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봄부터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그동안 황무지에 씨 뿌리고 가꾸면서 행복했다. 생명이 탄생하고 커가는 과정이 신비로웠다. 봄에 심을 수 있는 상추며 고추, 가지, 토마토, 감자, 오이, 깻잎 등 20여 가지 품종을 손바닥만 한 땅에 뿌리고 가꿨다. 그 수확물은 풍부했다. 갖가지 상추가 푸른 잎을 자랑하며 쑥쑥 자랐다. 가지 고추, 오이 등 열매 식물은 꽃이 피고 지며 열매를 맺었다. 날이 다르게 열매는 크기를 더하며 여물어갔다. 토마토가 붉고 노랗게 익어가며 식단은 더욱 풍성해졌다.
흙은 참 신비로웠다. 뿌린 씨앗은 어떤 것이든 싹을 틔워내고 길러내었다. 마치 컬러프린터가 감춰둔 색깔을 뿜어내는 것과 같았다. 손으로 움켜잡았을 때는 그냥 한 줌의 흙이었다. 흙이 태양 빛과 합작하며 만들어내는 색깔은 신비롭고 조화로웠다. 그 놀라움은 마치 밤하늘의 별들과 다르지 않다. 어린 시절 고향 집에, 어두운 밤이 되면 하늘은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다. 지구보다 더 큰 별들이 바닷가 모래알보다 많다는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내가 별을 좋아하는 이유도 그러한 경이로움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놀라움을 주말농장을 하면서 또다시 체험하고 있다. 이 기적 같은 현장에 내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만으로도 축복받은 인생이 아닌가 싶다.
기적은 또 있다. 그렇게 자란 농작물은 끝없이 수확을 계속할 것 같았다. 그러나 한여름이 지나니 하나둘 수명을 다해갔다. 그 많던 상추는 더위에 녹아 더는 잎을 키워내지 않았다. 열매채소도 더위에 지쳐버린 듯 줄기며 가지가 마르고 시들어갔다. 마치 다들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익숙한 농부들은 벌써 마지막 열매를 따고 줄기를 뽑고 밭을 갈아엎기 시작했다. 다음 순번을 위한 기초 작업이다. 가을 수확을 위해 한여름 폭염에 뿌려야 할 씨앗이 기다리고 있다. 초보 농사꾼이 하는 일은 그저 익숙한 농사꾼을 보고 따라 하는 일이다. 흙을 새로 다듬고 골을 내어 두둑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두둑에 무와 배추씨를 뿌렸다.
흙은 또 새로운 가족을 받아들인다. 흙은 말이 없고 모든 걸 묵묵히 받아들인다. 세상에 가장 마음 좋기는 흙이 최고인 것 같다. 있는 대로 뿌린 대로 받아들이고 또 그렇게 키워낸다. 인간의 세상처럼 ‘병원에서 신생아가 바뀌었다’는 말도 ‘장례식장에서 시신이 바뀌었다’는 말도 들어본 적이 없다. 한 번도 어떤 종류이든 뒤바뀜 없이 원칙을 지켜낸다. 그래서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말이 있는 듯싶다. 인간세상은 원칙을 지키지 않고 사는 사람이 그만큼 많다는 역설적인 말이기도 하다.
주말농장을 하면서 흙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밭이 시멘트 콘크리트 바닥이었다면 단 하나의 생명이라도 키워낼 수 있을까? 인공물의 한계다. 생명을 키워내는 것은 오직 흙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싶다. 이제 뿌린 씨앗에서 다시 싹이 나 자라고, 흙은 그 일을 또 묵묵히 수행할 것이다. 한 번도 거부하거나 싫다는 내색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씨앗을 키워 가을에는 예쁜 처녀처럼 속이 노란 배추를 키워내고, 장성한 총각처럼 미끈하고 통통한 무를 키워낼 것이다. 흙을 보니 부모의 마음도 흙을 닮은 것이 아닌가 싶다. 바람처럼 빠른 세월 속에서 흙은 나보고 ‘흙처럼 그렇게 살라 한다.’
은퇴 후, 수입보다는 보람을 찾아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이가 많다. 34년간 수학교사로 재직 후 도시농부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김정기 씨의 경우가 그렇다. 그를 만나기 위해 햇살이 따가운 월요일 오후, 서울 근교 광명시 외곽에 있는 텃밭을 찾았다. 근엄한 수학 선생님을 상상했는데, 시종일관 얼굴에 웃음이 가득한 인상 좋은 분이 마중 나왔다.
은퇴 후 도시농부가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강원도 원주 태생이지만 시내에 살았기 때문에 농사는 지어본 적이 없다. 2017년 은퇴 후 쉬는 동안 괴산에 있는 처가에서 농사를 지으며 다음 할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 후 '노사발전재단 중장년일자리희망센터'에서 1주일 동안 교육을 받았다. 그 과정을 통해 도시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육을 받은 이후 도시농부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셨나요?
서울시50플러스재단에서 진행했던 ‘도시농부학교’에서도 3개월 동안 심도 있게 공부했다. 노사발전재단에서 교육을 받을 때 좋아하는 일과 잘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좋아하는 일은 농사짓는 것이고, 잘할 수 있는 일은 가르치는 것이었다. 농사를 배워서 생태 텃밭 강사 활동을 하면 학생들에게 텃밭 교육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후 도시농부 전문가 과정도 88시간을 공부했다. 유기농 기능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3년 동안 쉼 없이 즐겁게 달려왔다.
현재 무슨 사회공헌활동을 하고 계신지요?
금촌도시농업네트워크와 생태지킴이 강사단의 일원으로 활동 중이다. 나는 그곳의 강사로서 초보자들이 문제에 부딪혔을 때 해결하는 방법을 교육하고 있다. 작물에 진물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거름으로 쓰는 쌀뜨물 액비와 계란 껍질로 만드는 식물영양제는 어떻게 만드는지 등을 가르친다. 초등학교 5학년 과목에 텃밭 가꾸기가 있다. 오늘 오전에도 5학년 5개 반에 작물 키우는 방법에 대해 수업을 하고 왔다.
도시농부가 되려면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나요?
은퇴 후에 “농사나 짓지”라는 말을 하면 실패하기 마련이다. 농사는 아무나 지을 수 있는 게 아니고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여러 곳에서 진행하고 있는 도시농부학교의 커리큘럼을 이수하면 도움이 된다. 나는 ‘몸펴기생활운동협회’에서 사범 자격증도 땄다. 건강해야 농사도 지을 수 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작업 시작 전·후에 할 수 있는 몸풀기 동작을 알려주고 있다.
두 번째 인생에서의 보람은 무엇인가요?
생태 텃밭을 하면서 꿈을 하나 하나 이뤄나가고 있다. 도시농부 선구자들처럼 많은 사람에게 도시농업을 알리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농업과 친해지면 기후, 생태, 환경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된다. 비닐이 환경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땅 속 미생물이 어떤 일을 하는지, 벌레들이 토양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교육하면서 아이들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보람 있다. 직접 재배한 수확물을 이웃과 나눌 때는 기쁨이 배가 된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열심히 배우고 부지런히 활동해서 건강을 유지할 것이다. 땅이 에너지를 준다. 농사짓기와 몸펴기운동을 통해 봉사 활동도 계속할 생각이다. 요즘은 도시농부라는 개념이 사회 전체에 퍼져 있다. 상자텃밭이라던지, 건물 곳곳에 작물을 심은 녹색커튼이 그것이다. 다음 단계로는 원예와 양봉도 배울 생각이다.
1800년대 중반 영국의 산업혁명과 프랑스의 정치혁명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 변화의 중심에 철도가 있었다. 빠른 속도의 이동은 세상을 보는 방식과 그림을 그리는 방법에 영향을 끼쳤다. 접이식 이젤, 튜브형 물감의 등장으로 밖에 나가서 직접 보고, 그림을 그리는 일이 쉬워졌다. 이런 변화들은 빛과 색채의 회화를 도입하려는 세잔, 드가, 르누아르, 모네 등 인상주의 화가들의 등장을 촉진했다.
