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외진 산골에 마녀들이 산다. 오순도순 친자매들처럼 정겹게 지낸다. 산골짝 여기저기, 멀거나 가까이에 떨어져서들 살지만 여차하면 만나고 모이고 뭉친다. 모임 전갈이 떨어지면 빗자루를 타고 나는 마녀처럼 모두들 득달같이 달려와 자리를 함께한다. ‘마녀들’이라지만 위험하거나 수상할 게 없는 아줌마들이다. ‘마음씨 예쁜 여자들’, 그걸 줄인 게 ‘마녀들’이라지.
‘마녀들’ 여섯 명은 모두 귀농인이다. 산골에서 산 세월의 길이는 저마다 다르지만 다들 농업을 통해 소득을 올린다. 모임을 제안해 만든 건 된장사업을 하는 임미숙(60) 씨. 지금으로부터 6년 전, 그녀는 귀농 동기인 강성대(70, 명박골 표고버섯) 씨를 왕언니로 해 동아리를 꾸렸다. 임미숙 씨는 도시에서 사업상의 부침을 거듭하다 활로를 찾아 7년 전에 이 산골로 귀농을 했다. 나 이제 욕심을 싹 비우고 살래! 그런 다짐을 하며 어버이처럼 푸근한 시골의 자연 속으로 거침없이 이주했다. 이후 용케도 그녀는 발랄한 또래 아줌마들을 만나 사교를 했다. 마침내 죽이 맞아 단단한 우애를 쌓게 되었다. ‘마녀들’이라는 모임 이름은 그녀의 작명.
“귀농으로 맺어진 우연한 인연이지만 친자매 같은 정을 나누고 지내니 큰 행운이죠. 귀농 직후 저는 갖가지 어려움을 겪었어요. 무엇보다 된장을 만드는 기술도 힘도 부족했어요. 혼자 끙끙거리며 남들 몰래 공부를 하고 실습도 하고 그랬어요. 그러던 중 인근 마을의 또래 아줌마들이 드나들며 일을 도와주었지요. 모두들 귀농 선배들이라 일 외에도 여러모로 배울 게 많았어요. 게다가 살가운 여자들이라 순식간에 정도 들었고요. 그게 ‘마녀들’ 모임의 배경이에요.”
우정이란 고독한 인생을 보완해주는 보약. 소소한 사교 이상의 결속력으로 희로애락을 함께하는 ‘마녀들’ 모임은 시골살이를 한결 생동하게 하는 힘이 돼주었다. 이들이 모이면 일이 벌어진다. 또는 일이 생길 때면 재까닥 모인다. 생일 같은 축일엔 파티를 펼친다. 김천농업기술센터가 개설한 음식연구회에 참여해 함께 요리를 배운다. 귀농 교육생들이 찾아들면 모두 발 벗고 나서 일을 거들거나 팜파티를 펼친다. 농번기엔 일손이 딸려 애를 먹는 곳이 농촌이지만 이들은 끄떡없다. 우르르 자매들의 농장으로 번갈아 달려가 일을 해치운다는 게 아닌가. 품앗이의 귀감이다.
“마녀들 또 뭉쳤네!”
때로 외롭거나 따분할 수 있는 게 산골살림이다. 뒷산 소나무 외엔 불만을 털어놓을 상대가 더 이상은 없는 상황에 빠질 수도 있는 게 귀농생활이다. 하지만 ‘마녀들’은 자기들끼리 알아서 해결한다. 끝없는 수다와 깔깔대는 웃음이 꽃처럼 피어 내부에 웅크렸던 그늘을 헹궈낸다. 멀리 대구로 나가 뮤지컬이나 영화를 즐기기도 하고, 더 먼 곳으로 함께 여행을 떠나기도 한다. 주변 사람들은 탄성을 내지른다지. “어라? 마녀들이 또 뭉쳤네!”
농사란 어쩌면 희한한 방식의 고행. 난다 긴다 하는 고수가 아니고선 실패하기 십상이지 않던가. 그런데 말이다, 놀랍게도 마녀들은 모두 순항하고 있다. 다들 김천 관내에서 손꼽히는 강소농으로 알려졌다. 면면을 볼까? 마녀들 가운데 유일한 독신인 임미숙 씨는 된장사업에 야무지게 매달려 기반을 잡았다. 조현숙(60) 씨는 보리떡을 만들어 기세를 돋운다. 구나윤(58, 삼도봉 천마농장) 씨는 천마 재배로 5억 원의 연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전경정(58, 새송이 청암농장) 씨는 고품질 유기농 새송이버섯을 생산하는 유력 농군으로 부상했다. 양봉으로 꿀을 생산하는 이선화(57, 도마네 꿀집) 씨도 억대농.
화려한 이력들이다. 모든 귀농인들이 사력을 다해 성공을 추구하지만 숫제 물거품이 되는 경우마저 숱하다. 마녀들은 하늘의 자비로운 협찬을 유달리 옹골차게 누렸을까? 그럴 리가. 그들은 남들보다 더 분발하고 남들보다 더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고서도 참담하게 무너지기도 했다. 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바닥을 친 그 좌절의 힘으로 다시 튀어 올랐다. 인생이란 실로 역전과 반전의 드라마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얘길 들어볼까.
구나윤 “천마 재배 이전에 다른 작물을 다양하게 재배했어요. 하지만 실패만 거듭했죠. 가지고 있던 자금을 다 털어먹고 빚만 잔뜩 남았을 때 실의 속에서 착안한 게 천마 재배였어요. 그러나 이마저 뜻대로 되질 않았어요. 복잡한 재배와 생산 과정을 숙달하고서도 판로가 여의치 않더라고요. 게다가 값싼 중국산마저 마구 밀려들었고요. 그러나 끈질기게 한 우물을 파겠다는 신념으로 포기하지 않았어요. 초기엔 한 해 빚만 1억 원에 달할 정도로 큰 실패를 봤지만 무심한 하늘을 원망하는 것으로 실의를 털고 다시 일어서야만 했어요.”
전경정 “저는 귀농 1세대에 속해요. 원래 시골을 좋아했기에, 시골에 사는 게 꿈이었기에, 귀농에 만족했어요. 하지만 농업이란 정말 만만치 않았어요. 본격적으로 새송이버섯 재배에 나선 게 10년 전이었는데 처음엔 고전의 연속이었죠. 모든 재산이 경매로 사라지는 곤경에 처하기도 했어요. 벼랑 끝까지 몰렸던 셈이죠.”
구나윤 “저희 농장의 문제는 판로에 있었지요. 제아무리 고품질 천마를 생산한다 하더라도 안정적인 판로를 구축하지 못하면 헛수고에 그치고 말아요. 그래서 인터넷 마케팅에 주력했고, 그건 매우 정확한 타깃이었어요. 현재 인터넷 단골 고객만 600여 명에 달해요.”
전경정 “한순간에 부도가 나자 주변 사람들이 말도 안 걸더라고요. 배척하는 그 분위기, 참 서글펐어요. 급기야 제가 간암 판정을 받는 상황까지 맞이했어요. 제대로 잘 살아보기 위해 귀농을 했는데 죽을병에 걸리다니…. 금전적 압박이 중병을 가져온 것인데 의지로 떨쳐야만 했어요. 암 치료 중에 부단히 운동을 하고, 모든 현실을 받아들여 순응을 하고 긍정심을 키우고…. 그런 노력 덕분에 건강을 회복할 수 있었어요. 버섯 재배에도 더 각별한 공을 들였어요. 남편과 함께 새벽까지 농장에서 불을 밝히고 일했어요. 그 결과 5년 전부터 빛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지금은 안정적인 운영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아요. 저 들에 핀 꿋꿋한 풀꽃처럼.”
고진(苦盡)의 짝꿍은 감래(甘來)
하늘엔 때로 느닷없는 비구름이 엉기고, 인간사엔 자주 우환이 끼어든다. 하지만 지구상의 가장 강인한 생물에 속할 인간은 때로 무적함대처럼 용맹하다. 운세를 경영하는 촉이 살아 있을 경우 우환이라는 놈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귀농으로 고진감래의 여정을 연수한 두 ‘마녀’의 술회엔 가슴을 파고드는 감명이 서려 있다. 뜬구름처럼 덧없는 게 인간사라지만, 어떤 상황에서고 할 일을 능히 찾아 치열히 행하고 볼 일이렷다.
농사 혹은 돈벌이만이 마녀들의 본분사는 아니다. 심혼을 촉촉이 적시는 정서적 만족감이 있어야 생이 즐거울 게 아닌가. 젊지도 늙지도 않은 어간에 이른 이 아줌마들이 갈구하는 건 즐거운 나날들의 지속일 테지. 그 어엿한 지향을 실현하기 위해 귀농을 택했고, 시골은 그녀들에게 응분의 선물을 주었다.
임미숙 “여자 혼자 사는 제 입장에선 일 자체가 매우 힘들어요. 하지만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살 수 있는 게 시골생활이에요. 마녀들끼리 서로 돕고 의지하고 격려하며 지내는 일에서도 커다란 보람과 즐거움을 느낍니다. 흔히들 시골엔 문화 여건이 열악한 걸로 알지만 사실과 달라요. 가령 김천농업센터만 해도 다양한 문화강좌가 개설돼 있어요. 저는 그곳에서 우쿨렐레와 천연염색을 배웠어요. 제과제빵 기술도 배웠고, 한식요리사 자격증도 땄어요.”
이선화 “시골생활 초기엔 모든 게 힘들었어요. 그러나 원래 허약 체질이었던 몸과 마음이 온전히 건강해졌는데요, 우선은 거짓말 없는 자연에 마음을 두고 산 덕분이라 봐요. 잔바람에 흔들리는 들꽃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하늘과 구름과 달과도 대화가 되는 기분이에요. 저희 부부는 이동 양봉을 합니다. 철 따라 꽃 따라 산천을 찾아다니는 일이 얼마나 만족스러운지 모르겠어요. 제가 사실은 현대판 집시여인이에요.(웃음) 꽃이 좋아 꽃을 따라 늘 여행하는 여자라는 거.”
구나윤 “처음엔 시골이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어요. 새벽부터 동동거리며 수많은 일들을 해야 했으니까요. 머리가 돌아버릴 지경이었죠. 몸은 망가지고, 부채만 쌓이고, 화병이 생기고, 참 문제가 많았던 시절이 길었어요. 그때를 생각하면, 누군가 귀농을 한다면 뜯어말리고 싶을 지경이에요. 하지만 시련기가 지나고선 서서히 안도와 행복을 느꼈어요. 판로를 구축해 천마 판매에 탄력을 붙이면서였어요. 나름의 부를 일굴 수 있었던 덕이죠. 이젠 하고 싶은 일들을 하며 삽니다. 사고 싶은 것 사고, 가고 싶은 곳 가고, 먹고 싶은 것 먹고…. 거의 맨날 붙어 지내는 남편과는 충돌이 많지만, 그동안 꾹 참고 살았지만 이젠 눌려 살진 않을 거예요. 밥을 찾아 먹거나 말거나.(웃음)”
전경정 “시골이 싫다는 여성이 많지만 저는 참 좋아요. 그래서 촌스럽게 생겼을까?(웃음) 마음도 촌스러워요. 주변 산과 꽃의 경이로움을 사진에 담는 일이 참 즐거워요. 그보다 좋은 건 ‘마녀’ 언니들과 어울리는 일이에요. 제겐 원래 언니가 없어서 이 언니들에게 더 기대는지도 몰라요. 음, 농사란 좋은 직업이라 봅니다. 생명공학도라 할까? 농부는 항상 자기개발을 하는 사람이라 봐야 할 거 같아요.”
