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마다 일정 금액을 지불하며 제품이나 서비스, 콘텐츠 등을 이용하는 ‘구독경제’의 몸집이 나날이 커지고 있다. 이제는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뿐 아니라 의식주부터 취미와 여가 등 삶의 전반에 다양한 방식으로 침투하고 있다. 심심할 때 TV 대신 넷플릭스를 보고, 유튜브 구독자 수로 인기를 가늠하는 구독 전성시대, 시니어가 알아두면 좋을 이색 서비스를 소개한다.
균형 잡힌 식사, 규칙적인 수면 등이 세계 장수마을 사람들의 건강 비결로 알려져 있다. 사실 ‘밥 먹으면 배부르다’ 식의 당연한 이야기다. 누구든 잘 먹고 잘 자면 면역 기능이 향상돼 질병에 쉽게 노출되지 않는다. 문제는 나이가 들수록 이 뻔한 일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체력이 떨어지면 삼시세끼는커녕 한 끼 차려 먹는 것도 힘들다. 그런데 매일 색다른 밥상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눈앞에 차려진다면 어떨까. 첨단 로봇이 아닌, 식단 구독 서비스로도 가능한 일이다.
건강 식단 구독 서비스 ‘그리팅’
‘혈당 조절은 장기전이기에 식사에 한계가 있는데, 식단을 구독하니 선택지가 많아져 스트레스가 사라졌습니다.’ 현대백화점 계열사 현대그린푸드의 건강 식단 구독 서비스 ‘그리팅’을 구독한 40대 김건강(가명) 씨가 남긴 후기다. 그가 선택한 메뉴는 저당식단. 당류와 염분을 최소화하고, 저당 식재료를 3종 이상 활용해 만든 당뇨 예방 식단이다.
‘그리팅’은 이처럼 건강관리가 필요한 이들을 위해 원하는 날짜에 식단을 배송해주는 서비스다. 종류는 저당식단을 비롯해 한 끼 평균 열량이 450kcal인 칼로리식단, 세계에서 가장 장수 인구가 많은 ‘블루존’(Blue Zone) 국가의 식문화를 반영한 장수마을식단 총 3가지다. 이 중 골라 구독 기간과 끼니 수, 배송 희망일을 택하면 해당 식단을 주 2~3회 받아볼 수 있다. 주문 후 조리되는 상품 특성상 구독 최대 기간은 2주이며, 가격은 한 끼당 8500원이다.
홈페이지 구독 신청 페이지에서 ‘메뉴 미리보기’를 누르면 테마별로 18가지 식단을 살펴볼 수 있다. 해당 날짜를 기준으로 2주간 제공되는 식단이다. 2주 뒤에는 다른 식단이 그 자리를 채운다. 매일 다른 메뉴를 즐길 수 있는 셈이다. 박주연 그리팅사업담당 상무는 “식단을 통해 건강관리를 하려면 계속 먹을 수 있어야 한다”며 “고객분들이 변화를 느낄 수 있도록 매월 신 메뉴를 개발한다. 일반 식품 제조업체에서는 실현하기 어려운 사업 모델이지만, 자사는 서울아산병원과 아주대병원에 환자식을 제공했던 노하우를 바탕으로 건강한 식단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건강 식단’을 표방하는 만큼 식단 구성 과정도 까다롭다. 먼저 식단의 특성에 따라 영양 목표를 설계하고, 시기별 어울리는 식자재와 조리법을 연구해 레시피를 완성한다. 그다음 맛, 색상 등의 조화를 고려해 궁합에 맞는 메뉴로 한 끼 식사를 구성한다. 이때 단순히 대중적인 레시피를 차용하는 것이 아닌, 생소한 재료를 활용해 전에 없는 메뉴를 말 그대로 ‘개발’한다. 이를테면 저당식단에는 인슐린 작용을 도와주는 여주와 꾸지뽕이, 장수마을식단에는 산초, 팔각 등 이국적인 재료가 들어간다. 정현정 그리팅Lab 케어식단연구원은 “대개 건강식은 싱겁고 맛없다는 편견이 있는데, 그리팅을 통해서는 다양하고 새롭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도록 영양뿐 아니라 맛에도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했다.
구독 전 세 끼 분량의 체험판을 주문할 수 있다. 그리팅 오프라인 매장인 ‘영양사의 반찬가게’를 통해서도 구매가 가능하다. 이곳에서는 영양사와 1:1 건강 상담을 통해 맞춤형 반찬을 추천받을 수도 있다. 현대백화점 본점·여의도점·무역센터점·목동점·판교점 총 5곳에서 운영 중이다. 박 상무는 “앞으로는 건강 식단뿐 아니라 연화식 등 고령 친화 식품과 관련 서비스를 업그레이드해 시니어가 더 편하게 식사를 즐길 수 있도록 도울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리팅’이 추천하는 장수 식자재
꾸지뽕_우리나라에서 자생하는 토종 식물로, 뽕나무를 닮아 ‘굳이 뽕나무’라고 불리며 그 이름이 유래됐다. 혈관 건강에 효과적인 루틴이 뽕잎의 약 18배, 녹차의 68배가량 함유돼 있어 혈전 생성을 억제하고 성인병 예방에 도움을 준다. 비린내를 잡는 데 탁월해 해물찜, 갈치조림 등 생선을 찌고 조릴 때 꾸지뽕잎 가루를 함께 넣으면 더욱 깔끔한 맛을 낼 수 있다.
여주_입에 쓸수록 건강에는 달다! 특유의 쓴맛으로 한의학에서는 ‘고과’(苦瓜)라 불리는 여주는 사포닌 계열의 모모르카로사이드 성분이 풍부해 신체 활력을 증진하는 데 도움을 준다. 쓴맛 때문에 손이 잘 가지 않을 것 같지만, 제육볶음이나 소불고기 등 양념 고기 요리에 넣으면 맛있게 즐길 수 있다. 여주의 쌉싸름한 풍미가 매콤달콤한 고기의 맛을 더욱 살려준다.
당귀_반건조 상태의 당귀는 뜯었을 때 특유의 향을 끈적한 감촉으로 느낄 수 있다. 주로 늦가을부터 봄 새싹이 돋기 전에 캔 뿌리를 건조해 사용한다. 잎이 무성해지면 약의 기운이 잎으로 몰려 뿌리의 효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관절 통증과 치매 예방에 좋은 데커신 성분이 풍분해 노년기 건강관리에 도움을 준다. 닭볶음, 주꾸미볶음 등 매콤한 한식 요리에 잘 어울린다.
농부가 땅에 비지땀을 쏟아 필수 식량을 생산한다는 점에서 농업은 신성한 직업이다.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천하의 뿌리’에 관여된 일이 농업이다. 반면 믿기 어려운 직업이 농사다. 땀 흘린 만큼의 공정한 대가가 주어지는 경우가 흔하던가? 예측하기 어려운 기상에 따라 좌우되는 작황, 널뛰기하는 가격, 불안정한 판로 등 리스크 요인이 한둘이 아니다. 그러나 현실의 악조건을 끔찍하게 여기면서도 귀농을 하는 이들이 많다. 나만큼은 성취할 수 있다는 뜨거운 신념을 가지고 농사에 뛰어든다. 경북 상주시의 산골로 귀농한 임원식(61, 상주갑장산굼벵이농장) 씨도 그랬다.
“경치 좋은 시골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정원이나 농장을 가꾸며 마음 편하게 사는 삶. 이건 대부분의 남자들이 가진 로망이 아닐까? 내게도 막연하나마 오래전부터 그런 꿈이 있었다.”
귀농은 임원식 씨에게 오래 묵은 꿈이었던 거다. 비록 막연한 바람이었지만. 다시 말해 언젠가 기회가 오면 시골에서 한번 살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그 ‘언젠가’가 오지 않아도 무방할 몽상 차원의 꿈이었다. 그런데 그 ‘언젠가’가 별안간 도래했다. 회사에 감원 바람이 불었던 것이다. 그는 경남 거제시에 있는 삼성중공업 직원이었다. 이름난 대기업이고 연봉도 높은 수준이라 자청해서 그만둘 이유가 없었으나, 구조조정의 칼바람 앞에서는 생각을 달리해야 했다. 선배 직원들부터 차례로 무자비하게 잘리는 걸 본 그는 곰곰 궁리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오기 전에 명퇴를 신청했다.
명퇴 뒤 그의 고민은 본격적으로 깊어졌다. 이제 어떡하나? 무엇을 해야 하나? 체인점? 창업? 그가 생각한 건 장사였으나 가만히 따져보니 그건 당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간이라도 빼줄 듯이, 심지어 영혼까지 팔 듯이 자세를 낮추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상업인데 그건 참 싫었던 것이다. 이때 그는 오래된 꿈인 귀농을 카드로 뽑아들었다. 그리고 숙고에 들어갔으며, 결국은 귀농만이 믿을 만한 대안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러나 머리를 감싸 쥐고 더 고민할 문제가 하나 있었다. 아내 박선숙(56) 씨의 동의를 얻는 일이 만만치 않았던 것. 남편들이 마치 지상낙원을 건설하겠다는 투로 열렬히 귀농을 선창해도 아내들은 십중팔구 앵돌아앉기 십상이다. 그의 아내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합리성 있는 이유를 내세워 ‘강력한’ 반대를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있어도 아내와 함께 귀농해야 한다는 기본 방침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인내심을 가지고 차근차근 설득에 나섰다. 그 과정이 길고 힘들었다고 한다. 마침내 동의를 얻어내 귀농을 한 건 2016년 8월. 부부는 손잡고 나란히 경북 상주시 낙동면 갑장산 기슭의 산골로 들어갔다.
귀농 한 달 만에 시작한 굼벵이 농사
“터는 미리 사두었다. 인터넷을 통해 전국의 농지 매물을 검색해 곳곳을 답사한 끝에 이곳의 땅을 사들였다. 적은 자금으로 마음에 드는 터를 구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터는 좋아도 너무 외지거나 길이 없는 땅이 많더라. 헛걸음이 잦았지.”
Q 작물 선정도 미리 해두었나?
A “아니다. 일단 시골로 빨리 내려가고 싶어 작물에 대한 모색 없이 그냥 내려왔다. 산자락에 사둔 땅 인근에 있는 빈집을 임시로 빌려 살며 작물 구상을 시작했다. 처음엔 사슴농장이나 옻나무 재배에 관심을 가졌으나 실상을 좀 파악해보니 만만치 않겠더군. 생산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리는 과수 농사나 자금이 많이 드는 시설 하우스 농사도 그렇고. 그러던 차 TV 방송에 나온 굼벵이(흰점박이꽃무지의 유충) 사육 농가의 성공 스토리를 보고 굼벵이 사업이 유망하겠다고 판단했지. 그게 굼벵이 농사에 뛰어든 계기였다.”
Q 귀농하자마자 곧바로 굼벵이 사육을 시작했나?
A “지체 없이 일을 착수했다. 경기도 연천에 있는 굼벵이 농가를 찾아가 상담을 하고, 교육을 받고, 굼벵이 종자(종충)를 분양받아 사육에 나섰던 거지. 셋집에 있던 창고를 사육사로 썼고.”
Q 보통은 미리 작물 선정과 공부를 하고 귀농을 한다. 신중하게 접근하는 것이지. 당신은 일사천리로 진도를 냈네?
A “사실 굼벵이 사육과 가공 생산이 별로 어렵지 않다. 여느 농사에 비해 한결 수월하거든. 물론 굼벵이 공부는 사육 착수 이후 충실하게 했다. 경북농민사관학교를 통해 2년에 걸쳐 천적곤충과정과 유용곤충과정 교육을 이수했으니까. 여하튼 귀농 한 달 만에 굼벵이 농사를 시작했으니 엄청 속도를 낸 셈이다. 내 땅에 내 집도 신속하게 지어 이사도 했다. 불과 서너 달 만에 이 두 가지 일을 해치웠지.”
Q 왜 그렇게 서둘렀을까?
A “지금 와서 돌아보면 너무 조급했다는 생각이 들지만 당시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월급이라는 게 없으니 한시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만 했던 거다. 매사 추진력을 가지고 신속하게 처리하는 게 좋은 거라는 생각과 그렇게 살아온 습성도 작용했지만.”
땔나무를 베겠다면서 종일 낫만 가는 건 바보짓이다. 저 굴 속에 호랑이가 있는지 고양이가 사는지 궁금하면 굴로 들어가 봐야 한다. 그는 성격 자체가 느긋하기는커녕 박력이 넘쳐 뭐든 영감이 떠오르면 즉시 판단해서 즉시 해치우는 사람인 거다.