점차 발전되는 경제적 풍요와 부르주아 계급의 등장으로 그림의 대상도 변했다. ‘자연의 풍경’에서 ‘풍요롭고 여유로운 지금 여기의 삶’으로 바뀌었다. 그리고자 하는 모든 것이 그림이 되는 시대가 열렸다. 그렇게 세상이 변하는 과정에서 프랑스 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파리의 상징 에펠탑이 1889년 완공되었다. 에펠탑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 되었다. 새로운 기술 발전과 변화는 과학적 광학 이론에 따른 색채 구사를 필요로 했다. 여기에 맞춰서 ‘조루즈 쇠라’ 같은 후기 인상주의 화가들이 나타났다.
한편, 인상주의의 성공을 넘어 본질적이고 영원한 것에 갈망을 품은 화가들도 있었다. 이들은 파리를 떠났다. 세잔, 고흐, 고갱이 그들이다.
인상주의의 전성기는 역사적으로 제국주의의 시기였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식민지 획득과 물질문명의 발달에 대해 비판하는 작품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마네, 고야 등이 대표적이다. 이어서 회화는 마티스 등 야수파와 피카소 등의 입체파로 이어졌다. 그리고 결국 인간의 탐욕과 물질의 팽창은 전쟁으로 폭발했다. 이후의 그림은 고통과 비극이었다. 그래서 인상주의가 오랫동안 사람들로부터 가장 사랑받는 미술 사조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마침 이 시기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대표적 그림들을 모아 ‘프렌치 모던:모네에서 마티스까지’전이 ‘고양아람누리 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다. 그곳으로 그림 감상 여행을 떠났다.
1800년대 중반 대대적인 도시 정비로 파리가 지금의 형태로 재편되는 시기에 파리 근교에 모여 순수한 자연과 농민들의 가치를 그린 화가들이 있었다. 사실주의 화가 밀레, 카미유 코로 등이다. 이들은 신화나 영웅 이야기가 아닌 농촌을 중심으로 눈 앞에 펼쳐진 환경과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그렸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농촌 그림은 인기가 많지 않았다. 오히려 ‘쥘 브르퉁’의 농민 그림이 더 인기가 있었다.
전시회에서 내가 첫 번째로 만난 여인도 ‘쥘 브르통’의 ‘양초를 들고 있는 농민 여성’이었다. 대서양에 접하고 있는 프랑스 북서부 브르타뉴 지방의 흑백색 전통 의상을 입은 노파가 양초와 묵주를 든 모습을 묘사한 그림이다. 당시 급속도로 변하는 세상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검소하고 소박한 종교적 자세와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집이 화폭에 담겨 있다.
‘쥘 브르통’의 다른 작품으로 감자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농민 여성을 그린 '귀갓길'도 있다.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감자밭을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모습이다. 1848년 혁명의 영향 때문인지 농촌 노동자들을 영웅화하고 싶어 한 당시 사회의 허구가 반영되어 장밋빛 하늘을 그린 배경이 눈에 띄었다. 가운데 그려진 여인은 농촌에서 일하는 여성의 얼굴이라고 하기에는 세련되고 곱다. 그것은 고흐의 말처럼 작업실에서 그림이 그려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런 사실주의의 한계를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농부는 농부답고, 밭 가는 사람은 밭 가는 사람다워야 한다.”고 여러 번 말했다.
두 번째 만난 여인은 ‘장 밥티스트 카미유 코로’의 ‘스파르타의 젊은 여인’이다. 야외에서 직접 그린 스케치를 바탕으로 화실에서 재구성하는 방법으로 작업을 한 그는 가장 좋아하는 모델을 선택해 자신의 시정을 불어넣는 방법으로 이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그림에 나오는 여인은 작가의 이상적 여성상이었다. 집시 복장 차림의 나른한 자세와 눈길에서 작가의 마음을 살짝 엿볼 수 있다.
이어서 ‘앙리 팡탱 라투르’의 ‘마담 레옹 마스터’를 만났다. 마네의 영향을 받은 작가는 사실주의와 인상주의 사이를 넘나들었다. 이 그림 역시 명암을 깊게 해 정확히 신중한 묘사를 한 사실적인 초상화다. 그녀가 입은 화려한 이브닝드레스와 그 뒤에 감춰진 우울한 분위기가 당시의 경제적 풍요와 정신적 빈곤이라는 모순된 시대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여인의 체념한 눈빛은 기본적 욕구와 욕망마저 포기한 무너져버린 생의 의지가 보여 애잔한 아픔의 해일이 밀려왔다.
주최 측의 의도였는지 바로 이어서 애잔한 가슴을 먹먹한 비애로 만든 조각 여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스 신하에 나오는 ‘다나이드 이야기’를 주제로 형벌을 받아 밑바닥이 빠진 항아리에 계속 물을 채워야 하는 ‘다나이스’를 표현한 로댕의 조각 작품이다. 이 ‘다나이드’는 로댕에게 조각적, 예술적 영감을 주었던 제자이자 연인 ‘카미유 클로텔’을 모델로 했다고 한다. 이 여인을 만난 순간 잔뜩 웅크린 채 울고 있는 가냘픈 등줄기와 팔에서 살갗의 온기가 느껴졌다. 벗어나고 싶은 운명을 말하듯 방향을 돌린 얼굴과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전하는 절망에 대한 공감 때문에 미술관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슬픔, 고통, 불행이 너무나 아름다운 우아한 선과 볼륨으로 표현되어 여인의 운명을 품앗이 하고 싶다는 깊고 깊은 한숨의 울림이 가슴 속에서 들려왔다.
이어서 ‘다나이드’와는 완전히 다른 여인을 만났다. 당시의 경제적 번영과 문화예술의 번창을 상징하는 여인으로 이탈리아 출신 ‘조반니 볼디니’의 ‘여인의 초상’이다. 초상화가로 유명했던 작가는 뉴욕의 자선가 ‘플로렌스 블루멘탈’을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했다.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아 검은 머리카락과 드레스가 하얀 피부가 대조를 이루었다. 특히 역동적인 자세를 순간 포착한 구도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여인의 옆에 있는 의자에 눈길이 멈췄다. 곡선을 ‘가우디’는 신의 선이라고 말했지만, 인간이 만들 수 있는 가장 세련된 선이 그림 속에 있었다.
야수파를 대표하는 화가 ‘앙리 마티스’가 그린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여인’도 만났다. 마티스의 개인적 경험 때문인지 북아프리카를 여행한 후 그린 이 그림에서 그는 모델인 이탈리아 여성 ‘로레토’에게 모로코 전통 의상을 입혀 그림을 그렸다. 분홍색 천의 의자, 길고 검은 머리카락, 녹색 간두라에서 야수파의 특징인 보색대비가 잘 드러났다.
마지막으로 만난 여인은 ‘드가’의 ‘몸을 닦는 여인’이다.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달리 실내 빛의 효과와 순간을 포착하는 그림을 즐겨 그린 특성이 나타났다. 드가는 주로 매춘부들을 모델로 고용해 누드화를 그렸다. 그것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번성했던 당시 매춘업의 실태와 작가의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적 시각이 나타난 현상이다. 그림은 단색의 밑그림으로만 돼 있어 미완성작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 관람자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하는 모델의 자세는 작가의 훔쳐보는 시선을 표현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노골적인 여성 혐오주의자였던 드가가 가지고 있던 자기모순의 내면을 드러낸 것은 아닐까?
나는 눈물이 메마른 줄 알았다. 환갑이 넘어 칠십을 바라보는 나이에 눈물은 없을 줄 알았다. 이 나이에 섣부른 감성에 젖어 눈물 흘리는 것은 사내대장부가 아니라고 다짐했었다. 여간해선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눈물은 입술을 깨물고 참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슬픔의 눈물도 아니요, 분노의 눈물도 아니었다. 벅찬 감동의 눈물이었다.
춘향과 이몽룡은 남원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다. 그러다 아버지를 따라 한양으로 떠나는 이몽룡과 헤어져 할 때 부르는 ‘이별가’가 애간장을 녹인다. 그 후 새로 부임한 사또의 끈질긴 수청 요구를 거절하고 감옥에 갇히는 춘향은 기약 없는 벌판에 내몰린다. 그러던 어느
날 몽룡은 거지꼴로 춘향이네 집을 찾아오게 된다. 실망한 춘향 어미 월매와 감옥에 갇힌 춘향을 찾는다. 목놓아 우는 춘향과 집안도 망하고 과거도 떨어져 거지꼴로 왔다는 몽룡, 이제 기댈 언덕이 없는 춘향이 이몽룡에게 부탁한다. "낼 처형되려 가거든, 무거운 칼끝이라도 거들어 주고, 죽으면 사체라도 수습하여 화장한 후 둘이 만났던 곳에 뿌려달라"고 애원한다.
