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때만 되면 새벽같이 일어나 엄마와 함께 김밥을 말았다.
김밥 가게가 생겼을 때 ‘과연 이게 팔려?’라고 생각했다. 요즘은 소풍날 아침이면 너도나도 김밥집으로 향한다. 흔하디흔한, 빠르고 간편한 먹거리 김밥. 일상 속에서 쉽게 집어 들던 김밥에 형형색색 특별함을 더해 세계 속에 화려한 모습으로 선보인 이가 있다. 바로 ‘김밥 셰프’로 불리는 김락훈(金樂勳·48) 셰프다. 김밥을 지구촌에 전하다 보니 요즘은 모든 재료의 중심이 되는 우리 농민과 함께 나아가는 일에도 깊은 관심을 갖게 됐다. 김밥 세계화를 넘어 근원적인 문제에 접근하며 소통의 물꼬를 트고 있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한국을 대표하는 요리를 꿈꾸는 김밥
김락훈 셰프를 만난 곳은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미국에서 세미나를 마치고 난 뒤 중국 상하이를 거쳐 전날 밤 한국에 도착했다고 했다. 현재 그는 청와대사랑채 한식홍보관 대표로서 한국 문화와 요리를 알리는 일을 담당하고 있다.
“오래전에 이미 약속된 시간이었어요. 대림중학교 다문화 학생들과 함께 불고기를 만들고 그것을 넣어 김밥을 만들었습니다. 원래는 외국 관광객 체험 프로그램인데 오늘은 특별한 날이에요. 한국 교육제도 아래에서 공부하는 아이들을 위해 예외 규정을 준 거죠.”
생소한 한국음식을 체험하는 아이들과 어울리며 흥미롭게 시간을 이끌어가는 김락훈 셰프. 1시간여 진행된 요리교실은 자신들이 만든 김밥을 맛있게 먹는 것으로 끝이 났다.
김밥 세프라는 말이 일단은 생소하다. 전자공학과 출신으로 유럽 배낭여행을 갔다가 초밥의 매력에 푹 빠져 결국에는 다다른 곳이 김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김밥 셰프를 자처했을까?
김밥에서 가능성을 보다
“저는 혼자서도 잘 놀아요. 내 만족을 위해 살아왔고 사람들의 평가를 크게 받아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내 잔재주를 적용시키기에는 너무나 좋은 콘텐츠가 김밥이더라고요. 누구 하나 접근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예쁘게만 잘 만들어서 사람들한테 보이면 되는 거고 완성도는 시간이 가면서 축적되는 거고요. 완벽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이 내가 하는 작업에 대해 물어보면 받아칠 수 있는 수준은 되려고 노력했습니다. 일식이면 일식, 멕시칸이면 멕시칸대로 김밥 한 개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은 생긴 거예요. 멕시칸 푸드로 김밥을 만든다고 하면 사람들이 아는 범위와 한계 내에서 그들의 관심을 긁어줄 수 있을 만한, 그 정도 지식만 쌓으면 되는 거잖아요.”
김밥 셰프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수준을 위해 공부하다 보니 국내외에서 딴 자격증만 해도 20여 개나 된다. 네덜란드 룩셈부르크세계요리월드컵에서 개인전, 단체전 동메달을 목에 걸기도 했다.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본 수준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토록 끊임없이 매달리는 것일까.
“저는 세계 1호 김밥 셰프예요. 저도 저지만 김밥을 의인화해서 셰프란 말을 붙인 거라고 보면 이해가 쉬울까요? 저는 레시피를 만들고 요리하는 세프와는 조금 거리가 있습니다. 시스템을 만들거나 조직하는 사람이라고 저를 설명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령 시니어의 신규 직업층을 만들고 싶어요. 한식의 새로운 분야로 발돋움할 수 있는 하나의 성장 자료가 될 수 있도록 말입니다.”
김밥, 세계 속에서 ‘바람’나다
나라 밖에서 한국 김밥을 널리 알리고, 안으로는 농민들과 어떻게 하면 신나고 재미있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는 김락훈 셰프. 우연한 기회에 세계 무대에까지 김밤 셰프로서 얼굴을 알리게 됐다.
“스스로 더 성장이 필요할 때라고 생각했는데 한국 문화를 알려야 하는 중요한 국제 행사에 저를 불러주시더라고요. 물론 김밥 셰프는 저 하나였고 김밥이라면 잘할 자신이 있었죠. 다만 그때의 저는 아직 그런 중요한 자리에 서기에는 검증이 되지 않은 패였습니다. ‘내가 잘못하면 큰일 나겠구나. 정말 잘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한 공식 행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스페인국제관광박람회(FITUR)였다. 규모 면에서 세계 최고를 자랑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다양한 국내외 행사에 참여했지만 뭔지 모를 책임감이 밀려왔다.
“그때 결정했죠. 외국 행사에 집중하자. 처음 나간 박람회였는데 규모가 대단했다는 것을 3년 동안 국제박람회를 다니면서 알았죠. 처음에는 비교 대상이 없어서 몰랐고요. 우리나라 김으로 제대로 된 김밥을 만들어 선보였습니다. 그리고 행사에 참여할 때마다 저도 점점 성장했습니다.”
김락훈 셰프가 만드는 김밥은 일반 김밥이 아니다. 다양한 무늬가 돌돌 말린 김과 밥 사이에 표현되며 배색 또한 예술이다. 일명 ‘파티 김밥’. 곰돌이 모양, 꽃 모양 등이 동그란 김밥 안에 담겨 있다. 길게 김을 이어 붙여 행사장에 모인 사람들과 김밥을 말기도 했다. 함께 화합해 만드는 의미와 재미도 있고 잘라 먹어보니 맛도 있는 김밥에 세계 각지에서 모인 관람객들이 흥분했다.
“사람들이 어마어마하게 모였습니다. 그 후에 독일 베를린 국제관광박람회(IBT), 한불수교 130주년, 영국 런던 국제관광박람회(WTM) 등 대한민국 정부를 대표하는 자리에 참석해 ‘김밥 쇼’를 했습니다. 다행히도 가는 곳마다 성황이었어요. 실패한 적이 없습니다.”
작년 한 해는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유치를 위한 한국 문화 홍보대사 자격으로 전 세계를 누볐다. 안 가본 나라가 없을 정도였다. 셰프로서는 유일하게 김락훈 셰프가 평창동계올림픽 성화 봉송에 참여했다.
“솔직히 성화 봉송은 하고 싶었어요. 인생에서 의미 있는 한 페이지잖아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 최초에 도전하려고 합니다. 미국 선생님들에게도 김밥과 관련한 강의를 해주고 왔습니다. 미국에는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으로 비빔밥집이 아주 많아요. 그런데 미국 선생님들에게 비빔밥이 아닌 김밥으로 한국 음식 관련 강의를 해온 지가 벌써 4년이나 됩니다. 미국 교육국에 정식으로 등록한 한국 요리 체험 교육도 바로 김밥입니다. 그 전에도 누군가 한국 음식을 가르쳤겠지만 미국 공식 기록에는 음식 체험으로 배운 한국의 첫 요리가 ‘김밥’이 됐다는 의미입니다.”