알아주는 굼벵이 농가로 부상했으나
허준의 ‘동의보감’에선 굼벵이를 아주 좋은 약용곤충으로 적시했다. 굼벵이 섭취를 혐오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지만, 예부터 약용은 물론 식용으로 민간에서 흔히 쓰인 곤충이었다. 굼벵이 사육이 농업의 한 장르로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효능이 탁월하지만 식품으로 인정받지 못했다가 2016년에야 식약처에 의해 식품 원료로 승인됐으니까. 그즈음 곤충산업에 대한 인식이 높아지기 시작했고, 굼벵이 농사가 블루오션으로 부각되면서 사육 농가가 급증했다. 1000개 이상으로까지.
상품화되는 과정은 비교적 간단하다. 산란한 굼벵이 알을 리빙박스 안에서 3개월 정도 길러 살을 찌운 뒤 환, 분말, 엑기스 등 식용상품으로 가공하면 되니까. 질병이 거의 없고, 투자 비용도 적게 들고, 게다가 온·습도만 잘 맞춰주면 크게 손이 가지 않아서 매력적인 고소득 특화작물로 각광을 받았다. 민첩한 머리와 바지런한 손발을 가진 임원식 씨는 이 기특한 애벌레를 야무지게 잘 길러 고품질 제품을 생산함으로써 상주에서 알아주는 농가로 급부상했다.
“굼벵이 농사는 신선놀음에 가깝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수월하다. 그러나 차별화된 고품질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선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문제는 역시 판로다. 기르기는 쉽지만 팔기는 쉽지 않은 거다.”
Q 어느 정도 수익을 올리는가? 사육 농가가 급증하면서 고전하는 농가들이 많다던데. 폐업도속출하고.
A “처음 3년간은 부진했다. 어떤 농사든 초기의 바닥 다지기에 3년은 걸린다. 시행착오도 겪으며 성장의 힘을 얻어가는 필수적인 수련기지. 아무튼 부진한 가운데에서도 서서히 매출이 올라 2019년엔 연매출 9000만 원을 기록했다. 블로그를 운영하고 노하우를 활용한 덕분이었다. 이젠 궤도에 올라섰구나! 그런 판단을 했지. 농장 이름이 알려지면서 견학을 오는 이들도 많았다. 그러다 코로나로 위기를 맞이했다.”
Q 매출이 급감했나? 코로나의 횡포로 곤경에 빠지지 않은 분야가 드물다.
A “2020년 매출이 반 토막 났다. 소비가 위축되고 주요 판로였던 지역 축제장에서의 가판이 불가능해지면서 벌어진 일이다. 사육 농가가 포화 상태이기도 했고. 올해는 더 상황이 나쁜 것 같다.”
불운이라 할 수밖에. 아무도 못 말릴 급한 성격대로 후다닥 일을 진행했음에도 궤도에 올라섰으나, 코로나의 기습으로 주춤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절체절명의 상황까지는 아니지만 낙심이 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단 대차게 강물에 오른 사공은 멈추지 않는 법이다. 급물살에선 노를 묘하게 잘 저어 나가면 그만이다. 비바람에 시달리지 않고 피는 꽃이 있겠는가. 그는 방향을 선회하기로 했다. 굼벵이의 사육 규모를 왕창 줄여 코로나 종식 이후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새 작물에 도전했다. 그 이름도 참신한 참두릅을 기르기로 하고, 올봄에 스마트 팜 타입의 시설 하우스를 지었다. 귀농 5년 차 이상의 귀농인에게 주는 연리 2%짜리 영농자금 3억 원을 지원받아서.
“내가 시작한 참두릅 농사는 기존 노지 재배 방식과 크게 다르다. 노지에서 기른 두릅나무의 마디마디를 잘라 하우스 안의 물병에 꺾꽂이처럼 꽂아 기르는 방식이거든, 이걸 ‘마디수침 재배법’이라 부른다. 이 재배법으로 연중생산이 가능해 최대 10배까지 수익 증대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메리트가 큰 농법이라 성과가 있을 것으로 예상하지.”
‘이미 남들도 많이 하는 재배법 아닌가?’ 하는 생각이 대번에 들었지만 아직은 선도적 농법이란다. 이 분야의 고수를 만나 멘토로 삼기도 했다. 그렇다고 해도 성공 보증서는 어디에서도 발부받을 수 없다. 인생이라는 미스터리가 늘 그렇듯, 농사에도 역시 복병과 변수가 음흉하게 나타나 행패를 부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들 대수로울 것 없다. 행복이라는 밥상에는 늘 고난이라는 양념이 동행하므로 복병은 복병대로 열나게 때려눕히면 되는 거다. 임원식 씨의 기본 태도가 그렇다. 그는 약 7억 원의 자금을 들고 귀농했다. 내 생각엔 그 돈이면 그냥 경치 좋은 산골에 오두막 하나 짓고 놀고먹겠다만 그는 생각이 영 다르다. 백수에 흥미 없다.
“그간 지니고 온 자금은 전부 사라졌다. 농토를 사고 집을 짓는 데 주로 사용됐지. 적자에 따른 손실금도 좀 있지만 그건 수업료가 아니고 뭐겠는가? 다 투자분이라 생각한다. 75세까지는 열심히 농사를 지을 작정이다. 월 350만 원 정도는 가져야 생활이 되던데, 그걸 벌기 위해서도 뛰어야 한다.”
Q 월 100만 원으로 희희낙락 사는 시골 부부도 많던데?
A “내가 단지 돈벌이만을 위해 뛰는 건 아니다. 도시와 직장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열심히 하며 살고 싶다는 기본 이상을 좇아 달리는 거거든. 당신 행복해? 누가 그리 물어보면 답은 ‘그렇다!’다. 몸은 고달프고 고민도 많지만, 난 지금보다 더 좋은 시간을 보낸 적이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 된 느낌이다.”
어떤 직업이든 유쾌하기만 하겠는가. 애환과 성취는 궁합이 잘 맞는다. 고로 그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행복하다는 거겠지. 그의 뇌에 세팅된 목적은 삶의 질을 높이는, 즉 자기 확장에 있는 것 같다.
임원식 씨가 주는 귀농 팁
•할 일 없으면 농사나 짓는다고? 어림없다. 귀농은 절대 쉽지 않다. 단단한 각오와 철저한 사전 준비를 하자.
•자칫하면 원주민들에게 왕따당한다. 절대적인 신임을 얻도록 노력하자. 인사부터 잘하고. 목에 힘주면 발붙이기 어렵다.
•관행 농사는 소득을 기대하기 어렵다. 똘똘한 작물 선정을 위해 미리 심각한 고민과 연구를 해두는 게 좋다.
•작목을 정했다면 확실한 멘토를 만나라. 그 사람의 실패담이 거울이다.
•교육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라. 새로운 지식도 얻고 멘토도 거기에서 만날 수 있다. 각종 지원사업도 교육을 이수해야 받을 수 있다.
•직거래만이 답이다. SNS 마케팅을 공부해 적극 활용하라.
퇴직을 앞둔 57대 A씨는 인생2막을 준비하기 위해 고민이 많다. 이제 막 취업해 직장 생활을 시작한 자녀들은 아직 안정적인 단계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 벌써 ‘정년퇴직’이 다가오고 있어 알 수 없는 걱정과 압박감에 어깨가 무겁다. 현실적인 문제도 있지만 막상 은퇴 뒤 집에 가만히 있으면 몸이 근질거리고 마음도 불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다.
A씨처럼 여러 가지 이유로 은퇴 뒤에도 일을 하고 싶은 시니어에게 자격증은 사회에서 요구하는 정년이나 노인이라는 나이 문제를 넘어서며 일할 수 있는 좋은 비법이다. 자격증 취득이 재취업과 노후대비, 자기계발에 해결책이 될 수 있다.
자격증을 취득하려고 공부를 하는 것 자체가 새로운 활력을 줄 수 있다. 또 자신만의 경험과 노하우를 살려 관련 자격증을 따면 탄탄한 미래를 준비하는 데도 도움된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며 변화를 통해 완전한 변신을 꾀하는 것도 좋을 수 있다.
인생 100세 시대를 고려하면 앞으로 40년 넘게 더 살아야 한다. 오래 이어질 인생2막을 다채롭게 꾸려가고 싶은 시니어들을 위해 알짜배기 자격증 4개를 소개한다.
①자녀를 키워봤다면 누구나!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는 출산한 산모와 신생아 가정을 직접 방문해 이들의 건강을 살피고 산후 관리를 돕는다. 출산 전후 산모의 안정과 빠른 회복을 위해 산모에게 유방 마사지, 복부 마사지, 찜질, 산후 체조, 건강식을 제공한다. 또 목욕과 배꼽 소독, 청결, 아기 마사지 같이 신생아 위생과 건강관리를 돕는다. 이 밖에 큰 아이가 있으면 등하교 관리와 식사, 장보기, 빨래, 청소 같은 가사도 전담한다.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가 되려면 보건복지부나 시·군·구청 홈페이지에서 정부가 지정한 교육기관을 먼저 확인한다. 그리고 지역 내 여성인력개발센터, 돌봄사회서비스센터 같은 해당 교육기관에서 이론 24시간과 실습 36시간 교육을 받는 2주 과정을 밟아야 한다.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간호사 같은 자격증을 소지해 경력을 인정받으면 이론 12시간과 실습 28시간으로 교육 기간이 1주 과정으로 줄어든다.
다만 지방자치단체나 교육기관에 따라 시험을 치르는 곳이 있으니 시험 유무도 확인해야 한다. 수강료는 신규 과정 20만 원, 경력자 과정 15만 원이다.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계층은 교육비 50%를 감면받는다. 수료 뒤 바우처 제공 기관에 취업해 400시간 이상 근무한 재직자는 수강료 50%를 환급받는다.
교육 수료 뒤 군청과 구청 같은 각 지방자치단체에 등록된 바우처 제공 기관에서 ‘바우처 산모관리사’로 취업할 수 있다. 근무는 주 5일, 하루 8시간이 기본으로 단축형(1주), 표준형(2주), 연장형(4주) 중에서 선택할 수 있다. 보수는 단축형 33만3750원, 표준형 66만7500원, 연장형 133만5000원이다.
근무할 때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무엇보다 자신이 산후조리를 했던 방식이나 자녀 양육 방식을 고집하면 안 된다. 복장 제한도 있다. 면 소재 옷만 입어야 하고 액세서리는 금물이다. 향수도 피해야 한다.
취업한 산모·신생아 건강관리사라도 교육 수료 뒤 1년이 지나면 반드시 연 8시간 이상 보수교육을 이수해야 한다. 교육은 직무와 서비스, 직업 비전, 현장 갈등과 문제 해결, 스트레스 관리 같은 직무와 직접 연관 있는 내용이다. 또 산모로부터 불만을 2번 이상 접수받은 건강관리사는 재교육을 받아야 한다.
②공동주택 지킴이 주택관리사
주택관리사는 공인중개사 못지않게 조명되며 정년이 없어 은퇴 뒤 노후대비로 인기 높은 자격증 시험 중 하나다. 주로 아파트와 공공시설, 상가 같은 대규모 공동 주택의 각종 시설과 환경을 유지 관리한다. 또 공동시설 유지와 보수, 관련된 각종 회계 업무인 공과금 납부 대행, 관리비 징수 같은 업무를 담당한다.
주택관리사(보) 시험은 1년에 1회, 1차와 2차로 나뉘어 진행된다. 구체적인 일정은 한국산업인력공단 홈페이지에서 일정과 시험과목을 미리 확인하고 준비하면 된다. 서울시평생학습터, 아산시평생학습관, 천안시평생학습센터, 인천시민교육센터, 경기도평생학습관처럼 전국 지자체에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강의를 제공하고 있다.
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취득한 다음 3~5년 이상 근무 경력을 쌓으면 주택관리사로 활동할 수 있다. 주택관리사로 되려면 500세대 미만의 공동주택 관리소장으로 근무 경력이 3년 이상 또는 공동주택관리기구 직원(경비원, 청소원, 소독원은 제외함) 또는 주택관리업자 직원으로 주택관리업무 종사 경력 5년 이상과 같은 경력을 충족해야 한다.
③ 식물과 함께하는 삶, 조경기능사
조경기능사는 식물이나 토목, 물, 조형물 등을 통해 생활공간을 꾸미고 자연을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대해 현장을 조사해 조경에 대한 기본 구상과 계획을 세우고, 부분적으로 실시 설계를 이해하고 있는지, 현장 여건을 고려한 시공으로 조경 결과물을 도출하고 관리할 수 있는지가 주요 평가 지표다.
