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매일 쌀밥을 먹으며 조상의 은덕과 농부의 수고에 고마움을 느낀다. 쌀에 영혼이 있다는 도령(稻靈)께 무언의 기도를 올리며, 쌀밥을 맛있게 먹고 소중한 쌀 한 톨도 버리지 않고 귀중하게 여기려 한다.
이렇듯 소중한 쌀과 인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우리는 매일 쌀밥을 먹고 성장하였으며 일상을 살아간다.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쌀’에 대한 고마움이나 그 의미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하게 마련이다.
쌀은 벼의 열매껍질을 벗긴 알맹이다. 쌀겨는 쌀을 씻을 때 나오는 고운 속겨이며, 쌀을 씻은 뜨물이 쌀뜨물인 것을 누가 모르랴? 그러나 도시 학생들에게 벼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쌀을 얻는 농작물로 익은 열매를 '벼'라 하고 그것을 찧은 것을 '쌀'이라고 해야 알게 된다. 쌀나무(?)라고 일러줘야 할까? 벼를 재배하여 거두는 일을 벼농사라 하는데, 도심에서는 쉽게 볼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곡식을 익힌 음식을 끼니때마다 먹는다. 하루에도 세끼씩 꼬박꼬박 먹으며 생활하지 아니하는가? 아침밥을 시작으로 음식을 차려 놓은 소반인 밥상은 참으로 고마운 존재다. 그렇다면, 세계 3대 곡물은 무엇일까? 바로 쌀, 밀, 옥수수다. 세계 5대 주에서 쌀을 재배하여 식용으로 쓴다. 쌀이 서양에 전해진 것은 실크로드의 아랍인에 의해서였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쌀은 의식주 중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그래서 나는 쌀의 기원에 대한 문헌을 찾아보았다.
학명은 '오리자(oryza)'로 라틴어이고 'riso'는 이탈리아에서 쓴다. 영국에서는 'rys'에서 'rice'로 됐다. 고대 인도어 'sari'가 곧 우리말의 '쌀'의 어원이다. 즉 살[肉]에서 왔으며, 식물의 살(쌀)과 동물의 살(고기)을 먹고 사는 게 '살암'(사람)이란 속설도 있다. 이러한 뜻을 알면 참 흥미롭다.
쌀미(米)자는 농부가 팔십팔(八十八)번 손이 닿아야 할 만큼 수고해야만 수확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매일 밥을 먹으며 건강을 지키고 행복한 마음으로 인생을 즐기며, 쌀처럼 가치 있는 인간으로서 미수(米壽)인 88세까지 잘 살아야겠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버킷리스트에 종점에서 종점까지 버스나 전철을 타보는 것을 담았다. ‘참 쉬운 버킷리스트구나’ 했는데 스스로 곰곰이 생각해보니 실제 그렇게 해본 일이 없다. 업무상 전철로 왕십리에서 문산까지는 자주 다녔다. 그런데 반대편으로 왕십리에서 용문까지는 가보지 못했다. 막연히 '용문에 가봐야지' 했는데 아는 선배가 용문 오일장 구경을 가자고 전화를 해왔다.
시골 출신의 시니어세대는 오일장에 대한 추억들이 있다. 어릴 적 오일장은 명절처럼 기다려지는 설렘이 있었다. 북적거리는 장터를 돌아다녀보면 어린 내 눈에는 희한하고 없는 것이 없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나무꾼이 지게에 장작을 잔뜩 지고 오기도 하고 소나무 솔잎을 긁어모은 '갈비'라는 땔감도 팔려나왔다. 떨어진 고무신을 때우는 기계가 있었다. 넓적한 고무판에서 가위로 떨어진 구멍만큼 알맞은 크기로 때울 고무를 잘랐다. 여기에 고무풀을 바른 후 뜨겁게 달구어진 무쇠기계 인두로 꾹 눌러 열처리를 몇 분간 해준다. 마치 고무신이 용접되는 것처럼 신기하게도 때워졌다. 때운 흔적은 남아있지만 떨어진 옷에 헝겊을 덧 되어 꿰어 입던 시절이니 아무도 이런 고무신을 보고 흉을 보는 사람은 없었다.
5일장에는 강아지나 닭, 오리도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농사를 지은 콩이며 고추도 가용 돈이 필요한 농부가 손수 들고 나왔다. 산에서 뜯어온 산나물도 있었고 알록달록 화려하지만 한번만 신으면 금방 구멍이 나는 목양말도 있었다. 당기면 늘어난다는 고무줄 장수도 긴 고무줄을 장대에 걸기도하고 허리에 차기도 하면서 시장을 빙빙 돌며 팔았다.
오일장에서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하는 데는 뻥튀기가 압권이다. 사람들 놀라지 말라고 뻥튀기 장수가 미리 ‘뻥이요’하고 외치면 그 소리를 들은 사람은 모두 귀를 막았다. 곧이어 뻥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하늘로 치솟으며 한 바가지였던 강냉이가 열 바가지도 넘게 부풀어 오른다. 아이들이 한 줌씩 공짜로 집어가게 하는 인심도 있었다.
시장 한 구석에는 가마솥에 흰 수증기를 연신 내뿜으며 금방 말아내는 국밥집도 명물이었다. 용문 오일장에도 국밥집이 유명하다고 소문이 났다. 앉을 자리가 없어서 빈자리만 나면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합석해야 한다. 무청 시래기에 선지와 돼지고기를 넣었다. 값도 저렴한 오 천 원이다. 먹어보니 맛이 있고 더 달라니 듬뿍 더 갖다 준다. 우연히 합석한 등산객이 말하길 장터국밥을 먹기 위해 오일장을 찾아오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살기가 어렵다고 기진맥진해 있는 사람들은 오일장을 가봐야 한다. 모두 해봐야 2만~3만 원에 불과한 물건을 펴 놓고 줄기차게 팔리길 기다리는 가난한 서민의 얼굴에서 삶의 용기를 얻는다.
어딜 가도 꽃잔치가 한창이다. 희거나 붉거나 노란 꽃송이들 우르르 일으켜 세우는 봄의 힘. 그걸 청춘이라 부른다. 자연의 청춘은 연거푸 돌아온다. 인간의 청춘은 한 번 가면 끝이다. 조물주의 디자인이 애초에 그렇다. 청춘은 전생처럼 이미 아득하게 저물었다. 바야흐로 생애의 가을에 접어든 사람에겐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가을을 절정으로 가늠하는 사람에겐 여전한 봄. 싱싱한 태도와 관점이 청춘의 사촌인 회춘(回春)을 데려다 주기도 한다는 점에서 인생이란 흥미진진한 극장!