흠 잡히지 않고 경계를 넘나들다
놀라운 점은 우리나라 한식 분야에도 명망 있고 이름 있는 요리사가 있을 텐데 김락훈 셰프가 그들을 대신해 국가를 대표하고 신나는 한판을 벌였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제자 혹은 정통성을 따져 묻기 좋아하는 한국 사회. 궁중 요리도 전통 한식도 아닌 김밥으로 세계 속에 한국 음식을 알리고 다닌 셈이다. 시기나 질투를 받지는 않았을까?
“저는 계파 같은 거 없잖아요. ‘넌 누구니? 쟤는 뭐야?’ 한마디로 이런 거였죠. 김밥 셰프라고는 저밖에 없고 이래라저래라 하기도 뭣하고 말입니다. 그렇게 살펴만 봤는데 제가 자리를 지켜냈잖아요. 수면 아래에서 쭉 보고 있다가 지금은 응원도 해주시고, 잘하고 있다고도 말씀해주십니다. 한 3년 전부터인 거 같은데 이쪽 업계 분들은 처음에 제가 이러다가 말겠거니 생각했답니다. 지금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말씀도 해주십니다.”
사실 잘나간다는 말을 듣고 있을 때 자칫 큰 코를 다칠 뻔도 했다. 하나밖에 없는 김밥 셰프이니 김밥 체인 사업을 해보자는 제안도 있었다. 구체적인 가능성도 열려 있었지만 서둘지 않고 그 자리에서 멈췄다. 주위 사람들도 말렸다. 섣불리 결정을 내렸다가는 낭패 볼 것이 뻔했다. 그 또한 제대로 준비가 안 됐기 때문이다.
“잘 보고 길을 걸어온 걸까요? 원맨쇼만 하면서 온 건 아닌지. 망가지면 한순간에 무너지고 나쁜 평가를 받게 될 거 아니에요. 그래서 사업적으로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 편입니다.”
팜파티로 농촌과 도시 유통망을 좁히다
김락훈 셰프는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에 관심을 갖고 전국의 농작물과 농민을 연계하는 일을 벌이고 있다. 한국벤처농업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맡고 있는 이유도 농민들과의 교류 목적 때문이다.
“김밥 안에 들어가는 식재료를 다양화하려면 현실적으로 농민과의 접점이 필요하잖아요. 식재료는 농민을 빼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김밥이든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 한식집이든 농촌에서 식탁까지 안전한 먹거리가 유통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 운동의 일환이 제가 4년 동안 우리 농민들과 함께하고 있는 ‘팜파티’인 것이죠. 여기에 참여하는 농민들은 팜파티 셰프가 되는 것이고요.”
지금까지 국내외 박람회와 각종 행사, 파티를 하면서 쌓아온 모든 노력을 농민의 자립과 건전한 먹거리 유통망을 다지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이 김락훈 셰프의 계획이자 바람이다. 올해는 외국 활동을 멈추고 한국에 머물면서 농민들과 함께할 사업과 관련해 진지하게 구상 해볼 생각이다.
“요리를 통해 농업을 논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농민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매개체도 필요하고요. 말하자면 한국벤처농업대학교 같은 그림도 필요하고, 요리를 할 줄 하는 사람도 필요하고, 판로도 필요하죠. 김밥은 제 스타일로 콘텐츠를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따라만 와주셨으면 합니다.”
자신을 농민 삐끼(?)라고 불러도 좋단다. 생산자로서 농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장을 열어주고 싶다고 했다. 7cm 내외 동그란 김밥 안에서 마치 우주를 발견한 사람처럼 농민 이야기에 신이 난 김락훈 셰프다.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과 같이 일을 벌이고 한식 세계화를 위해 뛰고 싶어요. 지금 저와 함께하는 농민, 그분들이면 됩니다.”
얼마 전 연트럴파크 길 걷기에 참여했다. 연트럴파크라는 도로명은 미국 뉴욕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와 연남동을 합성해 지어졌다고 한다. 2011~2016년에 걸쳐 완공된 전체 6.3km의 옛 경의선 숲길 중 가장 긴 연남동 길이다. 약 두 시간에 걸쳐 경의선 숲길을 지나고 홍제천을 따라 걷다가 월드컵 평화공원까지 걸었다. 1905년 첫개통 했다는 옛 경의선은 현재는 공항철도 및 복합 전철로 건설되면서 한국철도시설공단이 철길 상부를 50년간 무상 임대하여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공원길 주변으로 카페나 편의, 위락시설은 좋은데 경관 훼손이나 고성방가 등의 소음을 규제할 원칙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최근 떠오르는 길이 또 하나 있다. 1970년에 만들어진 서울역 고가도로가 바로 그 길이다. 1971년도에 숙명여대에 입학했으니 통학버스 안에서 익숙하게 보아왔던 길이기도 하다. 1024m의 이 길은 2015년에 철거됐는데, 지난해 5월 ‘서울로 7017’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났다. ‘7017’은 1970년에서 2017년의 시점을 의미하고 ‘서울로’는 서울로 향하는 사람의 길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서울로 7017’은 뉴욕시 맨해튼에 있는 센트럴파크 인근 하이라인공원 길을 벤치마킹한 것이라고 알려졌는데, 총괄 디자인 기획을 한 세계적인 건축·조경 디자이너 비니 마스(Winy Mass, 네덜란드)는 오히려 하이라인 공원길과의 차별성을 많이 강조했다고 한다. 뉴욕과 서울의 도시 환경을 비교할 때 차별성을 갖는 것이 더 자연스럽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하이라인 공원길은 1934년에 맨해튼 중심부 20개의 블록을 가로지르며 운행되던 2.33km의 고가 화물 노선이었으나 철도 업이 쇠락한 1980년, 철로도 완전히 중단되어 20여 년간 방치되어 있었다. 뉴욕시 도시재생사업의 일환으로 ‘하이라인 친구들’이라는 시민단체와 하이라인공원길 건설 프로젝트를 기획하여 2009년 완공했다. 아름다운 식물과 벤치 등 디테일한 디자인으로 조성된 길은 허드슨강의 풍광을 배경으로 마천루를 비롯한 뉴욕의 건축사를 살펴보는 교육의 장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뉴욕 맨해튼의 도시 설계자 로버트 모지스는 “뉴욕 도시 중심부에 큰 공원을 설계하지 않는다면 5년 후에는 같은 크기의 정신병원을 지어야 할 것”이라 당부한 바 있다. 그 공원이 바로 우리가 익히 아는 ‘센트럴 파크’인 것이다. ‘연트럴파크’와 ‘서울로 7017’도 오랫동안 훼손, 오염되지 않고 시민의 아름다운 휴식처로 남아 주기를 바란다.