인사만 잘해도 탈날 일 없어
수많은 인구가 넘실거리는 도시에서, 사람들은 대체로 타인을 골똘히 주시하지 않는다. 피차 피곤할 수 있는 간섭을 가급적 자제한다. 그러나 시골에선 다르다. 마을 인구가 워낙 적기에 이웃에게 자연스레 관심이 쏠린다. 게다가 마을 나름의 질서와 풍습을 고수하는 보수적 성향이 강하다. 누군가가 귀촌을 했다면, 그는 이삿짐을 푸는 첫날부터 무대에 오른 것과 다를 바 없는 상황에 놓인다. 입길에 오른다. 야무지고도 건실한 마녀들, 이들은 원주민과의 융화에 애로를 느끼진 않았을까. 들어보자.
구나윤 “시골분들이 합리적이진 않을지라도 자연스럽게 물들며 살아왔어요. 가령, 모처럼 치장 좀 하고 외출할 경우, 저걸 옷이라고 입고 다니느냐는 투의 손가락질을 당할 수도 있어요. 지나친 참견이죠. 하지만 귀농인들이 조심하며 지내는 게 상책이라 봐요.”
임미숙 “간섭으로 들릴 수 있는 얘기들을 간섭으로 듣지 않으면 돼요. 그냥 하는 소리니까요. 재치 있게 받아넘기는 게 필요하고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사만 잘해도 탈날 게 없어요.”
전경정 “시골에 와서 가장 힘들었던 건 이웃들과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일이었어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적극 노력을 했어요. 저희 남편은 마을의 초상집을 찾아다니며 시신까지 만졌어요.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죠. 이웃과 어울리지 못하면, 결국 도시로 돌아가야 하는 낭패를 볼 수도 있어요.”
마을 전체를 내 집으로, 마을 주민 모두를 내 가족으로 생각한다면 실패할 일이 없겠지. 그게 쉽겠냐마는 마을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선 설 길이 없다. ‘마녀들’처럼, 우정과 공감에 찬 동아리를 만든다면 한결 든든할 테고.
소설가 박원식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검정고무신, 아이스께끼, 초가지붕, 푸세식 화장실…. 지금은 까마득한 시절의 우리나라 풍경을 오롯이 기억하는 사람.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한국을 방문한 스물한 살 청년은 소와 함께 밭을 갈고, 어른을 공경하며 사는 순박한 사람들의 나라가 무작정 좋았다. 미국으로 돌아간 뒤에도 어떻게 하면 한국에 가서 살 수 있을까 궁리하는 날이 많았다. 그리고 마침내 40대에 그 소원을 이뤘다. 그가 사는 동네에서는 ‘엉클 밥’으로 불리는,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 로버트 그라프(Robert Graff·70) 교수의 이야기다.
그라프 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은 주말 나들이객들과 벌초 성묘객들이 몰고 나온 차들로 빼곡했다. 4시간여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강릉 허균·허난설헌 기념관 쪽으로 들어서자 ‘엉클 밥’ 간판이 걸린 카페가 모습을 드러냈다.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2층 건물은 초록 논밭을 배경으로 우뚝 서 있었다. 무더위와 막 헤어지고 온 초가을 바람이 살랑대는 오후였다. 대전에 있는 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주말에만 강릉에 와 있다는 그는 카페테라스에서 중학생과 마주앉아 있었다.
“우리 동네에 사는 학생인데 제가 올라오는 날 영어를 가르쳐주기로 약속을 했어요. 배운 지 이제 일주일 됐는데 아주 잘하고 있어요. 인터뷰할 때 통역 좀 해보라 할까요?(웃음)”
그가 장난치듯 말하자 학생은 당황한 듯 손을 내저으며 쑥스럽게 웃었다. 안 그래도 평창올림픽 때 외국 관광객을 상대해야 하는 택시 기사들에게 무료로 영어 회화를 가르쳐 신문과 방송에도 소개됐던 그는 여전히 더불어 사는 삶을 실천하고 있었다.
“2007년도에 아내 고향인 강릉으로 이사 왔어요. 평창올림픽 개최를 2년쯤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시청 공무원이 택시 기사분들께 영어 좀 가르쳐줄 수 있겠냐면서 도움을 요청해왔어요. 강릉 시민으로서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어 흔쾌히 수락했죠. 터미널이나 역에 내린 외국인들이 처음 상대하는 사람들은 택시 기사예요. 그분들이 강릉의 얼굴인 셈이죠. 그래서 영어로 하는 대화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회화 교실에서 공부를 시작한 뒤 기사분들이 많이 달라졌어요. 그동안은 외국인을 만나면 대화가 안 돼 태울까 말까 망설였는데 이제는 당황하지 않고 ‘Hello, welcome to 강릉!’ 하면서 인사 몇 마디 나눌 정도는 됐다고들 말해요.”
마을 사랑방이 된 ‘엉클 밥’ 카페
영어 회화 교실은 지금도 일주일에 두 번씩 그의 카페에서 열린다. 여러 상황에 대비한 표현들을 배우는 시간이다. 자주 만나 공부하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친해져서 이젠 가족 같은 사이가 됐다. 맛있는 음식이 있으면 함께 나눠 먹고 술도 한잔씩 마시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카페를 연 지는 3년 정도 되어갑니다. 2층 집을 짓고 나서 1층을 우리 부부 놀이터로 만들었는데 주변에서 그러지 말고 커피도 한번 팔아보라 해서 시작했어요.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누구든 편하게 와서 쉬었다 가는 공간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커피가 팔리든 말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그는 카페 창문에 페인트마카로 크게 써놓은 글을 보여준다. ‘It’s not the coffee. It’s the people’. 아침에 일어나 카페에 내려올 때마다 한 번씩 쳐다보기 위해 써놨다는 글이란다. 들여다보니 커피보다는 사.람.에 방점이 찍혀 있다. 누구에게나 첫 마음을 잃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는 시절이 있듯 강릉에서의 그의 삶도 그러해 보였다.
‘엉클 밥’은 그의 애칭. 동네 사람들은 그를 ‘밥 아저씨’라 부른다. 카페 이름도 ‘엉클 밥’으로 지은 걸 보면 자신의 애칭이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그가 대전에서 강의를 마치고 올라오는 주말에는 카페 주차장이 시끌벅적하다. 영어를 배우는 택시 기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모여들기 때문이다. 그렇게 엉클 밥 카페는 어느새 동네 사랑방으로 바뀐다.
소가 밭 갈던 풍경이 그립다
젊은 시절, 그의 한국 사랑은 특별했다. 1969년 미8군 장병으로 처음 한국 땅을 밟은 그는 이 나라가 마치 오래된 고향처럼 편안했다.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겪은 가난한 나라였지만 헐벗고 가난한 모습보다는 아름다운 경치와 순박한 사람들의 얼굴이 더 많이 다가왔다. 특히 마을에서 뛰어 노는 아이들 모습에서 한없는 평화를 느꼈다.
“농기계가 없어 소와 함께 밭을 갈던 농부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나요. 농부는 힘들었겠지만 제게는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경이었어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른이 차에 오르면 자리를 양보하던 젊은이들 모습도 인상적이었고요. 예절을 중시하고 어른을 공경하는 한국 문화가 좋았어요. 제가 살던 미국에는 그렇게 깊고 오래된 문화가 없거든요.”
1년간 짧은 사병 생활을 마친 후 미국으로 돌아간 그는 평화봉사단을 통해 다시 한국을 방문한다.
“처음에는 정부가 가라 해서 한국에 왔지만 그다음부터는 자발적으로, 제 의지로 왔어요. 더 오래 머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고, 다시 가고 싶었어요. 방법을 고민하다가 평화봉사단을 생각해냈어요. 제대 후 대학교에 있던 평화봉사단을 찾아가 한국에 갈 기회가 있냐고 물었지요. 인연이 되려고 그랬는지 3개월 후에 그럴 계획이 있다 하더군요. 당장 단원 가입을 했죠.”
다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는 전라도 영광, 광주 지역에서 3년여 봉사활동을 했다. 한국말은 이때 많이 배웠다. 이제 막 일흔을 넘긴 그는 시간여행을 하듯 20대 시절로 돌아가더니 하숙집 이야기, 맥주 마시러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갔던 일, 어니언스·펄 시스터즈·김추자·서유석 등 가수 이름들을 줄줄 꿰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영광읍에서 공무원인 하숙생과 친하게 지냈어요. 가수 최희준의 노래 ‘하숙생’을 같이 불렀던 기억도 나네요. 어디서든 노인을 공경하고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가족들이 많았어요. 닮고 싶은 모습이었어요. 물론 불편한 점도 있기는 했죠. 그때는 한국에 가정용 냉장고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맥주가 마시고 싶으면 아이스께끼 파는 가게로 가야 했어요. 거기는 제법 큰 냉장고가 있었거든요. 푸세식 화장실도 경험했지요. 냄새도 나고 낯설었지요. 그때 새마을운동도 한창이었는데 초가와 기와집이 없어져서 저는 너무 섭섭했어요.”
결혼, 그리고 귀화
그 후로도 한국에 대한 그의 관심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미네소타 주립대학교 MBA 과정을 마치고 은행에서 일하던 그는 휴가 때마다 자비를 들여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자신의 업무와 관련된 기업을 찾아다니며 한국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운 좋게 1994년 광주은행 IT 보안 업무를 맡아 들어왔다가 삼일회계법인에서 IT 매니지먼트 일을 담당하게 된다. 드디어 그의 바람대로 한국에서 직장을 얻어 살게 된 것이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유학생 소개로 아내를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최화순(66) 씨는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상하게 측은지심이 밀려왔다고 했다. 그 마음이 부부의 인연으로 이어질지는 당시엔 그녀도 몰랐을 터.
“남편 키가 너무 커서 깜짝 놀랐어요. 197cm였거든요. 그렇게나 큰 키에 테가 굵은 안경을 쓰고 있는 남자를 한번 상상해보세요. 왠지 쓸쓸해 보였어요. 남편은 화가 나도 내색을 잘 안 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주 작은 일에는 엄청 기뻐하고 크게 웃더라고요. 작은 것들을 참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죠. 그때부터 저 사람이 좋았어요.”
이들 부부는 지금도 여전히 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하지만 가끔 네 나라, 내 나라 하면서 부부싸움을 하기도 한단다.
“최근 남편이 TV를 보면서 요즘 왜 그렇게 먹는 프로그램이 많은지 모르겠다면서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하더라고요. 제가 애국자는 아니지만 우리나라를 비판하면 은근히 화가 나더군요. ‘하도 가난해서 못 먹던 시절이 있어서 그런다, 그런 당신네 나라는 뭐가 그리 대단하냐’ 하면서 다툽니다. 제가 거의 일방적으로 떠들지만요.(웃음)”
그라프 교수가 한국말이 유창하지 못해 애를 먹은 적도 있다.