신을 발견했다. 새파랗던 청춘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어느새 어중간한 중늙은이로 변해버린 게 아닌가. 흉포한 세월의 간계에 부질없는 삿대질을 해대는 대신, 그는 올 것이 왔다는 투로 태연히 응하기로 했다. 과학교사였던 그에겐 매사 과학적 사고를 하는 버릇이 있다지. 어차피 거역할 수 없는 숙명엔 대번에 순응하자는 게 그의 과학적 인생관이다.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게 인색한 조물주가 주입한 숙명에 짓눌리지 않는 길이라는 지론 또한 그의 과학이렷다. 윤 씨는 교장을 찾아가 사직서를 제출하는 것으로 모종의 일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 모종의 일이란 반전 평화운동이나 조국의 통일운동 같은 웅장한 사업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의 내밀한 영혼과 관련됐을 수도 있을 그 모종의 일이란 귀촌이었다. 귀촌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었더란다. 사실 그건 오크통에 숙성시킨 와인처럼 그가 오랫동안 무르익힌 숙원이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시골에 들어가 살겠다는 포부. 귀촌으로 인생 가을을 회춘의 계절로 누리겠노라는 열망. 그는 포부와 열망 자체가 믿을 만한 길잡이인 걸 알아차리고 귀촌을 단행했다. 미련도 불안도 없이 사표를 던졌다. 마치 담 밖에서 부르는 연인의 음성에 이끌려 집을 나서는 사람처럼 스윽 도시를 벗어났다. “남들이 뜯어말리더라고요. 그 어중간한 나이에 시골 가서 무슨 재미를 보겠느냐, 웬 생고생을 자청하느냐, 그런 소리들을 했어요. 그러나 은퇴 이후 어떻게 살 것인가를 미리 생각해왔던 저에겐 귀촌이 움직일 수 없는 답이자 길이었어요. 이미 오래전부터 귀촌에 매력을 느끼고 모색해왔으니까. 다만 타이밍을 기다렸을 뿐인데, 예순 나이에 접어들 즈음, 이제 때가 왔다, 더 미룰 수 없다, 그런 판단을 했죠.” “평생 생활고에 쫓기다 옥살이까지 했던 세르반테스. 그가 ‘돈키호테’를 써 성공한 게 예순 무렵이었죠.” “저의 꿈은 소박해요. 일테면, 깨끗한 공기를 마시며 살고 싶다, 그런 거….” “선생께서 미리 간파한 귀촌의 매력 요소란 어떤 것들이죠?” “일단은 제 취향과 잘 맞을 거라 봤어요. 딱히 도시에 환멸 같은 걸 느끼진 않았지만, 마음은 자주 시골로 흘러갔어요. 텃밭을 가꾸고, 나무를 기르고, 앞산 뒷산을 산책하고, 그런 한적한 생활에 대한 선망이 많았어요. 생활비를 줄일 수 있을 거라는 점에도 호감을 느꼈어요. 시골의 싼 땅값도 매력 요소라 봤고요. 이래저래 귀촌으로 은퇴 이후 노년의 삶을 한결 생동감 넘치게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네요.” “살터를 잡는 일부터 착수했겠죠?” “광주 인근 나주나 담양에 터전을 마련하려고 많이 돌아다녔지만 마땅치 않았어요. 우연히 이곳 이 마을을 발견한 건 행운입니다. 땅값도 쌌어요. 광주의 아파트 한 채 값이면 땅 사고 집짓고, 그럭저럭 충분하리라는 예상대로, 이후 과정은 일사천리로 잘 진행되었죠.”
원주민보다 귀촌 가구가 더 많은 마을
귀촌을 작심한 이후 불과 반년 안짝 만에 집짓기까지 마치고 이사를 했다. 윤태홍 씨의 아내 이숙연(57) 씨가 동지애를 발휘해 한껏 조력한 성과였다지. 이 씨 역시 교사 출신이다. 영어를 가르쳤었다. 부부 교사였으니 연금을 합산하면 쏠쏠하리라. 부부가 보유한 나름의 물적 토대는 귀촌의 돛을 미는 순풍 역할을 했을 테다. 500여 평 부지를 사 번듯한 2층집을 짓는 데엔 처음의 예상대로 아파트 한 채 값이 들어갔단다. 이후 집 뒤편 산자락에 있는 묵정밭을 추가로 사들였다. 날 보러 와요, 라고 어여삐 노래한다. 윤 씨네 집 둘레에 피어난 봄꽃들이 말이다. 봄 아니고 꽃 아니더라도 헌칠한 마을이다. 높고 낮은 산들이 어깨를 겯고 둥글게 둥글게 원을 그리며 한바탕 춤을 추어대는 그 복판에, 혹은 꽃잎들 환하게 벌어진 그 안통 화심(花心) 부위에 마을이 들어앉았다. 저 아래 초록빛 호수 위로는 아지랑이 아롱거린다. 전쟁이 터지더라도 감쪽같이 무사할 듯 외진 맛이 있는 반면, 볕 바른 양달 일색이라 으슥한 구석 없이 포근하다. 대를 이은 농투성이로 살았던 원주민들은 대부분 도시로 흩어져 나갔다. 바야흐로 귀촌·귀농 전성시대라 해야 하나. 지금 이 마을을 이룬 24가구 중 70%가 도시에서 유입된 귀촌 가구들이라는 게 아닌가. 어떤 이들이지? “저와 같은 퇴직자들, 자영업을 하다 들어온 사람, 예술인, 광주로 출퇴근하는 건설업자 등 다양합니다. 원주민보다 외지인이 더 많아 텃세, 그런 건 없어요. 원주민들 자체가 순후하지만, 다들 편하게 어울려 지냅니다.” “이사 뒤 가장 먼저 공들여 한 일은 무엇이었죠?” “제가 소나무를 무척 좋아합니다. 광주 아파트에 살 때도 화분에 소나무를 길렀어요. 소나무를 바라보면 왜 즐거움이 샘솟을까, 그 이유를 잘은 모르겠지만 그놈들을 애호했어요. 정원 둘레에 소나무를 심어 가꾸고 싶다는 염원은 사실 귀촌 동기에 속합니다. 해서, 공들여 소나무부터 심기 시작했어요.” “소나무로 뜰을 둘렀으니 솔향이 은은할 테고, 달빛이 솔가지를 타고 흐를 테고, 수시로 운치를 즐기시겠다.” “소나무뿐일까. 모든 자연 환경이 아름답죠. 그러나 제가 풍경을 즐기는 일에 능하진 못합니다. 낭만적인 성향의 인물은 전혀 아니라서.(웃음)” “그럼 어떤 성향?” “흠. 원만한 성품이랄까? 눈앞에 주어진 일에 단순하게 매달리는 기질이고요, 부지런히 내가 할 일을 찾아 나서는 성격이기도 하죠. 딱히 안 해도 될 일을 굳이 찾아 열심히 매달리곤 했어요. 귀촌 이후 아로니아 농사를 짓기 시작한 것도 그런 성격 탓이죠.” 윤 씨는 800평 규모의 아로니아 농사를 짓는다. 이왕에 사들인 널따란 묵정밭을 그냥 놀리기란 대지의 여신에게 결례되는 일이거니와, 시골의 적막 속에 찻물이나 마시며 도 닦는 사람처럼 고요하게 눌러앉아 지내기란 고문처럼 고역스러워서였겠지. “농원을 보여주실래요?”라고 부탁하자 나른하던 그의 표정에 갑자기 생기가 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맘껏 즐기는 일상
4월의 아로니아나무들은 미처 깨어나지 못해 둔하다. 윤 씨 홀로 살뜰한 눈매로 나무의 싹눈을 이리 쳐다보고 저리 들여다보고, 마치 현미경으로 박테리아균의 신비한 동향을 살피듯 진지하다. 귀촌 1년 만에 농부로 변신한 그는 3년여가 더 흐른 현재는 영락없는 농사꾼이다. “텃밭농사도 그렇고 농사라는 거 진짜 재미있습디다. 아로니아 농사에 관한 한 별로 어려울 것도 없더라고요. 워낙 강한 작물이라서요. 병충해에 강하거든요. 극단적으로 농약 살포를 자제하더라도 농사를 망치진 않아요.” “수익성은?” “하향세가 뚜렷해요. 재배 농가가 급증해서죠. 재작년엔 2000만 원 정도의 매출을 올렸지만 작년엔 반 토막 났어요. 작물 전환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체리나 굵은 대추로 바꿀까 해요.” “선생은 과학을 전공했어요. 농사에도 과학을 적용하시나?” “농사도 응용과학이지 않겠어요? 그 점에서 제겐 농사가 유리하죠. 제가 가장 싫어하는 두 가지가 있는데요, 고집스럽게 말만 앞세우고 행동은 없는 처신, 그리고 자기합리화입니다. 그런 쓸모없는 것들을 경계하고, 과학적인 사고에 따른 주도면밀함과 준비성으로 살아가는 게 좋다고 봐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게 몸에 밴 과학적 실천은 있다고 봅니다.” 다시 집 안으로 들어와 다탁에 마주앉는다. 그의 아내가 주방에서 다과를 가져와 탁자에 놓고 원래의 자리였던 저편 의자에 다시 앉는다. 말수가 드물다. 그림자처럼 조용한 거동. 묵언수행을 하는 도류처럼, 식물처럼, 시종을 일관해서 고요하다. 말보다 내밀한 침묵의 웅변이란 게 있겠지. 세상에서 할 말을 이미 다해버렸거나, 말이 아닌 은근한 눈빛으로 부부애를 나누기에 숙달됐을 수도 있겠지. 아니면 부부간에 언쟁이라도 있었나? 흔하디흔한 게 부부싸움이지 않던가. 그러나 윤 씨 말하길, “우리에겐 그 흔한 부부싸움이 아예 없다”고 한다. “부부싸움이 되질 않아요. 왜냐? 집사람이 전혀 대꾸를 안 하거든요.(웃음)” “저런! 남편을 숫제 포기하셨을까?”