다음날 이몽룡은 거지 차림으로 사또 잔치에 참여한다. 시 한 수 지어 올리니 암행어사 출두를 눈치채고 관리들은 도망하기 바쁘다. "암행어사 출두야!" 소리에 청천벽력이 쏟아지고 사또는 그 죗값으로 투옥된다. 춘향을 불러내 ‘어사또인 내 청도 거절할 거냐?’고 춘향의 의지를 떠본다. 춘향이 "어서 죽여달라" 청하니 드디어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춘향과 극적 상봉하게 된다. 클라이맥스로 치달았던 이 순간 그동안 쌓였던 화산이 폭발하듯 벅찬 감동이 치솟는다. 억울하게 당한 약자의 설움을 일거에 날려버리는 역전 드라마다. "암행어사 출두야!"를 외치며, 희망 없는 거지꼴의 낭군이 어사또로 나타난 기막힌 반전의 힘이다.
사실 고전 중 춘향전만큼 잘 아는 내용도 없다. 어릴 때부터 보고 들어온 게 춘향전이다. 소설로 연극으로, 영화로 뮤지컬로, 심지어 발레나 드라마로 춘향은 늘 우리 곁에 있었다. 그러니 사내가 체면 구기게 눈물까지 흘리겠나 다짐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무엇이 이렇게 무장해제를 시키는 걸까? 그것이 창극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공연을 보는 내내 관객은 몰입하게 된다. 배우의 몸짓 숨소리 하나까지 놓치지 않는다. 같은 춘향가 한 대목이라도 누가 부르는가에 따라 제각각의 소리로 표현하는 까닭에 언제 누가 불러도 새롭다. 춘향전이 그 오랜 세월을 사랑받는 까닭이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무대에 올려진 2020년 '춘향'은 원작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 감각을 잘 살려냈다. 순종하는 수동적인 춘향이 아니다. 요즘 젊은 여성처럼 당차고 당돌하다. 백년가약을 약속하는 계약서를 존엄한 사또 자제 이몽룡이 보는 앞에서 좍좍 찢어 조각을 낸다. "이까짓 종이 쪼가리가 무슨 약조가 되겠느냐?"고 묻는다. 그러고는 천지신명께 맹세를 드릴 것을 요구한다. 사또와 어사에게도 끝까지 굴하지 않는 지조와 절개가 많은 사람에게 감동을 준다. 거지 위장을 한 이몽룡이 춘향의 수청 사실을 떠보다 남원 농부들에게 봉변을 당하는 장면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의녀 춘향을 어찌 보는 거냐?"고 달려들어 쫓아 내 버린다. 당시도 그렇지만 오늘날도 춘향은 남원고을의 자랑이고 사랑받는 존재다. 수백 년을 흘렀어도 춘향이 우리 가슴속에 살아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리라.
오랜만에 따스한 눈물이 흐르는 감성을 되찾아 감사하다. 각박하고 힘든 세상에 단비 같은 창극 '춘향'이 반갑다.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 정국이다. 위기가 닥쳤을 때 이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지금 세계는 각자 빗장을 걸어 잠그고 외부 배제와 통금으로 맞대응하고 있다. 코로나 초창기 시절, 남의 집 불구경하던 유럽국가들과 미국이 막상 본인들 발에 불이 떨어지자 준비도 하지 않은 채로 무작정 도시를 셧 다운시켜버렸다.
위기에 닥칠수록 전 세계가 연대하고 공동체로 바이러스에 맞서는 대신 각 국가마다 대문을 걸어잠그고 그 빗장 안 세계에서도 또 다시 섹터를 나눈다. 이럴수록 힘들어지는 것은 정보에 뒤처진 노년층과 충분한 재화가 없는 저소득층들이다.
미국에서 살아왔던 나는 천사들의 도시라는 로스앤젤레스 시내 한복판 도로들을 점령한 채 텐트를 치거나 골판지 박스로 집을 짓고 도로 한복판을 술과 마약에 찌들어 어슬렁거리던 홈리스들을 봐왔다. 이들 홈리스들이 집단으로 모여있는 도시 한복판을 지날 때마다 멧 데이몬과 조디 포스터가 출연했던 할리우드 영화, '엘리시움(Elysium)'에서 그려낸 황폐해진 2154년의 지구를 미리 보는 듯하여 공포에 가까운 충격을 느끼곤 했다.
만약 이들 홈리스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가 덮친다면 어떻게 될지 상상만으로도 공포스럽다. 무질서와 공포스러운 게토의 생활을 영화 '엘리시움(Elysium)'에서 너무나 생생하게 화면으로 접해본 탓인지 지구의 황폐화를 그려낸 영화들은 이후 내 영화 플레이리스트의 단골 장르가 됐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건 공동체다. 꿋꿋한 척, 멋있는 척, 은근 외톨이로 살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본래 내가 꿈꿨던, 하고 싶었던 여러 가지들을 찾아 다니다 보니 내가 무척이나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싶었던 사람이란 걸 알았다.
한국 사회에서 실패한 가족공동체의 모습을 보여주기 싫어 머나먼 미국까지 아이를 끌고 이주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딸아이와 단 둘이 꾸렸던 가정은 전쟁의 상흔으로 뒤덮인 폐허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으르렁거리며 날카로운 발톱을 할퀴어대던 정글 같았다.
그래서일까?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내게 경외의 대상이다.
한국에 돌아와서 새로이 만난 친구 중에 양수리 인근에서 농사도 짓고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건강하게 삶을 개척해나가는 이가 있다. 아직 그와의 관계가 깊지 않아 속속들이 속내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 부럽다. 옥수수와 감자, 당근 등등 전혀 농사 한번 지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 손으로 남편과 함께 씨앗을 뿌리고 추수를 한다. 기꺼이 이 친구의 친환경 농산물을 구매하면서 기쁘다. 주위에 이런 삶을 살고 있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이 말이다.
오랜 대학 동기는 대학을 자퇴하고 전북 진안으로 내려가서 20년 넘게 농사를 짓고 있다. 오랜만에 진안에 내려가서 친구를 만났다. 돌아오는 길에 친구가 농사지은 호박이며 가지며 풍성하게 받아왔다. 친구가 수확한 가지로 볶음을 만들어 먹으면서 눈물이 핑 돌았다. 20년 넘게 고생하며 이제 농부로 제법 자리 잡은 친구의 고생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는 다양한 형태의 공동체적인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공동체란 것이 거주와 깊은 연관이 있다 보니 건축가들의 실험적인 공동체는 일반인에게는 생소하면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그런 대상이 되곤 한다. 2018년 봄에 방문했었던 애리조나의 아르코산티란 공동체가 바로 그런 곳이다.
애리조나 사막 한가운데에 세워진 생태환경도시를 건축하기 위해 모여 사는 공동체. 이탈리아 출신의 건축가인 파울로 솔레리가 1970년부터 시작한 생태환경도시로 에너지 소비를 최소화하고 일터와 거주, 문화를 한 권역에서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하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목표로 현재까지 건설 중이다.
이들의 공동체를 체험하고 배우기 위해 전 세계에서 연수자와 투어 참가자들이 모여든다.
마치 고대 그리스 아크로 폴리스 같은 공동체로서 구성원들은 함께 작업하며 거주하고 문화를 즐긴다. 아르코산티 중앙에 위치한 아르고에는 마치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공연될 듯한 원형 무대가 있다. 투어 시간에 맞춰 이곳 아르코산티의 기념품인 주물 풍경을 만드는 과정을 무대에서 보여준다.
아르코산티에는 공동체 곳곳에 풍경이 걸려 있는데 이 풍경은 이곳 아르코산티의 주 수입원이기도하다. 사막의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풍경이 천천히 흔들리며 청아한 소리를 들려준다. 마치 한국의 사찰 처마에 달려 있는 풍경소리와 똑같아 함께 했던 일행들이 모두 놀랐다.