걷기가 일상의 행위를 넘어 여행이 되려면 나름의 계획성과 준비가 필요하다. 유유자적 도보 여행가를 꿈꾸며 위대한 첫걸음을 내딛기 전 알아두면 쏠쏠한 걷기 정보를 담아봤다.
◇웹사이트로 걷기 코스 찾기
두루누비 www.durunubi.kr
걷기와 더불어 자전거 길까지 교통, 숙박, 음식, 문화 등 관련 정보를 한꺼번에 검색할 수 있는 사이트다. 길 이름으로 검색하거나 지도에 표시된 아이콘을 클릭해 지역에 따라 코스 찾기가 가능하다. 코스에 대한 소개 글과 사진, 지도, 거리, 시간, 난이도, 편의시설 등에 대한 기본 정보와 전문가 평점까지 골고루 담았다. ‘여행일정 짜기’, ‘이달의 추천 길’ 등을 이용하면 더욱 수월하게 도보여행 계획을 짤 수 있다.
서울두드림길 gil.seoul.go.kr
서울둘레길, 한양도성길, 근교산자락길, 생태문화길, 한강·지천길 등 서울의 도보 코스 정보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서울둘레길 8개 코스의 지도와 거리, 소요시간을 비롯해 난이도, 진입로 교통정보, 주변 볼거리 등의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자료는 그림 파일로 다운로드 및 출력 가능하다. 한양도성길의 경우 서울두드림길 홈페이지를 통하거나 도메인(seoulcitywall.seoul.go.kr)을 직접 입력해 접속하면 된다.
강화나들길 www.nadeulgil.org
‘나들이 가듯 걷는 길’이라는 뜻을 지닌 강화나들길은 총 20개 코스로 연결돼 있다. 선사시대 고인돌과 고려시대 왕릉 등 유적지와 함께 저어새, 두루미 등 천연기념물 철새가 서식하는 자연환경까지 경험할 수 있어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거리, 소요시간, 난이도, 주변 볼거리 등을 확인할 수 있다. 또, 걷기 모임 일정과 더불어 ‘나들길지기’의 연락처와 콜버스 전화번호를 알려준다.
강릉바우길 www.baugil.org
강릉바우길은 백두대간에서 경포와 정동진까지 산맥과 바다를 함께 걷는 총 400km의 코스다. 산맥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이 대부분이라 경사가 높지 않아 초보 여행자들에게 부담이 덜한 편이다. 사이트에서는 코스별 지도, 교통정보, 준비물을 비롯해 길마다 히스토리를 담은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볼 수 있다.
지리산둘레길 jirisantrail.kr
지리산둘레길은 전북, 전남, 경남을 아우르며 남원, 구례, 하동, 산청, 함양의 21개 읍면 120여 개 마을을 잇는 길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총 22개 구간으로 나뉜 코스의 지도, 거리, 예상시간, 난이도뿐만 아니라 해발고도까지 볼 수 있다. 더불어 주요 경유지와 안내센터 전화번호, 민박 정보, 마을회관 전화번호 등을 제공한다.
해파랑길 haeparang.org
해파랑길은 부산 오륙도 해맞이공원을 시작으로 강원도 고성 통일전망대에 이르는 770km 장거리 도보여행 길이다. 고성 구간, 울진 구간, 포항 구간 등 크게 10개 구간으로 나뉜 50개의 코스가 있다. 사이트에서는 구간별 거리와 소요시간, 난이도를 비롯해 지역별 대표 연락처와 전 구간 교통편 확인이 가능하다.
제주올레길 www.jejuolle.org
제주올레길 18코스 정보를 한눈에 보기 쉽게 정리해놓은 사이트다. 각종 안내소, 화장실, 숙소, 식당, 볼거리, 즐길거리와 시간대별 날씨와 미세먼지, 오존 상태, 휠체어 가능구간 정보도 제공한다. 걷기 또는 제주 여행 관련 행사, 축제, 프로그램 소개와 제주 소식, 여행 준비에 도움이 되는 조언까지 알차게 담겨 있다.
◇기분 좋은 걷기 매너
01 오르막길에서 힘들게 올라오는 사람에게 길 먼저 양보하기
02 추월할 때는 앞사람에게 양해 구하기
03 시끄러운 음악이나 요란한 행동 삼가기
04 지정된 노선을 이용하고 안전수칙 지키기
05 걷기 중 음주, 흡연하지 않기
06 야생동물에게 먹이 주지 않기
07 쓰레기 되가져오기
08 여럿이 걸으며 길 막지 않기
09 주변 농작물과 열매는 눈으로만 바라보기
10 공공시설물 깨끗하게 사용하기
11 도로변이나 좁은 길 지날 때는 한 줄로 걷기
12 지역 문화 및 지역민 존중하기
13 위험 구간 발견하면 제보하기
14 이정표나 길 표식 훼손하지 않기
15 길가에 핀 꽃과 나뭇가지 꺾지 않기
◇2018 주요 걷기대회 일정
△4/21~22 제12회 한국 100km 걷기대회 4/26~29 IML 총회 및 스웨덴국제걷기대회 △5/12 제5회 고양누리길 전국걷기축제 △5/18~27 재미대한걷기연맹 2018 미국그랜드캐니언 걷기 △6/2~3 제18회 일본 SUN-IN 미래걷기대회 △7/17~20 제102회 네덜란드 나이메헨 국제걷기대회 △9/15~16 제2회 낙동강 세븐 스테이지 걷기대회 △10/13 제9회 군산 66km 새만금걷기대회 10/20~21 △제11회 울산 태화강전국걷기대회 △제8회 부산 갈맷길국제걷기대회 △제4회 영주 소백힐링전국걷기대회 △10/27~28 제24회 원주국제걷기대회 △11/2~5 제41회 일본 히가시마쓰야마 국제걷기대회 △11/10~11 제6회 일본 SUN-IN 100km 걷기대회 △11/17~18 제10회 인도네시아 족자 국제걷기대회 △12/1 2018 워커인의 밤
매혹적이다. 그러나 불편하다. 이 찰나의 간극 속에 그의 ‘붉은 산수’가 있다. 하고많은 색깔 다 놔두고 하필 붉은 풍경이라니… 어디서도 마주친 적 없는 역설이다. 사람들은 그의 ‘산수’에서 유토피아를 찾고 디스토피아를 본다. 그가 장치한 은유와 비유 속으로 빨려 들어간다.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탐을 내는 작가 이세현(李世賢·51).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러브콜을 보내고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가 그를 만나러 영국까지 날아갔다. 붉은색을 화두로 삼은 뒤의 이야기다.
