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연명의료결정법이 제정되고 ‘좋은 죽음’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지만, 여전히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많다. 삶의 마지막이 가깝게 느껴지는 나이가 되면 죽음을 더욱 부정적으로 인식하거나, 아예 언급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죽음은 현실이고 준비가 필요하다. 이 때문에 노인복지관에서 진행하는 웰다잉(Well-dying) 프로그램의 수가 늘고 있다. 여전히 두려움과 기피의 대상인 죽음을 이곳에서는 어떻게 풀어나가고 있을까.
역삼노인복지센터, 대화노인종합복지관 등 다양한 복지관에서 웰다잉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강원남 행복한 죽음 웰다잉 연구소 소장은 수업에 들어가기에 앞서 ‘자신이 생각하는 좋은 죽음의 모습이란?’ 이라는 질문을 먼저 던진다. 처음에는 주저하던 어르신들도 각자의 대답을 내놓고, 이를 어떻게 준비할 수 있을지 화제를 전환하면 자연스레 교육에 적극적으로 임하게 된다는 것.
그는 “웰다잉 교육의 목적은 잘 살게 돕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많은 어르신 수강생들이 아플까 무섭고, 가족들 고생시킬까 두려워했지만 ‘죽음’ 교육 수강 후 어떻게 살지 고민하고 현재를 소중히 여기는 등 변화한 모습을 보였다.
창동어르신복지관 박미연 관장은 웰다잉 교육을 두고 “삶의 태도와 자세가 바뀌기 때문에 무엇보다 중요하고 필요한 교육이다”라고 말했다. 십여 년 전부터 웰다잉 교육을 특화 사업으로 진행했던 창동어르신복지관은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복지관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다.
고민 속에는 웰다잉 프로그램의 지향점도 들어있었다. 그는 수업을 열기 이전에 설문조사를 진행했다. 죽음에 대한 이미지, 죽음에 대해 무엇이 두려운지, 준비를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묻고 수업에 반영했다. ‘어르신들이 앞으로 다가올 상실을 인정하고 주체적으로 맞이할 수 있게 하는 교육 프로그램’인 웰다잉 교육의 중요성을 인지해 ‘상실 교육’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 하고, 코로나 상황이지만 비대면, 대면 방식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다.
외려 삶에 대한 교육이란 걸 알게 된 어르신들은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덕분에 코로나 위기에도 삶의 소중함을 깨달은 어르신들이 생겨났다. 한 어르신은 “전이나 지금이나 상황이 달라진 건 없지만, 마음이 간절해졌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의 가족들, 자식들과의 모임 자체가 너무나 소중하고 그 자체로 행복하다”는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행복한 마무리를 위한 고백(Go Back)’(이하 고백)에 참여하는 어르신들 역시 비슷한 소감을 전했다. 고백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한 어르신은 “예전보다 죽음이 두렵지 않고 사는 것이 보람 있는 느낌이다. 수업을 듣기 전에는 나이가 많이 들었으니 빨리 죽고 싶었는데, 이제는 오늘이 내가 가장 젊은 날이라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고 후기를 남겼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 역시 죽음 교육의 장벽을 허물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여왔다. ‘죽음준비교육의 필요성’, ‘연명의료결정법’을 주제로 특강을 열거나, 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부스를 운영하며 자연스럽게 죽음준비에 대한 어르신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죽음 준비가 필요한 시기임을 알렸다.
고백의 커리큘럼 역시 처음부터 죽음을 직접 언급하기 보다 이해를 도모하고, 정보를 제공한 뒤 실질적인 죽음계획을 수립하는 식으로 단계를 밟아 기획됐고, 운영되고 있다. 종로노인종합복지관의 프로그램 담당자는 “고백 프로그램의 궁극적 목표는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죽음 준비를 통해 당하는 죽음이 아닌 맞이하는 죽음으로 갈 수 있다’는 개념을 이해하게 하는 것과 인생 노년기의 마지막 성장을 이뤄내게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어르신들은 또래의 어르신들과 함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하고, 유언장을 작성하며 삶을 배운다. 웰다잉 교육 담당자들 역시 입을 모아 웰다잉은 삶을 잘 살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고 말한다. 웰다잉 교육을 마냥 죽음에 대한 논의로만 여기고 부담스레 생각할 필요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난해부터 매년 60만 명에 달하는 베이비부머들이 만 65세 고령인구로 편입되고 있다. 이들은 노인이기를 거부하며 계속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사회는 이들을 노인으로 규정해 모두 은퇴시켜 골방으로 몰아넣는다. 뛰어난 역량을 갖춘 베이비부머도 예외는 아니다. 노인으로 편입되고 있는 베이비부머를 포함해 시니어들이 행복한 삶을 영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노년학 전문가인 한경혜 서울대 명예교수에게 그 해법을 들어봤다.
“우리 모두는 태어날 때 그 나라에 대한 입국 비자를 받고 태어난다. 그런데 그 나라에 입국하기 전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는다. 막상 입국하면 그때 비로소 그 나라의 언어와 문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당황하게 된다. 그 나라는 ‘노년기’라는 나라다.”
한경혜 교수는 베이비부머를 비롯해 많은 시니어들이 ‘노인’이라 불리게 됐을 때 힘들어하는 이유 중 하나로 노인을 타자화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언급하면서, 메리 파이퍼의 ‘또 다른 나라’라는 책의 한 구절을 인용해 설명했다. 노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워낙 부정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노인, 나이 듦과 거리두기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가 자신이 노인으로 분류되는 시점이 되면 뒤늦게 적응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쉽지 않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차별적 문화를 바꾸는 것이 베이비부머의 행복한 노후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다.
한 교수는 노년학과 가족학 전문가로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높은 연구자다. 그는 “나이 듦은 개인의 내적 변화뿐 아니라 개인 간의 상호작용 과정”이라며 “나이가 들어 만 65세가 되더라도 사람들은 대부분 노인이라 불리거나 분류되는 걸 거부한다”고 말했다. 실제 많은 노인들이 자신은 ‘저 노인네들’과 다르다는 언급을 자주 한다. 젊고 활기차게 살기를 희망하고, 그러기 위해서 운동하고 사회적 활동을 활발히 하는 등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하지만 주변에서 자신을 노인으로 대하는 경험을 하게 되면서, 비로소 자신이 노인이라는 나라에 이미 입국했고 이를 부정할 수 없다는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실제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노인이 참석하는 모임에 가고 싶지 않은가’라는 질문에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이 상당히 높다. 놀라운 점은 노인들도 이렇게 대답한 비율이 높다는 사실이다. 특히 65세에서 75세에 이르는 프라임타임에 있는 초기 노인들은 노인으로 불리거나 묶이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어떤 연령 집단보다 노인은 개인차 커
한경혜 교수는 “우리나라는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매우 부정적이어서 노인 집단이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며 “그러다 보니 노인들과 자신을 경계 짓고, 중장년들도 노인이 아니라고 손사래 친다. 80 넘은 노인들도 자신만은 다른 노인들과 다르다고 말할 정도”라고 말했다.
이런 환경에서는 노인을 위한 상품이 시장에 등장해도 실질 소비자인 노인들이 거부해 시니어 시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아무도 노인이기를 원하지 않으니 노인이라는 타이틀을 건 상품이 잘 팔릴 리 만무하다. 실제로 국내 시니어 시장은 10년 넘게 규모가 커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나 실질적인 성장은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그래서 시장에서는 마케팅을 위해 액티브 시니어나 오팔세대 같은 긍정적인 용어를 만들어 기존의 노인 이미지와 차별화해 시니어 시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교수는 “사람들의 인식과 문화를 바꾸지 않으면 액티브 시니어와 오팔세대 같은 성공한 노인 집단이나 노년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하는 마케팅 용어도 결국 한계를 보일 것”이라고 전망한다. 단순히 용어의 문제가 아니라, 노인에 대한 부정적 편견이 뿌리 깊다는 점이 근본적 원인이라는 지적이다.
노인을 획일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노인 집단 내에 존재하는 다양성을 이해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노인 집단 내에서도 젊은 노인, 고령 노인 등 연령에 따른 차이가 있고, 학력과 삶의 경험 등 수많은 차이점이 가져오는 다양성이 존재한다. 실제로 많은 연구에서 노인 집단은 다른 어떤 연령 집단보다 개인차가 크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노인에 대한 이미지가 긍정적으로 변화되고 노인층이 적극적 소비자로서 스스로 드러내기를 주도한다면, 시니어 시장이 본격화되고 상당한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노년학에서 대상으로 삼는 노인은 복지가 필요한 일반적인 시니어와 성공적인 노년을 만들어가는 액티브 시니어로 나뉜다. 한 교수는 “최근까지 노년학은 노년의 어려움, 노인 문제에 집중해서 연구되고 담론이 만들어진 경향이 있다”며 “높은 노인 빈곤률이나 황혼이혼 증가, 치매와 간병의 어려움 등 사회문제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노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더 커지고, 노인 인구 증가를 사회적 부담으로 보는 시각이 강화될 우려가 크다. 나이 듦의 긍정적 측면, 노인을 사회적 자원으로 활성화하는 방안 등에 대한 학문적 논의가 더 활발해져야 한다”고 말했다.
연령 구분 사회를 세대 통합 사회로
그런데 이런 변화를 모색하기에는 우리 사회가 시니어들에게 너무 폐쇄적이고, 기회의 문을 단단히 걸어 잠그고 있다. 한경혜 교수는 “베이비부머가 가진 뛰어난 인적 자원을 생각하면 이들을 활용할 방법이 나와야 한다”며 “시니어들을 역(易)연령보다 기능적 연령으로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 연령에 따라 구분하는 사회를 이제는 연령 통합 사회, 세대 통합 사회로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태어난 생일에 따라 달력이 결정하는 역연령이 아니라, 각 개인이 가진 신체 연령이나 재능 등 실제 의미 있게 작동하는 기능적 연령으로 시니어를 개인마다 다르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다.
한 교수는 최근 노년기에 편입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가 노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본다. 베이비부머는 부모 세대보다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학력이 높다는 점에서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췄을 뿐 아니라 그 수도 많다.
한 교수는 “베이비부머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대규모 집단이 함께 노년기에 진입해 생애 후반기 경로를 개척한다는 점에서 흔히 선구자라 불린다”며 “이들이 어떻게 노년기를 보내느냐가 노인, 노년에 대한 앞으로의 문화를 이끌 동인이 될 것”이라고 기대를 밝혔다. 또 그는 “전쟁 후 경제적 활성화가 이뤄지는 시기에 태어나 젊은 시절을 보낸 베이비부머는 이런 면에서 운도 좋았고, 또 열심히 노력해서 성공의 열매도 누린 집단”이라며 “액티브하지 못한 동년배들을 위해 시민의식을 고취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국 경제발전을 주도하며 사회경제적 과실을 따먹은 베이비부머가 액티브 시니어로서 사회를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시민의식이나 사회에 대한 기여는 베이비부머 자신의 노년기 삶의 질, 행복과의 관련성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한 교수는 “나이가 들면서 겪게 되는 신체적·사회적 변화는 삶의 의미를 돌아보게 한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직장과 자녀 등 평생을 바친 삶의 중요한 축이 노년의 삶에서는 빛이 바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러려고 그렇게 애쓰며 살았나’, ‘내 삶의 보람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과 함께 ‘은퇴하고 나이를 먹었지만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다’는 열망이 커진다”며 노년기 의식의 흐름에 대해 설명했다, 물론 나이가 들면 노후 준비와 건강이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된다. 하지만 고령층으로 갈수록 삶의 의미에 대해 자문하게 되는데,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회를 위해 기여하는 활동이 그 해답으로 나타난다는 설명이다.
한경혜 교수는 최근 오픈한 ‘노년학 제3의 공간’ 연구소를 중심으로 노인, 노년기에 대한 연구를 즐겁게 이어갈 예정이다. 노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나 편견은 노인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탓이라는 점에서, 이론적으로 탄탄한 연구를 통해 노인의 적확한 실상을 보여주려는 목적의식을 근저에 두고 있다. 한 교수와 그의 뜻을 이어받은 이들이 노년에 대한 연구를 이어가, 한국에서 노인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기를 기대한다. 아울러 그의 바람처럼 베이비부머가 적극적으로 시민 참여에 나서고 노인 문화를 긍정적으로 바꿔, 국내에서도 시니어 시장이 꽃 필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한경혜 교수는 최근 노년기에 편입되기 시작한 베이비부머가 노인에 대한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다고 내다보고 있다. 베이비부머는 경제적으로 부유하며 학력이 높은 액티브 시니어로 사회 변화를 주도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고 있다.