아르코산티가 풍경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건축가 솔레리가 뉴 멕시코주에서 만났던 지인의 권유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지인이 한국 전쟁에 참전했던 군인이었는데 당시 한국 사찰의 풍경을 보고 크게 감동받아 솔레리에게 풍경 제작을 권유했다는 것이다. 솔레리도 이후에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하니 아마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바람이 불면 이리저리 흔들리며 영롱한 소리를 들려주는 풍경이 곳곳에 걸려 있어 아르코산티를 거닐다 보면 마치 고향인 한국에 돌아와 어느 산사를 방문한 듯 몸과 마음이 차분히 안정되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세상은 너무나 어지럽고 사분오열된 인간들은 목청을 돋우며 서로에게 삿대질을 한다. 상처를 보듬고 토닥여줄 공동체가 그리운 요즘, 애리조나 사막에서 만났던 아르코산티에서 땀 흘리며 주물을 붓던 젊은이가 생각난다.
구글 포토에 앨범으로 만들어두었던 사진을 꺼내보며 이 글을 쓰기까지 이어지는 잠깐의 행복한 시간이었다. 오프라인과 온라인이 결합된 힐링 공간, 우리가 글쓰기를 하는 궁극적인 목표일 것이다. 아르코산티를 찬찬히 걸으며 눈길을 잡아 끈 보드 위의 그림을 하나 소개해본다. 아르코산티에서 운영하는 워크숍에 참가했던 어떤 이가 그려놓은 것으로 보인다.
We want to discourage the vision. Of a pleasant 5 week vacation.
문장만 보아도 숨 가쁘게 일만 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 혹은 그녀는 이곳에서 5주의 휴가 동안 어떤 깨달음을 얻었던 것일까?
삶의 목적이 모두 성공을 강요하는 경쟁사회다. 세속적인 성공만을 향해 달려 나가는 무리들 속에 조금이라도 뒤쳐진 듯하면 코어로 들어오라고 손짓한다. 코어에 들어와야 한다며... 그래야 뒤처지지 않는다며….
책임을 지고 의무를 수행하기 급급하게 살아왔던 지난날에서 벗어나 비로소 벤치에 앉아 바람을 쐬고 있다. 간혹 나만 뒤처지고 있는 건 아닌지... 다시 의지를 격려하며 경쟁의 한가운데로 돌아가야 하는 건 아닌지 문득문득 고민한다. 지금 내겐 꼭 그렇게 중심에 살지 않아도 된다고 다독여주는 손길이 필요하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나이 먹음에 저항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추레해진 노년으로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노년다운 노년을 스스로 짓고 좇고 이루려 애쓰게 됩니다. 그 또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노년은 노년 나름의 아름다움과 무게와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이러한 노년의 삶을 도와주려 우리 사회에 탄생한 드문 잡지입니다.
그동안 다섯 해를 지내면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인들에게, 노인이 되어간다고 느낀 분들에게, 많은 것을 되살피게 해주었습니다. 아주 적극적으로 말한다면 꿈을 안겨주었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꿈의 공간으로 우리 옆에 늘 있어주었습니다. 감격스러운 일입니다. 노년에 새 로운 꿈을 지니게 해주는 일보다 더 귀한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럴 뿐만 아니라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노년들에게 참 드문 놀이터를 제공해주기도 하였습니다. 그 놀이터에서는 꿈의 실현이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을 실증하는 온갖 놀잇감을 펼쳐놓고 누구나 마음껏 즐기도록 해주었습니다. 익숙한 이제까지의 삶을 다듬을 수 있는 놀이도 할 수 있고, 그야말로 꿈도 꾸지 못했던 모험을 할 수 있는 놀이도 감행할 수 있고, 보고 듣고 만지고, 그리고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놀이도 지천으로 쌓여 있었습니다. 고마운 일입니다.
그러나 조심스러운 점도 없지 않았습니다. 그 꿈의 공간이, 그 즐거운 놀이터가, 까맣게 높거나 멀어 내가 가 닿을 길이 없다는 생각을 한 노년도 있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가끔 스며들기도 했습니다. 꿈의 자리에서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는 느낌보다 자신의 초라함과 누추함을 새김질해야 하는 계기를 만나야 하는 것은 노년에게는 무척 견디기 힘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런 분들을 위한 자리가 ‘브라보 마이 라이프’라고 말하는 것은 온당하지만, 그런 노년에게 드리고 싶은 설명만큼의 자성을 스스로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성숙한 놀이터이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다시 다섯 해, 어떤 모습으로 우리 노년들의 삶 안에서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자리를 잡을지 궁금합니다. 제가 그때까지 있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일지도 모르겠는데, 어쩌면 그것의 가능성 여부는 매달 나오는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결정해줄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거듭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 정진홍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인생 이모작의 나침판 ‘브라보 마이라이프’ 창간 5주년을 축하드립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베이비부머들의 본격적인 은퇴가 시작될 무렵 창간되었지요. 마침 귀농.귀촌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한 때라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창간기념 메시지에서 농업과 농촌이 은퇴자들에게 새로운 기회의 장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그 후 저는 3년 6개월의 장관직을 끝으로 고향집으로 돌아와 노모를 모시며 텃밭을 가꾸는, 꿈에도 그리던 은퇴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여느 농부와 다름없이 봄이면 씨앗을 뿌리고 땀 흘려 가꾸어 수확하는 즐거움도 있지만 늙고 지친 농업과 농촌, 무너지는 지역공동체를 보며 과연 무엇을 하였는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하였습니다. 지방 소멸과 농촌 붕괴를 막는 일이 급하다고 생각한 나머지 농사 짬짬이 경상북도의 농촌살리기 자문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고위공직에 있던 사람이 낙향해 노모와 사는 것도 드문 일이지만 직접 농사를 짓고 하위직 공무원으로 일한다는 게 없던 일이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지요. 선하심후하심(先何心後何心)이란 말처럼 누구도 가지 않는 길을 처처히 걷는 나그네에게 ‘브라보 마이 라이프’는 당산나무처럼 위안과 격려를 주는 소중한 친구가 됩니다. 더 크고 푸른 거목으로 자라나 판에 박힌 삶에 지친 방랑자들이 기대어 가치 있는 인생을 꿈꾸며 쉬어갈 수 있도록 무궁한 발전을 기원합니다.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
‘브라보 마이 라이프’가 탄생한 지 5년이 됐다니 진심으로 축하의 말씀을 드립니다.
특별한 사람들의 평범한 삶을 충실히 담아내고 애로점을 함께 고민하며 다양한 정보와 공감의 메시지를 담은, 어른을 위한 잡지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큰 언덕이 됩니다. 사실 나이 들어가면 몸이 힘들기 시작합니다. 당연히 마음도 시들어갑니다. 거기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사태로 너무 지치고, 불안으로 피로가 쌓여가고 있습니다. 다들 잠을 많이 자고 푹 쉬어도 피로가 가시지 않는다고 호소합니다. 몸이 쉬어도 뇌가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로토닌에는 감정을 조절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세로토닌이 부족하면 폭력적으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 습관’을 잘 들여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명상을 하면 행복과 사랑의 뇌 신경물질이 많이 분비됩니다. 세로토닌과 옥시토신이 그것입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친절한 말과 행동으로, 봉사와 배려로, 옥시토신과 세로토닌을 분비시켜 젊고 건강하게 희망 바이러스가 퍼지기를 바랍니다.
UN이 평생연령 기준을 다시 정립해 발표했습니다. 0~17세는 미성년자, 18~65세는 청년, 66~ 79세는 중년, 80~99세는 노년, 100세 이후를 장수노인으로 구분했습니다. 이 기준대로라면, 시니어 대다수는 아직 청년입니다.
‘브라보 마이 라이프’ 독자 여러분, 청년이 되어 올 한 해도 행복하고 활기차게 살아갑시다~
- 이시형 세로토닌문화원장
사진에는 작가의 이야기가 담겨야 한다. 이야기를 담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화면 속에 있는 피사체 자체만으로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면 속의 피사체와 관련되는 화면에 보이지 않는 바깥의 이야기를 함께 엮는 방법이다.