“대꾸를 하거나 제동을 걸어봤자 먹히지 않아서겠죠. 때로 저 사람이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섭섭한 생각도 들지만, 사실은 천성이 그래요. 소리 없이 남편을 도와주고 믿어주고 챙겨주고, 숨 쉬는 공기처럼 제겐 고마운 존재죠. 제가 그걸 모를 정도의 멍청이는 아닙니다.(웃음)” “귀촌이라는 급격히 바뀐 환경에 남편은 빠르게 적응하는 반면, 아내는 적응이 더딘 경우가 드물지 않죠.” “배려가 필요하겠죠. 상대의 성향을 존중하는 자세 말이죠. 저는 제법 활달한 편입니다. 외부 활동이 잦아요. 반면 아내는 이웃의 단짝 친구와 어울리거나, 집에서 혼자 조용히 머무는 걸 즐겨요. 그런 아내를 위해 도서관엘 자주 들러 소설책들을 빌려다 줍니다.” 배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메마른 공유지를 적시는 단비. 윤 씨의 성정은 담백함이 넘쳐 무색무취에 가깝다. 그러나 아내에게 쓰는 마음은 나긋하거나 촉촉하겠지. 부부가 불화하고서도, 아내를 고려하지 않고서도, 시골생활을 무사히 누릴 묘한 방법은 어디에도 없다. 귀촌 4년 차. 윤 씨는 더 바빠졌다. 오라는 곳도 가야 할 곳도 많아졌다. 그는 이걸 생동하는 삶의 징표로 본다. “제가 일찌감치 서예와 사진에 열을 냈어요. 이젠 꽤 조예가 생기고 동호인 모임들에도 빠지질 않아요. 귀촌 공부도 여전합니다. 이미 예전에 집짓기 학교나 각종 귀촌 교육 프로그램을 섭렵했지만 지금도 열심히 찾아다녀요. 한문 고전 강독 모임에도 참여해요. 때론 몸이 둘이라도 부족할 지경이에요. 귀촌에 만족합니다. 강박과 속박 없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을 비로소 맘껏 즐기며 사니까. 이보다 나은 삶이 어디 있을꼬.” 귀촌으로 자유를 얻었다는 얘기다. 상처가 없는 지평, 자유를.
봄이 왔다. 농부들이 바빠지는 농사철이다. 서울 같은 대도시에도 농사를 짓는 곳이 있다. 도시텃밭에서 상자를 이용한 농사다. 대부분 건물의 옥상이나 아파트 베란다 같은 곳에서 관상용으로 취미 삼아 농사를 짓는다. 아파트 건축 후 남은 자투리 텃밭도 있다. 텃밭을 개인이 관리하고 농사짓는 것은 정서면에서도 좋다. 다만 지자체에서 ‘도시농부’ 또는 ‘자투리 텃밭’이라는 이름을 달고 개발하여 지역주민에게 한 평이나 두 평정도의 아주 작은 농토를 분양하고 관리를 해 주는 것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지자체 도시텃밭은 주민들에게 인기가 좋아 경쟁이 심하다. 도시민들이 여가를 이용해 직접 농사를 지어보게 함으로써 여가선용도 되고 건강도 도모하면서 가족끼리 농사짓는 기쁨도 맛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자투리땅이라도 농사는 농사다.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라는 유행가 가사처럼 낭만에 젖어 아무나 덤벼들기는 어렵다.
농사를 지으려면 농토는 기본이고 씨앗이나 모종이 있어야 한다. 농작물이 잘 자라게 하기위해 퇴비도 듬뿍 넣어야 하고 비료도 필요하다. 친환경 농사를 위해 농약을 치지 않으려면 수시로 손으로 벌레를 한 마리 한 마리 잡아야 한다. 삽이나 괭이, 호미, 등 농기구도 필요하다. 가물 때는 물도 줘야 하고 장마 때는 배수로에도 신경 써야 한다. 잡초도 없애주고 농작물이 넘어지지 않게 버팀목도 세워줘야 한다. 또, 농사는 시기가 있으니 영농일지를 써가면서 시기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이런 자질구레한 일들 때문에 농사를 지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어렵다. 농군학교에 다녔어도 농사 전문가로부터 지도와 도움을 받아야 한다.
다행이도 이런 관리와 지원, 지도를 지자체에서 해주고 있다. 대부분 비슷하겠지만 어느 지자체에서 자투리 텃밭 분양공고를 봤는데, 6㎥에 2만 원을 받고 씨앗과 퇴비를 주겠다고 한다. 삽이나 괭이 등 농기구도 빌려준다. 단 호미는 각자 사라고 한다. 지자체에서 농토를 갈아엎어서 구획을 정리해주고 각종 지원을 해준다. 담당 부서가 있고 이 일을 맡아서 하는 담당 공무원이 있다. 겨우 2만 원을 받으며 이런 지원을 해주는 것은 손해 장사다. 지자체의 손해에는 다른 사람이 낸 세금이 들어가서 형평을 맞춘다.
귀농하는 농부들의 첫 번째 애로사항이 농사를 지어도 팔 곳이 없다는 것이다. 도시에 사는 사람 중 시골의 일가친척으로부터 농산물을 사 달라는 전화를 받아보지 않은 이가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팔지 못해 애타하는데 도시농부를 만든다는 낭만으로 지자체가 세금을 쏟아 붓는 도시텃밭은 재고해야 마땅하다.
대기업이 참기름 들기름까지 짜서 파니까 재래시장 상인들이 해 먹을 것이 없다고 한다. 예전에는 큰 동네마다 수동식 국수 기계를 갖춘 국수 공장이 있었고 아이스케이크 공장, 정미소도 있었다. 이제는 산업화와 경영 효율화에 밀려 다 없어졌다. 시골의 면 소재지에 가 봐도 지역민을 위해 생산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겨우 미장원, 이발소나 일용잡화를 파는 구멍가게만 있을 뿐이다. 5일마다 열리는 재래시장은 지역의 축제장이었지만 대형마트에 밀려 거의 사라졌다. 농촌에도 피와 같이 돈이 돌게 정책을 만들어야 한다.
농촌의 농산물을 도시에서 소비해 주지 않으면 팔 곳이 없다. 지자체에서 관리해주고 그저 세금만 잡아먹는 도시텃밭이라면 그만 문을 닫아야 하지 않을까? 고추, 상추, 가지는 시장에 가서 1000~2000원만 주면 한보따리 살 수 있다. 입술이 없으면 잇몸이 시린 법이다. 농촌이 죽으면 도시도 죽는다. 지자체에서 도시 텃밭자리에 꽃동산을 만들고 도시민들이 자발적으로 꽃을 가꾸게 하면 좋겠다. 대형마트를 재래시장 활성화를 위해 경제 논리에 반해서 하루정도 문을 닫는 날을 만든 것이 본보기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홍일선 님이 1970년대 대표 작가 송영(1940~2016) 선생님께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봄… 봄이라고 가만히 써봅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 넘어
밭둑에 탐스럽게 피어 있는 흰 조팝나무꽃을 바라보며
송영 꽃… 송영 선생님이라고 가만히 이름 불러보는 밤입니다.
송영 선생님
한밤중이었는데 어디선가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 같아 설핏 꿈결인 듯 몽유인 듯 일어나야 했습니다. 어제는 종일 텃밭에 나가 아내와 함께 감자를 심었기에 초저녁잠이 깊었으련만 누군가의 목소리가 많이 간곡했던 것 같았습니다.