난청은 노년기의 의사소통을 방해하고 인지장애를 유발하는 위험인자로 알려져 있다. 2019년 보건복지부 자료에 의하면 65세 이상 고령 인구 775만 명 가운데 약 170만 명의 난청 환자가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인 4명 가운데 1명이 난청 증세를 겪는 셈이다.
보청기는 난청 치료에 가장 효과적이라고 알려진 의료기기지만 착용을 주저하는 환자도 적지 않다. 질환의 정도에 따라 효과의 편차가 크고, 가격도 만만치 않다. 귀로 쏠리는 타인의 시선도 부담스럽다. 실제로 2018년 한국소비자원의 발표에 따르면 고령자 의료기기 불만 중 보청기가 약 19%로 높은 비중을 차지했다.
전문가들은 청력이 약해질 경우, 병원 진료와 청각전문가의 도움에 따라 보청기 착용 등으로 난청을 적극적으로 치료할 것을 권한다. 강동성심병원 이비인후과 김창우 교수는 “난청이 지속할 경우 뇌로 전달되는 소리 자극이 줄어들어 인지력과 기억력이 감소하면서 치매가 발생할 가능성도 높아질 수 있다”며 “중등고도 난청까지는 보청기 착용을 통한 청각재활로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귓속형부터 귀걸이형까지, 장단점 고려해야
보청기는 귀로 들어가는 소리를 증폭시켜 주는 전자 장치로, 밖에서 나는 소리를 전기 신호로 전환해서 증폭한 뒤 스피커를 통해 귀로 전달한다. 이러한 원리로 난청인의 청력을 보조하는 보청기는 디자인과 성능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개인의 난청의 정도와 주파수 별 특이성 등 청력 유형에 따라, 혹은 고막천공, 중이염 수술 등 질환의 유무에 따라 선택하면 된다.
보청기의 종류는 크게 ‘귀 안에 착용하는 보청기’와 ‘귀 뒤에 착용하는 보청기’로 분류된다. 귀 안에 착용하는 보청기는 외이도 모양에 맞게 제작해 귓속에 들어가는 형태로, 외부에 드러나지 않고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런데 크기가 작은 만큼 효과도 줄어들어, 청력 손실이 가볍거나 보통 수준인 사람들이 주로 착용한다. 외관상 전혀 눈에 띄지 않는 ‘초소형 보청기’(IIC), 외이도에 완전히 밀착된 ‘고막형 보청기’(CIC), 고막형보다는 조작이 간편하여 주로 노인층과 학령기 아이들이 많이 사용하는 ‘귓속형 보청기’(ITE)가 이에 속한다.
귀 뒤에 착용하는 보청기는 ‘귀걸이형 보청기’(BTE)와 수신기 ‘오픈형 보청기’(RIC)로 나뉜다. 귀걸이형 보청기는 내부 습기의 유입이나 외부 오염에 강한 보청기로, 난청 정도가 심한 고심도 난청자도 사용 가능할 만큼 강력한 출력이 특징이다. 오픈형 보청기는 소리의 출력을 담당하고 있는 리시버를 귀에 꽂을 수 있는 돌출 형태이기 때문에 귀를 꽉 막지 않아 가볍게 착용할 수 있다. 귀걸이형에 비해 크기가 작아 눈에 잘 띄지 않고, 울림 현상과 잡음을 최소화하여 부드러운 소리를 제공한다는 장점도 있다.
김 교수는 “보청기를 결정할 때 외부에서 보이지 않는다고 무조건 귓속형을 고집하지 말고 환자의 시력이나 손의 감각, 손의 미세 운동기능 등을 고려해서 결정하는 것이 필요하다”며 “외이도의 상태나 보청기를 혼자서 사용하고 건전지 교환이나 이물질 청소를 할 수 있는지에 따라 종류를 결정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했다.
또 김 교수는 보청기 구입 전에는 이비인후과 진료를 통해, 구입 시에는 청각전문가 상담을 통해 안전하게 보청기를 착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보청기를 구입하기 전 진료를 통해 외이도나 고막의 상태에 대한 검사를 해서 중이염과 같은 치료가 필요한 질환이 있는지 알아보고, 청력검사를 통해 난청의 정도와 유형을 확인하는 것이 중요하다”며 “그 후 보청기 구입 시에는 청각전문가에게 충분한 상담을 받고 본인에게 맞는 보청기를 선택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구매 시 건강보험 지원받는 방법은?
보청기는 제조사마다 적게는 50만 원부터 많게는 700만 원까지 가격대의 차이가 크다. 전문가들은 무조건 비싼 제품을 선택하기보다는 환자에게 필요한 기능을 갖춘 제품을 구매하면 된다고 조언한다. 김 교수는 “고가제품의 다양한 기능이 환자에 따라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며 “일반적으로 200~300만 원 대 제품으로도 좋은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다”고 덧붙였다.
보청기의 높은 가격 때문에 구매를 꺼리는 사람들이 많지만, 국민건강보험공단의 심사를 통과하면 보청기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건강보험 가입자라면 최대 117만9000원까지 받을 수 있고, 기초생활보장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은 131만 원까지 가능하다.
보청기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먼저 청각장애인으로 등록돼야 한다. 이비인후과에서 진료를 받고, 청각장애 진단서를 발급받은 후 주민센터에 제출해 심사 통과하면 복지카드 발급이 가능하다. 청각 장애 등급은 2~6급으로 분류되는데, 급수에 상관없이 모두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이후 국민건강보험 홈페이지에 등록된 업체에서 보청기를 구입해 한 달간 사용한 후 이비인후과에서 청력 건강검진을 받는다. 이후 가까운 국민건강보험공단 방문 혹은 우편으로, 검수 확인서를 제출하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 보청기 구매일로부터 1년이 지나면 후기 적립 관리비를 총 4회 청구가 가능하다.
무선이어폰, 보청기 대안 될 수 없어
한편 소니 ‘엑스페리아 이어 듀오’, 애플 ‘에어팟’, 삼성전자 ‘갤럭시 버즈’ 등의 무선이어폰이 보청기 기능을 한다고 알려져 난청인들의 관심이 높다. 실제로는 어떨까? 이를 입증하는 연구결과가 있다. 지난 3월 삼성전자와 삼성서울병원이 공동 진행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갤럭시 버즈 프로의 ‘주변 소리 듣기 기능’이 경도 및 중도 난청 환자들의 듣기 능력 향상에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보청기를 평가하는 요소인 △출력 음압 수준 △주파수 범위 △등가 입력 잡음 △전체 고조파 왜곡 등에서도 기준을 충족시킨 것으로 나왔다. 주변 소리를 최대 20데시벨까지 증폭해 이어폰을 귀에서 빼지 않고도 대화를 하거나 안내 방송을 들을 수 있도록 만들어진 ‘주변 소리 듣기 기능’이 보청기의 역할을 한다는 연구결과다.
갤럭시 버즈 프로는 보청기와 개인용 소리 증폭기와 함께 기기 착용 전후 발화된 단어의 인지 정도의 차이 검사에서도 유의미한 연구결과를 보였다. 이는 무선이어폰이 잠재적으로 경도·중도 난청 환자들이 일상에서 대화하는 데 있어 도움을 줄 수 있음을 시사한다. 다만 무선이어폰의 이러한 기능은 기존의 ‘소리증폭기’와 비슷한 효과를 보일 뿐, 보청기의 역할을 대체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이야기다.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 김 교수는 “무선이어폰의 소리 증폭 기능은 소리증폭기와 비슷해, 만족도와 효과 역시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며 “소리증폭기의 경우 충분히 큰 소리도 여과 없이 증폭시키기 때문에 소음성난청을 유발할 가능성이 있고, 이는 무선이어폰 역시 예외는 아니다”라고 우려했다. 무선이어폰은 난청 환자들의 증상을 의학적으로 고려해 개발된 기기가 아니므로 보청기의 역할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는 설명이다.
국내 연구진이 50~64세 사이 중년 여성의 근감소증과 비만, 심혈관질환 사이 관계성을 밝혀냈다. 폐경 전 중년 여성이 근감소증이 있으면 상대적으로 비만율이 높고 심혈관질환 관련 위험 지표 수준이 높으며, 칼슘·칼륨 등 영양소 섭취 상태가 가장 취약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6일 한국식품커뮤니케이션포럼에 따르면 경일대 식품개발학과 김미현 교수가 2009년~2011년 국민건강영양조사에 참여한 50~64세 여성 2038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연구 결과가 이와 같이 나타났다. 연구진은 폐경 전 정상 그룹, 폐경 전 근감소증 그룹, 폐경 후 정상 그룹, 폐경 후 근감소증 그룹 등 총 4그룹으로 나눈 뒤 그룹별 식생활 상태 등을 분석했다. 50~64세의 신중년 여성 중 근감소증 유병률은 6.5%였다.
그 결과 근감소증이 있는 중년 여성의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는 근감소증이 없는 여성보다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뇨병의 진단 지표인 당화혈색소와 혈중 비타민 D 농도 역시 근감소증이 있는 여성이 없는 여성보다 낮았다. 근감소증이 있는 여성은 없는 여성보다 칼슘, 칼륨, 니아신(비타민 B군의 일종) 섭취량도 적었다. 근감소증이 있는 폐경 전 여성의 칼륨·칼슘 섭취량이 특히 부족했다.
또한 근감소증이 있으면 폐경 여부와 무관하게 복부 비만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근감소증이 있는 여성이 정상 그룹 여성보다 체중·허리둘레·체질량지수(BMI)가 높았던 것.
얼굴·종아리 주목하고 앉았다 일어나기 해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근감소증은 노화로 인해 근육량이 줄어들고 근육 기능이 저하되는 질환으로 노년기 만성질환의 원인이다. 노인의 운동능력과 일상생활 수행 능력을 저하시키고, 신체기능을 감소시키며 낙상과 골절 위험을 키우는 등 노년기 삶의 질을 크게 떨어뜨리는 주범이기도 하다.
건강한 노년 생활의 적, 근감소증을 간단하게 진단해볼 수 있는 방법이 몇 가지 있다. 우선, 얼굴 살이 유독 많이 내렸다면 근감소증을 의심해봐야 한다. 평소 영양 섭취가 골고루 이뤄지지 않으면 얼굴의 피하 지방이 빠지고, 음식물을 씹는 저작 능력이 떨어져 턱 근육이 빠지고 얼굴이 갸름해 보이기 때문이다. 장일영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교수는 “볼살이나 줄어드는 것은 근감소증을 나타내는 지표로 볼 수 있다”며 “이때 턱 근육과 저작 기능이 전반적으로 저하돼 삼킴장애가 동반되는 경우가 흔하다”고 말했다.
신체에서 근육 감소가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곳이 종아리다. 전신의 근육량이 종아리 둘레와 비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경희대병원 가정의학과 연구진에 따르면 근감소증 환자의 82%는 종아리 둘레가 32㎝ 미만이었다. 성별이나 키에 관계없이, 65세 이상의 어르신 중 종아리 가장 굵은 부위 둘레가 32㎝미만이라면 근감소증을 의심해볼 것을 조언했다.
종아리 둘레를 재는 방법은 간단하다. 두 엄지손가락과 검지손가락을 각각 맞대 넓게 만들어진 원, ‘핑거링’으로 종아리 가장 굵은 부분을 감싸면 된다. 이는 도쿄대 노인의학연구소가 개발한 ‘핑거링 테스트’ 방법으로 일반 성인의 핑거링 둘레는 30~32㎝다. 이때 종아리가 얇아 핑거링이 남는 사람은 근감소증 위험이 종아리가 핑거링보다 굵은 사람보다 6.6배 더 높았다. 핑거링이 종아리에 딱 맞는 사람은 2.4배 가량 높았다.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 같은 간단한 운동으로도 근감소증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의자에 앉았다 일어서기 5회를 15초 안에 하지 못하면 근감소증으로 진단한다. 이는 유럽노인병학회에서 발표한 ‘근감소증 새로운 진단 기준’에 포함됐다.