그는 파주 출판단지에 자리한 로우 갤러리(Raw Gallery)에서 보자 했다. 후배들을 위해 자신의 작업실 한쪽에 마련한 비영리 문화공간. 그의 표현을 빌리면, 그냥 놀이터다. 오후의 햇살을 잔뜩 빨아들이고 있는 ‘RAW’라는 글자가 문패처럼 달려 있었으므로 헤맬 일은 없었다. 저 ‘날것(raw)’의 의미는 그의 ‘붉은색(red)’과 또 어떤 방식으로 한바탕 내통하는 걸까. 느닷없는 상상을 하며 갤러리 안으로 들어섰다.
‘붉은 산수’와 맞닥트렸을 때 ‘아’ 하는 탄성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무슨 일인지 꼼짝없이 포위당한 느낌이었다. 매혹적이었지만 속수무책의 버거움도 몰려왔다. 그것은 근원을 알 수 없는 슬픔과 두려움이었다. 잠시라도 놓여나기를 바라는 사이 이세현 작가가 나타났다. 그를 따라 작업실로 들어갔다. 화가들이 붓질하는 공간이 대개 그러하듯 캔버스와 수백 장의 밑그림, 물감, 붓들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가 데려온 자연이 ‘붉은 산수’로 다시 태어나는 방이었다.
‘비트윈 레드(Between Red)’라는 제목으로 ‘붉은 산수’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영국 유학 시절이다. 2004년, 서른아홉에 유학을 떠났다. 꽤 늦은 나이였다. 무엇이 그를 충동질했을까.
“20대에는 학원 강사로 지냈고, 30대에는 계원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어요. 작업도 하고 먹고살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했으니까요. 회화, 설치미술, 조각 등 장르를 넘나들며 다양한 실험을 하던 시절이었는데 작품을 단 한 점도 팔지 못한 무명작가였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하고 싶은 건 그림인데, 그래서 하기 싫은 일도 하는데,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가혹하게 물었습니다. 예술가 흉내나 내면서 적당히 살고 있는 모습이 보이더군요.”
결기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지 않는다. 타성에 젖은 나날이었다고 표현했지만 그는 자신과 끊임없이 불화한 듯했다. 그리고 그 시간들을 청산하듯 전세금 뺀 돈 6000만 원을 쥐고 영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미친 듯 그림만 그려보고 싶어서였다.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
영국에 도착해 런던 첼시디자인아트컬리지에 입학했다.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라 생각했다. 그만큼 간절했을 유학생활. 하지만 처음부터 녹록지 않았다.
“입학하자마자 영국 학생들 앞에서 내 작품을 슬라이드로 소개하는 시간이 있었는데, 어눌한 영어로 들뢰즈의 철학을 들먹이고 라캉을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 내 모습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부끄러웠어요. 반대로 생각해봐요. 서양 학생이 동양 학생들 앞에서 공자 왈, 맹자 왈 하면 제대로 알기나 하고 그런 소릴 하는 건지 우습지 않겠어요? 순간 식은땀이 났고 더 이상 아무 말 못하겠더라고요. 그날을 계기로 제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봤어요. 서양의 저 거대하고 찬란한 현대미술은 그동안 내 것이 아니었구나, 뼈저리게 느꼈죠.”
낯선 땅에서 사고방식이 다른 서양인들을 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깨달았다. 그들의 아류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어쭙잖게 흉내나 내지 말고 내 이야기를 하자고 마음먹었다. 이후 작업 방식도 바뀌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해 그때만큼 고민해본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매일 묻고 또 물었죠. 결국 동서양의 차이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환경과 문화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에 이르렀어요. 그리고 내 뿌리가 되어준 것들을 새로운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았습니다.”
잠자고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작업에 매달렸다. 처음에는 우리의 전통음식, 제사상, 돼지머리 등을 소재로 삼아 변화를 모색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군 복무 시절 야간 투시경으로 바라본 비무장 지대의 풍경이 불현듯 떠올랐다. 충격적일 만큼 아름다웠지만 온통 붉어 두려움과 공포감마저 들게 했던 우리의 산하. 야간 투시경 속 산하는 그렇게 ‘비트윈 레드’ 시리즈로 재탄생했다.
‘붉은 산수’를 본 사람들은 “한 번 보면 절대로 잊히지 않는 그림”이라고 말한다. 런던에서 졸업을 앞두고 하루 종일 그림만 그려대던 날. 하루는 스위스에서 온 여자가 우연히 그가 그리고 있던 붉은 산수를 보고 마음에 든다며 작품이 완성되면 자기가 꼭 구입하고 싶다 했다. ‘붉은 산수’ 첫 번째 작품을 손에 넣은 사람은 버거 컬렉션 대표 모니카 버거였다.
그 뒤 그의 이름은 유럽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다. 졸업전시회 때 내놓은 작품도 평론가와 수집가들에게 모두 팔려나갔고 여기저기서 전시 제의도 들어왔다. 이후 미국 페이스 갤러리, 프랑스 페로탱 갤러리 등에서 손을 내밀었고 뱅크오브아메리카 등 유명 기업들도 그의 작품을 사갔다. 세계적인 미술품 컬렉터 울리 지그는 런던으로 직접 찾아와 그림을 사갔다. 외국에서 인기가 더 많은 이유가 궁금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에 대한 거부감이 있어요. 이데올로기적 트라우마도 있고요. 또 집에 걸어두고 감상하기 편한 그림들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죠.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취향이 다양해요. 작품에서 드러나는 철학과 시대 문제를 고민하고 있는가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고객도 많아요. 울리 지그가 제게 그러더군요. ‘당신 그림은 분단과 같은 한국 문제를 다루고 있어 참 좋다, 메시지가 분명하다, 묵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아름답다, 물론 다른 훌륭한 한국 작가들도 많지만 어디서 본 듯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당신 작품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그림이다’라고요. 그의 말에서 큰 답을 얻었습니다.”
어머니, 다비화실, 12색 모나미물감
전통 산수화의 다시점과 서양화의 묘사 방식을 통해 그가 재해석해낸 자연의 풍경은 겸재 정선과 같은 진경산수화 대가들의 정신을 더듬으며 다양한 변주의 과정을 거친 듯 보인다. 자연은 눈에 보이는 풍경에 그치지 않는다. 개인의 체험과 만나 재구성되기 때문이다. 이세현 작가에게 자연은 삼라만상이다. 인간사, 세계사와 분리될 수 없는 풍경이다.
자연을 이야기할 때마다 그는 한 사람에 대한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군 복무 시절 돌아가신 어머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짧은 생이었다.
“어머니를 화장하는 동안 벌판에 앉아 있는데 들꽃 향기가 났어요. 그만 슬퍼하라고 어머니가 주시는 마지막 선물 같았어요. 순간, 지나온 시간들이 아득해지면서 자연이 다르게 보였어요. 아름다운 풍경 뒤로 삶과 죽음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더군요. 어머니의 유해는 원하신 대로 처녀 적 살았던 통영의 작은 마을 해안에 뿌려드렸어요. 그런데 유학을 떠나기 전 그곳을 다시 찾았다가 깜짝 놀랐어요. 제2거제대교가 생기면서 마을이 통째로 없어졌더라고요. 어머니를 한 번 더 잃은 것처럼 슬펐습니다.”