“어느 날 몸이 아프다 해서 약국에 가서 소염제를 사 먹으라 했는데 수면제를 받아가지고 온 거예요. 기겁을 했지요. 남편은 분명 소염제라 말했을 거예요.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 약사가 잘못 알아들었던 것 같아요. 그 후로 큰일 나겠다 싶어서 꼭 함께 다녔어요. 지금은 혼자 다녀도 문제없지만요.”
그는 현재 대전에 위치한 솔브릿지 국제경영대학교에서 IT 관련 비즈니스 강의를 하고 있다. 강릉에선 동네 아저씨처럼 푸근한 인상이지만 학교에 가면 학생들에게 “여기 놀러 왔냐, 배수의 진을 치고 공부하라”고 호통을 치기도 한다.
2007년 삼일회계법인에서 퇴직한 후 한국인으로 귀화한 그에게 그동안 향수병은 없었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괜한 질문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로움이란 심리적 거리의 문제이지 물리적 거리에서 오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는 한국 땅을 처음 밟았을 때, 마치 오래 떠나 있었던 고향에 돌아온 것 같았던 그 기분을 강릉에서도 느끼고 있다고 말했다.
“도시 사람들은 늘 바쁘고 옷, 백화점, 돈, 물건에 관심이 많은데 강릉 분위기는 좀 다릅니다. 도시에서는 길에서 서로 눈 마주치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나 여기서는 인사도 하고 손도 잡습니다. 오래전 한국의 시골에서 봤던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들을 다시 만나고 있습니다.”
그를 만나고 돌아왔을 때 한 통의 메일이 와 있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또 오면 즐겁게 쉬다 가셔요.” 이웃에 대한 관심과 나눔. 이것이 엉클 밥, 로버트 그라프 교수가 한국을 사랑하는 방식이다. 그가 이웃과 만들어내는 공명(共鳴)이 더 멀리 울려 퍼질 것 같다.
나의 위대한 생태텃밭 (샐리 진 커닝햄 저ㆍ들녘)
들녘의 59번째 귀농총서. 유기농 텃밭 농부이자 원예 전문가,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인 샐리 진 커닝햄이 수십 년간 경험한 텃밭 가꾸기 노하우를 담았다. 방대한 이론을 섭렵하며 수많은 실험을 거듭한 저자는 “텃밭 농부가 할 일은 자연이 일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는 ‘화학물질 제로’를 달성해낸 ‘생태텃밭 농법’을 소개한다. 책에는 자연과 함께 텃밭을 가꾸는 구체적인 방법들이 나와 있다. 올해 농촌진흥청이 발표한 ‘동반식물 재배법’과 같이, 함께 심으면 더 잘 자라는 이웃 식물들을 소개한다. 나아가 텃밭 대표 작물 32종의 가족 식물, 이웃 식물 목록을 정리하고, 자세한 재배법과 흔히 발생하는 문제와 해결책까지 다뤘다. 텃밭에 도움이 되는 익충 31종의 생김새와 생활주기, 발견 장소, 유익성, 소환 방법 등을 소개한 것이 특징이다. 더불어 조심해야 할 해충 12종도 방제법과 함께 보여준다. 초보 농부에게 도움이 되는 단계별, 시기별 텃밭 농사 비법도 전수한다. 가장 기초적인 흙 돌보기 단계부터 수확 방법, 다음 농사 준비 단계까지 자세히 담았다. 저자가 직접 자신의 텃밭에서 촬영한 사진들과 그림 자료를 활용해 이해를 돕는다.
아흔일곱 번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이옥남 저ㆍ양철북)
강원도 양양 송천 마을에 사는 이옥남 할머니가 1987년부터 2018년까지 쓴 일기 중 151편을 골라 엮었다. 자연과 어우러진 농가의 사계절과 저자의 일상이 정겹게 그려진다. 30년 넘게 현재까지 이어오는 일기 속 평범하고도 소박한 이야기가 잔잔한 위로를 건넨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 산사 순례 (유홍준 저ㆍ창비)
올해 6월 우리 산사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것을 기념해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에 실렸던 남한의 산사 20여 곳과 북한의 산사 2곳을 꼽아 소개한다. 가을을 맞아 산을 찾는 등산객들에게 우리 산사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친절한 안내서 역할을 한다.
노년에 대하여 (윌 듀런트 저ㆍ민음사)
‘철학 이야기’, ‘문명 이야기’ 등으로 이름을 알리며 퓰리처상을 받은 역사가 윌 듀런트의 마지막 원고다. 삶과 죽음, 청춘과 노년, 신과 도덕, 전쟁과 정치 등 인생에서 마주하는 20여 가지 문제를 다룬다. 삶의 의미를 탐색하는 동시에 정제된 저자의 사유를 엿볼 수 있다.
실용치즈전서 (배인휴 저ㆍ유한문화사)
배인휴 국립순천대학교 명예교수가 1982년부터 유가공학연구실을 운영하며 모은 치즈 관련 자료와 치즈 산업 현장 경험이 640여 페이지 분량의 책 한 권에 담겼다. 다양한 치즈 제조 과정을 알기 쉽게 정리해 낙농가 농민들과 치즈 입문자들에게도 유용하다.
“붉고 통통한 볼에 눈이 맑은 여자 같은 술이여!” 한산 소곡주에 취한 그가 감흥에 못 이겨 한밤중 끼적였다는 한마디다. 주선(酒仙) 이백이 그 모습을 봤다면 그냥 가지 못하고 배틀 한번 붙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어쩌다 술 향을 맡았다가 낯선 길로 들어섰다는 허시명(56) 씨. 우리 술 찾아 20여 년간 유랑하듯 전국을 떠돌더니 어느 날 술 얘기 좀 해볼 때가 됐다며 막걸리학교를 열었다.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술 인문학 바람의 신호탄이었다.
술 기행 떠났다가 아예 술 평론가가 되어버렸다는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 술과 함께하는 삶을살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해봤다고 한다. 우리 술과의 인연은 기자생활을 그만두면서부터 시작됐다.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나와 당시 우리나라 최고 인문 사회 교양지였던 ‘샘이 깊은 물’에 입사해 글을 쓰던 그는 5년 만에 사표를 쓰고 나온다. 기자들이 만든 노동조합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사직을 결심한 것이다. 이후 주요 일간지와 잡지 등에 글을 기고하며 여행 작가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양조장에서 우리 술 빚는 장인들을 만난 것도 그 무렵이었다. 곰삭은 옛 문화를 발견하고, 더러는 불운했던 역사를 들여다보며 그는 우리 술 이야기를 써나갔다. 그렇게 해서 출간된 술 관련 책만 벌써 네 권.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중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 들어가 고문헌의 기록들을 뒤지더니 2005년에는 우리 술 원형을 찾아 일본 유학까지 감행한다.
“글 쓰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들여다보는 사람입니다. 어느 날 여행지에서 만난 양조장에 들렀다가 평생을 우리 술에 바친 장인을 만났어요. 그분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술을 한 잔 마셨는데 한 편의 글이 저절로 써지더라고요. 그 뒤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니며 술 기행을 시작했죠. 지금도 한 달에 한두 번은 술 찾아 떠납니다.”
우리 술, 인문학적 접근이 필요할 때
주당천리. 그가 자신의 술 기행을 빗대어 표현한 말이다. 처음에는 먹고살기 위해 글을 썼다면 나중에는 돌아오는 길을 잊거나 잃어버린 채 썼다. 가끔은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여기가 어디지?’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그러나 술이라는 놈은 알면 알수록, 옛 주당들의 흔적을 발견하면 할수록 더 빠져들게 했다. 주당천리를 돌고 나자, 우리 술이 기록해온 유무형의 길들을 인문학적 이해 없이 제조·기술자·소비자 구도로만 인식해온 현실도 아쉬웠다.
“좋은 술에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렇게나 많은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술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서는 궁금해하지 않는 것이 의아합니다. 술 마시고 사고 친 얘기는 해도 술 빚은 사람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잖아요. 그래서 막걸리학교를 만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수백 개의 양조장이 있고 그곳에서 만든 막걸리 맛은 다 다릅니다. 그런데도 ‘막걸리 맛이 거기서 거기지’라고 생각하죠. 이제는 인식을 바꿀 때가 됐습니다. 내 입맛에 맞는 막걸리, 차별화된 막걸리, 새 막걸리를 찾아 마시며 그 맛을 품평해봐야 해요.”
술 기행하면서 물 좋고 공기 좋은 곳에서 빚어낸 다양한 술을 맛본 후 그는 우리나라 술 문화에 대한 고민이 더 깊어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맛과 향기를 느끼기보다는 ‘부어라 마셔라’ 하는 분위기 속에서 마십니다. 술이 내 몸에서 어떤 반응을 일으키는지 관찰하는 사람들도 거의 없고요. 음식들의 순환 사이클에 대해 잘 모르는 거지요. 젊은이들에게 음주법 가르쳐주는 프로그램도 없어요. 술 마실 나이 됐으니 너희들이 알아서 마셔라 하는 상황이죠. 그러면 어른들은 제대로 마실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취하면 누구라도 미투 대상이 될 수 있어요. 이게 우리의 술 문화 현실입니다. 술은 마시고 취하면 사고나 치는 음식이라며 부정적으로 인식돼왔고 가능하면 언급하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해왔던 것 같습니다. 술의 긍정적인 면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은 거의 없었다는 얘기죠. 그러나 앞으로도 우리가 술과 공존해야 한다면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야 하지 않을까요? 바로 이 부분이 저의 도전 욕구를 자극했습니다. 제대로 한번 장을 마련해 그 역할을 해보려 합니다.”
우리 술의 유통과 판매도 인문학적 관점에서 본격적으로 들여다봐야 제대로 진단할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현대의 술은 대양을 가로지르는 항공모함이 되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술이 자기 존재를 알리려면 자본이나 광고의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술에 담긴 문화의 힘이 있으면 순항할 수 있다고 봐요. 모든 술이 함선일 필요는 없습니다. 더러는 쪽배가 되기도 하고 나룻배가 되는 것도 괜찮습니다.”
수강생들로 북적이는 ‘막걸리학교’
그가 쓴 첫 막걸리 책 ‘막걸리, 넌 누구냐?’를 읽고 허영만 만화가는 “이제야 비로소 막걸리 종주국의 체면이 서게 됐다”고 말했다. 전통주의 문화와 역사를 기록하느라 그가 공을 들인 시간과 노력과 실천이 우리 술의 자존심을 세우는 일이기도 했음을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2009년에 문을 연 막걸리학교는 이러한 면에서 볼 때 하나의 결실이다. 개교한 지 벌써 10년이 다 되어간다. 삼청동에 있던 학교는 1년 전 남산으로 이사를 해 39기 수강생을 모집하고 있다. 그동안 졸업한 학생이 2000명을 훌쩍 넘는다 하니 이런 열풍도 드물다.