하체 근육 운동시키고, 단백질·비타민 D 섭취해야
근감소증을 치료할 수 있는 약물은 아직 개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근감소증 진단을 받았다고 해서 자포자기할 필요는 없다. 근력운동과 단백질 섭취 등 꾸준한 관리를 해주면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하체 근육 키우는 데에 신경써야 한다. 근육의 70%는 하체에 있으며, 우리 몸을 지탱하는 곳이기 때문에 하체 근력이 건강에 미치는 영향은 지대하다. 전문가들이 중장년층에게 추천하는 운동은 앉았다 일어서기, 계단이나 비탈길 오르기 등이다. 산책할 때도 평소 걸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걷는 것이 좋다.
비타민 D는 칼슘의 체내 흡수를 도와 골다공증·골절을 예방하고 면역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에 중년 여성의 근감소증과 비만, 심혈관질환의 연관성에 대해 연구한 경일대 연구진은 논문에서 “근감소증이 있는 여성의 경우 뼈 건강관리에 신경 쓰고, 계란·우유 등 비타민 D가 함유된 식품을 자주 섭취할 것”을 당부했다.
운동할 때도 야외에서 햇빛을 쬐는 것이 좋다. 햇볕을 충분히 쬐면 체내에서 비타민D가 생성되기 때문이다. 경일대 연구진은 논문에서 하루에 20~30분은 야외에서 햇볕을 쬐어줄 것을 권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선크림을 두껍게 바르면 비타민 D가 생성되지 못해 결핍 증세를 보일 수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 연구진은 이외에도 단백질, 칼슘, 칼륨, 니아신 등 근육 대사와 관련 있는 영양소가 충분히 포함된 음식을 섭취할 것을 당부했다.
연구에 참여한 김미현 경일대 식품개발학과 교수는 논문에서 “중년 여성의 적절한 칼로리 섭취, 신체활동을 병행한 비만 관리, 건강 체중 유지가 근감소증 위험을 낮추는 데에 이롭다”며 “근감소증 발생 위험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다 보면 심혈관질환의 발생 위험도 함께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했다.
습관이라는 단어를 보고 있노라니 가파른 언덕이 떠오른다. 꼭대기를 쳐다보면 한두 번 한숨이 쉬어지고 마음을 다잡아야 비로소 첫걸음이 내디뎌지는 기나긴 비탈길이 눈앞에 펼쳐진다.
누구나 알다시피 습관에는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이 있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똑같이 습관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때가 있다. 좋은 습관이란 예를 들어 매일 일정한 시간 동안 운동을 한다거나 혹은 매일 한 시간씩 일찍 일어나 책을 읽는다거나 하는 행동일 것이다. 그런 행동이 몸에 배려면, 비탈길을 한 걸음씩 쉬지 않고 올라갈 때처럼 몸을 뒤로 잡아당기는 무거운 저항과 오래 싸워야 한다. 익숙해져서 저항이 느껴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도, 이번에는 자잘한 지루함이나 피로를 견뎌야 한다. 좋은 습관이란 아무리 몸에 익어도 의식적으로 애써서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나쁜 습관은 그렇지 않다. 비탈길을 달려 내려가는 것처럼 그다지 어렵지 않게 몸에 붙는다. 심지어 언제 내 몸이 그런 행동을 시작했는지 의식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몸에 붙는 것은 쉽지만 멈추기는 힘들다. 나쁜 습관을 버리려면, 좋은 습관을 몸에 배게 할 때처럼 의식적으로 꾸준히 통제해야만 한다. 좋은 습관과 나쁜 습관을 유지하는 것은 마치 가파른 언덕의 오르막길을 오르는 것과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것처럼 전혀 다르다. 그러니 똑같이 습관이라는 말이 붙어 있다고 해서 두 가지 행동을 동일한 범주에 집어넣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매일 잠자리에 들기 전에 혼자 와인 한두 잔 마시는 습관이 있었다. 언제 시작되었는지는 모른다. 집 밖에서는 아무래도 귀갓길 걱정도 있고 해서 마음 놓고 술을 마시지 못한다. 그래서 집에 돌아와 여운이 남은 한두 잔을 보충하다가 습관이 되었을 것이다. 습관이 되고 난 다음에는 와인을 마시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았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한두 잔이 아니라 반 병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마시고 어떻게 쓰러져 잤는지 모르는 경우도 가끔 생겼다. 당연히 다음 날에는 두통에 시달리고 몸이 무거워 자리에서 일어나기 힘들었다. 굳이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은데, 좋은 습관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아침마다 황폐한 기분으로 죄책감을 느끼며 일어나고,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하는 날이 점점 늘어났다. 와인을 사는 데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이제는 그만 마셔야겠다고 몇 번을 결심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슈퍼마켓에 가면 저절로 와인 판매대 앞으로 발길이 옮겨졌다. 이런저런 와인 병의 라벨에 적힌 품종이나 제조연도를 읽어보면서 시간을 보낸다. 자줏빛으로, 혹은 옅은 라임빛으로 투명하게 빛나는 병들은 어쩌면 그렇게 완벽한 곡선을 지니고 있는지! 그냥 돌아서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손이 간다. 마지막으로 딱 한 병이라고 다짐하면서 장바구니에 담는다. 이런 과정을 되풀이하면서 애써 와인 사는 횟수를 줄이는 데는 성공했으나 완전히 끊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건강에 이상을 느끼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몸의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똑바로 걷기도 힘들었다. 인터넷에서 증상을 검색해보다 ‘이석증’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비인후과를 찾아갔다. 병원에서 이런저런 검사와 치료를 받고 증상이 많이 호전되었다. 이후 와인 마시는 습관을 끊을 수 있었다. 이석증과 음주가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부터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쩌다 사람들과 어울려 한두 잔 마시면 어지럽고 메슥거리기만 했다. 그렇게 끊으려고 애썼던 나쁜 습관이 결국 몸이 거부하니 저절로 사라지고 말았다.
날마다 와인 마시는 습관을 이어간 것은 잠이 오지 않아서라는 핑계도 있었지만, 책을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좋은 느낌이 더 증폭되기 때문이기도 했다. 맨정신으로 보면 무심하게 넘어갔을 문장이나 흘려듣게 되는 선율이 더 감동적이고 아름답게 느껴졌다. 모든 사물의 이면에 깊고 신비한 의미가 감춰져 있는 듯 느껴지던 사춘기 시절의 감수성이 돌아오는 것 같았다. 그래서 혼자 책상에 앉아 와인을 마시며 책을 읽고 음악을 듣고 영화를 보는 달콤한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몸이 분명한 신호를 보내기 전까지는.
나이 들고 노년기를 코앞에 두면서 점점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사는 게 아니라 몸의 신호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낀다. 젊은 시절에는 하루이틀 잠들지 않고 시험 공부를 하거나, 친구들과 술 마시고 놀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몸이 우리의 의지나 감정에 따라주었고, 견뎌주기도 했다. 물론 나는 몸과 마음이 분리되어 있거나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젊은이의 욕망과 감정이 격렬할 수 있는 것은 몸이 충분히 받쳐주는 에너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몸이 달라졌는데 마음이 착각하는 일이 종종 생긴다. 마음은 과거의 빛나는 경험을 쉽게 잊지 못한다. 이제는 다른 몸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과거에는 젊은 사람들이 나이 든 사람의 지혜를 배우고 행동을 모방하려 했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나이 든 사람이 젊은 사람의 외모나 행동을 따라 하려 애쓴다. 이따금 나는 스스로 묻는다. 젊은 시절이 지금보다 더 행복했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가? 그리고 아니, 그렇지 않다고 대답한다. 만약 조금이라도 젊은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젊은 외모나 건강한 신체 때문이 아니라,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으로 그때 좀 더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지금과 다른 삶을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회한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또다시 나 자신이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는 혼란과 불안 속으로 돌아가야 한다면, 온갖 억압과 저임금과 소외감에 시달려야 한다면, 나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래서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생겼을 때, 나는 생각했다. 지혜로운 선택을 해서 다른 삶을 사는 것은 굳이 젊은 시절로 돌아가지 않더라도 여전히 가능한 일 아닐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하던 일들을 조금씩 정리하고, 하고 싶었으나 이제까지 못 했던 일들을 하면 어떨까?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기 위해 이런저런 인문학 강좌를 듣기도 하고 장편 소설 읽기 세미나나 독서 모임 같은 곳에 참여하기도 했다. 이런 강좌나 모임에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얻기도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평범한 일상에서는 만날 일이 없던 낯선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이와 학력과 직업이 나와 전혀 다른 사람들을 만나 함께 책을 읽고 강의를 들으니, 일신상의 정보나 주고받는 대화가 아닌 새로운 유형의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것이 나에게 가장 필요한 ‘다른 삶’이었고, 무의식 속에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아쉽게도 새로운 대화 이상의 깊은 교류를 맺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수강한 철학 강좌의 강사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나오는 ‘약속할 수 있는 인간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인간’이라는 구절을 설명하면서 ‘약속하는 나’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어렵고도 세세한 설명은 듣고 곧 잊었으나, 사례로 들었던 강사 자신의 이야기는 잊을 수 없었다. 그분은 15년 전쯤 건강이 나빠져서 요가를 배웠는데 놀랍게도 건강이 점차 좋아지는 기미가 보였다. 그래서 어느 날 스스로에게 약속했다고 한다. 지금부터 죽는 날까지 매일 요가를 하겠다고. 그날부터 그분은 정말로 하루도 빠짐없이 요가를 했다고 한다. 자그마치 15년 동안!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매우 놀랐고, 설마 하루도 안 빠졌을까 의심스럽기도 했다. 아플 수도 있고 너무 바쁠 수도 있고 그냥 까맣게 잊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고는 해도 거의 빠지지 않고 매일 요가를 했으니 저렇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이 내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몇 달 전 허리 통증이 심각해지면서 아침마다 간단한 스트레칭에 가까운 요가를 시작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하지는 못하고 있으나 일주일에 적어도 네다섯 번은 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요가를 하면 저녁 무렵에는 반드시 한 시간쯤 동네 공원을 걷게 된다. 이상하게도 요가를 하지 않은 날에는 걷는 운동도 내키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는 일에는 확실히 관성이 작용하는 것 같다. 어쨌든 평생 운동과는 담을 쌓고 살았는데, 규칙적으로 가벼운 운동을 하면서 뭔가 큰 변화를 이룬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 겨우 몇 달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노년이란 찬란하거나 아름다운 성취를 위한 시간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부록 같은 시간이라고 생각한다. 의무적으로 집중해서 읽어야 하는 본문과 달리 맘 편히 설렁설렁 읽을 수 있는 보너스 같은 내용이 담긴 게 부록일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에게는 부록이 허락되지 않는 경우도 있고, 본문보다 치열하게 부록을 읽어야 하는 경우도 있다.
나의 바람은 적절하게 독립적이고 적절하게 치열한 노년이다. 이제까지 습관적으로 하던 일들을 가능한 한 하지 않고, 습관을 거스르는 새로운 습관이 몸에 배도록 하고 싶다. 직업 탓인지 성향 탓인지 살아오는 동안 사람들과 교류가 적었고 인간관계가 편협했다. 이제는 사회적으로 또 정서적으로 사람들과 교류하는 폭을 넓히고 싶다. 주위에는 이제 새로운 사람들을 사귀거나 만나고 싶지 않다는 친구들이 가끔 있다. 지금까지의 인간관계만으로도 피로감을 느낀다고 호소한다. 나는 그렇지 않다. 여전히 낯선 이들에 대한 호기심이 남아 있다. 평생 직접 사람을 만나기보다는 책 속의 인물과 더 가깝게 만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만남을 후회하지는 않으나 내가 놓쳤던 경험을 한번 붙잡아보려는 시도는 하고 싶다. 나이나 계층이나 직업 같은 경계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현실의 사람들과 진지한 대화를 나눠보고 싶다.
또한 홀로 생활하는 데 어렵지 않도록 건강에 큰 문제가 없기를 바란다.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내 몸을 잘 돌봐야 할 것이다. 가벼운 운동을 계속하고, 생활하면서 반드시 해야 하는 자질구레한 집안일도 손에서 놓지 않을 작정이다. 죽을 때까지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들고, 내가 사는 집을 청소하고, 내가 입을 옷을 손질하는 게 나의 목표이면서 약속이기도 하다. 조금 더 욕심을 부려본다면, 이따금 낯설고 먼 곳으로 여행할 수 있는 건강을 유지하면 좋겠다. 너무 큰 욕심일까?