온 나라가 개발의 신열에 들떠 있던 시대였다. 통영에도 관광지 개발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에게로 가는 길은 끊겨버리고 말았다. 어린 시절이 몽땅 추방당한 듯했다.
거제도에서 태어난 이세현 작가는 부모를 따라 부산, 통영, 울산 등지를 옮겨 다니며 살았다. 아버지의 나전칠기 사업이 망해 도시빈민이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도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심장판막증을 앓고 있는 허약한 몸이었지만 닥치는 대로 일했다. 결국 건강이 더 나빠진 어머니는 통영 이모 집에서 요양을 하게 됐고 어린 그는 어머니를 만나러 갈 때마다 자신이 더 강해져야 한다고 다짐했다.
“어쩌다 용돈이 생기면 문제집을 사서 공부했어요. 대학을 가야 집안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나봐요. 미대를 가고 싶어 고등학교는 전통공예학교로 들어갔어요. 회화반이 있었거든요. 학교에 가보니 미술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태반이었어요. 나는 그런 교육을 한 번도 받아본 적도 없고, 그때까지 12색 모나미물감이 최고인 줄 알았어요. 어느 날 학교에 가져가 자랑스럽게 펼쳐놓았는데 다른 애들은 전문가용 물감을 내놓더라고요. 기가 팍 죽었죠.(웃음)”
그래도 그림 그리는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고1 때부터 운 좋게 미술반 청소를 담당하게 되어 선배들 그림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면서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렇게 그려댄 그림은 100장이 되고 수백 장이 되었다. 그만큼 실력도 늘었다.
고3이 되면서 대학 진학을 결정해야 했다. 집안 형편이 좀처럼 나아지지 않아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무턱대고 학력고사를 봤다. 성적이 괜찮게 나왔지만 철없다는 소리나 들을 게 뻔해 몰래 홍대 미대에 입학원서를 내고 실기시험을 준비했다. 다른 학생들은 학원에서 특강을 받는 등 분주해 보였다. 학원은 꿈도 못 꾸는 상황에서 그들과 경쟁할 생각을 하니 초조했다. 가난한 아버지가 밉기도 했다.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 했던가. 문득 후배가 다니던 다비화실이 생각났다.
“어머니 몰래 쌀을 훔쳐 학원으로 들고 갔어요. 돈이 없으니 쌀이라도 받고 그림을 좀 봐달라고 했더니 학원 선생님이 어처구니없어 하더라고요. 기특하면서도 맹랑한 놈이라 생각했겠죠. 나를 한참 바라보더니 ‘그래, 한번 해보자!’ 하더군요. 옛날이니까 그게 가능했지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죠. 당장 그날부터 차가운 평상에 스티로폼을 깔고 함께 먹고 자면서 실기시험 준비를 했어요.”
결과는 합격. 게다가 장학생으로 붙었다고 하니 집에서도 서울 유학(?)을 더 이상 말리지 못했다.
계속 이어질 캔버스 속 이야기
이스라엘의 유명 아트딜러인 세르주 티로시는 이세현 작가의 작품에 대해 “매우 독특하면서도 세계 미술시장에서 주목받을 만한 무언가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가 국내외에서 핫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그동안 국내는 물론 스위스, 미국,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중국 등지의 유명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갖는 등 빡빡한 일정을 보냈고, 2015년에는 이탈리아 유명 패션 브랜드 페라가모가 협업을 요청해와 스카프, 머플러, 블랭킷 등을 제작해 선보이기도 했다. 1월에는 홍콩문화원 개관전 기획 전시가 예정되어 있다. 하루가 48시간이어도 모자란 듯 보인다. 지금까지 그린 대부분의 ‘붉은 산수’를 해외 컬렉터들이 구입해갔다니 놀랍다. 캔버스 속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진다.
나이 듦에 대해 물었을 때 예술가는 뭔가 다르게 대답할 줄 알았다.
“나이 드는 게 좋아요. 이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용기가 생겼어요. 오해받는 것도 불편하지 않고요. 아, 또 하나 있네요. 포기할 줄 아는 것.”
얼마나 명료한가. 아무런 기교도 필요치 않은 저 투명한 각성은.
중소기업 중앙회는 분기별로 협동조합이나 중소기업체를 대상으로 오전 7시부터 조찬회를 겸한 강연을 한다. 12월 6일 포럼의 주제는 ‘패권과 행복의 비밀’이었다. 김태유 서울대 명예교수의 특강은 지난번 강의 ‘은퇴가 없는 나라’에 이어 두 번째로 듣게 되었다. 김 교수 강연의 특징은 자신만의 독특한 주제와 연구로 경제와 역사의 흐름을 이야기해주는 데 있다.
포럼의 주제도 그러하다. 국가 경제가 발달한 미국에서 사업을 하는 것과 후진국인 아프리카에서 사업을 하는 것은 기업가의 입장에서 볼 때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모든 시설이 제대로 갖추어지고 국가가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선진국에서 사업이 훨씬 더 잘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나라의 기업가나 국민은 후진국보다 훨씬 더 행복해질 수 있다는 점이 오늘 강의의 핵심이었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가 행복 추구라면 우리는 과거에 왜 불행했는가? 김 교수는 이 질문으로 강의의 서두를 열었다. 그리고 서양보다 기술력이 뒤처져 있다는 사실을 가까운 나라 일본과 똑같이 인식하면서도 대처 방법에서는 차이를 보인 것에 그 원인이 있다고 강조했다. 즉 일본은 19세기 중반 뛰어난 기술력을 앞세운 외세의 개방 압력을 받았다. 요시다 쇼인과 같이 대양이(큰 서양 오랑캐)를 인정하고 화혼양재(和魂洋才)의 정책으로서 산업혁명을 이룬 전기를 마련했지만 우리나라는 위정척사를 앞세워 척화비를 세우고 과거 성리학에 집착했기 때문에 서로 다른 운명의 길을 걷게 되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사람들을 지배자와 피지배자로 나눈 대분기점이었다고 강조했다. 제1차 산업혁명 때 영국이 석탄, 금속, 직물 부문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면 제2차 산업혁명 때는 독일과 미국이 화학, 전기, 강철을 통해 발전을 이루었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당시 산업혁명을 주도한 나라가 지배자로 등극한 사실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다. 제레미 리프킨이 처음 언급한 제3차 산업혁명은 1970년대 ICT와 신재생에너지 기술에 의해 일어났고 오늘날은 이른바 클라우드 슈밥이 말한 제4차 산업혁명의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ICT(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Bio Technology, Nano Technology 등 초연결 기술이 핵심이 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행복한가? 1963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로 125개 국가 중 101위에 머물렀던 우리나라는 공업인구 2.7%, 농업인구 68%였다. 이제는 국민소득 2만 달러를 돌파해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를 하는 나라로 성장했다. 맥킨지 보고서는 새로운 성장 방식을 창조한 한국 스타일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우리나라에 대한 맥킨지 보고서 내용은 다소 부정적이다. “북핵보다 한국 경제가 위기다”라고 썼고 “1997년 경제위기, 2008년 금융위기에 잘못된 진단과 처방은 한국경제의 동력을 상실시켰다”라고 했다.
