데다가 대학도 나오지 않아 서울에 연줄도 없고요, 그렇다고 잡지나 문학 단체와의 유대도 없을 뿐더러 이념적인 배경도 없었기 때문이었지요. 그야말로 그것은 자갈밭에 뿌린 씨가 싹이 터서 무성하게 자라는 것을 꿈꾸는 일과 같았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도움이 있었기에 나는 아직도 한 사람 시를 쓰는 사람으로 살고 있고 100권도 넘는 책을 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주 사람도 아니면서 공주에 풀꽃문학관을 세우고 또 풀꽃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모두가 당신 덕입니다. 당신이 그동안 참아주고 기다려주고 져주면서 함께 살아준 결과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이 없는 나의 하루하루, 인생을 상상할 수가 없습니다. 나보다 더 나에 대해서 잘 알고 나보다 더 나를 걱정해주고 생각해주는 사람이 당신입니다.
정말로 당신과 같은 아내는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아내 자랑하는 사람은 팔불출이라고들 말하지만 정말 나는 팔불출이 되어도 좋은 사람입니다. 비록 당신은 내가 하는 문학과 시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지만 끝까지 이해하고 참고 견디려는 사람입니다.
무엇보다도 내가 1박 2일로 문학강연을 떠날 때면 동행해주는 당신의 배려가 더없이 고맙습니다. 일주일마다 하는 공주문화원에서의 시창작 강의에서도 빠지지 않고 내 강의를 들어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러고는 가끔 나한테 부족한 점, 잘못한 점을 지적해주는 당신이지요.
이것만 봐도 오늘날 내가 있게 된 것은 오직 당신 덕분이라는 것을 증명하고도 남는 일입니다. 정말로 당신의 존재를 빼내고 나의 인생은 이제 불가능한 인생입니다. 오로지 나의 인생은 당신에게 업힌 인생이고 당신에게 신세지는 인생이지요. 그야말로 당신은 나의 보호자이며 후견인이며 동행인이고 마지막 보루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런 아내를 어디 가서 찾을 수 있겠어요. 당신은 나에게 행운의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행운이 당신에게는 악운이라는 것이 참으로 미안스럽고 송구한 일이지요. 나이 들어가면서 점점 당신에게 의존도가 높아갑니다. 이제는 한순간도 당신이 없는 나의 삶을 생각할 수가 없어요. 집 안에서 글을 쓰다가도 가끔은 당신을 찾곤 하지요.
여보, 지금 어디 있어요? 그러면 당신은 나 여기 있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집 안 어디에선가 대답을 해주지요. 그러면 나는 다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글을 계속 쓰지요. 참 이런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걱정입니다. 당신에게 가는 의존도가 점점 높아진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요. 나의 소망은 이러한 삶이 조금 더 오래 지속되기를 바라는 것뿐이에요.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돈도 아니고 집도 아니고 옷도 아니고 맛있는 음식도 아니고 다만 날마다 날마다 이어지는 평안이고 무사안일이에요.
이 무사안일이 우리의 행복이고 삶의 목표이자 보람입니다.
여보, 앞으로도 오래 그 자리에 그대로 있어주셔요. 나도 가능한 대로 이 자리에 이대로 있으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미안했습니다. 앞으로도 나는 오래 고맙고 미안할 것입니다. 아침마다 일어나 당신에게 드리는 인사. 여보, 잘 잤어요? 그 인사가 내일도 또 내일도 이어지기를 소망합니다.
나태주(羅泰柱) 시인
시 ‘대숲 아래서’로 등단했다. 2007년 공주 장기초등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 퇴임했으며, 2010년부터 공주문화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적인 시로 ‘풀꽃’이 있으며 100여 권의 책을 출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