시험은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본다. 조경 기초 설계부터 정원 설계, 잔디 식재 공사, 실내 조경 공사 같이 포괄적인 내용을 알아야 한다.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을 받아야 합격이다. 실기 시험은 3시간 30분 안에 주어진 조경 작업(도면작업·수목감별·조경실무작업)을 완료해야 한다. 도면 작업은 평면도와 단면도를 모두 완성해서 제출해야 한다. 완성하지 못하면 실격이다. 수목감별 평가 방법은 주어진 수목 사진을 보고 수목명을 맞혀야 한다. 조경 실무 작업은 주로 조경수목 식재, 포장(벽돌쌓기), 잔디 파종 같은 수행 능력을 평가한다.
조경기능사는 법적 우대사항보다 민간에서 활용도가 높은 자격증이다. 주로 건설회사 조경부서와 조경엔지니어링회사, 조경컨설팅회사, 조경설계용역업체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다. 이 외에도 조경 식자재전문공사업체와 조경관리업체, 조경시설물 설치전문공사업체, 학교·아파트 단지 관리부서, 정원수·온실 재배업체로 진출할 수 있다.
실제 조경시공업계에 따르면 50~60대 중장년층에서 조경기능사 취득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조경시공업계 관계자는 “조경기능공이 예전엔 몸을 많이 쓰는 직업이란 인식이 있었지만 지금은 장비가 발달해서 덜 힘들다”며 “오히려 식물과 함께하면서 은퇴 뒤 건강도 챙길 수 있는 일로 바뀌어 가는 중이라 60대 중반까지도 현장에서 조경기능인으로 활약하는 분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④웰빙시대, 우리 먹거리 안전하게! 농산물품질관리사
농산물품질관리사는 산지 생산자조직에 소속돼 농산물 품질 관리, 상품과 브랜드 개발, 물류 효율화, 판촉과 바이어 관리 같이 농산물품질을 종합적으로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다. 주로 농산물 등급을 판정하고 농산물 출하 시기를 조절하며, 품질관리기술에 대해 자문한다. 또 농산물 품질 향상과 유통 효율화에 필요한 업무를 수행한다.
자격증 응시에 경력이나 학력, 성별 제한이 없다. 평소 농업에 관심이 있거나 귀농을 생각해볼 법한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자격증이다.
농산물품질관리사 시험은 1차 시험과 2차 시험이 있다. 1차 시험은 객관식으로, 100점 만점에 모든 과목 40점 이상, 전체 평균 60점 이상이면 합격한다. 실기시험은 단답형과 서술형으로 시행되며, 100점 만점에 60점 이상이면 합격한다. 자세한 시험 과목과 일정은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격증을 갖고 있으면 농산물을 취급하는 대형 유통업체, 공공기관, 지역농협, 농산물품질관리원에 취업할 가능성이 높다. 덧붙여 농산물을 취급하는 공공기관과 농협에 취업하면 인사 고과와 수당, 승진 같은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농산물품질관리사는 농업직 9급 국가공무원 채용에서 3% 가산점을 받는다.
금융권 종사자들의 은퇴 나이가 빨라지고 있다. 비대면 거래가 늘면서 은행들이 몸집 줄이기에 나서며 은퇴자 연령이 빨라지고 있는 분위기다. 일부 은행에서는 만 40세 퇴직자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따라 은행업계에 종사하는 4050 시니어들일수록 더 빨리 인생 2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신한은행이 오는 14일까지 희망퇴직을 받는다고 10일 밝혔다. 앞서 1월에도 신한은행은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이날 신한은행 관계자는 “한 해에 희망퇴직 신청을 두 번이나 받는 적은 올해가 처음”이라고 말했다.
이번 희망퇴직 신청은 일반직, 계약인력 가운데 1972년 이전 출생한 15년 이상 근속 직원을 대상으로 한다. 2019년 희망퇴직이 1964년 이전 출생자를 대상으로 했던 것과 비교하면 무려 6년이나 낮아졌다. 2년만에 연령 기준을 크게 내리며 대상 연령층을 대폭 확대한 셈이다.
신한은행처럼 다른 은행들에서도 희망퇴직 대상자 연령이 내려가면서 은행업계 종사자들의 은퇴 시기가 빨라지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2018년 말부터 2019년 초까지 각 은행이 추진한 희망퇴직 대상자들은 주로 1960년대 중반 베이비부머 세대였다. 그런데 올해는 희망퇴직 대상자에 1980년대생까지 포함될 정도로 연령층이 크게 내려갔다.
국민은행은 올해 1965년부터 1973년까지의 출생연도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2019년 초에는 희망퇴직 대상자 최저연령은 1966년생이었다. 신한은행과 같이 2년만에 대상층이 5년이나 젊어졌다.
NH농협은행은 올해 1964년부터 1980년까지 태어난 직원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2년 전에 1963년부터 1978년까지 출생자를 대상으로 한 2년전과 비교하면 거의 비슷하다. 다른 은행과 달리 희망퇴직 대상자 연령층이 확대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희망퇴직 대상 연령이 만 41세까지 가능해 2년 전에는 희망퇴직 연령이 가장 낮은 은행이었다. 올해는 이 자리를 하나은행이 차지했다.
하나은행과 우리은행은 2년 전에 1964년 이전 출생 직원들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진행했다. 그런데 올해는 연령층을 대폭 확대했다. 우리은행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출생자를 대상으로 해 최저 연령대가 무려 8년이 더 낮아졌다. 하나은행은 더 크게 바뀌었다. 1965년부터 1981년생을 대상으로 퇴직 신청을 받아 만 40세까지 연령층이 낮아지며 올해 희망퇴직 신청 연령이 가장 낮은 은행으로 자리매김했다.
신한은행은 올해 희망퇴직자에게 연차와 직급에 따라 최대 36개월 월급을 특별퇴직금으로 지급한다. 한 달 월급이 1000만 원이라고 가정하면 3억6000만 원을 특별지원금으로 받는 셈이다.
또 신한은행은 희망퇴직 직원들을 관리전담·금융상담 계약직 인력으로 다시 채용하는 방안도 함께 추진한다. 이들에게는 자녀학자금과 창업지원, 건강검진 등 다양한 혜택을 제공한다고 밝혔다.
이처럼 금융권에서 희망퇴직을 하면 그동안 불입한 퇴직연금을 일시불로 목돈 형태로 받을 수 있다. 하지만 한 전문가는 "은퇴자들이 퇴직금을 바로 받을 수 있다는 생각으로 퇴직금만 보고 퇴직할 경우 위험하다"며 "은퇴 이후 경제활동을 준비하고 퇴직을 고려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25년간 은행에서 일하다 2015년 말 명예퇴직한 A씨는 최근 유튜브 ‘너와 나의 은퇴 학교’ 채널에 출연해 “명예퇴직이 갑자기 이뤄져 미래를 미리 고민할 시간 여유가 없었다”며 “희망퇴직을 선택하면 당장 수억 원 상당의 특별퇴직금을 받을 수 있어 경제적으로 유리하다고 생각하고 1주일 만에 결정했다. 미리 준비할 시간이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창희 트러스톤자산운용 연금포럼 대표는 “단돈 50만 원을 벌면서 퇴직금을 관리하는 사람과 소득 없이 퇴직금을 관리하는 사람은 시간이 갈수록 자산 규모에서 차이가 크게 난다. 또 일을 하면 더욱 건강하고 보람 있게 삶을 영위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금융권 희망퇴직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조언을 덧붙였다.
대기업 금융기관에서 기업금융 업무를 담당했던 사람이라면 상장을 앞두고 있는 중소기업 재무 담당 자리를 노려볼 만하다. 코스닥 시장에 이제 막 등록했거나 등록 직전에 있는 회사는 재무 담당 인력이 취약하다. 이들은 증권 시장에서 자금을 조달하거나 다수의 투자가에게 기업재무 내용을 홍보해 본 경험이 없다. 이런 업무는 금융기관에서 기업금융 업무를 경험한 사람의 노하우를 필요로 한다.
개인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해본 사람은 자산운용상담사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할 수 있다. 은행은 자산관리사 중 일부를 계약직으로 고용하는 경우가 꽤 있다. 은퇴 전에 ‘회사의 금융상품 판매 대리인’으로 근무했다면 이제부터는 ‘고객의 구매 대리인’ 처지에서 고객에게 유리한 상품을 추천한다는 생각으로 일해야 한다.
강창희 대표가 제시한 방법 외에 금융권 퇴직자를 위한 정부 프로그램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고용노동부는 금융특화 전직 지원 서비스를 운영하고 있다. 여기선 금융업계 종사자들이 퇴직 후 진로를 설정하고 관련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돕는다. 창업 귀농·귀촌은 물론 금융권 퇴직자들이 많이 뛰어드는 금융과 재테크 전문 강사 준비 과정도 지원받을 수 있다.
중소벤처기업부에서 진행하는 ‘1:1 현장코칭 숙련인력 양성사업’도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 이 사업은 금융권 퇴직 전문인력과 중소기업 신규인력을 연결해 실무 노하우를 전수하는 프로그램이다. 퇴직 전문인력은 금융위원회가 산하 금융기관들로부터 수요를 파악해 선정한다.
1990년대 농구대잔치는 한국 농구의 최전성기였다. 당시 뛰어난 실력과 준수한 외모로 유명했던 이상민, 문경은, 서장훈 등은 ‘오빠부대’로 불리는 팬덤을 구축했다. 이들이 소속된 연세대를 농구대잔치의 전설로 만든 이가 바로 감독 최희암(67)이다. 명감독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2009년 인천 전자랜드 감독을 끝으로 코트를 떠났다. 이후 경영인으로 변신하여 현재 고려용접봉 부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그를 만나 농구인의 삶과 철학, 그리고 경영인으로서의 변신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농구대잔치 흥행의 중심에는 연세대가 있었다. 최희암 감독은 17년간 연세대 감독으로 팀을 이끌며 대학팀 최초로 우승컵을 거머쥐는 기록을 세웠으며, 세 차례의 우승을 통해 감독으로서의 실력을 증명했다. KBL 출범 이후 프로팀과 대학팀을 오가며 감독 생활을 이어오다 2009년 돌연 은퇴하고 경영인으로 변신했다.
“2009년 당시 전자랜드와의 재계약이 불발되면서 은퇴 이후의 삶을 고민했어요. 농구 코트를 떠나기로 했지만, 아쉬움이 컸죠. 그래서 대학에서 농구를 가르치거나 농구와 관련된 자문을 하려고 맘먹고 있던 시기였어요. 그때 고려용접봉으로부터 제의가 왔어요. 뜻밖의 제의라서 놀랐죠. 선배들과 아내와 상의했는데, 다들 ‘OK’ 사인을 주더군요. 아내는 감독과 같은 자영업자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월급을 받는 정규직이 된다고 좋아했어요. 저도 인생 2막으로 다른 길을 가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어요.”
그의 영입을 적극적으로 추천한 이가 바로 홍민철 고려용접봉 회장이었다.
“나중에 전해 듣기로는 홍민철 회장이 저의 열정적인 모습을 높이 평가하셨다고 해요. 전자랜드 감독 시절, 홍 회장과 그의 동생인 홍봉철 전자랜드 구단주와 함께 우연히 저녁 식사를 몇 번 같이한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숙소에서 출퇴근했기 때문에, 집에 안 가고 식사를 마친 후 숙소로 갔어요. 감독 할 때 출퇴근 시간이 아까워서 늘 숙소 생활을 했거든요. 그 시간을 아껴서 전술을 한 번 더 짜거나, 선수들 훈련을 1분이라도 더 시키고 싶었어요. 저도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이런 태도를 좋게 봐주신 것이 아닐까요?(웃음)”
반복과 숙달 그리고 다롄
오랫동안 한 분야에서 일하다 다른 분야로 전환한다는 것.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농구인이 아니라 경영인으로 첫걸음을 내딛는 순간 어떤 심정이었을까?
“농구인 출신은 적응력이 빨라요. 우리는 코트에서 점프도 하고, 뛰기도 하고, 구기 종목처럼 볼도 다루고, 필요하면 몸싸움도 해야 해요. 그래서 훈련할 때 다양하게 연습하고, 숙달될 때까지 반복하죠. 반복과 숙달이 몸에 뱄어요. 경영도 마찬가지예요. 업무를 파악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일단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숙달되면 잘할 수 있다고 믿었어요. 현대건설 다닐 때도 6개월은 업무를 집에 가지고 가서 했는데, 이후에는 2시간이면 다 끝냈어요.(웃음) 어렵겠지만 ‘한번 해보자’ 이런 맘으로 시작했어요.”