“1기생 모집 때는 이틀 만에 수강생이 다 차더니 2기 때는 단 몇 분 만에 마감이 되어 얼떨떨했습니다. 해외에서도 강의를 들으러 오는 사람이 있어, 우리 막걸리가 이렇게 인기가 많았나 하고 놀랐어요. 지금도 수강생이 만원이라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합니다. 그만큼 술 교육에 목이 말랐던 모양입니다. 프로그램은 주로 전통주 시음, 술과 관련한 인문학 강좌, 술 빚기 강좌, 하우스 막걸리 창업 강좌, 우리 술 해설사 강좌 등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먼 지역에 계신 분들을 생각해 2013년에는 부산 분교도 열었습니다.”
허 교장은 남주북병(南酒北餠, 서울의 남촌은 술맛이 좋고 북촌은 떡 맛이 좋다 하여 이르던 말) 이야기를 해주며 스토리가 있는 남산 막걸리의 시대를 열고 싶다고 했다. 인문학 체험 공동체에 대한 열망도 컸다.
막걸리학교에선 술 마시며 토론하는 수업시간이 인기다. 생막걸리와 살균막걸리, 전통막걸리와 개량막걸리 등 다양한 막걸리를 통해 지금까지는 몰랐던 맛들을 경험한다. 색상, 탁도, 향기, 첫맛, 뒷맛 등을 꼼꼼하게 비교 분석해보는 시간이다. 그러나 술에 사로잡혀 비틀대거나 주정이라도 부리면 바로 퇴학 조치가 내려진다니 아무리 흥에 겨워도 경거망동은 금물이다.
시니어와 막걸리의 아름다운 동거
젊은 사람들도 막걸리에 대한 관심이 있지만 역시 은퇴를 앞두고 있거나 막 은퇴한 사람들이 막걸리학교의 큰 고객이다. 특히 귀농·귀촌을 준비하는 사람들은 더 열심히 공부한다. 시골에서 노동의 기쁨을 누리며 우리 술을 빚어보겠다는 사람도 있고, 수익을 얻기 위해 막걸리 사업을 구상하는 사람도 있다. 요즘은 하우스 막걸리 제조가 가능해 막걸리 프로젝트를 실천하는 사람도 꽤 있다. 허 교장은 막걸리 교육을 받고 장인의 경지로 깊어지든, 벗들과 나눠 마실 술을 소박하게 빚든 둘 다 괜찮은 공부라 말한다.
“대학 교수, 신문사 기자, 음식점 주인, 직장인, 농부, 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하시는 일들이 정말 다양해요. 나이도 그렇고요. 이번에 75세 어르신이 오셨는데 친구랑 같이 공부하러 왔다면서 ‘우리 나이 합치면 150이야, 쉿 이건 비밀이야’ 하셨어요. 술 빚어 친구들하고 나눠 먹으려 배우러 왔다는 말씀에 ‘선생님, 참 건강하시네요. 일흔이 넘어 마시고 싶은 술이 있다는 거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운동 열심히 해서 오래오래 건강 지키셔야 해요’라고 응원해드렸어요. 건강을 잃으면 좋아하는 술도 못 먹게 돼요. 저는 수강생들과 술 기행 가면 ‘술 한 잔에 1km!’ 하고 무조건 걸으라 합니다.(웃음)”
그러고 보니 그의 주량이 슬쩍 궁금해졌다. 막걸리학교 교장이라는 직함에 어울릴 만큼의 만만치 않은 주량이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친구들에 비하면 약해요. 같이 대화를 하는 게 좋아 한 잔씩 하는 정도죠. 대학에 들어와 마시기 시작했으니 고등학교 친구들은 제가 술 마시는 줄도 모를 걸요. 말술 마시는 술꾼이었다면 살아 있지 못했을 겁니다. 지금 하는 일이 그렇잖아요. 매일 소량이라도 술을 마시게 돼요. 저는 술맛을 느끼고 평가하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에 과음은 하지 않습니다.”
술꾼만이 술맛을 알 것이라는 통념을 보기 좋게 무너뜨린다. 그는 수강생들에게 술을 마실 때는 술맛과 향기를 제대로 감상할 것을 강조한다. 수업시간에 “당신이 가진 언어로 가장 길게 이 술맛을 표현해보라”고 주문하는 것은 후각과 미각 능력을 길러주기 위한 훈련이다. 술 한 잔 앞에 놓고 대숲 소리를 듣고, 달과 대화를 나누고, 국화 향 속에 흠뻑 젖어버렸던 옛 주당들의 풍류가 새삼 부럽다. 가끔 월하독작(月下獨酌)의 흉내라도 내어봐야 할까? 혼술 시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다.
“우리 사회는 혼자 술을 마시면 알코올 중독자나 노숙자 혹은 술꾼 취급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고의 술은 독작(獨酌)이라는 말도 있지요. 자기 삶을 들여다보며 내면을 관찰하는 시간이 된다면 그게 바로 혼술의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 시간 넘게 우리 술에 대해 묻고 대답을 듣고 나니 마치 대숲 바람 부는 양조장에서 백발의 장인이 빚은 탁주 한 사발 시원하게 마시고 온 기분이다. “술에 대해 논하려면 입으로 마시고 가슴으로 하라”는 그의 말이 오래 발효하는 시간들이다.
꽃에서, 어떤 이는 생명의 환희를 본다. 어떤 이는 상처 어린 역정을 느낀다. 원주 백운산 자락 용수골로 귀농한 김용길(67) 씨의 눈은 다른 걸 본다. 꽃을 ‘자연의 문지방’이라 읽는다. 꽃을 애호하는 감수성이 자연과 어울리는 삶 또는 자연스러운 시골살이의 가장 믿을 만한 밑천이란다. 꽃을, 자연을, 마치 형제처럼 사랑하는 정서부터 기르시오! 귀촌·귀농 희망자들에게 전하는 김 씨의 메시지란 대략 그렇다.
김용길 씨는 산수경관 기차게 삼삼한 곳에 산다. 도시의 ‘난리 블루스’를 뒤로 하고 이곳에 들어온 건 10여 년 전. 비유컨대, 그간 적응하고 생존하느라 코피를 닷 말쯤 쏟은 것 같다. 하지만 이를 악물어 견디고 버티고 솟구쳐 씽씽한 활로를 찾았다. 성취한 게 많다. ‘성공한 귀농인’이라 소문났다. 처음 이 산중에 입장할 때 김 씨 내외는 빈손이었다. 아니, 빈손 정도가 아니라 서럽게도 빚 얻어 귀농했다. 이 얘기는 좀 있다 하기로 하고, 흠, 그가 자주 입길에 올리는 꽃 얘기부터 들어볼까?
“가령, 어젯밤 제 농장에 강도란 놈이 숨어들었다 칩시다. 숨고 보니 꽃들이 지천이지 않겠어요? 문득 놀랍지 않겠어요? 그 순간 강도의 가슴엔 천사 같은 생각이 밀려들 겁니다. 꽃의 위력이 이와 같아요. 제가 여길 와 마당에 꽃양귀비를 잔뜩 심었어요. 그걸 싹눈으로 해 ‘용수골 꽃양귀비 축제’라는 마을 제전으로 발전시켰어요. 축제 땐 인파가 넘칩니다. 마을의 농산물 판매에 효자 노릇을 하고 있어요. 꽃으로 거둘 수 있는 홍보 효과, 경제 효과가 이처럼 커요. 그 무엇에 앞서 꽃으로 대변되는 자연에 관한 사랑, 자연이 몸에 붙은 체질, 이런 게 있어야 시골생활을 진정으로 영위할 수 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꽃을, 자연을, 그것들의 본받을 만한 힘과 미덕을 얘기하는 이 사람은 군인 출신이다. 육사를 나온 그는 군에서 말처럼 내달렸다. 보안사(현 기무사)에서 군대 말년을 보내다 2006년에 대령으로 전역했다. 요즘 요상한 ‘기무사 계엄령 문건’으로 세상이 시끄럽다. 김 씨가 보는 군 문제의 핵심은 무엇일까.
“군의 정치화가 문제입니다. 그 무엇에건 진력하는 기질로, 군대에서도 저는 죽기 살기로 열심히 뛰었어요. 정치군인 비슷하게 흐르기도 했어요. 하지만 타고난 성품은 어쩔 수 없더라고. 기본적으로 정치 성향과 멀고, 게다가 비판적이기도 해 결국은 발언권 센 놈들에게 튕겨났죠. 그 늑대 소굴에서 벗어나고 싶어 중령 시절부터 전역을 신중하게 숙고했어요.”
“그 옛날, 제가 입대하던 첫날, 단상에 오른 정훈 장교에게 들은 발칙한 연설이 기억에 선명합니다. ‘너희들은 이 시간 이후 인간이 아니다!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라도 잡아먹을 수 있는 돼지일 뿐이다!’ 군이 비민주적이고 시대에 뒤처지는 집단이라는 인상은 지금도 여전해요.”
“한마디로 영혼 없는 집단입니다. 탈인간화, 몰인간화한 조직이죠.”
“군대에 식상했다는 것, 그게 귀농의 직접적인 계기?”
“귀농 동기가 단순하진 않아요. 제가 야생화도감에 나오는 400여 종의 식물을 모조리 외울 정도로 자연을 좋아합니다. 시골살이에 적당한 성향의 소유자죠. 늑대처럼 오염된 인간들을 피해, 자연을 누릴 수 있는 곳에 살며 어려서부터 좋아한 그림이나 그리고 싶었어요. 그러자면 일단 시골에 내려가 사는 게 답이었어요.”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기도
김 씨는 군에 있을 때부터 그림 습작을 땀 흘려 했다. 마치 감옥을 사는 자가 창살 너머로 들어오는 밤하늘의 영롱한 별을 바라보듯 절박한 심정으로. 전역과 동시에 서울 인사동에서 개인전을 열기도 했다.
“이 시골에 들어와 미술관부터 지었어요. 작지만 소중한 꿈의 공간이죠. 그런데 말이죠, 귀농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어요. 시골생활을 작정했으나 갈 곳이 없더라고. 제가 원래 가난한 농가 출신입니다. 부모님께서 고생고생하며 농사에 전념하셨지만 가난을 면치 못했어요. 제가 육사를 간 것도 배가 고파서였어요. 그 궁색했던 고향으로 낙향하고 싶었으나 이미 도시화가 진행돼 가당치 않은 현실이었죠.”
“흔히 터 잡기부터 애환의 드라마가 펼쳐지죠.”
“터를 마련하려면 자금이 필요한데 가계 상황이 엉망이었어요. 전역하고 보니 빚이 산더미 같더라고. 군인 남편의 진급을 위해, 아이들은 물론 시어머니와 시동생까지 돌보느라 그간 아내가 나 몰래 이리저리 자금을 융통해 썼던 겁니다.”
“괴롭고도 헌신적인 내조였군요.”
“돈 문제로 남편이 스트레스를 받아 군 생활에 차질이 오면 어쩌나, 그런 우려를 한 아내 나름의 궁여지책이었지만, 하마터면 이혼할 뻔했죠. 연금 타서 이자 갚고 나면 남는 게 없더라고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내린 결론은 시골에 내려가되 일단 재테크로 조속히 돈부터 벌자는 거였어요. 그런데 말이죠. 그게 용케 성공했어요.”
“어떻게? 무엇으로?”