‘약속하는 나’라는 구절은 나에게 와서 ‘좋은 습관을 유지하는 나’로 바뀐 것 같다. 흔히 사람은 습관의 동물이라고들 한다. 알고 보면 내가 나라고 믿고 있는 정체성은 주위 사람들과의 교류, 그리고 오래 지속되어온 나의 습관적 사유와 행동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비탈진 언덕길을 날마다 한 걸음씩 힘들게 오르다 보면 어느 순간 풍경이 변화하는 지점이 나타날 것이다. 습관이 인생을 바꿀 수 있음을 믿게 되는 순간이다. 약속하는 내가 미래의 나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겠다.
국내 연구진이 꾸준한 운동과 약 조절 등으로 노인이 건강하게 지낼 수 있는, 일상을 좀먹는 ‘노쇠’ 예방 방법을 찾아냈다.
노쇠는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정도로 기능이 심각하게 떨어진 상태를 말한다. 노쇠한 노인들은 식사량이 떨어지고 걸음 속도가 느려지며 활동력도 눈에 띄게 떨어진 모습을 보인다. 단순히 나이가 들어 신체 능력이 젊은 시절보다 떨어지는 현상을 의미하는 ‘노화’와는 다르다.
서울아산병원 노년내과 장일영 교수 연구진이 노쇠를 예방하기 위해 운동, 영양, 복용 약 조절 등을 관리하면 건강수명이 늘어난다는 연구 결과를 8일 발표했다. 건강수명은 평균 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몸이 아픈 기간을 제외한 것으로, 질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기간을 나타내는 건강 지표다.
연구진은 강원도 평창군 보건의료원과 평균 나이 77세 노인 383명을 대상으로 2015년 8월부터 2017년 1월까지 노쇠 예방 프로그램의 효과를 분석했다. 187명의 노인은 6개월 간 꾸준히 노쇠 예방프로그램을 따르게 했고, 196명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않았다. 연구진은 프로그램을 마친 뒤 2년 간 두 그룹의 변화를 비교했다.
분석 결과 프로그램 참여 그룹의 노인들은 평균 28.5개월을 요양병원이 아닌 집에서 지냈다. 30개월 동안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생존한 비율은 87%에 달했다. 반면 미참여 그룹은 23.3개월만에 숨지거나 요양병원에 입원하면서 집을 떠났다. 집에서 30개월을 생존한 노인은 64.9%에 불과했다. 일반적으로 노인이 요양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건강한 생활을 하면 삶의 질도 더 낫다.
장일영 교수는 “의료진과 함께 전문적으로 노쇠를 예방하기 위해 신체 및 정신 건강, 외부 환경 등을 세밀하고 종합적으로 관리하면 장기적으로 노년층의 삶의 질과 건강 상태가 훨씬 좋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연구는 영국 노인의학학회에서 발간하는 국제학술지 ‘나이와 노화’(Age and Ageing) 최근호에 실렸다.
연구진이 활용한 노쇠 예방 프로그램 내용은 다음과 같다.
ㆍ운동
스쿼트·플랭크 등 근력 운동 20분, 한발 들고 서 있기 등 균형 운동 20분, 빨리 걷기, 계단 오르내리기와 같은 유산소 운동 20분 등으로 1시간 운동한다. 일주일에 두 번씩 매 달 강도를 조금씩 올리며 실시했다.
ㆍ영양
노년층에 부족한 탄수화물, 단백질, 필수 아미노산, 지방 등이 골고루 함유된 식품을 하루에 두 번씩 섭취한다.
ㆍ우울증
미국정신보건연구원에서 개발한 우울증 검사(CES-D)를 활용한다. 우울증이 의심되면 의료진이 월 1회 상담 치료한다. 필요시 약을 처방하거나 관리한다.
ㆍ약조절
노인은 여러 만성질환을 앓고 있어 많은 약을 복용한다. 꼭 필요한 약만 복용할 수 있도록 복용 약제를 관리한다.
ㆍ낙상 예방
간호사가 주기적으로 집을 방문해 낙상 위험 요인을 제거한다. 지역 사회의 도움을 받아 화장실에 손잡이를 달고 낙상 방지 슬리퍼 등을 제공한다. 방바닥 장판 중 튀어나온 부분이 있으면 제거한다.
치매는 노년기를 위협하는 질병이자 노인들의 가장 큰 두려움이다.
중앙치매센터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 65세 이상 노인 열 명중 한 명은 치매를 앓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2025년 초고령사회 진입을 앞둔 가운데, 의학 기술의 발전으로 많은 노화 관련 질병에 대한 치료법이 개발되고 있다. 하지만 치매는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에 세계 각국에서 치매를 정복하기 위한 노력을 다양한 방법으로 이어가고 있다. 네덜란드와 영국, 일본에서 이용하고 있는 세계의 신박한 치매 치료 방법 세 가지를 소개한다.
치매 노인끼리 떠나는 버스 여행부터 해변에서의 소소한 휴가까지
네덜란드 두틴험 시의 한 치매 요양시설에서는 시내 버스를 운행하는 치매 노인과 그 뒤에 탑승해 농담을 주고 받는 치매 노인들을 볼 수 있다. 해변에서 가까운 하를렘 시의 요양시설에 머무는 치매 노인들은 시설 내 해변에서 소소한 휴가를 보낸다. 이 모든 일은 요양시설 안의 ‘시뮬레이션 방’에서 이뤄진다.
시뮬레이션 방은 일상에서 만날 수 있는 환경을 그대로 구현해 놓고 있다. 평소 외출할 때 탔던 버스에 타면 창밖으로 보이는 가로수가 늘어선 네덜란드의 시골길을 볼 수 있다. 해변을 구현한 방에서는 진짜 모래가 깔려 있고 이따금씩 철썩이는 파도 소리도 들린다. 심지어 해변의 열기가 느껴지는 곳에서 맛 보는 아이스크림까지 그대로 재현했다. 이 모든 것은 창문 위치에 달린 화면에서 반복적으로 재생되는 시골길 영상, 열기를 조성하는 램프 등으로 만들어진다.
네덜란드의 이례적인 치매 치료 방식을 보도한 뉴욕타임스에 따르면 2018년 기준 네덜란드의 64세 이상 인구 320만 명 중 약 8.4%인 27만 명이 치매를 앓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는 2043년 전까지 그 수가 두 배로 늘어날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고령층 환자의 스트레스를 줄이고 증상도 낮출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심 끝에 고안해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리고, 카페나 버스 정류장, 펍 등 일상에서 마주하는 장소를 구현해낸 시뮬레이션 방을 가족이나 시설에서 함께 지내는 노인들과 함께 이용하도록 한 것이다.
빛과 향, 마사지, 음향을 이용하는 시뮬레이션 방은 1990년대부터 네덜란드 전역의 의사와 치매 간병인이 개척해 온 방식이다. 침대 위에서 안정을 취하게끔 하거나 약물을 처방하는 정통적인 치매 치료법을 거스른다. 에릭 스헤르데르(Erik Scherder)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신경 심리학 교수는 뉴욕타임스와 인터뷰에서 “환자의 스트레스와 불편함을 낮출 수 있다면 생리적 효과를 볼 수 있다”고 언급했다. 또 네덜란드의 한 치매 환자 담당 간병인은 “이런 형태의 시뮬레이션이 실제로 치매 환자에게 투입되는 약물 치료의 필요성을 낮춘다”고 증언했다.
치매 환자도 자유롭게 지출하게, 시브스타(Sibstar)
영국에는 치매를 앓는 노인이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하는 핀테크(FinTech) 스타트업이 있다. 바로 ‘시브스타(Sibstar)’로, 치매 환자가 스스로 일상 지출을 관리할 수 있도록 설계한 보안 카드와 애플리케이션(앱)을 제공한다. 핀테크는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로 금융과 IT의 융합으로 생겨난 금융서비스다.
시브스타는 부모님 두 분이 모두 치매를 앓고 있는 창업자이자 CEO 제인 시블리(Jayne Sibley)의 경험에서 시작됐다. 시브스타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 ‘Sibstar’에 게재된 인터뷰 동영상에서 그는 “치매 환자인 부모님이 남의 도움 없이 스스로 무언가를 구매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잘못된 제품을 구매하는 등 치매 환자인 부모님이 돈 관리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목격했다. 활발하고 사교적인 성격의 부모님이 치매라는 질병에 구애 받지 않고, 스스로 상점이나 카페를 가고, 요가 수업을 등록하는 등 일상을 누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사업을 구상했다.
시브스타는 앱이나 홈페이지로 서비스를 신청한 사람에게 선불 체크카드를 보내준다. 시브스타 앱으로 체크카드에 연결된 계좌로 돈을 입금해 카드를 사용하면 된다. 앱으로 온라인이나 오프라인 상점, 현금이나 포인트 방식 등 치매 환자가 주로 카드를 사용하는 장소나 결제 방식을 미리 선택할 수 있다. 또한 앱으로 카드 사용자인 치매 환자와 가족 또는 법적 대리인이 매일 카드 사용 내역을 확인하고 관리할 수 있어 치매 환자가 소비 활동을 자유롭게 할 수 있다.
영국 유일의 치매 환자를 위한 핀테크 기업인 시브스타는 아이디어와 효과를 인정받아 지난해 설립돼 영국 알츠하이머학회 액셀러레이터 프로그램(Alzheimer's Society Accelerator Program)에 선정됐다.
테라피 독·테라피 캣과 함께하는 노인, 애니멀 테라피
개나 고양이 등의 반려동물을 치매 노인의 심리 치료에 활용하는 애니멀 테라피(animal theraphy)도 있다. 지난달 26일 지지통신은 일본 환경성이 내년부터 지자체가 보호하는 개·고양이를 병원이나 요양원에 제공하는 사업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애니멀 테라피(animal theraphy)를 희망하는 병원이나 요양원에서 ‘테라피 독’과 ‘테라피 캣’으로 노인의 심리치료를 담당한다.
다비드 쿠르토(David Curto) 알츠하이머성 치매 전문 의사는 스페인의 건강보험그룹 ‘사니타스’(Sanitas)의 소식지의 칼럼에서 반려동물을 이용한 요법을 알츠하이머성 치매 치료법 7가지 중 하나로 소개한 바 있다.
반려동물의 이름을 기억하고, 식사를 챙겨주고, 산책을 시켜주거나 털을 빗겨주는 등의 행동이 치매 환자의 정신 상태나 기동성을 향상시킨다. 또 다비드 쿠르토는 반려동물이 주인에게 보이는 애정이 치매로 인한 사회적 상호작용의 결핍을 채워준다고 설명했다. 그는 “반려동물을 키우는 일은 치매 노인의 신체, 인지, 감정, 사회적 부분 등 모든 면을 개선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적었다.
국내에서도 전자약이나 디지털 치료제, 추억의 가요 가사가 수록된 음악 퀴즈 책자를 제공하는 등 신박한 치매 치료 방식이 등장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은 도입 단계에 머물고 있다. 중앙치매센터는 2060년 치매 유병률이 20%를 웃돌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른 나라의 사례를 참고해 우리나라의 시니어들이 덜 아프고, 더 행복한 사회가 하루 빨리 준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행복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보통 사람들은 건강과 돈, 가족과 친구, 명예 등을 떠올린다. 반면 삶을 이루는 다양한 요소 중 하나인 습관을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다. 그러나 잘 들인 습관이 열 가지 노력 부럽지 않다는 말도 있듯, 습관에는 노년기의 삶을 청춘의 것처럼 빛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커버스토리에서 ‘습관의 물리학’을 다뤘다. 나쁜 습관의 최고봉인 분노를 다스리는 방법 ‘아하! 내가 지금 화를 내고 있구나!’, 이퇴계의 생활 습관, 습관적 사유와 행동 그리고 ‘약속하는 나’ 등의 콘텐츠를 담았다. 비대면 시대의 시니어가 SNS 사용 시 주의해야 할 나쁜 습관과 좋은 매너, MZ세대에게 배우는 리추얼, 미국 시니어들의 일상 습관을 들여다보며 하루를 달라지게 만드는 웰에이징 습관은 시니어 독자로 하여금 좋은 습관을 들이게 해 주는 안내자가 될 것이다.