경영인으로서의 첫 무대는 국내가 아니라 중국이었다. 고려용접봉에서 첫 부임지는 바로 중국 다롄이었다. 중국 다롄의 법인장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한국이 아닌 중국에서의 생활은 분명 쉽지 않았을 터.
“일단 젊을 때 회사 생활을 잠깐 해봤기 때문에 경영이 낯선 분야는 아니었어요. 다만 능력상 잘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이 있었죠. 게다가 해외라서 소통이 쉽지 않잖아요. 첨엔 걱정을 좀 했는데, 나중에 지나고 보니 결과적으로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경영도 처음이고 언어의 벽도 있었기 때문에 큰 흐름만 제시하고, 이외의 세세한 사항은 현지 직원들을 믿고 전적으로 맡겼죠. 만약 한국에서 일을 시작했다면, 발의 위치조차 하나하나 지시했던 농구 감독 때처럼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썼을 거예요. 경영자로서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는 힘을 그때 많이 길렀어요.”
몇 줄의 이력으로 사람의 모든 것을 쉽게 판단할 수는 없지만, 무시할 수는 없는 법. 운동선수 출신이라는 경력은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비경영인 출신이 취임했을 때 내부의 반응이 궁금했다.
“일단 얼굴을 아니까 기본적으로 호의적이었어요. 내부 직원이나 외부에서 사람을 만날 때 쉽게 다가갈 수 있었어요. 농구가 좋은 대화거리가 됐죠. 중국에 있을 때는 경쟁회사 임직원 중에 저를 좋게 봐주셨던 분이 참고할 수 있는 경영 노하우 같은 것을 은연중에 공유해줬는데, 그런 걸 통해 많이 배웠어요. 배운 걸 회사에 적용하면 다들 ‘운동선수가 어떻게 그런 걸 생각하지?’ 하는 반응을 보이더군요. 또한 실수해도 많이 용인해줬어요. 운동을 오래 해서 잘 몰라서 그렇다고 하면서요. 또한 홍 회장을 포함한 임원진이 코치를 많이 해주셨어요.”
임시대행으로 시작한 17년
사실 그는 선수로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쟁쟁한 선수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것이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20대 후반에 은퇴를 결심했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은퇴 후 평범한 직장인으로 살기도 했다.
“농구 선수로서 아쉬움은 있었지만, 내 길이 아니라 판단하고 재빨리 다른 길로 나섰어요. 현대건설 다닐 때는 이라크로 파견근무도 나갔어요. 하지만 당시 이라크 현장이 워낙 위험해서, 한국으로 돌아와 안정적인 중학교 체육교사를 준비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정기 연고전을 앞두고 연세대 감독대행을 맡아달라고 하는 거예요. 사실 직장 다닐 때 방학마다 어시스턴트 코치로 후배들을 종종 가르치고 있었거든요. 그냥 잠깐만 맡아야지 했는데, 무려 17년이나 할 줄은 몰랐어요.(웃음)”
당시 연세대 선수들은 그를 ‘두 얼굴의 사나이’로 불렀다. 혹독한 훈련을 하기로 유명한데, 이와 달리 실전에서는 부드럽게 선수를 대했다.
“여자배구의 전설이라 불리는 이창호, 전호관 감독으로부터 감명을 받았어요. 훈련할 때는 선수들한테 엄청 혹독한데, 경기장에서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대요. 경기장에서 선수들한테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감독은 평소에 훈련을 덜 시킨 거라고. 그때부터 저도 경기장에선 최대한 부드럽게 대했지만, 훈련은 정말 혹독하게 했어요. 더러 도망가는 애들도 생길 만큼요. 물론 혹독하게 대하지만 마음이 쓰이는 부분도 있었죠. 저마다 버틸 수 있는 역량이나 성격이 다르잖아요. 잘 따라오지 못해 힘들어하는 애들을 보면 맘이 아팠죠.”
혹독한 훈련 덕분이었을까? 그는 농구대잔치 시절 연세대 감독으로 우승을 세 번이나 했다. 감독으로서 바라본 우승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비결은 없지만, 원리는 있어요. 농구는 철저한 팀 게임이에요. 감독이 욕심 부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한 선수만 기량이 탁월하다고 되는 것도 아니죠. 물론 재목이 좋은 선수를 데려오는 것도 중요하죠. 다만 재목이 훌륭한 친구들이 서로 잘 조화를 이루면서 게임을 치러야 이길 수 있어요. 결국 코트에서 넣어야 할 골대는 하나고, 이기는 팀도 하나죠. 코트에 들어서면 최선을 다해야 이길 수 있어요.”
*②편으로 내용이 이어집니다.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저·아날로그)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경제교사인 앨런 크루거의 유작. 콘텐츠 산업 중 가장 큰 변화를 맞고 있는 음악 업계를 통해 최근 경제학의 주요 이슈와 콘텐츠 산업의 미래를 개관한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경제학 (로버트 스키델스키 저·안타레스)
원로 경제 석학인 저자가 주류 경제학의 문제점을 총체적으로 진단한다. 180여 명의 최고 권위 학자들의 이론을 통해 애덤 스미스부터 현재까지 경제사 300년의 흐름을 꿰뚫는다.
완전한 행복 (정유정 저·은행나무)
베스트셀러 작가 정유정의 신작. 자신의 행복이 타인의 행복과 부딪치는 순간 발생하는 잡음에 주목한다. 압도적인 서사와 속도감 있는 문장, 정교한 플롯이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걷는 독서 (박노해 저·느린걸음)
삶의 길잡이가 되어줄 박노해 시인의 문장 423편이 그의 사진과 함께 담겼다. 흑백 사진의 대명사처럼 여겨지는 시인의 사진 중에서 흔치 않은 컬러 작품만을 엄선해 실었다.
강원국의 어른답게 말합니다 (강원국 저·웅진지식하우스)
청와대 연설비서관 출신 저자가 삶의 품격을 높이는 화법을 이야기한다. 진정한 어른으로서 말 한마디로 공감과 신임을 얻고 존중받을 수 있는 여러 실질적인 노하우를 소개한다.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 (김서울 저·놀)
유물 해설가인 저자가 서울의 5대 궁궐을 거닐며 느낀 감상을 위트 있게 풀어낸다. 청기와를 집값에 비교하고 해치를 강아지에 비유하는 등 현대인의 시선으로 재해석해 재미를 더한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지만, 인간은 꽤 많은 것을 두고 떠난다. 이를 ‘유품’이라 부른다. 유품을 정리하는 작업은 고인을 애도하는 아름다운 일이지만, 상황에 따라 더 큰 고통으로 다가오는 경우가 있다. 주인 없이 어질러진 집이 숙제처럼 느껴질 때, 고인이 생전 소중히 여기던 물건을 제 손으로 처분해야 할 때 남겨진 가족의 회한은 더욱 커진다. 사랑하는 이들이 먼 훗날에도 자신을 떠올리며 웃음 짓기를 바란다면 삶의 끝뿐 아니라 그다음 페이지도 아름다워야 한다. 장래 유품이 될 물건을 직접 정리하는 ‘생전 정리’가 필요한 이유다.
“가장 힘들었던 건 옷이었어요. 빈집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앉아 부모님과 언니의 옷을 손에 쥐고 있자니 하염없이 눈물이 북받쳐 올랐어요. 여러 가지 추억도 떠오르고요. 그 많은 옷을 제가 가질 수도 없고, 결국 조금만 남기고 과감히 처분했어요.”
14년 전 어머니와 언니를 잃고, 4년 전 아버지를 여읜 히라쓰카 요우코(59) 씨는 2년 전 아무도 살지 않는 친정집을 홀로 정리했다. 분주히 식기와 주방용품, 옷가지를 처분하면서도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옆에서 참견하는 사람이 없어 한편으론 속이 편했지만 넘쳐나는 물건을 ‘버릴 것’과 ‘버리지 말아야 할 것’으로 혼자 결정하려니 마음이 점점 무거워졌다”며 “세상을 떠난 가족이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라 더 그랬다”고 말했다.
가와무라 노조미(67) 씨는 어머니가 살아 있을 적 함께 정리를 시도했지만, 무엇 하나 버리지 못하게 하는 어머니의 완고한 태도에 모든 물건을 제자리에 두어야만 했다. 그로부터 몇 년 뒤 어머니를 떠나보낸 노조미 씨는 모든 것이 그대로인 공간을 5년간 정리하며 외로운 작별의 시간을 보냈다. 그녀는 “자신이 건강할 때 주변을 조금씩 정리해 홀가분하게 만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한다.
최근 국내 출간된 책 ‘부모님의 집 정리’는 일본 중장년 세대가 고령으로 접어든 혹은 이미 세상을 떠난 부모의 집을 정리하며 느낀 경험담을 담고 있다. 이들의 진솔한 고백은 국경을 초월해 생의 마무리를 앞둔 시니어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고령화 사회에 ‘생전 정리’라는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남겨진 자식이 부모님의 집을 정리하는 과정은 썩 유쾌하지 않다. 대부분 어디서부터 정리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분류하고 버리다 원망 섞인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그럼에도 저마다의 방식으로 정리를 끝낸 이들은 마침내 한 가지 공통된 깨달음을 얻는다. 아름답게 이별하려면 정리는 스스로의 몫이어야 한다는 것. 누군가의 자식이기 전에 부모이기도 한 이들은 자신이 겪은 아픔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생전 정리를 결심한다.
◇ ‘데스클리닝’과 ‘가타미와케’
웰다잉 산업이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는 우리나라에서 생전 정리는 아직 낯선 개념으로 받아들여진다. 유품 정리를 삶과 동떨어진 문제로 보고, 가족의 몫으로 여기는 인식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품 정리를 스스로 실천하고, 생활 속 문화로 발전시킨 국가도 있다.
스웨덴은 죽음에 대비해 주변을 정돈하는 ‘데스클리닝’(Death Cleaning)이 일종의 미니멀 라이프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 그 대표 주자가 데스클리닝 전문가 마르가레타 망누손이다. 그녀는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집을 정리하다 놀라운 광경을 발견한다. 물건 곳곳마다 어머니의 글씨로 처리 방법과 기증처가 적힌 메모가 붙어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저서 ‘내일 내가 죽는다면’에서 “꼭 내게 하는 말은 아니었겠지만 나는 이 작은 지시 사항들에 위안을 얻었다”며 “어머니가 옆에서 도와주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이 일로 생전 정리의 중요성을 깨달은 그녀는 이후 데스클리닝 노하우를 주변에 알리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장례가 끝난 후 고인의 유품을 주변에 전달하는 ‘가타미와케’(形見分け)라는 문화가 있다. 고인이 생전에 아끼던 물건을 가족, 친구 등 지인에게 나눠주는 것이다. 유산을 분배하는 경제적 개념이라기보다는 물건을 통해 고인을 애도하고 기억하기 위한 목적에 더 가깝다. 홍수, 지진 등 대규모 자연재해로 하루아침에 집과 가족을 잃은 이들이 서로를 위로하기 위해 바다에 떠다니는 고인의 물건을 주고받으며 유래했다. 이후 고령화 사회의 도래로 ‘종활’(終活·죽음을 준비하는 활동)에 대한 논의가 확장되면서 본인이 생전에 미리 물건을 나누는 경우도 늘었다. ‘부모님의 집 정리’ 마지막 장에서는 80대 중반의 나이에 60년 동안 거주한 집을 직접 정리하고 가족과 이웃에게 물건을 나눈 쇼코 씨의 사례를 소개한다.
◇ 무엇을 남기고 정리할 것인가
이처럼 유품 정리는 단순히 공간을 정돈하는 차원을 넘어 그 과정에서 다양한 가치를 파생시킨다. 특히 생전 정리는 가족이 짊어질 부담을 덜어주고, 다 함께 마지막을 준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유품 정리 서비스 키퍼스코리아 김석중 대표는 “유품은 혼자만의 것이 아닌 상속인과 공유하는 추억”이라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가족과 죽음에 대해 논의해보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언젠가 발생할지 모르는 화재를 대비해 소화기를 준비하듯 생전 정리를 하면 재산, 상속 문제 등 사후 자신으로 인해 벌어질 불씨를 막을 수 있다”며 “그런 의미에서 생전 유품 정리는 후회의 대물림을 막는 일”이라고 했다.