“우선 은행과 친척을 통해 7000만 원을 빌렸어요. 그러곤 시장경제의 약점인 부동산, 그걸 뚫고 들어가 보자는 작정을 하고 부동산 재테크 관련 책들을 독파했죠. 그런 뒤 여기저기 땅들을 알아보다 이곳 땅 1400평(4400m²)을 사들였는데 이 땅이 원래는 값싼 맹지였어요. 귀농 금기사항 제1칙은, 맹지는 절대 피하라! 그러나 저는 이판사판 한순간에 질렀어요. 이후 온갖 험한 고생을 감수해 기어이 길을 냈죠. 그러자 땅값이 벼락처럼 뛰기 시작합디다.”
인생이란 기묘한 서커스. 요령과 용기에 인자한 천사의 협찬까지 겹치면 후루룩 팔자가 바뀐다. 김 씨가 맹지에 길을 내자 인근에 고속도로 IC가 생기고, 혁신도시니 기업도시니, 요란한 개발바람이 불더란다. 햐, 현재 20배 가까이 지가가 상승한 상황. 그렇다면 맹지 투자란 은근히 매력적인 종목인가? 독자님들께선 유념하시라. 아니란다. 절대 금물이라는 거다. 김 씨 자신의 케이스는 워낙 기묘하고도 특별한 성공적 일탈일 뿐이라는 거다.
빠른 두뇌 회전, 상류로 거침없이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생동하는 촉, 과감한 깡, 집요한 근면성, 아마도 이런 것들이 김 씨의 밑재산일 게다. 그는 군 복무를 하면서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녔다. 연세대학교 경영대학원에서 석사 논문도 썼다. 생판 객지인 시골에 살면서는 숱한 파란을 겪었다. 마을 원주민에게 멱살 잡히는 식의 드잡이도 흔했으나 다 이겨냈다. 덮쳐오는 난관마다 용을 쓴 엎어치기와 돌려차기와 허리치기로 끝내 돌파한 걸로 보인다.
‘낭만을 가져라!’
김 씨는 늘 바쁘다. 일테면, 수시로 귀농·귀촌 교육장에 강사로 불려 다닌다. 강의료 수입만 연 1000만 원에 이르기도 했다지. 귀농 선수 다 됐다. 작물은 내내 블루베리를 기른다. 이미 한물간 걸로 소문난 블루베리를 여전히 끌어안고 있다. 후다닥 작물전환을 왜 안 하지?
“블루베리 시장성은 아직도 무궁무진해요. 전성기는 지났다지만 기술력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평당 6만 원은 나옵니다. 시골 농부들이 평생 농사를 지었지만, 기술력이라는 면에서 보자면 농사를 잘 짓는 게 아닙니다. 판로 개척에도 둔하죠. 귀농인들이 똘똘한 기술력을 보유할 경우 기존 농민들보다 승산이 큽니다. 주변 농가들의 블루베리 85%가 죽었을 때에도 제 농장의 블루베리는 싱싱하게 살았어요.”
“머리와 몸을 악착같이 써도 타산 맞추기 어려운 사업이 농업 아녜요?”
“농사꾼들은 이미 하층으로 몰렸어요. 시장경제의 딜레마죠. 난처한 우리 농촌의 현실을 고려할 경우, 사실 제가 교육장에서 양심적인 소리를 하기가 힘듭니다. 부동산 재테크로 성공한 입장에서 농사나 귀농을 권장한다는 건 사치스러운 얘기일 수 있어요. 축산이나 시설하우스 등 공장형 농업을 하는 사람들은 연간 1억 원 이상을 벌기도 하지만 일부에 불과해요. 근본적으로는 농업혁명이 필요합니다. 현 상황에서 우선은 기술 영농과 작물 브랜딩이 필요해요.”
“열악한 농업 구조에도 불구하고, 농업이란 가장 창의적이고 인간적인 사업일 수 있죠. 때로 저는, 고달플망정 정직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농부를 만나 감동을 받곤 했어요.”
“농사란 자연과 더불어 자급자족하는 일입니다. 떳떳하고 여유로운 마음을 갖고 살 수 있죠. 제가 귀농 이후 사람이 됐어요. 농사짓는 사람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어요. 시간을 기다려야 하고, 용서가 없는 자연에 순응해야 하기에. 겉으로는 겸손하지 않을망정 속으로는 겸손이 차오르는 걸 느낍니다.”
대체로 기억은 망각에 진다. 끝내 묻히지 않는 기억, 그중 아픈 기억은 한(恨)으로 응어리진다. 김 씨의 기억 속 앨범에도 한이라 할 만한 게 꽂혀 있으니, 성장기에 바라봤던 부모님의 가난과 고난의 참경이 바로 그것. 그의 귀농 배경이기도 하다.
“제 부모님은 평생 농부로 살며 평생 가난에 허덕였어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몸을 망쳐가며 일을 하고서도 왜 가난을 벗어나지 못했단 말인가, 내가 출세를 해서 농업 구조를, 제도를, 현실을 바꿔보자, 그런 생각이 많았어요. 그게 귀농 원동력인데요, 이 마을에 와서 보니 역시나 비참했어요. 농업 자체가 구조적으로 피폐한 현실이지만, 일단 우리 마을이라도 좀 방향을 틀어보자, 어떻게 해서든 농가 소득을 올릴 수 있도록 힘을 보태보자, 그런 생각으로 꽃양귀비 축제를 비롯해 많은 마을사업을 주도해왔습니다.”
“어라,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려 한다, 그런 반발이 없진 않았겠죠?”
“그간 멱살도 잡히고, 나이 어린 사람에게 욕도 먹고, 당신 때문에 마을이 시끄러워졌다, 누가 잘살게 해 달라 했냐, 별별 곤욕을 다 치렀지만 포기하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타협까지 해가며 마을을 바꾸기 위해, 주민들이 인정할 때까지, 그야말로 필사의 노력을 했어요. 부글부글 속에서 끓는 게 많았지만, 그 와중에 정이 들었어요.”
뜨겁거나 차갑거나, 그게 아닌 미지근한 건 난 싫어! 아마도 김 씨는 스스로에게 그리 외치며 사는 사람. 군문에서건 귀농한 시골에서건, 삶의 야생과 야전(野戰)의 스릴을 도발하거나 도전하는 인물. 이런 그가 ‘낭만을 가져라!’ 귀띔한다. 귀촌·귀농을 준비하는 시니어에게 말이다.
“돈 벌 계산보다는, 시골생활에 관한 총천연색 꿈을 꾸는 게 중요합니다. 얄팍한 꿈이 아닌, 간절한 꿈에서 강렬한 힘이 나오니까 말이죠. 그리고 시골에 가려면 시골 지향적 가치, 자연 지향적 가치부터 생각하고 배우고 익혀야 합니다. 제 꿈은 자그만 목장 하나라도 만들고,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림을 그리며 살고 싶다는 것이었어요. 아직은 제대로 이루질 못했지만, 여전히 절실한 꿈이라 매너리즘 같은 것에 빠지진 않고 삽니다.”
나이 든 사람의 가슴엔 은연중 ‘자연’이 깃든다. 서러운 날들의 기억이 헹구어지며 시(詩)랄까, 그림이랄까, 발효한 감성의 문양이 서린다. 시골의 자연 속에선 한결 더 눅진하게.
김용길 씨가 주는 귀촌 준비 tip
❶ 노후 시골생활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건 분명하다. 중요한 건 충분한 준비. 돈과 땅과 집 문제에 치중하기 전에 인생을 보는 가치관부터 수정하는 게 필요하다. 시골 지향적, 자연 지향적 가치관을 가슴에 채워야 한다. 사람도 원래 자연의 하나이지 않는가.
❷ 혼자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멘토를 만들자. 시골 목사, 공무원, 귀농인, 현지 농민 중에서 도움 받을 만한 사람을 반드시 찾아내자.
❸ 나 혼자만 잘살려는 생각을 버리고 원주민과 적극 어울려야 한다. 매사 조금만 양보하면 된다.
박원식 소설가
중앙대 문예창작과에서 배운 작가. 오랫동안 자연과 문화에 관한 글을 써왔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대상을 좋아할수록 아득해지는 미스터리가 늘 그를 궁리하게 만든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안목을 얻는 일의 요원함을 실감한다. 그가 즐기는 것은 산촌의 적막, 암자의 풍경소리, 낯선 여행지의 선술집, 우연한 만남 등이다. ‘천년 산행’, ‘암자에서 듣다’, ‘산골로 간 예술가’ 등의 저서가 있다.
6월 13일, 강신영, 김종억 동년기자와 내가 백두산 트레킹 팀(총 33명)에 합류했다.
“백두산은 한민족의 발상지.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온 민족의 영산(靈山)이다.”
어떤 결의에 찬 출발이라기보다 막연히 뿌리를 보고 싶었다. 또 더 나이를 먹으면 백두산에 오르기 힘들 것 같은 불안감도 있었다. 일찌감치 4박 5일의 여행 일정표를 받았지만 비용과 둘러볼 장소만 보고 무심히 있다가 출발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세히 보니 ‘오전 6시, 인천국제공항 제2터미널 3층 집합’이라 씌어 있었다. 난감했다. 다른 사람들은 4시에 출발하는 공항버스를 이용할 수 있지만 경기도에 사는 나는 그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인천공항 근처의 호텔을 알아봤다. 아침에 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까지 포함해 숙박료가 4만5000~5만5000원 정도였다. 인천 운서역 근처에 있는 호텔을 예약한 뒤 4만5000원을 지불했다.
다음 날 새벽 5시 40분까지 인천공항까지 데려다주는 서비스를 받았다. 집에서 왔으면 잠도 설쳤을 텐데 느긋하게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비용으로 쓴 4만5000원은 그 가치가 충분했다.
짐을 꾸리면서 트레킹과 등산, 어디에 맞춰야 할지 좀 헷갈렸다. 그래서 트레킹 준비를 했고, 내 상태를 고려해 스틱까지 준비했다. 우산과 비옷, 따뜻한 옷도 집어넣었다.
허전한 코리아타운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심양국제공항에 도착, 시내로 가는 버스를 탔다. 가이드의 안내에 따라 버스에서 내려 코리아타운 ‘서탑가’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중국어와 한국어로 된 간판이 이어져 있었지만 한국어가 생경하게 느껴졌다. 마사지, 노래방, 술집, 음식점, 찻집, 미용외과, 횟집, 족도관, 한국당구장….
뭔가 허전했다. 거리에서 돈을 쫓아 부지런히 움직이는 모습이 느껴져 머물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조선의 문화가 배어 있는 풍경은 아니었다. 문화를 팔아야 돈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았다.
잘 보존된 고려의 옛 거리, 결기 있는 독립투사 후예들이 자신들의 혼을 녹여 만든 거리를 상상했는지도 모르겠다. 고구려 유적지, 민족 성지 만주벌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곧 이런 생각들을 후회했다. 먹고살기 팍팍하고 안전이 보장되지 못하면 문화도 역사도 예절도 지키기 힘들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많은 고난 속에서도 조선족으로 남아 우리의 말과 풍습을 지켜오지 않았는가.
산 자와 죽은 자의 도시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 통화시에서 집안시로 두 시간에 걸쳐 이동했다. 광개토대왕비와 능, 장수왕릉으로 추정되는 장군총을 관광하기 위해서였다. 차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우리의 논, 밭, 산과 너무도 흡사했다. 고구려의 두 번째 도읍지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이다. 고구려 2대 왕 유리왕이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천도한 이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하기 전까지 400여 년 이상 고구려의 수도였던 곳이다.