앞의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이 사진은 호명산(경기도 가평군 소재) 산행을 마친 후 귀가하기 위해 상천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던 중 역 앞 시골 마을에서 발견한 장면이다. 낡은 슬레이트 지붕 농가 앞에 고목이 된 감나무가 서 있고 굳어진 시멘트 부대 위에 고양이 한 마리 졸고 있다. 때마침 따사한 석양 빛줄기가 고양이를 비추고. 낡은 삽 한 자루가 한가롭게 농가 벽면에 세워졌다. 기자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한 편의 이야기가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 셔터를 누르고 또 눌렀다, 고양이 잠 깨울까 조심하며.
“밭에서 일하던 농부가 사용하던 삽자루를 벽면에 비스듬히 기대어 놓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새참으로 막걸리 한두 잔을 마신 후 툇마루에 누워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며 낮잠을 즐기고 있겠지. 한 줄기 석양의 따사한 빛줄기를 즐기며 함께 졸고 있는 고양이. 시골의 나른한 오후 풍경” 카메라로 한 편의 이야기를 그린 셈이다. 사진 화면 속의 피사체(고양이, 삽자루, 농가, 감나무, 석양 빛줄기 등)와 그를 통해 상상할 수 있는 화면 바깥의 다른 장면을 상상하도록 했다.
또 하나의 사진(앞 사진 참조)을 예로 들어보자. 정년퇴직한 후 사진 취미에 몰입하여 나름의 독특한 사진을 만들고 있는 유병창(70세) 작가의 사진이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개인 전시회로 자신의 사진을 세상에 보여준 작가다.
이 사진은 제주도 주상절리를 촬영한 것의 극히 일부분이다. 화가가 그린 예술 작품을 연상케 한다. 하나의 수채화라 해도 좋을 듯. 유 작가는 화산으로 생긴 기묘한 그 모습만을 보지 않았다. 화면 속의 장면에서 지구 변화의 숱한 이야기도 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작품이 들어 있는 사진첩의 제목에서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다.
“The Echo from A Distant Time(먼 옛날의 메아리)”.
피사체를 통해 먼 옛날 우주의 소리를 느끼게 한다. 화면 바깥세상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였다.
이처럼 사진은 있는 그대로를 복사하듯 찍을 수도 있으나 화면에 보여주는 피사체와 연결된 바깥의 이야기도 상상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작업도 필요하다. 사진 역시 그림이나 조각 등과 같이 한 분야의 예술이기에 그렇다. 셔터 누르기에 앞서 그런 메시지를 생각해 보면 새로운 사진이 만들어질 것이다.
제주도 옛날 농가의 모습을 볼 수 있는 제주전통농가전시실. 옛것을 익혀 새것을 안다는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현장이다. 제주감귤박물관 본관 2층에 설치되어 있다. 제주도 전통농가의 옛 모습과 삶의 지혜를 중심으로 정리하였다. 요즘 제주도 젊은이들도 잘 모르는 특이한 명칭들이 많다.
제주전통농가의 옛 모습
제주민속자료 제3호인 제주전통 초가 세 채와 정낭, 통시(전통화장실), 우영밭(텃밭) 등 제주농가 전체를 복원해 놓은 곳이다. 옛 농가 전체를 실내에 조성했다. 제주 농업과 제주전통농가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다. 용어 자체가 제주도의 전통과 특성에 맞게 붙여진 것이 많다.
사람들이 주로 살았던 집을 "안거리"라고 한다. 안채의 방언이다. 안거리 옆에 별도로 지은 작은 집을 “밖거리”라고 한다. 바깥채의 방언이다. 안거리와 밖거리는 모두 진흙을 발라 지은 초가집으로 안거리는 살림을 하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집으로 사용하였다. 밖거리는 주로 부엌으로 이용하여 부엌에서 밥을 지어 먹을 때는 안거리에서 먹었으며 남은 공간은 마늘과 고추 등 농산물을 걸어놓고 말리고 그 외에 농산물과 농기계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활용하였다.
'쇠막'은 외양간의 방언으로 소와 말을 기르는 곳이다. 옛날에는 말이나 소가 농사를 지을 때 매우 중요한 일을 하는 동물이었기 때문에 집 가까이 두고 정성껏 보살폈다. 말은 수레를 끌거나 직접 타는 교통수단이었고 소는 쟁기를 매어 밭을 가는 역할을 했다. '통시'는 대소변을 보는 곳과 돼지를 가두어 기르는 곳을 하나로 합쳐서 돌담을 쌓아 만든 주거공간이다.
옛날 제주의 민가들이 사는 입구의 올레에는 '정주석'을 세우고 '정낭'을 걸쳐서 대문 역할을 했다. 정낭은 인적 정보를 이웃에게 알리는 제주가 갖고 있는 특유의 생활 풍습이었다. 정주석에 3개의 구멍을 뚫어 나무로 만든 정낭을 걸쳐서 소나 말의 출입을 막고 집주인의 외출을 이웃에게 알렸다.
'장항'은 장을 담는 항아리이고 '장독대'에는 늘 여러 개의 장항이 놓여 있었다. 제주에서는 탈곡하기 전의 농작물을 단으로 묶어 쌓아두거나 탈곡하고 난 짚을 낟가리로 씌워 쌓아 놓은 것을 "눌"이라고 하고 눌을 쌓기 위한 공간을 “눌굽” 또는 “눌왓”이라고 했다. '우엉'은 텃밭을 말하고 '물허벅'은 물을 길러 나르는 물항아리다. '물구덕'은 물을 길어 다닐 때 등에 지고 다녔던 정방형 모양의 대바구니다. '물팡'은 물허벅을 지고 다니다 내려놓는 곳을 말한다.
제주전통농가의 삶의 지혜
농사를 지을 때 다양한 도구를 이용하여 효율적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노력한 모습을 전통 농기구 등에서 엿볼 수 있다.
'애기구덕'은 아기를 좌우로 흔들면서 재우는 데 사용하였던 구덕이다. 말과 되는 곡식을 측정하던 기구이며 '도고리'는 가축의 먹이를 주는 그릇으로 모두 나무로 만들었다.
'대패랭이'는 대나무로 만든 패랭이이다. 갓과 비슷한 형태로 '이대'라는 대나무의 한종류로 만들어지는 데 '이대'는 제주지역 어디에서나 군락을 지어 자생하며 바닷가에서 소금바람을 견뎌내며 자라서 좀이 슬지 않고 잘 썩지도 않는 장점이 있다. 농부들이 무더운 여름날 밭에서 더위를 피하려고 사용하였다. 덩드렁마께'는 나무 방망이이다. 나무 토막으로 만든 투박한 방망이로 짚이나 칡을 두드려 부드럽게 만들 때 사용하는 도구다. 빨래를 할 때 두들겨 물을 뺄 때도 쓰인다.
'남방애'는 남방아라고도 하며 제주도에만 있는 것으로 큰 나무를 파고 그 안에서 곡식을 찍는 부분인 돌로 만든 절구다. 나무로 만든 방아라는 뜻이다. '맷방석'은 고래방석이라고도 하며 고래할 때 밑에 깔아서 이용했다. '고래'는 맷돌을 돌리는 기구로 맷돌을 돌리는 것을 고래곤다라고 한다. 메밀 등 마른 곡식을 가는 데 쓰는 기구이다. '푸는 체'는 곡식에 섞인 겨 따위를 걸러내는 도구이다. 바람을 일으켜 죽정이나 겨를 내쫓는 데 사용했다.
'도깨'는 도리깨의 방언으로 콩, 보리 등 곡식을 두둘겨서 알갱이를 털어 내는 데 쓰이는 연장이다. '홀태'는 촘촘한 날 사이에 벼, 보리, 밀 따위의 이삭을 넣고 훓어내어 낱알을 터는 농기구다. “골갱이”는 제주의 농기구 중 가장 작으면서도 대표적인 도구이다. 손에 쉽게 휴대하여 잡초 등을 제거하고 종자를 심을 때 사용한다. '호미'는 풀, 나무, 곡식의 대 등을 베어내는 데 쓰는 낫이다.