자식에게 각별한 기억을 남겨줄 수 있다는 것도 생전 정리의 장점이다. 김 대표는 “물건에 얽힌 사연을 들려주면 자식도 부모의 몰랐던 점을 알게 되고, 더욱 친밀감을 갖게 된다”며 “그 과정에서 자신 또한 자부심을 느끼고, 삶의 의지를 다질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더욱 의미 있는 정리를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김 대표가 제안하는 몇 가지 팁을 참고해 아름다운 ‘인생 졸업식’을 준비해보자.
◇ 웰엔딩을 위한 생전 정리 노하우 6가지
① 가족 간 비밀을 최소화한다
가까운 듯 보이면서도 알고 보면 먼 사이가 바로 가족이다. 시시콜콜한 이야기는 잘 나누지만, 정작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는 묵언하는 이들이 많다. 금전이 얽힌 문제라면 더욱 그렇다. 생전에 보유하던 상가나 주택의 임대 정보에 대해 끝끝내 알리지 않아 유족이 곤란한 입장에 처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의 경제적 상황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털어놓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가족 간 비밀은 최소화하는 것이 좋다. 직접 말하는 것이 어렵다면 ‘엔딩노트’에 관련 내용을 상세히 작성해둔 다음, 유사시 가족 구성원에게 노트의 존재를 알려도 된다.
② 재산과 승계 목록을 작성한다
정리는 자신이 무엇을 갖고 있는지 현재 상태를 파악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유품 정리도 마찬가지다. 종이나 컴퓨터에 집 안에 있는 각종 물건과 보유 중인 자산 현황을 적고, 이를 종류별로 묶어서 분류해본다. 그다음 각 물건과 관계된 사람을 떠올리고 승계 목록을 적는다. 가족에게 ‘올인’하기보다는 물건별 얽힌 사연이나 추억이 있는 사람에게 나누는 것이 좋다. 가령 함께 골프를 즐긴 친구에게는 골프용품을, 음악 동호회 회원에게는 오래된 LP 박스를 선물하는 식이다. 한평생 소중히 여기던 물건이 쓰레기 취급을 받지 않으려면 필요한 사람이 물려받아야 한다. 나눔이 끝나고 남은 물건은 간직할 것인지, 기억 속에 남겨둘 것인지 고민하고 처분을 결정한다.
[PLUS+] 내 물건 체크해보기
. 예금통장·인감·보험증서·카드
. 연금수첩 등 연금 관련 서류
. 약·보험증·진찰권·병원 연락처
. 부동산 권리증·등기부등본
. 귀금속
. 현금
. 편지 및 일기장
. 사진
. 추억의 물건
. 취미용품
. 대여 중인 물건
. 가스·수도·전기·전화 등 청구서
. 가계도·친척 연락처 등 가족 관련 물품
③ 유산의 가치가 있는 물건은 기증한다
개인의 소장품이 때로는 국가와 사회의 귀중한 자산이 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 더욱 의미 있게 공유하고 싶다면 각 물건과 관련된 기관에 기증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가령 그 시절에 입었던 교복이나 모아두었던 상패는 출신 학교에, 오래된 승마복은 역사박물관에 전달한다. 전달된 물건은 기관별로 50년사, 100년사 등 사사(社史)를 만드는 데 큰 도움이 된다. 서재에 쌓여 있는 책을 아동보육시설이나 지역 도서관 등에 기부하는 것도 의미 있다.
④ 골동품과 고물을 구분한다
앞서 소개한 사례처럼 낡을수록 빛을 발하는 물건을 갖고 있는 것은 자신만의 작은 박물관을 안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고장 난 물건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물건은 함께한 세월에 관계없이 고물에 불과하다. 즉 골동품과 고물을 구분해야 한다. 예컨대 유산의 성격을 띠는 풍금이나 시간이 흐를수록 가치가 높아지는 그랜드 피아노는 소장 가치가 있지만, 젊은 시절에 가져다놓고 쓰지 않는 가정용 피아노는 갖고 있을 이유가 없다. 쓰임새를 다해 창고 신세를 지거나 공간만 차지하는 물건이 있다면 과감히 버린다.
⑤ 명예롭지 못한 흑역사는 정리한다
완벽한 인간은 없다. 누구에게나 알려져서는 곤란한 흑역사가 하나쯤은 있다. 생전에는 자신의 노력(?)으로 비밀을 묻어둘 수 있지만,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는 경우가 있다. 은밀한 취향을 기록해둔 사진이나 영상, 주고받지 못한 금단의 편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두 집 살림을 위해 사용했던 휴대폰이 나온 사례도 있다. 이를 발견한 가족은 상실의 슬픔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또 다른 충격에 휩싸인다. 기왕이면 흑역사를 만들지 않는 것이 바람직하겠으나, 그간 쌓아온 명예가 실추될 만한 일련의 기록이 있다면 스스로 정리한다. 정리의 기준은 가족과 제자가 보았을 때 부끄러울 만한 일이다.
⑥ 디지털 정보도 꼼꼼히 관리한다
오늘날과 같은 정보 사회에서는 인터넷에 올린 기록물도 모두 자산이다. 특히 남겨진 이들에게는 고인의 생전 모습을 추억할 수 있는 선물이 되므로, 언제든지 접속할 수 있도록 수첩에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사이트별로 적어둔다. USB, 외장하드 등 별도의 장치에 모아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반면 인터넷 세계는 너무도 방대해 ⑤와 같은 부끄러운 기록이 자신도 모르는 새 어딘가에 남아 있을 수도 있다. 특히 클라우드 서비스를 사용하는 이들은 휴대폰과 동기화된 경우가 많아 함께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
[PLUS+] 엔딩노트 작성하기
일본 영화 ‘엔딩노트’에서는 시한부 판정을 받은 주인공이 다가온 죽음에 좌절하지 않고 엔딩노트를 작성하며 마지막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다. ‘평생 믿지 않았던 신을 믿어보기’, ‘한 번도 찍어보지 않았던 야당에 표 한 번 주기’, ‘일만 하느라 소홀했던 가족들과 여행 가기’ 등 노트에 적은 리스트를 성실히 실천해나가며 삶의 엔딩을 맞이하는 내용이다. 영화는 그런 주인공의 하루하루를 조명하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주체적인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처럼 엔딩노트는 말 그대로 행복한 엔딩을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을 기록해두는 노트다. 정해진 규범이나 양식은 없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생전에 하고픈 일을 버킷리스트 형식으로 쓰거나, 장례 절차나 유품 처리 방식, 가족들에게 하고 싶은 말 등을 기록해도 된다. 차마 얼굴 보고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적는 방법도 있다. 유언장과 다른 개념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남겨진 이들이 떠난 이의 마음을 헤아리는 데 도움이 된다.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있는 참외 농장. 푸릇푸릇한 잎사귀 사이엔 샛노란 참외가 가득 숨어 있다. 참외 농사는 한 번 심어 늦겨울부터 늦여름까지 연속 수확이 가능해 어떤 작물보다 안정된 수익을 올릴 수 있어 성주로 내려왔다는 50대 부부. 수확한 참외를 선별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4월에 부부를 만났다.
30년을 서울에서 살아온 서울 남자, 서울 여자인 곽창신, 박미영 부부는 귀농을 결심한 후 두 아들을 데리고 전국 곳곳을 찾아 헤맸다. 남편 곽창신 씨는 ‘6시 내 고향’, ‘나는 자연인이다’, ‘인간극장’ 등을 시청하며 시골에서의 삶을 동경해왔다고 한다.
다니던 직장에 희망퇴직을 신청하고 약 6개월의 준비 기간에 이들 부부는 곽창신 씨의 고향인 강원도에서 충청도, 경상도까지 귀농할 곳을 찾아 전국을 돌아다녔다. 귀농지를 찾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한겨울에도 수확되는 딸기로 유명세를 얻고 있는 충청도 제천에서 얼음딸기를 생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제천을 몇 번이나 방문해 그 지역 농부들을 만나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경쟁자가 오는 것을 마땅치 않게 생각하며 마음을 열어주지 않는 농부들에게 결국 두 손 들고 좌절하기도 했다.
귀농귀촌지원센터를 통해 몇 군데 문을 두드린 끝에 마침내 2017년 1월 성주참외로 유명한 경상북도 성주로 귀농, 참외 농사를 짓는 농부가 됐다. 귀농은 2017년이었지만 참외를 첫 수확한 것은 2018년 3월. 첫 실습치고는 큰 착오 없이 성주참외를 수확해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를 통해 직거래를 시작했다.
남편 곽창신 씨가 주로 참외 농사를 도맡아 하고 있다면 아내 박미영 씨는 농사를 거드는 것은 물론, 직판매를 위한 사이트 및 블로그 운영으로 판매 채널 다양화에 힘쓰고 있다. 서울에서 책 편집 디자이너로 일해왔던 만큼, ‘호호네성주참외’는 참외 농사를 기록하는 것뿐만 아니라 귀농 생활 체험 정리 등 다양한 콘텐츠가 소개된 알짜배기 귀농 블로그로 손꼽히고 있다.
올해 귀농 생활 5년 차. 지난 4년간 겪은 고생을 말로 하자면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라는 부부는 귀농을 결심했던 그 즈음을 떠올리며 헛웃음을 짓는다.
아직 귀농인의 성공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지는 않지만, 도시에서의 삶을 시골로 모종한 후 조심스럽게 뿌리 내리고 있는 곽창신, 박미영 부부의 귀농 체험을 브라보가 귀알못(귀농귀촌에 관심은 많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주제별로 묶어본다.
Q 왜 귀농을 결심했을까요?
A 다니던 직장이 발전소였어요. 하루 24시간 운행되는 곳이라 3교대로 근무하는데 밤 근무가 되면 꼴딱 밤을 새서 일해야 했어요. 아이들 얼굴을 볼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죠. 같은 공간에서 살고만 있을 뿐이지 아이들과 밥 한 끼 편하게 먹을 수도 없고 학교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도 없었어요.
불현듯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던 참에 회사에서 희망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공지가 떴어요. 오랜 고민 끝에 아내에게 귀농하고 싶다는 속마음을 털어놓았죠. 흔히 아내와 함께 온 가족이 귀농하면 반은 성공한 것이란 말이 있어요. 행복하게도 아내의 동의를 얻게 됐고, 이런 점에서 정말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죠.
Q 내려오길 참 잘했다, 이런 생각이 드는 지점은 뭘까요?
A 저희 부부가 자주 이야기하는데… 매일 아침 우리 가족 4명이 같이 밥을 먹어요. 저는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하고 좋아요. 참 우습죠? 쉬운 일처럼 보이는 이걸 직장생활 할 때는 할 수가 없었거든요. 저녁에는 같이 텔레비전 보면서 깔깔거리고 웃기도 하고… 소소한 일상이 너무 행복해요. 귀농하면서 예전에 누리지 못했던 일상의 행복을 보상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모든 것을 내가 판단하고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는 점도 있지만요.(웃음)
Q 경북 성주로 꼭 집어서 귀농한 이유는?
A 제가 특별한 기술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귀농을 결심한 후 준비하면서 귀농한 선배들의 조언도 듣고 인터넷 강의도 듣고 귀농귀촌지원센터에 등록해 교육도 듣고 상담도 받았죠. 전 전원생활을 즐기며 부업으로 농사를 짓는 귀촌이 아니라, 아직 한참 키워야 하는 어린 두 아들이 있기 때문에 경제적 생활이 가능한 특화작물 쪽으로 열심히 알아봤어요.
이때 참외가 눈에 띄더라고요. 비닐하우스 생산을 하면서 일 년에 수확을 몇 차례 한다고 하니 수익성도 높을 것 같았고요. 참외 하면 성주참외가 특화돼 있는 상태라 경북 성주에 관심을 갖고 지원센터에 상담을 요청했죠. 그렇게 성주를 여러 번 방문해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간 다른 지역에서 폐쇄적으로 이야기도 잘 안 해줬던 것과 달리 개방적으로 따뜻하게 맞아주시더라고요. 최종적으로 성주로 귀농을 결심하기 전에 아이들까지 데리고 4~5번은 왔던 것 같아요. 농장에서 참외 체험도 해보고요.
Q 귀농해서 가장 어려웠던 점은 뭘까요?