지금도 땅을 파면 유적과 유물이 나오는, 산 자와 죽은 자가 공존하는 도시다. 1570년간 땅속에 묻혔던 광개토대왕비는 한 농부에 의해 발견되었다. 장수왕은 높이 6.9m, 무게 37t의 비석에 아버지 광개토대왕의 업적을 기록해놓았다. 그러나 탁본을 뜨는 과정에서 훼손되었고 일제가 기록 일부를 변조하는 일까지 벌였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수모의 공간, 빼앗긴 국토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광개토대왕비는 중국 공안 복장의 경비원이 지키고 있었는데 사진촬영을 금했다. 인형처럼 유리로 둘러싸인 공간에 박제가 된 채 서 있는 비석. 우리 조상의 업적을 다른 나라 사람이 지키면서 우리에게 입장료를 받는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뒤를 돌아 광개토대왕릉으로 향했다. 마치 조그만 동산처럼 느껴지는 흙더미. 그 위에 초라한 나무 한 그루가 능임을 알게 해줬다. 내부 석실에는 한국 관광객이 던져놓은 듯한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이 놓여 있었다. 먹먹한 마음을 그렇게라도 달래고 싶었던 모양이다. 좀 더 걸어가니 413~490년에 축조된 장군총이 나왔다. 거대한 화강암을 쌓아올리고 그 옆에 밀리지 않도록 지지석을 세운 피라미드식 축석묘다. 높이 12.4m, 길이 31.6m의 7단 계단식 동방의 피라미드는 아직도 탄탄해 보였다.
침묵, 그리고 안타까움
장수왕 무덤가에 머물며 안타까운 질문을 하고 싶었다. ‘거대한 만주 벌판을 버리고 평양으로 천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안 그랬다면 아직도 만주는 우리 영토일 텐데요.’ 모두의 가슴으로 젖어드는 안타까움. 그것이 비가 되었는지 그칠 줄 모르고 따라다녔다. 아니면 아비를 박제화한 것을 통곡하는 장수왕의 눈물일지도 모르겠다.
웅장하고 거대한 무엇을 본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 뿌리에 존재하는 의식을 일깨워준 여행이었다. 순간순간 가슴이 저려왔다. 잘 키운 딸을 강탈당한 부모의 심정이 이럴까. 가이드는 천지에 올라 태극기를 꽂았다가 벌금 물고 감옥까지 갈 뻔했던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해줬다.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괜히 웃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귀촌이라 하면 도시의 삶을 정리하고 시골로 내려가 안빈낙도의 생활을 즐기는 과정을 떠올린다. 제2인생을 위한 새 출발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고령화 사회의 선배라 할 수 있는 이웃 나라 일본은 어떨까? 일본에서는 최근 다거점생활(多拠点生活) 혹은 다거점라이프(多拠点ライフ)가 새로운 귀촌 형태로 주목받고 있다. 단어의 의미 그대로 생활의 거점을 여러 곳 만든다는 의미다. 또 다른 생활의 터전을 만든다는 면에서, 그저 자연을 벗 삼아 쉬는 것이 주목적인 별장의 개념과는 다르다. 이 이면에는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의 속사정과 특유의 합리성이 돋보인다.
일본에서 시도되고 있는 다거점생활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갖고 있는 귀촌이란 개념에 디지털 유목민, 즉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다는 사고가 많은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장소에 구애받지 않아도 되니 굳이 생활의 터전으로 도쿄와 같은 거대 도시를 고집할 필요가 있냐는 이야기다. 그래서 나온 것이 다거점생활이다. 간단히 설명하면 살고 있던 거주지 외 농촌 등지에 또 다른 집(거점)을 마련하는 것이다. 단순히 집을 마련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새 거점에서 생산활동이나 인간적 교류를 통해 또 다른 생활의 기반을 만드는 것을 추구한다. 그리고 여기에 또 한 가지 개념이 더해지는 계기가 발생했다. 바로 2011년 3월, 일본을 뒤흔들어놓은 동일본 대지진이다.
지진 공포가 가져온 대피처의 필요성
평생을 한곳에서 살아온 지역 주민들은 대지진 후 삶의 터전을 잃고 가설 마을에서 어렵게 생활하거나 타 지방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정착의 어려움을 겪는 모습은 일본인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했다. 그것은 언제든 자신도 재난의 당사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 신속하게 몸을 옮길 수 있는 피난처의 필요성 등에 대한 고민이었다.
‘다거점생활 추천’의 저자이자 일본에서 다거점생활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언론인 사사키 토시나오(佐々木俊尚)는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거점생활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했다.
“동일본 대지진 후 생활의 또 다른 거점에 대한 필요성을 느꼈고, 운전해서 갈 수 있을 정도의 거리에 있는 카루이자와(軽井沢)를 선택하게 됐다”며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방사능을 피해 서쪽으로 가는 사람이 늘었다. 도시민이 지방으로 이주하는 ‘I턴’의 기반이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재 사사키 토시나오는 후쿠이(福井) 지방에도 거점을 마련해 세 곳의 집을 오가는 생활을 하고 있다.
동시에 두 가지 삶, 인생에 활력 줘
‘언아더(another) 거점을 만드는 방법’을 출간한 Think Future의 편집장 사토 하야오(佐藤 駿)는 SNS를 통해 “기존 일본의 이주(귀촌)는 도쿄 생활에 지쳐 지방으로 돌아가는 현역 이후의 것이라는 인식이 강했다”고 말하고, “재해 대국이라는 현실적 문제로 인해 또 다른 생활거점에 대한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고, 이를 실행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동시에 여러 곳에 거점을 마련하는 삶은 어떨까. 사사키 토시나오는 다거점생활이 다양한 장점이 있다고 설명한다. 먼저 도시와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유지할 수 있다고 말한다. 도시생활을 겸하는 삶이기 때문에 일이나 사업적 관계를 포기하지 않아도 되는 장점을 꼽는다. 농촌에서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때문에 평소 만나기 쉽지 않았던 농부나 어부 같은 사람들과도 인맥을 형성할 수 있다. 짜여진 생활에 익숙해지는 것도 장점이다. 거점마다의 삶에 충실하기 위해 게획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동시간은 심기일전의 계기가 된다. 그는 어딘가 떠나고 싶을 때 많은 짐이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일본은 교통비가 비싸 경제적 부담이 따르고, 두 집, 세 집 살림을 하는 셈이니 세간을 마련하는 데 초기 비용이 든다. 또 일정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기도 한다.
또 다른 다거점생활자들은 완전히 다른 두 개의 삶을 동시에 살 수 있음을 장점으로 꼽는다. 주말마다 농촌 사람으로 변신해 지역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고, 자신의 재능이나 기술로 마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다거점생활의 보람 중 하나다. 또 자신이 운영하던 사업체의 또 다른 지점을 개설하듯, 일의 영역을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검토해볼 수 있다. 기존의 삶과 터전을 유지하면서 또 다른 거점을 개척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들이다.
지자체에선 외지인 유치 방안으로 활용
지난 7월 21일과 22일, 일본 야마나시(山梨) 현 고슈(甲州) 시에서 흥미로운 행사가 열렸다. 다거점라이프 필드워크 프로그램이라는 다소 생소한 이름의 행사다. 이 행사는 지역 단체가 다거점생활에 관심 있는 도시민을 초대해 시골생활의 매력과 생활 수단으로 지역에서 생산 가능한 수공예품의 제작 방법 등을 알려주기 위해 진행됐다.
이런 행사는 고슈 시뿐만 아니라 일본 내 여러 지자체에서도 유사한 형태로 개최되고 있는데, 다거점생활을 활용해 도시민의 유입을 유치하기 위한 지방 정부의 속내가 엿보인다. 유명 관광지가 아닌 지자체들이 도시민의 유입을 유도하기 위해 정기적인 방문을 꾀하는 것이다.
도시민의 이주를 유치하는 데만 매달리고 있는 국내의 귀촌 정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도시민 유치를 거주인구 증가에 초점을 맞출 것인지, 생활인구 증가에 집중할지 양국 간의 관점의 차이가 드러난다. 무조건 이주만을 강요하는 국내의 도시민 농촌유치 사업에 시사하는 바가 큰 대목이다.
현재 한국 농업·농촌에 대해, 이동필(李桐弼·63)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간단하게 ‘전환기’라고 명명했다. 자신의 고향이자 농업 현장인 경상북도 의성군에서 농부로 일하면서 느낀 솔직한 속내였다. 그러나 그는 전환기 속에서 맡은 바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책임을 지고자 한다. 장관 자리에서 물러난 후 스스로 돌아보는 ‘마음공부’ 뜨락에 씨앗을 뿌리고 일구는 데 모든 것을 바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농촌경제연구원에서 장관을 거쳐 귀향한 후 농부의 삶을 살아가는 그에게서 한국 농업과 농촌이 직면하게 된 현재와 미래의 활로에 대해 물어봤다.
경상북도 의성군은 우리에게 무엇보다도 마늘로 친숙한 도시다. 그리고 지난 2018 평창동계올림픽에서 특별하게 유명해진 지역이기도 하다. 전 국민의 관심을 모았던 컬링 종목의 스타들이 모두 의성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의성은 컬링 종목의 스타들을 꾸준히 배출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컬링의 수도라고 봐도 좋을 정도로 아낌없는 지원도 이루어지고 있다.
30년 뒤면 사라질 수도 있는 도시
그러나 이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진 의성의 대외 이미지와는 달리, 이동필 전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은 걱정이 많았다. 그는 인터뷰를 하던 중 서산대사의 시를 읊었다. ‘환향’이라는 제목의 시다.
삼십 년 만에 고향에 돌아오니
사람은 죽고 집은 부서지고
마을은 황폐화됐는데
청산은 말이 없고 봄 하늘은 지는데
어디서 두견새 우는 소리만
들리는구나
그야말로 막막하다.
“이게 내 심정이에요.”
그의 먹먹한 기분은 지극히 현실적인 문제들 때문이었다. 그가 장관 퇴임 후 한 명의 농부가 되어 귀향한 의성군은 2016년 ‘중앙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30년 뒤 사라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그 자신도 그러한 현실을 체감하고 있었다.
“고령화, 양극화, 그리고 예전 같은 공동체가 스러지고 있다는 점이 문제죠. 연구소나 중앙부처에 있을 때는 망원경으로 세상을 봤지만 현장에서는 현미경 보듯 보이지요.”
장관, 농부가 되다
이 전 장관은 뼛속까지 농업인이다. 그의 경력을 보면 바로 드러나는 사실이다. 농촌지도자였던 아버지를 둔 그는 영남대학교 축산경영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와 미국 미주리주립대학교에서 농업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한국농촌경제연구원에서 30여 년 넘게 근무하면서 농촌의 현실과 문제를 연구하고 대안을 내놓는 일을 했으며 2013년에는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입각해 역대 최장수인 3년 6개월의 시간을 지냈다. 그리고 2016년 9월 5일 퇴임한 다음 날 고향으로 돌아와 2500평(8264㎡)의 땅을 관리하는 농부가 되었다.