강물이 무엇인가 다급하여 상수리나무들에게 하는 말도 아니었고 지금 한창 꽃봉오리가 절정인 조팝나무가 헤어져야 할 벗들에게 들려주는 속삭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내가 아는 이름은 더욱 아니었습니다. 그 목소리의 진원지는 러시아 변방 가브리노 산골짜기에서 들려온 아득한 울림이었습니다. 아, 니나… 선생님이 러시아 순례에서 만난 유일한 지음(知音) 니나 그리고르브나였습니다. 모르겠습니다. 내가 한 번도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니나가 내 눈 속으로 어떻게 들어왔는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온화한 얼굴이 다가왔고 밤하늘엔 북두칠성 국자 형상이 오롯했습니다. 그 목소리는 니나, 니나의 것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젊은 날이나 만년이나 한결같이 단 한 사람 스승이 톨스토이였지요. 순례길에서 벗을 만난다는 것은 생의 도반을 만났다는 것 아니겠는지요. 톨스토이가 평생을 찾아 헤맸던 성자의 표상을 선생님은 구릿빛 얼굴을 한 온유한 농부 니나 그리고르브나에게서 찾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날 초면의 니나는 선생님이 원하는 만큼의 땅을 선뜻 주겠다고 했다지요.
당대 톨스토이는 ‘사람에겐 몇 평의 땅이 필요한가’라고 수없이 물었고 그러나 러시아 제국은 답을 주지 않았습니다. 130년 뒤 오늘도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손에 못이 박힌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있지만 못이 박히지 않은 자는 식탁에 앉을 수 없다’는 바보 이반의 말을 그날 니나의 모습에서 빙의로 들었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바보 이반은 성자였지요. 이반은 소위 ‘국가는 전쟁 없이 돈 없이 학문 없이 사고하는 것 없이’ 스스로 자라는 나무들을 아름다운 공동체라고 말하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반은 바보였고 늘 무시당했고 글을 몰랐기에 이반은 ‘신(神) 가까이’ 늘 있을 수 있었던 것이지요.
선생님께서 1967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했으니 원고지를 펜으로 한 자 한 자 메운 일이야말로 ‘손에 못이 박힌’ 고단한 농부의 삶이었습니다. 온몸을 흙의 마음으로 물들인 니나가 바이칼에서도 더 아득한 남쪽 코리아에서 온 소설가의 진의를 대번에 알아본 것이 당연한 일이지요. ‘원하는 만큼의 땅’을 무상으로 주겠다니… 니나는 선생님의 지음이 분명합니다.
조팝나무꽃 그늘에 앉아 있다가 한 권의 책을 받았지요. 작가의 말이 생략된 작품집 ‘나는 왜 니나 그리고르브나의 무덤을 찾아갔나’였습니다. 저자의 부재 속에서 나온 책, 쓰라린 책,심지가 없는데도 불타오르는 책… 활짝 피어난 꽃들이 싫었습니다.
이 땅의 꽃들은 크나큰 상심 속에서만 피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숨죽여 읽어야 했습니다.
송영 꽃 송영 숲의 문장들. 존재하지 않으면서 존재하는, 존재의 시간을 넘나드는 꽃이었습니다.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핀 꽃이었습니다. 나는 이 꽃 이름을 감히 송영 꽃이라고 명명합니다. 작가는 세계를 수없이 떠돌며 완고한 중심에서 벗어남으로써, 자의로 일탈함으로써 비로소 한 세계를 꿈꾼다지요. 선생님, 지금 어디를 순례하고 계신지요. 그래 니나는 만나셨는지요. 니나에게 톨스토이의 온화한 미소를 이심전심으로 전해드렸는지요.
송영 선생님. 초월(草月)역 기억하시는지요. 여주까지 가는 전철 개통을 우리는 많이 기다렸지요. 그토록 기다리던 전철은 선생님이 분당 어느 병상에 누워 계실 때 개통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날 병상에서 수화를 나누듯 침묵의 소리로 세계를 묵상했지요. 선생님은 초월역 벤치가 잘 놓여 있더냐고 물었지요. 초월역 앞에는 무슨 꽃이 피어 있느냐고 물었지요.
선생님은 또 말씀하셨지요. 병원에서 곧 나갈 테니 초월의 그 꽃들 함께 보자고, 찬찬히 느리게 보자고….
선생님은 또 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다음에 초월에서 만날 때는 완성본이 아니더라도 작품 한 편씩 갖고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홍 시인 생업이 농사이니 아무래도 내가 초월역에 먼저 나와 앞산을 보게 될 것 같다고 혼잣말처럼 하셨는데 선생님… 지금 그곳도 꽃들이 한창인가요. 머나먼 북방 툴스카야역 노천카페 의자에 홀로 앉아 바흐의 ‘첼로 무반주 모음곡 6번’을 듣고 계신가요? 음악의 궁극을, 첼로의 선율을 문학보다도 더 편애했던 소설가, 세속의 온갖 억압과 불의를 음악으로부터 구원받고 싶었던 예술인.
송영 선생님
언제인가 금강산 가는 길목에서 ‘저 경계선 너머에는 실재하지만 현실에서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가상의 반쪽짜리 조국이 있다’며 우리의 반쪽을 오래오래 응시했다고,
그리하여 소리 내지 않고 울었다고 하셨지요.
선생님께선 어느 날 아주 긴 전화로 침묵의 울음을 아냐고 저에게 물은 적 있습니다. 저는 대답하지 못했지요. 살아 있으되 침묵을 강요당하는 것들의 아픔, 그 침묵의 공간을 침묵으로 뚫고 나오는 것이 문학이라고 선생님은 나직이 말씀하신 적 있지요.
어제는 선생님 등단작 ‘투계’를 읽었습니다. “나는 램프의 심지를 아주 커다랗게 돋워버렸다. 갑자기 부풀어 오른 불빛이 눈부시도록 방 안을 가득 채우는 것 같았다.”
밀폐 고립된 상황 속에서 램프 심지를 올리는 일만이 억압과 소외의 시간을 유예하는 유일한 길임을 터득했던 소년 송영을 만나는 아픈 시간이었습니다. 남도 염산이라는 궁핍한 마을, 외딴집에서 지속되는 투계(鬪鷄)는 세계가 강자와 약자, 승자와 패자로 분류됨으로써 한 세계가 유지됨을 암시하고 있지요. 비루하고 암울한 세계가 마치 신세계처럼 느릿느릿 펼쳐지고 있지요. 한 작가가 예술적 상상력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비극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문학예술이 태어나는 시대, 그 시대는 분명 유쾌한 역사는 아닙니다. 암울한 역사 복판에 송영 문학이 아프게 오랜 시간 서 있었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부재하는 동안 좋은 일도 많았습니다. 촛불이 이윽한 광장에서 아드님 송시원 군을 만나 함께 어둠을 밝힌 시간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귀한 일은 아기 지안(知岸)이 태어난 것입니다. 선생님은 작가 송영 말고도 지안이 할아버지라는 또 다른 이름이 생겼습니다.
선생님 이렇게 좋은 일이 많은데 초월역에서는 언제 만날 수 있는 것인지요. 봄날이 가기 전에 못난 시 한 편 품고 초월역에 나가 기다리겠습니다.
송영 선생님 보고 싶습니다.
홍일선(洪一善) 시인
1950년 경기 화성 출생, 1980년 창작과비평으로 등단.
시집 ‘흙의 경전’ 등이 있고 현재 여주 남한강가에서 농부로 생업 중.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마음만 동동 구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브라보 마이 라이프’의 문을 두드려주셔요. 이번 호에는 시인 최돈선 님이 제자 최관용 님께 편지를 쓰셨습니다.
벌써 38년이 지났네. 자넬 처음 만난 지가. 이 사람아 자넬 만난 날이 무더운 한여름이었지. 8월의 매미가 지천으로 울어대던 그날, 나는 자네가 공부하는 2학년 2반 교실 문을 열었네. 교장선생님의 안내로 들어간 자네 교실은 창문을 열어놓아 시원했어. 창가 미루나무 숲이 바람에 흔들렸지. 그때마다 미루나무 잎들은 은어떼처럼 바람에 재잘거렸어. 왜 그날 난 그게 선명히 기억났을까 몰라.