A 마을 주민들과 잘 어울리려면 제가 먼저 도움이 많이 돼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준비하면서 용접도 배우고 기계 수리도 배우고. 그런데 제가 내려와서 정착한 마을이 집성촌이에요. 오랜 시간 동안 거의 친족들이 모여 사는 곳에 불쑥 이방인이 참외 농사 짓겠다고 내려온 것이니 친해지기가 쉽지 않았죠. 그나마 두 아들이 마을에서 뛰놀고 그러는 게 좋아 보였던 마을 주민들도 계셔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지만.
저희는 시골 생활이라고 강아지도 키우고 닭도 키우고 그렇게 시작했는데 마을 주민들은 워낙 그런 생활이 일상이잖아요. 그래서 이제 그런 생활이 지겨워서 닭도 안 키우시고 그러세요. 근데 갑자기 마을에서 새벽에 닭이 울어대니까 좀 뭐라고 하셨죠. 웃픈 이야기죠?
정말 어려웠던 건 참외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땅이 필요한데 땅을 구매하기가 어려웠죠. 현재까지 저희는 땅을 구입하지 못했어요. 이제야 농지 구매를 위해 저금리로 대출해주는 농업인에 선정돼 3억 원을 대출받게 됐어요. 이 자금으로 참외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밭을 알아볼 예정이에요.
물론 밭을 구매하는 게 또 어려움이 있죠. 이런 시골에서의 논이나 밭 거래는 주위의 아는 사람들끼리 알음알음 거래하는 경우가 많아요. 저희가 귀농한 지 이제 5년 차지만 아직도 주민분들에게 이런 거래를 귀동냥 듣기에는 친밀도가 아무래도 떨어지니까… 부동산 중개인을 통해 조금 비싸더라도 구매할 수밖에 없어요. 근데 또 이렇게 조금 비싼 금액으로 거래하면 그 땅에 관심을 갖고 있던 마을 주민이 뭐라 하세요. 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하는 거죠. 그래도 어떻게 하겠어요. 열심히 농사지으며 소통하고 관계 맺는 것을 소홀히 하지 말아야죠. 결국 진심을 다해서 대하다 보면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Q 거주지를 찾는 것도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하였나요?
A 저는 4인 가족이 당장 생활을 해야 하는 상태라 농지보다 거주지를 먼저 장만했어요. 답답한 아파트에서 살다 보니 마당 있는 단독주택에서 아이들이 맘껏 뛰어 놀게 하고 싶었죠. 옆에 밭을 포함해 411평에 건평은 29평 정도 되는 단독주택을 직접 지었습니다. 귀농귀촌지원센터에 가면 농가주택 전용으로 지을 수 있는 기본 평면도까지 업로드돼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생활의 터전이 되는 농지 확보부터 한 후 주거지를 해결하라고 권하고 싶어요. 요즘에는 주거 공간에 관해서 각 지방자치 정부마다 빈집 프로젝트를 운영하고 있어요. 시골의 빈집을 리모델링해서 1년간 살아보고 귀농을 준비할 수 있게 하는 프로그램이에요.
집주인은 돈을 들이지 않고 집을 리모델링해서 좋고, 귀농을 꿈꾸는 도시인들은 첫 1년을 테스트 기간으로 삼아 적은 월 임대료로 살아볼 수 있어서 좋고, 일석이조죠.
Q 농사일이힘들지는 않았나요?
A 모든 농사는 힘들죠. 농사가 처음이니까 교육이란 교육은 다 참가했어요. 강소농 교육, 농민사관학교, 현장실습, 심화교육… 다 쫓아다녔죠. 아내는 사이버농업인 e비즈니스 교육까지, 2017년과 2018년은 교육의 해였습니다. 그러면서 2018년 3월에 참외 첫 수확을 하게 된 겁니다. 그때까지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공판장에는 출하를 못 했고, 밭에서 키우던 소소한 채소들과 참외까지 네이버 스마트스토어나 가족과 친지, 친구들에게 직판매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제 이름으로 공판장에 첫 출하한 게 2018년 4월이었어요.
참외 농사짓는 걸 처음 해본 거잖아요. 모종판에 참외씨 넣고 또 모판에 호박씨 넣고 접목하고 수정시키고, 참외순이 자라면 순 자르기, 참외순과 호박줄기 접붙이기, 자꾸 성장해서 참외 성장을 가로막는 호박잎 떼어주기 등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참외는 열대작물이라 겨울에는 보온성 좋은 부직포로 이불도 덮어줘야 해요. 또 물을 대는 방법이나 비료 쓰는 법 같은 것도 터득해야 해요.
매일 마을 어른들에게 혼도 나면서 배웠어요. 모종을 키워서 본밭에 심어 3개월 정도 되면 수확하는 거죠. 그리고 농부는 부지런해야 한다고 하잖아요. 그 말이 정말 맞아요. 특히 참외는 새벽에 따야 해요. 새벽 시간에 못 따서 기온이 올라갈 때 따면 참외의 아삭한 맛이 덜하고 물러져요. 아침 11시면 경매가 시작되거든요. 그때까지 오늘 출하량을 맞춰야 하니까 성주 분들은 새벽부터 참외 따느라 부지런하게 움직이죠. 저희 같은 경우는 아이들 학교를 보내야 해서 이게 참 힘들었어요. 참외 따랴, 아이들 학교 보내랴.
Q 참외 농사로 매출액이 얼마나 되나요?
A 비닐하우스 1동당 연간 매출액이 1000만 원 정도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농사짓는 사람의 노하우에 따라서 위아래로 20% 정도는 왔다 갔다 하죠. 비닐하우스 10동이 있다면 연간 매출액 1억 정도죠. 그래서 성주에는 억대 농부들이 많아요. 물론 자신 소유의 밭에 비닐하우스 시설을 갖췄을 때 이야기고… 이 시설을 임대해서 하는 저희 같은 경우에는 비용이 더 들어가겠죠. 자가 소유라고 하면 기본 경비를 매출액의 30~40% 잡으면 될 것 같아요. 제일 비중을 많이 차지하는 것이 비료입니다. 땅의 토양을 좋게 해야 상품 가치도 높아지고 당도도 높아지죠. 성주군 농업기술센터에서 미생물을 배양해 토양을 좋게 하는 것들도 지원하고, 토양을 좋게 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씁니다.
무엇보다 성주의 토양이 다른 곳보다 미네랄 함유치가 높다고 해요. 그리고 가야산이 있어서 바람을 막아주고 눈이 잘 안 오고, 다른 곳보다 일조량이 많다는 점 등이 참외 재배에 장점이라고 들었습니다.
Q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됐던데 어떤 점이 어필됐을까요?
A (취재에 동행한 성주군 귀농귀촌지원센터의 담당 이태일 계장이 보충 설명을 곁들였다)
박미영 씨의 꾸준한 SNS 활동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단지 농사짓는 것만 올리시는 게 아니라 농촌 생활을 꾸준히 업로드하면서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받고 계셨는데, 이게 저희 센터가 할 일을 직접 해주신 거죠.
경험자로서 생생하고 유익하게 말이죠. 어린 자녀와 함께 귀농하셔서 자녀들도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고요. 성주를 대표하는 귀농인에 선정되셔서 저금리로 융자를 받게 됐으니 앞으로 참외 농사를 더 늘리실 수 있을 겁니다.
Q 가장 큰 문제는 농지 확보겠네요?
A 그렇죠. 현지 분들이 귀농인 때문에 땅값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세요. 근데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농사를 짓기 위해 귀농을 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귀촌을 통해 현지 주민들과 교류하면서 인맥을 쌓고 직거래 등의 포장 판매 부분에서 뭔가 경제활동을 할 수도 있어요. 꼭 농사짓는 것만이 농촌에서의 경제적 활동은 아니라고 봐요.
농사 힘들어요. 어느 정도 연세 들어서 오시는 분은 차라리 현지에서 생산된 참외를 직접 구매해 소포장 판매를 통해 수익 창출을 하는 부분도 고려했으면 해요. 특히 온라인 판매 등 관련 기능이 뛰어나다거나 마케팅 분야에서 일했던 분이라면 판매 채널 다양화에 훨씬 도움이 될 수 있거든요.
Q 귀농 혹은 귀촌을 원하는 분들은 어떻게 도움을 받으면 될까요?
A 일단 귀농귀촌지원센터를 방문해 귀농하고 싶다고 상담을 요청하면 어떻게 해서든 연결해주세요. 그리고 어떤 혜택이 있는지 상세히 설명해주시죠. 요즘은 1년짜리 현장실습 교육도 받을 수 있는데, 센터에서 농사 잘 짓는 멘토를 연결해 멘토멘티 프로젝트에 넣어주기도 합니다.
멘토에게 월 30만~40만 원, 멘티에게는 월 80만 원의 훈련 참가비를 줘요. 하루 8시간 농사를 배우는 거죠. 5개월 정도 배울 수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더 자세한 내용은 지원센터에 상담해보면 알 수 있을 거예요.
Q 귀농귀촌을 원하는 이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뭘까요?
A 어렵네요, 하나만 꼽기가요. 그런데 제가 살면서 느낀 게 하나 있어요. 서울에서도 마찬가지겠지만 결국 농촌 마을도 사람이 모여 사는 거잖아요. 사람과의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저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저희 집에 인터넷 설치가 안 됐어요.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죠. 아니, 저 높은 가야산 꼭대기에서도 인터넷이 되는데 제가 이사한 성주의 읍내 권역에 인터넷을 설치할 수 없다고 하니 미치고 팔짝 뛸 지경이었죠.
그래서 도시에 살 때처럼 군에 민원 넣고, 심지어 청와대에도 민원 넣었어요. 그런데 공무원은 원칙만 읊으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느 날 저희 옆집에 이사 왔는데 이 사람은 그 지역에 인맥이 있던 사람이에요. 이 사람 집에는 그 다음 날 인터넷을 바로 설치해주더라고요.
또 한 가지 꼽자면 요즘 소확행이라는 말을 많이 하잖아요. 정말 귀농은 소확행을 실천하는 거예요.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냥 가족끼리 행복하게 살자.’
정신없이 빠르게 변해가는 도시에서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인생을 음미하며 살아갈 수는 없잖아요. 귀농해서 비로소 우리 가족은 ‘느리지만 차근차근’ 그렇게 살아가고 있어요.
성주군 귀농인들 연간 수입과 비용
귀농 A 사례(농지 임대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2억 원(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3000만 원(1년), 평균 수입: 8000만 원(1년)
귀농 B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참외, 평균 투자비: 5억 원 (농지·주택 구입 포함), 연간 운영비: 1억 원(1년), 평균 수입: 3억 원(1년)
귀농 C 사례(농지 구입의 경우)
선택 작목: 상추, 평균 투자비: 1억 5000만 원, 연간 운영비: 400만 원(1년), 평균 수입: 4500만 원(1년)
2012년, 50대 중반에 손주를 본 작가 박경희(60) 씨는 금쪽같은 손주가 태어난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덜컥 겁이 났다. 50대에 할머니가 되는 법은 들어본 적도, 배워본 적도 없기 때문이다. 기왕이면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마음으로, 지난해 자신과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담은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냈다. 나름의 독학인 셈이다. 그 무수한 고민 덕분이었을까, 이제 그녀는 익어가는 자신과 쑥쑥 자라나는 손자를 느긋하게 관망하는 여유가 생겼다. 베테랑 방송 작가에서 ‘오아민 할머니’로 인생 3막을 일궈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모든 것이 남들보다 한걸음 빨리, 숨 가쁘게 찾아왔다. 박경희 씨는 자신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 스물여섯에 결혼을 하고 곧바로 첫째를 낳았다. 한숨 돌릴까 싶더니 연년생으로 둘째 아들이 세상 밖에 나왔다. 라디오 작가로 일과 육아를 병행하는 사이 커버린 첫째는 자신과 견줄 만한 속도로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이른 나이에 짝을 만나고, 결혼하자마자 첫아이를 본 것까지 빼닮았다. 정신 차려보니 풋보리 같은 손자 아민이가 자신을 ‘할머니’라 부르고 있었다. 순간 그녀는 미지의 세계에 빠진 듯 혼란스러웠다.
“김혜자 선생님과 라디오 프로그램을 같이할 때 비슷한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김혜자 선생님도 저처럼 이른 나이에 손주를 보셨거든요. 그 당시 선생님께서는 할머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기에 어디론가 떠밀려가는 느낌이 드셨다고 해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 공감은 했지만, 사실 실감은 못 했어요. 그런데 아민이가 태어났다는 소식을 접하는 순간, 그제야 선생님의 말씀이 이해됐어요. 뭐랄까, 여자로서의 막이 닫힌 느낌? 좋고 나쁨을 넘어 굉장히 미묘한 기분이었어요.”