‘나는 원래 웃겼다’는 탤런트 김성환을 표지와 기사로 만날 수 있다. 베테랑 연기자이자 30년 넘는 경력의 라디오 진행자, 예능 MC까지 일흔이 넘은 나이에도 종횡무진 활약하는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인생 철학은 무엇일까. 성공한 방송인이자 가수,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그의 변죽 좋은 인생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웃음이 터져나온다.
스페셜 인터뷰에서는 더 나은 사회를 바라는 이병철 신한은행 퇴직연금그룹 부행장을 만났다. 은퇴한 시니어가 두 번째 인생을 즐기며 의미 있게 놀고, 행복한 인생을 스스로 만들기를 바란다는 그. 이 부행장에게서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뒷얘기와 신한은행이 바라보는 새로운 시니어 라이프 가치 등에 대해 들어봤다.
참 좋은 시절에서는 서울월드컵경기장과 올림픽체조경기장, 리츠칼튼호텔과 박경리문학관 등을 설계한 대한민국 대표 건축가 류춘수를 만났다. 그의 대표작이자 출세작인 서울월드컵경기장 설계를 맡을 때, 건축계의 ‘골리앗’ 현대건설을 상대로 던진 다윗의 승부수가 무엇이었는지 기사로 확인해보자.
추석 연휴가 있는 9월, 오랜만에 만난 가족과 기분 좋게 대화하는 데 필요한 세대공감 소통법도 담았다. 배우 윤여정과 유튜버 밀라논나, 외식사업가 백종원 등 청년과 원활히 소통하며 인기를 얻고 있는 시니어 3인방의 소통 노하우도 참고할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인 우주여행 이야기도 담았다. 시니어들의 오랜 로망 우주여행이 국내에서도 가능할 수 있을지, 트렌드 톺아보기에서 국내 우주여행의 현재와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신문물 설명서에서는 5060세대에게 더 나은 쇼핑 ‘옴니채널’을 소개한다. 온라인과 오프라인 쇼핑 채널의 장점만 모아 유기적으로 연결한 옴니채널을 이해하고 나면 쇼핑이 더욱 즐거워질 것이다.
추어탕, 판소리와 광한루의 고장, 남원. 보고 듣고 느끼고 즐길 거리 많은 이곳에 최근 여행자들 사이에서 주목받고 있는 새로운 명소가 등장했다. 감성 솔솔! 미술관 여기에서는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을 소개한다. 매혹적인 물의 정원과 ‘생명 작가’ 김병종 미술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곳, 김병종미술관으로 떠나보자.
이 외에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미숙했던 지난날을 위로하고 남은 날의 성숙한 촉매제가 되어줄 ‘브라보 마이 러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대상 수상작 ‘대륙에서 길을 묻다’ ▲재개발과 재건축에 투자할 때 유의해야 할 점들을 알려주는 구해줘 부동산 ▲연금부자로 가는 지름길 TDF를 소개하는 생활 속 법률 상식 ▲나도 지구도 건강해질 수 있는 특별한 운동 ‘플로깅’을 소개하는 ‘코로나19와 함께 사는 세상’ 등의 알찬 콘텐츠로 시니어 독자들에게 다양한 읽을거리를 선사한다.
고품격 시니어 매거진 ‘브라보 마이 라이프’ 9월호는 전국 서점과 인터넷에서 바로 구매할 수 있다.
영화표를 받아든 김 씨는 빠른 말소리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표를 사려는 오십대 여자 셋이 보였다. 카드를 꺼내고 지갑을 뒤적이며 네가 사네, 내가 내네 하면서 부산을 떨고 있었다. ‘웬 젊은이들이’ 김 씨는 여자들을 보자 이 공간의 냄새가 달라지고 자신의 연령대가 내려가는 착각이 들었다. 십여 년 전이었다면 영역을 침범당한 느낌이 들고 혹여 영감들 가슴에 바람이 들면 어쩌나 하는 괜한 걱정을 했을 수도 있다.
김 씨는 요건 몰랐지 하는 기분으로 중년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한 사람당 삼천 원이고, 쿠폰에 도장을 다 받으면 나중에 공짜로 한 편 더 볼 수 있다우.”
김 씨는 일곱 개의 도장이 찍힌 쿠폰을 내밀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어르신, 참 고우시네요.”
“호호, 이제 뭐…… 오 년 전이면 모를까.”
김 씨는 좋아서 입을 다물 줄 모르며 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어르신’이란 호칭 대신에 ‘할머니’라고 불렀다면 이렇게까지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이건 아이건 왜 호칭에 민감한지. ‘할머니, 할아버지’란 ‘나이가 들어 늙은 사람’인데 사람의 심리가 요상하여 ‘나이가 들어’ 라는 앞의 말에 신경 쓰기보다는 ‘늙은 사람’이란 뒤의 말에 민감해진다. 앞에 붙여진 ‘나이가 들어’라는 다섯 글자에는 사람들 제각각의 얼마나 많은 의미와 사연이 담겨 있던가? 김 씨는 아등바등하지 않고 탐욕스럽거나 심술궂지 않게 나이 들기를 원하면서도 할머니란 호칭이 꺼려지는 자신이 우습다고 느껴졌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자리를 뜨는 사람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요의가 느껴지지 않는데도 화장실을 다녀왔다. 간 김에 거울 한 번 들여다보고 하나뿐인 꽃분홍 립스틱으로 입술도 덧칠하고 나왔다.
상영관으로 들어가려는데 좀 전에 만난 여자들이 상영 시간표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벽에 붙어있는 공책만 한 인쇄물은 멀리서 보기엔 힘들었다. 노년층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마련된 영화관이다 보니 상영작 포스터도 없고 상영관은 하나뿐이고 테이블이 세 개 놓인 대기실 한쪽엔 천 원짜리 믹스 커피를 파는 간이매점이 고작이었다. 그 중 한 여자가 안경을 고쳐 쓰며 용지에 코가 닿도록 얼굴을 내밀었고 김 씨는 재밌다는 표정을 지었다. 몇 년 전에 노안 수술을 한 김 씨 눈엔 웬만한 글씨는 잘 보이고 고가의 보청기 덕분에 청력도 좋지만, 좋아서 오히려 불편할 때도 있었다. 나이가 들면서 웬만한 것은 못 본 척, 못 들은 척하라고 시력과 청력이 나빠지는 것이라지만, 잘 안 보이고 잘 안 들린다는 이유로 젊은이들로부터 괄시받고 싶진 않았다. 오메가 쓰리와 은행잎 제제를 매일 챙겨 먹고 영어 공부도 30분씩 했다. 휴대폰을 켜면 바로 영어 단어 앱이 떴고, 건강 보조 식품 챙겨 먹는 시간도 휴대폰의 알람이 꼬박꼬박 알려주었다. 치매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식한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휴대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땐 신인류의 일원이 된 것처럼 기뻤다. 설레는 김 씨를 위해 처음에는 휴대폰 사용법을 부드러운 말씨로 설명해 주던 아들이 반복적으로 물었더니 나중엔 짜증을 냈다. 아들의 구박을 감수한 덕분에 이젠 인터넷을 통한 물건 구입과 영화 예매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 한때는 지인들이 보내주는 동영상이며 좋은 글귀를 친구들한테 퍼 나르기도 했으나 글대로 실천도 못하면서 누군가에게 읽으라고 강요하듯 보내는 일이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고 나서부터는 그만두었다. 망측한 사진을 받고 놀라서 휴대폰을 던져버린 적은 있지만, 적어도 김 씨가 자식한테 잘못 전달하는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다. 하지만 새벽에 문자를 보내기도 하고 노인들 사이에 떠다니는 가짜 뉴스를 구분하지 못하고 그대로 믿고 흥분하기도 했다. 태극기 부대에 참석한 경험도 있는데 정치적 신념이 확실해서라기보다는 군중 심리와 함께 이 나이에도 정치에 관심이 있는 깨인 노인이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지금 상영할 건 이거예요.”
김 씨가 손가락으로 용지를 짚으며 말하기가 무섭게 일행 중 한 명이 톡 튀어들었다.
“아닌데…… 요거네요.”
김 씨 얼굴이 붉어졌다.
“나 좀 봐, 참.”
계면쩍은 김 씨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사람들이 들고나느라 문 주변이 번잡했다. 상영관 입구로 밀려나는 와중에도 김 씨는 오지랖이 문제라고 생각했다.
안으로 들어간 김 씨는 실내 전체를 훑어보다가 특정 위치에 잠시 시선을 던지곤 미소를 지었다. 등받이를 손으로 잡으며 자신이 선호하는 G7 자리를 향해 한 계단씩 조심스럽게 내려갔다. 뉴스에서 G7이란 단어를 가끔 들어서 익숙한 탓도 있고 근사해 보이기도 해서 그 자리를 고집하는 김 씨를 위해 카운터에서는 표를 따로 빼서 보관해두곤 했다.
전에 발을 헛디뎌서 계단을 구른 영감이 있었다. 김 씨는 그 장면을 보고 눈을 돌렸던 기억을 떠올렸다. ‘남들도 내가 넘어지면 자신을 보는 것처럼 민망해하겠지.’
G7 바로 앞자리엔 박 씨가 앉아 있었다. 김 씨는 박 씨를 실버 영화 카페 모임에서 알게 되었다. 소위 M.C커플이다. 산행을 같이 다니는 연인들도 M.C커플이라고 부르고 콜라텍에서 만난 인연들은 C.C커플로, 복지관에서 만난 연인들은 B.C커플로 불린다. 박 씨는 말수가 적었지만 영화 얘기만 나오면 술술 말을 잘 이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웬만한 영화 제목과 주인공 이름들을 기억하는 편이었다. 김 씨는 영화 얘기를 들을수록 박 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는데 젊어서부터 영화는 혼자 본다는 말 때문에 그가 더욱 근사해 보이는지도 몰랐다.
김 씨는 알은 체를 하지 않고 자리에 앉으면서 부러 큰 소리로 음, 음 거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박 씨가 뒤를 돌아보며 고개만 까딱했다. 김 씨는 답례를 하면서도 입이 무거운 박 씨가 야속했다. ‘어서 오시게, 라고 한마디 하면 입술이 부르트나.’ 김 씨는 입을 샐쭉거렸다.
아직 영화 상영 전이었다. 소란스러운 소리에 김 씨가 고개를 돌렸다. 통로 건너편에서 자리 때문에 실랑이가 벌어졌다. 서 있는 여자는 자리를 비켜달라고 하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노인은 굳이 빈자리도 많은데 여기에 앉아야겠냐며 버텼다. ‘저러니까 젊은이들이 질색하지.’ 김 씨는 중얼댔고 주변 사람들도 웅성거렸다. 여자는 투덜거리며 뒷자리로 갔고, 카운터에 말해서 쫓아내세요, 란 누군가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들렸다.
소란을 잠재우듯 실내가 어두워지자마자 광고 없이 영화가 시작되었다. 영화 제목과 함께 1936년 작품이란 숫자가 떴다.
“어머, 이상하다. 2008년에 만든 줄 알았는데.”
“게다가 흑백이야. 웬 구닥다리?”
“86년 전 영화네. 우리 아버지가 저 때 태어나셨거든.”
“말도 안 돼. 같은 제목의 영화가 또 있었나? 그냥 갈까? 냄새도 퀴퀴하고……”
김 씨가 고개를 돌려 뒤를 쳐다보자 여자들의 수다가 잦아들었다. 좀 전에 보았던 일행들이 막 들어와 앉은 참이다. 오래전 같았으면 따끔하게 한마디 했을 김 씨였다. ‘니들도 실수할 때가 있지.’ 김 씨는 미소를 지었다.
화면이 바뀌었고, 여자들은 다시 조잘대기 시작했다.
“미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래. 그냥 보자.”
“그래, 감독도 유명한 사람이네.”
“쉬, 쉬.”