김 교수는 1차 산업혁명이 농업경제에서 산업경제로 옮겨가는 1차 대분기점이라면 다가오는 4차 산업혁명은 산업경제에서 지식경제로 넘어가는 2차 대분기점이 될 수 있다고 예측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산업혁명은 어떻게 오는가? 김 교수는 시장에서 정부와 기업이 혼연일체가 되어 노력할 때 저절로 온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영국의 산업혁명, 네덜란드의 산업혁명 등이 그런 사례로 언급된다며 4차 산업혁명을 위해 현재 부처에 소속된 일반 행정관료(Generalist)를 전문정책관료(Specialist)로 바꿔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젊은 엘리트의 힘을 4차 산업혁명 분야로 대거 집중시켜 산업 역군으로 써야 한다고 언급했다.
영국과 네덜란드가 세계화를 통해 나라를 발전시켰듯이 우리나라는 4차 산업혁명을 주요 정책으로 삼고 기업들과 함께 나아간다면 2차 대분기점에서 선도적인 나라가 될 것이라는 김 교수의 말은 공감이 갔다. 강의의 결론은 “행복은 기업과 기술에서 나온다” 는 말에 집약되어 있는 것 같았다. 행복의 근원은 보는 시각에 따라 여러 측면에서 이야기될 수 있겠지만 공학을 전공한 김 교수의 행복에 대한 시각은 그만의 특성을 잘 함축한 말이라 아주 인상적이었다.
네덜란드 화가 빈센트 반 고흐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화 한 것이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그 자화상을 그렸는가 하면 37살에 권총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도로타 코비엘라, 휴 웰치먼 감독 작품으로 유화 에니메이션이라는 특수한 기법이라 주연 배우가 없다. 예매 순위는 높지 않으나 네티즌 평점이 거의 만점에 가깝다.
영화의 줄거리는 고흐가 죽고 난 후 1년이 지나고 고흐의 친구였던 우체부가 아들을 시켜 고흐가 마지막으로 머물었던 프랑스 남부에 가서 고흐의 죽음을 추적해 가는 과정을 담았다. 고흐의 주치의였던 가셰 박사, 그리고 고흐와 가까웠던 가셰 박사의 딸, 고흐가 묵었던 호텔 주인 등의 증언을 통해 고흐가 자살한 것인지 타살한 것인지에 대한 의문도 여전히 존재한다.
고흐는 말년에 정신병원에 입원했었다. 결혼도 못 했다. 자신의 귀를 자르고 사람들과 충돌하는 등 괴팍한 행동을 일삼으니 마을에서도 추방 압력이 있었다고 한다. 동네에서도 아이들이 고흐를 미치광이라며 돌팔매질을 하기도 했다. 자살 동기에 대해서는 여전히 미궁이지만, 가셰 박사 얘기로 우울증에 걸려 있었고 고흐 자신이 자살을 시도했다 말 하니 그렇게 믿어질 수밖에 없다.
고흐는 살아생전 ‘아를의 붉은 포도밭’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았기 때문에 무명화가 취급을 받았다. 그랬으니 그의 경제적 궁핍은 상상할 만 하다. 동생 테오가 생활비를 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유명한 화가들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은 인정은 받았던 모양이다. 10년 만에 1,000점에 가까운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다작이다. 고국인 네덜란드보다 픙광이 아름답고 다채로운 남부 프랑스에 정착한 것도 특이하다. 제대로 된 그림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짧은 기간 동안 그림 공부를 했으나 미술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그 스승과도 싸우고 결별했다는 것이다. 싸운 사람이 많은 것을 보면 성격이 원만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주치의 가셰 박사도 원래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포기하고 고흐의 재능을 부러워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는 화가가 선망의 대상이었던 모양이다. 가셰 박사는 고흐가 죽고 나서 치료비 명목으로 고흐의 작품을 걷어 갔는데 그 후에 고흐의 작품은 천문학적인 가치를 나타냈다. 죽고 난 후에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추앙받게 된 것이다. 작품 중에는 무려 수천만 달러에 경매되기도 했다.
영화는 유화 에니메이션이라는 독창적인 스타일로 만들었다. 고흐의 잘 알려진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 ‘아를의 침실‘, ’가셰 박사 초상화‘, ’해바라기‘, ’귀를 자르고 난 자화상‘ 등 눈에 익은 작품들이 마치 동영상처럼 살아 움직인다. ’프로방스 시골길의 하늘 풍경‘ 그림은 평범한 사람이 볼 때 하늘은 그저 파란 도화지 같을 뿐인데 고흐는 공기의 흐름까지 븟 터치로 그려냈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고흐의 붓 필치가 원래 생동하는 듯한 강렬함이 있는데다가 그것을 100여명의 실제 화가를 동원해서 에니메이션으로 만들었으니 영화 사상 초유의 일이다. 에니메이션의 특성 상 눈이 어릿어릿하다는 단점이 있으나 천재 작가의 그림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다 보면 그 정도는 넘어갈 만 하다.
‘루시드 드림(Lucid Dream)’은 가끔 접하던 단어다. 카페 이름도 있고 음악하는 그룹 이름으로도 들어봤으나 정확하게는 무슨 뜻인지 모르고 있었다. ‘루시드 드림’은 ‘자각몽(自覺夢)’이라 해서 꿈을 꾼다는 의식 하에 스스로 꿈을 꾸는 것이다. 대부분의 꿈은 깨고 나면 어렴풋해서 기억하기 어렵다. 그런데 잠든 사이에 꿈속에 나타난 것들은 뇌 어딘가에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을 거라는 추산 하에 저장된 것을 뒤져보면 자세히 기억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루시드 드림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영화가 한국 SF 스릴러 영화 이다. 김준성 감독 작품이며 대호 역으로 고수와 베테랑 형사 방섭 역으로 설경구가 출연했다. 대호는 대기업 비리 고발 전문 기자다. 3년 전 놀이동산에서 납치된 아들 민우를 백방으로 찾았으나 소득이 없었다. 그러다가 루시드 드림을 알게 되었다. 마침 친구인 정신과 의사 소현(강혜정 분)이 루시드 드림 전문가여서 도움을 받는다. 루시드 드림으로 다시 꿈속으로 들어가 당시 상황을 잘 살펴보면 대충 지나쳤던 사람들의 인상이나 행동거지, 심지어 자동차 번호판도 되살려낼 수 있다는 것이다. 대호는 루시드 드림을 이용해 아들이 납치되던 상황을 되살려 용의자들을 추적한다. 형사 방섭이 여기에 적극 호응한다. 아들 민우는 우리나라에 20명밖에 없는 특이 혈액형을 갖고 있다. 그중 한 명이 혈액이 필요하면 헌혈할 사람은 그 사람들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 연루된 사람들이 모두 용의자들이다.