'남태'는 흙덩이를 고르거나 씨가 날리지 않도록 땅을 다지는 데 쓰는 나무로 만든 기구다. '씨부게'와 씨부게기는 짚으로 만들어 씨앗을 보관하는 주머니로 주둥이를 좁게 만들어 쥐나 벌레로부터 피해를 막는 씨앗주머니다. '곰배'는 곰방애라고도 하며 흙덩이를 깨뜨리거나 골을 다듬으며 씨를 뿌린 뒤에 흙을 고르는 데 쓰는 기구다. '쇠멍에'는 말이나 소가 달구지나 쟁기를 끌 때 목에 거는 막대를 말한다.
지금 사용하는 현대식 농기구는 대부분 과거 전통농가에서 사용했던 기구들을 발전시킨 것들이다. 전통 농기구들이 잘 보관되어 더욱 잘 활용되길 기원한다.
바쿠의 구도시를 걷다 보면 누군가 옆으로 다가와 근교 일일투어를 권한다. 사실 택시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자유여행으로 바쿠의 근교 투어를 하는 건 시간 면에서 비효율적이다. 가격을 좀 깎아달라고 하니 여행사 사무실을 안내해줘 그곳으로 갔다. 결국 1인당 20AZN(한화 약 1만4000원)을 할인받아, 다음 날 4만9000원짜리 일일 투어를 했다.
아침 9시, 구시가지 성문 앞에서 가이드와 각기 다른 나라에서 온 외국인 6명을 만나 일일투어를 시작했다.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아름다운 카스피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한 시간 정도 달려갔다. 고부스탄(Gobustan)에 도착한 뒤에는 대기해 있던 여러 대의 낡은 승용차로 갈아탔다. 왜 차를 바꿔 타야 하는지 이해하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곳에서 목적지인 머드 볼케이노(진흙 화산)까지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을 10여 km 더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운전기사는 그 길을 ‘사파리 투어’라 표현했다. 그러나 마케팅 목적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일 뿐 동물 구경은 할 수 없었다. 억지스러웠지만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차창 밖 풍경은 영화에서 봤던 모습과 비슷했다. 미국의 텍사스나 어느 사막 지역처럼 풀 한 포기 제대로 자라지 못하는 척박한 땅이었다.
전 세계 700여 개의 진흙 화산 대부분이 아제르바이잔에 있다고 한다. 그중 일부가 이곳에 있었다. 용암 대신 진흙이 흘러내리는 화산 가까이 다가갔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화산 분화구에서 진흙이 끊임없이 부글거리며 기포가 부풀어 올랐다가 터졌다. 피부에 좋은 효과가 있는지 남자 몇 명이 머드팩을 즐기고 있었다.
진흙 화산에 오기 전 미니버스에서 내렸던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선사시대로 여행을 갈 수 있는 관광지가 있다. 200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고부스탄 암각화 문화경관구역’이다. 공원 입구에는 박물관이 있었고, 암각화 구역은 입구에서 1km를 더 가야 했다. 탐방로를 따라 걸으면 넓은 사암지대에 흩어져 있는, 약 5000년에서 2만 년 전에 원시인들이 돌에 그린 그림을 불 수 있다. 지나온 시간의 무게가 주는 중량감 때문에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 모습, 사냥하는 모습, 바다에서 고기 잡는 모습, 춤추는 모습 등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풀, 돌, 바위만으로 구성된 암각화 공원을 본격적으로 탐방하기 전 앞서 가던 가이드가 넓고 평평한 바위를 만나자 갑자기 타악기처럼 두드리기 시작했다. 돌에서 맑은 소리가 났다. 이 지역의 타악기 ‘가발 대시’(Gaval Dash)를 만들 때 사용하는 석재라고 했다.
조로아스터교 사원의 꺼지지 않는 불
불을 접하기 쉬워서 그랬는지 바쿠의 동쪽 외곽에 조로아스터교 성지인 ‘아테시카 사원’(Ateshgah Temple)이 남아 있다. 사원 안에는 470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불이 있다. 불을 숭배해서 배화교로 알려진 고대 페르시아 종교 조로아스터교. 현재는 신도 통계가 없을 정도로 사라져가는 종교다. 하지만 최근 이슬람 극단주의에 환멸을 느낀 쿠르드족들이 개종하면서 그쪽 지역에서 새롭게 관심을 받고 있다고 한다. 또 얼마 전 한국에서 신드롬을 일으켰던 록 밴드그룹 ‘퀸’의 ‘프레디 머큐리’가 조로아스터교의 후손인 파르시(Parsi) 출신이기도 하다. 수도원이었던 사원 내부는 박물관으로 개조됐다. 방마다 조로아스터교에 대한 설명과 모형, 사진들이 전시돼 있었다. 교세는 미약하지만 조로아스터교를 경험할 수 있는 건 바쿠가 가진 또 하나의 매력이었다.
이외에도 바쿠 외곽에는 불과 관련한 ‘야나르 다그’(Yanar Dag)라는 이름의 불타는 언덕도 있다. 지하에 어마어마한 양의 천연가스가 매장돼 있어 가스가 나오는 분출구에서는 계속 불이 타고 있었다. 그러나 자원 개발로 지하 압력이 내려가 과거에 비해 불꽃이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아제르바이잔 여행을 해야 하는 이유
현재와 과거의 절묘한 조화, 손님과 이방인에게 친절한 문화, 동서양의 경계선 위에서 유럽을 향해 있는 도시, 맛있는 음식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사람들. 바쿠 여행을 하면서 받았던 인상이다. 아직 구 소련 치하의 흔적도 남아 있고, 에어컨이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등 여행 인프라가 부족한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제르바이잔 관광청이 글로벌 캠페인으로 선정한 ‘기대, 그 이상의 아제르바이잔’(Take Another Look)이라는 캐치프레이즈가 그들 사회에 내재돼 있는 역동성과 경계를 넘나드는 수용의 문화를 잘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트빌리시행 야간 특급열차
한여름의 뜨거운 햇볕이 주황빛으로 바뀌면서 나란히 뻗어 있는 녹슨 철길 위로 떨어졌다. 검은색 섞인 파란 하늘이 배경이 될 무렵 그림자도 사라져가는 플랫폼 앞으로 둥근 쇳덩이가 슬며시 발을 들이밀었다. 흰 수증기를 내뿜으며 거친 숨을 내쉴 것만 같은 짙은 암녹색 기차였다. 톨스토이 소설 ‘안나 카레니나’에서 ‘브론스키’와 ‘안나 카레니나’를 운명처럼 만나게 했던 그 기차다. 조지아의 고리 시(市)에 전시돼 있는 스탈린 전용 열차도 같은 색이다. 소설 내용처럼―창 너머로 플랫폼에 서서 기차를 전송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치 뒤쪽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물끄러미 내다보고 있었다. (…) 규칙적으로 덜커덕덜커덕 흔들리면서 플랫폼을 지나고 (…) 열차는 점점 신나고 매끄럽게 경쾌한 소리를 내며 레일 위를 미끄러져 갔다―그렇게 바쿠와 이별했다.
오래된 열차이지만 2인 1칸인 1등석은 불편한 점이 전혀 없었다. 새것으로 바꾼 하얀 침대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바쿠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전 시추공에서 나오는 가스 때문에 큰 불꽃이 타오르는 공장들이 창밖으로 스쳐지나갔다. 때맞춰 창틀에 올려놓은 스마트폰에서 쇼스타코비치의 재즈 모음곡 2번 ‘왈츠 Ⅱ’가 흘러나왔다. 출발 전 역에서 산 와인으로 영혼을 적셨다. 그렇게 떠나는 아쉬움과 새로운 풍경을 만나러 가는 길의 떨림을 가라앉히며 수없이 꿈꿔왔던 침대열차에서의 밤을 보냈다. 기차는 쉬지 않고 트빌리시를 향해 달려갔다.
저녁 9시에 출발한 기차는 꼬박 12시간을 달려 다음 날 아침 9시경 트빌리시에 도착했다. 도착하기 전 새벽 5시쯤 조지아 입국 절차가 한 차례 있었다. 카메라가 연결된 노트북을 들고 조지아 군인들이 열차로 올라왔다. 입국신고서 작성, 여권 제출, 사진촬영, 그리고 이어진 간단한 가방 검사로 국경 통과 절차가 끝났다. 조지아는 한국 여권 소지자의 경우 무비자로 360일 체류할 수 있는 나라다.