“요즘은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동물들 밥 먹이는 일로 하루를 시작해요. 온몸이 타박상과 상처투성이예요.(웃음) 며칠 전에는 경운기 사고가 나서 갈비뼈가 부러졌어요. 도처에 해야 할 일이죠. 옛날 방식으로 농사를 하면 힘만 들고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실감했어요.”
귀향할 때 나름 세운 ‘일이삼사 원칙’이 있었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 하루 두어 차례 텃밭을 돌보고, 삼시 세끼 어머니와 밥을 먹고, 사람들이 찾아오면 말동무가 된다’는 것이었다. 3년간 보리·콩·팥·참깨·마늘·양파·옥수수 등 온갖 농사를 다 지어봤다.
그 과정에서 사모님은 반대 안 했느냐고 묻자 퇴직한 그날 밤에 어찌 내려가느냐며 딱 하루 반대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후로는 함께 고생하면서 도와주고 있다 한다.
“가끔 외롭고 답답할 때가 있는데 아내가 그걸 풀어줘요. 신세를 많이 지고 있죠.”
남는 농산물을 판매하는 수고로움은 모두 아내 이정숙 여사가 맡아서 하고 있다. 노모를 돌보고 남편 수발하고 농사일까지 거들며 집안 곳곳을 돌보는 1인 다역을 하고 있는 만큼 이 전 장관은 이런 아내를 인생 최고의 반려자라고 손꼽았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먼저 오래된 집을 손보면서 마당에 5평(16.5㎡)짜리 사랑채를 지어 사원재(思源齋)라 이름 붙였다. 농사일하며 이곳에서 책을 읽고 손님을 맞는다. 사원재라는 말은 조상과 부모, 그간 살아오며 도움을 줬던 수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리를 잊지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는 또 40년이 다 된 부친의 생가 마당 한가운데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애일당(愛日堂)이라 이름 지었다. 노모가 황반변성 때문에 눈이 불편하신데 남은 날 하루하루 즐겁게 사셨으면 좋겠다는 뜻을 새겨 넣었다. 이 또한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아니겠는지.
‘故鄕創生’에 몰두하다
하지만 눈앞의 일을 두고 보고만 있을 수는 없어 종일 흙에 파묻혀 있다 들어오면 너무나 피곤해 바로 쓰러져 자는 현실. 그는 자신의 현재를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 중 농가에 비유했다.
“이 사람들은 농사를 짓는 게 세상 근본 이치란 주장을 했어요. 그런 주장을 갖고 등나라를 갔죠. 그 나라 임금이 너희들의 주장은 뭐냐 물어보니 첫째는 근면 검소해야 한다, 둘째로는 왕과 왕비도 직접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대답했어요. 왕이 그 말을 듣고는 첫 번째는 공감할 수 있는데 두 번째는 못하겠다며 거절했죠.(웃음) 이 사람들은 농업인들과 함께 일만 열심히 하다 보니 자기 사상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못했어요. 당시 유가들은, 실천보다 말로 사는 사람들이니까 자신들의 주장을 다 책으로 만들었죠. 나도 이렇게 농사일만 하다가는 정작 농촌의 살길에 대해 글을 써보겠다는 생각은 시작도 하지 못하고 마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웃음) 이제 좀 바꿔야겠어요.”
그렇다고 그가 다시 정치의 세계로 돌아올 것이라는 얘기인가 하면, 전혀 아니다. 이번 지방선거 때도 얘기들이 있었지만 그는 손사래를 쳤다.
“밖에 나가면 말이 많아 거의 두문불출하고 있어요. 무슨 운동을 하거나 당을 같이 해보자며 찾아오는 이도 있지만, 차나 한잔 먹고 가라며 돌려보내요. 한 눈 팔지 않고 텃밭 일구며 스스로를 돌아보고 평생의 과업인 희망찬 농업, 활기찬 농촌을 만드는 생각을 하기에도 바쁩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집에는 신문도 TV도 없었고 라디오 하나만 틀어놓고 있었다. 외부 활동이라면 가끔씩 강의를 나가는 정도다. 요즘 그의 주된 관심사는 ‘지방소멸과 고향창생’, ‘청년창업과 귀농귀촌’ 그리고 ‘농협의 역할’ 등이다. ‘늙고 지친 고향을 어떻게 활성화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화두와 관련한 고민거리인 것이다.
극장 하나 없는 곳, 젊은이들에게 와서 살라 말할 수 있나
“지역발전이라 하면 흔히 돈 버는 얘기만 하는데, 그에 못지 않게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너그러운 마음과 역량을 갖춘 인재양성, 그리고 생활환경 및 복지 서비스의 질적 개선도 중요하다고 봐요. 의성만 해도 극장 하나 없어요. 그런데 말로만 여기 와서 살라고 권유할 순 없죠.”
사실 농업·농촌 발전을 위해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많은 예산과 인력을 동원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 전 장관은 지역활성화를 위해 일하는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중앙정부는 지방 분권과 지원체제 정비를 하고 지방에 도전할 기회를 준 후에 결과에 책임지도록 해야 해요. 지역의 특성과 농가를 유형별로 구분하여 맞춤형 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자원의 효율성을 높이는 길이거든요. 또한 조건불리지역 직불제도를 개선하여 개발 여건이 불리한 지역에 대해 지원을 차등화할 필요가 있어요.”
그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의 조속한 시행과 함께 고향기부금제를 도입할 것을 적극 주문했다.
“무역이득공유제의 대안으로 매년 1000억 원씩 10년간 모으는 농어촌상생협력기금을 조성하기로 했는데 제대로 시행되지 않고 있어요. 당시 한중 FTA 협약 비준을 전제로 여야가 합의한 약속입니다.”
아울러 지방의 역할을 강화하고 주민과 민간 부문의 참여를 촉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농촌에 젊은 사람들을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스마트팜이나 공동경영체 등을 통해 고부가가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하고 가공, 유통, 체험관광 등과 결합한 6차산업으로 매력적인 일자리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농교류를 하고 귀농·귀촌을 통해 외부 사람들을 불러들이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책임있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지역 스스로 자기들의 문제와 가능성, 부존자원을 기초로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 완성해야
이는 그가 장관 시절에 핵심적으로 추진한 과제 중에서 못 다 이룬 숙원과도 관계가 깊다.
“농정의 새 틀을 짜고 싶었어요. 농업·농촌을 둘러 싼 대내외 여건이 다 바뀌어버린 지금은 그 변화에 걸맞게 정책 프레임도 달라져야 한다고 봤죠. 그중 하나가 농업경영체를 등록하고 이에 기초하여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추진하는 일이었어요.”
그는 경영주가 65세 미만이면서 소득이 연 5000만 원 이상인 농가는 규모 있는 농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장기저리 융자와 컨설팅, 경영안정대책 등 맞춤형 정책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후계자가 없는 영세고령농가는 농업 경영에서 은퇴를 유도하여 사회안전망으로 커버하고, 나머지 중간 규모 농가는 가공, 유통, 관광 등을 결합한 6차산업화를 통해 추가적인 소득원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농가를 한데 묶어놓고 획일적인 정책을 추진하니 돈은 돈대로 쓰고 손에 잡히는 효과를 못 볼 수밖에요. 이웃인 성주는 참외 하나만 갖고도 잘살아요. 참외 주산지로서 품목이 특화되어 전후방 관련 산업이 발달하고 6차산업으로 수급까지 안정되니 가능한 거죠. 이처럼 지역 및 농가 유형별 육성정책을 완성해야 했는데, 끝장을 못 보고 나온 게 아쉬워요.”
지역의 농업·농촌 관련 사업이 중앙정부에 지나치게 의존하다 보니 천편일률적으로 획일화해 특성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도 같은 문제다. 농촌 중심 활성화 사업을 보면 지역 여건이나 부존자원에 대한 고려없이 주민 의사나 참여도 이뤄지지 않는 상태에서 건물이나 지어놓고 활용을 못해 심지어 전기세도 안 나온다는 얘기를 듣는다는 것이다.
“지역이라는 공간 정책 위에 산업 정책을, 그 위에 사람을 대상으로 한 복지정책이 이루어져야 시너지 효과를 얻을 수 있는데 제각기 따로 놀고 있어요. 그러다 보니 사후관리는 안 되고 지자체는 책임 안 지려 하고…. 지역이 정책을 좀 더 주도하고 책임지도록 추진체계를 보강해야 해요.”
어쩌면 농협이 대안이 될 수도
그는 1·2·3차산업을 융복합해 농가에 높은 부가가치를 제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6차산업을 주창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이 분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시아 몬순기후대의 영세소농이란 구조적 특징 때문이다. 여름에 고온다습한 기후 때문에 논농사에 특화하다 보니 계절별 유휴인력이 발생하게 되고, 유휴노동력을 생산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농외소득원을 개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된 것이다. 농업생산이란 1차산업과 가공이란 2차산업, 그리고 유통 및 관광서비스 등의 3차산업을 결합한 6차산업에서 그 해답을 찾았다.
그렇지만 현실은 생각처럼 간단치 않았다. 그는 지난해 수확한 팥 서 말과 양파 100kg을 팔 곳이 없었던 것이다. “콩 750kg은 다행히 인근 농협에 판매하였으나 시중보다 낮은 가격으로 넘겼어요. 오죽하면 농민들이 농협에 바라는 소망이 수확한 농산물을 제값 받고 팔아달라는 것이겠어요. 농사짓는 것도 힘들지만 판매하는 것은 더 어렵습디다.”
정부는 농협 개혁을 통해 경제사업을 활성화하려고 애쓰고 있으나 아직도 체감하는 성과는 얻지 못하고, 대부분의 사업장들도 적자 신세를 면치 못하는 실정이다. 더구나 농업인의 고령화로 준조합원 수가 늘어나면서 신용사업에 매진하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은 농협 회원 중 농사를 짓지 않는 준조합원이 정조합원보다 30% 정도 많고, 농협 계통 매장의 농산물 책임판매율이 50%밖에 안 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농협이 역할을 못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2014년부터 개혁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우리나라 농협은 정조합원이 준조합원보다 훨씬 더 많은데도 농산물 책임판매율은 25%에 불과해 농민들로부터 돈장사만 한다고 비판받는 거예요.”
그는 오랜 연구생활과 장관으로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감 없이 농협 유통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아울러 고령화로 인한 지방소멸 시대에 있어서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농협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했다.
“농협이 지역 단위의 6차산업을 주도해야 한다고 봐요. 경제사업의 수지개선을 위해서는 경영 능력을 향상하고 규모화, 전문화해야 합니다. 인근 지역과 품목을 생산하는 농협과의 통합 또는 사업을 연계하거나 연합사업단을 운영할 수도 있겠지요.”
어째서 농협일까? 그는 지금처럼 개별 농가가 따로따로 로컬푸드니 직거래니 하는 식으로 장사를 하면 비용절감을 고사하고 소비자 신뢰를 얻기 어렵다고 보고 있다. 표준화, 규격화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개별 농가가 하기 힘든 그 작업을 농협이 해줬으면 하는 의견이다.