영화의 첫 장면은 미국의 어느 대저택의 거실이었다. 보석으로 치장한 젊어 보이는 여자가 등장했다. 김 씨 눈에는 여주인공의 나이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 얼굴 구분도 힘들지만, 나이 추측도 쉽지 않았다. 사람들의 실제 나이는 김 씨가 추측한 숫자에 10 정도를 더해야 했다. 여주인공은 파티장도 아닌데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김 씨 평생에 입어본 적은 고사하고 사진에서만 보았던 옷이다. 부러우면서도 이런 감정이 아직도 남아있다는 게 놀라웠다. 뒤이어 중년으로 보이는 남자가 퇴근해서 집으로 들어오는 장면이 이어졌다. 남자는 거실로 들어와서 여자를 꼭 안아주었다. 종일 남편을 기다리느라 수고했다고.
김 씨는 정해진 팔자란 게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김 씨 남편은 며칠씩 집을 비우다 돌아와도 첫마디가 개밥 줬어? 였다. 김 씨는 아내가 아니라 밥솥이었고 세탁기였고 청소기였다.
외국 영화를 볼 때 김 씨는 긴장이 되었다. 자막이 서 너 줄일 땐 마지막 문장의 꼬리를 놓치기도 하고 사람의 이름을 읽는 중에 화면이 넘어가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왜 그리 이름이 길고 호칭 방법도 가지가지인지.
여주인공은 남자의 뺨에 입술을 비벼대고 손바닥으로 가슴을 더듬었다. 김 씨의 눈에 남자는 아버지뻘로 보였지만 여자의 행동이나 자막으로 미루어보아서는 남편 같았다.
‘아니, 저런 도둑놈이 있나, 곱빼기 띠동갑도 넘겠네.’ 예나 지금이나 지팡이 토막을 가운데 달고 다니는 인간들이 젊은이를 밝히는 건 변함없지만, 김 씨가 보기에도 못생기고 잘생긴 걸 떠나서 싱싱하다는 점만으로도 모두 예뻐 보였다. 심지어 다섯 살 아래인 여자도 김 씨 눈엔 젊어 보였다. 흥분했던 김 씨는 이내 인정 모드로 태도를 바꾸었다.
변덕을 부리고 기분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여자 주인공을 보면서 김 씨는 혀를 찼다. ‘젊고 얼굴 반반하면 저렇다니까.’ 김 씨는 며느리를 떠올렸다. 하나밖에 없는 며느리인데 아무리 예쁘게 봐주려 해도 콕 박힌 미운털이 빠지지 않는 애였다. 좀 산다는 집에서 자란 며느리는 액세서리 수집이 취미였다. 두 달에 한 번꼴로 시댁에 올 때마다 몸에 치장하고 있는 액세서리가 바뀌었다. 눈썰미가 없는 사람이라도 금방 알아볼 정도로 색상이며 디자인이 확확 달라졌다. 며느리를 떠보느라 나도 네가 한 것 좀 차 보자, 고 했더니 어머, 사람들이 웃어요, 라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며느리가 미워 보이는 이유가 말을 얄밉게 하는 탓도 있지만 자신의 삐딱한 시선도 섞여 있다는 걸 김 씨는 안다.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닌데 자기 돈으로 갖고 싶은 걸 사는 행위를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여주인공과 비교해 보니 며느리가 그다지 변덕 부리는 애도 아니고, 딱히 지 남편이건 시댁에 못 하는 편도 아니었다. 김 씨는 며느리의 미운털이 다름 아닌 질투라는 생각에 새삼 부끄러웠다. 그것도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에, 같은 여자라는 이유로. 며느리는 여자의 촉으로 벌써 눈치 챘을 게다. ‘앞으로 며느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스크린의 영상이 유럽을 항해하는 크루즈 내부로 바뀌었다. 은퇴한 남편이 아내와 긴 여행을 하는 중이었다. 한국 여자들은 보리죽 한 숟갈도 자식 입에 넣어주느라 배곯고 쪼그라져 있을 때 서양 여자들은 양장을 빼입고 삐딱 구두 신고 파티에 가거나 세계 일주를 했다니. 여자의 일생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날에도 김 씨는 고작 빌려 입은 단색의 한복에 면사포만 쓰고 혼례를 치렀다. 김 씨는 자신보다 먼저 태어난 서양 여자들에 비해 고루하게 살았다.
육지와 바다를 오가면서 장기 여행을 하는 사이에 여주인공은 서 너 명의 남자들과 사랑 행각에 빠졌다. 여자는 쉽게 남자를 만나서 사랑했다가 헤어지길 반복했다. ‘지 멋대로군, 착한 남편이 딱하네, 결혼 전에 많은 여자를 만나보지.’ 흥분지수가 높아진 김 씨는 자세를 바꾸다가 자신의 과거가 떠올랐다. ‘하긴, 선봐서 한 달 만에 식을 올린 나는 어떻고.’ 그러고 보니 그런 도박이 없었다. 어처구니없는 결정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땐 어이없는 일들이 다반사였는데 죄다 그러려니로 통했다. 어쩜 지금 당연하게 여기는 일들이 몇 십 년 후엔 또 이상한 취급을 받을 수도 있다. 김 씨가 젊어서 여주인공처럼 했다면 돌팔매질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김 씨가 영화에 집중할 만하면 뒤에서 소곤대는 소리가 들려왔고, 그것을 엿듣는 재미가 있었다. 뒷좌석의 한 여자가 또 말을 꺼냈다.
“안 봐도 비디오다. 나가자.”
“나갈까?”
“그래, 질 떨어진다.”
“아냐, 노벨상 받은 작품이라잖아, 뭔가 있을 거야.”
한 여자가 일행을 달랬다. 김 씨 뒤에서 들려오는 수다 소리뿐 아니라 여기저기서 콜록거리는 소리, 가래 끓는 소리, 카톡 소리, 사부작사부작 사탕 껍질 벗기는 소리 따위가 영화 중반이 넘어가도록 줄지 않았다. 심지어 전화벨 소리도 울렸다. 늴리리아 늴리리…… 맨 앞줄에 있던, 환갑이 넘어 보이는 남자가 손에 쥔 휴대폰을 끊거나 벨소리를 줄일 생각은 안 하고 느그적 느그적 걸어 나갔다. 남자를 따라서 사람들 고개도 돌아갔다. “걷지 말고 좀 뛰요.” 영화 시작 전에 큰 소리로 면박을 주었던 동일한 목소리였다. 사람들이 키득거렸다. 속이 후련해진 김 씨는 중얼거렸다. ‘어여 가야 해, 어여.’
김 씨는 다시 영화에 몰두하면서 좀 전과는 다른 생각도 했다. ‘하기는, 한 번뿐인 인생인데 뭘 따져, 몸뚱이 아꼈다 뭐 하게, 못 노는 것들이 바보지.’ 여주인공을 못마땅하게 여기던 김 씨는 어느새 주인공 편이 되어있었다. 뭐랄까, 김 씨는 노년기로 접어들면서 양가적 감정이 늘어났다. 어떤 상황이 옳고 그르다고 말하기 애매할 때가 있다. 편 가르는 행위가 불편해지면서 교집합 부분이 넓어지고 있다. 기억력은 물론 얼굴도, 몸도 전보다 빠른 속도로 변해가고 그로 인해 생기는 서운한 감정과 소외감도 자주 들지만 다른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태도가 느긋해졌다고 할까. 듣는 이에 따라서는 이율배반적이라고 하겠지만, 신체 중에서 가장 불결하게 여기는 부위가 신성한 부분이자 최고의 성감대인 인간 자체가 모순덩어리 아닌가.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외도한 상대는 연하의 남자였다. 남자의 어머니가 아들의 상대를 이혼녀이고 연상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둘을 강제로 갈라놓는 장면이었다. ‘딱, 나구먼.’ 김 씨는 아들이 자신보다 연상인 여자를 데려왔던 적을 떠올렸다. ‘그렇게까지 반대할 것도 없었는데.’
허리가 꼬부라져도 연애 상대는 어릴수록 좋다는 영감들이 김 씨 눈에는 철없어 보였다. 박 씨 속을 떠보기 위해 왜 두 살 연상인 자신을 만나느냐고 물었더니, 같이 나이 들어가는 마당에 거기서 거기라고, 나이만 적다고 젊은 거고, 나이가 많다고 늙은 거냐고 반문하던 박 씨의 말이 떠올랐다. 이 나이가 되고 보니 젊은이들이 상대를 고를 때 이혼, 사별, 동거, 비혼 따위를 따지는 일이 별 의미가 없어보였고, 잘 생긴 사람보다는 자신만의 색깔을 가진 사람에게 호감이 갔다. 이는 박 씨가 끌린 이유이기도 한데 김 씨 눈엔 박 씨의 딱딱한 말투마저도 매력으로 느껴졌다.
영화는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역사물을 주로 보던 김 씨에게 로맨스 영화는 피로를 씻어주는 꿀물 같았다. 일부러 로맨스물을 외면해오던 김 씨의 마음을 열게 한 계기는 박 씨다. 로맨스를 주제로 한 영화 내용을 들려줄 때 소도둑처럼 생긴 박 씨의 표정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이 뭔지 제대로 아는 듯 보였다.
김 씨는 영화에 푹 빠져있었다. 남자 주인공이 본부인과 이혼을 하고 새로 만난 애인에게 돌아오는 장면이었다. 남자가 탄 보트가 애인이 사는 섬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김 씨는 다가올 장면을 앞질러 상상하면서 잘했다, 잘했어, 란 말을 연발했다. 한 사람과 애정도 없이 의무적으로 평생을 산다는 건 미련한 짓이지만,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직도 그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 생활 내내 남편은 명령하고 김 씨는 복종하고 따르는 식이었다. 김 씨는 담뱃재가 떨어지기 전에 재떨이를 남편의 턱밑에 갖다 대고, 남편이 밥을 먹는 내내 생선 가시만 발라야 했다. 남편은 다리에 깁스를 한 김 씨에게 2충에 올라가서 부채를 가져오라고 호통 친 적도 있었다.
혼자면 외롭기나 하지, 둘이면 외로우면서도 괴롭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얼마 남지 않은 삶이라도 하고 싶은 대로 채워가고 싶었다.
스크린 속의 여자가 남자에게 다가가서 안겼다. 남편과 사는 동안 포옹은 언감생심이었다. 지 기분 내키면 아무 때나 김 씨를 자빠뜨렸다. 전혀 달갑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손끝조차 스치지 않고도 20년을 더 살아냈다. 김 씨는 남편이 매일 만지는 문고리나 수저만도 못했다.
김 씨는 남자의 품이 얼마나 따뜻할지에 대해 상상했다. 어릴 적 포근한 엄마의 품이나 듬직한 아들의 품과는 다른 느낌일 게다. 박 씨의 품에 안겨 지난날을 위로받고 싶었다. 활활 타오르기 위해 이성을 만나는 젊은이들과는 달리, 같이 사그라들기 위해 상대를 만나고 싶었다. 반찬이 김치 하나일망정 마주 앉아 식사하고, 약 먹을 때 물이라도 떠다 주고, 피곤한 발을 얹고 잠들 수 있는 사이를 원했다. 노년의 로맨스를 망측하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인간은 죽어야만 성애에서 해방될 수 있는 것을.
영화를 보면서 박 씨가 꽃다발을 들고 걸어오는 상상을 했다. 저…… 순자 씨, 김 씨는 맘 가는 대로 달려가는 자신의 생각이 주책이라고 느꼈다. 거의 움직임이 없이 앉아 있는 박 씨의 뒤통수를 쳐다보고 있자니 갑자기 그가 고개를 홱 돌릴 것만 같았다. 머리숱이 인제의 자작나무숲처럼 듬성하지만 박 씨의 뒤태는 늘 정갈했다. ‘저 영감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영화를 보나.’ 김 씨는 그뿐 아니라 영화관 내의 모든 노인들 감상평이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기도 전에 뒷좌석의 여자들이 서둘러 일어났다.
“내용이 끝까지 예상을 벗어나질 않네.”
김 씨는 영화를 보면서 주변 사람을 떠올리고 자신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고 연애 감정의 불씨를 키우는 계기도 되었건만 중년 여자들은 빤하다고 했다. 김 씨의 귀에는 이 영화를 끝까지 앉아서 보는 사람들 수준이 빤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게, 사람들 일어나기 전에 얼른 가자.”
“예의 지키다가는 어느 세월에 나갈지 몰라.”