먼 바다 섬에서 오셨다고, 유명한 시인이라고, 실력을 갖춘 선생님이어서 이 학교가 정중히 모셨노라고… 과장되게 말씀을 마친 교장선생님이 나가신 뒤에도 난 한동안 창밖 미루나무 잎들의 재잘거림을 듣고 있었어. 이윽고 나는 칠판에다 내 이름 석 자를 쓰고 이렇게 말했지. 반가워요,
난 이 나라 남쪽 끝섬 완도에서 왔어요.
그 말에 학생들의 눈빛은 호기심으로 가득 찼지. 그런데 그날 유난히도 두 학생이 내 시선을 끌었어. 한 학생은 미남형에 눈빛이 반짝거렸고, 한 학생은 소같이 우직한 인상에 곱슬머리였지. 책상에 앉은 둘의 눈빛이 어찌나 초롱초롱하던지…. 그랬어. 그렇게 자네들과 나는 만난 거야.
당시 강원고등학교에는 소설 쓰시는 선생님이 두 분 계셨는데 자네들은 그 선생님들의 지도를 받고 있었어. 문예부원인 자네들은 시인 선생님이 온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마음 설랬는지 모른다고 했어. 그래, 그날의 엉뚱한 질문을 내 어찌 잊을 리가 있겠나.
자네 곁에 앉은 눈 초롱초롱한 최준 학생이 벌떡 일어났어. 선생님 한국에서 누가 제일 시를 잘 씁니까. 학생들이 모두 나를 주시했지.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다음 이렇게 대답했어.
그야 물론…, 나 말고 또 누가 있겠나? 그 대답에 학생들이 일제히 와! 환호성을 내질렀어. 책상을 쾅쾅 치는 학생들도 있었다니까? 기억나나?
자넨 그저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고 있었지. 질문을 던진 최준 학생은 어쩐 일인지 멍한 표정이었고…. 마치 한 방 먹은 표정이었다니까.
자네들은 늘 같이 붙어 다니다시피 했지. 하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확연히 달랐어. 최준 군은 재기가 넘치는 학생이었어. 글쓰기는 물론이고 운동에도 뛰어난 소질을 발휘했지. 배구, 탁구, 축구 등 못하는 운동이 없었어. 체육대회 때마다 학급 대표로 선발되어 혁혁한 승리를 따내곤 했지.
최준 군은 재기가 반짝였고 자넨 뚝심이 남달랐고. 그랬어. 확연히 다른 성격임에도 자네들은 단짝이었지. 자네들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를 찾아와 꺼낸 말을 분명히 기억하네. 저희는 강원고등학교를 졸업한 것이 아니라 강원고등학교 문예부를 졸업한 사람들입니다. 자네들의 이 오만과 자부심은 어디에서 왔겠는가. 자네들은 정말 시를 사랑하고 시에 온 정열을 쏟기로 결심했던 거야.
그 후 최준 군은 신춘문예와 문예지 당선으로 시작활동을 하기 시작했고, 자넨 대학을 졸업하고 간호장교를 아내로 맞이했지. 그리고 이듬해 강원일보 문화부 기자가 되었네. 바쁜 기자생활 중에도 자넨 이따금씩 내게 찾아와 좀 괴상한 시를 내밀곤 했어. 나는 늘, 생각이 엉뚱한 자네를 두둔했지. 시가 되든 안 되든 그 발상이 남다르다는 데 나는 엄지를 치켜세워준 거야.
아니나 다를까. 자넨 ‘오늘의 작가상’ 최종심에 올랐건만 소설에 밀려 낙선의 고배를 마셨어. 당시 시와 소설이 함께 겨루는 독특한 작가상이었지. 춘천 출신 최승호 시인이 ‘대설주의보’란 시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기억이 나네. 그 후 ‘오늘의 작가상’은 아예 소설 등용문으로 바뀌어버렸어.
하지만 자넨 뚝심의 소유자였네. 이듬해 낙선의 고배를 안긴 민음사 ‘세계의 문학’에 재도전해 당당히 시인으로 등단했으니까. 그 후 난 학교를 그만두고 생계를 위해 식구들을 데리고 서울로 갔네. 그리고 틈틈이 자네 소식을 듣곤 했지.
이보게, 관용이. 그래도 자넨 뚝심의 소유자이네. 서울서 내가 춘천으로 다시 내려왔을 때 자넨 염소를 키우는 농부가 되어 있었지. 밭일과 염소를 키우면서 격일제로 아파트에 보일러 놓는 일을 한다고 했어. 자넨 나를 만났을 때 이런 말을 했지. 전 길을 가다가도 친구나 아는 이를 만나면 얼른 골목으로 피하곤 했어요. 시도 못 쓰는 껍데기 시인, 직장도 없는 백수가 되었으니까요.
언젠가 내가 페이스북에다 자네를 염소시인이라 부르면서 사연을 적은 걸 기억하나? 그래서일까? 자넨 금세 염소시인이 되어 많은 페친과 사귀게 되었어. 그리고 드디어 자넨 시를 쓰기 시작했네. 길 가다가 골목으로 피하는 일도 없어졌고.
제가 요즘 푼돈을 모아두고 있어요. 시집 한 권 내려고요. 평생 단 한 권뿐인 시집을요. 자네가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난 가슴이 뭉클했다네. 그런데 그 모아둔 돈이 갑자기 병마에 시달리는 자네의 예쁜 딸 병원비로 보태어졌지. 그 돈이 있어 참 다행이에요, 하고 자넨 말했어.
빼앗기듯 다 내주고 헐벗고 굶주린 배를 움켜쥐더라도 덕두원 밤하늘에 초롱초롱 빛나는 별들은 꼭꼭 가슴에 품고 싶다. 보석처럼 땅문서처럼 장롱 깊숙이 감추어두고 싶다.
애인처럼 아끼던 염소가 죽어 눈물 흘리며 묻어주면 염소는 밤하늘 별이 되어 시인의 밤길을 초롱꽃처럼 밝혀준다.
얼마나 애절하고 가슴 아픈 글인지…. 자네 글을 메모해두었다가 이 편지에다 적어보네. 이 글은 차라리 소슬한 한 편의 아름다운 서정시가 아닌가.
그래, 자넨 메모 쪽지처럼 글을 쓰더라도 그 글이 아름다운 시가 되고 있다는 걸 알고는 있는가?
결코 외롭다 생각 말게. 자넨 그 누구보다 순수하고 솔직한 시인일세. 춘천엔 염소시인 최관용이 있네. 그 염소시인을 멀리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한 노인이 있다는 걸 꼭 기억해주길 바라네.
최돈선(崔燉善) 시인
강원일보, 동아일보 신춘문예와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칠년의 기다림과 일곱 날의 생’, ‘허수아비 사랑’, ‘물의 도시’, ‘나는 사랑이란 말을 하지 않았다’ 등이 있다. 에세이집으로는 ‘너의 이름만 들어도 가슴속에 종이 울린다’가 있다.
4월, 불가역적인 봄입니다. 춘삼월(春三月)이라 하지만 심술궂은 꽃샘추위로 간간이 옷깃을 여미고 어깨를 움츠려야 했던 3월과 달리, 이제부터는 오로지 화창한 봄입니다. 아스팔트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노랑나비가 살랑살랑 춤추며 날아다니는 봄. 어질어질하고 아찔한, 그런 봄날의 몽환적 분위기를 쏙 빼닮은 야생화가 있습니다. 봄이 농익어가는 4월부터 5월 사이 연보랏빛 꽃을 피우는 깽깽이풀입니다.
주로 산 중턱 아래 낮은 숲에서 자랍니다. 잎이 나기 전, 6~8개의 꽃잎이 지름 2cm가량의 원을 그리며 피는 꽃은 단번에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매혹적입니다. 민가와 가까운 곳에서 자라는 데다 관상미가 높은 까닭에 남획과 자생지 훼손이 심해 한동안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됐다가 몇 해 전에야 해제되는 곡절을 겪기도 했습니다.
한두 송이가 각기 떨어져 피기도 하지만, 대개는 수십 송이가 뭉쳐서 여기에 한 무더기, 저기에 한 무더기 피는데, 바로 그런 특성에 깽깽이풀이란 이름의 유래와 번식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즉 듬성듬성 자라는 모습에서 한 발로 껑충껑충 뛰는 깽깽이걸음을 떠올리고 깽깽이풀이란 이름을 붙이게 됐다는 설이지요.