“고령화 사회에서 농협은 농기계를 구비하고 영세농들의 영농을 대행할 수도 있습니다. 농촌지역의 교육, 의료, 복지 등 서비스 전달 체계로서 농협의 새로운 역할도 생각해볼 수 있겠죠. 그것이 농협이 살길이에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결국 농협이 대체 뭐하는 곳이냐는 정체성 논란이 심화될 겁니다. 농협이 당면한 현안을 극복하고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주민들의 걱정을 덜어줄 수 있도록 스스로 혁신하고 노력해야 해요.”
귀농·귀촌, 국가 정책으로 시행해야
이 전 장관은 요즘 세상이 시끄럽다는데 다 잊고 산다고 했다. 해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기도 하지만 깨끗한 자연환경 속에서 씨 뿌리고 가꾸는 즐거움이 여간 아니라고 한다. 농업과 농촌에서 미래의 꿈을 키우는 젊은이들은 물론 은퇴 후 여생을 편안하게 보내려는 사람들에게도 보람을 느끼는 새로운 삶이 가능함을 농촌이 가르쳐준다고 말했다. 지역의 균형발전은 물론 개개인의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그는 귀농·귀촌 정책은 어느 한 부처가 아니라 여러 부처가 협력해 국가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농촌은 흡사 요양병원과 비슷해요. 우리 집 왼쪽으로 있는 집 세 채는 빈집이고, 오른쪽의 두 채는 독거노인이 살고 있어요. 소멸위험 지역에서 벗어나는 길은 외지 인구를 유입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러려면 이사비 몇 푼 보태주는 게 자랑이 아니라 이주자들이 필요한 것을 도와줘야죠. 여기서 태어나 20여 년 살았고,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저도 적응이 쉽지 않은데 낯설고 물선 객지로 이사와서 얼마나 답답한 게 많겠어요? 지역을 찾아 온 외지인을 축복으로 여기고 따스하게 배려하는 너그러운 이웃이 있어야 이곳에 눌러 살고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답니다.”
그는 귀농·귀촌 통계확립과 관련 정책의 정비, 농촌지역에 대해 1가구 2주택에 추가적인 감세를 포함한 제도정비등과 함께 주민들의 귀농·귀촌자들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제는 청복(淸福)을 위해 노력할 때
오로지 고향의 발전과 활기찬 농촌을 위한 생각에 둘러싸인 그에게서 못다한 책임감과 꺼지지 않은 열정이 보였다. 해야 할 일과 책임이 없다면 그렇게 힘들게 생활할 리가 없다. 그에게 견딤의 비법을 물었더니 정약용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다산 정약용은 복을 열복(熱福)과 청복(淸福)으로 나눴어요. 열복은 출세해 권세를 누리는 것이고, 청복은 청빈한 삶을 통해 욕심과 번뇌를 지움으로써 얻는 복이죠. 다산은 열복보다는 청복을 얻기가 훨씬 힘들다고 말했습니다. 제 인생을 돌아보면, 이미 열복은 과분하게 누린 셈이죠. 이제 마음을 내려놓고 이웃과 더불어 즐겁게 사는 복이 남았습니다.”
청복을 누려보겠다고 다짐했다는 말에서 그가 유독 마음가짐을 강조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더구나 그에게는 아직 풀어야 할 평생의 숙제, 희망찬 농업과 활기찬 농촌을 통해 국민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어보자는 도전이 있다. 도전은 사람에게 살아가야 할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래서 마음의 가치를 알게 된 그는 사람들에게 마음이 만들어내는 위대한 변화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향창생은 우리들 마음의 재생으로부터 시작됩니다. 내가 살아갈 지역의 미래를 위해, 무언가 하고 싶다는 주민들의 염원이 행동으로 나타날 때 활력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주말에 집에서 영화 한 편을 보았다. 꼼꼼히 보려고 되감기를 하면서 본 영화는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이다. 극장에서 할 때 시간이 잘 안 맞아 못 봤는데 생각보다 빨리 프리미어에 올라왔다. 이 영화는 제이알(Jean René, 1983~)과 아녜스 바르다(Agnès Varda, 1928~)가 공동으로 감독, 각본, 제작, 주연을 한 다큐멘터리 장르다. 2017년 프랑스 개봉에 이어 한국에서는 2018년 6월에 관객과 만났다. 올해 20년을 맞은 서울 국제영화제 개막작으로도 선정된 작품이다.
영화 속 외벽에 사진 작업하는 장면만 없으면 그저 할머니와 손주가 노닥노닥 여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손주 벌 되는 이 젊은이는 외벽에 흑백사진을 붙이는 것으로 잘 알려진 사진작가 ‘제이알’이고, 작고 귀여운 할머니는 영화감독이자 각본가이며 배우이자 사진작가 설치예술가인 ‘아녜스 바르다’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시작된 누벨바그 운동가이기도 한 아녜스는 현재까지 60년 넘게 작품 활동을 지속해왔다. 두 사람의 나이 차이는 무려 55세. 훤칠한 키의 제이알은 33세로 영화에서 늘 검은 선글라스에 중절모를 쓴다. 88세의 바르다는 흰머리 둘레만 갈색으로 염색했다.
영화는 시작부터 내내 잔잔하다. 예쁜 만화영화 같은 느낌도 있다. 크게 웃을 일도 없고 엉엉 소리 내어 울 일도 없다. 그저 사람들의 삶이 존재할 뿐이다. 두 사람은 외형이 카메라처럼 생긴 포토트럭을 타고 마을을 지나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바로 멈추고 사진을 찍는다. 찍은 사진을 크게 출력해 다양한 곳에 붙인다. 농부의 전신사진을 찍어 저장창고에 붙이고 공장이나 부두의 인부들을 찍어 건물이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에 붙인다. 노동자의 아내들을 찾아가 그들의 사진을 찍고 출력하여 운반용 컨테이너에 붙이기도 한다.
흑백사진은 왠지 정직해 보인다. 보는 이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다. 사진 찍는 날이 마지막 근무였다는 야윈 인부가 마치 절벽 앞에 서 있는 것 같다고 말할 때는 그의 고단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마음이 아팠다. 철거를 기다리는 폐광촌의 마지막 주민이던 할머니는 자신의 얼굴이 집 담벼락에 커다랗게 붙어있는 사진을 보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마워했다. 현관을 장식한 할머니의 커다란 얼굴이 마치 집을 지키는 수호신 같이 느껴졌다.
노안이 있는 바르다는 제이알의 눈을 보고 싶다고 하지만, 제이알은 절대 선글라스를 벗지 않는다. 제이알은 노안으로 사물이 흐릿하게 보이는 바르다를 위해 그녀의 눈동자와 발가락을 찍어 프랑스 전역을 다니는 화물기차에 붙여준다. 화물기차에 붙은 커다란 발가락 사진은 재미있었지만 선명한 눈동자가 붙은 화물기차는 조금 무섭게 느껴졌다. 그렇게 바르다는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게 될 것이다.
두 사람의 작품이 완성된 곳은 올록볼록한 벽돌담이거나 기다란 창고이거나 화물을 옮기는 컨테이너였다. 적당히 주름 잡힌 얼굴이 있는 커다란 흑백사진을 붙이는 순간 평범했던 공간은 특별한 공간으로 바뀌었다. 흑백사진에는 진솔함이 있다. 왠지 많은 이야기가 있을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였나? 영화를 보는 내내 색이 빠진 검은 눈동자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전쟁은 궁극적으로 목숨을 빼앗는 게임이다. 이런 섬뜩한 전쟁이 농촌에서 매일 일어나고 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기한 없는 농부와 야생동물과의 서로 살기 위한 생존의 경쟁이다. 예전의 평화스러운 농촌의 모습은 점점 사라져가고 들판 곳곳에서 야생동물을 쫓아내는 공포탄 소리가 진동한다. 예전의 농촌에는 새들을 쫓으려고 허수아비나 반짝이는 은박지 정도만 나풀거렸는데 이제는 고라니 때의 출입을 막으려고 그물로 벽을 쌓고, 전기울타리까지 사용한다.
왜 이렇게 과거와 달리 야생동물의 출연이 잦고 많아진 것일까?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먼저 사람이 먹이사슬이라는 것과 약육강식이라는 자연 생존의 법칙을 헝클어 버렸다. 산돼지 300마리면 호랑이 한 마리가 있어야 하는데 인간이 호랑이를 제거했다. 독수리 매 부엉이 같은 야생조류의 천적이 사람의 손에 의거 멸종에 가깝도록 사라져가고 있다. 둘째로 동물보호라는 이름으로 산짐승 사냥이 엄격하게 통제를 받는다. 예전에 엽총을 갖고 사냥하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고 사냥이 스포츠로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총이 가까이 있으니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했다. 총기 소지가 허가제로 되고 총은 경찰서에 보관해야 하는 등 관리가 엄격해졌다. 자연스럽게 사냥이라는 취미를 갖고 있던 사람이 줄어들었다. 셋째로는 동물보호에 대한 인식 변화다. 야생동물을 함부로 잡지 못하도록 감시의 눈초리가 많아졌다. 넷째로 산림녹화덕분으로 울창한 숲을 가지면서 야생동물이 숨기 좋고 살아가기 좋아지니 개체수가 늘어났다. 다섯째로 야생동물의 먹이인 도토리 같은 열매를 사람들이 빼앗아버리니 야생동물 입장에서는 먹이를 찾아 민가로 내려올 수밖에 없다.
도시사람들은 야생동물과 더불어 살기위해 수확량이 좀 줄면 어떠냐고 뭘 모르는 소리를 한다. 야생동물의 피해가 수확량이 줄어드는 정도를 넘어 아예 황폐화하는데 더 큰 문제가 있다. 농사란 제철이 있는데 올라오는 새싹을 새들이 쪼아 먹으면 다시 씨앗을 심어도 제철을 놓쳐버려 농작물이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 논에도 활착되지 않은 어린 모에 황새 같은 큰 새가 모를 밟아버리면 모가 들떠서 죽어버린다. 참외나 수박은 순이 뻗어가며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고라니나 멧돼지들이 밭을 짓밟아버리면 어린 순들이 다 망가져 버리고 더 열매를 맺지 못한다. 고구마 감자처럼 땅속 식물도 멧돼지들이 땅을 들쑤셔버리면 농작물이 말라 죽는다. 농사를 짓는 농부는 농사가 생존수단이다. 고생하며 짓는 농작물의 보호를 위해서 야생동물을 자신의 논과 밭에서 쫓아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전쟁은 싸우는 병사들에게 맡겨 놓고 국민들이 어느 쪽이 이기느냐고 평화롭게 관전할 수는 없다. 후방의 사람들도 군수물자를 지원해야 하고 부상병을 후방으로 이송하여 치료하는 등 온 나라가 전쟁에 매달려야 한다. 외교적으로도 하루바삐 전쟁이 종식되도록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등 부산하게 움직인다. 전쟁 기간은 짧아야 피해를 줄일 수가 있다.
농촌에서 시도 때도 없이 일어나고 있는 농부와 야생동물의 생존전쟁이 그들만의 문제로 강 건너 불구경하듯 할 때가 아니다. 개체 수가 늘어난 야생동물이 먹이를 찾아 서울의 도심까지 출연했다는 방송에도 흥미롭게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야생동물과 사람이 공존하며 평화롭게 각자 자기 나라에서 잘 살 수 있는 길을 찾는데 정부나 전문가들이 지혜를 모아야 할 때다.