대호가 자각몽에서 본 용의자의 얼굴을 소현에게 보여주자 소현은 그 사람의 몽타주를 만들어 보여준다. 실제로 만난 적이 없는 사람이지만, 자각몽을 꾼 사람들에게 공통으로 나타나는 사람의 얼굴이란다. 정신분석학에서는 ‘디스맨’이라고 표현한다. 이 영화에서는 또 꿈을 꾸는 누군가와 뇌 주파수를 맞추면 그 사람 꿈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는 ‘공유몽(共有夢)’을 통해 용의자를 찾는 설정이 독특하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용의자의 꿈속으로 이 사건에 연루된 여러 사람이 들어가 당시 상황을 알아내려고 한다. 이때 만약 식물인간이 된 사람이 죽으면 공유몽 상태에 있던 사람도 같이 죽게 되므로 스릴도 있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는 사리 판단을 잘 못할 수도 있다. 그래서 영화에서는 차임벨을 쓴다. 초침이 움직이지 않는 시계로 꿈과 현실을 구분하고 꿈에서 벗어나고 싶으면 손에 쥔 차임벨 버튼을 누르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리얼리티 체크(Reality Check)’라고 부른다. 실제로도 여러 방법이 시도되고 있는 모양이다.
루시드 드림은 단순한 SF가 아니고 정신분석학에서는 이미 체계적으로 연구되고 있는 이론이라고 한다. 1913년 네덜란드의 정신과 의사 프레데릭 반 에덴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이론으로 각국의 생리학자들도 연구를 진행 중이란다. 뇌과학이 더 발달하면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다. 최면술처럼 수사에도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꿈꾸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 같다. 가끔 가위눌림을 경험하기는 하지만 습관적으로 즉시 잠에서 깨어나 털어버린다. 오래 살다 보니 꿈을 꾸면서도 꿈인지 아닌지 구별이 되는 것 같다. 루시드 드림까지 갈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나 사진을 보면 사람이 어쩌면 이렇게 맑은 눈과 예쁜 미소를 지닐 수 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온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만인의 연인이 되기에 충분하다는 생각이 든다.
필자는 그녀가 주연을 맡은 몇 편의 영화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대표작 에서는 멋진 파티 걸로, 싸구려 패스트푸드로 아침식사를 하면서도 유명한 보석가게 티파니의 쇼윈도를 구경하는 가난한 아가씨의 모습을 인상적으로 연기해 잊지 못하는 장면으로 남게 해주었으며, 비상계단의 창가에 앉아 기타를 치며 ‘문 리버’ 라는 노래를 정말 달콤하게 불러 필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에서는 작은 나라 공주님으로 여러 나라를 순방하던 중 공식적인 행사에 지쳐 잠시 뛰쳐나와 일반인처럼 로마의 이곳저곳을 경험하는 아름다운 아가씨 역을 연기했다. 경호원을 따돌리려고 미장원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는 장면은 너무나 귀여웠다. 그 당시 앞머리를 일자로 자른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했다고 한다. 정말 상큼하고 예쁜 모습이었다. 이외에도 많은 영화를 통해 즐거움과 감동을 줬던 오드리 헵번이 유니세프 홍보대사를 하면서 죽을 때까지 봉사활동을 했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젊었을 때는 아름다웠지만 나이 들어 그 모습을 잃어버리는 여배우들도 많다. 그러나 오드리 헵번은 나이 들어서도 얼굴에 주름살만 생겼을 뿐 체형도 그대로인 채 미모가 여전했다. 게다가 좋은 일까지 많이 하니 또 다른 아름다운 모습도 있었다.
오드리 헵번이 봉사활동을 그렇게 열심히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벨기에에서 영국인 은행가 아버지와 네덜란드 귀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을 때 그녀의 아버지가 나치에 협력하면서 독일의 침략을 받은 벨기에에서 살던 어린 그녀와 어머니를 버렸다고 한다.
이후 어머니와 네덜란드로 이주한 뒤 아주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녀는 독일군이 유대인들을 수용소로 끌고 가는 광경을 보고 아버지를 떠올리며 충격에 빠지기도 했다. 배우로 성공한 후 그녀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편지를 전해주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가 나치 추종자였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배우로서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는 염려 때문에 어머니가 전하지 않았던 것이다.
어느 날 그녀에게 영화 캐스팅 제의가 들어왔다. 많은 여배우들이 욕심을 내는 역이었지만 몇 날을 고민한 끝에 그녀는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주연 캐스팅을 거절했다. 그 후 는 아카데미 3개 부문 수상을 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녀는 안네 역할을 꼭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나치 협력 때문에 양심상 수락할 수 없었다고 한다.
1960년, 영국에서 홀로 살고 있던 아버지를 찾아간 그녀는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하기로 결심하고 유니세프 홍보대사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말년에 대장암에 걸렸는데도 자신의 몸을 돌보기보다는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나 남미, 아시아에 도움의 손길을 펼쳤다. 보기만 해도 행복할 정도로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에게 이런 사연이 있었다니…. 아버지의 죄를 대신해 봉사를 시작했다는 그녀의 이야기가 참 슬프고 가슴 아프다.
6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던 날, 미국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이 있었다. 방송에서는 클린턴 대통령의 취임식보다 오드리 헵번의 사망 소식에 더 큰 관심을 두었다고 한다. 외모만큼 마음도 아름다웠던 오드리 헵번. 영화배우만이 아닌 진실한 사람으로 언제까지나 필자에게 기억될 아름다운 여인이다.
6성급 크루즈 선이 인천 항구에 들어왔는데 인천에 볼 것이 없어 승객들이 내리지 않는다는 신문 기사를 읽었다. 그나마 이 크루즈 선은 한국에서 인천이 유일한 항구란다. 동남아 관광객을 부른다면서 명동에 할랄 식당이 단 한 군데도 없다는 기사도 있었다.
도대체 그동안 인천 시장들은 무엇을 했는지, 관광공사는 무엇을 한 건지 한심한 일이다. 관계자들이 현장 답사라며 뻔질나게 외국을 다녔으면 우리에게 적용시켜야 하는 것이 있었어야 한다. 사드 보복으로 중국 관광객들이 급감한 지금이 우리 관광 인프라를 점검하고 확충할 때다.
인천은 종이 한 장짜리 관광안내도에 인천 관광 소개랍시고 차이나타운과 자유공원 정도만 소개해놓고 있다는 것이다. 그나마 차이나타운은 오전에 문을 열지도 않은 곳이 많아 볼 것도 없다는 얘기가 있다. 내가 봐도 인천은 볼 것이 없는 도시다. 앞으로 내국인 관광을 내다보더라도 이대로는 안 된다.