그런데 깽깽이풀이 이처럼 듬성듬성 자라게 된 데에는, 당분이 함유된 깽깽이풀의 씨앗을 개미들이 좋아해 개미집으로 운반해가는 도중에 여기에 하나, 저기에 하나 떨어뜨리면서 자연스럽게 분산 발아됐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한창 농사일이 바쁜 4월 농부들이 만개한 이 꽃을 보면 ‘깽깽이(해금이나 바이올린을 낮춰 부르는 말)’ 켜며 땡땡이치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해서 그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늘하늘한 꽃이 예쁘기 그지없지만, 활짝 핀 모습을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개화 조건이 매우 까다로워 날이 조금만 흐리거나 기온이 차면 꽃잎을 아예 열지 않습니다. 게다가 길이 20~30cm의 꽃대 끝에 하나씩 달리는 꽃은 매우 연약해 바람이 조금만 심하게 불거나, 빗줄기가 강하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지기 일쑤입니다. 그런데 꽃이 진 뒤 나는 잎이 꽃 못지않게 귀여워 그 또한 충분히 볼만합니다. 줄기 없이 뿌리에서 바로 나오는 잎은 적갈색에서 점차 녹색으로 변합니다. 물결 모양의 가장자리나 물에 젖지 않고 딱딱한 형태가 연잎을 많이 닮았는데, 이로 인해 아예 황련(黃蓮) 또는 조황련(朝黃蓮)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Where is it?
“깽깽이풀도 없는데 뭐하러 와요?” 몇 해 전 제주의 ‘꽃동무’에게 4월에 방문하겠다고 하자 돌아온 답이다. 남한 최고의 산인 한라산이 있어 ‘없는 야생화가 없는’ 제주도이지만, 4월의 야생화로 손꼽을 깽깽이풀만은 자생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실제 제주도와 남해 도서지방을 제외하고 전국에 분포한다. 그중 야생화 동호인들이 즐겨 찾는 유명 자생지는 경북 의성의 고운사 주변, 대구 달성군 본리리 야산, 강원 홍천군 방내리 야산 등지다. 멸종위기종으로 관리하는 동안 인위적인 증식이 많이 이뤄져 전국 각지의 웬만한 식물원·수목원 등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백년 안짝에 이 세상을 지나가는 덧없는 나그네. 그게 인생길. 이제 남은 생을 들판에서 일하며 만족을 구가하리라, 하득용(52) 씨는 그런 생각으로 산골에 입문했다. 산촌 노장들이 보기엔 짠했던 모양이다. “멀쩡하게 서울에서 그냥 살지 어쩌자고 내려와 생고생이오?” 오나가나 듣는 소리가 늘 그 소리였단다. 그러나 하 씨의 귀엔 맺히는 게 없는 관전평에 불과했다. 귀농에 아무런 회의가 없기에. 자연스러운 귀결이기에.
어릴 적부터 하득용 씨에겐 우렁찬 꿈 하나가 있었다. 바로 농사였다. 농대에 진학한 것도 농사 실력을 쌓기 위해서였다. 쉰 줄에 접어든 그는 현재 오미자 농원의 쥔장. 말하자면 드디어 꿈을 이루었다. 그는 번쩍거리는 서울의 요지 강남에 살며 근사한 직장을 다녔었다. 그랬던 그의 귀농 뉴스를 접한 초등학교 동창들은 이구동성으로 합창했다지. “야야, 놀랍지 않다. 너는 일찍부터 늘 시골에 살겠다 하지 않았냐.” 그의 오래 숙성된 꿈을 훼방할 의사가 전혀 없었던 아내 역시 순순히 부응했다. 뱀이 바람처럼 스며들어 소파 위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는 식의 불상사만 벌어지지 않는다면 기꺼이 동행하겠다고 장단을 맞췄다. 그는 내심 쾌재를 부르며 귀농을 실행했다.
농경은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만들어준 혁명적 사건이었다. 대략 1만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장수 산업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 이 나라에서 농업이란 가장 못 믿을 직업으로 밀려나 있다. 무엇보다 허리 휠 신역이 자심한 반면 타산을 맞추기가 영 힘들다. 사정이 이러했지만 하 씨는 밀어붙였다. 자신의 삶의 방향에 관한 확신과 긍지에 찬 귀농임을 이미 알 만하지만, 나는 바보처럼 물었다. 농사의 그 무엇에 매력을 느꼈는가?
“제가 시골 태생입니다. 어린 눈에도 농사란 힘겨운 일로 보였어요. 그러나 꽃과 나무들 속에서 산다는 게 참 좋았어요. 시골의 목가적인 정경이랄까, 그런 게 천성에 잘 맞았던 것 같아요. 그러면서 어렴풋하게나마 농부의 꿈이 발아했던 거죠. 중학생 때 치른 적성검사에선 농학 적성 비율이 98%로 나왔어요. 아, 농부가 나의 길이구나, 일찌감치 확신을 품기 시작했죠. 시골의 자연 풍경과 더불어 살 수 있는 농업이 내겐 가장 잘 어울린다는, 가장 좋은 삶일 거라는 끌림이 있었던 겁니다.”
“농부의 꿈을 품고 살았지만 정작 사회생활은 서울에서 했어요.”
“고등학교 졸업 뒤 의심의 여지없이 농대를 선택했고 일본 유학까지 계획했습니다. 그러나 일단 꿈을 접고 서울의 화학 회사에 취직하는 걸로 사회생활에 뛰어들었어요. 처자를 건사하고, 기반을 다져야 했으니까. 10년만 직장생활을 하고 시골로 내려갈 작정이었지만, 20년이 지나고서야 사직을 하고 귀농할 수 있었어요. 여건이 비로소 무르익었다는 판단으로.”
“처음엔 혼자 산골로 들어갔죠? 선발대로 뛰어들어 일단 물정을 익힌 거예요?”
“귀농교육도 받았고, 귀농박람회도 찾아다녔고, 사전에 서울에서 충분히 준비를 해뒀죠. 휴가를 얻어 전국을 돌며 마땅한 귀농지를 물색하기도 했어요. 지리산 자락 하동군 악양이 맘에 들었으나 땅값이 너무 비싸더라고요. ‘귀농의 압구정동’이라 하더군요. 포기했죠. 이후 문경 산북면의 시골 농토와 빈집을 임대해 농사를 짓는 걸로 귀농생활에 돌입했어요. 식구들은 서울에 두고 혼자서 말이죠.”
“차근차근 신중한 수련 과정을 밟으셨구나.”
“단신으로, 초심자로 농사를 한다는 게 예상보다 버거웠어요. 정말 고생했죠. 1식 1찬으로 끼니를 채우며 부지런히 배웠습니다. 살이 쭉쭉 빠지더라고요.(웃음) 그러나 꽤나 시골 물정을 터득할 수 있었죠. 1년쯤의 견습기를 지날 즈음, 마침 이화령 산중에 괜찮은 부지가 나와 매입을 하고 이주, 본격적인 귀농생활로 접어들었어요. 서울의 아파트를 팔고, 식구를 불러들이고, 집을 짓고, 묵정밭을 갈아 농장을 만들고, 그렇게 나름의 공을 들여 꾸려온 게 현재의 모습입니다.”
그의 ‘오래된 미래’는 시골
하 씨 부부가 이화령 기슭에 자리 잡은 건 2013년의 일. 터는 널따랗다. 5000평의 부지를 사들여 3000평을 오미자 농장으로 개발했다.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할 수 있는 첨단 단열공법으로 지은 북유럽식 2층 페시브하우스도 큼직하고 준수하다. 자금력이 수반되지 않고선 엄두를 낼 수 없는 행보렷다.