미국 조지아가 아니고 ‘조지아’
“조지아? 미국 조지아?” 이번 여행 목적지는 ‘조지아’라고 하니 주변 사람들의 반응이 한결같았다. 몇몇 사람은 구 소련이 지배하던 시절의 ‘그루지야’는 알고 있었다. 1991년에 독립하면서 국명을 ‘조지아’로 바꿨다고 설명하면 미국과 가까워지고 싶어서 이름이 그러냐는 반응들을 보였다. 정말 그랬는지는 확인하지 않았다. 일반적으로는 ‘농부’를 뜻하는 그리스어 ‘게오르기오스’에서 빌려왔다는 설과 트빌리시의 핫플레이스 ‘자유광장’에 황금동상으로 우뚝 서 있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에서 따왔다는 이야기가 가장 많다.
조지아에는 스위스처럼 아름다운 자연이 있고, 프랑스처럼 풍요로운 와인, 이탈리아처럼 맛있는 음식, 그리고 스페인처럼 정열적인 춤과 음악이 있다.
트빌리시는 재즈다
종착역이 가까워지면서 기차 속도가 느려졌다. 트빌리시는 BC 4세기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해 AD 5세기 말에 조지아의 수도가 된 오래된 도시다. 창문 밖으로 트빌리시의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졌다. 폐쇄된 기지창에 아무렇게나 방치돼 있는 녹슨 객차와 화차들, 네모반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 신도시, 트빌리시의 랜드마크인 나리칼라 요새와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는 구도시가 줄지어 얼굴을 드러냈다. 마치 한 곡의 재즈를 듣는 것 같았다. 이곳 사람들은 ‘재즈적’이라는 단어를 자주 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이 연결될 때 주로 사용한다. 그만큼 조지아 사람들은 뭐든 잘 받아들인다. 혼합에 익숙하다. 트빌리시라는 도시도 그랬다. 색소폰의 끈적한 느낌과 와인의 나른한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 듯 보였지만 퇴폐적 숨결이 느껴지지는 않는 골목의 모습이 그랬고, 클래식함과 모던함이 서로 뒤엉켜 하나가 된 도시의 풍경이 그랬다.
올드 트빌리시가 보여주는 것들
트빌리시는 도시를 관통하는 ‘므츠바리’(Mtkvari) 강(쿠라 강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을 중심으로 남쪽의 ‘올드 트빌리시’(구도심)와 북쪽으로 나누어진다. 잘 알려진 관광지 대부분이 구도심에 몰려 있어 걸어 다닐 만하다. ‘아블라바리’(Avlabari) 전철역에서 내려 강 언덕에 있는 ‘메테키 교회’(Metekhi Church)로 먼저 갔다. 13세기에 세워진 이 교회는 서른일곱 번이나 다시 지어진 사연으로 수많은 전쟁에 시달렸던 조지아의 얼굴이 됐다. 구 소련 시절에는 감옥과 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최근에서야 교회 역할을 하고 있다. 교회 옆에는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긴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왕의 기마상이 도시를 바라보고 있다.
기마상이 있는 곳에서 북쪽을 보면 물살이 빠르게 흐르는 강 오른쪽으로 ‘리케 공원’(Rike Park)이 있다. 시민과 여행자들에게 은은한 꽃향기로 피로를 풀어주는 곳이다. 강변에는 1200개의 LED 전구가 빛을 내는 ‘평화의 다리’가 있어 므츠바리 강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한다. 2GEL(한화 약 810원)을 내면 ‘메테키 다리’를 건너 므타츠민다 산 정상에 있는 나리칼라 요새까지 케이블카로 올라갈 수 있다.
도시 전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이 요새는 4세기에 페니키아인들에 의해 세워졌다. 요새 바로 옆 능선에는 왼손엔 와인 잔, 오른손엔 칼을 들고 있는 ‘조지아 어머니 상’이 있다. ‘친구에게는 와인 잔을 건네지만 적에게는 칼을 든다’는 의미로 건국 1500년을 기념해 만든, 높이 20m의 대형 석상이다.
트빌리시를 사랑한 작가들
러시아의 문호들은 조지아를 사랑했다. 막심 고리키는 이곳에서 일하며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썼다. 이때 사용한 필명이 ‘고리키’다. 그는 “코카서스 산맥의 장엄함과 낭만적 기질을 지닌 이곳 사람들 덕분에 방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됐다”고 회고했다. 톨스토이도 이곳에서 주둔군으로 4년을 복무한 후 조지아를 배경으로 몇 편의 소설을 썼다. 푸시킨의 시 제목을 그대로 가져다 쓴 ‘코카서스의 죄수’가 대표적이다. 누구보다도 조지아의 와인과 음식을 사랑한 푸시킨은 대표적인 친조지아 인사였다. 그래서인지 구도심 자유광장 옆에는 ‘푸시킨 공원’이 있다.
구도심 중앙에 위치한 ‘자유광장’은 주변의 아름다운 건축물과 교통의 요충지로 트빌리시의 시작이자 끝이 되는 장소다. 마치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광장 같은 곳이다. 레닌 동상이 있던 광장 중앙에는 조지아 수호성인 ‘성 조지’의 황금동상이 있다. ‘자유광장’에서부터 ‘루스타벨리 메트로 역’까지 이어지는 거리를 걸었다. 러시아 간섭에 저항하는 조지아인들의 데모가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회 앞 광장, 조지아 국립박물관, 루스타벨리 극장, 트빌리시 오페라·발레 극장, 트빌리시 현대미술관들이 이 거리에 있다. 중간중간 보이는 작은 카페와 거리의 화가들 작품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트빌리시의 숨결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과거와 현재의 눈부신 이야기들이 자연스럽게 숨 쉬는 소리가 들린다. 행복했다. 아무리 걸어도 질리지 않는 하염없이 걷고 싶은 길이다
므츠바리 강을 건너는 ‘사브뤼켄’(Saarbruecken) 다리 옆 ‘데대나’(Dedaena) 공원에서는 트빌리시 최대 규모의 벼룩시장이 열린다. 구 소련의 군용 제품에서부터 은식기, 오래된 카세트테이프 등 온갖 물건들이 거래된다.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오랜 세월이 빚어낸 추억의 물건들이 과거를 되돌아보게 한다. 지치지 않고 무언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조지아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찰나에 그들의 얼굴을 스쳐지나가는 희망과 그리움, 설렘도 봤다.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우리는 무엇을 먹어야 하는가? 이런 의문에 대한, 스스로 미욱하게 풀어낸 해답들을 이야기하고 싶다. 부족한 재주로 나름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틀릴 수도 있다. 여러분의 올곧은 지적도 기대한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시로 글을 시작한다. 널리 알려진 ‘자화상’의 한 구절이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부모님과 가족, 주변 친지, 친구 등 한 사람을 키우는 건 많다. 미당의 경우, 그런 요소는 2할이다. 나머지 8할은? ‘바람’이었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시래기였다”. 1960년대. 필자가 자란 곳은 내륙의 작은 시골 마을. 하루에 대처(大處)에서 버스가 네댓 번 정도 왔다. 어린아이의 눈에는, 아주 넓었던 신작로였다. 버스가 먼지를 일으키며 지나갔다. 먼지가 겨우 가라앉으면 집마다 담과 벽에 걸어둔 시래기가 겨울바람을 맞으며 누렇게 말라갔다.
시래깃국에 시래기무침. 배추김치와 큼직한 무김치. 나를 키운 8할은 시래기였고, 2할은 김장이었다. 겨울이면 어느 집이나 시래깃국과 시래기 무침으로 버텼다. 가난한 이나, 밥술이나 뜰 만한 집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우거지는 날것, 시래기는 말린 것
사람들은 우거지와 시래기를 혼동하며 물어본다. 정확한 표현은 아니지만, 늘 간단하게 설명한다. “우거지는 날것, 생것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그래도 여전히 많은 이가 혼란스러워한다. 다음 내용은 도종환 시인의 작품 ‘시래기’ 중 일부다.