인천은 우리니라 개항의 역사를 지닌 항구이자 도시다. 당연히 역사가 깊은 곳들이 많다. 이곳들을 잘 다듬고 가꾸어놓으면 볼거리가 될 수 있다. 또 바다와 면해 있어서 풍광도 좋다. 바닷가 횟집만으로 관광 인프라라고 할 수 없다. 그나마 여름철에만 반짝하고 겨울철에는 을씨년스러울 정도다. 도시 환경이나 길도 정비가 안 되어 있다. 대중교통도 불편하다.
자연적인 게 내세울 것이 없다면 인공적으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작은 나라 네덜란드의 쾨켄호프 같은 꽃 정원 하나 없다. 여러 가지 특징이 있는 박물관도 없다. 재원이 없다면 부산의 벽화 마을처럼 서민들이 사는 동네를 꾸며 관광자원화하는 방법도 있다. 지금 조성하고 있는 신도시도 도시화와 함께 관광 면에서도 신경을 써야 한다.
인제의 자작나무숲, 담양의 대나무숲이나 메타세쿼이아 길도 몇십 년을 내다보고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다. 인천에 잘 맞고 인천을 대표할 수 있는 숲이나 관광마을 조성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당대에는 빛을 못 보더라도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행정가들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단양에 갔더니 공중화장실은 깨끗한 편인데 좌식 변기는 없고 모두 재래식이었다. 한 해 1500만 명의 외국인들이 몰려오고 더 늘어날 추세인데 이래 가지고는 외국인들을 맞이할 수 없다.
명동의 할랄 식당도 정책적으로 지원해서 할랄 식당을 몇 군데 만들어야 한다. 회교국 관광객들이 하루 다섯 번 메카를 향해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 장소도 만들어야 한다. 건물 하나면 되는데 생각이 못 미치는 것이다. 이슬람 문자로 관광 안내도 준비해야 한다. 명동 땅값이 비싸서 못한다면 명동 인근 지역이라도 알아봐야 한다. 이슬라믹 국가들은 우리 시니어들이 젊은 시절 땀 흘려 일하며 구축한 인연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도 이슬라믹 교도들은 기독교도 다음으로 많다. 관광 당국이 지역적으로 특성을 파악하고 대비해야 하는데 이슬라믹 국가 관광객들에 대한 준비가 너무 소홀하다.
봄이 기지개를 켜는 3월이다. 우리네 마음은 춘삼월(春三月)이어도 꽃봉오리들은 아직 몸을 웅크리고 있다. 봄꽃을 보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하지만, 아산세계꽃식물원을 찾는다면 사시사철 언제나 향기로운 꽃들을 만날 수 있다.
아산세계꽃식물원은 3000여 종의 원예 관상식물을 볼 수 있는 국내 최대 규모의 실내 온실 식물원이다.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진 18개의 실내 온실 정원과 3개의 야외 정원을 둘러보며 여유롭게 산책하기 좋다. 2004년 개관해 2014년부터는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의 고령자친화기업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리아프(LIAF, Life ia a Flower)라는 자회사를 설립해 운영 중이다.
3월은 봄이라고 해도 날씨가 제법 쌀쌀한 편인데, 이곳 온실 정원에서는 3월 말부터 4월 초순까지 꽃피우는 구근식물(球根植物)을 미리 만날 수 있다(1월부터 온실에 전시). 알뿌리식물이라고도 불리는 구근식물은 땅이 얼기 전 심어 추운 겨울을 보내야만 봄에 꽃을 피우는 것이 특징이다. 겨우내 움츠렸던 구근에서 싹이 나고 싱싱한 꽃망울을 터뜨릴 때면 따뜻한 봄기운이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다. 이번 봄에는 튤립, 히아신스, 수선화 등을 비롯해 네덜란드에서 지난가을 수입해 식재한 250여 종의 구근식물을 전시한다.
따뜻하고 향기로운 꽃길 산책
꽃구경을 위해 온실 정원(식물원)으로 향하기 전, ‘LIAF 가든 센터’를 지나게 된다. 원예와 정원 문화가 발달한 유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든 센터(garden center)처럼 다양한 원예 프로그램을 체험하고 관련 제품까지 구입할 수 있는 공간으로 마련했다. 가든 센터의 외관은 지붕이 뾰족하고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마치 식물원을 보는 듯하다. 실내로 들어서면 안팎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 덕분에 햇살이 곧 조명이 된다.
가든 센터를 지나 온실 정원에 들어서면 한층 더 따뜻한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외투를 벗고 가벼운 차림으로 꽃을 즐기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햇볕이 잘 들고 실내 온도가 훈훈한 덕분에 계절에 상관없이 다양한 종의 꽃과 식물을 볼 수 있다. 산책 동선을 알려주는 이정표를 따라가면 굳이 천천히 걷지 않아도 자주 발걸음을 멈추게 된다. 올망졸망 피어난 꽃들을 바라보고 그윽한 향을 맡으려면 느긋하게 거닐 수밖에 없다. 관람객들은 예쁜 꽃을 담기 위해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꽃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기 바쁘다. 연못 정원과 새 모이 정원, 미로 정원 등은 아이들도 좋아하는 공간이다.
식물원에서의 추억, 집에서 키워나가기
온실 정원 코스를 순서대로 관람하고 나면 다시 가든 센터에 도착하게 된다. 봄을 맞이하는 꽃과 구근식물 화분, 원예에 필요한 다양한 도구 등을 구입할 수 있다. 가든 센터를 나서기 전까지 입장권을 잘 챙겨야 한다. 관람을 마친 후 입장권을 매표소에 보여주면 작은 다육 화분을 선물로 주기 때문이다. 식물원에서의 즐거웠던 추억이 집에서까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서 증정하기 시작한 다육 화분은 벌써 100만 개가 넘었다고 한다. 다육식물은 원예 초보자도 쉽게 키울 수 있어 집에서도 이곳에서의 추억을 오래 간직할 수 있다.
‘삶이 꽃이다’라는 캐치프레이즈처럼 단순히 꽃을 구경하는 것 외에 다양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다. 꽃잎으로 손수건에 물을 들이는 ‘꽃 손수건 천연 염색 체험’을 비롯해 화분 심기 등 다양한 원예 교육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 주말에 방문할 계획이라면 가든 센터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에도 들러보자. 다양한 식용 꽃과 신선한 나물로 만든 ‘꽃 비빔밥(8000원)’을 맛볼 수 있다(평일 10명 이상 예약 시 주문 가능).
>>LIAF·아산세계꽃식물원
위치 충남 아산시 도고면 아산만로 37-37
이용시간 (식물원) 09:00~18:00 (가든 센터) 09:00~19:00
관람요금 8000원(65세 이상 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