늘그막까지 우리를 일쑤 끙끙거리게 만드는 것 중의 하나는 돈 문제다. 헐거운 소유로 오히려 진정한 만족을 누리는 도류(道流)도 없지 않지만, 일테면 시골살이에도 단골로 등장하는 난적이 물적 토대의 여하라는 문제이기 십상이다. 하 씨는 이 난적의 농간을 면제받은 것으로 보인다. 숙원의 해결 또는 삶의 질적 지향이라는 문제를 풀기 위해 그의 머리는 민첩하게 움직였으며, 준비는 충실했고, 실천은 적시에 행했다. 광란처럼 기똥차게 치솟은 강남의 아파트를 미련 없이 처분, 그의 ‘오래된 미래’인 시골에 무난한 터전을 장만한 행장은 슬기의 소산일지도. 이제 농사 얘기를 들어볼까. 오미자를 주 작목으로 선택한 이유는 뭘까?
“‘해당 지역의 특산물을 재배하라!’ 귀농교육을 받을 때 자주 들었던 얘기였어요. 합리적인 권장이죠. 이곳 문경의 특산물은 사과와 오미자입니다. 기술 숙달이 필요한 사과 재배는 초보 농부에겐 너무 힘들다 판단해 오미자를 택했어요.”
“약재를 전문으로 하는 어떤 노인께서 제게 권합디다. 구기자와 오미자를 장복하시오! 그 둘의 약성이 탁월하다는 얘기였죠.”
“이왕 농사를 할 바엔 가족들의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작물을 하자, 그렇다면 오미자가 적격이다, 그런 판단도 했습니다. 저나 아내나 서울에선 천식과 알레르기에 시달렸는데 그게 싹 사라졌어요. 맑은 공기, 깨끗한 지하수, 그리고 오미자 덕분이라 봅니다.”
“문경은 오미자 주산지로 널리 알려졌어요. 농가들의 경쟁이 치열하겠죠? 하 선생의 생산물은 어떤 특장이 있죠?”
“무농약 고품질 오미자를 생산하기 위해 나름 노력했습니다. 제대로 된 청정 농산물을 생산하는 게 농사꾼이 할 일이라는 생각을 고수해왔어요. 무엇보다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덜 쓰는 게 요체라 봤고요. 과거의 농사엔 화학비료라는 게 쓰이질 않았어요. 자연과 절기에 순응하는 지혜를 필요로 했을 뿐이죠. 어떤 학자는, 철없는 사람들이 철없는 농산물을 먹어 오히려 심신의 건강을 해친다는 투의 말을 했는데, 경청할 만한 얘기이지 않겠어요?”
“요즘의 농작물은 파종 단계에서부터 농약을 투여하죠. 농약이 아니고서는 생육 자체가 어렵도록 농약 의존도가 심화됐어요. 무농약 농사를 실행할 경우엔 생산량도 매우 낮다죠? 결국은 채산성 악화로 이어지고 말이죠.”
“제가 오미자 농원 3000평을 운영하며 목표치로 잡은 게 연매출 5000만 원입니다. 그러나 아직은 턱없이 미달이에요. 농업 소득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면 생계조차 위태로웠겠죠. 다행히 모아둔 게 좀 있어서 헤쳐 나가고 있어요. 향후 4년쯤 지나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 봅니다만, 무농약 농사란 어떻게 보자면 무모하기 짝이 없는 짓이에요. 생산량은 관행농에 비해 3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가격은 20% 정도를 더 받을 수 있을 뿐이니 사실상 암담한 상황이라는 거.(웃음)”
적막도 즐길 만한 대상
세상에 유쾌하기만 한 직업은 없다. 설사 안정적인 소득이 보장돼도 사람들은 대체로 자신의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한다.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에 나를 쏟아 부을 경우엔 문제가 달라진다. 꿈이 실린 직업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준다. 이상으로 삼은 일에의 몰두가 깊을수록 만족감이 커진다. 하 씨의 경우는? 그는 양양하다. 속사정까지야 깊숙이 들여다볼 길이 없지만 그늘이 없다. 말쑥한 언사로 귀농의 만족감을 표한다. 비록 아직은 형편이 열악하지만 성취감을 느낀다는 게 아닌가.
“아내와 함께 농장의 풀을 손수 뽑아야 하는 일부터 농사의 전 과정은 고됩니다. 일머리가 서툴러 고생도 많았고, 극심한 가뭄으로 한 해 농사에 완전히 실패하기도 했고, 애환이 많은 게 농사예요. 하지만 매번 성취감을 느끼게 하는 것도 농사더라고요. 풀을 뽑고 난 뒤 깨끗해진 농장을 바라볼 때,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라 오르는 오미자 덩굴을 바라볼 때, 붉게 물들어가는 열매를 바라볼 때, 그럴 때마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도 해낸 것처럼 성취감을 톡톡히 맛봐요.”
“예전엔 느끼지 못했던?”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는 주로 머리를 썼어요. 귀농 이후엔 달라졌어요. 몸을 덩달아 최대치로 쓰고 있어요. 그러자 머릿속에 가득했던 욕망이나 욕심이 줄어드는 반면, 몸으로 오감으로 느껴지는 성취감이 자주 찾아오더라고요. 좋다, 참 좋다! 속으로 그렇게 탄성을 내지르는 순간들이 많습니다. 다채로운 자연의 변화와 생동감이 주는 즐거움과 활력은 도시에서는 누릴 수 없는 최상의 가치예요.”
“이곳의 산세는 통쾌하고 수려해요. 하지만 적막강산이에요. 아무리 일에 바쁘다지만, 때로 권태롭진 않을까?”
“삶이란 즐기라고 부여된 것. 일의 노예로 산다면 인생이 지루하겠죠. 낮에는 일하고 해 저무는 하오엔 읍에 나가 테니스를 즐깁니다. 한국화도 배우고, 난타와 색소폰도 교습받아요. 적막? 그 역시 즐길 만한 대상이죠. 언젠가 아내와 둘이 ‘위대한 침묵’이라는 영화를 봤는데 참 좋았어요. 고요한 산중 생활에 깃드는 내적인 평화, 이 역시 귀농을 통해 받은 큰 선물이구나, 아내와 둘이 그런 얘길 나눈 적이 있습니다.”
하 씨의 농사 실적은 아직 시원치 않다. 애당초 귀농 목적을 돈벌이에 두지도 않았다. 가급적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용무를 보고 싶었을 뿐이며, 용무란 농사 그 자체였으며, 마침내 농부로 변신, 결국은 해묵은 꿈을 이룬 셈이다. 그러자 또 하나의 세계가 조용하게 열렸다. 자연과 동행하는 삶의 길이 가지런히 펼쳐지고 있는 것. 이미 유년기에 시골에서 싹 텄을 자연에 관한 감수성이 귀농으로 되살아나 생태계를 존중하고 교감하는 버릇이 몸에 배기 시작한 것.
상쾌한 예화 하나를 볼까? 하 씨 부부는 어느 날 숲에서 꿩 둥지를 발견했다. 둥지 안에는 조르르 알들이 놓여 있었다. 알들의 일부는 깨져 있었다지. 뭔가가 둥지를 건드렸다는 증거였다. 일단 둥지가 노출되면 어미 새는 알들을 더 이상 돌보질 않는다. 그걸 알았던 부부는 읍내로 달려가 사온 부화기에 알들을 고이 길러 날려 보냈다.
“어느 날은 새 한 마리가 유리창에 부딪쳐 나동그라졌어요. 죽었는지 기절했는지 숨을 쉬지 않더라고요. 우리는 서둘러 인공호흡에 나섰어요. 저는 놈의 가슴을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줬고, 아내는 부리를 벌려 빨대를 꽂아 숨을 불어넣었어요. 앗, 그러자 살아나 후루룩 날아가는 게 아니겠어요?”
소소하면서도 짜릿한 감흥을 주는, 동화를 닮은 일화다. 보는 눈이 없더라도 그물에 걸린 어린 고기나 금지 어종을 풀어주는 어부라면, 그는 이미 자유로운 영혼이다. 새 한 마리의 목숨을 남의 일로 여기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는 이미 희귀하게도 잘 사는 사람이다. 나이 들어서도 우리의 이기심이 종종 놓치는 건 공생의 가치이지 않던가.