저것은 맨 처음 어둔 땅을 뚫고 나온 잎들이다/아직 씨앗인 몸을 푸른 싹으로 바꾼 것도 저들이고/가장 바깥에 서서 흙먼지 폭우를 견디며/몸을 열 배 스무 배로 키운 것도 저들이다/(중략) 가장 오래 세찬 바람 맞으며 하루하루 낡아간 것도/저들이고 마침내 사람들이 고갱이만을 택하고 난 뒤/제일 먼저 버림받은 것도 저들이다/(중략)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사람들의 까다로운 입맛도 바닥나고 취향도 곤궁해졌을 때/(중략)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
상당 부분 우거지에 대한 내용이다. 우거지는 채소의 윗부분 혹은 바깥 부분이다. 웃자란 부분이 우거지다. 땅속에서 가장 먼저 나와 싹을 틔우는 배추의 가장 바깥 부분이다. 위로 자란다. 윗부분, 위, 웃걷이, 우거지다. 바깥바람을 가장 오랫동안 견딘 것도 바로 우거지다.
불행히도, 우거지는 가장 먼저 버려진다. 배추를 뽑을 때 버리기도 하고, 다듬을 때 먼저 들어낸다. 가난한 이들은 버려진 우거지를 주워서 죽을 끓였다. 우거지 죽이다.
시래기는 말린 것이다. 우거지를 말리면 시래기가 된다. 배추 우거지를 말리면 ‘배추 우거지 시래기’다. 줄여서 배추 시래기다. 시에서는 “기억하는 손에 의해 거두어져 겨울을 나다가”라고 설명한다. 우거지를 벽에 혹은 담장에 걸면 시래기가 된다. “서리에 젖고, 눈 맞아가며 견디고 있는 마지막 저 헌신”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 시래기는 소중하지만 귀한 건 아니다. 누구나 쉽게 구할 수 있다. 바깥에 걸려 긴 겨울을 난다. 눈도 맞고, 바람도 겪는다. 가장 먼저 땅을 뚫고 나와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다음, 마지막에는 버림받는다. 우거지의 슬픈 일생이다.
시래기는 맛있다. 어린 시절, 거의 매 끼니 시래기를 먹으며 “또 시래깃국이야?” 하고 투정했다. 먹어본 게 별로 없으니 ‘시래깃국 대체품’을 주워섬길 수도 없었다. 고만고만한 살림살이. 사실, 시래기는 전 국민을 키웠다.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는다
음식 공부를 하면서 문득 “외국 사람들은 시래기를 먹지 않는다”는 희한한 사실을 깨달았다. 중국은 드넓다. 어느 구석에서 어떤 음식, 식재료를 먹는지 모두 파악하기 힘들다. 먹긴 하지만, 우리처럼 일상적이지 않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도 모른다.
중국 여행을 다녀온 이가 “중국에서도 시래기를 먹더라” 해서 ‘음식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시래기는 아니고 우거지와 시래기 중간 정도의 식재료였다. 위치는 동북삼성(東北三省) 부근이었다. 조선족들의 풍습이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예전의 간도 지역, 중국 동북삼성의 조선족들은 여전히 우거지, 시래기를 먹는다. 그뿐이다.
배추는 ‘백채’(白菜)에서 시작되었다. 배추 이파리의 줄기 부분은 흰색이다. 그래서 백채다. 지금도 배추의 한자 표기는 백채다. 배추는 중국에서 건너왔다. 조선시대 후기까지도 중국 배추가 우리 것보다 크고 맛있었다. 숱한 기록들이 “중국 배추가 크고 맛있다”고 말한다. 중국에 갔던 사신단은 “중국 간 김에 좋은 배추 씨앗을 사오려 했는데, 돈이 부족해서 미처 사오지 못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무는 오랫동안 ‘무우’라고 불렀다. 무는 ‘무후’(武侯)에서 비롯되었다. 무후는 높은 벼슬아치의 이름이다. 무후 제갈량이 좋아했던 채소라서 무후, 무우, 무로 변했다는 게 다수설이다.
배추와 무 모두 중국에서 한반도로 건너왔다. 원산지가 어디든, 우리는 중국을 통해 무와 배추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정작 중국에는 우거지와 시래기가 없다? 그렇지는 않다. 중국에도 시래기가 있었다. ‘지축’(旨蓄)이다. 지금도 중국 사전에는 지축이 기록되어 있다. 중국 검색 엔진 바이두에도 ‘旨蓄’이 버젓이 나와 있다. 지축은 ‘채소, 푸성귀[菜]’를 말린 것이다. 우리도 ‘지축’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아래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내용이다. 날짜는 성종 18년(1487년) 9월 11일. 제목은 ‘양양 도호부사 유자한이 강무의 연기를 상서하다’이다.
양양 도호부사(襄陽都護府使) 유자한(柳自漢)이 상서(上書)하였다. (중략) “신(臣)이 보건대, 강원도(江原道)는 다른 도와 달라서 서쪽으로는 대령(大嶺)에 의거하고 동쪽으로는 창해(滄海)에서 그쳤으며, 영서(嶺西)는 서리와 눈이 많고 영동(嶺東)은 바람과 비가 많은 데다가 땅에 돌이 많아서 화곡(禾穀)이 번성하지 못하여, 풍년이라 하더라도 백성들이 오히려 지축(旨蓄)과 감자나 밤으로 이어가고서야 겨우 한 해를 넘길 수 있으므로, 민간에서 상수리 수십 석(碩)을 저장한 자를 부잣집이라 합니다. 농부를 먹이는 것은 이것이 아니면 충족할 길이 없고, 백성이 이것을 줍는 것은 다만 9월·10월 사이일 뿐인데, 이제 순행(巡幸)이 마침 그때를 당하였으므로 (후략).”
양양은 지금의 강원도 양양이다. 강무는 국가의 군사훈련과 사냥을 겸하는 주요 행사다. 왕이 현장에서 직접 훈련을 감독하고 사냥을 한다. 문제는 인근 주민이다. 강무가 있으면 길을 닦고, 훈련에 필요한 물품을 챙겨야 한다. 현지 주민들이 말먹이부터 행사 참가자의 식사까지 챙겨야 한다. 중앙에서 곡식을 가져간다 해도 현지에서 챙겨야 할 게 많다. 사냥과 현장 막사를 만드는 일에도 현지 주민들이 참가한다. 원래 곡식이 많지 않은 곳이다. 겨울에는 ‘지축’을 챙겨야 한다. 지축은 목숨을 잇게 해주는 귀한 먹거리다. 겨울에 임금의 순행이 있으면 굶어 죽을 판이다. 현지 관리인 유자한의 상소는 “강원도 백성들이 겨우살이 준비를 해야 하니, 강무를 늦추자”는 내용이다.
500여 년 전에도 우리는 시래기를 챙겨 먹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이나 그때도 마찬가지. 시래기는 주요 식량이자 반찬거리였다. 시래기가 단순히 ‘배추 시래기’, ‘무청 시래기’를 뜻하는 건 아니다. 아래 내용은 여말 선초를 살았던 문신 권근(1352~1409년)의 시 ‘축채’(畜菜)의 일부분이다.
시월이라 바람 높고, 새벽 서리 내리니/울에 가꾼 소채 거두어들였네/지축(旨蓄)을 마련하여 겨울에 대비하니/진수성찬 없어도 입맛 절로 나네 (후략)
권근은 조선을 건국하고, 조선의 뼈대를 세운 높은 벼슬아치였다. 그도 10월(음력)이면 채소 갈무리를 놓치지 않았다. 지축, 시래기가 반드시 가난한 이들의 먹거리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지축은 단순히 배추 우거지 시래기, 무청 시래기만을 가리키지 않는다. 밭에서 수확한 대부분의 채소류로 준비한 겨우살이 준비 채소를 뜻한다.
중국도 우리도 모두 먹었지만, 중국은 버렸고 우리는 지금도 소중하게 여기고, 먹는다. 우거지, 시래기는 한식의 특별한 음식 중 하나다.
황광해 맛 칼럼니스트
연세대학교 사학과 졸업, 경향신문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년간의 기자생활 동안 회삿돈으로 ‘공밥’을 엄청 많이 먹었다. 한때는 매년 전국을 한 바퀴씩 돌았고 2008년부터 음식 공부에 매달리고 있다. KBS2 ‘생생정보통’, MBC ‘찾아라! 맛있는 TV’, 채널A ‘먹거리 X파일’ 등에 출연했다. 저서로 ‘한국 맛집 579’, ‘줄서는 맛집’, ‘오래된 맛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