인생에 갑작스러운 변화의 바람이 불면 누구나 그렇듯 지나온 삶을 돌아보기 마련이다. 경희 씨에게는 손주가 태어난 순간이 바로 그 지점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모니터 앞에 앉아 이상적인 할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소싯적 아주머니라는 호칭조차 거부했던 그녀였기에 훗날 손주가 자신을 떠올릴 때 멋지게 기억되길 바랐다. 그런 생각을 하니 손주와 할 일이 하나둘 떠올랐다. 작가 박경희로서의 욕심도 생겼다. 그러자 할머니가 된다는 것이 끝에 다다른 것이 아님을 깨달았다. 시니어를 위한 에세이 ‘손주는 아무나 보나’를 펴낸 이유이기도 하다.
“아민이가 태어난 후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생각해보게 됐어요. 휴게소처럼 달리다 잠깐 멈춰서 돌아보고 재정비하는 거죠. 처음에는 인생의 막이 내린 것 같았는데, 사실 세 번째 막이 열리고 있었더라고요.”
손주로 되찾은 청춘
책을 쓰기 위해 주변 조부모들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다니던 경희 씨는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을 발견했다. 수십 년간 몸담은 직장을 떠나고 백수로 돌아갈 생각에 수심 가득하던 남성들의 얼굴이 손주가 태어난 순간 언제 그랬냐는 듯 활짝 피어났다는 것이다. 은행 지점장으로 일하다 은퇴한 경희 씨 남편의 친구는 “마음은 청춘인데 세상이 나를 뒷방 노인네 취급한다”며 한탄하더니, 손주와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죽은 나무에 꽃이 피는 기분”이라며 활기를 되찾았다고 한다.
“은퇴하면 가정을 책임진다는 큰 몫이 사라지잖아요. 그런데 바쁜 부모 대신 손주를 봐주면 자식이나 며느리, 사위가 감사해하고 든든하게 느끼니까 ‘아직 여기에 내 역할이 있구나’ 깨달으면서 삶의 낙을 찾는 거죠.”
은퇴하지 않은 남성들도 고독을 느끼기는 매한가지다. 병원장으로 재직 중인 경희 씨 친구의 남편은 과업으로 힘들어하며 매일 기운 빠지는 소리를 입에 달고 지내곤 했는데, 손주를 보고 난 뒤 180도 달라졌다. 그녀가 메신저로 전해받은 동영상 속에는 우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장아장 걷는 손주를 사랑스레 바라보는 인자한 할아버지가 있었다.
경희 씨 남편도 예외는 아니다. 말수도 적고 덤덤한 경희 씨 남편은 표현에 서투르지만, 표정에서 다 드러나는 모양이다.
“남편은 아민이가 태어났을 때도 덤덤했어요. 근데 손주를 본 기쁨은 나보다 더 큰 것 같더라고요. 인간은 이 땅에 태어나 무언가를 남기고 간다고 하잖아요. 남자들은 손주를 볼 때 그게 무척 실감나나 봐요. 가끔 아민이 데리고 외식하러 가면 남편이 더 좋아해요. 두 아들을 챙겨주지 못한 미안함과 손주에 대한 감사함이 표정에서 보이죠.”
두 사람 사이 웃을 일이 많아지니 부부 사이도 좋아졌다. 원래도 사이가 소원한 건 아니었지만 하는 일도, 관심사도 달라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았다. 그런 두 사람에게 손주는 교집합의 행복이었다. 손주가 똥을 싸도 기특해하는 것까지 똑같다. 때로는 손주와 나들이 간다는 구실로 근교 데이트도 즐기고, 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이런저런 못다 한 이야기도 나눈다.
“두 아들 정신없이 키울 때는 남편과의 추억이 많지 않은데, 요즘은 손주 덕분에 그때 누리지 못한 여유를 즐기고 있어요. 노년의 삶이 한층 더 풍요로워졌죠. 약간의 신혼 분위기랄까요.(웃음)”
워킹맘 며느리와의 특별한 연대
18년간 라디오 프로그램 ‘김혜자와 차 한잔을’ 작가로 활동하며 결혼 후에도 일을 놓지 않았던 경희 씨는 그 당시 흔치 않은 워킹맘이었다. 하지만 방송국이나 잡지사로 동분서주 뛰어다니느라 바쁜 하루를 보내면서도 가사에 소홀하지 않았다.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는 것은 안 된다’던 시어머니 밑에서 엄격한 시집살이를 하며 본의 아니게 일과 육아, 가사를 모두 완벽하게 해내야 했다. 경희 씨는 늘 최선을 다했지만, 동시에 불안했다.
“나름 잘 키우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아이한테 못 챙겨주는 부분이 있는지, 놓치는 정보는 없는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어요.”
오늘날 대한민국의 워킹맘도 30여 년 전 경희 씨와 별반 다르지 않은 고충을 겪고 있다. 경희 씨의 며느리도 그렇다. 개발자로 일하는 며느리는 손주가 태어나고부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 상황이라 주변의 손을 빌려야 했다. 경희 씨 역시 아들과 며느리가 부탁하면 작가로서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황혼 육아에 전념할 생각이었지만, 오랜 논의 끝에 아들네와 가까이 사는 사돈이 돌봐주기로 결론지었다.
“ ‘손주를 아무나 보나’를 처음 보는 분들은 제가 아민이를 맡아 키우며 쓴 책일 거라고 생각하세요. 근데 사실 그러지 못한 미안함으로 쓴 거거든요. 이 땅에 아민이 외할머니 같은 분들이 많을 거란 생각으로요. 단순히 사례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조부모나 시부모로서의 올바른 역할과 책임, 말 못 할 고민에 대해 사회적 차원에서 함께 이야기해보자는 취지였죠. 이런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는 아직 많이 부족하거든요.”
손주를 돌봐주지 못하는 미안함이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다는 경희 씨는 며느리와 손주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을 고민했다. 그때 워킹맘 며느리의 모습에서 자신의 젊은 시절이 겹쳐 보였다. 이후 분기별로 며느리와 손주에게 필요한 책을 주문해 보내주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10살이 된 손주에게는 초등학교 3학년이 읽을 만한 상상력 가득한 소설을, 며느리에게는 초보 엄마를 위한 에세이를 보내주는 식이다.
“워킹맘의 노고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잖아요. 아이 교육에 중요한 시기를 놓치면 굉장히 후회하거든요. 그래서 시어머니로서는 적당히 거리를 두되, 며느리에게 필요한 부분은 최대한 지원해주고 싶었어요. 딸 같은 마음이라기보다는 같은 일하는 여성으로서의 연대, 응원 같은 거죠. 특히 조부모는 자식 키우며 수많은 성공과 실패를 경험했잖아요. 그중 실패담은 빼고 효과적인 노하우만 전수해주니 며느리가 싫어할 이유가 없죠.(웃음)”
럼피우스 할머니를 꿈꾸다
손주를 만나는 날이면 경희 씨의 머릿속은 이야기보따리로 가득하다. 첫째 아들 어린 시절 그림 그리는 재주를 발견한 순간, 두 아들이 과자 하나를 두고 꼬집으며 싸웠던 일화, 경희 씨 고향인 양평에 얽힌 추억까지 옛이야기를 들려주면 손주의 눈은 흥미롭다는 듯 커다래진다. 그녀는 그런 손주를 보며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내 말이 숭숭 새는 것 같아도 기억에 남는 게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들으며 남몰래 고개를 끄덕였다. 1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전해주신 말씀이 어제처럼 선명하게 떠올라서다.
“두 아들 키울 때 해주지 못한 것을 손주에게 쏟게 되는 것 같아요. 다행인 건 아민이 아빠도 그 모습을 보고 그동안의 서운함을 조금씩 씻어내는 것 같더라고요. 언젠가 한번은 아들에게 표현하지 못한 마음을 아민이에게 전한 적도 있어요. ‘아민아, 사실 너네 아빠는 혼자서도 뭐든지 참 잘했어’라고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대화법은 경희 씨가 손주와 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그녀는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는 대신 손주의 의견을 구한다. 명령보다는 의문문을, 일방적인 가르침보다는 생각을 공유하는 토론을 선호한다. 영화 한 편을 같이 보고 난 뒤에는 감상평을 나눈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데려가서는 작품이나 유물에 얽힌 내용을 할머니의 목소리로 들려준다.
“아이들에게는 현장 학습이 중요하거든요. 책에서 보는 열목어와 눈으로 보는 열목어는 다르잖아요. 직접 경험하면 나중에 교과서로 배울 때 얼마나 쉽겠어요.”
경희 씨의 바람은 바버러 쿠니의 그림책 ‘미스 럼피우스’의 럼피우스 할머니처럼 손주에게 기억되는 것이다. ‘미스 럼피우스’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수많은 이야기를 듣고 자란 럼피우스가 먼 훗날 할머니가 되어 자신의 인생담을 또 다른 꼬마들에게 전해주는 내용이다. 할머니이기 전에 이야기하는 직업을 가진 그녀와 더할 나위 없이 잘 어울리는 캐릭터였다.
“할머니의 품을 편안한 쉼터라고 여겼으면 좋겠어요. 요새 아이들은 숨 돌릴 틈도 없잖아요. 이 글을 읽는 분들도 본인이 어떤 할머니가 될 것인지 생각해보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평소와 같은 날도 다르게 다가오거든요. 저는 그걸 아민이 덕분에 느꼈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사진을 찍기 위해 경희 씨와 대학로 방송통신대학교 뒷길을 거닐었다. 그녀는 촬영도 잠시 잊은 듯 길가에 핀 꽃의 이름을 읊으며 흥미로운 이야기를 쏟아냈다. 멋진 할머니를 둔 아민이가 내심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2019년 감정평가사 시험에서 최고령 합격자가 탄생했다. 최기성 감정평가사(67)로, 합격 당시 나이는 65세였다. 그는 그해 11월 삼일감정평가법인에 입사했다. 실무를 시작한 지 어느덧 1년이 지났다. 국가정보원 고위 공무원으로 오래 일했던 그. 직무상 대통령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고 미소조차 잘 짓지 않았던 그가 이제는 감정평가사로서 현장에 나가 감정평가를 하고, 영업을 하고, 연신 미소를 띠고, 고개를 숙인다. 2년 차에 접어든 새내기 감정평가사를 만났다.
최기성 감정평가사를 만나기로 한 시간은 저녁 7시였다. 그때도 삼일감정평가법인 사무실에는 여전히 일하는 직원들이 많았다. 여러 감정평가사들의 책상 사이로 그의 자리와 뒷모습이 보였다. 그 역시 한창 업무 중이었다. 하던 일을 정리하고 기자를 만나러 오는 와중에도 동료 평가사와 업무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무척 바빠 보였다. 주변의 다른 직원들은 언뜻 보아도 그보다 한참은 어린 듯했다. 그 속에서도 그는 스스럼없이 대화하고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사무실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그에게서 나이에 따른 이질감 따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시 새내기가 되다
그는 감정평가사 실무를 시작한 지 이제 1년이 지났다. 수습 생활을 갓 마치고 인터뷰 날부터 사인 권한이 생겼다. 그날 처음으로 평가서에 자신의 사인을 했다. 보람이 남다른 하루였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고 다시 돌아가 일을 마저 해야 한다고 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날 자정께에 퇴근했단다. 요즘 일이 많아졌다고. 의뢰받은 일을 기한에 맞추어 끝내야 하기 때문에 일이 많을 때는 이처럼 야근을 한다. 그렇지 않을 때는 정시에 퇴근한다. 한 달에 야근하는 횟수는 절반 정도. 인터뷰 날에는 강북구 우이동과 수유동에 있는 현장 두 곳에 다녀왔단다. 그야말로 한창 현역이자 전성기를 살고 있는 이의 모습, 갓 수습 딱지를 뗀 새내기 직장인의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그에게서는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고희를 목전에 둔 터라 체력에 무리는 없을까 싶었다.
“상대적으로 체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받쳐주는 편이라, 특별한 어려움은 없습니다.”
다부진 그의 체격을 보니 마음은 물론 몸에도 견고하게 쌓인 내공이 보였다.
오히려 그는 감정평가사로 일하며 ‘워라밸’이 더 좋아졌다고 했다. 공직에 있을 때는 주말도 없이 일했다.