박원식 소설가 >>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늙음의 기준은 정신적인 면과 육체적인 면으로 나눠볼 수도 있고 이를 적절히 혼합해서 기준을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 주관적이어서 저울 위에 사람을 올려놓고 무게 달듯 늙음을 평가하기는 사실상 어렵다. 같은 나이인데도 동안(童顔)이라 불릴 정도로 어려 보이는 사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동안 유전인자를 갖고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장수(長壽)하지는 않는다. 빨리 늙는 나쁜 습관을 주위 사람들과 필자를 비교해 따져보니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흡연과 음주
흡연은 혈액순환을 방해하고 일산화탄소를 발생시켜 헤모글로빈의 산소 운반을 방해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아는 상식이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도 점점 줄어들고 흡연자에게서 나는 담배 냄새 때문에 가까이 가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분위기를 아는 흡연자의 마음 위축은 상당하다. 음주한 다음 날에는 얼굴이 푸석푸석한 느낌이다. 술에 취하면 말이나 행동에 실수가 뒤따른다. 이럴 때는 관계에서 당당함을 잃는다. 확실히 술과 담배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얼굴에 주름살이 깊고 크다. 윤기도 덜하다. 술과 담배는 몸속의 장기에도 영향을 주어 각종 암이나 질병을 일으켜 빨리 늙게 만든다. 술은 영양가 없이 열량만 높은 음식이다.
과식과 지나친 운동, 그리고 노동
먹은 것을 소화시키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몸속 장기가 혹사를 하는 것이다. 과식은 혈액을 오염시키고 필연적으로 비만을 불러온다, 비만은 염증세포를 양산해 신체 이곳저곳에 염증을 일으킨다.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의 증가를 불러오고 대사증후군도 일으킨다. 특히 시니어의 비만은 행동을 굼뜨게 하고 관절을 약화시킨다. 몸이 무거워 움직이지 않으려 하고 결과적으로 운동 부족으로 이어져 이런저런 신체 고장의 원인이 된다. 비만한 사람은 양질의 수면이 어려워 잠을 자도 피로 해소가 더디다. 마라톤처럼 과격한 운동도 사람을 빨리 늙게 한다. 지나친 육체적 노동 또한 노화를 촉진한다.
피부보호제를 바르지 않는 생활 습관
같은 나이라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사람이 더 늙어 보인다. 공기 맑은 시골에 사는데 왜 나이가 들어 보이는가. 그것은 시골 농부들이 야외에서 일하면서 햇볕에 더 많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자외선 차단제나 피부보습제를 바르지 않는 것도 주름을 만드는 데 일등 공신 역할을 한다.
수원의 공군부대 110대대 라운지에서 근무한 지 몇 개월이 지나서 필자는 사표를 냈다. 공부하려고 백화점 일도 그만두었는데 근무가 끝난 다음에 시간을 갖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양에 차지를 않았다. 그래서 전적으로 공부에만 매달리기로 결심하고 과감하게 일을 포기했다.
그런 다음 새벽에 서둔야학에 가서 혼자서 공부를 했다. 연습림의 새벽 공기는 차다. 그리고 신선하다. 공기가 맑아서인지 머리 또한 맑았다. 도서실에 있는 헌 참고서를 뒤적이며 공부를 했다. 어쩌면 공부가 그렇게도 재미있고 머리에 ‘쏙쏙’ 잘 들어오는지…. 몇 개월 동안 만져보지 못한 책, 그리고 공부에 대한 갈증이 보통 심한 것이 아니었기에 필자는 목마른 사슴 처럼 정신없이 마셨다. 지식이라는 단물을.
오랜만에 책을 잡는 기쁨이 칠년대한에 단비를 만난 듯한 기쁨이었고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한 감격이었다. 공부를 한참 하다가 보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는데 그렇게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해서 그런지 그럴 때도 강한 행복감을 맛보았다.
선생님들이 보시던 것을 혹은 당신 친구들에게 얻어다가 도서실에 마련해주신 각종 참고서가 무엇보다도 요긴하게 쓰였다. 참고서 하나 변변히 사볼 형편이 못 되었던 필자는 야학 도서실에 있는 참고서만을 의존해 공부를 한 것이다.
그즈음 야학 도서실에 있는 책 중에서 우연히 손에 쥐고 보게 된 것이 서머싯 몸의 ‘인간의 굴레’였다. 책을 보던 중 ‘인생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다’라는 구절이 필자의 머릿속으로 전광석화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래 바로 이거야!’
필자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별안간 세상이 밝아지는 느낌이었다.
‘그래 나는 내 나름대로의 무늬를 짜 가면 되는 것이다. 남이 뛰어간다고 초조해하지 말자. 나는 걸어가면 된다. 나는 나 나름대로의 삶의 형태가 있는 것이다.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다. 보다 잘 죽는 것이다. 임종의 침상에서 웃으며 죽을 수 있으면 되는 것이다. 나는 결코 후회 없는 삶을 살았노라 생각하며. 웃자. 밝게 살자. 사물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자. 하루하루 최선을 다하며 살자. 감사하며 살자.’
그렇게 필자 나이 열아홉 살, 그때부터 인생관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남과 비교하며 좌절하고 열등감에 빠지곤 했던 자신이 우습게 생각이 됐다. 더 이상 초조하지도, 괴롭지도 않았다.
‘이젠 웃으며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부터 웃으며 살 수 있었는데 이따금씩 사람들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항상 웃으면서 살아요?’
그러면 그냥 웃었다. 필자의 웃음은 그냥 얻어진 웃음이 아니다. 10대의 혹독한 시련과 모진 아픔 속에서 얻어진 웃음이다.
‘인생은 페르시아의 양탄자다’라는 말의 뜻을 후에 분석해보니 그 당시 필자가 생각했던 의미가 아니었다. 필자는 각자 나름대로의 무늬, 즉 각자의 삶에 의미와 가치가 있다는 의미로 읽었는데, 페르시아의 양탄자 무늬가 아무 의미가 없듯이 인간의 삶도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었다. ‘지구상에 생겨난 그 많은 생물 가운데 하나인 인간에게 의미 따위가 있을 리 없다’는 ‘인생의 허무’에 초점을 맞춘 말이다.
필자가 단단히 오해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소설을 읽고 소화할 때 작가의 의도대로 이해를 하든 오해를 하든 그것이 문제 될 일은 없다고 본다. 무엇이든 얻는 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로 인해 갈등과 의혹에 빠져 있던 필자가 길고 긴 어둠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살아가면서 몰랐던 것을 알게 될 때 기쁘다. 요즘에는 가르치는 데 필요해서 컴퓨터 관련 서적을 보다 보니 참 재미있다. 제자들에게 “어때 공부하기 재미있지?”라고 물으면 “아니요, 재미없어요. 지루해요”라고 대답한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소리는 하나같이 부정적이다. 그럴 때 필자는 이렇게 말한다.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건데요. 불행히도 여러분은 너무 좋은 부모님을 만나 배움에 굶주려본 적이 없으니 그렇게 소중한 기쁨을 느껴 볼 새가 없는 거예요. 공자님도 말씀하셨죠. 인생삼락을. 삶에 있어서 공부하는 즐거움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에요. 가장 감수성이 예민하고 기억력이 왕성한 여러분 나이에 하나라도 더 알아야겠다는 마음가짐이 정말 필요해요. 농부가 봄에 씨를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추수할 것이 없어요. 그렇다면 인생의 봄을 보내고 있는 여러분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질의 풍요를 누리고 있는 요즘 아이들은 배고픈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서러운 일인지 모른다. 특히 배움에 대한 굶주림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도 모른다. 가만히 앉아서 공부하기가 싫어 몸을 뒤트는 제자들을 보면 안타깝다. 그 시간에 청계천 평화시장 한 모퉁이에서는 그들 나이의 봉제공들이 불과 4~5평의 공간에서 먼지를 들이마시며 하루 종일 재봉틀을 돌린다. 밤잠도 제대로 못 자며 중노동에 시달리는 소녀들이 있는 것이다.
교복이 입기 싫어 될 수 있으면 사복을 입으려 하는 제자들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착잡해진다. 교복 입고 학교에 다니는 것이 소원이었던 필자의 어린 시절이 생각나서다. 요즘 아이들은 필요한 것을 요구하기 전에 미리미리 다 채워지니 아쉬울 것이 없다. 부족한 것 없는 아이들이 바라보는 삶과 어려운 항해를 마친 필자가 바라보는 삶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