중년 여성 셋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김 씨가 영화의 여운을 즐길 겨를도 없이 불이 켜졌고 사람들은 일어나기 시작했다. 화면은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거의 가려졌다. ‘모두 가스 불을 안 끄고 나와서 서둘러 가는 게지.’ 김 씨는 중얼거리며 박 씨가 일어날 때까지 애꿎은 가방만 뒤적거렸다. 박 씨가 일어나더니 김 씨를 보며 말했다.
“안 가요? 밥이나 먹으러 갑시다.”
“그러죠.”
김 씨는 순순히 박 씨의 뒤를 따라갔다. 문을 나서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1층으로 내려갈 때까지도 둘은 데면데면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나서야 김 씨는 박 씨 옆으로 다가가서 물었다.
“아직도 사람 많은 곳에서 나란히 걷는 게 어색해요?”
박 씨가 타박하듯 답했다.
“뭘, 어색하긴.”
백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정류장이 있었지만 김 씨는 길이 들지 않은 구두 때문에 멀게 느껴졌다. 박 씨를 만날 때만 신는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김 씨가 가지고 있는 두 켤레의 구두 중 동절기용이었다. 평소엔 운동화를 주로 신고, 화장도 하지 않았다.
박 씨는 김 씨를 재촉하지 않고 보조를 맞춰 걸었다. 김 씨가 영화 본 소감을 물었더니 박 씨는 그 당시엔 획기적인 일이었겠다고, 시대의 변화를 다시 한 번 실감한다고 답했다. 주인공에 관한 얘기 끝에 ‘나이 듦’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늙는 게 두렵지 않아요?”
김 씨가 박 씨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다.
“두려워해도 두려워하지 않아도 공평하게 찾아오는 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않겠소. 늙는 걸 두려워할 게 아니라 추하게 늙는 걸 경계해야지.”
김 씨는 늘 교과서적으로 말하는 박 씨가 야속하면서도 궁금해서 또 물었다.
“그럼 아름답게 늙는 게 뭔데요?”
“내가 정답도 아니고 뭘 묻소?”
“그래도 생각을 듣고 싶어요.”
“뭐 별거 있소? 그냥 다 덜어내는 거지. 감정도 덜어내고 그런 거 아니겠소?”
“덜어낸다는 말은 줄인다는 말과 어감이 다르네요. 뭔가 내가 덜 쓴 만큼 남이 쓸 기회를 주는 느낌이 드네요. 여하튼 자신이 가진 것이나 감정에 너무 휘둘리지 말자는 거지요,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는 얘기죠, 태봉씨?”
김 씨가 슬쩍 박 씨의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렇지만 마지막까지도 덜어내지 말아야 할 감정이 있지.”
김 씨가 손가락으로 하트 모양을 만들어 보였다.
“이거요?”
박 씨는 5년 전 아내와 아들을 한꺼번에 잃었다. ‘아내와 아들이 죽기 전에 사랑한단 표현을 많이 해주지 못한 걸 후회하고 있는 걸까.’ 겉으로는 담담해보이지만, 평온한 얼굴 아래 숨겨져 있을 부단한 노고에 대해 김 씨는 생각했다. 젊어서 한 성질 했다는데, 어떻게 변할 수 있었는지, 주름 하나하나에 새겨진 사연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버스는 금방 왔다. 박 씨가 손을 내밀어 김 씨 먼저 타라는 신호를 했다. 차에 오르는 김 씨는 뒤따라오는 박 씨에게 힘들어하는 동작을 들키지 않으려고 손잡이를 잡고 부지런히 발을 놀려서 계단을 다 올라왔으나 자신도 모르게 나온 에구, 소리로 허사가 되어버렸다. 이성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욕구나 질투의 감정은 젊은 사람 못지않게 여전하지만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쓸 뿐이다. 내부의 앞쪽 노약자 좌석은 젊은이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 한 청년이 일어나 자리를 양보했지만 김 씨는 못 들은 척하고 뒤로 갔다. 둘은 맨 뒷자리에 앉았다. 버스가 출발했고 속력이 나면서 덜컹대기 시작했다. 운전까지 과격한 탓에 엉덩이가 공중으로 떴다가 내려앉았다. 김 씨는 워메, 하면서 박 씨의 손을 잡았다. 꼬리뼈에 충격이 느껴졌다. 박 씨는 기사에게 소리쳤다.
“거 운전 좀 살살 하소.”
덕분에 둘은 착 달라붙게 되었고 김 씨가 손을 놓으려 하자 박 씨가 더 세게 쥐었다. 박 씨의 손이 야들야들하고 따뜻했다. 빼려던 손을 박 씨의 손에 맡긴 채 김 씨는 얼굴을 창으로 돌렸다.
박 씨가 물었다.
“뭐 볼 거 있소?”
“나뭇잎들이 제법 물들었네요.”
김 씨는 생각했다. 나뭇잎 색이 변하는 걸 앞으로 몇 번 더 볼 수 있을까를.
“같이 좀 봅시다.”
박 씨가 고개를 돌리면서 김 씨의 머리카락에 뺨이 닿도록 얼굴을 바짝 내밀었다. 김 씨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도 박 씨의 행동에 의도가 있기를 바랐다.
네댓 정류장을 지나서 내릴 때가 된 두 사람은 출입문으로 걸어 나갔다. 박 씨가 왼쪽 기계에, 김 씨는 오른쪽 기계에 카드를 태그 한 후 출입구를 막은 채 서 있었다. 여학생이 박 씨와 손잡이를 잡고 있는 팔 사이로 손목을 내밀어 태그를 시도했다. 연이어서 실패한 학생을 보고 김 씨는 카드를 가운데로 대요, 라고 말했지만 학생은 들은 척도 안 하고 또 손목을 갖다 댔다. 기계음이 들렸고 그제야 김 씨는 학생 손목에 차고 있던 검은 물건이 요즘 광고에 나오는 뭐시기란 걸 알았다. ‘또 오지랖을.’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김 씨는 자신이 하루살이만도 못한 3초의 뇌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영화관으로 오던 버스 안의 상황이 떠올랐다. 김 씨의 앞좌석에 앉아 있는 청년이 입고 있는 티셔츠에 시선이 갔다. 큼직한 흰색 라벨이 옷의 바깥쪽에 붙어있었다. 김 씨는 최대한 예의를 갖춰서 옷을 뒤집어 입었네요, 라고 속삭이듯 말했고 청년은 아, 이거요, 요즘 유행이에요, 라며 목 뒤의 라벨을 만지작거렸다.
박 씨 앞을 지나쳐서 쏜살같이 내리는 여학생의 귀에 무선 이어폰이 꽂혀있었다. 두 사람도 손잡이를 잡고 발 앞을 살피면서 내렸다. 여학생이 내리는 속도의 다섯 배는 족히 걸렸다. 내리기가 무섭게 문이 닫히기도 전에 버스는 출발했다. 왠지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니들도 답답하지. 당사자는 오죽하겠냐.’ 김 씨는 버스 기사가 야속했으나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한 줄기의 센 바람이 지나갔다. 나뭇잎이 몇 점 떨어졌다. 김 씨가 옷깃을 여미자 박 씨가 자신이 두르고 있던 머플러를 풀었다. 목에 걸어주려고 박 씨가 손을 뻗자 김 씨는 움찔하며 뒤로 물러났다.
“이런 맛에 데이트하는 거 아니요?”
“그게 아니라……”
김 씨는 머플러를 목에 늘어뜨린 채 눈을 내리떴다.
“갑시다, 순자씨.”
박 씨가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김 씨는 뒤따라가며 웃음이 나왔고, 목덜미가 자꾸 간지러웠다. 박 씨가 몇 미터도 안 가서 주변을 둘러보더니 골목으로 들어갔다. 코너의 편의점을 끼고 꺾어 들어서자마자 생선구이집이 보였다. 김 씨는 갈치구이가 먹고 싶다고 박 씨에게 지나가듯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입구부터 고소한 생선 굽는 냄새가 폴폴 풍겼다. 홀에는 사람들이 왁자지껄했다. 김 씨는 음식 맛을 보기도 전에 행복감에 폭 빠졌다. 빈자리는 입구 근처밖에 없었다. 박 씨는 김 씨에게 안쪽 자리에 앉도록 권하고 물도 따라주었다. 수저도 놓아주려고 하자 김 씨가 손을 저으며 막았다.
“아, 제가 하지요.”
“선심을 쓰면 좀 받으세요.”
박 씨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황송해서 그렇죠.”
대접받는 게 어색한 김 씨가 손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남자는 주고 싶고 여자는 받고 싶은 게 연애의 재미 아닙니까?”
“그래도 받기만 하는 건 좀 그래요.”
직원이 주문을 받아 가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메뉴라고 해봐야 갈치구이와 갈치조림 두 가지였다. 정갈한 밥상이 차려질 때까지 김 씨는 머플러를 만지작거리다 박 씨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열었다.
“태봉씨, 여긴 자주 오셨던 곳인가요?”
“오긴 누가 와요.”
박 씨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깐 미안했어요. 받는 게 익숙하지가 않아서요.”
“그렇다면 할 말이 없지만……”
박 씨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저도 그러고 싶은데 막상 잘 안 되네요.”
둘이 대화하는 사이에 기름이 차르르 흐르는 갈치구이가 나왔다. 박 씨는 왼손으로 갈치 토막을 잡고 오른손에 든 젓가락으로 잔가시가 있는 양쪽 끝을 바깥으로 당겼다. 가운데 뼈 위에 숟가락을 밀어 넣으면서 살을 들어 올렸다. 살덩어리가 부서지지 않고 네모로 분리되었다. 김 씨는 능숙한 손놀림을 신기한 듯 쳐다보면서 박 씨가 발라 준 생선살을 수없이 먹었을 과거의 여인에 대해 생각했다. 밥 먹을 생각은 안 하고 손만 쳐다보고 있자 박 씨가 한마디 했다.
“가시 바르는 거 처음 봅니까? 밥 좀 떠보세요, 순자 씨.”
김 씨는 얼떨결에 수저로 밥을 떴다. 박 씨가 뽀얀 쌀밥 위에 생선살을 얹었다. 김 씨가 당황하여 수저를 빼려다가 주춤했다.
“또 그러시네.”
“남의 밥에 반찬을 얹어주기만 하고 받아먹어 본 적이 없어서 그럽니다.”
말하는 도중에 삼십여 년 전 한정식 식당에서 며느리를 처음 만났던 때가 불쑥 떠오를 게 뭐람, 시어머니 가까이에 있는 음식에 젓가락을 댈 엄두도 못 내는 며느리를 위해 아들이 갈비 한 점을 옮겨 주던 모습이 박 씨의 행동을 보자 떠올랐다. 그때의 섭섭함이 지금에서야 부끄러움으로 다가왔다.
박 씨가 김 씨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 감동 먹은 거요?”
“네. 제대로 먹었지요.”
“밥도 많이 먹어요, 순자 씨.”
김 씨는 사람대접을 받는 기분이 들었다. 박 씨의 자상함과 배려는 몸에 밴 습관 같았다. 또한 세상의 소란함과 서두름으로부터 흔들림이 적어 보였다. 팔십 가까이 살아온 눈으로 알아볼 수 있다. 이렇게 다를 수가 있을까, 남편은 김 씨를 백 번도 더 울렸다.
김 씨는 밥을 먹는 중간에 국이나 물을 자주 마셨고 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 당황했다. 그리 맵지도 않은 도라지 초무침을 먹으면서 기침도 더러 했다. 박 씨가 김 씨에게 티슈를 내밀기도 하고 직원에게 따뜻한 물도 달라고 했다. 김 씨는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따뜻한 물로 입가심을 했다. 여태껏 먹어본 밥 중에 제일 달았다. 박 씨는 김 씨를 보며 흐뭇해했다. 데이트다운 데이트가 네 번째인 김 씨의 눈에 박 씨의 모든 점이 좋아 보였다. 김 씨는 나중에 콩깍지가 벗어지더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나이 들어서 이성을 만날 때는 다른 건 다 맘에 안 들어도 한 가지 맘에 드는 점에 집중해야 한다던 친구의 말이 떠올랐다.
김 씨는 박 씨와 헤어져서 집에 돌아왔다. 김 씨는 박 씨가 자신의 어깨에 오도카니 앉아 지켜보는 느낌이 들었다. 어깨를 손으로 문질러보았다. 웃음이 났다. 옷도 벗지 않고 며느리에게 전화부터 했다.