“대통령이 오더를 내리면 그에 대한 답을 준비해서 원장님한테 보고하고, 원장님은 대통령한테 보고하고. 계속 그런 식으로 일했죠. 남북 행사 있으면 통일부랑 같이 책임지고 맡아서 해야 하는 상황이고요. 유일한 틈이 토요일 오전 일찍 골프 한 번 치는 거예요. 그렇게 스트레스 풀고 들어와서 일하고, 일요일도 일하고. 오로지 일에만 매진하고 휴가나 여가는 생각도 못 했죠. 지금은 일이 있으면 며칠 밤을 새서라도 기한에 맞춰 납품해야 하지만, 일 없으면 정시에 퇴근하고 굉장히 자유로워요. 주말에도 쉬고.”
그는 성공적인 공직 생활을 했다. 1984년 행정고시에 합격해, 국가정보원에서 20년 이상 근무했다. 1급 관리관에 해당하는 실장까지 오르고 남북적십자회담에 대표로 참여하는 등 요직을 거쳤다. 퇴직 후에는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한국중부발전주식회사, 국가 안보 관련 싱크탱크인 국가안보전략원의 이사직을 역임했다.
전 직장과는 완전히 다른 일을 하게 된 그에게 고충을 물으니, 첫째로 꼽은 게 오피스 프로그램이었다.
“엑셀이나 워드를 전에는 다루지 않았어요. 여기는 그런 프로그램으로 평가서를 만드는 게 기본이고, 회사에서 사용하는 고유 프로그램들이 있으니까 익히는 데 되게 힘들었어요. 공직 시절에는 만들어진 보고서를 검토하고 사인만 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제가 직접 다 작성하죠. 모르면 선배들한테 물어가며 했어요. 요즘 젊은 친구들은 워드 엄청 잘해요. 회사 결정되고 나서 유튜브 보면서 연습하긴 했는데, 실무는 또 다르더라고요. 직접 부딪히고 시행착오 거치면서 하나씩 발전해나갔죠. 거기서 오는 성취욕도 있었고요. 지금은 웬만한 건 다 합니다.”
오랜 공직 경험이 주는 장점도 있다. 온갖 일을 다 겪었으니 웬만한 일엔 떨지도 않고 담담하다. 사회 초년생보다는 사람 대하는 기술도 노련하고, 평생 일하면서 보고서와 씨름했기 때문에 평가서를 보는 눈도 깊다. 단지 워드 프로그램 같은 고유한 틀에 익숙해지기까지 노력이 필요할 따름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장 큰 장점은 사람 관계다. 젊은 직원들과는 다르게 탄탄한 사회적 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회사에서도 그런 인맥을 활용하길 기대한다. 그렇기에 그의 경력을 감안해 고문 직함을 주었다.
“우리처럼 나이 들어서 일하는 사람한테는 인맥이 제일 큰 장점이에요. 회사에서 장년층 직원을 뽑는 것은 일도 일이지만 영업적 측면이 있어요. 그래서 제가 가서 일을 따오기도 하면서 제 역할을 해내는 거죠. 그래도 쉽지는 않습니다. 옛날하고 다른 측면이 있어요. 부탁하기도 쉽지 않고요. 불공평한 레이스라고 할까, 그런 걸 요즘은 다들 싫어하니까요. 저 자신도 특별히 문제가 되지 않는 선에서만 하죠. 사회 친구들이 은행 같은 곳들 소개해줘서 조금씩 해나가고 있는 상태예요.”
그는 공직에 있을 때 오직 국가를 위해서 일했다. 국가 안보와 국익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반면 지금 있는 곳은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다. 그럼에도 그는 두 조직의 공통점이 있다고 했다.
“부동산을 비롯한 경제적 가치가 있는 물건에 대해 평가하기 때문에 객관성과 공정성이 있어야 해요. 영업을 하기도 하지만, 준 공기관이라고 할 수 있어요. 국가 경제하고도 연관이 있거든요. 예를 들어 담보 평가만 해도 이해관계인이 대출을 받고자 하는 사람과 금융기관이죠. 우리가 평가를 잘못해서 객관성과 공정성을 잃으면 그 영향이 개인뿐 아니라 은행에도 미치고, 그게 국가 경제에까지 영향을 줘요. 과대평가를 하면 경제 질서를 흔들 수 있거든요. 그만큼 공공성이 가미된 일이에요.”
그가 몸담고 있는 삼일감정평가법인 역시 공정성을 지키며 신뢰받는 곳이다. 철저하고 체계적인 시스템을 통해 부실한 감정평가를 미연에 방지한다. 국토교통부가 지정한 15개 공시전문평가법인 중 하나로, 부동산 감정평가뿐만 아니라 부동산 컨설팅, 기업 가치평가, 무형자산 평가, 공적 평가 등에 전문 인력을 보유하고 있다.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갖춘 종합 부동산 서비스 회사다.
나를 바꾸는 시간
그는 ‘슈퍼 갑’으로 수십 년을 살다 이제는 ‘슈퍼 을’이 되었다고 했다.
“공직에 있을 때는 한 번도 머리 숙여본 적 없어요. 대통령이 와도 고개만 까딱하는 문화였어요. 아쉬운 게 없었어요. 남한테 부탁할 이유도 없었고요. 그런데 여기는 수주를 해야 되잖아요. 젊은 사람들한테 고개 숙이고 들어가서 영업도 해야 하고. 완전히 을이에요.”
어깨 힘을 빼는 일이 쉽지 않았다. 아내도 항상 “당신은 슈퍼 을이니 그런 자세로 대처해라”고 조언한단다.
“그 물을 빼는 게 되게 힘들었어요. 상처받기도 하고. 저도 나이가 있는데, 제가 존대를 했는데 상대가 얕보면 기분이 나빴죠. 마음 삭여가면서 일해서 지금은 많이 순화됐어요.”
체질과 습관을 바꾸고, 냉대에 마음 아프던 시간을 감내하면서 사는 그를 보며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그는 지난 공직 생활만으로도 경제적인 노후 대책은 이미 완비했다. 이 일을 생계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도 고충까지 참아가면서 하는 이유는 뭘까?
“제가 퇴직할 땐 골프 치고, 등산 가고, 그런 생활을 생각하고 그만뒀어요. 그런데 아내가 이 일에 도전해보라고 권했어요.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남은 인생이 수십 년인데 아무 일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게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옛날보다 평균 수명이 늘었잖아요. 건강에 이상이 없으면 80~90세는 거뜬하니까요.”
그래서 그는 단언한다. 일하면서 한 번도 후회한 적 없다고.
“사회생활인데 내 위치에 맞게 스스로 행동을 조절해야죠. 제가 고위직 출신이라고 어깨에 힘주면 밖에서 누가 알아주나요? 내가 숙여줘야 저쪽도 마음을 열죠. 그래서 지금은 아내 말 잘 들었다 싶어요. 아침에 가방 들고 출근하는 행복이 말도 못 해요. 남들은 다 오늘 뭐하지 하는데, 저는 맡겨진 일 하면서 활기차게 살잖아요. 사회적인 고충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병아리가 어미닭이 되기까지의 과정 중 하나니까 전혀 개의치 않아요. 감정평가사는 변호사나 변리사와 맞먹는 전문직이라 건강이 허락하는 한 정년 없이 계속 일할 수 있고, 지금이라도 내 사무소를 개업할 수 있어요. 최고의 직업이죠.”
그는 인생을 통틀어 고시에 두 번 합격했다. 행정고시와 감정평가사 시험. 두 시험 공부할 때를 비교해보면 가장 큰 차이가 기억력이다.
“행시 준비할 때는 젊은 시절이라 머리가 좋았죠. 한데 지금은 기억력이 안 따라줘요. 공부하고 돌아서면 기억이 안 나서 답을 못 쓰겠더라고요. 애 많이 먹었죠.”
행정고시를 준비할 때만 해도 집안 형편이 어려웠던 터라 고시촌에서 명운을 건 심정으로 전력투구하며 공부했다. 반면 감정평가사 준비는 달랐다.
“친구들과의 골프, 자전거 라이딩, 저녁 약속을 다 마다하기엔 삶이 너무 황폐해지는 듯했어요. 먹고살 게 없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틈틈이 공부하다 보니 준비 시간이 길어졌죠.”
6년이라는 긴 수험 생활 동안 우여곡절도 많았다. 패혈증에 걸려 8개월을 투병하기도 했다.
“아내가 후회를 많이 하더라고요. 가만있던 사람 괜히 들쑤셔서 고생시켰다고요. 공부 좀 잘할 줄 알고 해보라 그랬는데,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던 거죠. 게다가 패혈증까지 걸렸으니까요. 치사율이 50%인 질병이에요. 낫고 나니 제2의 인생을 살게 된 기분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할 생각은 한 적 없었다.
“만약 내가 죽거든 공부하던 책 같이 넣어서 태워달라고 했어요. 중간에 포기하면 죽을 때까지 한이 돼요. 또 포기한다고 달리 할 것도 없었고요. 끝까지 가기로 맘먹었지요. 그러니까 결국 결실을 맺었죠. 포기를 안 하면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게 제 철학이에요.”
젊은이들과 함께 어울리는 법
함께 일하는 평가사들은 모두 그보다 한참 연배가 낮다. 나이가 많아도 40~50대. 함께 입사한 동기는 36세다. 젊은이들과 함께 일하는 노하우가 있을까?
“마음을 열어놓아야 돼요. 나이 들수록 아집이 생겨요. 몸에 밴 습관이 있어서요. 항상 오픈 마인드로, 낮은 자세로. 그래야 젊은 사람들이 나한테 다가와요. 내가 나이 들었다고, 왕년에 어땠다고 하면서 어깨에 힘주고 있으면 아무도 접근 안 하죠. 그럼 저만 손해예요. 외롭고. 그래서 항상 젊은 사람들 말을 많이 경청해요. 또 저는 말 안 놓고 깍듯이 대해요. 그리고 선배들한테 많이 의존해요. 모르는 게 있어서 물어보면 다들 친절하게 잘 알려주세요. 이따금 실수하면 대신 잡아내서 고칠 수 있게 해주기도 하고. 얼마나 고마운지. 항상 저도 고맙다고 인사하고 그러죠.”
그는 슬하에 아들과 딸이 있다. 딸은 20대, 아들은 30대로 한창 직장 생활 중이다. 자신들과 다름없이 현역으로 활동하는 아버지를 보며 무척 좋아한단다.
“공부할 땐 둘이 의견이 달랐어요. 아들은 제가 혹시 공부하다 잘못되지는 않을까 싶어서 그만하길 바랐고요, 딸은 ‘아빠, 공부 안 하면 뭐하실 거예요. 계속하세요’ 했어요. 요즘은 둘 다 너무 좋아해요. 대화도 잘 통하고요. 저도 젊은 친구들이랑 어울리며 사니까 딸한테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하고요. 딸이 젊은 사람들 입장에서 얘기해주니까 도움 많이 받죠.”
그에게 자극받아 함께 도전한 친구도 있다. 그보다 여덟 살 어린 행시 동기가 자신도 도전해도 되겠느냐고 조언을 구했다. 그는 흔쾌히 하라고, 도와주겠다고 했다.
“저는 주변에 도와주는 사람이 없어서 맨땅에 헤딩하는 식이었어요. 이 친구한테는 제가 겪은 시행착오를 하지 않도록 도와줬죠. 친구는 작년에 합격해서 지금 법인에 다니고 있어요.”
주변 친구들 중에서도 그의 모습에 용기를 얻어 새 삶을 찾아 나선 이가 많다. 그에게 도전을 꿈꾸는 시니어들을 위한 조언을 구했다.
“앞으로는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더 길어질 거예요. 30년 공부하고, 30년 일하는데, 퇴직하고 나면 앞으로 그만큼이 또 남는 거예요. 그 기간을 어떻게 보낼 것이냐는 거죠. 공부해서 자격증을 따든, 취미를 발전시키든, 자신에게 맞는 길을 찾아야죠. 적극적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도전해야 해요. 그래서 은퇴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이라고 생각해요.”
인터뷰를 마친 그는 기자를 바깥까지 배웅해주었다. 그는 매너가 좋았다. 연신 미소를 띠며 일상적인 대화와 소소한 칭찬을 건넸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가 이러한 모습을 갖추기까지 어떤 노고가 있었을지 가늠되어 새삼 특별하게 와 닿았다. 우여곡절도 겪었고 고충도 있지만 새 직업을 갖게 된 기쁨, 아침에 출근해 일할 곳이 있다는 행복이 훨씬 크다는 그. 2년 차 새내기 최기성 감정평가사의 앞날을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