“너 좋아하는 약식하고 식혜 해 놓을 테니 내일 와서 가져가거라.”
“꺄악.”
김 씨는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괴성 때문에 고막이 터지는 줄 알았다. 이렇게 좋아하다니, 김 씨는 자신이 얼마나 박한 시어머니인가를 생각하다가 바빠서 글피에 갈게요, 라고 이어진 며느리의 말 때문에 좋다는 건지 아닌지 헷갈렸다. 한마디 하려다가 말았다. 전화를 끊고 개운치 않은 이유를 생각해보니 시어머니 행세, 연장자 행세를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었다. 자기 입으로 박 씨에게 되물었던 말이 생각났다. 너무 기뻐하지도, 너무 슬퍼하지도, 너무 노하지도 말자. 며느리도 나름의 스케줄이 있는 건데.
박 씨를 만나고 돌아오는 날엔 상념에 잠기게 된다. 김 씨는 아무리 잘 살았어도 마무리가 부실하면 인생 전체가 망가지는 느낌이 들고 잘 못살아왔어도 끝이 좋으면 지나온 생이 보상받는 느낌이리라. 인생 마무리를 아름답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고 그 간절함의 가운데 박 씨가 있었다. 왜냐하면 김 씨의 이름을 불러 준 사람은 박 씨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아니, 있긴 있었다. 내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 간호사들이 불러 주는 이름은 달갑지 않았다.
* 영화 제목은 ‘공작부인’이며, 원제는 남자 주인공 이름인 ‘Dorthworth’다.
•수상소감 - 우수상 단편소설 박상희
“저의 허당끼가 소설을 쓰는 모티프가 되기도”
나이가 지천명을 넘어가면서 아직 오지 않은 시절에 대한 호기심과 아름답게 나이 들어가는 자세를 고민하면서 써 놓았던 몇 편의 소설이 있었습니다. 그 중 이번 공모전의 주제와 어울리는 한 편을 골라서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작품은 저의 허당끼로 인해 소재를 얻게 되었습니다. 평소에 꼼꼼하지 못해서 영화감독이나 제작년도를 확인하지 않고 영화관에 간 실수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2008년에 만들어진 「공작부인」을 보고 싶었는데 그만 1936년에 제작된, 같은 타이틀의 다른 영화를 보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한 편의 소설을 썼고, 수상까지 하게 되어 기쁩니다. 저의 허당끼는 소설을 쓰는데 모티프가 되기도 합니다.
기존의 저명한 작가들은 글 쓰는 작업을 습관처럼 매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따라해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던 터에 선배가 제안을 해왔습니다. 하루에 단편 소설 한 편을 읽든가, 필사를 하든가, 소설 한 장 분량을 쓰든가, 써 놓은 소설을 수정하든가, 매일 이 네 가지 중, 한 가지라도 해내기로. 지키지 못할 경우는 밥을 사기로 했습니다. 올해 초부터 선배는 하루도 빠짐없이 약속을 지켜왔는데 저는 밥 사러 몇 번을 선배 동네로 가야했습니다.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서사의 밑그림이나 순서를 고려하지 않고 정해진 시간 안에 쓰는데 만 급급했습니다. 부모님 댁을 방문하거나 여행을 가면서도 노트북을 들고 갔습니다. 그날의 날씨나 기분에 따라서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을 쓰기도 하고, 어떤 날은 소설의 중간 토막부터 써내려가기도 했습니다. 구성을 해놓고 소설을 써나가는 방식이 바람직하지만 소설의 줄거리, 캐릭터, 작가의도가 정해질 때까지 기다리다보면 소설은 시작도 못 한 상태에서 두세 달이 그냥 가버리기도 합니다. 지금은 첫 문장을 쓰다가, 중간 중간에 몇 줄씩 쓰기도 하고 결론의 한 문장부터 쓰기도 하는 등 규칙 없이 쓰고 있습니다. 장단점이 있겠지만, 안 쓰는 것보다는 나은 듯해서 이런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제가 엉덩이를 들썩거리면서 소설을 놓아버릴까 말까 고민을 반복할 때도 선배는 꾸준했습니다. 덕분에 저도 이제는 하루라도 소설과 관계된 읽기나 쓰기나 수정을 하지 않고 지나가면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선배와의 다짐이 이제 효과를 발휘하는 듯합니다. 목표를 거창하게 잡으면 얼마 가기도 전에 지쳐버리지만, 실천할 수 있을 정도로만 정하니 꾸역꾸역 앞을 향해 나가기는 합니다. 다이어트 할 때 일주일에 1킬로그램 또는 한 달에 4킬로그램 감량을 목표로 하지 않고, 매일 200그램씩 빼겠다는 덜 부담스러운 목표를 설정하는 것과 같은 저만의 방식입니다.
다른 분들도 그렇겠지만 그래도 글이 안 써지면 딴 짓을 합니다. 제 취향이 아닌 영화도 보고, 딸을 앞세워 젊은이들이 모이는 라이브 카페에 가기도 하고, 부모님과 조카들까지 모아 놓고 마음 알아채기 게임을 하기도 합니다. 막힌 골목이나 민예품이 전시되어 있는 재미있는 장소를 찾아다니기도 합니다. 펜션 주인에게 말을 걸기도 하고, 기절할 각오하고 패러글라이딩에 도전도 해봤습니다.
TV를 보거나 버스타고 차창 밖을 바라보다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휴대폰에 단어 나열식으로 메모를 하거나 사진을 찍어놓습니다. 기록 당시에는 이해되었던 내용들을 한참 후에 찾아보면 어떤 의도로 저장해 두었는지 암호 해독 수준이 되기도 하고, 메모해 둔 제 글씨체를 읽을 수 없는 어이없는 경우도 생깁니다.
글을 쓰면서 세상을 의심하고 낯설게 보는 점이 가장 어렵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세상을 거꾸로 바라보고 싶은 심정입니다. 여태껏 보편타당하다고 여겼던 점들이 문제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글이 쓸수록 더 어렵게 느껴지지만, ‘50+ 시니어 신춘문예 공모전’ 수상으로 인해 격려가 되었습니다.
“정리는 단순한 청소가 아니라 삶을 쾌적하게 만들고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작업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다.”
tvN 예능프로그램 ‘신박한 정리’의 김유곤 PD가 뉴스1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연출자 한 명만이 갖는 특별한 감상이 아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대유행 시대에 변화한 집의 개념과 공간에 대한 관심이 시니어 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전문가들은 외출이 잦던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집에만 있다 보니 ‘정리’를 등한시했다는 사실뒤뒤늦게 깨달은 결과라고 설명한다. 집 정리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정리·수납 콘텐츠도 인기를 끌고 있다. 예능 프로그램 ‘신박한 정리’나 ‘바꿔줘! 홈즈’ 등이 대표적이다. 코로나가 기승을 부렸던 2020년 여름에 시작한 ‘신박한 정리’는 지난달 50부작을 끝으로 박수칠 때 떠났다.
정리·수납 분야 도서도 ‘비포 코로나’ 시대에 비해 판매율이 크게 늘었다. 인터넷 서점 예스24가 ‘집·살림’ 분야 내 ‘인테리어’ 및 ‘정리·수납’ 카테고리로 분류되는 도서 판매량을 집계한 결과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대비 2020년 해당 분야 도서 판매가 40.6%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기준 40세 이상 시니어가 인테리어 및 정리·수납 관련 도서 구매자 중 60%를 차지했다. 40대가 41.8%로 가장 많았으며 50대와 60대 구매자도 각각 17.4%, 3.2%를 차지했다.
인테리어 및 정리·수납 관련 도서는 2017년부터 2019년까지 매해 판매량이 줄었으나 2020년 큰 폭으로 반등했다. 팬데믹(대유행) 국면을 기점으로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아늑하고 편안한 나만의 공간을 만들고자 하는 수요와 관심이 크게 높아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수납가구 판매율도 눈에 띄게 늘었다. 지난해 말 가구·인테리어 브랜드 한샘이 자사 온라인 쇼핑몰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한 결과 ‘옷장수납’ 가구가 가장 높은 매출 신장률(85%)을 기록했다. 생활용품 최다판매 1위도 책장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수납박스가 차지했다. 한샘 측은 코로나19로 인한 ‘집콕 트렌드’와 맞물린 영향으로 분석했다.
정리 잘하고 싶다면 비우기, 역할, 방향 기억!
공간 정리 컨설팅 업체 ‘우리집공간컨설팅’ 관계자는 “전체 고객의 60~70%가 50세 이상 시니어 고객일 정도로 (정리에 대한) 관심이 높다”며 “자녀가 독립하고 난 뒤 자녀가 쓰던 방에 남은 짐이나 가구를 어떻게 정리할지, 그 방의 쓰임을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을지 문의하는 시니어 고객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렇듯 시니어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집콕 생활을 위한 정리 정돈에 대한 관심이 높은 상황. 슬기로운 집 정리를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까. 공간 정리 전문가 이지영 ‘우리집공간컨설팅’ 대표가 가장 강조하는 건 ‘비우기’다. 그는 “물건을 비우면 공간이 보이고 공간이 비면 사람이 보인다”면서 “물건을 보면 욕심으로 갖고 있었는지 비울 타이밍을 놓친 건지 보인다”라고 말했다. 예능 ‘신박한 정리’와 교양 프로그램 ‘세상을 바꾸는 시간’, 여러 라디오 프로그램 등에 출연한 그는 한결같이 비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정리를 하고 싶어도 어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모두 꺼내 필요, 욕구, 버림 세 가지로 구분하라”고 조언한다. 박스 세 개를 준비해 정말 필요한 것은 ‘필요’ 박스에, 사고 싶어서 산 것은 ‘욕구’ 박스, 그 외의 쓸모없는 것들은 ‘버림’ 박스에 넣는 것이다. 버림 박스에 들은 물건들은 그대로 버리고, 욕구 박스 안의 물건 중 다른 사람이 가치 있게 사용해 줄 만한 것이 있다면 다른 이에게 나눌 것을 당부했다.
그는 공간에 역할을 부여하면 정리가 쉽다고 설명했다. 한 방에 여러 잡동사니를 쌓아놓지 말고 침실, 옷방, 서재 등 방마다 정확한 역할을 부여해 그에 맞는 가구와 물건만 옮겨두어도 훨씬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건이나 가구를 배치할 때 방향도 고려해야 한다. 오른손잡이라면 자주 사용하는 가구를 오른쪽에, 왼손잡이라면 왼쪽에 둬야 사용하기 편하고 관리도 수월하다. 그는 식기건조대부터 서랍장 같은 필수 가구부터 연필꽂이 같은 소소한 집기, 신발장 문이 열리는 방향까지 스스로의 생활방식에 맞출 것을 권했다.
이 외에도 ‘현관이나 욕실 등 좁은 공간부터 정리하라’, ‘가구 배치는 현관에서 먼 곳에 높은 가구를 놓아야 한다’, ‘가구의 색상을 맞춰라’ 같은 다양한 조언을 남겼다. 현관이나 욕실과 같이 좁은 공간부터 정리를 시작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거실처럼 넓은 공간부터 정리를 시작하면 물건이 많아 금방 피로해져 중간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우리집공간컨설팅’ 관계자는 “노년기의 비움은 청년기의 비움과는 의미가 다르다. 시니어는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해보고 분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며 “최근 시니어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고 있는 ‘노전(老前)정리’라는 용어가 노년기의 비움을 잘 나타내 준다”고 말했다. 노전정리란 살아오면서 사용했던 과거의 물건들을 스스로 정리하는 일로, 사후 가족들이 하게 되는 유품정리와는 차이가 있다.
이어 자녀의 독립 후 공간 재배치를 고민하는 시니어에겐 “부부 둘이서 함께 사는 경우 각자의 침실을 갖는 것이 서로에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침실과 화장실 같은 개인 공간을 부부가 함께 사용해왔기 때문에 이제는 각자 공간을 갖고 자신만의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우리집공간컨설팅’ 관계자는 “이 대표가 강조하는 ‘비우기’를 성공적으로 마쳤다면, 노년기를 보낼 각자만의 공간을 구성하고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된다. 이는 건강하고 즐거운 노후 생활에도 보탬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